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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플러스의 시간
- 어느 때부터인가 시니어를 지칭하는 단어가 ‘50플러스’가 되었다. 외국에서 건너온 단어이기도 하지만, 50세에 직장을 퇴직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실감이 난다. 50대에 활발히 인생 이모작 활동을 시작하고 60대 중반에 피크를 이루는 것이 대세인 것 같다. 이란 책은 50+인생학교 학장 정광필씨가 최재천 교수, 박원순 서울시장 등 11명의 이야기를 모아 낸 책이다. 전체적으로 경어체로 통일 시킨 것이 좀 거슬렸다. 경어체는 겸손의 자세는 있어 보이지만 가르치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인생 이모작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가지 책이 나온 바 있다. 그 나이가 어떤 의미이며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었다. 추상적인 설계부터 각자의 전공에 따라 여러 가지 주장을 해왔다. 이런 책들 덕분인지 시니어에 대한 인식은 어느 정도 되어 있는 것 같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에 대해 각자 택할 방식은 각자의 몫이다. 여러 사람의 글 중에 ‘개저씨는 왜 혼자가 되었나?’를 쓴 이승욱 씨의 글이 마음을 당겨 이 책을 사게 되었다. ‘개저씨’는 아저씨를 낮춰 부르는 경멸의 단어이다. 시니어들이 범람하는 사회에서 필자 나이 또래들도 눈에 거슬리게 느끼는 일들을 지적했다. 매너는 당연하지만, 특히 말을 적게 하고 경청하라는 것이다. 시니어가 되면 말이 더 많아 지는 사람도 있고 말수가 적어지는 사람도 있다. 특히 말이 많은 사람은 상대를 피곤하게 하고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실수가 불가피하다. 자녀들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아빠와 상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60%라고 한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물어 보면 1% 이하가 그런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시니어들은 자신이 신식 아빠라는 환상에 젖어 있지만, 그래봤자 구세대라는 것이다. 그러니 소통이 될 리가 없다. 행복한 성문화대표 배정원씨의 글은 늘 재미있다. 아직도 남자들도 입에 담기 꺼려하는 성생활 이야기를 여자가 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미인이면서 늘 웃는 인상에 긴 머리를 하고 있어 젊어 보인다. 여자의 입장에서 성에 대한 얘기를 풀어 놓아 남자들에게 여성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사랑과 섹스, 로맨스에는 은퇴가 없다’며 지속적인 성생활을 주장하고 있다. 섹스를 하면 좋은 점은 면역력 강화를 비롯해서 상당히 많은데 시니어들은 오히려 성생활 중단 및 기피로 갈등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섹스를 하고 나면 상대방의 성 에너지가 내 몸 속에 7년이나 머문다는 주장도 눈길을 끈다. 성생활은 시니어들의 고민 중 큰 요소이긴 하다. 몸이 예전 같지 않은데다 배우자마저 등을 돌리고 있어 고민을 풀 수 있는 환경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도 큰 문제이다. 최광철- 안춘희 부부는 90일 동안 유럽 5개국 3,500km을 자전거로 횡단했다. 원주시 부시장까지 역임한 사람이다. 스마트폰과 구글지도 덕분에 초행길을 무사히 완주한 것이다. 시니어들의 버킷리스트에 여행은 빠짐없이 들어간다. 그래봤자 여행단 따라 3박 4일 정도 쉬고 오는 정도의 여행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꺼번에 화끈하게
- 2017-03-02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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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 왜성 천수대에 서서
-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mcj4627@naver.com 순천 왜성은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을 실감케 하는 곳이다. 바다가 변해 공단이 됐으니, 상전이 바다가 된 것보다 어찌 작은 변화라 하리오! 지금 우리 땅 어디인들 그렇지 않은 곳이 있으랴만, 420년 세월의 두께가 이렇게 두터울 줄 몰랐다. 성안으로 바닷물을 끌어들이고 다리를 놓았다 해서 왜교성(倭橋城)이라 불렸다는 옛 이름과는 너무도 딴판이었다. 택시를 타고 성터 앞에서 내리자 제일 먼저 거대한 제철소 건물이 눈길을 끌었다. 옛 격전지에 웬 공장인가 싶었지만 그건 놀라움의 시작이었다. 한겨울 찬바람을 무릅쓰고 허위허위 성터에 올라서 조망한 모습은 너무 놀라웠다. 광양만 물결이 출렁거릴 것이라는 기대와 예상은 산산조각이 났다. 현대제철 하나만이 아니었다. 그 옆으로 무수한 공장 건물이 들어선 드넓은 공단이 시야 가득히 펼쳐졌다. 저 넓은 공단이 얼마 전까지 바다였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았다. 뒤에 상세지도를 찾아보니 그곳은 여수반도 동안을 메우다시피 한 율촌 산업단지였다. 역사의 기록에 나오는 격전지 노루섬[獐島]도 뭍으로 변했다. 더 멀리 광양항 크레인이 보이지 않았다면 바닷가라고는 상상도 못할 변화였다. 거대한 기린이 줄지어 선 듯, 오렌지색 크레인 무리 너머로 흰 연기를 내뿜는 광양제철소 공장 건물군, 그 너머로는 여수와 광양을 잇는 이순신 대교 트러스가 희미했다. 아, 이순신 장군이 여기에 살아나셨구나 싶어 겨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근년에 대대적으로 정비했다는 성터는 말끔해 보였다. 마른 수풀 너머 나지막한 구릉 자락에 문루 터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 보니 ‘제1문지(門趾)’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제1성문 자리인데 문루는 사라지고 돌로 쌓은 기단만 남았다. 그것도 허물어져 덤불 속에 숨어 있던 것을 근래에 다시 쌓은 것이다. 색깔이 어두운 돌은 옛것이고, 밝은 것은 다시 깎은 것이리라. 옛것과 새것의 부조화가 엇박자 같았다. 얼마 가지 않아 제2문지가 나오고, 거기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한참을 오르니 병사(兵舍)들이 줄지어 있었을 병영 구역이다. 역시 옛 돌과 새 돌이 뒤섞인 복원 성곽 지대다. 거기서 한 구비 더 오르니 지휘부 건물들이 있었을 혼마루[本丸] 구역이 펼쳐졌다. 학교 운동장만 한 공터 저편 끝에 천수대(天守臺) 자리가 우뚝했다. 기단으로 오르는 계단 옆 안내판에는 ‘천수대 위에 오층망해루(五層望海樓)가 있었다’라고 씌어 있다. 명나라 종군 화수(畵手)가 그렸다는 정왜기공도(征倭紀功圖)에 나오는 조감도가 복사돼 있었는데, 그림 속 건물은 교회 첨탑을 닮은 목조 오층 누각이다. 천수각이라고 할 것까지는 못 되어 망해루라 한 것이리라. 바다를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도록 높이 지어 올렸으니, 실은 적정을 살피는 장대 역할을 한 건물이었다. 그 밑은 바로 바다. 가파른 비탈 아래 접안 시설이 길게 늘어서 있고 수많은 왜선이 정박해 있다. 물론 망해루 건물은 지금 없고 기단만 남았다. 이순신 장군의 공격을 받아 급하게 도망치며 불을 질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1598년 11월 하순에 소실됐을 것이다. 천수대 기단의 크기가 옛 모습을 짐작케 해준다. 가로 18m, 세로 14m라니 그리 크지는 않다. 성 돌은 대개가 자연석이다. 모양이 제각각인 돌을 엇갈려 쌓은 기법은 옛 축성법 그대로라고 하지만, 모서리는 바윗돌을 깎아 쌓은 흔적이 뚜렷했다. 쐐기질로 깎았다는 설명으로 보아 큰 돌을 쪼아 틈을 내고 쐐기를 박아 쪼갠 것이리라. 그 많은 돌을 깎고 자르고 운반하고 쌓는 데 얼마나 많은 공력이 들었을 것인가! 돌 다루는 기계나 장비가 없었을 시대, 왜병들의 채찍 아래 그 일을 하지 않고는 살아남지 못했을 고역이 다 인근에서 포로로 붙잡힌 백성들 몫이었을 것 아닌가. 백성들 피해가 어찌 그 노역뿐이었으랴! 성의 규모는 외성 3첩에 내성 3첩이다. 방대한 구조물이 다 돌과 흙과 목재로 이루어졌으니 노역의 고통이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천수대 주변 땅속에서는 지금도 색깔이 서로 다른 와편이 출토된다고 한다. 왜병들이 근처 절집이나 민가 관공서 건물 기와를 걷어다 천수각 지붕에 올린 것이다. 여러 지붕에서 걷어낸 것이니 재질과 색깔이 제각각일 터다. 엄청난 성의 규모 축성에 3개월이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행장(行長) 등이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향해 왜교에 결진, 성을 쌓고 막사를 지었다”는 정유년 9월 기사에 따르면, 축성은 1597년 9월에 시작됐다. 그해 12월 초,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에게 보낸 축성 보고 서장에 따르면, 그 달에 축성이 끝났다고 돼 있다. 정왜기공도는 1598년 9월 조명연합군의 육상공격전 상황으로 보인다. 왜성 북쪽 검단산성에 주둔했던 조명연합군이 기병을 앞세우고 외성을 향해 들이닥치자 왜병들이 황급히 후퇴하는 모습이 실감나게 표현됐다. 성 아래 당도한 보병들이 활을 쏘는 모습도 있다. 성루 안쪽에 점점이 뚫린 총안에 총신을 걸고 길게 늘어선 소총수들이 결사적으로 총을 쏘는 장면이 묘사됐고, 그 아래서는 판벽에 몸을 숨긴 왜병들이 반격하는 모습도 보인다. 성의 규모는 실로 엄청나다. 1만4000명의 병력을 너끈히 품었음직하다. 높이 40m쯤 돼 보이는 혼마루를 중심으로 수많은 건물이 세 겹으로 배치됐다. 성 한가운데 물길을 내고 두 개의 다리가 놓였는데, 밤이면 다리가 걷혀 내성과 외성이 물길로 갈리었다. 그래서 왜교성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밤에 다리를 끌어당겨 물길을 텄다고 해서 예교성(曳橋城)이라고도 불렸다. 물길은 외부 공격을 막는 해자 역할을 했다. 다리를 끌어들이면 내성 지역은 섬이 됐다. 그 물길은 지금 흔적만 남았다. 성 입구의 주차 구역에서 보면 갈대가 무성한 연못이 보이는데, 이것이 그 흔적이다. 유키나가가 구사일생으로 순천 왜성을 탈출한 이야기는 그들에게 철병이 얼마나 다급하고 치욕스런 것이었는지를 증언한다. 또 이순신 장군에게까지 뇌물공세를 취한 사실이 얼마나 화급했던 지를 말해준다. 화가 난 이순신은 “우리의 보화는 너희 대장 머리뿐”이라고 말하며 사자를 쫓아 보냈다. 유키나가는 사천시 선진리에 주둔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납작 엎드려 있었다. 명나라 장수에게 쓴 뇌물 덕에 명군이 철수하고, 지원군이 오는 길목인 노량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목숨 바쳐 총력전을 펴는 틈을 타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퇴로 확보에 혈안 1598년 8월 18일, 침략 전쟁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왜군 전 진영에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곱게 돌아가도록 놓아둘 조선이 아니었다. 성안에 갇혀 농성 중인 왜병들을 수륙 협공으로 섬멸하자는 작전 계획이 수립됐다. 육지에서는 조선군까지 거느린 명군 장수 유정(劉綎)이,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과 명 수로군 대장 진린(陳璘)이 동시에 협공하는 사로병진(四路竝進) 계획이었다. 그러나 명군은 내 전투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유정은 처음에는 기세를 올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내 속셈을 드러냈다. 조선군을 포함해 2만이 훨씬 넘는 병력을 가지고도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군량을 맡았던 호조판서 김수(金睟)가 공격하자고 하면 성만 냈다고 한다. 병조판서 이덕형(李德馨)의 장계를 근거로 한 기사에는 그 위인이 이렇게 적혀 있다. “유정은 한결같이 교만하고 경솔하며 여자를 좋아할 뿐입니다. 늘 적을 뒤에 두고 진군하기 불편하다고 합니다. 남원에서 거느리던 기생을 진중으로 데려 왔습니다. 부하 장수들과 군사들도 다투어 여자를 데리고 다녀 진중이 문란하기 비길 데 없습니다.” 울산 왜성을 포위했던 마귀(麻貴)가 그랬듯이, 그는 싸우는 시늉만 하면서 세월만 보냈다. 아직 병기가 오지 않았다, 공격의 적기가 아니다 등등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군량만 축내다가 유키나가의 강화 제안과 뇌물에 눈이 멀었다. 퇴로 확보에 혈안이 된 유키나가는 “성을 비워줄 때 군량과 약탈 재물을 그대로 넘겨주고 1000수급(首級)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강화를 제안했다.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던 유정에게는 바라고 기다리던 떡이었다. 뇌물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기록에 없으나, 적에게 그 정도 조건으로 포위망을 풀어주었겠는가. 뒷날을 기하겠다면서 유정이 순천으로 회군한 길가에 군량 쌀이 허옇게 흘려져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검단산성 주둔 중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수륙 협공 계획에 따라 이순신 장군이 진린 제독의 함대와 함께 강진 고금도 기지를 떠난 것은 1598년 9월 15일이었다. 조명수군연합 함대가 왜교성 공격을 시작한 것은 9월 20일. 광양만은 바다가 얕아 썰물 때는 배가 다니기 불편했다. 밀물 때를 이용해 치고 들어갔다가 빠지는 전법으로 10여 일을 보내는 사이 육지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정은 미적거리기만 하다가 10월 6일 철군하고 없었다. 그동안의 전투에서 이순신은 큰 전과를 올렸다. 왜선 격침 30척, 나포 11척이었다. 노루섬 왜군 군량 창고를 털고 불태우는가 하면, 얕은 수로에 좌초된 진린 함대를 지원해 진 제독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이런 은혜를 입고도 진린은 유정의 행로를 답습했다. 퇴로를 얻기에 혈안이 된 유키나가의 뇌물 공세에 넘어간 것이다. 이순신이 순국한 노량해전 일본 작가 기리노 사쿠진(桐野作人)의 에 따르면, 11월 14일 밤 붉은 깃발을 올린 왜선 2척이 명 수군 진영으로 들어갔다. 진린은 통역을 대동하고 나와 배를 맞았다. 왜군은 돼지 두 마리를 그에게 바쳤다. 그날 이후 양 진영에 사자(使者)의 왕래가 있었는데, 16일 진린이 순천에 보낸 사자에게 일본 측은 창칼 등 무기류 3척분을 바쳤다. 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11월 14일 밤 왜 소장이 7명을 데리고 배를 타고 진린 도독부로 들어가서 돼지와 술을 바치고 돌아갔다. 15일에도 왜 사자가 또 도독부로 갔고, 16일에는 도독이 부하 장수 진문동(陳文同)을 적 진영으로 보냈다. 조금 있다가 왜적 오도주(五島主)라는 자가 배 3척에 말과 창과 칼 등을 싣고 가서 도독에게 바치고 돌아갔다. 그 뒤로 왜 사자들이 도독부에 끊임없이 왕래하더니, 마침내 도독이 공에게 화친을 허락해주도록 부탁했다.” 이 사실은 이순신의 에도 기록돼 있다. 14일자 일기에 ‘왜선 2척이 강화할 차로 바다 가운데로 나오니 도독이 왜말 통역관을 시켜 조용히 왜선을 마중해 붉은 기와 환도 등을 받았다. 오후 8시에 왜장이 작은 배를 타고 도독부로 들어가서 돼지 두 마리와 술 두 통을 바치고 갔다’는 게 그것이다. 16일자 일기에는 ‘도독이 진문동을 왜영으로 들여보내니, 왜선 3척이 말 1필과 창칼 등을 도독에게 바쳤다’고 적혀 있다. 진린은 뇌물을 받은 16일 밤 왜교성에서 나온 왜선 1척의 광양만 통과를 허락했다. 그 배는 사천에 주둔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남해에 주둔한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 후 진린은 왜교성 앞바다에서 철수했다. 남해에서 농성 중인 왜군을 먼저 토벌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왜적에게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들이니 급할 것 없다”는 이순신의 만류에도 “이미 적에 붙었으니 적과 마찬가지”라면서 함대를 인솔해 떠나갔다. 같은 날 저녁, 왜교성에서 한 줄기 봉화가 올랐다. 사천, 곤양, 남해 등에 주둔한 왜군 진영에 구원을 요청하는 신호였다. 이를 간파한 이순신은 원군이 오기 전에 맞아 싸우지 않으면 다 놓치겠다는 판단으로 왜교성 앞바다를 떠났다. 17일 물목이 좁은 노량 앞바다에 진을 쳤다. 남해에 있던 진린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순신이 순국한 노량해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시마즈 요시히로 등 지원군 왜선 500척과, 조명 연합수군 500척의 대회전이었다. 노량 앞바다가 포성과 불길과 피로 물든 틈을 타 왜교성을 탈출한 유키나가는 남해 섬을 멀리 돌아 쥐새끼처럼 도망쳐갔다. 귀로에 ‘소서행장 전승비’를 찾아본 것은 뜻밖의 수확이다. 순천터미널 관광안내소에서 신성리 왜성 가는 길을 물을 때 친절한 안내원은 “성터만 보지 말고 충무사에 복원해놓은 비석도 보고 오시지요” 했다. 1930년 조선군 사령관을 지낸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가 천수대 꼭대기에 세웠다는 비석은 광복 후 지역 주민들 손에 철거되어 논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광복 후에는 면사무소 창고에서 발견돼 2013년 충무사 관리인 숙소 앞마당에 다시 세워졌다. 전면에는 ‘小西行長之城’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고, 다듬어지지 않은 뒷면의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야시 센주로는 중장 시절인 1930년 조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이듬해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본국 허가도 없이 휘하 부대를 만주에 파견한 일로 일본 정계에 물의를 일으켰던 자다. 만주국 창설에 세운 공으로 승승장구, 1937년 제33대 일본 총리 자리에까지 올랐다.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고 찬양하는 마음으로 세운 것이라 하여 이 비석은 소서행장 전승비로 불렸다. 명나라 장수들에게 뇌물을 쓰고 야반도주한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극우주의, 국수주의에 물든 군인들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역사에 오점을 남기기 마련이다. >>문창재(文昌宰) 언론인 1946년 강원 정선 출생. 서울 양정고, 고려대 국문과, 한양대 대학원 졸. 한국일보 도쿄특파원, 사회부장, 논설실장 역임. 저서 , , , 등.
- 2017-02-28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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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따뜻한 콘서트>덕분에 부자지간 돈독해져
- 동년기자로 활동한 지도 어느덧 만 1년이 돼가고 있다. 일상의 삶 속에서 나태(懶怠)에 빠져 글쓰기를 망각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내가 정말 글다운 글을 썼을까?” 하고 뒤돌아보며 반성을 하게 된다. 글쓰기에 대한 열정은 지난 1년 동안 한시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기자생활 1년 동안 덤으로 얻은 행운도 많았다. 대학로에서 두 번씩이나 연극을 관람했고 올 초에는 압구정동에서 이라는 뮤지컬도 관람했다. 젊어서는 살기 바빠 문화생활을 못했고 나이 들어서는 관심이 떨어져 고작해야 1년에 영화 한 편 보기도 쉽지 않았는데, 지난 1년 동안 동년기자로 활동하면서 문화생활까지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감사한 마음이다. 지난 2월 22일에도 큰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여의도 KBS홀 본관에서 공연된 이투데이 신춘음악회 에 초대된 것이다. 필자는 며칠 전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을 기다렸다. 그런데 당일 아침부터 날씨가 잔뜩 흐리더니 오후가 되자 오락가락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필자가 사는 인천공항 근처에는 진눈깨비와 비가 섞여 내리면서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퇴근시간에 맞춰 막내아들에게 회사로 나오라고 했다. 공연장까지 가는 방법을 인터넷 검색을 통해 몇 번이나 확인해보았지만 쉽게 가는 노선이 잘 찾아지지 않았다. 결론은 회사 통근버스로 김포공항까지 이동한 다음 공항전철역에서 9호선 급행열차로 갈아타고 가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려 저녁 먹을 시간이 없었다. 가다 보니 허기는 또 얼마나 몰려오든지…. 서둘러 현장에 도착해 일단 표를 받아놓고 시간을 보니 공연시작 20분 전이었다. 빠듯하긴 했지만 저녁을 굶고 관람할 수는 없어 근처 김밥 집으로 달려갔다. 모처럼 아들과 둘이 마주 앉아 김밥과 라면을 시켜 먹으면서 오랜만에 서로의 관심사를 물으며 대화할 수 있어서 좋았다. 식사가 끝나고 부리나케 공연장으로 돌아오니 공연은 이미 시작되었고 겨우 안내를 받아 착석하고 관람을 했다. 오프닝 무대로 타악그룹 RUN의 ‘두드림’은 힘차고 역동적으로 리듬을 타고 있어 오랜만에 필자의 마음을 심쿵하게 만들었다. 겨울 끝자락에서 만난 ‘마음이 따뜻해지는 콘서트’는 오는 봄을 맞이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필자의 마음을 녹여줬다. 아들은 가수 린의 인기 드라마 OST곡을 제일 좋아했다. 자신의 세대와 공감이 되고 감성이 맞아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깜찍한 걸그룹 ‘모모랜드’의 공연은 싱그러워 젊은 층의 관람자들은 물론이고 시니어들도 한마음으로 공감하고 어우러진 멋진 공연이었다. 중견가수 김장훈의 넘치는 끼와 재치는 마력이 있었다. 관객과 함께 호흡하면서 어우러지는 모습에서 문화는 대중과 함께 호흡을 해야 그 힘이 발휘된다는 생각을 새삼 해보았다. 마지막으로 메인무대를 장식한 가수는 등장하기 전부터 한껏 기대를 갖게 한 대형 록 가수 전인권이었다. 가늠할 수 없는 울림통, ‘전인권 밴드’의 현란한 연주, 관중을 사로잡는 매력과 포스가 한껏 발휘된 무대였다. 공연의 마지막을 향해 치닫는 시간에 갈 길이 먼 필자와 아들은 아쉬움을 남긴 채 자리를 떠야 했다. 아들은 공연장을 빠져나와 지하철을 타러 가는 내내 공연의 잔상(殘像)에서 벗어나지지 않는지 따뜻하고 멋진 공연이었다고 끊임없이 조잘댔다. 황급히 돌아오면서 9호선 국회의사당역을 찾느라 이리저리 헤맨 필자와 아들은 영락없는 촌뜨기 신세였다. 겨우 지하철을 타고 두어 정거장쯤 갔을 때 무심코 안내방송으로 다음 정차할 역이 노량진이라는 멘트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반대 방향으로 가는 전철을 타고 만 것이다. 일찍 집에 도착하려고 공연 엔딩도 보지 않은 채 조금 일찍 빠져나왔는데 반대로 가는 지하철을 타다니! 필자와 아들은 마주보면서 멋쩍은 웃음을 나누고 노량진역에서 내려 부리나케 반대 방향으로 가는 전철을 갈아탔다. 우여곡절 끝에 공항전철을 타고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택시 잡기가 힘들었다. 승강장을 보니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30여 미터나 늘어서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걸어가다가 택시가 보이면 타자. 그게 더 빠르겠다.” 아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걷기 시작했는데 그날 밤, 집에 도착할 때까지 택시는 잡히지 않았다. 한 시간여를 눈길을 걸었다. 칼로 에이는 듯한 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여미고 귀를 손으로 감싸면서 걸었지만 아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걸어가는 길이 싫지 않았다. 오랜만에 부자가 함께 걷는, 눈 내린 밤길은 따뜻한 콘서트만큼이나 훈훈했다.
- 2017-02-27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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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雪國, 바람의 언덕 선자령에서 텅 빈 충만을
- 지난달에 백두대간 선자령으로 겨울산행을 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고 그동안 세 번이나 갔다 왔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눈길이었다. 스틱을 사용해도 속도가 나지 않았다. 대관령 휴게소에서 출발해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 멀리 강릉과 동해가 다 내려다보이는 새봉 전망대를 지나 풍력발전기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선자령(1,257m) 정상까지 올라갔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마치 선경(仙境) 같았다. 내려올 때는 눈이 수북이 쌓인 활엽수 숲속을 지나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양떼목장을 지나 원점회귀했다. 그날 일기예보는 영하 15도의 추위라고 했는데 선자령은 눈가루가 하얗게 섞인 칼바람에 체감온도는 영하 20도쯤 되는 것 같았다. 혹한에 멋진 설경 담아오겠다고 배터리도 두 개나 가지고 갔는데 추위에 카메라가 작동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행 중에 카메라 보온덮개를 준비한 사람이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손가락은 꽁꽁 얼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스키 장갑만 믿고 핫팩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떼목장에 양은 없었지만 마음속에는 이미 가득 내려오는 코스는 숲속을 지나서 양떼목장을 따라 내려오는 길이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양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고 드넓은 목장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어 마치 동화의 나라 같았다. 끝없이 이어서 걷는 사람들 외에는 모두 흰색뿐이었다. 다양한 원색의 등산복들은 마치 설원에 핀 꽃들 같았다. 일행과 함께 하산하는 중이었지만, 잠시 멈춰 어느 것 하나 보이지 않는 눈 쌓인 목장을 바라보면서 쓸쓸하다는 생각보다는 순백의 아름다움과 함께 텅 빈 충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끝없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돌아오는 겨울에도 다시 갈 것 같다. 고단함 끝에 얻어지는 것들 겨울산행은 아이젠과 롱 스패츠를 착용해도 위험하고 눈 속에 빠져 고생한 적도 있어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앞으로 더 약해질 체력을 생각하며 일주일간 망설이면서 고민을 했다. 힘들 거 뻔히 알면서도 강행하려는 마음은 아직도 도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다. 그리고 힘든 산행을 마친 후에는 몸은 고단하지만 정신은 맑아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필자는 평소에도 운동을 지나칠 정도로 하곤 한다. 이번 등반 중에도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매서운 칼바람을 다섯 시간씩 맞아가며 고생했지만 바람이 적은 골짜기에 수북이 쌓인 눈 속에 누웠을 때 어머니 품 같은 포근함이 마냥 좋았다. 두 볼은 얼음사과같이 되었지만 드넓은 설원을 걷는 내내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선자령에서의 멋진 경험으로 올 한 해도 혹시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자연의 힘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버티기 힘들었던 상황을 잊지 않는다면 어려운 일이 닥쳐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힘들었던 것만큼 깨달은 것도 많았던 겨울산행이었다. * 겨울산행 tip 보온 유지는 필수. 두꺼운 겉옷 하나보다는 얇은 옷 여러 겹을 입는 것이 보온에 더 좋다. 스틱, 아이젠, 스패츠, 핫팩, 보온병은 필수. 카메라와 배터리 보온 커버도 준비할 것. 선자령처럼 눈과 바람이 심한 곳에서는 스키용 고글이 좋다. 일기예보를 100%로 믿지 말고 대비하는 것이 안전하다.
- 2017-02-27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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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중앙과학관 체험
- 국립중앙과학관은 1990년도에 대전 대덕연구단지로 옮겨 확대ㆍ개편하였다. 이공학ㆍ산업기술ㆍ과학기술사 및 자연사 등 과학기술자료의 수집ㆍ보존ㆍ연구ㆍ교류 역할을 하고 있다. 새봄처럼 포근한 2월의 끝 휴일, 손주들을 데리고 국립중앙과학관으로 가족 나들이를 하였다. 전시관은 과학기술관과 놀이 체험공간인 창의나래관, 영유아를 위한 꿈아띠체험관, 생물탐구관, 최첨단 교통체험시설인 자기부상열차관체험관, 천체관 등이 있다. 전시품으로 달암석ㆍ공룡화석ㆍ동식물 표본류 등 자연사 117만여 점과 측우대ㆍ석각천문도ㆍ자기부상열차 등 과학기술사 및 이공학 자료 1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자연사 전시실에서는 공룡화석에 눈길이 모아졌다. 공룡을 장난감이나 그림으로 익혔던 아이들은 화석이 모제품이 아니고 대부분 실제라는 해설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큰 공룡화석을 보면서 이름 맞추기에 매우 열중하였다. 천체관은 돔형 건물로 6분할 디지털 플라네타리움 프로젝터 6개로 360˚ 스크린에 입체효과를 가미한 다큐멘터리 및 애니메이션을 상영하였다. 우주의 생성과 발달을 입체안경을 쓰고 감상하였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따뜻한 야외에서 쉬었다. 수십 년 전 서울의 그것처럼 넓은 공간이 여유롭다. 오전 입장 때 텅텅 비었던 주차장도 꽉 찼다. 유료 체험장에서는 줄을 서거나 예약 후 한참 기다렸다. 자기부상열차 체험이 백미였다. 프랑스ㆍ독일ㆍ일본ㆍ중국과 함께 자기부상열차 대열에 합류하였다는 이야기가 좋았다. 몇 백 미터 천천히 갔다가 뒤로 다시 오는 짧은 거리다. 잠깐이지만 교통선진국임은 자랑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어린이 놀이공간이 3층 건물에 넓게 마련되었다. 옛날 자동차 타기, 미션 실행하기 등 보호자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시설도 많다. 관람의 혼잡을 피하려면 코스별 예약이 필수다. 서울에서 수원 광명 고속도로와 국도를 이용하면 시간과 통행료 줄일 수 있다.
- 2017-02-27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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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유재의 미술품 수집 이야기] 봄이 오는 길목에서
- “고등학교를 남보다 두 해 늦게, 고향 김천에 있는 농고(農高)로 들어갔지요. 그 무렵 구루병을 앓고 있는 사촌 누이동생과 문학을 교류하며 지냈는데, 그 누이가 이듬해 시름시름 앓다 사망했어요. 그 시절의 누이 모습이 잊히지 않아 ‘소녀’의 그림을 그려왔지요.” 창문이 열린 화실 밖, 밤나무에서 매미가 울었다. 박항률(朴沆律, 1950~ ) 화가는 창밖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읊조리듯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화상 같은 소년의 모습들은 누이의 눈동자에 비쳤을 내 모습을 상상하며 그렸고요.” 화실 바닥에는 최근에 완성했다는 이 있었다. 1995년 전시 때 그의 그림을 눈여겨봐왔던 잔잔한 감동이 드디어 이태 뒤 그의 청담동 화실까지 찾게 한 것이다. 인물화만 그리지 말고 풍경화도 그려달라 부탁하려다 그만두었다. 동갑의 우리는 40대 후반의 가장으로서 어깨를 짓누르던 삶의 무게뿐만 아니라 시대의 서글픈 사회상을 공유하고 있어서 서너 시간 더 대화할 수 있었다. 그땐 머리 위에 삼층탑을 이고 있는 과 물고기를 안고 있는 의 두 그림을 갖고 있던 터라 한결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탁자 위에서 소리 없이 타오르는 침향(沈香)의 그윽한 향내가 화실을 맴돌다 옅은 보라의 연기 띠를 이루며 창가로 흩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예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같은 미술학도인 아내와 가정을 꾸려 아이들을 낳고 전업작가를 선언하며 그림그리기에 용맹 정진할 무렵이었다. 그가 건네준 자작 시집 과 드로잉 한 점을 받고 돌아선 첫 만남은 한 화가의 진솔한 심상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의 그림의 주제는 단발의 소녀, 까까머리의 소년, 한 일사(逸士)의 인물 그림이지만 주변의 치밀한 장치가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온다. 새벽의 안개, 고요히 타오르는 등잔불 등은 보는 이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선(禪)과 명상의 세계로 이끈다. 어떨 때는 신화(神話)와 현실이 혼재되면서 끝없는 상상력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이후 두 번의 화실 방문과 전시회장에서 여러 번의 만남이 이어졌다. 그의 화풍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침묵의 적막함, 고요의 깊은 바다에 잠기는 탈속(脫俗)한 사색인의 경지를 리듬감 있게 그리고 있다. 1~2호 크기의 소품에서도 그의 면밀한 구도와 아크릴 물감의 잔 붓질이 높은 밀도로 공간을 채우고 있다. 몽환적인 이상향 같은 새벽 풍경 서너 해 전, 잘 아는 인사동 화랑 주인이 이른 봄 섬진강으로의 탐매(探梅) 여행을 계획하면서 박항률 화가도 동행한다며 동행을 권유했으나, 가정사로 참여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긴 일이 있었다. 남도의 강안(江岸)에 작은 배를 띄우고 강 건너 안개 낀 새벽 풍경을 특유의 스케치로 그려오더니, 드디어 채색이 완성되었다며 초청하기에 즉시 달려갔다. 그의 풍경화는 본 일이 없었으므로 설레는 마음이 더 가득했다. 30호(90.8cm×72.7cm) 크기의 대작이었다. 짙은 안개의 강둑 너머 고목이 즐비한 작은 마을에 소담한 집 몇 채의 안온한 정경이 새벽에 잠겨 있었다. 어쩌면 몽환적인 이상향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이미 네 권의 시집을 출간했는데 시인의 짙은 감성이 그대로 배어 나왔다. 절제되고 아껴왔던 시정(詩情)이 수묵담채처럼 새벽 강을 따라 질펀히 흘러 눈길을 비끄러매었다. 그는 늘 생각의 두께가 그림의 색칠로 침윤되기를 기원하는 구도자의 붓질로 화폭을 채운다. 은 목련꽃 아래 한 소년이 팔에 얼굴을 괴고 사색에 잠기는 찰나를 그린 아주 작은 작품이다[그림 1]. 이 소년이 곧 화가의 자화상이 되고, 보는 이의 감성에 이입되어 일체를 이룬다. 나른한 봄날의 한때가 침묵 속에 머물러 있다. 깨끗함과 따뜻함 보여주는 화가 미술품을 수집하면서 제일 큰 갈등이 일어날 때는 작품을 고르는 순간이다. 작가의 이력이나 다른 작품들을 함께 볼 수 없을 때는 더 곤혹스럽다. 눈과 가슴을 일렁거리게 하는 작품들이 안 보일 때 그 답답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벌써 10여 년 전이다. 늦겨울 인사동을 거닐다가 한 화랑 전시대에 걸린 을 만났다[그림 2]. 인도 위에는 잔설이 아직 희끗희끗한데, 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진 곳에서 하얀 어미 닭과 노란 병아리 세 마리가 한낮의 햇빛을 즐기는 이 그림은 무한한 희열과 따뜻함을 느끼게 했다. 사실 이 그림을 만나기 전까지 권사극(權師極, 1959~ )이란 화가를 알지 못했다. 한참을 서서 그림에 빠져 있는데 화랑 주인이 문을 열고 들어오라 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우중충한 겨울이 싫어서 빠른 봄맞이를 해봤다”는 주인과 함께 을 찬찬히 감상했다. 무성한 개나리꽃이 농염한 가지에, 파릇한 잎도 슬며시 내밀고 어미 닭의 흰색과 옅게 찍어놓은 붉은 벼슬, 병아리의 붉은 발목이 거슬리지 않게 조화를 이루었다. 인사동 화랑들은 우리나라 그림시장의 방향타 같아서 화력이 짧은 아마추어들의 작품을 내거는 일이 없다. 그만큼 전시 작품에 심혈을 기울인다. 주인이 내민 몇 권의 도록으로 이 화가의 다른 작품들을 보았다. 대부분 꽃을 그린 그의 작품들에서 받는 공통된 느낌은 ‘따뜻함’과 ‘깨끗함’이었다. 마음에 든다면 주저 말고 수집 이 화가의 그림에서는 꽃들의 잔향이 뿜어져 나온다. 발로 열심히 다니며 찾다 보면 비록 화력(畵歷)이 짧고 값비싸지 않아도, 예술성 높은 작품을 찾아내고 수집하는 기회가 온다. 무명의 작가가 훗날 미술계에 우뚝 서는 작가로 성장해 작품 가격이 치솟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래서 ‘마음을 움직이는 미술품을 만나면 주저 없이 수집해야 한다’는 수집가들의 격언이 있다.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런 작품을 만나기 어렵다. 나의 경우, 미술품 수집의 우선순위는 오랜 시간의 깊은 관찰이다. 마음에 거슬리지 않으면서 보면 볼수록 괜찮은 그림을 보면 작가의 이력과 다른 작품도 보게 되고, 화랑 주인이나 다른 수집가의 조언도 참조한다. 작가를 직접 찾아가 그의 예술관도 경청해본다. 작가가 교만하거나 작품이 기교에 차 있으면 경계해야 할 일이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 2017-02-27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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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컬처 키워드] 시대정신을 담보한 사임당이 문화 키워드로
-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knbae24@hanmail.net 사극은 역사 속 인물을 소환해 현재적 의미를 부여한 뒤 생명력을 불어넣고 오늘날의 사람들과 만나게 한다. 그동안 이순신, 정조, 사도세자, 장희빈, 이성계, 광해군, 연산군, 허준, 윤동주, 김원봉 등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수많은 역사적 인물이 새로운 시각에서 극화됐다. 또한 드라마 의 장금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발굴해 역사적 의미와 존재감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 사극의 역사적 인물의 소환은 새로운 문화 트렌드와 시대의 아이콘을 창출하는 진원지 역할도 한다. 올해도 MBC 사극 의 홍길동, 영화 의 독립운동가 박열 등 전통사극, 퓨전사극, 타임슬립 등 다양한 형태의 사극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다양한 역사적 인물을 소환하고 있다. 올해 사극을 통해 만나는 인물 중 단연 눈길을 끌고 화제가 되는 인물은 신사임당이다. 이후 13년 만에 드라마에 복귀한 이영애에 의해 표출되고 있는 사임당이 시청자와 만나고 있다. 바로 1월 26일부터 방송을 시작한 SBS 퓨전사극 다. 사임당을 사극으로 이끌어낸 이유는 뭘까. “현모양처라는 박제된 이미지의 ‘신사임당’의 틀을 깨고 여자로, 예술가로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여자 사임당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 드라마 제작에 돌입하며 제작진이 밝힌 기획의도다. ‘현모양처’ 이미지 탈피 노력 극본을 쓰고 있는 박은령 작가는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삶도 중요하지만, 예술가로서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 여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적극적으로 개척해나가는 모습에 주목했다.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힘든 일인데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극 중 사임당의 아버지 유언이 ‘삶을 선택하라’였다. 사임당이 삶을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적극적으로 개척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조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연출을 맡은 윤상호 PD는 “대한민국 사임당을 드라마화하기 위한 기획 의도는 대한민국 국민의 자긍심과 자부심을 위한 좋은 드라마를 만드는 것과 연결된다”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13년 만에 드라마에 복귀해 현대(서지윤)와 조선시대(사임당)를 오가며 1인 2역을 하는 이영애의 사임당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 “500년 전 사임당도 지금 5만원권에 박제된 듯한 모습을 원하진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여자로서의 사임당에 생명을 불어넣어 새 인물로 만드는 게 재밌었다.” 는 한국 미술사를 전공한 대학 시간강사인 워킹맘 서지윤이 이탈리아에서 우연히 발견한 사임당 일기에 얽힌 비밀을 조선시대와 현재를 넘나들며 풀어내는 타임슬립 퓨전사극이다. 는 일기 속에 숨겨진 천재 화가 사임당의 불꽃같은 삶과 ‘조선판 개츠비’ 이겸과의 불멸의 인연과 사랑을 아름답게 담았으며 현모양처라는 고정된 이미지의 사임당이 아닌 워킹맘이자 예술가로서의 열정에 초점을 맞췄다. 현대적 여성상 반영할 수 있을까 사임당은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현모양처라는 획일화한 표상으로 수많은 사람에게 각인된 게 사실이다. 사임당 하면 떠오르는 고정화한 이미지와 그녀에 대한 불편한 시선과 편견은 사임당의 삶이 아닌 후대의 필요에 의한 해석과 의미부여 작업으로 초래된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박정희 정권 시절 육영수 여사의 국모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 이른바 사임당의 현모양처 이미지를 강화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5만원권 지폐의 인물로 등장하면서 불편한 시선과 편견이 확대 재생산됐다. 는 전통적 여성상으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투영된 현모양처의 표상이었던 사임당을 시대와 운명, 남성 중심의 인식을 뛰어넘어 자신의 삶과 사랑, 예술을 적극적으로 개척한 주체적 인간의 아이콘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도 2017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다양한 의미와 현실로 다가오는 ‘워킹맘’이라는 문양으로 말이다. 최근 들어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다. 직업을 갖는 여성도 급증하고 있다. 그리고 출산을 하고도 일하는 워킹맘들도 많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인식이 엄존해 있고 남녀차별 더 나아가 여성혐오 행태마저 빈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는 의도가 개입된 획일화한 해석으로 우리에게 ‘현모양처’, ‘전통적 여성상’으로 인식되어온 사임당을,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이 어우러진 작업을 통해 2017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감과 희망을 제시하는 주체적 여성상으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새로운 시선과 의미가 투영된 사임당으로의 전환은 지난한 작업일지도 모른다. 이 작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돼 사임당이 새로운 문화 트렌드와 아이콘으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가 시청자, 특히 이 땅의 수많은 여성이 공감할 수 있는 현재적 가치를 체화한 2017년의 사임당을 잘 구현해야 한다. 또한 사임당에게 덧씌워진 편견과 왜곡된 시선을 자연스럽게 걷어내면서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오늘의 의미를 담보해야 한다. 그것도 우리 사회에 엄존해 있는 남녀차별적 시선과 여성혐오적 행태를 무력화하는 긍정적 이데올로기를 드라마에 완벽하게 승화하면서 구현해내야 한다. 는 정치적 시선,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사극에서 좀처럼 소환하지 않았던 신사임당을 오늘의 시청자와 만나게 하고 있다. 사극으로 부활한 사임당은 올해 시대정신을 담보한 새로운 인물 아이콘으로 눈길을 끌며 강력한 문화 트렌드로 부상할 수 있을까.
- 2017-02-23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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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철의 야생화] 염화시중의 미소로 꽃샘추위 내치는, 앉은부채!
- 춘삼월(春三月)이라고는 하나, 산골짝의 계절은 아직 봄이라기보다는 겨울에 가깝습니다. 나뭇가지는 여전히 깡말랐고 산기슭과 계곡엔 갈색의 낙엽이 무성하게 쌓여 있습니다. 낙엽 밑엔 미끌미끌한 얼음이 숨어 있어 함부로 내딛다가는 엉덩방아를 찧기 십상입니다. 저 멀리 남쪽에선 2월 하순부터 보춘화가 피었느니 변산바람꽃이 터졌느니 화신(花信)을 전해오지만, 높은 산 깊은 계곡에선 3월 초순 잘해야 너도바람꽃 한두 송이가 가냘픈 꽃송이를 치켜들 뿐입니다. 그렇듯 메마른 3월의 산중에서도 눈 밝은 동호인은 파릇파릇 돋아나는 묘한 야생화를 찾아냅니다. “이게 정말 꽃이 맞아요?” “무슨 꽃이 이렇게 생겼을까!” “꽃잎은 어디에 있나요?” 처음 보는 이는 익히 알던 꽃과는 전혀 다른 형태에 신기해합니다. 그러곤 이런저런 질문 끝에 ‘앉은부채’란 이름을 그럴싸하다고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앉은부처’로 잘못 알아들었음을 알고선 다시 갸우뚱합니다. 한가운데 도깨비방망이처럼 생긴 게 일견 불두(佛頭)를 닮아 ‘앉은부처’라고 불린다고 이해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뭔 사연인지 설명해달라고 채근합니다. 앉은부채는 우선 촛불 모양의 독특한 꽃으로 눈길을 끕니다. 꽃잎인 듯싶은 자갈색의 타원형 이파리는 불염포라 불리는 꽃 덮개입니다. 그 안의 도깨비방망이가 육수(肉穗)꽃차례라고 불리는 꽃 덩어리인데, 거북의 등처럼 갈라진 조각조각이 4장의 꽃잎과 4개의 수술, 1개의 암술을 갖춘 각각의 꽃송이입니다. 부처의 광배(光背)를 닮은 꽃 덮개와, 역시 부처의 머리를 닮은 육수꽃차례로 인해 ‘명상에 잠긴 부처’라는 별칭으로 또는 ‘앉은부처’로 잘못 불리기도 하지만, 원래는 꽃이 진 뒤에 무성하게 나는 잎이 부채처럼 넓다고 해서 앉은부채란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앉은부채가 가장 우리를 놀라게 하는 건 강인한 생명력에 있습니다. 이른 봄, 눈 속에서 꽃 덮개를 뾰족뾰족 세운 앉은부채는 마치 백상아리가 등지느러미를 곧추세우고 망망대해를 유영하듯 대견스럽습니다. 꽁꽁 언 땅속에 1m 넘게 뿌리를 내리고, 그 깊은 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얼음 구들을 녹이고 독특한 형태의 꽃을 피우는 앉은부채의 놀라운 생명력은 경이 그 자체입니다. 강원도에선 겨울에서 봄 사이 부채처럼 넓게 이파리를 펼치다 보니 겨울잠에서 갓 깨어난 곰이나 산짐승들이 가장 먼저 먹는 풀, 즉 ‘곰풀’로 불렸다고도 합니다. 또 지방에 따라 삿부채, 우엉취, 취숭(臭崧) 등 여러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유독성 식물로 잎은 풍성하지만 먹을 수 없다고 하여 ‘호랑이 배추’라는 별칭도 얻었습니다. 꽃 덮개가 노란 앉은부채의 경우 정명은 아니지만 ‘노랑앉은부채’로 불리는데, 어쩌다 귀하게 만난 노랑앉은부채를 보고 있노라면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로 겨울을, 꽃샘추위를 저만치 물리치는 듯한 진한 따스함이 전해져옵니다. 학명 중 속명 심플로카르퍼스(Symplocarpus)는 결합한다(symploce)와 열매(carpos)라는 그리스어 합성어로 씨방이 열매에 붙어 있다는 뜻, 종소명 레니폴리우스(renifolius)는 콩팥 모양의 잎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영어로는 스컹크 캐비지(Skunk Cabbage)라고 합니다. Where is it? 전국에 분포하는데, 수도권 인근에선 천마산이 개체 수도 풍성하고 ‘노랑앉은부채’도 만날 수 있는 자생지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충북 청원군 낭성면의 한 작은 산 입구에는 앉은부채 자생지라는 안내 표석(사진)이 세워져 있다.
- 2017-02-20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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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인생] 미니인터뷰 : 옻칠나전공예 수강생 이수매씨
- 남부기술교육원 옻칠나전학과에서 만난 이수매(李秀梅·63)씨는 지난해 3월부터 1년간 옻칠나전 수업에 푹 빠져 있는 수강생이다. 그녀가 옻칠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박물관에서 옛 문화재들을 보며 매력에 취했기 때문이라고. “요리강사를 꽤 오래하다가 건강이 나빠져 쉬었거든요. 그러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어 이것저것 알아보던 중에 전시장 속 칠기에 눈길이 갔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배울 수 있는 길이 많지 않더라고요. 다행히 남부기술교육원에서 배울 수 있다고 해서 먼 길을 마다 않고 여기까지 와요.” 물론 그녀가 은퇴 후 계획을 착착 준비했던 것은 아니다. 계획과 목적 없이 방황하던 시절도 있었다. “막상 은퇴하고 나서 보니 할 것도 없고 준비도 안 해놨다는 것을 느꼈어요. 100세 시대라고 다들 이야기하는데, 그때까지 놀면서 시간만 보낼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할 것을 찾자 하고 규방공예를 열심히 배웠어요. 그러고 나서 보니 옻칠나전과 접목할 수 있겠더라고요. 현재는 창업을 목표로 열심히 하고 있어요. 내년 3월에 작은 공방을 낼 계획이에요.” 이씨는 은퇴 후 계획을 세우려면 지구력이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면 될 것도 안 되고, 자기 재능을 찾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도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창업에 대한 생각도 분명했다. 생활 속에서 활용할 수 있는 소품을 중심으로,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돌아갈 때 기념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얼마 전 제주도에 갔는데, 기념품 가게에서 한 중국인이 그러더라고요. 살 것이 없다고.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성의 없어 보이는 공장제 제품이 대부분이라서 소유욕이 안 느껴졌어요. 저는 외국인들이 사고 싶은 물건을 만들어 한국의 전통공예를 외국에 널리 알리고 싶어요. 또 이를 위해 개인 작품으로 외국에서 전시회도 해볼 계획이에요.” 미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덕에 배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옻칠이 주는 매력도 컸다. “옻칠은 새 물건에만 하는 작업은 아니에요. 닳아서 쓸모없는 것도 손질해서 칠하면 훌륭한 물건이 되죠. 제 작품을 보고 남편이 대단하다고 칭찬하더니, 이제는 어디선가 이런저런 소품을 들고 오기도 해요. 칠해달라고(웃음).” 그녀는 마지막으로 동료들과 친구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우리가 이만큼 살면서 다양한 희로애락을 경험했잖아요.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은 물론 힘들고 어렵지만, 그간 우리가 겪었던 희로애락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직 무언가 배울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고 적극적으로 시도해보면 좋겠어요.”
- 2017-02-20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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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사랑] 첫사랑은 우두 자국 같은 것
- 우리 세대는 화려한 영화의 시대였다. 종로, 을지로, 충무로는 물론이고 프랑스 영화를 보기 위해 반은 겉멋으로 프랑스문화관을 드나들던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중에 지금도 필자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영화 두 편이 있다. 하나는 알랭 들롱이 주연한 이고, 또 한 편은 라이언 오닐과 알리 맥그로우가 함께 나온 다. 풋풋했던 젊은 시절의 알랭 들롱은 바다를 닮은 푸른 눈동자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선과 악의 분위기가 교차하는 미묘한 눈빛으로 푸른 바다 위 하얀 요트에서 작열하는 태양을 올려다보는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는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눈이 오는 하버드대학 교정에서 아이들처럼 눈싸움을 하며 즐거워하던 장면과 배경 음악을 잊을 수 없다. 는 훗날 훈남 배우 맷 데이먼을 내세워 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됐지만, 가슴에 새겨진 알랭 들롱의 강렬한 눈빛을 이길 수는 없었다. 얼마 전 의 실재 인물의 거짓이 드러났다. 알리 맥그로우가 연기한 그녀는 래드클리프 여대를 나온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는 필자 마음속에서 여전히 아름다운 영화로 남아 있다. 첫사랑은 그런 것이다. 만해 한용운 시인은 ‘님의 침묵’에서 마음에 각인되어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기억을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라고 읊었다. 서정주 시인도 ‘국화 옆에서’라는 시를 통해 국화를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고 노래했다. 첫사랑은 알랭 들롱의 눈빛처럼 강렬하고, 의 눈싸움처럼 다정하고, 국화꽃처럼 향기롭게 필자 마음속에 남아 있다. 첫사랑은 마치 우두 자국과 같다. 어린 시절 우리는 몇 가지 예방주사를 맞곤 했다. 지금은 그럴 리 없지만, 의료기술이 낙후했던 시절에는 우두 주사가 제일 말썽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어깨에 희미한 우두 자국을 낙인처럼 지니게 되었다. 첫사랑도 우리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것은 첫사랑이 아니다. 첫사랑은 대개 일방적이다. 그래서 첫사랑은 늘 안타깝고 수줍어서 다가갈 수 없는 그 어디쯤에 있다. 물론 쌍방통행의 무르익은 사랑이 어쩔 수 없는 저항에 부딪혀 이루지 못한 첫사랑도 있다. 첫사랑은 신이 인간에게 번성의 필요충분조건인 사랑의 마법을 알게 하려고 놓아준 사랑의 예방주사다. 예방주사를 맞으면 병에 걸리지 않듯이 첫사랑의 열병이 진짜 사랑으로 번지면 그것은 이미 첫사랑이 아니다. 어린 시절에는 거의 모르고 지나가버린 정유년을 60년 만에 다시 맞았다. 김용택 시인은 ‘첫사랑’이라는 시를 통해 “인생은, 사랑은 시든 게 아니라네/ 다만 우린 놀라움을 잊었네/ 우린 사랑을 잃었을 뿐이네”라고 읊었다. 정월 아침 새해라는 새하얀 눈길에 첫 발자국을 찍으며 마음속에서 희미해진 첫사랑의 우두 자국을 찾아보자. 풋풋했던 시절 수줍은 첫사랑의 설렘이 사그라져가는 우리 삶의 열정을 되살려줄지 누가 알겠는가.
- 2017-01-31 1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