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루어질 수 없는 첫사랑 그 쓸쓸함에 대한 이야기를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보내주셨습니다.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
누님. 이렇게 불러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이젠 누니~임 하고 소리 높여 불러도 대답 없을 당신에게 띄웁니다.
생각해보면 내가 참 바보 같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누님 앞에 서라면 아마도 그때 그 시절처럼 한없이 작아질 것입니다.
누님 결혼식 날, 축시를 읽어주기로 약속해놓고선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축시를 읽어드리지 못했습니다. 기억나세요? 내가 막 예식장에 도착했을 때 누님은 차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차 안에서 내게 손을 흔들어줬습니다. 그날 내가 왜 늦은 줄 아세요?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기억인데 이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날은 정말 누님이 미웠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고등학교 시절입니다. 내 여동생의 S 언니가 되면서입니다(그 시절엔 S 언니 동생이 유행이었습니다). 동생의 언니이니 당연히 나한테는 누님이 된 것입니다. 누님과 내 나이 차이는 딱 한 살입니다. 누님이 생겼으니 공연히 즐겁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동생을 통해 말로만 듣던 누님을 만난 것은 훨씬 나중 일입니다. 마침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누님과 친척이었는데 조카뻘이었습니다. 그러니 동생으로 인해 누님을 얻고 누님으로 인해 조카를 하나 얻은 셈입니다.
어느 날 친구를 앞세워 누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갔으나 부끄러움이 많았던 나는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선 다음에 만나면 이런저런 말을 해야지 하면서도 그 말들을 지금까지 하지 못했습니다. 대학시험에 낙방하고 실의에 빠져 외가 근처에 있던 직지사에 들어가 한 학기 동안 머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누님 꿈을 생전 처음으로 꾸었습니다. 글쎄요. 나 혼자 간직하고 싶었던 꿈이었지만 지금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누님이 나한테 키스를 해주었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누님이 나한테 해주셨습니다. 그 황홀한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깨어보니 허망하게도 꿈이었습니다. 계속 그런 꿈을 꾸고 싶었습니다. 그날의 꿈이 아쉬워 그 꿈을 꾸었을 때의 환경에 맞춰 여러 번 잠을 자보기도 했습니다만 그 후로는 한 번도 그런 꿈을 꾸지 못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누님은 영문과를, 나는 의예과를 다니던 시절이라 만나는 일이 잦았습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참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가깝게 지내면서도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입 밖에 내지도 못했습니다. 누님을 만나고 나면 즐거움만큼 아쉬움도 컸습니다. 꿈같은 대학 시절을 보내고 내가 모교 병원에서 인턴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누님은 결혼을 한다며 내게 축시를 부탁했습니다. 나는 기꺼이 승낙했고 당일 낭송하기 위해 축시를 하나 지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뭐라고 썼는지 지금은 기억에 없습니다. 시를 쓰고 그림도 그려 시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에 눈물이 떨어져 번져버렸습니다. 축시를 쓰면서 왜 눈물이 났을까요?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은 너무나 명쾌히 그 이유를 압니다.
내가 사랑한 누나를 다른 사람이 채갔기 때문입니다. 누나를 채간 사람에 대한 분함과 그 사람을 따라간 누님에 대한 서운함이 범벅이 되어 눈물로 떨어졌습니다(나이답지 않게 참 바보 같았네요). 예식시간에 맞춰 예식장에 충분히 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에서 우물쭈물하다 시간이 늦어버렸습니다. 핑곗거리는 충분했습니다. “환자가 많아서 그랬습니다”라는 핑계입니다. 그러나 기실 환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분노와 서운함이 밀려와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맞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 분노와 서운함을 직면하기 어려웠습니다. 생각하면 그 뿌리는 깁니다.
내가 대학시험에 낙방해 직지사에서 한 학기 동안 칩거하면서 제일 많이 생각한 사람은 누님입니다. 공부하는 시간보다 누님을 상상하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그냥 보고 싶다는 수준이 아니라 결혼까지 하고 싶을 만큼 많은 시간을 누님과 함께하는 상상 속에서 보냈습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항상 얼굴을 붉혔습니다. 속마음을 누군가에게 들킨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언제나 얼굴을 붉혔습니다. 결혼을 할 수도 있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항상 나를 통제하는 나만의 도덕적 기준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기준이지만 그땐 정말 바보스러웠습니다. 그 기준은 누님하고 어떻게 결혼할 생각을 하느냐는 자문이었습니다. 죄의식이었습니다. 참 바보스러웠지요. 누님은 내 혈연적 누님이 아니잖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님과의 결혼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생각에 얽매였습니다. 누님하고의 결혼이라니…. 그런 불순한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해선 안 된다는 마음이 서로 상충하는 양가감정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한 학기 동안 가슴앓이만 하다 내려왔습니다. 이런 깊은 사연이 있습니다. 결혼식 날 예식장에 늦게 도착한 것이 꼭 환자 때문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턴 과정을 마친 뒤 정신과 레지던트 과정 수련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내가 갓 결혼해 신혼생활을 시작했을 때입니다. 그 뒤 20여 년 동안 나는 누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첫아들이 개혼할 때 누님에게 청첩장을 보냈습니다. 아들 결혼식을 준비하다 불현듯 누님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예식장에서 누님을 20여 년 만에 만났습니다. 반가워서 잡은 손을 한참 놓지 않았습니다. 그날 나는 누님 손을 처음 잡아봤습니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옛날 생각이 나서 혼자 웃었습니다. 이젠 누님을 채간 분에 대한 분노도 누님에 대한 서운함도 내려놓은 지 오래돼서 그런지 그날은 그냥 미소를 짓게 하는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날은 정말 반가웠습니다. 바보스러웠던 내 모습을 생각하면서 누님 손을 오래 잡고 있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군가가 그리운 사람이 있다면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또 세월이 많이 흘렀지요. 인편에 누님이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다시 옛날 생각이 밀려오면서 누님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전화를 드렸지요.
“누님 나 대구 갈 일이 있는데 누님 집에 들려도 돼요?”
“오지 마.”
내 기대와는 다른 답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누님은 아파서 누운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고 했습니다. 체중이 35kg밖에 안 나간다니 그 모습을 상상하기 싫었습니다.
“대신 전화 자주 해.”
나는 그래서 매일 전화를 했고 옛날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다가 네팔로 봉사를 떠났습니다. 네팔에 가 있는 동안 나는 누님이 돌아가시지나 않을까 내내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네팔 봉사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곧바로 누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벨이 한참을 울리는데도 누님은 받질 않았습니다. 불길한 예감에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러곤 전화를 걸 용기가 나지 않아 한동안 걸지 않았습니다. 누님의 부음을 들은 것은 그 후 한참 지나서였습니다. 나는 또 바보짓을 했구나 싶었습니다. 두려워도 참고 전화를 걸어볼걸. 자책하고 또 자책했습니다. 전화를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지금도 내가 그런 바보입니다.
“오늘 당신 딸은 더없이 아름다운 오월의 신부였다오”
‘2017년 5월 28일 오후 5시 더 라움 4층’
전달 중순쯤 날아온 카톡 메시지다. 놀라움과 반가움이 동시에 겹친다.
벌써 일년! 세상사가 무상하다지만 생사의 갈림길은 언제여도 쉽지 않다. 성여사는 20년 지기 필자의 지인이다. 초등 1학년 아이의 학부모로 아파트 이웃에서 시작 된 인연이 결혼식을 알리는 사이로 이어 온거다.
작년 이맘쯤! 필자 여식의 혼례를 무사히 마치고 기분 좋은 피곤함을 즐기고 있었다. 신혼여행을 떠난 신참 부부에게 축하와 당부를 전하며, 축하해 준 지인과 친인척들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느라 분주한 며칠을 보냈다. 그 와중에 받은 부고 소식에 순간 감전되었다.
병고에 투병 중이던 지인이 생을 달리했다는 소식은 몇 번을 들어도 믿기지가 않았다. 결혼 전에 찾아가서 인사를 시킬까 했다. 아니 신혼 여행 다녀와서 시간을 내봐야겠다고 미루어 두었던 자신을 탓하였다. 삼오제 후에도 한동안 충격이였다. 자기 탓이라며 격하게 슬퍼하는 지인의 둘째 딸아이 고백에도 위로의 말을 찾을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보낸 지인과의 마지막 대화가 좋은 사윗감을 찾아봐달라는 것이였음을 늘 부채처럼 지니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일 년이 흐르고 지인의 큰딸아이 혼례에 참석하게 되었다. 단아하게 꾸민 신부대기실에 앉아있는 아이를 보니 급 마음이 내려앉는다. 그 친구가 그립다. 어디선가 분명 보고 있으리라 믿지만 아쉽고 아쉽다. 많이 좋아라 했을텐데...
5월의 신부답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니 울컥한다. 드레스, 신혼집, 가전제품, 만만치 않은 혼례준비를 혼자하느라 애썻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리다. 활짝 웃으며 인사를 전하는 신부의 옆모습에서 제법 어른스러움이 보인다. 화촉점화를 생략했다는 신부아버지의 멘트에 또 한번 빈자리를 떠올리며 안녕을 빌어본다.
아침고요 수목원, 남이섬, 수많은 맛집들.....아이들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무탈무고하게 잘 자라 인생의 반려자를 맞이한 우리 모두의 아이들에게 축복을 빈다.
“성여사! 장모됨을 축하해요!”
아내는 집을 7일씩 비운 적이 거의 없다. 장남인 필자에게 시집와서 아이 둘을 키우고 시어머니를 모시는 와중에도 필자의 네 동생들 학업을 지원하느라 적잖은 고생을 했다. 그뿐인가? 명절 때는 처가가 멀리 있는데다 시집간 동생들이 시차를 두고 인사를 와서 친정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누가 처갓집이 멀수록 좋다고 했는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요즘에는 아들 둘이 다 결혼해서 우리 부부는 젊어서 제대로 누리지 못한 인생 2막의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다. 게다가 아내는 무려 15일간 친하게 지내던 동네 주부들과 동유럽 여행을 함께 다녀왔다. 아내에게 그런 여유가 생긴 건 좋았지만 아내의 빈자리는 너무 공허했다. 아내는 혼자 있을 필자를 위해 이런저런 것들을 미리 준비해놓고 떠나 숙식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아내가 없는 침실은 쓸쓸했다. 특히 밖에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필자를 기다리는 아내 모습이 보이지 않아 허전했다. 마치 아내가 멀리 떠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필자가 직장생활을 할 때 1개월 이상 해외 장기출장도 했고, 1년 이상 파견근무도 했는데 그때 아내와 우리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비로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바쁘게 직장생활을 하느라 아무 생각 없이 지냈는데 시니어의 삶을 사는 지금은 아내가 없는 보름간의 시간이 너무 공허하고 힘들었다.
아내가 없는 보름이라는 시간은 마치 먼 훗날 우리 내외 중 한 명이 저세상으로 갔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예행연습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내의 빈 공간이 그렇게 크고 넓을 것이라고는 이전에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내가 돌아오면 그동안 고생한 세월에 대해 고맙다는 표현을 하고 그만큼 더 잘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내가 동유럽 여행 중에 보내주는 문자와 카톡으로 보내오는 사진은 마치 천국에서 보내주는 선물 같았다. 그렇게 반갑고 기쁠 수가 없었다. 필자도 과거에 회사 다닐 때 아내와 함께 다녀온 북한의 겨울 개골산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주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아직 건강해서 하고 싶은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필자가 직장 다닐 때 퇴직하면 함께 세계여행을 다니자고 아내에게 약속한 적이 있는데 아직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아내는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리다 도저히 현실성이 없다고 보고 동네 친구들과 유럽행을 결심한 것이다.
아내가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 후 혼자서 생활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아내가 여행 중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행복했다. 여행을 함께하지 못한 죄책감 혹은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미안함도 들었다. 앞으로 우리 부부는 이행해야 할 숙제가 남아있다. 아내가 친구들과 서유럽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필자와 함께 간다고 빠진 적이 있기 때문에 서유럽 여행은 꼭 함께 해야 한다.
나이가 들다 보니 시간과 돈이 문제가 아니고 건강이 제일 걱정이다. 요즘 아내는 과거에 비해 몸이 많이 안 좋아졌다. 지난 2개월간 허리 통증으로 힘들어하더니 요즘은 다리가 아파 계속 병원과 한의원에 다니고 있다. 쉽게 낫을 것 같지 않아 걱정이다. 여행 약속은 건강이 허락할 때 빨리 이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몸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필자는 간곡한 화살기도를 하고 있다. 아내가 하루빨리 회복해 옛날처럼 산행도 하고 여행도 함께할 수 있도록 건강을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번에 건강을 회복하면 더 나이 들기 전에 서유럽 여행 약속부터 지켜야 할 것 같다.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주변에서 모두 부러워한다. 시니어들의 버킷리스트에 예외 없이 들어 있는 항목도 여행이다. 여행은 무조건 좋은 것으로 치부하는 분위기인 것이다. 여행 가방을 꾸리면서 과연 여행은 무조건 좋은 것인지 생각해봤다. 물론 마주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감 등은 좋다.
필자는 여행 가방이 간단하다. 늘 메고 다니던 배낭 속에 세면도구만 더 넣는다. 해외여행을 할 때는 여권과 약간의 외화가 추가된다. 여행을 많이 다녀본 결과 얻은 노하우다. 처음에는 책도 여러 권 넣어 갔고 옷도 속옷에서부터 겉옷까지 여러 벌 가지고 갔다. 그러나 막상 힘들게 지고 간 배낭 속 물건들을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책도 어쩌다 시간이 나면 몇 페이지 펼쳐보지만 대부분 그럴 시간이 없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가까워지면 같이 대화라도 나누는 게 자연스럽지 혼자 책을 볼 분위기는 아닌 것이다. 장시간 타고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가져간 책보다는 공짜 영화나 기내 서적을 보는 편이 더 낫다.
발트 3국으로 떠나는 이번 여행은 조건이 많았다. 인솔자가 필자에게 댄스 강습 준비를 해오라는 것이었다. 무도장에도 갈 계획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 일단 드레스코드를 갖춰야 한다. 정장에서부터 구두까지 제대로 갖춰 입어야 입장도 가능하고 춤을 출 때 모양도 난다. 수영복도 가져오란다. 수영장에서 할 이벤트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짐이 늘어났다.
여행, 특히 해외여행은 익숙한 것들과의 잠시 이별이다. 늘 먹던 한식, 늘 보던 정다운 사람들, 몇 분 단위로 점검하던 카톡이나 메시지, 늘 하던 일들을 잠시 중단해야 한다. 물론 새로운 음식, 새로운 사람들, 관광 등 신나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다. 집에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다. 입고 싶은 옷도 편하게 골라 입을 수 있다. 먹고 싶은 것도 늘 가까이에 있다. 그 외에도 자질구레하게 필요한 것들이 손만 뻗으면 다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나면 이런 익숙한 것들을 다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에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지인 중에 장기 계획으로 해외여행을 떠났는데 짐을 분실해서 그냥 귀국해버릴까 하다가 스케줄대로 여행을 다 끝마치고 온 사람이 있다. 처음에는 필요한 것들이 없으니 상당히 불편했는데 적응하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하더라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면 여행 경비도 만만치 않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느끼는 부담감, 출입국에 따르는 불편함과 지루함,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부담감, 한국을 떠나 있을 동안 못하게 될 일이나 미뤄야 할 일 등이 여행의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그래서 여행은 이 모든 불편함과 금전적, 시간적 소비를 기꺼이 감수할 만한 것이어야 가치가 있다. 올해부터 기회만 되면 여행을 떠나겠노라 마음먹었다. 과연 여행은 좋기만 한 것인지 이번 기회에 곰곰이 생각해볼 것이다.
장례에 대한 걱정은 한국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장례비용을 아끼기 위한 방법으로 꽃 장식 하나 없는 작은 장례식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한편에선 시신을 교육용으로 기부하겠다는 신청자가 26만 명을 넘었다. 국내에서도 이 같은 장례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상조 관련 상품이 판매되고 있다. 그러나 상품 구매가 안식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전문가들은 삶의 평화로운 마지막을 위해 장례 상품을 구매할 때는 계약 전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국내 상조시장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일반 보험회사에서 운용하는 상조보험과 상조회사에 판매하는 상조상품이다. 이 두 시장은 엇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크다. 상조보험은 금융상품의 일종으로 보험업법의 규제를 받고 금융감독원이 감독한다. 이에 반해 상조회사의 상조상품은 할부거래에 관한 법률의 규제를 받는 선불식 할부거래로 공정거래위원회가 관리한다.
상품의 특성도 당연히 다르다. 상조보험은 계약에 따른 심사가 있고, 가입 거절이나 보장의 일부 제한이 있고, 자살과 같은 고의적 사망은 보장을 받을 수 없다. 대신 가입자가 사망하면 미납입 보험료 납입 의무가 없다. 이에 반해 상조상품은 가입에 대한 제약이 없는 대신, 사망 후에도 납입 의무가 사라지지 않는다.
보험사 개점휴업, 상조회사는 성장 중
현재는 소비자가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없게 됐다. 보험업계에서 운용하던 상조보험을 대부분 철수했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재무건전성 등을 이유로 보험회사를 선택하고 싶어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보험업계에서는 동부화재, 한화손해보험, MG손해보험이 2015년을 마지막으로 상조보험 판매를 중단했고, 그나마 끝까지 남아 있던 KB손해보험도 지난해를 마지막으로 판매를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메리츠화재의 경우 상품 판매를 중단한 것은 아니지만, 적극적인 가입 권유도 하지 않아 개점휴업 상태인 것으로 확인됐다.
업계에서는 공격적인 마케팅을 바탕으로 한 상조회사의 성장으로 인해 판매가 저조해지면서 손해율이 높아진 것이 판매 중단의 가장 큰 요인으로 꼽는다. 몇몇 보험회사는 다른 보험상품의 특약 형태로 서비스를 전환한 상태다. 조만간 상조보험이라는 단어는 사라질 처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상조회사의 상조상품 가입자 수는 계속 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해 발표한 하반기 상조업체 주요 정보 공개 자료에 따르면 2016년 9월 현재 가입자 수는 약 438만 명으로 6개월 만에 19만 명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중 상당수는 규모가 큰 상위 업체에 몰려 있는데, 전체 가입자의 77.6%가 가입자 수 5만 명 이상인 21개 업체에 가입돼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가입자 수가 자본력과 안정성으로 직결되는 상조업계의 특성상,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100억원 이상의 선수금을 보유한 55개 업체의 선수금은 전체 선수금의 95.2%에 달한다.
가입자가 크게 늘면서 건전성이 확보될 토대는 마련됐지만, 서비스의 질은 아직이라는 평가가 많다. 지난해 10월까지의 1372소비자상담센터 상조 관련 상담건수를 보면 7503건으로 2015년 상담건수(1만1779건)에 비해 감소 추세를 보이고는 있지만 여전히 적은 숫자는 아니다.
가입자 울리는 다양한 꼼수들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국내에서 활동 중인 상조회사는 195개사에 달한다. 이 중에서 옥석을 가릴 방법이 있을까? 전문가들은 찬찬히 살펴보면 안정적인 회사를 구분해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고 조언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공정거래위원회 홈페이지(www.ftc.go.kr)에서 가입을 고려하는 회사의 정보를 확인해보는 것이다. 정보공개 메뉴에서 선불식할부거래사업자를 선택하면 회사 정보를 상세히 볼 수 있다. 이외 검색할 수 있는 정보도 꽤 많다. 기본적인 정보는 물론이고 자산과 부채, 자본금까지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주의 깊게 봐야 할 내용은 선수금 보존비율과 보전계약 체결기관, 그리고 총 선수금이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는 가입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선수금 보전기관에 존재하는지, 납부한 회비 누계액이 정확한지 직접 확인해보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자신의 이름이 보전기관에 기록돼 있어야 폐업 등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할 때 보상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안마의자와 여행상품 등을 끼워서 파는 상품이 많아져 이에 대한 주의도 요구된다. 결합상품의 경우 상품별 판매 대금을 정확히 확인하고, 계약서를 구분해서 작성하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또 여행상품은 판매 주체가 상조업체라 해도 할부거래법의 ‘장례 또는 혼례’에 준하는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이런 결합상품들은 계약 금액도 크고, 계약기간도 길어 문제가 발생하면 골칫거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상조업체의 영업을 대행하는 모집인(상조 계약 중계자)들로 인한 횡포도 주의해야 할 사항이다. 상당수 모집인들은 상조회사 소속 직원이 아닌 대리점 형태의 개인사업자인 경우가 많은데 소비자 입장에선 이들을 구분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계약 과정에서 모집인의 설명에만 의존하지 말고, 계약서나 약관을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청약 철회는 계약서를 받은 날부터 14일 이내에 가능하다.
이밖에 상조상품을 판매하면서 실제 계약은 수의(壽衣) 판매계약으로 체결해 소비자를 기만하거나, 일시불 계약으로 유도해 할부거래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도록 꼼수를 쓰는 경우도 있으므로 대금을 2개월 이상의 기간에 걸쳐 2회 이상 나누어 지급하고 서비스를 받는 거래인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만약 일시납으로 대금을 내거나 계약금을 우선 지불한 뒤 장례 서비스를 받은 후 잔금을 내는 형태로 계약을 하면 법 적용을 받을 수 없어 해약할 경우 환급금을 받지 못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일흔에도 여든에도 아흔에도, 심지어 100세가 되어서도 저세상엔 못 가겠다던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친 적이 있다. 노래는 150세가 되어서야 극락왕생했다며 겨우 끝을 맺는다. 살 수만 있다면 100년 하고도 50년은 더 살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 아닌가. 장수만세를 외치는 100세 시대 시니어들에게 어쩌면 ‘죽음’은 금기어와 같다. 얼마나 ‘사(死)’에 민감하면 건물에도 엘리베이터에도 ‘4’층을 빼어버리기 일쑤인가 말이다. 그런 면에서 유분자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83)은 용감하고 거침이 없다. 1968년 간호사로 도미해 치열한 이민자의 삶을 산 그녀는 은퇴 후 시니어들을 향해 ‘품위 있게 죽자’고 외치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100세 시대, 지금이야말로 죽음에 대해 터놓고 말해야 할 때라고.
일흔에 다시 품은 ‘소망’
미국 땅에서 이민자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지 50년, 반세기다. 그 세월을 지나는 동안 유분자라는 이름 앞에는 재미 한인 간호사의 대모, 코리아타운의 철의 여인, 한인 여성운동가 1호라는 수많은 수식어가 붙었지만 어느 하나 의도한 바는 없다. 매 순간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 있었고 아무도 하지 않았기에 그녀가 했을 뿐이다.
1971년 낯선 타국에서 일하는 간호사들끼리 서로 의지하자는 뜻에서 만든 ‘남가주 한인간호협회’는 지금의 재미간호협회로 발전해 한인 간호사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RN(미국의 국가면허 소지 간호사)이 고소득 전문직으로 이민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직접 한국어 클래스와 예상 문제집을 만들어 한인 여성들의 RN면허 취득을 도왔다. 당시 이 프로그램을 통해 RN자격을 획득한 간호사만 3000명이 넘는다.
1980년대 한인들의 미국 이민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이민 가정에 크고 작은 문제들이 불거지자 가정법률상담소도 만들었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한인 여성들을 위한 인권운동으로 시작된 가정법률상담소는 현재 미주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비영리단체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가족과 친지들을 초청하면서 일으킨 요식업체 ‘비지비(Busy Bee)’도 성공가도를 달렸다. 간호사를 그만두고 그녀가 CEO로 활동하는 동안 ‘비지비’는 캘리포니아에만 14개 지점을 오픈, 탄탄한 프랜차이즈 브랜드로 입지를 굳혔다. 유분자 이사장이 신분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한인들에게 비지비를 통해 영주권을 취득하도록 주선한 일화는 수도 없이 많다.
1997년 조국이 IMF 외환위기로 신음할 때는 한국의 결식아동을 위해 '나라사랑 어머니회’를 만들었다. 이후 ‘어머니회’는 터키, 동티모르, 베트남, 이라크, 북한 등의 불우 어린이를 돕는 글로벌 단체로 성장했다.
실로 철의 여인이라 할 만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느덧 그녀의 삶은 미주 한인 이민의 역사가 되어 있었다.
“거창한 일을 해보자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다 그때그때 절실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하다 보니 좌우명 같은 것이 만들어지더라고요. 남이 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하자. 내가 할 거면 지금 하자. 지금 한다면 기쁘게 하자. 그러다 보니 은퇴도 좀 늦었어요. 일흔이 되던 해, 이젠 좀 편하게 지내라는 딸의 성화에 못 이겨 일을 놓았는데 저는 하나도 편하지 않더라고요. 할 일이 없다는 것,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오히려 불편했어요. 그리고 그때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뒀던 ‘그 일’을 시작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노인들에게 사전의료의향서와 유언장을 쓰게 하는 일이었어요.”
2007년, 소망소사이어티는 그렇게 탄생됐다. 그녀의 나이 일흔에 다시 품은 소망이었다.
그녀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유
간호사라는 직업 때문에 유분자 이사장은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특히 시니어 전문의료시설인 너싱홈에서 근무할 당시 죽음 앞에서 환자와 가족들이 겪는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보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죽음에는 당하는 죽음과 맞이하는 죽음이 있다는 것을.
“당하는 죽음은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극도의 두려움으로 삶에만 집착하지요. 살려 달라 소리치고 나중엔 의료진과 가족에게 분노와 원망을 퍼부어요. 한 번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 가족들과 이야기한 적이 없으니 죽음 이후에도 가족들은 장례 문제를 두고 갈등과 언쟁을 벌이게 돼요. 반면 맞이하는 죽음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가지려 애쓰며 가족들에게 사랑과 감사의 뜻을 전해요. 평소 좋아했던 음악을 듣고 자신이 믿는 절대자에게 기도하죠. 마지막 의료행위와 장례에 관한 뜻도 가족들에게 미리 전해 모든 절차가 평화롭게 진행됩니다. 가족들은 온전히 고인을 추모하면서 서로를 위로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요. 이렇듯 준비하는 죽음은 나와 가족 모두를 위한 일이에요.”
사실 다니는 교회를 중심으로 주변의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에게 유언장을 쓰라고 권하고 다닌 지는 꽤 오래됐다. 당시 세상은 온통 웰빙을 부르짖던 시절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잘 살아보자는데 그녀 홀로 잘 죽는 법을 외치고 다닌 셈이다. 돌아보면 그것이 바로 ‘웰다잉’ 운동이었다. 물론 그때는 그런 단어조차 없었지만.
유언장은 돈 많은 노인들이 유산분배를 할 때나 쓰는 것으로 알았던 한인 노인들은 적지 않게 당황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내민 종이에는 응급상황 시 연명치료는 어디까지 원하는지, 화장과 매장 중 어떤 것이 더 좋은지, 장례식은 어떻게 치르기를 원하며 특별히 원하는 음악이나 글귀가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 있었다. 오래 사시라고 덕담을 해도 모자랄 판에 난데없는 유언장이라니. 재수 없다고 욕도 많이 얻어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은 그다음부터였다.
“유언장을 쓴 분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고 난 후의 삶이 묘하게 자유로워지고 더 소중해졌다는 것이었어요. 건강하게 살아야겠다. 더 의미 있게 살아야겠다 등등. 죽음에 대한 인식이 삶에 대한 인식까지 바꾸어놓은 것이죠. 죽음은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삶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그냥 오래 사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비우고 내려놓음, 그리고 너그러움
여든셋의 그녀는 누구보다 건강하다. 여전히 붉은 립스틱을 멋스럽게 소화하고 적당히 높은 굽의 구두도 문제없다. 요즘같이 화사한 봄날에는 어김없이 연분홍 네일컬러를 바르고 사람들을 만난다. 작은 모임이라도 향 좋은 커피와 샌드위치를 내어놓고 회의 테이블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그녀의 삶 어느 한 구석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어 보인다.
“웰다잉을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이 뭔지 아세요? 바로 웰에이징이에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는 나에게 또 남에게 너그러워진다는 사실이죠. 고백하건대, 나는 소망소사이어티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그리 너그러운 사람은 아니었어요. 완고했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어려워했지요. 무엇이든 원하는 것, 기대하는 것이 많으면 너그러워지기 힘든 거 같아요. 결국 비우고 내려놓음이 키워드죠.”
10년 전, 소망유언서 쓰기로 시작한 소망소사이어티의 사역은 현재 여러 가지 방향으로 영역을 넓혔다.
건강한 삶을 위한 치매 예방과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호스피스 교육, 장례절차 간소화 운동, 그리고 비우고 내려놓는 삶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장기기증과 시신기증 캠페인이 그것이다. 특히 2009년 UC어바인 의과대학과 진행하고 있는 시신기증 캠페인은 대학병원 측도 놀랄 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4명에 불과했던 한인 기증자는 현재 869명에 이르고 있다.
“가장 높은 차원의 내어줌이죠. 하지만 시신기증을 결정하기까지 저 자신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아이들을 설득시키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시신기증이 편안하고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결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2010년 아프리카 차드에 첫 우물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아프리카와 중남미에 302개의 우물을 만들었다. 식수가 없어 오염된 물을 마신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분자 이사장은 직접 원정대를 꾸려 차드까지 날아갔다. 오는 11월에는 네 번째 원정대가 떠난다. LA에서 파리를 거쳐 장장 22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하는 곳, 물론 유분자 이사장도 함께다.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삶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소망소사이어티의 슬로건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마무리’는 결국 한 연장선에 있었다는 것이 유분자 이사장의 고백이다.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마무리
소망소사이어티는 올해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일흔의 나이에 그녀가 비영리단체를 만들었을 때 사람들은 그러다 큰일난다는 반응이었다. 여든셋에도 아프리카 차드에 간다고 하니 이번엔 사람들이 한결같은 질문을 한다. 도대체 건강비결이 뭐냐고.
“글쎄요. 실제로 걷는 운동 말고는 비결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잘 먹고 많이 걷습니다. 밥을 많이 사주는 것도 비결이라면 비결일까요? 어떤 분이 멋지게 늙으려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열라고 하더라고요. 웰에이징이라면 뭐든 잘 따라하는 편입니다(웃음).”
최근 유분자 이사장은 애써 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고 한다. 오래된 전화번호 수첩을 들춰가며 과거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안부전화를 하는 것이다.
“크게 거창한 이유는 없어요. 그저 인사를 나누고 싶더라고요. 낡은 전화번호부에 적힌 이름들을 보면 지나온 시절이 떠올라요. 알게 모르게 내가 섭섭하게 한 사람, 나를 서운하게 했던 사람들이 다 있지요.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안 해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지만 가능한 한 계속하고 싶어요. 이것도 일종의 비움이에요. 이상하게도 삶이 홀가분해지고 즐거워지는 느낌입니다.”
유분자 이사장은 창립 10주년에 대한 칭찬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에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비영리단체인 소망소사이어티를 이끌고 있는 것은 후원자와 자원봉사자, 그리고 함께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언젠가 자신이 떠난 후에도 이들에 의해 비움과 내려놓음의 미학이 전해지고 소망소사이어티가 이어질 것이라 믿고 있다.
“짧은 여행을 한번 하려 해도 준비를 많이 해야 하잖아요. 준비한 만큼 여행이 안전하고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죠. 헌데 막상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여행, 삶과 작별하는 긴 여행에 대해서는 어떻게 준비는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있죠?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는데 두려움 때문에 피한다는 게 많이 안타깝습니다.”
그녀가 웃으며 말한다.
“저는 장례식이 없을 거예요. 죽으면 바로 대학병원에서 가지고 갈 거니까요. 대신 살아 있을 때 멋진 이별파티를 열면 어떨까 계획하고 있어요. 다들 멋지게 차려입고 말이에요. 그 자리에서 좋아하는 시를 하나 낭송할까 합니다. 저는 평생 간호사로 지냈지만 사실 문학소녀였거든요. 하긴 제가 시낭송을 하면 모두가 놀라긴 할 겁니다. 하하하.”
귀천(歸天)_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어쩌면 우리는 유분자 이사장의 이별파티에서 시 한수를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83세의 유분자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 그녀의 삶 어느 한 구석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어 보인다.
부부는 오랜 세월 같이 산다. 그러다가 한쪽이 며칠 집을 비우기라도 하면 학창 시절의 방학처럼 큰 해방감을 느낀다. 하지만 필자에게 아내의 부재는 쾌재를 부를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아내가 심한 복통 때문에 병원을 찾은 것은 7년 전 이맘때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소화불량 정도로 생각하고 동네병원에서 진료를 받다가 정도가 점점 심해져 종합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다. 혈압이 급강하하면서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하루 종일 혈압강압제 투여 등 비상조치를 다한 뒤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이후 수년 동안 소화제 복용과 링거주사로 치료를 받아왔다. 그러나 그러다 나을 줄 알았던 것이 문제였다. 의사로부터 쓸개가 거의 녹아 없어지고 간까지 크게 손상되었다는 검사결과를 듣고 우리 부부는 크게 놀랐다. 당장 담낭 제거와 간 절제수술을 해야 했다. 아내의 ‘장기 부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올 것이 왔구나.’ 가족의 건강을 더 챙기지 못했던 점이 무엇보다 가슴 아팠다.
준비 과정을 거쳐 매우 어려운 담낭 제거와 간 70% 절제수술을 했다. 아내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아들ㆍ딸 가족과 교대로 병실을 지키면서 간병을 했다. 다행히 수술 경과가 매우 좋아 아내는 차츰 건강을 회복했다.
그런데 아내가 집은 비운 동안 집안 살림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장 식생활이 어려웠다. 식사 준비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던 필자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그동안 아내가 잘 챙겨준 덕분에 한 끼도 거르지 못하는 식습관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는데, 아내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전, 은퇴한 친구가 동창 모임에서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은퇴생활을 잘하려면 ‘홀로서기’ 연습이 꼭 필요하다. 고생한 아내에게 휴식시간을 주고, 언젠가 발생할 수 있는 비상사태에 대비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요리가 제일 중요하다.” 마치 당시 은퇴를 앞둔 필자의 처지를 생각해서 말해주는 것 같았다.
진즉부터 아내를 도우면서 가사를 익혔어야 했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병원을 왕복하면서 묻고 배웠다. 밥솥 버튼 누르기에서부터 물 맞추기까지 듣고 외워도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아예 수첩을 들고 받아쓰기까지 했다. 전자레인지ㆍ세탁기ㆍ청소기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었다. 열심히 익힌 덕분에 지금은 거의 전업주부 수준이 되었지만 말이다. 요즘엔 쓰레기 분리수거도 거의 도맡아 한다. “가사를 엄청 도와주시는 남편이시네요.” 본의 아니게 모범가장으로 칭찬을 받기도 한다.
아내는 치료 경과가 좋아서 퇴원을 했지만 건강은 많이 약화되었다. 나이 탓에 간의 절제 부분도 회복되지 않았다. 완전히 사라진 담낭 때문에 소화기능이 떨어져 음식섭취도 제한적이다. 그래서 은퇴 후 적극적으로 아내의 가사동반자로 나섰다. 자원봉사ㆍ취미활동을 열심히 하는 아내에게 가사부담을 덜어주고 있는 점이 뿌듯하다. 아내의 귀가시간을 묻거나 재촉하는 일도 없어졌다. 아내가 오기만을 멀뚱멀뚱 기다리는 일도 없다. 아내가 며칠간 여행을 떠난다고 해도 논의 대상이 아니다. 그럴 때면 오히려 된장찌개를 끓여 놓고 필자의 요리 실력을 음미하는 시간을 마련한다.
돌이켜보니 아내의 와병이 필자에게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다.
아내의 진정한 가사 동반자로 변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아들이 가족사진을 찍어 벽에 걸자고 했다.
그러고 보니 가족사진이 아들 초등학교 졸업 때 세 식구가 함께 찍은 사진과 유명 사진관에서 세 딸 가족이 친정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밖에 없었다. 액자 하나 끼우는 데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예쁜 손녀도 커가니 하나쯤 만들어 걸어도 좋을 것 같아 그러자고 했는데 아들의 속마음이 따로 있었던 걸 알게 되었다. 남편이 몸이 좀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 더 늦기 전에 가족과의 추억을 사진으로 남겨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으니 우리를 기억해주려는 아들의 마음이 기특하기도 했지만,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슬픈 마음이 들기도 했다. 우리를 사진 속에서나 봐야 하는 날이 점점 다가오는 걸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래도 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컸다.
지금 거실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은 친정 식구들과 찍은 사진이다. 액자 속엔 그리운 아버지도 계시고 그 옆엔 젊은 시절의 엄마가 웃으며 앉아 있다. 필자의 아들이 10살쯤이니 필자의 나이가 30대, 엄마는 50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미소를 띠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참으로 젊고 싱그러워 보인다. 이제 80대 중반을 넘어선 친정엄마는 자꾸 다치고 아픈 곳이 많아졌다. 친정엄마의 환하고 젊은 모습을 보니 사진은 역시 건강하고 젊을 때 남겨놔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관에 촬영 예약을 했다는 말을 들은 뒤부터 걱정이 되었다. 벽에 걸어놓고 오며 가며 보게 될 텐데 마음에 들지 않게 나오면 어쩌나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뭘 입어야 할지, 화장은 어떻게 해야 할지, 자잘한 것들이 신경이 쓰였다. 아들은 생긴 대로 나올 테니 미리 걱정하지 말라고 너스레를 떨어 필자를 웃겨주었다. 그래도 거실 벽에 걸 건데 실물보다 잘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필자는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카메라를 준비한다. 친구들은 멋진 경치나 예쁜 사물을 찍는데 필자는 필자 모습이 들어가지 않은 사진은 흥미가 없어 꼭 필자를 넣고 찍어달라고 한다. 필자가 예뻐서가 아니고 사진을 보면 그날의 즐거웠던 감정을 고스란히 돌이켜볼 수 있어서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친구들은 언제부터인가 사진 찍는 걸 싫어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모아놓은 사진도 서서히 처분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들이 죽고 없을 때 자식들이 사진 처리에 부담을 가질 것 같아 미리 없앤다고도 한다. 사진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다.
필자는 10여 권의 앨범에 넣어둔 사진 말고도 커다란 상자 안에 정리하지 않은 사진이 가득하다. 시간 날 때 들여다보면 각 사진마다 특별한 기억들이 딸려 나오고 그때를 회상하며 행복에 잠기기도 하니 사진은 필자에게 기억의 보물창고임이 확실하다.
이제는 놀러 가거나 여행지에 가도 친구들에게 기념사진 찍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눈치 보며 찍어달라고 한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요즘은 사진이 예쁘게 나오질 않는다. 나이 먹은 건 생각하지 않고 왜 이렇게 못생겼냐며 한숨이니 참 철도 없다.
그 전에는 10장 찍으면 10장 모두 맘에 들었다. 그러다 점점 마음에 드는 사진이 줄어들었고 급기야 요즘에는 한두 장 건지기도 어렵다. 그래도 그 한두 장 때문에 필자는 아직도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사진은 잊고 싶지 않은, 즐거웠던 일들을 고스란히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예약한 날 우리 가족은 사진을 찍었다. 손주가 플래시 터지는 게 무섭다며 울어대서 애를 먹었지만 무사히 촬영을 마쳤고 한 달쯤 걸려 단란한 모습의 가족사진을 받았다. 이제까지 걸려 있었던 친정 식구와의 사진을 안방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새 액자를 걸었다. 오래도록 기억될 가족사진을 바라보니 마음이 따뜻해지고 미소가 절로 떠오른다.
“안전벨트 꼭 매세요. 출발합니다.”
2017년 총동문회 상반기 안보 탐방을 진해로 떠난다는 말에 얼마나 들떴는지 잠을 제대로 못 이루고 뒤척이다 일어나 탐방 준비를 했다. 일 년에 두 번 탐방이 있지만 매번 함께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어린 시절 수학여행 떠나는 기분으로 버스에 몸을 실었다.
들떴던 마음과는 달리 긴 여행이어서 슬슬 허리가 아파오고 몸 여기저기가 결려올 때쯤 협력국장이 팔을 걷고 앞으로 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앉아서 할 수 있는 풍선게임과 각종 레크리에이션이 시작되자 우리는 친구들과의 수학여행을 떠올리며 깔깔거리며 맘껏 즐거움을 발산했고, 버스 안은 금세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 새 진해에 도착했고 모두들 바닷가를 배경으로 맛난 점심을 먹은 뒤 대형 수송함과 다목적 군함인 독도함을 찾았다. 광복 및 해군 창설 70주년을 기념하는 해군 관함식이 거행되었던 독도함은 뉴스로 보고 듣던 위대함 그 자체였다. 우리나라를 책임지는 위엄이 느껴졌다.
독도함은 상륙작전을 위한 병력과 장비수송을 하는 기본 임무와 해상 작전을 지휘 통제하는 지휘함의 기능을 수행하는 기동함대다. 1만4,500톤급 대형 함정의 위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독도함에 탑재된 항공기나 화물을 운발할 수 있는 거대한 항공기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배 위로 올라서는 순간, 해군들의 나라를 향한 충성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승만 대통령 별장에서는 이 대통령의 애국의 숨결을 하나하나 느낄 수 있었고, 잠수함 역사관에서는 잠수함의 위엄에 탄성을 지르며 감탄했고 우리나라 안보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각인할 수 있었다. 정원에서 활짝 핀 장미가 우리를 반겨줬다.
마지막으로 해군사관학교에 들러 그 위상에 놀라고 또 바다 위에 떠 있는 거북선을 바라보며 우리나라를 위해 인고의 시간을 보냈을 우리의 선조 충신들의 애국심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영화 의 대사도 떠올랐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죽음 앞에서도 용기를 줬던 이순신 장군의 목소리가 마치 귓가를 스쳐지나가는 듯했다.
오랜만에 만난 동문들과의 서먹함이 애국이라는 단어 앞에서 한마음 한뜻이 되었던 시간이었다. 각자 최선을 다하며 살자는 각오를 다진 뒤 많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달리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출발할 때의 들떴던 마음들과는 달리 애국이라는 단어 앞에서 숙연해져 있었던 탓일까? 동문들은 한참을 말없이 사색에 묻혀 있었다. 그러는 사이 구름을 붉게 물들이는 일몰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누군가 일몰의 아름다움에 대해 한마디 던졌고 그 순간 다 함께 합창을 했다.
“와~ 너무 멋있다~~”
희망의 메시지를 안고 돌아오는 버스는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아쉬움이 가득한 채 다음 탐방을 약속하며 각자의 인생 속으로 돌아갔다. 우리의 인생도 노을처럼 그렇게 아름답게 물들기를 바라면서….
1978년, 필자는 아이 둘을 데리고 남편을 따라 영국으로 갔다. 동경 경유, 알래스카에서 기름 보충, 그리고 비행기를 갈아타느라고 드골공항에서 두 시간이나 기다려야 해다. 그곳에서 만국 인간박람회에 온 듯 온갖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을 봤다.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당시 필자는 호기심이 철철 넘치는 눈으로 다가온 동전 수집가 프랑스 꼬마에게 우리나라 동전을 설명하며 챙겨주기도 했다. 일본은 알면서 코리아는 전혀 몰라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나라라고 간단히 말해줬다.
히드로 공항에 도착해 짐을 찾아 나오니 남편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인가 걱정했는데 차를 타자마자 불평불만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내용인즉슨 곧바로 아프리카 출장을 보름간 가야 한다는 거였다. 어렵게 수속을 밟아 먼 낯선 땅에 내리자마자 듣게 된 청천병력 같은 소리였다. 하도 날벼락 같은 일이어서 그 뒤의 말들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남편이 윗사람에게 밉보였나? 그래도 그렇지 남편만 믿고 따라온 가족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사람 됨됨이가 못된 상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쨌든 남편은 동양인들이 가는 일본 식료품 가게로 가서 쌀과 식료품을 대충 사가지고 와 우리가 머물 곳에 내려놓고는 주머니에서 지폐 한 다발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갔다 올게” 하고 퉁명스럽게 한마디하곤 나가버렸다. 평소 인색했던 남편도 남아 있는 가족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내 잘못도 아니건만 잔뜩 볼멘소리였다. 아이들은 다시 떠나는 아빠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놀기에 바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저녁 준비를 하며 남편이 없는 동안 어찌 보낼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비행기 음식에 질려 있던 아이들은 필자가 해준 밥을 맛있게 먹고 금세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필자는 남편도 없는 낯선 방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슬슬 곁가지가 쳐지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그렇게 스스로를 자극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남편의 부재라는 특별한 기회가 가슴을 뛰게 했다. 무엇보다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필자가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은근 기대가 되었다. 살금살금 필자를 부추기는 이상야릇한 희망이었다. 잠도 안 와 그 밤을 붕붕 뜬 채로 보냈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아이들 손을 꼭 잡고 런던의 하늘 아래를 돌아다녔다. 낯선 이들과 눈이 마주치면 인사도 주고받았다. 바나나와 오렌지가 어찌나 싼지 우리는 마냥 싱글벙글했다. 책방에서는 런던 가이드북도 샀다. 남편은 ‘제까짓 게 어딜 가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꽤 큰돈을 건네고 간 남편 덕에 돈과 자유와 시간을 맘껏 쓰고 즐길 수 있었다.
매일 밤 아이들을 재운 뒤 가이드북을 체크해가며 행복 만들기에 바빴던 날들. 전철을 갈아타며 아이들과 누비던 그 거리들을 잊을 수 없다. 런던에서 윔블던까지 서툰 영어로 대화를 해가며, 아이들이 가고 싶어 하는 공원, 동물원, 장난감 백화점, 미술관, 박물관 등을 빠짐없이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니 ‘15일 간의 남편 부재’는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고 내 멋대로 계획하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던 단 한 번의 기회였으니까. 마치 천국여행에 비할 수 있을 만큼 내 생애 가장 뜻깊고 행복했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