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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바로 시니어 패션 리더
- 낡고 늙음이라는 고정 관념을 끊어내고 시니어 모델로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 두 사람을 만났다. 시니어 모델 최초 서울 패션위크 무대에 오른 소은영(제이액터스·75) 씨와 최근 핫한 모델 김칠두(더쇼프로젝트·64) 씨다. 늦은 데뷔이지만 내공 가득 담아 시니어의 멋과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는 두 사람. 그들만의 패션 포인트와 패션 피플로서의 삶을 엿봤다. 인생, 이러니 참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Q. 패션에 관심이 많았나? 처음부터 옷을 잘 입었던 건 아니다. 어렸을 때 동생이 그림을 그렸는데 옆에 있다 보니 색 배합에 관심이 생겼다. 일본에서 들여온 패션 잡지도 오래전부터 봐왔다. 그러다가 옷에 관심이 많아졌다. 친구들이 치마나 바지를 못 입겠다고 하면 수선집에 가지고 가서 새로운 옷으로 만들어 입었다. 집 앞에 나갈 때 그냥 나가는 법이 없다. 어디를 가도 단정하게 챙겨 입고 나간다. 젊은 시절의 옷도 장롱에 그대로 있다. 가끔 입고 나가면 그때처럼 마음이 젊어지는 느낌이다. 시니어 모델로서 늘 당당하게 옷을 입는다. Q. 모델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일흔두 살에 시작했으니 올해로 4년 차다. 어렸을 때 배우 김지미 씨가 나를 동생같이 예뻐했다. 탤런트가 되고 싶었는데 집안이 엄해서 평생 전업주부로 살았다. 일흔이 넘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고민했다. 집에 앉아서 TV 보고, 친구 만나서 밥만 먹을 수는 없어서 나만의 길을 찾아보려고 했다. 탭댄스와 한국무용을 배워봤는데 적성에 맞지 않았다. 인터넷 검색으로 내 나이에 할 만한 활동들을 찾아봤다. 그러다가 시니어 모델 전문 교육기관인 제이액터스를 알게 됐다. 내가 젊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을까? 초반에 걱정이 좀 됐지만 잘할 자신이 있었다. 정말 열심히 했다. 딱 내 일이다 싶었다. 모델계에 발을 내딛는 순간 내 도전도 시작됐다. 재밌다. Q. 나만의 원포인트 패션 비법이 있다면? 단연 스카프다. 대형 박스 2개에 스카프가 가득 들어 있다. 셀 수 없이 많다. 옷을 입을 때 스카프를 늘 염두에 두고 스타일링을 한다. 액세서리도 원래 크거나 화려한 것을 안 했는데 도전해보고 있다. 깔끔하고 캐주얼한 옷을 많이 입는다. 남들은 못 입어도 나라면 소화할 수 있는 옷이 좋다. 스카프도 매보면서 말이다. 스카프 하나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하니 정말 좋은 패션 아이템이다. 친구들 옷을 가끔 골라주면 친구 남편들이 더 좋아한다. 옷을 고를 때 나이 고려는 안 해봤다. 브랜드도 전혀 신경 안 쓴다. 단돈 1만~2만 원짜리도 내가 입으면 남들이 명품이라고 생각한다. Q. 시니어 모델 최초 타이틀이 있다던데? 2017년 서울패션위크 박종철 디자이너 무대에 섰다. 시니어 모델로는 최초였다. 시니어 모델의 무대 위 워킹과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하다며 오디션에 붙여주셨다. 다 남자 모델이었고 여자는 나 하나였다. 12cm 킬힐을 신고 런웨이에 설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다. 청심환을 먹고 겨우 오를 수 있었다. 지금도 계속 무대에 서고 있다. Q. 체력 관리는 어떻게 하는가? 모델 일을 한다고 해서 급격하게 살을 뺀 적은 없다. 내 생각에 다이어트가 좀 필요하다 싶을 때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운동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체중이 50kg을 넘어본 적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꼭 스트레칭을 하고 한 시간 정도 되는 거리는 무조건 걷는다. 앉았다 일어났다 하면서 하체 근력을 키우는 스쿼트는 아침저녁으로 50번 씩, 하루 100번은 꼭 채운다. 피트니스센터는 성격에 맞지 않아 깨끗하고 좋은 목욕탕을 찾아 일주일에 세 번, 3시간 정도 있다 온다. 물속에서 걷고 스트레칭도 하고 말이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7시 반에는 꼭 잘 차린 아침식사를 한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편이다. Q. 모델로서 도전하고 싶은 스타일은? 시니어 모델 하면 단연 카르멘 델로피체 아닌가. 나는 일흔이 넘었는데도 흰머리가 안 난다. 그녀처럼 해보기 위해 탈색을 했다. 이제 머리를 좀 길러 제대로 스타일링을 해보고 싶다. 국제무대에도 나갈 수 있다면 도전해보고 싶다. 한국을 대표해서 어디든지 가고 싶은 의욕은 많다. 기대나 희망이 없으면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나이 핑계는 대고 싶지 않다. 큰 무대에 서보고 싶어 건강관리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이제는 나를 위해 살 시간이다. 내 인생을 어떻게 끝까지 마무리하느냐, 그것이 중요하다.
- 2019-03-15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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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 남성이 ‘압박스타킹’을 찾는 비밀
-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인천성모병원과 함께 ‘백세 건강 챙기는 가정용 의료기 백배 활용법’을 연재합니다. 시니어가 흔히 가정에서 사용하는 의료기를 제대로 알고 쓸 수 있도록, 재미있는 영상과 함께 찾아갑니다. 영상은 네이버TV 브라보 마이 라이프 채널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감수 김대균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출연 안지현 인천성모병원 간호사 평생 내복 한 번 입지 않고 겨울을 지내왔다는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중년 남성들이 적지 않다. 건강에 대한 자랑도 자랑이지만, 그들에겐 몸에 딱 붙는 속옷이 익숙지 않기 때문. 그랬던 중년 남성들이 달라졌다. 아침마다 부지런히 속옷을 챙겨 입는 이들이 하나 둘 늘고 있다. 그것도 그냥 내복이 아닌 스타킹, 게다가 입기도 까다로운 압박스타킹을 말이다. 시니어가 압박스타킹을 챙겨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지정맥류와 노인성 하지부종 때문이다. 하지정맥류는 말 그대로 다리에 있는 정맥, 피부 바로 밑에 있는 표재 정맥이 늘어나 피부 밖으로 보이는 질환을 말한다. 종아리나 오금 등에 푸른 빛이 도는 혈관이 실뱀처럼 드러나 보인다면 하지정맥류 가능성이 우선 크다. 이 질환은 50~70대 시니어들에 잘 나타나는데, 이유는 혈관이 노화로 인해 탄력이 떨어져 쉽게 확장되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순환되어야 할 혈액이 제대로 돌지 않고 넓어진 혈관에 고이게 되는 것. 혈액순환을 위한 근육의 펌프 기능이 점차 떨어지는 것도 문제이고, 노인비만도 원인이 된다. 특히 오래 서 있는 직종일수록 이러한 증상은 쉽게 나타난다. 만약 당뇨병이 있다면 더욱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혈전이나 피부궤양 등의 합병증이 발생할 수도 있다. 제대로 착용하면 하지부종에 효과 반면 노인성 하지부종은 노화의 과정에서 피부가 처지고 다리의 근육이 쇠약해지면서 생기는 현상으로, 정맥기능이 감소되면서 특징적으로 무릎 이하의 다리에만 부종이 생기는 증상이다. 정맥은 스스로 피를 이동시키지 못하고 주변 근육의 움직임에 의해 발생되는 압력에 의해 순환이 이루어진다. 하지부종은 평소 꾸준한 운동으로 예방할 수 있으나 운동을 할 수 없거나 이미 발생한 상태라면 압박스타킹으로 부족한 근육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 압박스타킹은 다리를 전체적으로 압박해 혈관에 피가 고이는 것을 방지한다. 실제로 스타킹 업계 관계자들은 “여성 사용자의 비중이 높지만, 그래도 증상을 개선하기 위해 제품을 찾는 중장년 남성들도 적지 않다”고 귀띔한다. 특히 시니어의 경우 해외여행 시 2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야 하는 상황이라면 압박스타킹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사용하는 이코노미 클래스의 좁은 자리에 장시간 앉아 있게 되면 다리의 혈액 흐름이 억제되어 자칫 혈전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뇌경색, 폐색전증 등 심각한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는데 압박스타킹은 이를 효과적으로 예방해준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입어서는 곤란하다. 제대로 입지 않으면 되레 혈액순환을 방해할 수도 있고, 지나치게 압력이 센 스타킹을 골라도 병을 더 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의료용 제품이 아니거나 너무 압박력이떨어지는 제품은 피하는 것이 좋다. 의료용 압박스타킹도 신체 사이즈와 용도에 맞게 압력을 제공하므로 유의해서 골라야 최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압박스타킹 선택법은? 의료용 압박스타킹은 형태나 재질, 압력별로 무척 다양하다. 모양에 따라 종아리형, 무릎형, 허벅지형, 팬티형 등이 있고, 재질이나 색깔도 다양하다. 평소 복장이나 용도에 따라 적당한 것을 맞춰 고르고 압력도 증상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전문의와 상담을 통해 증상에 맞는 형태와 압력을 골라야 한다는 것. 특히 30mmHg 이상의 중압 제품은 의사와 상의 없이 무작정 입었다가는 부작용에 시달릴 수 있다. 최근에는 패션을 고려한 제품들도 많이 나와 있어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의료용 압박스타킹의 시중 가격은 3만~15만 원 선. 어떻게 입을까? 압박스타킹의 가장 기본이 되는 착용법은 스타킹을 완전히 뒤집은 후 발끝부터 입는 것이다. 대충 양말을 신듯 발을 집어넣다가는 제품에 손상이 갈 수도 있고, 다리에 균일한 압력을 제공하지 못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a 스타킹을 완전히 뒤집은 후 발끝부터 뒤꿈치까지 위치에 맞게 신는다. b 발목부터는 양손 엄지손가락을 안쪽으로 넣어 스타킹을 잡은 후 차근차근 말아 올린다. c 이 과정에서 주름이 잡히지 않도록 스타킹을 끝까지 펴면서 입는다. 관리는 이렇게 제조사에서는 압박스타킹의 수명을 유지하기 위해 같은 제품을 매일 입는 것보다는 두 개 이상을 준비해 번갈아 입는 것이 탄성을 유지하는 데 유리하다고 말한다. 또 가능하면 착용 후 바로 세탁을 하는 것이 좋다고. 세탁은 미지근한 물에 약간의 중성세제를 풀어 손세탁하되, 잘 헹구는 것이 중요하다. 비틀어 짜거나 세탁기로 탈수시키면 안 된다. 마른 수건 사이에 펴 넣은 후 물기를 제거하고, 빨랫줄이나 건조대에 널지 말고, 그늘 바닥에서 말리는 것이 좋다.
- 2018-12-19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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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재산과 노후자금 지키는 세 파수꾼
- 15년 전에 살던 서울 광진구에 있던 아파트를 올 3월에 팔았다. 6월 4일 잔금 수령 일 등도 관계인들 요청으로 5월 말로 당겨 처리하였다. 현직에 있을 때 계약관계 일들, 법률적인 일들을 오래 처리한 경험이 있어 임차인과의 관계, 새 매입자 또는 매입자가 물색한 새 임차인과의 관계 등 복잡한 4자 관계에서 금전 정산일 들도 모두 정리하고 열심히 처리했다. 직접 모든 것들을 확인하며 발로 뛰며 처리했지만 돌아보니 미진한 점들이 많다. 현직에서 주어진 일들에 성실히 임하며 부모 역할도 열심히 한 후, 집 한 채와 일정 금액의 노후자금을 가진 은퇴자들이 본인의 재산과 일정 금액의 현금을 보호하고 활용하는데 내가 겪은 필수적인 몇 가지 정보와 지식은 상당히 유용하리라 생각되고 최소한 방어적으로 조심하도록 권유하고 싶다. 그것들은 질권, 재산세 부과기준일, 채권양도이다. 1 질권 근대사회 및 자본주의는 근대민법의 3대 원칙인 사유재산권(소유권) 절대의 원칙, 계약자유(사적자치의 원칙, 과실(자기)책임의 원칙에 따라 급속도로 발전했다. 물론,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빈부의 격차와 경제적인 공황 등으로 신의성실의 원칙, 권리남용 금지의 원칙이 보완되었다. 이중 소유권 절대의 원칙은 공산주의와 구분되는 큰 기준이거니와 여기에서 용익물권이라는 지상권/지역권/전세권과 담보물권이라는 유치권/질권/저당권이 나온다. 질권은 시계를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주는 것 같이 목적물을 유지하는 권리와 우선변제를 받는 권리이다. 시계 대신 임대차보증권/지명채권/주식 등 권리질을 잡을 수도 있다. 광진구에 2004년에 마련한 우리 부부의 새 아파트는 정년을 준비하며 잘 이용했고 3자녀들이 수도권에 적응하는 과정에 잘 사용하였다. 정년 후에도 잘 이용하다가 아내가 맞벌이하는 큰딸 부부의 의 두 아들, 즉 외손자들을 봐 줄 사정이 생겨 용인시로 이사 오면서는 전세(임대차)를 내주었다. 내 집같이 아끼며 사는 세입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 보니 4년 전인 2014년에는, 세입자께서 사업자금이 필요하여 은행으로부터 전세자금 3억 5천만 원을 융자받겠다며 절차상 필요한 소유주의 동의를 요청해 왔다. 동의를 해주겠다고 하니 첫 은행에서 전세자금 대출에 필요한 법적 요건인 질권 설정을 해야 하니 필요 절차와 서류의 동의절차를 요청해 왔다. 그러자고 했더니 먼저, 은행을 돕는 어떤 법무법인이 신원을 확인하며 직원을 용인 집에까지 보내 이런저런 서류에 도장을 받아갔다. 그런 다음 첫 융자은행은 친절한 안내문을 보내주었다. “임차인은 임대차보증금을 담보로 제공하고 저희 은행에서 대출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임대차보증금에 대해서는 본 은행이 임차인보다 먼저 반환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동시에 8가지 경우 발생 시에는 반드시 알려달라는 주의사항들을 안내해 왔다. 이 중에는 매매 등으로 소유권이 변경되는 경우와 다른 금융기관의 전세자금 담보대출을 허락한 경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2년이 지나 전세 계약 기간이 연장되었고 3년이 지나자 임차인께서 이번엔 은행을 갈아타면서 전세자금 융자 이자를 줄이는 융자를 하겠다며 동의를 요청해 왔다. 세입자도 60대여서 이자율을 낮추면 노후자금에 여유가 생길 터여서 또 동의해 줬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은행에선 전화확인만 해오고 사람을 보내어 서류 확인 등의 절차는 밟지 않았다. 아파트가 매매되고 6월 초에 매매 잔금을 받으려는데 임차인께서 5월 말에 두 번째 은행의 융자를 갚아야 하니 임대보증금을 맞춰서 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은행에 확인해 보니 임차인 명의의 융자금이 없다고 했다. 급기야는 첫 은행에 아파트 매매 사실과 그전에 임차인이 타 은행에 변경 융자한 사실을 알리며 임대차(전세)보증금을 아파트 소유자는 누구에게 환급할 의무가 있느냐고 확인했다. 그제야 임차인이 2016년 말에 융자금을 상환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무책임했다. 그리고 기어이 2016년 12월 20일 자로 질권 해지 통지서를 직접 받았다. 은행의 질권 설정 서류엔 2018년 6월 초까지 임대차기간이 명기됐었기에 그래야 법률적인 분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5월 말 임대차(전세)보증금을 돌려주면서 임차인과 두 번째 은행에 같이 가서 해당 융자금을 상환함을 직접 확인했다. 그래야 3억 5천만 원의 질권분쟁에서 벗어나고 아파트 매매에 따른 심적 부담을 개운히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선의로 임차인의 편의를 위해 질권 설정을 동의해 준다 해도 엄청난 법적 책임과 직접 발로 뛰는 확인 일들이 반드시 따른다는 것을 인지하고 동의해줄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질권 설정 금액의 두 배 이상 금액에 대한 분쟁과 손실 우려가 발생할 수 있겠다. 2 재산세 부과일 기준 광진구 아파트의 매매 전후의 하자보수비에 대한 매매 당사자들과 기존 임차인 및 새 임차인 간의 하자보수 책임과 비용 분담 등 잔잔한 일들을 다 정리했다고 생각하고 있던 7월 어느 날 해당 아파트에 대한 재산세가 부과됐다. 매매 사실과 5월 말에 잔금 처리된 사실을 관계구청에 알리고 재산세 부과 정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매년 6월 1일 기준으로 재산세 반이 부과되고 9월에 나머지 반이 부과된다고 한다. 우리 부부 아파트의 소유권 변경 등기이전이 6월 1일 이후에 이뤄졌으므로 재산세 부과 정정을 않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9월에 부과되는 것만이라도 새 매입자에게 부과해 달라고 했으나 그것도 6월 1일 기준이라 안 된다고 한다. 근대민법의 3대 원칙 중에 가장 근간이 되는 소유권절대의 원칙에 따르면 소유 없이 재산세를 내는 격이니 고쳐야 한다고 본다. 매년 6월 1일을 기준으로 재산세가 부과되는 것은 다분히 행정편의를 손해를 끼친 것이므로 고쳐져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이런 논쟁과 부담에서 벗어나려면 6월 1일 기준으로 재산세가 부과됨을 알고 특약조항에 재산세 납부자를 명기하거나 소유권 이전 의무 일을 합의하면 되리라고 본다. 혹은 매매대금 협상 시 알고 반영하면 될 일이다. 3 채권양도 20여 년 전 단독주택 2층에서 거주할 때 임차인이 1층 몇 칸을 얻어 우유 배달업을 하고 있었다.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사업이 성장일로이더니만 어느 날 전세보증금을 양도하고 우유 회사가 양수인이 되었음을 통보해 왔다. 급기야는 임차인이 이사하겠다고 하면서 전세보증금 반환 준비를 해달라고 해왔다. 채권양도양수 통보를 받은 후 수년이 지나서 잊어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나서 법정관리가 되고 회사정리법에 따른 복잡다단한 정리채권 확정의 소송들을 진행하던 때여서 양도채권의 효력을 알고 있었다. 받을 채권, 즉 금전에 대하여 압류, 임시압류, 추심명령, 이전명령 등 소위 법적 보전처분들이 뒤엉켜 있어도 채권양도가 통지된 이후엔 양도된 채권이 가장 효력이 강하여 이후의 보전처분들은 전혀 힘을 못 쓰는 것이었다. 만일 임차인에게 전세보증금을 내줬다면 우유 회사에 동일금액을 이중 반환할 법적 의무가 생기는 것을 알았기에 정중히 이해시키고 우유 회사와의 직접정산을 권유했다. 이렇게 질권, 재산세 부과 기준일, 채권양도 세 가지만의 기본 개념과 법적 효력을 잘 알고 구체적인 사례에 대처한다면 젊었을 때 오래도록 애써 모은 각자의 재산과 노후자금은 예기치 않는 손실이나 법적 분쟁을 막을 수 있는 파수꾼이 되리라고 본다.
- 2018-09-0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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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농·귀촌이 아니라 ‘이도(離都)’
- 도시에 살다 농촌으로 삶터를 옮기는 것을 귀농 또는 귀촌이라고 한다. 농촌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농사를 지으러 가는 것은 ‘귀농’이고, 고향을 찾아가는 것은 ‘귀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시골을 찾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가는 것보다 여유를 즐기기 위해 이동하는 경우가 더 많다. 또한 자신이 살던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터전을 찾아가는 사람이 늘었다. 전원생활이 목적인 사람들은 연고는 없지만 새로운 삶의 터를 마련하기 위해 시골을 찾는다. 1960~70년대 산업화의 바람이 불어왔을 때, 농촌에서 지내던 많은 사람이 도시의 새로운 일자리와 희망을 찾아 자신이 살던 곳을 버리고 아무 연고도 없는 도시로 떠났다. 이것을 ‘이농(離農)’이라 했다. 이농의 사전적 의미는 ‘농민이 다른 산업에 취업할 기회를 갖기 위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그곳에서 살기 싫어 떠나는 것, 즉 희망을 찾기 위해 터전을 새로 마련하는 것은 ‘이도(離都)’라 표현해야 맞다. 귀농이나 귀촌처럼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터전을 찾아 도시를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시에서 가까워 교통 여건이 좋고 경치가 빼어난 곳에는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 아니라 ‘이도’해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이들로 인해 마을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강원도나 충청도처럼 수도권과 경계하는 지역을 둘러보면, 화전민이 살다 버리고 간 땅을 개발해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사람이 많다. 도시생활로 넉넉해진 사람들은 먹고살기 힘들어 버리고 갔던 땅을 개발해 집을 짓고 여유롭게 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귀농·귀촌자가 아니라 새로운 삶과 희망을 찾아 농촌으로 오는 사람들, 즉 이도해온 사람들이다. 작고 소박해진 전원생활 이렇게 도시에서 살다 시골에서 살고 싶어 내려오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움직임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전원생활의 목표가 작고 소박해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예전과 같이 별장형 전원주택을 짓는 대신 노후생활의 대안으로 귀농·귀촌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품도 많이 빠졌다.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되면서 노후를 어디서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가가 매우 중요해졌다. 또 어디서 사느냐에 따라 필요한 노후자금 규모도 달라진다. 노후생활비를 줄이려면 아무래도 도시보다는 시골에서의 삶이 유리하다. 하지만 경치나 감상하고 좋은 공기, 맑은 물이나 마시며 살겠다는 꿈은 없다. 폼 잡고 사는 게 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현실적인 투자를 하게 되고 그 결과 화려한 정원이 있는 집이 아니라 작고 소박한 집을 찾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도시를 버리지 않는 귀농·귀촌자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도시를 영원히 떠나 농촌에 정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도시와 농촌을 오가며 이중생활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전원생활을 꿈꾸는 마음이 있어도 대다수 사람은 도시를 떠날 입장이 못 된다. 아직 현역으로 활동하거나 은퇴할 나이가 아니어서 가족의 반대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살 자신이 없고 두려운 사람도 있다. 그동안 살아왔던 도시를 떠나는 것이 이래저래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도시에서 절반 살고 시골에서 절반 사는 반쪽 전원생활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 시골생활에 자신이 붙거나 기회가 만들어지면 그때 도시를 떠나도 늦지 않은 것이다. 최근 주말주택, 세컨드하우스가 유행처럼 번지는 이유다. 도시를 떠나지 않고 시골생활을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우다 보니 무리한 투자를 하지 않는다. 다랭이논 한 뙈기, 컨테이너 박스 하나로도 좋은 집과 정원이 될 수 있다. 수익형 전원생활 단순히 자연이나 즐기자는 목가적 귀농·귀촌도 많이 줄었다. 농촌으로 내려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른바 귀농·귀촌 창업이 그것이다. 앞으로 ‘수익형 전원생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아질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생활비가 넉넉하다면 주말형 또는 별장형 구조의 집을 짓고 유유자적 사는 게 큰 부담이 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한다. 은퇴는 빨라지고 수명은 점점 늘고 있다. 직장에서 퇴직을 한 후에도 30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하는데, 이 시간을 도시에서 보내든 시골에서 살든 수입이 있어야 한다. 은퇴자들의 가장 큰 화두다. 수익 없이 살 수 있는 은퇴자들은 별로 없다. 은퇴자가 늘고 귀촌자가 많아지면 수익형 전원주택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날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미 펜션에서 증명됐다. 시골에서 살며 민박집을 운영해 수익을 내는 것이 펜션이다. 지금이야 시들해졌지만 불과 5년여 전만 해도 전원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펜션은 인기 창업 아이템이었다. 전원주택도 짓고 수익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장을 하든 펜션을 하든 전원카페를 운영하든 전원생활을 통해 수익을 낼 수 있어야 시골로 이주한 은퇴자들의 노후가 윤택해질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는 시니어에게 최근 전원주택 시장에 나타난 수익 모델을 하나 추천할 수 있다. 바로 ‘임대형 전원주택’이다. 펜션처럼 단기 임대의 형태는 이미 큰 시장이 됐다. 하지만 월 단위나 연 단위로 임대하는 전원주택 시장은 아직 없다. 작업, 힐링, 요양을 위해 전원주택을 장기 임대하려는 수요가 점점 늘고 있지만 체계적이지 못하다. 개인들끼리 알음알음 전원주택 임대가 행해지고 있는데 도심의 원룸이나 아파트 임대와 비교해볼 때 수익률이 매우 높다. 특히 놀리는 땅이 있다면 시도해볼 만하다. 물론 토지부터 구입해야 한다면 투자비가 크겠지만 토지가 있다면 가볍게 접근해볼 수 있다. ‘시골 체질’인지 고민해볼 것 마음은 귀농·귀촌하고 싶은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생각해야 할 것도 두려운 것도 많다. 하지만 마음이 있다면 지금이 바로 결정할 때다. 당장 실행해야 한다. 서둘다 금전적인 손해를 본다 해도 전원생활을 통해 얻는 것이 더 많다. 좋은 땅을 고를 수 있는 기회의 폭이 먼저 결정한 사람에게 더 넓다. 하루라도 일찍 시작하면 정착도 빠르다. 정원에 나무를 하나 심어도 시작이 빨랐으니 그만큼 더 자라 꽃도 빨리 보게 되고 텃밭의 작물도 먼저 여문다. 실제로 귀농·귀촌해서 사는 사람들 중 ‘더 빨리 오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이 많다. 어차피 시골에서 살 마음이 있다면 서두르는 게 좋다. “산속에서 심심하게 사는 것은 아닐까? 자녀들 혹은 친구들이 자주 올까? 아프면 병원이 멀어 위험할 텐데, 시장 다니기도 힘들고, 교통도 불편하고, 뱀이나 벌레도 많고, 또 시골 사람들 텃세가 만만치 않다는데 왕따 당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걱정들은 살다 보면 ‘괜한 걱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바로 “내가 시골에서 살 수 있는 체질인가?”에 대한 판단이다.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딱 내 체질이야!” 하는 답이 나와줘야 한다. ‘강남 스타일’이 시골에서 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만약 마당의 풀을 뽑고 화단을 가꾸고 나무를 심고 집 고치는 일이 재미있다면 ‘시골 체질’이다. 당장 시골생활을 해도 문제없다. 그러나 별장 같은 집을 짓고 잔디 위에 파라솔 펼치고 친구들 불러 바비큐 파티나 하고 커피 마시는 상상이 좋으면 얼마 못 가 다시 도시로 올라와야 한다. 이런 사람은 ‘도시 체질’이다. 어떤 시골생활을 꿈꾸는지를 잘 고려해봐야 한다. ◆ 성공적인 시골 정착을 위한 8가지 단계 ◆ 01 결심 | 귀농·귀촌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결심이다. 농촌으로 이주해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농업에 종사하겠다는 생각으로 귀농을 준비한다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농촌과 농업에 대한 충분한 이해다. 도시 회피식, 목가적인 생각만으로 결정을 내린다면 위험하다. 스스로 농촌에서의 삶을 상상해보고 즐겁겠다는 생각이 들 때 옮겨도 후회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농촌을 동경하고 좋아하는 마음만 갖고 귀농·귀촌을 시작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02 가족 동의 | 귀농·귀촌해 사는 남자들이 이주할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아내 설득이다. 가족의 동의를 얻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가족들과 함께하는 귀농·귀촌이라야 성공할 수 있다. 특히 귀농은 배우자의 동의가 필수다. 정신적인 동료이고 노동력 도움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은퇴 후 귀촌하는 사람들은 터를 잡을 때도 자식들 잘 올 수 있는 곳, 집을 짓더라도 자식들이 편히 쉬다 갈 수 있도록 방을 만들고 집을 키운다. 그러나 이 경우 대부분 후회를 한다. 자녀들이 부모의 생각만큼 자주 찾아와주지 않기 때문에 계획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큰 방도 비게 된다. 이를 명심하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03 자금 계획 | 빠듯한 예산으로 귀농·귀촌 계획을 세우면 실패하기 쉽다. 농업시설을 마련하고 기술을 익히는 과정에서 예상했던 비용을 훨씬 초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때 자금이 모자라면 그동안 진행했던 것들마저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특히 땅을 사고 집을 짓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비용들이 발생한다. 토지 인허가 및 공사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고 변수도 많다. 04 할 일 선택 | 귀농·귀촌한 후 할 일을 정하는 것은 진행 단계 전반에서 가장 중요하다. 귀촌일 경우에는 꼭 수익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귀농자라면 어떤 작목을 선택할까를 정해야 한다. 작목은 가족의 노동력과 자본능력, 기술수준 등에 따라 결정한다. 어떤 농사를 짓느냐에 따라 준비해야 할 토지의 규모가 다르고 거기에 알맞은 농기계도 필요하다. 또 작목 종류에 따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작목을 선택할 때는 지역별 특산품을 고려해보는 것도 좋다. 각 도의 농업기술원이나 시군 농업기술센터를 이용해보자. 작목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05 기술 습득 | 작목을 선택했다면 재배, 가공, 홍보 마케팅 등에 대한 기술과 노하우도 필요하다. 영농기술은 다양한 귀농 프로그램을 통해 교육받을 수 있고 선진 농가를 견학, 체험, 연수할 수도 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농어촌 지역에 정착한 귀농인에게 현재 재배 작목 등의 심층 연수 또는 이주 초기 관심 있는 분야의 작목 재배기술 등을 지원한다. 선도농업인(농업법인) 또는 성공 귀농인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영농 분야 등에 대한 기술 습득, 정착 과정, 상담 멘토 등이 그것이다. 06 정착지 결정 | 정착지는 자신이 선호하는 지역이나 정해진 지역이 있다면 문제가 없다. 할 수 있는 일, 작목을 찾는 일은 그다음의 일이다. 하지만 정해진 지역이 없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선택한 후 정착지를 결정해야 한다. 귀촌이라면 선택의 폭이 넓겠지만 귀농의 경우 선택한 작목에 맞는 지역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시설원예와 같은 일은 도시 근교가 적당할 것이다. 벼농사, 채소, 밭농사는 평야 지역이 유리하다. 과수, 약초, 축산을 한다면 당연히 준산간 지역을 선택해야 좋다. 정착하기 위해서는 생활할 주택의 인허가를 비롯해 교통 여건, 생활 여건, 이웃 등도 검토해야 한다. 07 농지 및 주택 마련 | 농지는 영농 형태에 따라 규모나 토질, 물 사용 여건 등을 고려해서 구입한다. 농업용으로 구입할 때는 ‘국토의 계획과 이용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농림지역’ 농지법 상의 ‘농업진흥지역’의 농지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만약 주택용, 펜션, 전원카페, 식당, 숙박시설 등 다른 용도로 사용할 때는 ‘국토의 계획과 이용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관리지역’이라야 한다. 주택을 마련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기존 주택을 구입 또는 여유자금이 부족하다면 임대를 고려한다. 땅을 사서 신축하거나 빈집을 수리해 사용할 수도 있다. 이때 과도한 욕심은 금물. 주택에 무리하게 투자해 후회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농촌의 빈집은 대체로 간단한 수리만 해서는 사용하기 어렵다. 예상보다 비용이 많이 들기도 하니 잘 점검해야 한다. 아울러 집이 들어서 있는 땅이 대지인지, 땅 주인과 집주인은 같은지 등도 꼼꼼히 확인해보자. 08 운영 및 생활 | 모든 준비를 끝내고 이주를 했다면 드디어 전원생활의 시작이다. 이때 여유자금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다면 수익을 위한 경제활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당장 농사를 지어도 적게는 6개월에서부터 몇 년을 투자해야 돈을 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귀농·귀촌에 성공하려면 기술, 여유자금,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 2018-07-27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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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화와 영양을 고려한 ‘실버 푸드’ 시장이 뜬다
- 살아가는 데 음식은 꼭 필요하다. 요즘은 과잉 섭취 때문에 고민이거나 다이어트가 큰 관심사다.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집 안 물건을 버리는 것뿐만 아니라 간소하게 먹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TV를 틀면 넘쳐나는 쿡방, 먹방 프로그램. 과거의 요리 프로그램은 전문가가 나와 요리법을 시연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엔 음식점을 컨설팅해주거나 여행과 결합해 외국의 맛집까지 탐방하는 등 계속 진화 중이다. 그만큼 시청자들이 미식과 여행에 관심이 커졌다는 방증이다. 먹는 즐거움이 영원히 가능하면 좋겠지만, 시니어는 노화로 인한 신체 기능 저하로 식생활에 제한이 생긴다. 그래서 최근 고령화 사회가 심화되며 시니어를 위한 식품이 크게 주목받고 있다. 시니어 식품 시장 규모 갈수록 늘어 바나나, 두유, 두부, 청국장의 공통점은? 고령화로 매출이 성장하고 있는 식품들이다. 1인 가구와 고령화로 간편식을 찾는 인구가 많아지면서 식품의 매출 판도도 달라지고 있다. 과일도 깎지 않고 씻기만 해서 간편하게 먹는 과일이 인기다. 유통회사나 식품 관련 기업들은 이런 흐름을 파악하고, 매장 진열은 물론 시니어 식품 시장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현재 65세 이상 인구가 7명 중 1명인 고령화 사회다. 또 황혼이혼이나 사별로 인한 노인 1인 가구도 늘고 있다. 살아 있는 동안 삼시 세끼는 필수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시니어 식품 시장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지고 있다. 기업이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 시니어의 식생활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의 유명한 욕구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하위 단계에서 충족되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즉 가장 하위 단계인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다음 단계인 안전 욕구가 충족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우리나라 노인들의 식생활 사정은 심각해 보인다. 2015년 질병관리본부가 노인 287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 6명 중 1명은 영양 섭취가 부족했다. ‘영양 섭취 부족’은 1일 권장 열량 섭취량(남성 2000kcal, 여성 1600kcal)의 75% 미만에 해당하고, 칼슘 등의 섭취량이 평균에 못 미치는 경우를 말한다. 칼슘은 전체의 약 82%, 지방은 약 71%나 부족했다. 단백질이 부족한 노인도 약 31%나 됐다. 이렇게 영양이 부족하면, 신체의 대사기능이 저하되고 면역체계에 이상이 온다. 최근 한 기업에서 40~80대 부모를 둔 자녀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절반이 끼니를 거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귀찮다(26%), 소화가 안 된다(22%)는 이유로 식사를 하지 않았다. 시니어는 연령대에 따라 건강상태도 다르다. 스스로 식재료를 준비하고 식사를 챙길 수 있는 경우는 그나마 낫다. 노화로 신체 기능이 저하되어 혼자 식사를 챙기지 못할 경우가 문제다. 나이가 들면 왜 식사하는 데 불편함을 겪게 되는 걸까. 그것은 몇 가지 신체 변화 때문이다. 우선 미각의 변화다. 혀에서 맛을 느끼는 미뢰가 크게 줄어들면서 미각이 둔해지는 탓에 짜거나 달게 먹게 되어 당뇨와 고혈압 위험이 커진다. 그다음으로는 저작(咀嚼) 장애다. 치아와 잇몸 손상으로 음식 씹기가 힘들어 영양 섭취가 어려워진다. 또 연하(嚥下) 장애(삼킴 장애)로 음식물이 기도나 폐로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소화액이나 연동운동 감소로 인한 소화 장애도 생긴다. 이러한 여러 장애 때문에 고령자를 위한 별도의 식품과 서비스 개발이 시급한 것이다. 실버 푸드가 발달한 일본 고령친화산업 진흥법에 따르면, 고령친화식품은 ‘노인을 위한 건강기능식품 및 급식 서비스’로 정의된다. 건강기능식품, 특수의료용도식품, 두부류 및 묵류, 전통 및 발효식품, 인삼과 홍삼 제품이 여기에 포함된다. 농림축산식품부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고령친화식품 시장 규모는 출하액 기준 2011년 5104억 원에서 2015년 7903억 원으로 약 55%나 급증했다. 2015년 국내 전체 식품 시장 규모로 보면 아직 1.5% 수준으로 비중이 미미하지만, 고령화 속도로 볼 때 급성장이 예상된다. 같은 보고서에서 소비자 조사 결과를 보면, 고령친화식품은 영양분과 소화 용이, 저작과 연하 용이 순으로 중요했다. 또 60세 이후 건강한 간식을 챙겨 먹거나, 영양보다는 소화가 잘되는 식품의 소비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미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 일본은 시니어를 위한 식품과 서비스 산업이 크게 발달해 있다. 일본은 전체 인구 4명 중 1명이 65세 이상인 노인이다. 이들을 위한 고령친화식품을 일본에선 개호(介護)식품이라 표현한다. 일본개호식품협의회는 유니버설 디자인 푸드(UDF, Universal Design Food)로 식품의 굳기와 점도를 고려해 규격에 맞춘 식품을 판매한다. 유니버설 디자인 푸드는 쉽게 씹을 수 있는 1단계부터 삼킬 수 있는 4단계까지 구분된다. 이후 2014년부터 개호식품은 스마일케어식(Smile Care Foods)으로 명칭을 바꿔 판매 대상을 넓혔다. 개호 예방을 위한 식품부터 무스나 젤리 상태의 식품까지 범위도 넓다. 이런 음식들은 외관상으로는 차이가 없이 물성을 변화시킨다. 심화되는 고령화, 실버 푸드 시장 온다 나물 종류의 채식을 좋아하는 시니어도 있고 육식을 선호하는 노인도 있다. 또 만성질환이 있는 사람은 식단 조절이나 영양 관리를 해줘야 한다. 그래서 고령자를 위한 식품은 만성질환을 위한 건강식, 끼니를 챙기기 귀찮은 사람들을 위한 간편식, 저영양 상태를 보충하는 영양식, 건강이 악화된 사람의 간병식 등 세분화되어야 한다. 신체가 쇠약해져 이동이 어려우면 식재료를 사러 다니기도 힘들다.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구매 난민, 쇼핑 난민이 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위한 편의점이 진화하고 있다.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배달하고 노인을 위한 식품을 판매하거나 이동 점포까지 운영한다. 또 상품배달뿐 아니라 고령자 혼자서 하기 힘든 전구 교체 등의 집안일까지 지원해 인기다. 우리나라도 최근 농림수산식품부에서 고령친화식품 한국산업표준(KS)을 제정했다. 식품기업들도 고령자를 위한 식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요즘 시니어는 미식과 간편식을 즐긴다. 고령친화식품 시장은 이제 막 걸음을 뗀 상태이지만, 시니어가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식품과 서비스가 많아지길 기대한다. 이나영 시니어 전문 칼럼니스트 한국외국어대학교 졸업. 차의과학대학교에서 고령친화산업학을 전공했다. 한화그룹과 신한은행에서 근무했다. 현재 경향신문에서 고령사회 담당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며, ‘이나영의 고령사회 리포트’를 연재하고 있다.
- 2018-07-05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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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료 절감의 차량 운행 요령
- 연료 값이 점차 상승하고 있다. 주행거리가 많은 경우 가계의 부담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연료를 절감할 수 있는 운행 요령에 대해 알아봤다. 시동 전 1. 목적지 정보는 미리 준비 목적지 경로에 대한 사전 준비 없이 여행을 떠나게 되면 주행할 거리가 불필요하게 많아지게 되고 이럴 경우 주행 중 지도를 보며 목적지를 찾게 되므로 위험하기도 하고 시간 낭비까지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여행 전 미리 지도를 점검해 목적지까지의 경로를 잘 숙지하고 운행한다. 얼마 전 뉴스에서 운전 중 내비게이션을 조작하다 큰 사고가 난 사건을 봤는데 본인의 과실이므로 보험 전액을 받을 수 없다. 2. 무게와 연비의 관계 차에 불필요한 짐을 많이 싣고 다니면 연비에 악영향을 주게 된다. 트렁크에 있는 불필요한 짐을 정리해 차를 가볍게 하는 것이 연비 개선의 첫걸음이다. 차에 있는 짐을 반드시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분류해 불필요한 물건들은 집에 보관하고 꼭 필요할 때만 가지고 다니도록 한다(삼각대. 공구. 예비 타이어는 필수 지참). 3. 타이어는 적정 공기압으로 유지 타이어의 공기압도 연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공기압이 부족한 상태로 주행하면 연료가 필요 이상으로 많이 소모되므로 적정 공기압 유지는 필수다. 차량에 장착된 타이어는 기간이 오래 경과하면 특별한 사고가 없어도 서서히 압력이 줄어들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차량별 타이어의 규정 압력은 약간씩 다르다. 연비를 좋게 한다고 과다한 압력을 주입하면 승차감이 떨어지므로 반드시 규정 압력을 준수한다. 시동 후 1. 불필요한 공회전은 피한다 시동을 걸어놓은 채 일을 처리한다든가 사람을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공회전을 오래하면 연료 소비가 많아질 뿐 아니라 환경오염을 가중시키므로 가급적 삼가는 것이 좋다 2. 급가속, 급제동을 피하자 가속 페달을 급히 밟을 때 연료 소비 역시 급격하게 늘어난다. 급가속을 계속하면 연료가 추가로 소모될 뿐 아니라 엔진에 무리가 간다. 급가속과 급제동을 번갈아가며 조작하면 연료 소모는 물론 브레이크 패드의 조기 마모를 가져오므로 주의해야 한다. 연료 절감에 가장 경제적인 운전은 ‘급출발, 급가속, 급정지’ 등 이른바 3급에 대한 방지다. 상황에 따라 연료가 2배 이상 소모되기도 한다. 연료 소모뿐 아니라 ‘급’ 자가 들어간 운전을 하면 매우 위험하다. 급출발, 급가속, 급정지, 급회전, 급차선 변경 등 하나같이 안전운전에 장애가 되는 나쁜 습관이다. 다른 차에 혼동을 일으켜 사고를 유발하기도 하고, 에너지 낭비도 상당하다. 차량 사고를 방지하는 기본 운전은 다른 차량에 내 차의 위치와 추후 운전 방식을 알려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방향지시등이나 비상등으로 다른 차량에 내 차에 대한 예측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차선을 변경하거나 내 차의 정지를 알려주는 비상등도 켜지 않는 운전자가 많다. 이럴 때 다른 차량이 능동적인 대처를 하지 못해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앞뒤 차의 간격이 좁다 보니 앞차에 사고가 발생하면 몇 대가 연이어 충돌하는 큰 사고로 커진다. 예방과 안전은 한 템포 느린 운전과 여유다. 앞서 언급한 ‘급’ 자가 들어가는 운전을 지양하면 교통사고도 줄이고 연료도 크게 절약할 수 있다. 3. 정속 운전 = 좋은 연비 흔히 시속 60~80km를 경제속도라 한다. 차량별로 약간씩 다르지만 이 속도 내에서 운행하면 가장 높은 연비가 나오기 때문이다. 가속 페달을 고정해 시속 60~80km로 주행하면 연비는 더욱 좋아져서 같은 거리를 급하게 운행했을 때보다 연료 소모가 월등히 준다. 반드시 경제속도가 아니라 해도 90km, 100km와 같이 규정 속도를 정해 정속으로 주행하면 안전하고 알뜰한 운전을 할 수 있다. 4. 타력 운전과 엔진 브레이크 엔진 브레이크란 내리막길에서 주행 속도보다 낮은 기어를 한 단계씩 서서히 낮게 선택하며 가속 페달 누름 상태를 가감해 동력 손실을 줘 제동력을 얻는 것을 말한다. 고속 주행 중에는 관성과 중력을 이용한 타력 운전을 하고 내리막을 운전할 때는 엔진 브레이크를 사용하자. 5. 예측 운전 주행 중 신호등이 적색에서 청색으로 바뀌는 시간을 예측해 운행하는 것을 말한다. 서행 시에는 뒤에 오는 자동차의 주행을 방해하지 않는 운행이 필요하다. 차가 멈췄다가 출발할 때는 연료 소모가 많다. 6. 오랜 정차 중에는 기어를 N으로 한다 신호 대기를 하거나 잠시 정차할 때는 괜찮지만 오랜 시간 정차할 때는 기어를 N으로 위치해야 변속 레버를 보호할 수 있다. 또 수동 차량의 경우 불필요하게 클러치나 브레이크 페달에 발을 올려놓으면 연료 소모는 물론 브레이크 라이닝 수명이 단축되므로 주의를 요한다. 7. 에어컨 사용은 효율적으로 에어컨을 작동시키면 압축기가 작동하기 때문에 연료 소모가 많다. 고속도로를 주행할 때 연료가 아깝다고 에어컨을 켜지 않고 창문을 열고 달리면 압력 때문에 자동차에 힘이 필요하게 되고 그만큼 연료 소비가 많아진다. 이럴 때는 에어컨 사용이 오히려 경제적이다 8. 평상시에는 연료를 반으로 채우며 겨울철에는 빙결을 방지하기 위해 가득 채울 것 가솔린 1L의 무게는 0.71kg 경유는 0.8kg이다. 연료의 무게로 인한 연료의 소모도 크다. 자동차에 경고등이 들어올 때 기름을 넣는 경우도 있는데 경고등이 들어올 때까지 타면 자동차 연료 펌프의 수명을 단축시킨다. 따라서 경고등이 켜지기 전에 주유를 하는 것이 자동차 수명을 연장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경고등이 들어올 경우 차종마다 약간 다르지만 20~30Km까지 운행이 가능하다. 하지만 연료의 찌꺼기가 연료 순환 중에 차량 성능을 저하시킬 수 있다. 9. 차계부를 만들자 가정에서 가계부를 사용하면 불필요한 낭비를 없애고 알뜰한 살림을 할 수 있듯이 자동차도 차계부를 만들어 차량 관리 및 연료 주입량 등을 기록하고 어떤 운전 방법이 경제적인가를 월별로 비교하면 연료 절감법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엔진오일이나 다른 소모품 교환, 즉 스파크 플러그 등 기간이 경과하면 교환 날짜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차계부 기록은 반드시 필요하다.
- 2018-05-29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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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비 건강 정보보다 내 몸 공부가 먼저입니다”
-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 귀가 닳도록 듣던 말이다. 세월이 갈수록 이 말이 실감 나는 것은 나이 듦의 증거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강건한 정신, 건강한 육체를 유지할 것인가. 건전한 사회에서 어른으로서 중심을 잡는 비결은 무엇인가. 이 화두를 놓고 심혈관 세계적 권위자로서 대중을 위한 건강전도사로도 활약 중인 엄융의(73)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를 만나봤다. 대학로에 있는 연구실을 방문했을 때 그는 영국 출장에서 돌아와 전작 ‘내 몸 공부’에 이은 후속작을 집필 중이었다. 컴퓨터 모니터 화면엔 ‘온 세상 천지가 헬스 클럽이다’란 문장에서 커서가 반짝이고 있었다. 심혈관 분야의 권위자이신데, 요즘 일반인을 위한 강연 저술활동을 활발히 하고 계십니다. 건강 전도사로 나선 동기가 있으신지요. “한마디로 내 몸을 알자는 것입니다. 건강 정보는 넘치는데 정작 자신의 몸에 대해선 몰라요. 발에 신발을 맞춰야 하는데, 신발에 발을 맞추는 형국이라고나 할까요. 심장이나 혈관 건강에 좋은 식품, 심지어는 약 이름까지 줄줄 꿰면서 그것들이 우리 몸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모르잖아요. 아무리 많은 건강 정보를 알고 있어도 자신의 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입니다. 건강은 ‘내 몸 스스로 알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는 “육체적 건강은 정신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며 “문학작품을 통해 작가의 건강을 짐작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가령 도스토옙스키나 마르셀 프루스트가 대표적인 경우. 간질병을 앓고 있었던 도스토옙스키는 작품에서 보통 사람은 알 수 없는 간질의 전조증상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내면 의식의 흐름을 추구한 것은 신병인 천식의 영향도 크다. 천식 발작으로 고생한 그는 외출하기가 힘들어 실내 생활을 주로 하며 내면에 집중했다. 모두 자신의 지병을 수용, 강점으로 역전시킨 경우다. 문학 작품을 통해서도 작가의 건강을 유추할 수 있군요. 혹시 사람을 처음 만나실 때 상대의 건강 상태 등을 유의해 살피십니까. “그런 직업병은 없습니다. 다만 술, 특히 와인을 잘하게 생겼나, 아닌가는 꼭 봅니다.(웃음) 제가 와인을 즐기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프렌치 패러독스를 언급했다. 프랑스 사람들이 기름진 것을 자주 먹고 담배도 많이 피는데 미국, 북구 등 다른 국가에 비해 심장질환이 걸리는 비율이 낮은 것은 지중해식 식생활 때문이란 설명이다. 실제로 매일 적당량의 와인을 마시는 사람이 마시지 않는 사람보다 오래 살고 뇌졸중에도 덜 걸린다는 연구결과가 있다고. 평소 식습관과 여유로운 마음가짐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는 젊은 제자들과 와인 담화를 나누는 게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라고 말했다. 신세대 제자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시는지요. “저는 제 동료, 동년배들보다 제자들, 젊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게 더 재미있어요. 제가 그들과 어울리는 비결은 지갑은 열고, 입은 닫는 것이지요. 훈계하기보다 그들의 관심사, 와인에 얽힌 이야기 등을 나누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우리 집은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아지트예요.” 지난해 출간하신 저서 ‘내 몸 공부’는 서울대학교 비자연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셨던 교양강의를 기본으로 저술한 것이지요. 강의 당시에도 파격적 평가방식으로 화제였다고 들었습니다. “평가를 내 방식대로 했어요. 출석, 시험은 각각 25%로 하고 나머지는 ‘우리 몸의 이해’를 자신의 전공과 연결해 자유 형식으로 제출하라고 했지요. 에세이든, 음악이든, 무용, 미술작품이든…. 단 자신의 주장을 담으라는 게 제 요구사항이었어요. 우리나라 학생들은 제한 범위를 정해주면 잘하는데요. 오히려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 어쩔 줄 몰라 해요. 늘 밑줄 좍, 별 세 개의 참고서식 요약정리, 받아쓰기에만 익숙해 있기 때문이지요. 대학은 내 주장을 펼치는 연습을 하는 곳이란 게 제 신조입니다." 그는 연구실에 놓여 있는 손 모양의 조각상을 가리켰다. “강의 때 학생이 제출한 과제물”이라며 “창의성 부족을 탓하기보다 자극하는 교육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교수님은 정신적, 육체적 건강 외에 사회적 건강을 함께 강조하십니다. “사회적 건강은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환경을 말합니다. 그 지표는 배려지수입니다. 정신과 육체처럼 개인과 사회의 건강도 분리되지 않아요. 사회 환경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데 어떻게 개인이 건강할 수 있겠습니까. 비교, 경쟁이 만병의 근원입니다.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되는 분노조절장애는 비교-경쟁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객관성이란 명목 하에 수치로 표현되지 않는 다른 항목은 배제하고, 인정을 안 해요. 겉으로 드러난 것만 실력으로 인정되니 모두 한줄서기, 1등만 하려고 목을 매게 되는 것이지요. 내 뜻대로 이기지 못하면 개인적으로 우울증, 사회적으로 분노조절장애 증상을 보이게 됩니다. 남과 더불어 살아가기, 서로 배려하고 협동하는 사회적 건강 회복 운동이 필요합니다. 특히 교육 분야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엄 교수는 선진국에서 어린이들에게 팀 스포츠, 청년들에겐 오페어(Au-Pair) 제도를 활발히 시행하는 것을 예로 들었다. 그는 “딸이 영국에서 워킹맘으로서 직장과 가정 일을 병행할 수 있는 것은 오페어 덕분”이라고 말했다. 오페어 제도는 외국인 가정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아이들을 돌봐주는 대가로 숙식과 일정량의 급여를 받고, 자유시간에는 어학공부를 하면서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울 수 있는 문화 교류 프로그램이다. 우리나라도 점수따기 경쟁보다 이 같은 폭넓은 사회경험 프로그램을 확대해야 사회적으로 건강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의사가 말하는 대로는 실행하고, 하는 대로는 실행하지 말라”는 시쳇말이 있지요. 교수님이 직접 행하시는 건강 습관이나 비결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내 방식에 맞춰 마음 편하게 사는 겁니다. 저는 의학 통념이나 유행을 무조건 따르지 않아요. 진리라기보다는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한시적 학설이니까요. 먼저 나를 알고자 하고, 나에게 직접 실험해보는 편입니다. 평균적인 인간의 리듬은 말 그대로 평균이니까요. 내가 거기에 반드시 속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유행이나 학설이 내 몸에 맞나 실험해보고 관찰하는 게 내 기본 신조예요. 가령 예전에 ‘아침형 인간’ 바람이 불지 않았습니까. 저는 전형적인 ‘올빼미형 인간’이에요. 새벽 두세 시까지도 너끈히 일하지만 아침엔 일어나기가 힘들어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헌 나라의 노인 스타일이라고나 할까요.(웃음) 아침형 종달새 스타일에 맞춰 생활하는 실험을 해보니 나랑 영 맞지 않더군요. 그래서 내 올빼미 스타일대로 살기로 했지요. 나를 관찰하고 거기에 맞춰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사는 것이 건강 비결입니다.” 엄 교수는 스마트 밴드를 팔목에 차고 있었다. 이를 통해 깊은 잠, 얕은 잠을 몇 시간 잤는지, 심장박동수를 체크해 그에 따른 생체리듬을 읽고, 자신의 건강상태는 물론 라이프스타일도 조정한단다. 이외에 그가 실천하는 건강 습관은 걷기.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되도록 앉지 않으며, 목적지보다 한두 정거장 먼저 내려 ‘하루 1만 보 이상 걷기’를 생활화하고 있다. 중년 이상이 되면 영양제든 뭐든 약을 한 움큼씩 복용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지요. “모든 약은 기본적으로 독입니다. 한 가지 증상에는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다른 기관엔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어요. 자연식과 균형 잡힌 식단으로 치유하는 걸 권하고 싶습니다. 음식은 가공이 안 된 것일수록 몸에 좋고요. 접시에 담겼을 때 원래의 재료를 알아볼 수 있는 음식일수록 몸에 좋습니다.” 그는 “한국의 의사들이 지나치게 복잡한 검사와 약, 주사 위주의 처방에 의존하는 것은 불합리한 의료수가 시스템, 보험 체계 때문”이라고 말했다. 식이요법에 대한 전문적인 조언은 수가에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의사와 환자 모두 불행을 겪고 있다는 문제 제기다. 청·장년기 이후의 건강관리는 예전과 달라야 하는지요. 특히 유의할 점은 무엇인가요.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건강에도 내려놓기가 필요합니다. ‘건강 과신하지 말라, 비교하지 말라’입니다. 장년기 이후 건강 적신호가 울리는 사람은 두주불사의 타고난 건강체질파입니다. 이들은 젊었을 때의 건강을 과신하기 쉬워요. 오히려 한두 가지 지병을 안고 사는 사람이 건강한 것은 평소 주의를 하고 관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은 ‘비교하지 말라’입니다. 만보계를 갖고 걷더라도 참여자 비교 순위를 체크하며 경쟁에서 꼭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어요. 피트니스 클럽에서 트레드밀을 뛸 때도 옆 사람의 속도를 따라 하려고 하거나 더 빠른 속도로 뛰는 사람이 있어요. 이런 경쟁심은 오히려 건강을 해치기 쉽습니다. 남과 비교하기보다 자기 스타일, 페이스, 리듬을 알고 즐기세요.” 교수님은 50대 중반부터 기러기 부부 생활을 시작, 1년 반 정도를 떨어져 사시는데 어떠십니까. “손주가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집사람과도 그렇습니다.(웃음) 평생 전업주부로 살다가 50대 중반에 애 다 키워놓고 영국 유학을 가 공부를 하겠다고 해서 ‘하고 싶은 것 해보라’고 찬성했지요. 우리 부부가 45년 가까이 결혼생활을 원만히 해온 비결은 ‘덜 간섭하기’예요. 부부 갈등은 내 스타일대로 바꾸려 하는 데서 옵니다. 우린 체질, 습관, 성향이 다르지만 최대한 존중하려고 해요. 제가 주례사를 할 때 늘 강조하는 것도 ‘상대를 내 스타일대로 바꾸려 하지 말라’입니다.” 교수님은 황우석 교수와 국가과학기술연구회에서 활동을 같이하셨죠. 또 지금은 정계에 있는 안철수 바른미래당 인재영입위원장의 스승이기도 하셨고요. 이들의 부침(浮沈)을 보면서 깨달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입니다. 황 교수, 안 대표 모두 재능 있는 인물인데요. 황우석 교수는 능력보다 너무 많이 나갔어요. 자신의 관리 범위를 벗어났는데 멈춰야 할 때 멈출 줄 몰랐다고나 할까요.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려면 학문 분야는 적절히 위임해야 합니다. 그걸 못 한 게 문제였어요. 안철수 전 대표도 기대가 되는 제자였지요. 학계에 딱 적합한 사람인데… 생각이나 꿈이 커도 현실이 잘 따라주지 않을 때 기다리는 대기만성(大器晩成)의 진득함, 그게 아쉽지요. 너무 빨리, 높이 가고자 하기보다 자신의 페이스에 맞춰 즐기며 가는 게 내가 생각하는 인생 의미이자 재미입니다.” 공자는 일흔의 나이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한 바 있다. 종심(從心)은 세상의 기준에 휩쓸리지도, 나의 기분에 휘둘리지도 않는 중심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마음을 풀어놓지도(방심, 放心), 잡아놓지도(조심, 操心) 않고 고삐를 늦췄다 당겼다 조절할 수 있는 경지…. 엄융의 교수의 인생 키워드는 종심과 통한다. 새로 보는(see) 내 몸, 마음공부를 시작하면서 새 봄맞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리더의 언어병법’, ‘성공하는 CEO의 습관’, ‘하이터치 리더’, ‘용인술, 사람을 쓰는 법’ 등이 있다.
- 2018-04-03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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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격전지를 찾아서] 조선수군의 수도 통영 한산도
-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통영 한산도는 이순신이 창건한 조선수군의 수도였다. 조선 개국 이래 버려져 있던 섬이 ‘이순신 수국(水國)’의 서울이 되어 국방과 경제·산업의 심장이 되었다. 그가 삼도수군통제사로 지낸 3년 8개월 동안 국가 경제의 중심지였고, 피란민을 구제한 사실상의 수도이기도 했다. 싸우면 이기는 막강 조선수군의 병권을 쥐고 독자적인 행정 사법제도에, 과거(무과)까지 시행해 민중의 신망이 높아진 이순신은 차차 왕의 의심을 사기에 이른다. ‘한산수국’이 강대해지자 위협을 느낀 선조는 끝내 그에게 죄를 씌워 죽이려 했다. 그 사이 통제사 자리를 꿰찬 원균이 첫 전투에서 궤멸당해 한산도는 다시 이름처럼 한산한 섬이 되고 말았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수영을 차린 것은 전라좌수사 시절인 1593년 7월 16일의 일이다. 왜적이 들끓는 경상도 수역에 자주 지원 출동을 나가게 되자, 여수에서 힘들게 노 저어 가 싸우고, 되돌아가기가 버거웠다. 7월 8일 한산대첩 때 이 섬의 가치를 눈여겨보았던 이순신은 조정에 이진(移陣)을 품신(稟申), 허락이 떨어지자 신속하게 진을 옮겼다. 이진의 필요성은 왕래의 불편함만이 아니었다. 남의 관할에서 싸우는 객장(客將)의 위치가 불편했을 것이다. 전투의 주장(主將)은 번번이 경상우수사 원균이었다. 그해 5월 이순신은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섬멸하라”는 어명을 받았다. 즉시 여수를 떠나 걸망포(통영), 칠천량(거제), 세포(거제), 역포(고성) 등을 돌며 잠시 머물 진지를 찾았다. 그러나 배를 감추고 기동이 편리한 포구를 찾지 못해 한산해전 때 봐두었던 섬으로 옮겨갔다. 한산도 두을포(豆乙浦), 지금의 두억리다. 한산도는 바다에서 보면 밋밋한 섬이다. 그러나 가서 보면 배를 숨기기 알맞은 포구를 감추고 있다. 섬 한가운데 제법 높은 산(망산·293m)이 있어 남해바다를 감제하기 안성맞춤이다. 무엇보다 견내량(見乃梁) 바다가 가까워 왜적의 동태를 파악하기에 편리한 곳이다. 통영과 거제도 사이의 좁은 물길 견내량은 전라도 해로의 길목이다. 이순신의 편지글에는 한산도를 선택한 까닭이 드러나 있다.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인데 만약 호남이 없다면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그래서 어제 한산도로 옮겨 진을 치고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진 다음날 지평 벼슬에 있던 현덕승(玄德升)에게 보낸 답서에 그는 이진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조정의 공도(空島)정책으로 그때까지 한산도는 무인도였다. 완만한 경사지 너른 풀밭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이 있을 뿐이었다. 이 한산하던 섬이 삽시간에 번잡한 군사 도시가 되었다. 이진 1개월 만에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빈번해진 것이다.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가 전쟁 수행의 장애 요인이라고 판단한 영의정 겸 도체찰사 유성룡이 이순신의 직첩을 높여 원균을 휘하에 두도록 배려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그때까지 없던 직급이었다. “그대 휘하의 장수로서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그대가 군법대로 시행하라”는 선조의 교지에 그 뜻이 숨어 있다. 이때까지는 싸우면 이기는 이순신이 미뻤던 모양이다. 삼도수군통제사란 지금으로 치면 해군참모총장이다. 육군은 존재감이 미미했고, 오직 수군만이 왜적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바다를 끼고 있는 70여 개 고을이 통제사 관할 아래 들어왔으니 가히 ‘수국’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교서지 한 장만 내려왔을 뿐이다. 조정은 지원은커녕 일선 장수들에게 손까지 내밀었다. 조정에서 요구하는 물품을 올려 보낸다는 이순신의 장계가 여럿 전해온다. 1592년 9월 18일 행재소에서 소용되는 종이를 넉넉히 올려 보내라는 지시를 받고 “우선 장지 10권을 보낸다”는 장계를 시작으로, 9월 25일 의연곡(義捐穀, 기부한 곡식)을 모아 한 배로 보낸다는 장계도 있다. 신하가 왕에게 종이와 쌀을 모아 보낸 것이다. 1594년 6월 26일자에는 “단오절 진상물을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수많은 장병을 먹이고 입히고, 전함과 무기 화약 등 각종 군수품을 조달할 책임은 당연히 그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그 문제를 해결한 것이 유명한 둔전(屯田)책이다. 그에게는 전라좌수사 때 영남에서 몰려든 피란민을 구휼할 방책으로 돌산도 둔전을 시행한 경험이 있다. 통제사가 되자 군량 해결책으로 둔전 개간을 청원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전라좌수사 시절 “전라좌우도 소속 1만7000명 군사를 먹이는 데 적어도 하루 100석, 한 달에 3400석이 필요하다”고 한 장계를 근거로 추산하면, 3도 수군의 하루 군량이 얼마나 될지 짐작할 수 있다. 이 많은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그는 연안 지역과 빈 섬의 버려진 땅을 개간해 경작자들에게서 세곡을 받아들이자는 방안을 낸 것이다. 공도정책에는 어긋나지만 당장 뾰족한 방도가 없는 조정으로서는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둔전에서 식량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개간 기간과 수확이 나오기까지의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그는 병사들을 동원해 칡을 캐고 고기잡이를 했다. 칡은 대용양식, 물고기는 부식이 되었다. 남는 고기는 내다 팔아 곡식으로 바꾸었다. 여러 병영에서 필요한 갖가지 경비를 조달할 방책으로는 소금을 구워 팔았다. 그 시절 소금은 ‘백금’이라 불릴 만큼 값진 식품이었다. 미역, 다시마, 김 등 해조류와 조개류를 채취해 경비에 보탰다. 200여 년 공도정책 덕분에 남해 연안 지역과 섬들마다 황금어장이었다. 에는 쇳물을 부어 철부(鐵釜, 다리가 없는 솥)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소금 굽는 쇠솥을 주조했다는 말이다. 남해안의 소금 제조는 바닷물을 오래 끓여서 만드는 전오(煎熬) 제염법이 주류였다. 그만큼 많은 쇠솥이 필요했을 것이다. 개간이 끝난 농지에서 쌀과 잡곡이 나오기 시작한 뒤로 사정은 좋아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200척이 넘는 전선을 건조하고 총포와 화약, 창과 칼, 활과 살 등 무기와 장비를 확충하기에 돈은 턱없이 모자랐다. 그것들은 관련 산업을 일으켜 해결했다. 특히 조선업 진흥은 지역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고을마다 솜씨 좋은 목수들이 한산도와 각 지역 수군병영으로 떼 지어 몰려들었다. 좋은 소나무와 참나무 같은 목재들이 실려 오고, 대장간마다 쇠 소리와 풀무질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군사 1283명에게 밥을 먹여 산에서 선재용 나무를 끌어왔다.” 이런 일기가 자주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전선(戰船) 건조사업의 규모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배들이 날로 늘어갔다.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멀리 바라보니 우리의 배들이 바다에 가득 차 있다. 적이 비록 쳐들어온다 해도 섬멸할 만하다.” 1594년 5월 10일자 일기에는 수많은 전선이 건조된 것을 뿌듯이 여기는 마음이 가득하다. 조총까지 제조되었다. 임진년(1592년) 4월 부산포에서 우리 병사들을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던 그 총을 만들어냈다. 왜적에게서 노획한 총을 본떠 만든 것이다. 1593년 9월 14일자 일기에는 “정철총통(正鐵銃筒)은 전쟁에서 제일 중요한 무기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드는 법을 몰랐다. 오랜 연구 끝에 이제야 만들어냈다. 왜의 총보다 성능이 좋아서 명나라 사람들이 진중에 와서 시험사격을 해보더니 다들 잘되었다고 칭찬하였다. 이제는 그 묘법을 알았으니 순찰사와 병사에게 견본을 보내고 공문을 돌리도록 하였다”고 기록했다. 그 뒤의 일기에 “총통 두 자루를 부어 만들었다” 같은 내용이 자주 보이는 것으로 보아, 거푸집을 만들어 두고 필요할 때마다 만들어 쓰고 선물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환도(還刀) 대검(帶劍)을 선물로 사용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주물 공업의 발달상을 알 만하다. 임진왜란 직후 300년 동안 조선수군의 수도였던 통영에 전통 공업이 발달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통영에는 옛날부터 12공방이 있다고 일컬어져 왔다. 나전칠기, 갓, 놋쇠, 부채, 신발, 목가구, 질그릇, 은세공 등등 격조 있는 집기와 일상생활의 소소한 일용품 제조업 발달에 한산도 시대의 몫이 컸다. 이 정도로 ‘수국’이라 할 수는 없다. 끈질긴 상소 끝에 한산도에서 독자적인 무과(과거)시험을 실시한 것이 한산도를 ‘한산수국’ 수도로 만든 결정적 사건이었다. 과거시험 출제와 관리를 군대 책임자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비상시가 아니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1593년 12월 이순신은 전주에 내려와 분조(分朝, 임진왜란 때 임시로 세운 조정)를 떠맡은 세자 광해군에게 당돌한 장계를 올린다. 수군만의 무과를 자신의 주관으로, 그것도 전주가 아닌 한산도에서 시행하게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12월 27일 전주부에 과거 시험장을 열도록 명령하셨다고 하니, 진중의 모든 군사들이 달려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물길이 멀고 왜적과 대치해 있는 상황이라 뜻밖의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정예용사들을 한꺼번에 내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수군에 소속된 군사들에게는 진중에서 시험을 볼 수 있게 해주시어 그들의 소원을 풀어주시옵고….” 수하들을 이끌고 전주에 와서 과거를 보라는 분조의 지시를 따를 수 없으니 시험장을 한산도로 해달라는 요구였다. 분조에서는 이를 불쾌하게 여기는 세력이 있었지만, 그 명분을 외면할 수 없어 이순신의 건의는 채택되었다. 날짜는 4개월 늦춘 1593년 4월이었고, 합격자 100명도 거의 진중의 장병이었다. 시험과목 중 말을 타고 달리면서 쏘는 기사(騎射)는 편전(片箭)으로 바뀌었다. 이순신의 요구가 100% 수용된 셈이다. 한산도의 번영과 영광은 그때까지였다. 이순신이 함거에 실려 한양으로 끌려가고 몇 달 뒤 한산도는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그의 자리를 차지한 원균이 첫 출전 부산포 해전에서 대패하고, 경상우수사 배설이 자신의 함대 12척을 이끌고 돌아와 병영을 불 지르고 자취를 감추었던 것이다. 유성룡의 에는 그때의 일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원균은 자기 수하의 배만 이끌고 지키고 있다가 적이 공격해오자 달아났기 때문에 그의 군사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한산도에 도착한 그는 무기와 양곡, 건물 등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남아 있는 백성들과 함께 대피했다.” 뒤따라 한산도에 들이닥친 왜적은 그동안 이순신에게 당한 분을 풀어보려는 듯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분탕질을 했다. 한산도에 진을 치고 전라좌수영까지 점령해 남해를 자기네 안마당으로 만들었다. 오늘의 한산도에서는 제승당 포구에 자리 잡은 요트 선착장이 세월의 힘을 대변하고 있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격전의 현장에 생겨난 레저시설이라니! 오전 10시 통영 여객선 터미널을 떠난 페리 연락선에는 금요일 오후의 여가를 역사의 현장에서 즐기려는 관광객으로 만선이었다. 긴 물거품을 끌고 달리는 페리 갑판 위에서 갈매기들에게 먹이를 던져주는 아이들의 환호성이 비명처럼 높았다. 30여 분의 항해 끝에 다다른 제승당 포구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배가 들어온 쪽을 돌아보니 사방이 뭍으로 둘러싸였다. 고동산 돌출부와 한산대첩비 돌출부가 길게 뻗어 나와 내해를 방파제처럼 에워싸고, 그 너머로 미륵도와 통영 반도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멀리서 접근해오는 호화 요트 두 척이 제승당 포구에 들어와 접안하는 것을 보고야 그곳이 관광요트 선착장이라는 걸 알았다. 420년 사이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음을 충무공에게 고하려 함일까! 현장에 가서 본 수루(戍樓)의 위치는 참으로 절묘했다. ‘섬 안의 반도’라 해야 할 내해의 곶이었다. 그 위에서 바라보면 개미 새끼 한 마리의 움직임도 포착할 수 있었겠다 싶었다. 제승당 뒤편 망산 꼭대기에서는 견내량을 감제하고, 좌우 물길과 뭍으로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으니 그런 지리(地利)를 가진 곳이 또 없다. 이곳에서 유명한 ‘한산도가(閑山島歌)’를 지었다는 달밤이 저절로 상상됐다. 수루 뒤편 중앙에 잡은 제승당(制勝堂)은 본래 이름이 운주당(運籌堂)이었다. 이순신이 수하 막료들과 작전 계획을 세우고 장졸들의 의견도 듣던 곳으로, 집무실 겸 주거 시설이었다. 이런 곳에 원균은 첩을 들이고 울을 둘러 수하들의 출입을 막았다. 배설이 불태워 폐허가 되었던 자리에 1739년 제107대 통제사 조경(趙儆)이 건물을 복구해 제승당으로 당호를 바꾸었다. 통제영 시설 가운데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곳이 활터 한산정(閑山亭)이다. 바다를 끼고 145m 건너편 산비탈에 과녁 셋이 있다. 밀물과 썰물 교차를 이용해 해전에 필요한 실전거리 적응을 위해 일부러 바다 낀 곳을 골랐다는데, 아마도 국내에 이런 활터는 없으리라 했다. 매일같이 활쏘기를 연마하던 이곳에서 “수하들과 내기를 해 진 편에서 떡과 술을 내 배불리 먹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1594년의 과거시험 활쏘기 시험장으로도 이용된 역사의 현장이다. 원균의 패전 이후 통제영은 통영으로 옮겨갔다. 통영에서 제일 유명한 곳은 국보 제305호 세병관(洗兵館)이다. 1604년 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 시절 두룡포(오늘의 통영)로 통제영을 옮기고 이듬해 건물을 지었다. 두 차례 증개축을 통해 앞면 9칸, 옆면 6칸의 목조 건물이 되었다. 여수 진남관과 함께 바닥 면적이 가장 넓은 객사 건물로도 유명하다. 뭐니 뭐니 해도 통영을 대표하는 것은 그 땅의 지명이다. 300년 동안 수군통제영이 있었던 곳이라는 유래에서 비롯된 이름이어서 주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박정희 정권 시대 충무공 시호에서 유래된 ‘충무’로 불리기도 했지만, 옛 지명을 선호하는 여론 때문에 다시 통영이 되었다.
- 2017-10-30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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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회가 만난 CEO 스토리] 이종수 한국사회투자재단 이사장·임팩트금융 추진위원회단장
- ‘누군가를 돕는 것은 스스로를 돕는 것이다’. 취약계층, 사회적 패자들의 자활을 돕고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를 디자인하는 이종수(63) 한국사회투자재단 이사장 겸 임팩트금융 추진위원회 단장, 남들이 ‘문제없다’를 외칠 때 그는 ‘문제 있다’를 외치며 우리 사회의 궁벽한 문제를 드러내고 찾아낸다. 그리고 해결을 도모한다. 철거민촌 소년이 글로벌 금융인을 거쳐 사회운동가가 되기까지의 진솔한 패자부활전 이야기를 들어봤다. 별명이 소셜 디자이너입니다. 왜 그런 별명이 붙었나요. “패자부활전을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격차와 갈등을 해소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디자인한다고 해서 언론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빈곤의 사전 예방, 차단을 위해서는 단순히 퍼주기 식의 복지 지원이 아니라 한 사회 생태계 구성이란 전향적-종합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고기를 주기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젠 고기 잡는 도구를 빌려주는 것까지 함께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장을 만들고 고기를 잘 잡을 수 있는 환경 조성까지 해야 합니다. 취약 계층 자활도 단순한 지원을 넘어 융자의 시대를 지나 이젠 사회투자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런 시스템을 디자인하는 게 제 일입니다. 빈곤도 커다란 흐름 속에서 이해해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착한 금융 2.0은 복지 측면에서 개인 대상 직접 자금 지원이었다. 3.0은 사업 지원, 사업 아이디어 사전 자문과 사후 사업 멘토링까지 종합관리 시스템으로 패키지 지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4.0은 투자 생태계 마련, 즉 사회투자 방식으로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기업과 프로젝트를 발굴해 투자하고 이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다. 개인도 종합검진을 미리 하면 중병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 이처럼 사회 빈곤, 취약 계층 발생도 사후 대책을 넘어 문제 요인을 사전에 진단, 예방하는 사회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취지다. 이 이사장은 사회투자금융 활동의 선구자로서 늘 앞장서 각 단계마다 진화를 주도해왔다. 사회투자라는 용어가 아직은 낯선데요. 사회와 투자라는 용어가 얼핏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만. “사회 문제가 점점 많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합니다. 그러나 그 예산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의 문제는 너무 복잡해 주는 복지 방식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많습니다. 많은 사회 문제가 경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해결 방식도 전통적인 복지에 금융경영 등과 같이 시장적인 방법을 융합해 해결해야 합니다. 사회투자는 재원의 선순환을 이루면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주는 복지를 넘어 구조와 예방의 사회 인프라를 깔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사회간접자본과 같습니다. 다리, 항만 부두 등을 건설하는 데는 당장 비용이 발생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사회 발전의 근간을 마련하지 않습니까?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취약 계층을 지원하는 대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패자부활을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이고 예방적인 차원에서 지속가능하게 문제를 풀어가는 사업에도 투자하는 등 다층적 접근을 해야 합니다.” 사회금융기관은 일반 은행과 어떤 점이 다른가요? “일반 은행이 돈을 빌려줄 때 수익과 담보를 본다면 사회투자를 지원하는 사회 금융기관들은 그 기업과 프로젝트가 어떤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가, 그리고 그것을 추진하는 사람과 기업의 철학을 본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재무적 수치나 성과만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 즉 장애인, 노숙자, 저출산, 고령화, 청년 일자리, 주거 문제, 환경 문제, 자살률 등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가를 우선적으로 판단해 투융자를 결정합니다. 돈의 회수 가능성을 본다는 점은 같지요. 공익적 개념이더라도 지속가능하게 사업을 진행하려면 재원의 선순환이 필수이니까요.” 은퇴자들과 매칭 포인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설립한 사회연대은행에서는 시니어브리지라는 프로그램을 수년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은퇴하였거나 은퇴를 앞둔 시니어들이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교육하고 논의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벌써 400명 이상의 시니어들이 교육을 받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전문성을 갖고 사회적 기업에 컨설팅을 하는 등 다양한 경로로 봉사가 가능합니다. 일정 교육을 받고 커뮤니티를 구성,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인생에는 두 가지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돈을 벌어 재무적 성과를 내는 재무적 가치, 사회적 의미를 두고 봉사하는 사회적 가치. 이 중 나이가 들면서 사회적 가치에 점점 더 무게중심을 두게 되더군요.” 당면한 사회 문제 중 심각한 게 양극화인데요. 많은 사람들이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끝났다고들 말합니다. “부모의 가난이 새로운 연좌제가 되고 있는 것이죠. 요즘은 개천의 용을 보기가 힘듭니다. 개천에선 욕만 나오는 세태이지요. 싹수 있는 지렁이들의 신분상승 희망조차 개천 바닥 아래로 봉인돼버린 것입니다. 어느 나라이든 명문대 인재들이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존재해요. 영국의 이튼스쿨 출신, 미국의 아이비리그 출신 등. 우리 사회의 문제는 갈등과 적대감이지요. 리더들이 갈등을 부채질하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제도 개선 등 따뜻한 개천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이사장은 “실업, 저출산, 주거난, 장애인 문제 등이 곪아 터지면 결국 빈곤의 문제로 수렴된다. 이들이 벼랑에서 떨어져 사회적 비용이 더 크게 발생하기 전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이라는 책에서 “가난이 자존심에 미치는 영향은 공동체가 가난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방식에 결정적으로 좌우된다”며 “경제적 능력주의 사고는 가난한 사람을 불운한 게 아니라 실패자로 묘사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체제에선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지고, 자선-복지-재분배-동정의 필요성은 갈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과연 빈곤을 그들만의 인과응보에 의한 책임으로 볼 것인가. 한 부모가 아이를 서울역으로 데려가 노숙자를 가리키며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산교육(?)을 했다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으로 다뤄진 적도 있지요. “가난의 책임을 개인에게 물을 수만은 없습니다. 현대사회는 복잡해서 여러 가지 사회적인 상황이 개인을 빈곤으로 몰아넣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국민총생산이 성장하는 것만으로는 그 사회가 발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국민총생산이 늘어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소외되고 낙오되는 사람들을 보듬고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장입니다. 이를 위해선 공동체 정신, 커뮤니티 정신이 기본적으로 중요합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 온통 효율만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인간의 얼굴을 한 따뜻한 자본주의가 실현돼야 합니다.” 개인 이야기를 해볼까요. 이사장님도 흙수저 출신의 개천룡이십니다. 어떻게 글로벌 금융인이 되셨는지요? “사당동 달동네의 철거민촌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서강대 경영학과)에 들어갔어요. 민주화운동을 하다 민청학련사건으로 옥살이를 하게 됐습니다. 이게 빨간 줄이 돼 국내 일반 직장에 취업이 안 되는 겁니다. 신원조회를 하지 않는 외국계 기업 직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친구가 권해줘서 우연히 응시한 미국 은행 체이스맨해튼은행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참, 인생이란 알 수 없더군요.” 민청학련 경력(?)이 인생의 장애물이자, 도약대, 두 가지 역할을 했군요. “20대 때 세상의 불공평, 부조리에 대한 분노가 질풍노도 같았어요. 독재 정권에 대한 불만이기도 하고, 제 가난에 대한 불만이기도 하고, 화가 꾹꾹 쌓여 폭발 직전이었지요. 처음엔 독방에 수감됐는데 매일 고함을 치고 벽을 쳤어요. 3개월 후 잡범들과 합방을 하면서 비로소 제 마음속 억눌린 화가 풀리더군요.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가난이라고 불만을 가졌던 게 사치였던 겁니다. 비교도 안 되게 별별 힘든 사연이 다 있더군요. 그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자’는 생각을 했지요. 책으로 배운 이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그 결심으로 대학생활 내내 구로동 공단에서 야학을 열심히 했어요.” 그 후에도 초심을 잘 유지하셨나요. 젊은 시절의 결심은 계속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법인데요. “하하. 웬걸요. 몇 번의 초심 재생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레드카펫 깔린 외국 직장에서 고연봉의 좋은 대우 받고,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7명이나 딸린 해외생활을 하면서 ‘그때 그 마음’이 바래버렸어요. 꿈은 이루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힘들어요. 내 삶은 우연찮게 사건이 ‘사연’을 상기하게 만들어요.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돌아보게 되었지요. 1996년 캄보디아에서 은행을 설립할 때인데요. 가난을 한탄할 틈마저 주지 않는 매정한 세상에 지친 서민들의 우울한 눈동자를 봤어요. 까맣게 잊고 있던, 감옥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과 예전 결심이 떠오른 겁니다. 내 삶을 돌아보게 됐고 사표를 냈지요.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이라고 하지만, 가슴에서 발까지의 결심이 더 힘들더군요. 이후 캄보디아 농촌 빈민을 위한 자활 프로젝트, 인도네시아 농촌 빈민 직업 훈련 프로젝트 등 ‘가슴이 시키는 일’에 연달아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캄보디아 내전 등 내부 문제 때문에 아쉽게도 끝까지 추진하지 못하고 접어야 했다.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그에겐 소중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이때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에 영감을 받아 귀국해 사회연대은행을 설립하게 된다. 당시 국내에선 개념조차 없는 때라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한국형 사회연대은행을 기초부터 공부해가며 시작해 실행까지 도맡아서 했다. 세계 최대 보험중개사인 에이온코리아 사장으로 계시다 비정부 시민사회 단체인 사회연대은행 대표로 옮기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10년간 양다리 기간이 있었습니다. 두 곳이 인근 건물이어서 상호 양해 하에 두 곳의 장(長) 역할을 왔다 갔다 병행했지요. 그러다 사회연대은행 운영이 어려워져 직원 급여도 못 주는 상황에 직면했어요. 3개월 월급 못 줄 땐 가시방석이었어요. 웬만한 직장에서 그랬다면 야단이 났을 텐데, 마이너스통장 쓰면서도 견디는 모습을 보며, 나 혼자 편하게 지내도 되나 갈등이 생기고, 인간적으로 모순 상황을 못 견디겠더라고요. 고민 끝에 에이온에 사표를 냈고 마음이 가는 바를 좇고 나니 편해지더군요. 온전한 헌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진정한 이익과 불이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니 결정이 오히려 쉬웠습니다. 버는 거야 옛날과 비교할 수 없게 줄었지만요. 막상 살아보니 상상했던 것보다는 불편하지 않아요. 밥값 내던 시절은 잊고 빈대가 되고, 기사 딸린 승용차를 타는 대신 대중교통 이용하고…. 많이 벌면 많이 쓰고, 조금 벌면 조금 쓰게 되는 게 사람 사는 이치더군요(웃음).” 사표를 쓴 당일에 스페인 산티아고로 직행, 혼자 도보순례를 하셨다면서요. “모양만 좋은 ‘데코레이션 나’가 아닌 진짜 ‘내 안의 나’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만나기 힘든 게 나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살면서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 나이기도 하고요. 자신만이 답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 사람들 눈에 보이는 나는 내 참모습과 일치하는가.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어보는 시간이었어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나에게 지지 말자고 결심했지요.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지?’ 하는 매일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말씀을 들으니 이사장님의 삶 자체가 끊임없는 패자부활전, 초심 회복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하, 그런가요. 격렬한 희망과 내려놓기, 그것이 제 나름의 인생 지혜입니다. 격렬한 희망이란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긍정적 기회로 볼 수 있는 것, 그것이 나를 일으켜 세웁니다. 하나하나 보면 실패였지만 돌아보니 그게 저수지가 됐어요. 감옥에 들어간 일이나, 젊은 시절의 방황이나 해외 돌아다니면서 은행을 설립한 일이나…. 또 하나는 내려놓기입니다. 돈뿐 아니라 일에 대한 욕심도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을 내려놓으니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따라오더군요.” 이 이사장은 인터뷰 중 일어나더니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을 펼쳐 한 대목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읽어주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출발이다. 과거를 지움으로써 현재를, 지금을 버림으로써 미래를 들일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다른 것을 쥘 수 없는 것처럼 비우지 않으면 채울 수 없다. 내려놓음은 익숙함에 찍는 단정한 마침표다. 나를 타성, 관성, 습성에 젖게 했던 세상의 기준과도 이별이다. 그는 자신이 지은 집에서 80대 노부모를 모시고 산다. 소셜 디자이너란 별칭처럼 ‘남이 디자인해준 집’에서 사는 것은 재미없기 때문이란다. 아버님(86)은 시력을 상실하시고, 어머님(85)은 치매이시지만 그는 이 역시도 문제로 보지 않는다. ‘노인의 문제는 곧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노인 병환, 공양 문제를 사회적으로 어떻게 풀 것인가, 노인들이 어떻게 존엄한 삶을 살게 할 것인가, 양질의 서비스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기회로 받아들인단다. 타고난 소셜 디자이너 이종수 이사장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 2017-09-30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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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조선업의 국제경쟁력과 신의
- 한국의 조선업, 그러니까 대형 화물선을 만들어 수출도 하고 국내 해운회사에 판매하는 산업인 조선업은 1970년대 초에 시작돼 20여 년이 지난 1990년대에는 일본을 넘어 세계 1위 자리를 확보했었다. 그 전까지는 영국이 세계 1위였는데 일본이 영국을 넘어서 세계 1위의 지위를 누리다가 한국에 추월당한 것이다.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조선소 10개 중에 한국이 7개나 점할 정도였다. 그만큼 한국의 조선업이 영업력, 기술력, 생산성과 관리력 등이 뛰어나 이른바 국제경쟁력이 세계 1위 수준에 올랐던 것이다. 어떠한 어려운 상황이나 위기상황에서도 신의와 공정성을 유지했고 국제계약의 조건들을 이행하는 수준도 선진국에 비할 때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7년 말에 몰려온 IMF 한파로 필자가 근무하던 대형 조선소도 부도가 나고 법정관리 및 구조조정의 격랑에 휘말렸다. 크게 불안을 느낀 외국의 해운회사들은, 선박들이 한창 건조 중이었지만 끝까지 차질 없이 인도될 수 없다고 판단해 13척이나 선박 건조계약을 취소했다. 당시 싱가포르의 한 해운회사로 갈 선박은 건조가 거의 완료되어 마무리를 위한 잔 공사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사실은 부도사태로 조선소에 현금이 부족해, “1주일 먼저 몇백억원 상당의 인도분할금을 융통해줄 수 없겠는가?” 하고 의사를 타진했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융통은커녕 선박 값을 몇십억원 깎아달라는 냉정한 요구였다. 결국 어려움을 참으며 1주일 후 선박을 인도해 인도분할금을 미화로 받아 원화로 환전하니 오히려 몇십억원 환차이익이 생겼다. 그다음 프랑스의 한 해운회사는 선박을 인도하기 몇 주 전에 기술 담당 수석부사장이 조선소에 와서 매일 현장을 휘젓고 다녔다. 그러고는 기술적 하자 사항을 계속 들먹이며 조선소 관리자들을 자기 회사 부하처럼 부렸다. 정도가 심해 선박 건조계약서의 권리의무 이행관리를 총괄하던 필자가 따졌고 양해할 것들을 서로 합리적인 수준으로 처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조선소 사장실에 간 그 기술 담당 수석부사장은 유창한 영어로 조선소를 질타하듯 기술적인 하자 사항을 맹비난하며, 몇십억원을 조선소가 해외은행에 예치하는 조건으로 선박을 인수하겠다고 해댔다. 부도난 조선소로서는 몇백억원 인도분할금을 빨리 받아야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으므로 무리한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줘야 할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높은 직위의 고객인 외국 선주 대표라 해도 합의내용을 어기거나 거짓말하는 것은 용인하기 힘들었다. 결국 필자가 나섰다. “하키비안 부사장! 당신 어제 나하고 양해하고 합의한 것들을 왜 사장님 앞에서 번복하는 거요? 그리고 왜 거짓말을 합니까?” 그러고는 그날 저녁, 둘이 술자리를 같이하면서 담판을 벌였다. 그른 내게 이렇게 말했다. “미스터 리! 아무리 그래도 당신 사장 앞에서 그렇게 면박을 주면 됩니까?” 1년 후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항에 있는 그 프랑스 해운회사를 방문했다. 예치금액을 상호 정산하고 하자보증문제를 종결하자며 그가 우리를 초청한 것이다. 깨끗한 마르세유 항구엔 상당히 큰 조선소도 있었는데 일감이 없어 정막이 흐르고 있었다. 부도난 우리 조선소보다 더 큰 어려움이 있는 듯했다. 하키비안 부사장과 국제 계약서상의 권리의무를 잘 마무리 짓고 나서는데, “미스터 리! 마르세유 산 와인 16박스를 선물로 당신 조선소에 보내겠소. 우리 선박 만드느라 수고한 분들과 함께해주길 바라요.” 했다. 해외 출장을 마치고 통관절차를 거쳐 프랑스 산 포도주를 동료들과 마시면서 국제경제력과 공정함, 그리고 인간적 신의의 수준을 되짚어봤다. 2000년대로 들어서자 중국에서는 세계 1위 조선국을 목표로 우후죽순처럼 몇십 개의 대형 조선소들이 생겨났다. 신조선박의 수주량, 생산량, 인도량 등에서 한국을 위협하거나 추월해 1위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8년 미국 발 세계 금융위기의 여파로 중국의 많은 조선소들이 문을 닫았다. 한국의 대형 조선소들도 불황을 겪었다. 신조선박의 건조 수요가 감소하자 해양구조물 생산에 주력해오다 이 또한 유가변동에 따라 어려움을 겪었다. 지난 몇 년간 대형 조선소들이 위치해 있는 거제도와 울산 지역에서 직장을 잃은 종업원들이 무척 많아 실업급여 받는 인원들 통계가 아직도 다른 지역보다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2017년 상반기부터 한국의 대형 조선소들의 선박 건조계약 실적이 세계 1위 자리를 다시 찾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조선업에 오래 봉직했던 동료와 후배들도 괜스레 기분이 좋고 마음에 여유가 생겨진다. 스페인 선주가 발주한 선박을 중국 조선소에서 건조하도록 국제 선박건조계약을 중개한 친구가 있다. 중개수수료 2할을 할인해줬는데도 3년째 6할의 중개수수료를 아직 못 받고 있다고 한다. 중국조선소 사장이 국제중개수수료계약을 고의로 회피하는 것이다. 친구가 몇 번 비행기 타고 받으러 갔는데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거나 아예 피하고 있단다. 국제계약을 헌신짝처럼 무시하고 고의로 이행하지 않으려는 중국조선소 사장의 태도는 한국 조선업에 오래 근무한 경력자로서 용인하기 싫다. 그래서 친구가 상해 소재 변호사를 선임해 국제 수준의 법적 조치를 취하는 데 적극 지원했다. 중국 조선업의 국제적 수준 향상과 국제신인도 향상을 돕는 방편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다른 한편으로는 소탐대실하고 미몽에서 깨어나지 않는 중국 조선업의 수준에 안심도 되고 고소한 웃음이 나온다. ‘그래 너희는 아직 멀었어. 남의 돈 떼어먹고 국제무대에서 얼마나 생존하는지 보자.’ 기초와 구조가 국제적 수준으로 단단히 다져진 한국 조선업의 ‘조선입국(造船立國)’의 역할을 긍지를 갖고 기대해본다.
- 2017-08-24 0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