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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플러스 친구들과의 여행, 이렇게 준비해요
- 심리학자들은 “행복하고 싶으면 친구와 여행을 가 맛있는 것을 먹으라”고 말한다. 이보다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과 장기여행을 하다 보면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다. 오죽하면 ‘친구를 알고자 하면 사흘만 같이 여행해보라’는 말이 있을까. 여행 중엔 본성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일정에 지치고, 취향과 지향이 부딪치다 보면 날카로워지기도 한다. 특히나 해외 자유여행은 사전에 준비할 일도, 멤버 간 선택할 일도, 조정할 일도 많다. 요컨대 ‘갈등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예방하는 것’이 최선이다. 꼼꼼한 룰을 사전에 세워놓으면 좋다. 역할분담 각자의 특성대로 맡아서 하기 친구들과의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역할분담이다. 한 친구가 도맡아 하면 피로가 쌓이고 결국 “내가 혼자 애쓰는데 너희들은 뭘 했느냐” 하는 불평이 생기고 균열이 발생한다. 단 공정한 역할분담은 N분의 1로 나누는 것이 아님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각자 똑같은 분량으로 일을 나누기보다는 자신의 장기, 재능별로 역할을 맡는 것이 좋다. 여행 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일정 기획, 예약, 회계 총무역할이다. 각자 자신 있는 분야를 맡아 선택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우리는 크게 건강(비상의약품, 음식), 회계 총무, 기획·예약, 기록담당 등으로 역할을 나눴다. 항공권 및 숙박호텔 예약 품 들인 만큼 싸게 살 수 있다 행복한 여행을 하려면 치밀한 사전준비가 필요하다. 품 들이는 만큼 가성비는 높아진다. 여행준비의 핵심은 항공권과 숙박호텔 예약이다. 여기서 여행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린 비용보다 비행시간을 최소화해 더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기로 했기 때문에 직행 항공권만을 집중 검색했다. 품을 들이는 거에 따라 200만 원짜리 항공권을 절반에 살 수도 있다. 항공권을 싸게 샀을 때의 뿌듯함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항공권은 일찍 예약한다고 반드시 싼 것은 아니기 때문에 추이를 살피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예약’하는 게 필수다. 요컨대 항공권 비용 절약의 왕도는 결국 손품이다. 아울러 적당한 시기에 표를 사는 결단도 필요하다. 호텔 예약을 할 땐 비용과 교통편의를 함께 감안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로테르담과 벨기에의 브뤼셀, 호텔 3곳. 열흘 치 짐이 든 가방을 들고 이동하는 게 부담이었다. 대중교통 이동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에 역에서 가까운 호텔을 찾는 데 중점을 뒀다. 해당 도시 호텔들을 하도 많이 검색해 여행을 떠나기 전쯤에는 그 도시 시가지를 머릿속에 훤히 그릴 정도였다. 호텔 등급은 여행 전반에서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점점 더 고급형으로 높이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끝이 좋아야 다 좋다. 뭐든 좀 불편한 데서 좋은 곳으로 업그레이드돼야 만족도가 높아지고 여독을 풀기에도 좋다. 전체 동선은 함께 가고 싶은 나라를 결정한 후, 여행지 안내서를 중심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여행사의 패키지 프로그램 일정표를 참고하고, 멤버들이 가고 싶은 곳을 반영해 최종 정리했다. 데이터 이용 여행 목적, 멤버 구성에 따라 수단을 찾는다 해외여행에서 데이터 사용은 필수다. 헤어졌을 때 멤버 간 비상연락망은 물론, 길을 찾을 때, 유적지 관련 정보를 찾아볼 때 필요하다. 해외에서 데이터 사용 수단으로는 유심, 휴대용 와이파이 공유기, 해외로밍 등이 있다. 각각 장단점이 있으므로 비교 후 결정하는 것이 좋다. 유심은 전화번호가 바뀌기 때문에 국내에서 오는 문자나 전화를 받을 수 없는 게 불편하다. 휴대용 와이파이 공유기는 일행이 인터넷을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어 편리하다. 불편한 점은 공유기를 들고 다녀야 한다는 것, 수시로 별도 충전해야 하는 것도 단점이다. 또 멤버가 같이 사용하려면 일정 범위 내에서 붙어 다녀야 한다. 로밍은 편의성 면에서 가장 좋지만 비용이 상대적으로 비싸다. 짐 싸기 여행은 채우러 가는 게 아니라 비우고 오는 것이다 여행을 떠날 때 새 옷, 새 신발을 사는 사람이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는 반대였다. 옷도, 양말도, 신발도 헌것으로 가져간다. 여행 중에 옷장 속에 놔두고 오기도 하고 매번 빨래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새 옷과 새 신발이면 낭패다. 여행을 하다가 가방을 비워야 하는 상황도 대비해야 한다. 여행은 바리바리 채우러 가는 게 아니라 비우러 가는 것이다. 당연히 여행 짐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여행지 정보 아는 만큼 보인다 여행을 할 때도 아는 만큼 보인다. 여행국과 관련한 영화, 소설 등을 읽고 가면 이해가 빨라 흥미롭다. 영화를 다운받아서 비행 중에 보면 지루함도 덜 수 있다. 네덜란드와 관련한 영화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튤립 피버’가 있고 책으로는 ‘먼나라 이웃나라, 네덜란드 편’, ‘네덜란드 벨기에 미술관 산책’, ‘플랑드르 미술여행’, ‘네덜란드에 묻다, 행복의 조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 암스테르담’ 등이 있다. 지출 비용 항목별로 미리 짜놓은 예산에 따라 쓴다 비행기표, 숙박비(별 4개 수준의 호텔 숙박비 기준), 입장권, 교통비, 투어비 등은 예약이 필요해서 미리 비용 파악을 할 수 있다. 굵직굵직한 일정들은 되도록 예약을 했다. 유명한 곳은 2개월 전 예약이 필수이고, 현장 판매가 안 되는 곳이 많으므로 확인이 꼭 필요하다. 현지에서 써야 하는 비용도 미리 예산을 세워 분류했다(여행지에서 현찰이 모자라 송금을 부탁하는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다). 식비는 끼니당 100유로씩 예상했다. 유럽 식당에선 1인 1식이 필수라 하지만 수프, 샐러드, 메인 요리 3개를 시켜도 무방하다. 또 호텔에서 팁을 줘야 할 때를 대비해 1달러짜리 지폐를 별도로 준비했다(동전을 싫어한다 해서). 교통비, 입장료도 미리 책정했다. 이외에 예비비를 편성해놓으면 여행 중 발생할 수 있는 돌발변수에 대처할 수 있어 좋다. 여행에선 크든 작든 사고가 발생한다. 여행 도중 우리는 일정이 변경되어 예약한 버스표와 기차표를 취소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런데 아뿔싸, 버스나 기차는 하루 전에 취소해도 환불이 불가하고 현지에서 1년 내에 사용할 수 있는 티켓으로만 바꿔줄 수 있다는 냉정한 답변이 돌아왔다(총액 28만 원 정도여서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때 예비비가 유용하게 쓰였다. 여행 중 비용 지불은 카드와 현찰 모두 가능하지만, 편의와 안전을 위해 적절히 배분해 다니기로 했다. 현찰로 지불할 때는 즉시 기록했다. 매일 저녁 영수증을 펴놓고 돈 계산하는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현찰은 멤버들에게 N분의 1로 분배, 각자 가지고 다녔다. 혹시 모를 도난이나 분실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또 카드의 경우, 여행공금카드(체크카드)를 국내에서 미리 만들어갔다. 여행 후 가계부 앱을 돌려 지출비를 카테고리별로 점검해보니 ‘교통비 36%≻투어와 기타 31%≻숙박비 16%≻식비 13%’의 순이었다(그림 참조). 이런 기록 시도는 처음 해봤는데 다음 여행 계획 때 많은 참고가 될 것 같다. 프로그램은 종합구성으로 해외 자유여행은 현지 가이드, 현지 관광상품, 프리 워킹투어 등으로 종합구성하면 좋다. 렌트카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짐까지 계산해 동선 계획에 넣어야 한다. 체크아웃을 하고서도 호텔에 짐을 맡길 수 있는지, 역에 라커가 있는지 등도 확인한다. 교외 관광지는 이동수단의 불편이 많기 때문에 현지 관광버스투어, 현지 가이드를 활용하고, 목적지가 편한 곳일 때는 구글 앱 도움을 받아 이동하면 된다. 도심의 여러 곳을 돌아다녀야 할 때는 워킹투어를, 상세한 설명이 필요한 역사문화유적지는 현지 한국어 가이드를 섭외하는 것이 좋다. 역사문화유적지 같은 곳을 봤어도 스토리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추억이 달라진다. 미리 공부를 해가도 문외한의 눈으로는 한계가 있고 차이도 구별하기 힘들다. 우리는 역사문화유적지를 갈 때는 현지 한국인 가이드를 섭외해 설명을 들었다. 영어로 설명하는 가이드도 있지만 복잡한 역사와 다양한 문화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다행히 20여 년 이상 그곳에서 산 분이 가이드를 해줘 역사, 문화, 시사, 그리고 현지의 생활문화까지 들려줘 매우 유익했다. 현지 한국인 가이드 섭외는 ‘자전거여행’, ‘마이리얼트립’ 등을 이용하면 된다. 교외 유명 자연관광지 교외 유명 자연관광지는 현지 교통 사정에 어두운 외지인이 찾아가려면 힘들다. 관광버스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편하다. 역 터미널, 공항 터미널에 티켓센터가 있고, 국내에서 예매도 가능하다. 단 주의할 것은 버스 출발 장소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우리도 출발지와 티켓 발매처가 헷갈려 엉뚱한 곳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 뒤늦게 혼비백산해 버스 출발 5분 전에 모임장소에 가까스로 도착할 수 있었다. 도심은 워킹투어 프로그램 이용 대부분의 도시에는 워킹투어 프로그램이 있다. 걸어서 두세 시간가량 도심을 돌며 주요 장소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한국인과 외국인 가이드 모두 가능하고 유료와 무료가 있으니 일정에 맞춰 예약하면 된다. 우린 암스테르담에서 무료 워킹투어 프로그램(영어)을 신청했다. 무료는 실력 차가 나는 경우가 많다. 효율성을 따진다면 유료 워킹투어를 이용하는 게 낫다. 한곳에서 유유자적하고 싶다면 구글앱 사용 한곳에서 여유롭게 보내고 싶다면 일행끼리 움직이면 된다. 길치 4인방인 우리는 목적지를 찾아갈 때 구글 앱과 지도를 보거나, 현지인에게 물었다. 구글 앱이 잘돼 있어 길 안내를 상세하게 받을 수 있다. 트램(노면열차)을 타도 내려야 할 정거장, 경로까지 꼼꼼하게 안내해줘 편리하다.
- 2019-08-05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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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국의 숨결이 배어있는 ‘강화 나들길 제2코스
- 조금 일찍 찾아온 여름 때문에 봄이 짧아졌다. 맑게 갠 파란 하늘 아래서는 아카시아 향기가 희미해져 가고 장미는 못 참겠다는 듯 붉은 아름다움을 터트린다. 연녹색 나뭇잎을 타고 구르는 물방울이 싱그럽다. 이토록 푸르른 날 자연을 담지 않는다면 내 카메라에 미안한 일이다. 가방을 메고 나섰다. 신록의 기운을 하나 가득 받기 위해 찾아간 곳은 강화도다. 강화도에는 아름다운 풍경과 이야기가 있는 걷기 여행길이 있다. 총 20개 코스가 강화도, 교동도, 석모도, 볼음도, 주문도의 5개 섬에 ‘강화 나들길’이라는 이름으로 조성돼있다. ‘강화 나들길’은 코스마다 해당 코스를 상징하는 이름이 있다. 그 중 ‘호국돈대길’이라는 이름의 제2코스를 걸었다. ‘돈대’란 성벽 위에 석재 또는 벽돌을 쌓아서 망루와 포루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높은 누를 말한다. 강화도가 근대사에서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잘 반영한 이름이다. 길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김포와 마주 보는 해협을 따라 있다. 초지진에서 시작해 덕진진, 용두돈대, 광성보, 오두돈대, 화도돈대, 용당돈대, 용진진을 거쳐 갑곶돈대까지 가는 17km의 거리다. 김포에서 초지대교를 건너 강화도에 들어서자마자 오른편에 초지진이 있다. 초지진은 병인ㆍ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 근대에 가장 줄기차게 싸운 격전지다. 해상으로 침투하는 적을 막기 위해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구축한 요새다. 민족 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을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성곽도 보수하고, 조선군이 쓰던 대포도 전시해 놓았다. ‘강화 나들길 2코스’라고 쓰여 있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걸었다. 자전거 여행자들도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전용 도로가 길옆으로 잘 만들어져있다. 걷다가 바라본 파란 하늘 아래 길가에 은행나무 연두색 잎이 너무나 싱그러웠다. 왜 이즈음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논에서는 모내기를 끝낸 후 뿌리가 자리를 잘 잡으라고 물을 대주고 있다. 갓 심은 모의 푸르름도 이즈음에 맞는 연녹색의 향연이다. 그 잔칫상으로 하얀 백로들이 날아왔다. 덕진진은 강화도 12개 진․ 보의 하나로 강화 해협을 지키는 요충지다. 덕진돈대 앞에는 흥선대원군이 ‘어떠한 외국 선박도 이 해협을 통과할 수 없다.’는 당시 쇄국 의지를 나타낸 경고비가 있다. 광성보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서 해협을 따라 길게 쌓았던 성이다. 이를 1679년에 완전한 석성으로 축조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다. 이곳에 당시 전사한 무명 용사들과 어재연 장군의 전적비가 있다. 그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일 년에 한 번 ‘광성제’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 ◇ 주변에 가볼 만 한 곳 ㆍRose Bay: 초지진에서 덕진진 가는 길에 있는 아름다운 커피 숍이다. 커피와 갓 구운 빵은 물론이고 도자기와 다육식물을 전시, 판매하는 온실도 있다. 예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가든은 덤이다. ㆍ대명항 포구: 초지대교 김포 방면. 5~6월은 병어, 밴댕이 회 철이다. 현대식 시설로 깨끗한 환경을 갖춘 젓갈 시장도 있다. 5~6월은 황석어, 밴댕이 젓갈 철이다.
- 2019-06-0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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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록도 가는 길
- 보리피리 불며 / 봄 언덕 / 고향 그리워 /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 꽃 청산 / 어릴 때 그리워 /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 인환의 거리 / 인간사 그리워 /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 눈물의 언덕을 / 피ㄹ 닐니리. 한하운 시인의 애달픈 시 ‘보리피리’다. 소록도를 다녀오고 나서 비로소 그 고독과 고통을 백분의 일도 이해하지 못한 채 시를 읊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나병으로 한 맺힌 일생을 살아간 분들의 절망을 비로소 마음속 절절히 느끼고 돌아왔다. 전남 고흥에서 소록도 가는 바다는 평화롭기만 하다. 해안 울창한 솔 숲 옆으로 도로가 길게 나 있다. 이곳에서 한 달에 한 번뿐인 한센인들의 면회가 먼발치로 떨어진 채 이루어진다. 행여 바람결에 병이 옮겨질까 봐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서 있는 장소가 바뀌었다고 한다. 부모형제여도 손잡아 볼 수도 없고 서로의 숨결 한번 느껴보지 못하던 아픔이 서린 곳이다. 그래서 애환 어린 탄식의 장소란 뜻으로 수탄장(愁嘆場)이다. 일생을 소외와 고통 속에서 살았지만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편견이 가장 큰 아픔이었다. 병원 치료도 못 받고 부모형제에게까지 버림을 받아 간 곳이 소록도다. 103년 전부터였다. 한때는 6000여 명 정도 수용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500여 명의 환우들이 남아있다. 그 세월 소록도 병원의 나무는 자라서 울창해졌다. 그분들의 아픔과 슬픔을 기억하고 있을 건물들은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검문소를 지나 수술대와 검시대, 세척실, 감금실, 시체 해부실, 형무소를 돌아보며 처절했을 그 시간들을 짐작해 본다. 밖으로 나오면 6000여 평의 공원이 잘 가꾸어져 있다. 일제 강점기에 환자들의 강제노역으로 조성된 곳이다. 환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과 한으로 만들어진 공원의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허투루 볼 수가 없다. 편백나무, 소나무, 향나무, 철쭉과 종려나무, 장미터널 등 각종 꽃과 나무, 그리고 잘 가꾸어진 푸른 잔디 위에 그들의 아픔을 표현한 시화가 줄지어 서있다. 공원 중앙에 하얀 탑이 하늘 높이 눈부시다. 성 미카엘 대천사가 악마인 한센병을 발로 밟고 박멸하듯 창으로 찌르는 형상이다. 그 아래엔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문구가 있다. 옆면으로는 1963년 당시 근로봉사단이었던 국제워크캠프 남녀 대학생 133명의 대학생 이름이 적혀 있다. 이것이 소록도의 랜드마크 구라탑(救癩塔)이다. 말 그대로 나병에서 구함을 얻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또 하나의 탑이 있다. 1962년 소록도의 나환자를 돌보러 오스트리아에서 멀고 먼 이 땅으로 온 마리안과 마가렛 두 수녀님의 공적비다. 40년이 넘도록 맹목적인 헌신으로 수많은 환자들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았던 분이다. 연로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 소록도에 부담이 될까 봐 편지 한 장 남기고 40년 전에 들고 왔던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고향으로 떠났다고 한다. 현재 두 수녀님의 노벨평화상 후보 추천을 위한 활동이 펼쳐지고 있는 중이다. 이제 소록도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섬이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지켜주고 덮어주지 못한 세월을 산 분들에게 가졌던 편견의 벽이 부끄럽다. 그들이 소록도에 갇혀 산 시간에 편안히 살아서 미안하다. 전남 고흥의 끝자락인 녹동항 앞바다에 있는 아기 사슴의 머리 모양을 닮은 작은 섬 소록도(小鹿島), 지금은 그 섬의 생명력을 닮은 푸르른 등나무가 붉은 벽돌담을 가득 덮고 있다.
- 2019-05-24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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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이 ‘멋진’ 기네스를 마저 알아야겠어”
- 맥주라곤 하이트, 카스만 알던 시절, 난생처음 맛본 흑맥주의 맛은 충격적이었다. ‘간장 향’, ‘한약 맛’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강렬했던 맛이 잊히지 않듯 흑맥주의 매력은 입안에서 계속 맴도는 풍미에 있다. 영화 ‘킹스맨’을 본 사람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기네스(Guinness)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Kingsman:The Secret Service), 2015 장르 액션, 스릴러 감독 매튜 본 출연 콜린 퍼스, 태런 에저튼, 사무엘 L. 잭슨 등 ‘콜린 퍼스의 수트 포르노’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영화 속 콜린 퍼스는 수트를 입고 우산 하나로 악당을 처치하며 수트의 정석을 보여준다. 이러한 ‘킹스맨’의 독보적인 스타일링은 턴불&아서 셔츠, 드레이크 넥타이, 스웨인 아데니 브릭의 여행 가방, 브레몽 시계, 조지 클레버리 구두 등 전 세계 소수만 사용하는 명품 브랜드의 참여로 완성됐다. 신사의 나라 영국의 영화답게 젠틀맨 스파이 ‘킹스맨’의 작전 기지 또한 영국 새빌로에 있는 맞춤 양복점. 킹스맨 요원이 수제 양복으로 스타일을 자랑했다면 악당은 힙합 요소가 들어간 패션을 선보인다. ‘007’, ‘본’, ‘미션임파서블’ 등 스파이 영화에서 술이 빠지지 않듯 ‘킹스맨’에서도 다양한 술이 등장한다. 특히 해리(콜린 퍼스 역)가 ‘멋진(lovely)’이라고 표현한 아일랜드 대표 맥주 ‘기네스’는 킹스맨 최고의 명대사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th man)”가 탄생한 장면에서 빼놓을 수 없다. 펍에서 기네스를 마시고 있던 해리는 그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무리에게 “난 이 멋진 기네스를 마저 마셔야겠다”고 말하며 물러가기를 요청하지만,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자리를 떠나는가 싶더니 가게 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이들을 차례차례 때려눕힌다. 이 장면의 화룡점정은 마지막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리로 돌아가 남은 기네스를 마저 비우는 그의 모습이다. 기네스의 풍미와 부드러움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이 장면은 통쾌함에 갈증이 해소되면서도 해리처럼 당장 기네스를 한잔 비우고 싶은 욕구를 일으킨다. 기네스를 한 번이라도 마셔봤다면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을 포기할 수 없었던 해리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맥주계의 젠틀맨, 기네스 하루에 약 1000만 잔 이상 소비되는 기네스는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맥주다. 하지만 청량감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첫맛에 당황할 수 있다. 탄산이 강한 다른 맥주와 달리 기네스는 청량감이 거의 없다. 우리가 기네스 광고를 볼 때 부드러운 느낌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기네스 특유의 부드러운 풍미와 거품의 비결은 바로 질소를 사용한다는 점에 있다. 1959년 기네스는 맥주 안에 질소를 넣어 이산화탄소가 담긴 다른 맥주보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거품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영화 속 해리가 샴페인, 위스키, 칵테일이 아닌 맥주 기네스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해리 역을 맡은 콜린 퍼스가 아일랜드 출신 배우이기 때문에’, ‘친근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등 많은 추측이 있지만 확실한 건 영화가 끝나도 계속 생각나는 콜린 퍼스처럼 기네스도 한 번 맞보면 쉽게 잊을 수 없다. 그만큼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9000년 임대 계약 체결 기네스 창립자 아서 기네스(Arthur Guinness)는 1759년 아일랜드 더블린에 위치한 폐기된 양조장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를 매년 45파운드(약 6만5000원)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9000년간 임대하는, 역사상 가장 독특한 계약을 맺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260년이 지났으니 앞으로 8740년이 더 남은 셈. 현재 기네스 양조장이 있는 더블린은 아일랜드 최고 관광 코스 중 하나다. 캔 속 작은 공의 정체 다른 캔맥주와는 달리 기네스 캔맥주에는 특별한 ‘무엇’이 들어 있다. 캔을 흔들었을 때 딸랑딸랑하면서 움직이는 이 물체의 이름은 ‘위젯(widget)’. 1991년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술 진보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발명품은 기네스 특유의 부드러운 거품층을 생성시킨다. 간단히 설명하면 캔을 땄을 때 압력 차로 인해 플라스틱 공(위젯)에 들어 있던 질소가 빠지면서 맥주와 섞여 부드러운 거품을 일으키는 원리다. 따라서 기네스 캔에 든 물체는 이물질이 아니니 안심하고 먹어도 된다. 기네스와 기네스북의 관계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기네스북’은 기네스와 관련이 있다. 기네스 양조회사의 상무이사였던 휴 비버(Hugh Beaver)는 어느 날 어떤 새가 가장 빠른가에 대해 사람들과 논쟁을 했고, 그 사건을 계기로 세계 최고 기록들을 모은 책을 구상하게 됐다. 그 후 약 1년간의 조사 끝에 1955년 기네스의 이름을 딴 ‘기네스 북 오브 레코드(The Guinness Book of Records)’ 초판본이 출간됐고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2000년부터 ‘기네스 월드 레코드(Guinness World Records )’라는 제명으로 바뀌었고, 2001년 기네스는 기네스북 판권을 다른 회사에 넘겼다. 아일랜드보다 더 아일랜드다운 기네스 기네스 엠블럼으로 사용되고 있는 하프 문양은 1862년부터 현재까지 총 여섯 번의 수정을 거쳐 완성됐다. 흥미로운 점은 1922년 아일랜드 정부가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악기인 하프를 엠블럼으로 사용하려고 신청했지만 거절됐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1876년 기네스 사가 먼저 하프를 트레이드마크로 등록을 했기 때문. 결국 기네스보다 한발 늦은 아일랜드 정부는 하프를 엠블럼으로 사용하기 위해 기네스 엠블럼과는 다른, 좌우 위치가 바뀐 하프 문양을 쓸 수밖에 없었다.
- 2019-02-2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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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지에서 터득한 생활 철학
- 나에게는 조그만 여행용 가방이 있다. 벌써 몇 년째 충실한 동반자 역할을 하며 지구 반대편을 함께 다녔다. 서유럽, 북유럽 등 여러 나라를 다녔고 터키에도 10여 일이나 넘게 동행했다. 옛날에 가지고 다니던 가방은 좀 낡고 작아 새로 구매했는데 귀중품을 넣기에 적당한 크기여서 애용했다. 여행할 때는 어깨걸이 멜빵을 하고 허리띠에 끼워 덜렁거림을 방지하면서 도난의 위험을 막았다. 그렇게 몇 년을 함께했어도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스페인 여행길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철옹성 같았던 가방 문이 열린 것이다. 여행 중 가이드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소지품 조심하라는 말이다. 가방 속에는 여권, 신분증, 신용카드, 현금 등 귀중품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소지품을 잃어버리거나 도난당하면 어렵게 온 여행을 망치게 된다. 여권 없이는 꼼짝도 못한다. 유럽은 이러한 가방을 노리는 사람들의 천국이다. 떠돌이 집시들이 많다. 가난한 나라에서 넘어와 일자리 없이 방황하거나 쉽게 돈 버는 일에 빠져든다. 그래서 도난사고가 잦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없다. 내 가방이 안전하다는 믿음이 지나쳤던 걸까? 스페인의 유명한 관광지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꽃보다 할배’라는 모 TV 프로그램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누에보다리’에서였다. 신구 시가지의 경계인 120m 협곡에 놓인 다리 길이는 얼마 안 되었는데 아래로는 완전 벼랑이었다.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벼랑 위 양쪽에는 조그만 집들이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었다. 카페도 있어 차를 한잔하는 스릴을 만끽할 수 있었다. 수많은 관광객이 이 기이한 장면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나도 사진을 찍기 위해 자리를 옮겨가며 열중했다. 이때 어디서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저씨~” 마치 비명소리 같았다. “저 사람이 아저씨 가방에서 검은 지갑을 꺼냈어요~” 돌아보니 신혼부부처럼 보이는 젊은 남녀와 시어머니로 보이는 아줌마 한 분이 있었다. 그중 젊은 여자가 내 가방을 뒤졌다고 했다. 곧바로 외국인 3명의 신병을 확보한 뒤 뭘 가져갔느냐고 보디랭귀지로 따지니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고 딱 잡아뗐다. 하지만 철옹성 같았던 가방 문은 아무 저항도 못하고 무기력한 듯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가방 속을 살펴보니 다행히 지갑은 있었다. 일행 중 한 명의 외침을 듣는 순간 도로 집어넣은 것이 틀림없었다. 혼자 하지 않고 신혼부부나 가족처럼 여행객을 가장한 3인조 전문 털이범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행운이었다. 만약 지갑이 털렸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팔을 잠시 올렸을 뿐인데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그들은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다. 주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작전 성공이었을 것이다. 여행 관련 격언이 떠오른다. “등 뒤에 있는 물건은 공동의 것이고, 옆에 있는 것은 나눠 쓰는 것이며, 앞에 있는 것만이 내 것이다.” 여행하는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말이다.
- 2019-02-22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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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팔 히말라야 100km 트레킹 완주
- 1월 6일부터 20일까지 네팔의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왔다. 전남불교환경연대가 주관하고 청소년 13명이 포함된 총 27명 팀에 나도 합류한 것이다. 목표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등정이었다. 8박 9일간의 일정에 네팔 수도 카트만두와 제2의 도시 포카라 관광도 포함되어 있었다. 네팔은 한국과 3시간 15분 시차가 나는 나라다. 남한보다는 약간 크고 인구는 약 3000만 명이다. 세계 10대 최고봉 가운데 8개의 봉우리를 보유한 산악 국가다. 히말라야에서는 해발 7000m가 넘지 않으면 ‘마운틴(mountain)’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는다. 심지어 세계 3대 미봉으로 불리는 마차푸차레도 피크(peak)로 불린다. 8박 9일간의 히말라야 트레킹은 비행기를 타고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이동하고 다시 버스로 2시간 만에 당도한 나야풀에서 시작되었다. 첫날부터 고전이었다. 4시간짜리 코스였는데 돌계단으로 된 오르막을 오르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숙소에 돌아와 땀에 젖은 옷을 말려봤으나 습도가 높아 귀국하는 날까지 마르지 않았다. 다음 날에는 7시간을 걸어 고라파니까지 갔다. 계속 오르막 돌계단이 나왔고 소똥, 말똥이 마구 방치되어 있어 냄새가 진동했다. 이날부터 체력 미달로 탈락자가 한 명 나왔다. 끝없이 이어지는 돌계단, 등에 진 짐이 부담스러웠다. 원래 짐을 날라주는 포터를 2인당 한 명씩 고용했는데 포터가 가지고 가는 짐 외에도 개인이 지고 가야 할 짐이 있었는데 그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날씨 또한 한국의 늦가을 정도의 기온이라 내복을 입은 사람들은 진땀을 빼며 고전했다. 3일 차에는 새벽 일출을 보기 위해 푼힐 전망대에 올랐다. 우리는 이미 3000m 고도까지 올라와 있었다. 이때 가장 걱정하던 고산병 증세가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목적지인 4130m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갈 수 없다고 했다. 샤워도 하지 말고 특히 머리를 따뜻하게 유지하라고 했다. 샤워는 물론 세수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털모자를 쓰고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물티슈로 눈곱만 겨우 닦아내는 고양이 세수를 했다. 남자들은 아예 면도를 포기했다. 자외선 차단제도 땀이 워낙 많이 나서 소용없었다. 무엇보다 날마다 땀에 젖어도 목욕을 못하는 것이 고역이었다. 4일 차에는 타다파니에서 촘롱을 거쳐 시누와까지 6시간, 5일차에는 도반, 히말라야 롯지, 데우랄리까지 6시간을 걸었다. 길도 가파랐지만 데우랄리는 해발 3150m라서 고산병을 적응하는 구간이었다. 도반부터는 눈길이었다. 아이젠 없이는 걸을 수 없는 겨울 날씨에 진눈깨비까지 내려 길이 사라지기도 했다. 6일 차는 디데이였다. MBC로 불리는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해발 3700m), ABC로 불리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해발 4130m)까지 갔다가 다시 마차푸차레 캠프로 돌아와 숙박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입구에는 트레킹 완주 축하, 환영 간판이 있었다. 그 위쪽으로 故 박영석 대장과 히말라야에서 숨진 산악인들을 추모하는 묘비가 있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가 마치 서울의 인왕산처럼 마음만 먹으면 올라갈 수 있을 것처럼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안나푸르나는 8091m, 마차푸차레는 6993m이다. 전문 암벽 등반 기술이 필요한 구간이다. 고산병 증세가 여러 사람에게서 나타났다. 두통에 심하면 구토 증세까지 보였다. 소화도 안 되어 방귀도 자구 뀌게 된다. 약을 먹는 사람도 있었지만, 가이드 말로는 소용없는 일이라고 했다. 이날은 긴장이 많이 됐다 기대감과 동시에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신령한 산으로 쉽게 등정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마차푸차레가 눈앞에 다가와 있고 그 아래 양쪽으로 눈 덮인 산들과 계곡을 보고 있자니 태고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설산의 한기와 찬바람은 이불 안쪽까지 뚫고 들어왔다. 7일 차부터는 하산을 했다. 밤부까지 내려온 뒤 8일 차에는 촘롱에서 갈림길로 지누단다까지, 9일 차에는 나야풀까지 매일 8시간을 걸었다. 8박 9일 동안 우리는 약 23만 보, 100km를 걸었다. 히말라야는 여러 산이 겹쳐 있다. 그래서 산 하나를 넘어가려면 계곡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그다음 산을 올라야 한다. 당연히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반복되었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가다 보면 또다시 급경사로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했다. 그마저 돌계단은 우기에 홍수와 산사태가 자주 없어진단다. 도반까지는 돌계단이 많지만 그 뒤부터는 자연스런 흙길이다. MBC에서 ABC까지는 왕복 4시간 코스. 양옆에 트인 계곡이 있어 분위기가 호젓했다. 68세의 나이로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 코스를 완주했다. 이 코스에 도전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모두 말렸다. 체력적으로도 무리일 뿐 아니라 특히 고산병이 위험하다고 했다. 그러나 위험한 상황도 없었고 고산병 증세도 겪지 않았다. 평소의 체력만으로도 젊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같이 행동할 수 있었다. 시니어의 버킷리스트에 히말라야 트레킹이 들어 있어도 소망일 뿐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 이제 뿌듯한 마음으로 버킷리스트 항목 하나를 지운다. 탄탄해진 무릎 위 근육과 허벅다리 뒷 근육을 만져본다. 숙박과 숙식 롯지(Lodge)는 우리나라 민박집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숙박 시설이 열악하다. 샤워하기가 어렵다. 더운 물을 쓰려면 200루피(한화 2000원) 정도 내야 하고 방은 난방이 안 된다. 싼 건축 자재로 만들어진 건물이라 문도 틀어져 있어 바람이 숭숭 들어온다. 침낭만으로는 추위를 이길 수 없다. 수단껏 이불을 구해왔고 150 루피 정도에 뜨거운 물을 사서 물통과 핫팩을 안고 자야 했다. 식사 메뉴도 다양하지 못해 전통 음식인 달 바트를 자주 먹었다. 돈을 더 주면 한국 라면과 밥을 먹을 수 있다. 김치찌개 등 한국 음식을 파는 롯지도 있다.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좌식 변기라 불편했다. 휴대폰 충전과 와이파이를 사용할 때도 100~200루피의 돈을 받는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롯지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성수기에는 예약 없이는 숙박도 어렵다. 독방도 있지만 대부분 한 방에서 4~6명이 자야 한다. 보통 6시에 저녁식사를 마치지만 특별히 여가시간을 즐길 거리가 없어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자는 경우가 많다. 복장 1월의 날씨이지만, 카트만두는 낮 기온이 약 20℃나 된다. 그러나 고산에서는 영하 15℃까지 떨어지므로 옷을 다양하게 준비해야 한다. 아침시간에는 손이 곱을 정도로 춥고 트레킹을 하다 보면 땀이 나서 하나씩 벗게 된다. 포터가 짐을 날라주지만, 포터 짐에 더 이상 넣을 공간이 없으면 나머지 짐은 스스로 메고 가야 한다. 기온 편차가 심해 여름옷에서 겨울옷까지 갖춰야 하니 짐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포터는 여러 사람 짐을 합쳐서 지고 가기 때문에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은 가져가면 안 된다.
- 2019-01-21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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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여자농구의 아이콘, 강현숙
- 한국 여자농구 전성기의 중심엔 강현숙, 박찬숙, 조영란, 정미라, 전미애 등의 스타군단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강현숙은 빼어난 미모와 실력으로 수많은 남성 팬을 몰고 다녔다. 1972년 청소년 대표팀으로 첫 태극마크를 단 뒤 1980년 은퇴할 때까지 국가대표로 맹활약한 강현숙(姜賢淑·64)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재정위원장을 만났다. “돌이켜보면 그때 무슨 생각으로 농구를 하겠다고 손을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그가 농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조금 특별하다. 초등학교 5학년, 농구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는 담임선생님의 말에 무턱대고 들어 올린 손 덕분(?)이었다. 내성적이고 심지어 운동도 딱히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고 고백하는 그는 “어쩌면 나의 농구 인생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던 연습벌레 그가 챙겨온 앨범을 열자 그의 선수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마치 한 장면도 잊은 적이 없다는 듯이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이때는~”, “이건~” 이라며 설명을 덧붙인다. 그가 어렸을 때 부모님과 찍은 흑백사진부터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젊은 시절의 사진까지, 마치 그의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 기분이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사진이 있었다. 바로 ‘박신자 선수와 같이 훌륭한 선수가 되기 위해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자’라는 문구가 써진 자료다. 가로도 아닌 세로로 써진 글자는 비장함을 더했다. “박신자 선수가 제 롤 모델이었어요. 1967년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우리나라가 2위를 했는데 이례적으로 우승팀이 아닌 준우승팀에서 최우수선수상 수상자가 탄생했죠. 그 주인공이 바로 박신자 선수였어요. 정말 대단해 보였죠.” 1999년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아시아 선수로는 유일하게 헌액된 박신자 선수의 인상 깊은 플레이는 새내기 농구선수였던 강 위원의 열정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매일매일 농구에 ‘올인’하는 생활이었다. “새벽에 학교에 가면 교문이 닫혀 있었어요. 그러면 철문 사이로 가방을 밀어 넣고 담을 넘어서 체육관에 가곤 했죠. 오후에 본 연습이 끝나면 남아서 또 연습했고요. 드리블 연습, 슛 연습 등 혼자 할 수 있는 연습은 다 했던 것 같아요. 밤늦게 집에 도착해서 밥을 먹다가 잠드는 날도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을 농구에 다 쏟아부었죠.” 누구보다 성실하게 노력한 덕분이었을까. 그는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 주전으로 뛰었다. 비록 첫 데뷔 무대에서 골대 방향을 잘못 알고 역주행하는 바람에 자살골을 넣을 뻔했지만 말이다. 그 후 8년간 국가대표선수 생활을 하면서 세계 베스트5에 두 차례나 선정되고, 1979년과 1980년엔 국가대표팀 주장으로서 팀을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2위,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버린 만남 그는 가장 특별했던 경험으로 북한팀과의 경기를 꼽았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은 여자농구가 아시안게임 공식 종목으로 채택된 대회이기도 하지만 중국과 북한이 참가한 첫 아시아 스포츠 무대였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그는 난생처음 북한 선수를 만난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을 떠올리며 “참 할 말이 많은 경기였다“며 운을 뗐다. “선수촌 셔틀버스를 타면 타국 선수들이 있든지 말든지 북한 노래를 부르다가 마지막엔 ‘조선은 하나다!’ 하고 고함을 쳤어요.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은 물론이고 경기 전 몸을 풀 땐 우리나라 코트까지 넘어오면서 비매너의 끝을 보여줬죠.(웃음)” 북한 선수들은 경기 내내 거칠게 굴었다. 그는 “실력은 우리나라보다 뒤처졌지만 괜히 겁이 났다”고 털어놨다. “루즈볼 상태에서 볼을 다투는데 북한 선수가 볼이 아닌 김은주 선수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내리친 거예요. 결국 들것에 실려 나갔죠. 싸우자는 건지 경기를 하자는 건지….” 한국팀이 큰 점수로 리드하며 경기를 끌고 가자 북측은 게임 종료 2분여를 남기고 퇴장소동을 벌였다. 심판이 반칙한 북한 선수에게 파울을 선언하자 마치 준비해놓은 대본이라도 있는 양 일제히 항의하더니 한국팀을 향해 “너네 심판한테 돈 멕였구나”라고 소리치며 경기장을 나가버린 것이다. 그날 이후 강 위원이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북한 여자농구팀을 볼 수 없었다고. 그렇게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북한 선수와의 인연은 감동이 아닌 전투적 만남으로 기억되고 있다. 여자농구의 제2전성기를 바라며 “요즘 남자 아이돌 부럽지 않았어요.” 그가 기억하는 1970년대 여자농구의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경기가 끝난 뒤 나오면 팬들에게 둘러싸여 꼼짝 못하는 일들이 다반사였고 초등학생, 성인 가릴 것 없이 국민들이 보내온 팬레터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1979년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세계선수권대회가 있었던 날은 1층부터 3층까지 빈자리가 없었어요. 경기하다 슛이 들어가면 그 많은 관중이 동시에 함성을 지르는데… 상상해보세요. 소름이 돋다 못해 희열을 느낄 정도였죠.” 특히 그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박찬숙 선수와의 패스 플레이가 득점으로 이어지면 관중의 뜨거운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는 “박찬숙 선수는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동료”라고 설명했다. 농구 코트를 떠난 지 38년이 지난 지금, 그는 세 딸의 어머니이자 ‘손주 바보’ 할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1일, 그의 농구 스토리를 담은 자서전 ‘나는 국가대표 포인트가드’를 출판했다. 자신에게 돌아올 관심보다는 독자들이 다시 한번 옛날 여자농구를 추억하고 그때의 사랑을 현역 선수들에게도 이어줬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예전엔 스포츠 종목이 다양하지 않기도 했지만, 여자농구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주목을 많이 받았어요. 반면 요즘엔 워낙 많은 종목이 생기면서 인기가 좀 분산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 많던 여자농구팀이 이젠 여섯 팀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아쉬울 뿐이죠.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 한국여자농구연맹 재정위원장으로서 한국농구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거예요. 사람들의 관심을 조금씩 얻다 보면 언젠가는 여자농구의 전성기가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요?”
- 2019-01-03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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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셀 뒤샹’展 개최, 뒤샹의 인생 여정 4부로 담아내
- 국립현대미술관은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과 공동 주최로 ‘마르셀 뒤샹’ 전을 22일부터 새해 4월 7일까지 서울 종로구 MMCA 서울 1, 2 전시실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전 세계에서 뒤샹 작품을 최다 보유한 필라델피아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협업으로 현대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마르셀 뒤샹의 작품 150여 점과 아카이브를 선보인다. 이중 다수가 국내 최초 공개작이다. 뒤샹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샘’ 등 레디메이드(기성품을 예술적 맥락에 배치해 재탄생시킨 작품)도 함께 만날 수 있다. 전시는 뒤샹의 삶 여정에 따른 작품 변화를 총 4부로 나누어 소개한다. 1부에서는 작가가 청소년 시절부터 인상주의, 상징주의, 야수파 등 당시 프랑스의 화풍을 공부하며 제작했던 그림과 드로잉을 선보인다. 특히 뉴욕 아모리 쇼에 전시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1912년 작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2)’가 포함된다. 2부에서는 뒤샹의 대표작 ‘큰 유리’ 제작에 영향을 준 ‘초콜릿 분쇄기’ 등 관련 작업과 ‘자전거 바퀴’, ‘샘’ 등 레디메이드 작품을 소개한다. 3부에서는 뒤샹의 작품을 총망라한 미니어처 이동식 미술관 ‘여행가방속 상자’를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1941년 에디션과 필라델피아미술관 1966년 에디션을 함께 비교 감상할 수 있다. 마지막 4부는 세계 여러 곳에서 전시를 하던 뒤샹의 아카이브를 보여준다. 1950년대 많은 사람들이 그가 예술계를 은퇴했다고 생각했지만 뒤샹은 아무도 모르게 20년에 걸쳐 마지막 작업에 매진했다. 그 마지막 작업으로 알려진 ‘에탕 도네’를 제작하며 남긴 스터디 작품도 공개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뒤샹의 삶과 작품에 영향을 준 사진작가 만 레이, 건축가 프레데릭 키슬러 등 다양한 예술가들과 생전 협업 모습도 만날 수 있다. 또한 전시실 앞 열린 공간에서 한 달 간 전시와 연계한 다양한 교육, 문화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자세한 정보는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2018-12-21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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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직도 파리 경찰의 연락을 기다린다
- 프랑스 남부 도시 니스를 가기 위해서는 로마나 파리를 경유해야 한다. 나는 그중에서 파리 경유를 선택했다. 나만의 이유가 있다. 아주 오래 전의 파리 여행을 했을 때는 어린 두 아들을 챙기며 사진 찍어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내 생각이 깃든 파리 사진이 얼마 없다. 이번엔 잠깐이지만 파리 사진을 많이 찍어보고 싶었다. 카메라 배터리와 메모리 카드도 여유 있게 더 준비했다. 늘 간단히 하나 들고 나섰던 카메라에 이번엔 렌즈도 하나 더 넣었다. 그날따라 파리 드골 공항에선 공연히 분주했다. 트렁크 속의 카메라 가방을 꺼내어 따로 메고 가려했지만 어쩐지 공항의 심란한 상황으로 그럴 틈이 안 생겼다. 마음이 분주하다 보니 진땀나고 정신도 없었다. 이날따라 입국심사를 기다리는 여행자의 줄도 길어서 지쳐버렸다. 소르본느 대학 근처에 예약해둔 숙소에 가서 어서 빨리 짐을 풀어놓고 홀가분해지고 싶었다. 드골공항에서 파리 시내로 들어가는 RER기차의 B노선은 문이 활짝 열린 채 출발지의 여유를 보여준다. 이 여유로움이 문제를 만들었을까. 아니면 긴 비행시간과 입국절차의 피로가 방심을 만들었을까. 떠올리고 싶진 않지만 가끔 이때를 생각해 본다. 파리의 도둑놈은 재빨랐다 도둑을 도둑님이라 할 수도 없고 도둑이라고만 말하고 싶지도 않다. 이럴 때 마음 놓고 '놈'자를 써 보고 싶다. 기차에 올라 트렁크를 내 자리 옆에 놓고 출발시간이 얼마나 남은 건지 휴대폰 시계를 잠깐 보며 한숨을 돌리는 시간이 불과 10초나 20초 정도였을 것이다. 내 옆에 있던 트렁크가 순간 없어졌다. 어? 둘러보아도 없다. 내 비명에 모르는 주변 사람들도 일어나 친절하게 이쪽저쪽 찾아봐 준다. 머릿속이 하얘졌고 출발 전 기차에서 얼른 내렸다. 그리고 무전기 들고 오가는 공항직원에게 말했더니 안내데스크에 우릴 데려다 놓고 기다리라고 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기다리게 하는 그들의 무심함에 화가 치밀어 직접 물어물어 미로 찾듯 공항경찰을 찾아갔다. 이때쯤 난 가방 찾기가 어려울 거란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냥 맥없이 포기하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결과와 상관없이 파리 사람들의 이런 짓을 그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분노와 멍청함으로 온전치 않은 정신의 내게 친절히 길안내를 해준 지나던 멋진 조종사와 젊고 착한 어느 공항직원이 그나마 미쳐버릴 것 같았던 나를 조금 가라앉혀 주었다. 육중한 철문의 공항 경찰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구에서 인터폰으로 연결해줘야만 하는 또 다른 공항직원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여곡절 끝에 겁 없이 공항 경찰서에 들어가니 건장한 흑인 경찰이 우릴 맞는다. 경찰복으로 무장한 그 모습에 조금 두려움이 생겼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이미 피곤하고 지쳤다. 정수기가 보이기에 물 좀 먹어도 되는지 물었더니 직접 한 잔 받아다 준다. 친절하군... 조금 마음이 놓였다. 이제부터는 정식 절차에 따라 분실 신고를 하면 된다. 말도 안 통하는데 어째야 하나 막막했지만 영어를 그런대로 받아주어 남편이 한참을 설명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조금 있더니 전화를 받아보라고 한다. 한국인 여자 불어 통역사였다. 세계 각국의 통역 장치가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파리 경찰과 통역사를 중간에 두고 자초지종을 모두 이야기했고 연락처와 연결방법 등을 남겼다. 전화를 끊기 전 그 통역사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런데요... 크게 기대는 안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곳에서는 이런 일이 흔하기 때문에 각자 조심하는 수밖에 없어서요." 아무튼 파리 공항경찰에서 마음껏 한국말을 할 수 있게 해 준 그녀가 무조건 고마웠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경찰은 그것을 한 시간 정도 서류화 하느라 바빴고 우린 기다려 여러 장의 서류에 서명을 하고서야 끝이 났다. 공항열차를 타러 밖에 나오니 캄캄했다 기진맥진했지만 분풀이하듯 공항경찰에 모든 걸 털어내고 나서 그런지 시원했다. ‘까짓 가방 하나 잃어버릴 수도 있지 뭐, 살다 보면 별별 일 다 있는데 여행 중에 이런 일 정도 해프닝이라 해 두자...’ 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호텔에서 잠들라치면 속이 뒤집히며 화병을 일으키듯 속상하기를 몇 번이었지만 이런 여행도 해 본다 하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참아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여권이나 여행에 필요한 중요물품은 모두 남편 가방에 있었다. 오직 내 가방만 분실했기에 여행에 큰 지장은 없었다. 남편은 일찌감치 잊어버리라 누누이 말한다. 하지만 내 옷가지와 필요물품 정도는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지만 카메라 관련 일체는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가끔 유럽 여행 중에 생기는 도난방지 꿀팁이라거나 소매치기 체험기를 듣곤 했다. 그러나 나는 무심히 다녀도 그런 일은 여태 한 번 일어나지 않았다고 잘난 척했다가 이렇게 크게 당한 꼴이 되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더없이 소중하고 아까운 내 카메라 생각에 속병이 날 지경이었지만 이젠 분통 터지는 내 여행의 경험담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종종 메일을 뒤적이며 프랑스 경찰의 소식이 없나 찾아본다. 혹시라도 본분에 충실한 파리의 어느 경찰 덕분에 내게 연락이 오는 기적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씩 하는 중이다.
- 2018-12-03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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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어난 여가, 스마트폰 카메라 활용법
- ‘시간 부자’라 말할 정도로 4차 산업혁명과 수명 연장으로 인간에게 한가한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 일주일에 52시간 일하는 제도가 시행됐다. 미래학자들은 머지않아 주 10시간 근로로 충분할 수 있다고 예측한다. 사람이 하던 일을 인공지능 로봇이나 3D프린터 등이 대신하는 환경으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데 가장 힘든 것은 할 일이 없는 경우다. 한마디로 무료한 생활. 장수가 축복이 아닌 고통으로 바뀐다. “하루가 열흘 같아요~”라던 100세를 훨씬 넘긴 어느 장수 할머니의 이야기가 이해된다.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고 그러한 희망으로 산다. 날로 늘어가는 시간을 잘 활용할 일거리를 찾아야 하는 근본적 이유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시니어 세대는 대체로 생업에 매달렸고 은퇴 후 여가를 보내는 방법에 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 “놀아본 사람이 잘 논다”라는 말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낼 준비나 훈련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여가를 재미있게 보낼지에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나는 여가를 보내는 방법을 강의하는데 카메라, 특히 스마트폰 카메라를 이용한 사진 취미를 권유한다. 스마트폰 사진은 취미로 삼았을 때 따로 장비를 사지 않아 비용이 적게 들고 혼자서 잘 놀 수 있는 문화라는 장점이 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은 선명도나 화질 등이 카페, 블로그 등 SNS 활용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진은 이미 대중화해 남녀노소가 따로 없고 영상 언어로 실시간 활용할 수 있다. 때로는 자신이 담긴 사진이 필요할 때도 생긴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찍을 수 있으나 누군가 주변에 없으면 스스로 촬영해야 한다. 주로 카메라를 한 손에 들고 찍거나 셀카봉을 활용한다. 이 경우는 한계점이 있다. 자기 전신이나 특정 행동은 촬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때 스마트폰 카메라의 기능 중 ‘타이머 설정’으로 해결할 수 있다. 타이머는 셔터를 누르면 설정한 시간 후 촬영된다. 가령 카메라 설정에서 10초로 했을 때는 셔터를 누르고 10초 뒤 촬영되는 기능이다. 자기 전신이 잡힐 수 있는 범위에 구도를 잡고 적정한 위치에 스마트폰을 고정해 셔터를 누른 다음 그 위치로 10초 안에 이동하여 자세를 취하면 된다. 나는 거치대 대용으로 빨래집게를 활용한다. 스마트폰을 빨래집게로 집어 고정하면 훌륭한 거치대가 된다(사진 참조). 물론 삼각대를 활용하면 편리하나 일상에서 삼각대를 휴대하기가 쉽지 않다. 빨래집게는 호주머니나 손가방에 넣고 다니기 수월해 쓸모가 많다. 지난봄 초등학교 동창회모임으로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 있는 하동호에 다녀왔다. 친구들이 곤히 잠에 빠져 있는 이른 아침에 혼자서 하동호 언덕배기에서 사진 촬영 장면을 호수 풍광 속에 담았다. 타이머 기능과 빨래집게를 거치대로 사용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한가한 시간을 홀로 보내며 고향의 추억을 되새겨보았다. 여럿이 여행을 떠나 기념사진을 찍으면, 누군가 한 명은 셔터를 눌러야 하기에 모두 함께 담기는 쉽지 않다. 이때 역시 타이머 기능과 거치대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타이머 설정 법은 스마트폰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타이머를 사용한 후에는 다시 기본 설정으로 바꿔둘 필요가 있다. 특별한 순간을 바로 찍어야 하는데 타이머가 작동하면 때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타이머 기능을 해제해 두는 것이 좋겠다. 사진은 예술의 한 분야다. 무엇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마음을 행복하게 한다. 피사체에 몰입하는 순간 때론 무아지경에 이른다. 촬영을 위한 여행도 곁들이면 더욱 좋다. 나아가 사진을 통해 재능기부도 할 수 있으니, 여가를 보내는 것 그 이상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 2018-09-06 1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