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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로 떠나는 ‘미러맨’
- 마블의 영화 '어벤져스2'에 등장해 화제가 됐던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랜드마크 ‘미러맨(Mirror man)’을 이제 터키에서도 볼 수 있다. 미러맨은 ‘그리팅맨’으로 잘 알려진 유영호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이다. 유 작가는 9월 23일 터키로 가는 미러맨을 컨테이너에 탑재했다. 11월초 미러맨은 터키의 고도 부르사(Bursa)에 설치된다. 미러맨은 두 개체가 서로 마주 보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상암동 DMC(디지털 미디어 시티)의 미러맨은 ‘미디어에서의 성찰하는 인간’을, 남미 에콰도르 키토의 작품은 ‘지구촌 남반구와 북반구의 공존과 소통’을 뜻한다. 세계 도시 중 세 번째로 터키 부르사에 설치되는 미러맨은 실크로드의 역사, 나아가 동서양의 교류를 의미하는 작품이다. 유영호 작가는 40만 달러 상당의 이 작품을 터키에 기증한다. 에르신 에르친(Ersin Ercin) 주한 터키대사는 “한국전쟁 70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해에 양국의 우호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유영호 작가는 “코로나19로 시일이 지연되어 걱정했는데 해를 넘기지 않아 다행”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작품은 부르사 시의 아타투르크 광장에 세워진다. 이곳은 서울의 광화문에 해당하는 시내 중심가다. 늘 아름다운 도시 (Beautiful City of All times)를 표방하는 부르사는 터키 아나톨리아 북서부 마르마라 지역에 있는 인구 200만 상당의 대도시다. 오스만 제국의 첫 주요 도시이자 두 번째 수도로 유네스코 지정 유적지다. 건축물 등이 700년 동안 잘 유지돼 문화유산으로서 인정받았다. 지난 2월 알리누르 악타시 시장이 교류 협력 증진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다. 터키 부르사 시는 한국의 경상북도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부르사 시는 11월 5일경 현지에서 작품 준공식과 함께 터키 6.25 참전 70주년 기념 세미나를 개최한다. 유 작가는 11월 초에 현지로 떠나 작품을 설치하고 준공식에 참가한다.
- 2020-09-28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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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혼과 애국의 일념 불태웠던 '무성서원'
- ‘정읍’ 할 때 ‘내장산 단풍’만 떠오른다면 올가을엔 무성서원에도 한번 발길을 돌려볼 일이다. 지난해 한국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의 서원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서원이 발원됐다는 안동 지역 3곳을(소수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거쳐 전라도로 넘어왔다. 정읍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25년 전, 서울역에서 마지막 기차를 타고 정읍에 내려 고창을 간 적이 있다. 마중 나온 친구 차를 타고 고창으로 넘어가는 길은 줄곧 산등선을 따라가는 도로였다. 그때 깊은 밤이었는데도 유별나게 환했다. 옆을 보니 환한 달이 빛을 밝히며 열심히 차를 따라왔다. 그 달을 보자 학창 시절에 배웠던 백제 가요 정읍사가 불현듯 떠올랐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 데를 드데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논 데 졈그랄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정읍의 달이 얼마나 밝던지… 그날 우리 차를 따라 달리던 달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정읍은 내게 이렇게 환한 빛을 밝히는 달의 고장으로 기억돼 있다. 그런데 정읍에 위치한 무성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됐단다. 서원 취재를 핑계로 정읍을 방문하기로 했다. 무성서원이 위치한 곳은 앞으로는 천이 흐르고 뒤로는 성황산을 등진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이다. 원촌마을 한가운데에 무성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안동의 소수서원이나 도산서원, 병산서원은 마을과 뚝 떨어져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에 비해 무성서원은 외양상으로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언제든 마을 주민들이 찾아와 툇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눠도 될 만큼 친근하고 격의 없어 보인다. 서원을 알리는 홍살문도 주민들이 거주하는 대로변에 떡 버티고 있다. 원촌마을이 곧 무성서원이고 무성서원이 곧 원촌마을인 듯싶다. 이런 마음을 읽었던 걸까? 해설가가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무성서원의 특징은 특별한 사람만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신분 차별 없이 수학의 기회를 제공한 데 있다”며 해설을 이어갔다. 또한 이곳은 항일 의병운동의 첫 시작지였단다. 원촌마을에는 2원5사, 즉 서원 두 곳(무성서원, 용계서원)과 사당 5곳(남천사, 송산사, 필양사, 시산사, 도봉사)이 있는데, 구한말 일본 제국주의의 강탈에 맞서 저항한 항일의병운동이 이곳 서원을 중심으로 처음 일어났다고 한다. 항일의병 선봉장으로 알려진 면암 최익현 선생이 무성서원에서 1906년 첫 의병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강연회를 했다는 해설가의 설명에 새삼 원촌마을의 역사적 유산이 위대해 보였다. 무성서원에서 항일의병을 일으켰던 최익현 선생은 결국 일본군에 의해 체포돼 대마도에 감금됐는데, 단식 투쟁 끝에 1907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무성서원이 기리는 인물 중 대표적인 이는 최치원이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해 천재로 이름을 떨친 신라시대의 학자다.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6년 만인 18세에 빈공과(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한 후 학자와 정치가로 이름을 날리다가 고향이 그리워 신라로 돌아온다. 하지만 통일신라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결국엔 태산(현 정읍) 지역 향리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자신의 뜻을 현실정치에 펼쳐 보이지도 못하고 깊은 좌절만 한 채, 이곳 정읍에서 학문에 심취하고 백성들의 존경을 받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최치원. 그가 이룩한 학문의 경지는 높았으나 견고한 신분제 사회를 구축한 신라의 권력층은 그의 능력을 시샘하며 지방으로 떠돌게 만들었다. 이외에도 무성서원은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표작 ‘상춘곡’을 지은 정극인도 기리고 있다. 정극인은 최치원 등과 함께 무성서원의 사당인 태산사에 위패가 있고 무성서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정극인의 묘소와 재실이 있다. 다들 전라도를 예술의 고장이라 부른다. 단순히 근현대사의 예술가들만 배출한 건 아닌 것 같다. 면면한 역사의 흐름 속 문학과 예술의 고장이라는 이름답게 걸출한 문인과 학자들을 배출한 것이다. 역시 남다르다. 마을 한편에는 큰 연못이 있어 연꽃이 한창이다. 안동 지역 서원들이 만든 연못이 서생들의 휴식공간이었다면 이곳 무성서원이 위치한 원촌마을의 연못은 마을 주민들의 휴식공간이다. 연꽃을 즐기며 이곳저곳 산책할 수 있다. 한국의 서원을 엘리트 교육의 산실이라고만 할 수 없는, 마을 교육의 현장이 바로 무성서원이다 무성서원(武城書院) 신라시대 말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사적 166호). 무성서원은 최치원이 태산군(정읍 지역의 옛 지명) 태수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고 떠나자 백성들이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제를 올렸던 생사당(生祠堂), 태산사가 뿌리다. 이후 조선시대 중종 때 태인현감으로 부임한 영천 신잠의 생사당이 태산사와 합해져 태산서원으로 불리다가, 1696년(숙종 22) 사액을 받아 무성서원이 됐다. 무성서원은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효시인 ‘상춘곡’의 작가 정극인, 눌암 송세림, 묵재 정언충, 성재 김약묵 등을 추가로 배향하며 성장했고, 흥선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 철폐에도 살아남아 역사적·학문적 가치를 증명했다. 무성서원의 입구는 현가루(絃歌樓)로 불리는 두리기둥을 쓴 정면 3칸, 측면 2칸 기와집이며 안으로 들어가면 명륜당이 있으며, 오른쪽에 4칸의 강수재(講修齋), 왼쪽에 3칸의 흥학재(興學齋)가 있어 동·서재(東西齋)를 이룬다. 3칸인 신문(神門)을 지나면 사우(祠宇)인 단층 3칸의 태산사가 있는데, 그 안에 최치원을 북쪽 벽에, 같이 모신 사람들의 위패(位牌)는 좌우에 봉안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844년(헌종 10) 중수한 것이며, 명륜당은 1825년(순조 25)에 불탄 것을 1828년에 중건하였다. 특히 이곳 무성서원에는 중요한 서원 연구자료가 있다. 1968년 12월 19일 사적 제166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여행 이야기, 두산백과)
- 2020-08-12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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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길 따라 마음 따라 고르는 취향저격 트레킹
- 트레킹의 묘미라면, 정상이나 완주를 목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쉬엄쉬엄 거닐면 그뿐이다. 그렇게 어디든 걸어도 좋아서일까? 전국 방방곡곡 이름 붙은 코스만 수백여 곳. 이 길과 저 길 사이 고민하는 이들을 위해 올여름 떠나기 좋은 테마별 트레킹 코스들을 소개한다. 참고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 및 각 지자체 홈페이지 여름에 제격, 탁 트인 해안 트레킹 ◇ 변산반도 마실길 (전북 부안군) 물때를 잘 맞춰가야 길이 드러날 정도로 해안과 인접한 코스다. 특히 1코스 조개미 패총길은 밀물과 썰물에 따라 해안 야산길과 바닷길을 선택해 걸을 수 있다. 변산해수욕장, 고사포해수욕장, 격포항, 솔섬, 곰소염전 등을 거쳐 변산반도를 크게 도는 총 13개 코스로 구성된다. [추천코스] 적벽강 노을길 산과 들, 바다를 동시에 감상하면서 갯벌체험이 가능하고 특히 석양이 아름답다. 격포항 주변 각종 해산물 맛집도 즐비함. 7㎞, 2시간 소요, 난이도 ★★☆☆ ◇ 금오도 비렁길 (전남 여수시) 남해안에서 보기 힘든 금오도 해안단구 벼랑을 따라 조성된 트레킹 코스다. 길 이름 ‘비렁’은 여수 사투리로 ‘벼랑’을 뜻한다. 함구미 마을 선착장에서 출발해 촛대바위, 매봉전망대, 온금동전망대, 숲구지전망대 등을 둘러보는 총 5개 구간으로 조성돼 있다. [추천코스] 3코스 함구미에서 배를 타면 곧바로 3코스의 시작인 ‘직포’에 도착한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기암괴석들이 이루는 장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구간. 3.5㎞, 2시간 소요, 난이도 ★★★★★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옛길 ◇ 내포문화숲길 (충남 예산군) 이중환의 ‘택리지’ 팔도총론에서 언급된 지역으로, 충청남도 최장거리 트레킹 코스다. 가야산 주변에 남아 있는 불교와 천주교 성지,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던 흔적들을 따라 원효깨달음길, 내포천주교순례길 등 4가지 테마의 26개 코스가 마련돼 있다. [추천코스] 22코스 여사울성지 입구에서 삽교성당까지 내포문화숲길에서 가장 긴 구간. ‘내포천주교순례길’ 중 한 코스로, 그야말로 순례하듯 오래 걷기 좋음. 23.8㎞, 7시간 소요, 난이도 ★★★★☆ ◇ 밀양아리랑길 (경남 밀양시) 삼문동 밀양강을 따라 걷는 코스로, 아름다운 풍경은 물론 옛 성곽과 읍성, 봉수대 등을 돌아보며 오랜 역사를 만나게 된다. 밀양관아에서 시작해 영남루, 밀양향교, 추화산성, 충혼탑 등을 지나는 3개 코스로, 경남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밀양시립박물관도 들를 수 있다. [추천코스] 2코스 밀양향교에서 시작해 밀양시립박물관까지, 밀양의 역사를 가장 함축적으로 느낄 수 있는 구간. 추화산성 주변으로 깔끔한 휴게시설이 마련돼 있음. 4.2㎞, 2시간 소요, 난이도 ★★☆☆☆ 거동 불편한 시니어도 OK! 무장애 코스 ◇ 가야산 소리길 (경남 합천군) 홍류동 옛길을 복원하고 다듬어 완만하게 걸을 수 있도록 조성한 저지대 수평 탐방로다. 홍류동 계곡을 따라 칠성대, 낙화담 등을 두루 살피며 길상암에서 해인사까지 걷는 단일 코스로 남녀노소 누구나 수월하게 탐방 가능하다. 2.1㎞, 1시간 소요, 난이도 ★☆☆☆☆ ◇ 주왕산 탐방로 (경북 청송군)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인 주왕산과 더불어 용추협곡, 용추폭포 등 자연경관이 빼어난 길이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환자나 노인, 유모차를 타는 아이 모두 함께할 수 있는 무장애 단일 코스로, 곳곳에 장애인 화장실과 쉼터가 마련돼 있다. 2.2㎞, 3시간 소요, 난이도 ★☆☆☆☆ 코로나19 거리 두기에 딱! 인원 한정 예약 구간 ◇ DMZ펀치볼둘레길 (강원 양구군) 민통선 북방지역 화채그릇(punch bowl) 모양의 해안분지 내에 조성된 둘레길로, 형상 자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이다. 미확인 지뢰지대와 인접해 탐방객의 안전과 산림자원 보호를 위해 예약제로 운영된다. 가이드와 동행해야 하며 탐방 가능 인원은 하루 200명이다(033-481-8565). ◇ 금강소나무숲길 (경북 울진군) 금강소나무숲길을 걸으며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과 천연기념물 서식지를 두루 탐방할 수 있는 코스다. 오지에서의 안전한 트레킹과 산양을 비롯한 멸종위기 동·식물 보호를 위해 숲해설가 동반 없이는 탐방이 불가능하다. 구간별 하루 40명만 예약 후 입장할 수 있다(054-781-7118). ◇ 백두대간트레일 (강원 양구군·인제군·홍천군) 백두대간 트레일 코스 중 아침가리 구간(인제군 기린면~홍천군 내면)은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 및 자연휴식년제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산림생태계 보전을 위해 산불 우려가 있는 봄, 겨울은 탐방이 어렵고 5~10월 중 하루 100명 한정으로 예약 후 이용 가능하다(033-461-4453). ◇ 점봉산 곰배령 탐방로 (강원 인제군) 점봉산 정상의 남동향 곰배령을 중심으로 희귀 야생화 및 산약초, 산채류 등이 다량 서식한다. 이로 인해 곰배령을 찾는 방문객이 많아지자 1987년부터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1일 450명 이내로 입산을 통제, 관리하고 있다(033-463-8166, 산림청 홈페이지 예약).
- 2020-07-17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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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나기, 우리에겐 모시옷이 있었다
- 본격적인 무더위가 몰려오고 있다. 충남 서천 여행 중에 마침 한산 모시관이 있어 들렀다. 예로부터 한산 모시는 정갈하면서도 우아한 맵시를 보여주는 한여름 최고의 전통 옷감이었다. 무더위를 이기게 해줄 간소하면서도 시원한 옷들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는 요즘이지만 옛 어른들은 모시옷으로 더위를 잊었다. 산아래 멋진 한옥으로 단정하게 지어진 한산 모시관으로 들어가니 저절로 차분해졌다. 백제시대 때 모시풀을 처음으로 발견한 곳이 바로 이곳 건지산 기슭이었기 때문에 모시관을 이 땅에 지었다고 한다. 입구로 들어가니 뜰 한쪽 작은 밭에서 재배되고 있는 모시풀이 눈에 들어왔다. 방문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심어놓은 듯했는데, 마치 깻잎과 흡사한 모양새였다. 모시풀은 습기가 많고 기온이 높은 곳에서 잘 자란다고 한다. 무엇보다 한산 모시로 만들어진 품격 있는 역사 속 옷들을 보고 싶었다. 지하 1층에는 삼국⋅통일신라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시의 역사와 함께 시대별 전통 복식을 복원해 전시하고 있다. 신분과 관계없이 옛 조상들이 입었던 옷과 의복 재료로 다양하게 사용된 모시의 우수한 품질을 볼 수 있다. 1층에서는 한산 모시의 유래와 발달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한산에서 모시가 언제부터 재배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전시된 글에는 “통일신라시대 한 노인이 약초를 캐기 위해 건지산에 올라가 처음으로 모시풀을 발견하였는데 이를 가져와 재배하기 시작하여 모시 짜기의 시초가 되었다고 구전되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2층에서는 4000번의 섬세한 손길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한산 모시의 제작 과정을 영상과 기록으로 볼 수 있다. 자연에서 채취한 동양의 5원색 백․청․황․적․흑의 천연염료로 만들어낸 우아하고 아름다운 옷들도 감상할 수 있다. 역시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무화유산으로 불릴 만하다. 전통관 안채에서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 모시 짜기 보유자 방연옥 선생의 시연을 보며 전통 공예의 섬세함과 인내의 작업 과정을 이해했다. 머리카락보다 가늘다는 모시올은 작업자들의 입술과 이로 뽑아낸다고 한다. 그렇게 뽑은 모시올을 모아 모시실을 만들고 그 모시실을 베틀에 올려 한 필을 만들어내는 데 무려 5개월이나 걸린다고 한다. 그 과정을 직접 보니 소중함과 특별함이 더했다. 베틀 앞에 앉아 베를 짜기까지의 많은 과정 중에 모시의 품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인‘모시 째기’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이[齒]를 사용하는데, 아랫니와 윗니로 태모시를 물어 쪼개다 보면 피가 나고 이가 깨지는 고통스러움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수백 번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에 골이 파지고 모시 째기가 수월해진단다. “길이 들어 몸에 푹 밴 버릇”일 때 흔히들 “이골이 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분들의‘이골이 나는’작업에서 생겨난 말이다. 한산 모시 홍보관에서는 모시로 만든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국립 농산물품질관리원의 엄격한 품질 기준에 따라 유통 판매가 이뤄지고 있어 믿음이 간다. 모시 전시관에서 연결된 육교 건너편에 한산모시 공예마을이 있어 넘어가 봤다. 1500년 전통의 한산 모시를 현대인들이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모시옷 입기 체험, 미니베틀 체험, 천연염색, 부채 만들기, 모시 공예, 한산 모시식품 체험 등의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준비돼 있다. 모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시간이다. 미리 예약하고 방문하면 즐거운 체험을 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모시옷은 더운 여름 특별한 경우에만 입거나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옷이 되었다. 손이 많이 가고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가격도 아니어서 대중적이지 못한 편이다. 하지만 직접 보고 듣고 살펴보니 한 번쯤 입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로부터 왕에게 진상했다는 한산 모시가 얼마나 시원하고 착용감이 좋은지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밥그릇 하나에 모시 한 필이 다 들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결이 가늘고 고울 뿐 아니라 통풍까지 잘되는 우리의 여름옷이 바로 모시옷이다.
- 2020-06-29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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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의 도시 바투미와 중서부 지역 유적들
- 그리스 신화에 젊은 영웅들이 배를 타고 세계의 동쪽 끝까지 가서 황금양털을 찾아오는 설화가 있다. 바로 ‘아르고호 이야기’다. 이아손 원정대는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황금양털을 찾는 모험을 한다. 마침내 그들이 도착한 곳은 흑해 연안에 접한 고대 조지아의 첫 번째 국가 ‘콜키스’(Kolkhis)였다. 그곳에서 원정대는 이아손에게 반한 ‘메데아’(Medea)의 도움을 받아 황금양털을 가지고 그리스로 돌아간다. 조지아가 신화의 땅으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다. 흑해의 진주 바투미의 핫 플레이스 흑해의 석양이 아름다운 고급 휴양도시 바투미는 조지아의 여름 수도라고 부를 만하다. 여름철이면 주변국에서 온 많은 사람이 휴가를 보낸 후 돌아간다. 그렇다 보니 현대식 건물과 유럽 양식의 건축물과 집들이 뒤섞여 있다. 관점에 따라 난개발로 볼 수도 있고, 신구(新舊)의 조화로 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조지아에서 가장 복잡한 거리이면서 현대화된 도시라는 점이다. 바투미는 ‘불러바드(Boulevard) 해변’과 유럽광장이 중심인 ‘구시가’로 나눠 둘러보는 게 좋다. 다양한 공원과 테마파크가 모여 있는 불러바드 해변에서 여름철에만 영업을 하는 ‘선셋 레스토랑’이 있다. 음식뿐 아니라 조지아의 화려한 전통 무용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불러바드 해변에서는 뮤직 페스티벌 등 크고 작은 축제가 매일 밤 열린다. 해변을 걸으며 이곳 분위기에 푹 빠져보는 시간만으로도 행복하다. 미학적 감동을 넘어 잠들어 있는 나를 깨워주는 해방의 공간에 온 듯한 자유가 느껴진다. 해변 옆 힐튼호텔 20층 ‘스카이라운지’는 전망을 즐길 수 있는 바투미의 숨겨진 명소다. 시시각각 다르게 물드는 바다와 하늘을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다. 수평선을 향해 기울어가는 붉은 태양을 배경으로 나뭇잎 떨어지듯 활강하는 패러글라이딩과 오렌지색 바다 위로 검은 물살을 남기며 가로지르는 배를 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클라리넷의 선율이 감미롭게 들려온다. 흑해가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거대한 공간이 되는 시간이다. 무슬림을 상징하는 남자 ‘알리’와 조지아 정교회를 상징하는 여자 ‘니노’의 이야기를 담은 두 조형물 ‘알리&니노’는 저녁 7시가 되면 조금씩 움직이며 서로 아슬아슬하게 만나지만 키스도 못하고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며 다시 멀어진다. 안타깝고 가슴 저리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표현한 이 작품도 바투미를 상징한다. 여행을 하다 보면 운 좋게도 행복한 기운이 느껴지는 마을에 들를 때가 있다. 바투미 구시가지가 그런 곳. 마치 동화 속 마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메데아 동상’이 있는 유럽광장을 중심으로 천문 시계탑, 황금빛 공연 예술극장, 황금 포세이돈 동상, 신화 속 마녀 사이렌의 조형물, 꽃 장식 테라스가 있는 레스토랑들이 모여 “이곳이 신화의 땅“이라고 속삭인다. 기꺼이 길을 잃고 한 집 한 집 들어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다. ‘보르조미’ 광천수는 신의 선물 조지아 중부지방에 있는 보르조미 국립공원은 유럽 최대 규모의 공원이다. 침엽수와 활엽수의 광활한 원시림으로 이루어져 있어 몸에 좋은 피톤치드가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조지아 사람들은 자녀가 천식을 앓으면 이곳에 데려와 요양을 시킨다. 뇌전증을 앓았던 차이콥스키도 이곳에서 치유하며 음악적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보르조미 시내에 그의 동상이 있다. 이 공원에서 조지아 3대 상품 중 하나인 ‘보르조미 생수’가 생산된다. 한국에서도 수입했던 보르조미 광천수는 자연 탄산 미네랄워터가 빙하로 덮여 있다가 여과되어 내려오는 물이다. 제정 러시아 시절 이곳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 군대 지휘관이 광천수를 마시고 위장병이 나은 후 휴양지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 후 러시아 왕족과 귀족들도 이 물을 들여와 마셨다고 한다. 1894년에는 광천수를 병에 담기 위한 공장까지 생겼다. “신은 아제르바이잔에게는 원유를, 조지아에게는 물을 선물했다”는 말이 있다. 1000년을 마셔도 마르지 않을 물이 보르조미에 있기 때문이다.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린 후 광천수를 마셔봤다. 쇳물 냄새에 짭조름한 맛이었다. 고즈넉하고 쓸쓸한 그리움의 도시 ‘쿠타이시’ 조지아를 여행하다 보면 교회가 참 많이 보인다. AD 337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할 정도로 조지아 사람들의 삶에는 종교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교회도 많다. ‘쿠타이시’(Kutaisi)에 있는 ‘바그라티 대성당’(Bagrati Cathedral) 역시 의미 있는 교회 중 하나다. 조지아 역사상 최초의 통일 왕국을 이룩한 후 그 상징으로 지었다고 한다. 웅장한 규모와 녹색 지붕이 인상적인 이 성당은 조지아 건축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기원전부터 도시로 형성된 쿠타이시는 고대부터 조지아 역대 왕국의 수도였다. 현재도 교통, 행정의 중심도시 역할을 한다. 교회 앞마당에서 내려다본 쿠타이시의 해질녘 시가지는 지나온 굴곡의 시간을 대변하듯 고즈넉하면서도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물들어갔다. 조지아의 경찰은 1등 신랑감 조지아에서 유리로 만들어진 가장 멋진 건물은 무조건 경찰서로 보면 된다. 경찰서 건물이 이토록 환하고 밝고, 멋진 데는 이유가 있다.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후 집권한 ‘사카슈빌리’ 전 대통령은 경찰 개혁을 추진했다. 2004년 부패의 화신이었던 경찰 수장과 3만 명의 경찰을 일시에 해고한 뒤 새 경찰을 모집해 완벽한 물갈이를 했다. 뇌물을 받지 못하게 하려고 급여도 20배 이상 인상했다. 또 모든 경찰 활동을 밖에서 볼 수 있도록 건물을 투명한 유리로 만들었다. 당시의 개혁은 한계와 어두운 측면도 있었지만, 일선 경찰들은 크게 변했다. 이때부터 조지아에서 경찰은 1등 신랑감이 됐다. 요즘 조지아 청소년들은 ‘케이팝’(K-pop)에 열광하고 있다. 탈레비에서 있던 일이다. 일몰을 감상하기 위해 공원으로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오던 세 명의 소녀가 “안녕하세요?” 하면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반갑고 신기해서 30여 분 정도 대화를 나눴다. 소녀들은 케이팝이 너무 좋아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고리’(Gori)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케이팝 때문에 전공을 아예 ‘동양 언어’로 선택하려 한다는 ‘타마르’(Tamar)도 우리를 반겨줬다. 한국인을 직접 만나 정말 기쁘다며 한국 드라마와 노래에 대한 꽤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다. 준비한 김밥과 라면으로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친 그녀는 자신의 친구를 숙소로 불렀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기타를 치며 케이팝과 ‘술리코’(Suliko)를 비롯한 조지아 노래를 부르며 작은 콘서트를 열어줬다. 고리의 광장에서 만난 스탈린타마르를 만났던 ‘고리’는 소련 독재자 스탈린의 고향이기도 하다. 시청 광장에 아직도 그의 동상이 있다. 사진과 유물을 모아놓은 박물관과 생가, 그가 사용했다는 전용열차를 전시해놓은 공원도 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인 역사의 패륜아라는 생각에 그곳을 둘러보는 동안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바람의 나라 아르메니아로 가는 길 바르지아에서 출발해 11번 도로를 타고 아르메니아 제2의 도시 ‘규므리’(Gyumri)로 향했다. 1번 도로를 이용할 것을 주로 추천하지만, 이동거리 때문에 11번 도로를 선택했다. 염려했던 것보다 도로 상태는 좋았다. 새롭게 포장된 구간도 많았다. 오히려 차량이 별로 없어 한갓지고 더 좋았다. 국경을 넘자 고원지대 특유의 초원이 펼쳐졌다. 초원의 풀밭을 쓸며 지나가는 바람의 출렁임이 보였다. 누런 벌판으로 여름날 오후의 햇볕이 쏟아졌다. 눈이 부셨다. 그대로 서서 두 눈을 감고 두 팔을 한껏 벌렸다. 바람이 담아 오는 오래된 전설을 듣고 싶었다. 부드러운 저음색의 목관악기 소리가 끊이지 않고 바람에 실려 왔다. 한이, 처연함이, 소망이 스며 있는 소리였다. 바람은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며 빠져나갔다. 노아의 이야기와 격조 높은 아르메니아의 문화와 검소한 신앙이 남아 있는 곳으로. ◇조지아 중서부 지역에서 꼭 가봐야 할 곳◇ 우플리스치헤(Uplistsikhe)의 ‘고대 동굴도시’ 기원전 10세기경에 만들어진 고대 동굴도시다. 바위를 깎아 공동 집회장소, 궁전, 와인 저장고, 감옥 등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태양신을 섬기는 종교도시였는데 기독교인들이 이주해오면서 그들의 삶의 터전이 됐다. 11세기에는 실크로드의 거점으로 인구가 2만여 명까지 늘어날 정도로 커졌지만 13세기에 몽골 침입으로 폐허가 됐다. 아할치헤(Akhaltsikhe)의 ‘라바티’(Rabati) 성’ 13세기에 세워진 도시다. 조지아어로 ‘새로운 요새’라는 의미를 지닌다.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할 때 구시가지에 있던 ‘라바티 성’은 폐허가 됐다. 2011년 복원을 시작해 새로 문을 열면서 조지아의 유명 관광지로 변신했다. 바르지아(Vardzia)의 ‘동굴도시’ 쿠라 강변의 ‘에루쉐티’(Erusheti) 산비탈에 동굴을 파서 만든 도시다. 12세기에 몽골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짓기 시작해 타마르 여왕 때 완공됐다. 서쪽과 동쪽에 각각 6개의 수도원과 여왕 타마르의 방, 접견실, 회의실, 대장간 등 300여 개의 방과 25개의 와인 저장실로 이루어진 군사요새다. 한때는 5만 명을 수용할 만큼 큰 규모였다. 중세 때는 수도원으로 사용됐다.
- 2020-06-03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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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을 사랑한 넬슨 박사의 별세를 애도하며…
- ‘서울 암사동 유적’지에 세라 밀리지 넬슨 (Sarah Milledge Nelson, 미국 덴버대 명예교수, 1931년 11월 29일 ~ 2020년 4월 27일) 박사의 별세를 애도 하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일반인들은 넬슨 박사를 잘 모른다. 필자도 ‘서울 암사동 유적’에서 문화 해설사로 활동하고 나서야 넬슨 박사를 알게 되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넬슨 박사를 소개하고 싶다. ‘서울 암사동 유적’은 1925년(을축년) 대홍수가 일어나 땅속에 묻혀있던 토기와 석기 등이 노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로는 일본 식민지 시대였으므로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 뒤 1968년 장충고등학교 야구장을 이곳에 건립하려고 터를 닦으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곳 한강 지역이 지금으로부터 6400년에서 3500년 전의 신석기 시대의 주거지임이 밝혀졌다. 그 뒤 추가 발굴 작업을 거쳐 1979년 사적 제267호로 지정되고 준비과정을 거쳐 1988년 8월 30일에야 비로소 일반인에게 처음 공개되었다. 넬슨 박사는 1970년 미군 군의관이던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왔다. 늦게 고고학을 공부하면서 한국 선사 세대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미시건대 대학원에서 '한강 유역 신석기시대 빗살무늬 토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6년 하와이 세계 동아시아 고고학대회에서 한국 고고학이 처음으로 중국이나 일본에 종속되지 않은 독립 분과가 되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나아가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신석기 유적을 소재로 한 소설 '영혼의 새'(영어: Spirit Bird Journey)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소설은 한국 출신으로 미국에 입양된 여성 고고학도 ‘클라라’가 한국에 유학 와 오산리 유적 발굴에 참가하며 출생의 뿌리와 인류의 선사시대 문화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넬슨 박사는 이토록 한국을 사랑하였다. 넬슨 교수는 “그동안 한국 고고학이 국제적 관심 덜 받는 이유로 거대한 피라미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메리카처럼 고대 도시유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라면서 “이제는 문화를 그렇게만 보는 시대는 아니다.” 고 단언했다. 서울 암사 유적의 움집과 빗살무늬토기처럼 선사시대에 우리의 조상들이 “식량은 어떻게 저장했으며, 겨울에 움집 속에서 어떻게 잘 살 수 있었을까, 등이 앞으로 우리가 연구해야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암사동 유적지는 한국의 주거양식을 알려주는 소중한 유적으로서 더 깊이 연구해야 한다며 그 가치를 인정했다. 넬슨 박사는‘서울 암사동 유적’에 대해 ‘훌륭하고(wonderful) 매우 인상 깊다(very impressive)라고 말하며 “유적이 중요하다고 그대로 두면 누가 아느냐? 중요한 점을 앞세워 널리 얘기해줘야 일반 사람도 이해할 것”이라고 현실적인 말을 했다. 넬슨박사의 뜻을 살려 ‘서울 암사동 유적’을 세계에 널리 알려 선사시대에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제대로 연구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되도록 우리 모두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 2020-05-13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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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해녀의삶터 ‘숨비소리길’
- 구좌읍 세화리 바닷가를 걷는데 ‘호오이 호오이’ 휘파람 같은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내는 소리라고 하기엔 기이했다. 물고기가 그런 소리를 낼 리는 없고. 바닷가에 새만 있으니 새소리려니 생각했다. 몇 년이 지난 뒤에야 그 소리가 해녀의 숨비소리임을 알게 됐다. ‘호오이’ 소리를 내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민 해녀를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잠수하는 여자(潛女) 해녀 제주 해녀(국가무형문화재 제132호)는 1~2분간 숨을 참으며 수심 10m까지 잠수해 소라, 전복, 성게, 해삼 등의 해산물을 딴다. 숨 쉴 때는 물 위로 떠올라 재빨리 이산화탄소를 내뿜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이때 ‘호오이’ 숨비소리가 난다. 해녀는 이 과정을 반복하며 여름철에는 하루 6~7시간, 겨울철에는 하루 4~5시간 물질을 한다. 산소마스크도 없이 말이다. 해녀가 잠수에 특화된 신체를 갖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반복된 물질과 훈련을 통한 결과다. 제주 해녀의 물질 기술은 바닷가 마을에 사는 소녀들이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눈치껏 배우고, 훗날 딸에게 가르치며 대를 이어 전승됐다. 해녀는 물질 능력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뉜다. 상군해녀가 대장 해녀이며, 해녀 공동체를 이끈다. 오랜 기간 물질을 한 상군해녀는 채취 기술이 뛰어나고, 바닷속 해산물 서식처와 조류와 바람에 관한 지식이 해박하다. 해녀들이 물질할 수 있는 날씨인지 아닌지를 일기예보보다 상군해녀의 말을 듣고 판단할 정도라고 한다. 제주 해녀의 이런 독창적인 문화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2016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해녀가 다니던 숨비소리길 해녀들은 물질뿐만 아니라 밭일도 하며 생계를 꾸린다. 그녀들이 물질하러, 밭일하러, 부지런히 누비던 길을 스토리로 엮은 것이 ‘숨비소리길’이다. 제주올레처럼 바닷가도 지나고, 마을 골목길도 지나고, 밭도 지난다. 이 길을 걸으며 고된 해녀의 삶을 짐작해보고, 봄기운 무르익은 들판과 비췻빛 바다를 만끽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아쉬워 아껴 걸었더니 한나절이 훌쩍 지났다. 숨비소리길의 출발점인 해녀박물관은 제주 여행 필수 코스다. 제주 해녀의 역사·생활풍습·세시풍속·무속신앙·해녀 공동체 등의 자료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제주 해녀 항일운동사까지 정리돼 있다. 아는 사람만 아는 바다 전망 포인트이기도 하다. 3층 전망대에 오르자 비현실적인 빛을 뽐내는 세화 바다와 세화리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해녀박물관을 둘러보고, 뜰에 있는 해녀상 뒤쪽으로 가, 숨비소리길 첫 이정표를 찾았다. 이정표가 갈림길마다 세워져 있어, 세상없는 길치이지만 걷는 내내 두렵지 않았다. 해녀박물관에서 마을길로 접어들어 세화 축구장을 지나자, 야트막한 언덕 아래 자리한 ‘삼신당 여씨할망당’이 보였다.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돌집 안에 여씨할망신위를 모셔두었다. 제주에서는 할망당, 해신당을 흔히 볼 수 있다. 할망당을 뒤로하고 면수동마을회관 앞을 지날 무렵, 아름드리 팽나무, 네 그루에 눈길이 갔다. 왠지 인사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았다. 제주 사람들은 팽나무를 ‘폭낭’이라고 부른다. 여름 태풍과 겨울 찬바람에도 견디는 폭낭은 마을 쉼터 역할을 한다. 제주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밭담’ 면수동마을회관 사거리에서 하도리 별방진에 이르는 약 2km 구간에는 무, 당근, 보리 등을 심어놓은 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잔잔한 바다처럼 보였다. 세로선보다 가로선이 많은 풍경에 맘이 평화로워졌다. 파스텔 빛 바다도, 진초록 보리밭도, 노란 유채밭도, 검은 현무암 밭담도 모두 나지막이 가로누워 있다. 이 구간이 ‘밭담길’이다. 돌이 많은 제주도에서는 고려시대 때부터 돌을 쌓아 밭 경계로 삼았는데, 이를 밭담이라고 한다. 밭담을 쌓은 뒤로 토지 분쟁이 사라지고, 가축이 농작물에 손해를 끼치는 일이 줄었으며, 농경지 면적이 늘어 제주 농업 발달에 기여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밭담에도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밭담은 제주도의 전통문화 산물로 평가받아, 국가중요농업유산과 FAO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됐다. 세화리에서 하도리로 이어지는 이 밭담길은 바다를 오가며 생계를 꾸몄던 해녀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평상시에는 밭일이나 집안일을 하다가 물때가 되면 바다에 나가 물질을 했다. 알고 보면 고된 물질도 부업일 뿐이었다. 별방진 품에 안긴 하도리 밭담길을 지나 하도리 골목길을 지나면 별방진이 나온다. 별방진은 마을 사람들이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하도리의 옛 지명인 별방에서 이름을 땄다. 성의 총길이는 1008m, 높이는 3.5m.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타원형이다. 별방진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별방진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하도리 마을이, 오른쪽에는 자그마한 하도리 포구가 마주보고 있다. 별방진 안에 초록, 빨강, 파랑 지붕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풍경이 동화 속 그림 같다. 하도리 마을이 유난히 평온해 보이는 건 태풍도 왜적도 다 막아줄 것 같은 별방진이 있어서가 아닐까. 별방진 이후로는 줄곧 해안선을 따라 걸었다. 제주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바닷가에 그물처럼 돌을 둥그렇게 쌓아놓은 원담과 해녀들이 물질하기 전에 옷을 갈아입던 불턱들을 차례로 만났다. 제주 해안에는 마을마다 서너 개의 불턱이 있다. 구좌읍에 해녀들이 특히 많이 살고 있어, 숨비소리길 구간에서만 서동 불턱, 보시코지 불턱, 모진다리 불턱, 생이덕 불턱 등을 볼 수 있었다. 1970년대 초 고무 잠수복이 보급되고, 1985년 전후로 현대식 탈의장이 설치되면서 불턱의 역할은 줄었다. 비췻빛 바다가 매력적인 세화리 세화리 바닷가에 이르자 해녀와 어부들이 물질 작업의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는 ‘갯것할망당’이 눈에 띄었다. 제주 해녀들은 물질하기 전에 해신당에서 용왕 할머니에게 제사를 지낸다. 음력 1월 초부터 3월 초까지, 약 두 달 동안 34개 어촌계에서 해녀굿을 봉행한다. 해녀굿 중 바람신인 영등신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영등굿을 가장 성대하게 치른다. 갯것할망당 옆에는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바닷가에서 솟아나는 용천수를 가둬놓은 ‘도구리통’이 있다. 제주 사람들이 용천수 둘레에 네모난 담을 쌓고, 식수를 뜨거나 빨래를 하던 곳이다. 수도 시설이 잘돼 있는 지금도 물통에서 채소를 씻는 할머니를 본 적이 있다. 도구리통을 지나면 곧 해녀박물관이다. 이미 둘러봤으므로 세화해변까지 이어 걸었다. 제주도에서 물빛 좋기로 소문난 곳이 협재, 금릉, 함덕, 우도 등인데, 요즘은 세화를 추가해 손꼽는다. 세화 바다는 협재나 함덕처럼 번화하지도 않고,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감성 카페와 책방, 소품 가게들이 고요히 자리한 사랑스러운 곳이다. ◇ 주변 명소 & 맛집 ◇ 세화민속오일장 세화해변 끄트머리에 자리한 세화민속오일장은 날짜 끝자리에 ‘0’ 또는 ‘5’가 붙는 날 장이 선다. 규모는 작지만 채소, 곡식, 수산물, 젓갈, 생활용품, 간식거리 등 생활에 필요한 물건은 다 판다. 낭만적인 뷰는 덤이다. 시장 안에서도 세화 바다가 보인다. 이곳 장터는 1930년대 초 하도리·종달리·세화리·연평리·시흥리 등지의 해녀 1000여 명이 항일운동을 벌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매주 일요일에는 시장 앞에서 플리마켓 벨롱장이 열린다.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1500-44 카페록록 하도리 바닷가에는 전망 좋은 카페가 늘어서 있다. 이 중 카페록록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시원한 바다와 돌담을 배경으로 이국적인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유명하기 때문이다. 실내 곳곳에 둔 초록 식물이 온실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인기 포인트. 푸딩처럼 말캉한 에그타르트가 별미다. 제주시 구좌읍 하도서문길 41 / 10:30~18:30 /카페라테 6000원 연미정 세화리에는 전복돌솥밥으로 유명한 식당이 두 곳 있다. 연미정과 명진전복이 그 주인공. 명진전복은 TV에 출연한 덕에 늘 대기 줄이 길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명진전복을, 가성비를 따진다면 연미정을 선택해볼 것. 전복돌솥밥을 주문하면 1인분이라도 작은 고등어 한 마리와 약간의 활어회가 따라 나온다. 반찬 맛은 평범한데, 전복 내장까지 넣어 지은 돌솥밥이 쫀득하고 구수하다. 제주시 구좌읍 세평항로 14 /09:00~21:30 매월 첫째, 셋째주 수요일 휴무 /전복돌솥밥 1만5000원
- 2020-04-07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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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인에 취하고, 사랑에 빠지고, 폴리포니에 감동받는 조지아 여행
- “웰컴 투 시그나기(Sighnaghi)!” 예약한 숙소에 도착해 안내를 받으며 간 곳은 객실이 아닌 테라스였다. 파란 하늘 아래 짙은 녹음 속 밝은 산호 빛 마을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그림엽서 같았다. 포도밭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 의자에 앉으니 주인아저씨가 수박과 와인을 가지고 왔다.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면서 와인을 한 잔 따른 후 건배 제의를 했다. 트빌리시 동쪽의 카헤티(Kakheti) 주에 있는 ‘시그나기’. 인구가 3000명 정도 되는 이 작은 마을에서 본 첫 광경이다. 조지안의 크베브리 와인 사랑 조지아인들의 와인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와인을 마시느라 신이 부르는 자리에도 늦었다는 우화를 말하면서 신도 포기한 와인 사랑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래서 러시아는 조지아를 지배할 때 조지아 정교회에 대한 탄압뿐 아니라 포도나무를 자르는 정책을 펼쳤다. 이렇게 조지아인들의 정체성이자 자부심인 와인은 ‘성스러운 액체’로 불릴 정도로 그들의 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수도원에서도 와인을 만들었고, 아직도 몇몇 곳에서는 와인을 판매한다. 그레미(Gremi) 수도원에서 담근 레드 와인을 마셔보니 선입견 때문인지 일반 와인보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향이 마음의 무늬를 더 나긋나긋하게 해주었다. 조지아 와인은 560여 가지가 넘는 다양한 포도 품종에서 생산된다. 3km마다 기후가 달라서 같은 품종이라도 재배 지역에 따라 맛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 어떤 와인을 선택해야 할지 모를 때면 ‘치난달리’(Tsinandali), ‘사페라비’(Saperavi), ‘킨즈마라울리’(Kindzmarauli) 라벨이 붙은 와인을 선택했다. 가격에 비해 맛은 일품이었다. 조지아 와인의 주 생산지는 카헤티(Kakheti) 주. 조지아 와인을 상징하는 지역이다. 코카서스 산맥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분지에 알라자니(Alazani) 강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다 보니 포도나무를 비롯해 과일나무들이 잘 자란다. 카헤티 주의 중심 도시 시그나기와 텔라비(Telavi)도 대표적인 와인 산지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는 지점 두물머리처럼 조지아에도 쿠라 강과 아라그비 두 개의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세워진 도시가 있다. 조지아 초기 왕조인 이베리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조지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므츠헤타’(Mtskheta)다. 지금은 수도가 트빌리시이지만 아직도 조지아 정교회의 총본산인 스베티치호벨리(Svetitskhoveli) 성당이 이곳에 있어 조지아 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장소다. 이 마을은 199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도시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즈바리(Jvari) 수도원 앞 언덕에 앉아 바라본 므츠헤타는 그리움이 안개처럼 차분하게 깔려 있는 도시였다. “조지아 와인은 이렇게 마시는 거야” 오래된 역사만큼 와인을 마시는 조지아만의 전통문화가 있다. 술자리에는 반드시 덕담과 건배를 주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를 ‘타마다’(Tamada)라고 부른다. 타마다가 ‘가우마조스’(cheers)를 외치며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긴 덕담을 한다. 건배 제의 내용은 순서가 있다. 처음에는 신께 감사하고, 다음 잔에서는 평화를 기원하며, 그다음 잔에서는 성 조지를 위해, 그다음 잔에서는 가족의 안녕을 위해… 이런 식으로 계속한다. 이렇게 이어지다 보면 ‘옛날에 헤어졌던 애인을 위해’ 건배 제의를 하는 경우도 있다. 술자리에서 나온 건배 내용에 대해 질투를 하면 안 된다. 보통 기쁜 날은 26잔, 슬픈 날은 18잔의 와인을 마시며 술자리와 건배가 이어진다. 또 한 가지, 취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술을 그만 마시고 싶으면 타마다에게 말해 벌주를 받으면 된다. 이때 사용하는 잔이 ‘깐지’(Kantsi)다. 염소나 소의 뿔로 만든 전통 와인 잔으로 조지아 어느 곳에 가도 기념품 판매점에서 볼 수 있다. 이 잔은 뿔로 만든 잔이라 세워지지 않는다. 벌주를 받는 사람은 반드시 원샷을 해야 한다. 사랑에 빠지는 도시 ‘시그나기’ 달콤한 포도 향이 바람에 실려 퍼지는 작은 도시 시그나기에 신의 물방울만 있는 건 아니다. 18세기에 지은 요새, 돌 성벽, 주황빛 마을은 해발 790m 높이의 자연과 함께 시그나기를 동화 같은 마을로 만들었다. 아무 목적 없이 마을 구석구석을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내기에 딱 좋다. 이 마을에서는 누구라도 천사가 될 수밖에 없다. 누구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고풍스러운 시청 건물에서는 365일, 24시간 내내 결혼식과 혼인신고가 가능하다고 한다. 흔히들 시그나기를 ‘사랑의 도시’라고 말한다. 마음 예쁜 사람들이 사는 그림 같은 마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그나기에는 사랑에 얽힌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이곳 출신인 조지아의 국민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Niko Pirosmani)의 사랑이다. 그는 프랑스 출신 여배우 마르가리타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가난했던 그는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림과 집을 팔아 장미를 사서 그녀가 사는 집 앞을 꽃으로 장식했다. 하지만 그녀는 떠났고, 그에게는 그녀를 그린 그림만 남게 되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그가 죽은 후 세상에 알려졌고, 1980년대 러시아 가수가 ‘Million Alykh Roz’라는 제목의 노래로 그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줬다. 우리나라에서 가수 심수봉이 ‘백만 송이 장미’로 번안해 부른 곡이다. 시그나기에서 가까운 곳에 카헤티 주의 주도인 텔라비가 있다. 텔라비는 작지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다. 조지아의 자연을 즐길 수 있는 ‘튜세티 국립공원’(Tusheti National Park)으로 가는 전초 기지 역할도 한다. 감동의 폴리포니 공연 도로 양옆으로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싱그러운 포도밭을 보며 달리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조지아의 아름다운 연녹색 매력에 빠져버릴 것 같았다. 길가에 서 있는 와이너리 안내 간판은 여행자를 향해 손짓을 했다. 카헤티 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오래된 마을 크바렐리(Kvareli)의 ‘카레바’(Khareba) 와이너리로 갔다. 단순한 와이너리가 아니었다. 조지아를 종합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서의 규모와 콘텐츠를 잘 갖추고 있었다. 휴식공간으로 보이는 건물 앞 정원은 크베브리 황토 항아리를 비롯해 각종 소품과 조형물이 꾸며져 있었다. 건물 안은 와인 저장고, 시음 및 판매시설, 와인 관련 도구 전시실, 와인 제조 설명 프로그램 진행장, 기념품 판매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와인 체험을 하고 나오니 로비에서 5명의 남성이 환상적인 다성 창법의 폴리포니 공연을 했다.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조지아의 노래는 현대 음악보다 훨씬 관념적이다”라고 극찬한 이유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매혹적인 보컬의 다성 창법이 들려주는 하모니가 장엄하게 가슴을 울렸다. 목에서 나오는 소리라기보다는 영혼의 울림 같았다. 환상적인 조지아 와인만큼이나 황홀한 폴리포니의 벅찬 감동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시그나기에서 가볼 만한 곳 보드베 수도원(Bodbe Monastery) 조지아 왕비의 병을 치료하면서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녀 니노가 생을 마감한 수도원이다. 수도원 밑 돌담길을 따라 내려가면 ‘니노의 샘’이 나온다. 지금도 치유 효험을 믿고 많은 사람이 찾는다. 시그나기 성곽 길(Sighnaghi Wall) 마을 언덕 위에 있는 아치형 돌문을 지나면 성곽 위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아침과 저녁 시간에 성곽 길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환상적이다. 로라시빌 도로(Lolashvili St.) 시그나기 마을 정상부터 산을 타고 구불구불 내려가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 카헤티 지방의 광활한 평원을 조망할 수 있다. 알아두면 좋은 Tip 텔라비에서 트빌리시 혹은 므츠헤타로 갈 경우, 혹은 반대의 경우 ‘38번’ 도로인 ‘곰보리 패스’(Gombori Pass)를 이용하길 권한다. 해발 2000m의 산을 넘으며 한없이 맑은 공기와 파란 하늘, 야생화에 푹 빠질 수 있다.
- 2020-03-09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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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배우 한지일 “마지막 인생은 멋지게 살 겁니다”
- 젊은 시절, 중후함을 무기로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배우 한지일(韓支壹·73). 그가 세월 풍파를 뚫고 나와 대중 앞에 섰다. 1세대 모델로서, 영화 중흥기 인기 배우로서 재도약을 꿈꾸는 파란만장했던 이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뭘 입을까 고민했는데 이 옷이 눈에 띄었어요. 있는지도 몰랐어요. 40년 만에 입어봐요. 잘 맞나요?” 오랜만에 꺼내 입은 명품 양복 재킷의 깃을 번갈아 매만지며 싱글벙글 웃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굴곡진 삶을 살아와서일까. 이 옷이 없어진 줄로만 알았다. 한국에 돌아와 웨이터, 벨보이, 발렛파킹 요원, 그리고 봉사하는 사람으로 매스컴을 탔으나 작년에는 좀 더 다양한 행보를 보였다. 단편영화 ‘미희’에 출연했고, 시니어 모델로서 재도약을 꿈꾸며 모델 관련 행사에 여러 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제57회 영화의 날’에는 한국 영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봉사상을 받기도 했다. 마음 아픈 이들에게 희망을 말하다 전에 없던 콧수염이 썩 잘 어울렸다. 그런데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턱수염이 있었는데 잡지에 좀 지저분하게 나올 것 같아 면도해버렸어요. 사실 수염을 기르게 된 이유는 우울증 때문이었어요.” 수개월 전 그는 우울증을 앓았다고 했다. 뭔가 집중하고 싶은 마음에 수염을 길렀다. 그는 현명한 방법을 택했다.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증상을 알렸고 세상과 소통하며 기운을 얻었다. “도무지 못 걷겠더라고요. 말도 잘 안 나왔고요. 요즘엔 찾아주는 곳이 많아 스케줄이 좀 바쁩니다. 10년 훨씬 넘게 활동하지 않았는데도 팬들이 알아봐주시니 두려웠어요. 우울증은 괜찮다가도 언제든 또 올 수 있는 마음의 병입니다.” 그의 황금빛 명함에는 ‘자살방지 전도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죽은 정다빈(1980~2007) 때문에 자살방지 전도사가 됐습니다. 다빈이의 유작이 된 드라마에 제가 카메오로 등장했어요. 드라마 끝내고 2년 뒤 미국에서 살 때 그 아이의 자살 소식을 들었어요. 참 명랑한 친구였어요. 그 작품이 잘 안 됐는데 그래서 우울증을 앓게 된 것 아닌가 싶어요. 작년에 세상을 떠난 설리와 구하라도 참 안타깝습니다. 구하라는 한국 소속사가 없었다더군요. 친구도 죽고, 무엇보다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었을 텐데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가 SNS에 간곡한 마음으로 자신의 우울증을 알린 이유였다. 살기 위해서였다. 그는 우울증이 있는 친구나 가족이 있다면 더 관심을 갖고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젊은 연예인 둘이 가고 나니 ‘비타민엔젤’이라는 걸그룹 기획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자살방지 전도사로서, 배우로서 좋은 이야기를 해달라고요. 두려웠어요. 열여섯, 열일곱 청춘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다행히 집중해서 잘 들어주더군요. 나도 젊었을 때 요즘 아이돌이 겪는 힘든 시간들이 있었지만 피나는 노력을 하며 살아왔다고 말했어요. 좌절하지 말고 다 잘될 거라고 믿고 살라며 응원해줬습니다.” 한지일도 젊은 시절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적이 있다. 뒤에 다시 이야기를 하겠지만 어두웠던 시대 상황으로 인해 배우 활동을 못했던 때가 있었다. 배우의 꿈, 아무도 몰랐다 ‘파란만장’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삶. ‘본의 아니게’, ‘의도치 않게’ 그렇게 살았다. 20대로 접어드는 순간 한지일 인생에 회오리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집에 찾아온 한 유명 배우가 한지일에게 꿈의 씨앗을 던졌다. “제가 영화배우가 된 건 윤일봉 선배님 영향이 큽니다. 고2 때 그분이 홍콩에서 활동하다가 한국에 돌아왔는데 저희 집에서 한 1년 사셨습니다. 촬영장에서 ‘아저씨, 아저씨!’ 하며 따라다녔어요.” 배우가 되겠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경희대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갔다. 그런데 입학 후 CF모델을 하더니 패션쇼 무대에 올랐고, 틈날 때마다 영화배우 오디션도 보러 다녔다. 1970년 우진필름의 신인배우 공개모집에 뽑혀 첫 영화를 찍나 했는데 영화가 배우 캐스팅 단계에서 무산돼버렸다. “영화가 엎어지고 얼마 안 있어 우연히 신상옥 감독한테 발탁이 됐습니다. 명동 유네스코 건물에 있었던 ‘신필름’은 당시 최고 영화사였어요. 그때 다른 신인 배우들과 함께 안양예술고등학교에 가서 연기수업을 받았어요. 신상옥 감독이 학교 설립자이시고 부인인 배우 최은희 씨가 교장으로 있을 때였죠. 모델활동만 하던 저에게 배우 수업은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의 첫 스크린 데뷔작은 이유석 감독의 ‘천동’(1970)이다. “한소령이란 이름으로 활동할 때였는데 주인공이었던 최정민의 오빠이자 암행어사로 나왔습니다. ‘천동’을 찍고 난 다음에는 영화 촬영차 홍콩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신상옥 감독이 당대 최고 스타였던 홍콩 배우 리칭과 ‘반혼녀’(1973)라는 공포영화를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갈 수가 없었어요.” 블랙리스트 전성시대 한지일이 과거 정부로부터 정치 탄압을 받은 일은 여러 매체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이유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둘째 아들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과의 친분 때문이었다. 대학교 시절 김홍업과 절친했던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 집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군부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시절이잖아요. 자택 건너편 주유소에서 사진을 다 찍은 거죠. ‘천동’에 출연했을 때는 조연에, 이름도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보안부에서 몰랐던 거예요. 그러다 제가 점점 유명해지기 시작하니까 압박을 하더라고요.” 몇 년 전 문화계 블랙리스트 때문에 나라가 한참 시끄러웠을 때, 거론됐던 연예인들이 나와서 ‘자신이 블랙리스트 1호’라는 얘기를 했다. 그는 헛헛한 웃음이 나왔다. “1972년에 제작된 영화 ‘바람아 구름아’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았을 때도 힘들었어요. 큰 영화사는 저에게 작품을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시 ‘보따리 장사’로 불리던 프로듀서들의 저예산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한지일이 자살을 생각했던 시기였다.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데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절망적이었어요. 열심히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죠. 물론 저뿐만이 아니라 동교동 사람들은 다 억압받았어요. 저는 순수하게 딴따라가 좋았던 사람입니다. 철없이 정치인들과 어울린 사람은 저밖에 없었을 겁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된 후 특별히 김홍업 이사장을 따로 만나는 일을 만들지 않았다. “청와대 들어가시고 3개월 후에 삼청동 사직터널 인근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김대중과 홍업이를 팔고 다니느냐고 묻더군요.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쓰자 ‘대통령 각하’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불러왔는데 참…. 그래도 (김)홍일이 형과 이희호 여사 장례식장에 3일 동안 가 있었습니다.” 현재 김홍업 이사장과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자 말을 아꼈다. 지금은 때가 아닌 듯하다고 했다. 억압과 탄압, 실망, 이 모든 역경을 뛰어넘어 현재를 살아가는 몇 안 되는 스타가 바로 한지일이다. 젖소부인 얘기 빠지면 재미없다 한지일 하면 떠오르는 게 있다. 바로 에로 영화다. 1980년대 말부터 ‘젖소부인 바람났네’를 제작해 한국 영화산업이 바닥을 치던 시절 큰돈을 벌어들였다. 진도희, 정세희 등을 발굴했고 B급 패러디물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신호탄도 쐈다. “우리나라에서 한국 영화가 설 자리가 없을 때였어요. 지금은 한국 영화 많이들 보는데, 당시에는 홍콩 누아르와 할리우드 영화가 인기였죠. 예술 영화를 찍는 감독은 영화 제작을 포기하다시피 했습니다. 영화 제작 초창기에 ‘엄마 울지마’라는 영화를 16mm 카메라로 찍었는데 반응은 그닥 좋지 않았어요. 개그맨 이원승을 등장시켜 ‘로보트 태권V’도 제작했지만 안 풀렸죠. ‘룸’, ‘추억의 이름으로’ 등도 다 깨졌어요. 배짱부리다가 결국 에로 영화를 제작하게 됐어요.(웃음)” 버티는 심정으로 작품을 만들다가 결국 에로 영화에서 길을 찾았다. “‘매춘이의 첫사랑’이 히트를 쳤고, ‘젖소부인 바람났네!”가 대박이 난 거죠. 두 달, 석 달에 한 번씩 영화를 제작해 13편까지 나왔어요. 요즘 젊은이들도 제목 정도는 알잖아요. ‘정사수표’, ‘욕탕 속의 여자들’, 그리고 대히트를 친 영화가 ‘마가씨’예요. 일본에서 인기가 있었는데 7편까지 나왔어요.” 출시되자마자 곧장 비디오 시장으로 흘러들어가는 16mm 저예산 B급 영화를 만들면서도 그는 연출력이 좋은 감독들을 영입했다. “김성수, 박용준, 김인수 감독 등이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에로 영화라 해도 내용이 탄탄하니까 잘 팔렸어요. 특히 김성수 감독은 조명을 써서 야하게 찍었어요. 조명이 야해.(웃음) 애마부인도 만든 분인데 작품을 제작할 때마다 정말 공을 많이 들입니다. 젖소부인 시리즈로 찍고 싶은 아이템은 있지만 아직은 얘기를 못합니다. ‘젖소부인 바람났네’ 타이들은 저밖에 못 써요. 언젠가는 만들어볼까 합니다.” 하늘을 찌르던 그의 기세도 IMF 금융위기 앞에서 결국 무너졌다. 무리하게 건물을 짓는 바람에 열심히 벌어놓은 돈을 하루아침에 날리고 말았다. 이후 베트남으로 갔다가 미국에 정착해 은둔자 같은 생활을 14년 동안이나 했다. 지금 아무것도 없는 신세라고 말하는 배우 한지일은 가방에 ‘한정환’이라는 본명이 기록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늘 챙겨 다닌다. 길 가다가 일하고 싶은 곳이 보이면 배우이고 뭐고 들이밀고 본다고 했다. “제 롤 모델이 삼미그룹 부회장이었던 故 서상록 씨입니다. 롯데호텔에서 웨이터 일을 했던 분인데 저도 감명 받고 한국에 들어와 웨이터를 했죠. 요즘은 식당에서 일해보고 싶더라고요. 무엇보다 경제활동을 해야 저도 떳떳하게 사람을 만날 수 있잖아요.” 곡절 많은 인생이었다. 배우를 꿈꾸던 20대 초반에 명동 한복판에 맥줏집을 열어 큰돈도 벌어봤고, 1년 만에 망해도 봤다. 과일 파는 리어카에 포장마차도 끌었다. 은막의 스타, 잘나가는 모델로도 살았다. IMF 금융위기 이후 외국으로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제 제3의 인생을 잘 살아보고 싶어요. 영화배우와 제작자로 지냈고, 미국에서는 두 번째 인생을 살았죠. 훗날에 한지일이 죽었다? 그러면 좋은 영화 찍었고, 봉사도 많이 했고, 열심히 살았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사람이 죽어서 이름만 남기면 됐지 뭘 알릴 거예요.(웃음)” 그와의 대화는 끝이 날 줄 몰랐다. 매번 다양한 현장을 찾아다니고 발견하고 뭐든 푹 빠져 사는 신청년 한지일. 올해는 또 어떤 일에 도전하고 행복을 얻을지 궁금해진다.
- 2020-02-26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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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시킨이 사랑한 도시 ‘트빌리시’
- 바쿠의 구도시를 걷다 보면 누군가 옆으로 다가와 근교 일일투어를 권한다. 사실 택시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자유여행으로 바쿠의 근교 투어를 하는 건 시간 면에서 비효율적이다. 가격을 좀 깎아달라고 하니 여행사 사무실을 안내해줘 그곳으로 갔다. 결국 1인당 20AZN(한화 약 1만4000원)을 할인받아, 다음 날 4만9000원짜리 일일 투어를 했다. 아침 9시, 구시가지 성문 앞에서 가이드와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 6명을 만나 일일투어를 시작했다. 준비된 미니버스를 타고 아름다운 카스피해를 바라보며 남쪽으로 한 시간 정도 달려갔다. 고부스탄(Gobustan)에 도착한 뒤에는 대기해 있던 여러 대의 낡은 승용차로 갈아탔다. 왜 차를 바꿔 타야 하는지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곳에서 목적지인 머드 볼케이노(진흙 화산)까지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을 10여 km 더 가야 했기 때문이다. 운전기사는 그 길을 ‘사파리 투어’라 표현했다. 그러나 마케팅 목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 동물 구경은 할 수 없었다. 억지스러웠지만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 차창 밖 풍경은 영화에서 봤던 모습과 비슷했다. 미국의 텍사스나 어느 사막 지역처럼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땅이었다. 전 세계 700여 개의 진흙 화산 대부분이 아제르바이잔에 있다고 한다. 그중 일부가 이곳에 있었다. 용암 대신 진흙이 흘러내리는 화산 가까이 다가갔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화산 분화구에서 진흙이 끊임없이 부글거리며 기포가 부풀어 올랐다가 터졌다. 피부에 좋은 효과가 있는지 남자 몇 명이 머드팩을 즐기고 있었다. 진흙 화산에 오기 전 미니버스에서 내렸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선사시대로 여행을 갈 수 있는 관광지가 있다.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부스탄 암각화 문화경관구역’이다. 공원 입구에는 박물관이 있었고, 암각화 구역은 입구에서 1km를 더 가야 했다. 탐방로를 따라 걸으면 넓은 사암지대에 흩어져 있는, 약 5000년에서 2만 년 전에 원시인들이 돌에 그린 그림을 불 수 있다. 지나온 시간의 무게가 주는 중량감 때문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 모습, 사냥하는 모습, 바다에서 고기 잡는 모습, 춤추는 모습 등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풀, 돌, 바위만으로 구성된 암각화 공원을 본격적으로 탐방하기 전 앞서 가던 가이드가 넓고 평평한 바위를 만나자 갑자기 타악기처럼 두드리기 시작했다. 돌에서 맑은 소리가 났다. 이 지역의 타악기 ‘가발 대시’(Gaval Dash)를 만들 때 사용하는 석재라고 했다. 조로아스터교 사원의 꺼지지 않는 불 불을 접하기 쉬워서 그랬는지 바쿠의 동쪽 외곽에 조로아스터교 성지인 ‘아테시카 사원’(Ateshgah Temple)이 남아 있다. 사원 안에는 470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꺼지지 않고 타고 있는 불이 있다. 불을 숭배해서 배화교로 알려진 고대 페르시아 종교 조로아스터교. 현재는 신도 통계가 없을 정도로 사라져가는 종교다. 하지만 최근 이슬람 극단주의에 환멸을 느낀 쿠르드족들이 개종하면서 그쪽 지역에서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한다. 또 얼마 전 한국에서 신드롬을 일으켰던 록 밴드그룹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조로아스터교의 후손인 파르시(Parsi) 출신이기도 하다. 수도원이었던 사원 내부는 박물관으로 개조됐다. 방마다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설명과 모형,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다. 교세는 미약하지만 조로아스터교를 경험할 수 있는 건 바쿠가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이었다. 이외에도 바쿠 외곽에는 불과 관련한 ‘야나르 다그’(Yanar Dag)라는 이름의 불타는 언덕도 있다. 지하에 어마어마한 양의 천연가스가 매장돼 있어 가스가 나오는 분출구에서는 계속 불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자원 개발로 지하 압력이 내려가 과거에 비해 불꽃이 많이 약해졌다고 한다. 아제르바이잔 여행을 해야 하는 이유 현재와 과거의 절묘한 조화, 손님과 이방인에게 친절한 문화, 동서양의 경계선 위에서 유럽을 향해 있는 도시, 맛있는 음식과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사람들. 바쿠 여행을 하면서 받았던 인상이다. 아직 구 소련 치하의 흔적도 남아 있고,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등 여행 인프라가 부족한 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 관광청이 글로벌 캠페인으로 선정한 ‘기대, 그 이상의 아제르바이잔’(Take Another Look)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그들 사회에 내재돼 있는 역동성과 경계를 넘나드는 수용의 문화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트빌리시행 야간 특급열차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이 주황빛으로 바뀌면서 나란히 뻗어 있는 녹슨 철길 위로 떨어졌다. 검은색 섞인 파란 하늘이 배경이 될 무렵 그림자도 사라져가는 플랫폼 앞으로 둥근 쇳덩이가 슬며시 발을 들이밀었다. 흰 수증기를 내뿜으며 거친 숨을 내쉴 것만 같은 짙은 암녹색 기차였다.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브론스키’와 ‘안나 카레니나’를 운명처럼 만나게 했던 그 기차다. 조지아의 고리 시(市)에 전시돼 있는 스탈린 전용 열차도 같은 색이다. 소설 내용처럼―창 너머로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전송하고 있는 사람들이 마치 뒤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 규칙적으로 덜커덕덜커덕 흔들리면서 플랫폼을 지나고 (…) 열차는 점점 신나고 매끄럽게 경쾌한 소리를 내며 레일 위를 미끄러져 갔다―그렇게 바쿠와 이별했다. 오래된 열차이지만 2인 1칸인 1등석은 불편한 점이 전혀 없었다. 새것으로 바꾼 하얀 침대 시트가 마음에 들었다. 바쿠를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전 시추공에서 나오는 가스 때문에 큰 불꽃이 타오르는 공장들이 창밖으로 스쳐지나갔다. 때맞춰 창틀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모음곡 2번 ‘왈츠 Ⅱ’가 흘러나왔다. 출발 전 역에서 산 와인으로 영혼을 적셨다. 그렇게 떠나는 아쉬움과 새로운 풍경을 만나러 가는 길의 떨림을 가라앉히며 수없이 꿈꿔왔던 침대열차에서의 밤을 보냈다. 기차는 쉬지 않고 트빌리시를 향해 달려갔다. 저녁 9시에 출발한 기차는 꼬박 12시간을 달려 다음 날 아침 9시경 트빌리시에 도착했다. 도착하기 전 새벽 5시쯤 조지아 입국 절차가 한 차례 있었다. 카메라가 연결된 노트북을 들고 조지아 군인들이 열차로 올라왔다. 입국신고서 작성, 여권 제출, 사진촬영, 그리고 이어진 간단한 가방 검사로 국경 통과 절차가 끝났다. 조지아는 한국 여권 소지자의 경우 무비자로 360일 체류할 수 있는 나라다. 미국 조지아가 아니고 ‘조지아’ “조지아? 미국 조지아?” 이번 여행 목적지는 ‘조지아’라고 하니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한결같았다. 몇몇 사람은 구 소련이 지배하던 시절의 ‘그루지야’는 알고 있었다. 1991년에 독립하면서 국명을 ‘조지아’로 바꿨다고 설명하면 미국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이름이 그러냐는 반응들을 보였다. 정말 그랬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는 ‘농부’를 뜻하는 그리스어 ‘게오르기오스’에서 빌려왔다는 설과 트빌리시의 핫플레이스 ‘자유광장’에 황금동상으로 우뚝 서 있는 조지아 수호성인 ‘성 조지’에서 따왔다는 이야기가 가장 많다. 조지아에는 스위스처럼 아름다운 자연이 있고, 프랑스처럼 풍요로운 와인, 이탈리아처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스페인처럼 정열적인 춤과 음악이 있다. 트빌리시는 재즈다 종착역이 가까워지면서 기차 속도가 느려졌다. 트빌리시는 BC 4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해 AD 5세기 말에 조지아의 수도가 된 오래된 도시다. 창문 밖으로 트빌리시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폐쇄된 기지창에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는 녹슨 객차와 화차들, 네모반듯한 현대식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신도시, 트빌리시의 랜드마크인 나리칼라 요새와 ‘조지아 어머니 상’이 있는 구도시가 줄지어 얼굴을 드러냈다. 마치 한 곡의 재즈를 듣는 것 같았다. 이곳 사람들은 ‘재즈적’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연결될 때 주로 사용한다. 그만큼 조지아 사람들은 뭐든 잘 받아들인다. 혼합에 익숙하다. 트빌리시라는 도시도 그랬다. 색소폰의 끈적한 느낌과 와인의 나른한 분위기가 뒤섞여 있는 듯 보였지만 퇴폐적 숨결이 느껴지지는 않는 골목의 모습이 그랬고, 클래식함과 모던함이 서로 뒤엉켜 하나가 된 도시의 풍경이 그랬다. 올드 트빌리시가 보여주는 것들 트빌리시는 도시를 관통하는 ‘므츠바리’(Mtkvari) 강(쿠라 강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을 중심으로 남쪽의 ‘올드 트빌리시’(구도심)와 북쪽으로 나누어진다. 잘 알려진 관광지 대부분이 구도심에 몰려 있어 걸어 다닐 만하다. ‘아블라바리’(Avlabari) 전철역에서 내려 강 언덕에 있는 ‘메테키 교회’(Metekhi Church)로 먼저 갔다. 13세기에 세워진 이 교회는 서른일곱 번이나 다시 지어진 사연으로 수많은 전쟁에 시달렸던 조지아의 얼굴이 됐다. 구 소련 시절에는 감옥과 극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최근에서야 교회 역할을 하고 있다. 교회 옆에는 수도를 트빌리시로 옮긴 ‘바흐탕 고르가살리’(Vakhtang Gorgasali) 왕의 기마상이 도시를 바라보고 있다. 기마상이 있는 곳에서 북쪽을 보면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강 오른쪽으로 ‘리케 공원’(Rike Park)이 있다. 시민과 여행자들에게 은은한 꽃향기로 피로를 풀어주는 곳이다. 강변에는 1200개의 LED 전구가 빛을 내는 ‘평화의 다리’가 있어 므츠바리 강의 밤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2GEL(한화 약 810원)을 내면 ‘메테키 다리’를 건너 므타츠민다 산 정상에 있는 나리칼라 요새까지 케이블카로 올라갈 수 있다. 도시 전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 요새는 4세기에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요새 바로 옆 능선에는 왼손엔 와인 잔, 오른손엔 칼을 들고 있는 ‘조지아 어머니 상’이 있다. ‘친구에게는 와인 잔을 건네지만 적에게는 칼을 든다’는 의미로 건국 1500년을 기념해 만든, 높이 20m의 대형 석상이다. 트빌리시를 사랑한 작가들 러시아의 문호들은 조지아를 사랑했다. 막심 고리키는 이곳에서 일하며 처녀작 ‘마카르 추드라’를 썼다. 이때 사용한 필명이 ‘고리키’다. 그는 “코카서스 산맥의 장엄함과 낭만적 기질을 지닌 이곳 사람들 덕분에 방황에서 벗어나 작가가 됐다”고 회고했다. 톨스토이도 이곳에서 주둔군으로 4년을 복무한 후 조지아를 배경으로 몇 편의 소설을 썼다. 푸시킨의 시 제목을 그대로 가져다 쓴 ‘코카서스의 죄수’가 대표적이다. 누구보다도 조지아의 와인과 음식을 사랑한 푸시킨은 대표적인 친조지아 인사였다. 그래서인지 구도심 자유광장 옆에는 ‘푸시킨 공원’이 있다. 구도심 중앙에 위치한 ‘자유광장’은 주변의 아름다운 건축물과 교통의 요충지로 트빌리시의 시작이자 끝이 되는 장소다. 마치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광장 같은 곳이다. 레닌 동상이 있던 광장 중앙에는 조지아 수호성인 ‘성 조지’의 황금동상이 있다. ‘자유광장’에서부터 ‘루스타벨리 메트로 역’까지 이어지는 거리를 걸었다. 러시아 간섭에 저항하는 조지아인들의 데모가 토요일마다 열리는 국회 앞 광장, 조지아 국립박물관, 루스타벨리 극장, 트빌리시 오페라·발레 극장, 트빌리시 현대미술관들이 이 거리에 있다. 중간중간 보이는 작은 카페와 거리의 화가들 작품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트빌리시의 숨결을 애써 들으려 하지 않아도 트빌리시의 과거와 현재의 눈부신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행복했다. 아무리 걸어도 질리지 않는 하염없이 걷고 싶은 길이다 므츠바리 강을 건너는 ‘사브뤼켄’(Saarbruecken) 다리 옆 ‘데대나’(Dedaena) 공원에서는 트빌리시 최대 규모의 벼룩시장이 열린다. 구 소련의 군용 제품에서부터 은식기, 오래된 카세트테이프 등 온갖 물건들이 거래된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랜 세월이 빚어낸 추억의 물건들이 과거를 되돌아보게 한다. 지치지 않고 무언가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조지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찰나에 그들의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희망과 그리움, 설렘도 봤다.
- 2020-02-10 0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