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성낙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 “지인들이 부르면 불원천리, 산 넘고 물 건너 달려가요”
- 미술을 애호하는 의사? 의료활동을 가끔 하는 미술 전문가? 이성낙 가천의과대 명예총장(79)을 지칭할 때 헷갈리는 이름표다. 베체트병 최고의 권위자인 그는 가천의과대 총장 퇴임 이후 일흔의 나이에 미술사 공부를 본격 시작했다. 의학 박사이자 미술사학 박사로서 그는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내는 한편, 다양한 매체에 문화 관련 칼럼을 기고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젠 문화인으로서의 명성과 활동이 의료인의 경력을 압도할 정도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인터뷰를 약속한 날, 그는 최근 한 달여 유럽 미술관 전시회를 혼자 순례하고 왔다며 문화의 향취에 젖은 표정이 역력했다. 사진 촬영을 생각지 못하고 평상복(?) 차림으로 와 어쩌냐고 걱정을 했지만 중절모에 세련된 비즈니스 캐주얼, 적당히 손때 묻은 가죽가방을 멘 차림은 단아한 문화인 그 자체였다. 퇴임 후 미술사 공부를 시작,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취미로 즐기셔도 될 텐데 굳이(?) 박사학위에 도전하신 이유가 있었나요? “한국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 연구, 이것은 한국에서 저 말고는 할 수 없는 분야란 절박감과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간 모은 자료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모두 쓰레기가 된다. 내가 책임지고 반듯한 논문으로 남겨야 국내외로 인용될 것 아닌가’라는 사명감에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2008년 총장직을 사임하고, 사석에서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 관련 자료가 많은데 어떻게 넘겨줄지 고민 중’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때 좌중에 있던 유홍준, 이태호 교수가 ‘대학원에 들어와 연구’를 하라는 조언을 하더군요. 그 말이 제가 평소에 갖고 있던 사명감을 부추겼다고나 할까요.” 그가 피부과 교수로서 초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64년 뮌헨의과대학 졸업 종강강의 ‘예술작품에 나타난 피부병’을 듣고부터다. 당시 청년 의사 이성낙은 ‘예술을 의학적 시각에서도 접근할 수 있겠구나’ 하고 비로소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이후 유럽 미술관을 다니며 자료 수집을 하고 틈틈이 공부도 해왔다. 그 열매가 50여 년 만에 맺어진 셈이다. 피부병변을 통해 밝힌 한국 초상화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우리 선비문화의 정직성입니다. 죽기 전 영정에 해당하는 초상화들을 보면 중국, 일본과는 큰 차이가 있는데 바로 정직성입니다. 자료를 본격 수집하기 전엔 우리나라 초상화에는 피부병이 나타나 있지 않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관찰해보니 우리나라 초상화의 83%에서 피부병이 확인되어 깜짝 놀랐습니다. 단지 17%만이 정상적인 피부란 이야기인데요. 예컨대 서예가 추사 김정희 선생님은 살짝 곰보였습니다. 이는 전기 등엔 안 나오는 사실이지요. 초상화들을 보면 곰보 자국, 여드름 자국, 다모증 등 실물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시의 초상화는 수염을 그리지 않았지요. 다시 말해 그리는 사람이나 초상화를 요청한 사람이나 담담하게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고 그리게 한 것이지요. 피사체가 장바닥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의 상위층 양반 그룹이라 지시를 통해 그리지 말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담담하게 다 드러내 그리도록 한 것이지요. 조선 선비정신의 진수를 보는 것 같아 희열을 느꼈습니다.” 일흔의 나이에 전혀 다른 분야, 늦깎이 공부에 도전하셨습니다. 취미로 하셨다 해도 녹록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대학원생이나 교수진이 부담스러워하진 않던가요? “퇴직하고, 2009년에 명지대에서 미술사 석·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했지요. 공부도 힘들고, 주위의 눈길도 신경 쓰이긴 했지요. 또 뭘 읽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그렇다고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는 한 번 읽었다면 지금은 두세 번 반복해 읽는 노력이 필요할 뿐이지요(하하). 입학 전부터 전직(前職) 명함의 권위에 기대지 않겠다고, 그런 뒷소리를 듣지 않겠다고 단단히 각오했어요. 내 전직이 무엇인지 다 아는데, 불성실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엄청 노력했답니다. 설렁설렁 한다고 할까봐 강의 15분 전에 출석하고, 강의가 끝나면 맨 마지막에 나오는 등 성실한 학생으로서의 책임을 다했습니다. 100퍼센트 출석은 물론이고요. 무엇보다 큰 기쁨은 강의를 통해 그간의 부분적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구슬이 한 줄로 꿰어지는 기쁨에 비유할 수 있어요. 늘 가르치던 입장에서 배우는 입장으로 돌아가 젊은 30대들과 동료가 된 재미도 적지 않았습니다.” 아주대 의대 학장과 가천의과대 총장으로 지내던 시절, 예술·인문·문화학을 정규 강좌로 개설해놓고 의학도들에게 의무적으로 듣도록 하셨습니다. 인문학을 이처럼 앞장서 강조해온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인문학은 공감학입니다.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고 성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요. 공연, 전시회, 책을 보며 우린 사람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돌아보고 경계하게 됩니다. 영국에선 유명 연극배우에게 ‘Sir’라는 칭호를 줍니다. 정치가, 기업인보다 높이 평가하는 거지요. 배우는 황제, 살인자, 거지 등 인간의 다양한 삶을 펼쳐 보이며 다양한 인격을 구현해냅니다. 또 문학 서적을 읽으며 그 안에서 비겁한 사람도 보고, 정의로운 사람도 보고, 용감한 사람도 봅니다. 그들의 갈등을 제3자의 눈으로 보며 경계하고 배울 것이 무엇인지 의식을 갖게 하는 것, 그것 때문에 예술과 인문학이 중요하지요.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 의료인에게도 특히 필요한 학문입니다.” 실제로 총장님 삶에서 인문학과 예술이 문제해결의 마스터키로 작용한 적이 있는지요? “(하하) 네, 제가 독일 유학을 갔을 때입니다. 1950년대 말이니 한국인 유학생이 흔치 않을 때였지요. 기숙사 룸메이트가 저를 노골적으로 무시했습니다. 늦은 가을 기숙사로 들어가는데 룸메이트가 베토벤의 을 듣고 있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베토벤!’ 하고 탄성을 질렀지요. 그날 그 말을 들은 친구와 밤새도록 베토벤 얘기를 했어요. 그 전까지는 한 달 동안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사이였는데 말이죠. 문화 예술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공감한 덕분이지요.” 인문학은 세대, 국가, 민족을 넘어 소통과 공감의 가교로 자리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진정한 교육은 잘난 사람, 있는 사람이 아니라 못난 사람, 없는 사람을 어떻게 일으켜 세우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명문대 진학률을 평가의 잣대로 삼는 현행 입시체제는 잘못됐다, 사람의 아픔에 연민을 느끼고, 함께 나누고자 하는 인문학적 교육 인식이 필요하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흔히 십년지기(十年知己)라는 말도 있듯이 십 년 이상 알고 지낸 사이를 오래된 인연이라 표현합니다. 총장님을 안 지 저도 십 년 이상 됐는데요. 뵈면 ‘70년지기’ 유치원 친구들과 서로 이름을 부르며 친하게 지내시는 모습이 참 정겹습니다. 인연을 오래 유지하시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살아보니 사람에게 복 중의 최고 복은 인복(人福)이더군요. 돌이켜보면 친구, 학교 은사 등 제 주위엔 늘 인간적으로 훌륭하신 분이 많았습니다. 천운이라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분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떨리고 행복해져요. 이들과의 귀한 인연을 돌이켜보니 공통점은 지속성입니다. 인간관계를 오래 유지하려면 지속적으로 가꿔나가야 합니다. ‘이 사람이 유용하다, 아니다’라는 계산에서 탈피해 순수하게요.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용건이 없어도 안부를 묻고 꾸준히 관심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나의 우정 유지 방법입니다.” 그는 마르부르크대 의예과에 들어가 처음 만난 독일 친구와 아직까지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도 일주일에 한 번은 전화를 하고 2014년 박사학위를 받을 때는 부부가 함께 한국까지 일부러 와서 축하를 해주었다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에는 신록의 연둣빛에 감탄해 “문득 네가 생각났다”는 메시지와 함께 사진을 보내니 바로 “어디에서든 우리에겐 봄소식이 들려온다”고 답장이 왔단다. 삶의 진정한 행복은 큰 행운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과의 소소한 일상 나눔에 있다는 고백이었다. 그의 말을 들으며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에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른들은 신세대에게 자신들의 풍부한 경험을 나눠주고 싶어 합니다. 신세대는 ‘꼰대의 잔소리’로 거부감부터 표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총장님의 세대 간 소통의 지혜는 어떤 것인지요? “한마디로 역지사지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입장을 바꿔 미리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또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되도록 가르치려 들지 않아요. 지나가는 말처럼 사례를 들어 이야기하지요.” 이외에도 이 총장이 잘 쓰는 세대 간 소통 방법은 시사 현안을 갖고 그때그때 간단한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그는 미술을 전공하는 손녀와도 현안에 관한 미니토론을 카톡으로 소소하게 나누곤 한다. 얼마 전 마네의 그림 를 패러디한 을 국회의원회관에 전시한 것이 문제됐을 때도 “예술에 있어서 역지사지란 무엇인가, 예술가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등을 생각해보면 좋겠구나” 하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간단히 코멘트를 해주며 손녀와 대화를 했다. 일방적인 주입보다는 사고의 확장을 이끌어내기 위해 인도하는 식의 대화 방식이다. 자제, 제자분들에게 평소 강조하시는 인생의 가치는 무엇인지요. “첫째도 둘째도 정직입니다. 제가 의미하는 정직은 자기관리를 솔선수범해 실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퇴직할 때 ‘대과(大過) 없이 마쳤다’란 말을 관용어처럼 쓰지 않습니까. 그러나 혼탁한 현실에서 막상 이를 실천하려면 쉽지 않습니다. 부정이 만연한 사회에서 대과 없이 살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거든요. 소극적으로 들리지만 적극적 행동강령이에요. 운도 정직에서 비롯되고, 불운도 정직하지 못한 데서 온 것입니다. 예전에 선현들은 무첨(無添), 즉 선조에게 죄를 더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하셨어요. 욕되게 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고리타분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살수록 진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조, 가족, 자식 앞에 부끄럽지 않고, 그들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당당한 삶을 사는 것, 그것 이상이 있을까요. 담담해야 당당할 수 있고 욕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의 아들이 회사에 갓 입사했을 때 제일 먼저 강조한 것도 돈에 대한 정직이었다. 그것의 구체적 행동강령으로 ‘현금을 수금할 때 당일 보고, 당일 입금’을 실행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이 총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혹시라도 먼저 입사했다고 친구들에게 밥 살 일 있으면 쩨쩨하게 굴지 말고 아버지 이름 대고 밥 사라’고 자신의 단골식당을 아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일일이 인사시켰다고. 마지막으로 현역 프리랜서로서 ‘인생의 브라보’를 외칠 수 있는 조언을 들려주시겠습니까? “호기심과 활력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꾸 힘들다, 어렵다, 귀찮다 생각하면 도태되고 배제돼요. 행동반경이 좁아지면 사고반경, 사람반경도 좁아집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저는 지인들이 부르면 불원천리, 산 넘고 물 건너 달려가고요. 지하철에선 되도록 자리를 양보받지 않아요.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서 있으면 오히려 균형력 강화에 좋습니다. 휴대폰은 신제품 출시 소식이 나오면 즉시 바꾸는 얼리어답터입니다. 지금 편한 것에 길들여지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해요. 아웃 오브 사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잊힙니다. 이런저런 핑계 대지 말고 새로운 공부, 도구, 환경에 도전하세요.”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 2017-04-28 13:01
-
- 연극인 유인촌, ‘광대’의 삶을 말하다
- 국민 드라마 의 바르디바른 둘째 아들 용식, 뜨거운 열정과 헌신으로 무대에서 빛나는 베테랑 연극인, 그리고 막말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문화체육부 장관까지. 어느새 올해 67세를 맞이한 유인촌의 이미지는 이렇듯 여러 갈래로 만들어져 있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매스컴의 요란한 스포트라이트에서 어느 순간 사라져 연극인으로 돌아간 그는 OBS의 대담 프로그램 MC를 맡아 3년째 드라이빙하고 있다. 광대로서, 그리고 뼛속까지 순간예술인임을 자각한 유인촌과의 만남 뒤로 생각보다 진중한 얘기가 있었다. 유인촌은 자신이 맡은 OBS 의 방향성이 최근의 방송 트렌드와는 다르게 진중한 점이 좋다고 한다. 뭐든지 예능화되는 요즘 TV 프로그램들과 비교하면 그가 과거에 진행자로서 인기를 얻었던 에 가까운 느낌이다. “요즘 방송은 장점보다는 단점을 드러내고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그래서 이 프로그램만은 정말 좋은 점, 장점, 들어서 감동할 수 있는 점을 중심으로 만드는 게 좋겠다 싶었어요. 물론 그렇다 보니 방송이 원하는 자극은 없어요. 그러나 보고 나면 따뜻해져요. 다행히 OBS가 그걸 지켜주고 있습니다. 매주 다른 분을 만나기에 그분들에게 보고 배우는 게 많아요. 1년에 50여 명을 만나니 지금까지 150여 명을 만난 셈이죠.” 그는 기억에 남는 사람이 많지만 특히 이어령 박사, 이명현 전 교육부 장관, 김희수 건양대학교 총장을 꼽았다. “이어령 선생은 첫 방송에 모셨고 개인적으로도 존경하는 분이죠. 이명현 전 교육부 장관은 과거에 김영삼 정부 시절에 교육부 장관을 하셨던 분인데 인생 스토리가 너무 놀라웠어요. 한국전쟁 전에 걸어서 월남한 뒤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하시다가 검정고시로 서울대 철학과를 입학한 분이죠. 김희수 건양대학교 총장은 김안과를 만드신 분인데, 지금도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학교에 간다는 얘기를 듣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죽을 때까지 연구할 게 생겼다 유인촌을 의 영원한 둘째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그가 어느새 67세라는 나이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아주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제가 공직에서 나와 다시 연극을 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지금이 전성기다.” 유인촌에게 전성기라는 개념은 철저히 연극인 유인촌으로서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연극에서의 시간은 보통 삶의 시간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영상은 젊은 사람들이 잘할 수 있지만 무대는 달라요. 희곡 작품 자체가 일상이 아니라 어렵거든요. 그런 것들이 소화되고 공감대를 가질 수 있으려면 남자는 40이 넘어야 해요. 그 전에는 아기 같아요. 사실 40대까지는 대학생 역할을 했었어요. 성인 남자의 역할은 40대 후반에서 50대가 되어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이 전성기’라고 얘기한 거죠.” 그것이 4년 전 얘기. 지금 유인촌은 또 다른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지금은 개인으로서 하려 했던 일은 거의 다 했다고 생각해요. 그건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 그동안 했던 걸 모두 지우고 연기자로서 새로운 뭔가를 다시 시작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연기 외의 다른 사업이라든지 기관장이라든지 말고요. 순수하게 내가 배우로 뭘 한다고 하면 그동안 쭉 쌓아왔던 걸로는 다 했어요. 그래서 공부를 다시 하고 있어요. 기본적으로 배우 훈련입니다. 발성부터 다시 공부하고 있어요.” 연극인 유인촌이 발성부터 다시 배운다? 납득이 되지 않는 얘기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동안 해왔던 작업이 겉으로만 보였던 거라면 이제는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들에 집중하고 싶어요. 특히 저는 우리만의 전통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양복을 입고 있어도 한국 사람이 갖고 있는 전통의 멋이나 깊이를 체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이제부터 그런 연구를 시작하고 정리해 죽을 때까지 할 계획입니다. 수련하는 느낌으로.” 아이들에게 자아를 찾는 기회 주고파 근본으로 돌아가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하는 그는 올해부터 의미와 가치에 중점을 둔 계획을 여러 가지 세우고 있다. “사실 극장도 내가 퇴직하고 나와서 대관료를 만원 받으며 운영했었어요. 젊은 친구들 하라고. 그걸 3년을 했네요. 올해는 청소년, 특히 소년원과 쉼터에 있는 아이들이나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자아를 찾는 기회를 주기 위해 자전거 여행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어요. 여름방학 기간에 4박 5일 동안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라이딩 투어를 준비하고 있죠.” 그러고 보니 그는 소문난 자전거 마니아이기도 하다. 그와 자전거는 어떻게 인연이 맺어진 걸까? “오래전부터 탔죠. 그런데 옛날에는 그냥 설렁설렁 타다가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한 건 한 15년쯤? 늘 탔지만 취미 내지는 생활처럼 된 건 그 정도 됐죠. 저는 배우를 했잖아요. 연기를 하기 위해 모든 기능적인 걸 다 배워야 했어요. 수영, 자전거, 바이크, 펜싱, 검도, 스쿠버다이빙, 윈드서핑…. 다 연기할 때 필요한 것들이었죠. 그러다 보니 적당히 한 게 아니라 업계에서 알아볼 정도로 했죠. 승마도 장애물까지 할 정도였으니까. 지금은 다는 못하고 걷기, 자전거, 수영, 스키, 스노보드 정도만 하고 있죠.” 그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린단다. 취미도 운동도 생활 속에 깊숙이 배어 있다. 특히 걷기는 그가 여전히 좋아하면서 계속할 수 있는 취미이자 운동이다. 670km를 걸어서 종단한 경험이 있는 그는 아직도 웬만하면 걸어 다닌다. 장관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삶의 보람을 일깨운 마지막 햄릿 연극인으로서의 성공, 정치인으로서의 논란. ‘개인적으로 할 건 다했다’고 말하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유인촌의 삶의 그래프는 급격하다. 그가 ‘내가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였을까? “작년에 이해랑연극상 수상자들과 함께 공연을 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나는 햄릿을 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60대 중반 넘어선 사람에게 왕자 역할 하라고 하면 욕먹는다고. 그런데 이해랑연극상 받은 사람들이 젊은 사람이 없었어요. 윤석화가 전체에서 가장 막내였고 내가 그다음이었으니. 그래서 결국 내가 햄릿 역할을 하게 됐는데, 굉장히 책임감이 느껴졌죠. 다행히 유종의 미를 거뒀어요. 어떻게 보면 그게 저의 햄릿 역할의 마지막이었습니다. 내 연기 인생의 전반부가 으로 정리가 됐어요. 그러면서 연기하고 연극하길 참 잘했다고 처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계산하지 않는 스타일이라고 정의했다. 물질적 계산보다는 명분과 충분한 목적과 필요성이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 그가 세운 극장도 처음에는 한 달에 2500만원씩 빠져나갔는데 그때마다 다른 곳에서 일한 돈으로 메꾸면서 운영했다고 한다. 꼭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저질렀다는 그의 말에서 평소의 신념과 의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내 일에 더 집중하려고 해요. 주변에 여러 가지가 연관이 되어 있는데 정리하고 있어요. 제게 섭섭한 것도 있고 아쉬운 것도 있겠지만 좀 좁히려고요. 이제 와 일을 벌이는 건 안 좋다고 생각해요. 연극도 1년이나 2년씩 구상하고 준비해서 하려고 해요. 작년에는 의도치 않게 연극 일이 많았지만, 올해는 쉬면서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하는 책을 써볼까 합니다.” 나이는 장애가 아니다 “젊다는 것은 젊어서 좋은 거예요. 그것 외에는 크게 장점이 없어요. 그러니까 늙는다는 것은 핸디캡이 아니에요.” 그는 ‘어차피 늙는 건데 (인생을) 잘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침 그가 주연과 연출을 맡았던 연극 중 톨스토이의 중편소설 를 원작으로 한 라는 작품이 있는데, 늙어감에 관한 총체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가 유난히 애착을 가진 작품이기도 했다. “제가 를 1997년에 호암아트홀에서 초연했는데 지금까지 매번 적자였어요. 그러나 작품의 의미나 형식이 너무 좋아서 적자가 나는데도 계속 공연을 하고 있어요. 이 작품의 대사 중에 ‘중후하게 늙을 것인가 가련하게 늙을 것인가, 중후하고 가련하게 늙을 것인가’라는 말이 나와요. 그 질문을 관객에게 계속하는 거예요.” 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삶을 관조하는 늙은 얼룩말을 맡았던 연기자 유인촌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간이다. 는 병든 말 ‘홀스또메르’를 통해 인간 삶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화자인 얼룩말은 다양한 역경을 겪은 늙은 말이다. 이 얼룩말의 시각을 통해 이야기되는 사랑과 고통, 아름다움과 추함, 젊음과 늙음 등은 인간사 희로애락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예술의 보람과 감동을 알기에 놓을 수 없다 “‘인간은 자기 땅이라고 하면서 밟아보지도 않아. 자기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 사람을 욕해. 내 여자라고 말하면서 다른 여자와 살아.’ 는 이런 인간의 속성을 말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어요. 관객 중에 홀스또메르가 말하는 이런 사람이 꼭 있어요. 그 사람은 나와 눈을 못 마주쳐요. 그래서 흥행은 안 되죠(웃음). 하지만 나이 들어 이 연극을 보신 분들은 공연이 끝나도 일어나지를 못해요. 자신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울기도 합니다. 저도 그 작품을 생각하면 지금도 두근두근해요.” 한번은 사업을 하다 부도를 내고 자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친구 때문에 를 보게 됐는데 이 연극을 본 후 죽으면 안 되겠다는 걸 깨달았다고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는 거지. ‘내가 꼭 성공하겠다, 그리고 당신을 후원하겠다’는 내용이었어요. 제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겠어요. 그걸 보면서 예술로서의 목적이 달성됐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그런 편지 하나 때문에 연극 일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거니까요.” 궁금했다. 유인촌은 어떤 이유로, 어떤 힘으로 연극이라는 자신의 세계를 이렇게 끌고 올 수 있었을까? 그 의문이 다소 풀리는 순간이었다. 기억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제가 같은 작품을 했는데 어떻게 늙어갈지를 왜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렇다. 지금의 유인촌은 그 고민의 결과다. 예술은 사람에게 화두를 던질 수 있고 그 화두를 접한 사람은 더욱 발전할 수 있다. “운동을 하기 싫지만 취미를 갖고 싶으면 예술을 가까이 하는 게 좋아요. 일본의 단카이 세대들은 동호회가 많이 활성화돼 있어요. 그래서 박물관의 날, 미술관의 날 등을 정해서 집중적으로 예술을 접합니다. 돈을 모아서 강연회를 열기도 해요. 아주 지적인 취미생활인 거죠. 우리도 할 게 많아요.” 기자가 늘 놓치지 않고 묻는 마지막 질문, 그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를 물었다. “예전부터 그랬어요. 저는 기억되지 않는 게 좋다고. 가족에게도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뿌리라고 말해뒀어요. 광대 팔자라는 게 그런 거예요. 남기지 않는 게 좋다. 연극은 순간예술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거죠. 저는 저를 영상으로 남기는 게 어색하거든요. 그래서 영화를 안 했어요. 필름은 50년, 70년 돼도 남는 것이라 부담스럽거든요.” 방송에 나오지 않으니 젊은 사람들은 이미 자신을 몰라서 지하철을 타도 아무 불편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 그는 살짝 웃었다. “사람마다 저에 대한 느낌을 갖고 있겠죠. 누군가에게는 방송인으로, 누군가에게는 배우로. 그냥 그렇게 각자의 나름대로 가벼이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좋겠어요.” 유인촌과 ‘홀스또메르’가 오버랩되면서 옳다 그르다 선을 긋기 전에 인생역정 겪고 마침내 거울 앞에 선 그에게 다시 오는 것과 오지 않는 것은 무엇일지 큰 의미가 없을 듯하다. 편협한 생각으로 나눴던 대화, 그끝에 알게 된 건 그가 영원한 연극인이라는 거다.
- 2017-04-13 15:26
-
- “주어진 대로 ‘살아지면’ 사라집니다” 권대욱 아코르 앰배서더 호텔 매니지먼트 사장
-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이지만 거두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권대욱(65) 아코르 앰배서더 호텔 매니지먼트 사장의 말이다. 31년을 최고경영자로 살아온 인물의 첫 멘트로는 의외다. 선입관 없이 듣는다면 달관한 성직자 내지 철학자의 말 같다. 인터뷰 장소인 도심 복판의 강남 특급호텔이 갑자기 호젓한 사찰로 변해 수도승과 선문답을 나누는 느낌이다. 탈속 버전(?)에 맞춰 묘비명 질문으로 그와의 인터뷰를 진행해봤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태어나자 마자 1년 만에 아버지를 여읨 △삯바느질하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외아들로 어렵게 유·청소년기 보냄 △지망 중학교 입시 실패 △IMF 때 47세의 나이로 해직 △창업에 도전했다가 실패, 이후 산막에 칩거해 세상과 격리생활 2년. 반면에 다음의 이력을 보라. △35세에 한보건설 사장이 된 후 3개 건설사 사장 역임 △현직 특급호텔 사장 △교수 △합창단 단장 △쓰기, 말하기, 노래하기 등이 프로 수준 △주말마다 별장에서 전원생활 향유. 두 삶의 이력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위의 삶에서 짙은 불운의 그늘이 느껴진다면 아래의 삶에선 행운, 그것도 보통이란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억세게 좋은 트리플 운이 느껴지지 않는가. 단순히 성공도, 행복만도 아닌 균형적 삶으로 말이다. 알고 보면 동일 인물이다. 바로 권대욱(65) 아코르 앰배서더 호텔 매니지먼트 사장의 이야기다. 아코르 앰배서더 호텔 메니지먼트(주)는 국내의 정상급 호텔인 앰배서더와 세계적인 호텔체인 아코르가 공동 출자한 호텔 운영 전문 기업이다. 권 사장은 인생의 성공과 실패, 행과 불행을 카르마로 풀어 이야기했다. 카르마란 중생이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을 말하며 혹은 전생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받는 응보(應報)를 가리킨다. 그는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이지만 거두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며 “운이나 불운이나 결국은 업보이기 때문에 늘 현재의 행실을 갈고닦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묘비명에 꼭 한 줄 적히길 바라는 문장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한 단어로 이야기하면 명예입니다. 돈, 명성보다 중요한 것이 명예라고 생각합니다. 명예를 소중히 여긴 사람으로 기록되고 싶습니다. 언제든,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당당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당당하게 살고 싶어도 세상이 그냥 두지 않는 경우는 없었습니까? “물론 나도 (유혹에) 흔들립니다. 인생의 매순간은 유혹이니까요. 누구나 흔들리지만 깨어 있고자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공자는 ‘일흔이 되고서야 비로소 내 마음대로 해도 세상의 규율에 얽매임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공자도 이럴진대 보통사람이 어떻겠습니까. 흔들릴 때마다 내게 스스로 묻는 세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선의를 갖고 있는가. 둘째, 의로움과 정직함이 살아 있는가. 셋째, 내 자식이나 후배에게 떳떳한 역사를 쓰고 있는가입니다. ‘호호·당당·담담(웃음 넘치고 당당한 삶을 살아야만 담담해질 수 있다)을 살펴보는 세 가지 자성 질문이 나를 잡아주는 마음의 기둥입니다.” 중간에 부침이 있었지만 31년째 CEO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또 65세인 지금까지도 현역이십니다.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인생 선배로서 청춘들에게 전하는 조직생활 성공 메시지를 담은 책 를 최근 출간했다.) “예전에 이런 질문을 받으면 버벅거렸습니다.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직장에 존경심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상사에 아부를 떨고 눈치 9단이 되어 설설 기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회사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 일과 동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일의 주인이 될 수 있고 당당해집니다. 사람으로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유 아닙니까. 회사를 사랑하고 일을 사랑해야 내가 삶의 주인이 되고 당당해져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당당해야 자존이 살고, 자존이 살아야 자유가 삽니다.” 주인의식을 갖고 당당하게 살고 싶은데, 조직이나 상사가 ‘주인을 의식하게’ 해 고민하는 젊은이가 많습니다. 멘토로서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신지요. “정 힘들면 최면을 걸어서라도 내 일을 사랑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하하). 조직에서 80%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데 조직생활이 불행하면 인생이 불행해집니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상사가 있다면 ‘내가 왜 너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가’라는 피해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먼저 노력하라고 말합니다. 지금의 고통은 후일의 영광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신념과 내공이 쌓이고 진정한 자존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권 사장은 지금도 새벽에 출근할 때 회사에 경례를 하곤 한다. 사람, 상사에 대한 경례가 아니라. 회사의 가치와 비전 그리고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새벽바람 맞으며 달려오는 동료들의 열정과 마음을 향해 경의를 표하는 경례다. 그의 말을 들으며 얼마 전 들었던 ‘너가 회사다’란 말이 생각났다. 상사, 동료, 직원, 조직문화를 탓하지만 우리 모두가 누군가에겐 회사가 아니겠는가. 승승가도를 달리다 법정관리에 들어가 47세에 극동건설 사장을 그만두셨습니다. 그리고 창업을 하셨다가 바로 실패하셨는데요. “세상에서 사람들로부터 잊혀진다는 것은 생각 이상의 큰 두려움입니다. 오죽하면 공자도 ‘자기를 몰라줘도 화를 내지 않으면 군자’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세상으로부터의 외면, 망각 그런 게 두려워 창업을 서둘렀지요. ‘건설의 포털, 민간건설사업의 조달청 역할을 하는 아이템이었는데요. 전화 몇 통 걸어 이틀 만에 12억원을 모았다고 기뻐한 것도 잠시였지요.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사업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부족했고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문 경영인과 창업은 완전 다른 차원이더군요. 내 돈도 아니고 지인들의 피 같은 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하루하루 보는 게 피가 마르는 고문이었습니다.” 그 후 산막에 들어가 2년간 은거생활을 하셨더군요. “중년 백수, 내 인생에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지요. 처절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산막에 기거하는 생활, 힘들었지만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새로운 것들, 깨닫지 못한 삶의 중요한 요소를 생각할 숙성의 시간이 됐다고나 할까요. 돌이켜보니 더 올라갔다고 더 소신이 있고, 더 많이 가졌다고 더 여유로워진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손에 쥔 것을 잃을까봐, 자리를 뺏길까봐 더 소신이 없어지고 눈치를 더 많이 보게 됩니다. 막상 산에서 살아보니 사람이 하루 동안 먹는 게 별 거 없고 돈도 그리 많이 필요 없더군요. 과일 몇 알 가지고도 버틸 수 있고요. 가진 것을 놓지 않기 위해, 비굴하지 말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지면’ 사라지겠구나, 살아지지 말고, 주도적으로 살아야겠다, 소명의식을 갖고 내 삶을 살아야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은 기간이었습니다.” 지금도 주말엔 산막에 가서 생활하신다고요. 중년의 많은 사람이 ‘산막의 전원생활’을 동경합니다. “(웃으며)겉만 봐선 안 됩니다. 사람들은 산막의 여유로움이라는 좋은 면만 바라봅니다. 그 뒤의 땀과 수고를 봐야 진정으로 진정한 전원생활을 즐길 수 있습니다. 가령 원두막에서 한가로운 독서를 하기 위해선 그 뒤에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누가 흙 범벅의 손 되어 씨 뿌리고 잡초 뽑고 거름 줄 것인가. 개 먹이는 누가 주고 진드기 잡고, 청소하고, 닭똥 냄새 맡으며 누가 거름 만들 것인가. 낭만으로만 생각할 거면 차라리 콘도나 펜션으로 놀러가라는 말을 해주곤 합니다. 인생도 그렇지만 산막, 전원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 총량의 법칙이 작용합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습니다. 행해야 복이 옵니다. 행하지 않고 낙(즐거움)은 없습니다.” 권 사장은 “산막은 야인 시절, 권토중래의 재기 의지를 다짐하는 보금자리였지만 지금은 새로운 힘과 아이디어 충전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며 “세상이 나를 속이고 버릴지라도 언제든 돌아갈 보루가 있다는 점에서 든든한 안식처가 되고 마음의 힘이 된다”고 말했다. “산막을 지은 게 내 인생 최고로 잘한 일로 꼽는다”는 말에 자부심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권 사장님 하면 청춘합창단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시 오디션 장면, 저도 TV로 봤는데요.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온 삶이 아니었다”라는 말에 공감한 분이 많았습니다. 청춘합창단 이후 삶이 어떻게 달라지셨습니까? “하하, 바람 빠진 풍선에 공기가 빵빵하게 들어갔다고나 할까요. 처음 공개오디션 과정에 응한 것 자체가 큰 도전이고 용기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참 잘한 결정이었습니다. 더 부지런해지고 더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생활, 흐릿한 미래에 활력이 더해지고 꿈이 보다 더 또렷해졌습니다. 유엔 무대에 서겠다는 ‘가당찮은’ 꿈이 실제로 이뤄졌고 올해는 오스트리아 그리츠 음악제에 초대받아 해외 무대에도 진출합니다. 평균 연령 64세의 ‘청춘 또래들의 합창’을 통해 소통과 화합을 이루고 세계 무대에 전파하겠다는 꿈을 이루고 싶습니다. 언제까지 어디에서 어떻게 이룰 것인지는 다음 문제입니다. 꿈이 있는 한 외롭지 않고, 과정이 아름다우면 인생도 아름다운 것 아니겠습니까.” SNS 활동도 활발하신데요. 곡우라 칭하시는 사모님과 부부지간 금슬이 알콩달콩 보기가 좋습니다. “사실은 제가 철든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오십 넘어 집사람의 고마움을 알았어요. 알고 보면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라 이심이체예요. 당연히 나와 같으리라고 짐작해 내 고집을 피우고 우기지 말고, 나랑 다르다는 것을 알고 물어보고 배려해야 합니다. ‘따로 또 같이’라고나 할까요. 함께할 수 있는 일, 각자 할 일을 구분해 함께 혹은 각자 하고 즐기는 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입니다.” 쓰(쓰기)-말(말하기)-노(노래하기)에 능하십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특별한 재능이 없는 평범한 중년, 노년들이 삶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만큼 작은 것에서도 행복을 느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다섯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첫째, 죽을 때까지 명함을 파야 한다. 둘째, 최소한의 경제 독립. 이미 갖고 있다면 죽을 때까지 놓지 말아야 한다. 셋째, 지속적으로 공부해야 한다. 넷째, 독립심을 가져야 한다. 단적으로 반찬 만들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기본적인 일에서부터 은행일, 세금 신고하고 납부하는 일 등 일상과 관련한일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혼자 놀기뿐 아니라 혼자 먹기에도 익숙해져야 합니다. 다섯째, 확실한 취미를 가져야 한다. 하다못해 숨쉬기 운동이라도 취미로 가져야 무료하지 않습니다. 시간 알차게 보내기, 몰입할 수 있는 취미를 가지는 것이 요체라고 봅니다. 앞으로 이삼십 년을 무료하게 살지 않으려면 취미든, 공부든, 일이든 새로 시작하려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꿈은 아름답지만 정작 그것을 이루어가는 길은 늘 험하고도 멀다. 하지만 도전해볼 만한 일이다.” ‘꿈꾸는 청년’ 권대욱 사장의 마지막 멘트였다.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한 편의 인생론, 행복론 장편 강의를 들은 것처럼 충만한 기분이 들었다. 인생의 진정한 달관은 포기가 아니라 진격의 용기가 아닐까. 밖으로 나오니 꽃샘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그 바람을 헤치고 봄꽃들이 얼굴을 군데군데 내밀고 있었다. 문득 영국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율리시즈’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여행을 그만두고 쉴 수가 없다. / 나는 내 삶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들어 마시겠다. 나는 언제나 / 기쁨도 고통도 최대한 누리고 겪었다. (중략) 한결같이 변함없는 영웅적 기개 / 세월과 운명 때문에 약해졌지만, / 분투하고, 추구하고, 발견하고, 굴복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강하도다.” 인생의 행복은 남보다 높이,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 있지 않다. 분투하고, 추구하고, 발견하고 굴복하지 않는 의지로 지치지 않고 도전하는 데 있다. 당신은 인생을 진격시키는 힘을 어디서 어떻게 구할 것인가.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 2017-03-27 10:06
-
- [문화읽기] 1월의 추천 전시ㆍ도서ㆍ영화ㆍ공연
- ◇전시(exhibition) 1) 프랑스 국립 오르세미술관 이삭줍기 전: 밀레의 꿈, 고흐의 열정 일정 3월 5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9세기 서양미술사를 빛낸 거장들의 명작 130여 점을 만날 기회다. 작품 보존을 위해 엄격하게 관리하는 고흐의 ‘정오의 휴식’은 오르세미술관 개관 이래 수십 년 동안 유럽 이외 지역으로 반출된 적이 없으나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대여를 허가했다. 낭만주의와 고전주의, 아카데미즘과 사실주의, 인상주의와 자연주의, 상징주의와 절충주의, 20세기 예술의 다양한 원천 등 5개의 테마로 나누어 각 주제를 중심으로 작품 간의 대비와 유기성, 예술사의 흐름까지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2) 닉 나이트 사진전: 거침없이, 아름답게 일정 3월 26일까지 장소 대림미술관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진작가로 손꼽히는 닉 나이트(Nick Knight)의 국내 첫 사진전이다. 사진과 디지털 그래픽 기술의 결합이 돋보이는 닉 나이트 특유의 작품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상 실험을 접목한 패션필름까지 폭넓게 마련돼 있다. 초상사진, 디자이너 모노그래프, 페인팅·폴리틱스, 정물화·케이트 등을 주제로 한 110여 점의 각양각색 작품을 한 공간에서 감상할 수 있다. 매주 일요일에 열리는 ‘선데이 라이브 앤 클래스(SUNDAY LIVE & CLASS)’ 등 유익한 전시 연계 교육 프로그램들도 살펴볼 만하다. ◇도서(book) 1) 인생의 발견(시어도어 젤딘 저·어크로스) 21세기의 예언자라 불리는 영국의 철학자 시어도어 젤딘이 유명 인물들의 전기와 철학적 탐색을 통해 발견한 28가지 질문을 담았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인간과 삶에 관해 끊임없이 성찰해온 저자의 성숙한 지혜와 혜안을 엿볼 수 있다. 2) 브릿마리 여기 있다(프레드릭 배크만 저·다산책방) 로 잘 알려진 베스트셀러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 소설이다. 59세 중년 남성 오베와 얼핏 비슷하면서도 다른 성향을 지닌 63세 중년 여성 브릿마리. 누군가의 그늘에서만 살아온 그녀가 삶의 위기를 통해 온전한 자신을 찾아나가는 여정을 그렸다. ◇영화(movie) 1) 뚜르: 내 생애 최고의 49일 희귀암에 걸린 26세 청년이 한국인 최초로 49일 만에 뚜르 드 프랑스 풀코스를 완주한 실화를 영화화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체육교사를 꿈꾸었을 정도로 건강했으나 어느 날 갑자기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절망스러운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 않던 그는 뚜르 드 프랑스 완주라는 꿈을 키운다. 3500km 레이스의 마지막 지점인 파리 개선문을 통과하며 꿈을 이룬 순간의 가슴 벅찬 감동이 영화의 포스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개봉 1월 12일 장르 다큐멘터리 감독 이윤혁 출연 임정하, 전일우, 박형준 등 2) 내 어깨 위 고양이, 밥 떠돌이 음악가와 고양이 한 마리가 우연히 만나면서 인생의 희망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제목처럼 주인공 제임스는 어깨에 고양이 밥을 올리고 거리 이곳저곳에서 기타를 치고 사람들과 정을 나누며 따뜻한 세상과 마주하게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두 주인공은 2007년에 만나 현재까지 뜨거운 우정을 나누고 있다. 데이비드 허슈펠더 음악 감독과 싱어송라이터 찰리 펑크 등 실력파 제작진이 대거 참여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개봉 1월 4일 장르 드라마 감독 로저 스포티스우드 출연 루크 트레더웨이, 루타 게드민타스 등 ◇공연(stage) 1) 인간 프랑스의 천재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유일한 희곡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인류 마지막 생존자인 화장품 연구원 라울과 호랑이 조련사 사만타가 ‘인류는 이 우주에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재판을 벌이는 2인극이다. 일정 3월 5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연출 문삼화 출연 고명환, 오용, 박광현 등 2) 꽃의 비밀 네 명의 아줌마가 보험금을 타기 위해 각자의 남편으로 변장해 벌이는 사건들을 유쾌하게 그렸다. 장진 감독이 직접 쓰고 연출을 맡은 작품으로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코미디 장르의 연극이라는 점이 돋보인다. 일정 2월 5일까지 장소 대명문화공장 연출 장진 출연 배종옥, 소유진, 이청아 등 3)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중국 고전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를 각색한 작품이다. 원작의 비극성에 희극적 요소를 곁들여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2015년 이 작품의 무대에서 유명을 달리한 배우 고 임홍식의 공손저구 역은 중견 배우 정진각이 이어받았다. 일정 1월 18일~2월 12일 장소 명동예술극장 연출 고선웅 출연 장두이, 하성광, 정진각 등 4) 아이다(AIDA)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던 해 토니 상과 그래미상 등을 휩쓸었던 명작으로 한국에서는 2012년 이후 5년 만에 막이 오른다. 누비아의 공주 아이다와 이집트 파라오의 딸인 암네리스, 두 여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라다메스 장군의 사랑을 노래한다. 일정 3월 11일까지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키스 배튼, 박칼린 출연 윤공주, 아이비 등
- 2016-12-28 09:56
-
-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시인 고은 <초혼>을 노래하다, 곁에 두고 그리워하는 나의 평생 친구 '죽음'
- 새해가 밝으면 저마다 새로운 계획과 소망으로 기분이 들뜨곤 하지만, 고은(高銀·84) 시인은 인생에 해가 더해질수록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가 살아온 80여 년의 세월 동안 먼저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넋들과 앞으로 생을 이어가며 맞이하게 될 죽음들에 대한 가책과 슬픔이 늘 그의 세상에 공존하기 때문이다. 생과 사의 엇갈림 속에서 살아남은 자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방법으로 그는 오늘도 시를 쓴다. 시로써 삶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자신의 길이라는 그는 역시 시로써 자신의 뜻을 나누고자 한다. 고 시인은 시집 으로 자신의 마음을 대변한다. 에 실린 시 ‘초혼’은 원고지 130장에 이르는 장시(長詩)다. 김소월의 ‘초혼(招魂)’과 제목도 같고 먼저 떠난 영혼들을 기린다는 점에서 의미도 함께한다. 고 시인이 직접 낭독하는 데만 1시간이 걸렸을 정도로 깊은 애도의 뜻이 담긴 진혼곡 같은 시다. 그런 그의 시와는 달리 죽음을 경계하고 자신의 삶, 꿈, 자아에만 열중하는 이들을 보면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는 고 시인이다. “‘떠난 사람을 기억하는 게 대체 내 인생과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건 자신을 이루고 있는 세계를 과소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를 존재하게 한 내 부모, 또 내 부모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를 헤아려보면 끝없이 뻗어 있잖아요. 내 밑으로는 또 어떻습니까? 내 자녀, 손주, 손주의 자녀 등 그 또한 한없이 뻗어 나가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결코 분리된 나 하나가 아니에요. 그물망처럼 촘촘히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죠. 이 광대한 세상에서 하나의 삶을 구성하는 티끌로만 보이겠지만, 이 티끌이야말로 모든 우주를 담고 있어요. 나 자신은 곧 우주의 크기와 같죠. 그 안에서 죽음은 늘 우리와 함께합니다.” 혼자가 아닌 삶, 공적인 삶에 대한 의무 그는 나와 연결된 세상과 사람들을 인식했을 때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신중해진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인생이 개인의 노력으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기에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고. “6·25, 4·19, 성수대교 붕괴, 세월호 참사 등 역사에 남을 죽음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죽음까지 얼마나 많은 죽음이 우리 세상에서 일어납니까? 그런 의식 없이 나 혼자만 잘살겠다는 건 후안무치한 태도죠. 나는 정말 나 혼자가 아니에요. 예를 들어 내 속엔 수많은 기생충이 살고 있죠.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누가 만드나요? 여러 사람의 기술과 손길이 닿아 있죠. 내가 쓴 모자, 안경, 마시는 커피까지 무엇 하나 나 혼자 이뤄낸 게 없어요. 그런데 어찌 내 존재만을 과시할 수 있겠어요. 나는 언제나 타자와 함께, 그들의 희생 속에 존재하는 거죠.” 고 시인은 이러한 인식이 자신을 미미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닌 삶을 더욱 풍성하게 채워준다고 조언했다. “늘 떠난 자들의 넋을 어깨에 지고 애도하는 것이 산 자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얼핏 이타적인 삶이라 느낄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자신에게 이로운 점이 많아요. 혼자라고만 생각하면 그런 죽음 앞에 나는 참 비겁하고 가난한 존재잖아요. 그러나 나는 누군가를 기억하는 존재라고 느끼면 절대 공허하지 않죠. 나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자책할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있는 나의 존재를 인식해야 해요. 그러면 삶의 책임감이 강해지고, 비로소 죽은 자 옆에 있을 수 있게 되죠. 이때 누군가는 죽고 나는 살아남았다는 가책이 생기기도 해요. 참 미안한 일이잖아요. 그럴 땐 그들의 못다 한 삶을 내가 대신 살아야 한다는 공적인 자아를 만들어내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면 더 최선을 다해 살 수밖에 없어요.” ‘슬픈 열대’ 100세여, 좀 염치코치 없으셔 에 실린 시 ‘작은 노래 9’를 보면 ‘이 세상은/ 오래/ 오래/ 있어야 할 곳 아니셔/ (중략) ‘슬픈 열대’ 100세여/ 좀 염치코치 없으셔’라는 내용이 나온다. 죽음을 멀리하고 삶에 연연해하는 이들을 항해 고 시인은 ‘염치코치 없다’고 재치 있게 표현했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하잖아요. 나에게도 사람들이 100세 되면 기념 시집을 꼭 내라고 이야기하는데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살다 보면 살아지는 것뿐이지, 그렇게 바라보면서 가지는 않으려 해요. 이 세상의 시간은 나의 것이기도 하지만 타인의 것이기도 하잖아요. 다 가지려고 하는 건 탐욕이죠. 나이 들수록 생애 집착하기보다는 더 의연한 자세로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부여잡으려 하니….” 삶과 죽음에 대한 고 시인의 허심탄회한 감정은 ‘삼거리’라는 시에서 ‘나 또한 오지 않는 임종 같은 지긋지긋한 나이거니’라는 시구로 드러난다. 고 시인은 “죽음? 올 테면 오라!”고 초연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한 가지 염려스러운 부분은 있다고 고백한다. “죽음이라는 건 나 역시 겪어보지 않았는데, 두려움이 왜 없겠소. 그러나 이런들 저런들 찾아오고야 마는 죽음이라면 즐겁게 받아들이자는 거지. 술자리 1차에서 2차를 가듯 신나게 생각하려 해요. 다만 지상에서의 사랑은 늘 아픔을 전제하는 법, 내가 죽고 나면 아내나 딸이 슬퍼할 것 아니에요.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사이라도 결국엔 누군가 먼저 죽는데, 그때 살아남은 이가 얼마나 가슴 아프겠어요. 먼저 간 이도 더 사랑하지 못하고 떠나니 원통할 테고. 이렇게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사랑인데, 어찌 보면 모순이지요. 나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할 이들만 아니라면 나는 내일이든 모레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어요.” 시인생활 59년, 시집 여럿 근래 나온 그의 시집을 보며 인상 깊었던 점이 있다. 맨 앞장 시인의 소개란에 적힌 글귀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한 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화려한 경력이 빽빽했는데 이제는 단 열 자 남짓한 글귀만이 그의 시인 인생을 축약하고 있다. 지난해 나온 에도 그의 이름 두 자와 ‘시인생활 58년, 시집 여럿’이라는 문장 외에는 어떠한 수식어도 찾아볼 수 없다. 흰 종이 위 단출한 이력을 에워싼 여백은 빈 것이 아닌, 그의 겸손과 내공으로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은 자꾸 뭘 쓰게 만들어요. 화려한 경력, 베스트셀러 그런 걸 자꾸 드러내고 채우려고 하는데 난 그게 싫더라고요. 시를 정말 많이 썼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시들을 다시 들춰보고 새기고 하는 건 아니거든요. 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우물에 물이 고여 있다고 그 물이 옛날의 그 물은 아니잖아요. 매일 새로 솟아나지. 내 시도 마찬가지예요. 늘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에 지난 것들에 매여 있을 틈이 없죠.” 하루하루를 새롭게 느끼고, 만물을 신비로이 여기는 그는 이 세상엔 아직 시로 쓰인 것보다 써야 할 것들이 더 많다고 이야기한다. “아직도 노래할 것을 노래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고 시인의 창작에 대한 갈증과 애착은 그의 시집 의 서문에서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죽을 때도 죽어갈 때도 시를 쓸 수 있어?라고 내가 나에게 묻는다면 즉각의 자문자답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쓸 수 있다. 쓸 수 없다면 죽을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평소 시는 인생의 동반자이자 존재 이유라 말하던 고 시인다웠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시를 짓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요. 시는 내 인생에서 떼어놓을 수 없지요. 이 세상에 시로 쓸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내 생애 안에서 그 나이마다 느끼고 발견하는 것들이 있으니 우물물 솟듯 계속 생겨날 수밖에. 죽음도 시라고 생각해요. 의식이 있다가 없는 세계로 탁! 가잖아요. 시처럼 놀랍죠. 아침에 지저귀는 새들, 벼랑 끝에 부딪히는 파도, 이 세상이 다 시 아닐까요?” 나를 가장 정직하게 표현하는 한 권의 세계 1988년 시집 을 펴내며 그는 “6월 투쟁의 대열에 우선 발 벗고 나서야 했다. 최루탄은 눈물 없어진 나를 눈물단지로 바꾸어주었다”며 “이 시대의 당위가 나를 서재의 집념에 머물러 있게 하는 여지를 허용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전 30권 예정인 도 매듭지었고, 원로시인으로서 입지를 단단히 굳힌 그이기에 이제는 서재에서 오롯이 시를 위해 전념하는 시간이 늘지 않았을지 궁금했다. 그의 첫마디에 어리석은 질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런 거(기자와의 인터뷰) 말이오. 이런 거 하느라고 시 쓸 시간을 빼앗기지. 또 다른 나라에까지 내 시가 알려지다 보니 해외 출장도 많아졌고. 그렇게 나가면 그냥 나가는 게 아니라 기조연설 쓰고, 그걸 또 외국어로 번역하고, 시도 낭송해야 하고. 가기 전이랑 다녀와서 이틀에서 사흘을 쉬어야 하니 이래저래 서재에 붙어 있을 시간이 없지요. 그런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어요.” 요즘은 ‘초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주 긴 시를 준비하는 데 여념이 없다고 했다. 조금 전 그의 고충을 들었던 터라 서둘러 그를 서재로 보내드려야 할 것만 같아 냉큼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에 빠지지 않는 명사의 추천 도서 목록 요청이었다. 형식을 파해야 했지만, 짧지만 분명하고 확신에 찬 그의 조언을 그대로 담기로 했다. “나는 책으로 추천하고 싶지가 않아요. 그보다는 자기 자신을 아주 정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세계가 하나 있어요. 누구든 백범 김구 선생의 를 꼭 읽었으면 합니다. 더 추천할 것도 없어요. 우선 그것부터 읽어보라 하시오. 그러고 나면 자신에게 필요한 게 뭔지 스스로 알게 될 테니!”
- 2016-12-28 09:56
-
- [브라보가 만난 사람] 가톨릭관동대학교 국제성모병원 호스피스 담당 이인순 수녀
- 올해에도 노벨문학상 유력 수상 후보로 거론됐던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소설 에서 “죽음은 삶의 대극(大極)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재해 있다”고 말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일상과 무관하고, 삶과 거리가 있게 느껴지지만 사실 죽음은 늘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대단히 죽음에 인색하다. 입에 올리는 것마저 거북해한다. 매일 죽음을 접하는 사람은 다르게 느낄까? 이 단순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가톨릭관동대학교 국제성모병원 마리아 병동(호스피스 병동)의 이인순(李仁順) 수녀를 만났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저는 죽음이 삶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인간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니까요. 하루하루 죽어가는 존재라는 이야기도 있고요. 모든 여정에는 그 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자가 던진 우문(愚問)에 이인순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소인의 입장에선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매일 죽음을 맞닥뜨리는 일이라니. 일이 어렵거나 도망치고 싶을 것 같다고 얘기했더니 이인순 수녀는 되레 의아해한다. 소임받은 일에 의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인순 수녀가 이 호스피스 병동에 부임한 것은 국제성모병원이 개원한 2년 전.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에서 근무하다 수녀회로부터 소임 이동 명을 받고 이곳 병원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격이 필요한데, 이 수녀는 간호사이면서도, 호스피스 전문 간호사 대학원 과정을 이수했다. “물론 이곳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에겐 이곳 일이 쉽지만은 않아요. 다들 젊은 나이이기도 하고요. 24시간 교대근무를 하는 간호사들은 환자와 가족들과의 만남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은데 병동에서 함께 산다고 볼 수도 있죠. 돌보던 환자가 돌아가시면 습(襲)까지는 아니지만 시신을 정성껏 닦고 새 옷을 입혀드립니다. 그리고 장례식장으로 보내드리는 일까지 모두 직접 해요. 스트레스도 적지 않아요. 그래서 함께 일하는 팀원들의 소진 예방을 위한 프로그램도 운영합니다.” 가족이 치료 대상이 되는 이유 이렇게 어려운 일인 호스피스는 무엇일까?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말 그대로 더 이상 적극적인 치료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환자를 대상으로 치료보다는 통증 경감과 기타 신체적 증상 조절, 심리·사회·영적 돌봄을 통해 ‘남은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진행되는 의료서비스를 말한다. 완치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죽음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생의 마감과 가족과의 이별을 돕는 것이 목적이다. 정부에선 지난해 7월부터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국민건강보험 적용 대상으로 지정해 운영 중이다. 국민건강보험에서는 말기 암 환자만을 대상으로 하지만, 앞으로 그 대상이 다른 질환의 환자까지 확대될 예정이다. 현재 이인순 수녀가 있는 마리아 병동에는 33개 병실이 있다. 환자가 머무는 시간은 평균 한 달 정도. 물론 길면 두 달, 짧으면 일주일 이내에서 몇 시간까지 차이가 있다. 호스피스 병동이 일반 병동과 다른 것 중 하나는 바로 ‘가족’에 대한 관점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선 가족도 돌봄의 대상으로 바라본다고 이 수녀는 말한다. “‘사별 상실 스트레스’라는 말이 있어요. 말 그대로 가족을 잃은 상실감이죠. 보통은 13개월에서 3년 정도면 사별 상실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다고들 해요. 하지만 그 이상 길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아요. 그 정도 되면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죠. 여전히 배우자와의 사별이 가장 큰 충격, 즉 삶의 스트레스 1위이지만 최근에는 형제·자매와의 사별도 그 충격이 매우 큰 것으로 보고되고 있어요.” 이러한 사별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는 비슷한 고통을 겪은 다른 사람들과 슬픔을 나누는 것이라고 한다. 사별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겐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별 상실 스트레스를 겪는 분들이 말합니다. 자녀나 가족들로부터 ‘이제 그 얘기 좀 그만해. 잊을 때도 됐잖아’라는 말을 듣는다고요. 죽음을 터부시하고 외면하고 싶은 심리가 있으니까, 고인에 대한 이야기도 못 꺼내게 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태도는 사별 가족 모두에게 좋지 않아요. 심한 경우 50년이 지나서 사별 상실의 슬픔이 터져 나오는 경우도 있어요. 사별을 겪었던 당시에 상실의 슬픔을 충분히 표현하거나 극복하지 못한 채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 결국은 표출되고 마는 것이지요. 이러한 슬픔은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나’와 ‘슬퍼하고 있는 그 당시의 나’를 대면하고 인정하면서 극복해나가야 합니다.” 병명 알고 죽음 맞는 환자 적어 현재 호스피스 병동은 말기 암 환자를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일단 입원하면 모든 환자가 암 환자다. 그러나 실제로 병명과 상태를 정확히 알고 오는 환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이 수녀의 설명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가족에게 권하는 것이 ‘진실 통고’ 혹은 ‘나쁜 소식 전하기’예요. 환자의 알 권리를 존중하자는 것이지요. 환자에게 병명이나 의료적 상태를 정확히 알리고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보호자, 즉 자녀분들이 당사자들에게 말기 암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아요.” 환자에게 가벼운 병명으로 둘러대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심지어 미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왜 이런 거짓말을 하는 걸까? “‘진실 통고’를 권하면 보호자들 반응이 대부분 비슷해요. ‘아마도 충격을 받으실 겁니다, 얼마 안 남으셨는데 꼭 그런 얘기까지 해야 하나요, 삶의 끈을 놓으실 것 같습니다’ 등등 이유가 많습니다. 하지만 삶의 주인공은 나 자신, 환자 본인이잖아요. 자신의 남은 삶을 삶의 주인이 갈무리해야 하는데, 그것을 자녀들이 막는 셈이죠. 환자의 권리를 앗아가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본인들에게 진단명이라는 이름으로 말기 암을 알리고 현재의 의료적 상태를 알렸을 때 심리적으로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만약 환자에게 진실 통고를 할 때 심적 부담이 된다면, 보호자가 그 짐을 떠안을 필요는 없어요. 원래 그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의료진의 몫이니까요. 가족 중에 말기 암 환자가 있다면 환자는 물론이고 가족 모두가 환자 상태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손주들, 즉 어린아이까지요.” 어린아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이 수녀는 말한다. 어린아이들이 놀란다는 이유로 혹은 어리다는 이유로 부모 사별 현장 또는 조부모 사별 현장에서 배제된다. 결국 남는 것은 기억뿐인데, 부모와의 마지막 추억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수녀의 이야기다. 병명을 확실하게 언급하지 않고 숨기더라도, 환자는 병 진행에 따른 본인의 몸 상태의 변화나 병동의 환자들, 주변 분위기를 보고 눈치를 채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환자는 자신이 어떤 상태라는 걸 안다는 사실을, 또 가족은 환자가 눈치 챘다는 것을 알아도 입을 닫는다. 서로가 서로를 안타까워하며 현실을 외면하고 숨기는 것이다. 슬프게도. 시한부 환자가 겪는 5단계 그렇게 알게 된 말기 암에 대한, 본인의 몸 상태에 대한 환자의 심리적 반응은 어떨까. “호스피스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 Ross)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5단계로 설명했어요. 맨 처음엔 부정하죠. 결과를 믿지 않고 다른 병원을 찾아가요. 그러나 같은 결과를 듣게 되지요. 그럼 ‘하필 내가 왜?’라며 자신이나 가족 또는 병원 직원, 더 나아가 신에게까지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환자가 존경과 이해와 지속적인 관심을 받으면 격한 분노가 한결 누그러집니다. 진실과 인내가 필요하죠. 그러면서 사실을, 죽음을 인지하지요. 하지만 타협하는 과정을 거쳐요. 종국에는 신과의 타협입니다. 그것이 끝나면 우울해지고 수용하는 과정을 맞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만나는 환자들은 반드시 이 순서대로 감정 상태를 보이지는 않아요. 감정의 기복이 큽니다.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에 따라 완전히 달라져요.” 그렇게 죽음을 수용하는 과정을 거친 후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어떤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은 죽음일까. 또다시 튀어나온 모호한 질문에 이 수녀는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분명하게 해줬다. “그 전에 바르게 사셔야 해요. 잘살아야 잘 죽을 수 있는 것이지요. 흥청망청 살다가 인생 말년에 웰다잉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가족과의 불협화음이 있는 경우의 환자들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도 순탄치 않아요. 마지막까지 외롭고 힘든 과정을 거치게 되더라고요. 환자 본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확실하게 의사표현을 해서 정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특별히 경제적인 문제는 남은 가족한테 떠넘기지 말고 본인이 해결하셨으면 좋겠어요. 사별의 아픔을 겪는 가족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남기는 셈이니까요.”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죽음 역시 인생의 방점이고 현실이니까. 로맨틱할 이유도, 동정만 할 일도 아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해서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자택 임종’ 하고 싶어도 못해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의학적으로 임종 시기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단다. 때문에 그 시기가 가까워지면 환자를 임종실로 모시고 차분히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가족들과 이별할 시간도 마련한다. “임종실을 해밀방이라고 불러요. 해밀은 비온 뒤 맑은 하늘을 뜻하는 우리말이에요. 해밀방으로 옮겨지면 환자와 가족들이 그간 하지 못했던 말,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라고 권해요. 서로가 청할 것이 있으면 청해서 용서받고, 화해하라고요. 이런 과정은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 도움이 돼요. 한번은 의식이 없는 아버지(환자)와 가족 모두가 마지막 인사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환자의 의식이 살짝 돌아와, 네가 했던 말 다 들었다고 하면서 고맙다고 표현하신 거예요. 환자의 큰아드님이 감격스럽고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가셔서 감사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환자는 의식이 없어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귀는 열려서 듣고 있었던 거죠.” 그렇게 환자가 임종하면 이 수녀와 담당 간호사는 고인의 몸을 닦고 준비해뒀던 옷, 생전에 좋아했던 옷으로 갈아입힌다. 이 수녀는 이 과정을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보람 있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에 피를 토하는 환자가 있어요. 그러면 고인의 얼굴을 잘 닦아드리고 정돈된 모습으로 가족과 마지막으로 인사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드려요. 그러면 가족들이 기억하는 고인의 마지막 모습은 피 토한 흔적 없는 깨끗하고 편안한 모습이에요. 그 모습에 가족은 위로를 받아요. 편한 얼굴을 보고 편하게 돌아가셨다고 믿고 싶은 거죠.” 환자들은 생의 마지막 장소로 병원을 어떻게 생각할까. 사실 많은 환자들이 임종 장소로 집을 원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병원이 선택되는 이유는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이다. “집에서 환자를 24시간 간호한다는 것이 쉬운 문제가 아니잖아요. 환자를 돌보는 문제도 있지만,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난 뒤에도 문제가 있어요. 사망 확인을 위한 행정적인 절차가 꽤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호자들이 겁을 먹는 경우가 많아요. 죽음의 현장이 자연사임에도 불구하고 죽음 자체가 익숙하지 않고 낯선 것이니까요. 죽음을 터부시하는 문화의 영향이 지배적인 거죠. 현재는 꼭 가정에서의 임종이 아니어도 가정형 호스피스 제도를 통해 호스피스 서비스를 가정에서 받으실 수 있어요. 올 3월부터 시범사업을 시행 중인데, 병원에서와 같은 돌봄을 가정에서 받을 수 있고 돌봄 제공자들이 연계되어 가정으로 방문합니다. 환자들이나 가족들의 반응도 좋아요.” 죽음 앞에서 가족들의 모습은 어떨까. 이 수녀는 예외 없이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수고했다. 고통 없는 좋은 데로 가라”고. “다들 그러세요. 고생 많았다. 수고했다. 고통 없는 데로 먼저 가라고 하면서 덧붙이는 말이 있어요. 다시 만나자고. 아마 우리네 민간신앙이 바탕에 깔렸겠지만, 죽음 너머에는 여기가 아닌 어딘가가 있다고 믿는 것이죠. 그래서 이야기해요. 좋은 곳에 먼저 가 있으라고. 다시 만나자고.” 이 수녀는 마지막으로 잘 죽는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송나라의 주신중(朱新中)이 훌륭한 죽음에 대해 5멸(五滅)의 실천을 이야기했어요. 멸재(滅財), 재산을 남기지 말고 죽을 것. 멸원(滅怨), 원한을 남기지 말 것. 멸채(滅債), 남에게 빚을 남기지 말고 죽을 것. 멸정(滅情), 정분을 남기지 말고 죽을 것. 마지막으로 멸망(滅亡),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을 것이라고요. 인생 여정의 붙잡고 있기와 놓아주기를 균형 있게 한다면 하루하루 잘 죽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 2016-11-07 09:32
-
- [브라보가 만난 사람] 취미가 직업이 된 사진작가 박찬원의 꿈, “내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는 것이 목표다”
- “팔다리는 물론 얼굴에까지 뜨듯한 오줌이 그대로 튀어요. 얼굴은 똥, 오줌 범벅이 돼도 ‘똥은 흙, 오줌은 물’이라고 생각해요, 사실은 이때가 사진 찍기 가장 좋은 때거든요.” 7개월 동안 돼지의 생활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박찬원(朴贊元·72) 사진작가가 겪은 일이다. 그는 돼지만 사진을 찍어서 ‘사진작가는 미친놈이다, 아니면 내가 전생에 돼지였는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단다. 확실한 것은, 그가 사진에 미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제2 인생의 즐거움과 사진예술 인생의 새로운 가치를 들어본다. 글 사진 김영순 기자 kys0701@ 이제는 사진작가라고 불러야 한다. 과거에는 사장, 한때는 교수라고 불렸던 이다. 바로 박찬원 사진작가의 이야기다. 1944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삼성전자 대표, 삼성그룹 부사장을 지내면서 전 세계로 뻗은 거대한 재벌 기업의 의사결정권자로 일했고, 코리아나화장품 사장을 끝으로 기업에서 은퇴한 후에는 성균관대 석좌교수로 교육자로서의 삶도 겪어 봤다. 그러나 40년을 직장인으로 산 그가 인생 후반전에 도착한 곳은 사진이라는 예술이었다. 그는 지난 6, 7월에 걸쳐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이포’와 은평구 녹번동 ‘서울혁신파크’에서 두 번의 ‘돼지’ 테마 전시회를 마친 뒤였다. 지난 8월에는 12일간 종로구 사진위주 류가헌에서 ‘숨 젖 잠’이라는 초대전도 열었다. “원래 초대전을 여는 걸 사진 배우기 시작한 10년째인 2018년에 계획했는데 기회가 일찍 왔어요. 문래동에 위치한 대안공간 이포가 원래 실험적인 젊은 작품들을 전시하는 곳인데 내 작품을 보고 좋다고 해서 열게 됐죠.” ‘예술은 돈이다’라고 이야기한 피카소의 말이 생각났다. 박 작가한테 전시 작품에 ‘빨간딱지’ 가 붙어 있을 때 기분이 어땠냐고 물었다. “전문 사진가라면 작품이 판매되어야 하죠. 처음 판매되었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2011년 코엑스 CEO 특별전으로 기성 작가들과 호주에서 사진전을 열었을 때에요. 가슴이 쿵쾅거렸어요. 구매한 그분께 정말 감사했고 부담도 느꼈어요. 아마추어는 전시만 하면 되지만 프로는 팔려야 하죠. 작가와의 친분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좋아야 사는 거잖아요. 나중에 누가 샀는지 알아보지 말 걸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작품이 팔리고 보니 진짜 작가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웃음)” 작가는 작품이 판매될 때 비로소 첫걸음을 떼는 것이다. 누드 사진을 계기로 사진예술에 눈 뜨다 박 작가와 사진과의 인연은 올해로 8년째다. 2008년에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강연을 듣다가 미술과 사진을 배우면서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는 미술과 사진 둘 다 지금도 꾸준히 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시 ‘본업’은 사진이다. “처음부터 사진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사진작가 조세현 선생이 가르쳤는데 하루에 인물, 풍경, 누드, 종합으로 테마 하나씩을 세 시간에 걸쳐 네 번 찍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세 번째 날인 누드 사진을 찍은 날, 내가 대상을 받았어요. 그때 썼던 카메라들이 모두 삼성 카메라였는데, 조세현 작가가 제 걸 보더니 ‘이건 카메라 광고로 써도 손색이 없겠다’라고 말하더군요. 그 사진이 누드의 실루엣만 찍은 건데, 저는 마케팅 쪽을 했기 때문에 보는 눈은 좀 있다고 자부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곳에 가서 엎드려서 찍었는데 성공적이었던 거죠. 그때 ‘야, 이거 할 만하네’라는 생각이 들었죠(웃음).” 박 작가는 이때 때로는 초보도 프로 못지않은 명작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인생 자체가 작품 같은 박찬원 박 작가는 코리아나화장품에서 은퇴하고 성균관대에 석좌교수로 초빙되어 마케팅을 강의하게 됐다. 그런데 하다 보니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젊은 박사들은 경력을 위해서 강의를 맡는 게 중요한데 나는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아, 내가 할 자리가 아니구나’ 싶어서 한 3년 하고 나서 그만두었어요. 그리고 사진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2010년에 상명대 예술디자인 대학원에 멋모르고 지원했죠. 그러면서 고생 엄청 했어요.” 사진을 배우러 들어갔는데, 정작 대학원에선 사진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기술은 이미 대학교에서 배웠다고 생각하고 예술가가 되는 훈련을 시켰기 때문이다. 여전히 초보였던 그로서는 많이 힘들었지만 그러한 훈련 덕분에 예술, 예술가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다고 말한다. 인생 후반기의 보람을 느끼는 힘,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 쓰는 언어, 노는 물도 달라졌다. 그리고 그간 고생한 것이 아까워 졸업하자마자 라는 책도 썼다. 이제 박 작가의 목표는 영원한 현역이다. “사진작가를 업으로 가는 건 정해졌습니다. 제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는 게 목표예요.” 작품의 진정성을 추구하기 위한 100일 촬영 박 작가는 하나의 주제에 100일 촬영을 목표로 작업하는 순수 사진가로 ‘생명의 의미’를 담았다. 현재 작품 세계의 주요 테마는 ‘돼지’와 ‘염전’이다. 얼마 전에 쟁쟁한 기성 작가들과 함께 전시했던 테마도 ‘돼지’를 소재로 한 ‘꿀 젖 잠’이라는 제목이었다. 각각 ‘꿀’은 돼지가 내는 소리, ‘젖’은 돼지의 젖, ‘잠’은 돼지의 영혼을 사진으로 잡아내고자 한 시도다. ‘돼지’ 테마는 결코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촬영할 수 있는 곳을 섭외하는 데만 6개월이 걸렸다. 그것도 운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겨우 섭외한 양돈장에서 지난해 8월부터 올해 3월까지 매주 2박3일씩을 현장에서 먹고 자며 촬영했다. “똥 냄새 엄청나죠. 지금도 자동차 트렁크를 열면 그 냄새가 날 정도예요. 젖 사진을 찍을 때는 얼굴에 똥이 다 묻어요. 그리고 돼지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긴장해서 오줌을 싸고요. 그런데 돼지가 오줌을 싸면 움직이지 않아서, 좋은 사진이 나올 수 있어요. 상황이 이런데 막상 사진을 찍을 때면 냄새가 안 납니다. 의식을 못하는 거죠.” 100일 촬영하기를 한다고 했을 때, 2주에 한 번 간다고 하면 2년이 걸리고 1주에 한 번 가면 1년이 걸리는 긴 시간이다. 당연히 사진 촬영 때문에 다른 모임은 일절 참석할 수 없게 된다. 얼마나 사진에 올인하여 새로운 즐거움을 갖게 됐는지를 알 수 있다. “막상 셔터를 누르는 시간은 얼마 안 걸려요. 나머지는 다 생각하는 시간이죠. 그 시간이 주제가 구체화되는 지점입니다.” 3년 동안 염전 사진을 찍었다 소금밭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염전 안에는 삶과 죽음이 모두 담겨 있더라고요. 처음으로 빛을 느낀 곳이기도 합니다. 바닷물이 노구(老軀)를 끌고 찾아와 햇볕에 몸을 맡기면 육신은 소금으로 남아 생명의 물질이 되고, 영혼은 수증기가 돼 다른 세상으로 날아갑니다. 죽음과 탄생이 공존하는 공간이죠. 나비, 하루살이, 거미 등을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은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어요. 눈을 뜨고 마음을 여니 새로운 세상이 보이는 듯했어요.” 박 작가에게 염전은 성지와도 같다. 처음으로 사진다운 사진을 찍었고 많은 고민을, 많은 생각을 했던 곳이다. 날것 그대로, ‘생명’을 사진에 담는다 어디를 가나 그는 연장자다. 전문작가도 사진을 정리할 나이 65세에 사진을 시작했다. 아랫사람보다 10년 이상 차이가 난다. 나이가 많다고 대접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체력의 한계, 감각의 한계가 핸디캡이 될까 봐 그래서 항상 조심스럽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몸과 마음이 따라 주지 않는다. 최근 사진들은 리터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준이다. 그런 기술적인 부분까지 직접 다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박 작가는 리터치(보정)를 잘 못하고, 가급적 안 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어쩌면 그러니 제 작품을 어설프지만 인정해 주는 것일 수도 있어요. 리터치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보면 다 알거든요.” 가공이 거의 없는 날것 그대로의 사진. 그래서인지 박 작가의 사진에는 유난히 담백한 맛이 있다. 그것은 다큐로서의 시선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게 그냥 찍는 게 아니고 사람과 사귀어야 하고 동물하고도 사귀어야 하고 그런 것들을 해야만 개념도 잡히는 거죠.” 박 작가가 추구하는 작품세계의 궁극적인 지점은 ‘생명’이다. 다음 테마는 비밀이지만 역시 그가 추구하는 ‘생명’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이미 결정됐다고 하며 10월 부터 착수한다. “작품 사진이 좋을 때는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답은 간결했다. “즐기면서 찍을 때 좋은 사진이 나오고, 힘을 빼고 작업할 때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것은 진리예요.”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 “우리 집사람은 수채화를 그려요. 그러니 호흡이 딱 맞아요. 저도 처음에 대학원을 갈 적에 그림으로 가느냐 사진으로 가느냐 고민이 많았는데, 그림은 앉아서 하니까 건강에 도움이 안 될 것처럼 보였어요. 반면 사진은 움직이면서 찍으니까 활동적이어서 그쪽을 선택한 것도 있죠. 지금은 더 건강해진 느낌이에요.” 상당수의 시니어들은 뭔가를 새롭게 하려고 해도 늦게 시작하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있다. 그래서 감히 못하는 경우 많다. 그러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해요. 의외로 나이든 예술가들이 자기 명성만 가지고 유지하는 경우가 많아요. 반면 젊은 친구들은 장래가 두려워서 방향을 잘 못 잡고 몰입을 잘 못하죠. 난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됐고 다른 일이 없으니까 필요한 건 용기였죠.(웃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기에 박 작가 혼자 히죽 웃는다. 제2 인생도 용감한 사람만이 즐길 수 있는 것 같다. 영원한 현역을 다짐하다 그는 나이를 먹어서 가져야 할 것은 용기를 내는 것이라는 걸 재차 강조했다. 자신도 주변에 추천은 많이 해줬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기를 못 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해야 하는데 취미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점도 지적했다. 나이 들어 자기 자신의 역량이나 잠재력을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관점도 거기에 있었다. “호기심, 그리고 노력인 거 같아요. 그림도 사진도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재능 없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제가 찍는 정도의 사진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시도를 안 하는 거라고 봅니다.” 다소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 인생에서 가장 흥분되는 때가 언제인지 물어 봤다. 그의 대답은 즉각적이고, 예상한 그대로였다. “바로 지금이지! 즐거워!” 자기만의 인생을 사는 사람, 박찬원 작가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가는 사람이었다. “2018년은 사진을 시작한 지 10년째 되는 해예요. 10년간 사진 공부를 하고, 10년간 사진가로 활동하겠다는 계획을 잡았어요. 우리 나이 65세에 사진 공부를 시작했고, 75세에 나만의 작품으로 데뷔전을 하고 85세에 마지막 사진전과 사진 책을 발간할 작정입니다.”
- 2016-09-08 08:40
-
- [브라보가 만난 사람] 조동성 안중근 의사 기념관장의 멈추지 않는 미래 탐색기
- 조동성 안중근의사기념관장은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로 무려 35년 반을 재직한 대한민국 경영학계의 대표 학자다. 디자인 경영 개념을 제시하여 경영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왔던 그는 2011년 남산에 위치한 안중근의사기념관 관장으로 취임했다. 교수로서의 성공적인 생활에 이어 새로운 삶에 도전하고 있는 조동성(趙東成·67) 관장의 목소리를 통해 ‘인생 본고사에’ 도전하는 의미를 짚어봤다. 조동성 안중근의사기념관장은 인터뷰 내내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아마도 입가에 가시지 않는 웃음기가 그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몇 년 전 서울대학교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서 봤을 때와는 또 다른 젊음이 새삼 느껴졌다. 그는 안중근 의사를 ‘로맨티스트’라고 표현했다. 원칙에 살고 원칙에 죽었던 이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안중근 의사에 대해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며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에 대한 의욕을 보였다. 아직 안중근 의사에 대해 모르는 점 많아 “대략 1년에 10만 명 정도 기념관을 찾고 있어요. 저는 경영학을 한 사람이다 보니 마케팅을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좌상이 아니라 보부상이 되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안중근 의사 기념관 홍보대사란 직함을 만들었습니다. 500여 명을 홍보대사로 양성 및 위임하여 전국의 각 초중고에 가서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카데미를 만들어 교육을 진행하고 있어요.” 안중근아카데미는 지난 5년 동안 1년에 두 기수씩 진행됐다. 50대, 60대로 학교 교사, 대학 교수로 은퇴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국민의 혈세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돈을 벌 수 있으면 자체 수입을 만들어서 정부 지원을 되도록 안 받는 쪽으로 가자는 생각이 있어요. 혈세는 받을 만큼만 받자는 거죠. 마침 여기가 위치가 좋아요. 서울역이나 남대문에서 5분 거리입니다. 직장인들도 많이 다니구요. 그래서 찻집을 하나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돈도 벌고 사람도 오게끔 하려는 생각이에요.” 조 관장은 그에 더해 ‘의류 사업’(?) 진출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캐릭터가 미키마우스입니다. 그 다음이 체 게바라라고 해요. 체 게바라는 티셔츠로 그렇게 유명해질 수 있었죠. 안중근 의사도 그렇게 해보고자 합니다. 돈을 버는 것과 함께 사회적 역할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는 찔레이자 장미다 조 관장은 2014년 2월 서울대학교에서의 35년 6개월이라는 시간을 마치게 됐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덕분이었다. “어머니에게 서울대에서 일을 시작한다고 알려드린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날 저에게 ‘무릎 꿇고 앉아라. 나하고 약속을 하자’라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어머니는 저에게 ‘정년 퇴임할 때까지 서울대를 떠날 생각을 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가 1978년이었죠.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그렇게 살게 됐어요. 사실 학교를 떠날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니의 말씀이 저를 붙잡았죠.”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이 모이는 곳에서 보낸,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렇게 한 우물을 팠을 때 얻는 것과 잃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한 우물을 파야 물이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가능성이 확실하게 있다고 생각이 들면 성공할 때까지 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조 관장의 저서 중에는 라는 공저가 있다. 그렇다면 그는 장미의 삶이었을까 아니면 찔레의 삶이었을까? “장미는 축적하는 삶입니다. 반면 찔레는 처음부터 가진 걸 즐기는 삶이죠. 큰 조직의 일원으로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삶은 장미입니다. 군대나 대기업이 대표적인 장미의 삶이죠. 장미는 자기 삶이 없고 50, 60대가 되면 힘들어집니다. 그에 비하면 교수는 찔레의 삶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찔레도 한 길만 계속 파다 보면 장미처럼 돼요. 그러니까 제 삶은 장미와 찔레로 굳이 구분 짓는다기보다는 일정한 궤적으로서의 삶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서울대라는 조직은 조직 구성원이 갖고 있는 능력을 확장해줄 수 있는 곳이라는 특성이 있음을 잊지 않았다. 같은 말이라도 서울대 교수가 말한다고 하면 좀 더 믿음이 갈 수밖에 없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그는 그 현실에 혜택을 받으면 받았지 자신이 희생된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교수 생활의 마지막 봉사 조 관장은 서울대 교수 생활의 마지막 해에 경영학 교수로서 사회에 어떤 봉사를 할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서울대가 아닌 대학교 학생들에게 특강을 하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확실한 봉사라고 판단했다. “제가 지도한 학생들이 전국 70여 개 대학에 교수로 있어요. 그들에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두 시간 정도 특강 시간을 주면 내가 가서 특강을 진행하겠다, 향토음식을 사주면 맛있게 먹고 돌아오겠다라고(웃음).” 그렇게 15개 대학이 정해졌고 한 주에 한 번씩 특강을 나갔다. 2013년 9월부터 12월까지 2학기 내내 가졌던 강의 봉사 속에서 그는 많은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강의를 똑같이 하려다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받아서 그중에서 괜찮은 걸 골라 강의하자고 했어요. 질문들 중에 가장 많이 나온 게 두 개였어요. 첫 번째는 ‘좋아하는 걸 할까요, 잘하는 걸 할까요’였습니다.” 그는 그 문제에 대해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많이 나온 질문에 대해 답하다 보니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더란다. “두 번째로 많이 나온 질문은 ‘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꿈에 대한 질문은 즉답을 하는 순간 질문의 함정에 걸리는 거예요. 묻는 이가 스스로 선택하여 말할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그가 본 꿈을 대하는 학생들의 유형은 다음 네 가지였다. 1.확실하게 꿈이 있고 그 꿈이 절대 안 변하는 사람 2.확실하게 꿈이 있는데 확실하게 바뀌는 꿈 3.꿈을 가지고 있느냐고 하면 적당히 내 꿈을 말하지만. 자신이 없고 확신이 없는 것. 4.아예 깨끗하게 꿈이 없는 것. 내 꿈이 아니라 가문의 영광, 부모의 꿈 등등. “1, 2는 그 사람의 꿈이 확실한 겁니다. 반면 3, 4는 꿈이 없거나 모르는 거죠. 되레 3, 4의 유형은 크게 부담이 없어요. 이들은 잘하는 걸 계속하면 됩니다. 그러나 1, 2는 자신만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좋아하는 걸 하라고 해야겠죠.” 자신의 첫 번째 스승, 아버지 조 관장은 자신의 삶이 평탄하기만 했던 것 같지는 않다고 밝혔다. 연구 결과가 안 나오거나 친구 관계가 틀어지거나 하는 소소하지만 심각한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것들에 대해서 연연하지 않는 품성이 그러한 갈등이 큰 상처가 되는 걸 막았다. 그의 그런 기질은 아버지로부터 배운 면이 있었다. “선친께서는 교수를 하다가 정부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국회의원에도 출마하셨죠. 그러나 당선은 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가 제가 막 대학생이 됐을 때였죠. 낙선한 그날 아버지께 깎은 사과를 드리기 위해 방에 들어갔는데 아버지께서는 거기서 책을 쌓아놓고 글을 쓰고 계시더군요. 뭐하시냐고 여쭤봤어요. 책들은 러시아로 된 책들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나라가 남북 분단이 되어 있고 통일이 가장 큰 과제인데 소련의 도움 없이 통일될 것 같지가 않다. 옛날에 러시아에 대해 배운 걸 정리해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패배한 선거날에 말이죠. 그런 분이셨습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게 아버지의 철학이었습니다.” 미래를 생각하는 습관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아버지 덕분이었다는 그는 그런 습관 덕분에 서울대 교수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제 비로소 인생 본고사를 시작한 셈 조 관장은 교수직 퇴임 이후의 가장 큰 변화로 중압감에서 벗어난 걸 들었다. 서울대학교라는 이름의 무게에서 그도 자유롭지는 못했던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누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 신경 쓰게 되더군요. 교수 사회에서도 최고여야 하고 표정, 행동, 매너 등등을 고민하게 돼요. 제 한마디가 서울대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면 더 그렇죠. 그런데 학교에서 월급 받을 때와 달리 지금은 명예교수니까. 명예교수는 한 푼도 안 받거든요(웃음).” 그는 인생 후반전이라는 말은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저는 제가 후반전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제가 고3일 때, 모의고사를 열 번 보고 본고사를 봤어요. 그래서 40대, 50대일 때는 모의고사를 7번 본 거 같았죠. 두세 번 더 보면 이제 진짜 인생의 본고사를 보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서 8번째, 9번째 모의고사를 봤고. 지금에 와선 모의고사는 다 봤고 이제야 본고사를 볼 시간이라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은퇴 후 인생이란 표현이 저에게는 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스승이 많으면 행복한 삶이라고 하던가. 그는 자신에게 인생의 가르침을 준 사람들을 하나하나 꼽았다. “첫 번째, 두 번째가 아버지와 어머니입니다 세 번째 분이 중학교 때 교장 선생님이에요. 그분께서는 ‘올림픽 기록은 지키라고 있는 게 아니라 깨라고 있는 거다. 역사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기 위해서 하는 거다. 하루하루를 과거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를 깨고 새롭게 나아가기 위해 살아라’라고 말씀하셨죠. 그 말씀이 지금도 생각나요. 그리고 서강대 경제학과를 맡고 계셨던 김덕중 교수님입니다. 그분께서 1975년께 제가 하버드대학을 마치고 막 귀국했을 때 말씀하셨죠. ‘하버드를 나왔으니 기고만장할 때다. 사회에서도 인정해줄 거다. 그거 딱 5년 간다. 하버드라는 이름이 깨질 때를 위해 지금 준비하고 능력을 쌓아라’라고요. 정신이 번쩍 들었죠.” 누구라도 세상에 도움이 될 능력을 갖고 있다 조 관장이 접한 경험, 그리고 그가 만난 스승들은 그에게 미래를 놓지 않는 힘을 갖게 만들었다. 그는 그러한 힘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접근하지 못했던 분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는 최근 ‘사람의 능력을 발견하는 작업’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특히 자폐증인 사람들의 능력을 발굴하는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군대 시절, 고문관인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친구였죠. 그런데 그 친구가 어느 날 풀피리를 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소리에 모든 사람이 감동을 받았고, 저 또한 마찬가지였죠. 이 세상에 불필요한 사람은 없다는 걸 느끼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군대 시절의 기억은 그에게 사람에 대한 관점을 바꾸게끔 만들었다. 그의 이 새로운 작업은 무엇보다도 그의 가족 중 한사람이 자폐증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요즘은 자폐증 부모들이 어떻게 자녀들의 능력을 찾아냈는가를 연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생각해보면 풀피리를 불었던 그 친구를 접한 경험에서 갖게 된 자세 같기도 해요. 누구에게라도 능력은 있다, 그러니 그걸 찾아내게 돕자는 겁니다.” 끊임없이 미래를 갈구하는 이가 이제 타인의 미래를 찾아주기 위해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려 한다. 실로 아름다운 나비효과 아닌가. 이제 인생 본고사를 치르려 한다는 조 관장의 말이 실제적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 2016-04-19 09:48
-
- [신중년·꽃중년 새 바람, 학교 가는 사람들] Part 4. 우아한 인생 2학기, 교양학점 올리기 ②서울시민대학
- 나이 들수록 지식을 뽐내기보다는 지혜(智慧)를 나누고 덕(德)을 베풀었을 때 자연스레 교양이 묻어난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지혜와 덕은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교과서나 시험도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생의 큰 숙제와 같다. 해결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동안의 소양과 더불어 끊임없이 공부하며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체력(體力)이다. 몸이 건강해야 정신과 마음이 건강한 상태로 오랫동안 인생 공부를 해나갈 수 있겠다. 교양 있는 중·장년의 삶을 위해 ‘지덕체(智德體)’를 향상할 수 있는 배움의 장을 살펴봤다. ◇ Chapter 2. 서울시민대학에서 德 학점 올리기 서울시는 시민에게 풍성한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서울시민대학’을 운영한다. 2013년 시작해 인문학적 성찰, 시민 민주주의, 삶의 터전, 예술적 감성 등 총 379개 강좌에 교육 인원 2만693명(연인원 8만6363명)이 수강하는 등 인문학 교육을 통해 성숙한 시민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배움의 장을 마련해왔다. ‘서울시민대학’은 시민청, 뚝섬 학습장(방송통신대 서울지역대학), 은평·중랑 학습장, 대학연계 시민대학(14개 대학 학교별 강의장)에서 2016년 상반기 114개 강좌를 3월에 개강하며, 하반기에는 230여 개 강좌로 확대할 예정이다. 서울 시민이라면 누구나 무료로 수강 신청할 수 있도록 서울시 평생학습포털 사이트(sll.seoul.go.kr)를 통해 온라인 선착순 모집한다. 세부강좌는 서울시평생학습포털에서 확인 가능하며, 수강 신청은 3월 8일 10시부터다. 3월 22일 시민청 시민대학부터 강좌별 순차적으로 개강한다. 서울시민대학의 시민청 시민대학은 유명 강사의 재미있는 대중 인문강좌를 들을 수 있고, 은평학습장은 평생교육사, 예술지도사 등 전문가로 성장하고 싶은 시민들에게 전문가 역량 강화 교육을 제공한다. 뚝섬· 중랑 학습장은 평생교육시설이 부족해 학습기회가 적은 일반시민들에게 시민공동체과정, 부모교육 등 생활 속 인문강좌를 진행한다. 또한 시민 누구나 더 가까이 인문 심화강좌를 들을 수 있도록 서울시와 협력을 맺은 대학교 내에서 대학연계 시민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대학연계 시민대학은 2013년 3개 대학이 서울시와 협력운영하여 11개 강좌 365명이 수강했고, 2015년에는 14개 대학 69개 강좌에 2885명이 참여하는 등 8배가량 학습자가 늘었다. 각 대학의 특성을 반영한 다양한 인문 전문강좌에 대해 학습자들의 만족도가 높았던 덕분이다. 이러한 학습자들의 요청에 힘입어 하반기에는 운영대학을 20개 대학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서울시민대학은 학습자에게 배움의 즐거움을 주는 한편, 학습매니저에게 평생교육 전문가로 성장의 기회를 주고, 대학 등 민간 평생교육기관과 협업하는 등 지역사회 환원활동도 해나가고 있다. ‘나를 위한 글쓰기’ 수강생들이 말하는 ‘서울시민대학’ 나를 위한 배움을 통해 만난 ‘진짜 나’ 경희대에서 ‘나를 위한 글쓰기’를 수강한 50대 김혜순씨는 “대학을 졸업한 지 20~30년이 넘은 중·장년에게 필요한 공부를 선택해 들을 수 있었던 점이 좋았다. 대학 캠퍼스를 다시 거닐어 보는 낭만도 만끽하고, 다시 배움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한다”며 “중·장년이 30% 정도 되는데, 함께 배우는 분들의 의지는 매우 강했다. 처음엔 문단의 개념이나 글의 전개 방식 등에 대해 전혀 몰랐던 동료가 강의를 거듭하면서 눈에 띄게 발전했다. 칭찬을 많이 받고 글로 상을 받는 분들이 늘어났고, 80세에 가까운 어르신은 구술로 전환하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서울시 메일링 서비스를 통해 서울시민대학을 알게 된 60대 김모씨는 “다양한 강좌들이 무료로 진행된다는 점이 정말 좋았다. 강사진과 커리큘럼도 마음에 들었다”며 “앞으로도 이러한 강좌를 지속하고, 많은 이들이 참여한다면 고령화사회를 맞이한 노후에도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소감을 말했다. 특히, 그녀는 ‘나를 위한 글쓰기’를 통해 진짜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동안 잊고 지낸 시간을 되새김하며 치유하지 않고 묻어버린 상처와 아픔, 그리고 기쁨도 다시 찾게 됐다. 학기가 끝났지만, 수업 시간 내에 다 쓰지 못한 나의 이야기를 지속해서 써나갈 수 있도록 격려하는 벗이 생긴 점도 감사하다”며 글쓰기를 통해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바랐다. 학습매니저 이서연(52)씨가 말하는 ‘중·장년 학생들의 학구열’ 노력·열정·배려 속에서 발견한 중·장년의 기품(氣品)과 기쁨 서울시민대학에서는 강사와 학습자가 더 잘 소통할 수 있도록 새로운 교육전문가인 학습매니저가 함께하고 있다. 이들은 학습자료 준비, 강의실 및 출석 관리뿐만 아니라 시민대학과 학습자, 교수와 학습자를 이어주는 소통창구 역할을 한다. 학습현장에서 수강생들의 건의사항이나 고충을 듣고 처리하기도 하지만, 수업에 대한 만족도와 반응도 가장 직접적으로 듣고 학습동아리나 커뮤니티 형성을 도와준다. 지난해 홍익대학교에서 학습매니저로 활동했던 이서연(52)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녀는 학습매니저와 담당 교수들이 가장 놀라워한 것은 중·장년 수강생들의 노력과 열정이라 말했다. “교수님들은 학습자들의 진지한 수업 태도에 찬사를 보냅니다. 일반 대학생을 상대로 강의할 때는 정해진 커리큘럼이나 학점 이수를 목적으로 수업을 듣기 때문에 태도나 열정이 덜하다고 해요. 그런데 이분들은 정말 자기가 원해서 스스로 좋아하는 강의를 찾아오신 거잖아요. 수업 몰입도도 대단하고, 예습 복습도 철저하게 해오니 수업의 질도 높아졌죠.” 수업에는 중·장년뿐만 아니라 학생이나 청년들도 참여한다. 소모임을 만들거나 SNS를 통해 젊은이들과 배움을 나누는 등 세대 간 훈훈한 사례도 많다고. 나이가 적고 많고를 떠나 한 학기를 동기라는 이름으로 어우러지며 나아가 인생 선배들의 따뜻한 배려로 함께 한다. “질문이 많아지면 진도가 더디게 나가는 경우가 생겨요. 중·장년 학습자들은 주로 쉬는 시간이나 수업이 끝나고 궁금했던 것들을 털어놓으시죠. 양보하고 배려하는 모습에서 교양과 기품이 묻어나더라고요.” 겉으로는 차분하지만 그 속에는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다. 만족스러운 그들의 표정을 볼 때 가장 보람을 느끼는 이씨다. “거동이 불편하신 70대 남자 학습자분이 있었는데, 수업을 빠짐없이 들으셨어요. 같이 수강한 분들이 모두 격려의 박수를 쳐드렸어요. 학습자 자신도 굉장히 뿌듯해하고 기뻐하죠. 마지막 질문은 대개 ‘언제 또 하느냐’예요. 중·장년의 배움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죠.”
- 2016-03-30 10:51
-
-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이문재 시인, "중·장년들이여! 행복한 미래를 위해 고민하라"
- 이문재(李文宰·57) 시인 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2014년 을 펴내며 이런 말을 썼다. ‘시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대신 시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묻지 않고 시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라고 묻곤 했다. 시를 나 혹은 너라고 바꿔보기도 했다. 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 그러다 보니 지금 여기 내가 맨 앞이었다.’ 지금 여기 맨 앞에 선 그는 를 통해 실천하는 지성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평소 자본주의 시대의 생태계와 소비문제에 관심이 많던 그는 한 일간지에 실린 짧은 서평을 보고 를 읽게 됐다. 책의 저자인 하랄트 벨처(독일 사회심리학자)라는 인물은 낯설었지만, 내용은 익숙하리만큼 그의 시집과 같은 맥락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해 많은 책을 읽었는데, 새로운 미래에 관한, 가장 기억에 남는 책입니다. 제가 갖고 있던 에콜로지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는 계기가 됐고, 특히 자본주의를 소비사회의 틀로 분석한 것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요즘 쓰는 칼럼들도 어떻게 소비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등에 대한 것인데, 그런 점에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죠. 그동안 잘 몰랐던 부분을 건드려 주기도 하고, 새로운 생각을 확대해줘서 처음부터 끝까지 메모를 해가며 읽었습니다.” 하랄트 벨처는 미래를 되찾으려면 효율성과 소비, 성장에 기초한 삶에 대해 저항하고 삶의 기준을 행복과 지속가능성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스스로 생각하기, 스스로 행동하기’를 통한 실천적 저항을 제안한다. 이 교수 역시 이러한 제안에 동의하며, 무엇보다 우리 시대 중·장년의 각성과 의미 있는 행동이 필요한 때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 기성세대가 좋은 미래를 위한 가능성을 만들어놓지 않으면 후손들의 미래는 없는 거잖아요. 지구적 차원에서 보면 후기 산업사회, 절정을 달리고 있는 자본주의가 누리고 있는 풍요가 미래세대의 것을 일방적으로 수탈한 셈이라고 생각해요. 지구의 자원은 미래세대와 공유하고, 남겨줘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나 함부로 소비하고 있죠. 그런 점에서 중·장년세대가 뼈아픈 각성을 해야 해요. 는 그런 이들에게 우리가 누리는 물질과 풍요는 어디서 왔는가, 과연 정당한 것인가, 후손에게 물려줄 것은 무엇인가 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미래의 가장 소중한 가치는 행복 책에는 가치가 실천을 이끌어내는 시대를 지나, 실천이 가치를 이끌어낼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다면 기성세대가 실천해야 하는 것과 그들이 궁극적으로 이끌어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해답을 한 리서치를 통해 설명할 수 있죠. 경희대학교 학생 1만4000명이 참여한 ‘미래대학리포트’를 살펴보면 ‘현재와 50년 후 미래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 1순위가 모두 ‘행복’이에요. 행복한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죠. 우리 아이들이 느끼고 있을 불행에 대해 기성세대들이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고 행복한 미래를 위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흔히들 청년세대에게 "너희는 왜 꿈이 없느냐. 도전하지 않느냐"고 꾸짖지만, 이 교수는 그러한 행동은 가혹하다고 말한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너는 왜 비타민을 먹지 않느냐"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굶어가는 사람에게는 물을 먼저 마시게 하고, 조금씩 먹여가며 기운을 차리게 하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저항 역시 청년 세대를 질타하는 것이 아닌, 기성세대의 행동이 솔선수범돼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서서히 기성세대와 행복한 미래에 대한 믿음을 쌓아가다 보면 자연스레 청년세대의 실천이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청년들로 하여금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게 할 수 있을까요? 이제는 말하고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해요. 내가 안드로이드를 안 쓰고 애플을 쓰면 쟤들하고 다르다. 폭스바겐을 타지 않고 아우디를 타면 다르다. 어느 지역에 사는 것, 어떤 옷을 입는 것 모든 것이 소비를 통해서 신분, 계층, 삶의 질이 구분되고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소비하는 것에 대한 반성, 성찰 그리고 올바른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런 행동을 통해 자본주의 시스템 바깥에서 덜 소비하면서 살아도 얼마든지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줘야죠.” 에세이 쓰면 삶의 의미를 발견 할 수 있어 그는 생태와 환경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상황이 몇몇 사람의 운동이나 캠페인 정도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느꼈다. 하지만 누구나 예외일 수는 없다. 중금속, 방사능, 초미세 먼지 등 이미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환경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느냐. 그는 결국 정치라고 말한다. “이때의 정치는 여의도 정치, 청와대 정치 이런 게 아닙니다. 자기 정치를 의미하죠. 책의 서두에 실린 ‘성공적인 저항을 위한 12가지 지침’ 중 ‘모든 것은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은 당신에게 달려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이 정치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정치적 주체로 나서는 것이죠. 그렇게 하려면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정치의 주체는 어떤 모습인지를 생각하고, 스스로 법칙을 만들고 그것을 준수하는 것이죠.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 정치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책임을 지되, 그것을 표현해야 해요. 표현하지 않으면 타인과 만날 수 없으니까요. 이러한 과정을 공유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거죠.” 의 부제는 ‘스스로 생각하라’이다. 책의 마지막 장에는 스스로 생각하기의 본보기가 될 만한 다양한 사례들을 담았다. 이 교수가 실천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궁금했다. “시를 쓰는 거죠.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서 어떻게 시를 쓰겠어요. 또, 스스로 생각하기 위해 자주 걸어 다니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글쓰기 강연을 하고 있어요. 서울시와 함께하는 서울시민대학 프로그램을 통해 ‘나를 위한 글쓰기’라는 강좌를 열고 있습니다. 글쓰기는 특히 은퇴 전후 중·장년층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야말로 국가와 사회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는데 자신의 삶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스스로 정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고 누구한테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도 안 되고요.” ‘자기 성찰과 재탄생’이라고도 불리는 이 강좌를 통해 수강생들은 10편의 짧은 에세이를 쓰게 된다. 5편은 과거 삶에 대해, 3편은 현재, 나머지 2편은 미래에 관해 쓰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담아낸 10편의 에세이를 묶어 놓으면 한 권의 자서전이나 다름없다. “특히 중년 남성분들의 경우 공통적인 반응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 등을 쓰라고 하면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기업 임원 은퇴자든, 교수든, 공무원이든 살아오면서 그런 순간을 떠올려본 적이 없다며, 그저 앞만 보고 달려왔노라 말하죠. 글쓰기 과정을 통해 스스로 인생의 기승전결을 구성하다 보면 삶의 의미가 만들어져요. 누구나 그 안에 엄청난 보물을 가지고 있는데 이 사회가 그것을 못 돌아보게 했던 거죠.” 중·장년 수강생들이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대부분이 미래에는 타인을 위해, 사회를 위해 환원하고 봉사하며 살겠다고 쓴다는 것. 이 교수는 그런 이들이 같은 책을 읽으면 남다른 깨우침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 “에세이를 쓰다 보면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돼요. 이를 통해 그동안 의미 있게 살아온 만큼 앞으로도 미래 세대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끼게 되죠. 누구나 그럴 수 있을 텐데, 그걸 알게 해주는 촉매제나 불씨가 없이 살아왔을 뿐이에요. 책에는 3~5퍼센트 법칙이 나옵니다. 각 분야의 3~5퍼센트가 다른 생각을 가지면 사회가 변한다는 거죠. 저는 우리 기성세대의 3~5퍼센트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새로운 미래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만들어가길 희망하고 있어요.”
- 2016-02-19 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