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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출혈로 생사 넘나든 여성과 그를 살려낸 신경외과 전문의의 라뽀
- 귓가의 사이렌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했다. 함께 탄 구급대원은 쉴 새 없이 무언가 물었지만 너무나 혼란스러워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시끄러운 구급차의 신호음을 비집고 들리는 언니의 다급한 목소리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짐작케 했다. 그저 가족이 함께 타고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될 뿐이었다.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에서 만난 김해임(金海任·57)씨는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불과 몇 달 전인 6월 6일의 일이다. 해임씨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우려가 앞섰던 것은 당연한 걱정이었다. 뇌출혈로 응급실에 실려온 환자는 대부분 후유증이 남기 마련이라는 것은 상식에 가까운 일이다. 당연히 뇌와 관련한 장애가 생겼다면 인터뷰 진행이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어느 정도 각오를 했다. 하지만 병원에서 만난 김해임씨의 모습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뇌출혈로 쓰러졌던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건강해 보였다. 의외였다. 그의 이런 건강한 모습 뒤에는 마치 드라마 속 우연처럼 기적을 만들어낸 몇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수영에 한창 재미 붙였는데…” 김해임씨가 수영을 시작한 것은 사건이 벌어지기 6일 전의 일이었다. 지난해에는 남편과 친오빠를 두 달 간격으로 하늘로 보내야 했다. 힘든 날들의 연속이었다. 올봄에는 운영하던 가게를 정리하는 일로 진절머리를 앓기도 했다. 즐거운 일은 조금도 찾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럴 때 친언니가 권한 것이 수영이었다. “수영에 푹 빠져 있었던 언니가 권하더라고요. 나이 먹을수록 체력이 떨어진다는 느낌도 들고, 운동을 좀 해야겠다 생각했는데 수영이 딱 맞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가까운 동네 문화체육센터에 등록하고 다니기 시작했죠. 올해 6월 1일부터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더라고요.” 그러다 사달이 난 것은 며칠 후인 현충일이었다. 그 전날까지 전조증상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다음 날 수영 수업이 기대될 뿐이었다. 수영패드를 쥐기는 했지만 물에 떠 앞으로 나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대견하기만 했다. “콧속에 물이 들어가면 좀 찡하잖아요. 그날은 그렇게 찡한 기분이 수영 시작하자마자 들더라고요. 물을 들이마시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그냥 이상하다 싶었는데, 갑자기 머리가 너무 아팠어요. 수영장 안전요원에게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했더니 심각성을 느꼈는지 바로 119에 신고하겠다고 했어요. 이 정도 일로 구급차를 불러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얼마 안 가 뒷목이 너무 아팠어요. 그 이후로는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죠.” 보기 드물게 운 좋은 환자 김씨를 치료한 인천성모병원 신경외과의 장동규(張東奎·44) 교수는 “정말 운 좋은 환자”라고 말했다. “이렇게 치료 결과가 좋고 후유증이 없는 뇌출혈 환자는 보기 드물어요. 빠른 대처가 환자를 살린 셈이에요. 119에 신고가 접수된 것이 오후 3시쯤이고, 병원에 도착한 것이 3시 30분이었어요. 증상이 나타난 지 30분 만에 의료진이 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으니 초기 대응이 신속했던 거죠. 또 하나 운이 좋았던 부분은 환자의 출혈량이에요. 뇌출혈의 위험도를 결정하는 기준 중 하나가 출혈량인데 환자의 출혈량은 매우 적었어요. 여러모로 행운이었습니다. 처치가 늦었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죠.” 장 교수가 설명하는 김씨의 정확한 병명은 내경동맥박리로 인한 뇌지주막하출혈. 쉽게 설명하면 뇌의 우측 내경동맥 일부분이 찢겨 피가 혈관 밖으로 새어나간 것이다. 자발성 뇌출혈은 주로 고혈압에 의해 자발적으로 터지는 자발성 뇌내출혈과 뇌지주막하출혈 등으로 나뉘며, 뇌지주막하 출혈은 뇌동맥류의 파열에 의한 경우와 혈관이 찢어지는 뇌동맥박리에 의한 경우로 나뉜다. 물론 모두 다 심각한 상황이지만, 그 중에서도 뇌동맥박리로 인한 출혈의 경우 출혈량이 많으면 예후가 매우 좋지 않다. 뇌지주막하출혈 환자 중 내경동맥박리에 의한 뇌출혈 환자는 0.3% 미만일 정도로 흔치 않다. “환자가 처음 병원에 왔을 때는 약간의 출혈이 있었지만 더 이상은 없었어요. 뇌혈관조영술을 통해 찢어진 부위가 의심되는 부위가 있었지만 뚜렷하지 않아, 일단 환자의 혈압을 안정시키고 나서 이틀 후인 6월 8일에 뇌혈관조영술을 다시 시도했어요. 혈관 모양이 변화된 것이 확인돼 뇌동맥박리에 의한 뇌지주막하출혈이라고 확진하고 스텐트 삽입술을 진행했습니다. 더 이상 출혈이 생겨서는 안 되니까요.” 혈관용 스텐트는 금속으로 된 원통형의 그물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스텐트는 제대로 자리를 잡았지만 며칠 후 확인해본 결과 혈관의 모습이 기대와는 달랐다. 가성동맥류라고 부르는, 피로 찬 주머니가 혈관 밖으로 부풀어 오른 것이다. 그대로 놔두면 재출혈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조치가 필요했다. 1m 퍼팅, 하지만 홀컵이 3mm라면 장 교수는 코일색전술이라는 치료법을 선택했다. 피가 고이지 않도록 주머니에 백금으로 만들어진 아주 얇은 실을 타래처럼 꼬일 때까지 삽입하는 방법이다. 백금사가 자리를 잡으면 피가 응고돼 더 이상 터질 염려가 없는 작은 혹으로 남게 된다.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시술 방법이 매우 까다롭다. 허벅지에 있는 대퇴동맥을 통해 카테터를 삽입했다가 피가 고여 있는 부위까지 미세 카테터를 병변부위까지 삽입하고, 백금사를 넣는 방법이다. 스텐트 삽입술과 비슷하지만 난이도가 훨씬 높다. 허벅지에서 뇌동맥까지 거리는 약 1m 남짓. 일반적인 골프의 퍼팅이라면 초심자도 도전해볼 만한 거리이지만, 이 수술의 목적지는 108mm 홀컵과는 완전히 달랐다. 혈관에 튀어나온 부위는 높이가 1.45mm, 너비가 2.9mm로 여드름 크기에 불과했다. 1m 밖에서 얇은 실을 여드름 안에 넣어야 했다. 게다가 터지면 환자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시술은 6월 22일에 이뤄졌다. “아무래도 긴장이 많이 됐죠. 코일색전술은 3mm 이상의 환부에 시술하는 것이 보통이니까요. 카테터가 들어가다 출혈이 생길 수도 있고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놔둘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의 사랑이 생명 살려 다시 김씨가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로 돌아가보자. 김씨가 완벽에 가깝게 생명을 살리고 몸을 회복할 수 있었던 그날, 또 하나의 비밀이 있었다. 김씨가 응급실에 도착하고 나서 의료진이 치료를 시작했을 때, 그들에게 악다구니에 가깝게 절규하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김씨의 언니 김해자(金海子)씨였다. 그도 그럴 것이 김씨 자매를 공포로 몰았던 것의 바탕에는 집안의 가족력이 있었다. 자매의 어머니와 큰언니도 뇌혈관이 막히는 병인 뇌경색을 앓았다. 지난해 친오빠도 뇌졸중으로 응급실에 실려가, 입원한 지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자매는 당시 병원에서 좀 더 서둘러줬다면 오빠가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생 해임씨마저 눈앞에서 쓰러지는 것을 지켜본 해자씨는 극도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료진이 서두르고 있었는데도 해자씨는 다급하게 외쳐댔다. 1분 1초가 억겁 같았다. 해임씨는 응급실에 실려와 정신이 없는 와중이었는데도 언니의 그 모습을 또렷이 봤다고 했다. “저도 머리가 아파오자 돌아가신 오빠 생각이 났는데, 언니도 마찬가지였겠죠.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고 해요. 저도 두려웠고요.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병원으로 가려는 구급차를 규모가 큰 이곳으로 돌린 것도 언니였어요.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큰 병원이 낫다고 판단한 것 같아요.” 골든타임 맹신하면 안 돼 그렇다면 뇌출혈은 왜 발생하는 걸까. 장 교수는 그 원인을 기본적인 데서 찾았다. “혈관성 질환의 가장 대표적인 원인은 고혈압이에요. 혈압이 높으면 혈관에 문제가 생기기 쉽죠. 특히 나이가 들면 특별한 질환이 없어도 혈압이 오를 수 있어요. 많은 사람이 한두 해 전의 검사결과로 안심하고 자신의 건강을 맹신하곤 하는데, 혈압이 오르는 이유는 다양해요. 그러므로 자주, 정기적으로 혈압을 체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나트륨을 많이 섭취하거나, 흡연 및 기름진 식습관으로 인한 고지혈증도 고혈압의 원인이 됩니다. 신장과 같은 장기의 이상으로도 혈압이 오를 수도 있고, 운동 부족도 마찬가지이고요.” 이밖에 장 교수가 지목한 원인은 바로 가족력이다. 김씨의 경우처럼 가족력이 있다면 본인의 상태도 반드시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 환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또 한 가지는 빠른 대처라고 했다. “흔히 골든타임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 시간 전까지 오면 언제든 괜찮다는 뜻은 아니에요. 한시라도 빨리 와서 의료진의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해요. 빠른 시간에 적절한 처치가 이뤄지지 않으면 대부분 후유증이 남게 돼요. 너무 늦거나 상황이 심각하면 환자를 살릴 수 없는 경우도 있어요. 매초마다 뇌세포는 죽어가고 있다고 여겨야 해요.” 장 교수가 말하는 후유증이란 우리가 흔히 중풍(뇌졸중)의 후유증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다. 뇌졸중은 뇌출혈과 뇌경색을 아울러 표현하는 말이다. 후유증에는 전신의 한쪽만 마비되는 편마비나 언어장애, 삼키는 데 문제가 생기는 연하장애, 혈관성 치매 등이 있고, 심하면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다. 보행장애가 오면 이동에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주님이 내게 기회주신 것 김씨가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을 때 크게 걱정한 사람들 중에는 그의 학생들도 있다. 매주 하루씩 부광노인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있는데, 그의 소식이 알려지자 일부 학생들이 병실로 달려와 안부를 물었다. SNS 메신저에는 쾌유를 비는 기원들로 가득했다. 또 그가 다니는 교회 교인들로 병실이 가득 차기도 했다고. 병실에 방문했던 지인들이 멀쩡히 대화하고 행동하는 그를 보고 놀라는 모습이 재미있었던 것도 병원에서의 좋은 기억 때문이라고 김씨는 말한다. “교회 지인분들은 저 때문에 두 번이나 놀랐다고 해요. 처음엔 제가 쓰러졌다는 소식에 놀랐고, 또 한 번은 퇴원해서 교회를 나갔을 때 너무나 멀쩡한 제 모습에 또 놀라신 거죠. 제가 이렇게 건강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앞으로는 더 열심히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최선을 다할 거예요. 노인대학 강의도 적극적으로 할 생각이고요. 또 다른 삶을 살게 된 것과 마찬가지니까 한 사람의 몫을 더 하며 살아야겠죠.”
- 2017-10-08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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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대 참 괜찮은 소녀, 여에스더
- 여에스더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으로 TV에도 많이 나오는 유명한 가정의학과 전문의라서 까다롭고 위엄이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만나보면 전혀 위압감이 없고 소탈하고 발랄한 소녀 같다. 게다가 인품도 훌륭해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참 괜찮은 여성이다. 지금도 그런데 서울대 의대 시절에는 얼마나 인기가 많았을까? 그런 그녀를 목소리로 사로잡은 이가 바로 홍혜걸이다. 여에스더는 당시 응급실 주치의였고 두 살 연하 홍혜걸은 인턴이었다. 당시에는 선생님으로 깍듯하게 불렀지만 이제는 ‘임마’라고 부른다. 당시 응급실 근무 교대하기 전에 홍혜걸이 전화로 여에스더에게 보고할 때 저음의 차분하고 감성적인 목소리는 그만 여에스더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말았다. 그 후 홍혜걸이 여에스더가 자기에게 호감을 가진 것을 눈치 채고 하늘 같은 의대 선배에게 사귀자고 도발했다. 마침 여에스더는 7년간 사귀던 남자와 막 헤어졌던 터라 홍혜걸이 행운을 잡을 수 있었다. 홍혜걸이 여에스더를 처음 유혹할 때의 말이 걸작이다. 세계 금연의 날 세미나에서였다. 여에스더는 “결혼할 사람이 담배를 피운다면 어떻게 하시겠나?”라고 물었고, 이에 홍혜걸은 즉흥적으로 “어린 사람이랑 결혼하면 되죠!”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녀보다 두 살 연하인 본인이 남편감이라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 머리 좋은 여에스더는 곧바로 알아듣고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사귀게 된 지 3주 만에 병원 뒤뜰에서 갑자기 홍혜걸이 여에스더의 손을 와락 움켜잡더니 “우리 결혼해요”라고 프러포즈를 했다. 그때 첫 포옹을 했는데 홍혜걸의 쿵쾅쿵쾅하는 심장 소리가 하도 커서 변태인 줄 알고 살짝 고민도 했다고 고백한다. ‘편지’와 ‘살색 팬티’가 결혼기념일 선물 가정의학과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의한 생리적 반응에 대해서는 무지한 소녀였다. 올해로 결혼 24년 차라서 “내년이 은혼식인데 뭔가 큰 선물이 있지 않겠냐?”라고 물었더니 “이제껏 한 번도 이벤트를 해준 적이 없다”며 입이 튀어나온다. 며칠 전에 결혼기념일이어서 남편에게 “뭐 없냐?”고 슬쩍 물었더니 “매일매일 잘해주는데, 뭐가 필요해?”라며 뻔뻔스럽게 반문하더라는 것. 그녀는 가끔 돈 안 들인 선물은 받아왔다고 웃는다. 다름 아닌 편지. 홍혜걸이 뭔가 잘못했을 때 편지로 쓰는 “다시는 안 그럴게~ 술도 안 먹고…” 등등의 다짐이다. 결혼하고 첫 번째 생일 선물로 촌스런 살색 팬티와 ‘효도 신발’ 같은 것을 받았다. 그때는 어이가 없었지만, 돌이켜보니 남편의 그런 성격이 귀엽다. 홍혜걸은 평소에 쓰다듬고 주무르고 스킨십하는 걸 좋아한다. 여에스더는 당하는 걸 좋아한다. 그래도 잠자리에 들면 등을 돌리고 자는 게 편해서 줄곧 그렇게 지내왔다. 그런데 작년부터는 갱년기라서 아예 트윈베드로 바꾸고 사이가 좋을 때는 침대를 가까이 붙이고 뭔가 틀어졌을 때는 멀리 떨어뜨려놓는단다. 남편도 갱년기라서 서로 고집도 피우고 투정도 부린다. 그래서 작년과 올해 초까지 힘들었는데 지금은 둘 다 의사이기에 생리적 현상을 서로 잘 이해하고 좋아졌다. 이제는 부부지간에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후라서 그럴까? 술자리 모임에서도 에스더와 홍혜걸은 서로 험담을 늘어놓으면서 재미있게 논다. 잘 삐지지도 않는다. 홍혜걸의 별명은 ‘홍수르(만수르에 빗댄 말)’란다. 남편이 경제관념이 없고 허술해서 그녀는 불만이다. “홍혜걸은 허당”이라고 대놓고 말한다. “어떤 부분이 그렇게 허술하냐?”고 묻자 “한번은 저 몰래 강의료를 모아두려고 은행에 새 구좌를 개설했다가 저한테 딱 걸렸잖아요. 인터넷뱅킹을 안 하니까 로그인하면 계좌 목록이 쫙 뜨는 걸 몰랐던 거예요”라고 폭로하며 깔깔 웃는다. 바가지를 그렇게 긁어도 고쳐지지 않아 불만이었는데 지금은 이해한다는 것. 바둑의 단수를 올린다든지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이 많은 남편의 열정이 지금은 오히려 보기 좋을 정도로 너그러워졌다. 결혼 24년 차의 여유일 수도 있겠지만 에스더의 사업이 번창해서 과거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풍요로워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같은 여유는 자신의 외모를 평가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홍혜걸은 허당 ‘홍수르’ 여에스더는 최근 한 방송에 나와 “예전에는 홍혜걸씨가 왜 저렇게 못생긴 여자랑 결혼했냐는 말이 많았다”고 운을 뗀 뒤, 그런데 요즘은 “아이유랑 닮았다는 얘기를 듣기도 하고 수지랑 닮았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며 외모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케케묵어 익을 대로 익은 남편과의 사랑이 결실을 맺은 자신감의 표현이다. 그러면서 남편에 대한 불만도 과감하게 털어놓는다. “2년 만에 뉴욕으로 출장을 가게 됐을 때 원래는 밤 9시 비행기였는데 폭풍우로 밤 12시로 시간이 바뀌어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어떻게 하니, 폭풍우가 와서 위험하겠다. 조심해라’ 이렇게 말을 해야 하는데 그날은 뭔가 말을 제대로 못하더라! 남편이 집에 있어야 하는 시간인데 집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돌아와 우연히 영수증을 발견했는데 꽤 비싼 음식 값이더라. 그것도 추가 와인 두 잔에 코스요리 2인분. 이게 뭔가. 청담동에서 내가 없을 때 누구하고 먹었겠나?” 그녀는 남편을 다그치며 따졌다고 한다. 홍혜걸이 “회사 일로 알게 된 후배”라고 하자, 여에스더는 “아내가 외국출장가고 없을 때, 왜 하필이면 그 밤에 그것도 청담동에서 분위기를 내면서 와인까지 마시냐?”고 따져 물었다. 한량 이봉규는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도 같지만 굳이 이 대목에서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기로 했다. 홍혜걸도 한 방송에서 부인에 대한 불만인지 자랑인지 알쏭달쏭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나를 잘 이용하는 여우 같은 생각이 든다”고 포문을 열었지만 결국 “박사로 만들어준 아내에게 정말 고마운 생각이 든다”며 부인 자랑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신혼 시절 아내가 나에게 진지하게 박사 학위를 따라고 했다. 석사부터 박사까지 하려면 10년 정도가 걸리는데, 그 당시에는 ‘새삼스럽게 무슨 공부를 또 하나’ 했지만 지금은 아내에게 너무 고맙다”고 부연 설명했다. 그러면서 “예전에 MBN 에서 함익병 원장이 우스갯소리로 집사람 뜯어먹고 산다고 한 적이 있는데, 내가 벌어온 돈으로 아내가 병원을 개업하고 사업도 시작한 거다”라며 정색했다. 아마 2009년 설립한 회사에서 만든 이른바 ‘여에스더 유산균’이 대히트를 치고 각종 홈쇼핑에서 판매실적 1위를 달성하는 등 사업가로서 대성공한 아내에 대한 위축감으로부터 나온 자기방어의 발현일 수도 있겠지만, 아내를 존경하기에 자랑삼아 자기비하를 고급지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머리 좋은 사람의 고급 유머. 이를 반증하듯, 남편 홍혜걸이 아내 여에스더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내가 지금까지 만난 남자 중에 당신이 베스트다”라는 평가다. 여에스더가 결혼 전 7년 사귄 남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보다 빨리 두 배 이상 같이 살고 싶다”며 두 사람이 처음 맹세했었는데 어느새 세 배 이상 살고 있어서 행복에 겨운 부부다. 짓궂은 질문으로 반전을 노려봤다. “이혼할 생각 해봤나?” 에스더는 망설임 없이 “멋진 남자를 보면 눈이 돌아가지만, 남편을 사랑해서 이혼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홍혜걸과 결혼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며 부끄러움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다. 24년을 같이 살았는데도 에스더의 가슴은 여전히 소녀같이 뛴다. 처음 포옹할 때 홍혜걸 심장의 쿵쾅거림이 100미터 달리기 후의 느낌이라면 지금 여에스더의 심장소리는 마라톤을 완주한 후 내뿜는 안도감같이 들린다. 의사와의 인터뷰인 만큼 건강하게 사는 법에 대한 팁을 주문했다. “하버드대학의 음식 피라미드에 따르면, 건강을 위해 매일 잡곡밥, 올리브유로 만든 샐러드, 탁구공 두세 개 정도 크기의 껍질 벗긴 닭고기, 과일과 채소 다섯 접시 등을 먹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이렇게 먹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며 방법을 알려주는데 바로 자신이 일생을 걸고 매진하고 있는 여에스더 종합비타민과 유산균이라는 것. 이 대목에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눈이 빛난다. 천생 연구하는 의사 티는 어쩔 수가 없나보다.
- 2017-10-08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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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에서 만난 사람] 민 김 오픈뱅크 행장, 미주 한인 은행가의 대모
- 2014년, 금융권의 유리천장을 깨고 최초의 여성 행장이 탄생해 한국에서 연일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때 다소 의아해했던 기억이 난다. 미주 한인 사회에서는 이미 2006년에 첫 여성 행장을 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당시 3명의 여성 행장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민 김(58·한국명 김민정) 오픈뱅크 행장. 그녀는 미주 한인 은행가의 대모로 통한다. ‘1호 여성 행장’ 타이틀을 얻기 전부터 최초 여성 지점장, 최초 여성 전무, 한인 여성 최고 연봉 등의 수식어가 그녀를 따라다녔다. 170cm가 훌쩍 넘는 키에 카리스마 넘치는 미모는 여전하다. 미국의 유력 경제지 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뱅커이자 여성 뱅커들의 로망. 민 김 행장을 LA 다운타운 오픈뱅크 본사에서 만났다. 그녀만의 ‘왕좌의 게임’ 2010년 민 김 행장은 당시 한인 최대 은행이었던 나라뱅크의 행장직을 내려놓고, 폐업 위기의 FS 제일은행(현 오픈뱅크)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인 은행권은 술렁였다. 그야말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때였다. 은행원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최고의 자리에서 미련없이 내려온 그 일을 두고 사람들은 아직도 ‘왜’냐고 묻는다. “행복하지 않았어요. 늘 가면을 써야 했고 책임감과 의무감만이 나를 짓눌렀죠. 이러다가는 나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생각에 사표를 던졌어요. 집에서 놀고 있을때 FS 제일은행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행장을 맡아줄 수 있냐고. 내 조건을 들어준다면 그러겠다고 했죠. 내가 좀 황당한 제안을 하기는 했는데…(웃음).” 민 김 행장이 제안한 것은 수입의 10% 사회 환원, 전 직원의 사회봉사 의무였다. 일반 기업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사회는 이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은행이 문을 닫느냐 마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해답은 민 김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10% 사회 환원도 일단은 수익을 내고 볼 일이었다. 은행 이름도 새로 내걸었다.‘오픈뱅크’.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민 김 행장의 신앙과 기업관이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있는, 아주 특별한 은행의 탄생이었다. 고층 빌딩 행장실에서 하이힐을 신고 일했던 민 김 행장은 운동화로 갈아 신고 다시 필드로 내려와 뛰기 시작했다. 부와 명예의 왕좌 대신 택한 것은 순수한 열정과 자유였다. “가장 먼저 부실대출부터 정리했어요. 막대한 부실대출을 1년여에 걸쳐 과감하게 정리하고 나니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죠. 부실한 은행이라는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서는 발로 뛰며 투자자들을 만나 우리의 비전을 어필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신뢰를 회복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별수 있나요. 그저 최선을 다해 달릴 수밖에 없었죠.” 민 김 행장 취임 이듬해였던 2012년, 오픈뱅크는 창립 후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고 1100만 달러 증자에 성공하면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 2012년 2억 달러였던 자산은 2013년 3억 달러, 2014년 5억 달러, 2016년 7억 달러로 뛰어올라 2017년 2분기 말 현재 8억3500만 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그녀가 경영을 맡은 7년 동안 자산이 무려 800%나 증가한 것이다. 돈이 아닌 사람을 생각하는 경영 이사진은 점점 고민에 빠져갔을 터다. 민 김 행장이 내걸었던 조건, 10% 사회 환원은 수익이 커질수록 부담도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이다. “100만원에 10만원은 기분 좋게 기부할 수 있죠. 그런데 점점 기부하는 돈이 늘어나 1억이 되고 10억이 되면… 이건 선뜻 내놓기 힘든 액수가 돼요. 참 감사하게도 이사회에서는 변함없이 저와의 약속을 지켜주고 있어요. 뿐만 아니라 이제는 나누는 기쁨을 알고 함께 즐기고 있습니다.” 오픈뱅크는 올해 말이면 100만 달러(약 10억원)를 사회에 환원하게 된다. 민 김 행장은 전문 부서를 따로 두고 이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다. 민 김 행장은 모든 일에서 ‘사람’을 우선시한다. 처음 은행을 맡을 때도 인재를 영입하는 일에 주력했다. 단 ‘건강한’ 인재라는 단서를 붙였다. “스펙보다는 오픈뱅크의 비전을 이해하고 함께 뛰어줄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고집하고 있어요. 같이 일하면서 같은 기쁨을 맛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직원들에게 한 달에 6시간 사회봉사를 의무로 하고 있는데 하루이틀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억지로 하겠습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직원들의 표정이 점점 행복한 얼굴로 바뀌고 있다는 겁니다. 은행에 대한 자부심도 크고요. 이런 것들이 영업실적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경영자로서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이지요(웃음).” 민 김 행장은 소형 은행의 장점을 십분 발휘한 것을 오픈뱅크의 성공 비결로 꼽는다. 의사결정의 신속성, 고객밀착형 마케팅 등이 그것이다. 고객을 만날 때도 대형은행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은 과감히 포기하고 그 대신 오픈뱅크의 비전과 기업의 이미지를 전하라고 교육한다. 이웃과 커뮤니티에게 좋은 기업이 되고 싶은 ‘진심’을 말이다. “한인들과 한인 은행과의 관계는 특별하죠. 한인 은행은 한인들의 땀과 눈물로 성장했어요. 밤새워 투잡, 쓰리잡 뛰어서 모은 돈을 들고 은행으로 오셨으니까요. 조그만 비즈니스라도 해보려 할 때 미국 은행들의 문턱이 얼마나 높았겠어요. 영어가 서툰 이민 1세대에게 한인 은행은 막힌 숨통을 틔워주는 곳이기도 했죠. 저 또한 중3 때 부모님을 따라 이민을 왔고 이곳 LA 한인타운에서 자라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한인 은행은 어르신들이 영어로 된 편지를 가지고 와도 기쁘게 읽어드릴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최근 오픈뱅크는 바쁜 이민생활에 한 번도 가족여행을 해본 적이 없는 30가구를 선정, 멕시코 크루즈 여행권을 선물했다. 기업 이벤트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3박 4일간 동행한 민 김 행장은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고. “배 안에서 그분들과 함께 먹고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일단은 너무나 즐거웠고요. 저희 스테프까지 120여 명이나 되는 인원이었는데 돌아올 때는 모두가 가슴에 묵직한 것을 하나씩 담아왔습니다. 가족, 친구,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커뮤니티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었어요. 얼마나 친해졌는지 형님, 조카가 많이도 생겼어요.” ‘늙어감’이 즐거운 이유 USC를 졸업하고 윌셔은행(현 뱅크오브호프)에 입사했던 때가 1982년. 벌써 35년 전의 일이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그것도 보수적이기로 손꼽히는 한인 은행가에서 최초로 여성 행장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드라마틱한 일이 많았을까 싶지만 정작 그녀는 덤덤하다. “사실 한인 사회 첫 여성 회계사가 꿈이었는데 다른 분이 되셨지 뭐예요. 급히 선회한 것이 은행장이었어요(웃음). 주위에서 남성 위주의 직장에서 어렵지 않았냐 하시는데 저는 그곳에서 꿈을 이뤄가는 과정이 무엇보다 행복했습니다.” 심각한 취업난 속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민 김 행장은 ‘남들 보기에 멋있는 일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즐기라’고 조언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은행에 입사하려고 했지만 줄줄이 다 떨어졌어요. 로컬의 한인 은행에 겨우 붙었는데 제가 할 일은 창구에서 손님을 맞는 텔러였죠. 솔직히 자존심이 상했어요. 그러나 나중에 은행장이 될 건데 뭐 어때 하며 생각을 바꿨죠. 요즘 젊은 친구들을 보면 시작부터 뭔가 폼이 나지 않으면 안 하려고 하더군요. 남 보기에 그럴싸한 일을 하려니 더 그렇고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해요. 애정이 있으면 열심히 일하게 되고 열심히 일하면 능력을 발휘하게 되고, 그럼 인정받는 거죠.” 민 김 행장은 신입사원 시절의 자신을 기억한다. 출근길은 늘 설레었고 은행에서 일하는 순간순간이 즐거웠다고. 남에게 화려하게 보이는 삶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더라는 값진 경험을 한 그녀는 많은 것을 내려놓은 현재의 삶이 그저 귀하고 감사하다. 민 김 행장은 65세가 되면 아름다운 은퇴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은퇴를 하면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신앙인으로서 또 경영인으로서 겪었던 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세상에서 성공하는 법이 아닌, 가치 있게 행복하게 사는 법을 말해주고 싶어요. 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내가 손녀만 셋이랍니다. 우리 딸과 아들이 어렸을 때는 많이 놀아주지 못했는데 사실 그게 너무 아쉬워요. 미안한 마음에 대신 손녀들하고는 틈만 나면 같이 놀아줍니다(웃음).” 민 김 행장은 늙어가는 것이 너무나 즐겁다고 한다. 주말이면 할 일 없이 집에서 손녀들과 뒹구는 것이 가장 재미있고, 막역한 친구들과의 수다가 웬만한 철학서보다 낫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끔 남편과 팝콘 먹으면서 하는 영화관람도 예전엔 몰랐던 재미다. 생애 가장 행복했던 때를 꼽으라니 주저 없이 ‘지금’이라고 말하는 민 김 행장. 은퇴 전까지, 오픈뱅크를 커뮤니티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기업의 롤모델로 만들고 싶은 것이 그녀의 마지막 꿈이다. 아마도 민 김 행장의 출근길이 다시 설레어진 이유일 것이다.
- 2017-10-04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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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nS 색소폰 앙상블, 색소폰 재야 무림고수들이 모였다!
- 색소폰 좀 연주한다는 독자는 바짝 긴장해야 할 것이다. 말 그대로 무림 격전지에서 빠져나온 느낌이다. 덕소의 명물 음악 모임으로 알려진 ‘GnS 색소폰 앙상블’. 연습을 시작하기 전 단원들이 조금씩 내비치는 긴장감이 꽤 흥미롭다. 색소폰을 잡아든 손. 자기 자리에 앉자마자 악기 튜닝을 하는 몸짓이 예사롭지 않다. 여러 대의 색소폰이 하나의 완벽함을 위해 서로 눈빛을 맞추고 발을 구르는 진지한 현장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본다. 저희 단원을 좀 맡아주시겠습니까? 2004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GnS 색소폰 앙상블(이하 GnS)은 최천곤 단장에게 인생의 사명처럼 어느 날 찾아왔다. “덕소고등학교에서 교감으로 근무할 때였어요. 기독교 학교라 이 지역 교회에서 학교에 추수감사절이 되면 오셔서 반별로 목사님들이 예배를 드렸어요. 그런데 그중에 신도들에게 색소폰을 가르치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언제 한번 놀러오라더군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줄곧 색소폰을 연주해왔던 단장에게 구미 당기는 초대였다. 알고 보니 그 목사와 장로가 신도 7~8명을 대상으로 색소폰을 가르치고 있었다. 게다가 색소폰을 배운 지 얼마 안 된 상태. 잠깐 가서 지도를 거들었던 것이 계기였다. “그런데 교회가 의정부로 이사를 간다는 겁니다. 저에게 맡아줄 수 있는지 목사님이 물었어요. 아니면 해체한다더군요. 그래서 시작을 하게 됐고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음악에 눈뜨기 시작한 사람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최 단장 또한 남다른 아픔과 역경의 시간을 딛고 음악을 해왔다. 시대 상황과 집안 사정 등으로 대학 진학이 늦어졌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색소폰을 비롯해 각종 관악기에서 손 떼본 적 없는 최 단장이다. 그렇게 지금까지 GnS의 음악 선생님으로 단장으로 살아오고 있다. 아마추어 앙상블의 도전이 시작되다 2004년 6월경 연습을 시작해 10월에 곧바로 정기연주회 일정을 잡았다. 목표가 없으면 절대 한 단계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너무 못하는 거예요(웃음). 너무 못했어요. 그만둘까도 생각했는데 결국 미루고 미루다가 3년 후에 첫 정기연주회를 했습니다. 결과는 대단했습니다.” 3년 동안 단원들은 가족들에게서 ‘빨리 들어오라!’는 말과 함께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 추궁당해야 했다. “2007년에 첫 연주회를 했는데 단원들 가족이 와서 보고는 더 나아가더랍니다.” 이후 GnS의 인기 또한 높아갔다. 이곳저곳에서 행사가 이어졌고 봉사 연주도 많이 다녔다. “GnS는 주고(give) 나눔(share)을 의미합니다. 봉사도 지금까지 많이 했죠. 교회 초청연주, 교도소, 노인복지원 많이 다녔어요. 그리고 잊지 못할 2013년도 있었습니다.” 2013년에 CBS에서 주최한 ‘아마추어 가스펠 색소폰 경연대회’에서 동메달을 차지했다. 앞서 상을 받은 수상자들이 독주자인 것을 감안했을 때 단체 1등이나 다름없었다. 같은 해 여세를 몰아 강원도 정선군 시설관리공단에서 주최한 제1회 전국 아마추어 색소폰 경연대회에 나가 당당히 대상을 차지했다. 2013년은 두고두고 평생 기억하고 싶은 해가 됐다. 또한 역사와 실력을 자랑하는 전문 색소폰 앙상블로서 차츰 나아가게 된 해였다. 이제는 처음과 달리 전문 음악가와 전공자 참여가 두드러지기 때문에 아마추어란 꼬리표는 거추장스럽다. 40대에서 70대까지 다양한 세대가 모여 화합하는 GnS은 언제든 새 단원을 맞을 준비가 돼있다고. 너무 겁먹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란다. “색소폰은 처음에 배우기 쉽습니다. 소리가 잘 나요. 그런데 깊이 들어갈수록 어렵고 합주는 더 어렵지만 매력이 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GnS의 정기연주회가 열린다고 한다. “이번이 10회째인데 11월 15일, 3시 덕소주민자치센터에서 공연합니다.” GnS의 대표 연주곡인 헨델의 할렐루야, 향수, 에버그린 등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색소폰 연주에 관심이 있다면 꼭 한번 연주회에 가보시길. 반주기가 아닌 악보를 보며 진짜 음악에 다가가는 멋진 연주자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Mini Interview 이상근(70) 색소폰을 연주한 지는 6년째 됐습니다. 딸아이 결혼식 때 사돈하고 색소폰을 배워 축하연주를 했습니다. 그게 계기가 돼서 꾸준히 배우게 됐습니다. 이렇게 계속 연주를 하게 된 건 여기 함께 계신 분들이 너무 좋아섭니다. 그리고 연주가 잘 안되고 틀리면 심적으로 힘들기도 하지만 그걸 다 해내고 잘하시는 분들 따라잡고 하다 보니 쾌감이 있더라고요. 이기성(56) 여기 오게 된 동기는 이윤용 회장님 때문입니다. 제 고등학교 은사님입니다. 예전에 제가 지휘하던 합창단에서 단원으로 활동하셨는데 잠깐 연락이 끊겼었죠. 그런데 은사님을 찾아뵙고 난 뒤 이곳을 알게 되어 들어왔습니다. 저는 원래 트럼펫을 전공하다 성악으로 전향했습니다. 항상 보면 아마추어분들 열정이 대단하세요. GnS 단원들은 오래하셔서 굉장히 잘하십니다. 무엇보다 예술을 중심으로 모임이 조직돼 움직인다는 건 지역문화 발전에도 기여하는 바가 크죠. 안정숙(68) GnS에서 새내기로 통합니다. 사실 색소폰은 7~8년 전에 시작했는데 앙상블은 처음 해봤습니다. 친한 동생이 한번 와보라더군요. 여럿이서 반주기 없이 함께 호흡 맞추고 같이 한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이 색소폰 합주의 매력입니다. 지금 제대로 색소폰을 배우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남편이 너무 좋아해요. 가끔 집에서 친구들과 모임을 할 때 연주자들을 부르곤 했는데 이제 제가 해요. 노래 반주도 해주고요. 남편이 반주기며 색소폰이며 고가의 장비를 사줬어요. 전쟁 나갈 때 좋은 무기를 써야 한다면서요. -------------------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으면 bravo@etoday.co.kr 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2017-09-30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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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꿈꾸는 소녀 양수경, 인생 2막을 다시 가수로 데뷔
- 제목만 말해도 그 시대의 풍경이 떠오르는 노래들이 있다.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당신은 어디 있나요’ 등등 발표될 때마다 가요 차트를 점령하며 시대의 유행가로 자리매김한 그 노래들. 특유의 여린 목소리로 그 시절의 애절한 감성을 노래했던 양수경(52)이 무려 27년 만에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긴 세월을 넘어 그대로 도착한 듯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녀는 여전히 꿈을 꾸는 소녀와 삶의 부침을 겪고 거듭난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을 함께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철두철미한 가수였다. 그녀가 인생 2막을 열면서 발견한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가수 양수경의 귀환은 요즘 한창 일어나고 있는 ‘8090’ 가수들의 복귀 붐 속에서도 특별한 느낌을 준다. 작년부터 여러 음악 방송 프로그램에서 무대를 가진 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단독 콘서트를 27년 만에 연 것이다.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었음이 짐작된다. 후회 없이 할 수 있는 일, 답은 노래였다 “준비하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몇 번이나 들었어요. 추억 속에 있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이들 엄마이기에 나만 생각할 수는 없었어요. 사업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어요. ‘내가 잘하는 일이 뭘까’, ‘눈감는 날까지 후회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를 무지 많이 고민했죠. 답은 노래였어요.” 양수경은 공연을 앞두고 2014년 일기를 봤다. 공연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써놓은 자신의 글이었다. 그 막연했던 희망이 3년 정도 지나 이제야 이뤄진 셈이다. 그러나 막상 그런 무대가 찾아오니 갈등과 두려움이 올라왔다. ‘이번만 하고 다시는 못하는 것 아닌가, 무대에 섰는데 노래가 잘못 나오지 않을까, 차라리 안 보여주면 망신이라도 안 당할 텐데….’ 공연 끝나고 다음 날 아침까지 잠 못 자 “요즘 공연 시장도 안 좋지, 음반업계도 안 좋지. 내 나이에 뭔가 시작한다는 것도 두려웠고. 공연 날 표가 백몇 석이 비었다는 얘기를 듣고 무대를 올라갔어요. 그런데 막상 올라가 보니, 객석이 꽉 차 있었어요.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어요. 그리고 노래를 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했는데… 모르겠어. 시작했는데 끝나 있었어요.” 성공이었다. 공연 직전까지 떠올렸던 모든 어둠과 고통을 날려버릴 정도의 성공. 공연 전날 불안감에 잠을 못 잤던 양수경은 공연이 끝나고 정반대의 이유로 그다음 날 아침 여덟 시까지 잠을 못 잤다. 공연을 본 사람들에게서 들은 “다시 또 오고 싶어요”라는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울고 웃는 게 상상을 초월했죠. 우리 밴드는 최고의 세션이에요. 최고의 가수들과 해외 공연을 다 해본 사람들이라서 무대에서 설렐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친구들이 나처럼 잠이 안 온다면서 전화를 했어요. ‘누나, 이상해. 아직도 안 가셔. 모르겠어. 어떤 힘인지 모르겠는데 아직은 설레’라고.” 세상의 무수한 따스함과 마주하다 양수경은 이번 공연을 기획하고 추진하면서 자신을 도와주는 따뜻한 사람들을 무수히 만났다. 그 만남들은 그녀로 하여금 지난 시간을 후회하게 만드는 계기도 됐다. “옛날에는 제가 말을 잘 안 했어요. 그게 너무 후회스러웠어요. 좀 어렸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말하고 사귀면 그게 추억으로 남는 건데 그걸 못한 거죠. 어렸을 때는 너무 가난해서 똑바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너무 포장했어요. 지금은 내가 풀어놓으니까, 많은 걸 내려놓고 나니까 세상이 따뜻해요. 전보다 가진 것도 없고, 모든 걸 다 잃은 줄 알았는데 여기 이렇게 따뜻한 분들이 계셨어요.” 그녀가 세상의 따뜻함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과정은 슬픔과 인고의 세월이기도 했다.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 인간 양수경은 내비게이션 아니면 어디에도 갈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자꾸 ‘수호천사’들이 나타나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뜻밖에 누군가가 나타나 나에게 손을 내밀어줄 거라곤 생각 못해봤어요. 단절된 삶, 이슬에 젖어 산 세월이 참 길었지. 해 뜨는 것도 싫고 해 지는 것도 싫었던 때가. 너무나 많은 배신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녀는 사람을 볼 때 눈을 본다고 말했다. 눈은 숨길 수 없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자신에게도 해당되었다. 그녀는 힘든 시간에 ‘제 마음에 분한 게 없게 해주세요, 내 눈에 사악한 게 없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 소원 덕분일까, 그녀의 눈은 30여 년 전처럼 여전히 해맑았다. “아직도 아픈데, 그 아픔이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날 보고 울고 웃고 용기를 얻으면 좋겠어요.” 내년 데뷔 30주년 공연도 하고 싶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서 고통을 보지 않고 힘을 얻으면 좋겠다는 말은 철저한 대중가수로서의 양수경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제2의 인생 또한 첫 번째 인생처럼 가수로서 다시 문을 연 셈이다. 컴백 공연 전에는 조관우의 ‘늪’, 김범수의 ‘약속’을 만든 베테랑 작곡가 하광훈과 손잡고 신곡 ‘애련’을 발표했다. 그것은 과거에만 함몰되지 않는 ‘현역’ 가수로서의 양수경을 증명해주는 의지처럼 보였다. “지금 리메이크 앨범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런데 참 돈이 많이 들어가더라(웃음). 과거에는 음반을 내면 많은 수입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음반이 안 나가요. 그래도 우리 또래 사람들은 CD를 가끔씩 사는데 젊은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죠. 우리의 낭만은 산업에 묻혔어요. 음반이나 예술 하시는 분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시대를 따라가다 보니까 앨범 한 장을 만들면서 생기는 추억이나 낭만이란 게 묻혀서 없어졌어요. 그래도 난 앨범을 만들 거예요.” 그러고 보니 그동안 양수경이 소화한 장르는 굉장히 넓다. 트로트, 발라드, 댄스, 탱고 등등. 자연스럽게 그녀가 어떤 가수가 되길 원하는지 궁금해졌다. “저는 대중가수예요. 그럼 대중이 좋아할 쉽고 편한 노래를 부르면 되죠. 노래는 안 되면 언제든지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내가 노력이라는 걸 잊지 않는 가수면 좋겠고 확실한 내 색깔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전 분명 이선희, 현미 언니와도 다르니까요.” 비굴하게 살지 말자는 다짐 인터뷰를 하면서 양수경은 그 소녀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직업적으로 완고하고 고집이 센, 흡사 장인에 가까운 의식이 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타고난 성정일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굴곡진 삶을 이겨내고 최고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만들었던 힘일지도 모른다. “가수를 딴따라라고 부르는 게 싫었어요. 그런 시선들이 좋지 않았고, 나라도 똑바로 살아야겠다 싶었죠. 연예인은 우리가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계속 쳐다보는 직업이에요. 그럼 많은 걸 포기해야 해요. 외로운 것도 받아들여야 하고요.” 어렸을 때부터 연예계에 몸을 담아야 했기에 체득해야 했던 그 완고함을 도와줬던 것은 책이었다. “어렸을 때는 책을 많이 읽었죠. 맨 연애소설만 읽었지(웃음). 특히 시드니 셀던 소설을 즐겨 읽었는데, 사람들은 그 소설에서 연애를 읽지만 잘 읽어보면 가난한 여자가 상류사회로 진출하면서 변화되는 모습이 나와요. 전 그 여자의 성공 과정에 대한 내용을 계속 읽었어요.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인문학 서적만 찾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시드니 셀던 소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도 발견했고, 과학, 경제, 예술에 대한 이야기들도 읽었어요.” 소설에서 인생을 배웠다는 신선한 관점. 그렇다면 그녀가 삶을 살면서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비굴하게는 살지 말자. 누군가 내 눈동자를 봤을 때 무엇을 감추려 하거나 비굴하게 보이지는 말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 나이 아름다움은 눈빛에서 나오는 것 양수경은 화가 날 때면 하늘을 보며 웃는다고 말했다. ‘예쁘게 살기도 힘든데’라는 말이 그녀의 반문이었다. 예쁘게 살고 싶다는 희망은 그녀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다. 그녀는 여자로서 당당하게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예쁘게 사는 것 또한 당당한 여성으로서의 삶의 일부였다. “우리 나이의 아름다움은 눈빛에서 나와요. 그러니 잘 때도 웃으면서 자야 해요. 그건 돈으로도 할 수 없고 시술로도 안 되는 부분이죠.” 그녀는 여성의 삶에서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딱 잘라 대답했다. “아, 그건 없어. 내가 신데렐라가 돼야 해요.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만큼 되어야 하는 거예요. 연애? 예전에는 연예인이라서 다 막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어요. 하지만 지금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그리고 내가 타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내 스스로 일어나고 싶은 거죠.” 그녀가 여유가 없다고 말한 이유, 바로 내년이 데뷔 3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른 생각들보다 다음 공연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는 게 더 급해 보였다. “이번 콘서트가 끝나고 다른 가수들의 공연을 본 뒤에 ‘난 아직 좋아할 때가 아니다. 다음 공연을 어떻게 할지 그걸 짜야 한다’ 했어요. 3년 전에 생각한 걸 이제야 한 거잖아요. 그래서 공연 다음 날 바로 다음 공연 기획을 짰어요. 물론 아무리 계획을 세워봤자 우리 뜻대로 되는 건 없죠. 꿈과 희망을 가질 수는 있는데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진 않아요. 그래서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세상이 예뻤으면 좋겠어요” 최근에 양수경은 예능 프로그램인 에 출연했다. 방송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대답은 지극히 ‘가수 양수경’다웠다. “방송? 불러줘야 나가죠. 그런데 방송 욕심보다는 공연 욕심이 더 커요. 그렇다고 방송국에서 절 안 부르는 건 아니에요(웃음). 부르긴 불러요. 하지만 난 대중가수예요. 대중들을 위해 쇼를 하는 가수이고 싶어요.” 가수로서의 삶 외에도 양수경에게는 또 다른 삶에 대한 꿈이 있다. “혼자 사는 여자들, 싱글맘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여유가 생긴다면 그런 삶을 살고 싶은 거죠.” 양수경 본인은 몰랐을지라도, 그녀를 그리워하는 팬들은 항상 있었다. 그들에게는 남편과 사별하고 세 아이의 엄마로서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것이 고마운 선물 같았을 것이다. 힘겹게 먼 길을 돌아 자신의 자리로 다시 도착한 그녀는 그 시절 그때처럼 여전히 꿈꾸는 소녀 같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꿈을 꾸면서 살고 싶었어요. 지금도 꿈을 꿔요. 밝고 맑은 세상에서 그렇게 예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 2017-09-30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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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식은 거울이다
- 작년 초, 딸아이의 남자 친구가 인사를 오겠다고 해서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2주 후 현대미술관 그릴에서 마주 앉았다. 어색하고 기분이 묘했다. 노트북을 펼쳐 몇 컷으로 정리한 자신의 풀 스토리를 전하는 예비사위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래도 비교적 차분하고 진솔하게 35년의 이야기를 전하는 표정이 진지했다. 만나서 심문하듯 묻고 답하는 자리보다는 온전하게 자신을 알리는 시간을 주는 게 좋겠다 싶어 필자가 주문한 것이 ‘나를 말한다’ 브리핑 PPT였다. 우리 아이와 결혼을 원한다면 예비 장인, 장모를 설득해보라는 일종의 작은 미션이었다고나 할까. 이후 까탈스러운 장모라는 주위의 비난이 있었다고 사위에게 전하니 나름 재미있었던 이벤트였다며 집안의 가풍으로 하잔다. 양가 부모 상견례가 걱정이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막막한 마음에 경험자들에게 물으니 형식적인 자리이니 인사 정도나 나누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 생각은 달랐다. 그동안 아들을 어떤 심정으로 키웠는지, 어떤 아이로 자라기를 소원했는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지 등등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자 모두들 극구 말렸다. 그러려면 너는 아예 상견례 자리에 나가지 말라는 충정 어린 겁박(?)까지 했다. 문득 ‘사돈끼리 그렇게 어려워해야 할 이유가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게 귀한 자식이고 사돈끼리 사이가 좋으면 아이들도 편할 텐데 왜 형식적으로 만나라고 하는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상견례 자리에서는 남편이 주로 이야기하고 필자는 경청만 하기로 했다. 그러나 두 시간의 상견례 만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딸아이에게 “입을 꼭 다물고 싸늘하게 앉아 계시니 시베리아가 따로 없었다. 겨울 왕국 지으시느라 애쓰셨다”는 원망 섞인 비난을 들어야 했다. 상견례를 마치고 나니 혼례가 실감이 났다. 남편도 딸아이가 시집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한동안 잠을 뒤척였다. 장인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 이해하겠다는 고백을 시작으로 35년 전 우리의 결혼식을 떠올리며 새벽까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결혼이 통과의례나 속물적인 거래가 되지 않으려면 정직하고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최소한 자신이 납득할 만한! 결혼 당사자는 내게 결혼은 무엇인지, 왜 그 사람이어야 하는지, 나는 상대에게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둘이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등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부모 역시 새 식구를 받아들이는 기준이 무엇인지, 자녀가 어떤 가정을 꾸리기를 원하는지,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인지, 그럼에도 결정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욕심을 내려놓고 다양한 경우들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어느덧 딸아이의 결혼 1주년이 지났다. 여전히 재미있고 좋단다. 살아가면서 몇 가지 잘한 일 중 하나가 딸아이를 결혼시킨 것이다. 새 식구도 얻었지만 남편과도 변화가 생겼다. 부모이자 인생 선배로서 바람직한 부부의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기 시작한 거다. 조금은 성숙하고 의젓한 장인, 장모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다. 딸아이의 결혼으로 우리 부부를 비춰주는 거울이 생긴 것 같다. 사위가 아직도 낯설지만 결혼시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딸아이가 원하는 사람을 흔쾌히 맞아들인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어른다웠다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설레는 가슴으로 함께 꿈꿔나가는 젊은 부부의 모습이 아름답다.
- 2017-09-14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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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심 좋은 우리 동네 사람들
- 필자가 사는 동네는 서울 변두리 산 밑이다. 이 동네에서 꽤 오래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동네에 아는 사람이 많다. 필자는 같은 아파트 사람 이외는 친분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는데 남편은 같이 산에 물이라도 뜨러 갈 때면 언제 사귀었는지 온 동네 사람과 다 인사를 나눈다. 그런 남편이 참 생소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필자보다는 낫다는 생각이다. 들고 들어오는 청첩장이나 부고장도 있는 것으로 보아 동네 사람 경조사에도 많이 참여하는 것 같다. 며칠 전 남편이 이번 일요일에 동네 아는 분의 자제가 결혼하는데 결혼식 장소가 청주라 버스를 대절해서 동네 사람들과 축하하러 가게 되었다며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다. 필자는 혼주 되는 분과 일면식도 없는 사이라 망설여졌다. 요즘도 이웃 경사에 버스를 타고 지방까지 내려가는 일이 있는 것일까? 변두리 우리 동네 아니면 별로 흔한 일은 아닐 듯했다. 그런데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치르게 되니 축하객이 너무 적을 것 같아 걱정이라는 혼주의 이야기를 전하며 남편이 필자에게 같이 가면 좋겠다고 했다. 이전 같으면 절대 따라가지 않았을 텐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일까 모르는 사람들과의 하루 나들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속마음은 어디론가 훌쩍 나서고 싶었는데 잘됐다고 쾌재를 불렀다. 일요일 오전 9시 아파트 앞 도로로 나가니 커다란 대형버스가 서 있었다. 한두 사람은 안면이 있지만 거의 처음 보는 사람들이 30여 명 앉아 있었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기온이 차가웠지만 어디론가 떠난다는 생각에 기분이 마냥 설레었다. 촉촉한 창밖 풍경을 내다보며 두 시간쯤 달리니 그제야 하늘이 환하게 밝아오며 햇빛이 활짝 피었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 날 혼사가 있으니 더 경사스럽다는 덕담들이 터져 나왔다. 필자는 이전에 청주를 몇 번 와 본 적이 있다. 친지를 방문하러 오기도 했고 여행으로 들르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톨게이트를 지난 지 얼마 안 되어 필자의 눈을 가득 채웠던, 무성한 플라타너스 잎이 아름다운 가로수 길이였다. 알고 보니 그 가로수 길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거리였다. 풍경이 아름다워 드라마나 영화의 배경으로 많이 나왔다는데 예전에 푹 빠져 보았던 드라마 에서 최민수가 오토바이로 질주하던 곳도 바로 이곳이란다. 청주에 가까워져 갈수록 플라타너스 거리를 기대했지만 가는 길이 다른지 가로수 길은 보이지 않은 채 어느 새 예식장 앞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는 대형 결혼식장이었다. 좋은 날짜인지 식을 올리는 커플이 많아 축하객들도 만원이었다. 머리 올리고 한복을 차려입은 하객이 유난히 많아 축제의 분위기가 더욱 살아나는 것 같다. 잘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신랑 신부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해주었다. 그러면서 이런 게 사람 살아가는 재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꼭 잘 아는 사람 아니어도 하객 부족할까 걱정하지 않게 동참해주는 이웃이 있는 우리 동네가 정겹다. 비록 변두리지만 인간의 정이 넘치는 자랑할 만한 곳이다. 훈훈한 인심을 가진 동네 사람들과 함께 모처럼 즐거운 나들이를 했다.
- 2017-09-12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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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문학의 발자취를 간직한 세계여성문학관
- ‘세계여성문학관’은 2000년 11월 여성 문학 관련 연구 지원을 위해 숙명여자대학교 도서관 내에 설립됐다. 도서관 안에 문학관이라니 처음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도서관(Library), 기록관(Archives), 박물관(Museum)의 합성어 ‘라키비움’인 세계여성문확관은 ‘라키비움’의 독특한 특성을 살려 여성 문학 연구를 지원하며 다양한 기획전과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일명 ‘막장’ 드라마계의 3인방으로 불리는 작가 문영남, 작가 임성한, 작가 김순옥.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여성 작가라는 점이다. 여기에 , , 등 많은 드라마를 흥행시키며 드라마 작가로서 한 획을 그은 노희경도 있다. 그야말로 여성 작가의 전성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문학사의 주류에서 여성 작가들은 소외되어왔다. 엄청난 변화임이 분명하다. 여성 문학이 이렇게 발전 가능했던 이유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던 시절에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펜을 쥐었던 여성 문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여성문학관’은 바로 이들의 발자취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곳이다. 숙명여자대학교 도서관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으로 꺾으면 세계여성문학관으로 들어가는 문을 바로 찾을 수 있다. 그 문을 열면 약 10만3000권의 세계여성문학 작품으로 가득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진다. 2층에 마련된 갤러리는 상설 전시와 기획 전시로 꾸며져 있다. 여성 문인들의 문학작품이 한곳에 1층을 빼곡하게 메운 서가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장서(藏書)가 여성 문인의 이름에 따라 체계적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점이다. 방문객이 관심이 있는 작가를 서가에서 찾으면 그 작가의 다양한 문학작품을 한꺼번에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서가 옆과 뒤쪽으로 마련된 책상을 이용하자. 이곳에 앉아 세계여성문학관 내에 진열된 도서를 얼마든지 꺼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문학작품으로 빼곡히 채워진 아래층에서 한가롭게 책을 읽다 지루해질 쯤 2층으로 가보자. 한국을 비롯한 세계 여성 문인들이 발표한 작품집의 초판본과 애장품을 상설 전시해놓은 갤러리를 만날 수 있다. 올라서자마자 벽면에 부착되어 있는 동판이 시선을 끈다. 선정위원회가 고심 끝에 선정한 23인의 세계 여성 문인의 사진과 명문구로 꾸민 것이다. 최명희, 박완서, 박경리 그리고 제인 오스틴 등 여성 문학을 대표하는 문인들의 흔적을 감상할 수 있다. 동판 아래에는 한국 문학 초판본이 연도별로 구분, 전시되어 있고 바로 맞은편엔 외국 서적 초판본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이곳에서 1층을 내려다보면 특별한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서가 위로 쓰인 문학 작품의 글귀들이다. ‘주요 문인 기증코너’에선 의 소재가 된 남편의 모자, 즐겨 쓰던 서예도구, 찻잔 등 김남조, 박완서, 한무숙의 작품에 드러난 소재들과 작가들이 평소 아꼈던 애장품을 볼 수 있다. 교수들이 직접 추천하는 책 5월부터는 ‘내 인생의 행복한 책읽기’를 주제로 새롭게 기획 전시가 이뤄지고 있다.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들이 직접 참여해 내놓은 기증품, 애장품, 추천도서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이번 기획전은 내년 4월 말까지 이어된다. 숙명여자대학교 중앙도서관 학술정보서비스팀 박성희 부장은 “이번 전시를 마친 뒤 시인 기념전이나 학생들이 꼽은 ‘내 인생의 책’을 모아 전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관람 정보 주소 서울시 용산구 청파로 47길 100 전화 02-710-9710 관람시간 학기 중 09:00~19:00 (평일) ~15:00 (주말) / 방학 중 09:00~17:00 (평일) ~12:00 (주말) 휴관일 일요일 및 법정 공휴일 입장료 무료
- 2017-09-08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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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또 다른 관찰 <더 테이블>
- 영화가 좋아하는 소재 중 하나가 플랫폼(platform)이다. 요즘 이 단어가 IT 기업의 용어로 변질되어 그 낭만성이 많이 퇴색했지만, 본래는 기차역의 승강장을 지칭하는 말이다. 기차역은 서로 무관한 사람들이 무수히 스쳐 지나가는 무심한 공간이다. 어찌 보면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그러나 그들이 각기 자기 나름의 삶의 애환과 사연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면 엄청난 스토리의 공간이기도 하다. 플랫폼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는 남편과 다시 만날 기약 없는 이별의 공간이고 군대 가는 연인을 배웅하는 여인의 애틋한 마음이 깃든 공간이다. 철없이 가출했다가 돌아오는 아들을 기다리는 모정의 공간이기도 하고 죽은 남편이 돌아올 것을 굳게 믿고 눈 오는 플랫폼을 서성이는 애절한 공간이기도 하다. 조금 다르지만, 의 이별 장면은 최고의 플랫폼 장면으로 기억된다. 플랫폼은 무정하고 건조하게 늘 그 자리에 있기에 인간의 격정과 대비되며 그 낭만성을 극대화한다. 인간들의 모든 사연을 알고 있지만, 말없이 홀로 삭이며 든든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 때문에 줄곧 의인화되며 삶을 관조하는 상징이 된다. 인간들의 삶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운명을 표현할 때 플랫폼이 즐겨 활용되는 이유이다. 영화 은 바로 플랫폼 영화의 전형이다. 카페의 탁자는 아무 연관 없는 사람들이 머물다 가는 사물에 불과하다. 감독은 이 가구를 플랫폼 삼아 스쳐 가는 인간들을 관찰한다. 오늘 이 테이블에는 총 8명의 등장인물이 네 번에 걸쳐 머물다 간다. 그들의 사연은 연결성이 없으며 극히 사소한 삶의 단면만 노출할 뿐이다. 그러나 감독은 이 맥락 없는 이야기에 각기 색깔을 입혀 사랑에 관한 기승전결을 엮어낸다. 그날 오전 테이블이 보는 첫 번째 사랑 이야기는 정유미와 정원준이 펼쳐낸다. 이미 스타가 된 전 여친 앞에서 전 남친인 주인공은 찌질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의도와 말은 줄곧 불일치하고 서투르기 짝이 없다. 젊은 시절 우리가 그랬듯이 말이다. 두 번째 사랑은 차분하며 관리할 줄 안다. 급격히 진전한 관계를 뒤로하고 불쑥 인도로 떠난 후 연락 없던 남자가 돌아와 다시 사랑을 이어가려 한다. 정은채와 전성우는 성숙한 모습을 자연스럽게 연기한다. 오후 테이블에 올려진 세 번째 이야기는 사랑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는 전환의 단계이다. 한예리와 김혜옥은 결혼 사기단의 짝이다. 그들은 새로 물색한 대상을 속일 계획을 짜면서 느닷없이 다가온 진짜 사랑에 당혹하면서도 메말랐던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낀다. 큐피드의 화살은 엉뚱하게도 돈 많은 사기 결혼 상대가 아니라 돈 없는 직원에게 꽂혀버렸다. 그렇다! 사랑은 기획 상품이 아닌 것이다. 저녁나절 마지막 손님들은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결론이 아니라 사랑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결혼을 앞둔 임수정은 옛 남친인 연우진을 만난다. 현실적인 선택을 했으면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이 남았나 보다. 여기서 임수정의 입을 통해 “왜 마음이 가는 길이랑 사람 가는 길이 달라지는 건지 모르겠어.”라는 우리가 아는 사랑과 결혼에 관한 가장 통속적인 대사와 마주친다. 영화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테이블에 놓인 꽃을 클로즈업한다. 이 꽃은 사랑에 대한 은유이다. 마지막 손님인 연우진은 우리의 젊은 날 애인을 기다리며 성냥개비를 쌓듯 꽃잎을 다 뜯어버린다. 사랑의 죽음을 암시한다. 소설도 좋지만, 가끔은 부담 없이 읽는 에세이도 좋다. 솜씨 있는 독립영화로 이름난 김종관 감독이 써 내린 사랑에 관한 에세이 한 편을 읽은 느낌이다. 영화 속 홍차처럼 입맛이 개운하다.
- 2017-09-05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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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신, 어떻게 생각 하시나요?
- ‘선타투 후뚜맞’. 이게 무슨 의미일까? ‘허락 전에 문신을 하고 그 후에 부모님께 뚜들겨 맞겠다’는 뜻이다. 문신을 반대하는 기성세대와 문신을 개성 표현 방법의 하나로 여기는 신세대 간의 첨예한 대립을 제대로 보여주는 말이다. 사람들 몸에 문신을 새겨주는 타투이스트 ‘난도’를 만나 그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문신(tattoo)’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우리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는 온몸을 휘감은 용, 잉어, 도깨비 등 부정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조폭, 야쿠자 등으로 연결되면서 ‘문신은 혐오스러운 것’으로 결론 난다. 가끔 뉴스에서 보이는 불량 청소년이나 조폭의 몸에 새겨진 휘황찬란한 문신들은 여전히 우리를 문신에 대한 부정적 생각의 틀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孝之始也]’라는 옛말도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문신은 결코 이해될 수 없는 행위였다. 하지만 오늘날 문신은 더는 낯설지 않은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요즘에는 길거리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문신한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화배우, 스포츠 선수, 가수 등 예체능 종사자를 중심으로 성행했던 문신이 이제는 많은 사람에게 열려 있는 문화로 변화하고 있다. 문신, 그 편견을 넘어서 한남동에서 타투숍을 운영하고 있는 타투이스트 난도. 담배 연기로 자욱하고 어두침침한 분위기의 숍을 예상했지만 이 또한 편견이었다. 처음 방문한 타투숍이 신기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난도가 인사말을 건넸다. “생각보다 숍이 밝죠?” 그렇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여기저기 놓인 독특한 소품들은 애초에 생각했던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밝은 조명과 쾌적한 환경, 거기에 난도가 직접 그린 작품들은 타투숍을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경희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그는 스페인 유학 시절 문신을 접하면서 시술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유럽 사람들은 개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방법으로 문신을 하곤 해요. 스페인에선 워낙 많은 사람이하니까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죠. 아무래도 제 전공이 미술이다 보니 눈길이 많이 갔고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유럽에선 20세기를 거치면서 문신이 이미 자연스러운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19세기에는 영국 해군들 사이에서 일종의 ‘무사 귀환’을 상징하는 부적으로 여겨졌고 이후 미국으로까지 퍼졌다. 그렇게 전 세계로 서서히 퍼지기 시작한 문신은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패션의 일부이자 개성 표현의 한 문화로서 자리를 잡고 있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 중인 JTBC 을 보면 가수 이효리와 남편 이상순 몸에 새겨진 다양한 문신이 눈에 띈다. 예전이라면 모자이크로 처리했겠지만 지금은 별다른 제재 없이 노출하고 있다. 그만큼 문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타투숍을 방문하는 걸까? “문신은 조폭이나 나쁜 사람들만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십니다. 문신이 조폭 영화에서 필수가 되어버린 것 같아 아쉬움이 커요. 하지만 요즘엔 젊은 사람들이 패션이나 개성 표현 방법으로 문신을 하는 경우가 훨씬 많아요. 최근 유행하는 문신은 눈에 잘 띄지 않다 보니 인식도 바뀌는 등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제가 하는 작업은 선이 얇고 비교적 작은 크기이다 보니 남성분들보단 여성분들이 많이 찾아오십니다.” 난도의 SNS 계정은 국내외에서 18만 명이 팔로우할 정도로 유명하다.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스타일을 문신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그의 지향점이 바로 인기 비결. 피부에 수채화를 그려넣은 듯한 그의 섬세한 문신은 우리가 흔히 아는 ‘혐오스러운’ 문신과는 거리가 멀다. 문신은 피부에 상처를 내서 물감을 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한 번 하면 지우기 어렵다. 레이저 시술로 없애는 방법이 있지만 완벽한 제거는 아직 불가능하다. 마치 우리 기억 속의 추억처럼 말이다. 그래서일까? 추억을 문신으로 새기는 사람들도 있단다. “아무 의미 없이 하는 손님도 있지만 나름의 사연이 있어서 찾아오는 손님도 있어요. 흉터를 가리기 위해 찾아오는 분, 반려견이나 반려묘와 이별하고 찾아오시는 분, 가족 얼굴을 새기고 가는 분 등 매우 다양하죠. 탄생화나 별자리를 새기는 분들도 있고요. 최근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아기가 태어난 날짜를 시계 도안과 함께 팔에 새기고 간 분이에요. 지워지지 않는 문신은 잊지 못할 순간을 평생 간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난도에게 물었다. “혹시 시니어분들도 문신을 하기 위해 찾아오나요?” “3년 전부터 급격하게 우리나라도 문신에 대한 인식이 관대해졌지만 아직 시니어에겐 쉽지 않은 것 같아요(웃음). 딱 한 분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이 한 적은 있지만 거의 드물다고 해야겠죠.” 문신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남아 있다. 대중목욕탕엔 ‘혐오감을 주는 문신을 한 사람은 입장 불가’라는 안내판이 존재한다. 공무원 응시 자격 요건에도 ‘공무원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문신이 없어야 함’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실제로 야구선수 이대은은 2016년 경찰야구단 입대를 위해 지원서를 냈다가 문신 때문에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다. 난도는 문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조폭 하면 쉽게 떠올리는 알록달록한 문신인 ‘이레즈미’, 글자만 새기는 ‘레터링’, 명암으로만 표현한 ‘블랙 앤 그래이’ 등 문신에도 다양한 장르가 있어요. 또 도안마다 가지고 있는 의미가 있죠. 타투이스트들 또한 손님을 가장 잘 표현해낼 수 있는 도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요. 아직까진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지 마시고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예술 활동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 사회에는 ‘평범함’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문신을 한 사람들도 ‘이상한 사람’에 포함된다. 위아래로 훑어보곤 ‘분명 엇나갔을 거야’, ‘몸이 도화지야?’, ‘철이 없네’ 하면서 부정적으로 그들을 평가한다. 문신을 찬양하자는 말은 아니다. 한 번쯤은 편견이 아닌 열린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려 노력해보자. 어쩌면 그들의 문신에는 위협이 목적이 아닌, 끝까지 잊지 않고 싶은 추억과 소중한 이야기가 담겨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 2017-09-01 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