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이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살겠다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아주 가끔씩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름다운 곳에는 으레 세계적인 부호나 유명한 배우들이 별장을 짓고 살지만 그 도시가 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일반 여행자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그 도시에서 한 달 정도만 살면 별장과 다를 바 없다. 이번 호부터 아름답고 특별한 별장을 꿈꾸는 시니어들을 위해 유럽의 멋진 도시들을 골라 시리즈로 소개한다.
글․사진 이신화( 저자, www.sinhwada.com)
고요함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소도시
얼마 전 “폴란드에서 사는 것은 어때?”라고 필자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 지인이 있다. 평생 ‘일이 내 삶의 전부’라며 살아온 그도 ‘딴 나라’에서 살 생각은 가끔 하나보다. 처음에는 “영국이 좋을 것 같아” 했다가 “미얀마, 라오스는 어때?”라며 급선회했다. 그러다 이번에는 폴란드를 묻고 있는 것이다. “폴란드는 아닌 것 같아. 체코의 남모라비아 쪽이 더 나아”라고 답변했더니 귓등으로도 들은 척하지 않던 그가 TV의 교양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야 활짝 웃었다. 술 좋아하는 그는 체코 모라비아 지방의 인심 좋은 포도 축제에 홀딱 반한 것이다.
지인이 당장 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어떠리. 꿈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삶의 질 차이는 엄청나게 크니까 말이다.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얻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지인이 가고 싶은 나라와 도시가 결정됐을 때 필자가 나서주면 될 일이다.
지인이 홀딱 반한 체코의 모라비아 지방에서 추천하고 싶은 도시는 ‘텔츠(Telc)’다. 필자에게 “체코에서 어디가 가장 좋았어?”라고 묻는다면 단언컨대 텔츠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들의 느낌은 비슷하기 마련이다. 체코의 대표 작가 카렐 차페크(Karel Capek)도 자신의 책 에서 “우리나라에서 텔츠보다 아름다운 광장을 가진 도시는 없다”고 적었다. 체코 관광청도 “텔츠는 예술가들과 몽상가들을 위해 만들어진, 사랑스럽고 연약한 분위기를 내는 도시다”라고 소개한다. 텔츠는 주관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매력이 있는 도시다. 특히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여행객들에게는 최적의 장소다.
대도시 프라하보다 물가가 50% 싼 모라비아 지역
모라비아의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텔츠는 프라하에서 150km, 브르노에서 서쪽으로 약 70km 떨어져 있다. 관광객이 90%나 되는 복잡한 대도시 ‘프라하’를 벗어나 모라비아의 가장 큰 도시 ‘브르노’에 도착했을 때 체감하는 것은 ‘물가’다. 과장 없이 50% 정도 물가가 싸다. 쉽게 예를 들면 커피 값이나 와인 한 잔 값이 1유로를 조금 웃돈다.
브르노를 떠나 텔츠 역에 도착해 10여 분 정도 걸어 호르니브라나 문을 들어서면 올드 타운의 자하리야슈(Zacharias) 광장이다. 광장 주변에는 엇비슷한 형태의 건물이 삼각형 모양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텔츠는 12세기에 로마네스크 교회의 은신처로 언덕 위(해발 522m)의 늪지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목조 가옥이었으나 1530년에 큰 화재가 났고 당시의 시장이었던 자하리야슈 폰 노이하우스의 통치 아래 대대적인 재건축에 들어갔다. 가옥들은 르네상스식 석조물로 바뀌었고 타운을 에워싼 성벽과 인공 연못도 요새로 만들어졌다. 그러다 또 한 번 화재가 일어났는데 그때도 같은 방식으로 재건축을 했다. 시장이 사망한 뒤 이 도시는 더 이상 개발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 덕분에 텔츠는 유서 깊은 마을(199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될 수 있었다. 텔츠에는 역사적 기념물로 지정된 85개의 구조물이 있다.
바로크, 로코코 건물이 길게 이어진 유네스코 도시
광장 옆으로는 긴 회랑처럼 한 몸으로 붙어 있는 건축물이 길게 이어져 있다. 한 몸이지만 제각각 모양새와 색깔을 달리한다. 건물의 정면은 바로크, 로코코 양식 등으로 장식되어 있고 분홍색, 하늘색, 노란색, 흰색 등으로 칠해져 있다. 뷔르게하우스(Burgerhaus Nr.15)는 다른 집과 달리 건물에 장식물이 달려 있어 쉽게 눈에 띈다. 또 한 곳은 미하일 베커 시장의 집인 61호 저택이다. 미하엘 베커는 빵 만드는 사람이었는데 훗날 텔츠 시장에 당선되었다. 그의 집은 즈그라피토(sgraffi to) 장식으로 1555년에 개축했다. 즈그라피토는 텔츠 성에서 일하던 조각가가 개발한 공법으로 ‘긁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석회 반죽을 이용한 작품이나 도자기 제작에 많이 응용된다. 이외 59호, 520호, 522호 저택 등도 눈여겨볼 만하다. 광장에는 페스트 종식 기념탑인 성모 마리아의 기둥이 있다. 조각가 다비드 리파트에 의해 1718년에 제작된, 이른바 구름 형식의 바로크 탑. 마리아의 탑을 가운데 두고 동서로 각각 6각형 못이 있다. 13세기에 로마네스크로 건립된 후 15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개조됐다는 성령성당도 있다.
영화 등 로케이션 현장 ‘텔츠 성’과 종탑
광장 북쪽으로 가면 텔츠 성과 정원이 있다. 고딕 양식의 성은 여느 지역과 달리 소박하다. 14세기, 자하리아슈에 의해 지어진 이 성에서는 즈그라피토 장식의 벽면과 홀 내의 격자무늬 천장, 아름다운 정원을 볼 수 있다. 1945년까지 리히텐슈타인 포드슈타트슈키 백작이 살았던 이 성이 몰수되자 백작 일가는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현재 성의 예배당에는 자하리아슈와 그의 아내, 여러 성인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때때로 음악회가 개최되는 텔츠 성은 영화 촬영지로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여성 살인마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바토리(Bathory, 2008)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성 뒤에는 16세기에 지어진 성 야곱성당의 종탑(60m)이 있다. 종탑은 멋진 ‘뷰포인트’다. 종탑에 오르면 바로크 양식의 쌍 탑이 두드러진 건물이 눈길을 끈다. 1651~1669년에 제수이트회가 세운 예수회 성당과 대학으로 텔츠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텔츠의 백미는 올드타운을 양 안으로 감싸 안고 있는 울리츠키와 슈테프니츠키 인공 연못. 도시를 복원하면서 만들어진 ‘물의 요새’는 텔츠를 샛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게 한다. 연못 속으로 유영하는 텔츠의 가옥들을 보면 누구나 시인이 될 수밖에 없다.
Travel Data
교통 정보 프라하 플로렌츠 역에서 매일 2회(13:55, 16:15) 직행버스가 운행된다. 총 2시간 40분 소요. 브루노를 기점으로 찾으면 편하다. 브루노에서는 기차와 버스가 운행된다. 버스는 완행버스처럼 여러 마을에 정차하므로 약 1시간이 소요된다.
여행 포인트 텔츠는 작지만 의외로 즐길 거리가 많아 오래 머물러도 심심하지 않다. 텔츠 성에서는 각종 이벤트가 펼쳐진다. 다양한 레저도 즐길 수 있다. 정원이나 숲길을 따라 트레킹, 하이킹도 할 수 있다. 여름에는 수영, 겨울에는 스키를 즐길 수 있다. 이 밖에 산악 바이크, 보트놀이를 할 수 있고 낚시도 가능하다. 골프장도 세 곳(www.siskuvmlyn.cz, www.czgolf.cz, www.czgolf.cz/golf-resort-telc)이나 있다.
기타 정보 메인 광장 주변에 호텔은 물론 펜션 등 숙박업소들이 있다. 직접 만든 수제 와인이 유명하다. 토굴 형태의 와이너리도 방문할 수 있다. 인포메이션 직원들이 매우 친절하다.
주변 여행지 브루노, 올로모우츠를 비롯해서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의 여행이 쉽다. 알폰스 뮤샤(Alfons Mucha, 1860~1939)의 개막식에서 만난, 체코 문화원에 있는 미하엘라는 미쿨로브스키를 적극 추천한다. 이곳은 알폰스가 오스트리아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다 발길을 멈춘 도시다. 브루노에서 슬로바키아로 가는 길목에는 포도밭이 많다. 가을 수확 시기에 맞춰 가면 금상첨화다.
텔츠 안내 사이트http://www.telc.eu/, http://www.discoverczech.com/telc/index.php4
함철훈 사진가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만이 여행할 수 있고, 많은 것을 가진 사람만이 내려놓을 수 있다. 그리고 고향이 있는 사람만이 사진을 찍는다는 짠한 말을 네덜란드 출신 미국의 가톨릭 사제인 작가 헨리 나우웬(1932~1996)은 남겼다.
몽골국제대학교에서 일하기 위해 한국에서 울란바토르로 이사를 하고, 사진 강의를 위해 매달 홍콩으로 출장가면서 잠시 서울에 들르게 되었다. 세상을 두루 다니는 직업이라 짐을 여러 번 꾸렸지만 서울에 오면 언제나 편안하고 푸근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인천공항에 내려 서울 시내로 들어가면서 우리는 이방인이었다. 그때 느낀 외로움이 무척 낯설었다. 내 고향은 서울이고, 서울은 여전히 나와 내 아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곳인데 말이다.
늦은 밤 인천공항에 도착한 우리가 갈 곳은 우리 집이 아니었다. 서울에선 너무나 낯선 게스트하우스란 이름의 주소를 손에 들고 있었다. 비로소 우리가 서울이라는 고향을 떠나 더 근본적인 곳으로 이미 이동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그동안 몽골에서 막연히 느낀 여러 종류의 이질감을 서울에서 정면으로 맞닥뜨린 것이다.
서울에 가면 이런 이질감은 모두 해소될 거라고 생각하며, 이런 배타감은 잠시라며 몽골에서는 만나는 대로 뒤로 핑계 대며 미뤄왔던 것이다. 그런데 서울에서 내가 서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내가 느끼는 외로움은 불편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소외감이었다. 몽골국제대학교에서 일을 하기 위한 이주는 여행이나 출장, 파견 근무가 아닌 아예 모든 삶의 근거를 옮긴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게 된 것이다.
우리는 다른 것과의 만남으로 다른 것이 되어 간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외로움을 느낀다. 그 외로움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나와 다른 것도 불편한 것만은 아니다. 조금 생각해 보면 자기 발전과 사람들 간의 문제는 대부분 나와 다른 것을 해석하는 방법에서 시작된다. 외로움을 어떻게 소화해 나가느냐 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익숙한 사람과 낯선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서로 모두 낯선 사람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익숙해진 사람들과 한데 모여 살아왔다. 거기가 고향이었으며, 일가친척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런 한국에서의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뒤로 하고 몽골국제대학교의 초청에 응한 것은, 우리의 삶에서 생긴 일종의 자신감 같은 것이었다. 특별히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과도 잘 살 수 있다고 믿었고, 그들과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날 수도 있다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깊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과도 맞다고 판단했다. 이젠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이겨내지 못하고, 질시하고 경쟁적으로 군림하고자 했던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인들이나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국제기구나 비정부조직 또는 개인과 나라의 이익을 넘어서는 일이 갖고 있는 보람과 자부심이 앞으로는 더 폭넓고 귀하게 펼쳐질 것이라고 조언해 왔다.
21세기 지금 세대부터는 서로 다른 것과의 이해와 화합을 화두로 삼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서울과 몽골 양쪽에서 겪는 이질감에서 오는 외로움은 한 아프리카 부족에 전해 내려오는 속담을 생각하게 한다.
“사람을 정말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외로움이 아니다. 정말 가난한 사람은 곁에 아무도 없는 사람이다.”
그 속담의 반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경고를 뛰어넘는 길, 모두를 만나기 위해 먼저 떨어져야 하는 길, 감히 많은 이상주의자들이 외쳤던 그 길을 우리 세대가 넘어가리라 믿는다. 우리 대한민국의 유전인자에는 독특한 것이 있다는 것을 외국에 살면서 조금씩 확신하고 있다. 내가 나를 보기는 쉽지 않지만 내가 우리를 알아가는 좋은 길을 외국에 살면서 하나 알게 되었다. 우리와 다른 남들 안에서 나는 우리를 조금 더 잘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양쪽에서 반쪽이의 어려움을 겪는다 해도, 그래서 얻게 된 우리가 있다. 이렇게 반쪽이가 된 많은 우리를 만나는 기회가 많아졌다. 양쪽을 잘 승화시킨 우리의 꿈나무들이 무럭무럭 잘 크고 있다. 또한 광화문 촛불시위 사이 틈틈이 허리를 굽히고 타버린 초와 종이컵을 줍는 젊은이들이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다.
늙은이들의 노파심 중에도 잘 자라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이 기대된다. 서로 다름을 시기하지 않는 길, 그 길들이 이젠 꿈에서가 아니라 분명히 보인다. 아주 추운 몽골의 눈길을 가면서도, 앞이 잘 보이지 않는 2017년 새해를 맞으면서도 새 시대를 여는 새 세대가 여기서도 분명히 보인다.
이재준 미술품 수집가
장리석(張利錫, 1916~ ) 화백은 2016년 4월 백세(百歲)를 넘긴, 그러나 아직 화필을 잡는 당당한 현역이다. 평양에서 출생하여 상수보통학교 졸업, 1937~1939년 일본 다마가와(多摩川) 제국미술학교 수학, 귀국해 1940~1945년 평양 미나카이(三中井)백화점 미술부장, 이때 조수로 있다 숨진 화가 최지원(崔志元, ?~1940)을 추모하여 그의 아호를 딴 ‘주호(珠壺)회’를 구성, 박수근(朴壽根, 1914~1965), 이중섭(李仲燮, 1916~1956), 최영림(崔榮林, 1916~1985), 황유엽(黃瑜燁, 1916~2010), 박고석(朴古石, 1917~2002), 박영선(朴泳善, 1910~1994), 윤중식(尹仲植, 1913~2012) 등과 5년간 동인전을 열어 평양 미술인의 자긍심을 높였다.
1950년 7월 북한 노동성에서 건립 중이던 금강산호텔 벽화 작업에 동원되어 평양을 떠난 뒤, 북진(北進)한 국군 원산 해군기지 사령부에 입대, 종군하게 되었다. 혈혈단신으로 1951년 1·4후퇴 때 제주도까지 내려가 4년 여 체류한 인연으로 제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1955년 제4회 국전에 이 특선되고, 1958년 제7회 국전에 이 대통령상을 수상하여 화가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1981년까지 서라벌예대, 수도여자사범대학, 중앙대학교에서 회화과 교수로 재직하며 현대 구상회화의 산증인이 되었다. 주로 제주에 머무르며 서민들의 일상,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해녀 등을 독특한 색감으로 그리고 있다. 2005년에는 제주도에 그림 110여 점을 기증하여 2009년 개관한 제주도립미술관 내의 ‘장리석 기념관’에서 상설 전시되고 있다. 2014년에는 전을 열어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의 그림 속에는 두고 온 고향풍 경도 많이 있는데, 내가 보았던 겨울 풍경은 , , 세 작품이었다. 눈 내린 시골마을, 옹기종기 초가집도 보이고 밤나무 옆길로 엄마와 아기, 소년과 강아지 등이 눈길을 걸어가는 시정어린 그림으로 화가의 유년시절 외가 마을의 설경을 그린 것이다.
바람에 눈발이 날리듯, 노화백의 가슴에 묻혀 있던 아슴푸레한 기억들이 연작으로 화폭에 옮겨져, 보는 이들을 묻혔던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게 한다. 소복소복 쌓인 눈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적이 따뜻하게 해 준다. 이 작품 은 10여 년 전, 인사동 경매에서 치열한 경쟁 속에 낙찰받은 작품이다. 창밖에 눈이 내리는 날이면, 이 그림 아래 아내와 차를 끓이고, 가야금 산조를 들으며 깊은 감상에 젖곤 한다.
은 박용인(朴容仁, 1944~ ) 화가의 유럽 여행 중의 한 작품이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 1981~1983년 프랑스 몽파르나스의 아카데미 드 라그랑 쇼미에르(Académie de la Grande-Chaumière)에서 유학하고 국내 여러 미술대학에서 강의하였다. 북한산, 제주도 등 곳곳의 풍경이나 와인, 과일, 꽃의 정물도 많이 그렸다. “남극과 북극을 빼고 전 세계를 여행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유럽에 자주 머물며 알프스의 마터호른,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같은 세계적 명산은 물론 고성(古城)들을 그렸다.
이 화가는 회화의 기법상 캔버스에 나이프를 주로 써서 유화물감을 바른다. 나이프를 쓰면 그림의 두께를 더하여 마티에르(matiere, 물감의 질감)가 무겁고 깊이 있게 보이고, 평면의 화면도 시각적으로 입체적인 양감(量感)을 느끼게 한다. 미술시장에서, 외국 풍경을 그린 작품은 우리나라의 풍경을 그린 작품보다 다소 가격이 낮은 편이다. 그러나 경매에서 이 그림을 살 때에는 그 시작가가 높아 의외였다. “이 작가나 권옥연(權玉淵, 1923~2011) 화백 같은 경우, 외국 풍경이나 인물을 워낙 심도 있게 작품화하기 때문”이라는 경매 회사의 설명이있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교외, 한적한 도로를 건너 왼편으로, 고색창연한 성당의 옆모습이 보인다. 후원에 나뭇잎을 채 떨어뜨리지 못한 나무에도 눈이 덮여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성당의 첨탑도 잿빛 하늘에 묻혀 희미하다. 지붕은 흰 눈으로 적요하다. 고목의 가로수 위에도, 풀밭에도 깊게 눈이 내려 사위가 고요에 휩싸였다. 그림을 보는 찰나, 아늑함과 경건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속세의 혼탁함을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심경이 화폭에 질펀히 흐르고 있다. ‘잘 된 그림이 반드시 좋은 그림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으나, 이 작품은 아주 잘 된 그림이며, 동시에 좋은 그림이라고 확신한다.
“그의 예술세계는 소재에 대한 친근감과 따뜻한 눈길이 와 닿는다. 거기에는 격정의 향수와 서정성 짙은 은유의 시어(詩語)로 잔잔한 감동이 다가온다. 정직, 성실한 자태와 순수함을 잃지 않는 작가적 심성이 화면 깊숙이 투영되고 있다”고 평자들은 말한다.
화가는 “내 그림을 보고 우리나라에서는 유럽풍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유럽에서는 동양적이라고 한다.”고 미소 짓는다.
사실 화가들은 설경(雪景) 그리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흰색이 다른 색에 묻히고 그 밋밋함이 화폭을 평이하게 이끌기 때문이다. 동양화에서도 화선지의 흰 여백을 그대로 두어 눈[雪]의 형상화가 어려움을 나타내곤 하였다.
눈 내리는 날은 마음이 설렌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걷노라면 마음도 경건해진다. 입속으로 가만히 어떤 바람이라도 읊조리고 싶고,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작은 오두막, 무쇠난로에 장작불을 피우고,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던 한때를 회상해본다. 눈설레 속에서 정겨운 얼굴들이 하나둘 스쳐지나가고, 아르보 페르트(Arvo Pärt 작곡가, 1935~ )의 몇 곡을 듣다 보면 정화(淨化)된 마음 한구석으로 밀려드는 적멸감(寂滅感), 시공을 넘어 유년의 뜰로 이어진다.
‘외가’라는 낱말은 단순히 ‘어머니의 친정’ 이라는 뜻만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함축된 말이다. 외가는 외할머니가 계신 곳이고,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곳이며, 내 모든 투정이나 허물도 기꺼이 품어 주는 따뜻한 풀솜 속 같은 곳이다. 아버지나 외할아버지에게선 느껴볼 수 없는 자글자글한 정이, 외할머니 치마폭에서 피어난다. 김칫국물 얼룩진 저고리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아릿하다. 어머니의 어머니로 농축된 모정이 “아이고, 내 강아지” 한마디 속에 묻어난다. 진종일 눈사람을 만들다, 강아지와 뛰놀다, 눈이 그치면, 보랏빛 하늘 위에 연을 띄워 날리며 얼레에 대고 ‘우우우’ 입김을 뿜던, 그 아름답던 시절이여!
>>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
스위스 중부의 호수 도시, 루체른. 로이스 강에는 14세기의 목조다리 카펠 교가 긴 세월 그 자리를 지키고 있고, 강변 주변으로는 아름다운 가옥들이 줄지어 있다. 밤이 되면 호수 물길 따라 흔들리는 야경이 더 멋지다. 스위스에서도 아름다운 도시로 소문난 곳. 1897년 여름, 이곳을 찾은 마크 트웨인은 “휴식과 안정을 취하기에 가장 매력적인 곳”이라고 격찬했다.
글·사진 이신화(의 저자, www.sinhwada.com)
루체른 호수의 또 다른 이름은 ‘월광소나타’
루체른(Luzern, 해발 437m)은 취리히와 인터라켄의 중간쯤에 있다. 알프스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루체른의 아름다움은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리하르트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음악가는 물론 빅토르 위고, 괴테, 실러, 바이런 등 문학가들도 즐겨 찾았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이 월광소나타로 불리게 된 배경에도 루체른이 있다. 베를린 태생의 시인이자 저널리스트, 음악평론가인 루트비히 렐스타프(1799~1860)가 베토벤의 제1악장에 대해 “달빛이 비치는 루체른 호수 물결에 흔들리는 작은 배” 같다고 평했기 때문이다. 루체른이 외부에 알려진 시기는 8세기, 수도원이 세워지면서부터다. 도시 명은 켈트어와 로망스어가 혼합된 로체리나(Lozzerina, 늪의 거주지)에서 유래했다. 13세기에는 장크트 고트하르트 고개(2108m)가 개통되면서 알프스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자리 잡았고, 1332년에 합스부르크로부터 독립했다. 루체른에서 가장 먼저 반기는 곳은 로이스 강을 길게 잇는 목조다리 카펠(Chape, 204m) 교다. 1333년에 축조된 카펠 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목조다리. 지붕이 있는 다리의 천장에는 축조 당시 새겨진 그림과 글씨가 이어진다. 다리 중간의 팔각형 석조물 바서투름(물의 탑)은 등대 겸 방위 탑이었다. 카펠 교 위쪽으로는 1408년에 세워진 슈프로이어 교(Spreuerbrucke)가 있다.
바그너가 결혼한 마테우스 교회와 빈사의 사자상
로이스 강과 루체른 호수를 가르는 다리를 건너면 구시가지(Altstadt) 골목이다. 곡물 시장, 와인 시장, 뮐렌 시장 등이 있는 그곳에 마테우스(matthaus) 교회가 있다.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와 코지마(1837~1930)가 결혼식(1870)을 한 곳이다. 리스트의 딸이었던 코지마는 당시 독일의 피아노 연주자 겸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의 부인이었다. 바그너와 24세나 나이 차이가 났던 그녀는 남편과 이혼하기 전에 이미 바그너의 아이를 낳았다. 어쨌든 둘은 평생을 같이했다. 또 빙하공원으로 가면 ‘빈사의 사자상’(Lo ¨wendenkmal)이 있다. 작은 연못 위 바위 절벽 속에 들어앉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자상이다. 이 사자상에는 스위스의 슬픈 역사가 깃들어 있다. 좁은 국토의 스위스는 농경지가 적은 산악지대인데다 지하자원도 없는 가난한 나라였다. 젊은이들은 5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외국 부대 용병으로 참가해 돈을 벌어야 했다. 1792년, 프랑스 대혁명 때 루이 16세를 지키던 786명의 스위스 용병들이 있었다. 다른 국가들의 용병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끝까지 남아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이 죽어간 이유는 단 하나. 후세들에게 용병자리를 물려주기 위함이었다. 선대의 처절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자상은 1820년, 덴마크의 조각가 토르 발센이 시작해 1821년 독일 출신인 카스아호른에 의해 완성되었다. 사자의 발아래에는 부르봉 왕가의 문장인 흰 백합의 방패와 스위스를 상징하는 방패가 조각되어 있다. 마크 트웨인은 “세계에서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인 바위”라고 묘사했다. 또 두 개의 뾰족한 첨탑이 눈길을 끄는 호프 교회(Hofkirche)가 있다. 735년, 이 도시에 처음 세워진 수도원이다. 17세기에 화재로 소실된 후 1645년에 후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1525년, 고딕 양식으로 세워진 두 개의 첨탑은 화재 때 피해를 입지 않아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교회 안에는 1640년에 4950개의 파이프로 만든 파이프 오르간이 있고 건물 주변으로는 예술적으로 뛰어난 묘석들이 남아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
루체른 호수 따라 찾아가는 리기 산
루체른에는 멋진 리기(Rigi, 1797m) 산과 필라투스(Pilatus, 2132m) 산이 있다. 특히 ‘산들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리기 산은 스위스 최대의 관광 휴양지. 루체른에서 유람선을 타고 비츠나우(Vitznau)까지 1시간 정도 가면 된다. 유람선 여행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스위스 풍치를 보여준다. 호반을 정원 삼은 300~400m의 언덕 위에 터전을 잡은, 아름다운 스위스 가옥들과 전원 풍경은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든다. 작은 도시, 비츠나우에 도착하면 산악열차 리기 쿨름(Rigi Kulm)이 눈앞에 있다. 리기 쿨름은 1871년 5월 21일에 개통한 유럽 최초의 산악열차. 리기 산 중턱 마을인 리기 칼트바트(Rigi Kaltbad, 1453m)를 거쳐 30분 정도 가면 정상에 이른다. 그곳에는 1861년, 스위스 최초로 산정에 세워진 호텔이 허허벌판에 우뚝 서 있다. 여러 갈래의 산책로(30km)를 따라 여름에는 하이킹을 즐기고 겨울에는 스키나 썰매를 탄다. 무엇보다 이곳에 오르는 이유는 멋진 풍치를 보기 위함이다. 미텔란트(Mittelland) 지방의 13개 호수와 켜켜이 이어지는 산들이 파도를 친다. 마치 ‘천국이 여기다’라고 생각하게 한다. 하산은 리기 칼트바트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베기스(Weggis)로 10여 분 내려오면 된다. 435m 고지에 위치한 휴양도시 베기스는 여행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마력이 있다.
Travel Tip!
현지 교통:루체른 선착장에서 비츠나우까지 매시간 유람선이 운행된다. 스위스 패스(www.swisstravelsystem.com)가 있으면 무료. 시내는 걸어 다니면 된다.
맛집과 숙박:호수 주변이나 구시가지에 레스토랑이 많다. 강변 옆의 라트하우스 양조장(Rathaus Brauerei)은 하우스 비어를 생산하는 곳으로 블론드 비어가 대표적이다. 또 뮐렌 광장에는 대형 쿱(coop) 마켓이 있다. 숙박은 루체른 시내를 이용하면 된다. 리기 산 중턱에 있는 리기 칼트바트 호텔(www.hotelrigikaltbad.ch)에서는 온천욕이 가능하다.
여행 포인트:필라투스 산을 가려면 알프나하슈타트(Alpnachstad) 역에서 등산 철도를 이용해 필라투스 역(2070m)까지 오르면 된다. 눈 덮인 필라투스 산 풍치가 매우 빼어나다.
문의
루체른 홈페이지:luzern.ch
유람선:lakelucerne.ch
스위스정부관광청:myswitzerland.com/ko
지난날 폭압정치를 경험한 세대들은 좀처럼 정치적 의사표시를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살았다. ‘1987년 6·10 항쟁 이후, 190만 명 이상이 운집한 최대 집회’가 현재진행형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명예를 훼손하는 루머’는 어느새 ‘합리적 의심’으로 변했다. 이제 그것은 장막을 걷고 있다.
겨울의 문턱에 다다른 11월 마지막 휴일, 오랜 친구 몇 명이 산에 올랐다. 동네를 지나면서 붉게 익은 늦가을 감나무에 눈길이 멈췄다. “까치밥 남겼던 그때가 좋았다.” 누군가 탄성을 질렀다. 세상일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친구들이지만 세상사 관심은 누구나 같았다.
수첩공주 ‘수첩’의 정체
요술주머니처럼 보였던 수첩의 ‘품질’은 몇 개월 만에 바닥이 났다. 의사표현도 못하는 허깨비의 수첩을 누가 작성하였는가. 영혼 없이 받아쓰기 바빴던 종사자들의 고생이 컸다. 덕분에 깨알같이 작성된 ‘수첩’이 허깨비의 실체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말았다. 종잡을 수 없는 지시에 책잡히지 않으려고 한 녹음이 중요한 증거물이 되었다.
세월호 7시간의 진실
상상만 난무할 뿐,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무엇을 했는지 묻는데 대답하지 않는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굿을 했건 성형수술을 했건 다른 사생활이 있었건 그것을 묻는 게 아니다. 세월호 수습이 잘되었다면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 일도 아니다. “왜 직무 수행을 하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반드시 물어야 하고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 국민의 생명을 버린 직무유기다. 세월호가 침몰할 때 그 장면을 하나하나 지켜보면서 어찌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면서 가슴을 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재단법인 출연금 갹출
세상에 공짜 없다. 부자간에도 공짜는 없는 것이 진리다. 거래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다. “개별 접촉 자체가 문제다.” 왜 동네 아줌마의 꼭두각시가 되어야 했는지 그 이유부터 밝혀야 한다. 몇 년 전 큰소리쳤던 유전자 검사부터 해서 모든 의혹을 낱낱이 규명해야 한다. 재벌 총수 불러서 뻔한 대답을 백번 들어봐야 머리 끄덕일 사람 아무도 없다.
헌정중단ㆍ위헌논란
헌정중단이란 5·16 쿠데타ㆍ12·12 군사반란 때처럼 ‘헌법 기능이 정지되는 상황’을 말한다. 대통령 유고 시 권한대행과 60일 내 대선은 헌법에 정해져 있는 절차다. 대통령 개인의 사임ㆍ탄핵은 헌정중단과 아무 상관이 없다. 주판알 굴리는 일부 정치인들의 염치없는 주장이다.
헌법에 정한 60일 내 선거가 불가능하다고 일부에서 주장하고 있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통신ㆍ교통 등 과학기술 발달로 60일 내 대선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준비 타령은 아전인수식 꼼수에 불과한 진영논리일 뿐이다.” 지금이나 1년 후나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달라질 상황도 아니고 하늘에서 흑기사가 나타날 일도 없다.
‘허깨비 정리’가 제일 큰 과제다. 국민이 허탈감과 상실감을 털어내고 밝은 미래를 설계하도록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한다. 제왕도 싫지만 허깨비는 더 큰 문제다. 우리나라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지만, 지금은 선진국 문턱에서 허덕이고 있다. 모두가 정신 바짝 차리고 ‘합리적 의심’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도시생활만 해온 사람이 무모하다 싶게 은퇴지를 결정했다. 은퇴지가 제주도라서 무모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제주도에도 택지로 조성된 터가 많고 도시적인 주거 조건에 맞는 집들이 많다. 꼭 제주도에서 집을 신축할 필요도 없고 집터가 임야일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필자는 아무 생각 없이 빈터를 매입했고 그 빈터는 임야였다. 억새와 잡풀은 나무라 할 만큼 키가 웃자라 있었고 덩굴식물들이 엉겨 붙어 있어 걸으면 수북하게 쌓인 눈길을 걷는 것처럼 발이 푹푹 들어갔다.
우선 나무라도 심어야겠다고 마음먹고부터 굴삭기 기사를 불렀다. 토목에는 전혀 안목이 없고 땅을 어떻게 고르는지도 몰라 아이디어가 전혀 없었다. 필요한 만큼만 조금씩 공사를 해나가기로 했다. 우연히 소개로 만난 굴삭기 기사는 성격이 유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필자에게 자기 의견을 강하게 제시하거나 자기 아이디어대로 일을 밀고 나가지 않았다. 필자가 요구하면 큰 무리가 없는 한 필자 원하는 대로 일을 해주어 고마웠다. 그 인연이 20년이 훌쩍 뛰어넘었고 이제는 매해 만나는 사이로 발전했다.
며칠 전에도 굴삭기 작업을 했다. 말할 것도 없이 바보처럼 살자는 굴삭기 기사와 함께했다. 이전에 땅을 고른 후 판판한 터에 깡마른 나뭇가지 같은 향나무, 단풍나무, 애기동백나무, 은목서 같은 정원수 묘목을 심었다. 이놈들이 제법 자라 빽빽하여 답답해 보였다. 저들도 공기가 필요할 것도 같았다. 그보다는 정원수라는 관념 때문인지 밭의 다른 농작물이나 땅꼬마 화초들 같지 않게 군거하니 오히려 주위와 어울리지도 않았다. 잘난 사람이 노숙자로 전락한 모양새라 그들에게 어울릴 법한 자리로 이식을 했다. 필자 집에서 지대가 좀 높은 위치의 공터로 나무를 이식하면서 굴삭기 기사는 다른 기사들 같으면 담배 한 대 피우고 잠시 휴식할 시간에 멋들어진 노래 한 가락을 뽑는다. 애기동백을 옮길 때는 동백아가씨가 애잔하게 흘러나온다.
굴삭기 기사는 오래전에 취미생활을 즐기는 멋쟁이로 제주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필자가 기사를 처음 만났을 때는 해변 외딴 집에 드럼 세트를 구비하고 드럼을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그 무렵 밤낚시를 즐긴다기에 초대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어느 날 집으로 오라 했다. 집에 가서 보니 창고로 사용하는 해변의 외딴 집은 사람이 생활하는 흔적은 없으나 그런 대로 큰 생활 터전이었다. 그런데 그 집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필자 눈에 들어온, 힘찬 휘호로 쓴 한글 액자가 보였다. 내용은 ‘바보처럼 살자’였다.
처음 일을 맡기려고 전화로 거래를 틀 때다. 너무 쉽게 이쪽에서 하자는 대로 ‘그러라고 그러자고’ 쉽게 동의하기에 필자는 ‘내가 도인을 만났나? 혹 뻥은 아닐까?’ 했다 사실은 가격도 필자가 깎는 대로 그대로 응해주었다. 고맙고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스럽기도 했다. 일 시작하면서 보기 드문 사람임을 금방 알아챘다. 생활 속에서 힘들이지 않고 말없이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터득한 사람이라 느껴졌다. 같이 일하는 기회가 거듭되면서 신뢰도 생기고 친밀감도 쌓였다. 평소의 생활 태도와 속사람이 궁금해지기 시작하여 집 방문의 기회를 만든 것이다. 다른 동업자에 비하여 적은 값으로 일을 해주는 그와 일을 하려면 적어도 두어 달 전에 예약해야 한다. 늘 일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혹 너무 오래 기다렸다 싶으면 쉬는 날 하루를 억지로 내어 필자 집에 온다. 얼굴에서 피로함이 느껴지면 “급하지 않으니 다음에 해도 되는데…”라고 말한다. 참 반가운 소식은 요지의 상가에 4층 빌딩을 올렸단다. ‘바보처럼 살자’의 힘찬 울림이다.
이규현(교육학 박사, 행정학 박사)
인간은 올 때도 혼자 왔고 갈 때도 홀로 갑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은 혼자 살 수 없는 가냘프고 나약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남자를 만들어놓고 홀로 있는 것이 보기에도 안 좋고 불안해서 남자를 재운 뒤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해서 여자를 만들어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남자로 만들어 서로 도우며 살아가라고 하시지 않고 여자를 만들어 남녀가 서로 도우며 의지하고 살아가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남녀의 성 역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동성끼리는 신이 바라는 종족 번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또 인간은 성적인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위대한 사랑과 배려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부라는 이름으로 둘이 만나 살다 보면 어느 한쪽이 먼저 작별을 고하게 돼 있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한쪽 배우자가 떠나고 나면 남은 한 사람은 밀려오는 고독과 싸우며 살아야 합니다. 물론 고독감은 고령자만 느끼는 것이 아니고 일생 동안 느끼며 사는 것이지만 특히 고령자가 되었을 때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외톨이가 되었을 때 깊은 고독을 느낍니다. 배우자가 살아 있을 때도 고독은 있지만 혼자가 되었을 때 가장 큰 고독을 느끼는 것입니다. 식사를 같이할 사람, 잠을 같이 잘 사람이 없으면 인생은 혼자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누군가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노년이 되면 상실의 시기, 소멸의 시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령이 되어도 상실이나 소멸이 되지 않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생리적 욕구입니다. 배가 고프면 음식이 먹고 싶고 졸리면 자고 싶고 성적 욕구가 생기면 해소하고 싶은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배가 고프거나 잠이 올 경우는 그것을 충족시키고 싶은 의사를 표명하지만 성적 욕구는 어느 누구도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니! 못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사회가 더 두드러집니다. 유교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서양사회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성적 표현이 고령자들이 해서는 안 되는 천박한 범주에 속합니다. 물론 서양사회에서도 과거에는 종교와 문화에 따라 엄격한 때가 있었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부터는 급격히 달라졌습니다. 성은 종교적인 면에서만 봐서는 안 되고 인간 중심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 주된 주장이고 변화입니다. 성은 신이 인간에게 만인평등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침해하거나 박탈할 수 없는 천부적 권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령이 되었다고 제한하거나 규제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똑같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노인의 성을 빼고 노후를 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노인의 기쁨, 만족의 가능성이 간과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히 숨을 쉬고 있는 생물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인간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살아 있는 한 가슴 속에서 성적 욕구가 꿈틀거리는 불가사의한 존재입니다. 그것은 살아 있음을 의미하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욕구입니다. 섹스를 통한 황홀감은 인간이 느끼는 오감 중 가장 강력한 쾌감입니다.
흔히 인간을 ‘성적 인간’이라고 합니다. ‘성적 인간’이란 따뜻한 감정으로 이성과 접촉하고, 이성과 성적 교류가 가능한 인간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따뜻함은 삶을 위한 마그마(magma)로서 젊은 시절엔 이성을 희구하고, 친구를 희구하며, 노후가 되어도 이성에 대한 따뜻한 눈길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성기 결합은 물론이거니와 그 이상으로 상대와 마음과 감정의 교류를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긴요한 것입니다. 상대와의 농밀한 마음의 교류, 그것이 있음으로써 섹스를 하는 것이 극상(極上)의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교류가 없는 섹스는 단순한 점막(粘膜) 마찰에 불과한 것입니다.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All is well that ends well).’ 셰익스피어가 한 말입니다. 과거의 삶이 아무리 고달팠든 화려했든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인간은 항상 현재가 중요합니다. 인간에게 있어 고독은 죽음 다음으로 두렵다고 합니다. 고독은 수명을 평균 8년이나 단축시킨다고 합니다. 나이와 관계없이 인간은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이나 마찬가지이며 사랑의 향기가 없는 인생은 꽃이 없는 사막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인간의 주성분이며, 인간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홀로 사는 이 세상에 내가 사랑할 사람이 아무도 없고, 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때, 인간은 허무해지고, 고독해지고 절망에 빠지는 것입니다. 서산마루에 걸려 있는 태양을 바라보며 이제 곧 지겠지 한탄만 하지 말고 저 아름다운 태양처럼 나도 인생 말년을 멋지게 장식하겠다고 도전하십시오. 멀리 보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70m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섹스는 만병통치약이며 최고의 보약입니다. 모든 시니어들의 건강과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이규현 현 용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객원교수이며 저자다. 용인대학교 사회교육원장, 도서관장을 역임했다.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knbae24@hanmail.net)
산업구조와 사회 상황의 변모, 가족에 대한 인식 변화, 이혼·비혼 증가 등 사회, 경제, 문화적 요인으로 혼자 사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 행정자치부가 최근 발표한 ‘2016년 9월 주민등록 인구 통계 현황’에 따르면 전체 2121만4428세대 중에서 1인가구가 738만8906세대(34.8%)로 가장 많다. 2인가구는 452만1792세대(21.3%)로 그 뒤를 이었고, 4인가구 397만1333세대(18.7%), 3인가구 391만8335세대(18.5%) 순이었다.
1인가구의 증가세는 최근 들어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린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지만 건강하고 행복한 솔로 생활에 대한 교육이나 정보 부재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혼자 사는 연예인들이 방송을 통해 1인가구 생활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트렌드를 제공하고 솔로 생활 풍속도를 보여줘 눈길을 끌고 있다.
연예인 역시 이혼, 비혼, 사별, 직업적인 특성 등의 이유로 1인가구가 많이 늘었다. 방송사들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앞다퉈 혼자 사는 연예인, 특히 중·장년 연예인 1인가구의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MBC의 , SBS의 , , 채널A의 등의 프로그램은 혼자 사는 연예인의 생활을 통해 1인가구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의식주와 생활 전반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트렌드를 전달하고 있다.
1인가구 시청자들은 혼자 사는 연예인의 생활과 정보를 접하면서 실생활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는 의견을 쏟아내고 있다. 는 방송인 전현무, 개그우먼 이국주 등 혼자 사는 유명인의 솔로 생활과 풍속도를 통해 혼자 사는 사람들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의식주와 인간관계 형성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요령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의 출연자 중 이혼 후 혼자 지내면서 1인가구 생활을 하는 중견 탤런트 김용건(70)은 많은 시청자의 눈길을 끌고 있다. 김용건은 의식주를 비롯한 기본 생활에서부터 취미, 사교활동, 문화생활, 건강관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의상 구입에서부터 착용 방법에 이르기까지 패션감각이 뛰어난 패션니스타로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 장·노년의 건강관리에 영향을 주는 음식 구매와 식사 잘하는 요령까지 알려준다. 또 행복한 장·노년 솔로 생활의 필수요소인 드라이브, 패러글라이딩, 록페스티벌 관람을 비롯한 취미생활과 지인들과의 정기적인 모임 등 사교활동과 인간관계 유지법 등도 제공한다.
김용건은 “시대와 상황이 변해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혼자 살아도 행복하고 즐겁게 생활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가족이 함께 살 때보다 혼자 살면서부터 패션에서 식사까지 더 많이 신경을 쓰고 있다. 혼자여서 외롭다는 생각보다는 혼자여서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하고 그동안 못해본 것을 해보며 생활한다. 긍정적인 생각이 행복한 1인가구 생활에 큰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예능인 김국진(51), 가수 강수지(49) 커플의 오작교 역할을 해 관심을 모은 SBS 은 중·장년 솔로 연예인들이 여행 등을 하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마음에 맞는 친구를 찾는 과정을 보여준다.
혼자 생활하는 중·장년과 노년층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인간관계 단절에서 초래되는 외로움이다. 이 외로움을 여행과 이성 혹은 동성 친구와의 교제를 통해 잘 극복하고 즐거운 1인 솔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이 바로 이다. 김동규(51), 이연수(46), 김광규(49), 김완선(47), 김도균(52), 김국진, 강수지 등 이혼을 했거나 결혼을 아직 하지 않아 혼자 사는 중·장년 연예인들은 제주, 강원 등 전국 각지를 여행하며 서로 마음을 나눈다. 또한 솔로 생활의 어려움이나 외부의 시선 등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며 더 즐거운 1인가구 생활의 해법을 찾아가는 모습도 보여준다. 김완선 등 솔로 생활을 하는 연예인들은 결혼하지 않더라도 연인관계를 유지하는 방법 등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에 출연하면서 연인이 된 김국진-강수지 커플은 “이혼 후 혼자 사는 생활을 오래 해왔다. 을 통해 서로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게 됐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라도 연애나 교제 등을 통해 이성 친구를 만나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외로움 극복은 물론이고 행복과 즐거움, 건강함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동성 혹은 이성과의 교제 외에 혼자 사는 사람들이 외로움을 극복하거나 가족이라는 연대감을 느끼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 바로 반려견 등 동물 키우기다. 주병진(57)은 종편 채널A의 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개를 키우면서 느끼는 감정이나 생활의 변화 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주병진은 방송에서 “애완견을 키우고 함께 생활하면서 내 삶이 달라졌다. 식사하는 것부터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까지 좋은 방향으로 변화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애완견 등 동물을 키우면 삶과 1인가구 생활이 더 행복해질 것임을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JTBC의 , tvN의 등 쿡방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김국진 등 혼자 사는 일부 연예인들은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1인가구 생활에서 가장 소홀히 하기 쉬운 식생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건강 증진을 위한 요리법을 터득한다. 김국진은 “혼자 살면서 요리를 전혀 하지 않았다. 요리 만들기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요리법을 배웠다. 혼자 사는 사람들도 요리법을 배우면 여러 가지 요리를 하며 건강을 챙기는 식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건모(48) 박수홍(46) 등 혼자 사는 중년 연예인의 생활과 이를 바라보는 어머니들의 심경을 듣는 프로그램도 있다. 바로 SBS에서 방송하는 다. 혼자 사는 사람들의 생활과 심경,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시선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준다. 솔로 연예인들의 심경과 결혼 적령기를 넘기고도 솔로 생활을 하는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경 사이에 적지 않은 갈등과 오해가 존재하는 것이 보인다.
1인가구 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부모 등 가족들이 오해나 편견, 고정관념이 많아 어려움이 적지 않다고 토로한다. 솔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데 혼자 살면 외롭다거나 불행할 것이라고 예단하는 가족들 때문에 갈등을 겪기도 한다는 1인가구 생활자들이 의외로 많은 것이다. 박수홍은 “부모들은 자식들이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야 행복하고 혼자 살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가족과 가족 형태에 대한 생각과 인식도 많이 바뀌고 혼자 생활해도 결혼한 사람 못지않게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많다. 혼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은 바뀌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1인가구로 혼자 생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이들 프로그램에서 소개되는 연예인들의 솔로 생활을 보면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맛있는 음식이 있을 때 맛난 음식부터 먹고 나서 다른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맛난 음식을 제일 나중에 먹는 사람도 있다. 필자는 후자에 속한다. 각자 음식에 대한 자기 철학이 있으니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요즘 ‘휴가’라는 단어는 ‘여름 휴가’를 줄인 말처럼 사용된다. 7월 말에서 8월 초에 사람들은 메뚜기 떼가 이동하듯 도시를 떠난다. 집 떠나면 고생인 것은 다 알고 있다.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불쾌지수를 높이는 요인들이 많지만 그래도 무리를 하며 떠난다. 물론 이때 휴가를 떠나지 않으면 갈 시간이 없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필자는 사람들이 우르르 떠나는 여름 휴가를 가지 않는다. 오히려 다들 탈출해버린 도시에서 한적한 여유를 즐긴다. 이때는 마치 차량 홀짝제를 시행하는 것처럼 출퇴근길도 한산하다. 맛난 음식을 맨 나중에 먹듯 휴가도 미루고 미룬다. 그리고 가을이 깊어질 때쯤 가벼운 마음으로 휴가를 떠난다. 이미 휴가를 다녀온 사람들은 가을 휴가를 떠나는 내게 부러운 눈길을 보낸다.
필자의 가을 휴가에는 특별함이 하나 더 있다. 아내를 집에 두고 혼자 떠나는 것이다. 물론 아내는 궁합이 잘 맞는 친구나 회사 동료들과 늘 여름 휴가를 다녀오곤 한다. 경제권을 다 쥐고 있는 아내는 필자가 여행갈 때 당부의 글과 함께 용돈을 넣은 봉투를 손에 쥐어준다. 평소에 자주 즐거운 마음으로 설거지를 해주고 아내가 쇼핑을 갈 때 운전기사 노릇도 해줘서 착한 남편 마일리지를 쌓아둔 덕분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가을 휴가를 혼자 떠날 수 있는 티켓을 손에 쥔다. 주위의 남자들은 필자의 휴가를 몹시 부러워한다.
필자는 오랜 세월 건축설계 사무소를 운영하면서 휴가를 재대로 가본 적이 없다. 여러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 것이 불안하다. 현장이 늘 위험 요소를 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도 휴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젊었을 때는 몇 년간 휴가를 못 간 사실을 대단한 경력이라도 되는 양 은근히 자랑하기도 했다. 그렇게 일에 묻혀서 살다 보니 어느덧 환갑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몸도 점점 예전 같지 않다. 그동안 나를 너무 잊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비로소 휴식이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가을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소란스러웠던 여름이 말끔히 치워진다. 투명한 햇살을 받아 눈부신 백색으로 빛나는 억새밭에 서서 바람소리를 듣는다. 추수가 다 끝난 텅 빈 들녘도 걸어본다. 잔잔한 바람에도 미련 없이 가지를 떠나버리는 낙엽 비도 맞아본다. 갈색으로 변해가는 잔디 위에 풍성했던 잎들을 다 내려놓고 빈 몸으로 서 있는 나무 곁에도 서본다. 깊은 계곡 작은 웅덩이 옆에 앉아 작은 물고기들이 바위틈을 들락거리는 모습도 들여다본다. 바람 부는 해변을 걸으며 아주 멀리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본다. 아주 느리게 걷고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는다. 가을은 버리고 비우는 계절이다. 그렇게 텅 비어가는 자연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비로소 나를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얻는다. 필자가 매년 혼자만의 가을 휴가를 즐기는 이유다.
글 박원식 소설가
지리산 자락,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산야에 살포시 내려앉은 9월의 소슬한 가을빛. 한낮이지만 핼쑥한 가을볕을 받은 능선도, 숲도, 나무도 덩달아 수척하다. 연신 허리를 틀며 휘어지는 언덕길 양편엔 상점이 즐비하다. 사람들의 발길도 연달아 이어진다. 소설가 박경리(1926~2008)의 대하소설 의 무대이자 드라마 촬영장인 ‘최참판댁’을 관람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다.
언덕 끝자락 외진 곳엔 ‘박경리문학관’이 있다.
‘최참판댁’ 일대엔 들고나는 사람들로 바글거리지만, 바로 옆에 있는 문학관은 찾아드는 이가 드물어 고요하다. 문화보다는 관광을, 문학보다는 눈요기를 포식하는 일로 만족을 구하는 항간의 경향이 여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박경리는 생시에 를 기념하는 공간인 ‘최참판댁’을 조성하는 일을 당최 마뜩치 않아했다. 죄스럽기까지 하다고 토로했다. ‘최참판댁’이 필시 요란한 관광상품으로 쓰일 것을 미리 내다보았으며, 가뜩이나 넘쳐나는 ‘관광지’ 홍수에 또 하나의 관광지를 보태는 게 달갑지 않았으며, 결국은 지리산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라 보았다. 세상과 세태를 읽는 박경리의 냉철한 눈과 광활한 가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박경리문학관’은 하동군이 올해 5월 개관했다.
이전에 ‘전통농업문화전시관’으로 쓰였던 한옥 건물을 개조해 문학관을 꾸몄다. 건물의 형용은 덤덤하거나 밋밋해서 슬쩍 섭섭하다. 그러나 내부에선 박경리의 혼이 스멀거린다. 300㎡쯤 되는 공간의 벽면과 진열장에 작가의 개인사와 창작열과 일상을 더듬을 수 있는 갖가지 책자와 초상화, 사진, 영상물 등이 전시되었다. 다분히 정형화된 구색이자 구성이지만, 박경리가 생시에 사용하거나 아꼈던 유물 41점이 흥미롭다. 이 소중한 유물들은 박경리의 딸이자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인 김영주에 의해 무상 대여 받은 것들이다.
박경리의 는 자그마치 25년이라는 긴 집필기간을 통해 5부 16권으로 완간한 걸작이다. 그는 오직 칩거한 채 에 매달린 장구한 시간을 ‘빙벽에 걸린 자유, 주술에 걸린 죄인의 세월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암 수술을 받고 퇴원한 날에도 가슴에 붕대를 감고 책상 앞에 앉아 원고를 썼다. 탁발한 재능의 소유자이기 이전에 그는, 유례가 드문 독종이자 강골이었다. 유리 진열장 안에 놓인, 방울방울 피를 뿜듯이 써내려갔을 육필원고 뭉텅이들이 숙연한 감동을 자아낸다. 글씨체에선 활달한 기운이 생동한다. 늘 곁에 두고 수시로 뒤져 알토란같은 토속어를 건져 올렸을 게 분명한 국어사전은 낡아 너덜거린다. 소설이란 여하튼 모국어와의 내밀하고도 치열한 통정(通情)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유품이다.
특유의 도회적이고 지적인 용모를 한껏 돋보이게 하는 데에 이바지했을 원피스와 재킷, 일상의 실용적인 동향을 짐작하게 하는 싱거 미싱, 안경과 만년필과 가죽장갑, 도자기와 그림부채 같은 유물들이 눈길을 오래 붙잡는다. 박경리의 끽연 습성은 생과 함께 유구하게 지속됐는데, 진열장 안에 덩그마니 놓인 저 아리랑 담배와 재떨이와 라이터를 무시로 애용했던 사람은 지금 우주의 어느 푸른 공간에 거주하는가.
빛바래고 균열이 간 흑백사진 하나에 다시 눈길이 오래 머문다.
박경리의 소녀 적 사진이다. 자못 그윽한 눈매, 고집스레 두툼한 볼, 헌칠한 이마…. 자존감과 내향성이 도드라지는 모습이다.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그는 진주여고에서 소녀기를 보냈는데 유별난 독서광이었다. 책에 푹 빠져 지냈던 소녀 박경리는 마치 예정된 길로 접어들듯이 문학이라는 꽃길, 혹은 가시밭길로 자연스럽게 걸어들어갔으며, 게걸스러운 독서를 통해 얻은 상상력으로 소설의 산정(山頂)에 올랐다. 많은 소설가들이 실증과 조사를 중시해서 작품을 쓰지만, 박경리는 붙박이 장롱처럼 칩거한 채 매진한 독서를 통한 상상력이라는 폭약을 창작의 화톳불로 삼았다. “내 소설의 밑천은 오로지 상상력이오!” 그는 그리 거듭 말했다. 해외여행이라는 걸 거의 하지 않았던 그는, 놀랍게도 의 배경지인 이곳 하동 악양 땅조차 작품을 완간한 뒤에야 처음으로 밟았다는 게 아닌가.
‘박경리문학관’은 박경리라는 거목을 하나의 풍경과 세계로 새삼 눈여겨 바라보게 하는 재료를 제공한다. 박경리는 자신을 추켜세우는 기념관 명색을 극구 꺼렸다. 그러나 그를 기리고 그리는 사람들에겐 흡족한 선물일 수밖에.
박경리문학관 관람 정보
주소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길 79 관람시간 09:00~18:30
관람요금 성인 2000원 / 청소년·군인 1500원 / 어린이 1000원
※박경리문학관은 하동 최참판댁 안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