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손자가 이제 갓 돌이 지났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사랑스러운 네 살배기 손녀에 이은 둘째 아기다. 첫 손녀 때는 며느리가 제날짜에 맞춰 순산하고 산모도 건강해서 모유 수유로 아기를 키웠다.
요즘 몸매 걱정으로 젖을 먹이지 않는 엄마도 있다는데 엄마 품에서 젖을 먹고 있는 손녀를 볼 때마다 마음이 흐뭇하고 며느리가 대견했다. 그래서인지 손녀는 정말 뽀얗고 예쁘게 아픈 곳 없이 잘 자랐다. 둘째 아기는 예정보다 보름 가까이 먼저 세상구경을 나왔다. 예정일보다 훨씬 일찍 낳아서 아기는 2kg의 매우 작은 몸이었다.
재미있는 건 아직 2주일 정도 예정일이 남아서 필자가 동창들과 대만으로 여행을 떠난 일이다. “설마 내가 여행 간 동안 아기를 낳지는 않겠지?” 농담처럼 이야기했고 며느리도 잘 다녀오시라고 했다.
떠나던 날 공항에서 안부 인사까지 받았는데 대만에 도착한 날 저녁 손자를 낳았다는 메시지가 왔다. 친구들은 모두 대만 동이 축하한다며 한바탕 웃었다. 내가 같이 있어 주지 못해 어쩌냐고 걱정했더니 시어머니보다 친정엄마가 옆에 있어주는 게 더 좋을 것이라고 위로해주었다. 며느리도 친정엄마가 옆에 계시니 걱정하지 말고 재미있게 놀다 오시라고 전화해 왔다.
그렇게 예정일보다 일찍 나온 우리 아기는 표준미달의 체중으로 가녀린 팔다리가 보기에 몹시 안쓰러웠다. 설상가상 평소 건강하던 며느리가 이번엔 산후 고혈압 증세를 보였다. 출산 후부터 혈압약을 처방받아 먹으니 아기에게 젖을 줄 수가 없었다. rm 작은 아기가 젖병을 물고 자랐다. 볼 때마다 내색은 못 했지만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무럭무럭 잘 자랐다. 어느 날 아들 집에 갔더니 소포가 왔는데 그 안에 당근 감자 달걀 등 식재료가 조금씩 들어 있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우리 손자에게 나라에서 지급한 유기농 먹거리라고 한다.
예방접종으로 병원에 간 우리 손자는 키와 몸무게, 머리 둘레가 또래의 다른 아기들보다 작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런 아기들에게 잘 자라라고 국가에서 보내주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일찍 태어나기도 했고 게다가 엄마 젖을 먹지도 못했다는 생각에 매우 속이 상했는데 이런 제도가 있어 정상이 될 때까지 이 같은 유기농 제품을 받는다 하니 좀 위로가 되었다. 우리나라에 이러한 복지제도가 있었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다. 이 복지 혜택을 우리 손자가 볼 줄은 몰랐다. 이런 제품을 받지 않는다 해도 튼튼하게 잘 크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이긴 하다.
우리 아기는 분유와 유기 농산품을 받고 있다는데 보건소마다 지급되는 품목은 다를 수 있다고 한다. 보통 한 달에 쌀 1.4kg, 감자 750g, 달걀 30개, 우유 200ℓ짜리 60개, 검정콩 300g, 김 90g, 당근 540g의 유기농 농산물이 지급되며 이 제도의 명칭은 영양 플러스 사업이다. 만 6세 미만의 영아에게 해당하고 저체중의 영양 위험 보유 아기에게 지급되며 사는 동네의 보건소에 신청하면 받을 수 있다.
영양 플러스 사업은 가구 규모별 최저 생계비 대비 200% 미만 임산부 및 영 유아 중 영양 위험요인 (빈혈, 저체중, 성장부진, 영양섭취불량 등)을 가진 대상자에게 영양교육 및 상담을 시행하고 보충식품 패키지를 제공하는 사업이다. 해당 서류를 준비해 관내 보건소에 신청하면 된다니 아기엄마들은 꼼꼼히 살펴보고 혜택을 받으면 좋을 것이다. 필자가 아이를 키울 땐 그런 정책이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나라에서 아기들을 위한 복지정책을 잘 펼쳐주고 있는 듯해서 뿌듯하다.
각 지역 보건소에서 하는 교육도 받아야하는데 언젠가 손자를 안은 며느리를 따라 보건소 교육에 참여해 보았다. 아기의 건강과 발달에 대한 유익한 정보를 알려주었는데 고만고만한 아기들을 안고 온 젊은 엄마들로 교육장이 가득 찼다. 옆자리의 예쁜 여자아기를 어르고 있는 젊은 엄마에게 영양 플러스 사업에 대해 어떤 생각인지 물었더니 아기에게한 양질의 먹거리를 받고 이렇게 필요한 교육도 받을 수 있어 즐겁고 감사한 마음이라고 했다. 표준미달 아기들을 위해시행하는 복지제도이니 해당하는 아기는 꼭 받아서 튼튼하게 자랐으면 한다. 포동포동 잘 자라고 있는 우리 손자가 빨리 표준이 되어서 이 혜택이 끝나면 더 좋겠다.
아버지가 큰형 집에서 분가하기 전인 1956년 봄빛이 찬란한 4월 말에 필자는 태어났다. 찻길도, 전기도 없는 북한강 변 오지 강 마을이였다. 넉넉하지 않은 강촌의 아이는 끼니를 걱정할 정도의 궁핍과 결핍을 껴안고 살아야만 했다.
예닐곱 먹었을 때부터는 부모님이 논밭에 일 나가면 동생들 등에 업고 소 풀 뜯겨 먹이려 풀밭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드디어 초등학교에 다니게 됐는데 툭하면 조퇴나 결석을 했다. 4명의 동생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는 십오 리(약 5.89㎞) 거리였는데 학교에 갈 때는 산길을 따라 고개 넘어 달렸다. 중학교는 북한강 건너 면 소재지로 통학하는 바람에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강폭 수백m의 강을 건너야 했다. 이 때문에 자연스레 팔뚝엔 근육이 쑥쑥 붙었다. 고등학교는 40리 밖이어서 학교 근처에서 자취했다. 당시 필자는 주말마다 반찬통을 메고 오고 갔기에 다리가 튼실해졌다.
어릴 적 가난 때문에 할 수 없이 한 고역 덕분에 필자 체력은 완전 최고이었다. 중학교 입학시험 체력검사 때는 턱걸이를 15회(만점 8회)를 했고, 각종 모임 때 팔씨름 내기하면 거의 이겼다. 군대에서도 개인 전투력 평가에서 거의 만점을 받을 수 있었다.
◇ 학창시절
1963년 3월 나이 8세 때 소청조각 몇 겹 접은 코 수건 가슴에 달고 큰집 사촌 누나를 따라 시오리 밖의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한글도 깨치지 못한 채였을 것이다. 그래도 부지런히 동네 누나, 형들 쫓아 산 고갯길을 넘나들었었다.
이렇게 힘든 통학 길이고 한글도 미리 배우지 못했지만 필자는 공부를 제법 잘했다. 간직하고 있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생활통지표’를 보면 지금도 흐뭇한 혼자 웃음이 솟나 오곤 한다. 담임선생이 보호자에게 보낸 말이 “아들 잘 두셨습니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입니다” 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착실하고, 말 잘 듣고, 온순한 어린이였다. 그래서 공부든, 학교생활이든 모범 그 자체였다. 아버지, 어머니가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우등상장과 반장 임명장, 각종 표창장과 상장을 간직하고 있다가 필자에게 준 걸 보면 부모도 필자를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 같다.
산길로 초등학교에 다니던 필자는 고학년이 되어서는 가끔 노 젓는 배를 타고 학교를 오가기도 했다. 꽁보리밥 도시락에 무장아찌가 주된 반찬이었던 관계로 지금도 아욱국과 무장아찌는 싫어한다. 5학년 때는 6학년 상급생들과 같이 서울,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처음으로 검정운동화 일명 ‘스파이크’를 신어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가진 사진 중에 가장 어린 시절의 사진이다.
69년 3월 입학시험과 체력장을 거쳐 북한강 건너 면 소재지 중학교로 진학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는 동네 형한테서 물려받은 거였으나 자기 책가방을 처음 갖게 되었고 책 보자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동네에서 대여섯 명이 한배를 타고 강을 건넌 뒤 5km를 더 걸어서 통학해야만 했다. 중3 때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는 몇몇 친구들은 선생으로부터 ‘완전정복’ 시리즈 참고서로 과외를 받는 모습이 무척 부럽기도 했었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려 하니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부모님이 망설여 입학원서에 도장을 찍어주질 않았다. 울며 조르고 다짐을 하여 또 다른 면 소재지에 있는 40리 밖의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72년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1학년 1학기는 일단 먼 친척 집에 하숙했다. 한 달에 쌀 네 말을 주면서 어려운 공부를 이어갔다. 공업고등학교이다 보니 실습 조교와 학교 잡일꾼 일을 하면 학비를 절감할 수 있는 장학제도가 있었다. 그래서 1학년 2학기부터 학교 기숙사로 들어가 일명 ‘전공생’으로 남들의 1/3 정도 학비로 부모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 했었다. 지금까지의 필자의 생애 가운데 두 번째로 힘들었던 시기가 아닌가 한다.
◇ 청년기(20대)
75년 2월 고등학교를 어렵게 졸업하고 스스로 대학에 진학해 보려고 서울의 조그만 독서실에 사환으로 들어가 청소와 관리를 해가며 공부했다. 독학으로 공부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입학 예비고사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다. 그리고는 경기 성남시 상대원동 서울왕복 시내버스 종점에 화로 드럼통을 놓고 군고구마 장사를 시작했다. 도시생활을 이어가며 먹고 살기가 만만치 않았다. 76년 3월 26일 군대나 빨리 다녀올 생각으로 수원병무청에 들렀다. 그런데 수원병무청 민원실 창구가 가니 가타부타 설명도 없디 “대한민국 1등 부대이니 입대해라”고 하는 장교가 있었다. 그래서 지원서 쓰고 1차 체력검사를 받은 뒤 서울 청량리역에서 군용열차를 탔다. 그런데 열차가 도착한 곳은 설악산 줄기 어느 골짜기였다. 바로 그 부대는 휴가, 외출, 면회 없는 특수부대였다. 이곳에서 33개월여 박박 기어야 했다. 생애 가장 힘든 시기였다. 6월 말 한여름과 12월 말 한 겨울에 수행했던 천리 행군 다섯 번, 공수낙하 훈련 및 점프, 야간침투 훈련 및 은신 잠복 등을 부대 모토인 ‘음지에서 싸워 이기고 양지에서 영광을 누리자’는 신념 아래 힘들게 이겨 내야 했다. 78년 1월 고향의 친구로부터 드디어 우리 동네에 전깃불이 들어 왔다는 편지소식을 들었다.
79년 1월 전역하여 집에 돌아와 보니 청평댐 수문 보강 공사로 강물이 완전히 빠지고 강바닥이 다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수력발전소 댐으로서 최초의 완전방류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해 3월초 둘째 남동생 고등학교 입학 짐 보따리를 들고 친척 집에 하숙을 시키러 들렸다가 신문에서 한전 채용공고를 보게 되었다. 학교 때 교재 및 참고서와 일반상식 책을 구입하여 준비한 결과 운 좋게 합격하였다. 7월에 신입사원반 교육에 입소하여 한국전력공사 직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동생들은 계속 돌봐야 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 중학교 3학년이었던 두 여동생을 첫 발령지인 강원 춘천시로 전학시켜 돌봤다. 그리고 둘이 결혼하여 출가할 때까지 데리고 있었다. 주말이면 청평 고향 집에 들러 부모님 농사일도 도와 드려야 했다.
그런데 83년 8월 15일 아버지가 갑자기 병이 생겨서 춘천시의 내과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서울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그래서 서울로 이송시켰다. 그런데 서울 병원에서 물어보니 큰 병이었다. 할 수 없이 어머니가 이틀에 한 번꼴로 서울로 오르내리며 병약해지는 아버지를 돌보아 드려야 했다.
그러다가 9월 29일 아버지는 병마에 쓰러지신 지 45일 만에 갑작스레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49세의 젊은 나이에 어머니와 우리 5남매를 남겨 두고 먼저 하세(下世) 한 것이다. 세상이 다 꽉 막히는 암담함 속에 무겁고 커다란 짐을 지어야 했다. 그때 내 나이 28세였다.
◇ 중년기(30~40대)
당시 중. 고등학생이던 두 여동생과 19평 주공아파트에서 어려운 살림을 이어갔다. 회사 직원의 소개로 서울에 있는 회사 내 여직원을 소개받아 데이트하다가, 1986년 10월 나이 서른한 살에 그 당시 관습으로는 늦장가를 갔다. 순하고 착한 아내를 맞아, 오 남매 고향 집의 홀어머니를 중심으로 오순도순 살아보려고 애썼다.
공부를 외면하고 초등학교만 졸업한 후 제멋대로 살아가던 남동생이 40세가 되도록 결혼을 못 한 채 고향 집으로 귀향을 해왔다. 주위의 소개로 중국 재중동포 아가씨를 제수씨로 맞아들였다. 그러다 3년도 채 안 되어 제수씨가 못 살겠다고 이혼 소송을 하게 되었고 1997년 3월 법원의 판정으로 이혼 절차를 거치게 된다. 동생이 객지에서 제멋대로 살며 돌보지 않은 몸 건강이 점점 나빠지면서 간경화가 악화하여 그해 7월에 사망하게 된다.
87년 8월엔 필자의 아들이 태어났고, 2년 후엔 딸이 태어나 우리 집은 네 식구가 됐다. 그 후 홍천으로 양구로 전근 다니며 36년 8개월 한전에서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 갱년기(50대)
55세 때 갑작스러운 가슴의 통증을 느껴 종합병원 심장내과를 찾았다가 ‘협심증’ 진단을 받고 두 군데의 관상동맥에 스텐트 시술을 받아야만 했다. 선천적으로 잇몸 건강이 원래 안 좋은데 50대를 넘으면서 급격히 나빠진 치아 때문에 음식 섭취가 불편하여, 장기간에 걸쳐 9대의 치아에 대하여 임플란트시술을 하게 되어 커다란 경제적 지출도 발생하였다.
2014년부터 춘천 소재 대학의 평생교육과정의 시 문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2016년 2월 방송통신대 졸업 직후 공부를 심도 있게 하고자 서울디지털대학 문예창작과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쉬지 않고 공부하며 살아가려는 생각이다. 육체는 늙어 가면 많이 약해지고 쓸모없게 퇴화하겠지만 정신적인 노쇠는 그런대로 유지하며 이어갈 수 있다고 본다.
◇ 미래 (60세~ )
모든 인간은 출생과 동시에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인 성장, 성숙, 노화의 단계를 거쳐 일생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런데 노화가 시작되면 개인과 주위의 사회구성원들과의 끊임없는 상호 관계가 중요해진다.
필자가 태어나서 지금까지는 부모님과 오 남매와 큼직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 의지하며 도움 주며 화목하고 다정하게 잘 살아왔다. 자식 둘은 결혼시켜 가정을 꾸리도록 만들어 주었고, 같은 도시 내에서 가깝게 살면서 자주 오가는 것 또한 행운이 아닐까 한다. 돌아오는 10월엔 손자가 태어나고 할아버지가 될 거란다.
지금은 다니던 직장의 정년퇴직으로 말미암은 경제적 소득의 감소로, 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특히 이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건강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제는 필자와 아내의 건강관리와 유지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고향의 노모도 더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꿈은 인생에 장마가 지고, 눈이 올 때마다 점점 깊숙하게 땅속에 처박힌다. 하지만 실종된 꿈을 찾지 않으면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꿈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고, 어릴 적부터 무엇을 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는지 찬찬히 살펴보면 꿈이 보인다. 이렇게 자신을 후벼 파서 꿈을 찾다 보면 옵션이 생기고, 다채롭고 재미나는 삶을 살 수 있다. 재미있게 산다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잘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 인생을 한 번 글로 서봤다.
◇꿈의 발원지
초등학교 때 신작로로 등ㆍ하교했다. 역고개를 넘어 역말다리를 건너 다시 올망졸망한 가게들이 즐비한 읍내를 지나 산 아래 있는 학교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당시 신작로 양옆으로는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가끔 트럭이 지나갈 땐 먼지가 풀풀 날리어 사람이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충북 괴산군이 고향이다. 도서관은 교과서에서 나오는 그림에서 봤을 정도의 촌이다. 다행스럽게 학교와 집의 중간 정도에 살는 임명희라는 친구가 있었다. 명희 아버지는 필자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동화책과 위인전을 전집으로 사놓았다. 그 집은 여러 형제가 있지만 그 누구도 책을 즐겨 읽지 않았다. 하굣길이면 늘 친구 집에 들러 책을 팠다. 처음 ‘알프스 소녀’를 읽고 하이디에 빠진 후로 괴산의 하이디라고 생각했다. 책에 흠뻑 빠져 전집을 몇 번씩 읽었다.
그 시간은 자신만의 시간이어서 행복했다. 명희는 깔깔거리고, 팔짝거리며 고무줄놀이를 하고 필자는 마루 끝 구석에 앉아 고개가 아프도록 책을 읽었다. 해가 저물고, 그 집 식구들 저녁상이 들어올 때까지도 죽치고 읽었다. 천국이었다. 명희 어머니가 “영희야, 이제 해가 저물었다. 집에 가야지”라고 해야 그제야 일어나 땅거미 내린 1.5㎞의 신작로를 마치 책에 나오는 주인공이 된 듯 사뿐거리며 걸으면서 중얼거렸다. ‘책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꿈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면서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발견, 다시 꿈꾸다
늘 필자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한때는 역사가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모든 것이 다르게 흘러갔다. 매우 실망했고, 무기력해졌다. 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화가도 되고 싶었다. 그것도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작가 꿈을 꾼 적도 있었으나 마찬가지였다. 몇 년 동안 아무 생각 없는 주부로 살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위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작가로서 자서전 쓰기 전문가로 나서게 되었다. 작가라는 토대 위에 ‘자서전 쓰기 전문가’라는 건물을 올린 것이다. 또 그것은 재능이라는 골조로 지어졌고 취향이라는 마감재로 모양을 갖추었다.
자신만의 이야기가 담긴 자서전은 특별함을 준다. 삶 속에서 나온 이야기이기에 진솔하고, 진실한 만큼 자신을 대신해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말해 줄 수 있다. 또 세월의 경험이 축적돼야 쓰는 것이 아니라 더 채워야 할 게 많고 더 부족함을 느낄 때 쓰는 것이다. 이렇게 쓰다 보면 꿈이 구체화하게 된다. 많은 사람과 필자가 자서전을 쓰며 받았던 느낌을 공유하고 싶다.
필자의 어릴 적 꿈은 여장군이었다. 군인을 거느리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고 싶었다. 또 작가도 되고 싶었다. 군인이 되고 싶은 것이 겉 꿈이었다면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은 속 꿈이다. 첫 번째 꿈은 이미 사라졌고, 두 번째 꿈은 얼마든지 꿀 수 있다. 또 어릴 때 그림도 그리고 싶었는데 매주 수요일 밤이면 누드크로키를 한다. 그 시간은 행복하다. 지금은 글쓰기 강사와 집필, 그림에 열중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꿈이 아니다. 그냥 별이다. 그래서 필자는 '내가 누구인지 조금씩 더 나가보자. “내 꿈은 말이야 ”라고 시작하는 화법으로 꿈을 찾아가는 중이다.
꿈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내 몸이 체득해서 토해 내는 것이다. 또한 찾는 것도, 쇼핑하는 것도 아닌 매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기와집 맏손녀
1956년 음력 섣달 보름, 밝게 비추는 달 아래서 저녁 먹고 한참 후에 필자는 태어났다. 오봉산 봉우리가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산 아래, 앞에는 동진천이 흐르고, 1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아버지는 외아들이었기에 첫 손녀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쁨이었다.
조부모, 부모, 고모, 일하는 아재들, 부엌에 밥하는 언니, 애 보는 사람 등 대식구가 모여 살았다. 애보는 사람이 필요했던 이유는 필자의 형제가 칠 형제여서다. 필자 느낌으론 학교만 다녀오면 갓난아기의 울음이 들린 것 같았다. 가방을 마루에 던진 채 심통이 나서 뒤 곁으로 확 달려가곤 했다.
◇아버지 기억
색동저고리를 입고, 초등학교 입학식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추운 봄에 역고개를 넘어 학교에 가고 있자니 “주머니에 손 넣고 가지 마라” 하면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탄 채 쌩하고 눈길을 지났던 것도 생각난다. 필자는 발을 동동거리며 그냥 걸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 아침이면 학용품 살 돈을 달랬다. 아버지는 잔돈이 없으면 읍내까지 가서 바꿔다 주었다. 가계부는 아버지가 기록했다. 필자에게는 별말이 없었고 필자도 어려워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내셔널라디오를 사왔다. 저녁이면 온 동네 사람이 모여들었다. 필자는 라디오에 아주 작은 사람들이 있는 줄 알았다.
3학년 때는 아버지가 네모난 빨간 비닐 책가방과 쑥색의 슬리퍼를 사 왔다. 슬리퍼의 뒤축에 자갈이 수시로 박혀 그것을 빼내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밤색 코르덴 바지를 뜯어 타이트스커트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집에 싱거 미싱이 있었고, 아버지도 미싱 기술이 있었다.
6학년 때는 주름치마에 스트라이프 무늬의 봄 스웨터를 사 주기도 했다. 그걸 입고 서울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서울 김포국제공항에 가서 수세식 변소를 처음 사용해 보았다. 사용 방법을 몰라 이곳저곳을 눌러 보고 물이 쏴 나오자 아이들과 함께 놀랐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 후 양복 기술을 배웠다. 이태 정도 기술을 배우다가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주농고와 충북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산림청에 근무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아버지는 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났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는 군대에 가면 대가 끊기게 되니 산속에 숨어 있었다. 할머니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아들은 6세 무렵, 무를 묻어 두었던 구덩이에 빠져 숨졌다. 하나 남은 아들을 애지중지하느라 쌀 두 가마니를 들여 군대에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로 아버지는 별 할 일이 없어서 책을 뒤적이거나 바깥마당 한쪽에 돼지를 길렀다. 누에와, 양봉도 했다. 잉크를 찍어 노트에 뭔가를 쓰는 것도 좋아했다. 아버지는 필체가 좋았는데, 필자 보고 “글씨가 그게 무어냐”며 자주 타박하였다. 농사를 적극적으로 해 볼 생각은 없는 듯했다.
고향에서는 조부모가 중농, 아버지는 대학을 나오고, 겉으로 보기에는 부러울 게 없었다. 다만 가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한패가 되어 어머니를 나무라곤 했는데 그게 유일한 분란이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옆구리에 보따리를 끼고 나갔다가 해가 넘어갈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필자는 처음에는 울고불고했는데 나중에는 외면해 버렸다.
◇그 오해와 진실
아들은 남이다. 고로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아들이 자기 아내 편을 든다고 필자는 당장에 보따리를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예전 필자 남편은 부모 편만 들고 효자이더니, 이제 아들은 마누라 편만 드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난 그래서 불행해’ 라고 생각하면 끝없이 불행해 진다. 그래서 남편이 부모편만 들었을 때 마음이 상했던 걸 떠올렸다. 그 속상함을 며느리가 가져야 하는 거는 더 안 될 일이다. 남편은 자기 부모에게 잘했으니 효자였고, 아들은 자기 부인에게 잘하니 괜찮다고 마음 다잡았다.
◇둘째 아들 1
필자는 둘째 아들은 스스로 자라게 키웠다. 그래서 이 아이는 매우 주체적이다. 유치원 때의 일이다. 봄에 심어 놓은 고구마를 캐 오는 날이다. 다른 아이들은 한두 개만 가지고 왔으나 아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큰 비닐봉지가 터지도록 질질 끌고 왔다. 물론 주인아저씨가 가지고 가고 싶은 만큼 갖고 가라고 했지만 가져올 수도 있고, 안 가져올 수도 있는 그 순간 아들은 이렇게 스스로 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는 모든 학용품도 스스로 선택해서 사도록 했다. “친구들은 어떤 회사 물건을 사 왔니”, “네가 보기에는 어떤 것이 괜찮아 보이니”라고 한 뒤 돈을 주었다. 그랬더니 물건을 잘 골라왔다.
학교에서 폐휴지를 가져오라고 하면 위층에 사는 외동아이는 그 엄마가 나서서 난리다. 학교까지 날라다 주고, 복도가 시끄럽게 한바탕 소동이다. 아들은 만약 집에 신문지가 없으면 경비아저씨한테 사정이라도 해서 지하에 갖다 둔 신문지를 바퀴 달린 가방에 넣고 혼자 끙끙대며 끌고 간다. 애처롭지만 그냥 두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보이스카우트를 하려고 할 때도 “엄마, 보이스카우트 해보고 싶어”라며 “보이스카우트는 단복 입고, 사회에 봉사하는 것을 배우는 첫걸음”이라며 필자한테 설명했다. 그래서 “그래 그럼 한번 해 봐”라고 했더니 아들은 3년 동안 스스로 열심히 했다. 운동장에서 1박 2일 야영훈련 때도 필요한 것 외에는 스스로 물건을 준비하도록 했다. 그랬더니 끝난 후 아이들이 버리고 간 물건 중 먹을 만한 것은 전부 집으로 한 보따리를 가져왔다. 대견했다.
5학년 때는 자전거를 사 달라고 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자전거를 요구하면서 시장조사 뒤 비교 분석해서 설명했다. 그래서 한술 더 떠 “네가 가서 사와라”라며 13만원을 주었다. 그랬더니 서비스품목까지 모두 챙겨왔다. 자기가 골라온 자전거라 그런지 애착을 가졌다.
6학년이 끝나고 초등학교 졸업식에 갔더니 스카우트활동을 잘했다고 교육감상을 받았다. 그런데 담임교사가 “진우 어머니세요. 어쩜 학교를 안 찾아오세요. 원래 진우가 단장감인데 할 수 없이 학교를 자주 오는 어머니 중의 아들을 단장으로 시켰어요”라고 했다. 하지만 필자는 “네 괜찮아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란 대답만 했다.
중고생이 되면 학부모들은 학교 앞에까지 자가용을 끌고 가서 모두 픽업하느라 난리다. 그러나 필자는 가지 않았다. 버스 네 정거장 거리였다. 혼자서 해결하라고 했다. 왜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없었겠는가. 잘못하더라도 아이들과 다투더라도 혼자 해결하도록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주시는 하고 있었다.
아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학원에서 수업이 끝난 후 칠판을 지우고 청소를 해 놓으면 학원비를 면제해 주겠다고 하니 그 일을 하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다, 근면, 성실성까지 있는 아이다.
아들이 빠져 있는 게 하나 있었다. 게임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얼마나 몰두하든지 ‘어주 구리, 이것 봐라’ 했다. 이때는 필자도 속이 좀 탔다. 전국게임회장이 되어 게임머니를 주무를 땐 특히 그랬다, 그러나 필자는 참았다, 되레 ‘어 이놈 봐라, 사업하면 잘하겠네’고 오히려 좋게 봐줬다. 더구나 대학 가서는 거의 안 했다. 안심됐다. 하지만 결혼하고 게임을 다시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며느리가 싫어하니 담배와 게임을 끊었다. 아마 지금은 거의 안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에 가서도 후배와 선배, 교수들과의 관계를 잘 맺었다. 자기한테 자꾸 일을 맡긴다고 투덜댄다. 일을 맡기면 잘해낼 뿐 아니라 믿음이 가서 일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해서도 ‘완급을 조절해 보라’ 고 조언하는 게 전부다. 사실은 필자도 큰아들한테 보다는 작은아들한테 일을 맡기면 안심이 된다.
군대에 복무할 때는 도움을 요청하거나 그럴 때만 대꾸를 했다.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믿음이 있었다. 대신 어머니로서 아들을 향한 기도를 늘 했다. 어머니가 올리는 기도가 대단히 효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운동을 시작한 지 15년 되었지만 도복을 입고 훈련에 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처음으로 한국체대 체육관에 가 보았다, 열심히 군인으로 생활하고 이다음에 퇴직하면 운동을 보급하면서 살아갈 예정. 자기의 인생목표가 뚜렷했다
결혼을 한 지금도 스스로 잘 헤쳐 나가고 있다. 마찬가지다. 상의하거나 어떤 사안에 관해 이야기할 때만 진지한 의견을 교환한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될 수 있으면 간섭을 하지 않으려 매사 애를 쓴다.
◇밤새워 할 부부이야기
찰칵찰칵 엿장수 가위 소리에 골목이 떠들썩했다. 남루한 차림의 어른과 아이들이 그 옆에서 뭔가 호기심에 찬 눈을 굴리고 있다. 엿판을 실은 손수례 아래에는 구멍 뚫린 솥단지, 고무신짝, 철사 토막까지 구경거리가 많았다. 단조로운 시골 마을에 엿장수의 등장은 일종의 문화행사였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기웃기웃. 무쇠 가위를 엿에 대고 치는 모습은 예술이었다.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옆집에 놀러 갔는데 엿장수 가위가 있었다.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엿가위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이웃집 여인은 대뜸 "그 가위 마음에 들면 줄까" 한다. 말이 바뀔까 봐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가위를 받아들고 서둘러 집으로 왔다. 어떤 선물보다 기분이 엄청 좋았다. 퇴근 후 남편이 집으로 왔다. 그런데 “그 가위 어디서 가져 왔나. 당장 버리라”고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닌가. . '엿장수 한 조상이 있나 봐, 왜 그래'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남편은 그냥 “구질구질해서 싫다”는 것이었다. 개포주공아파트 4층, 지금은 분리수거를 하지만 그 당시는 쓰레기를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그냥 투하했다. '쨍그랑'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오메, 아까운 엿가위, 지금도 가위가 눈앞을 아른거린다.
필자 집에는 골동품과 민속품이 즐비하다. 바라보고 있으면 편안하고 좋으니까 모든 것이다. 심란한 마음이 들 때 먼지를 닦으면서 만지작거리면 얼마나 행복한지. 며칠 전 일이다. 남편이 소파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 보더니 "이사를 하게 되면 저런 것들도 가져갈 거야"라고 민속품을 삿대질하면서 다그쳐 묻는다. 필자는 이에 “물론이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더는 대꾸를 하지 않고 방으로 슬슬 가더니 잠자리에 들었다. 필자 부부는 잘해 보려고 하거나, 좀 더 친하게 지내보려 노력하면 할수록 결국은 티격태격 싸운다. 의지와 사고방식이 참 많이 다르다.
어느 날, 무릎을 탁 쳤다. ‘본처가 아닌 첩처럼 살자’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필자는 달라졌다. 이야기 중에 이상한 기류가 감지되면 ‘아니 여보, 왜 이리 졸리지’ 핑계를 대며 안방으로 들어가 거기서 불을 켜 놓고, 할 일을 하든가 잠을 청하게 되었다.
필자는 남편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한다. ‘그랬군, 이제 고생 끝났네, 대단해요’ 하는 추임새까지 넣어주면서 말이다. ‘미주알고주알’ 해봐야 누더기가 되기에 십상임을 몸의 체득을 통해 알고 있다.
◇인수봉 정상에 오르다
인수봉을 오르고 싶었다. 그래서 북한산 바위를 오르는 연습을 했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동호회에 참가해 원효길, 우정1ㆍ2길. 인수AㆍB길에서 바위에 손을 짚어 기어올랐다. 한 발자국만 헛디디면 그대로 가는 거다. 의도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걸어 본 사람만이 그 맛을 뭐라고 말할 수 있다.
주요 봉우리인 인수봉, 백운봉, 만경대 세 봉우리가 삼각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삼각산이라고 불렸다. 인수봉은 서울 강북구 우이동과 경기 고양시에 걸쳐 있는 삼각산 세 봉우리 가운데 하나. 세 봉우리 모두 산 정상에 바위 암반이 그대로 노출된 모양이라 산 아래서 올려다보아도 ,직접 올라도 그 위엄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산이다. 특히 인수봉은 81m가 매끄러운 화강암 봉우리다.
필자가 이 봉우리에 도전한 그 날은 눈발이 스산하게 날리며 찬바람이 제법 불었다.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도 있었으나 그냥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 등반을 시작하면 물러날 곳은 없다. 그냥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물러나면 다른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자신을 타이르고 윽박질렀다. 그리고 악전고투 끝에 정상에 올랐다. 이미 많은 사람이 올라와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상에 오른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필자 팀은 산봉우리의 기쁨을 느끼며, 줄에 의지하여 모두 하산했다. 그때 로프 줄에 엉킨 젊은 두 남녀가 줄을 풀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다. 죽음과 삶은 한 끗발 차이다. 사람들은 사고를 보고도 또 올랐다.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인수봉에 이르기 위해 그 많은 고통을 감내하고 훈련했다. 이 세상에서 줄을 타고 인수봉에 오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인생에 잊지 못할 한 편의 드라마였다.
변종경(卞鍾敬·68) 국일제지(주) 사장에겐 ‘촉’이 있다. 신규 사업을 하면 길이 열린다. 만년 적자에 허덕이던 기업도 그가 손을 대면 황금알을 낳는다. 사람들은 그의 촉을 부러워하고 타고난 기획전략가라고 인정한다. 그런데 그의 촉이 이번엔 제조업에 뻗쳤다. 60대 후반의 나이에 특수지 제지업체 국일제지(주)를 드라이빙하는 중책을 맡았다. ‘아직 제지업계 초보’라고 자신을 겸손하게 소개하는 그는 삼성맨으로서, 그리고 전문 경영인으로서의 경험을 살려 국일제지가 나아가야 할 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안주하는 삶은 재미없다”고 말하는 그의 인생과 재미있는 일, 그리고 추구하고 있는 미래에 대해 들어본다.
변종경 사장의 이력은 화려하다. 서울대와 UCLA 대학원을 졸업하고 삼성물산 경영기획부장, 삼성그룹 비서실 임원, 사회공헌위원회 부사장 등 삼성맨 시절을 거쳐 삼부토건그룹 계열 (주)신라밀레니엄 대표이사 등을 역임한 그는 올해 초 국일제지(주) 사장으로 선임됐다.
‘고희록’ 써 경험과 지혜 전수하고파
사장으로 취임할 때 마침 그의 나이는 60대 후반에 들어섰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은퇴해도 여러 번 은퇴했을 나이, 그는 김형석 교수의 말을 빌려 이제야 자신이 전성기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원로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96세의 나이에도 강의 등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65~75세의 나이가 쓴맛 단맛 다 보고 인생의 소중함을 음미할 수 있는 인생의 황금기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지금 김형석 교수가 말씀한 인생 황금기에 3모작을 하고 있어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종전에는 매주 수요일 등산, 주 1회 골프 등으로 건강관리를 했으나 요즘에는 매일 아침 20~30분 시트업 등 스트레칭을 하고 주말에 등산이나 골프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건강관리는 킬리만자로,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했을 정도로 여행을 좋아하는 그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여행 마니아는 못 되고요, 등산이나 트레킹은 자주 했지요. 여행은 새로운 풍광과 문물을 통해 색다른 경험을 하는 것이 좋고요. 등산이나 트레킹의 경우 목표에 도전하고 정상에 이르렀을 때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지요. 그리고 등정 과정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찰할 시간을 갖는 것도 보람이지요. 지난번 킬리만자로 등정 시에는 그동안 내 자신을 되돌아보며 70세가 되면 그동안의 삶을 담아 을 써보기로 한 것이 수확이지요.”
살면서 지켜야 하는 3가지
은 제목 그대로 70세에 이른 자신을 돌아보며 쓰고자 하는 책이다. 베스트셀러가 되겠다는 욕심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후손에게 자신이 평생 배운 지식과 지혜를 전수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70 가까이 살면서 꼭 지켜야 할 3가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책임지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올바른 가치관과 도덕성을 가지고 신뢰를 지키는 삶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입니다. 영국 속담 ‘인생의 평판을 쌓는 데는 30년이 걸리지만 평판을 잃는 데는 30분이면 충분하다’가 이를 잘 대변해준다 할 수 있겠지요.
둘째는 경제적으로 생활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돈이 수단이 될지언정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자신과 가족을 건사할 최소한의 경제적 여유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베푸는 것도 마음만이 아니라 금전적으로 베풀어야 효과가 높습니다. 우리 속담에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도 있습니다.
셋째는 주변과 사회성을 잘 유지하는 것입니다. 저희 세대는 대체로 앞만 보고 달려와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게 후회됩니다. 가족에게도 미안하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그랬고요. 요즈음은 가족, 친구들과 어울리려 노력해 많이 좋아졌지요. 평소부터 가족, 친구들에게 잘해야 노년에도 관계가 좋지 않을까요.”
기업은 복합적 가치를 지닌 조직
그는 최근 새롭게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각종 회의를 주재할 때 오프닝 멘트를 통해 자신이 경험했던 노하우 등을 간단한 사례 등과 연결시켜 전수해 주고 있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
“물론 사전 준비 등으로 힘들기도 하지만 임직원이 경청하고 활용할 때 보람을 느낍니다. 에 나오는 ‘가르치면서 절반은 본인이 배운다’는 글귀대로 저도 준비하며 또한 배웁니다. 최근의 예는 ‘역발상 아이디어’를 강조하며 2006년 독일 월드컵 축구대회 당시 한국과 프랑스가 1:1 무승부일 때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 선수가 후반 46분 경고 누적으로 퇴장 당한 뒤 홧김에 라커룸 사물함을 발로 차 찌그러졌는데 라이프씨티 축구경기장 측에서 배상 청구을 검토하다 오히려 찌그러진 사물함에 금테를 두르고 11유로 입장료를 받고 관광객을 유치해 성황이라고 얘기해준 게 생각나네요.”
그가 현역 경영자임을 다시금 느끼게 만드는 부분이다. 그는 경영에 있어 기업 자체적으로 보면 수익 가치가 중요하겠지만 국가 및 사회와의 관계적 측면에서 볼 때 고용 및 인적 자본 형성, 기술 축적, 양질의 제품 및 서비스 제공, 사회공헌 등 사회적 가치 기여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경영해야 한다고 보고 있었다. 기업이야말로 복합적 가치를 지닌 조직이라는 생각이 이유였다.
“경영자의 길을 가지 않았더라면요? 글쎄요. 고위 관료나 정치인의 길을 갔을지도 모르지요. 저는 고등학교 때 이과반이었는데 대학은 문과를 택했지요. 당시 주변에서 저에 대해 나름 논리적이고 언변이 좋다고 부추겨 대입 때는 문과를 지원했습니다. 사실 정치에도 관심이 있었고요. 사주에도 정치를 했으면 ‘한 인물’ 했을 거라고 하네요. 그러나 요즈음 세태를 보면 정치 지망 안 하기를 잘한 것 같고요.”
회사의 미래를 위한 길 닦는다
그는 자신을 ‘제지업계 초딩’이라고 겸손하게 낮춰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삼성그룹의 구조조정본부의 임원이었다. 기업과 경영의 엔진 구조를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경험과 지식이 그의 커리어에서부터 보여지고 있었다.
1994년 삼성물산에서 삼성그룹 회장비서실로 옮겨 삼성자동차 사업을 성공적으로 진입시켰던 때를 떠올렸다. 그는 당시 삼성이 상공부로부터 자동차 기술도입 신고서를 1차 반려받은 후 비서실에 차출되어 전략지원팀을 만들었고 6개월 뒤 삼성자동차 사업을 성공적으로 진입시켰다. 10여년간 삼성그룹 회장비서실에서 열정과 집념을 갖고 그룹과 회장을 보좌하던 때를 회상하며 새로운 도전에 최선을 다해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간 업무 파악을 통해 회사의 비전을 ‘첨단 정밀 종이로 100년 가는 강한 기업’으로 정하고 선순환적 구조조정, 즉 사업구조를 수익력 있는 기존 품목 이외 부가가치 높은 지종 확충, 영업 인력 확대 등 미래지향적 인력 운용, 쥐어짜기식 경비 절감이 아니라 필요한 것은 과감히 투자하고, 절약할 수 있는 경영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간 본사는 물론 2개 공장 200여 명 전 직원에게 7~8회 경영방침을 설명하고 회식을 통해 공감대를 갖는 기회를 가져 직원들이 ‘한번 해보자’는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어 저 자신도 보람을 느끼고 있고 이와 관련하여, 회사의 미래 토대 마련을 위한 청사진인 중기 계획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노년에 가장 중요한 건 품위를 잃지 않는 것
기업의 체질을 바꾸는 쉽지 않은 미션을 수행 중인 그는 은퇴를 잊고 경영에 매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그가 나이 먹어도 절대로 잃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품위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품위를 유지하려면 조급하지 않고 마음의 여유를 갖는 자세도 중요하고 독서 등을 통해 인격 도야에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며 경제적으로도 여유를 갖고 베푸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이 들어 품위가 있어야 멋도 있고 존경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위해 준비 중인 것들도 있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많기 때문이다.
“취업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트레킹 등 여행을 많이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그리스, 이집트, 터키, 러시아 등을 비롯해 중남미 지역을 여행하지 못해 시간이 나면 몇 년 내에 꼭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2인승 컨버터블 스포츠카를 타고 전국을 일주하는 것이 버킷리스트입니다.”
‘휴가’라는 단어는 언제나 마을을 설레게 한다. 반복되는 일상의 탈출. 며칠간의 탈출이지만 일상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생각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칠말팔초’가 휴가철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꼭 그렇게 방 구하기도 힘들고 바가지도 절정에 달하는 이때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된다. 물론 이 시기는 장마도 끝나고 더위도 절정이긴 하다. 그러나 요즘은 기후변화로 장마기간도 예측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칠말팔초가 되면 나라전체가 온통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맛있는 음식은 맨 마지막에 먹으면서 식사의 행복한 마침표를 찍듯이 필자는 남들이 다 다녀온 늦가을에 휴가를 간다. 아내는 여름 휴가철에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과 휴가를 다녀오기 때문에 늦가을 휴가는 필자 혼자서 간다. 무작정 떠나는 것은 아니다. 매년 나름대로 주제를 정한다. 최근의 예를 들면 ‘추억여행’이 휴가의 주제인 경우 코스는 다음과 같다. 우선 종로 뒷골목에 남아있는 ‘피맛골’ 좁은 골목길을 걷는다. 그 길은 친구들과의 오랜 흑백사진이 남아있는 길이다. 다음날부터는 청평 안전유원지, 남이섬, 강촌, 춘천 김유정 문학관 등을 돌면서 학창시절 엠티 다녔던 추억을 떠올린다.
‘성지순례’ 가 주제인 경우는 전국에 있는 순교지나 멋진 종교건축을 찾아다닌다. 아주 가벼운 차림으로 카메라와 작은 배낭하나만 준비하면 된다. 이렇게 목적지를 찾아다니면서 가을 곡식이 익어가는 논길을 걷기도 하고 시냇가에 앉아 물소리도 듣고 잠자리와 함께 가을 햇살도 즐긴다. 가는 곳마다 음식은 인터넷에서 미리 다 찾아보고 그 지역에서 가장 특별하고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간다. 혼자 다니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침묵여행이다. 아주 느린 걸음으로 이렇게 며칠 다니다 보면 머리가 맑아지고 가슴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최근 어느 장애인 복지관장님과 여름휴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 중에 장애인복지관에서 작년에 시행한 휴가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복지관은 주간 보호시설이라서 아침에 부모들이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데려와서 맡기고 저녁에 집으로 데려가는 시설이다. 매일 그렇게 반복되기 때문에 장애아들의 부모들은 휴가를 떠날 수 없다. 그래서 작년에 복지관에서 아이들을 야간에 맡아서 보살펴 주는 날을 정하고 그 아이들 부모들을 제주도 여행을 시켜 드렸다고 했다. 여행을 떠나는 모든 분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에겐가 아이를 맡기고 부부가 함께 어디 놀러가 본 경우가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징하고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자랑처럼 떠들었던 혼자서 떠나는 나만의 휴가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가 하는데 생각이 미치자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우리는 일상의 당연한 것에 별로 감사하지 않는다. 뭔가 특별하다고 느낄 때에만 그야말로 특별한 감사를 표현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공기처럼 지극히 당연해서 일상에서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것들이 너무도 소중한 경우가 많다. 이제 또 여름 휴가철이 돌아왔다. 물론 올해도 필자는 늦가을 휴가를 떠날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 없이 홀가분하게 일상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설레고 행복해진다. 주변을 돌아보니 올해도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소중하게 생각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애초에 엄두를 낼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올 여름 행선지는 ‘방콕’으로 정하고 서울에서 버틸 작정이었다. 그런데 딸애가 이미 자유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여행에 필자를 끼워준다니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다. 그런데 자유여행은 돈이 많이 든다는 고정관념으로 살짝 걱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리저리 절약할 구석을 찾아본다면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혼자는 이런 재주를 부릴 재간이 없다. 마침 검색과 계획의 달인인 둘째 딸이 있어 그 덕을 톡톡히 본다. 낳았을 때 ‘또 딸’이라 섭섭하고 슬프기까지 했던 그 딸 덕을 이렇게 볼 줄 그때는 미처 상상도 못 했다. 그 애는 하도 검색을 잘해서 우리 집에서는 ‘다이버’라 부른다. 네이버에 운율을 맞춘 별명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돈 쓰는 방법도 우리 때와 다르다. 몹시 아끼면서도 시간과 안락함을 돈으로 대신할 때에는 아낌없이 쓴다. 우리 세대가 2번 할 것을 1번 하더라도 제대로 즐기겠다는 심사다. 그래도 절약할 방법은 여기저기 잘도 찾아낸다. 그것은 검색과 마일리지 쌓기다. 마일리지 쌓기야 우리도 어렴풋이 따라 하겠지만, 검색은 도통 흉내 내기도 어려운 일이니 일찌감치 단념하는 것이 좋다.
간혹 컴퓨터와 씨름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자발적 도움을 줄 때도 있지만, 그것도 그들이 한가할 때 이야기지 코빼기도 볼 수 없이 바쁠 때는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처럼 동행일 때에는 가만히 있어도 알뜰살뜰한 딸의 여행계획에 감탄과 칭찬의 대가만 치르며 따라나서면 그만이다.
우선 우리는 동남아 중 물가가 싼 태국의 방콕으로 여행지를 잡았다. 태국의 하고많은 여행지 중 왜 고작 방콕이냐고 의아해하겠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패키지여행의 단골 메뉴인 코끼리 타기, 악어농장, 게이 쇼, 사원 탐방 등은 이미 다 해보았고 빳따야 푸껫은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우리나라 해변만 못하다. 그러니 편하고 좋은 곳은 우리나라도 서울이듯이 태국도 방콕이다. 약간의 문화적 혜택도 즐길 수 있고 맛있는 음식도 그곳에 있다. 어느 할아버지 말처럼 “해외여행 뭐 별거 있어. 유럽은 성당만 보러 다니고 동남아는 맨 절만 끌고 다니”는 패키지여행에는 이제 좀 신물이 나기도 했다.
비행기와 호텔 예약은 2달 전쯤 하면 거의 1/2 가격이면 된다. 물론 7월 15일부터는 성수기라서 비행기 요금이 오르니 휴가 기간은 그 전에 잡는 것이 좋다. 특히 태국 여행의 경우 팝콘 여행사나 몽키 트레블을 통해 사는 것이 싼 편이다.
여러 날 한 호텔에 묵을 경우 여러 가지 혜택도 끼워주는 프로모션도 까다롭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 어떤 때는 값이 약간 비싸도 프로모션이 많아 더 이익인 경우도 있다. 두 달 후라서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으니 되도록 취소 가능한 것을 고르는 것이 좋다. 취소할 때 위약금이 있나 없는지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변화를 준다고 이 호텔 저 호텔 나눠서 이용하는 것보다 한 호텔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두 호텔을 사용하면 프로모션도 제대로 받을 수 없고 체크인 체크아웃으로 하루를 그냥 까먹기 십상이다. 그 외에도 호텔이나 비행사 결정은 먼저 이용한 사람들의 댓글이 큰 도움이 된다. 방콕에 가서도 검색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유심칩(USIM chip)을 사서 바꿔 끼면 지금 쓰는 휴대전화가 잠시 태국 전화가 되는 셈이다.
아! 이 그칠 길 없는 검색의 자유여행을 나는 다이버만 믿고 떠났다. 그 다이버가 말했다. “세상이 참 많이 변했어요. 어릴 때 만화나 공상 영화에서 보던 것이 다 현실이 되었어요. 제가 늙으면 어떤 세상이 될까요?” “인공지능 로봇이 가이드가 되는 세상이 되면 여행이 더 즐거울까?”
표도로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1821~81)는 러시아 모스크바 근교 빈민구제병원 관사에서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3세 때 기숙학교에 다녔고 이후 상트 페테르부르크 공병사관학교를 다녔고, 16세 때 어머니가 사망하였으며, 18세 때 폭군이나 다름없었던 아버지는 농노들에 의해서 살해당했다.
1847년 28세 때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페트라셰프시키 집에서 매주 한번씩 모이는 문학모임에 참가하여 문학 철학 정치 등 광범위한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벌이다 비밀서클조직 가담 죄로 체포되고 조사를 마치고 4달 후 총살을 받기 위해 처형장에 끌려나왔다. 그러나 황제의 특명으로 목숨만은 건졌으나 시베리아 옴스크로 유배되어 4년 동안 강제노역을 당하게 되는데, 니콜라이 1세가 국가전복 기도를 방지하려는 차원에서 기획된 사건으로 추정된다.
그는 석방된 후 4년간 국경수비대 사병으로 일했고, 이 무렵 하급관리의 미망인 「마리아 드미트리 예브나이사예바」를 만나 결혼하였으나 그녀와는 폐결핵으로 사별하고, 그 후 대학생 「아폴리나리야 수슬로바」를 만나 사랑에 빠져 함께 유럽여행과 룰렛 도박 등을 즐기지만 수슬로바와 헤어진 후 돈이 필요한 나머지 악덕출판업자를 만나 불공정계약(1개월에 소설 1권을 못쓸 경우 모든 판권을 넘긴다)을 체결하였다가, 계약을 지키기 위해 20세의 속기타이프 ‘안나 스니트키나’를 고용하게 되는데 곧 정이 들어 부부가 된다. 그는 ‘안나’의 헌신적 내조에 힘입어 죽을 때까지 큰 정신적 위안을 받는데, 소설 속의 ‘소냐’는 부인 ‘안나’를 닮았다.
도스토옙스키는 보잘 것 없는 외모에 36세 무렵부터 간질병을 앓았고 도박의 광이기도 하였다. 친형 미하일이 창간한 월간지 「브레미아(Vremya) 시대」의 전속 작가로써 글을 쓰면서 법정사건을 탐색해나가다가, 살인을 하고도 뉘우침이 없고 오히려 성취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감방에서 문학 정치 종교 등에 관심을 보인 시인 「라스네르」라는 범죄자에 주목한다. 그는 시베리아 유배생활 속에서 이 범죄자로부터 영감을 받아 「죄와 벌」을 구상하게 되었다 한다.
소냐의 선(善)을 통해 라스콜리니코프의 악(惡)을 회개하게 만들다
「죄와 벌」은 1866년, 도스토옙스키의 나이 45세에 쓰여졌다. 소설의 주인공 「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리니코프」는 가정교사 일을 하는 젊은이였으나 그 일을 그만두고 집안에 머무르면서 무료함으로 미칠 것 같은 느낌을 받고 한 주점에서 술을 마시다 비관적 성격의 '마르멜라도프' 라는 사람을 만난다. 그는 관리였으나 해고된 후 지인에게 고용되어 일을 하나 월급을 털어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의 딸 '소냐' 는 스스로 창녀가 되어 집안 생계를 꾸려간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그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허름한 사글세방에서 부인 카테리나는 폐병을 앓고 있었다. 마르멜라도프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월급을 어디에 썼느냐’며 처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욕설을 퍼붓는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 집을 나와 생각에 잠긴다. 전부터 수전노에다 인간적으로 형편없는 돈 많은 전당포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죽이고 그 재산으로 좋은 일에 쓰자는 생각을 해왔는데 이를 실행에 옮기기로 한 것이다. 돈만 밝히는 그녀는 돈이 많아도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돈을 모았고, 리자베타라는 동생이 있는데 착하지만 순하고 겁 많은 그녀를 하인 부리듯 부려먹으면서도 유언서에는 동생의 몫이 없었다. 세상에 해만 까치고 도움될 일이 없는 악독한 노파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리자베타가 집을 비운 사이 전당포를 찾아가 물건을 저당 잡히는 척하며 노파가 방심하는 사이 도끼로 노파를 죽인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때 리자베타가 들어오며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되자 함께 살해해버린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나 그 후 웬일인지 열병에 시달린다. 한편, 어머니가 보낸 편지에서 동생 '두냐'가 돈 많은 관리(표트르 페트로비치 루진)에게 시집가게 되었다는 글을 읽고 격분한다. 얼마 후 그 루진이 라스콜리니코프를 찾아오는데 돈 많은걸 이용해서 가난한 처자를 묶어두려는 속셈으로 판단하여 싸늘하게 대하자 화를 내며 떠나간다. 루진과의 약혼을 위해 페테르부르크를 찾은 어머니와 두냐는 열병을 앓는 라스콜리니코프를 간호하고, 라스콜리니코프와 루진의 다툼을 알고서 화해시키려고 같은 자리에 모이게 한다. 하지만 둘은 화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루진은 마치 결혼을 적선이라도 하듯이 거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보인다. 이에 어머니와 두냐도 화를 내고 그를 쫓아버린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라고 여겼지만 엉뚱하게도 루진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또 다른 일을 벌인다.
이후 라스콜리니코프는 이상한 행동을 하며 자기 범행을 농담식으로 수사중인 사람들에게 떠벌린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가 잠시 미쳤을 뿐이라 여기며 수사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포르피리라는 영리한 예심판사는 그를 의심하고 집요하게 수사를 한다. 사건은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엉뚱한 사람이 체포되어 조사를 당하고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를 자백한다. 그럼에도 포르피리는 집요하게 라스콜리니코프를 의심하며 그를 떠보고, 라스콜리니코프는 아닌 체 하지만 불안한 마음에 휩싸인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어떤 사람이 마차에 치이는 광경을 목격하고 다가가보니 예전 주점에서 만난 마르멜라도프라는 사실을 알고 황급히 집으로 데려다주지만 그는 숨을 거둔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그의 장례비용으로 내놓는데, 그 후 마르멜라도프의 딸 '소냐' 가 찾아와 아버지의 죽음으로 집안에 닥친 불행에 도움을 준 라스콜리니코프의 은혜에 감사하며, 추도식을 할 것이니 찾아와달라고 부탁을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라스콜리니코프의 불안은 점점 심해지고 그러던 어느 날 죽은 마르멜라도프의 장녀이자 창녀인 '소냐' 를 찾아간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녀에게 동정심을 품는다. 그러면서 창녀인 그녀가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것을 알고 어떻게 저런 고귀한 품성을 지닐 수 있는지 의심하면서 이런저런 악한 말로 그녀를 괴롭힌다. 무신론자인 그는 소냐의 신앙마저 괴롭히는데 그녀는 그의 이해할 수 없는 공격에 괴로워하지만 올곧은 마음은 오히려 라스콜리니코프를 괴롭게 한다. 그러다 그는 소냐에게 자신이 노파와 리자베타를 죽인 사실을 고백한다. 리자베타와 친했던 소냐는 충격을 받으며 그를 원망하면서도 죄인 라스콜리니코프를 위해 기도를 하고 그를 위해서라면 어디든 따라 가겠다고 말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포르피리의 수사는 집요해서 드디어 혐의를 굳히고 최후의 협박을 한다. "이미 진상이 파악됐으니 2일안에 당신을 체포하겠다. 그전에 마음의 준비를 하라"라는 내용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때가 됐음을 알고 정리를 한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결국 소냐에게 향하고, 자신의 죄를 알게 된 소냐에게 자수하러 간다고 말을 한다. 소냐는 죄를 씻기 위해서라도 빨리 자수를 해야 하며, 자신은 그를 위해 어디든 따라가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결국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자수를 하고, 포르피리는 그를 위해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는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여러 사람이 도와줘서 매우 유리한 재판을 받고 8년이라는 형벌로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고 소냐는 그를 따라간다.
「죄와 벌」은 인간의 신념을 심판하고 있다 '
흔히들 『죄와 벌』은 인간의 죄의식을 탐구한 소설이라는 말들을 한다. 그리고 선과 악의 2분법으로 소설의 모든 내용을 재단하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죄의식을 탐구한 소설이라기보다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죄가 아닌가를 묻는 인간의 신념을 생각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살인을 하고도 죄의식을 갖지 않는 신념,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졌고 종교적 신념이 강하지만 가정형편상 창녀생활을 통해 삶을 꾸려가는 소냐의 신념, 두냐의 약혼자였던 루진이 돈의 위력을 앞세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신념, 마르멜라도프의 추도식이 끝난 후 만찬을 여는 처 카테리나의 과시욕에 대한 신념, 장발장의 죄를 밝히기 위해 추적을 멈추지 안했던 자베르 경감처럼 라스콜리니코프의 죄를 의심하고 끝까지 수사를 한 포르피리의 신념 등이 그것이다.
누구나 나름대로 옳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신념을 갖지 못했다면 ‘남이 시장 가는데 시장갈 일이 없으면서 장바구니 매고 시장을 가는 인생’을 사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도 나름대로 자기 신념을 따라 시간적 공간적 상황에 맞춰 살아간다. 도스토옙스키에게 비밀서클조직 가담을 한 죄를 씌워 시베리아 유배를 보낸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신념이나 도스토옙스키가 수많은 좌절 방황 속에서도 「죄와 벌」을 완성시킨 신념 등도 같은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올바른 신념을 가진 것인지 아니면 상대적으로 올바른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인지 그것을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수많은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의 대립, 기독교과 이슬람 종교 등의 대립,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신대륙 인디언들에 대한 몰살 등은 물론이고, 같은 나라에서도 종교 정치 경제 과학 문화 학문 환경 지역 체육 학교 등 갈등의 모순, 그리고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떠드는 종교적 믿음을 빙자한 협박 등도 같은 것이다.
올바른 것과 상대적으로 올바른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절대적 올바른 것을 알면 그 신념에 따라 살아가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것을 모르면 상대적 올바름이 절대의 것이나 되는 것처럼 잘못된 신념을 갖게 되어 그 눈 밖의 존재는 있어서는 아니 되는 존재로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빨간색 안경을 끼고 보면 세상이 온통 빨갛게 보이고 파란색 안경을 끼고 보면 세상이 온통 파랗게 보이는데, 절대 올바름을 모르면 지금까지 인류가 생각하고 살아왔던 것처럼 미래도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실 「죄와 벌」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가 2명의 살인을 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동안 인류는 자신의 생각(사고, 사상, 종교, 신념, 이념 등)만 옳다고 생각한 나머지 수많은 사람을 집단적으로 학살해왔고 지금도 그것을 멈추지 않고 지금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평소 빨간색 안경이나 파란색 안경이나 노란색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온 삶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지만, 색채와 형태가 없는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나 만물이 있는 그대로 보인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 보면 만물이 없어서는 아니 되는 존재가 되고 색채와 형태를 가진 눈으로 보면 만물은 편 가름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것을 천성(天性)과 지성(地性)의 시각으로 설명을 한다. 지성이나 지성을 닮은 사고는 색채와 형태를 갖기 때문에 상대성을 가져 편 가름을 할 수 밖에 없고 천성이나 천성을 닮은 사고는 색채와 형태가 없기 때문에 절대성을 가져 편 가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인성(人性)이나 인성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인성교육을 시킬 것인지 정확하게 성찰할 수 있는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을 찾기 어렵다. 천성과 지성의 차이를 모르고 인성을 가르치면 또 다른 색채와 형태로 편 가름하는 사람 또는 편 가름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에 불과하다. 인성교육은 사람이 사람다운 인생을 살아가도록 만드는데 있다. 그렇게 교육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죄와 벌」을 통해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건강한 가정이 모여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이런 공동체가 모여 국가의 초석이 된다. 하지만 가정 해체가 심심찮게 일어나면서 아동학대, 노인 소외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허물어지는 가정 해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대안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전문가들은 바로 효(孝)라고 말한다. 이번 호에서는 효를 실천하는 3인이 한자리에 모여 이 시대의 효의 진정성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 무크지 을 창간하는 권혁승 백교문학회장(이하 권혁승 회장)
△ 효경영의 리더 상훈유통 이현옥 회장(이하 이현옥 회장)
△ 교육을 통해 효 문화를 정착시키는 최종수 한국효문화센터 이사장(이하 최종수 이사장)
장소 이투데이 6층 회의실
Q.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전통적 가치 ‘효.’ 요즘 효를 얘기하려면 저마다 답답하다고 한탄합니다. 무엇 때문에 시니어들이 분노하는 걸까요?
△ 이현옥 회장: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에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모든 행동의 근본이죠. 부모가 없었다면 자식들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섰더라도 이는 모두 부모의 은덕이죠. 부모 모시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데 바쁘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찾아뵙는 것은 소홀히 하고 전화 한 번 하는 정도로 생색내는 자식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죽는 날까지 자식 잘 되기를 바라고 좋은 소식 있기를 고대하며 밤낮으로 자식 걱정을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죠.
△ 최종수 이사장: 자식들의 마음가짐을 바로 세우기 위해선 교육이 우선돼야 해요. 옛 서당에서는 과 을 기본으로 어려서부터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예절을 가르쳤어요.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각자 직분에 충실하게 하는 밑바탕에는 효가 자리 잡고 있었지요.
이런 이유로 초·중·고교에서 효와 예절, 질서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요. 학식을 갖추는 것보다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지요.
이러한 일들을 시작하게 된 게 주위에 있는 문화예술인들이 ‘우리 매일 같은 것만 할 게 아니고, 인성과 효에 대한 공감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한번 해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 권혁승 회장: 우리나라 효 사상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고, 한국의 가족주의도 전부 없어져 가고 있어요. 이러한 현상을 두고 ‘가정 파괴’라는 말들을 씁니다. 이는 곧 가정의 예절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가정의 예절이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아야 하는데, 요즘은 어버이날이나 부모 생신날이라 해서 선물하나 사서 주는데 그건 효가 아니죠. 효 사상이라는 것은 한국인의 정신문화라는 것이고, 물질의 교류나 거래는 아니죠. 부모자식 간에 아파트 사주고 비싼 선물 사주고, 물론 그것도 효도의 한 방법 일수 있지만, 한국의 기본 사상이자 문화 사상은 아니라고 봅니다.효의 출발점을 가정의 예절에 두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부터 아이들을 교육해야 해요. 요즘은 어린이 교육이 잘못돼 개인주의나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해졌지만, 한국 효 사상이 무너져가는 위기 상황이라고 느끼니 씁쓸하죠. 그러한 문제로 우리(3인)가 모인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웃음).
Q. 지금 효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천되고 있나요?
△ 권혁승 회장: 요즘 대다수 부모는 자식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식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죠. 효를 바라지도, 하지도 않는 게 현 상황인거죠. 그래도 지금 우리가 하는 효 운동을 계속 꾸준히 전개해야 하는데, 도움이 필요합니다. 각 시·구 문화원에서 부모에 대한 시 낭송회를 1년에 한 번씩 한다든지, 강의를 한다든지 말입니다. 이렇게 효에 대한 교류를 해야 효심이 생기는 것이죠. 젊은이들에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날마다 반성을 해나가는 것이 효예요. 아이들이 “학교 다녀 오겠습니다”, “다녀 왔습니다” 인사를 하는 것이 기본인데 휙 갔다가 말없이 돌아오죠. 젊은 엄마들도 다 어릴 적 해본 것으로 신경을 못 써서 그렇지 아이들도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효심’. 그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봤어요. 대한민국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옵니다. 첫 번째, ‘효성스러운 마음’. 두 번째, ‘효심은 엄하게 키운 자식일수록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법이다’ 그러니 부모가 애를 잘 키워야 하죠. 적당히 키우면 효도가 안 돼요. 불효라는 것은 아이에게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 부모자식 간 주고받는 것이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를 실천하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왔어요.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의 물신주의는 가정의 안녕과 질서의 근원인 효를 경시하므로 해체되는 가정들이 늘어나고 어린이나 젊은이 할 것 없이 절대가치와 기준이 상실되어가고 있는 현실이죠.
자식을 물질적으로 키우면 그게 효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권 회장 말씀대로 엄하게 키우고 가정에 모범을 보여야 하죠.
Q. 지난해 12월 ‘효도계약’을 지키지 않은 아들에게 증여한 부동산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 판결을 놓고 가족모임에서 효도계약서를 쓰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 권혁승 회장: (부모자식 간 효도계약서 등의 문제에 대해서)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요. 한국인은 효에 대해 우리 전통문화, 민족문화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데 개중에는 부모자식 간 효도 계약서를 쓴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상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몇몇 사건을 미디어에서 너무 부풀리는데, 그런 것을 줄여야 해요. 부모자식 간 화합하고 소통해야 하는데 불화가 있다면 잘못되는 것이죠. 아이들이 자랄 때 가정 예절이나 인성 교육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식이 잘못했든 부모가 잘못 가르쳤든 소통이라는 것은 쌍방이에요.
△ 최종수 이사장: 효도계약서를 쓰고 하는 효는 결코 효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계약을 하는 것도 문제, 그것을 퍼뜨리는 언론도 문제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효가 아니고 효가 될 수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두 분(권혁승, 이현옥)도 그렇지만 자신의 모든 열정과 재산을 털어 효 문화를 전파하는 훌륭한 분들이 계시는데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는가 생각이 들어요.
지방자치단체 강령에도 효에 대한 지침 등이 있지만, 지나친 복지로 효가 묻히고 퇴색하고 있어요. 노인, 장애인 복지 등을 위한 비용이 당연히 들겠지만, 그중 일부를 효를 위한 예산으로 책정해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효를 통해 그런 노인과 장애인 등을 돌볼 수 있도록 말이죠.
Q. 효에 관한 교육과 정책 지원이 줄어들고 있다는데요.
△ 권혁승 회장: 예를 들어 우리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시 낭송회를 한다고 하면 그들도 그 며칠 동안은 아버지 어머니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효가 뭔가 선물만 주는 게 아니라 기본을 익히는 교육을 해야 해요. 이런 말이 적절할지는 모르지만 각 지역마다 문화원이 있어요. 대개 문화 강좌를 한다든가 음악, 미술, 무용 등을 가르치는데 효 문화에 대해서도 강의하면 안 될까 싶어요. 문화원마다 책정된 예산들을 다 그런 예술 강좌에만 써야 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의 독자들의 나이대를 보면 나라 망하고, 6·25사변 나고 배고프고 살기 어려워서 그런 걸 찾을 수 없는 시대였다 할지 몰라도, 그 와중에도 뜻있는 사람들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요. 좋은 효자·효부 정말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었다는 생각 말고 기본적인 교육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 이현옥 회장: ‘효’를 바탕으로 회사를 경영하다 보니 직원들도 만족해하고, 사고도 발생하지 않아요.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가는 직원들에게 홍천 대명콘도와 양양 솔비치콘도 숙박을 지원해 줍니다. 1년에 상·하반기 2번 가능하고, 시댁이나 처갓집 식구들도 함께 갈 수 있게 하는데 주로 직원들이 장인·장모를 모시고 가는 편입니다.
‘너희들이 부모에게 잘함으로써 우리 직장도 건전하게 발전이 되는 거다’라고 자주 말합니다. 매년 5월에는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전 직원이 가족을 데리고 세종시에 있는 효림원(효 마을)을 방문해 효심을 나누고 효 문화행사를 진행하죠.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서는 무엇을 바꾸어야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효 문화예술 교류 차원에서 학교에 전문 강사가 방문해 효 강의 등을 하는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만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어머니들의 생각이 좀 바뀌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효에 대해 토론회를 한다고 하면 관심도 없고, 다른 학원에 가라고 하는 등 꽁무니를 빼기 때문이죠. 학생들을 모집하면 3분의 1 정도만 자발적으로 오고, 3분의 1은 학교에서 하라니까 억지로 온 것이고, 또 3분의 1은 참여는 하지만 구실만 있으면 학원에 가거나 빠지려고 해요. 그런 경우에 학생도 학생이지만 어머니들이 적극적으로 인성이나 효, 예절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인성이 기본이 된 다음에 학력을 쌓아야지 기본도 안 되고 학력만 쌓으니 아이들이 머리만 커지는 것이죠.
효라는 것은 평생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인데, 유가(儒家)에서 배울 때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 모시기를 잘 해야 한다고 하는데, 종교가 달라 많은 부분에 갈등이 생겨나고 있어요. 그런 효가 필요 없다고 하는 단체도 생기고, 내가 효를 안 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지는 몰라도, 효는 우리나라 정서나 젊은이들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난해부터 인성교육진흥법을 시행하여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단체가 갈팡질팡하고 있어요. 인성과 예절 교육은 효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 문화, 이런 운동은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운동도 아니고 시간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어떠한 소명감에 의해서 하는 것이지 이해타산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기브’만 하는 거죠.
요즘 부모는 자식의 효도를 바라지도 않고, 자식도 안 하는 상황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효는 어디 내다 팔래야 팔 수 없는 한국인의 아주 기본적인 사상이자 문화 사상으로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니까요. 2018년에 동계 올림픽을 하는데 외국인들이 많이 왔을 때 ‘한국은 효의 나라다’라는 게 선전되면 얼마나 좋겠어요(모두 웃음).
△ 이현옥 회장: 생전이나 사후에도 예에 벗어남이 없어야 합니다. 즉, 살아 계실 때도 예를 지켜야 하나 돌아가신 후에도 예를 지켜야 합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자(慈)라면 자식의 부모 사랑은 효(孝)라고 합니다. 부모는 진 땅을 걸어가도 자식은 마른 땅을 걸어가기 바라는 게 부모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바쳐 희생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인프라 구축이 우선시되려면.
△ 최종수 이사장: 정부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먼저 조성돼야 합니다. 내가 과천문화원장을 8년 정도 하고, 전국문화원 회장을 4년 동안 했어요. 그러면서 체계적으로 구축하여 효 문화를 선도하려는 효 문화센터를 만들려고도 했죠. 그러나 주변에서 ‘왜 저렇게 판을 벌이나’하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어요. 그러니 그런 것을 하려고 해도 먼저 주변의 인식과 분위기를 바꾸지 않으면 안 돼요.
△ 권혁승 회장: 국내 효 문화를 바로잡고 육성, 창달해야 하지만 아울러서 교양을 갖출 수 있어야 해요. 효는 한국 고유의 문화예요. 이 문화가 옛날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 게 아니죠. 물론 서양에서도 방식이 다를 뿐 효도를 잘 하죠. 영국의 역사 철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책에 ‘인류문화 발전을 위해 한국이 크게 기여한 게 있다. 그것이 한국인의 가족제도와 효 사상이다’라고 썼어요. 그는 이러한 효 사상을 전 세계에 번지도록 해 모든 세계인이 가족을 사랑하는 정신이 퍼졌으면 좋겠다는 뜻을 설파했고요. 소설가 톨스토이도 “불효하는 사람은 벗으로 삼지 말라”고 했어요. 미국연방준비제도 의장을 지낸 버냉키(Bernanke)도 미국 프리스턴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이제 여러분은 졸업을 하니 매주 한 번씩 부모님에게 전화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생일에 선물을 사주고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1주일에 몇 번씩 전화 걸어 안부를 여쭙는 것이 한국 효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점이 전 세계에 한국인이 어깨 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고, 자부심이라 할 수 있어요.
한국의 효 사상을 세계에 널리 알려서 모든 세계인들이 한국의 효 사상을 본받고 한국하면 ‘아! 효의 나라’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더 나아가서는 효 문화를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록한다든가, 널리 번지도록 힘써야 해요.
△ 이현옥 회장: 이런 분위기를 조성해서 좋은 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여 정부와 언론이 주목하고, 효에 대한 인식이 관철됐으면 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에 대한 좌담회는 한국 언론사, 매체 사상 처음 있는 일 아닐까요? 아마 단군 이래 최초일 것 같아요. 오늘로 끝내지 말고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웃음)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 최종수 이사장: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타고난 소질과 능력을 개발해 나의 길을 찾고 이웃과 사회를 위한 사랑과 봉사가 바로 ‘효’라는 것이죠. 이를 위해 시대에 맞는 효 문화의 창출이 바로 인성 교육의 출발점이라고 보고 한국효문화센터를 2011년 시작했어요.
한국효문화센터는 효에 관련된 교육과 행사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 되돌아보며 자신에 대한 사랑의 첫걸음을 시작으로 하는 인성 교육과 밝고 건강한 사회 구현이 목표예요.
예술단체장들이 효 문화사업을 하면서 학술회의도 하고, 학생들을 모아 토론한 내용들을 토대로 효 문화를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단초를 발견했어요. 요즘 고등학생들은 입시에 시달리지만, 그중에서도 고전 등을 훤히 꿰뚫는 학생들이 꽤 있어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지만, 마냥 그럴 것이 아니라 헌혈도 하고 기증도 해서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의견도 나왔죠. 그러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시대에 효 문화사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해줬어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들의 수준에 맞는 효 문화사업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글짓기, 그림 그리기 대회도 하고, 매년 토론회도 열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가고 있어요. 국내 최대 규모의 ‘효’를 주제로 한 문화축제로 1회성 행사로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지만 그만큼이라도 확실히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상을 받는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만나보면 그때만이라도 가족끼리 효에 대해 이야기하고, 부모를 생각한다고 하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 문화라는 건 다들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는 게 어려워요.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 특히 5형제 중 셋째인 나를 많이 아끼셨고 사랑을 주셨죠. 공직생활 중에도, 사업을 할 때도 어머니가 편찮으시면 달려가 돌봐드리는 등 장남 역할을 했어요. 고향 마을에 1981년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면서 선산을 세종시 조치원으로 이전해 효림원을 조성했어요. 어머니는 그 안에 있는 농가주택에서 4개월 동안 고생하시다 90세에 돌아가셨고, 5일장을 치렀어요. 매년 시묘살이를 하기 위해 내려갔고 거기 가서도 돌아가신 어머니와 대화도 나누고 3년 탈상을 했는데 마을 회장이나 이장이 그 모습을 눈여겨봤나 봐요. 그러다 매년 추모식을 하면서 마을 사람 100명을 초대해 아이들에게 선물도 주고, 면장 추천을 받은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500만원씩 장학금도 수여하는 행사를 진행했죠. 사실 3년만 하고 그만두려 했는데, 막상 해마다 해온 것을 그만두기는 어려웠어요. 나로서는 자식의 도리로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소문이 나자 군에서 우리 마을을 성균관장에게 추천해 각지에서 몰려와 선전을 해주고, 포상도 받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 사람들이 1만원, 5000원씩 자발적으로 980만원을 모아서 선산 공원 입구에 효비를 들여놓았어요. 마을이 효의 고장이니까 “마을 입구에 ‘효림원’이라고 세워 놨어요. 그때 어머니가 옥색 한복을 입고 꿈에 선명히 나타나시더니 ‘마을에서 이렇게 효비도 세워주고 행사도 열어줬는데, 너도 고마운 뜻을 표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어요. 작은 유통업을 하던 나는 영농조합 농장을 하나 인수했어요. 그곳에서 생산하는 오이, 토마토, 배 등 농산물을 국가유공자 요양원이나 보훈병원, 군부대 등 10여 기관에 기증하고 있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지역의 소득 증대도 되고, 고용창출도 되니 농민들이 굉장히 좋아합니다.
△ 권혁승 회장: 7년째 백교문학상 효친문학상 작품을 전국적으로 공모하는데, 글과 시 속에 효 사상, 효심 또는 모정이 깃들어져 있는 작품을 심사 기준으로 삼아 상을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 쓴 글이라도 사친과 관계없는 글은 입선이 안 되죠. 자식들은 부모가 그렇게 사랑을 줘도 사랑인 줄 몰라요. 일상에서 공기를 마시듯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강릉 시골 마을에다가 사모정 정자를 지었어요. 마을의 쉼터가 되라고. ‘사모정’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라 해서, 한쪽에는 도예 조각 하는 교수님의 작품도 세워 놨죠. 정자를 강릉시에 기증했는데 하고 나니까 주변에서 그 정자만 가지고 효 사상이 함양되겠느냐 해서 ‘사친문학상’을 만들라 하더라고요. 그걸 만들어 전국적으로 등단한 문인을 대상으로 작품공모를 하고 있어요. 거기다 이 사상을 전 세계에 알려야 되겠다는 의미를 담아 이라는 책을 만들었어요. 국내 200여 도서관에 비치했고, 영어판을 제작해 65개국 130개 도서관에도 전달했어요. 유엔, 세계은행에도 책이 있어요. 대통령, 교육부장관, 문화부장관 등에게도 돌리고,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보냈는데 잘 전달이 됐는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작년에 사모정이 있는 공원이 너무 좁다고 해서 확장공사를 1년간 했어요. 높이가 3m인 고석에 ‘효 사상 세계화의 발원지 효향 강릉’이라 쓰고 밑에 영어로도 써놓았어요. 그 옆의 돌에도 효에 대한 글을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새겼어요. 오는 9월에 도 창간할 예정입니다.
제주도에는 가끔 갔지만 한라산에 올라 백록담을 못보고 내려오기를 여러 번, 기어코 이번에는 백록담을 보고 오기로 하고 2박3일의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다. 인생이라는 게 다 그렇 듯, 다람쥐 채바퀴 돌 듯 돌아가는 세상에 늘 퍽퍽하고 지루하기만 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군 시절의 동기인 3부부가 의기 투합하여 꽃향기가 그윽한 5월의 어느 날 제주도로 떠났다. 2박3일 중, 한라산 등반은 두 번 쨋날로 정했다.
상판악에서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한라산 등반!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잠속으로 빠졌들었는데…. 또드락 뚝딱! 또드락 뚝딱… 고요한 아침공기를 깨고 거실 쪽에서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가 아련하게 귓전을 울렸다. 눈을 번쩍 떠보니 창문너머로 환하게 동이 터오고 아직은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주방에서 식사준비를 하는 아낙들의 조용하면서도 부지런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덕분에 아침식사는 걸쭉한 전복죽으로 영양을 보충하였는데, 각자가 한라산 등반을 대비하여 두세 그릇씩을 뚝딱 비워 든든하게 속을 채웠다.
해발 1950m의 한라산 정상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는지 걱정은 태산이면서도 웬 먹을거리를 그리도 많이 준비하였는지? 돼지고기 수육에 홍어회와 양념장류, 각종 나물류, 그리고 금세 지은 밥을 바리바리 배낭에 넣고 그것도 모자라 막걸리에 물까지 챙겨 넣고 보니 배낭무게만 해도 어깨가 묵직하기 그지없었는데, 설상가상 무거운 카메라까지 목에 걸고 보니 아득하기만 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랴! 한창 젊은 시절에는 웬만한 고지는 단숨에 뛰어오르던 역전의 용사들이 아니던가?
한라산 백록담까지 오르기 위해서 성판악코스를 택했는데 성판악코스는 편도 9.6km 이며 보통 걷는 시간만 4.5시간을 잡아 왕복 19.2km로 총 9시간을 걸어야만 하는 험난한 코스였다. 다행히 코스자체가 완만하다고 하여 한결 마음은 놓였지만 그래도 마음은 놓이지를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한라산 등반길, 다행히도 비가 그친 산길에는 시원한 나무그늘과 신선함이 묻어났고 싱그러운 숲속에서 산들산들 바람이 불어와 상쾌하게 발걸음을 시작하였다. 완만한 등산로라고 하지만 제주도 특유의 울퉁불퉁 돌계단으로 이어져 걷기가 만만하지가 않았다.
일행 중, 최 박사는 무릎이 좋지 않아 전 날부터 걱정을 했다. 한라산 등반을 하기 위해 두어 달 전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집근처 야트막한 산을 연습 삼아 오르곤 했다는데 딱 2시간만 걸으면 무릎에 신호가 와서 걱정이 태산이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등반이 시작되자 제일 앞에서 씩씩하게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 산비둘기 소리가 산중에 울려 퍼지고 가끔은 까마귀가 머리 위를 빙빙 돌면서 환영을 해주었는데, 일행과 뒤질세라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아낙들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제주도 특유의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삼나무 숲이 나오는데 삼나무 숲을 지나니, 해발 1,140m에 위치한 속밭대피소가 나왔다. 세 부부가 조금씩 떨어져 오르고 있었으니 숨도 고를 겸 선두에서 오르던 팀이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일행들과 합류하기로 하였다.
1차 휴식! 달콤한 휴식이었다. 물도 마시고 간식도 먹으면서 재충전을 하였다.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속박대피소에서 1차 휴식을 취한 후 본격적인 오름이 시작되었다. 끝없이 이어진 돌계단과 중간 중간을 이어주는 데크… 그래도 싱그러운 숲내음과 선들 한 바람, 그리고 환영이라도 하 듯 울어주는 산새소리를 동무삼아 꾸역꾸역 오르고 있었다.
이 시기에 한라산에서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진달래를 볼 수 있다고 하는 소리를 반신반의 하면서 혹, 멋진 진달래꽃밭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기도 하였다.
육지에서는 이미 져버린 진달래꽃을 정말 볼 수 있을까? 강화도 고려산 진달래 능선에서 보았던 붉고 화려한 꽃잎을 상상하면서 오르다 보니 드디어 진달래 밭에 도착하게 되었다. 진달래 밭 대피소 앞에 배낭을 내려놓고 2차 휴식을 취했다.
데크에 다리를 쭉뻗고 털썩 주저앉아 초콜릿을 먹고 있는 최박사의 모습은 마치 몇날며칠 전투를 하다가 지쳐서 휴식을 취하는 곤궁한 병사의 그 모습이라면 과장일까? 물한모금 마시고 다시 기운을 내서 배낭을 짊어지고 올라선 길에서 저 멀리 옅은 구름에 둘러싸인 한라산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스라이 구름에 닿은 길에는 울긋불긋 등산객들이 행렬을 지어 올라가고 있었는데, 평일임에도 산을 찾는 이들이 이토록 많을 줄은 몰랐다.
어쩔 수 없는 60대의 시니어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르다가 잠시 뒤돌아보면 짙푸른 녹음이 길게 드리워진 산자락 밑, 서귀포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고 그 끝에는 일렁이는 검푸른 바다가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수령(壽齡)을 짐작할 수 없는 주목(朱木)이 등산로 양옆으로 이어져 있고 그 중에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폐목(廢木)이 되어 고고하게 바람을 견디어 내는 주목도 있었다. 한라산 정상에 가까워오자 가파른 등산로는 테크로 계속 이어졌고 물밀 듯 불어오는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아! 드디어 백록담이 지척에 보인다.
아! 한라산 백록담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미리 백록담에 도착한 필자는 속속 도착하는 동료들을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입구 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곤한 몸을 이끌고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띤 채 드디어 해냈다는 기쁨으로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는 동료들을 일일이 환영하며 사진을 찍었다.
인증 샷을 위해 백록담 표지석 아래로 길게 줄이 이어졌는데, 어찌나 바람이 세게 불던지 황급히 배낭에서 바람막이 옷을 꺼내 입었다. 5월임에도 불구하고 변화무쌍한 날씨가 필자 일행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허둥지둥 인증 샷을 마치고 말로만 듣던 백록담을 보러 조금 위로 올라섰다. 초겨울의 싸늘한 바람이 천둥치듯 불어대는 가운데 백록담을 조망(眺望)할 수 있었으니 역시 변화무쌍한 한라산은 그 높이가 백두산 다음가는 산중의 산인가보다.
바로 밑 양지바른 테크에 배낭을 풀고 가져간 음식들을 꺼내놓으니 이보다 더한 진수성찬이 있으랴! 돼지고기 수육에 홍어, 그리고 막걸리를 곁들인 삼합이 갈증 나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올라오면서 고생담을 비롯한 온갖 이야기꽃을 피우며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던 중에 홀로 쓸쓸하게 앉아서 비스킷을 먹고 있는 외국인 청년을 보게 되었다.
세 남자들은 모두 그를 데려다가 음식을 좀 나누어먹이자고 의견을 모으니 마님들께서는 먹던 음식을 어떻게 권하느냐고 반대의 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언어구사가 무난한 최용호박사가 다가가서 몇 마디 나누고는 그를 우리 자리로 데리고 왔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고 주도해 온 우리들의 캡틴 海松 김금섭 대장의 사위가 미국인이기도 하거니와 우리의 아이들도 미국의 콜로라도주 덴버에 살고 있기에 혹여 마음이 더 쓰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자신의 이름을 ‘마이클’이라고 소개한 그 외국인은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은 스페인 청년이었다. 이것저것 챙겨주니 먹기도 잘하였는데, 아마도 몹시 시장했던 모양이었다. 헌데 그 녀석, 막걸리는 물론 돼지고기 수육을 된장에 꾹 찍어 잘도 먹어댔다.
막걸리 한 잔 쭉 들이키던 마이클이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났다며 데크에 벌렁 나가 자빠졌는데, 어찌하랴! 모두가 달려들어 털이 북슬북슬한 그 녀석의 다리를 붙잡고 마구마구 주물러 주었더니 괜찮아 졌다고 하였다. 입식문화에 익숙한 그가 데크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서 음식을 먹다보니 쥐가 난 모양새다. 어쨌거나 밥과 반찬은 물론이고 이것저것 잘 먹으면서 여간 고마워하던 그가 기념사진을 찍겠다고 하면서 두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 친구를 데려다가 음식을 나누어 먹인 것은 어찌 보면 보잘 것 없는 작은 배려이지만 참 잘한 일인 듯싶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우리가 낮선 외국에 여행을 갔을 때를 생각하면서 작은 관심과 배려의 차원에서 나눔은 역시 모두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몇 번이고 고맙다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그 스페인 청년을 보내고 나니 내려올 일이 꿈만같았다.
드디어 해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일 터, 육십 고개를 넘어 이제 내리막길에 가속을 붙일 시기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한라산 등반. 그 하산 길에서는 피로가 온 몸을 엄습했다. 아침 여덟시에 시작한 한라산 등반은 오후 6시 30분에 모든 동료들이 성판악 주차장으로 되돌아오므로 써 장장 10시간 30분의 고단한 여정이 끝났다. 고단한 가운데서도 모두가 해냈다는 뿌듯함이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언제 또다시 이 곳을 찾을까마는 명산중의 명산 제주도 한라산을 당당하게 정복했다는 은근한 자부심이 샘솟았다. 거기에다가 날씨까지 좋아서 멋진 백록담을 볼 수 있었으니 얼마나 상쾌한지 모르겠다.
우리 인생에 있어 더 이상 젊은 시절은 돌아올 수 없으나 늘 긍정적인 사고로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에는 빨강, 파랑, 노랑으로 차린 멋쟁이 등산객으로 붐빈다. 사회발전만큼 산행문화도 많이 변하였다. 수십 년 산을 찾으면서 느꼈던 산행문화의 변천사를 살펴본다.
복장이 화려해졌다.
예전에는 전문 산악인을 제외하고는 등산복을 따로 갖추지 않았다. 평소에 입던 셔츠와 바지, 운동화만 있으면 삼삼오오 산에 올랐다. 면바지, 셔츠에 땀이 흠뻑 젖어 생쥐처럼 보기 민망한 모습을 자주 보았다.
아웃도어 발달로 통풍과 발수는 기본이요, 패션전시장이 되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철따라 유행을 쫓아가기에 허리가 휜다. “운동 중에서 등산이 제일 돈이 적게 든다.”는 통설이 깨진지 이미 오래다.
유학 온 산행을 즐기는 학생이 어느 방송에서 “한국 등산객이 화려하게 입고, 많이 먹으며 산행은 적게 한다.”고 지적하였다. 외장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산행문화가 필요한 대목이다.
취사가 사라지고 식당 뒤풀이로 발전
옛날에는 버너와 코펠이 기본 장비였다. 석유버너에 불 피우는 방법을 익히고 알코올버너, 코펠까지 갖춰 배낭을 메고 등산을 하였다. 산에서 지지고 볶아서 식사를 해결하던 때였다. 근래 등산복 브랜드로 사람의 외양을 구별하는 것처럼 유명 버너가 산행자의 위세를 판가름하였다.
친구들과 산에 갈 때에는 각자 역할을 정했다. 당시 전화통신 부족으로 연락할 수 없는 불참자를 예방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필자는 버너 준비와 밥하기, 그리고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정상주를 담당하였다.
사회에 진출 후에는 젊은 시절에 부족하게 느꼈던 먹거리를 배낭에 가득 채우고 다녔다. 친구들과 어는 산에 갔을 때 이야기다. 고기를 구워서 막 먹기 시작하는데, 학생 한 명이 “고기 좀 먹고 싶다.”고 하였다. 옛일을 생각하여 합석을 흔쾌히 승낙하였다.
잠시 후 일행이었던 나머지가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에게 그 자리를 내주고 학생 때처럼 감자 된장찌개로 소주잔을 기울였던 아름다운 기억이 났다.
산마다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계곡에는 음식물 찌거기가 쌓였다. 석유버너에 불을 잘 붙이는 사람은 귀한 대접을 받기도 하였던 먼 옛날이야기다. 취사가 금지되면서 환경이 정화되고 버너와 코펠은 자취를 감췄다.
다음부터는 도시락이 취사를 대신하였다. 친구끼리 어울리면 푸짐한 산상 뷔페가 열렸다. 맛 자랑 대회가 열렸다. 학창시절 소풍 때보다 더 즐거웠다. 정상에서 막걸리 한잔으로 천하를 호령하였다.
요즘에는 도시락 문화도 시들해지고 하산 후 뒤풀이를 즐긴다. 산행을 마무리하고 식당에서 오순도순 우정을 나누는 문화가 산행안전에 매우 바람직하다. 등산 출입로 식당은 항상 등산객으로 차고 넘친다.
산행은 놀이에서 필수 운동으로 성숙
대부분의 산 입장료가 있었다. 아침 7시 입장료 받기 전에 등산객이 몰리는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십여 년 전부터 입장료가 거의 없어졌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찾는 산이 되었다.
옛날에 등산복에 배낭 메고 나서면 여행가는 한량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산행이 이제는 놀이가 아니고 건강을 다지는 필수 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쓰레기 되가져오기 등으로 산행문화가 성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