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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스타트 컨퍼런스, “신중년 일자리 문제 세대융합으로 해법 찾자”
- 액티브 시니어의 일자리 문제를 다룬 ‘리스타트 컨퍼런스 2017’이 28일 쉐라톤 서울 디큐브시티 호텔에서 진행됐다. ‘액티브 4060을 대한민국 신성장동력으로’라는 부제로 진행된 이번 행사에선 은퇴 후 또 한 번의 경제활동이 필수적으로 된 우리 사회 4060세대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심포지엄은 국내외 현황, 정부 정책, 지자체 정책, 인생 이모작 방안, 시니어창업 현황, 성공한 선배의 노하우, 세대융합 창업, 공유경제와 사회적경제 등 액티브 시니어의 일자리 문제와 관련된 해법 등이 다뤄졌다. 발표에 나선 고용노동부 고령사회인력정책과 여승연 사무관은 “그간 정부의 중장년 재취업 정책에서 배제되어 있던 중위소득 100% 초과자들을 대상으로 한 신중년 인생 3모작 패키지 구성이나 65세 이상을 위한 재취업 정책 마련 등이 추진되고 있다”며 최근 정부의 취업정책 변화를 소개했다. 이날 컨퍼런스에선 시니어 취업시장 확대를 위한 세대융합에 관한 논의도 이어졌다. 세대융합이란 중장년과 청년 세대가 의기투합해 각자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취업·창업 형태. 시니어 창업이나 재취업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최근 스타트업 업계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이에 대해 앱노트의 장우용 대표는 “다케다제약 이춘엽 前대표의 영입으로 주거래 시장이었던 제약업계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며 “의사소통을 활발히 하기 위해 직급을 없애고 직함대신 영어호칭을 사용하는 등 세대 간 융합을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고 소개했다. 리스타트 조직운영위 관계자는 “4060세대가 다시 시작하는데 필요한 정부 지원 정책, 선배의 성공사례, 현실 인식, 지원 교육 등 유관 정보를 제공하려고 준비했다”며 “시니어 취업에 대한 수요와 관심이 커지는 만큼 관계기관의 협조를 통해 앞으로 행사 규모를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번 행사는 사단법인 한국모바일기업진흥협회와 다수의 민간단체로 구성된 리스타트 조직운영위가 주최했다.
- 2017-11-28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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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세대 재미교포 여성운동가, 그레이스 김의 망부가(忘夫歌)
- 미주 한인 사회에서 지식인의 멘토로 불렸던 노부부가 있었다. 정신과 전문의로 UC데이비스 의과대학에서 35년간 교수로 근무했던 故 김익창 박사와, 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 25년간 교사로 일했던 그레이스 김(한국명 전경자·86)씨다. 부부는 평생 소외받는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힘썼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싸웠다. 53년을 함께하는 동안 그들은 최고의 동지이자 친구였으며 연인이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아내는 여전히 열심히, 행복하게 살고 있다. “You should keep going.” 당신은 계속 그렇게 살아 달라는 것이 남편의 바람이었다. 사랑스러운 사회운동가 “동호회에서 주최하는 클래식 음악회 준비로 정신이 없어요. 오후에는 신문사에 음악회 기사를 전달하러 가야 해요. 오늘도 너무 바쁘네요!” 그녀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친다. 3년 전, 애너하임의 한 노인병원에서 김익창 박사와 그레이스 김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김익창 박사는 파킨슨병으로 상당히 힘들어하면서도 아내와의 인터뷰를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당시 인터뷰 주제는 ‘부부’였는데 김 박사는 “부부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젓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남편은 나를 커뮤니티 액티비스트(사회운동가)라고 별명처럼 불렀어요. 조용하고 신중했던 그와 달리 나는 말도 많았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곤 했는데 남편은 그런 내 모습을 사랑해줬지요. 우리는 6·25전쟁을 눈앞에서 겪은 세대입니다. 모두가 못 배우고 가난한 시절에 그래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우리는 그것을 갚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소외받는 곳,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늘 관심을 두게 되었어요.” 1931년 중국 상해에서 나고 자란 김씨는 해방이 되던 해 부친의 고향이었던 평안북도로 돌아왔고, 남북으로 갈리게 되자 다시 38선을 넘어 왔다. 이 과정에서 막내 동생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때 거침없이 행동하는 것은 그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상해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은 임시정부에 돈을 보내며 독립운동을 도왔고, 주위에 고학을 하는 한국 유학생이 있으면 장학금을 내놓기도 했다. 어머니 역시 그 시대에 평양신학교를 나온 신여성으로서 이웃과 나누는 것을 평생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고. “여고 시절 내 꿈은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가서 슈바이처 박사와 함께 일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화여대 의대로 진학했지요. 그런데 입학한 그해 6·25전쟁이 터졌어요. 산속으로 피난을 갔다가 와 보니 집이며 모든 것이 폭격으로 사라져버렸더라고요. 너무 화가 나서 당장 군에 입대해 총 들고 싸우겠다고 고집을 부렸죠. 어린 아가씨가 얼마나 맹랑했겠어요. 그때 영락교회를 다녔는데 목사님이 하루는 보여줄 곳이 있다면서 저를 데리고 가신 곳이 있어요. 바로 고아원이었죠.” 폭격을 맞고 부서진 학교 건물에 임시로 마련된 고아원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밤낮으로 울부짖었고 아프고 굶주린 아이들을 돌봐줄 손길은 없었다. 그렇게 김씨는 여군 대신 고아원 선생님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김씨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재입학한다. “등록금을 댈 형편이 아니었어요. 서울대 사범대가 등록금도 싸기도 하고 모자라는 교사를 길러내기 위해 장학금도 많이 준다고 하니 좋았지요. 또 고아원 선생을 하면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도 알게 되었고요. 무엇보다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으니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요?” 서울대학교 캠퍼스에서 그녀는 남학생들이 데이트 신청이 쇄도할 만큼 인기가 있었지만 모두 퇴짜를 놓아 별명이 ‘NO’였을 정도로 콧대가 높았다고 한다. 그중 유일하게 ‘YES’를 한 것이 남편 김익창 박사의 오페라 데이트 신청이었다고. 생전 김익창 박사는 인터뷰 때마다 첫눈에 반할 정도로 ‘탁월한 미모의 소유자’였다고 아내를 향한 무한 애정을 드러내곤 했다. 1956년, 김익창 박사가 미국 유학을 떠난 이후 6년 동안, 두 사람은 장거리 연애를 시작한다. 그 사이 김씨는 숭의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후 거리를 배회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용산직업학교를 세워 불우한 형편의 아이들을 지도했다. “6년 동안 우리는 떨어져 있으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어요. 그때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편지로 주고받았는지 몰라요. 삶에 대한 가치관, 철학, 문학, 음악, 예술, 종교에 대한 생각을 나누면서 우리가 서로 얼마나 닮아 있는지 알게 되었죠. 그 시간 동안 다져진 신뢰는 남녀의 사랑 그 이상이었어요.” ‘Dear, Grace’ 1962년, 마침내 두 사람은 미국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김익창 박사가 샌프란시스코 마운트 자이언(Mt. Zion) 병원에서 인턴십을 하는 동안 두 아들 데이비드와 다니엘이 태어났고, 남편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병원 응급실에서 일해야 했다. 잠을 잊고 살아야 했던 고된 시절이었다. “대단한 정신력이 아니면 견딜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렇게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3년 만에 박사과정을 끝내더라고요. 레지던트를 마칠 무렵 남편이 내게 공부를 해보라고 제안했어요. 너무 기뻤죠. 내가 너무나 원하던 거였으니까요.” 김씨는 그 길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원에 진학, 1969년 상담학과 아동발달학으로 교육 석사학위를 받는다. 캘리포니아의 진취적인 교육 도시 데이비스에 정착하면서 부부는 본격적으로 소수민족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게 된다. 김익창 박사는 임상정신과 의사로서 평생 소수민족의 정신의학에 관심을 두었다. UC데이비스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문화가 다른 환자들에 대한 의료진들의 이해’를 강조하며 대학에 강좌를 만들고 끊임없이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다문화 정신의학 분야의 권위자로 자리 잡았고 그의 노력으로 현재 미국 정신의학협회에는 ‘화병’이 정식 병명으로 등록되어 있다. 김씨는 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언어와 문화 차이로 어려움을 겪는 소수인종 학부모들과 학교를 잇는 가교 역할을 자청했다. 특히 인종차별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어떤 차별도 받지 않도록 앞장섰다. 특히 1980년부터 시작했던 미주 한국일보의 질문과 응답 형식의 칼럼 ‘Dear, Grace (그레이스에게)’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어느 날 신문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부모들이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려움이 많다고요. 흔쾌히 하겠다고 했죠. 궁금한 것을 편지로 보내면 답을 주겠다고 했는데… 세상에, 편지가 어마어마하게 와서 너무 놀랐어요. 궁금한 것은 많은데 어디에 물을 곳이 없었던 거예요. 한국말을 하는 선생님이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부모와 자녀 간의 갈등, 학교와의 마찰, 인종문제를 비롯해 마약, 섹스, 가출 문제까지. 그레이스 김은 한인 학부모와 청소년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고 칼럼은 1990년까지 계속됐다. 나눔, 그 위대한 유산 이들 부부에 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부’에 대한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입양아 단체, 아시안 청소년 장학재단 등에 적지 않은 기부를 하고, 무료 진료와 상담 등의 봉사활동을 해왔던 부부가 은퇴하면서 제대로 일을 치른 것이다. 2006년 김익창 박사가 35년간 몸담았던 UC데이비스 대학에서 나왔을 때, 이들은 캘리포니아 실비치의 한 은퇴촌에 작은 집을 마련한 뒤 나머지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 20여 개 단체에 전달한 기부금은 적게는 5만 달러, 많게는 25만 달러에 이르렀다. 모두 익명으로 한 기부였다. 이 놀라운 기부는 당시 UC데이비스대학에서 이들이 내놓은 기부금 25만 달러로 ‘다문화정신의학센터’를 만들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사실 그만한 목돈이 생긴 데는 숨은 사연이 있어요(웃음). 젊은 시절 내가 하도 많이 기부를 하고 다니니까 남편이 매달 월급의 반만 받고 나머지는 은퇴연금으로 저축을 하자고 한 거예요. 은퇴할 때 그렇게 돈이 쌓인 줄 몰랐어요. 평소 돕고 싶었던 단체 리스트를 적어 내려가는데 얼마나 신이 나던지. 남편과 아주 펑펑 잘 썼어요!” 고마운 것은 부모의 결정을 기쁘게 받아들여준 두 아들이었다. “그때 아이들이 한 말이 잊히지 않아요. 돈이 필요하면 지금 이야기하라고 했죠. 두 아이 모두 자신들을 키워준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다며 원하는 곳에 다 쓰라고 하더라고요. 아, 우리가 아이들을 잘 키웠구나. 갑절로 행복해지더라고요. 두 아들 내외 역시 어려운 곳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기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아요.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2009년 데이비드 김씨가 지난 오바마 정부의 교통부 차관보에 임명됐을 때, 그가 남긴 말이 있다. 부모님은 늘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마음만 있다면 언제나 남을 도울 힘이 있다고요.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또 다른 방식으로 도울 수 있다는 거죠. 바로 그 나눔의 정신이 우리 가족을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고개 들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아시아인은 돈을 많이 벌어도 미국 주류 사회에 들어가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님의 삶은 제 미래를 위한 최고의 투자였습니다. 부모님의 기부가 저를 성공적으로 키운 셈입니다. 상해에서 독립운동가와 유학생을 돕던 부모에게서 김씨에게로, 이것이 다시 김씨의 아들들에게로 이어진, 참으로 위대한 유산이다. To my forever love… ‘김 여사의 해피 에너지’는 은퇴촌에서도 빛을 발했다. 김씨는 입주한 은퇴촌 실비치 레저월드의 한인회 회장이 되어 커뮤니티 간 화합에 앞장섰다. 한인 노인들을 위해 각종 세미나와 교양 프로그램을 속속 만들어내는가 하면 지역구 선거에 한인 후보자가 나오면 발벗고 나서서 선거운동을 도왔다. 물론 그 뒤에서 묵묵히 김씨를 돕는 사람은 남편 김익창 박사였다. 이 무렵 김익창 박사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면서 부부에게는 예상치 못한 슬픔이 찾아왔지만 이 또한 차분히 받아들였다. “한동안 멍했지요. 왜 이런 병에 걸리게 됐을까. 젊었을 때 잠을 너무 못 자고 힘들어서였을까…. 하지만 남편은 곧 받아들이고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어요. 파킨슨병은 관리만 잘하면 당장 어떻게 되는 병이 아니라면서요. 그렇게 8년을 투병했지요. 그 사이 자신의 인생을 덤덤히 돌아보며 두 권의 자서전도 집필했고요.” 병세가 악화되어 노인병원에 입원하고 2년 동안, 부부는 다시 연애를 시작하는 기분이었다고. 아내는 매일 아침 예쁘게 화장을 하고 직접 구운 쿠키를 만들어 남편을 만나러 갔고, 남편도 눈을 뜨면 아내를 기다렸다. 전립선암이 발병했을 때는 상당히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김 박사는 항상 웃는 얼굴로 아내를 맞아주었다. 병원 스태프에게 ‘She is my forever love’라고 소개해 사람들을 웃게 만들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편지 한 장을 건네더라고요. ‘결혼해줘서 고맙고 행복했다. 아파서 미안했고 먼저 가서 또 미안하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까지처럼 계속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슬픈 삶을 살까봐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어요. 끝에는 늘 하던 말, ‘my forever love’라고 적어놓았더군요. 마지막 러브레터였어요(웃음).” 김익창 박사가 떠난 후, 그녀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며칠을 먹지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문득 자신이 이렇게 될까봐 걱정하며 병실에서 간신히 손을 움직여 편지를 썼을 남편이 떠올랐다. “아니다. 남편이 가장 좋아했던 내 모습으로 끝까지 열심히, 즐겁게 살자. 그렇게 결심했어요. 나는 지금 아주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은퇴촌에서 음악회도 열고 노래도 부르고 세미나도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어요. 그러다 남편이 너무 그리울 때는 조용히 말합니다. ‘하나님 나는 준비되었으니 이제 데려가셔도 됩니다. 루크를 만나게 해주세요…’ 라고요(웃음).” 오랜 대화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열심히 포즈를 취해주는 그녀의 미소가 캘리포니아 햇살만큼이나 화사하다. 누구에게나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하는 이런 모습을 남편은 사랑했으리라. “Good to see you!” 쿨하게 인사를 남기며 보무당당히 사라지는 ‘유쾌한 그레이스씨’. 그녀와의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
- 2017-11-13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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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라지는 치매 치료 생태계 “희망이 보인다”
- “국가와 사회 발전에 기여한 어르신이 건강하고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입니다.” 9월 18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치매 국가책임제 대국민 보고대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영상 메시지를 통해 이렇게 강조했다. 치매 환자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 개인과 가족이 떠안았던 고통을 국가가 나눠지겠다고 약속했다. 이와 같은 정부의 전폭적인 관심이 치매 치료에 대한 생태계를 변화시킬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실제로 의료계 안팎에서는 벌써 정부의 ‘동기부여’가 효과를 내고 있는 듯하다. 먼저 지난 9월 발표된 정부의 ‘치매 국가책임제 추진계획’을 들여다보면 이렇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전국에 47곳밖에 되지 않았던 치매지원센터의 확대다. 그동안은 서울과 수도권에만 설치가 집중됐지만, 다음 달부터는 전국 252곳에 ‘치매안심센터’가 설립될 예정이다. 센터에서는 치매 환자와 가족들이 상담과 조기 검진부터 관리, 의료·요양 서비스 연계까지 통합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센터에서 받은 상담 내용은 ‘치매노인등록관리시스템’에 등록돼 환자와 가족들이 이사를 하더라도 전국 어디서든 연속적으로 관리된다. 센터 안에는 치매 환자 가족의 정서적 안정을 도울 카페와 인지·신체 활동 프로그램으로 환자의 증세가 악화되는 것을 막을 단기 쉼터도 만들어진다. 기저귀 구매비용도 지원 중증 치매로 인해 이상행동 증상이 심해 가족이나 일반 시설에서 돌보기 어려운 환자는 ‘치매안심요양병원’을 통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다. 현재 전국 34개소에서 1898병상이 치매병동으로 운영되고 있는 공립요양병원은 다음 달부터 79개 병원 3700개 병상으로 확대될 계획이다. 치매안심센터와 치매안심요양병원, 요양시설 등 치매국가책임제 실행을 위해 정부는 올해 추경에서 2023억원을 이미 집행했으며, 내년 예산안에도 3500억원을 배정한 상태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으로 인해 지난 10월부터 중증 치매 환자도 산정 특례 적용을 받게 됐다. 의료비 본인 부담률은 4대 중증질환과 같은 수준인 10%로 경감됐다. 복지부 계산에 따르면 연간 200만원의 자기부담금을 지불했던 입·내원일 수 52일 정도의 환자는 앞으로 77만원만 내면 된다. 그동안 신체기능이 양호하다는 이유로 배제됐던 경증 치매 환자도 장기요양서비스 대상에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장기요양 5등급을 확대하거나 6등급을 신설해 경증 치매 노인에게도 장기요양서비스를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또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을 위해 시설의 식재료비나 기저귀 구매비용을 장기요양보험에서 지원할 계획이다. 이외 전국 노인복지관에서 치매 예방을 위한 미술, 음악, 원예 등을 이용한 치매 예방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66세 이후 4년마다 받는 인지기능검사 주기도 2년으로 짧아진다. 치매안심마을 조성 사업과 치매 파트너즈 양성 사업도 확대된다. 한의학계, 치매 분야에 높은 관심 치매 치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의학계도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한방 치매 치료의 과학적 효과를 입증하는 데 애쓰고 있다. 최근 부산시 한의사회는 초기 치매 증상인 경도인지장애로 판정된 환자 200명을 대상으로 6개월간 한방 치료를 실시했다. 그 결과 전체 환자 중 80.5%(161명)이 인지기능개선 효과를 보였고, 환자 중 82%가 치료 재참여를 희망했다. 또 강동경희대학교 한방신경정신과는 ‘한방 치매 예방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치매 예방뿐만 아니라 노년기 생활습관 교정을 통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주는 것이 목표다. 강동경희대학교 한방신경과는 서울시와 함께 ‘어르신 한의학 건강증진사업’을 통해 한방 치매 사업도 진행 중이다. 이런 한의학계의 노력에 화답이라도 하듯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박능후 보건복지부장관은 “(치매 국가책임제에) 한의사도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 본다”고 말했다. 치매 치료에 대한 관심 증가는 치과계도 예외는 아니다. 대한치과의사협회는 치매 구강건강정책 테스크포스팀을 통해 치매 예방과 관리를 위한 정책 제안서 제작을 결정하는 등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인공지능과 가상현실도 치매 다뤄 최신 IT 기술도 치매 진단과 치료에 나서고 있다. 류호경 한양대 아트앤테크놀로지학과 교수팀은 최근 국내 최초로 가상현실(VR)을 이용해 노화와 치매의 중간단계인 경도인지장애 여부를 판단하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이 기술은 은행 ATM, 대중교통 이용 등과 같이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상황을 가상현실 속에 구현하고, 참가자의 움직임 분석을 통해 치매 증상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방식은 진단 과정에서 거부감이 들지 않는 것이 큰 장점 중 하나로 꼽힌다. 기존 진단 방법은 설문 문항을 시험지처럼 작성하는 방식인데, 질문에 대해 반발하는 환자도 적지 않았다. 암 치료 방법을 제안하는 인공지능 ‘왓슨’과 유사한, 치매를 치료하는 인공지능의 등장도 멀지 않았다. 가천대 길병원은 뇌 질환 진료지침 정밀의료 플랫폼을 개발 중이다. 일종의 뇌 전문 인공지능 의사로 디지털 뇌 영상 빅데이터를 구축해 암 치료에만 적용됐던 개인 맞춤형 정밀의학을 뇌 질환 치료에도 실현시키겠다는 계획이다. 치매의 조기진단이나 치료에도 활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가천대 길병원은 지능형 뇌과학연구센터·뇌과학연구원·가천뇌건강센터를 설립해놓고 기술 개발에 대한 역할 분담과 협업을 하도록 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도 조선대학교 치매예측기술국책연구단 등과 함께 딥러닝 기술과 컴퓨팅 인프라, 뇌 영상 빅데이터를 활용해 뇌 영상 분석 인공지능기술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 2017-10-30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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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이상희 헤어팝’ 이상희 원장
- 그녀는 뽀얗고 하아얀 뭉게구름 같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색다르고 기발한 발상이 피어오른다. 집중해서 듣자니 성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이상희 헤어팝’의 이상희(李相熙·56) 원장. 직업은 미용사인데 그녀 인생에서 봉사를 뺀다면 삶이 심심할 것만 같다. 손에 익은 기술을 바탕으로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니 말이다. ‘누군가를 돕는다’란 말에 백만 개의 하트풍선이 ‘뿅뿅’ 터지는 그녀의 환한 얼굴과 마주했다.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루하루가 감사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하루하루가 감사해요. 저는 되게 감사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감사’라는 단어를 꺼낸다. 열 손가락이 성한 가운데 기술을 배운 것도, 그 기술을 가지고 다른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있어서 감사하단다. “미용기술을 배울 때 돈만 벌기 위해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한 달에 네 번 봉사를 간다면 나머지 시간은 봉사를 가기 위해 미용실에서 일하는 시간이라 생각하거든요. 제 이름이 서로 ‘상’에 빛날 ‘희’거든요. 말 그대로 상희답게 사는 거죠.” 어려운 이들을 만나면 뭔가 해줄 수 있어 좋고 자신이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후배들이 잘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이상희 원장을 만난 것은 5월 말. 본인 스스로가 정한 인생의 안식년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미용실을 계속하면 쉴 수 없겠더라고요. 원래 하던 넓은 미용실을 4월 30일까지만 하고 5월 1일 철거했어요. 저와 오래 일했던 디자이너들이 일할 곳을 마련해 지금의 아파트 상가로 옮겼어요. 이성적으로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철거하던 날 잠이 안 오더라고요. 안식년이라 해도 두 손 다 노는 게 아니라 그런지 다음 날부터는 잠이 너무 잘 왔어요.” 그런데 그 안식년이란 것 말이다. 대부분 휴식을 염두에 두고 설계를 한다. 이상희 원장은 그 하고 싶다던 일(?)에 더 빠져보려 미용실 운영 대부분을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맡겼다. 벌여놓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 당장 앞두고 있었던 새터민 결혼식에 피부 관련 사업, 매달 있는 봉사, 새로운 봉사, 미용인의 처우 개선 등 쌓이고 쌓인 일을 보니 이게 안식년인가 싶다. 봉사와 업(業)이 하나인 인생을 구상하다 전라북도 정읍 출신인 이상희 원장은 성공하려고 미용계에 입문했다. 미용실에 갔더니 기술을 배우면 서울도 갈 수 있고 해외도 갈 수 있다고 말해줬다. 솔깃한 말에 응시한 미용 자격증 필기시험에 떡하니 붙었고 곧바로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학원 안 다니고 미용실에서 연습했어요. 고등학교 친구들 데리고 가서 머리 잘라주면서 두세 달 정도 훈련했고 합격 1년 정도 후에 상경했죠.” 서울에 오자마자 당시 유명했던 미용실에 취업한 이상희 원장은 일주일을 못 다니고 그만뒀다. 줄지어 서 있는 거울에 헤어디자이너의 이름이 아닌 번호가 붙어 있었다. “큰 미용실 가야 성공한다기에 들어갔는데 거기선 사람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요. 적응하기 힘들더라고요. 제가 시골 애였지만 자존감은 있었거든요.” 서울살이 초반 20대의 이상희는 걷기도 많이 걸었다. 집이 있던 상도동을 지나고 한강다리 건너, 숙대, 남대문시장.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했다. “신호등 앞에 있는데 파마가 막 말아지는 거예요. 다시 미용을 해? 돈 많은 남자 만나서 미용실을 열어? 가난해서 걷고 고민하면서도 걷고. 그렇게 내린 결론이 나를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을 키워 성공하겠다는 거였어요.” 머리 자르는 미용기술 외에도 머리를 올리는 ‘업스타일’에 ‘메이크업’ 기술도 할 수 있어야 했다. 다니던 미용실 원장과 선배, 동료에게 양해를 구해 시간을 마련했고, 잘살던 친구에게 학원비를 부탁해 메이크업 학원에 등록했다. 선후배 관계가 수직적이고 딱딱하던 시대였지만 업무시간을 배려받고 학비문제를 해결해나가면서 더욱 완벽한 미용사로서 비상을 꿈꿨다. “후배들에게 돈과 시간이 없어서란 변명을 하지 말기를 당부해요. 꼭 해야 할 일이고 열정이 있으면 누구든 도울 테니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해요.” 20대는 미용사 이상희로서 삶을 채우는 시간이었다면 30대는 그것을 바탕으로 존중하고 돕고 깨치며 살아갔다. ‘높임말’과 ‘봉사’는 철칙 서른 살의 나이, 자신의 이름을 단 미용실을 열었다. 개업과 함께 이상희 원장이 철칙으로 삼았던 두 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가 직원들 사이에 높임말 사용이었다. 당시는 손님이고 미용사들이고 서로에게 함부로 하던 시절이었다. “저희 때는 디자이너와 스태프가 같이 앉아 밥도 안 먹었어요. 솔직히 미용기술에는 차이가 있지만 사람 차이는 없잖아요. 그래서 오픈할 때부터 높임말을 사용했어요. 혹여 함부로 하는 손님이 있으면 더 예의를 갖춰 말했어요. 구두며 유니폼도 갖춰 입었습니다. 그렇게 분위기를 바꿨어요.” 두 번째는 바로 봉사다. 한 달에 한 번은 전 직원이 봉사하기로 했다.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좋은 일에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교, 지역 그 어떤 것도 따지지 않고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 어려운 이웃과 얼굴을 마주했다. “처음 찾아서 봉사했던 곳이 가난한 마음의 집이라는 곳이었어요. 1990년대에는 메이크업이 아주 강할 때였어요. 장애우들이 저희를 보고 놀라서 숨는 거예요(웃음). 그래도 몇 번 가니까 친해졌어요. 봉사하다 보니 새터민과도 연결이 됐어요.” 어렵던 시절 동료들과 친구의 도움으로 메이크업을 배운 것이 두고두고 고맙다는 이상희 원장. 좋은 마음이 모여 얻은 기술이기에 봉사를 할 때 더없이 기분이 좋다. “미용실 열고 1년쯤 돼서 어떤 손님이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러시아 여자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온 탈북민이 결혼식을 하는데 메이크업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요. 제가 메이크업을 한다는 걸 몰랐던 손님인데 말입니다. 당연히 좋다고 했죠.” 봉사한다는 게 알려지면서 놀이처럼 재미있고 기획력 있는 봉사가 이어졌다. 정부 지원이 어려운 틈새 청소년들을 위해 일일찻집을 열고, 산골 아이들을 위해 자전거도 사주고 고아원에 세탁기도 기증했다. “손님들에게 이건 꼭 약속했어요. 우리 미용실에 와서 머리를 하면 그 일부는 다른 사람들 위해 쓰인다고요. 제가 그렇게 좋은 일을 하면 이곳에 오시는 분들이 복을 받는 거잖아요.” ‘K뷰티’와 ‘뷰티엔젤’ 봉사의 중심에 서다 2000년대 중반에는 한·일 미용인 간의 세미나가 자주 있어서 일본에 갈 기회가 많았다. 그때 일본의 성년의 날과 우리나라의 성년의 날에 대한 의문과 고민이 일었다. “일본에 갔는데 일본 젊은이들이 기모노를 많이 입더라고요. 예쁘기도 하지만 그 나라 문화잖아요. 그런데 일본의 ‘성인식’은 공휴일인데다가 자치단체에서 큰 잔치를 열어요. 기모노 입고 화장과 머리를 하고. 이 모든 게 다 미용실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함께 일본에 방문하고 온 미용실 원장들에게 우리 청년들을 위한 성년의 날을 특별한 날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메이크업과 머리손질은 미용실에서 도움을 주고, 한복은 당시 이상희 원장이 다니던 우석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미르’에서 만난 지인이 공급해주기로 했다. “연세대학교 다니는 손님한테 학교 대동제 때 성년식을 열어주겠다고 제안했어요. 단, 스마트폰으로 한복 입은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학생들에게만 기회를 주기로 했어요. 2011년 5월에 이틀 동안 저희가 준비한 성년식에 300여 명이 참여했어요.” 이 행사를 계기로 K뷰티디자인협회의 시초가 된 한국업스타일협회를 창설했다. “일본에 같이 다녔던 미용인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서 좋은 일도 하고 미용실 손님도 우리 손으로 오게 하자고 말씀드렸어요. 한국업스타일협회는 이후 좀 더 의미를 넓혀 지금의 K(Korea)뷰티디자인협회가 됐습니다.” 이상희 원장의 또 다른 활동 영역은 뷰티엔젤이다. 미용실 개업 초기 직원들과 다니던 봉사가 주위 미용인들과 함께하는 한국미용봉사회로 이어지다가 누구든 함께 참여하는 연합봉사 형태의 ‘뷰티엔젤’로 탄생했다. 한국 봉사는 물론 캄보디아 미용기술 지원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미르’의 박문희 원장님이 의료진하고 캄보디아 봉사를 간다고 머리를 하러 오셨어요. 제가 ‘의사들은 너무 좋겠다, 다른 나라 가서 봉사도 하고’ 그랬더니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봉사를 하게 된다면 저는 미용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게 진행이 됐어요. 그쪽 아이들 미용기술 가르칠 생각을 시작하니까 잠이 안 왔어요.” 캄보디아 봉사는 이상희 원장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20년 넘게 많은 사람을 도우며 살아왔지만 처음의 그 에너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캄보디아 봉사를 앞두고 느꼈어요. 왜 잊고 있었지? 친구 한 명의 도움으로 내가 20대를 살았는데 지금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난해도 여자가 기술을 배우면 자식교육 시킬 수 있고 생활고에서 나아지니까 공부는 늦게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두 번의 캄보디아 미용기술학습프로그램을 통해 20명을 지원했다. 학비뿐만 아니라 숙식과 생활보조금까지 지원하는 사업이라 매년 할 수 없다고 한다. “캄보디아 아이들과도 약속한 것이 있어요. ‘너희가 성공을 하면 한 사람을 가르쳐라.’ 그게 약속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캄보디아에 미용실 오픈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곳 아이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거죠.” ‘미용복지사’라는 직업 멋지지 않나요? 안식년이라는 본인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매달 13일 레드엔젤(청년응원단체)과 함께 K-컬처 콘서트를 개최한다. 2~3개월에 한 번씩은 다른 봉사단체와 연합활동도 한다. 캄보디아는 물론 올가을 새터민 합동결혼식도 계획 중이다. 미용인으로서의 고민도 남다르다. “미용은 보건의 개념도 있지만 지금 사회에서는 복지의 개념입니다. 형편은 되는데 거동이 힘들어서 미용실에 못 오시는 경우가 있잖아요. 현재 미용은 이동 미용이 안 됩니다. 환자 외에는요. 미용복지사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미용사의 새로운 직업에 대한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고령화 사회 시니어들의 복지에 대한 깊은 배려가 담겨 있다. 이외에도 한류로 인해 유입되는 외국 여행객에게 보다 친근하게 한국 문화를 알릴 수 있는 ‘뷰티존’을 만들어 세계에 한국 문화와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단다. 미용실을 작은 평수로 옮기면서 ‘손아당(蓀雅堂)’이라는 공간도 만들었다. 뜻 맞는 사람들이 모여 봉사에 관한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허브 역할을 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근데 저는 생각하는 게 예쁜 거 같아요. 끊임없이 꿈을 꾸는 거 같아요. 내가 만일 미용 일에서 손을 뗀다면 내 직함을 뭘로 하지?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 이상희로 불리면 어떨까 하는데 되겠죠?”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를 꿈꾸는 그녀의 입에서는 이쁘다(예쁘다)라는 말이 참으로 많이 흘러나온다. 자주 쓰는 단어에는 그 사람의 평소 모습이 담겨 있다. 그녀의 이쁜 마음이 영원하길 지지하고 응원한다.
- 2017-07-1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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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치매
- “아파트 꼭대기층서부터 좀 찾아내려와 주실래요?” 퇴근 후 분리수거와 음식물봉지를 들고 분리수거장으로 갔다가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어르신들이 모여서 웅성웅성 하신다. 항상 출입구에 앉아 계시던 A어르신께서 병원에 다녀오신 후 타고 가실 실버카를 조카가 가지러 간 사이 어디로 가신 것이다. 항상 눈 여겨 보시고 안타까워하시던 분들이라 모두 여기저기로 찾아 나섰다. 필자와 어르신 한분이 24층서부터 찾아 내려오자며 꼭대기로 올라갔다. 고소공포증이 있던 필자는 아래를 살짝 내려 본 순간 다리가 후들거려 옆은 보지도 못한 채 계단을 달리며 어르신을 찾아 내려왔다. 며칠 전 친절교육차 대강당에서 많은 사람이 교육을 받았다. 여름더위인양 폭염속의 찌는 듯 한 더위 속을 헤치고 달려가 듣노라니 소통과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강사님께서는 힘들고 스트레스 받을 때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고 계단을 이용하라시며 하시는 말씀인 즉 처음엔 익숙하지 않아 적응이 안 되지만 몇 번 올라 다니다 보면 계단 오르면서 힘든 점이 하나하나 도망가 버린다고 하시며, 더욱 좋은 점은 계단을 밟고 오르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희망의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고 하셨다. 평소 운동을 싫어했던 필자는 많은 반성과 후회를 하며 계단을 오르내리며 새로운 각오를 다짐해야지 했는데 갑자기 잃어버린 어르신을 찾으며 내려오는 계단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참을 내려오다 보니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뛰어 어르신들이랑 내려 와 2층으로 가서 보니 혼자 다니셔서 많이 힘드셨는지 피곤해 보이시는 모습으로 A어르신이 앉아 계셨다. 나이가 많은 조카께서는 혼자 계신 숙모님께 왔다 갔다 보살펴 드리려니 힘든 점이 너무 많고 요양보호사가 오전에 와서 일을 봐주어도 너무 힘들다고 입가에 거품이 일도록 토로를 하시자 옆에 계시던 어른신들께서도 치매로 인해 힘든 삶의 애환을 한마디씩 더하신다. 한 바탕 아파트가 발칵 뒤집어 지긴 했어도 여러 어르신들의 협동심과 위와 아래로 나누어 찾자며 재치 있게 어르신을 걱정하는 정겨운 모습이 ‘아직까지 우리들 이웃사랑이 존재하고 있구나.’ 하고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대한의사협회는 치매가 국민건강상의 문제를 넘어 국가적으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국가 차원의 근원적인 대책마련을 위한 문재인 대통령의 주요공약인 치매국가책임제를 적극 환영하고 치매 대책의 일환으로 치매 조기진단 및 치료, 모니터링을 더욱 충실하게 할 수 있도록 치매진단 및 치료 프로토콜을 제작해 배포하고 치매 관련 연수교육 프로그램도 개발해 치매국가책임사업에 의료인이 최선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의료전문가를 비롯한 민간과의 원활한 소통을 통해 지속 가능한 치매대책을 마련함으로써 치매환자는 물론 환자 가족까지도 국가가 책임지는 복지국가를 실현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는 의사협회의 바램 또한 온 국민의 소원이라고 본다. 서로 수고와 감사의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한바탕 일어난 어르신소동을 계기로 계단이 있는 곳이면 꼭 걸어 다녀야 함을 재인식하며 운동엔 격식과 규칙이 없어 나의 몸과 소통하며 또 나를 위해 공감하는 실천을 함으로써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치매를 사랑하면서 보듬을 수 있는 정책이 뒷받침 될 수 있는 그날을 기다려 본다.
- 2017-07-03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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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 건강 프로그램 어디까지 믿으세요?”
- 건강정보 홍수의 시대다. 우리 사회가 고령화로 접어든데다 건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신문이나 방송의 주된 소비층이 시니어인 것도 이유 중 하나다. 실제로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흰 가운을 입은 의사의 단체 출연은 예사다. 음식을 소개하며 자연스레 효능을 소개한다거나, 병을 앓았던 환자가 본인의 경험을 ‘진리’처럼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정작 의료계에서는 이런 건강정보 프로그램의 유해성을 경고한다. TV 건강 프로그램, 제대로 시청하는 방법은 없을까? 지난해 10월, 대한가정의학회 학회지에 흥미로운 논문 하나가 발표됐다. 중앙보훈병원 가정의학과 연구진이 발표한 논문으로, 50세 이상 성인의 TV 건강정보 프로그램에 대한 신뢰도가 건강 습관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내용이었다. 중앙보훈병원에 다녀간 환자 249명을 대상으로 조사된 이 연구의 결과, TV 건강 프로그램을 신뢰하는 이유로 ‘의사가 출연해서’가 51%(122명)로 가장 많았다. 그다음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줘서’(28.4%), ‘TV에서 전달하는 정보이므로’(11.2%), ‘실제 환자가 나와서’(7.4%) 순이었다. 또 TV가 제공하는 건강정보에 높은 신뢰도를 보이는 환자의 공통점은 TV 시청시간이 길다는 것이었다. 건강의 적은 쇼닥터? 이렇듯 시청자들의 의사에 대한 신뢰도는 상당하다. 시청자가 의학적 지식을 받아들일 때 의사의 의견은 마지막 보루와도 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방송에 출연하는 의사의 말을 100% 신뢰하기가 어려운 시대다. 한 예로 대한의사협회 중앙윤리위원회는 지난해 8월 발모에 효과가 있다며 자신이 만든 어성초 제품을 방송매체를 통해 홍보한 A원장에 대해 회원 권리 정지 2년과 위반금 2000만원을 부과했다. A원장은 어성초가 탈모를 치료한다고 자신이 만든 제품을 홍보하고, 물구나무서기를 하면 후두부 동맥 혈류량이 5배 증가해 발모 효과가 강해진다고 주장했다. 이에 의협은 의사의 품위를 훼손했다는 이유를 들어 중징계를 내렸다. 소위 쇼닥터에게 내린 첫 번째 징계로 꼽힌다. 쇼닥터(Show Doctor)는 최근에 만들어진 신조어로, 의학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시술에 대해 과장하거나 근거 없이 이야기하는 의사와 의료진을 가리키는 말이다. 의협에서는 쇼닥터에 의한 부작용을 막기 위해 지난 4월 의사윤리 강령·지침을 11년 만에 개정했다. 전문가들은 특정 제품을 판매하기 위한 목적 혹은 자신의 병원을 홍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의사들이 방송에 적극적으로 출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실제로 의료법에 의해 광고게재 제약을 받는 병원들은 언론기사 노출이나 방송 출연에 목매는 경우가 많다. 올해 언론중재위원회에서 4차까지 이뤄진 시정권고소위원회 결과를 살펴보면, 시정권고 총 374건 중 의료기관의 기사형 광고로 지적된 사안이 49건이나 된다. 체험 환자의 증언이 갖는 함정 의사들이 등장하지 않는 건강 프로그램들은 더욱 문제다. 특히 병을 앓았던 환자의 체험담은 시청자들을 솔깃하게 만든다. 방송사는 환자가 실제로 겪었던 일이라는 이유로 특별한 검증이나 여과 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한다. 시청자 입장에선 사실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분위기다. 말하자면 의사들이 농담처럼 말하는, “의사는 믿지 않아도 이웃사촌은 철석같이 믿는” 심리를 이용한 프로그램이다. 이들의 경험담에는 효험을 얻은 음식이나 민간요법을 만나기 전 어떤 병원에서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가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이런 증언 형식의 방송은 언급된 내용에 대한 책임에서 제작진이 비켜설 수 있게 해주는 구조도 된다. 방송은 그저 환자 경험에 대한 내용을 옮길 뿐이다. 일부 인터넷 환우 커뮤니티에는 흥미로운 체험을 한 환자를 찾는, 방송작가들을 위한 별도의 게시판이 운영될 정도다. 한 한의사는 “방송에서 특정 질환에 좋다고 소개된 약재나 음식을 살펴보면 몸에 다른 이상을 일으킬 정도로 비정상적인 분량을 섭취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면서 “실제 치료 효과는 다른 데서 왔는데 음식이나 민간요법에서 얻은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아 그대로 믿으면 낭패를 볼 수 있다”고 경고했다.
- 2017-07-03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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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고픈 도시민 유혹하는 귀어·귀촌
- 이른 아침 갈매기 울음소리에 눈이 떠진다. 찬거리가 부족하다 싶으면 낚싯대를 들고 방파제로 나서면 그만이고, 수평선을 장식하는 저녁놀은 훌륭한 안줏거리가 된다.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만큼이나 누구나 꿈꾸는 노후생활 중 하나는 어촌에서의 삶이다. TV 속 예능 프로그램이 간간이 보여주는 바닷가 마을에서의 유유자적한 생활은 어촌생활에 대한 동경을 더욱 증폭시킨다. 현실에서도 그럴까? 전문가들은 무작정 어촌으로 떠난다고 해서 즐거운 인생이 보장되지는 않는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잘만 준비하면 평범한 귀농보다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는 귀어·귀촌이다. 우리가 귀어·귀촌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귀어·귀촌에 대한 명확한 정의다. 귀어 혹은 귀어업은 어업활동을 하기 위해 타지에서 어촌에 거주하는 것을 의미하고, 귀촌 혹은 귀어촌은 어업활동 여부와 관계없이 타지에서 이주하는 것을 말한다. 즉 어촌에서 ‘어업활동’을 하는가가 핵심이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은 관계부처에서 수산업·어촌 발전 기본법 등을 근거로 이주자들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다. 귀어·귀촌이 뜨는 이유 최근 사회적으로 귀어·귀촌이 관심을 받는 이유는 대략 3가지 정도다. 먼저 활발한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이다. 고령화로 몸살을 앓는 어촌 지역에 젊은 도시민을 유치해 활력을 불어넣고, 이를 통해 채집이나 양식 중심의 어업에서 가공이나 관광 등 2·3차 산업과의 접목을 꾀한다는 계획이다. 실제로 이를 위해 정부에서는 창업자금을 1인당 최대 3억원, 주택마련 지원자금을 최대 5000만원까지 연리 2%, 5년 거치 10년 분활상환 형태로 제공하고 있다. 이외에도 수산업 경영인 육성사업 등을 통해 별도의 사업자금 지원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조선업계의 구조조정으로 취업시장으로 몰려나오고 있는 조선업 퇴직자의 구제 방안 중 하나로 귀어·귀촌제도가 활용되고 있다. 증가하고 있는 어가 소득도 귀어·귀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유 중 하나다. 지난 5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어가경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어가 평균소득은 가구당 4708만원으로 2015년(4389만원)에 비해 7% 증가했다. 이는 2013년 이후 4년 연속 증가한 수치다. 해양수산부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40대 이하 경영주 어가의 선전과 정부의 지속적 지원이 효과를 올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수산물 소비도 늘고 있다. 지난해 국내에서 소비된 수산물 식자재는 1인당 58kg 정도로 일본(45kg)을 넘어 세계 최고 수준이다. 공급에 비해 소비가 늘면서 단가와 수익도 자연스레 오르고 있는 모양새다. 무작정 바닷가 마을로 떠나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귀어·귀촌은 정서나 생활방식, 소득 마련 등 모든 면에서 도시에서의 삶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연고가 없는 사람이라면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해야 할지 더욱 막막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귀어·귀촌을 희망하지만 배경 지식이 없어 도움이 절실한 희망자들을 위해 운영되는 곳이 있다. 귀어귀촌종합센터다. 바다에서 무엇으로 먹고살까 귀어귀촌종합센터는 한국어촌어항협회가 설립하고 해양수산부가 지원하고 있는 기관으로, 귀어·귀촌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각종 지원제도 안내에서부터 업종 및 품목별 전문적인 기술상담, 창업계획서 작성 자문까지 돕는다. 귀어귀촌종합센터에서 희망자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담당하는 홍순택 전문위원은 다양한 지원책이 마련되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의지와 노력을 통한 사전준비라고 조언한다. “보통 특정 지역에 연고가 있고, 집안에서 하던 어업 업종이 있으면 비교적 귀어·귀촌이 쉽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본인에게 맞는 정착 지역과 먹고살 업종부터 찾아야 합니다. 누군가가 대신 결정해주지는 않아요. 또 지원제도가 잘되어 있어서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현지인들 사이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어야 정착에 성공합니다.” 일반적으로 귀어·귀촌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경쟁력 차이가 크다고 전문위원은 설명했다. “새 아이템으로 창업을 해보려는 20~30대와 은퇴 후 제2인생을 준비하려는 50~60대, 그리고 도시생활에서 도태돼 갈 곳을 찾는 40대로 나눌 수 있어요. 물론 정착을 가장 잘하는 부류는 자신만의 아이템으로 준비가 잘된 20~30대예요. 반면에 도피처를 찾는 40대들은 쉽게 정착하기 어렵습니다. 당장 뭘 해야 할지 구체적인 아이디어도 없는 상태이니까요.” 귀어·귀촌을 통해 할 수 있는 업종은 다양하다. 가장 많이 선택하는 것은 배를 사서 고기를 잡는 어선어업이다. 귀어업의 약 65% 정도가 배를 탄다. 이 중 3톤 미만의 작은 배를 사서 연안에서 조업하는 형태가 70%가 넘는다. 정부지원자금만으로도 창업이 가능하고 일을 배우기도 쉽다. 실패했을 때도 위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데다, 평균 노동시간은 하루 3~5시간, 조업 일수도 연간 동해안은 150일, 남·서해안은 200~250일 정도로 다른 직종에 비해 짧다. 금어기가 존재하고 기상에 따라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최근 각광받는 업종 중 하나는 양식어업이다. 사전 지식과 자금 확보가 필수이지만 부가가치가 높기 때문에 인기가 많다. 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김, 굴, 전복 등의 해수면 양식 외에 육지에서 할 수 있는 내수면 양식도 있다. 뱀장어나 미꾸라지, 아열대성 민물새우인 큰징거미새우가 대표적이다. 이밖에 수산물 유통업, 가공업이나 소금산업 등도 선택되고, 최근에는 어촌관광이나 해양수산레저 사업을 포함한 어촌 비즈니스 사업에 대한 관심도 높다. 고령 은퇴자의 경우 해안가에서 조개나 낙지 등의 수산물을 채취하는 ‘맨손 어업’을 선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촌에 정착만 잘 하면 맨손 어업만으로도 기본적인 생활 유지는 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성공적인 정착을 위한 필수 요소 전문가들은 귀어·귀촌을 위한 정보와 기초준비 단계로 귀어귀촌종합센터에서 상담을 받은 후, 각 기관에서 마련하고 있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해볼 것을 권한다. 교육 프로그램은 해양수산인재개발원에서 진행하는 귀어가, 귀어촌 정착교육 과정과 귀어귀촌종합센터에서 개최하는 귀어귀촌아카데미와 코칭클래스가 대표적이다. 또 어선어업, 양식업, 해양레저 등 업종에 따른 전문 교육기관도 있다. 귀어·귀촌 생활을 경험할 수 있는 귀어촌 홈스테이 지원사업도 있다. 귀어·귀촌 희망자가 어촌에서 미리 살아보고 정착 여부나 업종 선택 등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체험 프로그램이다. 정부와 지자체 예산으로 숙박비와 컨설팅 비용의 80%까지 지원한다. 귀어·귀촌 지역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각 지자체의 도시민유치희망 정보를 확인하는 것도 방법이다. 도시민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지자체의 경우 어촌계 가입비 면제, 어업권 매입 안내, 주거용 사택 실비 제공, 일자리 알선 등 여러 가지 지원을 하고 있다. 다만 지자체 여건상 이런 지원책들은 지속성이 부족한 경우가 많아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귀어귀촌종합센터의 SNS를 팔로우해두면 편하다. 또 귀어·귀촌 경험자들은 원하는 지역에서 미리 살아보고 마을 주민들과 사전에 의사소통을 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귀띔한다. 지역에 따라 어촌계 가입이 까다롭거나 불가능한 경우도 있고 배타적, 폐쇄적 성향을 띠는 마을도 있기 때문이다. 연안어업이 가능한 어장이나 양식을 위한 해수면, 해산물 채취가 가능한 해안 등 대부분의 지역 해양자원은 어촌계의 공동소유로 관리된다. 이는 어업권이자 자산의 개념이므로 어촌계의 일원이 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고 경우에 따라 큰 비용이 들기도 한다. 한 지역 어촌계장은 “도시민들은 어촌을 생활공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실제로는 생활공간이자 생업의 현장입니다. 따라서 마을의 예법이나 상호간의 약속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라고 조언했다.
- 2017-06-12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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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나가는 사람에게는 이유가 있다 PART4] 철학이 있는 사람 ②자생한방병원 국제진료센터 라이문드 로이어 센터장
- 그때는 마치 기적과도 같았다. 백인 청년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 없었다. 좀 전까지 걷기 힘들었던 다리가 동양의 비술을 만나자 5분 만에 나아버렸다. 한의학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반드시 이 학문을 익히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주변의 만류가 심했다. 한의대에서 거절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한의사 국가고시 사상 최초로 합격한 백인이 되었다. 자생한방병원 국제진료센터 라이문드 로이어(Raimund Royer·53) 센터장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푸른 눈의 한의사. 많은 언론에서 라이문드 로이어 원장을 지칭하는 수식어다. 이 수식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편견이 보인다. 한의사라는 단어보다는 푸른 눈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외국인으로 바라보는 시선. 그 시선으로 인해 그는 역경도 겪었고 혜택도 받았다. 오스트리아인인 그가 처음 한국에 온 것은 1987년. 무역회사에 다니던 그는 동양의 아시아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나라를 찾았고, 그중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눈에 들어왔다고. “당시 한국은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어요. 1988년 서울올림픽 이전이었으니까 유럽에서 한국에 관한 정보는 전무했어요. 그렇게 무작정 서울에 도착했을 때 인상 깊었던 것은 젊은이들의 활기로 가득한 도시의 모습이었죠. 서울의 역동적인 모습은 알프스 산맥의 작은 동네 출신인 저를 사로잡았어요.” 한국에서 지내다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노란띠를 매고 한창 재미가 붙을 무렵 훈련 중 발목을 다치게 된다. 그리고 이때 한의학과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발목이 다쳐서 갔는데 엉뚱한 부위에 침을 놓더라고요. 처음엔 당황해서 보디랭귀지를 섞어가며 항의했어요. 그런데 5분 만에 통증이 사라지면서 걸을 만해지더라고요. 마법 같았죠. 한의원 특유의 한약 냄새, 약장의 모습 등이 낯설고 신기했습니다. 한의학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더라고요. 알아보니 영화에 등장하는 무술처럼 엄청난 스승을 만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대학을 통해 체계화된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도 절 놀라게 했어요. 당장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그의 뜻과는 달리 한의사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주변의 만류도 컸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자까지 알아야 하는데 가능하겠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대학 쪽에서도 난색을 표했다. 유명 한의대에 입학 가능 여부를 문의했는데 거절한다는 회신이 왔다. 이미 한 차례 외국인이 도전했다가 중도 포기한 전력이 있기도 하고, 외국인이 제대로 된 수강이 가능하겠느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표현(한국어로)대로 그는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사내였다. 한국어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해서 어학당을 다니며 한국어를 익혔다. 한문과 동양문화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고 해서 강릉대학교에서 동양철학을 배웠다. 그때 대관령 자락에 있는 빈집에서 장작불을 지펴 가마솥밥을 해먹고 다녀, 주변에서 미친놈 소리까지 들었다. 그 후 전국을 수소문한 끝에 자신을 받아주겠다는 대구한의대(당시 경산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렇게 원하던 한의대생이 됐지만 자격을 획득하기까지 또 다른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1993년에 약사에게 한약 조제권을 주는 것을 놓고 한의대생들의 수업거부가 있었어요. 그때 다른 학생들의 뜻에 따랐기 때문에 수업을 제대로 못 받았죠. 어렵게 한의대생이 됐는데 말이죠. 그리고 1995년에 약학대학 안에 한약학과를 설치하는 문제 때문에 또다시 수업거부가 있었어요. 그때는 안 되겠다 싶어 강의를 꼭 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교수님들이 파업을 하시더라고요(웃음).” 정작 수업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한문이 낯선 것은 한국 학생들도 마찬가지였고, 전공 수업이 익숙해지면서 성적은 점점 향상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서양인 최초 한의사라는 감격적인 타이틀을 따냈다. 아직까지도 서양인 한의사는 그가 유일하다. 한의사가 되고 난 후 그는 또 다른 목표를 세웠다. 그중 하나가 한의학의 세계화다. 자생한방병원에서 그에게 국제진료센터를 제안했을 때 어렵지 않게 수락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효과가 좋고, 체계적으로 발전해온 한의학이 아직 세계 속에 자리매김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했다. “제 고국에 인접한 독일의 경우 TCM(중의학) 관련 단체만 60개가 넘어요. 소속된 양의사들이 3만~5만 명 정도 돼요. 한국의 한의사보다 많은 셈이죠. 이들은 양의학의 테두리 안에서 침술과 같은 동양의학의 장점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양의학과 한의학 사이의 벽이 너무 높아요. 왜 이렇게 싸우나 의문이 들 정도죠. 확실한 건 체계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면 분명 한의학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거예요. 특히 한약의 우수성은 중의학이 못 따라옵니다. 부작용 적고 효과 좋은 한약의 장점을 세계에 알리고 싶어요.” 한의학을 알리고 싶다는 그의 열망은 생각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CNN 등 다양한 해외 매체와의 접촉을 통해 한의학의 장점을 알렸고, 국제학술대회 등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대한한의사협회에 소속돼 일하기도 했다. 의사로서의 그는 어떨까. 병원 관계자는 그를 찾는 환자들이 많아 실적만으로도 병원 내에서 상위권이라고 귀띔한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용하다는 소문이 난 덕분이다. “이젠 고향이에요.” 한국 생활이 어떠냐는 질문에 돌아온 그의 대답. 한국 생활 30년. 어지간한 젊은 청년들보다 한국 생활을 오래한 그다. 그럴 수밖에.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그 의문이 머릿속에 맴돈다. ‘푸른 눈’에 가려 그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누구보다 한의학을 아끼고 사랑하며, 환자 걱정을 멈추지 않는 그. 이제 그를 바라볼 때 인종을 구분하는 수식어는 내려놓아도 될 것 같다. 그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멋진 韓醫師다.
- 2017-02-13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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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환자 좋은 의사 되기] 한국이 좋아 귀화한 중국 출신 여성과 혈액종양내과 전문의의 라뽀
- “샤오메이즈(小美子, 이쁜아) 넌 죽지 않아. 꼭 살아날 거야. 걱정하지 마.” 오빠는 막내의 손을 꼭 잡으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서해를 넘어 한국까지 날아온 오빠가 동생은 너무나 고맙고 미안했다. 그렇게 오빠의 조혈모세포는 동생 몸으로 흘러들어 생명을 살렸다. 바로 중국 출신의 귀화인 등희하(滕希霞·38)씨의 이야기다. 이 감동적인 만남에는 든든한 후원자 가천대 길병원 혈액종양내과의 박진희(朴眞嬉·51) 교수가 있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등희하씨는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해외생활을 동경하던 평범한 소녀였다. 1997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소녀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외국을 향한다. 한국이었다. 물론 타향살이는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적응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고향에 남은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역시 참기 힘들었다. 그러나 중국어 강사로 어느 정도 기반을 잡게 됐고, 2007년 귀화를 통해 한국인이 되었다. “한국에서 사는 게 좋았어요. 그래서 귀화도 신청했죠. 서울생활에 익숙할 때쯤 같은 학원 강사를 통해 남자를 소개받았고, 2009년에 결혼했어요. 얼마 뒤 아들도 얻었고요. 남편과 함께 작은 중국 음식점을 열어 장사도 열심히 했죠.” 갑작스런 하혈에 놀라다 모든 것이 평탄하게 잘 흘러갔고 행복했다. 장사도 그럭저럭 잘되었고, 둘째 임신 소식에 새로운 복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기쁨은 여기까지였다. “어느 날부터 하혈이 계속 됐어요. 2011년 6월쯤이었어요. 동네 병원에 가니까 난소암이 의심된다고 하더라고요. 좀 더 큰 병원으로 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병원을 두 번 더 옮겼어요. 그렇게 길병원까지 오게 됐죠.” 결국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한 아이는 유산됐고, 그 후에도 출혈은 계속됐다. 피 검사결과 백혈구 수치가 문제였다. 급성골수성백혈병이었다. “처음에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는 믿을 수 없었어요. 우리 집안에는 이 병에 걸린 사람이 없었거든요. 보통은 드라마 속 여주인공들이 걸리잖아요. 또 그 주인공들은 금방 죽어버리고. 저도 그렇게 될까봐 너무 겁이 났어요. 길병원을 믿을 수 있나 의심할 정도였으니까요.”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이식수술 “똘똘한 친구예요.” 박진희 교수는 등희하씨를 이렇게 기억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나요. 제가 최대한 환자와 대화를 많이 나누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그녀와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병에 관한 이야기는 물론이고 남편과 하는 가게 이야기에서부터 시댁이야기, 한국생활에 대한 이야기까지요.” 등희하씨의 치료를 진행하는 데는 여러 가지 걸림돌들이 많았다. 먼저 경제적인 어려움이었다. 등희하씨 없이 한국어가 서툰 남편 혼자서 음식점을 운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그녀의 투병으로 가게는 포기해야 했다. 수익원이 없어지니 치료비가 문제였다. 박 교수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백혈병은 전체 암종 중에서 치료비가 가장 많이 드는 암으로 꼽혀요. 다행히 보험제도가 잘되어 있지만 그래도 저소득층에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죠. 그래서 사회사업실을 통해 한국혈액암협회 지원을 받거나 기초생활수급자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어요.” 등씨 입장에선 박 교수가 의사이기 이전에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준 후원자였던 셈이다. 박 교수와 길병원의 지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의 치료를 위해서는 조혈모세포의 이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기증자를 기다리려면 너무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평범한 한국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가족을 병원으로 불러 가능성을 타진했겠지만, 그녀의 가족은 모두 중국에 있어 이식은커녕 검사조차 쉽지 않았다. 박 교수와 병원 관계자들은 중국 병원과 직접 연락을 해야 했다. 그녀의 가족들 중 누가 이식에 적합한지 검사를 부탁했고, 검사결과에 대한 의견교환이 이뤄졌다. 다행히 두 오빠가 적합했고, 그중 회사원인 큰오빠 대신 사업을 하는 작은 오빠가 기증자로 결정됐다. 하지만 넘어야 될 또 하나의 산이 있었다. 이식을 위해 장기체류를 하기 위해서는 비자가 있어야 했는데 거절된 것이다. 또다시 박 교수와 길병원이 나서야 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난 2012년 3월에야 겨우 이식이 이뤄졌다. 등씨는 “교수님과 병원에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살려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우리 집안 식구들이 모두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있어요. 남편은 물론이고 작은 오빠도 한국에 왔을 때 인사를 드렸고, 어머니도 한국에 오셨을 때 병원을 찾아 교수님을 뵈었어요. 덕분에 딸이 살 수 있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가족 사랑이 가장 큰 힘 큰 힘이 되어준 것은 역시 가족이다. 이식이 필요하다고 형제들에게 전했을 때 주저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가족을 살리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다면 당연히 도와야 한다고 했다. 기증자로 결정되자 작은오빠는 한 달 전부터 좋아하는 술도 끊고 운동을 시작했다. 건강한 조혈모세포를 동생에게 주고 싶어서였다. 몸에 좋다는 것 다 찾아먹다 간수치가 오를 정도로 몸 관리에 신경을 썼다. 물론 남편도 힘이 됐지만, 가장 의지가 된 것은 올해 8세가 된 아들 리우한이다. “제가 아이를 너무 좋아하거든요. 어떻게 이렇게 이쁜 아이를 제가 낳았나 싶을 정도예요. 백혈병 치료를 받기 시작했을 때는 아들이 세 살이었는데, 항암치료를 위해서 무균실에 들어갔을 때 아이를 볼 수 없는 것이 가장 괴로웠어요. 남편은 유리창 너머로 통화라도 할 수 있었지만, 아이는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아이의 노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보면서 버텼어요. 아이를 위해서라도 꼭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죠.” 감기와 비슷한 백혈병 초기 증세 백혈병 또는 혈액암으로도 불리는 이 병은 어떤 병일까. 우리의 혈액은 백혈구와 적혈구, 혈소판으로 구성되는데, 혈액세포들의 생산은 조혈세포가 맡는다. 백혈병은 조혈세포가 암세포로 인해 비정상이 되면서 혈액세포 생성에 문제가 생기는 병. 박 교수는 “어느 날부터 감기가 낫질 않는다든가 멍이 쉽게 들고, 빈혈 증상이 나타난다면 의심해볼 필요가 있어요. 대부분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증상들이니까, 정기적인 건강검진이 중요해요. 하지만 혈액암은 제대로만 치료하면 대부분 완치하는 병이에요. 경제적 부담이 문제인데, 소아혈액암의 경우 후원단체나 기관이 많아 그래도 큰 걱정은 덜은 상태죠”라고 설명했다. 일부 혈액암의 경우 치료를 위해 고가의 표적치료제를 사용한다. 가장 대표적인 표적치료제인 글리백은 미국에서 보험이 없으면 환자가 월 6000달러(한화 약 700만원)를 부담해야 하지만, 국내에서는 건강보험제도를 통해 복제약값 월 200만원 중에서 5%인 10만원 정도만 부담하면 된다. 영양제 가격 수준이다. 그렇다고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시니어, 즉 고령혈액암 환자들이 문제라고 박 교수는 지적한다. “의학계에서도 과거엔 적극적 치료의 필요성에 대한 논란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어요. 연령과 관계없이 신체나이(상태)만 충분하다면 완쾌시킬 수 있다는 것이죠. 문제는 비용을 후원하는 기관들이 고령혈액암 환자에게는 큰 관심이 없다는 거예요. 사회적 후원이 필요해요.” 베르니케 증후군으로 고생하다 등희하씨의 치료도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치료비 걱정은 해결됐지만, 영양상태가 좋지 않았던 등씨가 힘든 항암치료를 견뎌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겨우 먹은 것도 다 토해내는 통에 너무 힘이 들었어요. 몸속의 백혈구를 모두 죽이고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몸의 면역기능이 약해지니까 식도에 곰팡이가 생겼어요. 가뜩이나 잘 먹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목에 문제까지 생기니 더 힘들었죠.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 몸무게가 6kg이나 빠졌어요.” 조혈모세포 이식은 환자 입장에선 간단한 과정이다. 수혈받는 것처럼 누워서 받기만 하면 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마치 수술처럼 표현되는 것은 극적 연출이지 실제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 박 교수의 설명이다. 등씨는 치료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든 치료를 하고 나서도 두 달 동안 꼼짝 못했다. 사랑하는 아들도 제대로 안아주지 못하고 집에서 누워만 있었다. 박 교수는 그녀가 겪은 증상이 베르니케 증후군의 일종이라고 설명한다. 비타민 등의 영양결핍이 겹친 탓이다. 계속 어지럽고 눈앞의 물체가 흔들려 보이는 증상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웠다. 긍정적인 생각이 날 살려냈다 힘든 과정을 이겨낸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녀의 백혈병은 ‘완쾌’ 단계에 있다. 이제 재발 가능성은 거의 없는 상태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란다. 혹시 다른 암이 발병될 수 있으니 정기적인 검진만 하면 된다. 등씨는 요즘 새로운 직업에 재미를 붙였다. 한국화장품 회사 소속으로 중국의 SNS를 통해 현지 젊은 여성들에게 화장품을 알리고 구매를 돕는 일을 한다.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 아닌데다 흥미로운 분야라 즐겁게 일한다. 등씨는 늘 긍정적인 자신의 태도가 삶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힘들었던 투병생활을 이겨낸 것도, 새로운 삶에 잘 적응해나가는 것도 긍정적 마음가짐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와 비슷한 병을 앓는 분들이 이 기사를 보신다면 꼭 긍정적인 생각을 하시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때는 정말 하루하루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기분이었거든요. 하지만 병을 이겨내겠다, 지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하루를 살더라도 행복하게 살자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 2017-02-08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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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중년@] 자신에게 진실해야 좋은 수필을 쓸 수 있습니다
- 40대에서 70대까지 연령층도 다양하다. 직업군 또한 그렇다. 안과의사, 사업가, 지역신문 기자, 전직 교사, 외교관, 국회 서기관 등을 지내온 사람들이 매달 자리를 함께한다. 다양한 기억과 경험을 가진 이들의 중심 화제는 바로 수필이다. 진솔한 마음으로 글쓰기에 몰두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서로 다른 언어와 감성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마음을 나누고 공감하며 글쓰기를 하는 모임, 그녀들의 ‘스페이스에세이 문학회’를 찾았다. 2013년 3월부터 모임이 시작됐다. 글 쓰는 일이 좋아서 만나는 사람들. 이들이 모이는 가장 큰 목적은 동인지 발간이다. 지금까지 총 세 권의 동인지를 발간했다. 모임 이름은 스페이스에세이 문학회. 다양한 삶을 산 15명의 회원이 알록달록한 색깔로 글을 쓰고 있다. 회원들은 수필가 권남희(한국수필가협회 편집주간)의 제자들로 대부분 등단한 수필가다. 한 달에 한 번씩 자리를 함께하는 스페이스에세이 문학회. 지난 11월에는 올해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은 밥 딜런을 주제로 열띤 토론과 시낭송을 이어갔다. 수필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작업입니다 수필은 자기 이야기를 쓰는 것이라고 배웠다. 감정이 마음껏 드러나도 되고 얼마든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문학 장르. 실제로 미사여구나 화려한 문장이 넘치는 수필을 종종 만나기도 한다. 물론 어떤 수필이 좋고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짧고 강렬한 느낌을 주는 수필이 있는가 하면 서정적 표현에 무게를 두는 수필도 있다. 그러므로 그냥 있는 그대로 자신이 쓰고 싶은 대로 표현하는 것이 수필이라는 것. 스페이스에세이 문학회 김종란(53) 회장은 수필은 어떤 선생님을 만나느냐 혹은 자신이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내용을 중심으로 쓸 때와 서정적인 느낌을 중시하며 쓸 때의 표현은 정말 많이 다릅니다.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너무 길어지고 처지면 잘 안 읽혀요. 또 느낌과 표현을 중시하는 글도 그 강도와 빈도가 적절해야 합니다. 어쨌든 요즘 수필은 예전에 비해 훨씬 더 다양해졌어요. 통통 튀는 수필도 있죠. 그런데 튀는 글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수필은 아니고 자기가 드러나야 해요. 비겁하게 피해가는 것은 수필이 아니에요.” 수필의 중심에는 첫째도 둘째도 진실이 자리하고 있다. 일상적인 내용을 써도 기본적으로 그 밑에 깔려야 하는 것은 진실성이다. 수필보다 시를 먼저 쓰기 시작했다는 회원 임금희(60)씨는 수필을 잘 쓴다와 못쓴다의 기준은 진실한가 진실하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수필이 시와 소설과 다른 점입니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들을 글로 쓰는 것이 얼핏 쉬워 보이지만 사실은 시, 소설보다 수필이 훨씬 어려워요. 왜냐하면 옷을 벗고 다 보여줘야 하니까요. 그런데 옷 벗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수필은 감추면 안 돼요. 옷 벗고 보여주는 게 수필이거든. 싫은 사람은 시나 소설을 써야죠. 수필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솔직함입니다. 수필은 결국 자기 얘기를 해야 하니 정직해야죠. 기자가 남의 진실을 보는 사람이라면 수필가는 나 자신의 진실을 보는 사람입니다. 진정성, 진실성이 생명인 글쓰기인 거죠.” 수필 쓰는 시간은 힐링의 시간이에요 사실 글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글을 써보겠다는 흥분되고 떨리는 마음으로 모임에 들어왔다가도 어려운 과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나가는 회원도 많다. 그 이유는 뭘까? 바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거부감 또는 불편함 때문이다. 그러나 수필은 스스로에게 치유의 시간을 마련해준다. 글을 쓸 때만큼이라도 자신을 제대로 보고 또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종란 회장도 이 모임의 회원들이 수필이라는 글쓰기를 통해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위안을 받는다고 말했다. “상담받는 것만큼이나 힐링이 되는 시간이 수필을 쓰는 시간입니다. 예전에 권남희 선생님과 함께 참여했던 동인지 제목이 였어요. 글을 쓰면서 일차적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을 갖는 거지요.” 미니 인터뷰 시니어들에게 수필 모임이 좋다 (김화순·64) 환갑이 넘으니 친구들 모임에서 내 얘기가 없더라고요. 저는 아직 손주를 안 봤는데 친구들은 대부분 손주를 봤어요. 모이면 남편 이야기, 손주 이야기, 자식 이야기밖에 안 해요. 그러니까 앞으로 그 사람들에게 남은 인생은 딱 그것인 거죠. 그러나 이 문학회에 오면 여기서만큼은 내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내 꿈, 앞으로의 희망, 올해 책 한번 내보겠다고 말할 수 있죠. 글쓰기가 미진할 때는 공부도 할 수 있어 좋습니다. 이것이 다른 모임과의 차이죠. 다른 곳에서는 내 얘기를 안 해요. 이미 그 사회에서는 고개를 넘은 거죠. 새로운 것을 만나게 되는 게 행복입니다 (송복련·69) 글을 쓰니까 좋은 점이 마음을 채워주는 수다를 할 수 있어서 좋아요. 그리고 다른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요. 미술·음악 공연장도 가게 되고요. 낯선 도시도 경험하고, 책도 많이 읽게 돼요. 오늘 모임에서는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밥 딜런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잖아요. 오늘 주제이기 때문에 밥 딜런에 대해 공부도 했습니다. 사실 음악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모르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에 대한 책을 읽어보니까 읽으면 읽을수록 재밌더라고요. 아! 매력적이네. 이 사람이 그럴 만했구나 이해했어요. 미국 사회에서 밥 딜런이 사랑을 받은 이유가 있고 그 사랑이 지금까지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그 사람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했기 때문이더라고요. 그러면서 성장한 거죠. 오늘 아침에 인터넷 들어가서 봤는데 가사가 완전 시더군요. 그러면 시인이지요. 다른 문화, 잘 몰랐던 문화를 접하게 되어 이 모임에 나오는 게 너무 좋습니다.
- 2016-12-06 1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