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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한과 고난의 길… 이순신의 백의종군
-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글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mcj4627@naver.com 정유재란 첫 전투 칠천량 해전의 치욕은 예고되어 있었다. 수하 장졸과 백성들이 하늘같이 떠받드는 장수를 내치고, 무능하고 용렬한 장수를 앉히고 어찌 이기기를 바라겠는가. 선조는 정유년(1597년) 1월 28일 이순신을 충청·전라 양도수군통제사로, 원균을 경상수군통제사로 발령했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한 계급 강등되고, 육군으로 전출되었던 원균이 수군에 복귀하여 최전방 수역을 맡게 된 것이다. 한산도 통제영을 거제도로 전진 배치하라는 명령을 수행하지 않은 데 대한 문책이었다. 이 인사에는 조정을 장악한 서인세력의 비호를 받은 원균의 모략이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통제영을 왜군 본진(부산포)을 견제할 수 있도록 한산도에서 거제도 동쪽으로 이동시켜야 한다는 조정의 논의가 이순신의 입지를 더욱 압박하기도 했다. 이순신은 그 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군은 임진년 이래 경남 동부 해역 요소마다 견고한 성을 쌓고 2만 정도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적진을 코앞에 둔 곳으로 수군총사령부를 옮기는 것은 섶을 지고 불길로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게 이순신의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꼼짝달싹하지 못할 죄를 뒤집어쓴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이 다시 쳐들어오는 길목을 지켜 출동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진노한 선조의 명으로 이순신은 함거에 실려 한양으로 압송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앉았다. 옥에 갇혀 국문을 당하다가 가까스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온 백의종군 길에서, 그는 칠천량 패전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전멸한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경상도와 전라도 포구와 고을을 순회하면서 흩어진 수군병력을 불러 모으고 병기와 군량을 찾아냈다. 그 사이 다급한 불부터 끄려는 듯, 조정은 그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앉혔다. 불운의 장수가 걸었던 통한의 길 이순신이 한양으로 잡혀간 것은 정유년 2월 26일이었다. 시류에 편승한 조정 중신이 모두 침을 튀기며 이순신을 죽이라고 했지만, 노 재상 정탁의 신구차(伸救箚, 목숨을 걸고 구명하는 상소문)라는 상소 덕에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보전했다. 이순신이 옥에서 풀려난 것은 잡혀간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4월 1일이었다. 그날부터 백의종군 길에 나선 그가 복직되어 다시 통제사가 된 8월의 회령포 취임식까지, 불운의 장수가 걸었던 통한의 길을 자동차로 둘러보았다. 이순신이 5개월 넘게 걷고 말달렸던 길을 주마간산처럼 달린 1박 2일 여행이었다. “합천 초계에 주둔한 도원수 권율 막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은 이순신은 남대문 밖 관노 집에서 아들과 조카의 마중을 받았다. 고문에 시달린 육신을 치유할 여유도 없이 하루를 쉬어 길을 떠난 그는 아산 선영에 들러 눈물의 참배를 한다. 전라 좌수영(여수) 마을에 머물던 어머니의 귀향 소식 덕분에 고향 집에 며칠 유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그에게 먼저 당도한 소식은 어머니 부음이었다. 아들의 하옥 소식에 허겁지겁 서해안을 따라 배편으로 올라오다 풍랑으로 와병, 끝내 주검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호송관의 독촉에 못 이겨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그는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을 안고 남행길에 오른다. 공주-여산-전주-남원-하동을 거쳐 초계에 당도한 것이 6월 4일이었다. 초계는 도원수의 진을 둘 만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영호남 여러 곳으로 통하는 길목을 통제하면서 육군과 수군 작전을 지휘할 적지로 보기 어려운 곳이었다. 왜적의 내륙 진출을 막으려면 교통의 요지를 차지하는 게 상식인데, 어찌하여 굽이굽이 험한 산길로 이어진 궁벽한 곳에 도원수의 진을 친 것인가. 도원수가 주둔했던 곳이 어딘지는 아직 특정되지 않았다. 한때 초계면사무소 자리가 그곳이었다 해서 표지판까지 있었다지만, 향토사학계가 들고 일어나 한동안 시끄러웠다. 그 뒤 경남도와 합천군은 마을 앞 농경지를 사들여 역사공원을 꾸미면서, 고증도 없이 호화로운 원수부 건물과 객사까지 세웠다. 많은 예산을 들인 보여주기 식 사적지로 보였다. 백의종군 당시 이순신의 숙소 모여곡이라는 마을에도 이설이 있지만, 합천군 율곡면 낙민마을 설이 유력하다. 그가 묵었던 집 주인 이어해(李漁海)의 13대손이 지금도 살고 있고, 당시의 일화도 전설처럼 전해져 온다. 마을 앞 정자나무 아래에는 백의종군 길 표지석이 섰고, 그 뒤편 야산 기슭에는 마을이 정겹게 들어앉았다. 칠천량 패전 소식에 낙담한 도원수의 한탄을 듣고 이순신은 “제가 한 번 나가보고 계책을 세움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그렇게 길을 나선 것이 7월 18일이었다. 곧바로 남행하여 사천 노량의 해안마을을 둘러보고 진양 수곡면 원계리 손경례(孫景禮) 집에 머물 때인 8월 3일,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 직첩을 다시 받는다. 에는 이때의 일이 매우 덤덤하게 적혀 있다. “맑음. 이른 아침 뜻밖에 선전관 양호가 교서와 유서를 가져왔다. 분부 내용인즉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숙배(肅拜)한 뒤에 받자온 서장을 써서 봉해 올렸다.” 며칠을 두고 큰비가 내려 근심과 우울증이 심해진 탓이겠으나, 복직인사에 대한 감상치고는 지나치게 무덤덤한 이 점이 바로 그의 진면목이다. 이순신에게 미안했는지, 선조는 유서에서 “지난번 그대의 직첩을 바꾸고 죄인의 이름으로 백의종군케 한 것은 과인의 지모가 밝지 못하여 생긴 일”이라고 사과했다. 그러고는 “이토록 패전의 욕을 당하게 되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尙何言哉)!” 하면서 ‘상하언재(尙何言哉)’를 반복했다. 사적지 손경례 집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목화 시배지로 유명한 산청군 단성에서 남으로 뻗은 지방도를 한참 달려가니 길가에 백의종군 길 표지석이 서 있고, 그 옆 전주에는 ‘손경례 가(家)’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급히 차를 세우고 찾아들어갔으나 동네에는 인적이 없었다. 한참 찾아 헤맨 끝에 12대손이라는 손도근(孫道根·80) 옹을 만날 수 있었다. 직계자손이냐는 물음에 손 옹은 손사래를 치면서 “직계는 서울에 살고 관리인이 집을 지키고 있는데 꼴이 이렇소” 했다. 그러면서 자기 조상 이름을 함부로 부른 데 대한 불쾌감을 내비추었다. 얼른 사과하고 당시의 일화를 물으니, 이은상의 에 다 나와 있는 이야기라면서도 “비가 많이 와서 충무공께서 우리 조상 집에 닷새를 묵어가셨다”고 자랑했다. 비에 갇혔던 길을 벌충이라도 하려는 듯, 이순신은 발길을 재촉하여 하동-구례-곡성-옥과-순천-낙안 땅을 지나 보성에 당도했다.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이제 사또께서 오셨으니 우리는 살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그들은 모두 난리를 피해 산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었다. 이순신은 말에서 내려 피란민들 손을 부여잡고 부디 몸조심하라고 당부하면서, 안쓰러움을 표했다. 젊은 장정들은 처자에게 “나는 대감을 따라갈 터이니 너희는 천천히 찾아 오거라” 하고 따라나서기도 했다. 노인들은 길가에 늘어서서 술병을 바쳤다. 통제사가 받지 않으니까 울면서 사정했다. 더 이상은 사양할 수 없었다. 아직 12척의 배가 남았다 보성 땅에서 제일 먼저 찾아든 곳은 조양창(兆陽倉)이었다. 다행히 이 국창(國倉)에는 곡식이 봉인된 채로 남아 있었다. 순천 부유창 등 고을마다 창고가 잿더미가 되었는데, 군량으로 쓸 곡식을 구했으니 얼마나 요긴했겠는가. 창고들이 잿더미가 되고 사람 그림자가 끊긴 것은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청야작전을 재촉한 탓이었다. 왜적은 그렇게 바짝 다가와 있었다. 칠천량 패전으로 남녘 바다와 뭍을 안마당처럼 누비게 된 왜적이 본격적으로 호남 침공에 나선 것이었다. 조양창 자리는 지금 흔적도 없다. 그 사이 간척공사로 바다가 뭍으로 변한 것이다. 통제사가 묵었다는 김안도의 집도 마찬가지다. 400년 넘는 세월의 무게가 짓누른, 보이지 않는 흔적일 것이다. 보성에서 이순신은 흩어진 장수와 병졸을 모으고 군량을 보충하기 위해 아흐레를 머물렀다. 보성읍성 열선루(列仙樓)에 머물던 8월 15일 선전관 박천봉이 임금의 유지(有旨·편지)를 가져왔다. “약세인 조선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의탁하여 싸우라”는 명령이었다. 통제사는 “공문 작성 때 영의정 유성룡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영의정은 경기지방 순행 중이었다는 선전관 말로 보아 조정 대신들이 유성룡 부재를 틈타 다시 자신을 나락으로 몰아넣으려는 계략이라고 생각했다. 이날 밤 통제사는 대취했다. 임금의 명을 받들지 않으면 다시 함거에 실려 올라가게 될 것이고, 명을 받들면 조선수군 재건은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괴로움을 잊고 싶어 그는 군관들을 불러 통음을 하고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이순신은 결심한 듯 열선루 누각에 앉아 유명한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장계를 썼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사옵니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아직도 할 수 있사옵니다. 전선은 적지만 신이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왜적이 바다와 뭍에서 온갖 패악을 부리는 와중에 그런 용기를 가진 인물은 이순신 한 사람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열선루는 지금 없다. 이순신의 뒤를 밟아온 왜적이 보성 땅을 분탕질할 때 불타 없어졌다. 전란이 끝난 뒤 복원되었지만 일제 때 다시 철거되었다. 불공대천지수의 사적이라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 자리에 지금은 보성초등학교와 보성군청이 들어서 있다. 몇 해 전 청사 신축공사와 도로공사 때 발굴된 주춧돌 넷과 댓돌들은 지금 군청 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보성군에 따르면 곧 있을 열선루 복원공사에 그대로 쓸 계획이라 한다. 보성을 떠난 이순신은 18일 회령포(會寧浦·장흥군 회진면 회진리)에 닿아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을 갖고 그 유명한 ‘회령포 결의’를 다진다. 에는 그날 “수사 배설(裵楔)이 뱃멀미를 핑계로 보이지 않았다. 포구 관청에서 잤다”고 씌어 있다. 17일자 일기에 “군영구미(軍營仇未·강진군 대구면)에 당도하니 경내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수사 배설이 우리가 타고 갈 배를 보내지 않았다”고 쓴 것으로 보아 이순신이 두려워 피한 것이 분명하다. 20일 일기에는 배설이 임금의 삼도수군통제사 임명교서에 숙배하기를 거부했다면서 “건방진 태도가 말할 수 없기에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고 썼다. 수사의 체면을 봐서 권율처럼 고위 군관을 직접 벌하지 않고 수하에게 벌을 주어 경고한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은 19일이었다. 배설이 가져온 12척의 전선과 120명의 장졸이 참석한 초라한 행사였다. 그러나 구국의 결의만은 드높았다. “우리는 다 같이 임금의 명을 받들었으니 의리상 같이 죽어야 마땅하다.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아까우랴!” 에 적힌 통제사 취임사는 이토록 뜨거웠다. 임금과 조정을 속이고 명을 받들지 않은 죄인의 신분에서 다시 수군 총수로 돌아왔으나, 그에게 주어진 것은 달랑 직첩 하나였다. 회령포는 오늘날의 정남진 바닷가다. 서울에서 정남쪽 끝이라 해서 붙은 이름인데, 해남 땅끝 마을 가기만큼 멀다. 오전에 초계를 떠나 해 안에 당도하기 어려워 장흥에서 하룻밤을 유했다. 다음 날 눈 뜨자마자 달려간 오월의 아침, 회진포 바다는 쪽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백성이 모두 피란 가고 빈 포구였을 그때와는 너무 다른 분위기였다. 선창에는 산뜻하고 날렵한 어선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고, 그 안쪽으로는 번듯한 주민복지 시설과 상가가 조성되어 있다. 취임식 행사를 치렀을 회령포 성터는 아름다운 역사공원으로 바뀌었다. 내륙 깊숙이 파고들었던 바다는 1960년대의 개간사업으로 비옥한 들판으로 변했다. 면 소재지가 되었으니 인구도 몇 곱절 늘었으리라. 칠천량 참패의 씨앗 글머리를 되돌려 이순신 삭탈관직과 나국(拿鞠, 잡아다 심문함)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직접 죄목은 왜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 군을 영격하라는 임금과 조정의 명을 어긴 일이었다. 그 까닭에는 아직 정설이 없다. 기록이 서로 달라 연구자마다 추론에 그칠 뿐이다. 정유년 초 경상도우병사 김경서(金景瑞·일명 김응서)의 진에 드나들던 왜인 가나메 도키스라(要時羅)가 김 병사에게 달콤한 정보를 흘렸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수하였던 그는 강화회담 결렬이 기요마사 탓이라고 헐뜯으며 “이번에 기요마사가 다시 건너오게 되었으니 통제사를 시켜 길목을 지켰다가 일제히 공격케 하면 그의 목을 벨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기요마사가 건너온다는 날짜까지 말해줬다. 김경서의 보고를 받은 임금과 조정은 그 말을 사실로 믿고 이순신에게 영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 명을 따르지 않았다. 초계에서 한산도까지 와 출동 명령을 전한 도원수에게 이순신은 “반드시 왜의 간계가 있을 것이오. 배를 많이 끌고 나갔다가는 도리어 역습을 당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어찌 간첩의 말을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했다. 이순신이 움직이지 않는 틈을 타 대한해협을 건너온 기요마사는 울산 서생포에 진을 쳤다. 이순신의 판단이 어떠했든 가나메의 정보는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진노한 선조는 “우리나라 장수가 유키나가보다 못하다”고 펄펄 뛰었다. 당장 이순신을 묶어 올리라는 명이 떨어졌다. 이순신을 그 자리에 천거하고 뒤를 보아준 영의정 유성룡도 어쩔 수 없었다. 이순신을 잡으러 온 의금부 도사 일행 가운데는 얼마 전 경상우수사로 부임한 원균도 있었다. “내가 통제사라면 당장 부산포로 달려가 왜적을 무찌르겠다”던 그였다. 그 시간 왜적의 동태를 파악하려고 가덕도 앞바다에 나갔던 통제사는 왕명 소식을 듣고 급거 귀항했다. 갖가지 병기와 화약류, 병력과 군량미의 끝 단위까지 세세히 인계하고 함거에 올랐다. “사또,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다 죽게 되는 겁니까!” 백성들은 함거를 가로막고 울부짖었다. 원균은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을 것이다. 씻을 수 없는 치욕 칠천량 참패의 씨앗은 그렇게 잉태되었다.
- 2017-05-24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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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치회로 봄을 알리는 바닷가 마을 장고항
- 4월 초순경, 장고항 어부들의 몸짓이 부산하다. 실치잡이를 해야 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실치가 적을 때는 하루에 한 번 정도 그물을 올리지만 많을 때는 수시로 바다에 나가 바쁘게 작업을 해야 한다. 흰 몸에 눈 점 하나 있는, 애써 눈여겨봐야 할 정도로 작은 물고기인 실치가 작은 몸집 흐느적거리면서 장고항 앞바다를 회유한다. 실치는 장고항 봄의 전령사다. 지형이 장고의 목처럼 생긴 어촌 마을 해돋이를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려 한다. 오전 6시가 채 못 돼 부스스 일어나 장고항 우측 끝자락의 노적봉과 촛대바위가 잘 보이는 위치를 찾는다. 마치 뫼산[山] 형태의 기암은 장고항의 지킴이다. 오랫동안 먼 바다에 조업 갔다 오는 어부들의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이 계절, 기암 사이로 멋지게 떠오르는 해돋이를 기대하진 않는다. 단지 장고항을 대변해주는, 육지 끝자락에 있는 모습을 확인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물이 빠져 갯벌이 다 드러나는 서해에서 바라보는 일출. 동해에서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아침 햇살은 빠르게 사위를 밝게 해준다. 서둘러 장고마을로 들어선다. 장고항은 ‘지형이 장고의 목처럼 생겼다’ 해서 ‘장고목’이라 불리다가 후에 장고항 마을로 개칭되었다. 이외에도 가낭골, 당산 마을이라는 이름이 있다. 여행자들도 바닷가 마을만 한갓지게 배회한다. 서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닷가 마을인 장고항이 특히 유명해진 것은 ‘실치’ 덕분이다. ‘실치’로 이름 알린 장고항 장고항 사람들은 1970년대 초, 실치잡이가 본격화되면서 다들 실치포를 말렸다고도 한다. 실치잡이가 성행할 때는 150여 가구가 소위 멍텅구리배로 불리는 무동력 중선으로 실치잡이를 해왔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연안에서의 실치잡이 어선이 자취를 감춘다. 지금은 인근 앞바다에서 개량 안강망 그물로 실치를 잡는다. 2000년 초부터는 장고항 실치회 축제를 만들어 ‘실치회의 원조 고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마을 안쪽 건조대에서는 실치포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고샅 건물 벽에 씌인 손글씨를 따라 실치포 작업장을 찾아낸다. 아주 오랫동안 실치포를 만들어왔음이 느껴지는 작업장이다. 실치포 만드는 작업은 눈으로 봐도 힘겨워 보인다. 마치 김 한 장 만들 듯, 물그릇 담긴 실치를 그릇으로 적당량 떠서 사각 나무틀에 쏟아 납작하게 모양을 잡는다. 연륜이 깊고 숙련된 사람일수록 실치의 양을 정확히 가늠하고 평평하게 할 수 있다. 발에 붙은 실치는 신기하게도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붙어 있다. 몇 시간 해풍을 맞으며 건조되면 실치포가 완성될 것이다. 두껍고 살색이 흴수록 좋은 실치포라는 상식을 알게 된다. 기꺼이 실치포 몇 묶음을 산다. 젓가락으로 건져낼 정도로 아주 작은 물고기 건조대를 지나 마을 끝 방파제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수산물유통센터가 나온다. 2012년 4월 28일, 제9회 축제를 맞춰 개장한 곳으로 7209㎡의 부지의 1153㎡의 1층 건물에는 20여 곳의 횟집이 들어서 있다. 난전, 포장마차를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간판을 달고 한곳에서 영업하고 있다. 싱싱한 활어는 물론이고 실치와 간재미 등이 지천이다. 손님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일까? 바닷물을 가득 담은 고무 대야에 살아 있는 실치들이 헤엄치고 있다. 흰 몸에 점이 하나 있는, 마치 실처럼 가는 물고기가 활발하게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다. “나 살아있어요” 하는 듯하다. 횟집들마다 부산하게 실치를 씻으며 손님 맞을 준비에 여념 없다. 실치 씻는 방법도 아주 특이하다. 튀김을 건져낼 때 사용하는, 긴 나무젓가락으로 실치들을 휘휘 저어댄다. 젓가락에 실치가 걸쳐지면 소쿠리에 담아내는 일을 반복한다. 워낙 작은 물고기라서 손품이 많이 필요하다. 기암 촛대바위가 멋진 해안 수산센터를 지나 방파제로 가는 길목에서 멀리서만 봤던 기암을 가까이서 조우한다. 붓을 거꾸로 꽂아놓은 듯한 바위가 촛대바위다. 양쪽으론 기암이 감싸고 있다. 바다 쪽, 높은 바위를 노적봉이라 부른다. 바다 쪽으로 내려서서 좌측으로 돌아가면 석굴(해식동굴)이 있다. 용천굴이라고 부르는데 으레 그렇듯이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천장이 뻥 뚫려 하늘이 그대로 보인다. 이곳으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다. 다른 전설도 있다. 200여 년 전, 나라에 큰 정변이 일어나서 사람들은 피난을 갔단다. 그때 한 아이가 이 동굴에서 7년을 공부해 장원급제를 해 재상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이야기다. 이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동굴을 신성시해 출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에는 올망졸망 배들이 매어 있는 선착장으로 가 본다. 조업을 마친 배들이 들어오고 몇 팀의 낚시꾼들은 부산스럽게 배를 타고 떠난다. 한편에서는 남편의 고깃배가 들어오는지 고개를 내밀고 기다리는 아낙도 있고 일찍부터 막걸리 한 사발로 술추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물망에 걸린 실치 작업에 한창인 어부를 만난다. 이들은 실치 철이 끝날 때까지 자주 바닷가에 나가 작업을 한다. 실치가 적게 잡힐 때는 하루에 한 번 정도 그물을 올리고, 많이 잡힐 때는 수시로 그물을 털 것이다. 내겐 볼거리이지만 어부들에게는 생계의 그물이자 돈 줄 아닌가. 씹힐 틈 없이 살살 녹는 실치회 이제는 ‘당진 8미(味)’ 중 하나로 꼽히는 실치회를 먹어야 할 시간이다. 실치회 한 접시를 시킨다. 아주 작은, 흰색의 물고기가 무더기로 뒤섞인 접시 위로 깨소금, 참기름, 파 등의 양념이 흩뿌려져 있다. 여기에 오이, 깻잎, 쑥갓, 당근 등 갖은 야채에 고추장 양념이 더해지면, 함께 쓱쓱 버무려 입에 넣기만 하면 된다. 실치가 미끄러워 반드시 나무젓가락으로 먹어야 한다. 한입 먹어본다. 작은 물고기라서 입으로 들어가자마자 살살 녹는 식감이 일품이다. 아욱을 넣어 끓여낸 고소한 실치 국에 실치 전, 실치 계란찜까지 배부르게 먹고 나니 실치라는 물고기가 어떤 놈인지 궁금해진다. 실치는 일반적으로 뱅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자료를 찾아보니 ‘베도라치’라는 이름도 있다. 서해에서는 흰베도라치가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실치는 ‘흰베도라치의 새끼’란다. 꽤 긴 이 이름을 외우려면 시간깨나 걸리겠다. 초봄 한 달간 ‘잠깐’ 먹을 수 있는 요리 첫 그물에 걸려드는 실치는 너무 연해서 회로 먹기는 어렵다. 3월 말부터 4월 초순경 적당히 몸집이 커져야 횟감으로 먹을 수 있다. 6월 말까지 잡히지만 4월 중순이 넘으면 뼈가 굵어져 맛을 잃는다. 그래서 실치회를 먹을 수 있는 기간은 약 한 달간으로 눈 깜짝할 새다. 실치는 성질이 급해 잡히면 얼마 안 가 죽어버린다. 당연히 먼 곳까지 운반할 수 없다. 산지에나 와야 싱싱한 회를 먹을 수 있다. 이후부터 잡히는 물고기는 실치포를 만든다. 멸치처럼 데쳐서 말리는 실치포는 칼슘이 풍부한 건강식으로 알려져 있다. 집에 돌아와 장고항에서 구입한 실치포로 밑반찬을 만들어본다. 요리법은 간단하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노릇노릇 구워낸 포를 먹기 좋게 가위로 자르면 된다. 밥하고 같이 먹으면 바삭바삭 과자 같은 고소함이 입안 가득 퍼진다. 과장 없이 놀라운 맛. 장고항의 바다 향이 어느새 따라와 있다. Travel Data 찾아가는 길 서해안 고속도로→송악IC→38번 국도를 타고 대산 방향으로 진행→석문방조제를 지나 615번 지방도로→5㎞ 정도 직진→장고항으로 우회전. 추천 별미집 용왕횟집, 고향나루 횟집 등을 비롯해 다수의 맛집이 있다. 미식가라면 우렁이 박사는 꼭 들러야 한다. 또 당진 시내의 장춘 닭개장도 유명하다. 장어구이를 먹고 싶다면 옛날돌집장어구이, 원조장어구이를 찾으면 된다. 주변 여행지 삽교천도 좋지만 당진 시내 탐험을 해보자. 봄철 당진 장날(5일, 10일)의 장터 풍경이 정겹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실컷 들을 수 있는 색다른 여행 체험이다. 충남에서는 1위를 차지한 명품 쌀에 쑥이 어우러진 왕쑥송편, 기름을 바르지 않은 호떡을 사들고 남산 건강공원으로 가보자. 산이라기보다는 마치 구릉 같다. 그래도 당진 시내가 한눈에 조망되어 눈앞이 시원하다. 봄철에는 꽃 천국이다. 왕벚꽃이 만발한 봄은 화려함의 극치를 달린다. 당진향교(충청남도기념물 제140호), 의인, 역대 현감, 군수 등의 선덕비, 공적비, 기념비 등 비석문화재 21점의 유적도 있다.
- 2017-03-2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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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철의 야생화] 보랏빛 꽃다발로 거친 파도를 다독이는, 해국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유치환의 ‘그리움’) 늦가을 철 지난 동해 바닷가를 서성댑니다. 불쑥불쑥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태풍으로 인해, 엄밀히 말하면 주로 일본과 대만 등을 덮치는 태풍의 여파로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달려드는 파도를 보면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라는 구절을 읊조리게 됩니다.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고 소리쳐봅니다. 그런데 시인의 말은 다릅니다. 시인은 뭍 같은 임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라고 장탄식을 했지만, 사실 뭍은, 심지어 잡채만 한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리움을 농축하고 농축해서 만든 꽃다발을 안고 온몸을 열어 으르렁대며 달려드는 파도를 환영합니다. 저 멀리 수평선으로부터 달려와 포말을 일으켰다가 사라지곤 하는 파도를 향해 보랏빛 미소를 건넵니다. 보랏빛 미소의 주인공은 바로 ‘바다 국화’라는 이름을 가진 해국(海菊)입니다. 해국은 거센 바닷바람에 날려 온 한 줌 모래흙이 전부인 바위 틈새에 뿌리를 내리고 삽니다. 사시사철 그늘 한 점 없는 땡볕에서 온몸을 드러내놓고 살다가 늦가을이면 어김없이 연한 보라색 꽃을 피웁니다. 꽃송이는 가지 끝에 하나씩 달리며 지름 3.5~4cm로 제법 큽니다. 대부분 연보라색 꽃이지만 가끔 순백의 꽃송이도 눈에 띕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서인지 높이 30~60cm로 자라는 줄기와 그 끝에 달려 있는 잎은 겨울에도 죽지 않습니다. 줄기는 해가 갈수록 굵어지며 심지어 나무처럼 단단해집니다. 겨울에도 잎과 줄기는 반상록 상태를 유지할 뿐 아니라, 제주도 해안가에서는 늦가을 핀 꽃이 그대로 달려 있기도 하고, 더러는 새로 피기도 합니다. 놀라운 생명력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국이 세계적으로 한국과 일본에만 분포합니다. 당연히 어느 해국이 원종(原種)인지 궁금해집니다. 영남대 생명과학과 박선주 교수는 해국을 비롯해 독도에서 자라는 식물의 고향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 연구결과의 하나로 2010년 세계유전자은행에 독도 해국의 염기서열을 등록시켜 독도의 자생식물로 국제적 공인을 받았습니다. 박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독도와 울릉도는 물론 제주도를 비롯해 동·서·남해안 전역에서 해국이 자라고 있으나, 일본의 경우 일본 서해(우리나라로 보면 동해) 지역에만 분포한다”라고 설명합니다. 또 해국의 분포도 및 개체 수 등으로 미뤄볼 때 한국의 해국이 원종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합니다. 박 교수는 조만간 우리나라 여러 지역의 해국과 일본 해국의 유전자 집단 분석 등을 통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답을 찾아낼 예정이라고 합니다. Where is it? 동·서·남해안을 비롯해 제주도·울릉도·독도까지 전국의 해안가가 자생지다. 그러나 강화도나 영종도 등 인천 인근 서해 바닷가에서는 보기 어렵다. 서해안에서는 적어도 영흥도나 안면도까지 내려가야 한다. 야생화 동호인들이 해국을 보기 위해 즐겨 찾는 곳은 일출로 유명한 추암 해변인데, 강원도 동해시 북평동 추암해수욕장으로 가면 된다. 길게 뻗은 모래밭을 따라가다 보면 바위틈에 핀 해국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촛대바위를 바라보는 바위들 사이에 절묘하게 핀 해국(사진-1)은 감탄사를 자아낼 만큼 아름답다. 제주도 전역 및 마라도 개쑥부쟁이 군락 사이에 드문드문 핀 해국(사진-2)도 인상적이다.
- 2016-10-17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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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가 본 순천만
- 필자는 외국 여행은 많이 한 편이지만 정작 국내 여행은 별로 가 본 곳이 없다. 물론 부산 같은 대도시는 업무상 몇 번 가봤지만, 여행이라고 하기보다는 출장이었다. 가족과 함께 피서 차 동해안이나 서해안 해변에 놀러가 본 적은 있다. 그러나 혼자의 여행이 아니라 먹고 마신 기억밖에 없다. 그래서 순천만을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다고 벼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해안과 석양, 철새들의 군무를 인터넷을 통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전라도는 먹거리가 풍부하고 맛있기 때문에 먹는 즐거움도 빼 놓을 수 없다. 그래서 순천으로 여행지를 정한 것이다. 주변에 물어보니 벌써 몇 번씩 갔다 왔다고 했다. 그러니 혼자 갈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정보가 없이 순천에 도착하다 보니 순천만 국가정원이 따로 있는 줄 몰랐다. 마침 9월30일부터 10월16일까지 17일 동안 ‘순천만국가정원산업디자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입장료로 8천원을 받았다. 볼거리가 많고 넓어서 하마터면 이곳이 순천만의 전부인 줄 알고 그냥 갈 뻔 했다. 가을을 맞아 국화꽃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꽃을 볼 수 있었다. 진짜 볼거리는 ‘꿈의 다리’를 건너 각 나라 국별 정원들이었다. 호수 정원 안에 있는 동산도 빙빙 돌아 걸어올라 갔다 올 수 있게 해 놓았다. 뉴스나 인터넷에 자주 올라오는 장면이다. 점심으로 행사장 안에 있는 음식점에서 짱뚱어탕을 먹었다. 걱정했던 냄새는 없었고 추어탕과 비슷한 맛이었다. 짱뚱어탕 한 그릇에 8천원을 받았다. 여기서 순천만 습지까지 다시 8천원을 내면 스카이큐브라는 무인전동차로 습지까지 갈 수 있다. 순천만 습지 입구에 도착하자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 갈대밭에 들어 섰다 나무로 만든 나지막한 통로를 따라 사람들이 걸었다. 가족단위, 연인들의 발길이 나란히 서서 길을 막고 가는 바람에 걸음이 빠른 필자는 여러 사람을 헤치고 가야 했다. 갈대는 억새와 달리 볼품은 없는 식물이다. 다만, 염분이 많은 갯벌에 적응해서 살고 있는 몇 안 되는 식물이다. 군집하여 있으니 볼만 한 것이다. 1m 정도 아래에 짱뚱어와 게가 많이 보였다. 갈대를 꺾어 쿡쿡 찔러보는 사람들도 있고 호기 있는 사람은 바지를 걷어 부치고 내려서려는 사람도 있었다. 중간에 회차로가 있어 절반 쯤은 거기서 돌아서는 것 같았다. 계속 앞으로 가니 용산전망대 표지가 나왔다. 뉴스 사진을 기억해 보니 높은 곳에 올라가 찍은 것으로 앞에 보이는 산 위에 올라가야 할 것 같았다. 과연 그랬다. 올라갔다 오려면 한 시간 정도 잡아야 한다. 갈대 밭 뒤로 올라가는 통로가 있었다. 오르막이라 노약자들은 무리일 것 같았다. 중간마다 전망대가 있다. 백미는 역시 용산 전망대로 순천만의 바다 쪽이 다 보였다. 과연 툭터진 시야도 좋았지만,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었다. 기대했던 철새 떼는 보지 못했다. 겨울철에나 볼 수 있단다. 단풍도 아직 철이 이르다. 그렇게 하루 종일 걷고 나니 만보기가 3만보를 가리키고 있었다. 걷기로 단련된 체력이라 거뜬히 소화하기는 했으나 보통 사람들은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 2016-10-11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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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철의 야생화] 섬진강변 흩날리던 매화의 환생 매화마름!
- “저 매화 화분에 물 주어라[灌盆梅].” 우리의 옛 선비들이 매화를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아끼고 좋아했는지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한마디 말입니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퇴계 이황(李滉·1501~1570)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라고 제자 이덕홍(李德弘)이 이란 문집에 전하고 있습니다. 생전 100여 편이 넘는 매화시를 짓기도 했고, 500년이 지난 현재 1000원권 지폐에 활짝 핀 매화꽃과 함께 초상이 등장할 정도이니 선생의 매화 사랑이 얼마나 유달랐는지 짐작이 가면서, 그런 유언을 남겼을 만하다고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한평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梅一生寒不賣香]’에 대한 옛 선비들의 사랑과 연모는 다소간의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동소이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매화는 봄을 알리는 꽃이란 명성답게 제주 등지에서 1월부터 피기 시작하는데, 3월 중순이면 전남 광양과 경남 양산에서 매화축제가 열릴 정도로 만개합니다. 특히 전남 광양과 구례, 경남 하동 일대의 매실나무에 하얗게 꽃이 필 무렵이면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도 봄바람에 휘날린 매화 꽃잎이 물 위에 가득 내려앉은 듯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그렇게 섬진강 가에서 흩날리던 매화 꽃잎이 섬진강 물에 어지러이 내려앉았다가 서해 바다를 거쳐 강화도로, 안면도로, 더 멀게는 백령도까지 올라가 모내기 전 물이 찬 논에 하얀 눈이 내린 듯 환생한 게 아닌가 싶은 꽃이 있습니다. 바로 매화마름입니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강화도를 비롯해 서해안 일대 논이나 수렁 등 여기저기에 잡초처럼 피어나는 꽃입니다. 꽃은 물매화를, 잎은 붕어마름을 닮아 ‘매화마름’이라고 이름 지은 이 수생식물은 모내기 전 물이 고인 논이나 습지, 연못 등에서 흔하게 만나던 꽃이었습니다. 농약 사용이 보편화하고, 논이 밭이나 과수원 등으로 바뀌면서 그 개체 수가 크게 줄어들어, 한동안 한란·나도풍란·광릉요강꽃·섬개야광나무·암매와 함께 환경부 지정 6대 멸종 위기 야생식물(1급)로 보호받다가 몇 해 전에야 2급으로 내려앉았습니다.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봤더라.” 기시감(旣視感)이라고 하지요. 전에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 매화마름을 처음 만났을 때 단번에 떠올린 단어입니다. 물속으로 파고든 뿌리에서 뻗어 나온 수십 가닥의 줄기가 거의 수면에 붙어 방사상으로 퍼지고, 그 줄기에서 마디마디마다 꽃자루가 올라와 손톱 크기의 흰 꽃을 무수히 피워냅니다. 그런데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그저 물속에 보잘것없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는구나 하고 지나치기 십상인데, 꽃자루 끝에 하나씩 달린 1cm 크기의 꽃을 자세히 살펴보고 5장의 꽃잎이 가지런한 매화를 떠올리고 매화마름이라 작명한 그 안목과 재치에 놀라면서 “아, 맞다. 두 달여 전 섬진강 가에서 보았던 매화를 똑 닮았다.”라고 무릎을 칩니다. Where is it? 주로 서해안 지역에 국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강화도에서부터 안면도까지 비교적 자생지의 폭이 넓다. 최근 백령도 등 서해 섬 지역의 논에서도 자생하는 게 확인된 바 있다. 충남 태안군 남면 신원리 곰섬 입구의 논에서는 국내 최대 규모인 집단 자생지 2만㎡가 발견되기도 했다. 서울에서 가까운 인천광역시 강화군에도 송해면 당산리 등 여러 곳에 자생지가 있다. 특히 초지대교 건너 길상면 초지리 큰길가에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시민유산 1호 강화 매화마름 군락지’(3,014㎡)가 있다. 매화마름이 자생하는 초지리의 이 논은 2008년 논 습지로는 세계 최초로 람사르습지로 등록되는 역사적인 기록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 2016-05-19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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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전원생활 도시서 즐기기
- 친구들과 오르는 경기 동두천 마차산은 온통 연두색 파스텔화다. 정상에서 태풍급 폭우를 맞으면서도 누구 하나 힘들어하지 않았다. 나무 향기 가득하고 쏟아지는 빗줄기가 미세먼지까지 말끔히 씻어낸 쾌적한 ‘전원’이기 때문이다. 시니어는 은퇴 후 편리한 도시를 떠나 전원생활을 꿈꾸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원에서 살다가 짧게는 수 개월, 길게는 몇 년 사이에 도회지로 되돌아온 이웃을 종종 보았다. “어릴 적 추억 속의 전원과 현실의 그것은 전혀 다르고 고독감, 교통 여건과 편의·의료 시설 부족이 큰 문제”라고 역 귀향 사연을 말했다. 장래를 생각해 전원에 투자했다가 큰 손해를 보고 철수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시니어는 이러한 함정에 빠져들지 않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도시에서 전원처럼 쾌적하게 생활할 방법을 찾자. 첫째,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는 ‘소유’보다 편리한 ‘이용’이 대안이다. 사실 시니어가 부동산에 장기 투자할 이유가 별로 없다. 투자비용, 관리비, 제세 공과금 등 ‘소유비용’이면, 마음에 드는 전원을 찾아 즐기거나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서해안 명승지에 전세 들어, 바다낚시와 조개잡이로 얼굴을 검게 그을리면서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는 친구가 있다. 2년 계약이 끝나면 다음에는 깊은 산골로 갈 예정이라고 자랑했다. 일부 명승지에서는 월 단위 임대사업도 최근에 유행하고 있다. 동호인끼리 한 주일씩 교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둘째, 멀리 다니기 어려우면 도시에서 전원생활을 즐기자. 관악에서 정들어 산 지 어언 30여 년이 넘었다. 이웃과 인사를 나누고 사는 고향처럼 느껴지는 아담한 ‘전원마을‘ 이다. 집 앞과 뒤, 옆으로 초·중·고등학교가 연이어 있다. 아이들은 전학 한 번 안 하고 학교를 마쳤다. 울창한 숲 덕분에 여름철에는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로 시원하다. 계곡 물놀이장은 어른·아이들 천국이 된다. 서울·관악산 둘레길이 잘 꾸며져 누구나 산책하기도 좋다. 아침마다 경쾌한 음악소리에 맞춰 체육공원에서 열심히 운동할 수도 있다. 이보다 더 쾌적한 전원이 어디에 있겠는가? 매주 배낭 메고 친구들과 찾는 북한·도봉·청계산은 우리 차지다. 전원생활! 바로 내 앞에 있다.
- 2016-05-18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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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참 걸을만 하구나 PART2] 신정일 우리땅걷기 이사장의 ‘길의 철학, 걷기의 철학’
- 광복 이후 한국인을 설명하는 말은 ‘빠르게’다. 무조건 ‘빠르게’에만 집착한 우리는 너무 오래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놓치고 부수고 망가뜨렸다. 이제 우리는 걷기에 대해 물어봐야 할 때다. 신정일(辛正一·62) 우리땅걷기 이사장은 걷기를 하나의 문화로 정립하고 전파한 독보적인 인물이다.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동학을 복권시킨 황토현문화연구소 소장이었으며 현대 시각에 맞춰 다시 쓴 이중환의 고전 ‘택리지’를 포함한 78권의 책을 쓴 작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길 위에서의 사색을 전파하는 길 위의 인문학자 ‘자연대학 총장’, 신 이사장이 말하는 걷기의 힘, 걷기의 철학. “강변의 모래가 아름답다고 쓴 걸 읽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직접 본 것들, 걸으면서 본 것들이 굉장히 중요하죠.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은 우리가 감동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한 발 한 발 걸어가며 본 것들이 곧 내 살이 되고 정신의 활력소가 된다는 신정일 우리땅걷기 이사장의 말은 나이 들어서 천천히 바라보면서 걸어야 하는 이유를 자연스럽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빨리 걸을 필요가 없어요. 마사이족은 팔을 힘차게 휘두르며 걷는데 그건 아프리카에나 맞지 우리에게는 맞지 않아요.” 우리나라 곳곳은 도서관이고 박물관이다 마사이족 얘기처럼, 요즘 걷기는 소위 건강을 추구하는 걷기가 유행이다. 이 시대에 신 이사장이 생각하는 걷기란 무엇일까? “겨울에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 만저우리(滿洲里)까지 갔던 적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평야만 가고 어떤 때는 자작나무숲만 가고 했죠. 그 길을 가면서 ‘내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게 행운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골짜기도 많고 산도 많고, 땅은 넓지 않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곳곳에 역사가 있어요. 그런데 거기는 그런 게 없었어요. 우리나라 곳곳은 어디나 도서관이고 박물관입니다. 허투루 볼 게 없어요. 그런데 지금은 앞사람 발뒤꿈치만 보고 가는 게 걷기 문화예요. 그래서 어디 갔다 왔는지도 몰라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늙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니 순간순간의 아름다움을 발견해야 해요.” 신 이사장은 많이 간다고 좋은 게 아니라고 말한다. 차라리 정상까지 안 가도 된다. 중간쯤 가면서도 많은 걸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걷기에서는 멀리 바라본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나이가 들면 관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너도 나도 같이 쏠려서 일행이 함께 가는 것은 자기의 자아를 찾는다기보다는 그저 다른 사람에 휩쓸려 가는 것이지 않나요. 길을 걸으며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그러지만, 많은 시간은 나 자신을 생각하는 시간이 될 수 있어요. 칸트, 니체, 루소 등등 수많은 철학자들도 걸으면서 사상을 확립했습니다.” 해파랑길에서 케이프타운까지 걷고 싶다 한강 길만 네 번을 걸었고, 낙동강은 세 번, 관동대로를 두 번, 서해안, 임진강, 영산강 등등…. 신 이사장이 지금까지 걸은 길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길 것이다. 그러한 길들 중 어느 길은 모두의 길이 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는 해파랑길이 있다. “2008년만 해도 길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 제가 제안한 길이 거의 길이 됐어요. 변산마실길, 소백산자락길 등등.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답사길을 만들자, 해서 만들어진 게 해파랑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해파랑길처럼 아름다운 길은 없어요. 저는 해파랑길을 시작으로 해서 우리나라에서 북한을 거쳐 러시아, 스웨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까지 걸어 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누가 그러더라고요. ‘너무 길어서 혼자선 못 걷겠는데요’라고. 그럼 3대가 걸으면 되죠(웃음).” 2014년 완공한 해파랑길은 선비들이 걸어가던 관동팔경길, 낙동강변에서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길을 모두 현대인들이 걸을 수 있게 재정비 했다. 신 이사장에게 좋은 길이란 무엇일까? “잘 만들어지고 시설이 좋은 게 아니라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길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 길인 게 좋아요. 경북 봉화군 석포면 소재지에서 명호면까지 이어지는 낙동강길을 특히 좋아합니다. 거기는 한나절을 걸어도 길 물을 사람조차도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아름다운 길이에요.” 여기저기를 보고 느끼며 빠져드는 즐거움 신 이사장은 ‘해찰’이란 말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해찰은 순우리말로 ‘쓸데없는 다른 짓’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신 이사장에게 해찰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빠져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걸으면서 유독 여기저기를 보고 확인하며 경험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에게 길은 어떤 도달해야 할 목적이 아니다. 마치 도반(道伴)처럼, 그렇게 기억에 남는 길동무가 있냐는 질문에 그는 많다고 대답했다. 당연하다. 그에게는 인생 자체가 길과 같을 테니까. “훈련소에서 첫눈에 반했던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서울대를 다니던 운동권이어서 강제징집을 당했는데, 신약성경 하나를 갖고 문답을 주고받으며 42일간 훈련을 함께 했었죠. 이후에 자대 배치를 받을 때 그 친구가 ‘신정일, 너 공부 많이 했다’라고 말해주더군요. 저는 고작 초등학교 졸업장 하나 있을 뿐이었는데 그 친구가 인정해주니 참 좋았어요. 이후로도 그 친구와 꾸준히 교류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군대를 간 게 행복이에요. 그 안에서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나고 자유를 구속당하면서 나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신 이사장과 김지하 시인, 신영복 교수, 박경리 작가와의 인연도 길을 타고 만나게 된 기연이다. 신 이사장은 김지하 시인의 시를 즐겨 읽는 애독자 중 하나였다. 김지하 시인의 시는 신 이사장에게 동학을 알게 해주는 길이 됐다. 인생이라는 길에서 만난 인연들 “향토현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있을 때부터 동학농민운동가인 김개남 장군의 추모비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결국 1993년 5월에 세우게 됐는데, 비문을 누가 쓸 것인가 싶었어요. 그때 만나던 김남주 시인이 신영복 선생을 소개해 주셔서, 신영복 선생이 비문을 쓰게 됐습니다. 4월에 연락이 왔죠. 글을 써놨으니 자택인 목동으로 와서 가져가라고. 그때 가서 비문을 받고자 하는데 김지하 시인 얘기가 나와요. 그날 볼 수도 있겠다 싶어서 기다리려고 파리공원을 갔는데 한 200m쯤 떨어진 자리에서 이상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있더군요. 지남철에 끌려가는 것처럼 갔더니 사진에서 보던 김지하 선생이었어요. 인사를 드리니 반가워하며 동학에 대해 두 시간 동안 얘기를 들려주셨어요.” 인연의 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지하는 장모님, 곧 박경리 작가가 김개남의 팬이라고, 오늘 자신이 전화할 것이니 전주에 가서 박경리 작가에게 전화하라고 말했다. 신 이사장은 그래서 그날 저녁에 박경리 작가도 만나 두 시간여 담소를 나눴다. 에서 나오는 김개주가 김개남을 모델로 했다는 것도 그날 알 수 있었다. 박경리 작가가 김개남을 세계적인 혁명가로 생각하고 후배들에게 그에 대한 글을 쓰라고 종용했지만 아무도 안 쓰더라는 작은 불평도 들을 수 있었다. 모두가 인연이 만들어낸 귀중한 경험들이었다. 길 위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고상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상하다는 것은 꾸미지 않는 것입니다. 별로 꾸밀 것이 없어요 인생 자체가. 인생은 자기 소신껏 사는 것이죠.” 도인의 말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로 적용하면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말이다. 신 이사장 또한 사람이다. 욕심도 생기고, 뭔가 해보고 싶다는 야심도 있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들은 정규 학교를 가고 부모 재력도 있었지만 저는 의지할 데가 없었어요.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책을 쓰기 전에는 변방에서 시인들 뒷바라지나 했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이 전혀 없었고 작가가 되겠다고 시험을 본 적도 없으니까.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이 없으니 오로지 글을 쓰고 걷기만 한 거죠.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그것이 삶의 지표였었죠.” 말의 행간에서 조금씩 느껴지는 것처럼, 신 이사장의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매일 두드려 맞고 책을 뺏기다가 결국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학교를 관뒀다. 그 후에 그는 14살에 가출을 했고 15살에는 출가를 했다. 출가한 지 두 달만에 스님이 ‘넌 여기 있는 것보다 세상에 나가 살아라’라고 말해서 절에서도 나와야 했다. “그때 정말 많은 곳을 방랑했습니다. 조직에 얽매이지 않는 성질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했던 그지만, 역경은 그의 삶에 꾸준히 자리했다. 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극복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고통을 이겨냈다. “돌이켜보면 저는 인생 중에 한 달 남짓 행복했어요. 그런데 한번 헤아려 보세요. 행복한 날이 얼마나 있었는가. 헤아려보면 많지 않아요. 연암 박지원이 누나 제문을 쓴 걸 보면 ‘어찌 이리 짧더란 말이냐. 왜 슬프고 가난하고 곤궁했던 일들만 많았는지 모르겠다’라고 하죠. 다 그래요. 인생 자체가 그래요.” 그걸 인정하고 사는 것이라고, 그게 삶이라고 그는 말했다. 마치 길을 걷는 것처럼. “들뢰즈가 ‘창조란 불행한 것들 사이로 자신의 길을 금 그어 나가는 것이다’라고 한 말을 좋아해요. 내가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문자조립공’의 나이 들지 않는 길 신 이사장은 태어나 최초로 군대에서 월급을 받는다. 690원. 그는 그 돈으로 200원짜리 삼중당 문고 세 권을 사고 나머지 90원으로는 라면 몇 개를 사서 한 달 동안 간식으로 먹었다. 제대할 때가 되자 2만원을 갖고 나오게 됐는데, 그 돈을 종로서적에 가서 책 사는 데 다 써버렸다. 그때 그는 종로서적에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책들을 보며 ‘과연 내가 쓴 책이 저 자리에 꽂힐 날이 있을까’ 되물었다고 한다. 물론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신 이사장은 교보문고에서 독자와의 대화를 통해 독자들과 함께 정선으로 열차를 타고 가기도 하고 에 출연하기도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대표였던 시절에는 국회의원과 보좌관들을 데리고 섬진강을 걸으며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에게 신기한 일들이 벌어졌다고 말한다. 그래서 ’항상 꿈을 꾸자. 꿈은 공짜다’라고 말한다. 그는 현재 자신의 직업을 ‘문자조립공’이라고 부른다.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책이 어느덧 일흔여덟 권에 이른다. “글 쓰는 사람은 모두 ‘문자조립공’이에요. 한문은 몇 만 자를 다뤄야하는데 우린 스물네 자만 다루면 되니 얼마나 행복해요.” 요즘 부쩍 철학 자체에 관심을 가진다는 신 이사장은 카프카,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연암 박지원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제는 내 곁에 놓고 가끔씩 펼쳐볼 수 있는, 인간에 대한 내용의 책을 만들고 싶어요. 에서 ‘우리는 수백만 금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이 말을 금과옥조로 여겨요. 돈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과 명예도 사라지는 것인 만큼 부럽지 않아요.” ‘현자란 바라보는 모든 것에 경탄하는 사람이다’라는 신 이사장의 마지막 말은 길과 인생에 대한 소회이자 해법으로 다가왔다.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 법이니, 길을 걷는 순간순간이 기적인데 깨닫지 못하면 기적이 아닐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이 그처럼 기적에 가까이 닿아 있는데, 마땅히 고개를 돌려 주시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 대한 예의 아니겠는가.
- 2016-04-1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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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유재의 미술품수집 이야기] 벗어나기, 쌓고 지우기
- 이재준(아호 송유재) “작가란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되기 위해서 달려갈 수도 없는 곳임을 안다. 촛불이 자기 몸을 태워서 빛을 발하는 것처럼, 어쩌면 자기 자신을 처절하게 바쳐서 작업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구름의 바다 위로 동이 튼다. 나는 지금 2002년 11월, 나의 열아홉 번째 개인전을 하러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속에 있다. 매일 작품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매일 해가 새롭게 뜬다. 지금 구름의 바다 위에 무지개 빛깔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구름바다는 내가 작년에 많이 썼던 King′s Blue이다.” 추상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는 홍정희(1945~ ) 화가가 2002년 12월호 에 쓴 글의 일부이다. 한 가정의 주부로, 같은 미술가의 길을 가고 있는 딸의 어머니로 오십 여년을 치열하게 살아온 화혼(畵魂)의 세계는 존경 받아 마땅하다. 서울대 미대 졸업 후 학창 시절의 작품을 모두 불사른 그 결연함이 그만의 세계를 열어왔다. ‘특정 사조나 단체에 속하지 않은 채 50년 간 꾸준히 색채 탐구와 부단한 모색과 실험, 자신만의 색면(色面) 회화의 세계를 구축, 캔버스와 안료의 물질성이 두드러지는 특징’을 평론가들은 예찬한다. 1996년 현대화랑에서 펼친 전람회는 1000호(5.3mx2.9m) 크기의 초대작을 비롯해 100호(1.6mx1.3m) 40여 점으로 화랑을 가득 채운 장쾌한 눈부심에 숙연할 따름이었다. ‘아(我)’ 주제에서 ‘탈아(脫我)’ ‘passion’ ‘nano’로 이어져 온 그의 작품세계는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깊은 사유(思惟)의 강물이 도도히 흐른다. 아래 그림은 ‘탈아(脫我)’시리즈의 한 작품으로 인사동 어느 모퉁이 화랑에서 구입한 것이다. 추상화 작품들로 벽면을 장식하던 첫날에 떼어 온 것이다. 화랑 주인은 구상(具象)의 다른 그림을 권했지만 황토 빛깔의 ‘아(我)’ 타이틀의 이 작가 그림과 나란히 걸고 싶어서 선택했다. 전시장에서 작가와 담소를 하던 중에 얼핏 시선이 간 그의 손은 영락없는 험한 노동자의 것이기에, 빤빤한 내 손이 부끄러워 뒤로 감춘 적이 있었다. 치열한 생산에 기여한 그 손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추상화는 어떤 정형이 없기에 눈에 부딪히는 순간부터 갈등과 혼란을 일으킨다. 점, 선의 연결부터 색상의 다양함이 도대체 이성적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화면을 흩뿌리는 무작위의 물감과 불규칙적인 붓질이 보는 이의 의식에 강하게 저항한다. 이런 작품들과 친해지려면 긴 시간의 눈 맞춤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화면의 구도와 색상의 대비와 어울림이 나름대로 거슬리지 않고 보는 이의 의식을 출렁인다. 마음의 분화구로 사유가 흘러넘쳐 용암처럼 흐른다. 내가 나를 벗어나면 나는 없다. 다만 그 길 위에는 그 무엇이 남는 걸까. 간단치 않은 화두이다. 미술사는 현대 추상화가 1910년대 러시아의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와 네덜란드의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에 의해 창시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30년대 일본에 유학 중이던 김환기(1913~1974), 유영국(1916~2002), 이규상(1918~1967) 화가들이 처음 시도한 이래, 현재 많은 예술인들이 그 주제와 영역을 넓히고 있다. 요즈음 세계 유수한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우리나라 원로 화가들의 모노크롬(단색 추상화) 그림들이 높은 가격에 낙찰되고 있다. 김태호(1948~ ) 화가는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모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언제나 변함없이 탄탄한 자기만의 독특한 그림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우선 그의 작품들은 그리드(grid, 모눈형의 사각)의 입체를 벌집을 짓듯 쌓아 올린 아크릭 물감의 여러 색상과 선들이 오묘한 깊이를 느끼게 한다. 캔버스에 격자의 선을 긋고 물감을 바르고 마르면 칼로 물감을 깎아내어 그리드를 만들고, 그 위에 다시 물감을 칠하고 또 깎아내고 하기를 스무 번쯤 반복한 후에야 한 작품이 완성되는데, 그 물리적 노고와 끈기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100호 정도의 작품을 완성하려면 3개월이 걸리는 이 작업을 작가는 왜 반복하는 것일까? 비록 색상을 달리하긴 하지만 그 힘든 작업에서 작가는 어떤 성취감을 느낀단 말인가? 작품 ‘내재율(內在律) 200801’은 화랑에서 전시회 첫날 작가가 직접 작품 설명도 하는 자리에서 구입한 것이다. 이 작가의 작품으로는 세 번째 구입한 것이고 아내를 위한 선물이기도 했다. 작가는 “타이틀이 왜 내재율이냐?”는 질의에 “광부가 채광해서 귀금속을 발견하듯 표면의 물질을 깎아내 찬란한 재료를 얻음으로써 마음의 진동을 창출하는 것”이라며 웃을 뿐이었다. 서로 다른 색이 날줄과 씨줄로 천을 짜듯 하나하나의 그리드를 만들고 그들이 화폭 가득히 펼쳐진다. 바둑판 모양의 요철(凹凸) 공간이 수직과 수평의 입체감을 형성한다. 물감이 두께를 더하면서 그리드가 혹은 무너지고 혹은 일그러져 자연스레 화가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이 작가의 그림은 멀리서 보면 단색화로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층층이 다른 색들도 나타나면서 “하나하나의 작은 방에서 생명을 뿜어내는 우주를 본다”는 작가의 변(辨)이 이해된다. 한때는 이들 두 작가의 그림을 오디오 룸에 걸고 진종일 음악을 듣다가 목침을 베고 낮잠을 즐기곤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탈아의 화두는 풀리지 않을 뿐이고, 잠재된 의식의 흐름을 운율로 감지하지도 못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사양(斜陽) 무렵, 서해안 작은 언덕에 올라 땅거미가 내릴 때까지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 순간의 풍경과 마음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다. 어쩌면 그때 화가가 되고 싶던 열망이 그림 수집으로 대리만족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미술품을 수집하는 사람들에게는 “섭치 한 수레를 사봐야 진품 한두 점을 만날 수 있다”거나 “상당한 수업료를 지불해야 비로소 미술품을 보는 안목이 트인다”는 격언이 통용되고 있다. 섭치란 ‘여러 물건 가운데 변변하지 못하고 너절한 것’이라고 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그 누구도 처음부터 뛰어난 감식안으로 객관적으로도 가치 높은 미술품을 구입할 수는 없다. 더구나 미술품의 가치 평가는 주관적이므로 언필칭 경제의 잣대로만 보아서도 안 된다. 그들이 여러 기법으로 표출하는 비의(秘儀)를 풀어가는 여정만으로도 예술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서녘으로 스러지는 한 줌 햇살이 깊은 고요에 침잠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새 빛이 잉태되지 않던가.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 2016-03-25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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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의 맛]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는 속 깊은 만두
- 만두는 화려한 맛보다는 뭉근한 정취가 떠오르는 음식이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 밀가루로 반죽한 피에 김장김치와 돼지고기 소가 푸짐히 들어간 만두는 추운 겨울에만 맛보는 별미 중 하나였다. 새해가 되면 온가족이 둘러앉아 오순도순 만두를 빚고, 떡국과 함께 끓여 먹으며 정을 나누곤 했다. 정성으로 빚어 속이 꽉 찬 만두를 먹고 나면 허기뿐만 아니라 헛헛한 마음까지 달랠 수 있었다. 그런 의미를 담아 따뜻하고 진심 어린 손길로 만두를 빚어내는 ‘자하손만두’를 찾아갔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노을처럼 따뜻하고 은은한 서울식 손만두 보랏빛 노을이라는 뜻의 ‘자하(紫霞)손만두’는 창의문(자하문이라고도 불림) 인근 북악스카이웨이 초입에 자리 잡고 있다.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배운 서울 음식을 토대로 20년 넘게 한국 음식의 한 장르로서의 만두를 선보이는 곳이다. 어린 시절, 온가족이 둘러앉아 만두를 빚는 날이면 줄곧 “만두를 참 예쁘게 빚는다”는 칭찬을 받았다는 주인장. 만두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던 그녀는 1993년 소박한 마음으로 장사를 시작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집에서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정성과 마음을 다해 만두를 빚어왔다. 그 마음을 발견한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졌고, 그렇게 자하의 만두 맛은 서서히 입소문을 탔다. 단정한 차림의 만둣국과 떡만둣국은 부드럽고 깔끔한 맛이 특징이다. 촉촉한 만두피를 한입 베어 물면 푹신한 만두소가 입안을 즐겁게 해준다. 어떤 이들은 이곳의 간이 조금 심심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좋은 재료에 필요한 만큼의 양념으로 정성을 다했기에 건강한 음식이라는 점에서는 부족함이 없다. 만두 맛에 호불호가 있더라도 주인장의 소신은 변함없다. 여러 사람의 입맛에 맞추다 보면 본래 추구하던 맛과 신념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박혜경 대표는 “몸에 좋은 재료로 정성껏 만들되, 먹고 난 후 포만감과 더불어 편안함까지 줄 수 있어야 한다”며 “자하가 지향하는 바른 음식에 호응해주시는 분들이 다시 이곳을 찾는다고 믿는다. 요즘은 배는 부른데 마음이 공허해지는 음식이 많다. 결국 음식에도 마음이 담겨야 한다”고 설명했다. 찾는 손님이 늘어나자 만둣집은 앞마당에서 집으로 옮겨졌다. 주인장이 살던 집을 개조했기 때문에 식당이 아닌 오랜 지인의 집에 찾아가는 듯 훈훈한 정이 느껴진다. 입구에는 한가족처럼 다정한 장독들이 보인다. 장사를 시작할 때부터 가장 큰 밑천으로 삼아온 간장이 담겨 있다. 해마다 봄이면 시골에서 띄운 메주와 서해안 소금으로 간장을 만든다. 이 전통간장은 자하손만두의 유일한 천연 조미료가 된다. 단골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공간은 2층 창가 자리다. 시원한 통유리 창밖으로 아기자기한 부암동 일대의 전경과 인왕산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즈넉한 풍경을 벗 삼아 뜨끈한 만둣국을 먹으면 몸과 마음의 피로가 한결 풀리는 기분이 든다. 주소 서울시 종로구 백석동길 12 영업시간 11:00~21:30 문의 02-379-2648, 02-394-4488 홈페이지 www.sonmandoo.com 주차 발레파킹 가능
- 2016-01-05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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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cond life]제 2의 황수관 박사를 꿈꾼다
- 제2 서해안고속도로 사장 류영창(柳塋昌·60)씨는 공학자(서울대 토목공학 박사)이자 과학자이며, 자타가 공인하는 ‘물박사’다. 류 사장은 공무원 시절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 수자원개발과장을 비롯해 수자원정책과장, 공보관, 기술안전국장, 한강홍수통제소장 등을 역임하면서 오랫동안 물과 관련된 업무를 했다. 그런 류 사장이 물 관련이 아닌 건강(의학)정보 책(생활건강 사용설명서)을 발간한 것이다. 최근에는 건강 관련 강연과 칼럼쓰기에도 여념이 없다. 과연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의 얘기를 들어봤다. “국토부 국장 시절 국책 사업을 기획할 때 고혈압이 왔어요. 의사를 찾아 아무리 생활요법을 가르쳐달라고 해도 혈압약 먹으란 얘기만 하더라고요. 병원문 나서면서 오기로 약 안 먹고 고혈압 고치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3년 만에 약 한 알 안 먹고 다 고쳤습니다. 그러고 나서 의사들에게 맞아죽을 각오로 책 한 권을 썼습니다. 건강과 의료 패러다임도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죽지 않기 위해 시작한 건강·의학 공부 그는 자신의 집안을 ‘뇌졸중 집안’이라고 소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어머니는 물론 이모, 외삼촌까지 전부 뇌졸중 등 심혈관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특히 어머니는 신경성 위장병을 비롯해 고혈압으로 사실상 50여년간 병원 신세를 지다가 세상을 등졌다. 결국 친가에도 뇌졸중이 발병한다. 류 사장의 아버지였다. 그는 1992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16년 동안 반신불수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다음엔 내 차례가 오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인 2008년 그도 고혈압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 것. 그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공부해야겠다’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몸이 허약했어요. 특히 심장이 약했어요. 조금만 뛰면 숨이 차고, 밤 늦게까지 공부하면 코피를 쏟는 약골이었지요. 성인이 돼서는 집안 어른들이 대부분 뇌졸중으로 돌아가시고 나자 ‘머지않아 내 차례가 오겠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병원에 가니 무조건 약을 먹으라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민간요법을 알려 달라고 간청했더니 ‘나도 (혈압약) 먹어요’라며 버럭 화까지 내는 거예요.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 무조건 스스로 이겨내겠다고 결심했지요. 그때부터 시간 쪼개가며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약 위주의 치료방식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게 됐어요. 깨달음이 커지면서 점점 다양한 측면에서 깊이 있는 연구를 하게 된 셈이지요.” 의학·건강 상식을 깨다 그의 집무실에는 건강 관련 서적이 가득하다. 물론 시간을 쪼개가며 건강·의학공부를 지속하기 위함이다. 특이한 점은 그 책들마다 포스트잇 메모가 빼곡하다는 것. 그는 틀린 이론이나 틀린 이론을 지적한 연구자들의 중요 문구에 대해 4색 볼펜으로 중요도를 가려내 메모한다고 했다. 특히 파란색 볼펜으로 밑줄 쳤거나 메모한 텍스트는 반드시 이론을 수정해야 하는 틀린 이론이라고 소개했다. 물론 언론 기고 칼럼이나 생활건강 사용설명서 개정판에 반영하기 위함이다. 현재 의료계와 날을 세우고 있는 셈이다. 그는 일단 의료업계에서 말하는 ‘성인병’이라는 용어부터 고쳐 써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에 따르면 성인병이라는 명칭은 1957년 일본의 후생성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로, 암이나 뇌졸중, 심장병 등이 40~60세 정도의 나이에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요즘엔 중·장년층뿐 아니라 젊은이나 어린이들도 이런 질병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성인병이 아닌 ‘생활습관병’이라는 명칭이 더 적절하고 정확한 표현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일본에선 1997년부터 성인병을 ‘생활습관병’으로 고쳐 사용하고 있다고 그는 소개했다. “성인병과 생활습관병은 차이가 크지요. 성인병은 나이 들면 어쩔 수 없이 병이 난다는 것이고, 생활습관병은 습관을 잘 고치면 병을 예방하고, 치유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요. 병원에 가면 대부분 무조건 약을 복용하라고 처방하고, 환자도 약을 처방해 주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양약(洋藥)은 화학물질이기 때문에 오래 복용하면 부작용이 생겨 다른 장기(臟器)에 병을 유발해요. 어떤 약은 몇 년 후에 부작용이 발견되는 경우도 허다하지요.” 진단은 의사에게, 치료는 자연치유로 류 사장이 서양의학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외상(外傷)을 비롯해 응급 처치, 증세의 판단 등은 서양의학이 굉장히 뛰어나다고 그는 말한다. 다만 치료에 있어서는 몸의 면역력을 높여 스스로를 치료하는 자연치유력을 활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최소한 병원에 가기 전에 본인 스스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예컨대 당뇨병을 앓는 미국 환자들은 스스로 당뇨병에 대해 약의 부작용 자연요법 등을 스스로 공부하고 병원을 찾는다고. 하지만 우리나라는 반대사례가 많다. 의사들이 주는 대로 처방약을 그대로 받아 먹는 등 의사들의 지시를 신처럼 복종한다는 것. 심지어 일부 의 사들은 약의 부작용 등은 알려주지 않고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환자를 주눅들게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를테면 혈압약은 성기능장애라는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는데도 이에 대한 소상한 설명 없이 처방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얘기다. 이런 공급자(의료계) 위주의 시장이 바뀌어야 함은 물론이고, 의사들의 권위주의적인 태도도 개선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말 못하던 공무원, 제2의 황수관 박사로 “제가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어요. 이 동네 사람들이 대개 말을 잘 못하거든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요새 건강 강의를 많이 하다 보니 말주변도 많이 늘었어요. (의사들과 대립각을 세우더라도) 이제 꼭 해야 할 말은 하려고 합니다. 지금껏 국가나 사회로부터 혜택을 많이 받았으니 이제 봉사를 해야 하는 시기인 거 같아요. 사람 살리는 일에 매진해야지요.” 그는 자신이 국가나 사회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학창시절부터 모두 국·공립학교를 다녔고 30년 국토부 공무원으로 나라의 녹을 받았다. 때문에 이제 국가와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며 눈빛을 빛냈다. 건강 관련 강연을 다니며 건강 전도사로 활약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그래서 강연료를 미리 얘기한 적이 없다고 했다. 봉사한다는 기분으로 강연에 임한다는 의미다.
- 2015-01-26 1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