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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여행 시 한국 돈
- 한국 화폐는 아직도 국제 시장에서 공식 환전이 안 되는 돈이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중국 여행지의 경우에는 한국 돈이 별 불편 없이 사용된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여행으로 많이 찾는다고 한다. 물론 호텔 숙박비나 식비 등 큰돈은 여행사에서 알아서 지급하므로 관여할 바 아니고 개인적으로 쇼핑에 사용할 돈을 말한다. 호텔 룸서비스 팁, 마사지 가게, 기념품점, 동네 행상, 기념품 판매점, 농산물 판매점, 공항 면세점에서도 한국 돈이 통한다. 한국 돈 1만 원은 중국 돈으로 약 60위안이다. 중국 돈 1위안은 우리 돈으로 약 167원이다. 미국 돈 1달러가 약 6.71 위안이다. 물건값이 중국 돈으로 되어 있으면 한국 돈으로 얼마인지 금방 계산이 어렵다. 그래서 한국 돈으로 지급 할 수 있으면 금액에 대한 감이 있으므로 계산이 편한 것이다. 우비 하나에 3000원, 좀 더 고급은 5000원, 삼단 우산은 5000원, 장뇌삼 10뿌리에 1만 원부터 굵은 뿌리는 하나에 5만 원도 부른다. 행상이 가지고 다니는 현지 교통지도가 1000원 식이다. 호텔 룸서비스 팁은 보통 1불을 놓고 나온다. 1불은 우리 돈 약 1120원 정도이지만, 1000원으로 간단하게 보면 된다. 그래서 테이블에 팁으로 1000원권 지폐를 놓고 나온다. 무거운 가방을 방까지 갖다 주는 팁도 마찬가지로 1000원이다. 1불은 우리 돈을 미국 돈으로 환전해야 하므로 환전 수수료가 붙는다. 환전한 미국 돈이 한정적이므로 우리 돈 1000원보다 귀하게 쓰인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중국 여행지에 갈 때는 우리 돈 1000원짜리를 많이 준비해 가면 좋다. 1만 원권도 그대로 사용하지만, 1000원 지폐가 더 용도가 많다. 굳이 수수료 내가며 위안화로 환전해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면세점에서도 가격을 미국 돈, 중국 돈, 한국 돈으로 따로 매겨놓았다. 역시 한국 돈으로 지급하면 편하다. 지갑이 불룩한 것이 싫어서 주머니에 대충 넣어둔 한국 돈을 꺼내 줬더니 구겨진 돈은 은행에서 환전해주지 않는다며 반드시 지갑에 넣어 다니라는 충고를 들었다. 동전은 걸어 다닐 때 짤랑거리고 무게도 있어 불편하다. 보안 검색 때도 금속이므로 여지없이 걸린다. 보안 검색은 공항뿐 아니라 중요 관광시설을 이용하기 전에 받는다. 백두산 산문에서 입산 절차를 밟을 때도 거쳐야 한다. 따로 가방에 넣어 두거나 아예 동전은 떠날 때부터 안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단, 유럽에서는 화장실이 대부분 유료이므로 유로 동전이 필요하다. 보통 한번 사용에 30센트, 50센트를 받는다. 동전이 없으면 지폐로 내면 팁으로 생각하고 거스름돈을 주지 않는 일도 있다. 여러 명이 함께 가면 합해서 지폐로 사용할 수도 있다.
- 2018-08-20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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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밤의 암살자’ 우수(憂愁)와 비정(非情) 사이
- 완벽한 미모로 인해 연기력이나 지성이 과소평가되는 배우가 있다. 알랭 들롱과 마릴린 먼로가 대표적이다. 요즘에는 신도 질투할 미모와 아우라를 갖춘 완벽한, 배우다운 배우가 없어 스크린 앞에 앉을 때마다 불평하게 된다. “저 정도 용모와 연기력으로 감히 나의 귀한 시간과 체력을 소모케 하다니.” 정말 놀라운 건 요즘 젊은이, 심지어 영화 좀 본다는 이들도 알랭 들롱과 마릴린 먼로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이름도 모른다고 답한다는 것. 물론 세계 각국 고전을 챙겨보는 게 어렵지 않은 요즘. 지금 한국의 젊은이, 영화학도는 고전을 찾아볼 의지가 없다는 것이 문제지만. 여름이면 생각나는 배우 알랭 들롱. 아마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추억 때문일 것이다. 학교 수업을 빼먹고 몰래 간 영등포 모 극장에서 ‘태양을 가득히’를 보고 온 다음 날, 1교시에 들어온 영어 선생님을 보고 경악했다. 넓적한 얼굴이 늘 술 마신 것처럼 불콰해서 ‘음주후’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선생님. 그날따라 어찌나 못생겨 보이던지. 칠판 꼭대기 판서가 불가능한 작은 키, 어벙한 양복 차림에 오버랩 되던 알랭 들롱의 푸른 눈동자와 오뚝한 콧날, 세련된 양복 차림. 선생님이 조금만 잘 생겼더라면 영어를 작파하기로 결심하진 않았을 텐데. 1988년 프랑스를 여행하며, 거리 청소부도 알랭 들롱처럼 잘 생겼다는 걸 알게 되긴 했지만, 내 마음속 알랭 들롱은 여전해서, 그가 세상을 떠나면 ‘제라르 필립-장 가방-이브 몽탕- 알랭 들롱’으로 이어진 프랑스 남성 스타 계보는 사라질 테니, 무슨 재미로 프랑스 영화를 보나 싶다. 그런저런 사연으로 15년 전이던가, 한국영상자료원에 비디오테이프를 수백 점 기증할 때, 큰돈 주고 어렵게 구한 귀한 한국 영화는 기꺼이 내주었어도, 알랭 들롱 출연작은 단 한 편도 내주지 않았다. 알랭 들롱을 향한 시시콜콜 연모를 드러낸 것은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다시 본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의 영화 ‘한밤의 암살자’(Le Samourai, 1967) 때문이다. 알랭 들롱 주연의 범죄 영화는 과묵하고 대부분 그가 죽는 것으로 끝나지만, ‘한밤의 암살자’는 그 절정, 궁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속 제프(알랭 들롱)는 말이 없고 주도면밀한 암살 전문가다. 자신을 사랑하는 고급 매춘부 제인(나탈리 들롱)과 알리바이를 약속한 후, 나이트클럽 사장 살해 지령을 수행한다. 수많은 용의자 중 제프를 의심하는 수사반장(프랑소와즈 페리에르). 그러나 유일한 목격자인 나이트클럽 피아니스트(캐시 로지에르)의 거짓 증언으로 풀려난다. 불안한 암살 고용주는 또 다른 암살 전문가를 보내 제프를 죽이려 한다. 제프는 경찰과 킬러에게 쫓기며 고용주를 알아내려 한다. 정면에 창문이 보이긴 하지만, 어두운 방 벽을 배경으로 크레디트만 떠올라, 침대에 누운 제프가 내뿜는, 희미한 푸른색이 감도는 하얀 담배 연기를 인식하지 못했다면, 흑백영화인가 할 정도다. 도입부에서 마지막까지, 영화는 프렌치 누아르 고전 수작답게 흑백 분위기로 일관한다. 마침내 일어선 제프가 거울 앞에서 연갈색 더블 코트에 같은 색 모자를 쓰고 모자 끝을 매만져 단장을 끝낸 후 방을 나선다. 알랭 들롱 미모에 누를 끼쳐선 안 되니, 옷차림에 신경 쓰는 건 당연하다. 더블 코트, 혹은 양복과 모자, 구두 디자인과 색감까지 신경 쓴 완벽한 남성 패션을 자랑한다. 집 앞 골목에 세워진 자동차를 훔칠 때, 주머니에서 꺼내는 열쇠꾸러미는 마치 대갓집 마나님이 속곳에서 꺼내는 열쇠처럼 묵직하다. 철사로 꿴, 최소한 100개는 돼 보이는 열쇠를 하나하나 끌러 시동을 걸어본다. 아, 아날로그 범죄의 침착하고 여유 있는 행동이라니! 훔친 차를 몰고 사람도 집도 보이지 않는, 자잘한 돌로 포장된 좁은 골목을 달려, 셔터 올린 창고로 단번에 들어간다. 감독 멜빌은 제프가 훔친 차를 몰고 좁은 골목을 달려 곧바로 창고로 들어가는 장면을 “자르지 않고 어찌 찍을까?” 걱정했는데, 알랭 들롱은 이를 한 번에 해냈다고 한다. 자동차 정비공이 차 번호판을 바꾸어주고 총을 주고 서류와 돈을 주고받을 때까지, 정비공과 제프는 눈빛으로만 소통한다. 제인의 아파트 방 앞. 인기척도 없건만 직감적으로 일어난 제인이 “제프?”라고 묻기까지, 9분 58초. 음악도 없다. 경제적인, 절제된, 영화 본질은 말이 아닌 행동 심리라는 걸 웅변하는 잊을 수 없는 도입부요 스릴이다. 모름지기 ‘싸나이’ 영화는, 범죄 스릴러는, 필름 누아르는, 알랭 들롱 영화는 이래야 한다. 완벽한 미남 스타 알랭 들롱이 거처하기엔 누추하고 초라한 단칸방. 변변한 가구도 부엌 도구도 없는 방 한복판에 새장 속 새 한 마리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유일한 생명체인 새가 얼마나 영리하게(새의 변화를 알아보는 예민한 관찰력의 제프, 암살자가 대단한 거지만) 정보를 주는지. 인간은 머리를 굴리며 배신하지만, 새는 스스로 기진해 죽어가면서 먹이를 준 고독한 암살자에게 충정을 바친다. 살림살이랄 것도 없는 집이라 식사는 어찌 해결하는지. 알랭 들롱은 특히 범죄 영화에서 밥 먹는 걸 보여준 기억이 없다. 잘 생겼으니, 식사 따위 일상은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 담배 하나면 되니까. 멜빌 감독이 알랭 들롱에게 스크립트를 건네자, 알랭 들롱은 제목을 뭐로 할 거냐고 물었다고 한다. 멜빌은 ‘사무라이’라고 답했다. (국내에선 ‘한밤의 암살자’, ‘사무라이’, ‘고독’ 등으로 소개되었다) 알랭 들롱이 멜빌을 따라 그의 침실로 들어가자, 거기엔 오직 가죽 소파와 벽에 걸린 사무라이 칼이 있을 뿐이었다. 멜빌의 미니멀한 취향이 영화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음을 알게 하는 일화다. 멜빌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왜 제프는 암살자가 되었을까?, 이런 물음 따위는 거두절미 성가실 따름이다. 불친절한 영화라 이야기에 구멍이 많다는 불평을 하고픈 관객이라면, 멜빌 영화를 볼 이유가 없다. 주인공의 설명 없는 행동, 목숨 건 결단에 빠져들면 된다. 제인 역시 제프에게 일방의 복종과 숭배에 가까운 사랑과 신뢰를 바치며, 왜냐고 토를 달지 않으며 명령에 다름 아닌 부탁을 수행한다. 멜빌 영화 주인공은 비록 범죄자라 할지라도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거나, 마치 죽음을 유도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한밤의 암살자’의 마지막, 제프는 피아니스트를 겨누지만, 형사들이 들이닥쳐 그의 등에 총을 쏘아댄다. 제프의 총에는 총알이 없는데. 물론 제프는 자신을 쫓는 경찰이 들이닥칠 것을 알면서도 손님 많은 클럽에 당당히 들어왔다. 오프닝 시퀀스에 격언을 새겨 넣길 즐긴 멜빌은 ‘한밤의 사무라이’에서도 출처를 니토베 이나조의 명저 ‘무사도’라고 밝힌 글을 올렸다. ‘무사도’는 일본인에게 수치와 명예를 알린 책으로도 유명하다. “There is no solitude greater than a samurai's, unless perhaps it is that of a tiger in the jungle.”(정글의 호랑이가 아닌 이상, 사무라이보다 더 고독한 존재는 없다) 도입부 인용문은 멜빌의 창작이라 한다. 유명 영화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이에 실망감을 드러냈다. 이런 작은 불만에도 에버트는 자신의 ‘Great Movies’ 목록에 ‘한밤의 암살자’를 올렸다. 평론가 스티븐 스나이더도 저서 ‘죽기 전에 봐야 할 1001편의 영화’에 영화 ‘한밤의 암살자’를 수록했다. ‘한밤의 암살자’는 장 피에르 멜빌 영화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5가지 특징이 다 적용된다. 범죄 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알랭 들롱과 같은 프랑스 유명 스타를 캐스팅했다. 오랫동안 대사가 없는 장면이 많다. 주인공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매무새를 살핀다. 나가기 전 방을 둘러본다. 1930년대 할리우드 필름 누아르와 하드보일드 영화를 좋아했던 멜빌이지만, 그의 프렌치 누아르는 역으로 많은 현대 감독에게 영향을 미쳤다. 짐 자무쉬 감독은 ‘한밤의 암살자’를 리메이크한 ‘고스트독-사무라이의 길’을 발표했고, 쿠엔틴 타란티노는 ‘저수지의 개들’이 ‘한밤의 암살자’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마이클 만의 ‘콜래트럴’도 마찬가지다. 오우삼 감독도 편애하는 영화로 꼽았는데, 주윤발 주연 홍콩 누아르 중 ‘첩혈쌍웅’의 주인공 이름이 제프일 정도다. 우수와 비정 분위기로 프렌치 누아르에 한 획을 그은 멜빌 감독은 ‘Jean-Pierre Grumbach’가 본명이지만, 미국 작가 허먼 멜빌을 존경해 장 피에르 멜빌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1973년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14편을 연출했을 뿐이다.
- 2018-08-20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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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의 혼행
- 이전과 달리 요즘은 소위 적당한 시기라는 게 따로 없는 세상이다. 일 년 사시사철 계절과 상관없이 무엇이든 대부분 할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떠날 수 있다. 특히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람 중에 시니어가 있다. 은퇴 후의 시간적 여유로움과 공허함을 채워줄 가장 좋은 도구가 여행이다. 그동안 치열하게 사느라 미루어 두었던 세상 나들이를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즈음이 된 것이다. 연휴를 앞둔 언젠가 남편은 틈만 나면 인터넷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는 정년퇴직 후 재취업하여 아직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찾아온 연휴 기회를 유용하게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 덕분에 지금껏 세상을 돌아다니며 자유여행을 제법 즐겼다. 남편은 특유의 치밀한 계획성으로 최대의 유익을 얻을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막상 나는 여행이 그리 내키지 않았다. 유난히 그 무렵 피치 못할 일정이 몇 가지 있어서 고민하던 차였다. 기대에 부풀어 준비하는 그에게 이런 내 사정을 털어놨다. 그리고 요즘 트렌드인 이른바 ‘혼행’(혼자 여행)이란 걸 권해보았다. 그러자 별로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그는 쉽게 혼행을 받아들였다. 물론 그가 혼자서도 여행을 잘 해낼 사람이란 건 익히 알고 있지만 이렇게 흔쾌히 응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혼자 하는 여행으로 바뀌면서 그는 한결 가볍게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부부가 함께했던 여행은 인내심이 부족한 나 때문에 이동의 불편함이나 숙식 문제 등으로 경비가 더 나가게 마련인데, 이젠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숙소나 교통편도 본인만 편하면 되니 부담 없이 일정을 짜고 예약했다. 그렇게 그는 단출하게 꾸린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떠났다. 그런데 현지에 도착했으면 간단한 연락이라도 할 사람인데 하루 이틀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생존은 알고 지냅시다.’ 참다못해 내가 먼저 문자를 보냈다. 그제야 전화가 왔다. 혼자서 어찌나 신나게 다니는지 연락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화가 나기도 했다. 그날 이후 남편이 숙제처럼 여행지에서 보내오는 멋진 풍광의 사진이 밀려들었고, 현지인들과 섞여 어울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통화할 때면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혼행의 즐거움을 생생히 전해왔다. 아이들과 함께했던 가족여행이나 부부만의 자유여행에 이미 익숙한 그는 혼자 하는 여행 역시 문제없이 잘 즐기고 돌아왔다. 게다가 낭비 없이 보낸 초저가 알뜰 여행이었다. 혼자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한층 밝아진 남편의 안색에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동행자와 의견을 조율하거나 인솔해야 하는 부담을 털고 홀가분하게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진즉에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좀 더 일찍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도록 배려할 걸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1인 가구와 고령화 사회 영향으로 다양한 1인 문화 콘텐츠가 등장하고 있다. 날마다 진화하는 나 홀로 문화 중에 액티브 시니어들의 활력 넘치는 여행은 매우 긍정적인 반응이다. 이러한 효과를 높이려면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독립적인 시간 활용을 위해 홀로서기의 자신감을 키워두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신노년의 문화는 매사 스스로 해결하며 살아나가려는 의지가 변수일 것이다.
- 2018-08-06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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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삭바삭한 여자, 배우 박정수가 만난 딜레마
- 카랑카랑한 목소리에서부터 이 사람은 싫고 좋은 게 분명할 것이며 그 점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으리라는 인상을 준다. TV 밖 현실 속에서 만난 배우 박정수의 첫인상은 어떤 단호함 혹은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한 이가 주는 강인함이었다. 얼마 전 드라마 ‘데릴남편 오작두’를 끝낸 그녀는 마침 인터뷰를 한 날 미국으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학생 시절 청춘스타로 화려한 데뷔, 긴 휴식, 복귀, 그리고 이제는 안정된 중견 배우로 그 이미지를 각인시킨 그녀를 만나 연기자로서의 삶, 묵직한 여정에 대해 물어봤다. “요즘은 드라마 끝나면 일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어요. 젊은 시절에는 드라마 끝나면 어디로 놀러 가야지, 쉬어야지 했는데 이제는 하도 쉬어서 일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드라마가 끝나면 다음 일을 생각한다는 배우 박정수의 말은 바로 그녀가 워커홀릭이라는 짐작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워커홀릭인 그녀가 지금 미국을 거쳐 캐나다 로키산맥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원래 즐겁게 여행하는 걸 좋아하지만 매우 힘들 때도 여행을 떠난다고 말했다.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지금 일을 준비해야 할 때인 것 같은데 여행을 준비하고 있으니…. 말하자면 그녀가 힘들다는 의미 같았다. 정상에 도착하기 전, 날이 저물다 그녀의 대학 시절 전공은 경영학과였다. 입학은 제약학과로 했다. 그리고 정작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미술이었다. 지금도 가방과 구두를 유독 좋아하는 그녀는 미술을 계속했다면 패션 디자이너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선택한 삶의 지점들이 여러 갈래인 이유는 가족 때문이다. 교육자 집안의 아버지는 딸이 미술을 하는 걸 반대했고 그녀는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학교 재학 시절 탤런트 시험을 봤는데 합격을 하면서 신데렐라 같은 연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화려한 연예계는 그녀에게 보람보다는 환멸을 더 줬던 것 같다. 탁월한 미모의 연예계 총아였던 그녀가 갑작스러운 은퇴를 결심했기 때문이다. “내 뜻과는 달리 연기자 생활을 시작해서, 남들보다 빨리 자리를 잡았어요. 그런데 주인공 몇 번 하다가 이 생활이 싫어서 시집을 갔죠. 그러다 15년 후 서른아홉 살에 다시 밑바닥에서부터 연기를 시작했어요.” 불혹을 앞두고 복귀한 연예계에서 밑바닥이라 할 수 있는 엑스트라 연기까지 하면서, 그녀는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혼자서 딸 둘을 제대로 키워야 한다는 의무감이 힘이 됐을 것이다.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예순여섯의 나이, 지금 그녀는 기자에게 연기자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회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산을 올라가고 있는 중인데… 그런데 정상에 도착하기 전에 날이 저물었어요. 다시 내려와야 하는 거야. 그래서 길을 잃은 거예요. 지금 내 마음이 딱 그래. 딜레마죠. 이걸 계속해야 해? 이 길을 가야 할까? 너무 힘드니까 고민이 돼요.” 또 다른 자신 마주하기 그녀는 자신이 이런 고민에 빠졌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워 보였다. 재작년까지는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고도 말했다. 연기자의 길은 당연히 자신의 길이라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진실하면 무조건 통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어요. 그런데 작년에 나이 든 것을 처음 느꼈죠. 나이를 먹으니 도태되는구나 하고 현실을 직시하게 됐어요. 그리고 나를 돌아봤어요. 너무 행운아였더라고. 정말 운이 좋았던 거죠. 그런데 그 운이 다한 거예요. 운이 다했는데, 이걸 밀고 나갈 힘이 있을까? 몸은 늙었고 늙다 보니 마음도 작아지고 겁이 나더라고요.”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은퇴 선언을 하겠다는 건 아니다. 외려 정반대로, 그녀는 연기 외의 다른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일을 언제까지, 어디까지 감수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여전히 둥둥 떠다니며 그녀를 괴롭혔다. 말하자면 그녀의 딜레마는 자신의 업에 대한 확신과 함께, 그 업의 한계를 잔인하게 체감하면서 시작된 듯했다. 애초에 기자는 적절한 시점에 그녀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 되어버렸다. 잠시 동안 그녀가 겪은 삶의 굴곡을 생각해봤다. 그녀는 정상에 올라갔다가 길이 안 보여서 내려왔고, 다시 길을 올라가다가 또 길을 잃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는 지금의 박정수는, 어쩌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또 다른 자신을 마주한 상황이 아닐까? 바닥을 치고 올라오기 위해 더 가라앉다 “저는 제 아집이 너무 셌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해요. 운 좋게 이 자리까지 왔지만 좀 더 열린 마음이었으면 오늘보다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내가 그런 걸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독선이 강했지, 실패가 없었으니까. 뒤를 돌아볼 시간이 전혀 없었던 거예요.” 그녀의 자기고백은 그녀가 하고 있는 고민의 깊이를 느끼게 해줬다. 동시에 그녀가 그렇게까지 자신을 진단할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해줬다. 모든 편견을 다 내려놓고 자신을 알아챈 그녀는 자신이 늪에 빠져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 늪은 고민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늪이기도 했다. “늪은 허우적거리면 더 빠져들어가죠. 그러니까 내가 어디까지 빠질 수 있는지를 확인한 다음, 바닥을 치고 나오는 게 좋겠다 싶어요. 끝까지 제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더 깊숙하게 자신을 침잠시켜 답을 구하겠다는 다짐은 자아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브라운관 너머에서 살아가는 여자 박정수가 더 궁금해졌다. 절제하는 배우가 갖게 된 연륜 “누군가 제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너는 사막에 떨어지면 전갈을 씹어먹고서라도 살아남을 사람이라고.(웃음)” 그 말처럼, 겉으로 보이는 박정수는 독하다. 너무 이른 나이에 경험한 연예계, 그리고 홀로 키워야 했던 두 딸.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기에는 생활인으로서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 책임감은 그녀의 연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저는 연기를 해도 어디까지는 가는데 선을 넘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건 배우로선 나쁜 점이에요. 배우라면 갖고 있지 말아야 할 감수성을 갖고 있는 거니까요. 미쳐야 미친다지만 미치도록 미치지는 않는 거죠. 감정을 절제하기 위해 다 내보내지 못하고 늘 참아요. 그게 아버지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어요. 아버지도 교육자, 외할아버지도 교육자인 집안이었으니까요.” 그녀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 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하는 것은 교육자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늘 합리적인 선택을 하려 했다. 그런데 사실 이런 행동과 성격은 연기자보다는 CEO에 더 어울리는 자질이다. “그래서 배우로 성공 못했나봐.(웃음) 기획을 너무 잘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그러다가도 ‘박정수, 네가 하는 거나 잘해’ 그렇게 스스로 말하죠.” 그렇게 ‘하는 거나 잘한’ 박정수가 얻은 것은 연기 연륜이다.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남들이 보기에는 선을 넘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능력. 젊었을 때는 상황을 너무 객관적으로 보며 몰입하지 못하는 감정이 단점이었지만 지금은 큰 걸림돌이 아닌 이유다. 너무 하고 싶은 영화 나이 들어서도 잃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내 자존감, 그리고 총명함이에요. 옛날에는 스마트하다는 말 참 많이 들었는데… 나이 들어가면서 총기를 많이 잃었죠.” 그녀 삶의 낙은 여행과 여행에 관한 독서, 그리고 영화 감상이다. “여행은 머리와 몸을 싹 비워줘요. 그곳의 문화에 젖어서 사는 거죠. 연기자로서도 도움이 돼요. 제가 워낙 새로운 곳의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걸 좋아하는데… 아마 호기심이 많아서겠죠.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요. 사람을 만나기 싫은 것은 사람에게 치여서, 부대끼는 게 싫어서 그런 것이지, 누구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좋아해요.” 그러고 보니 인터뷰를 하면서 그녀가 영화를 너무 좋아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넌지시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생각은 없냐고 물었다. “정말 하고 싶죠. 그런데 예전에 영화계를 모르던 시절에 개런티를 많이 받고 출연한 적이 있어요. 당시엔 그 개런티가 파격적이었나봐요. 그때는 내가 인기가 좀 있었던 때니까. 그런데 그다음부터 영화계에서 ‘박정수는 비싼 배우’로 낙인을 찍었어요. 그리고 영화계는 사단이 형성되어 있어 늘 같이 하던 사람만 세트업되더라고요. 이게 굉장히 큰 장벽이구나, 진작에 하자고 할 때 할걸 너무 배짱을 부렸나 했죠.(웃음)” 시니어 감정을 표현하는 연기 하고파 그녀에게는 아직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을 때 해보고자 하는 연기 욕심이 있다. “요즘은 과거에 비해 나이 드신 분들이 감정을 교환하는 게 복잡해졌을거예요. 사랑과 미움 등의 감정도 이제는 심플하지 않잖아요? 그런 부분을 잘 살려낸 영화나 드라마가 있다면 해보고 싶어요.” 그녀의 말은 시간과 함께 시대를 자신의 연기 속에 녹여내고 싶은 여배우들 모두의 소망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TV 속에 나오는 나이 든 여자를 단순하게 ‘어머니’의 이미지로만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만나는 나이 든 여자는 모두 ‘어머니’로만 존재할까. 그녀가 새삼 여성스럽게 느껴진 건 이 지점에서였다. 다소 거침없어 보이는 면모는 삶의 부침을 겪다 보니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그녀만의 방어기제가 아닐까. 마음의 평정을 찾은 사람이 멋있다 다시 그녀가 겪고 있는 딜레마로 얘기가 돌아왔다. 삶의 좌표를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박정수는 그걸 알기 때문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내면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결국 뭐든지 내가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자 그녀가 강인한 사람이지만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로서는 만족스러운데… 극복해야죠. 사실 이런 딜레마는 배우가 아니라 다른 누구도 겪는 거니까요. 그걸 딛고 일어서지 못하면 패배자가 되는 건데, 어떻게든 딛고 일어서야죠. 다만 얼마만큼 시간이 걸릴지, 어떻게 해야 할지가 문제죠.” 그녀는 나이 들어서도 멋있는 사람의 기준으로 ‘마음의 평정’을 꼽았다. 그렇다면 현재 마음이 평온하지 않은 그녀는 자신의 기준에서 멋있는 사람일 수가 없기에, 어떻게든 답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 그 순간 그녀에게 준비된 질문 중 폐기될 뻔한 질문을 꺼낼 수 있었다. ‘10년 후의 박정수는 어떤 사람일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질문이 너무 슬프게 만드네.(웃음) 이걸 다시 뛰어넘고 더 행복해질 수도 있고…. 저도 모르죠. 모르겠지만, 좌절하고만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마지막 대답은 그 어떤 말보다 그녀다웠다. 모든 것을 잃더라도 자신만은 절대 잃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한 다짐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가 찾아낼 길이 어떤 모습이든, 그것은 자신이 선택하고 납득한 길일 것이다. 배우 박정수의 새로운 길을 믿고 지켜볼 가치가 있는 이유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그녀의 핸드폰 너머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그녀는 슬럼프에 빠진 배우의 모습에서 바삭한 미소의 여자로 변신했다. 역시 ‘배우 박정수답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스스럼없고 당당한, 그렇지만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는 자기애가 스며들듯 젖어 있었다.
- 2018-07-16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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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수가 자산이다
- 김포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1시간 만에 홍차오 1 공항에 도착했다. 교통카드로 택시, 버스, 지하철 등의 대중교통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해서 사려는데 2 공항에서만 판다는 것이다. 다시 전철을 타고 가서 보증금으로 20위안을 맡기고 100위안짜리 교통카드를 샀다. 반납은 편의점이나 공항에서 가능하다고 했다. 호텔을 찾아가기 위해 한국에서 챙긴 지하철 지도를 꺼냈다. 인민광장은 교통이 편하고 주변에 관광지가 많아서 놀다가 지치면 잠시 숙소에서 쉬었다 나올 수 있는 위치였다. 2호선을 타고 인민광장 역 14번 출구로 나와 10분 정도 걸어가니 호텔을 찾을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짐과 몸을 검색했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김포공항에서 빌려온 포켓 와이파이를 잘 쓸 수 있기를 바랐다.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우리 조 2명과 옆 조 4명이 함께 별지비자를 냈다. 호텔에 도착해서 체크인하려니 별지비자 원본이 필요하단다. 우리는 사본만 있을 뿐이고 다른 호텔에 머무르는 팀이 원본을 갖고 있었다. 한국에서 예약하며 비용도 일부 냈지만, 나중에 원본을 준다고 해도 방 열쇠를 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원본을 가진 팀에게 연락해 만나기로 했다. 중국이 유독 비자에 까다롭다. 방은 청소 상태가 좋지 않았다. 샤워실은 물이 잘 안 빠져서 물에 발을 담근 채 샤워를 했다. 3박 4일을 머물 방이었다. 매일 팁으로 한화 1000원을 주었다. 다음 날 호텔에서 아침을 먹었다. 중국식 흰죽과 조 죽 귀리 죽이 나오고 짜게 익힌 달걀과 채소 볶은 것들이 나왔다. 음식이 좀 짠 편이었다. 예원을 관광하려고 아침 8시에 출발했다. 인민광장 역에서 2호선을 타고 난징둥루 역에서 내려 도보로 15분 정도를 걸었다. 거리의 이정표는 불친절했고 포켓 와이파이는 쓸 수 없어 구글 지도도 사용하지 못했다. 번역 앱 '파파고'도 먹통인데 중국어 간체자는 어떻게 봐도 해독 불가였다. 예원의 방향을 물어도 대답하는 사람은 처음엔 빠른 중국어, 다음엔 느린 중국어로 답했다. 길을 서성이다 똑똑해 보이는 청년에게 길을 물어 겨우겨우 예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엔 표를 파는 입구를 찾지 못해 헤맸다. 교통경찰에게 물으니 상가 번호 2번으로 들어가라고 일러주었다. 예원 상가는 대규모로 조성되었는데 그 상가를 통과해서 한참을 들어가 ‘아홉 번 꺾여 있는 다리 구곡교’를 지나야 매표소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매표소에서는 60세 이상인 사람에게는 50% 할인이 된다는 푯말이 친절하게 쓰여 있어서 여권을 보여주고 20위안으로 할인받았다. 다른 팀은 입구를 찾다가 마감 시간이 되어 결국 입장을 못 한 팀도 있었다. 중국의 입구는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이 아니라 대부분 찾기가 힘들었다. 룸메이트와 나는 돌아오는 날 홍차오 공항을 향해 일찍 출발했다. 공항에 미리 도착해서 짐을 맡기고 공항 근처에서 쇼핑할 예정이었다. 2호선을 타고 난징둥루로 가서 10호선 홍차오 기차역으로 가려면 쉬징동 방향으로 타야 했다. 10호선은 쉬징동방향과 항중루 방향 두 가지가 있다. 홍차오 1호 터미널에서도 다시 짐 검색을 했고 공항에 짐을 맡기는 비용은 한 덩어리당 4시간까지 30위안이었다. 짐을 맡기고 홀가분하게 다시 10호선을 타고 롱바이씨천 역으로 향했다. 즐거운 쇼핑 시간. 책에서 읽은 대로 시험할 참이었다. 가방을 골랐다. 주인은 짧은 한국어로 "200위안"이라고 했다. 50위안이면 사겠다. 돌아온 대답은 "안된다"였다. 가게를 나오려는 순간 주인은 팔을 잡았다. "알겠다. 50위안에 팔겠다"라는 것이다. 이곳에선 흥정을 잘하면 물건을 제시가격보다 훨씬 싸게 살 수 있다. 어느 곳이나 사람 사는 곳이고, 모르면 물어보고 도움을 청하며 하는 여행이었다. 겁을 줄이는 일종의 담력시험이었다. 와이파이만 터진다면 더 쉬울 것 같다. 안 터져서 오히려 에피소드가 더 많았다. 3박 4일의 여행경비는 항공료 빼고 모두 32만 원이 들었다. 맛집을 찾아다니며 호사를 누렸으나 다리는 매우 아팠다. 시니어도 자유여행에 겁부터 먹지 말고 도전해보면 새로운 추억을 많이 쌓을 수 있을 것이다.
- 2018-07-09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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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손으로 기획하는 여행 일정
- 여행은 일종의 병이다. 갈 곳을 정하면, 누가 기다리기라도 하듯 급하게 떠나곤 했다. 돌아올 때면 더 허겁지겁 돌아왔다. 그래도 머릿속은 삭제 버튼을 누른 듯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허전했다. 서울시도심권50 센터에서 진행하는 ’여행을 기록하는 맘대로여행 in 상하이‘ 프로그램을 보고 ’바로 이거다!‘싶었다. 여행 기획하기, 실전 여행하기, 여행기 만들기 등 4명이 한 조를 이루어 여행을 기획하는 교육과정이었다. 주로 여행을 가면 정해진 일정에 맞춰 편하게 따라다녔다. 종종 쇼핑의 들러리가 되어 계획에도 없던 물건으로 가방을 채우기도 했다. 수동적이었기 때문에 감동도 덜 했고 기억에 남지도 않았다. 그런 아쉬움을 느끼던 차라 얼른 참여했다. 이력서와 면접을 통해 12명이 선발됐다. 총 8회, 24시간의 교육이 끝나면 비행기와 호텔을 예약하는 등 실전 기획에 들어간다. 항공권은 보조를 받고 그 외 비용은 자기 부담이었다. 어쩔 수 없이 ‘짠내투어’가 됐다. 항공권 예약을 위해 출발지와 목적지를 지도로 확인했다. 인민광장 근처에 숙소를 정했기 때문에 김포공항과 홍차오공항을 이용하기로 했다. 한국 국적기보다는 중국 민항기의 가격이 저렴해 동방항공을 선택했다. 예약은 빠를수록 좋다. 할인항공권을 취급하는 여행사로 G마켓 여행, 인터파크투어, 여행박사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시간대와 가격이 적당한 것을 고르면 된다. 싸게 사는 요령은 성수기를 피하고 유효기간이 임박한 항공권이나 공동 구매를 이용하면 도움이 된다. 호텔 예약은 몇 개의 앱을 비교해보면 된다. 익스피디아, 트립어드바이저 등을 통해 각 나라의 호텔을 찾아볼 수 있다. 처음 본 사람과 어느 관광지를 갈지, 무엇을 먹을지, 오전과 오후 중 언제 떠날지 등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다. 그룹 이름을 ‘즐상’이라고 지었다. 상하이를 즐기자는 의미였다. 처음에는 여자 둘, 남자 둘, 총 넷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여자 둘만 남았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 한 팀이 되면 의견이 안 맞아 팀이 깨지는 일이 종종 있는 일이라고 한다. 여행을 계획대로 강행할 것인지 포기해야 하는지 위기가 있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각자 업무를 분담하여 진행하기로 했다. 다른 조와 달리 네 명이 나눌 일을 두 명이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지만,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 계획은 몇 번이고 수정됐지만, 상하이 여행책과 인터넷의 도움으로 제 자리를 찾아갔다. 상하이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상하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상상 속 상하이에서 푹 빠져 보낸 시간은 기대와 행복에 젖게 했다. 여행에서 무엇을 보든 상관없다. 각자의 느낌은 다르기 마련이고 어차피 다양성을 즐기는 것이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애써 계획을 짜고도 팀원의 기호를 신경 쓰며 존중과 배려의 시간을 보내는 겸손한 경험도 우리를 멋지게 만들었다. 패키지여행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떨림으로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다. ‘과연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떠듬떠듬하는 언어보다는 몸짓 언어가 아주 효과 있다는 경험을 한 이후로 마음이 조금 놓였다. 실수도 즐기며 불편함도 경험으로 받을 준비를 했다. 이번 상하이 여행은 조사한 것을 하나하나 펼치며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닌, 새로운 시야를 갖는 것이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처럼 근사한 안목이 더해지기를 기대하며 설렘을 마주했다.
- 2018-06-2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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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기업에 도전하는 김영철 바인그룹 회장
- 김영철(59) 바인그룹 대표는 가방에 MP3를 네댓 개씩 갖고 다닌다. MP3마다 영역별로 다운받은 강의 파일이 담겨 있다. 산책할 때도, 러닝머신에서도, 심지어 출장 갈 때도 늘 강의를 듣는다. “리더의 에너지는 공부에서 나온다. 공부는 가장 확실한 자기충전 방법이다. 리더가 직원들에게 나눠줄 것은 에너지다. 내가 매일 공부하는 이유다.” 김 대표의 지론이다. 알고 보니 그는 유도선수 출신. 무릎 연골 부상으로 유도를 그만두고, 출판사 영업사원으로 동화책과 백과사전을 팔러 다니던 그는 35세의 나이에 1995년 교육전문기업 ‘동화세상 에듀코’를 창업한다. 동화세상 에듀코는 유아에서 성인까지 온·오프라인 교육을 망라, 티칭과 코칭을 아우르는 교육전문기업이다. 2017년 에듀코를 모체로 교육·유학·여행·외식·무역·건설 등을 계열사로 아우르는 바인(vine)그룹으로 전환했다. 말 그대로 포도송이처럼 선한 열매를 알차게 맺자는 의미에서의 새 출발 선포다. 신설동에 소재한 바인그룹 사옥은 마치 자기계발 실행의 모델하우스를 방불케 했다. 대표 집무실엔 실행 플랜 게시판과 2095년까지의 미래비전 백년달력이 걸려 있다. 직원 화장실엔 벽마다 눈 돌릴 틈 없이 명언이 빼곡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영철 대표가 건네는 명함엔 ‘나 김영철은 한평생 끊임없이 수양해 자신을 누리며 남들에게 기쁨이 되어주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사명선언이 담겨 있다. 명함 타이틀도 바인그룹이 아니라 바인벤처다. 스타트업 벤처의 유연하면서도 맹렬한 야생정신을 배우겠다는 자기다짐의 의미다. 사옥 분위기뿐 아니라 김영철 대표도 마치 ‘걸어 다니는 자기계발서’를 접하는 느낌입니다. 실제 저자들보다도 실행을 더 잘하시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교육의 힘을 믿습니다. 제가 그 덕을 실제 체험했고요. 자꾸 드러내서 가시화해야 실행할 수 있기 때문에 저부터 솔선하고 직원에게도 권합니다. 유도선수인 제가 사회에 나와 영업의 고수가 되고, 또 경영자로 변신할 때 사회에서 받은 강의, 교육이 큰 힘이 됐습니다. 저는 지금도 어디에서든 교수, 강사란 말을 들으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벌떡 일어나 90도로 감사인사를 합니다.” 김 대표는 직원들 교육에는 예산의 한도를 정해놓지 않고 좋은 프로그램은 아낌없이 받도록 한다. 권장을 넘어 아예 의무화해 놓았다. 아이디어 창조, 마인드, 스피치, 리더십 각 분야에 걸쳐 다양한 교육, 지닉스 교육을 받는다. 지닉스는 Genie(잠재력)+Explore(탐험·여행)의 합성어로 ‘내 안의 잠재력을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기존 교육에 매번 새로운 교육이 더해지니 교육비 예산도 올라가게 마련이다. 직원의 성장판을 열려면 회사 예산의 천장을 없애야 한다는 게 그의 확고한 소신이다. 직원을 이용해 회사 성과를 올리기보다, 회사를 이용해 직원이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는 나름의 경영철학에서다. 본인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게 학력, 경력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는 인재철학이다. 그는 “사과 씨 안엔 사과가 없지만 사과가 되지 않느냐”며 잠재력을 읽고 육성하는 게 바로 진정한 리더의 능력이라고 말했다. 잠재력이야말로 학력, 경력보다 확실한 인생 전공이기에 그것을 읽어주고 그것을 살펴볼 환경을 만드는 것이 리더의 소명이라 생각한다. 젊은 시절부터 자기계발을 잘하셨습니까? “하하. 웬걸요. 강원도 산골 가난한 농가 출신이라서 학교 다니는 것도 사치였어요. 유도를 하게 된 것도 고등학교, 대학교를 장학금으로 갈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돌아보니 책 공부 말고 사람 공부도 큰 것 같아요. 동네 어른들께 어깨너머로 배운 예의범절, 더불어정신 등이 인생의 큰 공부더라고요. 남들은 흘려듣는 이야기도 저는 좋게 말하면 곧이곧대로, 나쁘게 말하면 고지식하게 귀담아들었어요. 유도하면 장학생 된다고 해서 유도 시작하고, 유도 국가대표 선수되려면 술, 여자, 담배를 멀리해야 한다고 해서 실천했고요. 그것도 자기계발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까요. 하하.” 그가 자녀는 물론 직원들에게 늘 책, 이론 공부 못지않게 강조하는 게 정신 자세, 세상 공부, 즉 더불어정신이다. “혼자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한계가 있다. 더 큰 성과는 옆 사람, 다른 분야와의 협업에서 나온다”고 강조한다. 그는 자기계발이 성공 처세술이 아니라 공동체 정신이라고 말한다. 박수 받는 것 못지않게 박수 치는 법도 배워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가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 때 직원들과 비인기종목 외국선수팀 응원을 굳이 간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늘에 관심을 기울이고, 나누어주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기계발이고 참교육이다. 유도와 경영, 얼핏 보면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데 어떤 게 서로 통하는지요. “유도를 하며 몸으로 익힌 정신력, 위기관리 능력, 팀워크, 후배를 챙기고 선배와 스승님을 모시는 진심이 도움이 됐습니다. 그건 어느 분야, 어느 곳에서든 통하더군요. 그 외에 두려우면 피하기보다 부딪친다는 실행력, 모든 것에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긍정성 등 몸으로 배운 것이 영업, 사업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유도를 하다 다치시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출판사 영업사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최고성과를 내서 시쳇말로 영업의 달인으로 이름을 날리셨다고 들었습니다. 비결이 뭐였습니까. “운동선수가 가진 승부근성과 체력이 도움이 됐어요. 좌절되니까 영업을 통해서라도 승부를 내겠다. 자존심도 회복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매달렸지요. 그러다 보니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더군요. 유도만 보고 달려온 인생이라서 제 잠재능력을 잘 몰랐는데, 또 다른 내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리고 영업뿐 아니라 조직관리에 강점이 있다는 사실도 새로 알게 됐어요.” 선수를 그만둘 무렵 90kg에 육박했던 몸무게가 60kg대로 떨어질 정도로 힘들었지만 체력과 승부근성으로 넘길 수 있었다는 회고다. 영업사원 초기엔 거절당하면 상처도 많이 받았단다. 그냥 안 사면 되는데 모욕을 주며 거절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 영업사원의 근성이 있는데 그냥 물러설 수 없지 않은가. 때로는 덩치 좋아 보이는 그에게 시비조로 싸움을 거는 남자 고객도 있다. 어쩔 수 없이 한판 붙더라도 차마 때릴 수는 없으니 흠씬 두드려 맞고… 분한 눈물을 삼켰지만 그때 성질이 많이 순화됐다는 회고다. 그는 늘 현장정신을 강조한다. 관리직 직원들이 현장 경험을 필수로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는 두 아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했다. 아버지의 궤도를 그대로 밟아 유도 국가대표 선수를 거쳐 현재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큰아들 김광섭 상무 역시 현장 경험을 거쳤다. 작은아들은 대학 때 아프리카에서 6개월 봉사를 하도록 했단다. 현장에서의 쓴맛은 인생에서 두고두고 위대한 자산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 경험해서다. 35세의 나이에 창업을 하셨지요. 23년간 사업을 해오시면서 위기의 격랑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역경은 몸을 다쳐 유도를 그만둔 것입니다. 그 후에는 위기도, 역경도 없었습니다. 왜냐고요? 어떤 상황이든 역경으로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거든요. 제 평생 취미는 결심입니다. 창업을 하면서 결심했어요. ‘정상에 도전할 때 어떤 이유도 대지 않겠다, 어떤 장애물도 난관도 문제 삼지 않겠다, 나는 일이 힘들다고 불평 안 한다’라고요. 내 안의 잠재력을 작동시키려면 강렬한 의식을 계속 불어넣어줘야 해요. 나는 매일매일 결심해요. 고민하면 걱정이 생기지만 결심하면 꿈이 커집니다. 문제는 작아지고요. 말이 씨가 된다고, 말을 초긍정으로 하면 그것이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더군요.” 습관이 운명이라고 하는데요. 운을 부르는 좋은 습관을 갖고 계실 것 같습니다. “운동과 신문 스크랩입니다. 사람은 배신당할 때 제일 상처가 깊다고 하는데요. 정작 사람들은 스스로를 배신해요. 자신의 건강을 과신해 돌보지 않거든요. 그러다가 내 몸은 내가 잘 아는데, 이런 증세가 올 리가 없는데, 병에 걸릴 이유가 없는데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생겼나 하며 후회하지요. 자기 몸을 함부로 대해 배신을 당하는 것이지요. 배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운동습관을 생활 1순위로 놓고 있습니다. 평일 아침에는 달리기나 수영, 주말엔 가족과 등산 등을 규칙적으로 하려 해요. 그 외에 조간신문 6개 정도를 통독하고 직접 스크랩합니다. 한 달이면 얼추 스크랩 한 권이 채워집니다. 나중에 아들들에게 읽어보라 권하지요.” 정말 걸어 다니는 자기계발서이시네요. ‘하면 된다’ 산업화 세대의 구호이지만 요즘 신세대는 ‘되면 한다’ 주의 아닙니까. 직원들과의 소통은 어떻게 하시는지요.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과거의 경력, 학력보다 미래의 잠재력을 믿어주면 서로 통하게 돼 있어요. 그들도 신임한다는 것 다 알더군요. 다만 7대 3의 법칙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7은 잘해주고 3은 요구하고 지적해야 해요. 무조건 잘해주기만 하면 자만심을 갖게 돼요. 반면에 지적만 해대면 심리적으로 위축돼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들고요. 인재 육성을 할 때는 무조건적인 자애보다는 신념을 갖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는 자녀교육에도 적용됩니다.” 김 대표는 “한국 사람은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다. 특히 인정해줄 때 능력을 엄청나게 발휘한다”고 말한다. 그는 전 직원 4500명에게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공개했다. 이 번호로 하루에 200통의 문자가 온단다. 그중 제일 기쁜 내용은 “내 꿈을 이룰 계기를 마련했다. 과거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로 바뀌었다”며 ‘비포 앤 애프터’의 성장기다. 직원들에게서 온 핸드폰 문자를 다시 읽는 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서도 기업이 매년 성장했습니다. 또 영역을 확장, 바인그룹으로 전환하셨는데요. 어떤 포부를 갖고 계십니까. “창업할 때만 해도 말 그대로 한 맺힌 성공, 돈 많이 벌어 출세하고 싶다는 욕망이 컸습니다. 이후 기업의 가치관을 생각하게 됐어요. 성장을 통해 직원과 고객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기업을 만들고 싶습니다. 직원성장, 고객성장을 통해 회사도 성장할 수 있는 백년기업으로요.” 김영철 대표는 앞으로 바인그룹은 엄청난 모습으로 성장해 있을 것이라며 3년 후의 인터뷰를 부탁했다. 직원들의 잠재력을 믿기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는 그의 말을 듣고 나자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이 떠올랐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하략) 리더가 팔로워를, 어른이 젊은이를 어마어마한 만남으로 서로 생각해 환대하고 대우할 때 우리 사회는 저절로 행복해지지 않을까. 김영철 바인그룹 회장 1960년생 강원도 양구군 출신으로, 학창시절 유도선수로 활동하였다. 대학시절 부상으로 유도의 꿈을 접고 출판사 영업사원을 했다. 1995년 교육전문기업 ㈜ 동화세상에듀코를 설립했고 2017년 10개 계열사를 운영하는 바인그룹으로 전환했다. 사람의 성장을 핵심가치로 둔 인재경영철학을 실천하고 있다. 그간 중소기업청, 중소기업중앙회 선정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상’ 수상, 대통령 표창 등을 수상하였다.
- 2018-06-04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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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보여행의 동반자 ‘배낭’ 어떻게 꾸려야 할까?
- 초보 도보여행자들이 겪는 시행착오 중 하나. 바로 배낭 짐 싸기다. 장거리 코스 생각에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마구 넣게 되는데, 이는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독이 되고 만다. 오랜 기간 몸에서 떼지 않고 걸어야 하기 때문에 배낭은 소중한 동반자와 마찬가지다. 어떤 동반자, 즉 어떻게 배낭을 꾸리느냐에 따라 도보여행의 질이 달라진다. 배낭을 고르는 방법부터 짐 꾸리기에 유용한 정보까지 담아봤다. 사진 제공 및 도움말 트래블메이트 ◇ 초보 여행자를 위한 배낭 고르는 방법 1 가벼운 것이 좋다 배낭이 가벼울수록 여행은 즐거워진다. 배낭의 절대무게를 고려해 쓸데없는 짐은 덜고, 좌우 무게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여행이 길수록 배낭의 무게는 체력을 갉아먹는 ‘짐’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작은 무게라도 가능한 한 줄여야 한다. Tip 짐 꾸릴 때 가벼운 것은 아래로, 무거운 것은 위로! 2 안전은 필수 초보 여행자를 노리는 ‘보이지 않는 손’을 조심하자. 이들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배낭을 공격하고, 때로는 대담하게 배낭 지퍼에 손을 댄다. 반드시 배낭의 모든 출입구를 봉인해야 한다. Tip 배낭을 살 때 자물쇠를 걸 수 있는 고리가 있는지, 또 튼튼한지 살필 것. 3 짐 꾸리기가 쉬워야 한다 초보 여행자의 아침은 늘 부산스럽다. 배낭에 쑤셔 넣은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찾고, 이동을 위해 짐을 꾸리느라 정신이 없다. Tip 배낭의 주 출입구가 넓게 벌어지면서, 하단 지퍼와 위아래 분리막이 있어 분리수납이 가능해야 짐을 싸고 푸는 시간이 줄어든다. 내용물을 넣어도 변형이 없도록 등판에 지지프레임이 있는 것으로 고르자. 4 내 몸에 딱 맞는 걸 골라라 배낭을 착용했을 때 불편하거나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깨, 등판, 허리벨트가 몸과 밀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배낭은 내 몸에 딱 맞는 배낭이다. Tip 배낭을 사고 나서 한번 짐을 꾸려 직접 메어보는 게 좋다. 빈 배낭을 멜 때와 내용물이 들어갔을 때의 착용감은 천지 차이다. 5 지퍼가 튼튼해야 한다 예쁜 디자인, 유명 브랜드 다 좋지만 여행 중 배낭이 망가지면 낭패다! Tip 배낭 고를 때 꼭 살펴야 할 것은 지퍼, 특히 맞물리는 이빨 부분이 튼튼한지, 봉제는 꼼꼼한지, 어깨끈과 몸체 연결은 견고한지 등을 챙겨야 한다. 눈으로 보고, 직접 당겨도 보자. 6 여행 기간보다는 짐의 양을 고려하라 기간이 길다고 꼭 짐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계절에 따른 옷의 부피나 세탁 편의성 등이 영향을 미친다. 무엇보다 불필요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Tip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데도 굳이 가져가는 물건은 없는지 살필 것. ◇ 장기 도보여행, 배낭 짐 꾸리기 비법 돌돌 말아 구김 없이 가벼운 수납 팩을 활용해 옷은 최대한 부피를 줄여서 넣자. 티셔츠나 팬츠는 여러 장을 겹쳐 말아 넣으면 구김이 덜 가고 부피도 줄어든다. 구겨지기 쉬운 셔츠나 재킷 등은 가방 맨 위에 넣자. 가벼운 짐은 아래에, 무거운 짐은 위에 여행 짐은 무게에 따라 수납하는 것이 좋은데, 가벼운 짐은 아래에, 무거운 짐은 위에 넣으면 가방을 들었을 때 안정감이 있고 좋다. 구석구석 빈틈엔 작은 소품 수납하기 옷을 넣고 남는 공간에 속옷 같은 작은 옷을 채우고, 선글라스나 카메라 등 충격에 약한 물건은 그 사이사이 남는 공간에 넣는다. 모자나 신발 안쪽에 양말, 화장품, 상비약 등을 비닐 팩에 싸서 넣으면 공간도 절약하고 모양 변형도 막을 수 있다. 용도별 지퍼백으로 냄새 없이 깔끔하게 파우치나 지퍼백은 넉넉히 챙기자. 화장품, 세면도구, 액세서리 등 작은 물품들을 용도별로 지퍼백에 담으면 뒤섞이지 않고, 찾을 때도 편리하다. 또 빨랫감이나 젖은 옷들은 오염될 수 있으므로 지퍼백에 담아서 넣는다. 냄새 걱정도 없고, 다른 짐들이 젖지 않아 좋다. 배낭여행 전용 제품 활용하기 장거리 도보여행을 하려면 옷뿐만 아니라 수건, 세면도구, 화장품, 비상식량 등도 챙겨야 한다. 이때 가정에서 쓰는 제품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보다는 부피가 작고 가벼우면서 실용적인 배낭여행 전용 제품들로 채우는 것이 더 유용하다. # 도보여행 # 배낭싸기 #도보배낭
- 2018-06-04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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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결같이 매일을 사는 청년 시인, 신현득을 만나다
- 큰 창 사이로 봄볕이 드는 넓은 복도 한편. 간이의자에 한 남자가 앉아 있다. 트렌치코트에 중절모를 쓴 그는 시간을 쪼개서 뭔가를 읽고 있다. 가방 안에는 공부해야 할 읽을거리와 책이 가득해 보인다. 정지한 듯 몰두해 있는 모습, 옛 러시아 영화의 롱테이크 장면처럼 깊고 안정된 정적이 흐른다.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다물었던 입술이 엷게 미소 짓는다. 아동문학계를 대표하는 현역 동시 시인이자 영원한 선생님 신현득(申鉉得·84). 벚꽃 만발하던 주말 오후의 데이트는 이렇게 시작됐다. 인터뷰 당일 생각보다 날씨가 꽤 추웠다. 봄꽃은 만발한데 새벽녘 눈까지 내렸다. 4월호 층층나무동시모임 취재로 만나 뵀던 신현득 시인을 인터뷰 지면을 통해 다시 모시기로 했다. 신현득 시인은 우리나라 아동문학계의 산 증인이자 스승이기에 얘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었다. 어린이의 마음으로 제자들과 함께 익어가는 모습이 아름다운 신현득 시인이다. “동시는 재미가 있어요. 불가능이 없는 세계입니다. 말하자면 온갖 세상에 있는 것들. 살아 있거나 또는 생명이 없어도 언어를 가지고 표현할 수 있어요. 가령 컵이면 컵이 말을 하고 생각을 한다는 가정 하에 시를 구성합니다. ‘시원한 물이 담겼다’, ‘아이고 시원하다’. 이게 지금 컵이 느끼는 거예요. 뭐가 됐건 행동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주고 난 다음에 사유하는 겁니다.” 동시가 뭐냐고 물어보니 여러 가지 예를 들어가며 설명을 한다. 얼굴에 화사한 기운이 도는 것을 보니 이미 마음은 아이로 돌아간 모양이다. 탁자에 놓인 컵을 보다가도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를 보다가도 시상을 이야기한다. 꽃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의견을 묻기도 한다.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심상으로 표현하고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영락없는 동시 시인이다.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신현득 시인은 60여 년의 세월을 동시 짓는 현역 작가로 살고 있다. 물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도 거르지 않고 있다.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했고 아이도 좋아했어요. 안동사범학교를 나와서 곧바로 초등학교 교사가 됐는데 아이들과 생활하고 늘 보고 듣고 하니까. 노는 모습이 귀엽잖아요. 예쁜 모습을 하나씩 메모하다 보니까 시를 쓰게 됐지. 어린애들, 예술 아니에요? ‘아기는 시다’라는 말이 있어요. 어린애들은 말하는 것도 시이고 동작도 시이고 모습도 시이고 그래요. 아이들 모습이 희한해요.” 아동문학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그에 대한 좋은 평가가 끊이지 않았다. 등단 이후 10년이 조금 지나 1971년에는 세종아동문학상의 영예를 안았다. 지금은 이런저런 상들이 많지만 당시만 해도 아동문학상 수상은 의심할 여지없이 좋은 글을 쓰는 시인으로 인정을 받는 중요한 지표였던 셈이다. 신현득은 20년 만에 교사를 그만둔 뒤 소년한국일보에서 15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이후 단국대, 서울예대, 한양여대 등 대학 강단에서 세계 아동문학사, 한국 아동문학사, 창작론을 가르치며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신현득은 한국 아동문학계의 큰 물줄기인 소파 방정환과 윤석중 선생의 계보를 잇는 인물이기도 하다. ‘어린이날 노래’를 비롯해 ‘새 신’, ‘고추 먹고 맴맴’ 등의 노랫말을 지은 윤석중 선생은 신현득 시인에게 가장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고마운 스승이다. “윤석중 선생의 추천으로 신춘문예에 뽑혔어요. 선생 사무실에 자주 다니고 얘기도 많이 듣고요. 수시로 만나 봬면서 많은 공부를 했어요.” 스승을 잘 모신 덕일까? 지금껏 스승과 제자의 끈을 놓지 않고 함께 공부하는 층층나무동시모임이 13년째 이어오니 말이다. 이외에도 동시를 쓰는 시인들 다수가 신현득 시인의 제자임을 자처한다. “나는 싫은데 제자들한테 떠받들리고 있어요. 내 영향을 받아서 시인이 됐다거나 수상을 했다거나 할 때마다 제자들 연락을 받죠. 그럼 축하도 해주고 격려도 하고 그래요. 금년에도 제자 두 사람이 상을 받았어요. 행복을 빌어주죠. 제자들한테 잘해주려고 애는 쓰지만 실제로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웃음)” 1분 1초가 바쁜 80대 현역으로 산다 요즘 신현득 시인은 일생일대 중요한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본인의 일과 생활, 모든 생각을 정리해놓고자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60년 동안 신현득이라는 시인이 ‘이렇게 해서 시를 이루어갔다’ 하는 그런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신현득 동시 시법’이라고 가제를 일단 붙여놨어요.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언제 완성할지는 모르지만 될 수 있으면 금년 내로 완성하려고 합니다.” 자신만의 노하우를 담은 책을 쓰고 싶지만 사실 하루하루가 너무 바쁘다는 신현득 시인. 애초에 세계아동문학사를 한번 써보겠노라고 집필을 시작했는데 생각한 분량의 절반 정도 쓰고서 접어둔 상태다. 밀려오는 원고 청탁과 해야 할 일들 때문에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는 순간도 소홀히 대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법보신문에 동시 해설 연재를 하고 있어요. 거기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달라고 했으니까 무한정이지. 대외적으로도 청탁이 많아요. 지금 일곱 군데에서 원고 청탁을 해왔습니다. 문예지 같은 데에서는 작품을 내놓아라, 안 그럼 칼럼을 써라.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할 일거리를 챙기면서 뭘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간추립니다. 작품은 지하철에서 구상하고 씁니다. 일기도 꼭 지하철에서 씁니다. 지하철에서 안 쉬어요. 쉬질 않아요. 여유도 없고요.” 그럼 잠은 언제 자냐고 물으니 일하다가 졸리면 잔다고. 안 졸리면 계속 일을 한다고 했다. 이 바쁜 와중에도 문예지를 받아들면 앞에서부터 끝까지 읽고 난 뒤 문예지를 보낸 곳에 꼭 이메일로 잘 봤다고 회신 메시지를 남긴다. 책을 냈다며 보내오는 사람들에게도 모니터링을 해준다 했다. 일상에 동시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벼운 이야기를 해볼까 싶어서 다소 사적인 질문을 해봤다. 가족이랑 주로 뭘 하시는지? 시를 쓰는 것 말고 좋아하는 다른 것이 있는지, 취미는 무엇인지, 영화나 연극은 좀 보시는지, 최근에 여행을 해보셨는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 취미생활이건 여행이건 “할 시간이 없다”였다. “워커홀릭이시네요”라고 말을 건네니 “나만치 바쁜 사람은 없을 거 같아” 하며 식 웃는다. “나는 딱 한 가지밖에 안 해요. 동시와 관련한 건 내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기에 재미를 느끼고 좋아하니까 몰입합니다. 그 외에는 없어요. 시를 쓰니까 건강한 겁니다.”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건강이고 자신을 위해 먹는 한약재라고 말했다. 시를 쓰니까 건강도 좋고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린다고 신현득 시인은 말했다. 언제 쯤 쉬실 수 있을 거 같아요? 바쁜 이야기를 쭉 하다 보니 느리던 말투에 속도가 붙어 있었다. 언제쯤 쉬실 것 같냐는 질문에 무덤덤하게 생사의 이야기가 수면 위로 올랐다. “아직 생각을 안 해봐서 몰라요. 죽으면 쉬는 거지. 그땐 뭐 더 일할 수 없으니까요. 100세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말입니다. 사실 죽음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안 해봤어요. 불교 신자라 윤회사상을 믿으니까요. 이 세상에 났다가 좋은 일 하면 또 좋은 세상에 태어나고, 여기서 착한 일 하면 또 좋은 세상에 태어나고, 나쁜 일 하면 지옥에 가고요. 죽고 난 다음에는 어떨 것인가 하는 건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묘비에 쓸 글귀 또한 생각할 틈이 없다고 했다. 인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매일 해내고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제가 만약 논문을 써야 한다면 글을 쓰기 위해서 공부도 해야 하고, 찾아서 정리할 자료들이 많잖아요. 글 쓸 준비는 다 해놓고 내가 쓰지도 않고 죽고 가버리면 낭패잖아요. 누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 내가 다 못해놓고 죽을까봐서 겁이 나요. 지금 제가 준비하고 있는 것이 다음 세대에게 꼭 필요한 거란 말이죠.” 후세에 작은 것 하나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에 하루하루가 1분 1초가 너무 아까웠음을 이제야 토로한다. 잠 잘 시간까지 아끼고 깨어 있는 매 순간 무엇인가 해야만 하는 신현득 시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가 없으면 안 되지. 이 세상에 동심만 있다면 다툼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겁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다고 하니 아동문학학회가 있다며 경희대학교로 간다고 했다. 오전에 제자들과 함께하는 동시문학 모임을 끝내고 기자와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학회에 간다는 신현득 시인. 학회를 마치면 또 학회 사람들과 저녁식사를 할 거라고 말했다. 운전을 할 줄 아는지 물으니 지금까지 쭉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살았다고 했다. 우리 시대에는 자가용을 모는 일이 흔치 않았으니 이렇게 누군가 차를 태워주거나 아니면 대중교통이 내 자가용이라고 말이다. 경희대학교에 가까워질수록 개나리며 벚꽃이 절정의 모습으로 하늘거리고 있었다. 그가 말했듯 차 안에서 한시도 쉬지 않는다. 차가 신호등에 걸려 잠시 멈출 때마다 기자에게 줄 자신의 시집에 조심스럽게 사인을 했다. 시상이 떠오를 때는 창밖을 쳐다보며 아이 같은 목소리로 이러면 어떨까 저러면 어떨까 얘기를 꺼내기도 했다. 동시를 쓰지 않았다면 신현득 시인은 80여 년 인생을 재미없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차에서 내려 미소에 존경을 담아 인사를 했다. 돌아서서 도서관으로 걸어가는 신현득 시인의 모습을 바라봤다. 건강하세요. 오래오래….
- 2018-05-14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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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의 요정! 레나
- 일본에서 살다가 필자의 집에 온 12세 손녀에게 샤방샤방한 라일락 색 스커트를 보여주며 물었다. "레나야, 이 스커트 예쁘지?" "스커트도 예쁘지만 할머니가 더 예뻐요." 그전에 공항에서 만난 딸의 핸드백을 본 필자가 한마디했다. "가방이 올드해 보이네" 나중에 “예쁘고 세련 됐지만 좀 올드해 보여”라고 정정했지만 딸애는 이미 마음이 상해 있었다. 알뜰한 딸애가 큰맘 먹고 학부형용 가방으로 비싼 돈 주고 구입한 것이라는데 까칠한 엄마가 그것도 모르고 초를 쳤으니…. 좋은 점부터 말해야 했는데 순서가 뒤바뀐 결과였다. 이것도 청출어람의 일종일까? 많이 살았지만 공감 능력이 부족한 필자와 어리지만 배려심이 깊은 레나!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이 많고 감성이 뛰어난 레나는 필자를 깜짝깜짝 놀라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레나가 6세 때였다. 어느 여름 밤 신대방동에 있는 보라매공원에서 딸애, 레나와 함께 산책을 했다. 연못에 음악분수가 있었는데 일정 시간이 되면 클래식 소품 음악에 맞춰 분수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춤을 췄다. 물줄기에 무지갯빛 조명이 비춰졌기에 더 아름다웠다. 양옆으로 곱게 퍼지는 물줄기를 본 레나가 신기해하며 말했다. "꽃향기 위에 앉은 나비 같아요." 소나무 아래에 떨어져 있는 솔방울 하나를 주은 레나가 일본으로 가져간다고 했을 때 딸애는 일본에 가져갈 수 없으니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했다. 그러자 레나는 솔방울이 아플세라 그 자리에 조심조심 내려놓으며 다정하게 솔방울에게 말을 건넸다. "솔방울아, 가서 아름다운 여행하고 와~" 레나의 가슴은 꽃처럼 예쁜 언어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는 듯싶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레나의 입은 한 송이 예쁜 꽃이다. 한마디 한마디 곱고 예쁜 언어들이 꽃 이파리가 되어 날아와 필자를 감동시키고 행복하게 해준다. 언어의 요정인 레나와 같이 있는 시간은 엔도르핀이 한없이 나오는 힐링의 시간이고 필자를 행복하게 해주는 축복의 시간이다.
- 2018-04-09 1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