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일부 지역의 집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정부의 부동산대책은 백약이 무효다. 젊었을 때 입주하여 산천이 세 번 넘게 바뀌도록 이사 한번 안하고 관악구 같은 집에서 산다. 이때쯤 관악에서 사는 아유를 밝힐 때가 되었다. 몇 년 전 사회은퇴를 앞두고 오랜 도시생활을 벗어나 전원생활을 하고 싶은 생각을 하였다. 전원이주 지인들을 살피면서 취향은
2018년 1월 1일. 짝지의 60세 생일이다. 이제는 헤아리기도 버거운 시간을 지내왔다는 사실이 낯설다. 그 많은 시간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어쩌다 보니 같이한 세월도 34년이다. ‘인생 금방’이라는 선배들의 푸념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그 시절 데이트는 대부분 ‘두 발로 뚜벅뚜벅’이었다. 좋아서 걷고, 작업하려고 걷고, 돈이 없어서 걷고, 사색하느라
50여 년간 장미를 그려온 화가의 심상은 무엇일까? 그것도 화병에 꽂은 정물이 대부분일 때는 의아할 수밖에 없다. 장미의 화가라면 김인승(金仁承, 1910~2001)이나 황염수(黃廉秀, 1917~2008) 화백이 떠오르지만, 성백주(成百冑, 1927~) 화백만큼 긴 세월 ‘장미’라는 주제에 천착해오지는 않았다.
성백주 화백은 화필이 무르익은 중년을 지나는
필자는 국립공원인 북한산과 가까운 동네에 살고 있다. 요즘 등산하는 인구가 많아져서 산은 항상 붐빈다. 남들은 자가용이나 버스로 이곳까지 와서 산에 오르지만, 필자는 운동화 끈만 질끈 매고 문을 나서면 언제라도 산에 오를 수 있으니 비록 땅값 집값이 싼 동네라지만 만족하고 공기 좋은 우리 동네를 사랑하고 있다. 잠시 전에도 산에 다녀왔다. 흰 눈이 내린 지
이런 영화도 있나 싶다. 뚜렷한 줄거리도 없이 하루하루 일상을 마치 일기를 쓰듯 영상으로 그려 낸다. 무료하게 반복되는 날들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주인공이 틈틈이 노트에 꾹꾹 눌러 담는 시(詩)뿐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우리나라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같은 과로 볼 수 있다. 다만 홍상수가 평범하고 지루한 나날들 속에서 인간의 추잡함을 드러낸다면 짐 자무쉬는
노 시인(老詩人)은 우이동 솔밭공원을 거닐며 청여장(靑黎杖, 지팡이)을 한 손에 꼭 부여잡고, 시 한 수를 낭송했다.
시공 속에 있으면서 시공을 초월하여
오 물방울
너 황홀히 존재하고 있음이여
소멸 직전에 아슬아슬함을 지니고 있건만
거뜬히 너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하나로 꿰뚫린 빛과 그림자
소멸과 생성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이 번갈아 이어지는
올해도 여의도공원에 야외 스케이트장이 열렸다. 아들이 직장 바로 앞 여의도공원에 스케이트장이 만들어졌다며 가보자 해서 손녀를 데리고 갔었다. 어린 손녀는 처음 타는 스케이트가 신기한지 자꾸 넘어지면서도 재미있어 했다. 즐거워하는 손녀를 보는 필자 마음도 흐뭇하고 좋았다.
도시 한가운데에서 스케이트를 즐길 수 있다는 건 참으로 낭만적이고 멋지다. 전에는 잘
2018년 새해 아침이 밝아왔다. 며칠 전부터 신년 첫해의 일출을 보러 어디로 갈까 고심을 했다. 작년에는 첫 날 해맞이를 고향의 백운산 정상으로 올랐는데, 불행하게도 구름이 많이 끼어 떠오르는 해를 볼 수는 없었다. 뭐니 뭐니 해도 일출의 장관은 바다에서 불쑥 솟구치는 역동적인 해의 모습이라는 생각에 여러곳을 생각해 보았지만 올 해는 그냥 송파구 집근처
보라색 드레스를 가봉하기 위해 압구정역으로 가던 길이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젊은 남성 둘이 서로를 툭툭 건드렸다. 처음에는 친구들끼리 장난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장난이 아니라 시비가 붙은 거였다. 분위기는 점차 험악해졌고 필자는 그냥 두고만 볼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을 중재하는 것은 여성 시니어가 적임자다(사실은 자만심이 작용했다. 지들이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