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옹진군 북도면에 있는 시도, 신도, 모도는 다리로 연결돼 ‘삼형제섬’으로도 불린다. 강화도 마니산 궁도연습장에서 활쏘기 훈련을 할 때 과녁으로 삼았다고 해서 시도(矢島)다. 모도(茅島)는 그물을 걷으면 물고기보다 띠풀이 많았다고 해서 띠염이라 불리다 이름이 바뀌었다. 시도에서 모도를 건너는 다리 왼편에는 달려가는 청년과 앉아 있는 소녀 조각상이 있다.
고향이 영종도인 필자는 고향 친구들과 어울려 시도 해안일주 트레킹을 하기로 약속하고 지난 4일 이른 새벽에 서둘러 서울에서 출발해 영종도 삼목선착장으로 갔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현충일 황금연휴로 선착장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人山人海)요 차산차해(車山車海)다. 주차장을 찾아 두어 바퀴 돌다가 대책이 없어 운서역 근처 아파트로 돌아와 주차하고 다시 버스로 이동했다.
삼목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불과 10여 분을 가니 신도가 나타났다. 일단 신도에서 하선해 마을버스를 타니 요금은 현금이 아니면 안 되며 큰돈을 내도 거스름돈은 없으니 알아서 요금을 내라고 시큰둥하게 말하는 버스 기사님을 보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촌스러웠기 때문이다.
10여 분 남짓 달리니 신도와 시도를 잇는 연도교가 나왔다. 우리는 시도 초입에서 내려 해안트레킹을 시작하였다. 한참 썰물 때라 거북이 등처럼 불쑥 드러난 갯벌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갯고랑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잡고 있었다.
1.4㎞에 달하는 해당화 꽃길로 들어서니 운 좋게도 붉은 해당화 꽃이 만발해 반겨준다. 해당화가 지고 나면 열매가 맺히는데, 우리는 어릴 적에 그것을 명감이라고 불렀다. 빨갛게 익어가는 명감을 따서 입에 넣고 성큼 깨물면 달콤한 물이 나오는데, 단물의 유혹에 빠져 정신없이 따먹다가 단물 뒤에 숨겨진 깔깔한 이물질이 목에 걸려 캑캑거리던 추억이 떠오른다. 그 시절, 마당 가에 서서 탁 트인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올망졸망한 무인도가 그림처럼 떠 있어 운치가 있었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바닷가 모래사장을 신나게 내달리다 보면 모래장술에 지천으로 피어 있던 해당화꽃잎 사이로 빨갛게 익은 명감이 유혹한다. 그 시절엔 해당화 꽃은 모두가 붉은색인 줄로만 알았다. 흰색 꽃잎도 더러 피어 있는 것을 이곳 해당화길에 와서야 알게 됐다.
해당화 꽃길을 지나고 나니 시도염전이 나타났다. 두부모처럼 물을 잡아놓은 염전을 지나 한참 돌아가니 드디어 수기해수욕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운 모래가 매력적인 작고 아담한 수기해수욕장은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었고 소나무 숲과 연결된 모래밭에는 군데군데 가족 단위 야영객들이 텐트를 치고 분주하게 황금연휴를 즐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모처럼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갯고랑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뛰어놀고 있었고 청춘 연인들은 다정하게 갯벌체험을 하면서 행복을 키워가고 있었다.
언젠가? 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우리도 올여름이 가기 전 이곳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해보자는 약속을 하면서 드라마 '풀하우스'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곳을 배경으로 인증 샷을 날리고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강화도 마니산이 지척에 보이는 수기해수욕장을 조금 지나 한적한 바닷가 전망 좋은 바위 밑에 자리 잡고 점심으로 버너에 라면 3개와 만두를 무려 15개나 넣고 끓였다. 해안을 따라 울퉁불퉁 험하기 그지없는 돌 밭길을 마냥 걸었으니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던 차에 행복한 성찬(盛饌)은 우리 모두의 배를 호강시켜주었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다시 해안을 따라 걸어가니 절벽 위 전망대로 올라가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어찌 이곳을 그냥 지나칠쏘냐? 가파른 절벽 길을 로프를 타고 전망대에 오르니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탁 트인 전망, 강화도 마니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절벽이 가파르다고 해 박절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가가도깨비 전설이 있다. 해안에 가가도깨비가 살고 있었는데, '가, 가' 소리를 세 번 들을 때까지 도망가지 않으면 가가도깨비에게 잡혀간다는 전설 때문에 어린아이들은 이 주변에 오기를 꺼렸다고 전해진다.
해안트레킹을 시작할 때는 썰물이라 괜찮았는데, 섬을 반쯤 돌았을 때는 밀물이 시작돼 쏜살같이 바닷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걸음을 서둘렀음에도 출발했던 선착장이 멀리 보이기 시작할 때쯤에는 바닷물은 거의 해안을 점령해 버렸다. 어찌해야 하나? 더는 해안으로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쯤, 뒤에서 누군가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소리 지른다. 한데 아슬아슬하게 바위를 타고 가는 재미도 꽤나 좋았다. 기묘한 바위를 배경으로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은 가이 절경이었다. 우리는 가는 데까지 가보기로 하고 바위를 건너뛰고 기어오르면서도 그 멋진 풍경을히찍느라고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자칫 발이라도 헛디디면 바닷물로 곧장 빠져 카메라 장비 모두를 망쳐 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 멋진 풍경에 매료돼 강행군을 멈추지 않았다. 전망 좋은 어느 바위 틈바귀에서 바다를 향해 다소곳이 자태를 드러낸 메꽃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어서 험로에 큰 위로가 됐다.
우여곡절 끝에 6시간의 강행군으로 트레킹을 마치고 출발했던 지점으로 되돌아오니 오후 4시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온몸은 파김치가 됐으나 고진감래 끝에 완벽하게 섬일주를 마쳤다. 선착장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동네 어귀의 상점에 앉아 시원한 캔 맥주 한 캔으로 갈증을 달랬다. 여행은 밋밋하기보다는 스릴 넘치는 고생이 동반돼야 더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도 뒷담화가 이어진다.
갈매기가 춤추는 돌아오는 뱃전에 앉아 잠시 전의 멋진 풍경 속으로 빠져들어가 보니 비록 몸은 고단했어도 달콤한 행복이 솜사탕처럼 밀려온다.
“저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 나왔지?” 영화 에서 본 장광(張鑛·64)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영상을 압도하는 무서운 표정의 배우는 어디서도 보기 드문 악역 전문이 될 거라 믿었다. 첫 영화 이후 4년이 흐른 지금, 장광은 매서운 눈매를 치켜세우거나 혹은 선한 눈을 하며 웃어도 어울리는 자유로운 배우로 사랑받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은퇴할 나이에 혜성같이 나타나 ‘대세 배우’로 살아가는 배우 장광을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글 권지현 9090ji@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장소협조 전광수 커피하우스 대학로점
배우 장광과 걷는 대학로는 앞으로 나아가기 쉽지 않았다. 그날따라 일일장터가 열린 탓이기도 했지만 내 옆에 걷는 이가 잘나가는 장 배우(?)이기에 인사를 하거나 악수를 청하는 사람들이 꽤 됐다. 나도 모르게 매니저 아니면 경호원이 된 듯 보호본능을 일으키며 주위를 살핀다. 인기 배우와 함께 있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다.
인터뷰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우선 시청자로서 제일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어떻게 매번 인기 흥행작에만 유독 얼굴을 비출 수 있는지 말이다. 영화는 물론이고 출연했던 TV드라마를 눈여겨보면 장광은 중년층이 즐겨보는 일일드라마나 주말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없다. 5월 초 막을 내린 tvN , 출연이 예정돼 있는 KBS 퓨전 사극 도 젊은 세대를 겨냥하거나 해당 방송사 주력 시간대 드라마다. 굳이 유행하는 작품만 고르는 걸까?
“아니요. 그런 거 생각 안 해요. 그냥 들어오는 대로 하는 겁니다. 사실 이번에 일일드라마에서도 제의가 있었는데 과 시간이 겹쳐 하지 않기로 했어요. 일부러 고르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캐스팅 1순위, 대체불가 배우로 꼽히지만 4년 전만 해도 꿈도 못 꾸던 일이었다. 다른 무명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오디션에 응시하고, 고배 마시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정년퇴직할 나이, 생애 최고의 영화를 만나다
그러다 만난 작품이 바로 영화 다. 이 영화 한 편으로 배우 장광은 인생역전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사실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사기 당하고 큰 손해를 입어 문제가 아주 심각했습니다. 7~8년 동안 서서히 숨통이 조여 왔어요.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다 보니 다른 사람들한테 더 이상 도움 받을 수가 없었어요. 기도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영화 를 만나는 과정을 신앙인으로서 기도와 말씀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타 매체 인터뷰에서 자신의 종교 신념을 표현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이어나갔다.
“매일 새벽기도에 나갔습니다. 집사람과 기도원이라는 기도원은 다 다녔죠. 그런데 를 만났던 2011년, 40일 동안 하는 새벽기도회에서 목사님이 ‘여러분들에게 앞으로 찾아올 10년, 20년이 생애 최고의 해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을 돌이켜보니 그때 내가 우리 나이로 쉰아홉이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정년퇴직하고 손 놓을 때잖아요. 그런데 앞으로 10년, 20년이라는 비전을 가지라더군요. 현실적으로는 정말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40일 기도회가 끝나기 바로 며칠 전에 영화 오디션 소식이 들렸다. 오디션 보게 될 배역을 보자마자 가족 모두 하나님이 보내신 거구나 생각했단다.
“영화 에서 원하는 배역이 50대 후반의 대머리여야 하고 연기는 잘해야 하는데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선한데 뒤에서 악랄한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이 준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장광이 맡은 1인2역의 교장과 행정실장은 교회 장로였다.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서 부담됐지만 기도로 받은 역할이라 생각했다. 800명이 지원해 단 한 명, 장광이 선택됐다. 이 배역이 정해지지 않아 6개월 여 난항을 겪다 장광이 합류하면서 바로 영화 촬영이 진행됐다고. 실화를 다룬 영화, 19금 등 흥행을 저해하는 요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460만(누적 466만2 914명) 관객이 영화관을 찾았다. 실제 도가니 법(장애 여성, 아동 등을 성폭행으로부터 보호하자는 법) 제정에도 큰 영향을 줬다. 사회적으로 파장이 커서일까? 영화를 만든 스태프와 배우에게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쫑파티를 못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는데 우리는 손님 많이 들었다고 웃고 즐길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할 분위기도 아니었죠. 상영 시작하고 한 달 뒤, 전라도 어디 초등학교 폐교에 가서 쫑파티 했습니다(웃음).”
주인공으로 등장한 배우 공유(본명·공지철)도 공유지만 쌍둥이 교장과 행정실장을 연기한 장광이 더욱 더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무엇보다 영화 이후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부드러운 인지도를 쌓아 나갔다.
“하여튼 예능 프로그램은 다 돌았던 거 같아요. 우리집 식구 다 찍고 그러고 나니까 처음 했을 때는 ‘저 얼굴도 보기 싫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거도 싫다. 나쁜 놈, 못된 놈, 더럽게 생겼다’ 이렇게 나오다가 나중에는 ‘귀엽다’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로 날개를 달다
악역에만 국한되지 않는 전천후 배우로 활약하게 된 첫 번째 작품이 배우 이병헌과 함께 했던 영화 다.
“를 찍을 땐 참 재밌었습니다. 악독한 배역이었다가 ‘내시’를 한다는 게 말입니다. 보통 ‘내시’라고 그러면 가늘고, 마르고, 앵앵거리는 소리를 내는 거만 생각하는데 감독님은 저한테 ‘아주 듬직한 고목나무 같이 끝까지 상감을 보필하는 우직한 내시를 연기해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영화 를 연출한 추창민 감독은 장광의 연기를 꼼꼼하게 챙기고 요구했다. 영화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를 때라 완벽하게 따지고 확인해 주는 추 감독의 도움이 컸다고.
“그때 칭찬 받았던 것이 뭐냐면 감독이 원하는 딱 그만큼만 한다는 거였어요. 차지도 넘치지도 않게 말입니다. 그래서 촬영 과정에서 연기 잘한다는 얘기가 들리더군요.”
작년 8월 개봉했던 영화 에서는 사이비 교주 역할을 맡았다.
“난 그런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것이 재밌습니다. 성우를 할 때도 그랬는데 강한 캐릭터나 만들어내기 어려운 것, 과연 저걸 어떻게 만들까하는 역할을 많이 했어요. 의 스탠스 필드(게리 올드만 분), 의 펭귄맨, 애니메이션 더빙으로는 와 도 해봤고요. 이 성공하지 못하고 완성도도 약해서 아쉽긴 했지만 사이비 교주 역은 아주 재밌었습니다.”
집안에서 나는 60~70점짜리 가장
얼굴이 알려진 이후 단 한 번의 기복도 없이 배우 생활을 하고 있는 장광.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본인의 점수를 물어보니 60~70점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장광의 부인 전성애, 딸 장윤희, 아들 장영 모두 연예인이다. 서로의 일상이 바쁘지만 돈독한 가족애를 위해 노력하고 살고 있단다.
“각자 스케줄 때문에 여행을 못해요. 그게 좀 아쉽지만 가족 예배를 드릴 때가 있기 때문에 볼 시간도 있고 기도 제목을 얘기하면서 서로의 고민을 나눕니다. 친구 부부들과 함께 만날 때면 우리 부부가 편안하게 말을 많이 한다더라고요. 내 친구들은 자식들 걱정에 속이 썩어들어 가도 말 못할 때가 많다는데 저는 다행이죠.”
내 아들, 미안하다! 사랑한다!
코미디언으로 활동하고 있는 딸 장윤희씨와는 정말 친구처럼 지낸다는 장광. 그런데 아들 장영씨와는 조금은 서먹함을 느낀다고 했다.
“아무래도 남자라서 그런지 밖으로 돌고 그래요. 물론 서로 할 만큼은 하는데 내가 어렸을 때 아들에게 상처를 많이 준 거 같아요. 따지고 보면 잘되게 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런 거죠. 우리 나이 아버지들이 대부분 다 그렇잖아, 자기는 잘 못했으면서 아이들은 제대로 시키려고 강제적으로 하는 거요.”
어느 날 꼭 날을 잡고 아들에게 사과할 생각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 교회 프로그램이던 아버지학교에서 편지를 써서 아들에게 보내고, 안아도 봤는데 풀리지 않더라고요. 스킨십도 하고 사랑한다 말도 해야 한다는데 아버지가 아들한테 그런 말 하는 게 쉽지 않아요. 젊은 사람들은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나이는 너무 어렵습니다. 꼭 언젠가 아들에게 얘기해 줄 겁니다. 미안하다고요.”
집밥 백선생님? 장광 배우님 어떠신가요?
사실 영화 로 카메라 앞에 서기 전, 성우로 일을 할 때도 줄곧 주인공을 맡아 인정받는 성우로 살아온 장광. 오디오와 비디오의 차이일 뿐이지 사랑을 많이 받고 산 사람이라 스스로 평가한다고. 물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도 겪었지만 현재를 생각하면 많은 것이 감사하다. 신앙적으로도 를 전후해 하나님을 깊이 만난 것도 인생에서 너무 고마운 부분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뭔가 배우고 싶다거나,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사실 젊었을 때는 탭댄스를 정말 배우고 싶었습니다. 진 켈리가 나왔던 뮤지컬 영화 를 보고 정말 멋지다고 느꼈습니다. 지금은 뭐 따라하는 정도일 거고 제 나이에 맞는 스포츠댄스를 운동 삼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배우고 싶습니다.”
최근까지 교회 공동체에서 기타를 배워보기도 했는데 정말 매일 미친 듯이 쳐야 늘 것 같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배우고 싶다는 것이 있었다.
“이제는 요리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 같아요. 요즘 분위기로 남자들도 요리는 좀 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혹시 이 글을 tvN 제작진이 읽기를 바라며 시즌3에는 꼭! 장광 배우를 섭외하길 권한다.
‘배우’.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연기하는 사람들에게 배역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그 어떤 옷을 입는다 해도 충격이지 않게 단지 그의 연기로 몰입하게 만드는 배우가 우리 주위에 얼마나 있을까? 배우 장광이 지금 별처럼 빛나는 이유? 바로 그것! 그것이다.
흡혈귀로 알려진 드라큘라는 실존 인물이다. 동유럽의 루마니아 중부 아르제슈주 쿠르데아르제슈 시에는 드라큘라 성으로 알려진 ‘브란(Bran) 성’이 있다. 루마니아 여행자들은 ‘브란성’을 빼놓지 않고 찾는다. 루마니아 당국에서도 이미 소설, 영화, 뮤지컬 등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드라큘라’를 이용해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드라큘라는 루마니아에서는 역사에 기록된 공인 영웅이다. 그 영웅은 어떻게 흡혈귀로 변신했을까?
동화 속에 나옴직한 멋진 고성, ‘브란 성’
여느 관광지가 그렇듯이 브란성 입구에는 드라큘라와 관련된 기념품 상점이 줄지어 있고 여행객들로 북적댄다. 매표소를 지나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가파른 언덕 위에 서 있는 고성을 만난다. 계단 초입에 감시탑이 있고 안쪽으로 들어가서 내부를 관람하게 되어 있다. 뾰족한 성 탑과 지중해풍의 지붕 벽돌이 에워싸고 있는 멋진 성이다. 건물은 시대가 흐르면서 새로운 건축양식이 추가되어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실내는 좁은 계단을 따라 층별로 전시관이 이어진다. 사람들이 사는 듯 물건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드라큘라 사진 대신, 어여쁜 왕비, 공주 사진이 눈길을 잡아끈다. 쇠창살, 철도끼 등 중세시대 고문기구 등도 있지만 몸서리쳐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박물관에 진열된 물건일 뿐이다. 드라큘라라는 선입견을 갖고 ‘으스스’할 준비를 하고 성을 방문하지만 실제로는 동화 속에 나옴직한 멋진 고성이다.
그렇다면 이 성은 실제로 드라큘라와 연관이 있을까? 브란성은 독일 기사단의 요새(1212년)로 만들어졌다. 15~16세기에는 트란실바니아와 왈라키아 공국을 잇는 연결지 역할을 하면서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헝가리 왕국을 지키는 관문이 되었다. 그 무렵 드라큘라가 이 성에 잠시 머문 것(1450년대)은 사실이지만 그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아니다.
이후 이 성은 루마니아 공국들의 통일에 기여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 드 여왕에게 헌정(1920년)되었고, 낭만적인 여름 궁전으로 바뀌었다. 여왕이 죽은 후 일레아나 공주가 성을 물려받았으나 루마니아가 공산권이 되면서 후손들은 성 소유권을 박탈(1948년) 당했다. 그 이후 브란성은 방치돼 파손됐다. 루마니아 정부가 1956년 국가 문화재로 지정, 개보수를 거침에 따라 중세역사미술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2006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손이 성의 소유권을 되찾았다. 그 후손은 지금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는데 후손들은 흡혈귀 성이라는 좋지 않은 이미지에 기분이 나쁘다고 한다.
드라큘라 백작이 흡혈귀가 된 속사정
그렇다면 루마니아의 실존 인물이자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유명한 영웅이었던 드라큘라가 왜 흡혈귀가 되었을까? 드라큘라가 흡혈귀가 된 것은 아일랜드의 소설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 1847~1912)가 쓴 소설 때문이다. 스토커는 ‘드라큘라의 삶’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괴기소설을 썼고 크게 명성을 떨쳤다.
우리는 역사를 똑바로 들여다봐야 할 이유가 있다. 드라큘라의 일대기를 들여다보자. 드라큘라(1431~1476)의 아버지는 신성 로마 제국의 드래곤 기사단 소속인 왈라키아 공 블라드 드라큘(Vlad Dracul) 2세다. 아버지가 용의 기사단의 단원이었기에 사용된 문장(紋章)이 ‘드라큘’이다. 루마니아어인 드라쿨(Drakulić)은 용(또는 악마)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어머니는 몰다비아 공국의 공녀 크네아지아다.
드라큘라는 트란실바니아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시기쇼아라(Sighişoara)에서 태어났다. 현재 그곳에는 생가가 변형된 채로 남아 있다. 드라큘라가 태어난 시기쇼아라는 그 당시 루마니아인이 아닌 게르만족 후손인 색슨족이 장악하고 있었다. 12세기에 이곳으로 이주한 색슨족은 철옹성 같은 성벽을 쌓고 상권을 장악했다. 루마니아 현지민들은 들어가 살 수 없었지만 당시 드라큘라의 아버지는 이들과 무역 협정을 맺고 도시 내부에 살 수 있었다. 형제는 형(미르체아), 본인(블라드), 남동생(라두) 3남이었다.
드라큘라는 어릴적(11살 경) 오스만 제국에 동생(4살)과 함께 볼모로 보내졌다. 드라큘라는 오스만 제국의 황태자인 메흐메트(훗날 메흐메트 2세가 된다)와 그의 아버지 무라드 2세에게 잔혹한 일을 많이 당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을 탈출해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다른 종족에 의해 암살(1447년, 드라큘라 16살 경)되었고 형은 뜨거운 인두에 눈을 잃고 생매장을 당하는 끔찍한 일을 겪었다. 드라큘라는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왈라키아 공국의 영주가 된다. 아버지 블라드 드라큘이라는 이름을 물려받았고 왈라키아 타르고비스테(Targoviste)를 수도로 삼는다.
포로들을 꼬챙이에 꽂아 죽여
하지만 사회는 불안정했고 영주 자리는 늘 위태로웠다. 툭하면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공작을 죽여 버리는 하극상은 끊이질 않았다. 드라큘라는 왕궁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고 나서 ‘피의 숙청’을 시작했다. 정적인 보야르(boyar, 당시 최상층의 귀족) 계급을 제거하는 게 우선이었다. 부활절 날(1457년), 그들을 왕궁으로 초대, “지난 50년간 몇 명의 군주를 모셨냐‘고 질문했지만 너무 많이 갈아치워 그들의 답변을 못하자 전부 다 죽였다. 대략 500명 정도가 말뚝에 박혀 처형되었다. 그의 처형 방법이 하도 잔혹해 체페시(Ţepeş, 가시, 또는 꼬챙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이후 그들을 다른 방법으로 이용했다. 브란성 근처 산정에 포에나리 요새를 축조할 때 보야르 계급에서 살아남은 귀족들을 인부로 이용했다. 이 포에나리 요새는 아주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다. 이어 드라큘라는 색슨족에게 전면전을 통보한다. 이 길을 상업로로 이용하려면 자신의 지시에 따르라고 명한다. 하지만 색슨족은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블라드의 정적들을 지원했다. 드라큘라는 군대를 이끌고 색슨족의 거점도시였던 브라쇼브(Brasov)로 진격했다.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 많은 포로들을 다 꼬챙이에 꽂아 죽였고 그대로 방치했다. 드라큘라가 그곳에서 식사를 해야 할 정도로 너무 많은 숫자였다.
드라큘라의 피의 장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호시탐탐 서방으로 진출을 꾀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과도 전쟁을 결심한다. 오스만제국의 사절단이 왔을 때, 터번을 벗지 않자 군주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 그 자리에서 터번 쓴 머리에 못을 박아 죽였다. 1461년, 오스만과 왈라카이는 전면 전쟁에 들어갔다. 이듬해(1462년)에 2000명이 넘는 포로를 잡았다. 그 포로들 전부 코를 잘라버렸다.
그러자 투르크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3배 이상의 군대를 끌고 쳐들어 왔고 드라큘라는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전세는 몰리기 시작한다. 포에나리 성으로 숨어 들어갔으나 장기적인 전투에서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부인은 성벽에서 떨어져 자살했고 수많은 수하 장군들을 잃었다. 드라큘라는 편자(말발굽형의 쇠붙이)를 역 방향으로 이용해 겨우 탈출한다. 하지만 오스만 군과 맞서 싸우다 술탄의 친위부대 예니체리들의 총칼에 무릎을 꿇고 목이 잘렸다. 향년 45세. 서기 1476년의 일이었다.
루마니아의 주요한 여행지들
유럽 발칸 반도에서도 동유럽 쪽에 위치한 루마니아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낯선 여행지다. 루마니아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독재를 반대하는 1989년 시민혁명을 통해 자유를 얻었다. 공산국가라는 이미지가 많이 남아 있지만 실제로 수도 부쿠레슈티(Bucureşti)는 기대 이상으로 볼거리가 많다. ‘루마니아의 작은 파리’라 칭하던 개선문, 세계에서 가장 큰 건물 중 하나로 알려진 국회의사당(1984년) 등 공산당 정권이 만든 유명 건축물들. 그것 말고도 도심 속에 남아 있는 옛 모습은 여행객들을 충분히 매료시킨다.
또 ‘시나이아(Sinaia)’, 브라쇼브와 시기쇼아라를 구경하는 재미를 놓치면 안 될 것이다. 시나이아는 ‘카르파티아(Carpathian)의 진주’라 불린다. 왕가의 여름 별궁인 펠레쉬(Peles, 루마니아 국보 1호), 펠리쇼르 성이 인기다.
또 시기쇼아라에는 드라큘라가 태어나 4살까지 살았던 생가가 있다. 그것 뿐 아니라 이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시계탑 등, 올드 타운은 마치 중세를 옮겨 놓은 듯하다. 이 도시의 역사지구는 199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좀더 사실적으로 알고 싶다면 다큐멘터리 를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Travel Tip!
항공편 직항은 아직 없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공항으로 이동하면 된다. 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각지를 경유해 가는 방법이 있다. 그 외에 카타르항공을 이용해 도하를 거쳐 부쿠레슈티로 갈 수 있다. 도하까지 약 10시간, 부쿠레슈티까지 약 5시간 걸린다.
현지교통 수도 부큐레슈티에서는 지하철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그 외 시외 이동은 열차, 버스 등으로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면 된다. 브란성을 가려면 부큐레슈티에서 열차를 이용해 브라쇼브로 가야 한다. 브라쇼브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12, 16번 버스를 타고 Stadionul Tineretului에서 하차 후 브란성 가는 버스(40분 소요)를 타면 된다. 시기쇼아라는 브라쇼브에서 버스나 열차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시차 한국보다 7시간 늦다
음식정보 음식이 제법 맛이 좋다. 루마니아식 족발인 치올란(Ciolan)이 있다. 그 외 옥수수를 재료로 이용한 음식, 다진 돼지고기를 포도잎으로 싼 사르말레 등이 있다. 루마니아 전통 도넛인 파파나스(Papanas)도 있다. 특히 부큐레슈티에서는 전통 깊은 건축물에서 음식을 즐길 수 있다. 구시가지 왕궁 옆에 있는 마눅 여인숙(hanul lui manuc, 1808년)은 200년 전통을 자랑한다. 또 1879년에 오픈한 카루 쿠 베레(Caru cu Bere)는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홀이다. 원래는 왕족의 만찬장소였던 이곳은 차우셰스쿠의 큰아들이 자주 파티를 열던 곳이란다. 현재도 레스토랑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매우 흥미롭다.
루마니아 문화 루마니아 민속 예술, 전통음악과 춤, 목공예, 도자기 공예, 건축, 뜨개질, 자수, 보석가공 등 여러 문화유산들이 발전을 거듭하면서도 그 원형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예술뿐 아니라 과학과 학문에 있어서도 루마니아는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는다. 스포츠 중에서는 체조를 빼놓을 수 없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당시 15세의 나이로 참가해 체조 요정이라는 별명을 얻은 나디아 코마네치(Nadia Comaneci)가 아직도 유명하다. 루마니아가 체조에 강한 이유는 신 식초 성분이 많은 음식을 즐기는 그들의 식생활도 한몫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미인들이 아주 많다.
화폐정보 레이(LEI)를 쓴다. 1유로가 4.4레이 정도다. 환전할 필요 없이 ATM기를 이용하면 된다.
주류 정보 포도주(VIN), 추이카(TUICA)라는 특유의 과실 증류주가 유명한데 자두가 좋다. 포도주는 아주 저렴한 가격과 뛰어난 품질로 이미 서구에서 크게 사랑받고 있다. 루마니아 포도주 박람회(VIN-EXPO)가 열린다. 그 외 보드카, 위스키, 럼, 다양한 맥주 등이 생산되고 있다. 포도주는 겨울철에는 데워 먹는 특징이 있다. ‘뜨거운 포도주(Vin fiert)’는 겨울 추위나 감기 등을 이기기 위한 민간요법이다.
숙박 정보 가격이 비싸지 않고 시설이 좋은 편이다. 유명한 숙박 사이트를 이용하면 된다.
시니어 포인트 수도는 걸어서 다니거나 지하철을 이용하는 데 크게 불편하지 않다. 그러나 도시 간 이동은 시설이 열악한 편이다. 서두르지 말고, 관광도시마다 1~2일 정도 지내면서 천천히 여행을 즐기는 것이 키 포인트다. 물가가 싼 편이라서 원하는 음식과 술은 멋진 레스토랑을 골라 먹도록 하자. 싼값에 기념품을 사오는 것도 방법이다. 관광지는 생각보다 눈요기를 할 곳들이 아주 많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요즘은 다들 형편이 좋아졌는지 휴가철이나 무슨 때만 되면 외국으로 나가는 사람들로 인천공항이 북새통이 된다고 한다. 소시민인 필자는 아이가 어릴 적부터 어른이 되어 더는 아빠 엄마와 휴가를 같이 보내려 하지 않게 되었을 때까지 여름휴가나 겨울휴가 여행을 국내, 특히 동해안으로 갔다. 우리나라 곳곳 다 아름답지만, 그래도 한계령을 넘어 설악산으로 가는 구불구불 길이 좋았다. 고개 넘어 맞닥뜨리는 동해의 탁 트인 파란 잉크 빛 바다와 특히 내가 좋아하는 먹거리 해산물이 풍부하다는 점이 그곳을 여행지로 꼽는 첫 번째 이유였다.
가수 양희은 씨의 노래처럼 한계령은 나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아 정답고 한계령 올라가는 길에 있는 한옥 민박집이나 바람불이라 불리던 계곡 야영장은 우리 가족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겨주었다.
지금은 어딜 가도 호텔이나 콘도, 화려한 리조트로 쾌적한 숙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우리 가족은 텐트를 준비해 자연 속에 머무르는 방법을 택했는데 남편이 아들에게 숲 속에서 지내는 낭만을 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고 나도 도심과 다르게 밤하늘의 쏟아질 듯 촘촘히 빛나는 별빛을 볼 수 있고 풀벌레 소리 들리는 야외가 마음에 들었다.
아들이 고사리손으로 제 아빠를 도와 텐트 치는 걸 보는 것도 대견하고 즐거웠다.
아무튼, 우리 가족은 아들이 서너 살 무렵부터 차에 온갖 캠핑 장비를 싣고 여행을 떠났다. 엄마인 나는 휴가 동안 먹을 밑반찬이며 간식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바닷가에서 회를 사 먹는 일 외에는 집에서와 똑같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요즘은 어디를 가도 그 근처의 특산품이 무언지 맛집은 어디 있는지 찾아다니며 식도락을 즐기지만, 그땐 왜 그리 힘들게 양념 하나까지 준비했는지 아마 그게 현명한 아내와 엄마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우습기만 하다. 자청해서 고생한 거지만 그런 게 또 즐거웠고 준비하는 동안 행복했었다.
승용차에 텐트며 오색파라솔 달린 테이블, 온갖 캠핑 장비를 갖추고 떠나는 날은 가족 모두 들떠서 가슴이 설레었다. 설악산으로 가는 길로 미시령과 한계령이 있는데 미시령 쪽도 휘몰아치는 물살이 시원한, 계곡을 끼고 달릴 수 있는 멋진 길이지만 주로 한계령을 지나서 갔다. 한계령은 필자가 정말 좋아하는 곳이다. 꼭대기에 있는 한계령 휴게소는 그림처럼 아담하고 경치가 좋아 마음에 들었다. 가끔은 온통 안개에 휩싸여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일 때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 맑고 청량한 공기와 둘러 보이는 경치가 너무나 멋졌다.
짙은 갈색의 휴게소 건물도 운치 있고 안으로 들어가 테라스의 나무로 된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 강원도 명물 음식을 맛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으며 특히 테라스 끝쪽에서 사진을 찍으면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정말 멋진 풍경의 사진이 되어서 매번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곤 했다. 그래서 설악이나 동해안에 갈 때는 항상 한계령을 거쳤는데 요즘은 빠른 길이 생겨서 한계령 고개를 넘는 차량이 많지 않다는 소식이 들려 어쩐지 애잔하고 마음이 쓸쓸하다. 한계령에 오르기 전 초입에 시원한 물줄기가 모여 옥빛의 깨끗한 연못을 이룬 옥녀탕이라는 계곡이 있는데 그곳에 나는 재미있는 추억 하나가 있다.
어느 해인가 설악산으로 휴가를 갔을 때였다. 시끌벅적한 동해안 대진항의 분위기도 만끽하고 맛있는 회와 싱싱한 해산물 구경도 실컷 하는 등 좋은 시간을 가졌으며 다음날은 그곳에서 좀 떨어진 동명항이라는 작은 포구에도 들러서 또 다른 맛과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설악산에서는 너무나 피곤했다. 모든 사람이 다 여기로 모인 듯 인파에 뒤덮여 온통 계곡이나 길이 복잡하고 소란스러웠다.
여행 마지막 날에 나는 몸과 마음이 지쳐서 몹시 피로함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예외 없이 한계령을 지나 구불구불 산길을 내려오다가 옥녀탕 앞에 이르렀다. 여기서 잠깐 쉬어가자고 내려서 보니 정말 맑고 깨끗한 계곡 물이 있었다.
필자는 물을 너무 좋아한다. 수영을 그리 잘하는 것도 아니면서 물만 보면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설악산의 계곡에서 실망했던 마음이 옥녀탕을 보니 다 풀어지고 티셔츠와 핫팬츠 차림이었던 나는 옥녀탕 물속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정말 시원하고 기분이 좋아서 두 팔로 물을 휘휘 저으며 수영을 했다. 남편이 그만 나오라고 손을 흔들었는데 그때 지나가던 순찰차에서 마이크로 “옥녀탕에 계신 분 빨리 나오세요, 들어가면 안 됩니다.” 라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에서 쉬고 있던 관광객들도 웃으며 빨리 나오라고 손짓을 해 댔고 누군가는 휘파람까지 불었다. 깜짝 놀라서 재빨리 나왔는데 어찌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곳에 들어가면 안 되는 줄 몰랐고 주변 어디에도 들어가지 말라는 안내판이 없었다고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벌금이라도 내야 하나 걱정했지만, 경찰관을 태운 순찰차는 자리를 떴다.
그저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있는 설악산 계곡이니 들어가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순찰차의 경고를 듣고는 이름 있는 계곡에 무단 침입한 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있던 많은 관광객에게도 무척 부끄럽고 미안했던 기억이 난다. 자연을 아끼고 보호해야 하는데 깨끗한 물이라고 텀벙 뛰어들다니 너무 철없는 행동을 했다. 그후에도 휴가 갈 때 올 때 그곳에 들러 보았다. 들어가지 말라는 팻말이 없어도 물에 들어간 사람은 없으니 많은 사람은 나처럼 지각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반성도 되고 너무 창피하지만, 그래도 나는 설악산 옥녀탕에서 수영해 본 사람이라는 생각에 즐거운 미소가 떠오른다.
필자 가족이 놀러 간 적이 딱 한 번 있다. 5남2녀로 나는 맏딸이다. 엄청난 식구가 놀러 갈 수 있는 차가 있던 것도 아니고, 버스를 타야만 했다. 그 버스도 하루 다섯 차례 다녔다.
필자의 고향은 괴산이다. 그곳에는 쌍곡, 화양동이 있는 휴가지다. 필자 집은 그 곳에서 십 여리 떨어진 곳에 살았다. 사람이 붐비는 휴가철이 되면, 버스에 사람이 꽉 차서 지나가는 것을 보고도 도시사람들이 놀러 가나보다. 그날이 그날처럼 무심하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해가 서쪽에서 떴다. 필자 가족한테 괴산수력발전소가 있는 개울에 놀러 가자고 아버지가 말했다. 그 곳은 초등학교 때 걸어서 소풍을 갔던 곳이다. 회양목을 서너 그루 캐 가지고 손에, 손에 들고 오던 곳 아닌가. 학교 화단에 심기 위해서다. 필자 형제는 솔직히 아버지가 정신이 어떻게 되었나. 멈칫했다.
꿈은 아니겠지? 자주 놀러 가 본 적이 없어서 우리 가족은 서먹서먹한 기분으로 서로 얼굴을 멀건이 바라보며 별 말 없이 우리 아홉 식구는 버스를 탔다. 내가 고등학생 때 이었으니 막내 동생이 두 살 인가. 상상을 해보라. 두세 살 터울로 일곱 명이 올망졸망 했겠는가. 업고 걸리고 여전 피난행렬 같았다.
비닐봉지도 가방도 없던 시절이다. 보자기에 싸서 간단한 취사도구를 한 가지씩 들고 가는데 여전 거지패가 이동하는 것 같았다. 천신만고 끝에 강가에 다다르자 우리 식구는 강 반대편을 바라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 했다.
김총대! 김총대! 아버지는 엽연초조합에 다녔고 그 담배농사 짓는 집 근처로 놀러갔었다. 총대라는 것은 그 동네에서 담배를 농사짓는 사람 중의 대표되는 사람을 호칭하는 것이다. 아무튼 온 식구가 소리를 질러대니 산에 메아리가 울렸다. 그는 우리를 바라보며 작은 배를 저어 마중 나왔다. 각자 자기 집 손님은 그 쥔장이 나와 실어 날랐다.
식구가 다 배에 오르니 배가 기우뚱 거렸다. 우여곡절 후에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개울에 들어가 올갱이를 잡았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곳에는 바다에서나 볼 수 있는 여전 홍합보다 좀 더 큰 말조개라는 것이 지천이다. 형제들은 서로 시새워가며 조개를 주웠다. 누가 더 큰 것을 잡는가.
그 때 아버지는 돌을 쌓아 화덕을 만들었다. 그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불을 지폈다. 집에서 준비해 간 감자를 삐져 넣고 고추와 호박을 넣고 고추장을 풀어 아버지는 고추장감자찌게를 준비했다. 아버지는 소고기 대신 개울에서 잡은 조개를 듬뿍 넣었다. 한소끔 끓인 후 찌개 냄비를 불 옆에 놓았다.
밥을 짓기 위해 쌀을 안쳤다. 뜸까지 다 들인 후 다시 잔불에 감자찌개를 푹 끓였다. 그 구수하고 매콤한 냄새는 지금도 코끝을 맴도는 듯하다. 야외에서는 양념이 많지 않으니 오래 끓이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아버지 월급날에 소고기를 한칼 사오면 무조건 감자찌게를 했다. 그것은 소고기 양보다 좀 더 늘려 먹는 법이다. 고기 첨은 어쩌다가 더러 눈에 띄었다. 우리는 서로 눈치를 보면서 한 숟갈이라도 더 먹으려 했다. 칠 형제이니 밥상에 반찬이 남아나질 않았다. 어쩌다가 용케 걸려 내 입에 들어간 소고기 한 첨은 입에 살살 녹았다. 반찬은 열무겉절이 달랑 하나였으며 냉장고가 없어 끼니때마다 밭에서 뜯어 버무리는 즉석반찬이었다. 거기에 텃밭에서 딴 상추와 쑥갓. 오이와 가지 그게 전부였다. 그 때는 그런 반찬이 싫었는데 나이드니 요즘 내가 여름철에 찾는 반찬은 늙은 오이에 가지, 호박잎만 찾는다. 옛날에 먹던 맛을 용하게 기억하는 내가 참 신기하다.
보리쌀이 넉넉하게 들어간 밥에 감자찌게를 넣고 쓱쓱 섞어 비벼 먹었다. 냄비 바닥을 너무 긁어 바닥이 뚫릴 지경이었다. 두레 반상에 둥글게 옹기종기 앉아 먹었다. 고추장 감자찌개는 여름에 먹는 것이 제격이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데리고 여행은 자주 갈 수 없었지만 집에서 고추장감자찌게 만은 자주 끓여 주었다.
휴가지에서 아버지는 우리에게 고추장감자찌게를 끓여 주었고, 개울가에서 우리 가족은 아주 맛나게 먹었다.
40여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지만 아버지가 감자를 씻고, 다듬어 감자찌개를 끓이면 엄마가 한 것보다 더 월등했다. 우리 가족은 그 후 다시 전체가 모이는 가족여행을 가지 못했다. 얼마 후 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때 보아 두었던 대로 감자찌개를 끓여 보지만 그 시절 아버지의 손맛에는 어림도 없다. 내 손가락은 아버지를 닮아 짤막하게 생겼는데 말이다.
그래서 엄마는 지금도 말한다. 우리 가족이 그 때 괴산발전소로 딱 한 번 놀러 갔었지? 사진도 못 찍었지. 사진기가 흔치 않는 시절이라서 우리 머릿속에만 또렷하게 남아 있다.
휴가철이 돌아오면, 아버지의 고추장감자찌게, 그 손맛이 그립다.
“은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휘슬이다. 그래서 노후 준비는 바로 지금 시작해야 한다”라고 강조하는 가재산 2060클럽 회장은 노후를 위한 건강한 삶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자신의 말을 실천하는 것처럼, 그가 이끄는 2060클럽은 트레킹 모임이다. 1년여 만에 350명이라는 회원을 모으면서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2060클럽의 의미와 트레킹의 끝없는 즐거움이란 무엇인지 들어본다.
성공적인 노후를 누리는 많은 시니어들은 흔히 나이가 들어서 건강을 유지하는 최고의 비결을 ‘가능한 한 오랫동안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사 토털 솔루션을 제공하는 HR전문가 기업 피플스그룹의 대표이며 2060클럽의 회장이기도 한 가재산 회장은 ‘2060’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그는 2060은 ‘경제수명(經濟壽命) 2060시대’라며 20세부터 80세까지 60년 동안 일해야 하는 삶의 가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100세 시대 고령화 국가가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노후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최고의 ‘노테크(老TECH)’는 오랫동안 일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는 2060은 경제수명을 60년 가져가기 위해서 ‘20대부터 60년 일할 준비를 시작하고, 60대도 20년 더 늘려 80까지 일하자’는 의미입니다.”
노후 준비는 바로 지금
가 회장은 노후 준비는 퇴직 직전에 하는 게 절대 아니라고 강조한다. 노후 준비의 골든타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나이와 관계없이 바로 지금’이라고 말하는 그가 참고 사례로 주목하고 있는 나라는 장수국가로 유명한 일본이다. 일본은 65세 이상 노인들이 이미 국민의 23%를 넘었고, 100세 이상의 고령자가 6만 명을 넘는 세계 최고령국가다. 그래서 일본에는 100세 이상 일하는 현역들도 많다.
“시바타 도요 할머니가 100세에 낸 라는 시집은 100만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건강법’의 저자 히노하라 시게아키(日野原重明) 박사는 올해 105세(1911생)지만 현역 병원장입니다. 그는 100세가 되던 해에 강의를 하러 우리나라 대학교를 다녀갔는데, ‘어떤 일이든생각하기 나름이며 늙는다는 것은 쇠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늙음과 젊음은 마음에 있다’는 의미인 겁니다.”
트레킹 모임 2060클럽이 추구하는 3무(無)
그가 회장으로서 운영하고 있는 이색 모임 ‘2060클럽’에도 그대로 붙여져 있다. 2060클럽은 80까지 건강하게 일하며 100세 시대를 살아가자는 트레킹 모임이다.
“3년 전 우연히 네 명이서 여행사 광고를 보고 전남 여수에 있는 금오도 비렁길 트레킹을 가게 되었지요. 동백꽃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진 섬이었는데 정말 아름다운 절벽과 비경이 펼쳐지는 바닷길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처음 트레킹이라는 걸 하면서 시쳇말로 ‘뿅’가버렸습니다. 이후 트레킹에 매료되어 서울 둘레길 157km를 완주하고 태안 국립공원 등을 다니면서 무척 좋아 그 멤버들이 나이가 들더라도 승합차 한 대 정도의 인원으로 계속 다녀보자는 제안을 한 것이 이렇게 커졌습니다.”
우연히 그리고 취미로 시작한 2060클럽은 올해 5월을 기점으로 회원 수 350명을 넘어서며 성공적으로 순항 중이다. 2060클럽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누구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열심히 하게 되어 있습니다. 2060클럽은 남을 위해서라기보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기 건강을 위해서 걷는 매력이 가장 크다고 봅니다. 오는 사람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이런 분들과 걸으며 대화하는 사이에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고, 배우면서 삶의 에너지를 얻게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하다 주말에 트레킹을 통해 충전도 하니 주말을 기다리게 되지요.”
모임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드러내듯, 2060클럽은 회비도 나이도 직업도 따지지 않는 3무(無)를 추구한다. 부담을 갖지 않고 즐기길 바라는 의도에서다. 누구나 가입이 가능하다.
“단지 조건이라면 2060에서는 세 가지를 위해 노력하자고 합니다. 첫째는 일, 건강, 그리고 사랑 즉 3유(有)입니다. 여기서 당장은 일이 없더라도 좋지만 80까지 일하겠다는 생각을 갖는의지와 열정은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일하기 위해 건강해야합니다. 문제는 자신과 주위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꼭 필요합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걸으며 새로운 에너지 얻어
가 회장은 자신이 젊었을 때는 20여 년간 계단 오르기, 테니스, 등산 등 무릎에 안 좋은 운동만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다 보니 40대 후반부터는 운전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관절이 망가져 수술을 계획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트레킹을 만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멀쩡해졌다고 한다.
“더구나 우리 집안에는 당뇨가 유전적으로 있어서 저한테도 경고장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트레킹을 시작하고 지난 연말에 체크해보니 당뇨 수치가 90대로 떨어졌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건강을 얻은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자연과 함께 다양한 사람들과 걸으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는 게 제일 즐거운 일이지요.”
2060클럽이 주로 걷는 길은 전국에 대략 1600여 개가 형성되어 있는 트레킹 코스다. 또한 트레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각 지자체에서도 훌륭한 코스들을 개발해 놓고 있다.
“2060클럽에서는 매주 트레킹 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서울 둘레길이나 북한산 같은 근교에서 걷고 있는데, 한 달에 한 번은 여행사들이 전국에 개척한 코스를 버스를 타고 다녀옵니다. 특히 분기에 한 번은 1박 2일 코스로 멀리까지 다녀오는데 그 활동이 회원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든다는 기쁨
최근 은퇴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만들어지는 모종의 공백 현상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지금껏 일만 알고 살아온 사람들이 막상 은퇴를 하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 하면서 우울해 하거나 부질없는 곳에 돈을 쓰는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을 위한 대안의 솔루션으로서 최근 다양한 시니어 모임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 제대로 운영을 하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가 회장에게 클럽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면서 무엇이 중요했는지에 대해 물어보니 ‘열심히 일하며 트레킹으로 건강을 지키자’며 차별화를 추구했다고 밝혔다. 2060클럽이 일하는 시니어에게 필요한 건강 조건으로서의 트레킹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구성원의 성격도 정의해주고 있다. 일하는 일상을 지탱하기 위한 모임이라면, 구성원들 또한 의욕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 회장은 앞으로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외의 멋진 트레킹코스를 가보려고 계획하고 있다.
“이러한 작은 커뮤니티들이 많아진다면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고령화로 인해 국가 전체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줄어들면 세수도 줄고 노인 환자들은 늘어나 건강보험까지도 부족해지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신광철 시인
“2060클럽은 ‘주고 또 주는(Give And Give)’ 관계”
걷는다는 것은 인생의 은유 같기도 하고, 직유 같기도 하다. 사람 안에는 길이 하나 들어 있어 거미가 거미줄을 뽑아내듯 사람은 걷는 일로 인생길을 만들어 낸다. 마음에서 뽑아낸 길이 인생길이 된다.
2060클럽 가입을 권유받고 망설였다. 할 일은 없지만 늘 머릿속에는 글이 왔다 갔다 해서 하루 일상이 생각으로 일출이 오고, 생각으로 일몰이 오는 나 같은 사람에게 함께 걷는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었다. 평생을 여행, 취재, 일로 돌아다니며 살아 걷기 모임이란 말에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깔끔하고 안정된 사고의 소유자인 가재산 회장의 권유이기도 하고, 직접 만든 모임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띄었다.
걷는 것은 평생의 내 일이기도 했다. 인생의 절반을 길에다 깔고 살았다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혼자 하는 여행에 익숙해져 있었다. 산길을 택해 걸으면 하루 종일 걸어도 사람 하나 만나지 못할 때도 있었다. 명산에는 사람이 넘쳐도 이름 없는 야산을 걸으면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한적하고 조용하다.
나는 산과 들을 걷고, 쉬고, 숲이나 간이역이나 나무 그늘 아래 누워 자기를 많이 했다. 풀 위에 누워 자면 세상은 내 것 같았다. 더구나 비가 오는 날에 숲이나 들판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면 세상은 울림을 주었다. 비는 결이 있었다. 눈도 결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바람도 결이 있었다. 자연은 거대한 흐름이 있었다. 비나 눈이 올 때 물이 흐르는 바닥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면 비와 눈의 흐름이 보였다. 가슴 벅차게 하는 광경이었다. 새들의 군무 같고, 보리밭의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의 군무 같은 걸 느꼈다. 감동이 온다. 더구나 태풍이 오는 날 숲으로 들어가 나무와 나무가 부딪히며 부러지고 폭우와 바람이 거칠게 지나가는 현장에서 흠뻑 젖어서 하늘을 보고 누워보라. 젖고 나서는 더 젖지 않는다.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졌다. 묘한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2060클럽은 다른 세상이었다. 내가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세상을 선물했다. 아름다움과 상쾌한 궤적을 만들어내는 곳을 찾아내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구릉을 오르내리고, 산허리와 강을 휘어 돌며 대화를 나누는 기쁨은 또 다른 세계였다. 혼자 걸을 때의 쓸쓸함과는 다른 인간애를 느낄 수 있었다. 몰라보게 달라진 것은 사람이 좋아서 걷는 날이 기다려진다는 점이다.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만큼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 나는 감히 이야기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그리움이란 별이 떠야 하는 거라고. 그리움이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존재할까 싶다.
걷기를 하면서 등산이나 혼자 걷는 것과는 다른 인간의 온기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선하면 선한 사람이 찾아오고, 거칠면 거친 사람이 찾아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2060클럽의 매력은 가재산 회장의 성격처럼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 ‘주고 또 주는(Give And Give)’ 관계의 설정에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 걷고,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것으로 족한 모임이어서 부담 없는 모임이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끌린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면서 꽃을 피우지만 소리치지 않고 지나가듯이 2060클럽이 그렇다. 무엇보다 같이 걷는 분들의 건강이 좋아졌다는 한결같은 말에 덩달아 즐겁고 나 또한 걷는 것의 즐거움과 더불어 얻은 건강이 고맙다.
성인이 된 자녀가 부모 집에 얹혀살면서 어린이처럼 처신하는 현상이 미국에서도 새로운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캥거루족, 키덜트(Kidult), 어덜테슨트(Adultescent) 같은 신조어에도 익숙해졌다. 제 앞가림을 못하는 자녀 때문에 베이비붐 세대의 속앓이가 심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애지중지하는 부모도 적지 않다. 이런 현상에 대한 학계의 연구와 언론 보도가 봇물을 이루고 전문가들의 논쟁도 끊이지 않고 있다. AARP(미국은퇴자협회)가 5월호에 게재한 ‘끔찍한 22세들(The Terrible 22s)’이란 제목의 특집 내용을 소개한다.
베이비붐 세대의 시각 :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다
요즘 20~30대인 밀레니얼 세대는 애지중지 키웠더니 제 구실을 못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그건 한쪽에 치우친 말이다. 정말 문제는 부모인 베이비붐 세대다. 원인을 제공했고 날개까지 달아줬다. 줄리 리스코트-하임스 스탠포드대학 교수는 그의 저서 에서 “많은 부모가 자녀를 지나치게 보호하고 간섭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힘든 경험을 해보지 않은 밀레니얼 세대는 온실의 난처럼 현실 적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20대일 때는 해외여행이나 연수를 가도 부모가 일정을 세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해외에서 엽서나 편지 한 장 보내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당시 부모는 자녀가 20세가 되면 성인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일을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뒀다. 자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 첫 봉급을 받을 때까지 생필품과 방값을 지원해 주면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여겼다.
이런 경험을 한 베이비붐 세대가 자신들의 자녀를 대하는 태도는 전혀 딴판이다. 성인이 된 자녀를 여전히 품안에 끼고 있다. 자녀와 함께 지내면서 내밀한 생활까지 공유하려는 욕심 때문일 수도 있다. 소셜미디어와 같은 현대기술 덕분에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지고 있다. 베이비부머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을 이용해 자녀의 일상생활과 고민을 낱낱이 파악하고 간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자녀의 연예나 결혼에도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결혼할 생각이 없는 청년과 몇 년째 교제를 하고 있는 딸에게 시간 낭비니 단교하라고 종용하는가 하면 중매 사이트에 자녀의 세세한 이력과 취향까지 올려 배필을 물색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자녀의 직장 생활에까지 발 벗고 나서는 부모도 적지 않다. 회사에 전화를 걸어 자녀의 취업인터뷰 절차를 알아보는 것은 기본이고 연봉 계약과 승진 문제로 직장 상사와 직접 상담을 하고, 자녀의 업무 성과까지 평가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자녀가 어린이일 때보다 부모의 역할이 더 커진 셈이다.
미국 부모의 과보호 현상은 지난 1979년, 당시 여섯 살이던 에단 파츠가 학교버스를 타러 가다가 행방불명되면서 미국 전체가 공포에 빠진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에 1980년대 초 미국 어린이의 학력이 세계 수준에 못 미쳐 국가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내용의 대통령 보고서가 발간되면서 ‘헬리콥터 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학생 6명 중 1명이 불안증세로 진단을 받았거나 치료를 받은 경력이 있을 정도로 정신력이 약해졌다.
부모가 병원 예약에서부터 선물 구입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일을 대신해주니 자녀는 성인이 되어도 사소한 일조차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부모는 아들딸이 도움 없이도 잘 지내게 되면 자신은 쓸모없는 늙은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한 분위기다.
네브래스카의 임상심리학자 제인 워렌은 “좋은 가정에서 곱게 자란 자녀들의 자립심이 더 낮은 것은 아이러니한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부모와 함께 있을 때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니 독립할 이유가 없어진다. 부모들도 고분고분 잘 따라주는 자녀와 함께 살고 싶으니 독립이 반가울 리 없다. 맨해튼의 심리치료사 제리 애게이트는 “자녀가 독립하면 부모는 책임을 다했다는 생각이 우선 들지만 자녀로부터 소외된 느낌도 들기 때문에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오리건주립대학 리처드 세터스턴 교수와 작가인 바바라 레이는 공동 저서 에서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 특히 어머니에게 조언과 자문을 받을 뿐 아니라 동료애와 위안도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이 덕분에 세대 차이가 많이 좁혀지고 있다. 1970년대나 1980년대와는 달리 자녀의 생각이 부모와 닮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는 자녀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스스로 자유로운 생활을 접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면을 감안할 때 이제는 자녀들이 21세기에 직면할 문제를 스스로 해결토록 하는 공동 목표를 세우고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음 세대가 번영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자녀인 밀레니얼 세대의 시각 : 부모님은 몰라요
베이비붐 세대는 헌신적인 노력에도 자녀들이 무기력하고 생활을 꾸려갈 준비도 안 됐다고 낙담하고 있는 것 같다. 공포와 수치심이 뒤섞인 숨 막힐듯한 태도로 자녀를 대하는 느낌마저 준다. 밀레니얼 세대를 평가절하하는 근거없는 이야기도 많이 나돈다.
입사 면접에까지 부모와 함께 간다는 소문이 단적인 예다. 이 이야기는 2013년 9월 월스트리트저널에 ‘면접장까지 부모와 함께 가야 하나?’라는 제목의 기사로 소개됐다. 인력관리회사인 아데코가 대학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근거로 한 이 기사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응답자의 8%가 입사 면접에 부모와 함께 갔고 3%는 자리를 같이했다는 내용이다. 사실을 제대로 파악해 보면 황당해진다. 차가 없는 자녀를 면접장까지 차로 데려다 주고 면접장 주위에 앉아 기다린 부모의 비율을 집계한 통계를 왜곡해 큰 제목으로 기사화한 것이다. 대중교통이 불편한 미국에서는 부모가 어디든 차로 데려다 주는 것은 자연스런 일상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경제력이 떨어진다는 분석도 왜곡된 점이 없지 않다. 2013년, 25~34세인 남성의 수입은 1980년 그 또래의 남성에 비해 물가상승률을 감안했을 때 18.5%나 감소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기간 젊은 여성의 수입은 40.5%나 증가해 전체적으로 보면 그 전 세대와 수입 차이가 별로 없다.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에 따르면 밀레니얼 세대의 하위 60%는 부모세대 때보다 재정상태가 훨씬 열악하다. 1989년, 18~34세의 젊은 성인들은 평균 3300달러의 순자산을 보유했으나 2013년의 그 또래는 7700달러의 빚을 지고 있다. 학자금 융자가 빚 증가의 주요인이다.
그렇다면 밀레니얼 세대가 과거 부모세대에 비해 더 많이 파산했냐 하면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다. 대학을 졸업한 경우 베이비붐 세대보다 형편이 더 낫고 고등학교 이하 학력의 경우는 부모세대 때보다 수입이 훨씬 떨어지는 상반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는 이런 자녀를 위해 옹호자, 친구, 상담사 등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녀와 좀 더 가까워지려 하고 있다. 하지만 자녀의 생각은 좀 다르다. 부모가 자신만의 소셜미디어 영역에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안전장치를 하고 있다. 부모 집에 같이 사는 것도 밀레니얼 세대만의 현상은 아니다. 1911~1924년에 태어난 가장 위대한 세대 때는 대공항의 여파로 직업을 구하지 못해 부모와 함께 지낸 캥거루족이 더 많았다. 고용여건이 악화되고 임대료 부담이 가중되면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요즘 직장 상사들은 “밀레니얼 세대들이 문자를 주고받느라 근무를 태만히 하지만 일일이 나무랄 수 없어 포기하고 만다”고 말한다. 하지만 근무 태만은 밀레니얼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징계를 하거나 해고를 하면 될 일을 밀레니얼 세대의 특성으로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밀레니얼 세대는 아직 젊다. 앞으로 수십 년을 살아가면서 미흡한 생활능력을 키우고 재산도 모으며 자녀도 낳아 기를 것이다. 균형 잡힌 시각에서 보면 밀레니얼 세대도 다른 세대와 별 차이가 없다. 더 예민한 부모가 있을 뿐이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전해인 1996년 4월, 필자는 외국인 친구 4명과 중국 구이린(桂林)을 여행했다. 떠나기 전 한국 친구들은 찡그린 표정으로 한마디씩 하며 말렸다. “공산주의 국가에 외국인들과? 꼭 가야겠니?” “하여튼 못 말려!.” 필자도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게 아니야. 왔을 때 잡아야지!’ 이렇게 다짐하며 여행을 강행했다.
그림으로만 보던 구이린의 풍광 중에도 가장 기대했던 곳은 리강(漓江)이다. 둥그런 봉우리들과 어우러진 유장한 리강은 명물허전이었다. 일행는 두말없이 남편이 운전하고 부인이 가이드인 배에 올랐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리강은 주변에 둥그렇고 뭉뚝한 산봉우리들과 흐드러진 대나무 숲, 뗏목, 물소와 노는 아이들로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풍경에 젖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사이 점심시간이 되었다. 일행은 그곳의 음식 사정이 변변치 않은 것을 미리 알고 한국에서 식사 대용품으로 각종 과자를 준비해갔다. 현지 가이드에게도 조금 나누어 주었다. 선장인 남편에게도 과자를 주고 돌아온 오지랖 넓은 가이드는 우리에게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밥을 짓고 있다는데 조금 드실래요?” 원래 그날 뱃삯에는 점심이 포함되지 않았다. 우리의 친절에 감동한 가이드가 돌발적으로 뱉은 말이었다. 순간 일행 사이에서 알 수 없는 눈빛이 재빠르게 오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곧바로 그들은 대부분 배부르다며 손사래를 쳤다.
잠깐 어찌할 바를 모르던 필자와 미국 친구 이베트는 실망하는 가이드의 눈빛이 안쓰러워 “조금만 주세요.”라고 말해 버렸다. 그러자 그는 흥겨운 뒷모습으로 배 뒷전에 있는 문을 나섰다. 가이드가 사라지자마자 친구들이 이벳과 내게 개미 소리로 꾸짖었다.
“너희들 어찌하려고 그래. 화장실 가며 저 여자가 그 더러운 강물로 밥하는 것 봤어!” 배의 화장실은 하발통이었다. 강물과 그대로 연결된 그냥 뚫린 구멍만 있었다. ‘아~뿔~싸~!!!’
곧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 위에 볶은 돼지고기와 채소를 얹은 점심이 가이드의 상냥한 미소와 함께 우리에게 건네졌다. 이번에도 그가 나가자 린다가 긴박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와 요꼬는 배 뒤편으로 간 가이드를 살피고 사다꼬는 뱃머리의 선장을 망봐. 그동안 너희는 밥을 강물로 버리는 거야. 할 수 있지?” 필자와 이베트는 갑자기 특명을 받은 007대원이 되었다.
“이때야 미령아! 하나 둘 셋에 버려!” “하나, 둘, 셋!” 후딱 잘 처리한 이베트와 달리 필자는 긴장되어 손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밥을 버리려다 그릇까지 던질까 봐 걱정되었다. 떨리는 손으로 겨우 밥을 버리자 필자의 엉성한 태도를 눈치 챘는지 이베트가 한마디 덧붙였다. “미령아 뱃전을 다시 봐. 혹시 밥이 떨어지다 묻었나······.”
점검에 들어간 필자는 뱃전에 묻은 여러 개의 밥알을 발견했다. 들킬까 봐 속을 태우며 나는 휴지로 창 넘어 뱃전을 닦기 바빴다. 웃음을 참으며 요꼬는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다시 온 가이드에게 이베트와 필자는 감사의 말과 함께 여유 있게 웃으며 빈 밥그릇을 건넸다. 가이드도 흐뭇한 미소로 답했다. 일행은 007작전을 완벽히 해낸 정보 요원처럼 자랑스러웠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인 구이린이지만, 수교 직후 가로등도 없이 어두컴컴한 공산주의 중국의 시골에서 필자가 거둔 처음이자 마지막 큰 업적으로 남아 있다.
가뭄이 들어 세상이 모두 타들어 가더라도 마르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계곡이다. 계곡은 세상의 모든 것이 말라도 마르지 않는다.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낮은 곳으로 임하는 ‘계곡의 정신’은 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의 원천이다. 이 같은 계곡 정신을 그려 노자는 ‘도덕경’에서 곡신불사(谷神不死)라고 했다. 진정한 승자는 세월이 지나봐야 드러난다는 뜻이다. 이것은 필자가 마음속 깊숙이 간직하면서 괴롭고 힘들 때 되뇌이는 생활신조다.
필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하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미 암소 1마리를 키우면서 새끼를 낳으면 가축시장에 팔아서 생활비와 교육비를 충당하고, 논과 밭을 소작해 먹을 것은 해결하며, 산 비탈길에서 잡목을 베서 집까지 지게지고 와서 말린 후 땔감으로 사용하는 그런 집이었다. 필자 집에선 여름철 더위는 볏짚으로 만든 멍석을 마당에 깔아 놓아 이기고, 모기와 벌레는 잡풀로 연기를 만들어서 퇴치했다. 또 부러진 소나무 옹이를 태워서 저녁 밤을 밝혔다.
이렇듯 옹색했으나 낭만도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저녁 밤하늘의 반짝이는 유난히도 많고 별들을 누나와 동생들이랑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하면서 별의 개수를 셌다.
부모님은 무척 지혜로운 분들이었다. 귀뚜라미와 여치, 소쩍새와 부엉이 소리를 들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으면 당시에는 시계도 없는데도 달그림자가 기울어진 정도와 대기 온도 차이로 시간을 말씀하시곤 했다.
아무리 시골이지만 초등학교 입학식 때나 어린이날, 각종 행사 때는 부유한 집안의 친구 부모들은 화려한 의상을 차려입고, 돈 들여 파마까지 하고 온다. 특히 생전 처음 보고, 먹어보는 음식과 다과를 가지고 온다. 이런 음식을 필자는 내내 계속 얻어먹기만 했다. 필자는 이들의 이런 생활을 보면서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목표로 삼았다.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할 기회를 줬다는 점에서 부자 친구와 부모들에 감사한다.
그 당시에는 하루하루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길게만 느껴졌으나 돌이켜보면 너무 짧은 추억의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흘러간 세월이 너무 아쉽기만 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시내 아이들은 학원 다니고 공부하는 동안 소 풀 먹이고, 소 풀 베면서 잠깐의 틈바구니 시간을 활용해 공부했다. 그래서 항상 손에 책을 들고 다녔다.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먹고 살기 힘든 집안에서 대학은 꿈도 꿀 수 없는 먼 나라 이야기 동화에 나오는 ‘상상의 우주선’이었다.
초등학교를 6살에 조기 입학해 고등학교 졸업반일 때는 공무원 시험을 볼 수 있는 최소 연령에 미달해 응시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바로 직업 전선에도 뛰어들 수 있는 실력도 없어 공학도가 되기로 했다. 관련 자격증을 취득해 기술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대학 전기과에 입학했다. 남들은 대학의 낭만을 즐기고 여행가는 사이 자격증 취득 공부와 취업준비에 매달린 결과 졸업반 여름에는 최연소 기사자격증 3개를 취득하고 국가공무원 및 한전 입사 시험까지 동시 합격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필자는 두 가지 직장 가운데 국가공무원을 선택했다. 공무원으로서 첫 발령지는 연고도 없는 서울이었다. 덕분에 난생처음 서울에서의 직장 생활이 시작됐다. 하지만 호사다마라던가. 기대에 부풀어 첫 월급을 받았는데 숙박비와 식비도 충당도 못 하는 수준이었다. 공무원 생활을 계속해야 한다면 계속 통장 잔액가 마이너스 되는데 이걸 누구에게 손 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고민만 쌓이는 사이 한국전력공사 신입사원 연수원 입교통지서가 날아왔고 미련 없이 공무원은 사직서를 내고 한전에 입사했다. 한전은 월급이 공무원의 3배가 넘었다. 그 당시엔 후회 없이 잘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한전연수원 교육을 마치고 화력발전소에 처음 부임해 교대근무 37개월 후 원자력발전소 건설 현장으로 보직을 변경됐다. 그런데 우선 용어와 도면, 시방서, 서류가 모두 영어로 돼 있다. 우리나라가 원자력 건설 기술이 없어 외국인들이 같이 투입됐는데 이들과도 영어로 소통해야 했다. 영어와 사투하느라 힘들었으나 그래도 신기술 분야여서 정말 흥미로웠다. 하루 종일 보고, 배우고, 현장 쫓아다니고, 온통 정신없이 업무에 몰두하다 보면 하루해가 언제 가고 오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건설현장에는 외국인은 오전 9시 출근에 오후 5시 퇴근하게 돼 있었지만 한전 직원은 오전 8시 출근에 오후 퇴근 시간이 따로 없을 정도로 한마디로 일에 미친 미치광이처럼 업무에 몰두했다.
필자의 원자력 건설 처음 10년은 외국인들에게 배우는 시기였고, 그다음 10년은 국산원자력발전소 1호의 건설에 참여하는 성장기의 단계였으며, 이어 10년은 선행호기 문제점을 찾아 개선하고 품질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립기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발전하기까지 기술자의 한사람으로서 이바지했다는 생각이다. 특히 이런 공로로 국가품질명장에 선정되기도 했다.
세계 최고의 품질상은 말보르상이지만 국내에서는 품질경영상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기업이 아닌 개인이 도전할 수 있는 최고의 품질상은 국가품질명장이다. 제안 실적, 설비개선 건수 및 개선 실적, 꾸준한 품질 개선 활동 실적, 자격증 취득 건수, 품질교육 실적, 사회봉사활동 시간, 현장 경력, 품질경진대회 포상실적 등으로 1차 서류심사를 한 뒤 2차 필기시험, 3차 현장실사, 4차 면접시험을 거쳐서 최종합격자를 가린다. 선출된 품질명장은 매년 10월 정부주관 품질명장 및 뺏지 시상식이 부부 동반으로 거창하게 치러지고 있다. 국가품질명장이 되면 사내에서는 사장상 공로 1등급과 해외교육, 사내외 품질개선활동 심사위원, 품질교육 등 다양하게 후진을 양성하도록 기회가 주어진다.
문창재 내일신문 논설고문
집에서 지하철역에 가려면 백화점 두 곳을 지나게 된다. 하나는 주로 중소기업 제품을 취급하는 곳이고, 하나는 굴지의 재벌기업 소유다. 통행인이 많은 길옆 점포들은 고객을 유혹하려고 바리바리 물건을 쌓아놓고 늘 ‘세일’을 외친다.
60층이 넘는 주상복합 아파트 세 동의 하부를 이루는 재벌 백화점 지하에는, 지하철역과 통하는 무빙 워크가 있어 편리하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젊은 날 나를 괴롭힌 결핍의 시대가 떠오른다. 그 많은 의류와 잡화들이 그런 회억의 실마리다.
‘그때 저렇게 값싸고 질 좋은 방한복이 있었으면 그날 그렇게 떨지 않았을 텐데….’ 눈에 띄는 제품마다, 후각을 파고드는 음식과 향신료 냄새마다 지나간 결핍의 시대 영상을 내 기억의 창고에서 끌어낸다. 저런 신발이 있었으면 시린 발을 동동거리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저렇게 강렬하게 후각을 유혹하는 음식이 그 시절에 있었던가!
4·19 학생혁명이 일어난 1960년 제야에 나는 처음 서울에 왔다. 다음 해 3월의 고등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위해서였다. 그날 아침 나는 지독한 추위에 떨었다. 아마도 영하 20도는 되었을 혹한의 미명이었다. 삭풍이 몰아치는 신작로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얼마나 제자리 뛰기를 했던지, 눈썹에 먼지가 허옇더라 하였다.
그 새벽 버스는 오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장터에 올라가 보았다. 운전사가 버스 밑에 엎드려 장작불을 피우고 있었다. 밤새 얼어 시동이 걸리지 않는 기관을 녹인다는 것이었다. 밤에 읍에서 올라와 다음 날 새벽에 떠나는 그 버스밖에는 교통편이 없었다. 도리 없이 서울행이 하루 늦어졌다. 구불구불 느릿느릿 달리는 그 버스 편으로 250리 밖 중앙선 철도역에 닿아, 귀성객으로 꽉 찬 열차에 결사적으로 올라탔다. 짐짝처럼 흔들리고 구겨진 열다섯 시간의 여행 끝에 청량리역에 도착한 그날 밤부터 나는 지독한 감기몸살로 앓아 누웠다.
그때 나의 입성은 초라하였다. 마직 검정색 교복 안에 목내의를 겹쳐 입었을 뿐이었다. 외투도 털목도리도 없이 얇은 명주 수건을 목에 두르고 세 시간 넘게 한데서 떨었으니, 얼어 죽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신발도 그랬다. 눈만 흘겨도 찢어질 것 같은 조잡한 운동화 차림이었다. 한겨울 백두대간 종주산행 때나 한라산 눈밭에서도 그렇게 발이 시려본 적이 없는 근래의 기억과 비교하면, 참 어이없는 시대였다.
우리는 ‘해방둥이’로 불린 축복의 세대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광복조국에 태어났으니 어른들 보기에 얼마나 복 받은 세대겠는가. 그렇지만 우리의 유소년 시대는 그 반대였다. 6·25 전쟁의 격류 속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전쟁 중에 입학한 학교생활의 하나부터 열까지가 없거나 모자랐다. 그러나 큰 불편을 몰랐다. 당연한 줄 알았다.
산골짜기여서 6·25 때는 피란을 가지 않았다. 광산 갱도 안에서 급박했던 며칠을 피하고, 인민군과 국군에게 번갈아 지배당한 몇 달이 지나간 1·4후퇴 때는 피란을 갔다. 모두 피란을 가라는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하였다. 태백준령 눈밭을 넘어 경상북도 봉화 땅에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다음 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국공 양측 군대의 본부로 쓰였던 교사는 불타고 없었다. 컴컴한 군용천막 안이 교실이었다.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책상도 없는 바닥에 앉아 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가마니 바닥에 책과 공책을 펴놓고 ‘가갸거겨’를 배웠다. 칠판을 보고 글씨를 쓰려면 궁둥이를 높이 쳐들고 어깨를 낮추어야 하였다. 궁둥이 때문에 칠판이 안 보인다고 툭하면 싸움이 났다. 교과서가 부족하여 두 사람이 한 권을 같이 보았다.
그러다가 한두 아이가 작은 책상을 들고 와서 교과서와 공책을 올려놓았다. 그게 부러워 너도나도 그런 책상을 들고 다니게 되었다. 줄지어 들고 와서 하학 때 들고 나가는 모습이 교문 앞 풍경으로 굳어졌다.
날씨가 풀려 야외수업을 할 때가 제일 즐거웠다. 특히 벚꽃 그늘에서 공부할 때가 좋았다. 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고학년이 되어 새로 지은 판잣집 교사에 들어갔을 때는 행복하였다. 소나무 판자의 향기가 그윽한 널따란 교실 벽을 트고 학예회를 할 때는 세상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몇 해가 지난 뒤 ‘사라호’로 불린 태풍에 학교 함석지붕이 날아가고, 벽면이 위태롭게 기울었을 때는 왜 우리 학교만 그런 신세가 되었는지 의아스러웠다.
그때는 너나없이 돈이 없었다. 돈을 본 일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선생님 따라 화전민 마을에 갔다가, 자두 한 되를 5환에 사먹은 일이 있다. 돈 구경을 못 해보았는지, 촌 아주머니는 선생님이 꺼내든 10환짜리와 5환짜리 돈 가운데 빨간색 5환짜리가 탐났던 모양이다. 10환짜리를 주려 하니 빨간 돈을 달라 하였다.
태풍 피해자 돕기 의연금 같은 돈 걷는 일에 현금을 낼 수 있는 아이는 드물었다. 새 학기가 되어 갈려 가는 선생님에게 주어야 한다고 전별금을 걷을 때도 그랬다. 돈을 낼 수 없는 아이들은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을 한 됫박씩 가져왔다. 팔아서 돈으로 주었던 모양이다.
6학년 수학여행 때도 쌀을 지고 갔다.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셨다는 정암사까지 80리 길을 쌀 두 되를 지고 종일 걸어서 갔다. 밤중에 도착하여 지고 간 쌀로 밥을 지어 먹고, 다음 날 수마노석으로 쌓았다는 돌탑을 보고, 또 종일 걸어서 돌아왔다. 객지에 공부하러 나간 학생들 하숙비도 쌀로 내던 시절이다.
식량의 결핍은 너무 슬퍼 되돌아보기 싫다. 그 시대 어느 고장 어느 마을이고 넉넉히 먹고 산 데가 없으니 특별한 이야기는 못 되리라. 그러나 미국에서 왔다는 우유가루 배급 이야기만은 빼놓을 수 없다. 쌀자루에 그걸 배급받는 날, 손으로 집어먹어 얼굴에 허연 가루를 묻히고 장난치던 일이 결핍의 시대 화제에서 빠질 수는 없다. 사료용이었다는 그 가루를 쪄서 과자처럼 만들어 먹은 날에는 어김없이 배탈이 났다. 그런 날 온종일 학교 변소가 붐비던 일은 비탄의 감정 없이는 돌아볼 수 없다.
사람 사는 세상에 꼭 있어야 할 것 가운데 책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을 파는 곳이 없어 낙망하였던 일은 나의 소년기에 큰 상처가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지 못하여 기가 죽어서 지낸 몇 달 동안, 나는 어린이 도벌꾼이었다. 중학교 참고서를 사다가 독학을 하리라는 장한 꿈으로 산에 올라 소나무를 베어 젖혔다. 그걸로 장작을 만들어 장에 지고 가면 “어린 것이 진학을 하지 못하고 나무꾼이 되었구나!” 하고 측은해 하며 사주었다.
그렇게 참고서 값은 마련되었으나 책을 살 길이 없었다. 빨간 딱지 이야기책이나 취급하는 잡화점에 부탁하여 ‘간추린 영어’ ‘간추린 수학’ 같은 참고서를 주문하여 책을 손에 넣고 나니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알파벳을 배워 본 일이 없는 영어 까막눈에게 영문법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수학도 그랬다. 1학년 2학기에 편입한 첫 수학시간부터 나는 그 과목과 멀어져야만 하였다. 그때 선생님들은 왜 그렇게도 질문을 싫어하셨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집안에도 이웃에도, 그 목마름을 풀어줄 사람이 없어 나의 영어와 수학은 점점 ‘불구’가 되어 갔다.
읽을거리에도 목말랐다. 교과서 말고는 책도, 신문도, 잡지도 없었다. 유일하게 책을 가진 동네 형 집에서 찾아낸 책들은 소용에 닿지 않았다. 서울에서 신문을 배달하며 야간대학에 다니던 그의 책꽂이에서 어느 날 눈에 번쩍 뜨이는 책을 발견하였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였다. 그 전 해였던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빌려다 읽어 보았으나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우리말로 된 책이었지만 그렇게 어려웠던 까닭을 이제는 알만하다. 노벨상 대목을 노려 급하게 이중삼중 번역판으로 내놓았을 책의 내용이 오죽하였으랴! 그나마도 얇은 축약판으로 나온 책이니 물어볼 나위도 없는 일 아닌가.
책에 대한 허기를 채우려고 나는 서울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도서반에 들어갔다. 방과 후 교내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원하는 책을 찾아주고 반납 받은 책을 정리하는 서비스의 대가로 도서반원에게는 관외대출 특전이 주어졌다. 그 혜택 덕분에 책과 가까이 하게 된 것이 내 인생행로의 나침반이 되었다.
서울생활에서는 겨우 책에 대한 갈증을 풀었을 뿐, 다른 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내 주머니는 텅 비어, 갖고픈 게 있어도 가질 수가 없었다. 물건은 많은데 돈이 없어 욕망을 채울 수 없는 고통이 더 크다는 걸 그때 알았다.
고등학교 3년간 통학로였던 서울역 염천교 길은 오사리 잡탕. 백화점이었다. 갖가지 먹을 것을 파는 노점상에서부터 입을 것, 신을 것, 지닐 것, 야바위판 등등 없는 게 없었다. 어떤 루트로 흘러나온 것인지, 시장골목보다 값싸고 멋진 물건으로 넘쳐났다. 그러나 한 달 치 전차회수권 60장이 유일한 유가증권이었던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내가 제일 갖고 싶었던 것은 멋진 학생 단화였다. 다른 아이들은 다 가진 그것을 나는 못 가졌다. 입학 때 내게 떨어진 것은 3년 넘게 신을 수 있다는 군화였다. 무게를 줄이려고 목을 잘라낸 그 신발을 꼬빡 3년을 신었다. 졸업 무렵에는 발등 부위에 두 군데씩 구멍이 뚫려 우리 반 아이들이 “박물관으로 가져가자”고 한 유명한 신발이다.
유소년 시절과 학생시절 나를 괴롭힌 유형무형의 결핍은 대학에 가서도 풀리지 않았다. 머리가 굵어질수록 욕망은 커지는데 여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가슴속에는 늘 욕구불만이 자꾸 쌓여갔다. 내 욕구를 눌러 꼼짝 못 하게 할, 쓰고 또 써도 넘쳐날 풍요를 찾아 헤맨 4년이었다.
그 허기는 직장생활을 시작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일하면 채워질 날이 있을 것 같았다. 밤을 낮처럼 지새우는 끝없는 일구더기를 벗어나, 세상의 주역이 될 나이가 되면 달라지지 않을까. 이런 기대에 속아 허겁지겁 달려왔다. 퇴직을 하고 인생의 종점이 보이는 곳에 당도하여서도 달라진 건 없다.
그래서 불행한가? 난 요즈음 이런 자문을 할 때가 있다.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누구도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영원히 욕구를 채울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는가.
그리고, 가득 채워본들 무엇 하리! 저 세상 갈 때 무얼 가져갈 수 있겠는가. 유형무형의 결핍 속에서 모자라고 빈 데를 채워보려고 허덕이는 과정 자체가 인생이라는 것을, 불유구(不踰矩)의 언덕에 올라서야 알았다. 아 아, 이 미욱함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