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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유튜버 스쿨’ 이제는 우리가 유튜브 스타!
- LG유플러스는 서울시50플러스재단과 전국 50+세대를 대상으로 차세대 유튜브 스타로서 성장 기회를 제공하는 ‘50+유튜버 스쿨’ 참가자를 모집한다. 50+유튜버 스쿨은 지난 3월 LG유플러스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50+세대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하는 사회공헌활동 협력 추진 업무 협약 이후 선보이는 첫 프로젝트다. 50대 이상 유튜브 이용자 비율이 증가하며 전 연령대가 애용하는 서비스로 자리 잡았고, ‘박막례 할머니’ 등 시니어 유튜브 크리에이터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LG유플러스는 ‘제2의 인생’으로 유튜버를 꿈꾸는 중장년층이 늘어난 점에 착안, 이와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유튜브를 처음 접하거나 평소 콘텐츠 크리에이터 활동에 관심 있는 50+세대라면 누구나 지원 가능하다. 1인 또는 최대 3인까지 팀을 구성할 수 있다. 모집기간은 4월 22일부터 5월 19일까지이며, 교육비는 무료다. 참가 희망자는 서울시50플러스재단 웹사이트 이벤트 페이지에서 신청서를 내려 받아 작성한 후 운영사무국 이메일로 송부하거나, 수기 작성 후 우편(서울시 서초구 바우뫼로 205 구남빌딩 2층)으로 보내면 된다. 신청서 접수 후 서류심사와 면접을 거쳐 최종 10팀을 선발한다. 최종 선발된 참가자는 6월부터 8월까지 3개월간의 교육과정에 참여한다. 콘텐츠 제작을 위한 영상 편집, 영상 효과 등 기본 교육을 비롯해 유튜브 인기 채널 편집 PD 특강과 유명 유튜버의 1:1 멘토링을 통해 운영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다. 참가자들이 제작한 콘텐츠는 유튜브 및 SNS, U+tv 브라보라이프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배포된다. LG유플러스 스마트홈 마케팅 담당 정혜윤 상무는 “창의적인 콘텐츠로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는 1인 미디어 시대에 유튜브 스타로 ‘인생 이모작’을 꿈꾸는 50+세대를 위해 실력 있는 강사와 저명한 멘토 등의 아낌없는 지원 아래 ‘50+유튜브 스쿨’을 시작하게 됐다”면서 “양질의 콘텐츠 제작에 열정을 가진 전국 50+세대의 많은 지원을 바란다”고 말했다.
- 2019-04-24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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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인한 봄날의 편지
-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신아연 소설가가 전 남편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고즈넉한 봄날 5월의 주말 아침, 처음으로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과 헤어진 지 어느 덧 7년째, 언제나처럼 나는 혼자 눈을 뜨고, 혼자 아침을 먹고, 혼자의 하루를 시작합니다. 내가 없는 당신의 하루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당신은 밥보다 빵을 좋아하니 오늘 아침도 빵을 먹었겠군요. 그러고는 산책을 나가고 오후에는 책을 읽고 간간이 글도 쓰면서 나처럼 단조롭고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요? 호주는 가을로 접어들고 있겠군요. 이 무렵의 기온은 두 나라가 비슷하지요. 하지만 한국은 여름으로, 호주는 겨울을 향해 서로를 등지며 가고 있지요. 북반구와 남반구는 계절이 반대이니까요. 한때는 생을 함께 꾸려왔지만 이제는 각자의 길을 가는 당신과 나처럼 말이죠. 당신, 환상지 증후군이란 말 들어봤어요? 손이나 발이 절단된 후에도 그 부위의 감각이 여전히 느껴지는 증상, 가령 손목 아래가 잘려 나간 사람이라면 손 전체나 손가락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처럼 감각되는, 그래서 ‘유령사지’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증상 말이에요. 그걸 다른 말로는 환상지 증후군(phantom limb syndrome)이라고 한다네요.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한동안 나는 그 증상에 시달렸어요. 어떤 상황에 처하거나 무슨 일이 닥쳤을 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우리 이렇게 할까?” 하며 마치 당신이 옆에 있기라도 하듯이 자동으로 고개를 돌려 말하곤 했죠. 늘 옆에서 걷던 당신의 기척이 느껴져 몸을 쓸어내리던 적도 있었고요. 당신과 내가 살았던 보라매공원 옆, 방 두 칸짜리 신혼집 부근(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섰지만)도 서성거려보고, 아이들을 낳았던 난곡 입구 박산부인과 앞도 일 없이 지나가봤습니다. 무엇보다 꼬박꼬박 닥치는 주말이면 서러움이 더해서 하릴없이 거리를 헤매곤 했는데, 이것도 모두 환상지 증후군 탓이었지 싶어요. 그랬던 것이 이제는 주말이라는 개념조차 흐려져 삶은 온통 무덤덤, 무감각의 잿빛입니다. 온 나라를 뒤덮은 뿌연 미세먼지처럼. “당신은 돈만 있으면 될지 몰라도 나는 돈 빼고 다 잃었다”던 당신의 고함이 아직도 귓바퀴를 울립니다. 21년간 당신과 함께 살았던 호주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온 후, 당장 내 입 하나를 먹일 수단이 없어 밥벌이에 전전긍긍하며 제발 돈 좀 보내 달라고 하자 전화로 당신이 내게 내지른 소리였지요. 아마도 당신은 이혼을 전제로 한 법적 별거기간 1년 동안 생활비를 주지 않으면 내가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게지요. 그때 내 수입은 신문 기고로 받는 월 30만 원이 전부였던 터라 라면 하나로 하루를 버틴 적도 있지만, 굶어 죽으면 죽었지, 먹고살 길이 없어 다시 당신에게 돌아가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고 마음을 다지고 다졌지요. 그 정도로 나의 이혼 결심은 확고했고, 그럴수록 당신의 분노와 원망은 커졌고 급기야 절망과 체념에 이르러 이혼에 합의할 수밖에 없었지요. 우리는 한때 서로 살을 ‘베어 먹일’ 듯 사랑했지만, 이혼을 앞두고는 서로의 살을 ‘베어 먹을’ 듯 으르렁거렸지요.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 모든 일들이 한바탕 꿈인 것만 같아요. 독 서린 감정의 날카롭던 칼날들도 시나브로 무뎌져 품속 어딘가의 칼집 속으로 슬며시 자취를 감추었지요. 그런데도 나는 이따금 당신을 꿈에서 만납니다. 꿈에서 당신은 대부분 슬픈 표정이지만 어떤 땐 무서운 얼굴을 하고 나를 다시 호주로 데려가려 하지요. 악몽이라도 꾼 듯 소스라치게 놀라 깨고는 꿈이라며 안도합니다. 당신에 대한 연민과 염려의 마음과는 별개로 당신의 폭력을 지금껏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커녕 세월이 흐를수록 25년 결혼생활 내내 당신이 내게 가한 폭언과 폭력에 대한 기억은 더욱 또렷하고 선명해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형식적으로라도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고, 자신의 분노조절장애와 폭력 성향을 고쳐보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지요. 아니, 그 심각성을 인정조차 하지 않았지요. 폭력을 견디다 못해 아내가 집을 나가겠다는데도, 가정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데도 남편이라는 그 알량한 자존심이 더 중했던가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이혼 과정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둘째가 우리의 이혼 수속을 맡게 된 거였어요. 변호사가 되자마자 한 일이 제 손으로 제 부모를 법적 이혼시킨 거였으니…. 그 애가 하필 가정법원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이 우연이 아니었기를 바라며 위로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이래저래 미숙하고 부끄러운 부모입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돌아가신 우리의 어머니들, 그리고 뿔뿔이 흩어져 사는 우리 두 아이들, 완전히 남남이 되어버린 나와 당신에게 가정의 달 5월은 황폐하고 무참합니다. 당신과 나, 그리고 작은 아이까지 세 식구의 생일이 들었던 지난 4월도 잔인했지만, 우리에겐 5월도 여전히 잔인한 달입니다. 신아연 소설가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21년간 호주에서 지내다 2013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인문예술문화공간 블루더스트를 운영하며 소설을 쓰고 있다. 생명소설 ‘강치의 바다’, 심리치유소설 ‘사임당의 비밀편지’,인문에세이 ‘내 안에 개있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 2019-04-2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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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에게 아지트란?
- 세상 모든 사람들이 독자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로서’라는 역할적 개념을 지니고 산다. 부모, 자식, 사회가 부여한 직위 등 다양한 얼굴을 하고 살아가니 도무지 내가 누군지 알 수 없다. 그럴 때 온전한 내 모습으로 돌아가 찾아드는 곳이 ‘아지트’가 아닐까. 그래서 물어봤다. 2019년 봄날, 인생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아지트는 어떤 모습의 어디인가? 진행 본지 편집부 도움말 원영희 한국성서대학교 사회복지과 교수, 김욱 경기대학교 사회복지과 교수 ✽본 설문조사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자체 조사이며, 104명의 50세 이상 시니어를 대상으로 진행했습니다. 시니어의 아지트 방문 목적으로 ‘배움’이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이에 대해 원영희 한국성서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평균수명의 증가로 이제는 ‘노년기’가 인생을 정리하는 시대가 아닌, 제2의 청춘 시기로 탈바꿈되었다”면서 “최근 평생학습, 인생 2모작, 노후 설계 등 다방면에서 학습에 대한 필요성을 인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져 학습 욕구도 높아진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시니어가 즐겨 찾는 아지트 유형 항목에서는 남녀의 선호도가 다르게 나왔다. 전문가는 이에 대해 관계성을 바라보는 남녀 간의 차이에 따른 결과라고 해석했다. 원 교수는 “상대적으로 관계를 중요시하는 여성 시니어의 경우 집단 및 커뮤니티를 통해 다양한 관계망을 확장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남성 시니어의 경우 기존 집단과의 교류 외에는 개별 활동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김욱 경기대학교 사회복지과 교수는 “맛집 및 카페는 여성에게 비교적 친숙한 공간이기 때문에 다수의 여성 시니어가 선호한다”고 덧붙였다. 혼자보다 여럿이 방문하기를 선호한 여성의 설문 결과에 대해 김 교수는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성은 나이 들수록 외향적으로, 남성은 내향적으로 변한다”고 설명하면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는 게 비교적 익숙한 여성들은 혼자보다 여럿이 어울리기를 선호한다”고 답변했다. 반면 원 교수는 남성의 설문 결과에 대해 “직장 위주의 생활 및 가부장적 문화의 영향 등으로 여성보다 사회성이 떨어지거나 관계성이 낮아 타인과의 소통에 서툴다 보니 누군가와 시간을 맞춰 함께 활동하는 것에 대한 심리적, 상황적, 시간적 제약이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찾아간 아지트가 ‘젊은 세대’가 많이 가는 장소일 경우 개의치 않고 이용한다는 답변이 70%이상을 차지했다. 이에 대해 원 교수는 “요즘 시니어는 평생학습, 인생설계 등 다양한 방면에서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려는 성향이 높다”면서 “이전 노인 세대와 달리 젊은 세대와 일방이 아닌 양방향의 소통을 위해 노력해 세대 간의 벽을 크게 느끼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동네 아지트는? 아지트가 없다고 응답한 14명은 그 원인으로 ‘장소에 대한 정보 부족’을 꼽았다. ‘네이버 우리동네’에서 동네별 소식(동네새공간, 동네마켓, 동네행사축제, 동네강좌, 동네모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설문조사 응답자가 추천한 아지트 •별헤는잔(칵테일 바) •필름포럼(예술영화관) •풍월당(클래식 카페) •느티나무쉼터(55세 이상 전용 문화 여가 복합시설) •카페꼼마(복합문화공간)
- 2019-04-24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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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마이 라이프 제4기 동년기자단 발대식
- ‘동년(同年)기자단’이란? 시니어 매거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만 50세 이상 시니어 기자단이다. 주요 활동으로 온·오프라인 기사 기획, 취재 및 작성과 함께 다양한 콘텐츠도 제작한다. 더불어 SNS 활동 등을 통해 전반적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 서포터즈 역할을 수행한다. 4월 10일, 이투데이 본사 5층 강당에서 제4기 동년기자단 발대식이 열렸다. 아침부터 계속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였지만 4기로 선발된 24명의 동년기자 중 21명이 참석했다. 이투데이 미디어 김상철 대표, '브라보 마이 라이프' 김영순 편집장, 김형석 동년기자단 편집주간 등이 함께 참석한 가운데 김상철 대표의 축사로 발대식을 시작했다. 김 대표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는 콘텐츠로 매우 의미 있는 매체"라 말하며 "동년기자들이 열심히 활동해주면 나날이 발전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덧붙여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고 멋진 활동을 해주시길 바라며, 동년기자단 운영에 건의사항이 있으면 편하게 말해 달라"며 응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축사에 이어 동년기자로서 지켜야 할 의무사항들이 적힌 기자윤리강령을 낭독했다. 동년기자들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윤리강령을 꼼꼼히 읽고 서명했다. 이어서 김상철 대표가 4기 동년기자단에게 위촉장과 명함을 수여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으로 김형석 편집주간이 4기 동년기자 모집 및 선발 진행 과정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했다. 4기 동년기자는 71명의 지원자 중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선발됐다. 올해는 무엇보다 소속감, 참여도,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인원을 정예화했다. 언론사에서 40년간 종사해온 김형석 주간은 경력을 살려 기획, 취재, 기사 작성 등 동년기자단의 전반적인 활동을 전담할 예정이다. 이어서 김영순 편집장이 동년기자 운영 방안에 관해 설명한 뒤 단체 기념사진 촬영을 끝으로 발대식은 마무리되었다. 장내 정리 후 동년기자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자기소개를 하며 자유롭게 대화를 나눴다. 기자, IT 업계, 교사, 사진·여행작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해온 경력들이 주목받았다. 연금제도 전문가로 활동하는 이재섭 동년기자는 "동년기자단 활동을 통해 기자의 자세를 배우겠다"며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 있는 분들이 모였으니 서로 협력하는 시니어 공론의 장이 만들어졌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동년기자 1~3기를 거쳐 4기로도 활동하게 된 박혜경 동년기자는 "그동안 기사 위주로 글을 써왔는데, 최근 동영상 편집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내레이션에도 흥미를 느꼈다"며 "이번 4기 동년기자 활동 분야가 다양하게 확대돼 기회가 된다면 성우 활동에 도전해 활약하고 싶다"고 말했다. 특히 4기 동년기자들은 유튜브 영상 제작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중에서도 능력이 돋보인 김주만 동년기자는 이날 영상 소팀장으로 임명됐다. 김영순 편집장은 "개별 취재뿐만 아니라 프로젝트 팀을 꾸려 시니어의 시각에서 '브라보 마이 라이프'만이 만들 수 있는 킬링 콘텐츠를 만들어보자"며 동년기자단의 사기를 북돋웠다. 4기 동년기자단은 2020년 3월까지 활동하며, 앞으로의 활약상은 '브라보 마이 라이프' 지면, 홈페이지, 공식 유튜브 계정 '브라보 잼잼 TV'에서 만나볼 수 있다.
- 2019-04-18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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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 챙기기
- 언론기관이나 글을 쓰는 기자는 독자의 의견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독자가 관심을 가져주면 더없이 고맙다. 얼마 전 나는 그러한 독자와 만났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2018년 12월호)에 실린 동영상과 관련한 나의 기고문을 읽고, 동영상을 만들고 싶다며 편집국에 전화해 내 연락처를 물었다고 했다. 편집국으로부터 그분의 연락처를 넘겨받고 바로 전화를 했다. 그리고 지난 2월 27일 오후 6시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동영상 촬영 방법 등을 알려주자 정말 고마워했다. 나 역시 독자와의 만남을 통해 재능을 기부했기에 기쁨이 배로 늘어났다. 알고 보니 독자는 나와 나이도 같았다. 정년 퇴임한 후 건물 관리 일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매일 건물을 순회하면서 건물 내에 입주해 있는 은행 창구에 비치된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보게 되었고 내용이 좋아 꼬박꼬박 읽는다고 했다. 내가 쓴 글은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던 동영상을 다룬 글이어서 더 자세히 읽었는데 더 알고 싶은 게 있어 연락까지 하게 됐다고 한다. 열심히 잡지를 읽자 지금은 은행 측에서 한 달이 지나면 과월호를 그분에게 드린다고 했다. 어떠한 경로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읽게 되었든, 애독자임에 틀림이 없다. 독자의 중요함을 알고 있는 나는 돈을 내고 배우는 사람보다 더 친절히 그리고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그게 곧 애독자를 위한 기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더 뜻 깊은 일이 일어났다. 애독자와의 만남이 편집국을 통해 이루어졌기에 그 후 상황이 궁금할까 싶어 연락을 했다. 그러자 담당 기자가 고맙다며 시간을 내주었고 우리 두 사람은 저녁식사 대접까지 받았다. 업무를 마친 후의 시간이긴 했지만 기사의 바쁜 일상으로는 쉽지 않은 배려였다. 언론기관의 직원으로서 본분을 지키고 실천하는 사람이라 여겨졌다. 나와 애독자 그리고 담당 기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 보면 아주 소소한 일일 수도 있지만 매체를 통해 상생하는 바람직한 동행이었다. 애독자를 향한 진심 어린 태도는 회사 발전의 밑거름이 될 수밖에 없다. 애독자는 그날 헤어지며 우리를 향해 한마디했다. “아, 이제부터는 정식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 구독자가 되겠습니다~” 나와 직원은 이구동성으로 “고맙습니다~” 하며 눈을 마주쳤다.
- 2019-03-27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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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료 호텔 숙식권의 주인공
- 작년 연말 ‘브라보 마이 라이프’ 행사에서 운 좋게 행운의 1등 경품에 당첨이 되었다. 경품은 고속터미널 근처 고급 호텔의 하루 숙식권이었다. 50만 원에 상당하는 경품이라고 했다. 경품 1등이라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무대에서 노래 한 곡 하라는 주문까지 받아 ‘빗속의 여인’을 불렀다. 2인용에 금년 3월 말일까지가 유효기간이다. 알아보니 오후 3시 이후에 체크인해서 3시간 동안 클럽에서 칵테일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1박 후 아침 식사까지 제공한다고 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일주일 전에 예약해야 하고 성수기인 크리스마스, 연말에는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저녁 식사도 포함돼 있지 않았다. 저녁 식사는 밖에서 하거나 호텔 레스토랑에서 별도 비용을 지불한 뒤 해야 한다. 클럽도 여러 명이 갈 경우 2명 초과 인원에 대해서는 추가 요금을 내야 하고 자리가 없으면 입장이 거부될 수도 있다고 했다. 항공사 마일리지를 막상 사용하려면 걸리는 문제들과 비슷했다. 이럴 경우 1순위로 생각할 수 있는 게 여자 친구와의 멋진 하룻밤이다. 단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하이네의 ‘노래들’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묻지요. 오늘은 내 사랑이 찾아오려나? 저녁이면 나는 쓰러져 한탄하지요. 오늘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고. 위의 시처럼 불행하게도 여자 친구와의 멋진 하룻밤 꿈은 물거품처럼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같이 술 마실 수 있는 상대야 구할 수 있지만, 배우자가 있는 사람들이 1박은 무리라서 결국 혼자 자는 것도 생각해봤다. 그러나 술 취해 잠들고 나면 아침. 한창때 해외 출장 다니던 시절, 고급 호텔을 이용했을 때 그랬다. 그처럼 실속 없고 허망한 일은 없다. 책 ‘혼자 놀기’에서 읽은 대목도 계속 맴돌았다. 저자가 얹혀살던 언니네 집에 언니의 남자 친구가 자고 간다 해서 친구네 집에 가서 하루 자고 올 요량으로 집을 나왔으나 가지 못하고 동네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제대로 힐링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읽을 때는 공감했으나 막상 내가 실행하려니 좋은 생각 같지 않았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아쉽지만, 남자끼리 가서 실컷 술이나 마시다가 오자는 사람도 있었다. 애인이 있는 후배가 저녁은 자기가 살 테니 숙박권을 넘기라는 제의도 있었으나 내키지 않아 거절했다. 경품권을 손에 쥐고 나서 꿈만 100일 정도 꿨다. 결국 마음대로 안 되고 시간만 가자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었다. 이래저래 유효기간이 다가왔고 일주일 전 예약을 감안하면 더 이상 내가 사용하기에는 무리였다. 아프리카 여행 일정이 원래대로 진행됐다면 남은 시간은 더 촉박했다. 그래서 그동안 바빠 얼굴도 자주 못 보던 딸에게 전화를 했다. 딸은 숙박권을 아들 부부에게 넘기자고 했다. 결혼기념일도 다가오는데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일단 만나야 하니 겸사겸사 식사나 같이하자고 했다. 결국 경품권을 넘겨주기 위해 아들딸과의 단출한 식사자리가 마련되었다. 딸 그리고 아들 부부가 네 살 된 딸과 같이 왔다. 그런데 아들이 마음만 받겠다며 딸에게 티켓을 넘겼다. 딸은 최근 인사이동으로 헤어진 단짝 여자 친구와 같이 1박을 하겠다고 했다. 아파트도 공동명의로 같이 산 막역한 사이다. 밤새 할 말도 많고 특별한 이벤트가 될 것 같다고 했다. 오늘의 식사비용도 그래서 반반 내기로 했단다. 아들딸을 만나 앞으로 이런 일이 없더라도 자주 만나자고 약속했다. 모두 경품권 덕분이다. 내게 좋은 상대가 생기면 현금을 내고서라도 호텔 1박 힐링을 염두에 두겠다는 생각도 이번에 얻은 소득이다. 화이트데이 다음 날 딸로부터 신나는 하룻밤이었다며 감사의 문자를 받았다.
- 2019-03-25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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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의전당, 시니어를 위한 연극 워크숍 개최
- “Bravo, Your Life! 당신의 인생을 한 편의 연극으로 만들어보세요! 연극이 처음이어도 상관없습니다. 열린 마음과 도전의식만 있으면 됩니다.” 평소에 연기, 연극에 관심이 있던 시니어라면 주목해보자. 예술의전당은 주한영국문화원과 공동으로 시니어를 위한 연극 워크숍 ‘드라마 같은 내 인생’을 3월 2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최한다. 이번 워크숍은 주한영국문화원이 추진 중인 ‘창의적 나이 듦(Creative Aging)’ 프로젝트의 하나로 영국 맨체스터의 로열 익스체인지 극장 시니어 극단의 책임자이자 연출가인 앤드류 베리(Andrew Barry)의 지도로 진행된다. '드라마 같은 내 인생'은 60세 이상의 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며, 참가자는 개인의 인생 여정을 돌아보고 경험을 활용하여 자신만의 이야기와 캐릭터를 창조하여 연극적 요소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참가비는 3만 원이며 20명 소수 인원으로 진행된다. 예술의전당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 2019-03-20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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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90세대의 아이콘 조정현, 송시현, 이범학
- 이토록 유쾌한 웃음과 유머가 자연스럽게, 핑퐁게임하듯 오간 자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가요계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아이돌’ 조정현, 송시현, 이범학이 이제 중년이 되어 우리들에게 돌아왔다. 그간 노래와 삶과 추억을 공유하며 살아온 이들은 의기투합해 세대를 아우르는 청춘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오십 중반이 됐어도 여전히 맑고 청년다운 기운이 넘실대던 그들과의 인터뷰. 조정현, 송시현, 이범학을 공통적으로 아우르는 표현으로 뭐가 어울릴까. 이들이 활동했던 장르는 정통 포크도 아니고 발라드도 아니고 댄스는 더욱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이 조금씩 섞여 있으면서도 도시적 세련미를 갖고 있다. 듣자마자 바로 와 닿는, 스며들기 좋은 노래들이라고나 할까. 한국 대중가요를 말할 때 컨템포러리로서 분명한 계보를 가진 이들이다.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가요계를 사로잡았던 세 명이 최근 뭉쳤다. 함께 콘서트를 열기 위해서다.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로 변진섭과 최성수를 제쳤던 조정현의 목소리로 인터뷰가 시작됐다. 세 가수들의 의기투합 “송시현이 나를 만나고 싶어 했고, 나는 돌파구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만났죠. 보통 음악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애가 굉장히 강한데, 대화를 해보니 진실성이 느껴졌어요. 그래, 같이 앨범을 만들어보자 했고 바로 그렇게 결정된 거예요.” 가수 이선희의 지원으로 1987년 ‘꿈결 같은 세상’을 발표하면서 히트 가수가 된 송시현과 조정현의 만남. 그리고 이 둘의 인연에는 1991년에 ‘이별 아닌 이별’을 발표하며 에너지를 태우던 이범학이 있었다. “정현이 형과는 고교 선후배 사이예요. 시현이 형은 한창 활동할 때 공연장에서 자주 본 사이였고요. 그러다 보니 굉장히 친해졌죠. 셋은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관계였어요.” 이범학은 최근 활동을 같이했던 사람들이 다시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래서 조정현에게 콘서트를 함께하자고 제안을 했다. 문제는 이범학의 계획으로는 세 명이 모여서 하고 싶었는데 나머지 한 명이 섭외가 안 되는 상태였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정현이 형과 시현이 형 두 분이 함께 앨범을 만든다고 해서, ‘잘됐다’ 싶었죠. 올해 이렇게 셋이 함께 앨범을 준비할 수 있어 너무 좋아요.”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된 송시현 그동안 많은 세월이 지났다. 청춘의 아이콘처럼 여겨졌던 이들도 이제 50대 중반의 나이가 됐다. 이범학은 20대에는 노래를 아무 생각 없이 불렀던 거 같다고 말했다. “때로는 올라가고 싶지 않은 무대에도 서고…. 노래에 절실함이 없었던 거 같아요. 지금은 세월이 담기게 됐죠. 그러면서도 정현이 형도 시현이 형도 저도 변하지 않은 게 좋아요.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된 우리들의 케미가, 그동안의 인생 등 많은 걸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송시현은 지금까지 직업란에 가수라고 써본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의외였다. “저는 어릴 때부터 지휘자, 작곡자가 꿈이었죠. 그러다 이선희 씨에게 곡을 줬는데 ‘이건 네가 부르니 더 좋다, 음반 한번 내볼래?’ 해서 본의 아니게 가수가 된 거예요.” 시집도 여러 권 낸 송시현의 노래들은 개인의 내밀한 감정을 잘 표현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노래를 부른다기보다는 세상과 사람들과 내 생각을 교감하기 위해서’ 그 시절 활동을 했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면서 달라진 건 노래의 힘에 대해서 좀 더 큰 확신을 갖게 됐다는 거예요.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사회와 나라와 구성원들을 좀 더 정의롭고 나은 방향으로 데려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음악을 해야겠다는 마음도 컸죠. 두 사람을 만났으니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노래 없이는 살 수 없었던 이범학 송시현의 고백으로 인터뷰는 그들의 꿈에 대해 묻는 쪽으로 흘러갔다. 이범학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수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2 때부터 밴드를 했고 끊임없이 노래를 만들었죠. 사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것도 가수가 되기 위해서였어요. 철학이 담긴 가사를 써보고 싶었거든요. 개론부터 낙제를 받긴 했지만.(웃음) 지난 20년 동안 중간에 뮤지컬도 했고요. 모든 목적은 ‘앨범을 내야겠다’였어요. 그러다 본의 아니게 ‘이대팔’을 하게 됐는데….” ‘이대팔’은 록커의 피가 흐르는 이범학이 트로트를 부르겠다며 내놓아 화제가 된 노래다. 2012년의 일이었다. 그는 그 노래에 대해 손사래를 쳤다. “당시 매니지먼트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죠. 하면서도 ‘이건 내 길이 도저히 아니다’ 싶었어요. 그래도 노래가 나름 알려져 공연장에 가면 사람들이 불러달라면서 ‘이대팔’ 앙코르를 외쳐요. 그래도 절대 안 불렀어요.(웃음)” 조정현의 꿈은 아이스하키 선수였다고 한다. 중1 때 가수로 바뀌었지만, 그의 아이스하키 선수로서의 경력이 국내 최초의 아이스하키 드라마 ‘아이싱’에 자리를 마련하게 했다. “‘마지막 승부’를 연출한 PD 장두익 형이 후속편을 준비하면서 저랑 얘기할 일이 있었어요. ‘정현아, 내가 드디어 아이스하키 드라마를 만들 것 같아’ 하더라고요. 아이스하키협회에서는 난리가 났죠. 무조건 도운다고. 저는 주연 장동건을 키우는 선배 역할을 맡게 됐죠. 대사가 많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중간에 작가와 좀 틀어진 일이 있었어요. 그래선지 갈수록 대사가 줄더라고.(웃음)” 조정현, 세월의 아픔을 품다 노래로 정상에 서보고 당대 최고의 PD가 만드는 드라마에서도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다. 아이돌 연예인으로서 성공적인 삶의 흐름이었던 셈이다. 그랬던 조정현이, 어느 날 우리들 앞에서 사라졌다. 가수생활을 하면서 겪은 안 좋은 일들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너무 상처를 받아서 더 이상 가수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함께 자리한 매니저는 “정현이가 개인적인 문제가 없었으면 립서비스가 아니고 정말 큰 가수가 됐을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대형 레코드사와 송사에 휘말렸던 것이다. “제작사와 소송이 있었습니다. 긴 싸움이다 보니 다른 제작사와 스튜디오에서 못 받아주는 상태가 됐어요. 음악을 포기하고 미국을 갔죠. 그러다 다시 돌아와 2집 앨범 ‘비애’를 냈는데, 성공했어요. 문제는 그 과정에서 대학교 친구와 초등학교 친구 둘을 잃어버려야 했죠. 이 일은 나랑 안 맞는가보다 싶었죠. 그래서 3집은 녹음하고도 안 냈어요.” 속사정을 알고 있는 이범학이 “그 아픔까지 사랑해야죠”라며 조정현의 대표곡으로 농담 반 진담 반 위로를 건넸다. 그러나 조정현은 허공을 보며 “힘들어” 하며 웃었다. 말을 아끼며 헛헛한 웃음을 짓는 표정에서 그가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울림과 여운이 있는 3인 콘서트 가수로서, 작곡가로서 대중들과 떨어져 있는 동안 송시현은 그야말로 뮤지컬에 ‘미쳐’ 살았다. 한국적인 뮤지컬 작품을 만들고 싶어 철저하게 기획단계에서부터 한국적인 뮤지컬이 돼야 한다며 그의 천재성을 드러내며 심혈을 기울였다. “원래는 음악만 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내 음악을 지키려면 연출을 해야 했던 찢어질 듯한 사연들이 있었어요. 저는 평생 새로운 시도만 해서 가족들의 걱정이 많았어요. 작곡하는 사람이 뮤지컬 연출을 한다는 게 얼마나 큰 모험이에요? 그래도 대학원 가서 연출 공부하고 지금까지 뮤지컬 70편을 만들었죠.” 작곡자로서 송시현의 가장 유명한 노래는 이선희의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일 것이다. 실제 그의 꿈속에서 나온 스토리와 가사를 그대로 옮겨 적어 완성된 곡이란다. 천재적이라는 말이 맞다. 저작권협회에 등록되어 있는 그의 노래는 무려 4000여 곡이나 된다. 70여 편의 뮤지컬 연출 경력과 그가 만든 수천 곡의 노래를 보면 그의 삶이 음악으로 꽉 차 있음이 느껴진다. 이선희의 히트곡 중 상당수가 그의 작품. 나 항상 그대를, 겨울애상, 사랑이 지는 이 자리, 한바탕 웃음으로, 그리운 나라 등등 자신만의 색을 담은 곡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선희 씨가 활동을 왕성하게 하면 저작권료가 많이 들어오고 뜸하면 안 들어오고.(웃음) 저를 음악인으로 살게 한 은인이시죠. 그때도 여러 가수에게 곡을 주는 작곡자들이 있었는데, 저는 노래가 자신의 음악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니 한 시기에는 한 가수에게만 곡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선희 씨가 함께 작업하면서 제 곡을 너무 아껴주셔서 행복했죠.” “고 대목에 첨언을 하자면” 하고 매니저가 대화 속에 끼어들었다. 이제는 뭔가 약방의 감초 같은 느낌이다. “작품을 남발하지 않는 것은 아티스트가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좋은 거라고 봐요. 작품을 남발하다 보면 진이 빠지거든요. 에너지 관리가 필요해요. 시현이는 천재적인 작곡가예요. 그런데 그만 뮤지컬을 해서….” 매니저 머릿속은 온통 ‘기승전뮤지컬’이어서 다들 웃음보가 터졌다. 정말 서로를 잘 알아봐주는 사람들이 만난 듯한 느낌이 확 들었다. 이런 즐거운 우정이라면 앞으로의 삶도 행복하지 않을까. 모두 나이가 오십을 넘었고, 그동안 각자의 굴곡도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에게서는 삶에 찌든 모습이 안 보였다. “세 명 다 굉장히 맑아요. 다행이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맑음으로 그들이 준비하는 콘서트는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했다. “우리가 중년의 나이가 됐잖아요. 우리 다음 세대에 대한 헌사가 필요한 시기가 됐다고 봐요. 우리 2세들도 청년이 되어가는 중이니까요. 이번 공연은 그쪽으로 잡아보자 했죠. 사실 지금 청년 세대가 겪는 상대적 박탈감, 고통 등은 어느 세대이든 다 있었어요. 그러니 우리가 겪은 경험과 노하우를 알려주고, 자녀와 손잡고 온 옛 팬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했죠. 자녀와 부모 세대의 소통과 공감으로 이어지는 용기와 희망 그리고 응원을 이번 공연 콘셉트로 잡았어요.” 10대 후반에서 20대인 아이들에게 공연을 보여줬을 때 ‘진부하다’는 말을 들으면 안 된다는 게 그들의 다짐이었다. 50대 중견가수들이 보여줄 보편성과 트렌디함이 섞인 공연이라니 기대가 됐다. 어쩌면 그들의 노래가 가진 세련미가 그를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이런 시도는 후배들에게도 하나의 귀감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음악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범학은 인생 자체가 음악이었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여태까지 그것만 위해서 살았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냥 뮤직 이즈 라이프(Music is Life).” 송시현에게 음악은 다양한 향유였다. 그는 음악이 시간이기도 했고 숨 쉬는 것이기도 했고 추억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갈급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곡을 쓸 때면 그 시대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는데, 그렇게 그 시대와 함께 보낼 수 있었죠.” 조정현에게 음악은 시간을 버티게 해준 매개체가 아니었을까 하는 물음에 그는 순순히 동의했다. 그는 음악을 떠났다고 말했지만, 노래를 멈춘 적은 없었다. “요즘은 매일 연습해요. 연습할 때만큼은 저만의 시간에 빠져들어 너무 좋아요.” 서로를 알아보며 무르익는 3인 인터뷰를 마칠 시간이 되니 그들의 요즘 생활과 계획이 궁금했다. 영원한 의리 ‘형님’ 조정현이 먼저 얘기를 꺼냈다. “가게를 한참 하다 보니까 동업하자는 유혹을 아직도 받아요. 장사는 현실이니까 잘못되면 바로 헤어지기 때문에 심사숙고하는데…. 외국에는 어느 장소를 가도 음악을 들으면서 즐길 수 있는 곳이 있어요. 우리나라에는 왜 없을까요. 그게 안타까워요. 우리나라는 특이한 게, 음악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부르는 문화예요. 그냥 놀면서 즐길 수 있는 그런 뮤직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이범학은 일산에서 해물요리 전문점을 5년째 하고 있다. 요리를 좋아해서 시작했지만 난생처음 해보는 일이다. “1~2년은 매일 제가 연안부두와 노량진을 왔다 갔다 했죠. 가수로서가 아닌 다른 보람이 있죠. 그리고 그걸로 생활이 되니 가기 싫은 무대 요청이 들어와도 거절이 돼요. 요즘은 가게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요. 그래서 이제 슬슬 하고 싶은 걸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송시현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여전히 ‘뮤지컬’에 집중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지나친 관심을 받으며 살았는데, 창작자로서 편한 게 아니었어요. 어디를 갔을 때 피아노 쳐 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하면서 내내 불편해지고…. 이제는 굳이 내색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저를 잘 모릅니다. 그게 오히려 자유롭고 편해요.” 왕년에 모두 전성기를 누려봤기에 세 사람은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것에 일희일비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과거는 과거일 뿐 미화하는 것도 싫다고 했다. “과거만큼 영화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무대에 안 서는 것도 아니니까요. ‘노래를 이렇게 부르니 옛날보다 사람들이 더 좋아하네’ 같은 작은 걸 하나 깨닫는 것도 너무 행복해요.” 그들은 이제 나이 들었고 그간 굽이굽이 인생의 여러 고초도 겪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청년의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남아 있다. 세 청춘이 맑은 모습으로 새로운 미래를 얘기할 때, 그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겸손함 덕분일 것이다. 셋이라서 그 깊이와 울림은 더 커 보였다. 새순이 돋아날 기운과 따뜻한 햇빛이 함께할 그들의 두 번째 청춘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브라보, 유어 라이프!
- 2019-03-08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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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거간꾼' 이정모 관장, 유쾌하게 과학과 세상을 연결하다
- 소설을 좋아하던 문학 소년은 국가 발전을 위해 이 땅에 한 송이 꽃을 피우겠노라 다짐하며 연세대학교 생화학과(?)에 들어갔다. 머지않아 그는 알았다. 그 ‘화’가 ‘꽃’이 아니었음을. 낙담을 뒤로 하고 과감히 미지의 시공간으로 몸을 내던졌다. 실수라고 생각했던 순간의 선택은 평생을 함께해도 지루할 틈 없는 과업이 됐다. 인생 최악의 오작동 사건을 통해 진정 걸어가야 할 길을 찾아냈다는 서울시립과학관의 이정모(李庭模·56) 관장. 이 세상 모든 실패와 좌절, 오해로 꼬여 삶이 불편하다면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천진함과 유쾌함이 가져다준 놀라운 긍정 에너지 효과를 경험할 것이다. 이정모 관장만큼 꾸준하게 대중과 소통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관장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연령대를 가리지 않고 과학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쇼맨십에 언변도 좋아 매스컴에서 반기는 인물. 정통 과학 TV 프로그램이었던 ‘궁금한 일요일 장영실쇼’(KBS)는 물론이고, 이 시대 명사들만 초빙하는 ‘차이나는 클라스’(JTBC)와 ‘어쩌다 어른’(tvN) 등에 출연해 과학을 포기했던 시청자들까지 TV 앞에 끌어들였다. 눈높이에 맞춰 과학을 쉽게 알려주는 능력자 “글 쓰고 책도 출간하니 강연 요청이 들어오더라고요. 글로만 과학을 설명할 필요가 없구나 했죠. 의외로 강의료도 꽤 괜찮고요. 방송에 나가 보니 영향력이 더 크더군요. 책이 제일 깊은 얘기를 하고 강연은 약간 깊이가 낮아지고, 방송은 더 낮고 표피적이지만 영향력은 엄청나죠. 보는 사람도 많고요. 처음에는 방송 출연을 경원시했지만 세상을 바꾸려면 필요하겠다 싶었습니다.” 이 관장의 매력은 무엇보다 권위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서울을 대표하는 자연사박물관장에 이어 과학관 관장이라는데 낙천적이고 푸근한 인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얼굴 알려진 명사라지만 아이이건 어른이건 반갑게 인사하고 만나는 ‘털보 관장님’. 과학의 범주에 있는 모든 것은 물어보는 순간 인터넷 지식 검색 수준으로 친절히 설파한다. 그는 언제부터 아는 것이 있으면 설명하고 말해주고 이해시키며 살아온 것일까. 얘기를 들어보니 인생의 과정 속에서 그런 역할을 자연스럽게 맡게 된 것 같다. ‘과학자’가 아닌 ‘과학 거간꾼’의 길을 걷다 “우리 부모 세대는 교육과정을 끝까지 못 마친 경우가 많았잖아요. 저희 어머니도 그랬고요. 아들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니까 신기해서 매번 학교에서 뭘 공부했는지 물어보셨어요. 어머니가 다림질하고 있으면 옆에 누워 뒹굴거리면서 배운 것들을 얘기해드렸어요. 너무 좋아하셨죠. 그렇게 1년간을 했더니 어머니가 양복 한 벌을 사주시며 ‘너, 야학 선생 해!’라고 하셨어요.” 대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원 졸업할 때까지 서울 연동교회 산하기관이었던 연동청소년학교에서 야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관장이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과학과 수학은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야학 선생을 하면서 교직에도 관심이 생겼지만 마음을 접어야 했다. “당시 저희 학과의 경우 교직 이수가 가능했지만 상위에 있던 여학생들이 자리를 내주지 않아서 이룰 수 없었죠. 그런데 정작 교직 이수한 그 친구들 중에 선생님이 된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고요.(웃음) 가르치는 일은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못해요. 애정이 있으면 ‘내가 어떻게 보여줄까, 뭘 알려줄까’ 생각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애정을 가질 수 없어도 자꾸 소통하다 보면 그런 마음이 생겨요. 그동안 사람들 만나고, 강연하고, 책 쓰고 방송 출연하면서 많이 변했어요. 물론 제게 타고난 성향도 있지만요.(웃음)” 입담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예능과 인문학적 소양을 겸비한 과학인” 같다고 말하니 “아주 잘 봤다”고 말했다. “저는 실험실보다 도서관을 더 좋아했습니다. 한 개의 데이터를 만들기 위해 몇 년을 연구하려면 엉덩이가 무거워야 해요. 저는 남들이 만들어놓은 데이터를 이야기로 전달하는 재능이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 용어는 대중적으로 사용하기 전부터 제가 써온 말입니다. 과학은 전문가 영역이니 대중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줄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그게 바로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 우리말로 ‘과학 거간꾼’ 정도로 설명하면 되겠네요. 제 바람대로 과학을 알려주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실패는 당연한 것! 칭찬과 격려를 이 관장이 몸담고 있는 서울시립과학관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시설이다. 이곳 초대 관장으로 부임하면서 설계에서부터 세밀한 것들까지 펼치고 구현했다. 무엇보다 서울시립과학관의 벽면 어디에도 과학지식 등 설명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손으로 모래를 모으고 펼쳐 등고선의 위치 변화를 알아보고, 걸어보고, 뛰어보고, 펌프질에 자전거까지 타보면서 스스로 의미와 답을 찾도록 장치들을 마련해놓았다. 특별히 손주들 교육에 관심이 많을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를 위한 얘기를 들려 달라고 청했다. “이곳은 몸소 체험하고 경험하면서 질문을 만들어가는 곳입니다. 과학관 방문객들 중 절반 이상의 친구들은 보고만 가고 절반 안 되는 친구들은 마음속에 질문을 안고 나가죠. 과학관은 과학자의 삶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이 실험이 왜 안 되지?’ 하면서 실패를 양식으로 삼아야 하죠. 과학자들도 매번 실패해요. 어쩌다 한 번 성공하는 것이죠. 실패를 해봐야 회복탄력성이 생깁니다. 성공만 하다가 실패하는 아이들은 회복탄력성이 없어요. 실패 앞에서 대처 방법을 모르면 안절부절못하면서 거짓말을 하게 돼요. 아이들에게 실패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유쾌한 관장님 고액기부자 대열 합류 재밌고 그저 신나는 명강사 관장님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작년 말 통 큰 기부가 세상에 알려지고야 말았다. 발달장애 청년들을 위해 써달라며 푸르메재단에 1억 원 기부를 약정하고 고액기부자 클럽 ‘더미라클스’ 회원이 됐다. “포토월 앞에서 사진 찍자기에 응했는데 보도가 될 줄 몰랐습니다. 푸르메재단을 설립한 백경학 상임이사가 동네 가까이 살기도 하고 고등학교, 재수, 대학교 동창이에요. 전 재산 들여서 재단을 만들었는데 병원을 짓는 등 정말 돈이 많이 들어가더라고요. 기여를 좀 하고 싶었어요. 일단 책이 좀 많이 팔렸어요. 공무원은 공무원 월급으로 살면 되잖아요. 제가 무슨 대단한 일 한 거 아니에요. 저나 제 자식들은 너무나 멀쩡하잖아요. 발달장애아들의 부모는 잘못이 없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고요. 세금으로 해결이 되면 좋으련만 안 될 때는 조금씩만 모으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한 달에 3만 원 월정액으로 시작했죠.” 그러다 어느 날 문득 1000만 원이 내고 싶었단다. 그 뒤로도 돈이 생겨 500만 원을 또 기부했다. “처음에는 1억 원까지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1억 원을 낸 사람들의 클럽이 있다더군요. 그분들께 강연을 해드린 적이 있는데 다들 좋으셨습니다. 저도 그 클럽에 들어가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삽니다. 글도 열심히 쓰고, 특히 강연하러 갈 때 뿌듯해요. 얼마를 또 기부할 수 있겠구나 하고요!(웃음)” 1년 뒤면 관장 임기가 끝난다. 그는 어떤 자리이든 연연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까지 늘 다 잘됐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교육방송에서 제 이름 달고 과학 프로그램을 하고 싶습니다. 재작년에 여균동 영화감독 작품에 출연해 배우로도 데뷔했어요. 배우의 꿈도 마음에 있고 말이죠.(웃음) 관장직을 마무리하면 또 뭔가를 하게 되겠죠.” 은퇴를 막막함이 아닌 도전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에 새삼 용기가 난다. 앞으로 더 멋진 인생을 살아갈 이정모 관장의 미래에 박수를 보낸다.
- 2019-03-06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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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신 신고 훨훨 가신 故 김금화 만신을 회상하다
- 최근 매스컴에 노출되지 않던 인사, 특히 고령 유명인의 이름이 인터넷에 회자되면 ‘혹시 돌아가셨나?’ 생각한다. 몇 년 사이에 생긴 달갑지 않은 버릇이다. 지난 일요일 밤, 그렇게 김금화 만신의 부고를 접했다. 23일 새벽에 노환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이었다. 많은 매체가 실시간으로 그에 관한 기사를 쏟아냈지만 그저 됐다 싶었다. 88년 파란만장한 삶의 종지부를 찍었으니 고인은 참으로 편하겠다. 만신의 지인에 따르면 22일 점심식사 뒤 호흡 곤란으로 119 구급대에 실려 인근 병원 응급실로 후송됐다. 콩팥 기능은 이미 망가진 후였고 혈액 투석으로 고비를 넘기는 듯했으나 다음날 새벽에 운명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보유자인 김금화 만신.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큰 무당이라지만 신앙적 의미를 떠나 우리 무속을 문화예술의 경지로 이끈 예술가이기도 하다. 그의 굿판은 곧 무대였고, 세상과 소통하는 신명 나는 오페라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수차례 외국 공연을 하면서 한국의 미와 전통예술을 전파해온 '한류의 초석'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본의 아니게 김금화 만신과 마지막 인터뷰를 한 기자가 바로 나인 듯싶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2018년 2월호에 게재한 ‘만신 김금화와 소소한 일상을 나누다’란 제목의 기사가 최근 인터뷰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뜨는 것을 보면 말이다.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와의 인터뷰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연세가 많으시고 몸도 쇠약했다. 혹여 인터뷰를 안 하겠다고 하면 도리 없다고 생각하고 돌아설 참이었다.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김금화 만신의 무릎은 말을 안 들었고, 입 속 상황도 좋지 않았다. 특히 얘기하거나 먹을 때 고생이 심했다. 오전에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손님들을 만나 점을 쳤으니 힘들게 뻔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취재를 고사하면 물러나야지 싶었다. 다행히 인터뷰에 응했고 사진작가와 함께 자택으로 찾아가서 만났다. “너무 시간을 뺏지 말아달라”는 김금화 만신의 말로 시작한 인터뷰. 지금까지 많은 기자를 만나와서일까? 취재 왔다는 말에 늘 했던 옛 얘기를 꺼냈다. 일반적으로 아는 김금화 만신의 이야기. 무병을 앓고 외할머니에게 신을 받고 큰무당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인생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선생님 그런 거 말고요. 다른 얘기 해주세요. 요즘 사는 얘기요.” 막상 요즘 얘기하라고 하니까 말문이 막혔나 보다. 그렇게 첫 만남은 20여분만에 끝이났다. 두 번째에 만나 어릴 적 꿈에 대한 이야기와 소소한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신과 함께 하는 만신 말고 여자로서 질문이 이어졌다. 당시 인터뷰의 의도 자체가 ‘신 말고 김금화’였으니 나름 신선했던 인터뷰가 됐다. 그가 나온 잡지가 발간 됐을 때 또다시 찾아가 만났다. 달콤한 케이크도 사 들고 말이다. 같이 밥도 먹고, 떡도 나눠 먹었다. 김금화 만신을 3번 이상을 만났으니 복 받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입이 참 아플 텐데 기운이 어디서 나는지 많은 조언을 해준 기억이 난다. 김금화 만신의 근황을 접한 것은 돌아가시기 딱 한 달 전인 1월 23일. 회사 이메일로 누군가 간곡하게 김금화 만신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잊지 말고 연락을 해보라는 하늘의 뜻(?)인 것 같아 이메일을 받은 상황을 전할 겸 김금화 만신의 일을 돌보는 사무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무장은 “현재 선생님께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며, 병원 입원을 두 번씩이나 한 상황에 몸이 안 좋다”고 했다. 나라도 가서 만나겠다고 했으나 그럴 상황이 아니라고도 했다. 그때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조만간 슬픈 소식을 들을지도 모르겠구나.’ 부고를 접하고 침착할 수 있었던 건 그때 걸었던 전화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무장 말에 의하면 곱고 예쁜 모습만 남기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한다. 나 또한 눈물 보다는 미소가 지어진다. 류머티즘으로 다 굽은 손가락이 펴지고, 계단을 힘겹게 오르내리던 무릎도 곧게 펴진 김금화 만신을 상상하니 말이다. 부디 꽃신 신고 사뿐사뿐 세상 소풍가시길 바란다.
- 2019-02-27 1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