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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메라와 놀기
- 모두가 백수를 하지 않아도 수명이 많이 늘어난 것만은 사실이다. 100세 장수 시대에서 이제는 100세 건강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 시쳇말로 ‘9988234’ 형국이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 2, 3일 앓은 후 죽는다.’ 이러한 장수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일까?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아프면서 오래 사는 경우를 들 수 있고 돈 없이 오래 사는 경우를 꼽을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은 전자의 두 가지보다 할 일이 없이 오래 사는 경우를 첫 번째로 꼽기도 한다. 한 마디로 무료(無聊)한 나날을 보낼 때가 더없는 고통으로 여긴다. 생존을 위하여 돈을 버는 일에 매달리면서 여가를 보내는 방법 체득을 소홀히 해서다. 필자는 무료하지 않은 후반생을 위하여 취미활동으로 사진을 선택하였다. 뒤늦은 나이인 60살에 배우기 시작했다. 나이가 68살이 되었으니 사진 취미활동 기간도 8년째로 접어들었다. 사진은 이제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고 카메라를 몸에 지니고 있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고 불안한 마음이 한구석에 자리하기도 한다. 카메라는 친구가 됐다. 카메라만 손에 들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산책에 나서는 한여름의 아침 들녘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카메라가 손에 들렸다. 아침저녁의 온도 차가 커서인지 안개 구름이 산허리를 둘렀다. 사진 촬영에 좋은 시간대다. 주변의 산인 고봉산을 배경으로 삼각대를 세워 카메라를 장착하고 10초 타이머 설정(셔터를 누르면 10초 후에 자동으로 촬영된다)했다. 셔터를 누른 후 필자는 도로 추락 방지 턱 위에 올라 셔터가 떨어지는 순간에 맞춰 하늘을 향해 뛰어올랐다 낙하한다. 카메라로 돌아가 촬영된 화면을 되돌려 본다. 원하는 장면이 아니다. 다시 셔터를 누르고 달려와 뛰어내린다. 수차례 반복한다. 사진이 찍히는 순간에 적절한 모습으로 뛰어 내리기 만만하지 않다. 몸에 땀이 흥건히 밴다. 다시 찍힌 사진을 확인하여 보지만, 만족스럽지 못하다. 같은 작업을 이어간다. 조금씩 원하는 장면에 가까워진다. 열 번 이상을 뛰어내렸나 보다. 드디어 한 컷이 만들어졌다. 예의 사진이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한 장이다. 성취의 기쁨을 느낀다. 꿈을 향해 날고 싶은 마음을 사진 속에 담았다. 필자는 카메라와 이렇게 놀기도 한다. 혼자여도 외롭지 않은 이유다. 카메라가 친구 되어 여가가 무료하지 않다. 100세 장수시대를 걱정하지 않는다. 참 잘 선택한 취미다.
- 2017-08-01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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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노래 아닌, 대중을 위한 노래로 기억되길”
- ‘내 청춘아 어디로 갔니, 소리 없이 흘러가는 세월이건만, 그것이 인생이더라.’ 오승근(吳承根·66)의 새 앨범 수록곡 ‘청춘아 어디갔니’의 가사다. 노래 속 그는 청춘을 찾고 있지만, 현실 속 그는 “내 청춘은 바로 지금”이라 말한다. 노래하는 지금이 청춘이고, 노래를 불러야 건강해지고, 세상을 떠난 뒤에도 노래와 함께 남고 싶다는 천생 가수 오승근. 사진을 찍을 때 “주름은 지우지 마라”며 뭐든 자연스러운 게 좋다는 그의 미소에는 특유의 편안함이 배어 있었다. 아내(故 김자옥)가 떠난 뒤, 이제는 살림도 제법 하면서 싱글라이프를 톡톡히 즐기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금껏 나온 앨범 표지 중에 표정과 의상이 가장 밝아요. 밝기도 하고 젊기도 하죠. 한동안 ‘내 나이가 어때서’를 많이 불렀잖아요. 이후에 다른 곡들도 발표했는데 사람들에게 어필이 안 됐어요. 그 노래의 인상이 너무 강하다 보니까. 이번에는 ‘내 나이가 어때서’를 뛰어넘는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표지 촬영한 것 중에 중후한 멋의 사진들도 있었는데 사진작가나 기획사에서는 젊게 나가는 게 좋겠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얼굴에 포토샵도 하고(웃음). 나야 그런 거 안 하는 게 자연스럽고 좋긴 하죠. 타이틀곡으로 ‘맞다 맞다 니 말이 맞다’를 고른 이유가 있나요? 전체적인 흐름이 좋았어요. 리드미컬하고, 따라 부르기 쉽고. 나이 들고부터 곡 고르는 기준이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남이 어떻든 간에 나를 나타내려고 가수를 위한, 내가 좋아하는 노래만 했거든요. 요즘은 반대로 “이 노래는 내 노래가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노래”라고 하고 불러요. 내가 좋아하는 노래보다는 대중과 함께할 수 있는 노래를 부르려고요. 예전에 ‘투에이스’, ‘금과은’ 시절에 불렀던 노래는 듣기는 좋아도 따라 부르긴 어려웠어요. 그래도 여전히 찾는 팬들이 있어 자주 불러드리곤 하죠. ‘떠나는 님아’, ‘빗속을 둘이서’ 등 청춘 시절 노래를 부르면 어떤 감정이 드나요? 이전과 많이 다를 것 같은데요. 노래는 말이죠, 젊었을 때와 나이 들어서의 감정이 똑같아요. 오히려 노래를 부르면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죠. 다만, 나이가 들어서 까랑까랑하던 높은음이 안 나오는데, 그럼 키를 낮추면 되니까. 동년배는 지금 목소리를 더 좋아하기도 해요. 청춘이라는 것도 꼭 20대만을 뜻하는 건 아니에요. 40대가 된 사람이 30대를 그리워하는 것도 청춘이고, 60대가 50대 떠올리는 것도 다 청춘 아니겠어요? 노래는 그런 감정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거죠. 타이틀곡 ‘맞다 맞다 니 말이 맞다’에서 ‘사랑해서 미안합니다’라는 가사는 어쩐지 애잔하더라고요. 아내를 향한 감정이 담긴 것이 아닐까 궁금했어요. 그런 건 아닌데,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조심스럽게 부르긴 해요. 그만큼 사람들이 공감하는 가사이기 때문이죠. 사랑하는데 왜 미안해? 물어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미안할 수도 있거든요. 연인이나 부부, 자식 관계도 그렇고 모든 게 사랑한다는 이유로 서운하기도 하고, 상처도 주고 하니까요. 아내를 위한 추모곡 계획은 없나요? 안 하려고 해요. 추모는 그 사람을 계속 기억한다는 건데, 그러면 괴로움도 계속되는 거예요. 그 마음 아픈 게 얼마간은 있을 수 있지만 10년 20년 그렇게까지 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죠. 노래로 만들어놓으면 계속 남잖아요. 그건 남들에게 자꾸 ‘가지고 있어라’ 강요하는 거밖에 안 돼요. 그 사람도 좋은 곳에 갔을 거고, 우리 애들하고 나하고 기도하고 그러니까. 다들 그런 그리움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주면 좋겠어요. 아내의 부재가 마음이 쓰여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라는 말을 나중에 물어보고 싶었어요. “어떻게 지내세요?” 똑같아요. 조금 달라진 거는 일하고 집에 갔을 때 같이 있었는데 이젠 혼자 있다는 것. 그 차이일 뿐이죠. 한동안은 같이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잠시 여행 갔다고 말이죠. 전에 같이 있을 때도 몇 개월씩 여행을 다녀오곤 했으니까. 어디 갔구나, 곧 오겠지, 근데 어떻게 하지? 혼자 밥해야 하네? 그렇게 조금씩 실감했어요. 애절하게 ‘나 외로워’ 이건 아니고. 물론 그럴 때도 있지만 매일 그러지 않죠. 그러면 남은 사람이 힘들어져요. 살림 솜씨가 늘었겠어요. 요리도 잘하세요? 잘하죠. 나 설거지도 잘하고 반찬도 잘하고 청소도 잘해요. 처음에는 (장가간) 아들하고 같이 살려고 했어요. 근데 아이들도 나도 편하게 살려면 분가하는 게 좋겠더라고요. 아내랑 함께 살던 집에서는 내가 못 지낼 것 같은 거예요. 거실이며 부엌이며 그 동네 어귀에도 아내와의 추억이 남아 있는데…. 거기 사는 건 내가 너무 괴롭다. 아빠가 나갈게. 그러고는 아내랑(봉안당) 가까운 판교에서 혼자 살게 됐어요. 그야말로 싱글라이프네요. 일상에서의 즐거움은 뭔가요? 내가 참 감사한 게 주변 친구들을 보면 다 실업자들이에요. 직장인들은 정년퇴직하고, 사업가들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근데 나는 정년 없지, 새 노래도 만들 수 있지. 자기 관리만 잘하면 100세까지도 할 수 있는 거니까. 또 애들 엄마 하늘에 가면서 일찌감치 상속 정리를 했어요. 그러니 내가 벌어서 나만 쓰면 되고, 쓰고 남으면 좋은 데 봉사하고, 눈치 보지 않고 쓰고 싶은 데 쓰고 먹고 싶은 거 먹고 그러지. 그 자체가 즐거움이죠. 자기 관리 비법이 따로 있나요? 노래를 하면 젊어져요. 엊그제도 몸이 안 좋았거든요. 그러다 무대에서 섰는데 원래 부르기로 한 세 곡을 다하고 앙코르를 해서 총 다섯 곡을 불렀어요. 노래하면서 에너지를 채운 것 같아요. 노래가 약인 거죠. 지방 갈 때 아침엔 컨디션이 안 좋다가도 다녀오면 좋아져요. 매니저한테 나 오래 살길 바라면 일 많이 잡아줘야 한다고 해요(웃음). 약이 되는 피곤함이랄까? 일 외에 취미생활은요? 여행은 안 다니세요? 운동 삼아 골프도 치고, 여행도 가끔 가요. 사람을 골라서 만나지는 않지만, 여행 파트너는 마음이 맞아야 하거든요. 함께 다니던 가장 친한 친구가 작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50년 지기인 데다가 마음도 참 잘 맞았는데… 그러는 바람에 이제 누구랑 여행을 가야 하나 싶어요. 요즘은 혼자 여행 다니는 사람도 많잖아요. 혼자가 좋다고들 하는데, 그건 정말 혼자가 되어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나도 자다가 어떻게 될까 싶어 무섭고 외로워요. 여행은 좋은 사람과 함께 가는 게 최고죠. 어떻게 보면 지금이 얽매일 것 없어 여행 가기 좋은 때이기도 해요. 얽매이는 건 가정인데, 아이들도 다 커서 자유로워요. 근데 오히려 편하니까 나태해지더라고요. 이게 아니다 싶으면 스스로 채찍질도 하죠. 온전한 자유 안에서의 불안이 있잖아요. 고삐가 없는 것처럼. 자유로운 지금, ‘내 나이가 어때서’ 노래처럼 도전하고 싶은 일은 없나요? 나는 내 나이를 몰라요. 생각 안 해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고, 가고 싶은 데 있으면 가고. 친구들에게 그래요. 너희들 돈 쓸 날도 얼마 안 남았어! 좋은 것도 한때이지 쓸 수 있을 때 쓰고, 재미있게 즐겨야죠. 지금처럼 자유롭게 지냈으면 하는 게 바람이에요. 오히려 도전, 목표 이런 걸 정해놓으면 거기에 구애받으니…. 자연스러운 게 좋아요. ‘자연스러운 것’을 선호하는 편이네요. 원래 성격이 그랬나요? 아뇨. 예전에는 그렇게 했어도 구애를 받게 되죠. 옆에 사람(아내)이 있으니까. 신혼 때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지내왔는데, 살다 보니까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맞추는 게 좋더라고요. 아내가 좋아하는 쪽으로 계속 바뀌었죠. 근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잖아요. 요즘 나를 말하자면 자유분방 그 자체? 여전히 아내 얘기를 자꾸 하게 되는데, 솔직히 불편하지는 않나요? 할 수밖에 없죠 뭐. 크게 불편하지는 않아요. 근데 너무 길게 이야기하지는 말자 그래요. 그럼 또 생각나니까… 내가 힘들어져요. 그냥 이렇게 이야기하다가 물 흐르듯 지나가면서 하는 정도가 괜찮아요. 아내 김자옥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우리는 만나고 6개월 만에 결혼해서 서로를 다 알지는 못했어요. 살면서 느끼고, 알아갔죠. 다음 생에서도 그 사람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 다시 결혼하고 싶은 그런 여자예요. 근데 나뿐만 아니라 참 많은 사람이 사랑했잖아요. 아내가 떠날 때도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왔어요. 이 사람 참 잘 살았구나 생각했죠. 내가 죽을 때도 그럴까 싶어요. 대중에게 오승근은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나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내 노래가 흘러나왔을 때, 아 이 사람! 그렇게 노래와 가수가 함께 떠오르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내가 세상에 없더라도 노래와 함께 회자되고 남아 있다면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에요. 노래 자체가 나의 정체성이고, 나의 정체성이 노래로 표현될 수 있는, 그런 게 대중에게 공유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 2017-07-3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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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의 순수, 그 처음의 정갈함으로 담담하게
- 아직도 이 나이에 ‘부러운 것이 있다’면 모두들 웃겠지만 저는 저리게 부러운 것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내가 갖고 싶었는데 갖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도 부럽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딱히 물건이면 어떻게 해서든 나도 그것을 마련하여 아쉬움을 채우고는 부러움을 지울 수 있겠는데, 제가 지닌 부러움은 그렇게 할 수 없는 부러움입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이 사는 모습을 보면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또는 살았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그런 삶이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남모르게 소심해지고 휑하니 허전해지면서 그런 삶이, 그리고 그분이, 무척 부러워집니다. 언제부터인지 가늠이 되진 않지만 나이 들어 은퇴를 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친구들을 볼 때 그런 부러움이 일었습니다. 어찌 보면 은퇴 후의 귀향은 귀소본능이 충동하고 충족시켜주는 향수(鄕愁)의 현실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낳고 자란 고향을 떠날 때는 넓은 세상에서 높은 뜻을 이루겠다는 청운의 꿈을 꾸었지만 삶을 살 만큼 살고 나면 꿈의 이룸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전의 떠남이 상실로 내려앉으면서 그 잃음의 아쉬움이 거의 강박적으로 귀향을 다그칩니다. 비단 그런 아쉬움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더 떠돌고 싶지 않은 고요한 정착과 더 피곤하지 않을 안식에의 그리움이 그 귀향을 덧칠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침내 귀향을 감행하고, 거기서 새 삶을 펼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대체로 번거롭고 메마른 ‘도시’를 벗어나 전원적인 정일한 ‘시골’로 들어서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니 이러한 삶이 부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삶을 엄두도 못 내는 제 삶의 조건들이 한스럽기조차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귀향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고향이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공간’으로 축소되면서 그 지리적 개념은 ‘새로 나이 먹어가는 사람들’의 마음자리에서는 이전의 무게를 지니지 못합니다. 농경사회와 산업사회의 간극이라고 해도 좋을 이질성이 뚜렷이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시공이 어우러져 삶을 회귀하게 하던 ‘고향’은 이제 없다고 해야 할 만큼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전의 귀향과 그 틀이나 드러난 모습이 거의 비슷한 삶이 새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위에서 자연으로의 ‘되돌아감의 정서’라고 할 독특한 감성이 사람들의 삶을 새롭게 충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농은 ‘다른 생업의 선택’이므로 이 범주에 넣기가 꺼려집니다만 귀촌은 다릅니다. 그것은 삶의 양태 자체의 변화를 꿈꾸면서 실행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 ‘자연 속에서 산다’에 이르면 이는 이제까지의 삶을 폐기하겠다는 선언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자연인으로 산다’는 데 이르면 이건 아예 다시 태어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어서 그 결연한 마음을 밖에서는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삶이 한창 번지고 있습니다. 그런 삶을 온갖 매체들이 기립니다. 그러한 삶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삶이고, 그래서 당연히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주장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너무 나아간, 너무 단단하고, 너무 복잡한 인위(人爲)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가 게걸스러움에 사로잡혀 사람답지 못하게 사는 것, 의미와 보람과는 상관이 없는 허무한 삶을 살면서 서로 미워하고 속이고 죽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인위의 지극한 성취라고 할 ‘도시적 삶’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자연의 순수, 그 처음의 정갈함, 그것이 스스로 짓는 질서를 좇아 담담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의 ‘도시’를 떠나 ‘시골’로 돌아가 자연인으로 살아야 한다. 그럴 수 있는 판단과 용기, 그렇게 살 수 있는 지혜, 그것이 현대인의 도덕이다.” 저는 이러한 주장에 이견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삶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살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의 삶을 버리면 생존이 위태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직 부러울 뿐입니다. 게다가 지금 그렇게 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반드시 향수를 일컬으며 귀향을 서두는 그런 세대의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도시적인 삶’에서 일컬어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이 선택한 ‘성공 이후의 삶’의 모습으로 그려지기조차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시골 삶’이나 ‘산속의 삶’은 묘하게 저를 아프게 하면서 제 부러움을 더 상승시키고 있습니다. 체념을 수반하는 부러움을 조장한다고 말하면 될는지요. 물론 이와 정반대의 경우도 보입니다. 그러나 그 경우도 제 부러움을 지우지는 못합니다. 어쩌면 ‘도시’에서의 실패가 낳은 좌절의 출구로 선택된 ‘시골 산속의 삶’이었는데 뜻밖에 ‘성공’한 사례들은 내 망설임을 비웃기라도 하듯 저를 괴로운 부러움에 빠져들게 하니까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자연에 산다’는 표어가 하필 지금 여기 우리의 주제만은 아닙니다.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만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미 1854년에 그의 저서 을 통해 자연에로의 회귀를 당위적인 것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도연명의 는 소로보다 2000년 전에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글을 읽다 보면, 제 모자람 탓이겠습니다만, 지금 여기 우리의 ‘자연에의 회귀’가 지닌 정서가 조금 불안해질 때가 있습니다. 소박한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자연에서 산다는 것이 정말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을까 하는 무엄한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만약 자연에서 산다는 것이 ‘물질의 새로운 소유 양식’일 수도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위의 일상성에서는 짐작도 못할 위선의 극치는 아닐까 하는 무지한 항변을 해보고 싶기도 합니다. 이제는 인위를 버리고 자연을 택해야 하는 새로운 도덕을 주창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선언은 감동스럽습니다. 잃은 것, 잊은 것을 되생각하게 하면서 처음의 순수와 정갈한 고요 속에서 나를 되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나이를 먹어 향수에 실려 귀향을 서두는 것은 그러한 정서의 표출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그렇게 삶을 다듬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자연에서 산다’는 선언이 풍구질로 불꽃 일구듯 유행한다면 그것은 참 자연스럽지 않을 것 같아 두렵습니다. 새마을 사업으로 초가지붕이 슬레이트로 바꾸는 작업이 한창일 때, 저는 이엉을 얹는 작업을 한동안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시인이 그 작업을 탄식하면서 초가지붕의 소멸이 문명의 종말을 상징한다고 아파하는 시를 썼던 것을 읽은 일이 기억납니다. 그때 이후로 저는 아직 ‘시적 상상력의 현실성’에 대한 회의를 지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연에서의 삶을 살지 못하는 나를 정당화하는 비겁한 논리이겠습니다만 자연스러움을 좇아 자연을 선택한 삶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삶일 수 있는지, 비록 인위로 차곡차곡 쌓인 삶인데도 그 삶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삶을 잉태할 수도 있는지를 우리는 곰곰이 살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2017-07-3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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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가 산타야
- “산타가 어디 있냐? 넌 아직도 그걸 믿냐?” “….” 친구들과 거실에서 놀던 아이가 못내 진지한 얼굴로 산타의 진위를 묻는다. 순간 당황한 필자는 산타는 믿는 사람에게만 있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해 크리스마스를 앞둔 11월 중순쯤 딸아이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레고로 점 찍어놓고 열심히 ‘착한 어린이’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날마다 기도를 하고 공들여서 산타를 기다리던 와중이었는데 그런 사단이 난 것이다. 산타의 실체를 이미 파악하고 전략적으로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딸아이 친구들을 보면서 내심 ‘우리 아이만 바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들었다. 퇴근한 남편에게 필자의 생각을 말하니 화살처럼 달려가 2층 침대 위에서 자는 아이를 흔들어 깨우더니 “진주야! 아빠가 산타야! 산타는 아빠야! 알았지?” 했다. 안 그래도 딸바보인 남편은 한잔 걸친 취기에 힘입어 앞뒤 전후 상황 가리지 않고 곧바로 돌진해 쉽게 누설해서는 안 될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다. 미처 잠이 덜 깬 딸아이는 눈을 비비며 아빠를 쳐다보다가 훌쩍이더니 급기야는 목놓아 울었다. 그러고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이제는 누구도 믿지 않겠다며 통곡을 했다. 그로부터 몇 달은 ‘산’ 자만 나와도 눈물을 흘렸다. 딸에게는 경악과 배신을 동시에 경험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들으니 딸아이는 그날 이후부터 세상의 모든 것들에 물음표를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작은 일에서부터 크고 작은 뉴스, 역사적 사건, 진리조차도 의심하고 확인하는 버릇이 생긴 것 같단다. 나름 필터링이 생긴 것이리라. 충격을 받지 않도록 천천히 조심조심 알리고 싶었지만, 주책맞은 아버지 때문에 생긴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한동안 가족들에게 회자되었다. 때로는 진실이 아플 때가 있다.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불안감이 먼저 작동해서 일을 그르칠 때가 있다. 바로 딸아이와 같은 경우다. 그해 크리스마스는 어색하고 서먹했다. 그날 이후 아빠 산타는 슬그머니 퇴장하고 언니 산타가 등장했다. 어린 사촌 동생을 위해 딸아이가 ‘언니 산타’를 자처했다. 밤새 선물을 사고 파티를 준비하면서 누구나 산타를 기다린다는 것과 세상에는 ‘주고파 산타’와 ‘받고파 산타’가 있고, 동시에 1인 2역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만큼 아이는 자랐다. 그 후 언니 산타에서 조카 산타, 손녀 산타, 이제는 신부 산타로 성장했고, 그날의 해프닝은 이런 교훈을 남겼다 ‘남이 깨면 후라이, 내가 깨면 병아리!’ 딸아이는 머잖아 가질 아가를 위해 예비 부모로서의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다. 엄마 산타를 준비하는 딸아이를 위해 건강과 행운을!
- 2017-07-26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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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식이 만난 귀촌 사람들] 전남 구례 시골로 귀촌한 김창승·김태영씨 부부
- 허비되기 쉬운 건 청춘만은 아니다. 황혼의 나날도 허비되기 쉽다. 손에 쥔 게 많고 사교를 다채롭게 누리더라도, 남몰래 허망하고 외로운 게 도시생활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머리에 들어온 지식, 가슴에 채워진 지혜의 수효가 많아지지만,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은하계를 덧없이 떠도는 한 점 먼지이지 않던가.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한다. 어둠 속을 부유하는 먼지의 신세를 면하기 위해, 저마다 나름의 별이 되기 위해, 타성에 젖은 삶을 바꾸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스스로 자청한 귀촌이라는 점에서는 유쾌한 도발이거나 즐거운 실험이다. 정착에 성공한다면 주야간에 얻어 누릴 것이 많은, 자못 성대한 사업이 바로 귀촌이라는 논평도 널리 돌아다니는 게 사실이지 않던가. 서울에서 이름 난 회사의 간부로 근무했던 김창승(58)씨. 그는 오래도록 그저 평범하고 무난한 인생을 끌어왔더란다. 퇴근 뒤 주점에 들러 한잔 마시는 일이나, 휴일에 느긋하게 골프를 즐기는 정도를 여흥으로 알고 살았다. 뭐 하나에 빠지면 수면 밑바닥까지 함빡 빠져드는 버릇, 그게 특유의 개성이라면 개성이라지. 본인이 선택한 일을 숭상하는 사람임을 알 만하다. 그런데 아마도 김창승씨가 가장 애호하는 건 아내 김태영(57)씨라는 존재였던 모양이다. 아내는 귀촌의 깃발을 들고 앞장서 나섰으며, 그는 즉각 응했다는 게 아닌가. 그는 ‘충성!’을 속으로 외치며 대번에 아내의 뜻을 따랐던 것 같다. 이를 부부애의 한 절경이라 봐도 무리가 없을 터. 세상의 모든 아내들이 부러워할 정경이렷다. 동쪽으로 가자 하면 일쑤 당나귀처럼 어깃장을 부려 서쪽으로 냅다 뛰기도 하는 게 남편이라는 종족이니 말이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내가 원하는 귀촌을 결행하기 위해 자신의 내부에 들어 있는 생각과 가치관 따위를 새삼스럽게 신중히 점검한 김창승씨는, 귀촌이라는 종목이 사실상 자신에게도 어울리는 탁월한 선택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이후 매우 신속하게 일을 서둘렀다. 그는 곧장 회사에 사표를 냈다. 2014년 1월 엄동 철에 부부는 마침내 전남 구례군 토지면의 시골로 귀촌했다. “아내의 고향이 구례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인생 후반을 맞이하고 싶다는 게 아내의 소망이었어요. 이 사람은 초등학교 교사인데, 고향의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텃밭농사를 통해 순수한 먹거리를 거두어 먹고, 자연의 품안에서 평온한 생활을 하며 늙어가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던 거죠. 어릴 적의 추억이 서린 시골에 대한 향수가 소박하지만 절실한 꿈으로 부푼 것 같았어요. 가만히 생각해보자니 저에게도 신선한 전환일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일에 착수했습니다. 집안 어른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밀어붙였어요. 어느덧 귀촌 3년의 세월이 흘렀는데요. 아내는 물론 저 역시 크게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김창승씨 내외가 깃들어 사는 집은 오래된 기와집. 마당엔 갖가지 나무와 화초들이 자라고, 온갖 작물들이 자라는 텃밭도 솔숲처럼 싱그럽다. 낡고 빛바랜 태로 세월의 풍상을 웅변하는 고가(古家)가 자아내는 푸근한 정감. 길차게 자란 채 집을 빙 에두른 대나무들이 뿜는 청신한 기운. 남도의 전형적 농가의 구색이며, 수더분해서 다분히 이상적인 조경이며, 꾸민 바 없이 자연스럽게 잘 꾸며진 미학의 공간이다. 아니, 이토록 고리타분한 집에서 살려고 시골을 내려왔소? 하고 딴죽을 걸 사람이 드물지 않겠지만, 인간이란 저마다 다양한 취향을 관철하며 즐기며 살아가게 돼 있는 동물. 김씨 내외는 이 옛집이 취향과 구미에 맞아 오직 만족스럽다는 거다. 집 뒤 저편으로는 지리산이 거인의 눈을 껌벅이고 있으며, 집의 전면으로는 수려한 섬진강이 요요히 남실거린다. 명당에 들어앉은 집이라 간주한 내외는 이 집을 아예 사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단다. 집주인이 집을 팔 의향이 눈곱만치도 없어서였다. 그래서 당분간 그냥 빌려 쓴다. 먹거리 정도는 자급하기로 귀촌이나 귀농을 하는 사람들이 맨 처음 해결할 문제는 단연 거처나 땅을 확보하는 일이다. 게다가 시골의 집값, 땅값은 늘 생각보다 비싸며, 매물 자체가 드물며, 뭘 모른 채 엄벙덤벙 순진하게 덤벼들었다가는 잔머리 굴리는 재주를 가진 이들의 농간에 깜박 속아 넘어갈 수도 있다. “귀촌 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역시나 들어가 살 집을 장만하는 일입니다. 시골에 빈집은 드물지 않지만, 대부분의 집주인들이 절대 팔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어요. 도시에 나가 사는 자제들이 언젠가는 들어와 살거나 별장 용도로 쓰겠다는 생각들이니까요. 그렇다면 현지의 사정도 파악할 겸 잠정적으로 세 들어 살 집을 마련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지만, 딱히 임대할 만한 집도 드문 게 현실입니다. 저희도 상당한 공을 들이고서야 이 집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우선은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지요.” “집 지을 땅이나 농토를 구입하려고 10년을 돌아다녔다는 사람도 있습디다. 뜸들이다 늙어버리는 것이죠. 이상적인 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도 과욕이지 않을까 싶어요.” “자연 경관이 빼어난 땅을 덜컥 샀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발이나 건축을 할 수 없는 땅을 속아서 사는 케이스죠. 계절마다 땅 사정이 다르다는 점도 유념해야 해요. 여름엔 바람골이라 시원하겠다 싶어 사들였다가 겨울이 돼서야 유난한 얼음골이라는 걸 알고 낙심하는 수가 있으니까요. 땅이나 집의 거래 때 마을의 내부 가격과 부동산 업체에 내놓는 가격차가 크게는 두 배에 달한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해요.” “선생 내외는 혹한기 1월에 여길 들어왔어요. 춥고 외롭고 불안하진 않았나요?” “고가의 보일러를 손보고, 벽지를 바르고, 그러곤 그냥 살았어요. 당시엔 TV도 없었어요. 온천지에 깜깜한 밤이 내리면 7시부터 잠을 잤죠. 그렇게 긴긴 겨울을 좀 스산하게 지냈으나, 어느덧 봄이 왔고요, 그 첫봄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몰라요. 이어 여름이, 가을이 오가고, 절기에 맞춰 농사가 시작되거나 마무리되고, 온갖 꽃들이 피고 지고, 참으로 감동적이었어요. 꿈꾸듯이 지낸 날들이었어요.” “일은? 농사는? 그저 자연 풍경을 관람하며 지냈나요?” “아내가 교직에 있고, 나름 물적 여력도 좀 있고 해서 황급히 돈벌이에 나서진 않아도 되는 여건이었어요. 그렇지만 이왕에 시골에 살게 됐으니 부부의 먹거리 정도는 자급을 하자, 뭐든 소소하게나마 농사도 지어보자는 생각으로 농토 400평을 샀습니다. 거기에 주로 콩을 심어 된장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귀촌과 귀농을 겸한 방식으로 살아온 셈이죠.” 도시라고 왜 매력 요소가 없을까마는, 한결 안전한 삶이 시골에서라고 거저 주어질 리가 있을까마는, 인구와 차량과 소음이 거품처럼 바글거리는 도회의 생활이란 시골에 비해 피로와 고독을 가중시키는 게 사실이다. 차갑고 쓸쓸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은 곳, 타산이 없는 동행을 만나기 어려운 장소가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쟁과 긴장이 덜한 시골에서 권태를 피해 생기를 유지하고 행복을 구가한다는 게 용이한 일만도 아니다. 적막하거나 적적한 시골살이에 무기력하게 코 꿰게 된다면 그 역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김창승씨는 가급적 일을 만들어 거기에 온전히 투신하는 게 복된 삶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이즈음의 그는 거의 일벌레다. “시골 인심은 정말 순후해” “콩농사와 벼농사, 그리고 양봉도 합니다. 벌통 20개를 운영하고 있어요. 왜 양봉이냐? 지리산 지구인 이곳엔 산야초가 타지에 비해 두 배 정도 많아요. 벌들이 꿀을 물어올 꽃들이 지천이라는 얘기죠. 과수농사도 좀 합니다. 아내는 저보고 일을 벌이지 마라, 좀 편하게 살자, 그렇게 투정처럼 말하지만 일이 즐거우니 어떡하나요? 물론 농사로 아직 수입을 올리진 못하고 있어요. 경험을 축적하는 단계라는 거.” “구례군 귀농귀촌협회장이기도 하죠? 귀농귀촌인들의 실태에 훤하겠어요. 그들은 어떤 문제에 가장 큰 애환을 느끼죠?” “만족할 만한 소득을 올리기가 어렵다는 점이죠. 농사로 돈을 만지기란 실로 어려워요. 더구나 막연히 뭔가 잘되겠지 하고 무작정 들어온 경우는 실패하기 십상이에요. 시골에 내려와 살고자 한다면 미리 도시에서 한 가지쯤 기능을 익혀두는 게 현명하다고 봅니다. 목공, 배관, 전기기술, 중장비 또는 숲 해설사라거나, 유용하게 써먹을 기능 분야가 많으니까.” “마을 주민들과 흐뭇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처신이 필요할까요? 융화에 실패하고 패잔병처럼 철수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아 묻는 질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이죠. 흠. 전통 농경사회의 특성이랄까, 시골 주민들은 ‘외지 것들’ 또는 ‘도회지 놈들’에게 일단 경계심을 품게 마련입니다. 개나 끌고 다니며 괜히 거들먹거리는 사람들, 온갖 참견을 하고, 육하원칙을 내세워 따지고 비판하는 부류들을 좋아할 리가 없죠. 제가 온몸으로 느낀 거지만, 시골 인심은 정말 순후해요. 주민들 속으로 겸손하게 들어가야 합니다. 돈 드는 일도 아녜요. 경로당에 수박 한 덩이 들고 가서 노인들과 어울리는 일은 사실 즐거운 일입니다. 마을 사람 하나와 싸움을 하면, 그건 결국 마을 전체에 싸움을 거는 일과 마찬가지라는 걸 알아야 해요. 존중하라! 그리 말하고 싶어요. 우리네 어버이들이 대부분 시골 출신 아니겠어요?” 자아도취엔 리스크가 많지만 겸허한 실천으로는 길이 열린다. 시골이라는 공동체에서 나를 낮추면 뜻밖에도 쏟아져 들어오는 것들이 많다. 우호적인 눈길, 미더운 관심, 끈끈한 유대감이 시골살이를 안정적인 쪽으로 데려다준다. 그렇다면 귀촌이란 수신(修身)이구나! 교만하거나 우매한 나를 독사의 눈으로 냉철하게 돌아봐 교정하는 교실에 들어선 것이라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자신을 세우되 이웃을 품는 일, 끔찍한 아귀다툼의 세태에서 한발 떼어 자연과 인간에게 순하게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 일, 이는 음풍농월만큼이나 발랄한 자아실현의 길이지 않겠는가. “아침저녁으로 새롭게 변하는 자연 풍경들이 정신과 영혼을 정화해주는 것 같아요. 이건 도시에선 도저히 느낄 수 없는 행운이죠. 산과 들과 강, 하늘과 별과 숲을 바라보면 때로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환희가 가득하기도 합니다. 마치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때처럼…. 이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내가 비로소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주체의식과 생기를 깨달아요. 예전엔 아내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섬처럼 저를 느끼곤 했으나, 이젠 온전한 기쁨을 느껴요. 뭔가 한층 높고 고결한 곳에 있다는 실감이랄까, 그걸로 만족스러운 겁니다.” 삶의 일상에 자연이 붙어 있을 경우, 행복의 빈도는 더 잦아진다. 강바람에 들이 일어서고 눕는 풍경을 바라보는 일, 나뭇가지 하나를 집 삼아 밤을 나는 박새를 바라보는 일, 별이 모이는 걸 바라보는 일, 이 모든 소소한 풍경들에서 내 심장의 볼륨이 높아지는 걸 깨달을 수 있는, 시골살이란 어쩌면 낙원으로의 입문이다. 낙원의 한 치 곁엔 늘 연옥이 있는 법이지만.
- 2017-07-17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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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 못 이루는 밤
- 필자는 잠을 아주 잘 자는 사람이었다. 아침에 늦잠도 잘 자서 친구들이 오전 중에 전화를 해 오면 거의 잠에 취한 채 받는 필자 목소리를 듣고 ‘미인은 잠꾸러기라던데 너도 미인 흉내 내는 거냐?’ 하며 놀리기도 했었다. 자는 동안 꿈도 잘 꾸었는데 나쁜 꿈이 아니고 정말 재미있고 현실감이 들 정도로 실감 나게 꾸었다. 어떨 때는 꿈속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는데 이전에 본 적 없는 필자만의 영화라 깨고 나면 금세 어떤 꿈이었는지 기억에서 사라지지만 어쨌든 재미있었다는 느낌만은 남았다. 그렇게 자는 걸 좋아하고 숙면을 취할 수 있었는데 요즈음 필자는 일주일에 이 삼 일은 불면증 증상을 겪고 있다. 처음 그런 증상이 와서, 눈을 감고 누웠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을 때 정말 힘들었다. 언젠가 들은 기억으로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를 외워봤지만, 더욱 양의 숫자세기에 몰두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그 방법을 포기하고 잠들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잠은 저만치 달아나고 자꾸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래서 생각을 계속 하다 보면 하룻밤이 지나가고 창밖이 서서히 훤해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필자가 이제까지 쉽게 잠들고 잘 잤던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는지 깨닫게도 되었다. 보통 불면증의 원인으로 정신적 긴장이나 불안 등 정서적으로 자극을 받거나 낯선 곳 시끄러움 등의 환경적 요인의 변화가 있을 때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 조금 우스운 얘기로는 불면증이란 생각이 많아서 생기는 병이란다, 그래서 바보와 아기들이 생각이 많지 않아 잠을 잘 자는 거라는 말이 있다. 생각해 보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잠이 안 올 때는 정말 끊임없이 이런저런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불면증은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수면이 박탈당하는 것을 말한다는데 보통 ‘입면 장애’ ‘수면 유지 장애‘ ’조기 각성‘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입면 장애는 잠들기 전까지 3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것을 말하고 수면 유지 장애는 잠을 깨는 횟수가 하룻밤에 5회 이상이거나 깨어있는 시간이 30분이 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또한, 조기 각성은 전체수면이 6시간 이하이면서 잠이 깨면 다시 잠들기 어려운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필자는 어디에 해당하는 걸까? 그냥 하얗게 밤을 지새우게 되니 말이다. 혹시 생각하긴 싫지만, 노인성 불면증은 아닐까? 나이가 들면 잠이 없어진다고 옛사람들이 말을 했다. 필자도 이제 노년기에 들어온 게 확실하니 아닌 척해도 어쩌면 노인성 불면증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좀 서글퍼지기도 한다. 잠이란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휴식이다. 필자는 생각을 달리하기로 했다. 전에는 잠이 안 오면 무작정 자려고 눈 위에 안대를 쓰거나 잠들려고 힘들게 노력을 했는데 이제는 잠이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졸릴 때까지 깨어 있기로 한 것이다. 요즘은 TV도 밤새 볼 수 있고 필자가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골라서 무제한 볼 수도 있다. 보는 도중 졸리면 다행이고 그래도 잠이 안 와서 밤을 새웠다면 낮잠이라는 다른 방법도 있다. 이제 필자는 불면증이어서 잠이 안 와도 걱정을 하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그 시간을 즐기는 편이다. 작은 걱정이라면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동안 간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이어트 때문에 항상 신경이 쓰이는데 한 가지 증상을 해결하니 다른 문젯거리가 생긴 것이 아이러니하다.
- 2017-07-12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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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나만 힘들고 어렵지 않다
- 한때는 취업전선에서 먹고사는 문제에 부딪치고 가족들마저 내 마음을 몰라줄 때 성당의 신부님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신부님은 완전고용으로 취업의 어려움이나 회사에서 짤리는 고통 없이 신도들에게 복음만 전달하면 되는지 알았다. 늘 깨끗한 복장에 신도들로부터 존경받기만 하는 모습이 세파에 시달리는 보통우리의 삶과는 다른 모습이 부러웠다. 하지만 신부님들도 저마다 어려움이 있는 모양이다. 예전에 지학순 주교께서 교황을 알현하면 무슨 말을 할까 하고 미리부터 준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글 중에는 용돈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그러나 막상 교황을 뵙자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주교라는 높은 신분임에도 부족한 것이 있어서 윗분에게 하소연할 거리가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어느 신도가 자신의 지치고 힘든 사정을 주님께 말씀드리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주님에게 ‘’주님!‘ 하고 부르다가 주님을 바라보니 내 고통은 주님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차마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고 한다. 귓전에서 주님이 ‘너도 나처럼 지쳤구나! 너도 나처럼 힘들구나!’ 하시며 위로하시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아들에게 미안한 과거 생각이 난다. 지난날 아들의 대학 졸업식에 참석을 했다. 취업도 하지 못하고 졸업을 하는 아들 어깨도 무거웠지만 이를 바라보는 애비의 마음도 찬바람 불고 황량했다. 아들이 이제 졸업하면 백수인데 남들이 ‘당신아들 지금 뭐해?’ 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에만 골몰하고 막상 백수의 첫발을 내딛는 아들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고 아들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미운 감정이 앞섰다. 아들은 어떡하든 졸업하기 전에 취업해 보겠다고 애를 썼다. 학교 근처에 방을 얻고 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몇 군데 원서를 넣었는지 묻지도 못했지만 결국 백수로 졸업을 했다. 졸업 후에도 아들은 밤낮으로 도서관에도 다니고 인터넷으로 이곳저곳 조회하여 취직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합격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러다가 내 아들이 영영 백수가 되는 것은 아닌지 속 좁은 애비는 불안하고 겁이 났다. 어느 날 내가 만취하여 나도 모르게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아내에게 토해냈다. ‘이제 정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아들이 이렇게 취업을 못하니 큰일이다. 남의 자식은 취직도 잘하는데 어떡하면 좋으냐?’ 라는 푸념을 하고 말았다. 아들이 제 방에서 귀동냥으로 애비의 말을 들었다. 다음날 아들은 내게 편지를 주고 나갔다. 내용은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 아버지 실망시켜드려 정말 죄송해요. 지금까지 25년이나 저를 믿고 기다려 주셨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궁하다고 아무 곳이나 들어가면 안 되잖아요? 곧 좋은 소식 드리려고 저도 노력하고 있어요.” 편지를 읽고 나니 나보다 몇 배나 마음고생이 심할 아들의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고 이런 아들을 보듬어주지 못한 애비의 속 좁음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남들이 ‘당신 아들 아직 취업 못했어?’ 하는 소리를 들을까봐 애비는 조바심했지만 그 시간에 취업 못한 아들의 마음은 애비보다 더 타들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몇 달 뒤에 아들은 기다리던 합격 전화를 받고 제일먼저 애비에게 전해왔다. ‘합격’이란 얼마나 듣기 좋은 소리인가. 전화기 너머의 아들의 씩씩한 음성도 반가웠지만 나도 내 생에 최고의 순간처럼 기뻤다. 아들의 인생은 아들의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라는 생각을 평소에 늘 해 왔지만 부자간 이라는 천륜이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은 성인이여서 그렇다 치더라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초개같이 목숨을 버린 수많은 영웅들의 고초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의 삶은 편안하고 너무 행복하다. 세상에 나만 외톨이로 뒤처져 힘들고 지쳐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용기를 내보자.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무수히 많다.
- 2017-07-12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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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를 끊어라
- 요즘 커피를 너무 자주 마신다. 저녁에 술좌석에 참석하고 나면 아침에 속도 안 좋고 머리가 몽롱하다. 그럴 때 커피 한잔을 마시면 비로소 정신이 좀 드는 것 같다. 믹스 커피는 달달한 설탕 덕분에 속이 진정되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 조금 격을 높여 편의점 커피를 마시는데 너무 맛이 써서 시럽을 많이 넣는다. 그리고 글을 쓸 때도 연신 커피를 마셔댄다. 하루에 대여섯 잔은 마시는 것 같다. 한가로운 시간에 여유를 즐기며 커피 한잔 하는 모습이 그럴싸하게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는 탓도 있다. 그런데 최근 읽은 책들을 보면, 커피가 몸에 좋지 않다는 지적이 많이 나온다. 신문에서는 커피가 건강에 좋다는 기사도 가끔 나오기 때문에 어떤 말이 맞는지 혼란스럽다. 지인 중에 중년의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몸이 마르는 사람이 있었다. 커피를 좋아했다. 커피 전문점에서 파는 커피를 즐겼다. 그러더니 어느 날 커피를 끊었다고 했다. 몸이 마르는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커피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살을 빼고 싶은 사람은 귀가 번쩍 뜨일만한 얘기이지만, 커피 때문이라기보다 커피의 카페인 성분 때문에 잠을 잘 못 자기 때문인 것 같다. 인터넷 카페에 글을 쓴 시간을 보면 새벽 3시도 좋고 4시에도 글을 올리기도 했던 것이다. 잠을 못자면 큰 문제이다. 군대시절 냄비에 라면을 끓여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할 때, 비누가 없으면 분말 커피 가루를 썼었다. 그러면 기름기가 말끔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고기를 자주 먹는 서양 사람들은 그래서 커피를 마시면 입안이 개운하다고 느끼면서 커피를 상음하는 것이다. 어느 책에 보니, 사람의 뇌는 해로운 물질을 대부분 걸려내지만, 카페인, 알코올, 마약 성분은 걸러내지 못하고 그냥 통과시킨다고 되어 있었다. 그래서 자극이 빠르고 쉽게 중독이 된다는 것이다. 또 어떤 책을 보니, 커피가 우리 몸에 들어오면 거의 모든 세포에 영향을 끼친다고 되어 있다. 그 결과, 과민성 위, 과민성 방광, 소화성 궤양, 피로 불안, 두통, 우울증을 유발한다고 되어 있다. 습관적으로 마시고, 지인들이 흔히 권하고, 손님을 만나면 마시는 것이 커피이다. 이제부터는 조심해야할 것 같다. 믹스 커피도 안 좋고, 드롭 커피도 안 좋다는데 굳이 찾아가서 마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커피 없으면 당장 큰일 날 것 같지만, 안 마시다 보면, 안 마셔도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재직 시절, 매일 커피를 대여섯 잔씩 마시다가 중국에 출장 갈 일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커피마시기가 어려울 것 같아 일부러 믹스 커피를 가져갔었다. 가는 곳마다 중국 차를 주는데 그러다 보니 굳이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둥글레 차나 현미 녹차로 대신해도 될 것 같다.
- 2017-07-11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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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 마니아가 된 사연
- “팬티까지 벗어야 합니까?” 20년 전 5월, 여의도 백화점 4층에 있는 헬스클럽 탈의실에서 필자가 윤 사장에게 한 말이다. 당시 필자는 몸무게가 90Kg을 막 넘어서고 있었다. 필자의 사업 파트너였던 윤 사장이 갑자기 어디 좀 가자고 하더니 데리고 간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이 대표님, 몸이 망가지고 있습니다. 운동 좀 하셔야겠네요, 제가 6개월 끊어드릴 테니까 운동 열심히 하세요” IMF 이후 사회, 경제에 혼란이 왔듯이 필자의 생활에도 큰 변화가 왔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거친 광야에 홀로 서게 되었다. 앞날에 대한 불안, 가장으로서의 무게감과 책임감이 양어깨를 눌렀다. 이런 것들로 인해 필자는 방황의 길로 들어섰다. 불규칙한 생활, 폭음과 폭식 그리고 엄청난 흡연으로 몸이 갈수록 망가져갔다. 허벅지 양쪽이 쓸리면서 앉았다 일어나기도 힘들었고 낮은 층수를 걸어서 올라가는데도 헉헉거렸다. 이에 보다 못한 윤 사장이 운동을 권한 것이다. 처음에는 무슨 운동이냐고 완강하게 거부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권유에 못 이기는 척하고 따라온 것이다. 어릴 때 동네 아이들하고 뛰어논 것 외에는 운동이라고는 전혀 한 적이 없는 필자에게 운동은 매우 낯선 것이었다. 처음 헬스장에 온 사람들이 가장 당황하는 것은 시설에 대한 불편함이다.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어 사용법을 몰랐다. 모든 것이 익숙해지기까지는 불편함의 연속이다. 탈의실에 들어갔을 때 팬티까지 벗고 운동복을 입어야 하는지, 팬티는 입고 운동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고민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날 이후 필자는 운동 마니아가 되었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서 러닝머신에서 30분 아니 15분 걷기도 힘들었는데 모 일간지에서 40분을 쉬지 않고 꾸준히 뛰면 몸이 제2의 탄생을 하는 것이라는 내용을 읽고 목표를 세웠다. ‘나도 40분을 쉬지 않고 뛸 수 있는 몸을 만들겠어.’ 일단 주별 계획을 세웠다. 1주일은 9분 걷고 1분 뛰고, 다음 주는 8분 걷고 2분 뛰고 하는 식으로 자신과 약속하고 결국에는 1분 걷고 9분을 뛰게 되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40분을 쉬지 않고 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날의 감동과 환희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야말로 어매이징 스토리였다. 인간은 끝없이 욕심을 내는 동물이라고 한다. 40분을 뛰고 나니 이제 1시간을 뛰고 싶어졌다. 열심히 노력해 그것도 이루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필자의 모습을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어졌다. 방법을 찾았다. ‘그래, 마라톤대회에 참가해 완주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필자는 우리나라에 그렇게 많은 마라톤대회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 극한의 날씨만 빼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열리고 있었다. 주말이면 온 가족과 함께 여행 겸 대회 참가를 위해 전국을 누볐다. 가족들에게도 필자에게도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갈수록 탄력을 받아 하프마라톤까지 뛰었다. 처음 도전했던 조일 마라톤 코스는 예술 그 자체였다. 가을의 아름다운 호수 풍경이 지금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 마다의 사연을 갖고 목표를 향해 뛰었다.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습인가? “이 대표님, 더 이상 몸무게 줄지 않죠? 운동만으로는 이제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식단을 조절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웨이트도 병행해야 합니다.” 트레이너가 그해 12월 필자에게 한 말이다. 이제 몸무게는 70kg 위에서 놀고 있다. 60kg대로는 절대 내려가지 않는다. 7개월 사이에 약 20kg을 감량한 것이다. 솔직히 먹을 것 다 먹고 할 것 다해가면서 말이다. 필자의 욕심은 또 60kg을 꿈꾸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한 결과 그 목표도 다음 해 2월에 이루었다. “이 회장님 운동가시죠.” 2017년 7월 현재 필자의 모습이다.
- 2017-07-07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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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의 차이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파스칼의 말이 생각난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미약한 존재지만 생각을 할 수 있으므로 그 어떤 존재보다 위대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은 갈대처럼 가냘픈 존재이기는 하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 우주를 포옹할 수도 있는 위대성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양극을 공유하는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이성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존재, 어쩌면 인간은 존재 자체로 모순을 안고 살아가는 2원적인존재인 것 같다. 그 모순을 어떻게 극복하여 순리에 맞춰서 사는가 하는 것이 중용의 삶을 사는 방법인 것 같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수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고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방향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의사결정의 중요성은 그 사람의 일생을 좌우 할 만큼 때로는 중요한 것일 수가 있다.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많이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삶을 사는 내내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학습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는 아는 만큼 인생을 편하게 살 수 있고 아는 만큼 지혜롭게 의사결정을 하면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 같다. 특히 인생2막을 시작하는 시니어들은 인생1막을 정리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학창시절만큼의 오랜 시간은 아니더라도 인생 2막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학습을 다시 해야 할 것이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은 “교육이 한 인간을 양성하기 시작할 때의 방향이 그의 삶을 결정할 것이다”라고 강조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은 노후로 가는 여행을 위한 최상의 양식이다” 고 말했다. 굳이 이런 철인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교육과 학습의 필요성을 절실히 삶을 통해 느끼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배움은 인간을 사람답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주체적으로 자기 뜻에 따라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사람은 배워서 행복하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요약하여 한 마디로 “배움은 미래를 위한 가장 큰 준비다”라고 했다. 둘째 인생길을 안내 해주는 멘토가 필요하다. 삶을 바로 살기 위해서는 인간에게도 항해할 때 등대처럼 가이드 역할을 해주는 스승이나 멘토가 필요하다. 훌륭한 멘토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고전과 같은 책이 될 수도 있다. 직접 경험에 의해 지혜를 터득할 수도 있겠지만 보다 현명한 사람은 간접경험을 통해서도 삶의 지혜를 깨우칠 수 있다. 가장 훌륭한 멘토는 자신과 코드가 맞는 선지자가 아닐까 싶다. 함께 공감하고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나 분야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서 이를 깨우쳐주고 가이드 해주기 때문이다. 멘토는 인생의 성공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존재이다. 마치 나침판이나 등대처럼 배가 옳은 방향으로 바로 항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셋째 사물의 본질을 알고 핵심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나무도 보고 숲도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정확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다리, 배, 코 등 어느 일부분만 확인해서는 안 된다. 우리 인간은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항상 파스칼처럼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생각 없는 삶은 무미건조하다. 삶의 맛을 북돋우는 것은 생각과 행동이다. 그러면 우리는 삶의 와중에서 어떻게 생각의 차이를 극복하고 함께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꽃밭에 있는 여러 종류의 꽃들이 함께 피어 있는 것을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꽃들은 종류가 다르지만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면서 꽃을 피우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서로 다른 개성의 차이를 인정하고 장점을 존중하면서 단점을 보완하여 함께 공존해 나갈 수가 있지 않을까? 만일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만 옳으니 따르라고 한다면 우리는 꽃밭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없을 것이다. 치열한 약육강식의 자연의 생존법칙에 따라 항상 불안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차이란 서로 다름이지 다르다고 적은 더욱 아니다. 다른 것은 결코 잘못된 것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에 우리의 삶은 발전이고 평화로운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의 오케스트라처럼 서로 다른 악기들이 다른 음으로 화를 이루기 때문에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트럼펫 소리가 아름답기는 하나 혼자 내는 소리는 단조롭다. 서로 다른 악기들이 화음을 만들어 낼 때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정치에 있어 보수와 진보도 마찬가지다. 보수와 진보는 모두 삶을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한 방법을 찾는 공통적인 목적이 있다. 보수와 진보는 서로 다른 차이를 존중하고 받아들일 때 미국과 같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장점을 수용하고 단점을 보완하는 그런 사고가 생각의 차이를 극복하는 방법이 될 것이고 이는 한마디로 중용의 삶과 상통하는 것이 될 것이다. 차이의 화합된 순열과 조합은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2017-07-03 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