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는 고독을 그린 이로 유명하다. 예건대 작품 ‘브루클린의 방’에선 먹먹한 창 밖 풍경 앞에 홀로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여자가 등장한다. 어찌 해볼 수 없는 외로운 심상이 감도는 그림이다. 삶에 만연한 고독과 피로를 도려내 캔버스에 담았다. 인생사의 답답하고 불안한 연극을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사실 일상이란 고달픈 것, 군중 속에서도 외로운 게 사람이다. 미술은 이 참을 수 없는 고독과 불쾌에 숨통을 열어준다. 한 모금의 청량제. 길 위에서의 잠깐 휴식. 미술작품 관람의 의미가 그쯤에 있을 게다. 그러기에 미술관을 만나면 반갑다. 여기에 거리를 걷다 쉬어가기 좋은 미술관이 있다. 코리아나미술관이다. 소음과 차량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신사동 길모퉁이에 있다.
코리아나미술관은 코리아나화장품이 설립한 미술관이다. 2003년에 개관했으니 어언 20여 년에 가까운 연조가 묵직하다. “돈을 벌기만 하면 무슨 재미? 작으나마 뜻있는 사회 환원을 하리라.” 코리아나화장품 유상옥 회장이 미술관을 설립한 연유가 이와 같다. 그는 일찍부터 미술품과 화장 관련 골동품을 모으는 취미에 푹 빠져 살았다. 오직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시작한 취미생활이었으나 점점 수집 물량이 늘어 집이 미어터질 지경에 이르렀고, 마침내 숙고 끝에 미술관과 화장박물관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 두 개의 뮤지엄을 들여앉히기 위해 6층 건물을 지어 ‘스페이스 씨’(space*c)라 이름 붙이고서.
대체로 미술관 건축들은 그 독특한 외양부터 튄다. 웬만하면 유명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겨 누가 보더라도 감흥이 돋을 건축물을 짓고자 노력한다. 건물은 물론 정원이라든가 외부 공간 전체에 예술미를 부여하기 위해 각별한 신경을 쓴다. 이건 하나의 트렌드로 건축가마다 가급적 기발한 방법을 동원한다. 그렇게 미감을 구현한 미술관 건축물이 이미 곳곳에 들어섰다. ‘스페이스 씨’는 이 대열에서 어느 정도 비켜서 있다. 얼른 돋보이게 지은 건물이 아니다. 신사동 대로변에 고만고만한 세련미를 가지고 늘어선 빌딩들의 무개성한 모습과 크게 다를 게 없는 외양이니 말이다.
왜 이렇게 지었을까. 이 건물의 설계를 맡은 이가 건축가 정기용(2011년 작고)임을 알고 나면 수긍이 된다. 그는 겉멋을 애써 추구하는 건축을 극히 싫어했다. 고도의 조형 구사로 예술적 건축을 설계하기에 능해 ‘현대 건축의 아버지’로 통하는 르 코르뷔지에를 불신할 정도였다. 이탈리아 건축가 지오 폰티는 ‘건축가는 신(神)’이라 주장했다. 이 역시 정기용에겐 가당찮은 허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건축을 학문적으로 구분하면 예술이나 기술이 아니다. 차라리 인문사회과학 영역에 속한다.”
건축 행위를 인문학으로 본 정기용의 관심사는 결국 인간의 문제였다. 그 무엇에 앞서 인간의 삶과 일상의 편의성을 존중하는 집이라야 집다운 집이라 봤다. ‘거주하는 사람의 생활 흔적이 서서히 누적되어 그 사람의 향기가 배어나오는 집’을 좋은 집이라 했다. 건축물을 읽는 철학이 이랬는데 겉멋에 쏠릴 리가. 사람의 삶과 자연스럽게 연계되는 건축을 추구한 그였으니 ‘스페이스 씨’ 역시 실사구시와 휴머니즘을 근간으로 설계했을 걸 알 만하다.
그렇다고 건축이 무덤덤하기만 하다면 무슨 맛? 고수는 은연중 묘수를 쓴다. 티내지 않은 듯 티를 남긴다. ‘스페이스 씨’를 밖에서 보면 층과 층을 잇는 계단을 건물 전면의 유리벽에 붙여 설치한 걸 알 수 있다. 따라서 층계를 따라 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외부에 그대로 드러난다. 건물 내부에서 외부를, 외부에서 내부를 함께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함으로써 내·외부 풍경이 소통되도록 했다. 흔히 집의 내부에서 내다보이는 ‘뷰’를 중시한다. 그러나 정기용은 달랐다. ‘삶이란 풍경을 소비하는 것, 혹은 풍경과 관계 맺는 것’이라 했던 그는 건물 내부에서 움직이는 사람 풍경을 하나의 퍼포먼스로 보길 바라며 벽을 허문 것이다. 층마다 나무들을 심은 정경에서도 풍경의 기운과 서정을 중시한 의도가 읽힌다.
여성 관련 탐색전 자주 열어
이처럼 곰곰 뜯어볼 게 드물지 않은 ‘스페이스 씨’는 서울에 유일한 정기용 작품이다. ‘스페이스 씨’를 설계하며 들인 공이 많아서였을까. 대장암 투병을 하다가 타계하기 하루 전날, 정기용이 코리아나미술관 유승희 관장에게 전화를 걸어 “고맙다”고 인사를 하더란다. 무엇이 고마웠을까. 유 관장의 얘기는 이렇다.
“이미 지쳐 몇 마디 못하시더라. 고맙다고, 건물을 고치지 않아 고맙다고, 그 한마디뿐이었다. 살아 숨 쉬는 건축, 사람을 중심에 둔 건축을 지향한 그의 설계를 받은 건 ‘스페이스 씨’의 행운이다.”
코리아나미술관의 전시 기획엔 뚜렷한 지향이 있다. 화장품 회사가 설립한 미술관답게 여성성, 여성의 노동, 여성의 몸 등등 여성의 정체성 탐색을 테마로 한 전람회를 자주 열었다. 여성주의를 표방한 셈이지만 성차별에 대한 도전과 저항의 메타포로서의 여성 내러티브를 내세우진 않았다. 억눌린 타자가 아닌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여성, 즉 대안적 여성을 모색하는 기획전을 미술관의 지표로 삼았다. ‘텔 미 허 스토리’(Tell Me Her Story), ‘아티스트스 바디’(Artist's Body), ‘히든 웍스’(Hidden Works) 같은 전시회들로 화단의 호평을 받기도 했다. 분명한 방향성에 추동된 양질의 미술전 개최로 존재감을 돋운 셈이다.
현재 진행되는 ‘호랑이는 살아있다’ 전은 성격이 전혀 다른 기획전이다. 왜 호랑이를 테마로 삼았을까. 자연계의 최상위 포식자인 호랑이는 공포의 대상만은 아니다.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다. 인도에선 신의 수레를 끄는 신수(神獸)로 섬김을 받았다. 우리의 토속신앙에 등장하는 호랑이 역시 하늘과 소통하는 신령한 존재이지 않던가. 민화에 나타나는 호랑이는 재롱떠는 고양이처럼 귀엽고 익살스러워 민간에 스민 호랑이 애호 풍정을 웅변한다. 이렇게 역사와 신화, 민속을 관통해 특유의 위상으로 존재하는 ‘호랑이 현상’의 광활한 스케일과 의미를 재조명하자는 게 이번 전시의 기획 의도이겠다. 다른 변수도 있다. 지금이 바로 호랑이를 부각할 시절이라는 거다. 유승희 관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88올림픽 때 ‘호돌이’ 마스코트가 각광을 받기도 했지만 요즘 들어 호랑이가 새삼 인기를 끄는 분위기다.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에 열광하는 대중들을 보라. 호랑이 마니아들이 늘고, 호랑이라는 이름을 상호로 쓰는 카페도 많아졌다. 이 급작스런 바람을 미술전을 통해 부양하고, 우리 민족의 상징인 호랑이를 미술 코드로 해석하고 싶었다.”
전시실은 지하 1·2층에 있다. 1층 전시실에선 호랑이 관련 전통 장신구와 조선시대의 수묵화 등을 볼 수 있다. 층고 8m에 이르는 지하 2층 공간은 큐브형 갤러리로 대형 퍼포먼스를 펼치기에 적격이다. 여기엔 호랑이 관련 국내외 작가들의 회화와 다큐, 영상작품 등이 전시되고 있다. 눈길을 끄는 건 이번 기획전의 타이틀로 채용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호랑이는 살아있다’이다. 비록 소품이지만 백남준의 기재(奇才)를 즐기기엔 충분하다. 그는 말하길,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건 빤한 생각, 지루한 감상이다”라 했다. 타고난 삐딱이 기질과 사람을 사로잡는 쇼맨십, 그리고 기존 사조와 형식을 갈아엎는 도발의 힘을 지렛대로 미술세계를 통째 전복하고 떠난 사람. 백남준의 작품을 보고 있자니 그가 그립다.
이제 5·6층으로 올라가 화장박물관을 볼까. 화장의 시원을 네안데르탈인에게서 찾아낸 연구 보고서도 있다. 화장이 여성의 전유물만도 아니었다. 예컨대 신라의 화랑들도 화장을 즐겼으니까. 인류는 왜 그렇게 화장에 꽂혔을까. 화장 재료와 도구의 변천사는 어떤 것일까. 화장으로 외모를 가꿔 내면까지 아름답게 다듬을 수 있는 메이크업이 가능할까. 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가볍게 관람하기 좋은 박물관이다. 국내 유일의 화장전문박물관인 이곳엔 남녀용 화장도구와 화장품과 용기들, 동경(銅鏡), 그리고 도자기와 미인도, 은장도 등등 온갖 골동품이 숱하게 전시돼 흥미롭다. ‘백자에 물든 푸른빛’이라는 타이틀의 청화백자 기획전도 볼 만하다.
화장박물관 관람까지 마치고 거리로 나서자 화장하기 어려운 얼굴들이 오고간다. 마스크로 얼굴 절반을 가렸으니 도리 없다. 너나없이 마스크를 쓰다니. 이게 무슨 기발한 미술 퍼포먼스가 아닌 ‘레알’ 현실임은 얼마나 큰 불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