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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장휴의 Smart Aging] 머릿속을 가볍게 만든다. 할 일 관리도구 '원더리스트'
- 요즘 서점에 가보면 단순하게 사는 법에 관한 책들이 많다. 단순함의 위대함부터 정리를 잘 할 수 있는 법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이제는 세상이 너무 복잡하니 몸도 마음도 단순하게 만들자’라는 분위기가 생기고 있는 것 같다. 단순해야 할 것 중 가장 중요한 게 바로 머릿속이다. 기억할 게 많고 해야 할 일이 많으면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다. 머릿속이 복잡하면 꼭 기억해야 할 것들을 잊게 된다. ‘이거 해야지’ 하는 순간, 뭘 해야 하는지 모르고 어리둥절할 때도 있다. 생각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자꾸 잊는 것이다. 생각을 갑자기 단순하게 만들 수는 없지만 할 일을 정리하다 보면 복잡한 생각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할 일을 눈에 보이게 하라 머릿속을 말끔히 비우게 하고 할 일을 관리해주는 도구가 바로 다. 퇴직 후 대학원에 들어가서 공부하는 분이 있었다. 학교생활을 새로 시작하려 하니 기억해야 할 게 너무 많다고 한다. 과제도 해야 하고, 스터디 모임에 참석도 해야 하고 매번 급작스럽게 생기는 일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데 정리가 잘 안 된다고 한다. 포스트잇에 메모도 해보고, 스마트폰에 있는 메모 앱에 적어놔도 적는 순간뿐이다. 적기만 하고 다시 보지 않게 된다. 그래서 그분에게 할 일 관리를 할 수 있는 앱을 안내해 드렸다. 그랬더니 할 일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급한 것들은 바로 처리하고 시간이 걸리는 것들은 목록화했더니 잊어버리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일단 해야 할 일을 모조리 앱을 이용해서 꺼내 놓으니 머리로 기억해야 하는 수고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할 일 정리의 고수 할 일을 가장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는 앱이 이다. 요즘은 할 일 관리 앱이 대세다. 여러 가지 도구가 나오고 있는데 그중에서 를 추천하는 이유는 기능이 군더더기가 없어 사용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생각을 정리하고자 배우는 건데 익히는 데 힘을 빼면 안 된다. 무조건 쉬운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는 쉽게 배워서 바로 쓸 수 있는 도구이다. 그리고 무료라는 장점도 있다. 일반 종이에 메모하는 것과의 차이점은 메모지에 메모하려면 당연히 종이와 연필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는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바로 스마트폰을 열고 할 일을 작성하면 끝이다. 장보기할 물건, 친구 생일축하 전화하기, 세금고지서 납부하기, 가스계량기 검침 등 할 일 리스트를 작성한다. 사소한 일들이지만 처리하지 않으면 계속 신경이 쓰인다. 할 일 리스트를 작성하고 처리했을 때 완료를 누르면 할 일 목록에서 사라진다. 할 일 목록이 비어 있을수록 머릿속은 깔끔해진다. ◇부부가 공유하는 할 일 목록을 사용하는 게 익숙해졌다면 목록을 공유해보자. 는 주로 마트나 시장에서 장을 볼 때 사용하는데, 장 볼 목록을 미리 작성해 놓으면 빠트리지 않고 살 수 있다. 종종 아내가 남편에게 전화로 뭐 좀 사오라고 요청하면 남편들은 하나씩 빠트리기 일쑤다. 이럴 때는 아내와 남편의 를 공유하면 된다. 아내가 자신의 목록에 살 것을 작성하면 남편 목록에도 자동으로 작성된다. 남편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고 물건을 사면 된다. 장보기 물건뿐 아니라 부부의 관심사를 넣을 수도 있다. 보고 싶은 공연, 가고 싶은 여행지, 찾고 싶은 맛집 등 정보를 서로 담아 놓기도 한다. 처음에는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서 사용했지만 쓰면 쓸수록 관심사로 목록이 채워지게 된다. 우리가 할 일을 관리하는 이유는 단순한 일은 바로 바로 처리하고 삶의 가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머릿속부터 말끔히 비워야 한다. 글 유장휴(소통기업 AG브릿지 대표/전략명함 코디네이터)
- 2015-08-19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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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철의 스포츠 인물 열전] 우리나라 첫 프로 복싱 세계 챔피언 '김기수'
- 초등학교 시절, 이탈리아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은 나라라고 담임선생님에게서 배운 기억이 난다. 같은 반도국가이고 두 나라 국민들이 노래를 즐겨 부른다는 등. 그래서 이탈리아는 왠지 가깝게 느껴지는 나라였다. 그런데 1960년대에 이탈리아 사람들은 ‘코리아’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깜짝 놀랄 일을 연달아 경험하게 된다. 한국의 김기수는 1966년 6월 25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인 이탈리아의 지오반니 벤베누티(국내 스포츠 팬들에게는 애칭인 니노로 알려져 있다)에게 도전했다. 벤베누티는 1960년 로마 올림픽 웰터급 금메달리스트로, 복싱 실력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당시 세계 동급 최강이었고 외모 또한 준수해 지금으로 치면 ‘꽃미남’이었다. 이탈리아 스포츠 팬, 특히 여성 팬의 우상이었다. 그런 벤베누티가 동양 여행 삼아 나선 타이틀전에서 무명의 복서에게 챔피언벨트를 내줬다. 이탈리아는 경악했다. 벤베누티의 아마추어 전적은 120승 1패이고 김기수에게 진 뒤에는 미들급으로 체급을 올려 세계 프로 복싱 양대 기구인 WBA와 WBC(세계복싱평의회) 챔피언을 지내는 등 이탈리아인들의 사랑을 계속 받기는 했다. 얼마 뒤인 그해 7월 19일 북한은 영국 미들스보로에서 1만8727명의 유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린 잉글랜드 월드컵 4조 마지막 경기에서 1934년, 1938년 대회 우승국이자 세계적인 축구 강국 이탈리아를 1-0으로 꺾고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이변을 일으켰다. 월드컵 역사는 이 경기와 1950년 브라질 대회에서 미국이 잉글랜드를 1-0으로 제친 경기를 깜짝 놀랄 경기 가운데 첫 손가락으로 꼽고 있다.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당한 이탈리아 선수들은 귀국길에 자국 팬들로부터 토마토 케첩과 잼 세례를 받았다. 한국인 이상으로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충격을 안긴 김기수를 ‘스포츠 인물 열전’ 첫 번째로 꼽은 까닭은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이겨 내고 세계 속의 한국으로 나아가려고 몸부림치던 1960년대 중반, 아마추어와 프로를 막론하고 스포츠 팬들은 물론 국민들에게 ‘한국도 세계 최고(챔피언)’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첫 올림픽 챔피언(1976년 몬트리올 대회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양정모)은 이때로부터 10년 뒤에 나온다. 1960년대 후반, 김기수가 뻗는 주먹은 모든 이들에게 고단한 삶을 잠시나마 잊게 했다. 김기수는 1939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12세 때인 1·4 후퇴 때 남녘으로 와 전라남도 여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형에게 자극을 받아 복싱에 입문해 1957년 전국아마추어복싱선수권대회 주니어 웰터급에서 우승했고 곧 이어 서울 성북고로 전학해 을지로 3가에 있는 한국체육관에서 복싱에 전념했다. 그 무렵 성북고는 복싱과 레슬링 등 격투기 종목을 집중적으로 육성해 우수한 선수들을 많이 배출했다. 김기수는 아마추어 시절에도 뛰어난 복서였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열린 각종 국내 대회에서 연전연승했다. 그 사이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웰터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했고 1962년 프로로 전향하기 전까지 88전 87승 1패의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유일한 1패가 1960년 로마 올림픽 웰터급 2회전(16강)에서 벤베누티에게 당한 판정패였다. 비록 올림픽 챔피언이 되지는 못했지만 김기수는 아마추어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의 경기력을 발휘했고 1964년 도쿄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정신조,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 은메달리스트 지용주 등으로 이어지는 올림픽 복싱 메달리스트들의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 프로에서도 연승 행진을 이어간 김기수는 1962년 12월 일본 원정 두 경기를 포함해 프로 데뷔 네 번째 경기에서 강세철을 판정으로 물리치고 국내 미들급 챔피언이 됐다. 1965년 1월 일본의 가이즈 후미오(海津文雄)를 6회 KO로 누르고 동양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김기수는 여세를 몰아 이듬해 벤베누티와 6년 만에 다시 만나 2-1 판정승을 거두고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프로 복싱 세계 챔피언이 됐다. 이 경기는 박정희 대통령이 관중석에서 지켜볼 정도로 전 국민적인 관심사였다. 박 대통령의 결단으로 5만 달러가 넘는 벤베누티의 개런티를 줄 수 있었기에 한국인 첫 세계 챔피언이 나올 수 있었다. 1950년대에는 외환 사정이 더 나빠 축구 대표 선수들이 외상으로 비행기를 타고 국제 대회에 출전해야 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김기수가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던 날 사진을 보면 챔피언벨트를 허리에 감은 김기수 옆에 있는 이방인이 눈에 띈다. 미국인 트레이너 보비 리처드다. 리처드는 김기수의 세계 타이틀 도전이 확정되자 트레이너로 영입된 인물이다. 일본 프로 복싱계에서 활동하던 리처드는 뒷날의 거스 히딩크 같은 족집게 과외 선생이었다. 김기수는 리처드의 지도를 받으며 타이틀 매치를 준비했고 15라운드 내내 왼손잡이 이점을 살리면서 포인트 위주의 작전을 펼쳐 챔피언이 됐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히트 앤드 클린치(Hit and Clinch)’라고 표현했다. 짧은 기간이라도 외국인 지도자가 쓸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첫 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66년 12월 스탠리 해링턴(미국), 1967년 10월 프레디 리틀(미국)을 상대로 타이틀을 방어한 김기수는 1968년 5월 3차 방어전에서 산드라 마징기(이탈리아)에게 판정으로 져 타이틀을 빼앗긴 뒤 그해 11월에는 미나미 히사오(南久雄)에게 판정으로 져 동양 미들급 타이틀도 내놓았다. 1969년 3월 리턴매치에서 미나미에게 판정승을 거두고 타이틀을 되찾았으나 그해 9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식을 갖고 글러브를 벗었다. 프로 복싱 전적은 49전 45승 2무승부 2패다. 김기수는 은퇴한 뒤 사업가로 활동했다. 그가 서울 충무로에 개업한 챔피언다방은 복싱 올드 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명소다. 행복한 은퇴 생활을 하던 김기수는 안타깝게도 한창 나이 58세 때인 1997년 세상을 떠났다. 김기수는 프로 데뷔 초기 일본에서 활동하며 귀화 제의를 받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화가 있다. 한국은 김기수의 세계 타이틀 획득이 기폭제가 돼 1970년대 홍수환과 유제두, 1980년대 유명우와 장정구 등 수많은 챔피언을 배출했고 WBA와 WBC에 동시에 세 명의 챔피언을 보유하기도 하는 등 세계적인 프로 복싱 강국으로 성장했다. 세계 챔피언 김기수가 태어나기 훨씬 전,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 프로 복싱 세계 랭커가 있었다면 쉽게 믿기 어려울 터. 프로 복싱 한국 최초의 세계 랭커 서정권은 전남 순천 갑부 집안의 4남 3녀 가운데 셋째로 1912년 태어났다. 플라이급과 밴텀급 선수로 일본 무대에서 활약하다 1932년 미국으로 건너가 WBC 밴텀급 6위까지 오르는 등 활약했으나 더 이상의 발전을 하지 못하고 1936년 귀국해 세계 랭커였다는 긍지로 평생을 살다 1984년 타계했다. 서정권은 16세 때 동향의 마라톤 선수 남승룡(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동메달리스트)과 함께 도쿄로 건너가 한국 최초의 올림픽 출전(1932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복서인 황을수의 지도를 받았다. 그때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서정권의 큰형은 두 소년이 복싱 선수가 되겠다는 것을 우려해 자신이 후원하던 황을수에게 “복싱에 대한 의욕을 단념하도록 혼내 주라”고 부탁했다. 황을수의 강펀치에 이가 흔들거리자 남승룡은 글러브를 놓았으나 서정권은 오기로 버티면서 형과 황을수가 놀랄 만한 투지와 기량을 보였다. 재능이 뛰어나다고 여긴 황을수의 지도를 받으며 복싱에 매진한 서정권은 일본을 석권하고 미국으로 진출하게 된다. 글 신명철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 2015-08-07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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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이 아침] 글로벌로 시작된 제2의 인생과 도전
- 듀폰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담당자로 인재개발 15년, 그리고 인사 업무를 7년간 맡으며 기업 인재교육 분야의 최고전문가로서 활동했던 윤경로(尹景老·62) 전 듀폰 부사장. HRD(Human Resource Development·인적자원개발)와 HRM(Human Resource Management·인적자원관리) 분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그의 현재 직함은 사단법인 글로벌인재경영원 원장이다. 경영원의 목표는 학생들과 비즈니스인들의 글로벌 역량을 단시간 내에 최적화시키는 것. 자신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장기로 두 번째 인생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그는 “사실 좀 쉬고 싶었다”라고 웃으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윤경로 원장이 사단법인 글로벌인재경영원을 만든 목적은 단순하고도 명확하다. 당연히 ‘좋은 인재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가 만들고 싶은 좋은 인재의 차원은 기존의 인재상과는 확실하게 다르다. 기준이 글로벌에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다. “우리 땐 해외로 여행도 잘 못 갔었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그게 일상이 됐죠. 그래서 요즘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글로벌 역량이 과거 세대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중국과 인도 등 새롭게 떠오르는 나라의 인재들이 우리나라 인재들보다 훨씬 빨리 성장하는 중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되레 그런 경쟁자들이 없었던 우리 세대보다 글로벌 경쟁력은 더 떨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굉장히 심각한 문제예요.” 우리나라 인재의 역량 저하 현상 … 심각한 문제다 윤 원장의 말에서는 내내 변화하는 현실에 관한 위기의식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위기의식에는 확실한 근거 또한 있었다. 그가 듀폰에 있을 때, 사내 핵심인재를 선발하게 되면 예전에는 한국인들이 핵심인재 범주에 상당수가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렇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출신 인재가 글로벌 기업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이 현상이 듀폰만 그런 건가 싶어서 IBM이나 GE에도 물어봤어요.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더군요. 심지어 더 심각하다고 할 정도로.” 흔히 한국은 천연 자원이 없는 대신 인적 자원의 우수성으로 지금의 성장을 이뤄냈다는 신화가 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신화가 추락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윤 원장은 이미 글로벌 기업에서는 일반화된 이 문제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하고 글로벌 인재를 본격적으로 육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글로벌인재경영원을 사단법인으로 만든 이유도 대학생 때부터 글로벌 인재 육성을 목표로 대학교 등에 프로그램 제공을 위해서다. “우리나라 인재들은 글로벌 경쟁력 측면에서 볼 때 영어에서 밀리고, 다양성에 대한 경험과 수용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과 일하는 게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인도는 글로벌 CEO 다수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들은 대학교까지 인도에서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기업에서 CEO로 올라간 거죠.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에요.” 국내 인재들의 글로벌 경쟁력, 정확하게 평가하고 토론해보자 “미디어에서 우리나라 인재들의 경쟁력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평가하고 토론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직도 기업에서는 해외로 사원을 보낸다고 할 때 어학 교육 정도만 해서 보내는 경우들도 많아요. 사람은 많은데 쓸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기업의 고민입니다. 앞으로는 기업들이나 생활의 글로벌화가 더 진전되는 게 당연한 흐름이기에 그에 맞추는 현실적인 방안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는 또한 우리나라 기업들이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2003년부터 2012년까지 LG전자 프랑스 법인에서 일했던 에릭 쉬르데주 전 LG전자 프랑스 법인 대표는 이라는 책을 냈다. 책에는 한국 기업에서 일하면서 겪은 과중한 업무와 전시행정, 승진 차별에 대한 비판이 실려 있다. 윤 원장은 저자의 행동이 옳지 않았다고 전제하면서,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성공해야 좋은 인재들이 한국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윤 원장은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을 담아 중소기업에 글로벌 역량을 제공하는 방안도 준비 중에 있다고 밝혔다. 윤 원장이 듀폰에서 은퇴한 지는 2년여가 되어오고 있다. 듀폰에서 22년을 인재들의 육성과 발굴에 바쳤다. 그런 윤 원장이 은퇴 전에 생각했던 게 젊은 직원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듀폰 내에서 그러한 시스템을 구축하기에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바깥에서 만들게 된 것이 글로벌인재경영원이다. 그가 은퇴하고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젊은 인재들을 키우고 싶었던 것이니 그 희망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 중인 것이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세, 미래지향적인 사고, 적극적인 의지가 글로벌 인재가 갖춰야 할 자질이에요.”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 재미있게 사는 법 1953년생인 윤 원장에게선 나이를 잊은 활력이 느껴진다. 그에게 즐겁게 살기 위한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할지를 물어봤다. “자신이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좀 겸손해져서 내려놔야 해요. 그러면 새롭게 배울 수가 있어요. 요즘 뭔가를 배울 기회는 많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꿈이 없어졌어요. 제 2의 인생은 어떤 꿈을 갖고 경영해야 합니다. 저는 새로운 것을 가지는 것이 재미있게 사는 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윤 원장은 현재 인간개발연구원, 세계미래포럼, 백강포럼에 출석하는 중이다. 그는 강사가 일방적으로 강연만 하는 포럼은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능성과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의사소통의 기술인 퍼실리테이션(Facilitation)의 최고 전문가였기에 당연한 생각일 것이다. 자신이 포럼을 한다면 토의와 참여 형식이 주가 되는 형식을 하고 싶다는 의견을 밝혔다. “나이 들어서 좋은 점이라면 심적으로 여유가 생긴 겁니다. 듀폰에 있을 때는 낮에 일하고 밤에도 일해야 했어요. 글로벌기업이라 시차에 따른 업무들이 야간에도 발생했거든요. 그리고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 좋습니다.” 윤 원장은 항상 사람들이 뭔가 생산적이고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과연 인재 전문가다운 성향을 드러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꿈이 없으면 지루해져요 나이가 들면서 중요해지는 배우자와의 관계에 대해서 물었다. 나이가 들어 남편이 은퇴하고 나면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진다고 하여 관계가 좋아지는 게 아니라, 되레 갈등이 커지는 경우도 많다. “저는 터득했죠(웃음). 공동관심사를 가지는 겁니다. 아직은 둘 다 일하느라 바쁘긴 하지만. 그리고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지루해지는 이유도 꿈이 없어서입니다. 가급적 부부가 함께 꿈을 찾는 것이 생산적인 일이죠.”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다는 건 결국 존중에 대한 이야기다. 인터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람을 대하는 전문가로서 윤 원장의 기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묵직한 대답이었다.
- 2015-07-16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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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투어]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친퀘테레 국립공원은 아름다웠다
- 이탈리아는 크고 넓었다. 온 도시마다 문화유적지의 보고이며 풍치가 빼어나다. 특히 토스카나(Toscana) 지방은 이탈리아 여행지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토스카나 여행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피렌체를 시작으로 가까운 ‘빈치(Vinci)’, ‘피사(Pisa), ‘루카(Luka)’, 고대 중세도시의 유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시에나(Siena), 성프란체스코와 성 클라라가 몸소 고행하던 ‘아시시(Assisi)’ 등. 그 어느 곳도 놓치면 아쉬울 곳들이다. 더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친퀘테레(Cinque Terre) 국립공원이다. 토스카나는 이탈리아 중부의 아펜니노(Appennino) 산맥과 티레니아(Tyrrhenia) 해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고대 에트루리아(Etruria) 문명의 발상지로 이탈리아를 상징하는 모든 것을 다 갖췄다. 가는 곳마다 유명 예술가들을 만나게 돼 놀라운 건축양식에 입이 쩍 벌어진다. 산간지대가 아니더라도 올리브 나무는 지천이고 떫지 않은 와인 맛에 매일 길이 들여진다. 무엇보다 한국음식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맛있는 메뉴가 지천이다. 여러 지역 중에서 최근 들어 전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곳이 친퀘테레 국립공원이다. 이탈리아 북서부의 리구리아(Liguria) 주에 위치한 친퀘테레는 국립공원으로 보호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단 한 지역을 일컫는 게 아니다. 라 스페치아(La Spezia) 지방의 5개 해안 마을을 철도와 도보용 도로로 연결하고 있다. 한국을 예로 들자면 ‘한려해상국립공원’처럼 남해안 일원을 함께 부르는 것과 같다. 친퀘테레의 5개 마을을 천천히 즐기려면 넉넉하게 시간적 여유를 갖고 가야 한다. 단 하루 만에 5개 마을을 섭렵할 수 없다. 몬테로소 알 마레(Monterosso al Mare)와 베르나차(Vernazza), 코닐리아(Corniglia), 마나롤라(Manarola), 리오마지오레(Riomaggiore) 등이 마을 이름이다. 리비에라(Riviera) 해안마을을 잇는 거리는 총 18㎞. 직선으로 이어진 길이라면 어려울 게 없고 관심 또한 끌지 못했을 터. 눈부시게 푸르른 청빛 바다와 기암, 그리고 마치 기암 위에 들어선 듯한 형형색색의 가옥들. 이곳의 가옥들이 색칠되면서 관광객들의 발길이 더 이어졌는데, 바다로 조업 나간 남편이 집을 잘 찾아오라고 아내들이 건물에 색칠을 덧칠했단다. 형형색색 빛깔을 달리하는 작은 건물들이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그림 같은 모습을 연출한다. 이제는 오랜 세월이 흘러 벽면 군데군데 색이 벗겨지고 바랬지만, 그 자체로 또 다른 멋을 느낄 수 있다. 친퀘테레 여행 시작은 대부분 리오마지오레부터다. 이른 아침, 첫 마을의 느낌은 경이롭다.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늘어선 골목길을 빠져나와 아침 햇살이 마을 안쪽으로 조금씩 스며드는 모습에 그저 할 말을 잃는다. 특히 필자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것은 자그마한 항구에 매어 있는 조각배. 물감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바다색 위에 형형색색, 이국적인 향기를 물씬 자아내는 배들이 정박해 있다. 어부와 지역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우러지면 자꾸만 영화를 보는 듯 착각하게 된다. 아름다움을 넘어서 여행객의 마음을 묘하게 뒤흔들어 놓는다. 한참을 할 말 잊고 앉아 있다가 다음 마을로 가는 행로는 기차가 아닌 보트였다. 배를 타고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가장 눈길을 끄는 네 번째 마을을 비켜 다섯 번째 마을인 몬테로소 알 마레에 발을 내디뎠다. 몬테로소는 해안을 따라 가옥들이 가로로 길게 펼쳐져 있다. 첫 느낌은 생각보다 큰 마을이라는 것. 어느 마을에나 있음직한 성 프란체스코 교회. 마을은 마치 두 개로 나뉜 듯 해안을 따라 날개처럼 가옥이 이어진다. 해안 길은 동굴로 이어지는데 어둑한 동굴 끝자락에서 흘러나오는 길거리 음악가의 노랫가락이 마음을 흔든다. 봄부터 가을까지도 낮 햇살이 따가운 이곳. 사람들은 으레 수영을 즐긴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집에서 산 달짝지근한 아이스크림의 맛이 혀끝을 감싼다. 해안가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마을 길이 끝나는 지점, 눈길을 끄는 바위 조각이 있다. 안내표시 없는 그 바위 위에 만들어진 조각의 표정은 온갖 고행의 흔적으로 일그러져 있다. 해안가에서 잊히지 않을 정도로 맛있는 해물파스타를 먹고 이어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베르나차로 향한다. 울릉도 도동 산책로를 연상케 하는 해안가의 아름다움에 빠져 절로 걷게 된다. 트레킹을 즐기는 많은 사람들과 해안선을 바라보며 함께 걷는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길에 어김없이 오랜 세월 만들어진 소로. 먹고 살기 위한 사람들과 노새들의 땀 흘림으로 만들어진 길. 깎아지른 벼랑길의 쓸 만한 땅에는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가 심어져 있다. 우리나라 남해의 가천 다랭이 마을이 연상되는 곳. 하지만 이 길은 걷기에는 많은 시간과 발품을 팔아야 한다. 여행정보서는 분명히 ‘걸으면 좋은 길’로 소개할 테지만 현실에서는 마치 산행을 하는 듯하다. 무더운 땡볕, 마음을 비우고 걷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는 동양 여행객.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후들후들해질 지경에 이르렀을 때도 3분의 1도 가지 못한 지점. 결국 되돌아오는 길이 더 낫다는 것을 파악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절대적으로 기차를 타고 베르나차로 이동하는 게 나을 것이다. 베르나차(네 번째 마을)는 몬테로소와는 모습이 다르다. 기차역에서 항구로 이어지는 길목은 관광객들로 넘실댄다. 다섯 마을 중에서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이기 때문이리라. 베르나차는 약 1000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지만 여느 곳과 다르게 고대 성곽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거기에 다섯 마을 중 유일하게 항구가 있다. 항구에서는 어김없이 아름다운 배들을 볼 수 있고 수영,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을 만난다. 이것으로 베르나차는 끝이 아니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길에 만들어진 요새가 있다. 마을 전체를 조망하거나 멋진 바다 풍경을 보려면 기꺼이 올라가야 하리. 입장료도 비싸지 않다. 사방팔방 펼쳐지는 풍경에 후들거리는 발걸음의 피로가 녹아내리는 듯하다. 성곽의 역사를 굳이 모른들 어떠하리. 그곳에서 하객 한 명 없는 미국인 커플의 결혼식 장면이 더 오랫동안 기억된다. 주례, 사진사, 들러리, 그리고 성혼이 끝나면 신부가 내미는 종이에 사인을 하는 것으로 결혼식은 끝이 난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짐작한다. 미국서 사랑을 속삭였을 것이고 그들은 이탈리아 친퀘테레 바닷가의 한 마을에서 결혼식을 올리자고 말이다. 오후 햇살을 벗 삼아 그들은 키스로 성혼이 되었다. 어떤 사랑이야기가 있든, 어떻게 살아가든, 그게 이 순간 무어 중요하리. 그저 하객 없는, 간단한 예복을 입은 막 결혼한 커플의 행복하고 감격에 겨운 신부의 눈물이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을. 그것을 지켜보는 여행객의 마음속에도 또한 추억 한 자락이 새겨졌다. 베르나차 옆 마을은 코닐리아다. 방향을 어디에서 시작하든 중간에 낀 마을이다. 다른 마을은 기차역에서 내리면 바로 마을을 만나지만 이곳은 마을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마을 또한 다섯 마을 중 아주 작고 바닷가 마을이라기보다는 산촌 같은 느낌이다. 이는 마을이 포구가 아닌 가파른 언덕 위에 터전을 잡고 있기 때문. 하지만 이 마을만의 매력이 있다. 두 사람이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좁은 도로에서 만나는 숍들이 그 어느 마을에서 보는 것보다 아름답다.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화분으로 장식된 유리창도 이곳에서는 예술적이다. 바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을 흥얼거리며 몇 발자국 더 떼었을까? 길은 끝나고 벼랑길 아래로 바다가 정원처럼 펼쳐진다. 바다가 지척이 아니어서 새롭다. 그 자리에 어김없이 자리한 작은 바. 지는 해를 보면서 와인 한잔을 마시면서 듣는 팝송가락이 살갑게 가슴팍을 후벼온다. 하루에 다섯 마을을 돌아보는 사이 해가 지고 있다. 마지막 마을은 마나롤라다. 이곳은 기차역에서 내려 포구로 길이 이어진다. 포구로 가는 길목에서 오래된 사진을 만난다. 거의 포도가 주제가 된 사진이지만 사진 속 사람들의 표정에는 인간미가 물씬 배어 있다. 주름진 얼굴, 햇살에 찌든 검은 피부, 무겁고 힘겨워 보이는 포도 농장, 희미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사람들의 표정이 이 해질녘에 특히 정겹다. 어쩌면 1338년 지어졌다는 고딕 양식의 산 로렌초 성당도 이들과 삶을 같이 하고 있을 것이다. 항구까지 이어지는 짧은 길. 그 길 끝에는 어김없이 아름다운 바닷가 풍경이 펼쳐진다. 조금씩 마을 건물색이 해거름에 진해지면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도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길 밑, 큰 바위 밑으로 난 소로에는 어김없이 조각배가 정박해 있고 그 바닷길 끝에 자그마한 기암이 있다. 그 시간에 지는 해는 묘하게 심장을 떨리게 한다. 이어 레스토랑에 사람들이 자리를 틀고 앉는 시간, 필자는 기차시간에 쫓겨 급하게 레스토랑에 앉아 해물스파게티를 시켜 먹었다. 기차시간과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 한국인들의 정서를 이해 못하는 웨이터는 내게 속삭인다. “저녁 9시부터는 라이브 음악이 울려.” 언제쯤에나 이런 아름다운 정서에 내가 흡입될 수 있을까? 다섯 마을 중에서 필자의 가슴속에 깊게 새겨진 곳. 풍치였을까? 아니면 영원히 잊지 못할 정도로 맛있는 해물스파게티 맛이었을까? 교통편 피렌체나 밀라노, 제노아 등지에서 철도를 이용하면 된다. 라스페치아 역을 비롯해 5개 역에서는 철도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친퀘테레 카드(Cinque Terre Card)를 판다. 하지만 기차 말고도 걷거나 보트를 타거나 하는, 제각각 여행패턴이 다르므로 사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먹거리 친퀘테레 바닷가 마을에서는 아주 맛있는 해산물 요리를 맛볼 수 있다. 레스토랑마다 맛이 제각각.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을 찾는 것도 요령이다. 레스토랑에는 칠리가 있어 우리 입맛에 맞게 음식을 즐길 수 있다. 또 포카치아(Focaccia)라는 지역 특산 빵이 있지만 한국인 입맛에는 아주 짜다. 이탈리아 전역의 레스토랑에서는 테이블 커버 차지를 받는다. 거기에 서비스 요금을 함께 내야 한다. 레스토랑에서 한 끼 식사를 하게 되면 원래의 가격보다 훨씬 웃도는 돈을 내야 한다. 숙박정보 친퀘테레 바닷가 마을은 대부분 숙박비가 비싸다. 라스페치아에 숙소를 정해놓고 다녀도 무관하다. 대부분 숙박지에서는 셔틀버스를 운행한다. 필자가 머문 고지대에 있는 호스텔은 가격이 저렴하고 조용했다. 분지처럼 움직이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저녁이면 하루 세 번씩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어 편리했다. △ 글ㆍ사진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 2015-06-12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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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어머니]“어머니를 속여 죄송합니다”
- 나른한 봄볕 아래 어머니를 생각하는 조창화(趙昌化·78) 대한언론인회 고문을 만나 담소를 나눴다. 그는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어머니의 값진 추억을 생생하게 그렸다. 흡사 계절마다 살아 돌아오는 장미꽃의 슬픈 아름다움처럼, 어머니의 모습은 그렇게 조 고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오직 1남 2녀 세 자식을 위해 헌신하셨죠. 그중에서도 아들인 제게 몰두하셨어요. 그래서 저에게 어머니는 늘 애틋하고 각별한 존재죠. 이렇게 다시 회고하니 늘 혼자였던 어머니 모습에 목이 멥니다.” 조창화 대한언론인회 고문은 어머니 박신행(朴信行) 씨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없다며 가슴 아파했다. 어머니와 가족의 삶을 풀어내는 그의 목소리에는 그리움과 아쉬움이 보태졌다. 그는 자신이 일곱살이었을 때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 나이 마흔을 훌쩍 넘어 낳은 아들이었던 그는 1945년 초, 어머니의 손에 끌려 서른 시간이 넘는 기차 여행 끝에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이라는 작은 포구에 닿았다. 그곳은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그 좋은 재산 다 놔두고 몸만 나왔으니 어떻게 하나”라는 어머니의 푸념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는 그곳에서 한천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일제 치하였던지라 다마고(계란) 잇고(1개), 니고(2개)를 먼저 배워야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일본 학교를 다니다 온 두 누이로부터 개인 교습을 받곤 했다. 해방이 된 그 해 8월 하순의 어느 날, 그는 아버지 조이선(趙利善) 씨와 함께 100여 리 떨어진 평양에 간 적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으로 갔는데 연단에서 키 큰 남자 한 명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저 사람이 바로 김일성이다”라고 했다. 마치 불길한 전조 같은 기억이었다. 함경도로, 서울로, 그리고 부산으로 소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그의 가족은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함경남도 신고산이란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 땅과 과수원, 광산 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고산 인민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아침마다 소년단 행진곡을 부르며 대열을 갖추어 등교할 때는 신바람이 났다. 그러나 역사의 비극이 그에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상한 사람들에게 끌려 나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후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전갈이 왔다. 죄목은 ‘유산 계급’. 공산당의 ‘숙청’ 작업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소년 조창화는 학급 위원 자리에서 내쫓기고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됐다. 부당한 처사들 속에서 학교에 나가는 둥 마는 둥 집에서 지내야 했던 그에게 아버지 소식을 갖고 왔다는 한 남자가 “어머니, 아버지는 안변 감옥을 탈출해 이미 월남을 했고, 나는 너희 3남매를 남쪽으로 데려가기 위해 왔다”면서 아버지의 편지를 내밀었다. 3남매는 1948년 8월의 어느 날, 부모님을 만나기 위한 2박 3일 동안의 월남 행군을 시작했다. 행군은 주로 밤에 이루어졌다. 고생 끝에 도착한 동두천에서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서울에서 아버지의 권유로 공옥소학교라는 사립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남대문시장 근처, 지금의 상동교회 뒤에 자리 잡은 이 학교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한 반씩밖에 없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소학교였다. 고된 경험 끝에 부모님과 함께하게 됐다는 것에서 그는 겨우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2주 남짓 지났을 시점인 1950년 7월 13일, 그의 나이 12세 때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서울이 온통 인민군으로 뒤덮인 날, 그는 아버지를 모신 영구차에 탄 채 무악재를 넘어 꾸역꾸역 밀려오는 인민군을 헤치고 홍제동으로 향했다. 묘지였던 그곳에서 5일장으로 장사를 치렀다. 그리고 그 후 석 달 동안 방공호에서 살아야 했다. 얼마나 지난 다음일까? 어느 날 국군이 서울로 들어왔고, 그해 12월 하순에 그의 가족들은 다시 짐을 꾸려 부산으로 가는 피난 열차를 탔다. 무려 6일 동안의 거북걸음 끝에 부산역에 도착한 것이 12월 26일 즈음, 어머니와 2녀 1남의 3남매는 사고무친(四顧無親)한 부산역 한 귀퉁이에서 고달픈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홀어머니 슬픔 헤아리지 못한 불효자 “그때 어머니는 겨울 털모자를 팔고, 그 돈으로 쌀을 사고…. 그런데 뭔가를 팔려고 해도 살 사람은 별로 없고…. 그 와중에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이나 아버지의 빈자리를 제가 헤아려 본 적이 있는가 하면…. 그런 기억들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엄청 울 수밖에 없었죠.” 부산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건 상상조차 못했다. 학교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동네 아이들과 사귀던 그는 미군 부대에 들어가 미군의 구두를 닦아주는 ‘슈샤인 보이’를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요즘의 우리들은 꽁트에서나 볼 수 있는 ‘기브 미 쪼꼬렛’이라는 어설픈 영어 뒤에 숨어 있는 건 시대가 만들어낸 고통이고 절박한 생존의 기술이었다. 조 고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슈샤인 보이’를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어머니는 “이대로 뒀다가는 애가 큰일나겠다” 싶었다. 더군다나 애지중지 키운 집안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어머니가 그를 미군 부대 대신 데려간 곳은 문래동 대선소주공장의 한 귀퉁이였다. 그곳은 미국인들에게 학교를 빼앗긴 성남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노천 수업을 받는 곳이었다. 이리하여 그의 인생에서 네 번째 초등학교가 시작된다. 졸업이 예정된 6학년 말까지는 한 달 정도 남았을 뿐이었고 다른 아이들은 연합고사를 준비한다고 야단법석인 가운데 그는 친구들의 노트와 책을 빌려 보기에 바빴다. 비록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달포 뒤에 성남초등학교 졸업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로써 초등학교 4개를 거친 그의 남행만리(南行萬里)는 부산을 마지막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의대에 안 가 죄송합니다” 1953년, 이제 여드름꽃이 피는 나이가 되는 조 고문은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대열에 끼여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고등학교 3학년으로 입학한 그는 당장 다가온 대학 입시 준비로 24시간이 모자랐다. “제가 있던 3학년 4반 담임인 육인수(故육영수 여사의 오라버니) 선생님을 만난 어머니는 ‘창화는 무조건 서울대학교 의대에 가야 하니까 그리 지도해 달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의과가 싫어 정치학과에 서류를 제출했고 어머니와 육 선생은 제가 당연히 의대에 넣은 것으로 알고 있었죠.” 서울대 정치학과에 합격한 그는 마치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서울 등지의 대표 준재들이 모인 형세를 이루는 정치학과 내에 함경도 대표로 자리 잡았다. 1961년에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대한일보 기자로 들어가 국회, 청와대 출입을 시작했다. 1973년, KBS 정치부 차장으로 이직하면서 언론인으로서의 그의 삶은 보다 탄탄해진다. “제가 KBS 부산방송 총국장이었던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나이 53세일 때 아버지와 사별하고, 이후 35년이란 세월을 우리 남매 세 명을 위해 개가하지 않고 홀로 살다가 88세에 세상을 떠나셨죠. 어머니는 아버지와 삶을 같이한 시간보다 홀로 산 시간이 더 길었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카리스마 있는 여장부로 기억했다. 그의 기억 속의 어머니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면 막일도 거르지 않았고 늘 당당했다. 나이 들어 출석하는 노인회관에서는 화투도 잘 치고 보스 노릇도 곧잘 했다. 그는 어머니를 인정이 많고 시대를 앞서 갔다고 평했다. 지고는 못사는 성격에 일본어와 중국어도 유창했던 것도 어머니다운 점이었다. 어머니 묘지에 대동강 모래를 뿌리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는 언제일까. “다들 비슷하겠지만,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는 어려울 때, 힘들 때죠. 어머니는 언제나 제 편이셨으니까요. 어떤 일이 있어도, 영원한 제 편이니까요.” 어머니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땠을지는 미뤄 짐작이 간다. 어머니는 그에게 무한한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하지만 그 사랑에 그는 변변하게 보답 못한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저는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날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태풍 때문에 비행기가 못 뜨더군요. 그래서 비행기로 못 움직이고, 새마을호를 겨우 타서 6시간 걸려서 집에 도착했죠. 그날 아침에 어머니가 ‘애비는 어디 있냐’고 물으시며 ‘화장실에 좀 가자, 씻고 싶다’고 하셨답니다. 가시면서 저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삶을 묵묵히 보여준 것뿐이지만, 그 모습 자체가 그에게는 80세가 다 된 지금까지 ‘정신적 울림’으로 남아 있었다. “청와대 출입 시절 잊지 못할 일이 한 가지 있지요. 1972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적십자회담 취재단으로 들어가 대동강을 산보하고 그 강변에서 모래를 채취할 수 있는 큰 행운을 얻었어요. 그래서 1985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의 고향 대동강의 모래를 뿌려드릴 수 있었죠.”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아버지 묘가 없어진 기억이 나서다. “사실 아버지 묘지를 잃어버렸어요. 부산 피난살이에서 돌아와보니까 홍제동의 묘지 자리를 불도저로 확 밀어버렸더군요.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아버지 영정만 가지고 합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어머니 유골을 파서 화장을 했어요. 그리고 용인공원묘지에 가로 60cm, 세로 40cm 사이즈의 와합, 즉 눕히는 비석으로 바꿨어요.” 비석에는 배천(白川) 조 씨 가족묘라고 쓰여 있고 뒤에는 사용 수칙을 적었다. ‘여기는 배천 조씨 묘지다, 화장을 해서 묻는다, 직계비속들은 만약 꽉 차면 맨 위부터 그대로 파서 거기에 다시 사용해라.’ 용인공원묘지가 상당히 큰데 그렇게 한 건 그가 처음이다. “한 40구는 들어갈 것 같아요. 내가 죽고, 한 5대까지는 걱정하지 않을 것 같네요.(웃음)” 그는 어렵게 묘지개혁을 했다며 어머니 같은 여장부라면 좋아하실 일이라고 평했다. 그가 요즘 즐겨 말하는 ‘첫째는 남한테 피해 주지 말자이고, 둘째는 정리정돈’이란 말 또한 어머니에게서 배운 습관이다. “요즘 이제 일곱살인 우리 손녀에게 할아버지가 뭐라 말했냐고 집적대면 ‘남 폐 끼치지 마라, 정리정돈이요’하고 냉큼 대답하죠. 그 재미에 삽니다.” 조 고문은 인터뷰 내내 진중하고 묵직하게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 손녀 얘기가 나오자 금방 함박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를 향한 추모의 정은 이제 유일한 손녀에 대한 짝사랑이 되어 삶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에게 손녀는 그의 어머니가 주신 축복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 2015-06-0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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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준생, 네 맘 안다] 3. 달라진 취업 트렌드와 자식에게 주는 조언
- 경영학을 전공한 지방대생의 한탄이 이어진다.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2년 넘게 100번이 넘는 입사지원서를 냈지만, 면접을 본 것은 5번 이하였고, 최종 면접에서 다 떨어졌다고 한다. 그는 요즘 기업들이 인문계 학과를 선호하지 않으며 지방대생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한다. 50명을 뽑는 대기업 경쟁률이 400 : 1이라고 한다. 생각을 바꾸라고 했다. 400 : 1이 아닌 1만9950명의 탈락과 50명의 합격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기업의 채용 프로세스는 크게 4단계로 이루어진다. 서류전형, 인·적성 검사, 면접, 신체검사이다. 서류전형은 원하는 기업에 주어진 기일 안에 입사지원서를 제출한다. 많은 기업들이 스펙을 보지 않는다고 하지만, 입사지원서를 통해 지원자가 어떤 성장 과정을 겪었고, 무슨 경험을 했으며, 자신의 기업의 인재상이나 핵심가치에 부합되는가를 확인한다. 인·적성 검사는 지원과 동시에 실시하는 회사가 늘고 있다. 그러나 S그룹처럼 자신들이 개발한 검사지를 통해 별도 일시를 정해 인·적성 검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통상, 서류전형과 인·적성 검사를 통해 최종합격자의 5배수 정도를 면접대상자로 선정한다. 앞 기업의 경우, 2만 명이 지원하여 1만9950명이 이 과정에서 떨어진다. 면접은 1:1면접, PT면접, 집단토론, 최종 임원진 면접으로 이루어지고, 합격자에 한해 신체검사를 실시하여 이를 통과한 사람이 최종합격하게 된다. 50명 안에 들기 위해 치열하게 준비할 수밖에 없다. ◇성장 시대인 1980년대와 저성장 시대인 지금은 너무나 다르다 1950~1960년대에 태어나, 1970년 말과 1980년대 대학을 졸업한 사람의 비율은 결코 40%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현재 대학에 입학하는 비율은 90% 수준이다. 1970~1980년대는 성장 시대였다. 지금은 저성장 시대이다. 대학을 졸업하면 자신이 입사하고 싶은 회사를 골라 가던 행복했던 시절은 지났다. 기업이 원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시대이다. 요즘 채용 트렌드를 보면 크게 6가지로 살필 수 있다. 첫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심화이다. 스펙을 안 본다고 하지만, SKY, 포항공대, KAIST출신은 여러 회사에 합격한다. 그러나 수도권 대학의 학생들도 서류전형에서 떨어지고 있으며, 지방대생은 100번 넘게 떨어졌다는 하소연을 한다. 둘째, 이공계 특정학과 편중현상이 가속되고 있다. 화학, 기계, 전기, 전자, 건축 등 일부 이공계 학과는 독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공계와 인문계 비중이 1970~1980년대에는 인문계가 더 높거나 50 : 50의 수준이었으나, 현재는 이공계와 인문계 비중이 80~90 : 20~10 수준에 있다. 인문계가 선호하는 지원 부서까지도 이공계가 차지하는 경향이 있다. 인문계 비경영과의 경우, 고민의 정도는 심해진다. 셋째, 인턴제도의 확대이다. 회사가 면접을 통해 입사 지원자를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은 1시간을 넘기 어렵다. 한 사람의 인성이 안 좋은 직원이 미치는 영향이 갈수록 크다 보니, 사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입사 여부를 판단하는 인턴제도를 선호한다. 과거에는 특별한 일이 없이 인턴 제도를 운영했다면, 요즘은 도전과제를 부여하고 다각적 측면에서 함께 할 사람인가를 평가한다. 넷째, 면접의 강화이다. 1980년대에는 일반적인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직무보다는 회사에 대한 질문이 많았고, 입사지원자 입장에서는 그 회사와 하고 싶은 직무에 대해 그렇게 많은 준비를 하지 않았다. 1980년대 초에 입사한 사람들은 PC가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지인들을 통해 귀동냥으로 들은 수준의 지식으로 면접에 임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 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취업동아리를 만들어 개인면접, PT면접, 집단토론에 임하는 예상 질문을 만들어 완벽하게 외운다. 어느 지원자는 예상 문제 100개를 선정하여 답안을 작성하고 외우면서 어떤 표정을 지을까를 생각했다고 한다. 모의 면접도 수차례 실시했고, 같은 회사를 희망하는 지원자들이 모여 정보를 공유하는 등의 많은 노력들을 한다. 면접을 하다 보면, ‘내가 면접관이 아니고 지원자였다면, 나는 100% 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요즘 지원자는 면접에 대한 엄청난 준비를 하고 온다. 다섯째, 경력사원 채용의 확대이다. 내 후배는 내가 채용하여 내가 키운다는 순혈주의 생각은 갈수록 희박해져 가고 있다. 일정 기간 회사와 직무를 경험하여 바로 업무에 투입할 수 있는 경력사원들을 회사가 선호한다. 저성장이고 치열한 경쟁 하에서 백지 상태인 신입사원을 채용하여 2~3년 가르치는 것에 대한 부담이 크다는 입장이다. 여섯째, 직무 중심의 채용으로 심화되고 있다. 1970~1980년대에 대학에서 배운 전공의 깊이는 법대 출신이 법전을 빨리 찾는 수준으로, 회사에 와서 대부분 새롭게 업무를 배웠다. 회사가 필요로 하면 그곳에 배치 받아 일했다. 지금은 직무 중심의 채용이 늘고 있다. 이 직무를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지식과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명시한다. 이 기준이 아니면 지원 자체가 안 되게 하는 곳도 있다. 산학협동 등을 통해 특정학과 출신들을 ‘선확보’ 개념으로 뽑는 곳도 있다.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일정 수준의 사전 지식을 대학에서 습득해야만 한다. 이런 과정을 통과하고 입사했다 할지라도 신입사원 입문과정, 수습기간이라는 혹독하고 타이트한 심사기간을 설정하여 적응하지 못하는 사원은 걸러내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선택한 요즘 젊은이들이 힘들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들ㆍ딸들에게 무엇을 조언할 것인가? 취업이 어렵다. 그렇지만 취업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매년 많은 기업들이 취업공고를 하고 신입사원들을 채용하고 있다. 자녀들에게 “너의 인생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하기에는 그들의 어깨는 무겁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자녀들에게 3가지 조언을 해주길 바란다. 첫째, 먼저 자신이 원하는 회사와 직무를 확실하게 선정해 놓으라고 조언해야 한다. 3박 4일의 중국 여행을 위해 한 달을 준비하면서, 인생 3분의 1 이상의 영향을 미치는 기업과 직무의 선택을 임박해서 결정한다. 심한 경우에는, 아무 회사나 지원한다. 회사 홈페이지 보고, 저장해 놓은 입사지원서를 수정해 전송하고는 떨어졌다고 힘들어 한다. 자신이 원하는 회사와 직무를 사전에 정했다면, 3~4학년 때 인턴이나 아르바이트를 그 회사에서 하고, 그 회사를 방문해 충분한 지식과 인적 네트워크를 쌓아야 한다. 둘째, 절박하고 악착같아야 한다. 자녀들이 노력한다는 것은 알지만, 절박하게 노력하는가, 악착같이 준비하는가를 물어 봐라. 발레리나 강수진 씨는 매일 15시간 이상 연습을 하며, “내가 이 정도가 됐다고 생각할 때, 내 예술 인생은 끝이다.”라고 다짐한다고 한다. 한 지원자는 클리어 파일에 그 회사의 자료를 100매 이상 준비해 완벽하게 외웠다고 한다. 1주일에 한 번 이상 그 회사와 원하는 직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자신의 것으로 했다고 한다. 내가 지원한 회사가 내 회사라는 생각을 갖고 회사 정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주인의식을 가지라고 조언해야 한다. 셋째, 실패를 통해 인생을 배우며 긍정적 사고를 습관화하라는 조언이다. 자신이 원하는 회사에 실패했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슬프고 아쉽고 힘들겠지만,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인생을 길고 멀리 보라며 어깨를 두드려 줘라. '내 후배는 내가 채용하여 내가 키운다'는 순혈주의 생각은 갈수록 희박해져 가고 있다. 일정 기간 회사와 직무를 경험시켜 바로 업무에 투입할 수 있는 경력사원들을 회사가 선호한다.
- 2015-06-02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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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투어] 천혜의 오지 마을, 응곡마을
- 울퉁불퉁한 비포장과 포장 길이 4㎞ 정도. 하늘 향해 쑥쑥 뻗어나간 소나무 숲길을 지나고 몇 개의 개울을 잇는 다리를 건너고 시원한 계곡 길을 따라 지루할 정도로 한참을 가야만 민가 한 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띄엄띄엄 텃밭 주변으로 민가가 둥지를 틀고 있는 모습에서야 겨우 사람 사는 곳이라는 곳을 알게 되는 곳. 바로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응곡마을(일명 통바람골)이다. 글 이신화 여행작가 마을 사람들은 뒷산에 매가 사는 골짜기라는 뜻을 지닌 ‘응곡산(鷹谷山)’이 있어서 ‘응곡마을’이라고 하는데, 지도상에는 응복산(1359.6m)으로 표기되어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10~11가구가 있다. 토박이들은 아니고, 10~20여 년 전부터 이곳에 둥지를 튼 사람들이다. 대부분 겨울에는 마을을 떠나 있다가 봄철 산나물이 나올 즈음에 모여든다. 4월 말에서 5월 초순경이면 얼레지 나물로 초문을 연다. 얼레지는 일명 ‘가제 무릇’이라 불리기도 하며 고산지대의 숲속 음지에 자라는 백합과의 다년생 초본이다. 높이가 25㎝ 정도 자라고 4월에서 6월에 자주색(흰색 변이도 있다) 꽃이 핀다. 잎이 얼룩덜룩하여 얼레지라 이름 붙였다고 하며 꽃말은 ‘질투’ 또는 ‘바람난 여인’이라고 한다. 얼레지는 씨앗이 발아하여 꽃을 피우기까지 7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산나물을 뜯으러 산으로 오르는 동네사람들을 따라 함께 나서본다. 임도가 끝나는 지점에서 1시간 정도는 걸어야 한다. 나무들은 아직도 썰렁한 겨울 분위기를 내지만 산행 길에 간간이 피어난 야생화가 반갑다. 노랗게 피어난 ‘괭이눈’과 ‘꿩의 바람꽃’, ‘댓잎 현호색’ 노랗게 종 모양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백두대간 능선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한계령 풀’이 눈 속에 들어온다. 특히 한계령 풀은 무지 희귀한 꽃으로, 지리산 모데미골에서 처음 발견된 모데미풀처럼 한계령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죽 길을 지나고 능선 참나무 군락지 밑으로 귀하디귀한 야생화가 눈에 띄더니만 능선을 넘어 고갯길에 이를 즈음에는 완전히 야생화 화원이 펼쳐진다. 일부러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화원을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노란 꽃 사이로 이미 나물꾼들이 뜯어가 버린 얼레지의 보랏빛 꽃까지 합세해 더욱 빛이 난다. 생계가 아니라면 그냥 피고 지는 얼레지꽃 군락지까지 합세했다면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야생화 화원이었을 것이다. 주민들은 나물이나 뜯어가라고 하지만 보랏빛 꽃이 너무나 처연해, 가늘게 봄바람 한 줌에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꽃잎이 가련해서 차마 뜯어버릴 수가 없다. ◇약수산에서 만난 신비한 철분 약수, 명계 약수터 그렇게 한참이나 야생화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새싹 움트는 몸짓을 느끼면서 돌아오기 싫은 길을 되돌아 나온다. 나물꾼들이 얼레지를 채취해 내려와 나물 삶는 데까지는 몇 시간의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마을을 비켜 임도길 중간 즈음에서 계곡 물을 건너가면 소로가 나온다. 계곡 옆길로 난 길이라 산책하기에 아주 좋다. 가래나물, 팥고비, 풀고비, 당귀싹, 화살나물, 골담초 등 나물 새순이 뾰족하게 올라오고 애기 괭이눈과 꽃잎에 점이 박혀 보기 쉽지 않다는 ‘긴 개별꽃’도 눈에 띈다. 산나물과 야생화를 관찰하면서 10분 남짓 올랐을까? 자그마한 폭포를 앞두고 약초꾼이 지어놓은 천막이 나선다. 켜켜이 장작을 싸놓고 부엌과 방을 들여놓고 뒤편에는 연통도 있다. 분명히 사람이 살았음직한 나물꾼의 천막은 당시에도 이곳에 있었는데, 여전히 사람은 만날 수 없다. 자그마한 폭포를 끼고 계곡을 건너면 암반 주변이 철분 빛으로 벌겋게 변해 있다. 누군가 계곡물과 섞이지 말라고 돌을 쌓아 막아 두었다. 자연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계곡 옆에 어떻게 이런 철분 약수터가 생겼는지 생각할수록 오묘하다. 붉은 물 사이로 뽀르르 기포가 올라온다. 물위에 떨어진 낙엽을 걷어내고 손으로 물을 마신다. 강한 철분 맛보다 톡 쏘는 탄산 맛이 느껴져 설탕만 넣으면 사이다와 같다. 이 약수를 통상 명계약수라고 하는데 통바람 약수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산 이름도 약수산이다. 약수산을 둘러싸고 남으로는 명계약수, 서쪽으로는 삼봉약수, 북으로는 갈천약수, 동으로는 불바라기약수가 있다. 약수가 여러 곳에서 나온다고 하여 부른 듯하다. ◇직접 만든 아궁지에 산나물 삶아 말리고, 지친 몸에 술 한잔 두어 시간이 지난 후, 필자가 이 마을에서 맨 처음 만났던 노부부가 사는 집을 찾는다. 자루에 나물이 가득 차면 집으로 와서 곧바로 나물을 삶는다. 시멘트로 네모진 통을 만들고 뒤에 연통을 단 아궁이가 있다. 장작불을 지피고 다듬지 않은 얼레지를 넣고 뚜껑을 닿고 5분 정도 삶아주고 양철통 위에 꺼내 말리면 되는 일이다. 할아버지가 나물을 삶는 동안 할머니는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한다. 커다란 무쇠솥이 두 개, 고기도 구워 먹고 화로로 쓰는 널찍한 양철통이 한편에 놓여 있다. 깊은 산 물을 끌어다 쓰기 때문에 수도꼭지는 잠그지 않은 채로 졸졸 물이 흘러내린다. 무쇠솥에 물을 한가득 넣고 군불을 지핀다. 자그마한 풀무를 돌려가면서. 가스렌지 위에서는 구수한 된장국이 부글부글 끓는다. 하루 종일 나물 뜯느라 지친 몸을 얼레지 된장국에 찬밥을 넣고 김치 한 가지로 때우는 것이다. “하루 정도만 우려내면 돼. 미역국처럼 맛이 좋아서 꼭꼭 얼려 두었다가 자식들에게 주지.” 겨울이면 춘천에 살다가 봄철 나물 뜯으러 온다는 할머니는 인심 좋게 된장국 한 그릇을 퍼준다. 그 맛이 얼레지 묵나물보다 훨씬 좋아서, 슬그머니 욕심이 생긴다. 뜯어오지 못한 것을 후회할 판이다. 그때 이웃 할아버지가 됫병을 들고 나타나 술잔을 돌린다. 자그마한 부엌에 옹기종기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화기애애하다. “얼레지는 귀한 나물이라서 호텔이 아니고서는 먹기가 힘들지. 말려 팔면 제법 비싸게 팔리는 산나물이야. 얼레지는 1주일 정도 후면 끝이 나고 그 다음에도 참나물, 곰취, 전우치 등 두 달 반 정도는 나물 작업을 해야 해.” 힘겨운 산나물 뜯기 작업 후에, 푸성귀로 배를 채우면 얼마나 허기질까 할 즈음 아랫집에서 전화를 한다. 이 집은 더 풍성하다. 고기에 직접 재배했다는 표고버섯과 막 뜯어 낸 곰취와 참나물, 산마늘 쌈이 차려져 있고, 여름까지 먹는다는 묵은 김치와 된장, 굵은 소금장이 있다. 막 지은 밥과 꽁치조림까지 곁들여지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계속 찾아든다. 할일 없는 겨우내 모여 술잔치를 벌였다는 사람들.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면서 밤이 이슥할 때까지 술판을 벌인다. 이 지역에서 나물은 이들의 생계수단이고, 나물 철이 끝날 때까지 산길 오르락내리락 하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사람은 이제 지긋지긋한 작업이 되지만 어쩌다 한 번 들르는 여행객의 눈에는 행복하기만 하다. 아직까지 이런 곳이 남아 있다니. 이것을 관광상품화한다면 덜 힘겹게 살 텐데 말이다. 돌아오는 길, 유난히 하늘에 떠 있는 달빛이 환하다. 주소 홍천군 내면 통바람길 찾아가는 방법 영동고속도로 → 속사IC → 운두령 넘어 창촌 방면으로 난 56번국도 이용 → 창촌 → 구룡령 가는 길에 우측 명계리로 들어가는 446번 지방도로 우회전. 다리 앞에서 왼편 비포장 길로 좌회전 → 응곡마을 맛집과 숙박정보 응곡마을 통바람 산장(011~9795~1684)에서는 식사와 민박이 가능하다. 또 가는 길목인, 이승복 기념관 주변에 운두령횟집(033~332~1943, 송어회, 용평면 운두령로 825), 장수촌(033~332~7419, 토종닭, 용평면 운두령로 286)이 괜찮다. 삼봉 자연휴양림(033~435~8535~6, 홍천군 내면 삼봉휴양길 276)이나 자연속으로(033~334~0770, www.naturalpension.com, 용평면 운두령로 109-49)와 같은 펜션에서는 와인을 시음할 수 있다. 여행포인트 얼레지 채취는 올해 끝이 났고 계절에 맞는, 또 다른 산나물이 싹을 틔울 것이다. 여행객들은 필요하다면 주민들에게서 사오면 될 일이다. △글ㆍ사진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 2015-06-02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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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와 나 - PART3] ‘키즈 마스터’ 백종화의 좋은 조부모 되기 지침서
- 손자녀들을 보면 괜히 미소가 나온다. 보고 있으면 맛있는 것 입에 넣어주고 싶고, 좋은 옷 입히고 싶은 것이 조부모 마음 아닌가. 그런데 가끔은 자녀들이 아이를 잘못 키우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우리 때와 다른 육아 방식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다. 좋은 조부모가 되는 방법, 자녀·사위·며느리와 부딪히지 않고 육아 잘하는 비결을 SBS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의 자문위원인 백종화 아동청소년심리상담센터 소장이 알려준다. ◇손자녀에게 다가가려면 자녀를 노크하라 좋은 조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자녀라는 문을 두드려 손자녀에게 다가가는 것이 좋다. 손주 교육에는 방관과 관심의 균형을 적절히 맞추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손주를 키우는 철학이나 양육 방법을 듣고 존중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자녀와 상충됐을 때 마찰이 생기는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손자녀가 불안함을 느끼고 혼란스러워 할 수 있다. 그러면 아이가 신경질적인 기질로 변할 수 있다. 또한 손자녀에게 주는 지나친 관심은 손자녀들이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아이가 아이답게 크지 못하고 조부모의 눈치를 보며 조부모가 원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이것이 손자녀들이 느끼는 부담감이다. 부담감을 가진 손자녀들은 성장할수록 조부모를 만나는 것을 꺼리게 된다. 자녀의 양육 방식과 철학을 이해하고 그런 방식을 존중할 때 손자녀들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존중 받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아 존중이라는 덕목을 체득할 수 있다. 거기에 자녀들도 부모들이 자신들의 방식을 존중해 준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껴 더욱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자녀는 손자녀에게 다가가기 위한 필수 관문이다. 자녀의 방식과 의견을 얼마나 존중해주느냐에 따라 손자녀의 행동도 달라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가족문화를 만들 때는 추진력 있게 이끌어라 조부모에서 자녀, 손자녀로 이어지는 3대 가족 문화를 만들 때는 조부모의 역할이 커야 한다. 이때는 가족의 큰 어른으로서 목소리가 커도 괜찮다. 어떤 가족이 그 가정만의 뚜렷한 문화가 있다는 것은 10세 이하 손자녀의 정서 안정에 큰 도움을 준다. 가족 문화는 제사나 생일 등의 대소사도 있지만, 한 달에 한 번 함께 밥 먹기, 3개월에 한 번 할머니 집에서 자기 등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도 좋다. 특히, 조부모와 함께 하루를 공유한 후 잠을 같이 자는 것이 좋다. 하루를 함께 공유하면 아이는 가족의 틀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나중에 사고를 넓히는 데 영향을 미친다. 백종화 소장은 “삶을 섞어라. 자녀·손자녀와 지지고 볶아라”라고 조언한다. 손자녀들이 부모에게서 떨어져 조부모와 삶을 섞는 것은 다양한 환경을 체험해 다양한 상황에서 적응력을 높이는 데 이롭다. 그래서 백 소장은 1년에 두 차례 손자녀와 함께 잠자리를 할 것을 추천한다.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손자녀들과 함께 손잡고 하루만 자연체험을 하고 같이 잠자자. 조부모들이 자연에서 자랐던 경험과 그 느낌, 분위기는 아이들의 감성을 풍부하게 해 줄 수 있다. 여행은 삶을 섞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문화 중 하나다. 자녀·손자녀와 함께 정례적인 여행를 가는 것도 좋다. 격년으로 한 번씩 여행을 같이 하거나, 자녀·손자녀와의 5박 6일 여행 중 2박 3일을 함께 여행해 보는 것은 어떨까. 거기에 가족의 화목을 도모하는 가족 단체티까지 맞춰 입고 간다면 금상첨화다. ◇손자녀들의 느티나무, 넓은 땅이 되라 조부모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조부모의 역할은 부모의 역할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부모는 가정의 느티나무와 넓은 땅이 돼 손자녀들이 편안하고, 부담스럽지 않게 뛰어 놀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또한 손자녀들의 부모가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해주는 것이다. 예컨대 손자녀를 정서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것은 조부모의 역할이 부모의 그것보다 훨씬 크다. 부모들은 사회생활과 육아 스트레스에 찌들어 여유를 갖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역할은 삶의 경험이 많은 조부모의 것이다. 백종화 소장은 “손자녀들의 기억 속에 조부모는 여유있고, 인자하고 편안한 기억으로 남는 것이 중요하다. 손자녀는 중학생이 되면 곁에서 떠나가는 것도 인정해야 하고, 그들이 떠나갔을 때를 섭섭해 하기보다 이후에도 좋은 기억 속에 조부모가 있는 곳을 ‘쉼터’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자녀의 양육방식이 마음에 안 들 때 자녀의 양육방식을 100%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금물이다. 세대가 세대인 만큼 30%밖에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녀를 키우면서 경험한 좋은 방법이 있더라도 그것을 손자녀에게 강요하다보면 손자녀들이 조부모를 만나기 꺼려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때로는 손자녀에게서 느낀 섭섭함이 자녀와의 마찰로 번지기도 한다. 이때는 대화로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 하는데 말의 어조와 순서 바꾸기, 느낌보다 본 것 말하기만 기억하면 된다. 전자는 말 그대로다. 손자녀를 양육하는 데서 오는 섭섭함이 자녀에게 생겼을 경우 감정적으로 말하기보다는 자녀에게 고마웠던 것부터 써보고 직접 이야기를 해보라. 예를 들어 “아이가 착한 것은 네가 잘 키워서 그런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녀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고 뜸을 들인 다음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다. 말할 때는 “~해라”의 명령조보다는 “내가 살아보니 이 방법으로 훈육을 하니 꽤 쓸만 하더라”라고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인데 좋은 것을 추천해 주는 것이다. 주 양육자가 되기보다는 육아의 조언자가 되는 것이 현명한 조부모가 되는 법이다. 아이가 산만하거나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때 자녀에게 양육을 잘못한 것이라고 다그치는 것은 좋지 않다. 아이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표현하는 것도 자제하는 것이 좋다. 자녀와 조부모간의 감정만 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는 아이를 섣부르게 판단해 느낌을 표현하기보다는 본 사실만 그대로 이야기해주는 것이 좋다. △백종화 소장이 제안하는 멋진 조부모 10계명 1. 거울을 보고 입꼬리 올리는 연습을 하세요. 2. 손자녀의 말에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쳐주세요. 3. 아이 놀이가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처럼 진지하게 지켜봐주세요. 4. 손자녀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아빠, 엄마의 좋은 점을 찾아주세요. 5. ‘요즈음 아이들’이라는 말로 손자녀와 거리를 만들지 마세요. 6.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스마트폰이나 물질로 손자녀를 유혹하지 마세요. 7. 동요 2~3개를 더듬지 않을 수준으로 연습해서 손자녀와 함께 불러보세요. 8. 손자녀 앞에서 다른 조부모와 손자녀를 흉보거나 비교하지 마세요. 9. 손자녀 여벌옷, 칫솔, 베개를 준비해서 갑자기 와도 편히 놀 수 있게 하세요. 10. 헤어질 때 귓속말로 “할머니, 할아버지가 00를(을)많이 사랑한다”고 해주세요. △손자녀에게 현명하게 선물하는 법 무작정 선물을 하다 보면 “버릇 나빠진다”거나 “이거 필요 없는데”라며 자식·며느리·사위에게 싫은 소리 들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물을 하는 것이 현명할까? 물건을 사줄 때 리스트를 작성하라. 그리고 자녀들에게 어떤 것이 필요한지 물어봐라. 그들에게 직접 리스트를 받아도 좋다. 이렇게 되면 자녀들과 손자녀가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 갈등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 손자녀에게 선물을 했다면 자식·며느리·사위에게도 조그만 선물을 하는 것도 좋다. 이럴 경우 손자녀들은 자신의 부모가 사랑 받는 존재라는 인식을 갖기 때문에 부모와 조부모를 존중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즉, 선물을 주는 행위만으로도 손자녀 교육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알아둬야 할 것은 손자녀 교육에서 자녀를 배제하면 손자녀가 부모를 무시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는 것이다. △자녀가 손자녀를 혼낼 때? 이때는 자녀에게 센스있는 부모가 될 수 있는 기회다. 손자녀에게 “엄마가 XX와 할 말이 있는 것 같으니 잠시 할머니 나갔다 올게”라고 말하고 자리를 피하라. 그곳에서 손자녀의 편을 든다면 자녀는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된 훈육을 할 수 없다. 반대로 자리를 피하는 경우, 자녀도 마음이 편해져 이성적으로 아이를 훈육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 다시 그곳으로 가서 손자녀의 기분을 풀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조부모가 직접 훈육을 하는 것보다는 자녀가 훈육하는 것을 완화해주는 쿠션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럴 경우, 가랑비에 옷 젖듯 조부모의 영향력이 증가한다. △‘꺼리’를 만들면, 유쾌한 조부모 될 수 있다 이럴 때가 있다. 손자녀들과 노는 데 놀 소재가 떨어져서 선물 공세를 펼치거나, 먹을 것만 주야장천 권할 때 말이다. 이것은 놀 거리, 볼 거리, 즐길 거리, 먹을거리 등의 ‘꺼리’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유쾌한 조부모가 되는 법은 ‘꺼리’만 만들면 된다. 손자녀들과 만나기 전 이런 ‘꺼리’들을 준비해 함께 즐기는 것은 손자녀들이 조부모를 유쾌하게 느끼고 기억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전래 놀이나 책을 읽어주는 것도 좋다. 특히 조부모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의외로 손자녀들에게 잘 먹히는(?) 아이템이다. 조부모도 그 이야기를 하면서 동심에 빠질 테지만 손자녀들도 그것을 들으면서 매우 신선하고 신기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의 마음이 움직여 조부모를 더욱 친근하고 매력적으로 느끼게 된다. - 도움말 백종화 아동청소년심리상담센터 소장 이화여대 아동학과 겸임교수, SBS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 전문자문위원, EBS ‘선생님이 달라졌어요’ 전문자문위원, EBS ‘학교의 고백’ 전문자문위원, 저서 , ,
- 2015-05-23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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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똑한 은퇴] 행복의 조건: 3S와 5F
- ‘누군가 사랑할 사람(Someone to love), 무엇인가 할 일(Something to do), 뭔가 바라는 것(Something to hope for)’ 영어권의 현인들이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꼽는 3가지(3S)이다. 여기서 필자의 의문은 “과연 우리가 이 3S만으로 진정 행복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3S가 진정한 행복으로 이어지려면 그보다 더 기본적으로 필요한 2가지가 있다. 바로 ‘돈’과 ‘건강’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니, 그걸 누가 모르냐?”고 반문할 것이다. 누구나 다 아는 당연한 것이니까 기본 중의 기본이 아닐까. 그래서 ‘3S + 2(돈과 건강) = 5F’라는 공식을 만들었다. 진정한 행복의 조건으로 다섯 가지 ‘F’로 시작하는 영어단어, 즉 ‘Finance, Friend, Field, Fun, Fitness’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 번째 F는 뭐니 뭐니 해도 돈이다. 해서 Finance. 우리가 열심히 살면서 돈을 버는 것은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는 한편 나 자신의 노후를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어느 정도 돈의 여유가 있어야 나름 설계도 하고 그에 따라 집을 지을 수 있는 것과 같다. 건강하기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지만 건강할 때 돈을 벌어놓아야 건강도 지킬 수 있고, 또 건강에 탈이 나도 고칠 수 있다. 두 번째 F는 누군가 사랑할 사람(Someone to love), 즉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놀 친구(Friend)를 의미한다. 친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친구는 배우자를 포함한 내 가족이다. 평소에 배우자와 자녀는 물론 부모·형제 등 가까운 친척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노력이 중요하다. 지금은 바쁘니까 이 담에 하지 뭐 하다보면 살가운 정은 다 떨어지고 난 다음일 수도 있다. 가족을 의미하는 영어 ‘FAMILY’는 ‘Father and mother, I love you!’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소설가 최인호 선생처럼 부인과 딸을 곁에 두고 사랑한다면서 눈을 감는 것보다 더 행복한 삶이 있을까. 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척 외에도 이 그룹, 저 그룹의 친구들과 사귀면서 등산이나 사진 찍기, 여행, 식도락 등을 함께 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세 번째 F는 뭔가 할 수 있는(Something to do) Field를 말한다. 이때 필드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직장이 될 수도 있고 여가로 사진이나 글쓰기, 춤 배우기, 문화예술 관람, 요리, 여행 등과 같은 취미활동을 즐기는 것일 수도 있다. 자원봉사와 기부활동도 평소나 은퇴 후에나 좋은 필드이다. 꼭 돈만이 아니더라도 내 체력과 재능과 시간 등을 얼마든지 기부하면서 자존감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미리미리 준비해놓으면 귀농귀촌 또한 훌륭한 필드가 될 수 있다. 요즘 뜨는 필드가 또 하나 있다. 방송통신대 또는 학점은행제 대학 등에 다니면서 그간 못 다했거나 하고 싶었던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다. 여기저기 퍼져 있는 도서관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친구들도 사귈 수 있다. 필자가 아는 분은 80이 넘은 나이에 방송통신대 일문과, 중문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불문과에 다니고 있다. 일본어 찍고 중국어 거쳐 불어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는 그에게서 청년의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다. 학점은행제 대학 등록자 중 60세 이상의 수를 보면 2008년만 해도 4500여명이던 것이 2013년 현재 2만 3000명으로 급증하고 있다. 결국 소득을 얻기 위한 일자리뿐 아니라 내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소일거리가 곧 좋은 필드가 되는 것이다. 네 번째 F는 재미를 의미하는 Fun이다. 지난 번 기고에서 말한 것처럼 즐겁고 재미있어야 인생이다. 뭔가 바라는 것, 기대하는 것(Something to hope for)이 없는 인생보다 더 지겹고 재미없는 삶도 없을 것이다. 영국계 글로벌 은행 HSBC가 몇 년 전 22개국 2만여명의 사람들에게 ‘은퇴’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대다수 선진국 사람들은 ‘자유, 만족, 행복’이라고 대답한 반면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첫 번째로 꼽았다. ‘외로움, 지루함, 두려움’이 그 뒤를 이었다. 돈과 할 일이 어느 정도 있고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녀,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이들과 함께 나만의 재미, 그 무엇을 찾아 떠나봄직 하지 않은가. 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 덕수는 아들과 딸 부부들이 여행갈 수 있도록 어린 손자와 손녀들을 봐 주고 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부인 영자와 손잡고 여행을 떠날 사람은 바로 덕수란 말이다. 다섯 번째는 앞선 4가지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강(Fitness)이다. 필자의 영어가 짧아서인지 건강하면 Health만 떠오르는 바람에 ‘4F 1H’하려다가 다행히 Fitness가 생각나서 5F로 완성할 수 있었다. 군말이 필요 없다. 건강이 없다면 돈과 친구, 일거리, 재미도 다 나의 것이 아니다. 얼마 전 한 TV의 장수 관련 프로그램에서 104세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73세 따님의 이야기가 나왔다. 무남독녀인 이 따님이 자녀들을 다 출가시킨 후 노모를 모시기 위해 시골로 내려온 것이다. 어느 날 잠시 외출했다 돌아오니 치매 기운이 약간 있는 어머니가 마당에 나와 계셨다. “쌀쌀한데 왜 나와 계시냐?”고 했더니 그냥 기분이 좋다면서 노래를 한 자락 하시는 거라. “술 잘 먹고 돈 잘 쓰니 금수강산이더니, 술 못 먹고 돈 못 쓰니 적막강산이로세.” 정선아리랑의 한 자락이었다. 술 잘 먹고 돈 잘 쓴다는 것은 5F, 즉 돈과 할 일, 친구, 재미, 건강의 5박자가 잘 갖춰져 있는 금수강산이다. 반대로 술 못 먹고 돈 못 쓴다는 것은 5박자 중 대다수가 잘 갖춰져 있지 못하니까 적막강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5F가 얼추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하면 내가 바로 공자도 부러워할 5자(놀자, 쓰자, 주자, 웃자, 걷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5F가 5자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5F 중 Finance는 은퇴설계 중에서도 재무적 설계에 해당하고, 나머지 4F는 비재무적 설계라고 말한다. 재무적 설계를 넘어 비재무적 설계도 잘 생각하고 준비해 놓아야 행복한 노후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말은 쉬워도 갖추기는 어려운 게 5F이다. 로또 당첨과는 달리 조금씩 조금씩 오랫동안의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5F를 하나씩 따져보면 어딘가 부족한 부분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 채워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자 우리네 인생이 아닐까. 누가 말했나. 행복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보험연구소장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 2015-04-17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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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은 꽃이다 - 꽃과 여행] 봄에는 떠나자, 꽃을 만나러
- ※꽃 그리고 봄. 중국과 일본에서도 꽃으로 봄과 사람을 맞이할 준비로 한창이다. 하나투어, 모두투어, 여행박사가 봄꽃 맞이할 관광지를 선정했다. 꽃을 맞이하자. ◇『하나의 선택』 유채꽃의 천국, 그 이상의 유토피아 - 중국 장가계(張家界) “사람이 태어나서 장가계(張家界)에 가보지 않았다면, 100세가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人生不到張家界, 百歲豈能稱老翁]” 예부터 중국인들 사이에서 전해오는 이 한마디면 장가계에 대한 설명은 모두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웅장한 표현을 다 써도 그 천혜(天惠)의 풍경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봄이 완연한 4월에는 중국 10대 용암동굴인 황룡동굴 근처에서 눈을 감고 팔을 힘껏 벌려 유채꽃의 기운을 받아보자. 이 일대 1만평의 들판에 흐드러지게 펼쳐진 유채꽃밭은 장관이라는 표현이 단조롭다고 느껴질 정도다. 거기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 기이한 봉우리, 각양각색의 형상을 지닌 장가계 풍경구(風景?)는 푸르른 나무와 형형색색의 꽃들이 어우러져 마치 자연 속 신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영화 감독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이 ‘아바타’를 제작할 때 영감을 받았던 곳으로 알려진 곳이 바로 이곳에 있다. 장가계 국가 삼림공원 북쪽에 위치한 원가계(袁家界)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협곡과 계곡이 일품인 곳으로 그 환상적인 모습에 정신을 잃는다는 미혼대(迷魂臺)가 기다리고 있다. 아찔한 절벽을 연결하는 천하제일교의 절경도 빼 놓을 수 없다. 장가계 삼림 공원의 핵심인 양가계(楊家界)는 꼭 가봐야 할 곳이다. 천자산과 원가계 풍경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신성하고 기이한 풍경을 뽐내고 있다. 우룡채와 천파부라는 전망대가 유명하며, 최근에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장가계의 또 다른 절경으로 손꼽히고 있다. 일정 장가계 삼림공원, 양가계 풍경구, 황룡동굴, 세계에서 제일 긴 천문산 케이블카 탑승 등의 코스 가격 69만원부터 문의 하나투어 (W: www.hanatour.com / ☎: 1577-1233) ◇『박사의 선택』큐슈에 펼쳐진 벚꽃의 향연 - 일본 구마모토(熊本)와 벳부(別府) 꽃 피는 춘사월의 주인공은 뭐니뭐니 해도 벚꽃이 아닐까? 그렇다면 명불허전(名不虛傳) 일본이다. 그중에서도 일본 3대 성(成)인 구마모토 성이 있는 구마모토는 그 전통적인 정취와 벚꽃의 발랄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구마모토는 역사 유적과 아름다운 자연 환경으로 일본 큐슈의 남과 북을 이어주는 중심부다. 특히 도심부에 위치한 구마모토 성은 주변에 고층빌딩을 세우지 않도록 해 성 고유의 분위기와 경관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은 벚꽃이다. 예쁘게 얼굴을 내민 벚꽃이 당신을 맞이할 것이다. 성 주위의 예쁜 벚꽃길을 걷고 있으면 왠지 모를 엔돌핀이 솟구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벚꽃의 향연에 푹 빠져 노곤노곤한 피로를 푸는 곳은 바로 벳부다. 온천 천국인 일본에서도 온천수 용출량 1위를 달리는 도시답게 그 별명도 ‘밥솥 지옥’이다. 때문에 뜨거운 온천수의 열기가 도시 전체에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9개의 지옥이라 불리는 9개의 온천 구역은 각양각색의 특징이 있다. 황산철 때문에 바다와 같이 푸른색을 띠고 있는 온천도 있고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모양을 한 곳도 있다. 봄을 더욱 뜨겁게 즐기고 싶다면 그 해답은 벳부다. 일정 온천이 있는 시티 호텔 2박,구마모토 성, 유후인, 벳부 코스 가격 35만9000원부터 문의 여행박사 (W: www.tourbaksa.com / ☎: 070-7017-2005) ◇『모두의 선택』꽃의 왕국 - 일본 하우스텐보스 일본 나가사키현에 위치한 하우스텐보스의 봄은 꽃의 왕국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 튤립, 벚꽃, 장미 등 다양한 꽃들이 이곳의 봄을 수놓는다. 꽃의 계절 봄을 체험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장소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하우스텐보스가 자랑하는 꽃과 풍차가 있는 플라워로드에 서면 마치 네덜란드의 고요한 마을을 활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특히 4월 13일까지 열리는 튤립축제에서는 형형색색의 튤립들이 풍차 주변을 싱그럽게 장식하고 있다. 하우스텐보스의 봄이 더욱 화려한 이유는 일본 최다인 700품종 이상의 튤립이 하우스텐보스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우스텐보스의 주요 교통수단인 캐널크루저는 로맨틱한 데이트에 안성맞춤이다. 하우스텐보스 안으로 흐르는 운하를 따라 운행하는 유람선으로 네덜란드 왕실이 과거 이용하던 선박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것을 타고 하우스텐보스의 전경을 구경하는 것도 괜찮은 여행 방법이다. 일본에서 유럽 어느 도시의 클래식한 호텔에서 숙박을 하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하우스텐보스의 중심인 알렉산더 광장에 인접한 곳에 암스테르담 호텔이 있다. 유럽의 궁전을 연상시키는 이곳은 외관부터 그 분위기에 취한다. 일본에서 클래식한 유럽의 봄을 느끼고 싶다면 하우스텐보스로 오라! 일정 큐슈 하우스텐보스+온천 3일, 벳부,유후인, 아소, 후쿠오카 코스 가격 110만1300원 문의 모두투어 (W: www.modetour.com / ☎: 1544-5252)
- 2015-04-16 0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