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비로소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 같다고 했다. 삐걱대던 시절을 지나 생각을 바꾸고 삶을 대했더니 희망이 찾아들었다. 나이 먹고 퇴역 군인처럼 산다는 건 있을 수 없다는 이 사람. 건강관리를 열심히 하는 이유? 일이 더 하고 싶어서란다. 멋진 목소리의 DJ, 활기찬 시니어 기자 소리 듣는 게 좋다는 윤종국 동년기자를 만났다. 화창했던 어느 화요일 낮. 라디오 방송 대본을 들고 마주 앉았다.
“어젯밤에 대본 연습을 거의 새벽 2시까지 했어요. 녹음기를 놓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서울노인복지센터(서울시 종로구 경운동) ‘탑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만난 윤종국 동년기자는 살짝 긴장한 눈치였다. 매주 화요일 30분씩 ‘이야기가 있는 풍경’이라는 센터 내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는 윤종국 동년기자. 이날은 입이 타들어 가는지 물컵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마포FM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서울노인복지센터 방송국으로 스카우트(?)돼 온 지 3개월이라고 했다. 익숙할 만도 한데 무슨 일일까?
“제 인생에 인터뷰 기회가 항상 있는 일도 아니고 또 권 기자님이 초대 손님으로 출연하니 제가 잘해야죠.”
인터뷰 전에 제안을 하나 했다. 윤종국 동년기자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초대 손님으로 출연하게 해달라고 말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함께 동년기자단에 대해 복지센터에 모인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었다. 대신 라디오 방송 대본을 제대로 써드렸다. 두 번 정도 대본을 맞춰보고 진행된 생방송은 주거니 받거니 뚝딱 하고 흘러갔다. 방송을 마치자 한결 여유로워진 모습. 안도 섞인 웃음이 윤종국 동년기자 얼굴에 번진다. 라디오 스튜디오 안에 혼자 앉아 콘솔 조절하고, 얘기하고, 음악 트는 것과는 또 다른 경험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윤종국 동년기자는 작년 2기로 동년기자단에 합류했다. 첫인상부터 남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시 마포구 지역 방송인 마포FM에서 DJ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저는 한국 시니어 블로그 협회 회원입니다. ‘내 고장 마포’라고 마포구청에서 발행하는 신문의 객원기자로 일한 지도 10년이고요. ‘우리마포복지관’ 산하 ‘우리복지신문’에서 봉사기자단으로도 활동하고 있고요. 우리마포시니어클럽 커뮤니티 맵핑(지도제작)팀에서 매퍼(지도 만드는 사람)로서 장벽 없는 동네지도를 만드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요새는 마포구의 작은 도서관 지도를 만들고 있어요. 작다고 하니 어린이 도서관으로 생각하는데 남녀노소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거든요. 그리고 이 라디오 DJ는 재능봉사입니다. 힐링되고 마음부자가 되는 것 같아 가능하다면 계속하고 싶어요.”
시니어 세대를 위한 정보라면 뭐든 관심 있게 보던 차에 동년기자단 모집 공고를 접하게 됐다. 47년생, 빡빡머리, 돼지띠 윤종국 동년기자는 오늘도 내일도 미래를 준비하고 성장해나가는 청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친구들은 벌써 은퇴해서 퇴직 연금으로 생활한다는데 정작 본인은 나이 의식해 뒷선으로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렇게 저에게 기회를 준 탑 방송국과 다른 매체에 다 고마워요. 늦게나마 인정받는 게 참 좋습니다. 뭔가 인생에 큰 힘이 되고 용기도 나고 말이죠. 요즘 나 자신을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술로 버텼던 시간을 지워가다
“젊었을 때 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방송 관련 직업에 관심이 많았어요. 울진에서 살다 고등학교 때 서울로 유학 와서 교내 방송도 하고, 대학교 때는 학보사에도 몸담았습니다. 그런데 일이 좀 복잡하게 꼬이더군요.”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국가가 제동을 걸었다. 사회에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줄줄이 부정당했다. 이데올로기 전쟁이 낳은 연좌제 피해자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때 처음 느꼈습니다. 학군단(ROTC) 신청 때 신원조회에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방송사 성우 시험, 국가공무원으로 있을 때도 어려움을 겪었어요. 사실 나이가 드니까 이 말 꺼내는 게 싫고 쑥스러워요. 변명처럼 느껴지고 내 자신을 모독하는 것 같고 말이죠. 얘기 안 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그냥 제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안 된 거겠죠. 가령 ‘키가 남보다 작아서 학군단 입단이 안 됐다’라든지 말이죠.(웃음)”
지금은 웃으며 옛일을 말하지만 그때는 매번 닥치는 고통을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폭음으로 이어졌다. 관계에도 서서히 금이 갔다. 젊은 시절 고무신 거꾸로 안 신고 고집 피워 결혼해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들, 오랜 시절 아끼던 친구들이 견디지 못하고 등을 돌려버렸다.
“아주 심했던 것 같아요. 이제야 이야기를 꺼냅니다. 고통 때문에 술을 엄청 마셨습니다. 좋아서, 억지로, 서러워서, 분노를 참지 못해서요. 거리, 안주, 주량 불문하고 술자리가 있다는 연락이 오면 정신없이 달려갔습니다. 혼자 저를 키우신 어머니도 돌아가시면서까지 제 걱정을 하셨다더군요. 아내는 이종사촌 동생 친구로 만나 6년 연애하고 결혼했습니다. 뭐 하나 제대로 안 되는데 술까지 마셔서 저 때문에 고생 많았어요.”
급기야 몸에 이상 신호가 오고 말았다. 6년 전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대장 파열이었다. 아들 결혼식을 앞두고 응급수술을 받았다. 의사에게 각서까지 쓰고 휠체어에 몸을 실어 아들 결혼식에 참석했던 일화는 작년 ‘브라보 마이 라이프’ 9월호 동년기자 페이지에 게재됐다. 이 일이 있은 후 마음속부터 몸 끝까지 전부 다 바꾸겠다고 다짐했다.
“제2 또는 제3의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각오로 머리부터 밀었습니다. 술도 완전히 끊었습니다. 하루도 안 빠지고 마시던 그 술을 말이죠. 끊고 한 3년 힘들었어요. 지금은 잘 극복했죠.”
가끔 딸아이가 빡빡 밀어버린 머리를 쓱 만지고 가면서 “우리 아빠 사람 됐네”, “복권 당첨 확률보다 아빠 술 끊는 게 더 어려웠잖아” 라며 아버지 자리로 돌아온 윤종국 동년기자에게 칭찬 섞인 말을 건네기도 한다. 아들과는 손주가 둘쯤 생기고 나서야 부자지간이라는 게 뭔지를 좀 알게 됐다. 특히나 고마운 것은 자신이 못다 이룬 방송인의 꿈을 아들이 대신 이뤘다는 점이다. 아들은 모 방송사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
“한번은 아들이 저한테 게스트로 방송에 좀 나오면 안 되겠냐고 물었어요. 내가 뭘 그런 걸 하냐며 안 한다고는 했지만 한편으로 너무 행복했습니다. 아빠의 모습으로 나타나줘서 고맙다고 아들이 표현해준 것이죠. 정말 아빠로서, 남자로서, 가장으로서, 사회인으로서, 국가의 일원으로서 내 위치로 돌아가는 것만이 살길이었습니다. 그렇게 먹고 싶은 술을 6년 동안 입에도 안 댔습니다. 제사 지내고 음복은 입에만 댔고요. 제가 왜 이걸 강조하냐면 저도 제 자신이 굉장히 예뻐 죽겠으니까요.(웃음)”
‘이야기가 있는 풍경’ DJ 윤종국입니다
술을 끊으니 얼굴색도 표정도 달라졌다. 생각이 달라지니 보이는 것도 많았다. 마포FM을 통해 시작한 DJ 활동도 술을 끊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객원기자로 활동하는 신문에 쓴 제 글을 보고 마포FM 대표가 연락을 했더라고요. ‘나의 삶, 나의 길’ 라디오 초대 손님으로 말이죠. 그때 출연하고 나서 목소리가 좋은 거 같다며 DJ 제안을 받았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중장년층을 위한 프로그램 방송이 있더라고요. 제가 왜 마다하겠습니까? 덥석 시작했습니다.”
1년 정도 마포FM 라디오 스튜디오 안을 누볐다. 화요일 녹음하고 그다음 주 월요일 아침 8시부터 9시까지 마포구 내 집과 상점 등으로 전파를 타고 흘러나갔다.
“생각 같아서는 좀 오래하고 싶었는데 젊은 세대와 함께 호흡을 맞추다 보니 엇박자가 나는 듯했습니다. 나이 먹은 사람은 몇 안 됐어요. 적응할 만하면 스태프가 바뀌고 말이죠. 1년 동안 열심히 했는데 다른 데가 없겠나 싶었습니다. 마침 예전에 알고 지내던 분이 네이버 밴드로 연락을 해왔습니다. 서울노인복지센터에 DJ 자리가 있으니 생각이 있으면 한번 검토해보라고요.”
서울노인복지센터 탑 방송국은 윤종국 동년기자의 친구이자 동년기자 1기 출신인 장혜섭 씨가 적극 추천했다.
“담당 직원이 DJ 의사를 물어보며 전화 연락을 해왔을 때 제가 건 계약조건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한 달 해보고 마음에 안 들면 ‘방송에 지장이 되니까 나가달라’고 미련 없이 말하라고 했어요. 서운해하거나 오해하지 않겠다면서요. 아직 제가 미약한데도 존중을 많이 해줍니다. 전파 방송과 구내 방송이라는 방송 도달 거리 차가 있지만 라디오라는 성격은 같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좋은 점이라면 청취자들의 취향이나 피드백을 바로바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이죠. 하루 평균 2000명은 된다고 합니다. 아직까지 나쁜 소리는 안 들었으니 잘하고 있다는 거겠죠?”
라디오 DJ 활동을 통해 세상과 교류한다면 손자와는 태어나기 전부터 소통하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윤종국 동년기자. 어떤 방법을 사용했다는 뜻일까?
“손자는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태명 ‘둥이’라는 카카오톡 계정을 만들어 소통했습니다. 물론 실제 대화 상대는 며느리였지만 손자인 척 며느리가 대답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동네 DIY 제작소에서 버린 자투리 나무토막으로 도미노 게임을 해주면 손자가 아주 좋아해요. 제 인생을 정리해서 말해드리자면, 젊었을 때는 말 그대로 ‘고난’이었어요. 자신을 이기기 위해서 살았어요. 답답해서 이민 생각도 해봤지만 스물일곱에 혼자되신 어머니를 두고 해서는 안 될 불효라 포기했습니다. 술에 빠져 살아보니 이러다가는 내가 가족도 잃고 남는 게 없겠다, 반성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손글씨로 스스로를 치유하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치유의 한 방법이 펜을 들고 글을 쓰는 것이라고 했다. 함께하는 라디오를 앞두고 컴퓨터로 작업해서 보내드린 대본도 굳이 손글씨로 써서 볼 정도이니 손글씨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보인다.
“매일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한 주제를 가지고 집중적으로 쓸 때가 있고, 때로는 그냥 악에 받쳐 쓸 때도 있고 말이죠. 서술적으로 쓰다가도 누가 싫으면 최대한 아주 싫다는 걸 표현합니다. 지금까지 모아놓은 일기장이 너무 많아서 아내는 좀 정리하라고 하는데 잘 안 됩니다. 그래도 딸아이는 아빠의 유물(?)을 인정해줘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앞으로 더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역시나 손글씨 이야기가 나온다.
“시니어만을 위한 옛 추억을 담은 손편지가 오고 가게 할 수 있는 길을 만들고 동아리도 만들고 싶어요. 정착이 되면 이메일이 아닌 손편지로 마음이 오고 가는 운동도 하고 싶고 말이죠.”
많은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지만 시니어의 감성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줄 아는 세상이기를 윤종국 씨는 바라기 때문이다.
“글씨를 좀 삐뚤삐뚤 쓰면 어때요. 잘못 쓰면 어떠냐고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지고 손주나 며느리나 딸한테 편지를 쓸 수 있는 게 얼마나 멋집니까. 50대 이상 모든 시니어 세대를 버무려서 손편지를 주고받는 세상을 한 번 만들고 싶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했던 것처럼 편지로 정보를 나누기도 하고요. 쓴 편지는 우체통에 넣으면 좋고요. 누군가는 편지를 기다리는 맛도 있겠죠? 어떻게 하면 아날로그 감성이 제대로 살아날까 생각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이루지 못했던 윤종국 동년기자의 도전은 지금부터 제대로 시작이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스켈레톤과 봅슬레이 두 썰매 종목에서 한국 최초의 메달리스트가 탄생했다. 메달 소식과 함께 주목을 받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한국체육대학교 강광배(姜光倍·45) 교수다. 그는 동계올림픽 최초로 모든 썰매 종목(루지, 스켈레톤, 봅슬레이)에 출전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후 썰매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제자를 발굴하고 육성에 힘쓴 그의 노력은 오늘날 한국 썰매의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한국 썰매의 아버지’, ‘한국 썰매계의 문익점’, ‘한국 썰매의 개척자’. 이 모든 수식어는 한국 썰매의 시초부터 함께한 강광배 교수에게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그와 썰매의 뗄 수 없는 인연은 20여 년 전으로 돌아간다. 때는 그가 대학교에 막 입학하기 전 무주리조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부터다.
한국의 첫 루지 국가대표 탄생
“휴무 날에 생전 처음으로 스키를 타봤어요. 아니나 다를까 스키에 푹 빠져버렸죠. 처음으로 확실한 꿈이 생겼어요. 국가대표가 되는 것.”
그의 스키 실력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대학부에서 우승하는가 하면 스키장에서 강사로도 활동했다. 꿈에 한 발짝 다가가는 듯싶었지만 불의의 사고로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스키 강습 도중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한 것이다. 절망하던 그에게 한줄기의 빛처럼 눈에 띈 게 있었다. 바로 학교 게시판에 붙은 루지 국가대표를 뽑는다는 루지 강습회 안내문이었다.
“태극 마크를 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루지가 뭔지도 몰라서 찾아봤는데 누워서 타는 썰매더라고요. 무릎에도 부담이 없을 것 같고… ‘아 이건 정말 나를 위한 종목이다’ 하곤 바로 강습회에 신청서를 냈죠.”
국제루지연맹에선 군터 렘머러 수석 코치를 파견해 한국 선수 지도를 도왔다. 말도 통하지 않아 손짓 발짓 해가며 루지 조종법을 익혔다. 제대로 된 장비나 훈련장도 없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이었다.
“선발전이라곤 그냥 아스팔트 언덕길에 꼬깔콘 모양의 라바콘을 세워두고 누가 빨리 장애물을 피해 내려오나 초시계로 재는 거였어요.(웃음) 썰매에 바퀴를 달고요.”
아직 무릎도 완치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선발전에 출전했다. 잘못될 경우 재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그가 품은 국가대표의 꿈이 훨씬 더 컸다.
“기회라는 게 자주 오는 게 아니잖아요. 정말 간절했거든요. 오히려 몸을 더 과감하게 던졌죠.”
그 결과 3명을 뽑는 선발전에서 2등을 기록했다. 1등과 3등을 한 선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루지를 그만뒀다. ‘루지는 비전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대표팀을 꾸리기 위해선 서둘러 두 자리 공석을 채워야만 했다. 이때 새로 들어온 선수가 강광배의 3년 후배인 이기로와 현재 봅슬레이 대표팀 감독인 이용이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한국 첫 루지 국가대표팀이 탄생했다.
1996년 캐나다에서 열린 첫 전지훈련, 강광배 교수는 이날을 회상하며 “아팠던 기억밖에 없다”고 말했다.
“트랙에 하도 많이 부딪혀서 저녁만 되면 선수들끼리 서로 약 발라주느라 바빴어요. 보호대를 착용하면 그나마 덜했을 텐데 그 당시에는 보호대를 착용하는 것조차도 몰랐으니까요.(웃음) 썰매를 탈 때마다 연습복도 다 찢어졌는데 매번 새 옷을 입을 수 없는 형편이어서 찢어진 데를 테이프로 붙여가며 훈련을 했어요.”
마땅한 장비도 훈련장도 경기장도 없었지만, 루지 국가대표 3인방은 구슬땀을 흘리며 올림픽 무대를 향해 달렸다. 그렇게 처음 출전한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강광배는 출전 선수 34명 중 31위를 기록했다. 기권한 두 명의 선수를 제외하면 꼴등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등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썰매를 가장 잘 탄다는 선수들은 다 모인 거잖아요. 국가대표로 출전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죠.”
불행이 행운이 되어 돌아오다
나가노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뒤 강광배는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체육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첫째 ‘루지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 둘째 ‘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인스브루크 체육대학에 입학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루지연맹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전달받았다.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그의 선수 자격을 박탈한다는 내용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릎 부상까지 겹쳤다.
“루지를 배우러 갔는데 가자마자 목표가 사라져버린 거죠. 유학 가기 전에 선생님, 친구들, 가족한테 열심히 하고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한국으로 돌아가자니 제 인생을 포기한 사람이 된 것 같더라고요.”
평생 흘릴 눈물을 하루 만에 다 흘렸다는 그는 ‘이곳에서 뭔가를 이루기 전까진 절대로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절박한 심정으로 더욱 공부에 매진하던 강광배는 어느 날 스켈레톤 선수이자 인스브루크 학생인 마리오 구겐베르거를 소개받는다. 루지를 탈 수 없었던 그에게 스켈레톤은 새로운 탈출구였다. 당시 트랙을 두 번 이용하는 데 들었던 비용은 약 5만 원. 스켈레톤을 타기 위해 그는 3~4시간 정도 폐지와 캔을 주웠다. 그래봐야 겨우 두 번 정도 탈 수 있었다.
“낮에는 민망하니까 사람들이 다 자는 밤에 나와서 폐지랑 캔을 주웠어요. 특히 강 주변으로 산책로가 있었는데 그 근처에서 신문을 보거나 맥주 마시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곳으로 자주 주우러 갔죠.(웃음) 덕분에 자전거 타고 한 바퀴 쭉 돌면 더 이상 실을 수 없을 만큼 주울 수 있었어요.”
그렇게 그가 스켈레톤에 미쳐 있을 때 생각지도 못한 희소식이 들려왔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스켈레톤이 54년 만에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부활한다는 소식이었다. 스켈레톤은 1948년 생모리츠 동계올림픽 이후 선수가 별로 없다는 이유로 폐지된 상태였다.
“루지 선수 자격을 박탈당했을 땐 나한테 왜 이런 시련이 왔나 했는데 돌이켜보면 큰 행운이었죠. 덕분에 스켈레톤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또 한 번의 태극마크를 다는 길은 순조롭지 않았다. 대회에 나가기 위해선 의사의 확인도장과 연맹 회장의 직인이 찍힌 라이선스가 필요했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에 스켈레톤 연맹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를 자른(?) 대한루지협회에 전화해 도움을 요청했다.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건 좋지만, 그에게 10원도 지원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도 좋았다. 그는 가입에 필요한 서류를 모두 준비하고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털어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렇게 1999년, 우리나라도 국제 봅슬레이 스켈레톤 연맹 회원국이 됐다.
“매년 국제연맹에서 회의가 열리는데 2000년에 제가 참석했어요. 갔는데 태극기가 딱 걸려 있더라고요. 뿌듯했죠. 우리나라를 국제연맹에 가입시킨 건 제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일이었어요.”
1998년 유학길에 올라 루지 선수 자격을 박탈당하고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스켈레톤 국가대표로 나가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그는 되돌아보니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제가 힘들어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썰매를 정말 좋아했기 때문이에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은 고생이 아니잖아요. 그땐 제가 미쳐 있었으니까요.(웃음)”
이젠 국민들의 관심이 필요할 때
강광배는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봅슬레이 출전을 끝으로 모든 썰매 종목에서 올림픽 진출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이후 한국체육대학교에서 썰매부를 맡으면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스켈레톤 금메달리스트 윤성빈을 발굴하는 등 한국 썰매 육성에 힘을 보태고 있다.
“선수들과 지도자들이 노력해서 딴 메달입니다. 마치 제가 다 한 것처럼 비춰지지 않으면 좋겠어요. 전 그저 씨앗을 뿌렸을 뿐이고 농사가 잘된 거죠. 얼마나 큰 행운입니까. 잘 성장해줘서 고마울 뿐입니다. 이젠 저보단 우리나라를 빛낼 선수들과 감독, 코치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썰매라면 이제 지겨울 법도 한데 그는 어쩔 수 없는 썰매 바보인가보다.
“가장 힘든 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계속 가고 있다는 생각에서 오는 외로움이었어요. 이제는 터널을 빠져나와 빛을 봤으니 미련도 여한도 없습니다.”
시계가 사람 목숨을 구한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주머니 속 시계가 날아든 총탄을 막아줬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스마트 시계 이야기다. 캐나다에 사는 데니스 앤젤모(62)는 지난해 봄에 집수리를 하다 유난히 힘들다는 기분이 들었다. 보통 같았으면 참고 넘겼겠지만, 손목에 있던 애플워치를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심장박동수가 210회로 비정상적이었던 것. 곧바로 달려간 병원에서 “동맥이 70% 가까이 막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칫 사망에 이를 수도 있었던 상황을 시계 덕분에 방지한 것이다. 스마트 기기의 등장으로 이런 극적인 이야기를 우리는 자주 접할 수 있게 됐다.
“목숨을 맡길 만큼 손목시계의 심박수 체크를 믿을 수 있겠어?”라는 의문을 가질 이들을 위한 재미있는 결과가 있다. 지난해 심장과 혈관을 연구하는 순환기내과의 논문을 게재하는 미국의사협회 학술지 ‘카디올로지’에 손목에 착용하는 심박측정기의 정확도에 관한 연구결과가 실렸다. 요약하면 대부분의 장비가 ‘꽤 정확한’ 심박측정 능력을 갖췄고, 국내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애플워치는 91%, ‘핏빗’은 84% 정도의 정확도를 나타냈다. 사용자가 건강을 위해 참고하기에는 충분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 주변에는 과거라면 상상도 못할 여러 가지 제품들이 건강관리에 쓸모 있는 기능을 갖추고 속속 출시되고 있다.
늘 나와 함께, 웨어러블 디바이스
스마트 기기 중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 보통 웨어러블 디바이스(wearable device)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과 블루투스를 통해 무선 연결되어 다양한 기능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 특징. 안경 형태에서부터 최근에는 이어폰 형태의 제품도 있지만 가장 대중적인 것은 역시 손목에 차는 시계형 제품이다.
자체적으로 앱(app)을 구동시킬 수 있는 삼성이나 애플의 스마트 워치가 일반적이지만, 불필요한 기능을 제거하고 각종 센서들만 부착한 스마트 밴드도 인기가 높다. 간단한 밴드형 제품은 시중에서 5만 원 이하로도 구매가 가능하다.
이런 스마트 기기의 역할은 크게 운동을 돕고 신체 상태를 점검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심박수 센서와 운동 센서 등은 심장 상태에서부터 수면의 질까지 건강과 관련한 다양한 지표를 보여준다. 또 장시간 앉아 있거나 운동이 부족하면 센서가 움직일 시간이라고 알려주기도 하고, 열심히 걷고 나면 수고했다며 칭찬을 통해 동기도 부여한다. GPS 센서가 달린 제품들은 이동한 거리나 경로를 지도에 표시해줘 일기처럼 기록할 수 있다. 스마트폰과 연결하면 산소포화도나 스트레스 등의 측정도 가능하다.
최근 삼성이 내놓은 블루투스 이어폰인 ‘아이콘X’도 운동 센서를 통해 사용자의 운동량을 기록한다. 착용하면 직전의 운동 기록을 음성으로 알려주기도 하고, 운동 중에도 운동 시간이나 거리, 칼로리 소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스마트폰과 연결하지 않아도 독자적으로 작동한다.
최근엔 허리띠 형태의 제품도 나왔다. ‘웰트’라는 제품으로 그저 바지와 함께 입는 것만으로도 허리둘레, 앉아 있는 시간, 과식 여부를 체크해 생활습관 개선에 도움을 준다.
만성질환도 스마트하게 관리
고혈압이나 당뇨병과 같은 만성질환도 스마트 기기를 통해 관리할 수 있게 됐다. 서울대병원에서 만든 당뇨병 관리 앱 ‘mDiabetes’가 대표적. 블루투스 혈당계와 연동되는 이 앱은 혈당을 관리하고, 식단 데이터베이스를 통한 식이관리, 운동관리가 가능하다. 의료진에게 간단한 상담도 받을 수 있다. 서울대병원은 실제 사용자를 대상으로 그 효과를 조사했는데, 대조군에 비해 당화혈색소(HbA1c) 개선 효과가 나타났다고 밝혔다.
중국의 대표적 스마트 기기 회사인 샤오미는 스마트폰에 직접 연결되는 혈당계를 최근 발표했다. 스마트폰에 장치를 꽂으면 일반적인 혈당계와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다. 또 얼마 전 스마트 혈압계 ‘아이헬스’를 출시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이 제품은 혈압 검사와 함께 간단한 문답을 통해 사용자의 신체 상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스마트 기기 건강관리, 그 효과는?
흔히 사용하는 체중계도 이제는 건강관리 도구로 변신했다. 최근 시중에 판매되는 체중계는 맨발로 올라서는 것만으로도 체중뿐 아니라 체지방, 근육량, 골격량, 수분량, 기초대사량, 신체나이, 내장지방 등을 알려준다.
스마트 기기를 통한 건강관리는 정말 효과가 있을까. 현장의 전문의들 의견은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가 중론이다. 중앙대학교병원 가정의학과 조수현 교수는 스마트 기기를 통해 생활습관에 자극을 주는 것은 좋지만, 너무 맹신하지 말고 보조적 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사실 나이가 들어 생기는 만성질환들은 생활습관과 연관되어 있어 이러한 생활습관을 정확히 판단해주면 진료에 도움도 주고 본인이 고쳐야 할 부분을 알 수 있어 좋습니다. 우울 성향을 측정하거나 바이오피드백을 이용해 마음의 안정을 갖게 하는 방식 등은 응급상황이 생길 때 자가 조절이 가능하도록 해 치료에 도움이 되게 할 수는 있다고 봅니다. 신체의 움직임 측정과 수면습관 측정 외에도 운동 종류에 따라 기록을 해주는 기능도 개발돼,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있는지 본인도 확인이 가능하고 의사에게도 보여줄 수 있어 좋은 정보일 수 있습니다. 다만 정확하게 측정되는 것인지 확인해봐야 합니다. 또 당뇨 환자를 위한 기능이 병원에서 검사하는 당화혈색소 측정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보조적 수단이므로 의사와 긴밀히 상의하면서 지켜봐야 할 문제입니다.”
세상에 이기지 못할 것이 운발이라고 한다. 운칠기삼(運七技三), 운이 70%라면 재능과 노력은 30%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심지어는 운11. 기 마이너스 1이란 이야기조차 있다. 운이 좋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윤은기(66) 한국협업진흥협회장은 그 답을 협조와 협업에서 찾는다. 그는 개인이나 기업이나 공생, 상생하는 것이 운을 좋게 만들고, 지속가능경영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가 아니라 ‘남을 돕는 자’를 돕는다”가 그의 신조다. 남과 나눠야 운이 따른다. 운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기보다 후천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별명이 ‘미스터 콜라보(Mr. collabo)’인 그를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윤 회장께선 일찍이 미래의 물결, 정보화사회를 이야기하는 등 미래 트렌드를 남보다 앞서 예측하시고 강의해왔습니다. 그런데 운 이야기를 강조하시는 게 좀 모순 같습니다.
“정보화를 넘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운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내가 말하는 운이란 덕행의 인과법칙입니다. 지극히 과학적입니다(웃음). 남을 돕지 않는 자에겐 운이 따르지 않아요.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사람도 남이 도와주지 않거나 방해를 하면 성과를 낼 수 없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노력뿐만 아니라 남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는 점입니다. 귀인을 만나야 운이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귀인을 만나려면 먼저 인간 존중,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최근 를 쓴 일본의 원로 변호사 니시나카 쓰토무도 국내 언론 인터뷰에서 ‘운=도덕과학’이라고 풀이한 바 있다. 니시나카 변호사는 “도덕적 과실이 운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라도 갚지 않으면 운이 나빠진다. 은혜를 받기만 하면 ‘도덕적 부채’로 쌓인다”고 말했다. 도덕적 선행과 나눔이 운을 불러온다면, 도덕적 부채와 독과점은 금전적 부채보다도 더 큰 불운을 초래한다는 지적이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보다 남을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은 과학적 근거가 있다. 남을 돕는 봉사를 하고 난 뒤에는 거의 모든 경우 심리적 포만감, 즉 ‘하이(high)’ 상태가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지속된다. 의학적으로도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현저히 낮아지고 엔도르핀이 정상치의
3배 이상 분비되어 몸과 마음에 활력이 넘친다. 이른바 마더 테레사 효과다. 기업의 사회적 공헌(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리더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인의 사회적 공헌(PSR, Personal Social Responsibility) 실행은 이타적이라기보다는 운을 불러들이는 이기적 행위인 셈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말은 많이 합니다. 반면에 일반 개인의 사회적 공헌(PSR)은 그만큼 강조되진 않지요.
“‘사회 공헌, 기부’ 하면 거대 담론으로만 생각합니다. 나중에 여유 생길 때 기부한다고 미뤄두면 평생 하기 힘듭니다. 기부는 물질적 여유가 아니라 평상시 태도, 습관입니다. 저는 재능기부 차원에서 군에 강의를 갑니다. 또 공군 순직 조종사 유자녀 장학금을 매년 1000만원씩 지원하는 일을 7년째 해오고 있습니다. 기부를 꾸준히 하는 것은 남을 위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행복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그는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앰뷸런스를 이용하며 운전기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소개했다. “부자들은 앰뷸런스에 시체가 실리는 순간부터 가족이 싸우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그렇게 산다면 부자인들 무슨 삶의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있어야 나누는 것이 아니고 나누어야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부자는 돈이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1년에 기부금 1000만원을 약정하고 꾸준히 하는 것, 쉬운 일은 아닌데요. 사모님도 처음부터 동의하셨는지 살짝 궁금합니다.
“저는 집사람을 설득해야 할 때 집에서는 절대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하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나 술집에 데려가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사는 게 뭐 별것 있나, 잘사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으로요. 먼저 길을 닦고,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 뒤 본론을 꺼내지요. ‘우리 여행 한 번 덜 가고, 골프 한 번 덜 치자, 소비를 조금 줄이더라도 좋은 일을 해보자, 돕고 사는 게 재미지, 혼자 잘사는 게 무슨 재미인가’ 하고요. 똑같은 이야기라도 반응이 전혀 달라요. 집사람이야 콩나물값 깎아가면서 알뜰살뜰 살림하는 전업주부인데 처음엔 좋아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저보다 더 기부에 적극적이랍니다.”
윤 회장은 스스로의 전공을 심경학, 즉 심리경영학(그는 학부는 심리학, 석·박사는 경영학을 전공했다)이라고 말하곤 한다. 심리를 경영할 줄 안다는 의미에서다. 그는 “정의파, 대의명분파들이 설득에 실패하고 저항에 부딪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옳으냐’로 ‘좋으냐’를 무시하거나 압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진정한 소통은 ‘옳다’를 넘어, 마음속으로 ‘좋다’고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이성보다 감성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베스트셀러 비결도 사모님과의 심경학 소통 덕분이라면서요.
“하하. 네. 제 책의 첫 독자, 안테나 마켓은 집사람입니다. 작가에겐 책 내용이 정리돼 영감이 오는 ‘유레카’의 순간이 있습니다. 한밤중이라도 깨워 한바탕 책 내용을 설명하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심드렁해하면 책의 콘셉트 혹은 틀을 바꿉니다. 베스트셀러가 된 책은 대부분 집사람이 한밤중 잠결에 들어도 흥미롭게 들은 책, 말 된다고 집사람이 동의를 표한 책이었습니다(웃음).이번 협업 책도 그렇고요.”
진정한 소통은 같은 세대, 같은 수준의 말을 쓰는 사람뿐 아니라 이질적 그룹의 사람과 통하는 것이다. 그의 강의가 폭넓은 호응을 얻는 것도 그 덕분이다. 이장우 브랜드마케팅그룹 회장, 차동엽 신부, 장용동 목사 등 숱한 명사들이 윤 회장의 강의를 ‘내 인생에 영향을 준 명강의’로 꼽는 것도 소통력 때문이다.
윤 회장께서 살아오시면서 겪은 가장 큰 고비는 무엇인가요.
“1980년도에 발간된 앨빈 토플러의 을 읽고 우리나라가 살 길은 정보화사회에 빨리 도전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게 됐습니다. 잘 다니던 종합무역상사에 사표를 내고 1983년 여의도에 정보전략연구소를 차렸는데 2년 만에 퇴직금까지 모두 까먹고 엄청난 부채를 지게 된 거예요. 하루가 지나면 부채는 늘고 철수하자니 빚 감당을 못하겠고. 그때가 내 인생의 최대 위기였습니다. 마침 1985년 앨빈 토플러가 방한해 붐이 일어나면서 극적으로 위기를 벗어나게 됐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은 세상 모든 일은 반드시 때가 있다는 거였습니다. 너무 늦어도 안 되지만 너무 빨라도 안 된다는 겁니다. 이후, 무슨 일이든 최적의 타이밍을 찾아내려고 심사숙고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아이디어가 생기면 자신감이 넘쳐 성급하게 뛰어드는데 그러면 실패하기 십상이지요.”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 칼럼니스트로 골프와 경영을 접목한 글로 인기를 끄셨지요.
“우리 사회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치고 저랑 골프를 치지 않은 사람은 드물지요. 골프를 치면서 인생의 깊은 내공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글로 써본 것이지요. 특히 김종필 전 총리랑 골프를 치면서 들은 인생 허업(虛業) 이야기가 제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정치는 허업이야. 잘났다고 하는 저 사람(정치인)들이 하는 일이 뭐가 있어? 온갖 폼은 다 잡지만 남는 게 뭐 있어? 정치는 자기들끼리 싸우다 다 잃는 거야. 제일 어리석은 직업이 정치야’라고 허무하게 말씀하신 게 기억에 남아요.”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분께 그런 이야기를 들었기에 허명(虛名), 허업(虛業)에 대한 내려놓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욕심을 많이 부리면 반드시 터지거나 넘어지게 돼 있다. 윤 회장은 인생의 욕심을 풍선과 계단오르기에 비유해 설명한다.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면 문제가 없지만 한꺼번에 많이 오르려 하면 반드시 고꾸라지는 게 인생의 법칙이다. 풍선도 마찬가지다. 있는 힘껏 풍선을 끝까지 불 수는 있지만 그러다가 터질 수도 있다. 그래서 80~90% 정도만 불고 남겨둬야 한다. 너무 빵빵하게 불면 언제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힘을,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다.
탈속의 이야기만 했네요. 세상 이야기로 돌아와 볼까요. 정보화사회, 협업 등 늘 기업 경영의 화두를 먼저 설정, 새바람을 일으키셨습니다. 또 시(時)테크, 골드칼라 등 시사용어를 선도해 유행시키셨는데요. 그 촉(觸)의 비결이 무엇인지요.
“지도자라는 것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선지자, 선견, 먼저 보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지도자는 지도를 가진 사람입니다. 즉 방향성을 제시하는 게 중요합니다. 청년기에 군에서 훌륭한 리더를 만나 생각의 틀을 다진 게 제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청년 장교(중위) 때 투스타 김동호 장군의 부관을 하다 보니 엄청난 용량의 공부가 필요했습니다. 인생의 한창때 존경할 만한 롤모델을 만나는 것은 큰 운입니다. 책 100권, 아니 1000권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책 에서 귀인효과를 말씀하시는데요. 김동호 장군이 윤 회장님의 귀인이셨나보군요.
“맞습니다. 김 장군은 영어, 일어 등 외국어 실력도 뛰어나시고, 유도, 검도 유단자에다 특히 인품이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지덕체, 문무를 겸비하신 분이었습니다. 김 장군이 면접하는 모습을 보고 단번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 실력을 묻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력, 종교, 꿈을 들려주시며 리더로서 이렇게 노력하겠다고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겁니다. 당시 제 주변 동료 장교들은 퇴근 후 취직 공부를 해야 한다며 24시간 근무해야 하는 부관을 기피했어요. 저는 퇴근 후 두 시간 공부보다 이분을 모시는 게 훨씬 큰 공부가 되겠다는 느낌이 한 번에 오더군요. 존경받는 것도 기쁘지만, 존경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는 것이 더 기쁜 일입니다.”
윤 회장은 그 후 4년간을 한결같이 김 장군을 곁에서 ‘모셨다’. 제대하는 토요일, 오후 3시까지 초과 근무를 자청한 것은 초급 장교 중 전무후무해 공군 본부에서 화제가 될 정도였다. 윤 회장은 김 장군과의 인연을 40년째 이어오고 있다. 지금도 1년에 두세 차례씩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예전 어록과 교훈을 같이 추억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곤 한다.
김 장군도 훌륭하시지만 그분을 한눈에 알아본 윤 회장님도 대단합니다. 더구나 20대 중반의 청년 장교 때요.
“그런가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알아보는 용인술도 중요하지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알아보는 ‘역용인술’도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롤모델을 만나고 싶어 하지만 스스로 찾아보려고 노력하진 않거든요. 존경하는 사람이 없으면 반쪽 인생이에요. 한 번도 사랑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보다 더 불행하고 불쌍한 삶이지요. 어려운 의사결정을 할 때 ‘김 장군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자기객관화가 되면서 답이 보여요. 존경할 대상이 생기면 상대의 장점 DNA가 보이고 배워야 할 사항이 쏙쏙 들어와요. 존경하는 사람을 가지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요.
“앞으로 10년 정도는 우리나라 모든 영역, 모든 분야에 협업문화를 확산시키는 일에 매진할 계획입니다. 그 후에는 청소년 시절부터 꿈이었던 소설가로 데뷔하고 싶습니다. 소설은 현실에서는 추진할 수 없는 이상향을 마음껏 그릴 수 있으니까요. 제가 존경하는 소설가 김주영 선생님도 수시로 만나고 있고 최근에는 김홍신 선생님도 몇 번 만났습니다. 평생 동안 경험한 일들과 상상했던 일들을 융합시켜 멋진 소설을 쓰는 게 내 인생의 마지막 직업이 될 겁니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액티브 시니어의 일자리 문제를 다룬 ‘리스타트 컨퍼런스 2017’이 28일 쉐라톤 서울 디큐브시티 호텔에서 진행됐다. ‘액티브 4060을 대한민국 신성장동력으로’라는 부제로 진행된 이번 행사에선 은퇴 후 또 한 번의 경제활동이 필수적으로 된 우리 사회 4060세대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심포지엄은 국내외 현황, 정부 정책, 지자체 정책, 인생 이모작 방안, 시니어창업 현황, 성공한 선배의 노하우, 세대융합 창업, 공유경제와 사회적경제 등 액티브 시니어의 일자리 문제와 관련된 해법 등이 다뤄졌다.
발표에 나선 고용노동부 고령사회인력정책과 여승연 사무관은 “그간 정부의 중장년 재취업 정책에서 배제되어 있던 중위소득 100% 초과자들을 대상으로 한 신중년 인생 3모작 패키지 구성이나 65세 이상을 위한 재취업 정책 마련 등이 추진되고 있다”며 최근 정부의 취업정책 변화를 소개했다.
이날 컨퍼런스에선 시니어 취업시장 확대를 위한 세대융합에 관한 논의도 이어졌다. 세대융합이란 중장년과 청년 세대가 의기투합해 각자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취업·창업 형태. 시니어 창업이나 재취업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최근 스타트업 업계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이에 대해 앱노트의 장우용 대표는 “다케다제약 이춘엽 前대표의 영입으로 주거래 시장이었던 제약업계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며 “의사소통을 활발히 하기 위해 직급을 없애고 직함대신 영어호칭을 사용하는 등 세대 간 융합을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고 소개했다.
리스타트 조직운영위 관계자는 “4060세대가 다시 시작하는데 필요한 정부 지원 정책, 선배의 성공사례, 현실 인식, 지원 교육 등 유관 정보를 제공하려고 준비했다”며 “시니어 취업에 대한 수요와 관심이 커지는 만큼 관계기관의 협조를 통해 앞으로 행사 규모를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번 행사는 사단법인 한국모바일기업진흥협회와 다수의 민간단체로 구성된 리스타트 조직운영위가 주최했다.
미주 한인 사회에서 지식인의 멘토로 불렸던 노부부가 있었다. 정신과 전문의로 UC데이비스 의과대학에서 35년간 교수로 근무했던 故 김익창 박사와, 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 25년간 교사로 일했던 그레이스 김(한국명 전경자·86)씨다.
부부는 평생 소외받는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힘썼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싸웠다. 53년을 함께하는 동안 그들은 최고의 동지이자 친구였으며 연인이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아내는 여전히 열심히, 행복하게 살고 있다. “You should keep going.” 당신은 계속 그렇게 살아 달라는 것이 남편의 바람이었다.
사랑스러운 사회운동가
“동호회에서 주최하는 클래식 음악회 준비로 정신이 없어요. 오후에는 신문사에 음악회 기사를 전달하러 가야 해요. 오늘도 너무 바쁘네요!”
그녀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친다.
3년 전, 애너하임의 한 노인병원에서 김익창 박사와 그레이스 김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김익창 박사는 파킨슨병으로 상당히 힘들어하면서도 아내와의 인터뷰를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당시 인터뷰 주제는 ‘부부’였는데 김 박사는 “부부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젓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남편은 나를 커뮤니티 액티비스트(사회운동가)라고 별명처럼 불렀어요. 조용하고 신중했던 그와 달리 나는 말도 많았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곤 했는데 남편은 그런 내 모습을 사랑해줬지요. 우리는 6·25전쟁을 눈앞에서 겪은 세대입니다. 모두가 못 배우고 가난한 시절에 그래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우리는 그것을 갚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소외받는 곳,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늘 관심을 두게 되었어요.”
1931년 중국 상해에서 나고 자란 김씨는 해방이 되던 해 부친의 고향이었던 평안북도로 돌아왔고, 남북으로 갈리게 되자 다시 38선을 넘어 왔다. 이 과정에서 막내 동생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때 거침없이 행동하는 것은 그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상해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은 임시정부에 돈을 보내며 독립운동을 도왔고, 주위에 고학을 하는 한국 유학생이 있으면 장학금을 내놓기도 했다. 어머니 역시 그 시대에 평양신학교를 나온 신여성으로서 이웃과 나누는 것을 평생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고.
“여고 시절 내 꿈은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가서 슈바이처 박사와 함께 일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화여대 의대로 진학했지요. 그런데 입학한 그해 6·25전쟁이 터졌어요. 산속으로 피난을 갔다가 와 보니 집이며 모든 것이 폭격으로 사라져버렸더라고요. 너무 화가 나서 당장 군에 입대해 총 들고 싸우겠다고 고집을 부렸죠. 어린 아가씨가 얼마나 맹랑했겠어요. 그때 영락교회를 다녔는데 목사님이 하루는 보여줄 곳이 있다면서 저를 데리고 가신 곳이 있어요. 바로 고아원이었죠.”
폭격을 맞고 부서진 학교 건물에 임시로 마련된 고아원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밤낮으로 울부짖었고 아프고 굶주린 아이들을 돌봐줄 손길은 없었다. 그렇게 김씨는 여군 대신 고아원 선생님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김씨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재입학한다.
“등록금을 댈 형편이 아니었어요. 서울대 사범대가 등록금도 싸기도 하고 모자라는 교사를 길러내기 위해 장학금도 많이 준다고 하니 좋았지요. 또 고아원 선생을 하면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도 알게 되었고요. 무엇보다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으니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요?”
서울대학교 캠퍼스에서 그녀는 남학생들이 데이트 신청이 쇄도할 만큼 인기가 있었지만 모두 퇴짜를 놓아 별명이 ‘NO’였을 정도로 콧대가 높았다고 한다. 그중 유일하게 ‘YES’를 한 것이 남편 김익창 박사의 오페라 데이트 신청이었다고. 생전 김익창 박사는 인터뷰 때마다 첫눈에 반할 정도로 ‘탁월한 미모의 소유자’였다고 아내를 향한 무한 애정을 드러내곤 했다.
1956년, 김익창 박사가 미국 유학을 떠난 이후 6년 동안, 두 사람은 장거리 연애를 시작한다. 그 사이 김씨는 숭의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후 거리를 배회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용산직업학교를 세워 불우한 형편의 아이들을 지도했다.
“6년 동안 우리는 떨어져 있으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어요. 그때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편지로 주고받았는지 몰라요. 삶에 대한 가치관, 철학, 문학, 음악, 예술, 종교에 대한 생각을 나누면서 우리가 서로 얼마나 닮아 있는지 알게 되었죠. 그 시간 동안 다져진 신뢰는 남녀의 사랑 그 이상이었어요.”
‘Dear, Grace’
1962년, 마침내 두 사람은 미국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김익창 박사가 샌프란시스코 마운트 자이언(Mt. Zion) 병원에서 인턴십을 하는 동안 두 아들 데이비드와 다니엘이 태어났고, 남편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병원 응급실에서 일해야 했다. 잠을 잊고 살아야 했던 고된 시절이었다.
“대단한 정신력이 아니면 견딜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렇게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3년 만에 박사과정을 끝내더라고요. 레지던트를 마칠 무렵 남편이 내게 공부를 해보라고 제안했어요. 너무 기뻤죠. 내가 너무나 원하던 거였으니까요.” 김씨는 그 길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원에 진학, 1969년 상담학과 아동발달학으로 교육 석사학위를 받는다.
캘리포니아의 진취적인 교육 도시 데이비스에 정착하면서 부부는 본격적으로 소수민족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게 된다. 김익창 박사는 임상정신과 의사로서 평생 소수민족의 정신의학에 관심을 두었다. UC데이비스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문화가 다른 환자들에 대한 의료진들의 이해’를 강조하며 대학에 강좌를 만들고 끊임없이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다문화 정신의학 분야의 권위자로 자리 잡았고 그의 노력으로 현재 미국 정신의학협회에는 ‘화병’이 정식 병명으로 등록되어 있다.
김씨는 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언어와 문화 차이로 어려움을 겪는 소수인종 학부모들과 학교를 잇는 가교 역할을 자청했다. 특히 인종차별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어떤 차별도 받지 않도록 앞장섰다.
특히 1980년부터 시작했던 미주 한국일보의 질문과 응답 형식의 칼럼 ‘Dear, Grace (그레이스에게)’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어느 날 신문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부모들이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려움이 많다고요. 흔쾌히 하겠다고 했죠. 궁금한 것을 편지로 보내면 답을 주겠다고 했는데… 세상에, 편지가 어마어마하게 와서 너무 놀랐어요. 궁금한 것은 많은데 어디에 물을 곳이 없었던 거예요. 한국말을 하는 선생님이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부모와 자녀 간의 갈등, 학교와의 마찰, 인종문제를 비롯해 마약, 섹스, 가출 문제까지. 그레이스 김은 한인 학부모와 청소년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고 칼럼은 1990년까지 계속됐다.
나눔, 그 위대한 유산
이들 부부에 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부’에 대한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입양아 단체, 아시안 청소년 장학재단 등에 적지 않은 기부를 하고, 무료 진료와 상담 등의 봉사활동을 해왔던 부부가 은퇴하면서 제대로 일을 치른 것이다.
2006년 김익창 박사가 35년간 몸담았던 UC데이비스 대학에서 나왔을 때, 이들은 캘리포니아 실비치의 한 은퇴촌에 작은 집을 마련한 뒤 나머지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 20여 개 단체에 전달한 기부금은 적게는 5만 달러, 많게는 25만 달러에 이르렀다. 모두 익명으로 한 기부였다. 이 놀라운 기부는 당시 UC데이비스대학에서 이들이 내놓은 기부금 25만 달러로 ‘다문화정신의학센터’를 만들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사실 그만한 목돈이 생긴 데는 숨은 사연이 있어요(웃음). 젊은 시절 내가 하도 많이 기부를 하고 다니니까 남편이 매달 월급의 반만 받고 나머지는 은퇴연금으로 저축을 하자고 한 거예요. 은퇴할 때 그렇게 돈이 쌓인 줄 몰랐어요. 평소 돕고 싶었던 단체 리스트를 적어 내려가는데 얼마나 신이 나던지. 남편과 아주 펑펑 잘 썼어요!”
고마운 것은 부모의 결정을 기쁘게 받아들여준 두 아들이었다.
“그때 아이들이 한 말이 잊히지 않아요. 돈이 필요하면 지금 이야기하라고 했죠. 두 아이 모두 자신들을 키워준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다며 원하는 곳에 다 쓰라고 하더라고요. 아, 우리가 아이들을 잘 키웠구나. 갑절로 행복해지더라고요. 두 아들 내외 역시 어려운 곳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기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아요.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2009년 데이비드 김씨가 지난 오바마 정부의 교통부 차관보에 임명됐을 때, 그가 남긴 말이 있다.
부모님은 늘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마음만 있다면 언제나 남을 도울 힘이 있다고요.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또 다른 방식으로 도울 수 있다는 거죠. 바로 그 나눔의 정신이 우리 가족을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고개 들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아시아인은 돈을 많이 벌어도 미국 주류 사회에 들어가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님의 삶은 제 미래를 위한 최고의 투자였습니다. 부모님의 기부가 저를 성공적으로 키운 셈입니다.
상해에서 독립운동가와 유학생을 돕던 부모에게서 김씨에게로, 이것이 다시 김씨의 아들들에게로 이어진, 참으로 위대한 유산이다.
To my forever love…
‘김 여사의 해피 에너지’는 은퇴촌에서도 빛을 발했다. 김씨는 입주한 은퇴촌 실비치 레저월드의 한인회 회장이 되어 커뮤니티 간 화합에 앞장섰다. 한인 노인들을 위해 각종 세미나와 교양 프로그램을 속속 만들어내는가 하면 지역구 선거에 한인 후보자가 나오면 발벗고 나서서 선거운동을 도왔다. 물론 그 뒤에서 묵묵히 김씨를 돕는 사람은 남편 김익창 박사였다.
이 무렵 김익창 박사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면서 부부에게는 예상치 못한 슬픔이 찾아왔지만 이 또한 차분히 받아들였다.
“한동안 멍했지요. 왜 이런 병에 걸리게 됐을까. 젊었을 때 잠을 너무 못 자고 힘들어서였을까…. 하지만 남편은 곧 받아들이고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어요. 파킨슨병은 관리만 잘하면 당장 어떻게 되는 병이 아니라면서요. 그렇게 8년을 투병했지요. 그 사이 자신의 인생을 덤덤히 돌아보며 두 권의 자서전도 집필했고요.”
병세가 악화되어 노인병원에 입원하고 2년 동안, 부부는 다시 연애를 시작하는 기분이었다고. 아내는 매일 아침 예쁘게 화장을 하고 직접 구운 쿠키를 만들어 남편을 만나러 갔고, 남편도 눈을 뜨면 아내를 기다렸다. 전립선암이 발병했을 때는 상당히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김 박사는 항상 웃는 얼굴로 아내를 맞아주었다. 병원 스태프에게 ‘She is my forever love’라고 소개해 사람들을 웃게 만들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편지 한 장을 건네더라고요. ‘결혼해줘서 고맙고 행복했다. 아파서 미안했고 먼저 가서 또 미안하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까지처럼 계속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슬픈 삶을 살까봐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어요. 끝에는 늘 하던 말, ‘my forever love’라고 적어놓았더군요. 마지막 러브레터였어요(웃음).”
김익창 박사가 떠난 후, 그녀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며칠을 먹지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문득 자신이 이렇게 될까봐 걱정하며 병실에서 간신히 손을 움직여 편지를 썼을 남편이 떠올랐다.
“아니다. 남편이 가장 좋아했던 내 모습으로 끝까지 열심히, 즐겁게 살자. 그렇게 결심했어요. 나는 지금 아주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은퇴촌에서 음악회도 열고 노래도 부르고 세미나도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어요. 그러다 남편이 너무 그리울 때는 조용히 말합니다. ‘하나님 나는 준비되었으니 이제 데려가셔도 됩니다. 루크를 만나게 해주세요…’ 라고요(웃음).”
오랜 대화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열심히 포즈를 취해주는 그녀의 미소가 캘리포니아 햇살만큼이나 화사하다. 누구에게나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하는 이런 모습을 남편은 사랑했으리라.
“Good to see you!”
쿨하게 인사를 남기며 보무당당히 사라지는 ‘유쾌한 그레이스씨’. 그녀와의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
“국가와 사회 발전에 기여한 어르신이 건강하고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입니다.” 9월 18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치매 국가책임제 대국민 보고대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영상 메시지를 통해 이렇게 강조했다. 치매 환자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 개인과 가족이 떠안았던 고통을 국가가 나눠지겠다고 약속했다. 이와 같은 정부의 전폭적인 관심이 치매 치료에 대한 생태계를 변화시킬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실제로 의료계 안팎에서는 벌써 정부의 ‘동기부여’가 효과를 내고 있는 듯하다.
먼저 지난 9월 발표된 정부의 ‘치매 국가책임제 추진계획’을 들여다보면 이렇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전국에 47곳밖에 되지 않았던 치매지원센터의 확대다. 그동안은 서울과 수도권에만 설치가 집중됐지만, 다음 달부터는 전국 252곳에 ‘치매안심센터’가 설립될 예정이다. 센터에서는 치매 환자와 가족들이 상담과 조기 검진부터 관리, 의료·요양 서비스 연계까지 통합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센터에서 받은 상담 내용은 ‘치매노인등록관리시스템’에 등록돼 환자와 가족들이 이사를 하더라도 전국 어디서든 연속적으로 관리된다. 센터 안에는 치매 환자 가족의 정서적 안정을 도울 카페와 인지·신체 활동 프로그램으로 환자의 증세가 악화되는 것을 막을 단기 쉼터도 만들어진다.
기저귀 구매비용도 지원
중증 치매로 인해 이상행동 증상이 심해 가족이나 일반 시설에서 돌보기 어려운 환자는 ‘치매안심요양병원’을 통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다. 현재 전국 34개소에서 1898병상이 치매병동으로 운영되고 있는 공립요양병원은 다음 달부터 79개 병원 3700개 병상으로 확대될 계획이다. 치매안심센터와 치매안심요양병원, 요양시설 등 치매국가책임제 실행을 위해 정부는 올해 추경에서 2023억원을 이미 집행했으며, 내년 예산안에도 3500억원을 배정한 상태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으로 인해 지난 10월부터 중증 치매 환자도 산정 특례 적용을 받게 됐다. 의료비 본인 부담률은 4대 중증질환과 같은 수준인 10%로 경감됐다. 복지부 계산에 따르면 연간 200만원의 자기부담금을 지불했던 입·내원일 수 52일 정도의 환자는 앞으로 77만원만 내면 된다.
그동안 신체기능이 양호하다는 이유로 배제됐던 경증 치매 환자도 장기요양서비스 대상에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장기요양 5등급을 확대하거나 6등급을 신설해 경증 치매 노인에게도 장기요양서비스를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또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을 위해 시설의 식재료비나 기저귀 구매비용을 장기요양보험에서 지원할 계획이다.
이외 전국 노인복지관에서 치매 예방을 위한 미술, 음악, 원예 등을 이용한 치매 예방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66세 이후 4년마다 받는 인지기능검사 주기도 2년으로 짧아진다. 치매안심마을 조성 사업과 치매 파트너즈 양성 사업도 확대된다.
한의학계, 치매 분야에 높은 관심
치매 치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의학계도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한방 치매 치료의 과학적 효과를 입증하는 데 애쓰고 있다. 최근 부산시 한의사회는 초기 치매 증상인 경도인지장애로 판정된 환자 200명을 대상으로 6개월간 한방 치료를 실시했다. 그 결과 전체 환자 중 80.5%(161명)이 인지기능개선 효과를 보였고, 환자 중 82%가 치료 재참여를 희망했다.
또 강동경희대학교 한방신경정신과는 ‘한방 치매 예방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치매 예방뿐만 아니라 노년기 생활습관 교정을 통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주는 것이 목표다. 강동경희대학교 한방신경과는 서울시와 함께 ‘어르신 한의학 건강증진사업’을 통해 한방 치매 사업도 진행 중이다.
이런 한의학계의 노력에 화답이라도 하듯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박능후 보건복지부장관은 “(치매 국가책임제에) 한의사도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 본다”고 말했다.
치매 치료에 대한 관심 증가는 치과계도 예외는 아니다. 대한치과의사협회는 치매 구강건강정책 테스크포스팀을 통해 치매 예방과 관리를 위한 정책 제안서 제작을 결정하는 등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인공지능과 가상현실도 치매 다뤄
최신 IT 기술도 치매 진단과 치료에 나서고 있다. 류호경 한양대 아트앤테크놀로지학과 교수팀은 최근 국내 최초로 가상현실(VR)을 이용해 노화와 치매의 중간단계인 경도인지장애 여부를 판단하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이 기술은 은행 ATM, 대중교통 이용 등과 같이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상황을 가상현실 속에 구현하고, 참가자의 움직임 분석을 통해 치매 증상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방식은 진단 과정에서 거부감이 들지 않는 것이 큰 장점 중 하나로 꼽힌다. 기존 진단 방법은 설문 문항을 시험지처럼 작성하는 방식인데, 질문에 대해 반발하는 환자도 적지 않았다.
암 치료 방법을 제안하는 인공지능 ‘왓슨’과 유사한, 치매를 치료하는 인공지능의 등장도 멀지 않았다.
가천대 길병원은 뇌 질환 진료지침 정밀의료 플랫폼을 개발 중이다. 일종의 뇌 전문 인공지능 의사로 디지털 뇌 영상 빅데이터를 구축해 암 치료에만 적용됐던 개인 맞춤형 정밀의학을 뇌 질환 치료에도 실현시키겠다는 계획이다. 치매의 조기진단이나 치료에도 활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가천대 길병원은 지능형 뇌과학연구센터·뇌과학연구원·가천뇌건강센터를 설립해놓고 기술 개발에 대한 역할 분담과 협업을 하도록 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도 조선대학교 치매예측기술국책연구단 등과 함께 딥러닝 기술과 컴퓨팅 인프라, 뇌 영상 빅데이터를 활용해 뇌 영상 분석 인공지능기술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그녀는 뽀얗고 하아얀 뭉게구름 같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색다르고 기발한 발상이 피어오른다. 집중해서 듣자니 성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이상희 헤어팝’의 이상희(李相熙·56) 원장. 직업은 미용사인데 그녀 인생에서 봉사를 뺀다면 삶이 심심할 것만 같다. 손에 익은 기술을 바탕으로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니 말이다. ‘누군가를 돕는다’란 말에 백만 개의 하트풍선이 ‘뿅뿅’ 터지는 그녀의 환한 얼굴과 마주했다.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루하루가 감사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하루하루가 감사해요. 저는 되게 감사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감사’라는 단어를 꺼낸다. 열 손가락이 성한 가운데 기술을 배운 것도, 그 기술을 가지고 다른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있어서 감사하단다.
“미용기술을 배울 때 돈만 벌기 위해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한 달에 네 번 봉사를 간다면 나머지 시간은 봉사를 가기 위해 미용실에서 일하는 시간이라 생각하거든요. 제 이름이 서로 ‘상’에 빛날 ‘희’거든요. 말 그대로 상희답게 사는 거죠.”
어려운 이들을 만나면 뭔가 해줄 수 있어 좋고 자신이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후배들이 잘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이상희 원장을 만난 것은 5월 말. 본인 스스로가 정한 인생의 안식년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미용실을 계속하면 쉴 수 없겠더라고요. 원래 하던 넓은 미용실을 4월 30일까지만 하고 5월 1일 철거했어요. 저와 오래 일했던 디자이너들이 일할 곳을 마련해 지금의 아파트 상가로 옮겼어요. 이성적으로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철거하던 날 잠이 안 오더라고요. 안식년이라 해도 두 손 다 노는 게 아니라 그런지 다음 날부터는 잠이 너무 잘 왔어요.”
그런데 그 안식년이란 것 말이다. 대부분 휴식을 염두에 두고 설계를 한다. 이상희 원장은 그 하고 싶다던 일(?)에 더 빠져보려 미용실 운영 대부분을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맡겼다. 벌여놓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 당장 앞두고 있었던 새터민 결혼식에 피부 관련 사업, 매달 있는 봉사, 새로운 봉사, 미용인의 처우 개선 등 쌓이고 쌓인 일을 보니 이게 안식년인가 싶다.
봉사와 업(業)이 하나인 인생을 구상하다
전라북도 정읍 출신인 이상희 원장은 성공하려고 미용계에 입문했다. 미용실에 갔더니 기술을 배우면 서울도 갈 수 있고 해외도 갈 수 있다고 말해줬다. 솔깃한 말에 응시한 미용 자격증 필기시험에 떡하니 붙었고 곧바로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학원 안 다니고 미용실에서 연습했어요. 고등학교 친구들 데리고 가서 머리 잘라주면서 두세 달 정도 훈련했고 합격 1년 정도 후에 상경했죠.”
서울에 오자마자 당시 유명했던 미용실에 취업한 이상희 원장은 일주일을 못 다니고 그만뒀다. 줄지어 서 있는 거울에 헤어디자이너의 이름이 아닌 번호가 붙어 있었다.
“큰 미용실 가야 성공한다기에 들어갔는데 거기선 사람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요. 적응하기 힘들더라고요. 제가 시골 애였지만 자존감은 있었거든요.”
서울살이 초반 20대의 이상희는 걷기도 많이 걸었다. 집이 있던 상도동을 지나고 한강다리 건너, 숙대, 남대문시장.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했다.
“신호등 앞에 있는데 파마가 막 말아지는 거예요. 다시 미용을 해? 돈 많은 남자 만나서 미용실을 열어? 가난해서 걷고 고민하면서도 걷고. 그렇게 내린 결론이 나를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을 키워 성공하겠다는 거였어요.”
머리 자르는 미용기술 외에도 머리를 올리는 ‘업스타일’에 ‘메이크업’ 기술도 할 수 있어야 했다. 다니던 미용실 원장과 선배, 동료에게 양해를 구해 시간을 마련했고, 잘살던 친구에게 학원비를 부탁해 메이크업 학원에 등록했다. 선후배 관계가 수직적이고 딱딱하던 시대였지만 업무시간을 배려받고 학비문제를 해결해나가면서 더욱 완벽한 미용사로서 비상을 꿈꿨다.
“후배들에게 돈과 시간이 없어서란 변명을 하지 말기를 당부해요. 꼭 해야 할 일이고 열정이 있으면 누구든 도울 테니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해요.”
20대는 미용사 이상희로서 삶을 채우는 시간이었다면 30대는 그것을 바탕으로 존중하고 돕고 깨치며 살아갔다.
‘높임말’과 ‘봉사’는 철칙
서른 살의 나이, 자신의 이름을 단 미용실을 열었다. 개업과 함께 이상희 원장이 철칙으로 삼았던 두 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가 직원들 사이에 높임말 사용이었다. 당시는 손님이고 미용사들이고 서로에게 함부로 하던 시절이었다.
“저희 때는 디자이너와 스태프가 같이 앉아 밥도 안 먹었어요. 솔직히 미용기술에는 차이가 있지만 사람 차이는 없잖아요. 그래서 오픈할 때부터 높임말을 사용했어요. 혹여 함부로 하는 손님이 있으면 더 예의를 갖춰 말했어요. 구두며 유니폼도 갖춰 입었습니다. 그렇게 분위기를 바꿨어요.”
두 번째는 바로 봉사다. 한 달에 한 번은 전 직원이 봉사하기로 했다.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좋은 일에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교, 지역 그 어떤 것도 따지지 않고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 어려운 이웃과 얼굴을 마주했다.
“처음 찾아서 봉사했던 곳이 가난한 마음의 집이라는 곳이었어요. 1990년대에는 메이크업이 아주 강할 때였어요. 장애우들이 저희를 보고 놀라서 숨는 거예요(웃음). 그래도 몇 번 가니까 친해졌어요. 봉사하다 보니 새터민과도 연결이 됐어요.”
어렵던 시절 동료들과 친구의 도움으로 메이크업을 배운 것이 두고두고 고맙다는 이상희 원장. 좋은 마음이 모여 얻은 기술이기에 봉사를 할 때 더없이 기분이 좋다.
“미용실 열고 1년쯤 돼서 어떤 손님이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러시아 여자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온 탈북민이 결혼식을 하는데 메이크업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요. 제가 메이크업을 한다는 걸 몰랐던 손님인데 말입니다. 당연히 좋다고 했죠.”
봉사한다는 게 알려지면서 놀이처럼 재미있고 기획력 있는 봉사가 이어졌다. 정부 지원이 어려운 틈새 청소년들을 위해 일일찻집을 열고, 산골 아이들을 위해 자전거도 사주고 고아원에 세탁기도 기증했다.
“손님들에게 이건 꼭 약속했어요. 우리 미용실에 와서 머리를 하면 그 일부는 다른 사람들 위해 쓰인다고요. 제가 그렇게 좋은 일을 하면 이곳에 오시는 분들이 복을 받는 거잖아요.”
‘K뷰티’와 ‘뷰티엔젤’ 봉사의 중심에 서다
2000년대 중반에는 한·일 미용인 간의 세미나가 자주 있어서 일본에 갈 기회가 많았다. 그때 일본의 성년의 날과 우리나라의 성년의 날에 대한 의문과 고민이 일었다.
“일본에 갔는데 일본 젊은이들이 기모노를 많이 입더라고요. 예쁘기도 하지만 그 나라 문화잖아요. 그런데 일본의 ‘성인식’은 공휴일인데다가 자치단체에서 큰 잔치를 열어요. 기모노 입고 화장과 머리를 하고. 이 모든 게 다 미용실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함께 일본에 방문하고 온 미용실 원장들에게 우리 청년들을 위한 성년의 날을 특별한 날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메이크업과 머리손질은 미용실에서 도움을 주고, 한복은 당시 이상희 원장이 다니던 우석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미르’에서 만난 지인이 공급해주기로 했다.
“연세대학교 다니는 손님한테 학교 대동제 때 성년식을 열어주겠다고 제안했어요. 단, 스마트폰으로 한복 입은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학생들에게만 기회를 주기로 했어요. 2011년 5월에 이틀 동안 저희가 준비한 성년식에 300여 명이 참여했어요.”
이 행사를 계기로 K뷰티디자인협회의 시초가 된 한국업스타일협회를 창설했다.
“일본에 같이 다녔던 미용인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서 좋은 일도 하고 미용실 손님도 우리 손으로 오게 하자고 말씀드렸어요. 한국업스타일협회는 이후 좀 더 의미를 넓혀 지금의 K(Korea)뷰티디자인협회가 됐습니다.”
이상희 원장의 또 다른 활동 영역은 뷰티엔젤이다. 미용실 개업 초기 직원들과 다니던 봉사가 주위 미용인들과 함께하는 한국미용봉사회로 이어지다가 누구든 함께 참여하는 연합봉사 형태의 ‘뷰티엔젤’로 탄생했다. 한국 봉사는 물론 캄보디아 미용기술 지원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미르’의 박문희 원장님이 의료진하고 캄보디아 봉사를 간다고 머리를 하러 오셨어요. 제가 ‘의사들은 너무 좋겠다, 다른 나라 가서 봉사도 하고’ 그랬더니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봉사를 하게 된다면 저는 미용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게 진행이 됐어요. 그쪽 아이들 미용기술 가르칠 생각을 시작하니까 잠이 안 왔어요.”
캄보디아 봉사는 이상희 원장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20년 넘게 많은 사람을 도우며 살아왔지만 처음의 그 에너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캄보디아 봉사를 앞두고 느꼈어요. 왜 잊고 있었지? 친구 한 명의 도움으로 내가 20대를 살았는데 지금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난해도 여자가 기술을 배우면 자식교육 시킬 수 있고 생활고에서 나아지니까 공부는 늦게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두 번의 캄보디아 미용기술학습프로그램을 통해 20명을 지원했다. 학비뿐만 아니라 숙식과 생활보조금까지 지원하는 사업이라 매년 할 수 없다고 한다.
“캄보디아 아이들과도 약속한 것이 있어요. ‘너희가 성공을 하면 한 사람을 가르쳐라.’ 그게 약속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캄보디아에 미용실 오픈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곳 아이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거죠.”
‘미용복지사’라는 직업 멋지지 않나요?
안식년이라는 본인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매달 13일 레드엔젤(청년응원단체)과 함께 K-컬처 콘서트를 개최한다. 2~3개월에 한 번씩은 다른 봉사단체와 연합활동도 한다. 캄보디아는 물론 올가을 새터민 합동결혼식도 계획 중이다. 미용인으로서의 고민도 남다르다.
“미용은 보건의 개념도 있지만 지금 사회에서는 복지의 개념입니다. 형편은 되는데 거동이 힘들어서 미용실에 못 오시는 경우가 있잖아요. 현재 미용은 이동 미용이 안 됩니다. 환자 외에는요. 미용복지사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미용사의 새로운 직업에 대한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고령화 사회 시니어들의 복지에 대한 깊은 배려가 담겨 있다. 이외에도 한류로 인해 유입되는 외국 여행객에게 보다 친근하게 한국 문화를 알릴 수 있는 ‘뷰티존’을 만들어 세계에 한국 문화와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단다. 미용실을 작은 평수로 옮기면서 ‘손아당(蓀雅堂)’이라는 공간도 만들었다. 뜻 맞는 사람들이 모여 봉사에 관한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허브 역할을 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근데 저는 생각하는 게 예쁜 거 같아요. 끊임없이 꿈을 꾸는 거 같아요. 내가 만일 미용 일에서 손을 뗀다면 내 직함을 뭘로 하지?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 이상희로 불리면 어떨까 하는데 되겠죠?”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를 꿈꾸는 그녀의 입에서는 이쁘다(예쁘다)라는 말이 참으로 많이 흘러나온다. 자주 쓰는 단어에는 그 사람의 평소 모습이 담겨 있다. 그녀의 이쁜 마음이 영원하길 지지하고 응원한다.
“아파트 꼭대기층서부터 좀 찾아내려와 주실래요?”
퇴근 후 분리수거와 음식물봉지를 들고 분리수거장으로 갔다가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어르신들이 모여서 웅성웅성 하신다.
항상 출입구에 앉아 계시던 A어르신께서 병원에 다녀오신 후 타고 가실 실버카를 조카가 가지러 간 사이 어디로 가신 것이다. 항상 눈 여겨 보시고 안타까워하시던 분들이라 모두 여기저기로 찾아 나섰다. 필자와 어르신 한분이 24층서부터 찾아 내려오자며 꼭대기로 올라갔다. 고소공포증이 있던 필자는 아래를 살짝 내려 본 순간 다리가 후들거려 옆은 보지도 못한 채 계단을 달리며 어르신을 찾아 내려왔다.
며칠 전 친절교육차 대강당에서 많은 사람이 교육을 받았다. 여름더위인양 폭염속의 찌는 듯 한 더위 속을 헤치고 달려가 듣노라니 소통과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강사님께서는 힘들고 스트레스 받을 때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고 계단을 이용하라시며 하시는 말씀인 즉 처음엔 익숙하지 않아 적응이 안 되지만 몇 번 올라 다니다 보면 계단 오르면서 힘든 점이 하나하나 도망가 버린다고 하시며, 더욱 좋은 점은 계단을 밟고 오르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희망의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고 하셨다.
평소 운동을 싫어했던 필자는 많은 반성과 후회를 하며 계단을 오르내리며 새로운 각오를 다짐해야지 했는데 갑자기 잃어버린 어르신을 찾으며 내려오는 계단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참을 내려오다 보니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뛰어 어르신들이랑 내려 와 2층으로 가서 보니 혼자 다니셔서 많이 힘드셨는지 피곤해 보이시는 모습으로 A어르신이 앉아 계셨다.
나이가 많은 조카께서는 혼자 계신 숙모님께 왔다 갔다 보살펴 드리려니 힘든 점이 너무 많고 요양보호사가 오전에 와서 일을 봐주어도 너무 힘들다고 입가에 거품이 일도록 토로를 하시자 옆에 계시던 어른신들께서도 치매로 인해 힘든 삶의 애환을 한마디씩 더하신다. 한 바탕 아파트가 발칵 뒤집어 지긴 했어도 여러 어르신들의 협동심과 위와 아래로 나누어 찾자며 재치 있게 어르신을 걱정하는 정겨운 모습이 ‘아직까지 우리들 이웃사랑이 존재하고 있구나.’ 하고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대한의사협회는 치매가 국민건강상의 문제를 넘어 국가적으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국가 차원의 근원적인 대책마련을 위한 문재인 대통령의 주요공약인 치매국가책임제를 적극 환영하고 치매 대책의 일환으로 치매 조기진단 및 치료, 모니터링을 더욱 충실하게 할 수 있도록 치매진단 및 치료 프로토콜을 제작해 배포하고 치매 관련 연수교육 프로그램도 개발해 치매국가책임사업에 의료인이 최선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의료전문가를 비롯한 민간과의 원활한 소통을 통해 지속 가능한 치매대책을 마련함으로써 치매환자는 물론 환자 가족까지도 국가가 책임지는 복지국가를 실현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는 의사협회의 바램 또한 온 국민의 소원이라고 본다.
서로 수고와 감사의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한바탕 일어난 어르신소동을 계기로 계단이 있는 곳이면 꼭 걸어 다녀야 함을 재인식하며 운동엔 격식과 규칙이 없어 나의 몸과 소통하며 또 나를 위해 공감하는 실천을 함으로써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치매를 사랑하면서 보듬을 수 있는 정책이 뒷받침 될 수 있는 그날을 기다려 본다.
건강정보 홍수의 시대다. 우리 사회가 고령화로 접어든데다 건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신문이나 방송의 주된 소비층이 시니어인 것도 이유 중 하나다. 실제로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흰 가운을 입은 의사의 단체 출연은 예사다. 음식을 소개하며 자연스레 효능을 소개한다거나, 병을 앓았던 환자가 본인의 경험을 ‘진리’처럼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정작 의료계에서는 이런 건강정보 프로그램의 유해성을 경고한다. TV 건강 프로그램, 제대로 시청하는 방법은 없을까?
지난해 10월, 대한가정의학회 학회지에 흥미로운 논문 하나가 발표됐다. 중앙보훈병원 가정의학과 연구진이 발표한 논문으로, 50세 이상 성인의 TV 건강정보 프로그램에 대한 신뢰도가 건강 습관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내용이었다. 중앙보훈병원에 다녀간 환자 249명을 대상으로 조사된 이 연구의 결과, TV 건강 프로그램을 신뢰하는 이유로 ‘의사가 출연해서’가 51%(122명)로 가장 많았다. 그다음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줘서’(28.4%), ‘TV에서 전달하는 정보이므로’(11.2%), ‘실제 환자가 나와서’(7.4%) 순이었다. 또 TV가 제공하는 건강정보에 높은 신뢰도를 보이는 환자의 공통점은 TV 시청시간이 길다는 것이었다.
건강의 적은 쇼닥터?
이렇듯 시청자들의 의사에 대한 신뢰도는 상당하다. 시청자가 의학적 지식을 받아들일 때 의사의 의견은 마지막 보루와도 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방송에 출연하는 의사의 말을 100% 신뢰하기가 어려운 시대다.
한 예로 대한의사협회 중앙윤리위원회는 지난해 8월 발모에 효과가 있다며 자신이 만든 어성초 제품을 방송매체를 통해 홍보한 A원장에 대해 회원 권리 정지 2년과 위반금 2000만원을 부과했다. A원장은 어성초가 탈모를 치료한다고 자신이 만든 제품을 홍보하고, 물구나무서기를 하면 후두부 동맥 혈류량이 5배 증가해 발모 효과가 강해진다고 주장했다. 이에 의협은 의사의 품위를 훼손했다는 이유를 들어 중징계를 내렸다. 소위 쇼닥터에게 내린 첫 번째 징계로 꼽힌다. 쇼닥터(Show Doctor)는 최근에 만들어진 신조어로, 의학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시술에 대해 과장하거나 근거 없이 이야기하는 의사와 의료진을 가리키는 말이다. 의협에서는 쇼닥터에 의한 부작용을 막기 위해 지난 4월 의사윤리 강령·지침을 11년 만에 개정했다.
전문가들은 특정 제품을 판매하기 위한 목적 혹은 자신의 병원을 홍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의사들이 방송에 적극적으로 출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실제로 의료법에 의해 광고게재 제약을 받는 병원들은 언론기사 노출이나 방송 출연에 목매는 경우가 많다. 올해 언론중재위원회에서 4차까지 이뤄진 시정권고소위원회 결과를 살펴보면, 시정권고 총 374건 중 의료기관의 기사형 광고로 지적된 사안이 49건이나 된다.
체험 환자의 증언이 갖는 함정
의사들이 등장하지 않는 건강 프로그램들은 더욱 문제다. 특히 병을 앓았던 환자의 체험담은 시청자들을 솔깃하게 만든다. 방송사는 환자가 실제로 겪었던 일이라는 이유로 특별한 검증이나 여과 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한다. 시청자 입장에선 사실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분위기다. 말하자면 의사들이 농담처럼 말하는, “의사는 믿지 않아도 이웃사촌은 철석같이 믿는” 심리를 이용한 프로그램이다. 이들의 경험담에는 효험을 얻은 음식이나 민간요법을 만나기 전 어떤 병원에서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가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이런 증언 형식의 방송은 언급된 내용에 대한 책임에서 제작진이 비켜설 수 있게 해주는 구조도 된다. 방송은 그저 환자 경험에 대한 내용을 옮길 뿐이다. 일부 인터넷 환우 커뮤니티에는 흥미로운 체험을 한 환자를 찾는, 방송작가들을 위한 별도의 게시판이 운영될 정도다.
한 한의사는 “방송에서 특정 질환에 좋다고 소개된 약재나 음식을 살펴보면 몸에 다른 이상을 일으킬 정도로 비정상적인 분량을 섭취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면서 “실제 치료 효과는 다른 데서 왔는데 음식이나 민간요법에서 얻은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아 그대로 믿으면 낭패를 볼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