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니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 사느라고 살았다”
- ◇ 입가에 미소 짓게 하는 어린 시절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고, 그 아래 작은 도랑이 흐르는 포근한 동네…. 막내 오빠와 그 친구들이랑 논밭 사이를 선머슴처럼 마구 뛰놀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그 시절…. 그랬다. 하늘이 유난히도 파래 눈부시던, 아름다운 경남 진주시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극히 온화하시고 자상하신 아버지와 적극적이고 생활력이 강하신 어머니께서는 육 남매를 두셨는데, 필자는 그중 다섯 오빠를 둔 막내이자 고명딸로 태어났다. 공무원이신 아버지 덕분으로 필자 가족은 관사에서 생활했다. 관사에는 그리 넓지는 않으나 아담한 텃밭이 있어 여러 가지 농작물을 가꾸며 필자의 정서를 포근하게 살찌워 갈 수 있었다. 그 텃밭 옆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그 물은 유난히도 차가워 여름날 오빠들의 뜨거운 몸을 식히는 데에 일등 공신이 됐고, 여러 과일을 담가 식힌 뒤 먹기도 좋았다. 과일 접시를 한가운데 두고 온 가족이 평상에 둘러앉아 여름밤을 즐기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들은 아직도 필자를 미소 짓게 한다. ◇ 교사의 꿈을 꾸기까지의 청소년기 당시 필자가 입학한 진주사범학교부속초등학교는 교복이 있었는데, 입학 당시 엄마는 손수 교복을 지어 입혀 주셨다. 감색 교복은 필자가 옷을 입었다기보다는 교복에 들어갔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것 같은 모습이있지만 ‘이제 나도 어엿한 학생’이란 생각에 교복 입을 때마다 행복감에 져졌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서울로 발령 나시면서, 초등학교 3학년 2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서울로 전학하게 됐다. 전입한 서울초등학교의 친구들은 경상도 말씨를 쓰는 필자를 신기해하며 놀렸고, 이 때문에 점점 말이 없는 아이, 폭넓은 친구들의 사귐이 없는 소심한 아이로 변해 갔다. 그러던 중 6학년 때 담임으로 박병직 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그 선생님께서는 나의 부족한 점을 잘 파악하셨고, 또 그 부족한 점을 채워 주시기 위해 많은 배려를 아끼지 않으시며 애써 주셨던 고마운 분이셨다. 그분은 내가 성년이 돼 38년 가까운 세월을 교단에 서 있을 수 있도록 첫 디딤돌이 돼 주신 분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중학교의 진학은, 학업 성적이 남달리 월등하지도 못했고, 또 당시 멀미가 심해 버스 통학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걸어서 등하교할 수 있는 가까운 중학교로 진학하게 됐다. 그 당시에는 입시가 있었는데, 그 입시에 아버지와 얽힌 이야기 하나가 있다. 입시 과목은 국어, 산수였는데, 시험을 마친 필자는 공중전화기로 달려가 아버지께 전화했다. 아버지께서는 수고했다면서 대뜸 산수 시험 문제 하나를 거론하시며, 답을 무엇이라고 썼느냐 하시기에 ‘12’라고 말씀드렸더니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수화기를 드신 채 직원들에게 대견한 딸이라 자랑하시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내 귀에 들려 왔다. 그 날 밤, 당신의 막내딸이 어려운 산수 문제 하나를 맞춘 것이 그리도 신이 나셔서 한턱내셨단다. 별로 뛰어나지도, 그리고 내세울 것도 없는 이 막내딸을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작은 일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키가 제법 큰 중학생 딸을 초등학생 때와 다름없이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곧잘 여기저기 다니시기를 즐겨 하셨다. 자상한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나를 대하실 때 한층 더 엄하셨다. 그것은 막내인 데다가 고명딸이고, 아버지의 절대적인 애정까지 받아 혹 남들로부터 버릇없이 키웠다는 소리를 들으실까 봐 내심 걱정이 많으셨던 것이다. 그땐 정말 철부지였었기에 한때 ‘내 엄마는 혹시 계모가 아닐까’하는 의구심으로 홀로 심히 고민한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다. 중학교 2학년 6월 필자는 일생에서 가장 쓰라린 경험을 했다. 그토록 자상하셨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고혈압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그땐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었고, 그 충격으로 필자는 다시 말이 적은 아이가 됐다. 196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여고 시절이 시작됐다. 13년 위인 나의 큰오빠는 다섯 동생을 헌신적으로 보살피면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를 훌륭하게 채워 주셨다. 특히 큰올케의 뒷바라지는 나에게 아무 부족함을 느끼지 않게 해 주셨다. 대대로 내려오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우리 가족은 서로 양보하고 사랑할 줄 아는 형제들이라는 것을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육 남매를 여자 혼자의 몸으로 자식들을 건강하게 키우시고 올바르게 가르치시느라 그 어느 어머니보다 피땀 흘리시며 사셨던 어머니. 지금도 애틋한 그리움으로 코끝이 시큰해 온다. 나의 신앙생활도 이때 많이 성장했다. 성장한 신앙심과 긍정적인 사고로 생활하다 보니, 중학교와는 달리 일상생활에서 감사가 넘쳤고 생기가 충만했다. 이로 인해 학교에서 임원 활동도 하게 됐다. 특히 교단에 서서 후진 양성에 젊음을 불태우리라는 인생의 꿈을 찾으면서 구체적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한 여고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나의 대학생활 및 교직 생활 필자는 대학 입시 예비고사는 무난히 합격하였으나, 대학 입시에서는 낙방의 고배를 마셔 후기 대학으로 진학하게 됐다. 진학한 대학은 사범대학으로서 나의 꿈을 이룰 수 있는 학교였다. 대학 생활은 순조로웠다. 신입생 시절부터 학보사 기자로 선발돼 적극적이고 활달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고, 교수님과 선배들의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받으며, 보다 도전적이며 창의적인 나로 성장하게 하였다. 대학 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뜨거운 열정으로 학과 연극제에서 두 번의 주연으로서 무대에 선 일과 학과의 전 학년 모임이 있을 때마다. 진행을 맡았던 것이다. 비록 낙선은 했지만 학생회 후보로 출마한 일도 잊히지 않는 추억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필자의 가슴 어디에 그러한 열정이 숨죽이고 있다가 폭발했는지 자신도 놀라울 따름이다. 대학 4학년 때, 최선을 다해 순위고사(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해야만 했다. 꿈꾸어 오던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무난히 시험에 합격한 후 대학을 졸업하던 그해 3월부터 교직 발령이 나 곧바로 교단에 서게 됐다 . 그 후 퇴직하기까지 아홉 개의 학교를 거치면서 약 38년이라는 짧지 않은 교직에 몸을 담았다. 돌이켜 보면, 교직 생활 중에 받은 표창(교육장, 교육감, 교육부 장관, 국무총리 등)들은 내게 더욱 잘하라는 격려와 지지가 돼 힘이 드는 줄 모르고 참으로 신명 나게 교육의 현장을 즐겼다. 49세의 나이로 대학원에 진학해 학문을 논하고, 젊은 교사들과 교육을 고민하며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던 것과 나 자신이 대학원생으로서의 열정과 낭만을 맘껏 즐겼던 2년간의 그 시간도 참 아름답고 소중했다. 그간의 많은 학생, 학부모, 교사 들과 함께 하며 울고 웃었던 많은 일이 지금도 파노라마로 스친다. ◇ 교단을 떠난 후 ‘오늘’지난 2012년 8월, 약 38년간 교단을 지키다가 깊은 번뇌를 거쳐 명예퇴직을 결심하였다. 명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세 가지. 첫째, 인생 후반전에 훌쩍 접어드니, 그간 바쁜 생활로 곁에 있는 사람의 눈과 계절의 변화를 볼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했음이 불현듯 아쉬웠다. 먼저 남편과 마주 보고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아침 식사를 하고 싶었고, 아름답고 좋은 계절에 사람과 자연을 여유롭게 만나고 싶었다. 둘째, 크리스천으로서 말씀을 가까이하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깊이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의 첫 시간인 새벽기도회에도 참여하고 싶었다. 셋째, 세태의 변화로 평생 천직이라 생각했던 교직에 깊은 회의가 찾아들었다.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스스로 한계를 만났는데, 그것을 뚫고 헤쳐나갈 자신이 없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했던가. 퇴직 후 필자는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기쁨을 느끼며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아침 식사는 언제나 남편과 함께 마주 앉아 하고, 신앙의 성장을 위해 성경공부 등을 하며 말씀을 가까이 하고, 새벽기도에 힘쓰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기회 될 때마다 임산부와 어린 친구들에게 태교동화와 구연동화를 들려주고 있으며, 동년기자단으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며 바삐 지내고 있는 요즘이다. 또한 나의 든든한 언덕이 돼 주는 후원자이자 조력자인 남편, 그리고 언제나 제 엄마를 자랑스럽게 여겨주고, 때론 조언과 정보제공을 아끼지 않는 딸, 사위, 아들, 며느리,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단지 세 손주가 있어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거나, 성인이 돼 가끔 만나 식사하며 차 마시고, 세상살이 이야기를 하며 같이 늙어가고 있는 제자들이 곁에 있기에 참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 필자가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소풍’을 마치는 그 날이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그날까지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것에 감사하며, 겸손한 자세로 기도하고 미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이타적 삶을 살아갈 것을 자신에 주문해 본다.
- 2016-05-12 14:06
-
- [6월을 맞으며] 6월은 ‘희망의 달’이다
- 한해를 반으로 접는 유월을 ‘희망’의 달이라고 부르고 싶다. 과연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유월은 신록이 절정을 향해가는 시기다. 신록은 우리에게 평안과 위로를 준다. 무엇보다도 신록은 희망을 준다. 한해를 시작한 1월은 시무식을 비롯한 이런저런 행사로 쏜살같이 지난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2월이 지나면 3월은 입학식으로 설렘과 기대가 가득한 달이다. 목련꽃이며 진달래꽃이 벚꽃의 화사함과 함께 추운 계절을 지낸 우리의 마음을 마음껏 위로한다. 푸른 하늘 속에서 노란 물을 들이는 것 같은 산수유가 활짝 핀 오솔길을 걷노라면 어느새 추억 속의 시절로 돌아가고 만다. 이렇게 노란 꽃물이 가슴에 들어 서서히 깊어지면 가을에는 빨간 사랑이 솟아나는 것인가. 5월에는 어린이, 어버이 챙기느라 이런저런 행사며 식사자리가 넘쳐 난다. 이렇게 바쁜 상반기를 보내고 숨을 좀 돌리며 호흡을 가다듬을 때 푸른 신록이 몰고 온 6월이 마음에 위로를 전한다. 6월은 장미의 계절이기도 하다. 담장을 타고 오르며 경쟁하듯 빨간 얼굴을 뽐내는 장미를 보는 것만으로도 삶의 의욕이 솟구친다. 수줍은 듯 하얀 감꽃이 피고 청초하게 하얀 미소를 띤 개망초가 들녘을 순결하게 수놓는 유월에는 희망도 녹음처럼 우거지는 것 같다. 올해 6월 5일은 24절기에서 아홉 번째에 해당하는 망종(芒種)이다. 이때가 보리를 베고 모내기를 하기에 가장 알맞은 시기다. 보리를 추수하기 전까지 식량이 떨어져 어려웠던 시기를 ‘보릿고개’라고 한다. 유월이 되면 식량문제에서도 희망이 보이는 것이다. 이런 6월이 우리 민족에는 역설적으로 가장 아픈 상처를 겪은 달이다. ‘6·25동란’이 일어났고 ‘6·10민주항쟁’도 있었던 달이다. 희망으로 가득해야 할 푸른 유월에 우리 민족에겐 뼈아픈 시련이 닥쳤던 것이다. 우리는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지정하여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유월 초 농촌 들녘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이었고 산등성이에서는 뻐꾸기 소리가 종일 심사를 흔들어 놓았다. 바쁜 시기였던 만큼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기가 무섭게 집안 일손을 도와야 했다. 학교에서 ‘반공 웅변대회’, ‘호국·보훈 글짓기’가 연례행사로 열렸던 것도 6월이다. 머리띠를 두르고 두 손을 치켜들어 주먹을 불끈 쥐며 열변을 토하던 그때 연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현충일이면 집집이 대문 앞에 태극기를 달았다. 성물처럼 고이 간직한 국기함을 열 때면 어떤 경건함을 느끼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상이 되지 않지만, 그때는 그랬다. 세계는 이념의 대결과 냉전의 시대를 뒤로하고 지구촌 시대의 물결 속에 꿈의 사회(Dream Society)를 열어가고 있다. 이런 시대의 흐름 속에서 6월은 어떤 의미여야 할까? 초고령사회를 향해 가는 대한민국은 노령인구와 양극화 문제를 풀기 위한 해법을 찾는 데 많은 힘을 쏟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1955년~1963년 출생자)가 700만 명 정도이고 ‘5575세대’(55세~75세)가 1천만 명에 이른다. ‘은퇴가 없는 나라’의 저자 서울대학교 산업공학과 김태유 교수는 “고령화는 고령화로 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시니어들은 복지의 수혜대상자를 의미하는 용어가 아니다. 시니어는 이 시대를 만들어낸 우리의 토대고 비빌 언덕이다. 시니어는 새로운 경제의 잠재력이고 보물이다. 시니어를 무기력하고 힘없는 노인들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시니어는 지혜의 샘이고 발전의 원천이다.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은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청춘은 인생의 어느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장밋빛 볼, 붉은 입술, 유연한 무릎의 문제가 아니라 샘솟는 상상력과 넘치는 감수성과 의지력이다.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공급되는 신선함이다.” 늙음은 낡음이 아니다. 늙음은 거꾸로 가는 신비한 새로움이다. 제대로 된 늙음에는 더욱더 원숙한 삶과 깊은 깨우침이 펼쳐진다. 늙음에는 심오한 맑음이 있다. 연륜에서 샘솟는 품격과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늙음과 낡음을 구별할 줄 아는 분별력이 삶의 질을 갈라놓는다. 원숙한 인격에서 풍기는 그윽한 삶의 향기는 늙음의 고상함에서만 맛볼 수 있는 진정한 멋과 아름다움이다. 이것이 바로 거꾸로 나이 드는 신비로 빚어내는 진정한 청춘이다. 농촌에서는 보리 베기와 모내기가 겹치는 이 무렵이 가장 바쁘다. 그만큼 생명력이 왕성한 시기라는 의미다. 본분에 충실한 생명체들의 활력이 우리의 마음에도 짙푸른 희망을 가득하게 한다. 인생에서의 유월은 인생 이모작 모내기를 하는 시기다. 시니어여! 이 유월, 우리야말로 인생의 유월을 맞이한 사람들임을 기억하자.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아프고 힘들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희망이 있었기에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오늘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았던가. 역사학자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는 “모든 역사는 현재 역사다”라고 했다. 지금에서의 평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5575세대’는 지금 이제까지 지내온 것보다 더 깊고 넓은 이모작 파종의 시점에 서 있다. 이런 이유로 유월을 ‘희망의 달’이라고 부르자는 것이다.
- 2016-05-10 09:30
-
- [6월을 맞으며] 금낭화가 피는 6월에 결혼하고 싶었는데...
- 봄이 되면 왜 그래야 하는지도 별로 생각하지 않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꽃밭을 일구곤 했다. 꽃밭 가꾸기가 우리 집 연례 행사였기 때문이다. 받아 놓았던 꽃씨를 전부 꺼내서 뿌리고 물뿌리개로 물을 줘가며 내 동생들과 정성을 다해 열심히 만들었던 일들이 그립다. 또 꽃모종들을 동네를 다니며 얻어 와서 심기도 했다. 그 해에는 금낭화를 처음으로 담임선생님 집에서 모종으로 얻어 와서 심었다. 6월 정도에 꽃이 필거라 했다. 조롱조롱 주머니를 달고 피어나는 금낭화가 혹시라도 죽을까봐 자라나는 걸 거의 매일 관찰해가며 꽃이 피길 기다렸다. 묘한 꽃 분홍으로 피어나는 꽃이 너무도 예뻐서 어서 피어나라고 기도까지 해가며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요즘에는 절이나 깊은 산속에서도 가끔 만날 수 있는 앙증맞고도 귀여운 꽃이다. 우리 집 꽃밭은 예쁘게 꾸며 놓은 곳은 아니었다. 생각나는 대로 자기 마음대로 심고 가꿔서 들쑥날쑥 했다. 예를 들면 작은 키의 채송화가 피어 있는 곁에 엄청나게 많은 가지를 뻗치면서 한 무더기로 변하는 분꽃이 자리할 때도 있었고, 양귀비, 기생 꽃들이 마구 섞여 있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해엔 유독 금낭화만 맨 앞줄에 심어 놓고 기다렸었다. 봄을 알리는 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이 지며 민들레 오랑캐꽃이 만발하면서, 산에는 어느 덧 라일락과 아카시아가 피어 향기를 날렸다. 그 뒤를 이어 패랭이도 별별 색을 뽐내며 피어났고, 들판에는 보라색 꿀 꽃들이 가득 가득 무더기로 피어나면서 우리들에게 달콤한 꿀 간식을 선사하며 입을 즐겁게 해줬다. 그 즈음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금낭화도 꽃을 매달았다. 어찌나 신기하고 예쁜지 입가에 웃음은 절로 피어났고 매일매일 봐도 귀엽고 고왔다. 꽃말이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 해서 더욱 더 가슴에 와 닿던, 여고시절의 수줍음과 별 이유도 없는 부끄러운 감정이 누구에겐가 들킬까 마음 졸이며 꽃을 보고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 탓이었을까 지금도 금낭화를 만나면 가슴에 설렘이 슬며시 지나가는 걸 느끼곤 한다. 난 혼자 금낭화를 보면서 그 꽃들이 복주머니라고 마음속에 꾹꾹 적어 놓고 믿었다. 내 맘대로 지은 복주머니 꽃이 피는 6월 신부가 되면 일생동안 복이 함께 할 거라는 웃기는 생각을 해가며 혼자 쿡쿡 대기도 했다. 그렇게 하리라 마음을 굳게 먹은 바는 아니었지만, 하고 싶다는 희망은 늘 지니고 살았다.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은 비밀이었다. 막상 결혼을 앞두고 나 혼자의 결정으로는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고 6월이 아닌 3월에 결혼을 했다. 그러나 지금도 금낭화를 만나면 내 옛날의 수줍던 마음으로 그리 될 것을 바라던 멋모르고 꿈만 꾸던 내가 보여 픽 웃음이 절로 나곤 한다. 나는 정말로 금낭화가 피는 6월에 결혼을 하고 싶어졌었다. 실수를 했나? 금낭화가 피는 6월에 결혼하고 싶었던 꿈이 아직도 마음에 걸려 있다.
- 2016-05-09 16:43
-
- [송유재의 미술품 수집 이야기] 마음으로 차오르는 산
- 이재준(아호 송유재) 꼭 42년 전 이맘때, 설악산 장군봉의 금강굴에서 홀로 7일을 지낸 일이 있었다. 군 제대 후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깊은 생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매일 마등령을 오르내리며, 세찬 바람에 스쳐지나가는 운해(雲海)의 그림자 밑에 누워 마음을 비우려 안간힘을 다했다. 새벽마다 비선대까지 내려가 찬물에 얼굴을 담그고, 그 물빛만큼이나 맑디맑은 푸른 영혼을 꿈꾸기도 했다. 옛 선승(禪僧)들은 면벽(面壁) 십년으로 화두를 풀었다는데, 고작 이레 만에 어떤 경지에 이를 수는 없었으나 나름 마음 정리를 하기는 했다. 산을 바라보면 가까운 풍경에서 먼 정경까지 끊길 듯 이어지는 아스라한 능선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사계절 어느 때라도 아득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안온해진다. 거친 심성이 순치(馴致)되고 아픔의 멍울이 서서히 풀린다. 산으로 들어가 한 발 두 발 걸어보면 걸음이 가뿐하고 머릿속이 맑아진다. 교만과 오만함을 내려놓게 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자(賢者)들은 산 속에 머물며 인격을 도야(陶冶)해 왔다. 그래서 산 그림도 늘 인기가 좋다. 좁은 실내 그 어느 곳에다 산 그림을 걸어도 마치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듯 마음이 열린다. 박고석(1917~2002) 화백은 산의 화가라 일컫는다. 우리나라 서양화의 1세대 작가로, 일본대학 예술학부 미술과에 입학한 1935년 무렵의 일본 화단은 이전의 아카데미즘에 반하는 새로운 양식이 물밀 듯 밀려와 구상파, 야수파, 입체파, 초현실파, 추상파등 신사조에 빠르게 젖어들었다. 박고석은 1940년 대학 동창으로 구성된 격조전(格調展)으로 화단에 데뷔했다. 1943년 동경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8·15해방과 6·25 등 역사의 격랑을 그림과 함께 건너왔다. 1960년대에는 짧은 시기 추상에 머물기도 했으나 회화 작업에 회의를 느끼고 한동안 화필을 놓기도 했다. 1967년 창립된 구상전(具象展)을 통해 화단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이 무렵부터 산행을 하며 산 그림을 그렸다. 1974년 공간화랑의 개인전에서 산 그림 연작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화가의 산 그림은 여느 산 그림과 다른 특색이 있다. 화가 스스로 산으로 들어가서 깊은 산행을 하며 생생한 현장감이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가벼운 스케치나 유채의 짙은 작품 모두 산중에서 완성된다. 산행도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 전문 산악인에 준하는 장비로 암벽 등반까지 했으며, 수년간 설악산에 거주하며 실경(實景)의 산 그림을 그렸다. 설악산에서 남녘 홍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산들을 화폭에 담았다. 지리산 자락 ‘쌍계사 가는 길’의 벚꽃으로 짓이겨진 유화도 가히 이 작가만의 명작이라고 누구든 손꼽고 있다. 이 화가의 산 그림은 대부분 20호(72.7cmx60.6cm) 이하의 비교적 작은 화폭이지만 그림 앞에 서면 그 밀도 높은 구도와, 두터운 마티에르로 그려낸 산봉우리, 그리고 거대한 암반의 질감이 입체적, 구체적으로 다가선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작가는 산에 밀착하던 치열한 화풍을 벗어나 물감의 칠이 서서히 엷어지면서 그윽이 바라보는 시선의 폭이 넓어진다. 직접 산을 오르지 못하더라도 산자락에 화구를 펴고 관조(觀照)의 마음을 담뿍 화폭에 담았다. 이 그림 ‘북한산’은 그 무렵의 작품이다. 그림 수집가들에게는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박고석의 그림은 경매나 화랑가에 유통되는 숫자가 아주 적어서 수집 기회도 적고 또 그림을 만나도 가격이 만만치 않아(10호 산 그림 3000만~4000만원) 망설여진다. 몇 년간 돈을 모아오다 이 그림을 사고 말았다. 이상국(1947~2014) 화가의 산 그림은 구상을 벗어난 반추상의 작품들이 주조를 이룬다. “1980년대까지 나는 그림을 집짓기처럼 구축해가는 과정으로 생각했지요. 그런데 최근 작품들, 특히 풍경화는 해체되는 방식으로 그리고 있어요. 철거된 산동네 그림도 그런 식이지요. 그런 해체 과정에서 가슴 아픈 느낌과 동시에 어떤 새로운 에너지, 기(氣)를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서울대 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했으나 졸업 후 서양화로 화풍이 바뀌면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무당이 칼 위에 선 것같이 긴장된 일이다.”라고 마음을 다잡던 화가였다. 2011년 3월 11일부터 4월 3일까지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렸던 그의 열두 번째 개인전이자 대학 졸업 40년간의 회고전은 이상국의 작품세계를 남김없이 펼쳐 보였다. 북한산, 인왕산, 홍제동의 달동네 등 서울 변두리 산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독특한 화풍의 그림을 남겼다. 7~8년의 암 투병 중에도 생의 마지막까지 화실을 지키며 그림을 그렸다. 나는 일찍이 ‘미술평론가 10인이 추천한 유망주’에 이상국을 ‘한국적인 것, 그 전통의 계승에 그는 내면을 파고 들어가 그 본성을 파악하려 한다. 요컨대 이상국은 박수근이나 이중섭이 걸어간 그 길을 걷고 있는 드문 작가의 한 사람이다.’라고 추천한 바 있다. 이 그림 ‘인왕산’은 겨울날 눈이 소복이 내린 정경을 그린 구상에 가까운 관념 풍경화에 속한다. 서울의 서촌 일대를 산책하다가 사간동의 단골 화랑에서 눈에 띄어 외상으로 구입한 작품이다. 평소 이 화가의 전시를 봐 왔고, 목판화를 구입한 바도 있어서 쉽게 결정하였다. 아내와 함께 택시에 싣고 와 거실에 놓고 몇 주 동안 눈 맞춤을 하였다. 가족 모두의 공동 감상평으로 눈 내린 삭막한 인왕산인데도,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포근하게 차오른다고 하였다. 바위틈마다 하나하나 눈을 얹으며 화가는 무슨 상념에 빠졌을까.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현실로 귀환하고 싶었다. 정말 나 자신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표현하고 싶었고, 울고 싶도록 깊숙이 파고드는 외로움을 그리고 싶었다.” 어느 미술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이 화가의 말이다. 두 해 전 3박 4일의 일정으로 옛 친구와 둘이서 지리산 종주(縱走)를 한 적이 있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을 거쳐 증산리로 하산하는 약 35km의 코스를 하염없이 걸었다. 눅진한 안개가 몸을 무겁게 하고, 갑자기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쳐도 묵묵히 걸어야만 했다. 날이 저물자 언제 그랬냐는 듯 둥근 달이 떠오르고, 달그림자에 휘감긴 산봉우리의 장중한 숨결이 피곤한 몸을 어루만졌다. 한 알의 풀씨도 소중히 키우고, 거친 눈보라 폭풍도 기꺼이 안으며, 언제나 그 자리에 의연한 산이 있기에 우리들은 산을 오른다. 비틀린 몸과 마음으로도 산문(山門)에 들어 한 발짝 두 발짝 발을 옮기며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볼 일이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 2016-05-09 09:12
-
- [브라보 社告]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동년기자단 1기 발단식 “제2 인생, 신중년 이야기 우리가 써야 제 맛”
- 4월 12일 오후 2시 이투데이 본사 5층 강당에서 ‘BRAVO 동년기자단 1기 발단식’이 열렸다. 이날 행사는 명함 및 기자수첩 수여를 비롯해 윤리강령 채택, 기념사진 촬영, 기자교육, 운영위원 선출 등 뜻깊은 시간으로 채워졌다. ‘동년’이라는 이름으로 한날한시에 모인 그들의 모습을 담아봤다. 3월 1일부터 15일까지 온라인 신청 및 서류 심사를 통해 최종 54명이 동년기자단 1기에 뽑혔다. 이들은 발단식 이후 6개월간 의 시니어 기자로 활동할 계획이다. 1944년생부터 1966년생까지 평균 나이 54세인 이들은 수필가, 사진작가, 대학 교수, CEO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됐다. 이종재 이투데이 대표이사는 환영사를 통해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65~75세가 인생의 황금기라고 했다”며 “브라보 동년기자단이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한 신중년을 위한 하나의 커뮤니티로 자리 잡았으면 한다”고 격려했다. 이어 진행된 기자 교육 시간에 임철순 이투데이 주필 겸 미래설계원구원장은 “한공간, 한시간에 모인 소중한 인연”이라며 “동년(同年)’은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을 뜻하기도 하지만, 같은 해 과거에 함께 합격한 사람을 일컫기도 하는 말이다. 그런 생각을 담아 이투데이 언론 고시에 합격했다는 일체감으로 활동했으면 좋겠다. 때로는 벗처럼 너나들이하며 망년지교(忘年之交)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첫날부터 샘솟는 열정, 앞으로의 활동 기대 이날 동년기자단 단장으로 선출된 강신영(64·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 대표)씨는 “늦은 나이에 처음 만났지만 동년이라는 데 의미가 깊다”며 “최선을 다해 단원들을 이끌고 열심히 발로 뛰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 외에도 54세(브라보 동년기자단 평균 나이) 이하인 동년기자 10명이 1기 기자단을 이끄는 운영위원으로 선발됐다. 이들은 수시로 자율적인 회의를 통해 기자단의 발전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운영위원 명단 = 강신영, 구자형, 박혜경, 박요섭, 성미향, 양복희, 이경숙, 전용욱, 정순영, 황선범) 발단식 당일에도 이들의 열정은 뜨거웠다. 공식적인 발단식 일정을 마친 뒤 강신영 단장을 비롯한 10명의 운영위원은 한자리에 모여 전문 분야별 기자단 운영과 커뮤니케이션 방법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회의를 끝낸 후에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편집부가 있는 2층을 방문해 기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 2016-05-07 10:49
-
- [은퇴 라이프] 행복한 노후 제2 조건은 ‘손주’
- 지난해 3월 하순의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전남 구례군 산동면의 산수유 축제현장을 거니는 도중 아내가 불쑥 얘기했습니다. “나무들은 매년 봄이면 다시 꽃을 피우는데, 사람은 한번 늙으면 그만이라는 게 참 허무하네요. 우리도 이 산수유 꽃처럼 다시 새봄을 맞을 수 있다면 좋겠네…” 저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나무는 매년 꽃을 피워서 되살아나지만, 우리에게는 손자들이 있잖소. 그 녀석들이야 말로 우리 인생의 새봄 아닐까요.” 아내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지난 호(號)에서 은퇴한 남자의 행복한 노후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배우자와의 관계’에 대해 얘기했습니다만, 오늘은 그에 못지않게 소중한 손주들과의 좋은 관계, 그리고 그 관계의 키(key)를 쥐고 있는 며느리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제가 여기서 손주들과의 관계만을 애기하는 건 제게 외손주가 없기 때문일 뿐이지, 외손주들과의 관계가 친손주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친외손 가릴 것 없이 하나같이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은 “외손자들의 육아에 가담한 것은 오직 ‘내리사랑’이라고밖에는 일컬을 수 없는,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웅크리고 있었던, 제어 불능의 끌림 때문이었다고 해야 옳겠다” 는 정석희 님의 증언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정석희 저 - ) 이처럼 내 핏줄에 끌리는 것은 본능이니까요. 그는 외손자를 키우며 쓴 책의 말미에서 “내 인생이 다 저물기 전에 이처럼 아이들의 시작과 내 삶의 끄트머리가 겹쳐질 기회가 주어졌으니, 이것이 축복이 아니면 무엇이랴. (중략) 아이들의 존재란, 경험한 적 없으나 응당 그럴 것이라 상상되는 마약처럼 황홀하고 중독성이 강했다. 나의 노년에서 가장 행복하고 충일했던 시기를 손자 녀석들과 함께 보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지난 6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두 손자를 키워 온, 아니 그 녀석들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저의 생각도 정석희 님의 고백과 꼭같습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전형적인 ‘손자 바보’입니다. 그걸 부인하기보다는 저는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다닙니다. 어찌 보면 구제불능인 사람이지요. 저는 두 손자가 태어난 이후로 가능하면 많은 시간을 손자들과 보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 취미를 살려서 두 손자가 자라나는 과정을 사진으로 담고, 거기에 제 나름의 설명과 소회를 담아 ‘바보 할배의 육아일기’라는 제목으로 블로그에 올리는 걸 낙으로 삼고 있습니다. 언젠가 동창 모임에서 한 친구가 “야! 뭐 때문에 그런 일에 아까운 시간을 다 보내나? 그래 봐야 손자들이 크고 나면 할아버지가 잘 해준 것 기억도 못한다”라고 타박을 하더군요. “그거야 자네 생각일 뿐이고…”라며 웃고 말았습니다. 두어 달 후 저녁 자리에서 바로 그 친구가 “나는 밥 후딱 먹고 먼저 갈 거다. 오늘 손자가 집에 오는 날이거든…” “손자가 얼마 만에 오는데?” 하고 물으니 “한 달에 한 번 정도…”하고 말끝을 흐리더군요. 두어 달 전 그 친구의 타박이 저에 대한 부러움의 표현이었다는 걸 그때서야 알아차렸습니다. 세 손주들을 적어도 일주일에 한 차례 이상, 어떨 때는 녀석들이 집에 가지 않으려 해서 일주일 이상 함께 자고, 먹고, 뒹굴기도 하는 제 입장에서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손자를 보려고 달려가는 그 친구의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니까요. 요즘은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50~60대가 한자리에 모이면 저마다 손주들 사진 꺼내놓고 자랑하기가 바쁘다고 합니다. 동창 모임 같은 데서는 손자 얘기하고 싶은 사람은 미리 만원씩을 내놓고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지요. 뿐만 아니라, 손주가 있는 친구들은 예외 없이 지갑 속이나, 휴대폰에 손주들 사진으로 가득합니다. 실버 라이프에 있어서 손주들의 중요성을 입증해주는 사례들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어쩌다 한 번 손주들을 보면서, 사진으로나마 애끓는 그리움을 달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 피를 받아 세상에 나온 손주들을 매일 보고 싶은 실버들에게는 그러지 못한다는 사실은 일종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손주들을 자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손주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친밀감을 느끼지 못해서이거나, 아니면 며느리들이 손주를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자주 보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손주들을 자주 보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들과의 관계, 그리고 손주들의 엄마, 즉 며느리와의 관계를 보다 친밀한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손주들과 친밀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까요… 물론 돈으로 손주들의 환심을 살 수도 있습니다만, 그건 그때뿐입니다. 정말 손주들과 좋은 사이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시간과 마음을 투자하십시오. 즉, 할아버지가 먼저 동심으로 돌아가서 손주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손주들이 집에 오면 그때부터 녀석들과 친구가 되어 놉니다. 놀이터로 가 같이 미끄럼도 타고, 같이 달리기도 하며, 모래판에서 씨름도 합니다. 키즈 클럽에 가면 함께 작은 공이 가득한 풀에서 넘어지기도 하고, 좁은 미로 속을 같이 기어 다니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어릴수록 같이 노는 친구를 필요로 하고,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며느리는 자신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시댁, 혹은 시부모와 자신의 아이들이 가까워지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며느리와 사이가 썩 편하지 않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당연히 손자와 가까워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결혼 전에 심하게 반대를 했다거나, 예단 등의 문제로 며느리에게 격하게 스트레스를 준 원죄가 있다면 ‘구원의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습니다. 며느리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고 손주를 맡겨도 좋겠다는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른들 스스로가 자신이 어른으로서 예우 받아야 한다는 권위의식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쓸데없는 권위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며느리에게 어른 대접을 받으려 하거나, 한 술 더 떠서 며느리가 자란 환경을 은연중 무시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노후의 행복 한 가지는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일체의 권위를 다 내려놓고,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는 사랑으로 먼저 다가갈 때, 며느리도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 며느리에게 시댁에 올 때 느끼게 되는 부담감을 덜어 주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제 경우는 아이들이 집에 오는 날은 기본적으로 외식을 하되, 메뉴는 반드시 며느리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합니다. 그게 저녁시간이면 아들, 며느리와 함께 폭탄주 한두 잔을 곁들이기도 하지요. 시아버지가 ‘말아주는’ 폭탄주 한두 잔이면, 웬만큼 두터운 장벽도 다 허물어지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하면 며느리가 시댁에 와도 밥 짓고,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기본적인 부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거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외식을 하게 되니 손해 볼 게 없는 장사가 되는 것이지요. 여유가 있어서 아이들이 돌아갈 때 신사임당 초상화 몇 장 찔러 줄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지요. 손주들과 노는 시간에 간혹 역사상의 위인 전기와 같은 교훈이 되는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려주는 할아버지가 된다면 더욱 좋습니다. 손주들이 바른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데는 할아버지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합니다. 결론적으로, 손주들은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얻은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 손주들이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자주 찾아와 준다면 그건 인생 최고의 훈장이기도 합니다. 이런 축복, 이런 훈장과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면 다른 어떤 것으로 노년의 무료함과 공허함을 메울 수 있겠습니까. >> 조용경(趙庸耿)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해서 한국은행을 거쳐 포항제철(현 포스코)에서 故 박태준 회장의 비서부장과 홍보부장과 회장 보좌역으로 일했다. 포스코건설 인천 송도신도시사업본부장과 지난 2009년부터 2012년 3월까지 포스코엔지니어링(전 대우엔지니어링)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현재 포스코엔지니어링 상임고문, 한국트라이애슬론연맹 부회장, (사)글로벌인재경영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 2016-05-07 10:46
-
-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궁궐 속 나무에 스민 조선의 역사, 박상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우리 궁궐을 아는 사전>
- 책(book)과 사람(人)의 이야기를 담아온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이번 호에는 그 의미를 살려 책을 통해 맺어진 특별한 인연을 소개하려 한다. 바로 박상진(朴相珍·76) 경북대학교 명예교수와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이다. 지난해 3월호에서 박 회장은 박 교수가 쓴 를 추천했다. 박 회장은 그전부터 여러 언론을 통해 박 교수의 책을 호평했고, 이를 고맙게 생각한 박 교수가 그를 찾아가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 두 사람을 이어준 매개체는 책과 나무다. 이번 호에서 박 교수는 을 추천했다. 과거 박 회장과의 인연이 그랬듯, 책 그리고 궁궐을 매개로 한 새로운 인연을 기대하며 박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역사건축기술연구소의 김동욱 이사와 이경미 소장 등이 합심해서 펴낸 은 평소 궁궐을 자주 찾던 박상진 교수에게 아주 반가운 책이었다. 궁궐이라는 소재와 더불어 책 표지의 ‘동궐도(東闕圖, 조선 후기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창덕궁과 창경궁 그림)’에 그려진 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그동안 궁궐에 대한 책이 많이 나왔지만, 궁궐의 건물들에 사람 이야기를 입힌 것이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건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잖아요. 선정전(宣政殿), 인정전(仁政殿), 낙선재(樂善齋), 성정각(誠正閣) 등 곳곳마다 얽힌 이야기를 소개해 역사와 더불어 선조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했죠. 문학이나 철학 등의 장르가 아니니 책 제목처럼 우리 궁궐을 이해하고 알고 싶은 분들에게 유용한 책이에요. 하지만 읽다 보면 내용의 깊이나 정보 면에서 결코 가볍게 볼 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책은 건물마다 실물 사진과 함께 동궐도에 그려진 모습을 보여준다. 지도에 나타난 모습이나 위치 등은 현재와 다른 부분도 있지만, 이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라고 한다. 에도 동궐도가 자주 등장하는데, 현재의 모습을 반영한 지도가 있어 더불어 읽기 좋은 도서라 권할 만하다. “지도와 사진, 이야기를 종합적으로 넣어 품이 많이 들어간 책이에요. 궁궐의 다양한 면모를 알고 가면 더욱 생생한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죠. 손주와 함께 간다면 들려줄 이야기가 참 많을 거예요. 궁궐은 역사의 현장입니다. 책이나 교과서로만 알던 역사를 그 현장에서 다시 보면 아이들에게도 기억에 남는 교육이 되겠죠.” 궁궐의 나무는 다 알고 있다 박 교수는 , 등 줄곧 나무와 역사를 함께 이야기해왔다. 나무를 전공한 그가 이토록 역사에 관심이 많은 까닭은 무엇일까? 누구나 역사를 알아야 하겠지만, 나무와 연관 짓는 그에게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카페를 가는 일이 드물었죠. 그럴 때 휴식을 겸해서 찾은 곳이 바로 궁궐이었어요. 일이 광화문 근처면 경복궁에 갔고, 종각 쪽이면 창덕궁이나 창경궁에 가서 쉬곤 했죠. 그런데 궁궐에 가보니 오래된 나무가 정말 많은데,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더라고요. 왕도 떠나고 사람들도 떠났지만 나무는 수백 년 역사를 그 자리에서 지켜봤잖아요. 나무에 입이 있다면 많은 기록을 남겼을 텐데, 그럴 수 없으니 내가 나무를 대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창경궁(昌慶宮)에는 영조 38년(1762년) 문정전(文政殿) 앞에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비명을 들은 나무가 아직도 살아 있다. 문정전에서 조금 떨어진 선인문(宣人門) 앞 회화나무와 광정문(光政門) 밖의 아름드리 회화나무다. 선인문 앞 회화나무는 줄기가 비틀리고 속이 완전히 비어 있는데, 너무 가슴이 아파 속이 까맣게 썩어버렸다고도 이야기한다. 이 두 나무는 동궐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박 교수를 만난 창덕궁(昌德宮)에서 가장 오래된 어른 나무는 바로 선원전(璿源殿) 앞의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다. 약 750세가 넘은 것으로 창덕궁의 터줏대감과 같다. 이 향나무는 와 에 모두 소개됐다. 그러니 나무와 역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 말할 수 있겠다. 나이가 들수록 느티나무처럼 창덕궁의 향나무도 역사적 가치가 있지만, 그는 느티나무도 빼놓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우리 궁궐에서 볼 수 있는 100여 종의 나무 중 박 교수가 가장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무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 나무 중에 가장 재질이 좋아요. 그래서 조선시대 궁궐의 기둥, 가구, 양반들이 쓰던 탁자 등에 주로 쓰였죠. 쓰임새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삶에 보탬이 됐다는 뜻이에요. 느티나무의 용도는 한 가지 더 있어요. 요즘도 시골 마을 입구에 가면 오래된 느티나무가 지키고 있잖아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추해지기도 하는데, 나무는 세월이 흐를수록 멋있어지죠. 그 넉넉한 품으로 오랜 세월 백성들의 안식처가 돼 주고, 고달픈 삶을 위로해준 고마운 존재예요. 나도 그런 느티나무처럼 늙어갔으면 좋겠어요. 살아서는 어려운 사람의 마음을 보듬을 수 있고, 죽어서는 여러 쓰임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어요.” 느티나무뿐만 아니라 모든 나무에는 본받을 점이 한 가지 더 있다고 한다. 바로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나무는 한 번 뿌리 내리면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그 자리에서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봄에는 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열매 맺기 위해 노력한다. “나무는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포함한 동물들은 자기가 마음에 안 들면 옮겨 다닐 수 있잖아요. 바람에 날아왔든, 동물이 물어다 놨든 열심히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죠. 요즘은 사회에 불평하고 참을성 없는 이들도 많잖아요. 우리도 나무를 본받아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가 필요해요.” 4월 궁궐 나들이엔 ‘매화’ 겨우내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최선을 다한 나무. 봄기운이 충만한 4월이면 궁궐에도 나무마다 꽃망울 터뜨리기에 분주해진다. 궁궐은 어느 계절에나 가도 좋다는 박 교수는 특히 봄에는 매화나무가 으뜸이라고 했다. “4월 10일쯤 되면 궁궐에 있는 모든 나무가 꽃을 피웁니다. 그중에서도 꼭 한번 가서 보시라고 권하고 싶은 건 매화나무예요. 매화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품격 있는 동양의 꽃 중 하나죠. 조선시대에는 난초, 국화, 대나무와 더불어 사군자에 꼽히기도 했고요. 태종이 특별히 좋아하던 꽃인데, 창덕궁 선정전 앞에는 와룡매(臥龍梅)라 불리는 백매와 홍매 두 그루가 임진왜란 전까지 있었다고 해요. 지금은 덕혜옹주가 마지막까지 살았던 낙선재에도 매화나무가 많으니(근래에 심은 것), 아름다운 매화를 볼 겸 궁궐 나들이 떠나보는 것 어떨까요?”
- 2016-04-19 09:39
-
- [세상 참 걸을만 하구나 PART3]아름답고 멋진 도보 여행, 미래세대와 천년 걸어갈 길을 만든다
- 언제부턴가 ‘걷기’가 유행이 됐다. 걷기 위해 떠나고, 걷기 위해 여러 장비들을 사 모은다. 가끔은 걷는 것의 의미보다 누구나 다 걸으니까 따라 걷기도 했다. 어느덧 유행이란 이름으로 걷기만큼이나 길에게 바라는 것이 많아져 새단장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걷기에 열광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아름다운 걷기란 무엇일까. 길 위에서 걷고 길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지난 3월 1일, 때늦은 함박눈으로 겨울산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고 있던 우면산 초입에서 사단법인 아름다운 도보여행(이하 아도행) 회원들과 손성일(孫成一·45) 대표를 만났다. 아도행은 2008년 4월 포털사이트 카페 모임으로 시작해 걷는 길을 개척하고 복원하는 사단법인으로 발전했다. 회원수가 2만7000명이 넘을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아도행. 이들의 일정표는 거의 매일이 걷기 모임으로 빼곡하게 잡혀 있다. 국내 유명하다는 길은 물론이고 일본, 홍콩 등 걷기 좋은 길을 찾아다니고 있다. 3월에도 아도행 회원들은 7박 8일 일정으로 홍콩 걷기를 하고 돌아왔다. 아도행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단순한 걷기뿐만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도보길인 ‘삼남길’을 개척하고 복원하는 일을 한다. 이들이 외국 도보여행을 하는 이유도 좋은 곳을 걷는 것을 넘어 다른 나라의 길에서 배워야 할 부분들을 찾는 것이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땅끝 해남에서 유럽의 땅끝 피스테라까지 미래 세대가 함께 걷는 길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아도행은 해남 땅끝부터 남태령까지 1만km 이상을 조사해 작년 5월, 7년 만에 600km에 달하는 삼남길 구간을 확정지었다. 느림 속에서 섬세함을 발견하다 아도행 회원들 대부분이 50대 이상의 남녀 시니어들이다. 이들 대부분 걷기 모임에 들어오기 전까지 등산을 했고, 자전거를 탔다고 했다. 여행을 좋아해 국내외 여러 곳을 돌아다닌 사람들이다. 그러던 어느날 영상처럼 빠르게 지나가던 차창 밖에 발을 내딛는 순간 세상이 달라 보였다고 말했다. 걷기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섬세함이다. 차를 타고 지나쳤던 그 길에 발이 닿으니 몰랐던 것들이 보였다고. 길 틈에 난 꽃, 예쁜 도자기 귀걸이를 파는 가게 등이 말이다. 그래서 그런가. 유독 걷기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진 찍기에도 관심이 많단다. 걷다보면 서 있을 시간도 많다. 작은 꽃, 바람에 흩어진 구름을 찍기에 길만큼 좋은 곳이 없었다고 한다. 걷기는 인생의 축소판이다. 걷다 보면 꼭 좋은 길만 만나는 것이 아니다. 전 구간이 예쁘다고 말하는 길도 꼭 다 예쁘지만은 않다. 꽃길, 숲길, 흙길, 때론 먼지투성이 길을 걷게 된다. 갑작스런 진흙탕을 밟을 수도 있다. 걷는 것이 인생에 비유되는 이유다. 아도행 회원들은 속도를 내 걷거나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 걷지 않는다. 이쯤 걸었으면 됐다 싶을 때 멈춰서도 된다고 말한다. 등산처럼 등정에 대한 압박을 느끼지 말고 걸을 수 있을 만큼만 걷기를 권한다. 삼남길, 천년을 넘어 세대를 잇는 길을 만들다 3월 1일, 아도행 회원들은 서울 안 삼남길 표시작업을 위해 모였다. 남태령에서 남대문까지의 삼남길 서울 구간 내의 우면산 코스의 길 표시 작업이었다. 서울 구간에 처음으로 길 표시를 하는 날이기도 했다. 초록색과 노란색으로 각각 서울과 땅끝 해남으로 향하는 표시를 사람들 눈에 잘 보이는 나무나 전봇대에 그렸다. 아도행은 앞으로 서울 구간과 의주길을 완성하고 충청수영로와 통영별로를 포함해 우리나라의 삼남(충청,전라,경상도) 지방을 모두 연결할 계획이다. 통일이 되면 북한 땅을 지나 실크로드를 넘어 유럽까지 이어지는 길을 개척하고 관리 운영할 것이다. 단순히 걷는 것도 모자라 길을 만드는 사람들. 이쯤 되면 정말 걷기에 미친 사람들이 모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이 누리기 위해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삼남길은 과거 사람들이 지나다녔던 길을 복원한다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 모두가 걷는 길이 될 것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나만을 위해 걸었다면 이제는 후세에 오래도록 남을 수 있는 길을 물려주고 싶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너무 길이 많다는 게 문제라고. 걷는 게 유행이 되면서 이런저런 이름으로 붙여진 길들이 생겼다. 어떤 길은 이름이 8개가 되는 곳도 있다. 이름이 달라 다른 길로 알고 왔다가 같은 장소에 여러 번 갈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은 유행이고 지역마다의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언젠가는 합의하고 조율해 모두가 한곳으로 인식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길이 만들어져야 할것이다. 손성일 대표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도보 아도행의 손성일 대표는 자신을 도보 여행가 또는 로드플래너라고 지칭한다. 걷기에 발을 들이기 전 20여년 동안 등산에 미쳐 백두대간을 400회 이상 올랐다. 그러다 스페인 산티아고에 대한 책을 읽고 막연하게 한번 가보고 싶다는 꿈을 꾸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그곳을 향했다. 그리고 3개월 동안 걸었다. 그곳을 걸으면서 꿈꾼 것이 한국에도 사람들이 천년의 시간을 흘러 걸을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이었다. 스스로 걷기의 의미를 찾는 것을 넘어선 사람이다. 손 대표는 “산티아고도 그렇지만 유럽에서는 60년 전부터, 일본의 경우 40여 년전 부터 걷기 열풍이 불었다. 우리나라도 이제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걷기에 대한 관심이 더 고조될 것이다”라고 한다. 이제 무릎이 안 좋아져서 산에서 내려와 걷기를 시작한 시니어가 점차 많아지는 추세이므로 실버사업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걷기가 된 것이다. 손대표는 아스팔트, 콘크리트 바닥이 아니라 숲길, 흙길을 걸으면서 치유하고 자연과 소통을 하면서 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걷기라고 강조한다. 산은 정상이라는 경계가 있지만 길은 경계 없이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저 수평적으로 걷기. 자기 마음속으로 어디까지 갈지를 정하면 된다. 걷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편히 쉬었다 가도 그만인 것이 걷기의 매력이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실제로 중요하다. 아도행 회원의 경우 70%가 여성이고, 60대 이상 시니어도 많다. 그래서 손 대표가 회원들과 같이 길을 만들 때 특히 여성에게 편한 길을 조성하고자 한다. 여성 화장실을 두 배 정도 만들어 달라고 지자체에 요청하고 있다. 여성들이 많이 걷고 또 걷기에 불편함이 없으면 남녀노소 누구나 걷기 편한 길이 될 거라 믿는다. 아도행과 손 대표가 만들어가는 삼남길은 제주 올레보다 난이도가 높고 지리산 둘레길보다 난이도가 조금 낮다. 어차피 70%가 산인 나라에서 길을 만들다보니까 매번 평지만을 걸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걷기를 하면서 대단한 감정이나 꿈을 가지고 걷지는 않는다. 그저 걷는 것만 생각한다.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뜻이다. 손 대표처럼 미래 세대와 함께할 길을 만들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한 걸음 한 걸음에 마음을 담아 나 자신을 만나는 것에 집중하지 않을까? 손 대표는 속도와 정확성에서 좀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길 바란다고 했다. 걷는 길 위에서 좋은 소식을 듣고 평안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아름답지 않을까.
- 2016-04-19 09:32
-
- [브라보가 만난 사람] 밤의 피아니스트가 된 치과의사 장요한의 이중생활
- 그날따라 신촌 길을 걷고 싶었다. 봄바람이 불던 첫날.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걷던 길 멀리서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다다른 곳은 신촌 홍익문고 앞 피아노. 많은 젊은이가 멈춰 서서 익숙한 선율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피아노 앞에는 갈색 모자에 목도리를 단단히 두른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그렇게 밤길 위의 피아니스트 장요한(張요한·62)씨를 만났다. 차 한잔 함께 하실래요? 그의 연주가 끝나기가 무섭게 다가가 다짜고짜 물었다. 봄이라지만 밤은 겨울이었다. 차라도 한잔 하면서 얘기가 하고 싶었다. 무엇 때문에 젊은이들의 장소에 나와 피아노를 치는지 묻고 싶어졌다. “그저 취미로 피아노를 칩니다. 일과를 마치고 피아노 칠 수 있는 곳을 찾아옵니다. 오늘은 날씨가 좀 풀린 거 같아서 신촌에 나왔는데 사람들이 피아노 연주를 들어주니까 좋았습니다.” 겨울 동안 장요한씨는 신촌이 아닌 여의도 IFC몰 CGV영화관 안에 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는 20분이고 30분이고 피아노를 쳤다. 그가 피아노를 치는 날이면 영화관 측에서 관객(?)들이 앉을 테이블과 의자를 마련해 주었다. “수줍음이 많은데 어렸을 때부터 남들 앞에서 연주를 좀 해서 그런 지 거리에서 피아노를 치는 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신촌에는 오늘 정말 오랜만에 나온 겁니다.” 장요한씨가 최근에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건 작년 3월 인사동에 설치된 ‘달려라 피아노’를 알고부터다. ‘달려라 피아노’는 연주되지 않거나 거실, 공공시설에 방치된 중고 피아노를 기증받아 화가들이 새롭게 디자인한 뒤, 지역 공공장소에 설치하는 프로젝트다. 2008년 영국 버밍엄에서 시작해 한국에는 신촌 홍익문고 앞, 인사동, 선유도 공원, 어린이 대공원, 동대문 DDP 등 서울과 지방 여러 곳에 번지고 있다. 장요한씨는 인사동과 신촌, 여의도를 오가며 매일 연주를 했다. 피아노 칠 때는 모르지만 연주가 끝나고 나면 몸이 아주 힘들었다. “쉬고 운동도 해야 하는데 퇴근만 하면 자꾸 발걸음이 피아노 있는 쪽으로 향하더라고요. 가끔은 왜 내가 아프면서까지 피아노를 치고 고생할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박수가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원동력이자 중독의 요인이라고 말했다. 피아노를 치고 난 뒤 쉬어야 하는데 박수를 받으면 연주를 끊을 수 없다. 몸이 좀 힘들어도 그가 연주하는 이유다. 피아노는 배운 적이 없다? 천재 아니십니까? 그는 단 한 번도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다. 어렸을 때 집에 있는 풍금을 접한 것이 피아노를 치는 계기가 됐다. “1974년 어느 날, 커피숍에서 누군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봤는데 그게 너무 멋있었어요. 원래는 기타를 배우려고 했다가 때려치우고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면 항상 음악과 함께한 세월이다. 중·고등학교 악대부원으로 활동할 때는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악대부 유니폼을 입고 안동 시내 시가행진을 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취미활동도, 특별활동도 늘 음악을 선택했습니다.” 학교 음악선생님이 음대에 가라더군요.” 고등학교 때는 고향인 안동에서 대구로 유학을 가 큰누님 집에서 살았다. 등교하기 전 피아노를 30분정도 치고 갔다. 전공자도 아닌 고등학생이 참으로 대단한 열정이 아니었나 싶다. 작곡가 출신이던 고등학교 음악선생님을 대신해 수업 시간에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는 장요한씨. 그런 그에게 음악선생님은 음대에 갈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장요한씨는 음악은 그냥 취미로 여긴다며 음악선생님의 추천을 거절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음대를 준비했던 것도 아니고……. 그때 당시에 음악선생님이 대구시립 교향악단 지휘자였거든요. 음대에 가라고 했는데 저는 1년 더 공부해서 치과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피아노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피아노를 쳤다. 손님이 없는 레스토랑이나 피아노가 있던 대구교대 안에 들어가 피아노를 쳤다. 피아노를 전공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약간의 후회가 남아 있는 듯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음악에 상당히 소질은 있었어요. 부모님이 제 재능을 알아보고 잘 키워줬으면 어땠을까요? 지방이 아니라 서울에 살면서 음악을 더 접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과거의 이루지 못한 꿈이 미련으로 남아 장요한씨를 길 위의 피아니스트로 만든 게 아닐까. “그래도 대학 다닐 때 학교 그룹사운드에서 키보드를 연주했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조용한 음악이 좋지만 저도 나름 20대 때는 록 음악이 좋았습니다.” 그는 경북대 의대 그룹사운드 ‘메디컬 사운드’ 2기 출신이다. 본과에 올라가기 전까지 활동하다 후배들에게 물려주는데 지금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전통의 그룹사운드다. 낮에는 치과의사 장요한의 삶을 삽니다 장요한씨의 본업은 치과의사다. 경북대학교 치과대학 1기로 졸업한 뒤 35년을 치과의사로 살고 있다. 최근 1년 사이 피아노를 치는 삶에 심취한 듯 보이지만 하얀 가운을 입는 순간 영락없는 의사 선생님으로 돌변한다. “피아노만 치고 치과 진료에 관심 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최대한 정직한 진료로 꼼꼼하게 환자를 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 병원에는 과잉 진료를 피하는 방법도 적어두었습니다. 은퇴하는 날까지 양심적인 치과의사로 일하고 싶습니다.” 장요한씨는 마음을 비우고 일반 환자만 치료하고 있다. 임플란트 시술도 안 한다. 엑스레이 찍기, 스케일링도 장요한씨 스스로 한다. “속은 편합니다. 수익이 별로 없는 게 문제지만, 돈에 대해 신경을 별로 안 써도 됩니다. 내 월급 누가 주는 거도 아니고 진료가 끝나면 저는 피아노 치러 나갑니다.” 치과의사를 하는 35년 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그만큼 치과의사로서 열심히 살았다고 말한다. “제 나이는 이제 은퇴할 나이잖아요. 하루에 받을 만큼만 예약한 환자들을 봐줍니다. 환자를 볼 수 있을 만큼만 봐서 에너지가 축적이 된 건지. 그래서 아마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장요한씨는 피아노라도 안 쳤으면 서울서 살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모든 사람에게 힐링 되는 연주 선물하고파 “저는 레퍼토리가 아주 많습니다. 그냥 놔두면 2~3시간 칠 수도 있어요.” 장요한씨는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비롯해 영화 OST , , , 등 피아노로 치기 편하고 인기 좋은 음악들을 고른다. “힐링이 되는 음악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제가 치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 보면 따뜻한 음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제 연주가 편하고 좋다며 다가와 말해주는 사람도 있었어요.” 장요한 씨는 좋은 연주를 위해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단다. “어떤 팝송이 치고 싶다고 생각하면 원곡을 계속 열심히 듣습니다. 듣다 보면 내가 따라 할 수 있고 딱 듣기 좋은 부분들이 들립니다.” 영어 어휘력을 늘리듯이 그렇게 차근차근 손에 건반의 느낌을 익힌다고 했다. 피아노를 치다 잘 넘어가지 않고 자꾸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잘 풀릴 때까지 연습한다. “반복해서 하나하나 치다 보면 되더라고요.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던 악보도 치다 보니 됐습니다.” 장요한씨는 은퇴 후 의료 시설이 취약한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서울에는 사람들도 많고 또 치료해 줄 의사도 많다고 느낀다. “치아 미백도 하고 다른 여러 가지 하면서 돈을 번다는데 저는 그런 거하고 멀어요. 고향으로 가고 싶은데 가족들이 서울이 더 좋다고 해서 고민입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 속에서 피아노 치는 게 그리울 거 같아 걱정이다. “내일은 뭐 하실 건가?”라는 질문에 “날씨가 추워진다고 하니 여의도에 가서 피아노를 칠 생각입니다”라고 말하는 장요한씨. 1년 넘게 그의 일상으로 자리 잡은 피아노 연주를 위해 그는 친구를 만나는 것도, 술을 마시는 것도 자제한다. 봄이 되면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피아노를 칠 생각이라는 장요한씨. 오늘 혹시 시간이 된다면 여의도 IFC몰로 가보기를 권한다. 산뜻한 표정의 치과의사, 아니 밤의 피아니스트 장요한씨를 만날 수 있다.
- 2016-04-12 08:58
-
- [추천 공연] '60년 전 부산발 환도열차가 서울에 나타났다' 연극 <환도열차>의 장우재 연출
- 1953년 부산에서 떠난 환도열차가 6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2014년 서울에 도착했다. 과거에서 현재로 시점은 바뀌지만 주인공 이지순은 20대 모습 그대로 남편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남편은 이미 90세 노인이 되어버린 것. 낯선 남편과 변해버린 서울의 모습에 혼돈을 느낀 주인공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연극의 연출과 극본을 맡은 장우재 연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작품 탄생 배경 몇 해 전 아는 선생님과 낙산에 올라가 대학로를 내려다보면서 옛날 개천이 흘렀을 때와 현재를 비교하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6·25 때 환도열차라는 게 있었고, 휴전이 되어 그 열차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는데 길이 안 좋으니 열차가 중간에 가다 서다 했다고 해요. 다들 서울로 돌아가면 뭘 해야겠다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솥 걸고 밥도 해먹으며 소풍처럼 보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문득 ‘6·25 때 열차를 타고 올라온 사람들이 만들고 싶었던 서울이 현재 우리가 사는 서울의 모습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모티브가 되었죠. 2014년 초연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야기가 간결해졌다’와 ‘훨씬 더 다이내믹해졌다’입니다. 덕분에 마치 열차를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더 살아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제이슨의 캐릭터가 초연과 달라졌는데요. 이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 저 역시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1953년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설정을 하게 된 이유 작품을 쓰기 전 중국 단둥(丹東)에 가서 북한 식당에 들른 적이 있는데 거기서 일하는 안내원들을 보면서 말씨나 몸을 쓰는 태가 참 곱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말의 내용은 첨단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였죠. 그 이질감이 흥미로웠습니다. 마치 ‘우리 어머니 세대가 나이를 먹지 않고 고스란히 처녀로 남아 현재에 나타난다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한 경험이 작품 구성에 투영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각본과 연출을 동시에 맡으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점 볼거리보다 이야기에 더 중점을 두는 것 같습니다. 연극의 힘이 본래 그것이라 생각하고요. 이야기들이 연쇄적으로 작동하면서 관객이 어디까지가 이야기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분간 못 할 정도로 빠져들다가 문득 다시 우리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그런 지점들을 고민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언제 동화시키고 언제 이화시킬 것인지 매번 찾고 있죠. 중·장년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 과거 인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아, 우리 저랬지’하는 공감과 함께 문득 ‘그것은 낡고 신파였지’라고 생각하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과거는 그렇게 오래된 것일까요? 우리는 정말 저 멀리 나간 것일까요? 나이를 먹으면 시간과 인생을 통으로 보는 맛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신비롭습니다. 공연 연극 일정 3월 22일~4월 17일 장소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연출 장우재 출연 김정민, 윤상화, 이주원, 김용준, 안병식, 강선애 등
- 2016-04-12 0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