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리우 올림픽 경기를 보면서 운동경기에서 키가 작은 선수들은 고전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태권도에서 가까스로 금메달을 딴 김소희 선수도 상대방이 다리를 반 쯤 접어서 견제하자 들어가서 공격하기가 어려웠다. 상대방보다 아래쪽에 있다 보니 수비하기 급급해서 점수를 지키기 위해 소극적인 경기를 한다고 주의 경고를 여러 차례 받았다. 하마터면 연장에 들어가 금메달을 놓칠 뻔 했다.
사실 필자도 태권도, 유도, 복싱을 배울 때 뼈저리게 느꼈던 사실이다. 똑 같이 동시에 팔 다리를 뻗어도 나보다 팔 다리가 긴 상대방의 팔다리가 먼저 내 몸에 닿는다. 특히 타격을 가하는 운동은 팔다리의 길이가 중요하다.
이번 올림픽 경기에서 펜싱이 그랬다. 팔다리가 짧은 대신 빠른 발놀림으로 상대방을 위협하곤 했다. 그러나 상대방이 발도 빠르다면 당할 재간이 없다.
타격을 가하지 않는 유도도 그렇다. 유도를 할 때에는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해야 하는데 엎어치기 기술을 구사하려면 상대방의 체중이 일단 넘어 와야 그 에너지를 앞쪽으로 쏠리게 하여 업어치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키가 큰 선수라면 필자가 업어치기를 하려고 상대방을 끌어당겨도 긴 다리가 버티고 있어 상체가 넘어 오지 않는다.
당구를 칠 때도 수구의 위치가 멀리 있으면 키가 작은 사람은 팔이 닿지 않아 불안한 자세에서 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키가 큰 사람은 허리만 간단히 구부려도 되니 자세가 불안하지 않다.
키가 크면 내려다보기 때문에 잘 보인다. 농구에서 바스켓이 위로 보이면 일단 공을 위로 보내서 중력으로 떨어지는 것을 노려야 하지만 키가 커서 바스켓을 내려다 볼 수 있다면 그대로 꽂으면 된다. 배구에서 공격을 할 때에도 키가 크면 상대방 진영이 다 보인다. 스파이크를 하면 내리꽂는 위력이 더 대단해서 수비하기 어렵다.
공을 멀리 보내는 구기 경기도 키가 상관없을 것 같지만, 역시 키가 큰 사람이 유리하다. 야구에서 키가 큰 투수가 내리 꽂는 공이 더 위력적이다. 골프에서도 키가 상관없을 것 같지만 키가 큰 사람은 골프채를 휘두르는 아치가 커서 임팩트 또한 크게 작용한다.
이외에도 키가 큰 사람이 유리한 것은 수없이 많다. 우리 선수들이 키 뿐 아니라 체구까지 큰 서양 선수들과 싸울 때 불리한 조건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핸드볼 경기를 보다보면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런데 우리 선수들의 체구도 많이 좋아졌다. 키도 커지고 체구도 커졌다. 배드민턴이나 유도 경기를 봐도 확연하다. 우리 선수들이 상대방 선수들보다 오히려 키가 더 큰 경우도 종종 보인다. 그러나 큰 키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답답함을 느낀다. 격투기에서는 오히려 큰 키로 엉거주춤 있다가 주의 경고를 받아 경기에서 지는 모습을 볼 때 더욱 그랬다. 탁구나 배드민턴도 빠청하게 서 있다가 수비 전환이 늦어 점수를 잃는 일도 많았다. 상대방은 키가 작아 큰 키의 우리 선수들을 부러워하는데 전혀 큰 키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는 것을 볼 때마다 답답했다는 얘기이다.
‘상대방의 눈으로 보고 상대방의 귀로 듣고 상대방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 인상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인상학자라는 것을 아는 상대를 만나면 가장 많이 물어 오는 말이 “저는 언제 돈을 벌 수 있어요?”이다. 그러면 “그러게요, 언제 돈을 벌 수 있을까요?”라고 되물으며 제일 먼저 상대방의 눈을 보게 된다.
그 이유인즉 그 말을 하는 상대의 눈에 얼마나 진실함이 담겨 있는가를 보기 위함이다. 사람의 마음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게 눈이기 때문이다.
눈은 운을 끌어당기는 첫 번째 관문이다.
먼저 눈으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시선이 머무는 곳에 기운이 함께 머문다. 언젠가 자신의 아들이 사업 자금을 보태달라고 한다며 몹시 화가 나서 찾아오신 사업가가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주기는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이 더 크기에 이번에는 사업이 잘 되어 더 이상 손 벌리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눈동자는 크게 확장되어 있었고 누군가가 작은 시비라도 걸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눈에서 번개가 나오는 상황을 만들고 있었다. 우려가 현실을 만든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사람의 일이란 것이 정답이 없기에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는 자식이 사업한다는 소리가 가장 무섭다고 한다. 자신의 노후를 힘든 상황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는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아야 한다. 어차피 주어야 할 상황이면 의심이나 불신을 하지 말고 좋은 마음으로 주어야 한다.
자신의 마음이 긍정적이면 부드럽고 편안한 기운이 갈 것이지만 반대의 경우는 부정적이고 불편한 기운이 담길 것이다. 우리가 보내는 기운은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와 자신을 행복하게도하고 힘들게도 하기 때문이다.
내 모습은 거울보다 사람들이 더 잘 알아
눈은 자신을 지켜주는 수문장 역할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침마다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는 내가 늘 만나는 얼굴이 나를 보고 있다. 하루를 계획하고 좋은 인상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다듬는다. 눈을 뜨면서 시작한 하루는 많은 상황을 만나지만 먼저 보고 판단하기에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피하게 만든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사람을 보는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가장 중요한 삶의 부분이다.
인상을 보는 이유는 상대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상대를 안다는 것은 자신을 지키는 큰 힘이 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상대의 눈을 잘 보고 상대의 지금 상태를 파악 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상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으면 지금의 상황이 싫거나 불안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을 하면서 상대를 보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피하면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이 상대를 바라보는 것은 놀랐다는 것이며 곁눈질을 하는 사람은 솔직하지 못하다고 보면 된다. 이렇듯이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를 파악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눈의 역할이기도 하다.
무감어수 감어인(無鑑於水 鑑於人)이란 말이 있다. 옛 시대에는 거울이 없었으므로 물을 거울로 삼았다. 자신의 모습을 물에다 비추어 보지 말고 사람에게 비추어 보라고 한 것이다. 진정한 내 모습은 물에 비친 내 모습이 아닌, 상대의 눈에 비친 모습이 진정한 내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눈은 자신을 사랑받는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향기가 난다. 사랑하는 사람은 주변을 아름다움으로 채운다. 사랑을 하는 사람의 눈빛에는 따뜻함과 아름다움이 있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려한다. 희망사항이지만 먼저 사랑한 만큼 사랑받는 존재가 될 것이다.
‘매의 눈’으로 돈의 흐름을 살펴보라
눈의 가장 큰 역할은 돈의 흐름을 보는 것이다. 형이상학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돈의 흐름을 보는 것은 결코 군자가 할 일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현대를 살아가면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돈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라는 말을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더 좋다”고 이야기하면서 웃는다. 돈은 우리의 생활에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존재이기에 정확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돈의 흐름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적게는 내 지갑에서부터 크게는 사회 전반에서 쓰이고 있는 돈의 흐름을 살필 수 있는 매의 눈을 가지고 있다면 생활이 풍요로워질 것이다. 매의 눈이란 어떤 눈일까? 매의 형상이 아닌 기운을 말하는 것이며 길고 깊은 눈을 말하는 것이다. 생각이 많이 담겨 있으며 지혜와 사랑을 겸비한 눈이라 할 수 있다.
에선 사람을 관찰하는 방법으로 “상대의 말을 듣고 상대의 눈동자를 보라”고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보는 것은 중요한 덕목임에는 틀림없는 일이다. 먼저 자신을 바로 알고 사물을 바라봄에 끝까지 탐구하고 바로 보려는 마음을 가진다면 나에게 오는 운을 잘 받아들여서 편안하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박정희(朴正姬) 前 동방대학원대학교 문화교육원 인상학 교수
혜담 인상코칭연구원 원장으로 기업체와 대학에 특강을 하고 있다. tv조선 인상학자 패널, 관상학 전문가 패널로 밝고 아름다운 인상미학에 대해 전파하고 있다. 등 저서가 있다.
1. 가락지를 낀 용의 꿈
필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나의 할아버지는 용꿈을 꾸셨단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런데 자세히 보니 용의 다리에 가락지가 끼어 있어 그것이 무엇인지 걱정스러웠다고 하셨다. 그 덕택에 필자가 양자로 가서 잘 살 수 있었음에도 할아버지는 당신 손자를 남겨 두는 결심을 하고 나의 사촌 형을 양자로 보내셨다고 한다. 필자는 서울에서 식품사업을 하시던 아버님 슬하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으나 겨우 걸음마를 하던 다음 해에 바로 6.25 사변으로 인해 어머니는 필자를 들쳐 메고 아버지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는데 기차를 타고 남으로 가던 중 인민군 비행기들의 기총사격에 전 승객이 정신없이 숲 속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올라타고 매달려서 가는 행렬이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왼쪽 다리를 약간 삐어 낮에는 잘 놀고 밤마다 아프다고 했으나 시골에서는 당시 마땅한 병원도 없었으니 아이의 꾀병이라고 그냥 넘긴 것이 화근이 되어 2~3세 때부터 심한 골수염을 앓게 됐다.
그러나 신이 나를 살리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침 당시 부산에 전후 서독에서 파견된 서독병원이라는 것이 부산 대신동에 있어 그곳에서 진료를 받고 바로 완쾌 상태로 퇴원하게 되었다. 당시 나이 8살이었는데 병원에서는 통원치료를 하던지 약 1년간 입원을 시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교에 갈 나이라 입학을 시키고 통원치료를 결정한 것이 화근이 되어 아직 후유증을 앓고 있어 보행이 불편하다. 어린 나이에 너무 활발하게 놀다 보니 환부가 제대로 치료되지 않고 후유증이 남게 된 것이었다.
2. 학문의 길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에게 통지표의 국어 과목에 ‘수’가 없으니 ‘수’를 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말해 국어에 ‘수’를 받을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필자는 대체로 우수한 학생 측에 들었다. 그러나 당시 진해에서 일류중학이라는 진해중학교에 응시하여 입학시험을 치르고 나서 혼자 고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였다. ‘과연 합격할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거의 꼴찌 수준으로 겨우 합격하였다.
합격 이후엔 학문에 뜻을 둔 공자와 비슷한 나이 15세에 공부의 즐거움을 깨우치기 시작하였는데 꼴찌 수준의 합격이 필자를 자극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1학년 첫 학기부터 상위권의 수준으로 시작했던 필자는 중학 시절 내내 상위권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공부를 잘해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가정 사정이 여의치 못해 대학 진학을 잠시 미루고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장남인 필자는 4명 동생을 돌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필자는 일하는 와중에 지방 행정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마침 동생들이 대학 공부를 시작하고 어느 정도 사회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지난 7년간 접었던 대학 공부를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70년 당시 5급을류 지방 공무원 월급은 약 1만 원 정도로 집 월세 충당하는 정도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사직하고 학원 강의를 하던 시기에 배움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상대에 진학하여 공부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축적하는 길이 꿈을 실현하는 첩경임을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대학을 꼭 가야 하는지 대학 생활을 통해서 이를 확인하고 싶다는 강한 집념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년이 지나서 진학한 대학 4년은 꿈같은 세월이었다. 엄청난 지식을 습득하게 되고 생활 중에 터득한 사업 경험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계기도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물 안의 개구리가 세상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전기가 되었던 것 같다. 한국경제의 흐름을 읽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방향설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대학 4년은 학문의 즐거움을 알게 된 시기기도 했다. 이런 즐거움으로 수석 졸업할 수 있었지만 한편에선 미래의 진로에 대한 걱정이 생겼다. 그러나 아직도 동생들 학업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학계로 나아가고 싶은 생각이 맘은 접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다시 산업전사로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먼 훗날 이론과 실제를 최대한 일치시키는 교수가 될 수 있으리라는 꿈을 안고 현실 속의 길을 찾기로 하여 당시 최고의 보수를 주는 대기업 건설회사에 취업하게 되었다.
3. 중동 건설 현장을 누비면서 아라비아 상인의 숨결을 느끼다.
필자가 취업한 시기에 건설회사는 한참 중동 붐이 일어 대졸 신입사원에게 최고의 월급을 주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중소기업이었던 한국유리(주) 기획실에 동시 합격하였지만 모든 사람이 추천한 건설 회사로 취업하였다. 희망하던 기획실이 아닌 자재부로 인사명령이 났다. 기왕이면 큰 뜻을 펴기 위해 나는 중동근무를 지원하였더니 사우디아라비아 TEP 본부 자재구매 담당으로 명령을 내주었다. 여기서 사우디아라비아 상인들의 상술의 대단함을 깨우쳤고 향후 중동국가와 업무상 협상하는 기술을 배우는 전기가 되었다. 영어가 능통하여 구매업무도 그리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말도 좀 익혔다. 운전 기술도 익히는 기회가 되었다.
1980년대 초 리야드 시내는 상가도 크게 형성되지 않았다. 따라서 건설용 자재를 구매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아서 해외에서 구매하여 조달하였으나 급한 자재는 현지에서 조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사 팀으로부터 자재 조달 독촉을 받았던 독특한 자재 A가 생각난다. 당시 필요한 자재는 상권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아 수소문하여 어느 주택가에서 상호를 달고 있는 공급업자를 찾았다. 급한 김에 대충 가격 협상을 하고 공급을 하고 나서 보니 약 3배나 비싸게 구매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동국가의 무표정한 협상력 앞에서는 국내 업자는 한순간 실수하면 엄청난 바가지를 쓴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었다.
모든 물건을 생산하지 않고 수입해서 판매하는 까닭에 부르는 것이 값이 되고 모르면 속아 넘어가게 되어 있는 곳이 중동이었다. 이후 상대와 협상 시에 얼굴에 표정을 나타내지 않는 기술을 터득하여 많이 활용하고 있다.
그런대로 사우디아라비아 생활은 재미는 있었지만 33세에 결혼하여 바로 해외근무를 하게 되어 아직 아이가 없는 관계로 회사에서는 연장근무를 요청하였지만 귀국을 결심하였다.
4. 세계 제1의 중공업 회사를 만들어내다
대학 재학 중에 아산학자금을 받아 공부했던 연고로 인하여 귀국 후에 현대중공업(주) 플랜트 사업본부 계약관리부에 근무하게 되었다. 구매부서의 업무도 재미있고 할 만했지만 주위에서 바라보는 의혹의 눈초리는 아주 거북스러웠다. 따라서 수출과 관련된 업무를 하려고 하던 차 현대중공업(주) 계약관리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당시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현대에서 정주영 회장과 함께 일을 하던 한유동 전무가 담당 중역이었다. 필자가 계약관리부로 가게 된 것도 한 전무의 뜻이었지만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계약서의 핵심 사항을 짚어가면서 일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였지만 리더십도 출중하여 회사의 임직원들이 많이 존경하는 그런 분이었던 것 같다.
1981년 만 하더라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쉴 수 있었고 그 외는 업무에 전념하는 시간이었다. 당시 필자는 혼자 회사에서 제공한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업무에 전념하였다. 우리는 현대가 이미 국가적인 회사였으므로 현대가 잘되는 길이 우리나라가 잘되는 길이라는 믿음으로 열심히 근무하였다.
계약관리부서는 요즘 PM 부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조직으로 회사의 대표이사로부터 프로젝트에 대한 전반적인 위임을 받아 사장을 대신하여 업무를 수행하는 역할을 한다.
미국, 영국 등 구미 국가를 위시하여 호주, 인도, 중국 등 전 세계적인 프로젝트를 총괄관리하다 보니 각 국가 및 회사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해양플랜트 분야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선진국의 기업들과 계약과 협상 업무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업무도 세계화의 수준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회의하면서 영문으로 회의록 (MOM)을 만들고 노트북이 생기면서 회의 시 바로 회의록을 작성하여 상호 서명하는 수준까지 이르니 어떤 계약과 협상 업무도 가능하게 되었다. 단지 기술적으로 좀 미진한 부분은 세계적인 설계회사와 하도급 계약을 하던지 합작회사를 설립하여 경영하는 식으로 보완해 나갔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어느 사이 우리도 모르게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선박을 만드는 회사로 성장하게 되었고 조선업 세계 1위 회사로 성장해 나아갔다.
초기 단계에 인도 ONGC사로부터 수주한 Win, Wips 공사는 실행률이 85% 정도가 되는 수익이 많이 나는 프로젝트였다. 필자는 개인적으로도 클레임 보험사고 처리 등의 업무에서 600만 달러 이상의 순익을 창출하는 데 기여했다.
해양사업본부는 인도 ONGC사로부터 인정을 받아 약 25년간 매년 지속해서 프로젝트를 수주하여 한때 ONGC사업본부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하였었다. 이와 관련 인도는 미국, 프랑스, 일본 등에 발주하지 않고 한국의 현대에게 지속적인 발주를 함에 따라 위 기간 약 20억 달러 이상의 예산을 절감하는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5. 함께하여 행복하다
먼 길을 갈 때는 함께 가라고 했다. 필자는 사랑하는 5남매들과 함께하여 행복했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필자가 존재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우리 오남매는 어려운 가정 사정으로 집도 절도 없는 상황임에도 함께 노력하여 다 대학을 졸업한 자랑스러운 사람들이다.
필자 집안에 행복을 몰고 온 사람은 어쩌면 나의 아내인 것도 같다. 아내와 결혼하자마자 5남매의 장남인 필자를 도와 얼마 되지 않은 월급을 쪼개 동생들 학업을 지원하고 집안을 평화롭게 이끌어왔다. 회사 야유회 때 부부동반이라 같이 가자고 하였더니 옷이 없어 함께하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순간 너무나 미안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난다.
어려운 상황에서는 아들 둘은 이제 장성하여 결혼하여 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 또한 큰 행복이라 생각한다. 손자를 보고 손자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니 이 즐거움 또한 어디에 비길 수가 있을까? 며느리가 수시로 전화로 안부를 물어오는가 하면 손자가 커가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내 우리 부부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
6.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서 도전
대기업 30년 중소기업 10년의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양자의 주요한 차이는 도덕성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필자가 앞으로 살아가는 방향은 도덕성을 지키면서 살 수 있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 개인사업자 등록을 하여 필자만의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필자가 스스로 도덕성을 허물지 않는 한 누구도 필자에게 도덕에 반하는 일을 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에서 외자 유치 3500만 달러를 성사시킨 필자는 이를 회사가 갚지 못할 시 처할 수 있는 어려움을 생각하면서 도덕성이 모자란 그런 결정을 했는데 당시 이런 생활을 접기로 했다.
필자는 전문성이 있으면서 혼자서 할 수 있는 국제계약 컨설팅을 하는 일이다.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한양대 및 중앙대나 전문 교육기관, 한국플랜트협회, 건설전문공제조합 등에서 국제계약 관련 강의를 한다. 신문사에서 집필 요청이 있으면 글을 쓰기도 한다.
강의는 대학 졸업 당시 학계로 나가고 싶었던 꿈을 실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루에 7시간 강의를 하는 필자를 보고 아내는 철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강의 자체를 즐기다 보니 강의를 시작하면 나는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필자가 또 하나 사명감을 느끼는 일이 있다. 100세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창출하는 일이다. 원래 국가가 앞서서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국가 발전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아야 할 일이나 현재 국가가 해주기를 기다릴 수 없는 실정이다.
서울시에서 실시하는 SBA의 창업 닥터 과정을 이수하면서 청장년들의 창업을 지원하는 창업닥터로서 자격을 취득하고 KDB 시니어브리지 센터 1기 과정 도심권 인생설계 1기과정 등을 수료하면서 많은 뜻을 함께하는 좋은 동지들을 만나게 되었다.
개인적인 꿈도 있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붙여 장학회를 하나 만드는 것이다. 이름하여 가칭 ‘태성(太晟)장학회’ 다. 가난으로 인하여 젊어서 배우지 못하는 후손이 없도록 해두고 싶은 생각으로 오래 동안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있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다. 시니어들이 건강한 삶을 살면서 국가와 사회를 위해, 또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또 다른 이상 사회를 꿈꿔가는 것은 필자의 또 다른 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 인생의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
1915년 5월 27일생이신 아버지와 1922년 11월 1일생이신 어머니 사이에서 1946년 1월 4일 8시께 1942년 8월 13일 누님에 이어 둘째로 태어났다. 2년 뒤 여동생, 4년 뒤 또 여동생이 태어났고 막내 남동생과는 9살 터울이다
어릴 적 기억은 4세 때 한국은행 돌계단을 오르면서 엄마 손 잡고 명동 가던 것뿐이다. 누나는 공부를 잘해 늘 전교 1등이었는데 그 동생은 말썽꾸러기라서 늘 창피하다며 야단을 쳤었다. 학교에서 누나에 거는 기대가 크면 클수록 필자는 야단을 적게 맞고 반대로 장난은 늘어만 갔다.
드디어 누나가 50년 개교 이래 처음으로 경기여중을 들어갔다. 누나 졸업과 동시에 필자는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다. 무엇 조금만 잘못해도 엄청 꾸중을 들었다. 아마도 그동안 적립해 놓은 야단을 한꺼번에 듣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학교 주변은 피난민이 많이 살았는데 대개 남대문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의 자제였다. 학교 끝나고 오는 길에 그들 몇이 모여 한 아이를 끌고 가 여럿이 골목에서 때리는 것을 보았다. 말썽부리고 공부는 잘못 해도 남을 해치고 약자를 괴롭히지는 않았는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뛰어들었고 우릴 아는 애들이 뒤따라 들어와 패싸움이 되어 일이 엄청 커졌다.
다음날 부모가 들어왔는데 그악스런 이북말씨에 네 일도 아닌데 싸움판에 끼었다는 요즘 말로 하면 변호사법 위반으로 징계를 먹었다. 다행히 초등학교여서 퇴학이 없어 전학으로 결정됐다.
5학년 후반 남대문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런데 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과를 끝내고 집에 오려는데 왠지 많은 아이가 빨리빨리 교실을 빠져나가고 열 두어 명이 남더니 뒤에서 양동이를 머리에 씌우고 몰매를 놓는 것이었다.
학교 근처에 서울역 양동이라는 사창가가 있었는데 그곳 아이들이 뭉친 게 한패, 남대문 시장 뒤 고아원 아이들이 한패로 그들만의 리그가 볼만했다. 전학생이 왔는데 패싸움 때문에 전학 왔다니까 기선을 잡기 위해 선수를 친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망치를 하나 들고 갔다. 노는 시간에 하면 여러 명에게 당할 것 같아 공부시간 중간에 뒤에서부터 한 명씩 깼다. 당연히 학교가 난리 났다. 결국 3개월 만에 멀고도 먼 교동초등학교로 전학 갔다. 이곳은 맹모삼천지교란 말이 실감 나는 곳이었다.
한반이 72명인데 왜 이렇게 조용히 공부만 하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필자도 할 일이 없어 공부하기 시작했다.
두 달 후 6학년이 되었다. 72명이 어깨 맞대고 촘촘히 앉아 시험을 봤다. 그래도 두 달 공부 열심히 했다고 아는 문제가 많아 정말 신나게 시험 봤다. 일요일이 주일 후 시험성적표가 성적순으로 나와 뒷벽에 붙었다. 그런데 나름대로 시험도 잘 봤는데 팔저 이름이 없는 것이었다.
“선생님 제 이름은 없는데요?” “그래? 번호는 몇 번까지 있니?” 72번이요.” “그럼 맞는데 어디 보자.” 갑자기 머리에 벼락이 떨어졌다. “야 임마 여기 있잖아. 너는 네 이름도 못 읽냐.” 아차 필자 번호 67번에 필자 이름이 있는 것이다
필자 생전 그렇게 재미있게 시험 본 경험이 없을 정도로 재밌게 봤는데 이상했다. 시험지 확인을 해보니 평균 82점인데 67등이었다. 그렇다면 점수 18점 안에 66명이 있다는 것 아닌가. 6년 내내 최고 점수 평균 91점 받아봤지만 등수에는 거의 변함이 없었다.
중학교 입학해 공부 좀 하려는데 집에 큰일 생겼으니 빨리 가보라는 담임교사 말에 어리둥절해 가보니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갔다. 5남매 장남으로 7식구 돌보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우선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신문 배달뿐이었다. 대학도 안 가려는데 어머니가 앞으로는 대학 졸업장 없으면 행세를 못 하니 앞으로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나오더라도 졸업장은 반드시 가지라고 말했다.
공부 잘하는 누나 한 사람 대학 보내기도 쉽지 않은데 필자 덜컥 시험을 봐 경희대에 턱걸이로 합격하니 어머니는 얼마나 심란했을까. 그 시절은 생애 최고의 순간이기도 했고 불안의 나날이기도 해다.
필자는 누나가 결혼한 뒤 군대에 갔다. 훈련을 마쳐 각자 본대로 가는데 그 많은 훈련병 다 호명해 갔으나 마지막까지 혼자 남았다. 알고 보니 육군본부였다. 군대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필자 복에 육군본부라니 말도 안 됐지만 사실이었다.
근무 중 월남파병 백마부대에 차출되어 강원 화천 오음리서 훈련받았다. 만기 제대를 하고 도저히 경희대 주간을 다닐 형편이 되질 않아 건국대 야간대학으로 옮겨 낯에는 일하고 밤에 학교를 다녔다. 경희대 다니며 친구들과 만든 “포도원”이란 모임은 지금도 50년 넘게 만나고 있는데 이혼, 상처, 상부, 본인 사망한 친구가 없는 모임이다.
건국대 야간은 낙원동에 위치한 96%가 직장을 다니며 주경야독하는 백전용사들이다. 지금도 매월 첫 수요일 저녁은 그들과 함께하는데 시멘트에서도 싹 튼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입가에 웃음이 걸려 있는 지독한 독서광들인 친구들이다. 건국대 야간 경제과를 졸업하고 학사가 되었다. 어머니 말대로 앞으로 들어가 뒷문으로 나온 기분이었다.
그해 10월 아내와 결혼했다. 그리고 1973, 75, 78년 생 딸 2, 아들 하나 아이 셋을 낳았다. 그리고 큰애가 아들과 딸, 작은애가 딸 둘을 낳았다.
1998년 소마라는 개인회사를 만들었다. 특수방식의 사료 첨가제였다. IMF가 왔지만 사료비를 아끼려는 농가가 많아져 오히려 매출이 늘었다. 크기를 키워 주식회사로 만들고 상호도 (주)지니 바이오로 변경했다.
이후 회사는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사옥도 사고 직원도 늘리고 거의 수직 상승곡선이 그려졌다. 하루 운행 거리가 최고 762km. 평균 500km가 넘을 정도로 영업하고 다녔다.
그리고 영업을 위해 삼성 SM5를 샀다. 이 차는 세상에 차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내게 알려준 최초의 차였다. 차 뺀 지 2년 만에 35만km를 달렸지만 잔 고장 하나 없이 잘도 달려주었다.
그런데 2000년 구제역이 왔다, 매출이 100%에서 3%로 떨어졌다. 1년 후 재기를 노려 농가를 다니길 약 20일. 그러나 다시 구제역이 왔다. 사옥도 팔아가며 버티고 버티며 2011년까지 왔지만 역부족 결국 남에게 넘겼다.
그러는 사이 나라에서 지하철 공짜카드가 나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이가 벌써? 대한노인회에 이모작 준비에 관해 문의했다, 그런데 답이 “집에서 가까운 경로당에 가서 봉사하라”라고 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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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버들 경로당에 가서 한 달을 버텼다. 경로당은 구립이라 지원금이 일 년에 360만원이 전부였다. 그래서 근처 절, 성당, 교회, 기업체를 다니며 ‘한 달에 한 번 어르신들께 점심 기부를 해 달라’며 다녔다. 많은 사람 앞에서 직접적인 필자 일도 아닌 금전적인 것을 부탁하러 다니다 보니 얼굴만 벌게 지며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40여년을 오로지 스피치 교육만 하고 있다는 ’한국언어문화원’을 찾아갔다. “지금처럼 서로 마주 보고 일대일로 상대를 설득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낚시법이라 한다면 저희는 일대 다중을 설득하는 투망법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하는 원장 말에 뿅 가서 그날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발성 연습을 하며 우리말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처음 알았다.
6개월 하고 나니 발성이 제대로 나오게 되었다. 얼마나 배웠는지, 남 앞에 제대로 설 수 있는지 알아보려 2012년 11월 3일 전남 광주시에서 열리는 제38회 박정희대통령기 쟁탈 전국웅변대회에 그 당시 한참 신문, 방송에 오르내리는 이태석 신부의 일대기를 웅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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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특등. 그 한 번의 경험으로 연단 공포증을 단숨에 없애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쉬지 않고 매주 월요일이면 스피치 공부하러 다니고 있으며 현재는 한국언어문화원에서 교수진에 등록되어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특등으로는 성이 차질 않았다. 2015년 11월 7일 광주에서 열리는 제41회 박정희대통령기 쟁탈 전국웅변대회 주제는 그해 대단히 가물어 식수마저 끊기는 지역까지 있어 ‘환경은 생명이다’”라는 원고로 참가해 마침내 대상을 거머쥐게 되었다.
1년 후 조선에듀케이션과 유어스테이지(주) 시니어파트너즈에서 강사 과정이 있다기에 응시해 생애 재설계를 배웠다.건강, 인식, 관계, 경제, 직업, 주거, 여가, 계획과 실천, 교수법을 배웠다. 그렇게 죽을 만큼 공부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결과는 합격. 필자가 강사가 되다니 꿈만 같았고 그 길을 계속 가고 싶었다. 2013년 3월 11일 강사자격인증서를 받았고 3월 21일 드디어 강사위촉장을 받으며 강사생활이 시작됐다.
필자는 무엇이든 빠르지 않고, 재주부릴 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은 절대 뒤로 가지는 않는다. 필자는 강사 과정을 함께 공부했던 사람 중에 대단히 해박하고 아는 것이 많았다. 공부해 보니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회 각당복지재단에서 웰다잉을 공부하라 지도해 주셔 죽음학을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죽음의 의미를 알아보는 로고테라피 강의는 그 중에도 백미였다.
다모작포럼협동조합에서 “한(정수) 이사”의 준말인 ‘하니’란 애칭으로 교장 선생 일도 보람 있게 하고 있다.
필자에게 강사라는 꿈이 있었을까? 연단에서 누굴 가르친다는 게 가능했을까?
필자는 돈만으로 격을 따지는 세상에서 인성의 사각지대에 있는 그들에게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동안 배운 모든 과정을 녹이고 녹여 재미있는 강의를 하다 보니 지금은 공무원연금공단 변화관리 전문강사로 활동하며 직접 겪은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전환 과정'을 중장년에게 전수해주려 하고 있다.
아울러 '다가치포럼 협동조합' 전무이사로 '중장년 미래전략 강사양성'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정부 지도자 과정도 다음 달에 개설할 예정이다. 교육이 대세라는 생각은 팔저를 생각하면 당연한 길이다.
무궁한 발전이 있을 것이다. 혼자가 아닌 함께 가는 길이기에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요즘은 외출할 일이 있으면 자가용보다는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한다.
젊어 한때는 바로 몇 정거장 아래에 있는 시장이나 은행 일을 볼 때도 차를 운전하고 나갔었다.
차가 내 발이라고 생각했고 마침 정비소에 갔거나 남편이 타고 나가 집에 차가 없으면 외출을 하지 않았으며 있던 약속도 “차가 없어서 못 나가니 다음 날 만나자.”라며 취소한 적도 있다.
오래 전에 대학동창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장소는 청계산 밑 유명한 고기 집 이었는데 10명이 모이면서 모두 차를 갖고 나왔다.
음식점 주차장이 넓어서 망정이지 욕먹을 만한 일이었다는 생각이다. 필자와 친구들은 나란히 주차된 우리 차들을 보고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자중하자며 한마디씩 했다.
그땐 농담처럼 나온 말이었지만 곧 실감하는 일이 생겼다.
별로 기름 값 걱정은 안하고 살았는데 어느 날 휘발유 값이 매우 비싸져서 기름을 아껴야하게 되었고 꼭 필요하지 않으면 자동차 운행을 자제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또한 차를 가지고 나간 날은 주차장이 있는 곳이 아니면 차 세울 곳을 찾아 헤매느라 진땀을 흘리고 약속시간에 늦기 일쑤였다.그래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좋은 점이 아주 많았다.
처음엔 지하철 환승하기가 어려워서 힘들었지만 여러 번 타다보니 요령도 생기고 인터넷에서 미리 검색하면 나의 목적지까지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자세하게 나와 있어 편리했다.
지하철 승강장 번호까지 나와 있어 그 자리에서 타면 정말 손쉽게 환승하는 곳으로 갈 수 있고 이렇게 익혀놓으니 지하철 타는 재미와 약속시간에 늦을까봐 고민할 일은 절대 없게 되었다.
꼭 지켜야 할 급한 약속이 있을 때가 아니면 지하철보다는 버스타기가 더 재미있다. 앉을 자리만 확보되면 창밖으로 거리풍경이나 지나가는 사람들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제 대중교통을 애용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 날 버스를 타고 나가는데 붐비는 시간이 아니어서 필자는 자리를 차지하고 창밖을 보면서 가고 있었다. 몇 정거장 후의 어느 정류장에서 20세 전후의 청년이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하는 행동이 조금 이상해 보였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학생, 돈 내야지?”하고 말했는데 이 아이는 운전석 뒷자리에 서서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기사님이 조금 큰 목소리로 “차비 내야지!”하고 소리를 치셨다. 그런데도 그 아이는 시선을 이쪽저쪽으로 돌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차는 이미 운행 중인데 아저씨가 화가 나셨는지 차비 안 낼 거면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라고 엄포를 놓았다. 내가 유심히 보니 그 아이는 잘생긴 외모였지만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약간 지적장애인 같아 보였다. 야단을 치는데도 꼼짝 않고 서 있는 모습이 좀 애처로웠다.
아저씨가 계속 소리를 크게 내셨을 때 나는 용기를 내어 “아저씨 제가 낼게요,” 하고 돈을 꺼내어 버스비 넣는 통에 넣었다. 아저씨도 그 아이도 아무 말이 없었다. 혹시 저 아저씨가 나를 주제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조금 민망했다. 순한 표정의 아이에게 어디에 가는지 집은 잘 찾아갈 수 있는지 묻고 차비라도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버스 안의 다른 사람들 시선도 그렇고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멀찍이 서 있는 아이에게 더 이상 말을 붙여 볼 순 없었다. 나도 모른 척 창밖만 내다보며 목적지까지 갔다. 차비도 없이 차에 올라탄 그 아이는 집으로 잘 돌아갔을까? 자꾸만 마음이 쓰이고 조금 더 관심을 가져 주지 않은 게 마음에 남았다. 그렇다고 불쑥 돈을 쥐여 줄 수도 없고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다음에 다시 이런 경우가 생긴다면 버스비뿐 아니고 찬찬히 아이가 집까지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신경 써 주리라 다짐했다. 버스를 애용하면서 버스 안에서 생긴 일이다.
어른들은 누가 봐도 잘못을 범했다는 게 확실한 일인데도 그걸 인정하고 사과하는 게 힘든 작업 같다.
미안하다 아니면 용서해달라고 하는 말을 해야만 한다면 나이어린 아이들에게라도 하는 습관을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어왔다. 그러나 그런 어른을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인격에 도달한 사람이 드물다는 증거라고 보인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하지만 정말로 선생님까지도 학생들에게 무릎을 반듯하게 꿇고 사과하는 장면을 봤다.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할 때 나이가 전연 필요하지 않다는 걸 의미하는 것으로 산교육이라고 보였다. 야구 코치가 학생들 앞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용서해 달라며 무릎을 꿇는 장면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들은 정말로 자기의 잘못을 깨달을 때는 어느 누구이건 간에 그 앞에 무릎을 반듯하게 꿇고 용서를 구한다는 것에 놀라웠다.
일본에 처음 가서 일본 엄마들이 한국에서 온 나를 초대했다. 우린 그 당시 초등학교 한 반이 80명이 넘었다. 그런데 일본에 가니 한반의 정원이 30명이란다. 나는 정말 놀랐다. 초대되어 간 학부형 집에 도착하니 우리 반이 25명이라 1명이 회사에 근무해서 못 나오고 전원 참석했었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얘기를 하는데 너무 놀라웠던 것은 한국은 아주 못 살고 힘든 나라로 알고 있는 것이고, 북한은 아주 잘 살고 굉장한 발전을 하고 있는 나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엔 몰랐지만 한국은 일본 동경에 초등학교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우리가 주재원 자격으로 가도 전학시킬 곳이 없는 실정이었다. 북한은 김일성대학까지 인가를 받은 정식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반해 우린 초등부터 중, 고도 인가가 안 나 있는 실정이었다. 그들은 죠센징(북한사람)은 잘 살고 있는 민족이고 그에 반해 강꼬꾸징(대한민국사람)은 데모나 하면서 나라가 아주 불안하고 힘든 국민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대 연설을 해야 했고, 내가 구사할 수 있는 걸 모두 총동원해서 일본이 우리를 36년간 식민지화해서 몹쓸 짓을 했다고 열변을 토했다. 별안간 내 앞에 모두 일어섰다. 그들은 구령도 없었지만 똑같이 나에게 조심하게 절을 올리면서 ‘유르시떼 구다사이. 혼도니모시와케아리마셍’(용서해 주십시오.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긴장된 분위기에 약간은 놀랐지만 무릎 꿇고 바로 일어서지도 않고 조아리는 그들의 모습에 그만 고개 숙이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정말 전연 교과서에서 배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말들이었습니다. 정말 미안하다며 얼마나 고생했을까 말 안 해도 안다며 전쟁에서 지고나면 그 뒤의 국민들의 고생은 정치하는 사람들은 모르는 일이고 설사 안다 해도 그런 일들은 다 무시당한다는 것이다. 국민만 불쌍한 거라고 내게 오히려 위로를 했다. 놀라웠다. 그들이 물어봐서 말을 꺼낸 일도 아니고 중간에 어떻게 하다가 그리로 얘기가 흘러갔던 것인데... 내가 만난 엄마들은 내 또래이니 그 부모들이 당한 일들에 대해 전연 모르고 있던 것이었다. 우리는 미주랑 고주알 역사에서 다 배워서 알아진 것이지만 그들은 역사에서 배우질 않았다 했다.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나는 모르지만 정치인들이 한 일에 대해서 국민으로서 예를 갖추는 그들의 국민성에 놀랐었다.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면 나이와 국적에도 상관없이 나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사과할 줄 아는 국민성을 가진 게 부러웠다. 아들에게도 무릎을 꿇고 용서해 달라고 정정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아버지들이 많았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다.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드라이버는 힘, 아이언은 기술, 퍼팅은 돈’ 아마추어 골퍼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일단 드라이버는 멀리 보내고 볼 일이고 아이언은 정확하게 핀 근처로 갖다 붙여야 한다. 그리고 마무리인 퍼팅이 좋아야 내기에서 돈을 딸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중요한 퍼팅이 가끔 전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있다. 이때 본인의 최종적인 판단과 실제 퍼팅시 잘못은 생각지 않고 애꿎은 캐디에게 한마디 던지는 골퍼가 있다. 물론 캐디가 경사를 잘못 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캐디의 조언을 받아 본인이 동의를 하고 그에 따라 퍼팅을 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 아닌가? 그럴 때마다 필자는 참지 못하고 꼭 하는 말이 있다. “주식투자와 퍼팅은 자기 책임이다. 우리 인생에서 또 하나 자기 책임 하에 하는 것이 있는데 무엇인지 아느냐?” 답은 ‘노후준비’이다. 우리가 주식투자에서 다양한 전문가의 조언을 참고하는 것처럼 퍼팅 시에는 홀마다 실제로 공이 굴러간 궤적 등을 보고 익힌 캐디의 조언을 참고한다. 캐디가 못 미더울 때는 동반자의 의견을 구할 수도 있다. 경험 많고 노련한 캐디가 있는가 하면 초보 캐디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때나 최종 결정과 최종 퍼팅은 내가 하는 것이다. 그 결과가 엉뚱하게 나왔다고 해도 조언한 사람은 조언에 그칠 뿐이다. 조언을 받아들인 것도 나고 그에 따라 퍼팅을 한 것도 나이기 때문이다. 주식투자도 마찬가지이다.
노후준비는 어떤가? 노후준비 역시 주식투자나 퍼팅처럼 이 사람 저 사람으로부터 조언을 받을 수 있다. 요즘 노후준비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노후준비 또는 은퇴설계 관련 전문가가 주식투자 전문가와 캐디에 못지않게 많다. 오히려 주식투자와 퍼팅은 나름 전문성이 있어야 하는 반면 노후준비는 누구나 당면한 과제이므로 한마디씩은 할 수 있다.
그런데 주식투자와 퍼팅은 안 해도 그만이지만 노후준비는 안 하면 노후가 괴로워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좀 더 나은 노후준비를 위해 전문가는 물론 은퇴를 했거나 은퇴를 앞둔 선배들의 경험과 조언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식투자와 퍼팅에 정답이 없는 것처럼 노후준비에도 정답은 없다. 여기서 정답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맞는 답, 즉 정답(正答)도 없지만 정해진 답이라는 뜻의 정답(定答)도 없다는 것이다. 정답이 없는 대신 현명한 답, 현답(賢答)은 있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 아니라 노후준비를 언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현문(賢問)에 대해 현답을 하는 것, 즉 현문현답(賢問賢答)인 것이다. 더욱이 그 현답은 자기 책임 하에 나만의 맞춤형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스스로 뭔가 계획하고 설계하기에는 뭔가 크게 부족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퍼팅이나 주식투자를 할 때처럼 전문가와 주위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조언과 정보는 헛갈리게 만들 뿐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전문가 2~3명, 이미 은퇴해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선배 또는 친구 2~3명으로부터 조언을 듣고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야 한다. 더해서 관련 책을 읽기도 하고 세미나에 참석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듣고 읽으면서 은퇴자들의 실제 생활을 보다 보면 나만의 철학과 전략이 설 것이고 그에 따라 차근차근 나만의 노후라는 집을 설계하고 지으면 되는 것이다.
핑계 없는 무덤 없듯이 핑계 없는 노후불안도 없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무덤은 피할 수 없지만 노후불안은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후가 불안한 사람들은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핑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소득이 적거나 가족관계 또는 건강에 문제가 있거나 하는 식이다.
따라서 스스로 한 번쯤 짚어 봐야 할 질문은 “만약 내 노후가 불안해진다면 그 핑계거리가 무엇일까?”이다. 이때 기준은 필자가 좋아하는 ‘행복한 노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다섯 가지 분야, 즉 5F(Finance, Field, Fun, Friend, Fitness)’이다. 분야별로 조목조목 짚어 볼 필요가 있다. 노후에 쓸 돈(Finance)이 부족하다면 왜 부족할까? 은퇴한 후 그 많은 시간을 보낼 소일거리 또는 취미활동(Field)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면 지금부터라도 뭘 해야 할까? 노후에 나와 함께 할 배우자와 가족을 포함한 친구(Friend)가 없다면 왜 없을까? 재미(Fun) 없는 노후가 예상된다면 왜 그럴까? 현재 건강(Fitness)에 문제가 있거나 문제가 예상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부터라도 5F 중 가장 부족한 분야를 우선적으로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돈만 있으면 다 되는 것 아닌가 할 수도 있다. 과연 돈만 있다고 해서 할 일과 친구, 재미, 건강이 따라올까? 그 돈을 누구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할 일과 친구, 재미, 건강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미국의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돈은 비료와 같아서 쓰지 않고 움켜쥐고만 있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 돈을 잘 써야 할 일도, 친구도 생기고 재미도 따라오고 건강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담배를 끊고 술을 줄이기만 해도 돈과 건강을 한꺼번에 챙길 수 있다. 배우자와 가족, 친구들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을까를 되돌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취미활동이나 문화행사 또는 봉사활동에 참가해보라.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뿌듯함과 자신감도 생길 것이다. 특히 걸어 다녀야 몸이 건강하다는 걸 알고 열심히 대사활동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 나이가 들수록 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 건강이 더 중요해진다. 오래 살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치매에 걸리지 않고 100세까지 건강하게 산다면 가족이나 친구 누가 뭐라 하겠는가? 인터넷을 뒤져 재미있는 건배사와 에피소드를 발굴,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서 써먹어 보라. 하다 보면 늘기 마련이고 잘 하면 나만의 주특기가 될 수도 있다. 사는 게 재미있으려면 내가 재미있거나 재미있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면 되는 것이다.
‘평균화의 맹점’은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한 말이다. “다리의 수송력은 여러 교각이 떠받치는 힘의 평균값이 아니라 가장 약한 교각의 힘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다리는 가장 약한 곳에서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5F도 평균값을 끌어올리는 것에 못지않게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건강을 잃으면 다른 4F가 아무리 풍족해도 다 소용없는 것이다. 5F 중 부족한 F를 찾아내서 채워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자 우리네 인생이다.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딸아이의 결혼식을 앞두고 박명수(59·여)씨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양가 하객을 50명씩만 초대하기로 했는데, 남편과 딸의 손님, 친척들을 꼽다 보니 자신이 부를 수 있는 친구는 10명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겨우 친구 몇 명을 추려 결혼식을 마쳤지만, 그 후가 더 골치 아팠다. 왜 자신은 부르지 않았냐며 섭섭해 하는 친구들을 달래기 바빴고, 기껏 청첩장을 주었는데 오지 않은 친구 때문에 실망감도 컸다. 고향 친구, 동창, 회사 동기, 동네 이웃도 모자라 SNS로도 친구를 맺는 요즘, 박씨처럼 친구가 없어서가 아니라 많거나 관리를 잘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이들이 늘었다. ‘진정한 우정은 친구의 수가 아니라, 그 깊이와 소중함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영국 극작가 벤 존슨의 명언처럼, 몇 명의 친구를 사귀는가보다는 어떤 친구와 어떻게 지내느냐를 고민해야 할 때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도움말 윤선현 베리굿 정리컨설팅 대표
참고 및 발췌
베리굿 정리컨설팅 윤선현 대표의 저서 를 살펴보면 “가장 친한 친구를 꼽아보고, 왜 그가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말해보세요”라는 물음에 90%가 넘는 사람이 어렸을 적부터 오랫동안 알아온 친구를 말한다고 한다. 윤 대표는 “‘술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는 옛 속담이 있지만, 어느새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관계란 오래될수록 성공적이다’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오래된 친구가 가장 친한 친구일 경우도 있지만, 응답자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그들 중 절반 이상이 구체적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당연히 그렇지 않으냐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 친구 관계, 이상과 현실 사이
‘오래된 친구가 좋은 친구다’라는 말처럼 흔히들 착각하는 게 ‘친구는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다. 윤 대표는 “자신의 인맥과 범위를 자랑하는 이들이 있다. 집으로 비유하자면 ‘우리 집엔 비싼 물건이 엄청 많아 창고가 세 개나 있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비싼 물건이 많다는 것은 부유함을 나타내지만, 그 부유함이 꼭 사람을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거나, 그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나타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조언한다. 몇 명을 알고 있는지와 그 사람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왜 친구가 없을까?’라는 불안한 마음에 인맥을 채우려 한다면, 우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관계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부터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다음 체크리스트를 참고해 내가 꿈꾸는 관계와 실제로 관리할 수 있는 관계는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자.
1. 나의 VIP(아주 친한 친구)들은 1년에 [ ]번은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2. 나의 보통 친구들은 1년에 [ ]번은 직접 만나고 싶다.
3. 각각 친구 수를 곱해서 두 숫자를 더한다. 이것은 1년에 약속이 [ ]번 있다는 뜻이다.
4. 나는 한 달에 [ ]번 정도 약속에 나갈 수 있다.
5. 내가 1년에 나갈 수 있는 약속은 [ ]번 이라는 뜻이다. (4×12)
3 의 숫자와 5의 숫자의 차가 클수록 내가 꿈꾸는 관계와 현실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관계의 괴리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년에 나갈 수 있는 약속 수(5)보다 내가 나가고 싶은 약속 수(3)가 많다면, 뜻대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버거운 상태일 것이다. 윤 대표는 “한 사람에게 필요한 관계의 양이란 결코 다른 사람이 정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을 위한 시간을 먼저 제외하고, 가장 소중한 가족과 VIP들에게 쏟고 싶은 시간을 제외한 뒤, 그 외의 시간에 감당할 수 있는 관계의 한계를 가늠해야 한다”며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시간부터 확보하고 나면, 양부터 먼저 채우려던 마음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스마트한 세상의 똑똑한 친구 관리
윤 대표는 인맥을 정리할 때 가장 유용한 방법으로 ‘휴대폰 연락처 삭제’를 추천한다. 아마 일일이 전화번호를 외우거나 수첩에 적어 다니던 시절에는 불필요한 연락처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휴대폰만 있다면 단 몇 초 만에 연락처를 저장할 수 있고, 외워야 하는 부담도 없기 때문에 요즘은 친한 사이가 아니더라도 의례적으로 휴대폰 번호를 입력해 둔다. 채우기 쉬웠던 만큼 정리도 쉬운 게 휴대폰 연락처다. 다음 기준을 참고해 지금 바로 연락처를 삭제해보자. ‘그래도 연락할 일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은 과감히 버리는 연습이 필요하다.
- 1년 이상 연락을 주고받지 않은 사람
- 앞으로 서로 연락할 일이 없는 사람
- 내 삶을 방해하거나 안 좋은 감정을 주는 사람
- 연락처가 변경된 사람
이 방법을 통해 윤 대표의 한 지인은 휴대폰에 있는 전화 목록 중 무려 600명을 삭제했다고 한다. 스마트한 세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SNS 친구다. 대체로 친구를 쉽게 만들고 초대할 수 있어 정신없이 친구가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 윤 대표는 “몇 년 전 맥도날드에서 페이스북 친구 10명을 지우는 사람들에게 햄버거를 공짜로 주었더니, 1주일이 채 되지 않아 23만 명이 넘는 사람이 페이스북 친구 리스트에서 지워졌다고 한다. 쉽게 맺은 관계일수록, 쉽게 끊어지게 된다”고 이야기했다. 휴대폰 연락처처럼 친구 목록을 보며 정리도 하고 내가 하는 SNS 특성에 맞게 관계를 유지해보자.
필자는 ‘펑퍼짐한 바지’는 거부한다. 바지통이 타이트해 몸에 짝 달라붙고 길이도 조금 짧아 구두 뒷굽을 가리지 않는 디자인을 입는다. 색깔 역시 노색이 아닌 밝은 계통을 선택한다. 윗도리도 붙는 형태의 것으로 입어 타이트한 바지와 궁합을 맞춘다.
예전엔 위아래 옷이 모두 헐렁한 것을 선호했다. 활동에 편함을 주어서였다. 나이가 들 대로 든 사람이 몸에 끼이는 옷을 입을 경우 보는 사람들이 점잖지 못하다고 여길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있었고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을 바꾸기 싫은 점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스타일에서 벗어났다. 자주 옷을 사지는 않아도 한마디로 젊은 티가 푹푹 나는 옷을 즐겨 입는다. 규율적 교복, 직장인 양복에서 진정한 패션으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혼사에 갈 때도 넥타이를 맨 정장을 고집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은 자주 청년 같다고 말한다.
◇점잖은 옷을 고집했던 인생일막
필자의 패션(패션이라는 말을 쓰기 뭣한 구석이 없진 않지만)은 젊을 때부터 ‘‘젊음’과는 거리가 있었다. 우선 옷이 우장 같이 커 펑퍼짐한 것을 입었다. 활동에 더 편한 옷을 선택한 결과다. 색감도 칙칙한 걸 좋아했다. 특히 검은색을 좋아했다. 그래서 필자가 입은 꼬락서니를 보면서 사람들이 우울해 할 정도였다. 그런데 시니어가 되면서 젊고 멋스러운 옷에 자꾸 눈이 갔다. 아마 오래된 펑퍼짐함과 칙칙함에 대한 싫증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시니어’라는 존재적 본질 때문에 스스로 이런저런 한계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계속 노티 풀풀 나게 입고 다녔다. 그리고 그게 무엇보다 익숙하고 편했다.
◇의류업계에 취업한 아들에게 옷가지 선사 받고선…
큰아들이 부산에 본사를 둔 의류업체에 취업했다. 간혹 필자에게 옷가지를 선물이라며 주었는데 모두 그 회사의 최신 패션 브랜드였다. 받은 옷이니 버릴 수도 없어 할 수 없이 꽉 끼고 색깔이 튀는 옷을 입게 되었다. 처음 입을 땐 엉덩이가 끼어 못 입겠더니 자꾸 입으니 생각보다 편했다. 필자는 사진작가여서 야외활동을 많이 하는데 이제는 야외에서 입어도 별로 불편하지 않다. 색깔도 처음엔 다른 사람 보기에 민망했지만 이 역시 익숙해지니 괜찮았다. 옷도 술과 마찬가지로 중독이다. 아들 회사 브랜드를 자꾸 걸치니 이제는 종전의 스타일인 펑퍼짐하고 칙칙한 바지는 오히려 이상한 느낌이 든다.
신발도 예전의 직장인 티 풀풀 나는 스타일에서 신세대 형태로 바뀌었다. 양말 역시 목이 짧은 것을 신는다. 예전에는 양말과 구두를 옷장과 신발장 제일 위에 있는 거부터 신었는데 이젠 바지 색깔에 따라 변화를 주기도 한다. 더구나 반가운 것은 이런 차림으로 나서면 실제 나이(67세)로 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때로 10살 어리게 나이를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다른 사람 얘기 다 믿을 순 없지만.
남들의 시선도 시선이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젊게 옷을 입다 보니 마음과 행동도 젊어진다는 것이다. 또 젊은 감각의 옷은 이웃에게 즐거움을 준다. 불교에서 무재칠시(無財七施ㆍ돈 없이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를 중요하게 여기듯 필자의 경쾌한 스타일이 이웃의 눈에 즐거움을 주면 그 자체로 공덕 아니겠는가.
불면증을 겪어 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힘든 고통은 없을 것 같다는 아픔을. 반면에 불면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불면증으로 고생한다고 하면 속으로는 아마 별 쓸데없는 고생을 사서한다고 빈정댈 수도 있는, 조금 사치스러워 보이는 습관으로 치부할 지도 모른다.
필자는 이런 하릴없는 증세(?)로 크게 두 번, 작게는 여러 차례 고통과 직면해야만 했었고 그때마다 그로부터 해방되는 방안을 찾느라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 만큼 이제는 나름 불면증에 관한한 준전문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신체가 아프거나 마음이 아파서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어렵다면 당연히 먼저 병원을 찾는 것이 맞는 일이겠지만 그 이전에 그러한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방비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개인적인 몇 가지 팁을 제시해 보려한다.
20대 초반 대학을 다닐 때 처음으로 불면증이라는 녀석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늘 고뇌와 번민을 달고 살았던 예민의 시절이었기에 어느 정도 잠 못 드는 밤이 있는 것은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잠이 부족해서 머리가 아파오고 몸이 피곤해 무엇에든 집중하기 어려운 날이 몇 달 지속되자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극도의 신경과민이 나를 심하게 괴롭혔다. 매일 아스피린을 달고 살거나 술에 만취해서 예민한 신경을 잠시라도 잠재우려 애를 써보기도 했지만 ‘존재에 대한 불안’에 근거한 잠 못 드는 밤은 실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내 정신을 피폐케 하였다. 결국 병원에서 가끔 수면제 처방을 받아 임시방편으로 잠에 빠져보기도 했지만 약이 없으면 이내 또 정신이 너무 눈부시게 깨어나서 잠을 이룰 수 없게 되고 젊은 혈기가 넘칠 나이에 약에 의존한다는 것이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는지 약의 효과는 점차 반감되어가기만 했다.
일반적으로 잠이 안올 때 책을 읽는다든가 양을 한 마리 두 마리 세어 나간다든가 하는 여러 민간처방을 해보았지만 효험을 본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에 내 영혼의 근본적인 불안이 원인이라고 잠정결론을 내리고 내 안에 오래 내재된 잡다한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참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십분 정도일지라도 참선을 하는 것을 지속했고 잠자리에 들 때는 사지를 편하게 뉘이고 오직 복식호흡에만 집중하였다. 아무런 잡념 없이 오직 심호흡에만 집중하여 계속하다보면 깊은 숨에 의한 체내 산소공급의 원활화로 인해서인지 편안한 마음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잠에 빠지게 되고 보통 한 두시간지나면 다시 깨곤 했었던 악순환 없이 6시간 이상 지속적인 깊은 잠을 이루게 되면서 드디어 악몽 같았던 불면의 세계에서 완벽하게 탈출할 수 있었다.
이후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없이 겪게 되는 갈등으로 잠시 불면의 밤을 지새운 적도 많고 심호흡을 해도 잠이 오지 않는 고통스런 순간도 많았지만, 적극적인 마음으로 나를 괴롭히는 갈등을 정면으로 돌파해 하나씩 해결해 나가다보면 무의식 세계의 평안함이 찾아오게 되고 이는 다시 나의 수면주기를 정상적으로 돌려놓곤 해주어서 그다지 큰 문제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다시금 된통 불면증의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고 한동안 살아야했던 기간은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너무 생생하여 되새겨보고 싶은 마음은 그다지 없으나 불면증이 다시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더 이상 고생할 것 같지 않다는 마음이 먼저 앞서는 것으로 보아 편한 마음으로 써나가도 될 듯하다.
삼십 여년 직장생활을 마치고 그리 큰돈을 모으지도 못한 채 맞이한 정년퇴직 후의 삶이 시작되었을 때다. 퇴직 후 일,이년 남짓한 기간은 해방감을 만끽하면 전국을 돌아다녔고 히말라야나 시베리아까지도 ‘무릎 떨리기 전에 가슴 떨림을 먼저 느껴야 한다!’고 우기면서 신나게 즐길 수 있었던 듯했다. 그러나 55세 이후 대략 또 다른 40~50년의 세월이 기다리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면서 뭔가 확실한 인생 2막을 열어야 할 것이라는 부담감이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원래 꼼꼼한 성격에 완벽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러한 고민에 침잠하다보니 예전 고민 많던 20대의 상황과 거의 유사한 내적불안으로 인한 잠 못 드는 밤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여행과 사진 활동을 접고, 노인에 대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도 하고, 노후에 하고 싶었던 직업으로 생각한 관광통역사 자격도 취득해서 일자리를 알아보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던 몇 가지 사업들도 지속적으로 매달려 보기도 하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백방으로 노력한다고 해보았지만 돈이 되는 것은 없고 돈만 계속 들어가는 시기였다. 아무래도 동업에 따른 갈등도 적지 않다보니 내 자신의 사업을 별도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법인을 만들고 직원채용과 마케팅으로 하루하루 몰두를 했지만 너무 앞서나가고 시장을 제대로 파악치도 않고 뛰어든 사업의 결과는 참담했다. 결국 번아웃 되어가는 내 자신을 바라보며 속절없이 잠 못 드는 밤과 나란히 친구가 되어 고통을 견디어야만 했다.
그러나 늦은 나이에 찾아오는 여러 고통은 예전과는 달리 두렵거나 힘들다는 느낌은 별로 없고 번거롭다는 생각일 뿐이며 ‘이 또한 지나가리라’ 또는 ‘연식이 오래되면 여기저기 탈이 나는게 자연의 섭리’라는 정도로 달관하게 되어 그다지 고통스럽다는 느낌은 크지 않았다. 다만 얼마 되지 않은 사업자금이 바닥나고 30년간 관리자 역할밖에는 모르던 사람으로서 앞으로 무엇을 해야 좋을지 대안 마련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저녁에는 잠들기 어렵고 새벽에는 진정 노인이 된 듯 일찍 깨면서 내 머리 속은 지나치게 밝은 조명을 바라보듯 집중이 어려워졌다.
어차피 잠 못 드는 시간이라면 가급적 생산적인 일을 하면서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여러 가지 대안을 생각하다보니 일석이조의 방안이 떠올랐다. 치매예방을 위해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글을 보고 한동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영어공부를 다시하기로 한 것이었다. 특별히 공부시간을 정해 놓을 필요 없이 잠이 오지 않아 고통스런 시간이 오면 무조건 스마트폰에 저장된 가장 어려운 등급의 영어 리스닝을 틀어 놓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다. 약 한달 정도 사이에 70킬로의 몸무게가 66킬로까지 빠질 정도로 불면증은 심신을 피폐하게 하는 악당이었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공부에 매달리면서부터 거짓말처럼 잠이 빨리 찾아와 주었다. 처음에 자동꺼짐을 한시간 정도 여유 있게 해 놓곤 했으나 점점 30분, 15분... 짧은 시간을 세팅하더라도 마지막까지 들은 기억이 없을 정도로 잠은 급히 쏟아지게 되었다.
“역시 어려운 공부는 졸음으로 가는 지름길!”
[불면증 관련 엉뚱한 제언]
민간요법(?)의 하나로서 잠이 오지 않은 경우 양을 세는 방법이 우리나라의 방식이 아니라 외국에서 전래된 내용으로 알고 있다. 보통 잠을 잘 못자는 경우 양을 세라고 하면 우리는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하겠으나 외국의 경우에는 one sheep, two sheep...하면서 ‘잠’에 해당하는 단어인 ‘Sleep’과 유사한 발음을 하므로 인해 잠을 유도하게 된다고 본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양한마리’ 대신에 ‘잠자리 한 마리, 잠자리 두 마리...’하다보면 잠자리에서 쉽게 잠이 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