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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 사느라고 살았다
- 몇 시간을 달려왔는지 모르겠지만 필자가 부모님을 따라 청량리역에 내린 시각은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었다. 청량리역을 나서면서 필자 입에서 나온 일성은 ‘아부지! 하늘에 호롱불이 좍 걸려 삣네요’였다. 그때가 필자 나이 9세이던 1966년 가을이었다. 필자는 경주 인근 작은 산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곳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었다. 초등학교는 논밭 사잇길을 지나 형산강 상류 얕은 곳을 건너고 긴 아카시아 터널과 무서운 보리밭을 지나야 갈 수 있는 먼 곳이었다. 농사철이나 눈보라가 심한 겨울날에는 학교에 오지 않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 작은 산골 마을에서 필자 집은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방이 두 개고 방 사이에 작은 부엌이 있는 초가집. 아버지는 일하러 서울에 가시고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들과 그 집에서 살았다. 그 시절 서울에서 철공소 일 하시던 아버지께서 다 망가져서 내다 버린 세발자전거를 주어다가 용접하고 색칠해서 보내주신 적이 있다. 그 신기한 물건은 나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한번 태워달라고 내 자전거 뒤로 동네 아이들이 긴 줄을 지어 따라 다녔다. 정식으로 학교에 다니신 적이 없는 어머니께서는 동네 할아버지들을 찾아다니면서 한글을 깨치시고 셈법을 배우셨다. 배움에 한이 맺히신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 ‘ㄱㄴㄷㄹ’ ‘가나다라’가 빽빽하게 들어 있는 책받침을 사다 주셨다. 덕분에 나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깨우쳤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반장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 해에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 오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2학기인 1966년 가을이었다. 검정고무신을 새로 사면 아까워서 신지 못하고 며칠 동안 들고 다녔고 반딧불이 여러 마리를 잡아넣은 호박꽃을 움켜쥐고 밤길을 뛰어다니던 천방지축 필자가 서울에 오게 된 것이다. 청량리역에서 태어나서 처음 본 가로등을 하늘에 좍 걸려 있는 호롱불로 알았던 것도 당연한 이치. 몸이 약하고 왜소했던 필자는 서울 아이들의 놀림감으로 충분했다. 심한 경상도 사투리는 심지어 선생님들도 놀림감으로 사용했다. 가난도 한몫했다. 솜틀집 귀퉁이 작은 방 하나에 우리 전 가족이 살았다. 시골학교에서 반장을 했던 필자는 자신감이 자꾸 사라졌다. 필자는 더 우울해지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변했고 외톨이가 돼갔다. 그러던 중 친구가 하나 생겼다. 그 친구와는 어떤 계기로 가까워졌는지 기억에 없으나 어린 시절 은인이었다. 그 친구네 집은 'ㅁ‘자 모양의 큰 기와집이었는데 마당 가운데에는 꽃이 피는 정원이 있는 대궐 같은 집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늘 필자를 자기네 집에 데리고 갔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언제나 맛있는 음식을 해 주셨다. 반들반들 거리는 마루에 그 친구와 단 둘이 앉아서 텔레비전을 봤다. 그 친구는바둑도 실력급이어서 필자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 친구네는 검은색 자가용이 있었는데 광나루에 물놀이 갈 때는 필자도 같이 데리고 가 주었다. 초등학교 3학년 단 일 년 동안의 시간을 보내고 그 친구와는 연락이 끊어졌다. 4학년 때 필자 집이 멀리 이사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의 이름을 긴 세월 동안 잊지 않고 있었다. 성씨는 기억나지 않았으나 그의 이름은 언제나 또렷하게 가슴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우울하고 힘들어하던 어린 시절에 필자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고 필자가 다시 용기를 갖도록 만들어 준 친구. 우여곡절 끝에 나는 2008년에 그를 찾아냈다. 만나서 얼굴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지나간 사십여 년의 긴 시간도 같이 지낸 듯 친근한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처럼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그는 원불교 성직자가 되어 있었다. 어릴 때 필자에게 했던 그 나눔을 평생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건네준 시집에서 그 친구와 함께 꼭 뵙고 싶었던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신 것을 알게 되었다. 필자의 그림 솜씨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우리가 시골에 살 때 아버지는 서울에서 철공소 일을 하시면서 돈을 벌어 보내셨다. 그렇게 일하시면서 그림 공부를 하시고 그 시절 미대를 졸업하셨다. 본래부터 가지고 계시던 재능인 그림 공부를 하신 후 평생 나염 공장에서 도안 그림을 그려 가족을 부양하셨다. 블록으로 지은 쪽방 도안실에서 꽃 그림을 그리시는 모습이 아직도 필자 기억에 남아 있다. 철공소의 험한 일은 그만하셨지만 나염공장도 열악하기는 별 차이가 없었다. 월급을 못 받는 경우도 많았고 다니시던 회사가 갑자기 부도가 나는 경우도 있었으니 우리 집은 늘 가난했다. 필자가 고3 때 미대를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중ㆍ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받은 상은 전부 그림 상이었다. 사생대회를 나가기만 하면 특선을 했다. 필자는 그림이 좋았고 평생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아버지께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대신 그림과 관련이 있는 건축과로 가라고 하셨다. 건축이 무엇인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필자는 건축과를 가게 되었다. 그림에 빠져있던 내가 공대 건축과를 갈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하게도 수학을 잘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건축과 학생 중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선후배가 모여서 작품전을 준비하는 써클에 가입했다. 1년에 5개월 정도를 써클룸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설계 공부를 하며 작품전을 준비했다. 그 당시 써클룸은 학교의 제일 높은 산 위에 있는 건물의 지하 보일러실 옆 정화조 위에 있었다. 냄새 나는 좁은 공간에서 저학년들이 전체 인원이 먹을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먹는 그 밥으로 대부분 영양실조 상태였다. 잠은 제도판 위에서 쪼그리고 잤다. 낮에는 자고 밤을 꼬박 새우면서 설계하는 습관 때문에 수업을 많이 빠졌다. 그러니 제때에 졸업 못 하는 선배들도 있었고 필자도 학점 미달로 한 학기를 더 다니고 졸업하는 신세가 됐다. 그렇게 희로애락을 함께한 선후배들은 사회에서도 형제처럼 서로 도우면서 건축을 할 수 있었다. 남자 형제가 없는 필자는 그렇게 맺은 건축과 선후배들이 형과 아우 같은 관계를 만들었고 지금도 그 연결고리에서 도움을 받고 나누고 있다. 졸업 후 7년 동안 건축 설계사무실의 도제 생활을 거치고 나서 건축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나이 서른두 살에 건축설계사무실을 개업했다. 개업하기 한 해 전에는 결혼해서 첫째 아들이 태어났는데 세 식구가 살 작은 원룸 아파트도 돈을 빌려서 전세로 들어갔고 사무실 개업비도 전부 선배들에게 빌려서 해결했다. 1989년이었다. 개업하자마자 일이 밀려 들어왔다. 그 시절 온 나라는 공사판이었고 설계일도 넘쳐났다. 삼십 대 초반에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찾아온 것이었다. 내가 그동안 만져보지 못한 큰돈이 들어왔다. 직원 수도 늘어났다. 일주일에 두세 차례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가 많아졌다. 골프도 치러 다녔다. 둘째 아들이 태어난 후엔 작은 전셋집에서 분양받은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다. 필자의 삼십대는 건축이 가져다준 풍요에 방향타를 놓치고 흥청거렸다. 그러나 그 풍요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7년 늦가을 어느 날 세상은 천지개벽했다. 그날 필자는 선후배 골프모임을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하고 있었는데 사무실에서 급히 연락이 왔다. 설계, 감리를 시행하고 있는 현장에서 인부 두 명이 사망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경찰서에서 여러 날 공사현장 사고 조사를 받는 중에 IMF가 터졌다. 처음엔 IMF가 뭔지도 몰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필자가 거래하던 중소 건설회사는 전부 부도가 났고 예정된 모든 설계프로젝트가 사라졌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이 거품이 터지듯 사라졌다. 필자가 사십 대에 접어드는 시기에 일어난 악몽이었다. 삼십 대에 이룬 것을 전부 잃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간 일거리가 없었다. 빚이 눈덩이처럼 쌓여가고 독촉장들이 여기저기서 날아들었다. 급기야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공황장애와 폐쇄공포, 협심증과 감각마비라는 중증 질환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신경과 전문의인 둘째 처남이 약을 지어주면서 ““약은 상태호전에 큰 도움이 안 되니 가능하면 약을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진단을 했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위기는 가족의 단결도 가져왔다. 어머니께서는 늘 기도해 주셨고 아내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밤마다 뜸을 떠주고 필자 손바닥에 빽빽하게 수지침을 놓아 줬다. 몇 달 후 건강이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 필자 사진 한 장이 지금도 남아 있다. 허공을 바라보는 초점 없는 눈과 창백한 피부. 그 당시 얼굴은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 이런 가족의 성원에 보답하려고 당시 건축설계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그동안 건축을 하면서 예술가인 양 거드름을 피우고 살았으나 필자의 사십 대 건축은 단지 생계 수단일 뿐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빚을 정리하면서 사십 대를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아이들의 키가 나보다 더 커져 있고 필자 머리카락이 반백이 된 것을 알았다. 필자의 불혹은 말 그대로 허무하게 지나갔다. 내 나이 오십이 되던 해, 그러니까 2007년부터 매년 한가지씩 이루어 나가기로 했고 지금까지 실행에 옮기고 있다. 담배 끊기, 목 조각 배우기, 책 내기, 상담사 자격증 따기, 강의하러 다니기, 새로운 사람 오십 명 사귀기 등이 그동안 내가 실행한 일들이다. 올해는 캘리그라피에 도전하고 있다. 앞으로도 매년 성취 가능한 목표를 하나씩 세우고 꼭 이루어 나가려고 한다. 2007년도부터는 건축 분야 가운데서도 환경, 생태건축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연구하고 있다. 어류를 포함한 동물 공부도 하고 수목원과 식물원을 찾아다니면서 식물도 공부하고 있다. 건축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필자가 연구하는 건축은 사람과 함께 지구 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을 위한 환경이다. 그와 더불어 지속가능한 소득이 있는 시니어타운을 연구하고 있다. 필자를 포함해 아파트 하나가 재산 전부인 대부분의 베이비부머들에게 작지만 그림 같은 집을 갖게 하고 싶다. 필자가 이렇게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가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선 인생 후반전을 능동적이며 긍정적으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니어에 필자가 가진 것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퇴직한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생애 재설계 강의도 하러 다니는데 이것도 같은 차원이다. 사실 한국의 시니어들은 퇴직 후의 인생 2막에 대해 대책을 세울 여유가 없었고 앞으로의 대안도 마련돼 있지 않다. 필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 대안의 하나로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계속하면서 관계를 넓혀가려고 한다. 최근에 필자는 ‘5070세대의 가슴 펄떡이는 기사를 쓰실 기자를 찾습니다’라는 이투데이의 시니어기자단 모집기사를 보면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필자 희망대로 필자의 경험을 나누고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배울 수 있는 장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야가 좀 더 넓어지고 깊어지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니어들과 서로 나눌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의 삶은 현재 진행형이다.
- 2016-05-18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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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의 인상학] 화폐 ‘슈퍼모델’ 세종대왕
- 우리나라 화폐 속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세종대왕이다. 현 화폐 모델 중 원에서 환으로, 100원에서 1만원으로 화폐단위와 액면을 자유롭게 넘나든 유일한 인물이다. 특히 세종대왕은 1960년 제2 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당시 1000환권의 모델이던 이승만 대통령과 자리바꿈을 하였고 그 이듬해인 1961년에는 500환의 주인공이 되었다. 1973년에는 1만원권 지폐의 모델로 발탁되어 명실상부 우리나라 화폐의 ‘슈퍼모델’이 된 것이다. 1972년 정부는 1만원권을 처음 도입하면서 앞면은 석굴암, 뒷면은 불국사로 도안을 확정하고 당시 대통령의 재가까지 받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부에서 종교적 색채가 짙다는 이유로 반발해 이듬해인 1973년 세종대왕으로 바뀌었다. 세종대왕은 백성을 마음속 깊이 사랑한 성군이다. 세종대왕 시대라고 하면 태평성대로 기억하고 있는 분들이 많겠지만 세종대왕 즉위 이후 10년간은 가뭄이 계속돼 백성들은 배고픔에 신음하고 농업은 황폐화되었다. 그 당시 중요한 경제기반인 농업의 황폐화는 곧바로 국가 경제의 위기를 불러왔다. 이에 세종은 우선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경험이 풍부한 농민에게 직접 물어 농사의 중요한 정보를 수집해 을 편찬하였다. 가뭄 또한 극복하여야 할 과제이기에 비를 직접 내리게 할 수는 없으니 “비가 언제 얼마만큼 오는지 알 수 없을까?”하는 간절한 여망으로 ‘측우기’를 만들었다. 측우기는 장영실이 만들었지만 이 또한 세종대왕의 고뇌로 탄생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세종대왕은 조세제도에도 관심이 많아 부자는 세금을 덜 내고 가난한 자는 더 내는 당시의 세법이 백성들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든다고 판단, ‘세제 개혁’을 단행한다. 중요한 것은 이 새로운 세금제도인 ‘공법(貢法·토지를 상, 중, 하로 나누어 농사의 풍흉에 상관없이 1결당 10두씩 징수)’을 시행하기 위하여 찬반여론 조사를 실시하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하여 보면 실로 파격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5개월의 여론조사 결과 반대가 예상보다 많다(당시 42%)는 이유로 시행을 보류하며 끊임없는 논의와 개선을 거듭한 끝에 14년 만에 공법을 시행한다.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맥락은 같으나 결과면에서는 많이 차이가 난다. 백성을 구제하는 애민정책의 본보기인 것이다. 세종대왕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단연 훈민정음 창제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를 알면 세종대왕에 대한 존경심이 배가될 것이다. 당시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억울한 죽임을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에도 아무런 말도 못하는 백성들의 아픔을 보면서 어렵고 복잡하게만 되어 있는 법을 모두가 공평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우리글을 만들어 반포하게 되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태종의 셋째 아들이다.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이는 첫째 아들 양녕대군이었으나 세자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킨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태종의 눈밖에 나 폐위되고 셋째 세종이 이어 받는다. 인상학적인 부분으로 볼 때 이마가 넓고 반듯하여 밝게 빛나며 흉터가 없고 마치 간을 엎어 놓은 듯 둥그스러운 면을 보이는 사람이 우리는 집안의 장남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이마가 시원하게 넒으면 세상을 헤쳐 나가는 힘을 품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두 눈썹 사이(산근)가 넓고 힘있게 코 뿌리를 잘 잡고 있으면서 코의 기운이 우뚝 솟아 있는 기상으로 상대를 압도하고 자신의 위상을 확실하게 나타내고 있는 인물은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확고하게 펼쳐 나갈 수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세종대왕의 영정은 초상화에 많이 가깝다. 긴 눈에 단아하고 힘 있는 턱은 후세에도 길이 이름을 남기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전해 줄 수 있을 만큼 강하다. 인상도 시대를 따라 변해 가기에 그 시대의 중요한 부분이 무엇이었는지는 얼굴을 이야기한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집안과 명예를 우선시하였기에 이마 부분을 이야기한 야사들이 많다. 넓은 이마(광상)는 집안의 자랑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한 시대의 영웅으로 존경을 받는 인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곁에서 시대의 아픔을 묵묵히 견디게 해주며 마음의 주춧돌 역할을 하여준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에게는 그 만이 가질 수 있는 확실한 트렌드가 있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은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작품이다.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있나? 자신만의 트렌드는 무엇일까? 지금 우리는 인기인은 많은데 존경받는 사람은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금은 한류열풍이라 한류의 주인공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들의 영향력은 작아질 것이다. 지금의 상황만을 파악하여 “어떻게 생활하며 어떤 방향으로 자손들을 교육시킬 것인가”하는 생각보다는 큰 그림을 그려보자. “무엇이 즐겁고 행복하게 할 수 있나”를 판단하는 안목을 가지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 안목을 키워서 밝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
- 2016-05-0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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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의 인상학] 돈에서 배우는 성공학, 인물학
- 박정희 혜담(慧潭) 인상코칭 연구원장 ilise08@naver.com 돈은 ‘돈다’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한곳에 머물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진다. 돈의 힘을 나타내는 말로 ‘돈이 장사’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 등이 있다. 돈은 상상 이상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돈을 버는 방법이 우리의 주요 관심사가 된 지 오래이며 돈에 의해 지배 당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돈은 어떻게 알고 다스려야 할까? 돈은 언제부터 사용되어 왔을까? 아마도 물건의 교환이 빈번해지면서 사람의 왕래가 많아지고 물건과 바꿀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필요한 것을 바꿀 수 있는 수단으로 돌로 만든 돈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돈은 기원전 4000년 말에 나온 신석기 돌돈으로 보고 있으며 돈이란 말도 돌에서 유래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돈은 우리의 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기도 하고 행복과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 주변에 가장 가깝게 있으면서 친숙할 수도, 멀리할 수도 없는 돈이란 존재를 어떻게 알고 다스려야 할까. 우리나라의 화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8월 당시 유일한 법화인 조선은행권이 사실상 무제한으로 발행되었고 1941년 이후에는 은행권 발행에 있어서 ‘최고 발행액 제한 제도’가 운용되었다. 광복 뒤에 바로 중앙은행법이 제정되지 못하였기에 법제 면에서는 ‘최고 발행액 제한 제도’가 계속적으로 적용되었으나 정치·경제적 혼란으로 인해 사실상 유명무실하였다. 갑작스러운 6·25동란으로 은행에 남아 있던 조선은행권을 미처 폐기하지 못한 정부는 적성 통화의 유통을 막아 적군의 경제 교란 행위를 봉쇄하기 위해 1950년 8월 28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0호로 ‘조선은행권의 유통 및 교환에 관한 건’을 공포하여 ‘제1차 통화조치’를 취하였다. 휴전협정 체결 직전인 1953년 2월에는 대통령 긴급명령 제13호에 의해 ‘제2차 통화조치’를 취했다. 이에 따라 모든 원화의 유통을 금지하고 모든 거래와 원화 표시의 금전 채무는 100 대 1의 비율로 절하시켜 그 단위를 새로운 ‘환’으로 개칭하게 되었고 새로 발행된 신 한국은행권 1환, 5환, 10환, 100환 등 5종의 화폐가 통용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환권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 초상으로 발행되었으며 주화에도 이승만 대통령과 거북선, 무궁화 등이 도안되어 있다. 정부는 1962년 6월 화폐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개칭하며 환가 비율을 10분의 1로 절하하는 ‘제3차 긴급통화조치’를 단행하였다. 돈에 있는 인물은 어떤 역할? 우리나라 돈에는 어떤 인물이 있는지는 잘 알지만 그분들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화폐 인물 중 유일한 무인(武人)은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이다. 1970년 100원짜리 주화에서 처음 나타났고 이후 1973년에 발행된 500원권 지폐에도 재현되었다. 충무공 이순신의 초상은 현충사에 봉안된 장우성 화백의 그림으로, 당시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 전해지는 이야기나 짧은 기록을 토대로 그려진 후 국가에서 표준 영정으로 지정하여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다. 세간에서는 이 초상의 얼굴이 무인의 얼굴이 아닌 문인의 모습이라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 많이 나왔다. 인상학을 연구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그 말은 공감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장수(將帥)의 이미지는 삼국지의 장비를 연상하여 굵고 짙은 눈썹이 위로 향하고 눈도 날카롭게 올라가 있으며 두툼하고 큰 입으로 호통을 치며 거칠고 강한 면을 먼저 떠올린다. 충무공 이순신의 얼굴이 화폐에 들어간 이유는 여러 가지로 알려져 있지만 그중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국민들의 애국심을 유도하면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구국의 영웅 이미지를 통해 군인 출신인 자신의 통치를 합리화하며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아끼는 이미지를 은연중에 스며들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군인을 보는 시선을 민족과 국가를 구하는 선한 시선으로 유도하기 위함이었다는 의도가 있다고 보는 것은 분단된 나라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안고 가야 할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은 곧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 얼굴에는 뛰어난 지략을 갖추고 깊은 고뇌를 하며 백성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전쟁 중에도 일기를 쓰는 세밀하고 섬세함이 있다. 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올바르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으로 윷 점을 치면서 승리를 기원하는 인간 본연의 심성을 지닌 얼굴이다. 시대를 만들어 가는 것이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정신적 지도자를 희망한다. 그런 지도자를 많이 가진 나라를 동경하며 그를 따르고 닮아 가려 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충무공 이순신은 살아서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불철주야 고심하며 자신까지 바친 영웅이었으며 370년이 지난 후에는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인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 2016-03-21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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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빈의 문화공감] “실수로 발이 엉키면 그게 곧 탱고”
- 필자가 기억하는 첫 탱고는 마릴린 먼로가 주연한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1959)’에서 여자로 변장한 잭 레먼이 코미디언 조 E. 브라운과 함께 입에 물고 있는 꽃을 바꾸어 물어가며 춤추던 불후의 명곡 ‘라 쿰파르시타’이다. 그 후 카테리나 발렌테가 부르는 ‘불의 키스(Kiss of Fire/El Choclo)’에 매료되어 여러 장의 탱고 판을 사서 듣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6·25 전에 들은 현인의 ‘추억의 꽃다발’(카네이션)과 ‘서울야곡’이 탱고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 외에도 필자가 좋아하는 국내 가요 중에는 탱고 곡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탱고는 아르헨티나에서 생겨났으나 다른 라틴음악과는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20세기 초에 ‘남미의 파리’로 불릴 만큼 유럽풍의 도시로 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이곳에는 유럽에서 엄청난 수의 이민자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지저분한 항구 지역 보카에는 이탈리아 출신이 주를 이루는 극빈층 이민자들이 모여 살았다. 19세기 초 쿠바에서 유행하다 전해진 ‘아바네라(Habanera)’라는 춤곡과 아르헨티나 민요 형식의 춤곡인 ‘밀롱가(Milonga: 탱고 춤을 추는 장소를 의미하기도 함)’, 그리고 아프리카에 기원을 둔 ‘칸돔베(Candombe)’라는 음악이 더해졌고, 여기에 향수와 가난 고독에 찌든 이탈리아 출신 하층민들의 격정을 담아 탱고라는 독특한 스타일의 음악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탱고를 진일보시킨 사람이 ‘El Rey del Tango(탱고의 황제)’라고 불리는 가수이자 기타 연주자, 피아노 연주자, 작사가, 작곡가, 배우 등 다양한 활동을 한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이다. 그는 1890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인 어머니와 함께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로 이주하여 1895년 우루과이 시민권을 취득했다. 이듬해인 1896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다시 이주했고, 1923년에는 아르헨티나 시민권을 얻었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무대로 한창 음악가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1935년 45세 때 콜롬비아의 메데인에서 비행기 사고로 숨져 비극적인 영웅으로 회자되고 있다. 사망한 지 8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무덤에는 생화가 없는 날이 없으며 매일같이 수많은 참배객들이 다녀간다고 한다. 한편 20세기 후반기의 탱고를 이야기할 때에는 아스토르 판탈레온 피아졸라(Astor Pantaleon Piazzolla)를 빼놓을 수 없다. 아르헨티나의 탱고 음악 작곡가이자 반도네온 연주자인 그는 1921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열 살 때 반도네온을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에는 킨테토 누에보 탕고(Quinteto Nuevo Tango, 탱고 5중주단)를 결성해 누에보 탕고라 불리는 독창적 아르헨티나 탱고의 시대를 열었다. 그의 고향에서 그는 “El Gran Astor” (위대한 아스토르)란 칭호를 듣는다. 특히 그의 음악은 많은 클래식 연주자들이 선호하여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첼리스트 요요마 등이 즐겨 연주하고 있다. 한편 콘티넨털탱고는 아르헨티나탱고가 유럽에 들어와 사교댄스나 살롱뮤직에 적합한 세련된 형태로 정착한 것이다. 악단 편성도 자유롭고 보통 반도네온 대신 아코디언을 쓰고 있다. 탱고가 처음 유럽에 소개된 것은 20세기 초이며 1910년대에는 상당한 붐을 일으켰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걸쳐 탱고음악이 많이 작곡되고 콘티넨털탱고의 스타일이 확립되어 많은 악단들이 활약하였다. 현재는 독일의 알프레트 하우제와 네덜란드의 말란도 악단이 쌍벽을 이루고 있다. 유럽과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도 탱고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 보급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영화배우 루돌프 발렌티노(1895~1926)였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1913년 도미(渡美)한 뒤 ‘묵시록의 4기사(1921)’, ‘춘희’, ‘혈(血)과 사(砂)’ 등에 출연, 이국적인 풍모와 특수한 성적 매력으로 전 세계의 여성 팬에게 인기를 얻었다. 특히 탱고를 즐겨 추어 ‘발렌티노탱고’라는 이름을 남겼다. 그는 절세의 미남으로 무성 영화시대 초기의 최대 스타였으나 인기 절정일 때 급사하였다. 알 파치노가 열연한 ‘여인의 향기’라는 영화에서는 ‘Por una cabeza(간발의 차이로)'라는 곡에 맞추어 탱고를 추는 장면이 명대사와 함께 관객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탱고는 실수할 게 없어요. 인생과 달리 단순하죠. 만약 실수를 해도 다시 추면 되니까. 실수를 해서 발이 엉키면 그게 바로 탱고라오.” 가장 전통적인 스타일의 탱고를 잘 듣고 볼 수 있는 영화로는 스페인의 거장 사우라 감독의 ‘탱고’가 있다. 또 탱고를 사랑한 영국의 여성감독 샐리 포터는 ‘탱고 레슨’에서 정통 아르헨티나 탱고 음악들을 소개하면서 직접 탱고를 배워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에 출연한 한 전직 탱고댄서는 “탱고를 이해하려면 밑바닥 생활을 겪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필자는 1984년 11월,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열렸던 세계 도로회의가 끝나고 귀국하는 길에 일행과 함께 아르헨티나, 페루 등 남미의 몇몇 나라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보카지역을 관광한 후 탱고 전용공연장에 가서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시대별로 변화해 온 탱고 춤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 탱고 음악은 많이 들었지만 당시까지 탱고 춤 공연을 본 적이 없는 필자에게 그들의 현란한 몸놀림은 잊지 못할 놀라움을 안겨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호드리게스가 부른 ‘검은 돛배(Barco Negro)’가 주제음악으로 사용된 후부터였다.
- 2016-01-05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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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그뉴스 그사람] 1982년 1월 5일, ‘밤[夜]’이 열리는 날
- 1970년대를 살았던 국민이라면 밤 12시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기억한다. 24년 전인 1982년 1월 5일, 광복 후 줄곧 갇혀 있었던 대한민국의 밤이 세상에 풀려났다. 밤 12시~새벽 4시의 야간 통행금지(통금)가 해제된 날이다. 전국 도시의 거리에 사람이 오가게 된 것도, 새벽까지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의 술자리 습관도 모두 이때 시작됐다. 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네온불이 쓸쓸하게 꺼져가는 삼거리 / 이별 앞에 너와 나는 / 한없이 울었다 / 추억만 남겨놓은 젊은 날의 불장난 / 원점으로 돌아가는 0시처럼” 가수 배호의 노래 ‘0시의 이별’ 가사다. 통금과 함께 불 꺼지는 거리 풍경과 이별할 수밖에 없는 연인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나타난다. ‘0시의 이별’에는 금지곡 딱지가 붙었다. 남녀가 0시에 헤어진다면 통행금지 위반인데 가사가 통금위반을 부추긴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밤과 낮의 구분 없이 거의 모든 생활이 가능한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광복 후 37년간 한국인들은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집 바깥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미군정 시절 북한의 간첩을 경계한다는 목적으로 도입됐지만, 이후 정부는 ‘범죄예방’ 등의 명목으로 통행금지 조치를 존속시켰다. 전쟁이나 재해 재난이 아닌 상황의 평시통금은 세계적으로도 사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때 그 밤문화…11시 30분 되면 귀가전쟁 시작 자정이 되면 ‘애~앵~’ 사이렌 소리가 울려 펴지고 서대문 로터리에는 철제 바리케이드가 설치됐다. 2인1조로 이뤄진 야경꾼들은 나무로 만든 딱따기를 치며 “통금!” 이라고 길게 소리친다. 단속은 엄혹했다. 김근석 전 경정(1970~80년대 서울 종로구 필동파출소에서 순경으로 근무)은 “귀가전쟁이 시작되면 번화가 입구쪽 차선이 사람으로 빽빽했다. 택시를 잡기 위해 합승은 기본이었고 ‘따블’이나 ‘따따블’ 요금을 부르는 게 일상적이었다”고 회상했다. 국민들의 밤문화는 완전히 달랐다. 혹시라도 통금에 걸리면 보통 곤욕이 아니었다. 일단 파출소에 잡혀갔다가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을 물었다. 예전 회사들은 별도의 숙직실을 두고 있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대의 유물이다. 술꾼들은 10시30분 정도가 되면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거나 술집 문을 닫고 밤새 마시는 선택을 해야 했다. 반대로 통행금지가 오히려 외박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일부러 애인과 술을 마시다가 깜빡한 척하고 통금을 넘겨버리는 수법은 당시 젊은 남녀들에게 흔했다. 덕분에 여인숙이나 여관 같은 서민형 숙박업이 높은 수익을 올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남자들은 굳이 섬에 가서 배를 놓친다든가, 두메산골에서 술이 떡이 되어 운전 못 한다고 버티는 등의 영웅담(?)도 심심찮게 회자됐다. 국가는 아주 가끔씩 통행금지를 풀어줬다. 1년에 단 두 번 통행금지가 해제된 날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와 12월31일이었다. 사람들은 이때에만 해방감을 만끽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는데, 이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성스러운 휴일이 아니라 ‘해방의 날’이었다. 서울 명동과 충무로, 종로 일대가 젊은이들의 해방구였다. 대한민국 밤의 족쇄를 풀어준 88올림픽 유치 대한민국의 밤에 채워진 족쇄를 풀어준 것은 다름아닌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 1981년 9월 독일(당시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전해진 올림픽 개최지 선정 소식은 한국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통행금지가 있는 상태에서 올림픽을 치를 수는 없었다. 사회에 팽배한 민주화 요구도 어떤 형태로든 숨통을 터 줘야 했다. 1981년 11월 19일 전국경제인연합회관 19층 중국음식점에서 여야 중진 국회의원들의 회동이 있었다. 권정달 민정당 사무총장은 이날 갑자기 통금해제안을 꺼냈다. 이견이 나오지 않아 4분 만에 논의가 끝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가급적 이른 시일 안에 통금을 해제하겠다고 밝혔다. 1982년 1월 5일 새벽 4시를 기해 50개시 139개군 지역의 야간 통행금지 조치가 해제됐다. 나라를 되찾은 뒤 처음으로 밤이 국민들에게 돌아왔다. 시민들은 잠을 잊은 채 37년 만에 되찾은 자유를 환호하며 거리를 활보했다. 적지 않은 인원이 새벽 1시에 길거리로 나와 만세를 불렀을 정도였다고 한다. 밤을 되찾은 시민들은 한풀이라도 하듯 거리로 쏟아져 나와 새벽 서울시청 시계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심야극장도 이 시절 생겨났다. 통금이 해제된 지 꼭 한 달 뒤인 2월6일 첫 심야 상영영화인 이 개봉했다. 개봉 첫날 밀려드는 인파에 극장 유리창이 깨졌다는 보도기록물은 처음 맛보는 자유를 만끽하고자 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설명해 준다. 심야영화의 흥행몰이는 을 필두로 , 등으로 이어지는 에로영화 전성기를 만들기도 했다. 술문화도 변했다.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룸살롱, 단란주점 등 새벽까지 이어지는 한국의 밤문화도 이때 시작됐다고 한다. 이전에는 최대한 급하게 마시던 국민들이 새벽까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통금 이후 급등한 민간소비, 오일쇼크 극복 원동력 1982년의 통금해제는 국민의식이 자유로워지고 성숙해진 계기로 평가된다. 통금이 해제되면서 범죄율이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으나 큰 혼란은 없었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돌려받은 4시간의 자유’는 37년간 계속되어온 억압을 빠르게 지워갔다. 버스와 지하철은 자정 이후까지 연장 운행됐고 택시 영업도 밤새 계속됐다. 철야 영업 간판을 내건 가게들도 속속 등장했다. 통제에 익숙하던 사회에 자율적 질서가 자리를 잡아갔다. 기대 이상의 경제적 효과도 뒤따랐다. 서비스 부문의 고용이 늘고 얼어붙은 기업 마인드와 소비심리가 살아났다. 비행기의 이착륙 시간도 구속에서 풀려나 바이어와 관광객의 입국도 늘었다. 1980년 마이너스 0.2%를 기록한 민간소비 증가율이 1982년 6.9%, 1983년 9.0%로 높아졌다. 우리 경제는 1982년 7.2%, 1983년 10.7%라는 고성장을 기록하며 2차 오일 쇼크 등으로 인한 국제적 경제 침체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야간 통행금지 해제 무렵부터 디스코텍과 카바레, 룸살롱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대형 폭력조직이 생겨났으며 퇴폐향락문화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에너지 사용량이 증가하였고, 유흥업소의 영업시간 연장으로 향락적인 사회 환경이 조성되었으며,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한 청소년 범죄가 발생하여 사회적인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간 통행금지 해제는 국민의 기본권과 자율성 회복의 상징적인 조치였다.
- 2016-01-0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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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더하기]한국·중국·일본의 영웅 비교
- 어느 민족에게나 영웅은 있다. 다만 양상은 제각각이다. 국민성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저마다 다른 시선으로 영웅들을 규정하고 파악한다. 때로는 어떤 민족에게 영웅인 인물이 다른 민족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어떤 영웅을 어떻게 떠받드는지 살펴보면 국민성의 일단을 검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글 김유준 프리랜서 dongbackproject@gmail.com 우리에게 영웅은 어떤 의미인가? 이웃 나라 일본이나 중국의 그것과는 어떻게 다를까? 21세기 들어 요즘처럼 한중일의 관계가 긴박하고 날카롭기는 처음이다. 더불어 세 나라의 진정한 모습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지고 있다. 그들의 영웅들을 우리와 비교해보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현실적이되 현실적이지 않은 중국 영웅들 먼 옛날부터 중국의 영웅들에게는 도교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의 영웅 관우가 번성 전투에서 패하고 참수된 이래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신격화된 것은 대표적인 예. 정사(正史)인 진수(陳壽)의 삼국지에는 “강이자긍(剛而自矜)의 단점으로 패망했으니 이수(理數)의 상례”라 기록된 장수가 민담과 설화 차원에서는 신선의 경지까지 오른 것이다. 관우의 사당이 무묘(武廟)라고 불리는 것도 같은 맥락. 공자의 사당을 문묘(文廟)라 일컬으며 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떠받들듯 중국 사람들은 관우를 자국의 무를 대표하는 인물로 숭앙한다. 여타 영웅들에게서도 도교(또는 도교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토착신앙)의 영향은 거의 빠짐없이 드러난다. 의 모사 장량이 신선에게 태공망의 병법서를 전수받는 과정이 그렇고, 에서 제갈량이 남동풍을 불러오거나 자신의 수명을 늘릴 때의 묘사 역시 그렇다. 그 바탕에는, 인간이 신선의 경지에 올라 삼라만상을 다스릴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에서 손오공이 요괴들을 물리치며 천축국으로 향하는 여정에도 도불습합(道佛習合)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를 비롯한 민담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중국 문학의 커다란 줄기인 무협소설에도 이런 경향은 짙게 나타난다. 세계적 거장 이안 감독이 영화화한 왕두루의 소설 에서 주인공 리무바이는 최고수의 경지에 이른 뒤 죽음을 맞이하고 또 다른 주인공인 용은 거친 물길에 스스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소설에서 그들의 죽음은 또 하나의 경지에 이르는 단계로 묘사된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에서 두 사람의 죽음을 이렇게 해석한다. “리무바이는 강호를 떠나려는 순간 최고의 무공에 도달한다. 최고의 무공은 다스리지 않고 조화하며 삼라만상의 기운과 조응하는 자기 내면의 기를 끌어낼 때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깨달은 리무바이도 용의 질주하는 욕망, 젊음의 활기를 은근히 부러워한다. 그것도 세상이치다. 어느 쪽도 결핍이다. 진정한 자유는 그 결핍을 인정하는 것. 영화 마지막에는 그 결핍을 초월하는 용의 해결방식이 나온다.” 서극 감독의 이나 정소동 감독의 은 더하다. 이들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빠짐없이 장풍을 쏘고 하늘을 날아다닌다. 2000년에 리메이크된 ‘촉산전’에서 아미파의 본산인 아미산(촉산)은 숫제 구름 속에 둥둥 떠 있다. 이수민의 으로 대표되는 이런 무협소설 속에서 중국의 무술 고수들은 죽기도 전에 이미 비현실적 경지에 이르러 있다. 이런 경향이 단지 고대 영웅들에게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덩샤오핑에 의해 ‘문화대혁명은 내란’이라 규정되었음에도 모든 중국 인민폐(人民幣: 런민비)에 초상이 그려진 마오쩌둥은 중국인들이 영웅을 신격화하는 가장 가까운 예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영웅들은 그리 현실적이지 않다. 그들은 인간세상을 번민의 각축장으로 해석하고 끊임없이 도탄을 초월하려 애쓴다. 그 시도가 성공적이든 아니든, 중국인들은 그들 영웅이 마침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믿으려 한다. 머나먼 고대에서부터 그런 영웅들이 활개쳐온 세상이기에 그들은 그들의 제국이 다름 아닌 세계의 중심, 중국(中國)이라 여긴다. 지극히 현실적인 일본의 영웅들 중국과 달리, 일본 영웅들의 머리 위에 신의 면류관이 얹히게 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천황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아마테라스 오미가미(천조대신: 天照大神) 이후 신격화의 자격은 오직 왕족에게만 부여된다. 물론 수백, 수천의 잡다한 신들이 신사(神社)에 모셔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본격적 믿음이라 부르기 힘든 것은, 일본 토속신앙인 신도(神道)를 본격적 종교로 인정하기 힘든 까닭과 궤를 같이한다. 지방의 신사에 모셔진 신격화의 대상들은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영향력이 국소적이고 제한적이다. 정순분이 쓴 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일본 신화는 천상신(天上神: 天津神)과 지상신(地上神: 地津神) 간의 투쟁이 중심축을 이루는 점이 특징으로, 지상신은 천상신에게 지배당하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일본의 첫 통일 정권인 야마토 조정의 지배층인 황족이나 귀족이 믿었던 신이 천상신이 되고, 평정된 지역의 사람들이 믿었던 신이 지상신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당시의 정치적 패권을 잡은 야마토 조정의 신화가 문자로 서술되어 남고, 그 밖의 토속적·자연적 신화는 점차 사라져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토속적 신화가 절멸된 결과, 일본 사람들을 사로잡는 영웅들은 새롭게 구성돼 현실과 맞닿아 있게 됐다. 일본의 대표적 설화인 모모타로(桃太郞)가 현대에 이르러 묘사되는 방식은, 일본 사회가 어떻게 영웅을 소비하는지 알 수 있는 바로미터다. 모모타로는 복숭아에서 태어났다는 전설 속 영웅이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귀신들을 쫓아냈다고 전해진다. 교활하게도 일본의 군국주의는 이 모모타로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들을 고무시키는 방법으로 이용했다. 영국과 미국을 귀축(鬼畜)으로 규정하고 군인들에게 ‘모모타로가 되어 귀신들을 물리치자’고 부추긴 것이다( 같은 충신들의 이야기 역시 비슷한 목적으로 사용됐다). 종전 이후 모모타로는 방송에서 탐관오리를 벌하는 영웅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드라마에서 모모타로는 40분쯤 악당들의 악행을 지켜보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면 일본 장구 소리를 배경으로 귀신 가면을 쓰고 “복숭아에서 태어난 모모타로” 하고 나타난다. 그러고는 단칼에 악당들을 베어버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귀신을 물리치는 비현실적 영웅이 정의의 사도라는 현실적 영웅으로 재탄생한 셈이다. 모모타로에게서도 발견되는 ‘떠돌이 정서’ 역시 일본 영웅을 특징짓는 중요한 축.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가 두 자루 검으로 고수들과의 대결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으며 일본을 평정한 이래,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며 무용담을 펼치는 사무라이의 이야기는 일본 대중예술의 단골소재가 됐다. 드라마와 영화로 수없이 만들어졌을 만큼 히트한 제니가타 헤이지(?形平次) 시리즈(이름에서 알 수 있듯 주인공은 동전 던지기가 특기이며 오라로 포박하는 데도 능하다), 영화와 드라마로도 히트한 만화 ‘아기를 동반한 무사’, 주인공이 막부의 특명을 받고 전국을 떠돌며 사건을 해결하는 ‘다비가라스의 사건수첩’(미소라 히바리의 남편으로 유명한 고바야시 아키라가 주연했다) 등은 대표적 예라 할 만하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게 나타났다가 귀신같은 솜씨로 사건을 해결하고 홀연히 사라지는 일본 영웅들의 전형적 여정이 ‘헐크’나 ‘도망자’ 같은 미국 드라마 시리즈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은 꽤 흥미롭다. 일본 떠돌이 영웅들의 출발점이 모모타로 또는 미야모토 무사시라면 미국 떠돌이 영웅들의 출발점은 ‘OK 목장의 결투’의 와이어트 어프라 할 만한데, 양쪽 모두 허무한 정서 또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쿨한’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일본 영웅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서민들 속에 파묻혀 있어 영웅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기가 민망할 정도다. 툭하면 아무데나 ‘신(神)’을 갖다 붙이는 일본 사람들의 속성은 이처럼 현실과 맞닿아 있는 영웅들의 실상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영웅은 영웅이되 영웅이 아니며, 일본의 신은 신이되 신이 아니다. 우리들의 독특한 영웅들 우리 영웅들의 모습은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현실적이라는 점에서는 일본과 비슷하지만 알고 보면 숫제 정반대라고 할 수도 있다. 영웅들을 신처럼 떠받드는 경향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중국인들의 떠들썩한 양상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우리의 영웅들은 일본과 중국 사이 어딘가가 아니라 완전히 동떨어진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먼저 (역사 속 위인들을 제외하면) 우리 영웅들은 정체가 불분명하다. 임꺽정을 예로 들어보자. 조선 중기 때 양주의 백정 출신인 그가 일당들과 함께 구월산을 중심으로 신출귀몰하며 3년 가깝게 관군들을 농락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史實). 그러나 그가 관곡을 털어 백성들에 나눠준 의적인지, 살육을 일삼은 포악한 도적인지는 확실치 않다. 확실한 것은 곤궁한 시대가 그를 도둑 또는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실록을 들여다보자. “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교화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해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饑寒)이 절박해도 아침저녁거리가 없어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장길산도 다르지 않다. 황석영의 소설에서 이갑송을 비롯한 장길산 무리들은 절대적 의리로 똘똘 뭉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도 그랬는지는 알 길 없다. 조선 숙종 때 광대 출신인 장길산이 뛰어난 기지와 탁월한 용맹으로 도적들의 수괴가 됐고, 이후 황해도와 평안도, 함경도 일대를 주름잡았으며, 나아가 역적모의까지 감행했다는 것만 사실로 확인될 뿐이다. 정체가 모호한 의적을 논하다 보면 흥미로운 인물이 한 명 등장한다. 조선 후기 때 실학자 이익은 에서 임꺽정, 장길산과 더불어 홍길동까지 포함시켜 ‘조선 3대 도둑’이라 칭했는데, 여기에서 질문 한 가지. 홍길동은 실존 인물일까, 아닐까. 홍길동은 실존 인물이다. ‘연산군 시절에 관군에 붙잡혔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기록은 부실하지만, 서자 신분으로 무리를 이끌고 관가를 습격했다는 등의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허균이 쓴 의 주인공은 이 인물을 바탕으로 그려진 게 틀림없다. 소설 속에서 홍길동은 의적 활동에 그치지 않고 조정으로부터 병조판서 제의까지 받으며 나중에는 아예 도술로써 괴물까지 퇴치한다. 그리고 활빈당 무리들을 이끌고 율도국(栗島國)으로 건너가 그곳 왕을 굴복시키고 이상향을 일군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점이 아이로니컬하게 느껴질 만큼 도교의 영향이 짙은 것이다. 은 민초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사회상을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쓰였지만, 주인공의 모습은 실제로 민초들이 떠받든 영웅들의 면모와 거리가 좀 있었다. 그에 비하면, 조선시대 최대의 혁명이라 할 만한 동학농민혁명의 주체들은 실체(?)가 분명하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비롯한 수많은 실존 인물들은 민초의 주장을 대변한 진정한 영웅들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역사적 영웅으로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암살’에 등장하는 김원봉 같은 독립투사들 역시 마찬가지. 우리 영웅들은 누구 못지않게 영웅적이었지만, 우리는 오랜 기간 그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못했다. 조선시대와 대한제국에 이어 일제 강점기와 독재라는 슬픈 역사를 거치며 한때 낭만적 목적만으로는 영웅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어떤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대적, 정치적, 경제적 해석이 뒤따라야 했고 그 해석을 심의하는 주위의 눈길은 삼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때문에 대중매체가 건드릴 수 있는 영웅의 세계는 한계가 뚜렷했다. 시간을 몹시 거슬러 올라가 건국 신화를 건드리거나 고작해야 암행어사 같은 비현실적 영웅들을 부각시킬 뿐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한동안 영웅 없는 시대에 살아야 했다. 충무공의 무용담을 재조명한 ‘명량해전’에 이어 올해는 이라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성공적으로 소개됐다. 그와 같은 문화 현상이 각별히 기쁜 이유는 달리 없다. 영웅 없던 나라에 바야흐로 영웅들의 시대가 찾아온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김유준 1966년생. 20여 년 동안 영화전문지 , , 남성교양지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도서출판 현재) 등을 번역했다.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
- 2015-10-2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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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토리텔링] 육체가 곧 연기인 진정한 액션 스타의 계보
- 우리나라 액션 스타의 계보는 곧 홍콩 스타의 계보다. 액션 영화가 ‘다치마와리’ ‘으악새’ 등으로 폄하되던 한국 영화계에서 토종 액션이 만들어지기는 쉽지 않았다. 홍콩 영화계는 달랐다. 그곳 영화인들은 중국 무술을 떠받들었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으려 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이어진 그들의 창의적이고 효과적인 노력은 자국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글 김유준 ◇ 호금전과 장철, 그리고 왕우 1960년대, 아시아 화교 문화권에서 무협극이 빠르게 인기를 얻어가고 그에 발맞춰 쇼브러더스를 비롯한 홍콩의 영화 스튜디오들이 새로운 무협 영상을 만들려던 시기. 그때 홍콩 영화계에 두 명의 거장이 있었다. 호금전과 장철. 두 감독은 홍콩을 무협 액션의 본거지로 만드는 데 거대한 몫을 담당했다. 호금전은 무술에는 문외한이었다. 칼춤과 경공이 난무하는 스토리를 다루면서 그가 관심을 둔 것은 경극과 무용에 바탕을 둔 아름다운 움직임과 꽉 짜인 미장센이었다. “무협 세계는 대부분 상상임에도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것이 이상하다. 내 관심은 액션과 풍경의 관계에 있다.” 이안 감독의 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를 비롯해 같은 호금전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상 그 자체였다. 결투 장면을 액션인 듯 아닌 듯 그려내는 연출 스타일 아래에서 스타가 탄생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그의 영화에서 정패패 같은 여성 배우가 더 돋보인 것은 그런 연출 스타일과 무관하지 않다. 장철 감독은 정반대였다. 세련된 화법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영화에서는 몸과 몸이 맞부딪치는 격렬한 움직임이 속출했고, 카메라는 그에 유치하다 싶을 만큼 급격히 줌인했다. 그런 영상 속에서 무술에 능한 배우가 주목 끌 것은 당연한 일. 장철은 그렇게 왕우(王羽)를 스타로 만들었다. 1967년 으로 합을 맞춰본 장철과 왕우 콤비는 이듬해 를 발표해 홍콩 영화 역사상 최초로 100만 홍콩달러 이상 벌어들이는 대성공을 거뒀다. 이 흥행을 바탕으로 등으로 외팔이 무사(독비도: 獨臂刀) 시리즈가 이어졌고 그 인기는 바다를 넘어 우리나라와 일본에도 전해졌다. 호금전과 달리 작품을 빨리, 많이 만드는 장철의 연출 스타일에 힘입어 왕우 외에 강대위(깡따위 또는 장다웨이), 적룡 등도 스타덤에 올랐다. 피바람이 몰아치는 장철식 영상이 대세가 되면서 홍콩 무협 액션의 기조까지 뒤바뀌었다. 허황된 칼춤은 시나브로 자취를 감췄고 스크린에서는 팔과 다리가 부러질 듯 맞부딪쳤다. ‘챙챙’ 하는 금속성 음향이 베개를 몽둥이로 두드리는 듯한 효과음으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의 시대배경이 점점 더 현대에 가까워지는 경향도 짙어졌다. 이런 현상은 이소룡이라는 불세출의 스타가 출현함으로써 절정을 맞았다. ◇ 작은 용의 등장과 죽음 이소룡은 실제로 무술의 달인이었다. 영춘권의 일대종사로 영화화되기도 한 엽문, 태권도 고수인 이준구 사범 등은 이소룡의 무술 스승. 이소룡은 그밖에 유도, 가라테, 권투 등 세상의 모든 무술에 관심이 많았다. 아역배우로 활동한 홍콩에서의 유년기 이후 미국에서 청년기를 보낼 즈음에는 무술 연마에만 힘을 쏟아 나중에 절권도라는 무술을 창안하기도 했다. 실력에 비해 영화계에서의 활약은 미미했다. 1966년 미국 무술가의 도움으로 TV시리즈 에 조연으로 출연했지만 반향은 크지 않았다. 이소룡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다시 홍콩으로 돌아오고부터. 1971년 액션 영화의 거장 나유(로웨이) 감독의 에서 주연을 맡아 놀라운 히트를 기록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어 가 홍콩과 아시아뿐 아니라 미국에서까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아시아를 뛰어넘는 세계적 스타 ‘브루스 리’가 탄생한 것이다. 이소룡의 트레이드마크는 일그러진 표정과 단순하면서도 폭발적인 움직임. 무도가들은 그 기괴한 기합 소리와 표정을 연기가 아닌 ‘발경(發勁)’의 결과로 이해한다. 무술에서 발경이란 ‘짧은 시간 안에 격렬하게 타격함으로써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 그런 필살기를 펼치는 순간이라면 소리를 지르고 인상이 일그러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이소룡의 시대는 화려했으나 길지 않았다. 느닷없이 나타나 3년 동안 온 세상을 흥분시켰다가 1973년 7월, 마지막 주연작 를 채 완성하지 못하고 서른셋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나 유성처럼 사라진 것이다. 이후 홍콩 영화계에는 액션 배우의 예명에 용(龍) 자를 붙이는 유행이 생겨나 순식간에 별의별 용들이 군웅할거하며 이소룡의 빈자리를 메우겠다고 나섰다. 성룡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다. ◇ 성룡 액션의 시작 이소룡이 사라지며 액션 영화는 주춤했다. 이소룡의 엄청난 주먹질과 발차기에 맛들인 관객들은 후계자를 자처하는 잡룡(?)들의 몸부림에 좀처럼 열광하지 못했다. 1976년부터 등 소림사 관련 영화들이 히트했고 그와 함께 황가달, 류가휘 같은 스타가 탄생했지만 이소룡이 남겨준 흥분을 잠재울 만큼은 아니었다.짧은 순간의 격렬한 움직임만으로는 도저히 이소룡의 그림자를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일까. 이후 홍콩 영화계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움직임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어느 제작자의 감정싸움이었다. 오사원은 뛰어난 프로듀서였지만 쇼브러더스 영화사의 상층부와 다툼이 잦았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프로덕션을 세우리라 결심한 것이 1970년대 후반. 오사원은 평소 눈여겨봤던 무술감독 원화평을 연출자로 키우려 했다(원화평은 나중에 에서 무술감독을 맡았다). 두 사람이 첫 영화의 주연으로 낙점한 배우는 성룡. 성룡은 존재감 없는 외모(쌍꺼풀 수술로 그나마 또렷해졌다)로 한국과 홍콩을 오가며 그저 그런 영화에 출연하던 2류급 배우. 그러나 재빠른 몸동작만큼은 최고였다. 1978년, 초일류 제작자와 초일류 무술감독과 초일류 스턴트 배우라는 삼각 조합은 라는 독특한 영화를 세상에 선보였다. 의 액션은 춤도 아니고 무술도 아니었다. 흡사 우스꽝스러운 광대짓 같았다. 그러나 성룡의 앳된 외모와 걸출한 움직임에 힘입어 장난 같은 동작은 도리어 관객들에게 통쾌한 웃음을 안겨줬다. 이어 성룡은 까지 히트시키며 승승장구한다(우리나라에서는 이 먼저 개봉했다). 이른바 코믹 액션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 거듭된 성공에도 성룡은 도취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대배경을 현대로 바꾸고 영화의 성격마저 액션 중심에서 코미디 중심으로 뒤바꿔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첫 번째 시도는 홍금보 감독의 (1983년). 성룡은 조연도 마다하지 않으며 절친한 동료의 영화적 실험에 동참했고, 흥행 성공으로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이어 성룡은 감독, 각본, 주연까지 맡은 를 세계적으로 히트시켰다. …. 성룡의 성공가도는 끝이 없었고 급기야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 영웅, 본색을 드러내다 성룡의 액션은 거의 독과점 상태였다. 구르고 때리고 피하는 액션으로는 어느 누구도 그 아성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장철의 조감독 출신인 오우삼은 ‘주먹 아닌 총’으로 블루오션 개척에 나섰다. 은 그 찬란한 결과물이었다. 현대판 협객전이라 할 만한 이 작품은 홍콩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히트했다. 상영 시간이 끝났음에도 관객들의 성화에 못 이겨 밤새도록 영사기를 돌렸다는 일화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이후 액션 영화의 양상은 크게 바뀌었다. 협객들은 칼집 대신 홀스터를 찼고, 도복 대신 레인코트를 입었다. 기합과 초식은 자취를 감췄고 방아쇠를 당기는 무심한 표정만이 스크린을 아로새겼다. 권총을 속사포처럼 내갈긴 후 담배를 피워 무는 모습이 가장 멋졌던 배우 주윤발은 그런 영화의 홍수 속에서 독보적으로 빛났다. 장국영, 유덕화, 장학우, 이수현 등이 그 뒤를 따랐고, 적룡을 비롯한 옛 스타들이 다시금 인기를 얻었다. 성룡 액션을 넘어서려는 움직임은 이른바 ‘홍콩 누아르’만이 아니었다. 서극은 일찍이 에서 특수 촬영 기법으로 고대 무협의 세계를 재현하려 했지만 흥행에 실패했다가 1987년 무술감독 출신인 정소동에게 연출을 맡긴 에 이르러 기어이 성공했다. ‘SFX 무협영화’로 불린 이런 흐름 또한 아류작들을 양산하며 오랫동안 유행을 이끌었다. 중국 본토의 무술대회 선수권자인 이연걸을 내세워 정통 권법 영화를 부흥시키려는 움직임도 주목할 만했다. 이연걸은 1979년까지 중국 무술대회를 5연패한 달인. 시리즈로 얼굴을 알린 뒤 서극 감독에게 발탁돼 시리즈를 히트시키며 일약 초일류 액션 스타로 발돋움했다. 액션의 숱한 유행은 21세기가 시작되며 잦아들고 있다. 성룡도, 주윤발도, 이연걸도 예전 같지 않다. 더불어 세계 무술 영화의 거점이던 홍콩 영화계는 힘을 잃었다.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다음 날 곧바로 ‘표절작’이 뿌려진다는 후안무치한 골육상쟁의 분위기 속에서 하루하루 스러져갔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액션 스타의 계보 역시 지금에 이르러 더 이상 쓰이지 않고 있다. 전 세계 영화계에 개인기 대신 규모로 몰아붙이는 대형 액션만 횡행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이제 육체의 움직임에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액션의 일대 위기다. 에서 에단 헌트는 이렇게 말한다. “절박한 순간이라면 필사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지금 액션 영화계는 절박하다. 광야를 내달리는 초인적 영화인의 ‘필사적 조치’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육체가 곧 연기인 진정한 의미의 액션 스타는 공룡처럼 멸종할지도 모른다. ◇ 우리나라의 액션 스타 으악새 영화. 한때 우리 관객들은 우리나라 액션 영화를 그렇게 불렀다. 허공을 내지른 주먹에 악당들이 “으악” 하고 제풀에 몸을 날리며 쓰러진다고 해서 붙은, 실로 치욕적인 별명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액션 스타가 탄생하기는 쉽지 않았다. 장동휘, 박노식, 이대근 등이 이른바 ‘다치마와리 영화(몸싸움 영화)’에서 주연을 맡기는 했으나 영화계의 본류는 아니었다. 정창화 감독 같은 액션 전문 연출자, 황정리처럼 액션만 고집한 배우는 척박한 우리나라 영화계 대신 홍콩에서의 활약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정창화 감독은 등을 히트시키며 일급 감독 반열에 올랐고, 황정리는 성룡의 등에서 악역으로 활약했다. 한용철은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활약한 거의 유일무이한 액션 스타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재미교포 출신(미국식 이름은 ‘챠리 셀’)으로, 무술의 달인은 아니었으나 발차기가 멋지다는 이유만으로 1973년 새로운 액션 스타를 찾고 있던 이두용 감독에게 발탁됐다. 결과는 대성공. 다리를 쭉 뻗어 순식간에 상대 뺨을 연타하는 광경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며 인기를 끌었고, 그와 함께 을 비롯해 2년 동안 여섯 편의 액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하지만 지나친 다작 탓인지 인기는 곧 가라앉고 말았다. 챠리 셀 외에 바비 킴이라는 또 한 명의 재미교포 배우가 반짝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비행기 안에서 소동을 피운 가수와는 다른 사람이다). 연예계 슈퍼스타 겸 액션 영화 애호가 겸 무술인이던 전영록이 이두용 감독과 함께 ‘돌아이’ 시리즈를 선보이며 잠시 인기를 끌기도 했다. >>글 김유준 1966년생. 20여 년 동안 영화전문지 , 남성교양지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도서출판 현재)등을 번역했다. 현재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 중.
- 2015-10-06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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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에 혼자 떠나는 여행- 당진시의 유일한 섬 '난지도'
- 충남 당진시에도 섬이 있다. 난지도(蘭芝島)다. 당진군 석문반도와 서산시 대산반도 사이, 당진만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소난지도, 대난지도를 합쳐 부르고 그 주변에는 대조도, 소조도, 우무도, 비경도, 먹어섬, 풍도, 육도 등 7개의 작은 섬들이 있다. 난초와 지초가 많이 자생해서 붙여진 섬 이름. 과연 그 섬엔 무엇이 있을까? 도비도 선착장에서도 눈가늠이 되는 소난지도가 해맑게 웃으면서 어서 오라 손짓한다. 글·사진 이신화 의 저자 www.sinhwada.com 작지만 조용하고 아름다운 소난지도, 의병들의 함성이 들리는 그곳, 언제 다시 가나? 오전 7시경. 도비도 선착장 주변엔 활기가 넘쳐난다.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 낚시객들을 태우느라 바삐 움직이는 작은 배들 사이로 하루에 세 번 운항하는 철부선(쇠로 만든 짐배)을 타려는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하나둘 모여든다. 자전거를 타고 온 여학생이 눈에 띈다. 선장의 딸이라는 여학생은 대난지도 섬의 분교로 6년간 통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7시50분, 배가 출항한다. 소난지도가 나의 첫 목적지다. 당진군내에서는 대난지도 다음으로 큰, 두 번째 섬으로 선착장에서는 10분 거리다. 눈 깜짝할 새 갑진마을에 도착한다. 낯선 곳에 대한 설렘이 앞선다. 이 섬에서 난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같이 하선한 몇 사람은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선착장 주변을 혼자 배회한다. 식당 두어 곳과 가게, 교회, 경로회관과 민가 몇 채가 있다. 마을에서 만난 할머니 두 명이 눈에 띈다. 말을 걸어볼 요량이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는 아흔이 넘은 할머니는 소난지도의 청아한 공기만큼이나 얼굴이 곱고 정정하다. 뭍에서 시집와 평생 이 섬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 애써 캐물어야 아는 것은 아니리. 선착장 좌측으로 가본다. 길은 바다를 끝으로 끊어진 듯 보이지만 더 가보면 옛 학교터다. 1960년대에 삼봉초 소난지 분교장이었다. 점차로 사람 수가 줄어들면서 1992년 폐교됐다. 1500평 규모의 폐교엔 제법 넓은 운동장이 있고 새로 지은 듯한 마을 회관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한때 이 섬에도 사람들이 많았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슬슬 마을 안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찻길이 끝나는 도독어미 바닷가에 발길을 멈춘다. 소난지도는 과거 조운경로에 들었을 때 조운선이 정박하던 곳이다. 지방에서 거둔 세곡을 경창(서울 마포)으로 수송하면서 잠시 쉬어 가던 곳이다. 조선 말에는 이 세곡선을 털기 위해 도둑들이 살기도 해서 붙여진 지명인 듯하다. 펜션동, 식당이 한 채 있고 낚싯배 한 척이 있다. 바다로 나가, 눈을 들어보니 지척으로 대난지도다. 400m 지점이니 수영을 잘한다면 도착할 수 있을까? 해변엔 인적이라고는 나 혼자다. 옅은 파도소리가 귓전으로 쓸려 간다. 배가 들어온 흔적인 선착장은 부서져 있다. 왼쪽은 바닷물이 차 더 이상 갈 수 없다. 야트막한 산길도 올라보고 해변도 배회한다. 새소리, 풀 자라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만큼 사위는 고요하다. 문득 책을 펼쳐들고 싶다. 돗자리를 펴고 원 없이 못다 읽은 책을 읽고 싶다. 바닷길을 따라 우측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바다로 튀어나온 기암에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과 조우한다. 바위 끝에 서서 낚싯대를 드리우다가 아주 작은 노래미 한 마리를 잡고 즐거워하는 사람들. 초보 낚시객들에게서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시고 우측 둠배마을 펜션단지로 들어선다. 그곳에서 의병총을 만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전국 의병들의 반발은 거셌다. 1907년, 당진지역 최구현의 의병부대, 경기남부지역에서 싸웠던 홍일초 부대, 서산의병 김태순 부대, 홍주의병 차상길 부대원들이 합류해 소난지도로 왔다. 소난지도를 택한 이유는 전라도 일대에서 세곡을 싣고 한양으로 가는 세곡선들이 정박한다는 점이다. 세곡을 탈취해 군량미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육지와 떨어져 있으니 비교적 안전하다는 점도 들 수 있다. 하지만 홍주경찰서에서 눈치를 채고 1908년 3월 15일 이곳을 기습 공격한다. 9시간의 피비린내 나는 총격전이 벌어졌다. 결국 실탄이 떨어진 150여 명 의병 전원은 이곳에서 몰살당했다. 아프다. 가슴이 저려온다. 절로 눈시울이 젖는다. 그것을 추모하기 위해 1974년 6월, 봉분을 봉축(封築)했고 1980년 6월 의병총비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됐다. 1982년 8월 5일 의병총비를 제막한 것이다. 의병총 앞, 둠배마을은 펜션 단지다. 그 앞에 폐가 몇 채가 있다. ‘소난지도의 영웅들’이란 다큐드라마를 찍겠다고 만들어진 세트장이다. 하지만 제작사 관계자들은 산지 전용허가를 받지 않은 채 소나무 5000여 그루를 무단 벌채했다가 문제를 일으켰다. 자연경관이 빼어난 보전산지인 이곳에 남아 있는 폐가만큼이나 창피를 당했다. 어쨌든 이 작은 섬 안에는 제법 볼거리, 할 거리, 느낄 거리가 쏠쏠함에 재미가 많다. 겨우 5~6시간 남짓한 섬과의 만남이지만 오랫동안 알던 곳처럼 친근하다.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가슴속 깊이 파고든다. 나 언제 또 이곳을 다시 올 수 있을까? 고운 모래사장이 자랑거리인 대난지도 해수욕장 오후 1시 30분에 선착장에 도착한 배를 타고 대난지도로 향한다. 대난지도에 사람이 살아온 것은 신석기 시대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소난지도, 대조도와 함께 근접형 군도를 형성하고 있다. 대난지도는 행정자치부가 선정한 ‘국내 명품 섬 베스트 10’ 중 하나로 꼽혔다. 그 섬에 내가 있다. 선착장 바닷가에서는 독특하게 생긴 바위가 눈길을 끈다. 엄지손가락이 올라간 듯한 작은 기암은 이 마을에서는 ‘선녀바위’라 불린다. 선착장에서 난지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포장도로를 따라 간다. 약 3㎞ 정도의 거리라서 걷기에도 어렵지 않다. 민가와 횟집을 지나고 나니 대난지도에서는 가장 큰 마을인 양짓말을 만난다. 바다와 조금 떨어진 데다 산기슭에 민가들이 둥지를 틀고 있어 바닷가 마을이라기보다는 산중 마을처럼 느껴진다. 마을을 비켜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목에 삼봉초등학교 난지분교가 있다. 체육시간인 듯 아이들은 땡볕에서 열심히 줄넘기를 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도 전교생인 듯, 나이차이가 많아 보인다. 학교 건물은 마치 전원주택 같은 모습이다. 슬쩍 교실을 엿본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현대적이다. 교실이라기보다는 개인 방처럼 아늑하다. 그곳에 최신 컴퓨터, 빔프로젝터, 스캐너, 프로젝션TV, 전자오르간 등 한눈에도 도심 시설보다 나아 보인다. 이 분교는 2000년엔 학생수가 2명으로 감소, 폐교 위기에 몰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분교로 발령받은 교사들이 육지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을 전학시켜 오는 등 ‘학교 지키기’에 나서 폐교를 막았다. 요즘엔 ‘아름다운 학교’라는 입소문을 타면서 매년 아이들이 한두 명씩 늘고 있다. 최신식 시설들은 모두 대기업들로부터 기증받았단다. 분교를 비켜 고갯길을 넘어서니 드디어 난지도 해수욕장이다. 당진시의 유일한 해수욕장으로 당진 3경으로 꼽힌다. 폭 500m, 길이 2.5㎞의 고운 모래가 깔린 백사장이 인상적이다. 100m 이상 완만하게 연결되는 모래가 깔려 있다. 물때에 따라 물고기도 잡고 조개도 잡는 곳. 특히 수심이 완만해 해양레포츠 장소로 인기라는데 마침 청소년 수련관에서 여중생들이 래프팅을 하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로 이동 중이다. 한참이나 그들의 극기훈련을 지켜본다. 멋진 추억을 만들고 있는 소녀들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바다 주변으로 퍼져간다. 해수욕장 주변으로는 넓은 소나무 숲이 있다. 북서쪽에는 바다낚시터도 있다. 팔각정 망치봉(118m) 정상에 서면 해수욕장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수련원 뒤쪽으로는 등산로가 만들어져 있다. 찾는 이가 많지 않아 팻말이 마땅치 않지만 산을 좋아한다면 올라가 봐도 좋을 곳이다. 난 이제 섬 밖으로 나가려 한다. 육지 도비도에서 오후 5시 30분에 들어오는 배를 기다리면서 선착장을 배회한다. 낚시객들도 보고, 배를 타기 위해 모여든 관광객들도 만난다. 아침에 탔던 그 배에 다시 오른다. 내 살갗은 하루 만에 벌겋게 익어 버렸다. 땡볕이 내리쬐는 섬의 하루, 난 소난지도, 대난지도를 훑듯이 스쳐왔다. 그곳을 평생 지키고 사는 할머니들도 여럿 만났고 그들의 섧디 서러운 인생사도 들었다. 그러면서 내게 묻는다. “소난지도가 좋아? 대난지도가 좋아?” 답은 하지 않으련다. 각자의 느낌이 다를 테니 말이다.
- 2015-07-07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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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특선-문화 읽기] 추천 연극 '아버지'
- 아버지, 그 대속의 영웅 글 김성수 문화평론가 너무나 평범한 제목의 이 연극은 미국 대표 극작가 아서 밀러의 걸작 ‘세일즈맨의 죽음’을 우리 실정에 맞게 번안한 작품이다. 전 문화부 장관 김명곤에 의해 한국 옷을 입은 이 작품은 청년실업과 노년실업, 88만원 세대의 비애와 가족 해체를 담아내며 우리 시대의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원작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은 1949년 발표되었고 초연 때부터 열광적 반응을 얻어 2년간 브로드웨이에서 장기 상연되었다. 퓰리처상·연극비평가상·앙투아네트 페리상 등 3대 상을 수상한 최초의 작품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 연극계 최대 걸작의 하나로 손꼽혔지만, 다소 번역이 어색해 정확한 정서를 이해하기 힘들어 어렵게만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다. 좀 가벼워진 감은 있어도 번안 덕분에 관객들과의 정서적 교감의 깊이와 폭은 훨씬 넓어졌다. 연출, 각색, 배우의 일인 3역을 소화해 낸 천상 광대 김명곤은 이 작품을 통해 아버지 혹은 권위의 복권을 꿈꾼다. 국물을 내고 버려지는 멸치와 같은 아버지가 아니라, 위기를 대신해서 극복해 낼 영웅 같은 아버지를. 사실 원작이 비극으로 분류되는 것은 주인공 월리 노먼(번안명 장재민)의 비극적 결함 때문인데, 이는 사실상 모든 아버지의 숙명을 탄생시키는 보편적 결함이기도 하다. 현대 미국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유명했던 이 작품은 번안을 거치며 한국 사회에 대한 비수가 되었다. 게다가 김명곤, 전무송, 권성덕 등 노배우들의 명불허전의 연기가 더해지니, 가히 상반기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다. 자식은 자식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가슴 부여잡고 눈물도 찔끔 흘리며 이 연극을 보고 나면, 그만큼 성장해 있는 스스로를 만날 것이다. 세대를 넘은 소통과 정통 연극의 감동은 덤이다. 일정 5월 1일~7월 26일 장소 동양예술극장 2관 연출 김명곤 출연 전무송, 권성덕, 김명곤, 차유경, 권지숙, 판유걸 등 제작 (선)아트컴퍼니
- 2015-05-07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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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돌아오라 7080
- 그때 1974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서울에 사는 이모가 졸업 겸 입학선물로 독일제 만년필 로텍스를 우편으로 보내왔다. 내 생애 처음으로 Made in Germany 제품을 손에 쥐었던 짜릿함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만년필은 잉크통이 고무 튜브가 아니라 빙빙 돌려서 쓰는 나사식이라는 사실이었다. 파랑 잉크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풍경은 가히 시골 소년에게 신세계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아버지의 차지가 되었다. 글 소설가 김호경 일러스트 윤민철 작가 “중학교 1학년이 만년필을 쓰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버지는 그 대신 ‘빠이롯트 파랑 잉크’ 한 병과 작은 조개가 박힌 ‘빨간 플라스틱 펜대’ 그리고 ‘10개들이 펜촉’을 사다주셨다. 그 필기구들을 책가방에 담아 학교에 가니 만년필이 없다 하여 꿀릴 일은 조금도 없었다. 한 반 60명의 아이들 중 빠이롯트 만년필을 가진 아이는 두세 명, 그보다 좋은 미제 파카 만년필을 가진 아이는 한두 명에 불과했다. 수업이 시작되면 초록색 걸상 위에 책을 펴고, 노트를 펴고, 오른쪽 위에 파란 잉크병을 놓고 그 옆에는 펜대를 놓았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펜촉에 잉크를 찍어 필기를 했는데 문제는, 부산스러운 사내아이들인지라 잉크병을 쏟는 사단이 종종 생긴다는 것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잉크병이 쏟아지면 책상은 난장판이 되었는데, 가장 좋은 해결책은 선생님이 던져주는 백묵이었다. 쏟아진 잉크 위로 백묵을 굴리면 순식간에 잉크를 빨아들여 비록 책과 노트에 온통 얼룩이 남기는 해도 짝꿍이나 앞 친구의 교복에 잉크를 묻힐 일은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용돈을 모으고 모아 중앙전파사(그때는 전파사에서도 만년필을 팔았다)에 가서 로텍스 만년필을 샀는데 800원이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버스요금이 30원 하던 시절이었으나 800원짜리 만년필은 그다지 비싼 것이 아니었다. 국산 빠이롯트 만년필은 최소 2000원이었다. 한때 만년필은 필수품이었으나 이제 시대의 소명을 다한 물건이 되었다. 또 사용하는 주체와 용도도 달라졌다. 학생에서 어른으로 이동했고 ‘필기’에서 ‘부의 과시’로 변한 것이다. 1천만원이 넘는 만년필이 심심치 않게 팔린다는 뉴스를 들으면 그 옛날 펜촉에 잉크를 찍어 공부했던 60년대생의 가난한 자화상이 떠오른다. 그래도 그 시절이 더 아름답고 행복하지 않았던가? 김일은 아버지, 조용필은 형 아름다운 시절에 대해 논하자면 어느 세대가 가장 아름다웠는지 단순비교는 어렵다. 그러나 50년대생은 너무 고달프고, 70년대생은 격변이 사라진 세대였고, 80년대생은 오늘날 88만원 세대가 된 현실에 비추어보면 60년대생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격동적이고, 추억이 많은 세대다. 하지만 추억이 많다 해서 어찌 암울함이 없었겠는가? 10집 건너 한 집의 담벼락에 ‘반공방첩(反共防諜)’이 붙어 있고, 10월 유신과 긴급조치가 사람들의 삶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고,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하면 집에 가지 못하고, 오후 6시가 되면 국기하강식에 걸려 모든 동작을 멈추고 길에 허수아비마냥 우뚝 서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는 태극기에 경의를 표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독재와 압제도 강했지만 일상에서의 흥분도 강했다. 1년에 두어 번 세계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렸는데 전 국민을 흑백TV 앞에 불러모은 주인공은 그 위대한 김일이었다. 레슬링 경기는 이틀에 걸쳐 열렸는데 첫날은 B급 선수들이 싱글매치와 태그매치로 경기를 했다. 우리의 영웅 김일은 반드시 두 번째 날, 마지막 경기의 태그매치에 출전했다. 상대 선수는 대부분 일본, 아니면 미국에서 온 레슬러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흉측하고 반칙만 일삼는 괴기한 ‘놈’들뿐이었다. 복면을 쓰고, 알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고, 심판을 패대기치고, 팬티 속에 흉기(주로 포크)를 감추는 아주 질이 나쁜 놈들이었다. 위기에 몰리면 심판이 안 보는 틈을 이용해 괴춤에서 포크를 꺼내 우리 선수를 마구 찔렀다.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할 무렵 김일이 등장한다. 그가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국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제 니들은 다 죽었어!” 그러나 적들은 여전히 악랄하다. 김일은 코브라 트위스트에 걸리고, 매트에 쓰러지고, 심지어 피를 흘리기도 한다. 모든 국민이 탄식을 내지를 때 김일은 불사조처럼 일어나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상대 선수의 머리를 잡고 한방, 꽝! 박치기를 날리는 것이다. 그 순간 온 나라가 환호성으로 끓어올랐다. 그 이후 2002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 그런 환호성은 우리나라엔 없었다. 그 통쾌함을 간직한 60년대생은 1979년 10·26 이후 길고긴 민주화 투쟁에 들어갔다. 민주화운동은 1950년대 생이 주축이 되어 시작했으나 그것의 열매를 맺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세대는 60년대생이었다. 지금은 그 이름마저 희미하게 잊힌 박종철(1964년생) 고문치사 사건으로 6월 민주항쟁이 절정에 달했고 6·29선언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갑작스레 끝났다. 사실 60년대생의 역사적 소명은 1987년 6월 29일에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쾌함과 더불어 즐거움도 많은 시절이었다. 매우 일요일 저녁 , , 으로 이어지는 골든 트리오 프로그램은 서민들에게 웃음과 격정을 안겨주었다. 1970년대 후반까지 학생들은 한 달에 한 번 단체영화 관람을 했다. 수요일 5교시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에 모여 학생주임 선생님의 훈시를 듣고 3열종대로 줄줄이 극장으로 향했는데 그마저도 없었다면 가난한 집 아이들은 1년 내내 영화 한 번 못 볼 처지였다. 50원을 내고 , , , , 등을 보았는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이소룡 영화였다. 를 보고 온 다음 날이면 막대기 2개를 잘라 쌍절곤이랍시고 만들어서 어설픈 무술을 선보이는 아이들이 꼭 있었다. 1977년 이 대 히트를 치면서 국민가수로 등극한 조용필은 이후 연예인 전성시대를 열었다. 사상 최초로 제주도 사투리를 넣어 을 부른 혜은이는 최초의 여자 국민가수였는데 두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대중문화는 오늘날처럼 활짝 꽃을 피우지 못했을 것이며, 30년 후쯤 등장하는 아이돌 가수들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김추자, 이은하, 최백호, 정태춘·박은옥 등이 있었고 맹인가수 이용복도 잊을 수 없는 명가수다. 60년대 생이 가장 잊을 수 없는 가수는 를 부른 샌드페블즈, 를 부른 활주로,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나 전국을 열풍으로 몰아넣은 산울림이지 않을까? ‘교련’, 그리고 ‘약속다방’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은 흑 아니면 백이었다. 겨울에는 검정 교모에 검정 교복을 입고 검정 운동화를 신었으며, 여름에는 흰색 상의에 회색 바지를 입고 흰색 운동화를 신었다. 교련이 있어서 그나마 옷이 두 벌이었다. 1주일에 두 번 교련 수업을 받고 1년에 한 번 교련검열을 받았다. 대학 2학년까지 교련수업을 했는데 다행인 것은 군대를 3개월 면제해주었다는 점이었다. 그때는 군대가 30개월이었다. 대학생이 되면서는 다방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다방!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단어다. 그곳에는 모나리자를 닮은 후덕한 마담이 있었고 엉덩이를 촐싹거리며 테이블 사이를 누볐던 허벅지 굵은 레지가 있었다. 또 푹신한 안락의자가 있었고 음악이 있었고 뿌연 담배연기가 있었고 매캐한 유황냄새가 있었고 따뜻한 커피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청춘이 고스란히 있었다. 우리는 다방에서 친구를 만났고, 미팅을 했고, 데이트를 했고, 역적모의를 했다. 모든 역사는 다방에서 시작돼 다방에서 끝났다. 테이블 위에 놓인 육각 성냥통에서 성냥을 꺼내 수수께끼를 풀다가 간혹 호기를 부려 레지에게 커피를 사주곤 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마담은 우리가 감히 근접하지 못하는 어른이었다. 대한민국 모든 곳에 있었던 약속다방, 양지다방, 별다방, 난초다방, 호수다방, 궁전다방, 아리랑다방, 아네모네다방... 당신은 분명 이 다방 중 한 곳에서 시간을 때웠을 것이다. 이제 다방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우리세대가 잃어버린 것 중에서 가장 가슴아픈 것이 바로 다방이다. 잃어버린 것은 또 많다. 위문엽서, 채변검사, 도시락검사, 대중가요의 양대 산맥이었던 남진과 나훈아, 오라잇~ 소리를 경쾌하게 외쳤던 버스 안내양, 명랑노래로 전국을 석권했던 듀엣 콤비 서수남과 하청일, 아나운서의 대명사였던 후라이보이 곽규석, 원맨쇼의 왕 남보원과 백남봉, 전 세계 시청률 1위였던 , 20년 넘게 치열한 대결을 펼친 미원과 미풍, 자유를 구가했던 구수한 싱어송라이터 송창식, 유치찬란한 대중통속 잡지의 대명사 , 꿈과 희망을 키워주었던 소년잡지 , 느끼한 목소리로 레코드판을 돌렸던 유리상자 안의 그 남자 DJ(일명 판돌이), 독서의 갈증을 풀어준 마음의 양식 삼중당문고, 70년대 영화계를 이끈 미남과 추남 배우 알랭 들롱과 찰스 브론슨... 이 모든 것들이 시대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들 모두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표한다. 비록 ‘판타레이’ 일지언정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판타레이(panta rhei)’라고 말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뜻이다. 2004년 정계 은퇴를 선언한 JP(김종필)는 김영삼(YS), 김대중(DJ)과 더불어 1980~2000년대를 지배한 이른바 3김 중 1명이었다. 386세대와 떼려야 뗄 수 없었던 JP는 정계를 은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싫든 좋든 세상은 변한다.” 그 변화의 중심에 60년대생이 오롯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름다운 영광이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김호경(金虎卿) 작가 37살의 비교적 늦은 나이인 1997년 제21회 오늘의작가상에 장편 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경희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장편 , , 여행에세이 , , 스크린셀러 , 등을 펴냈다.
- 2015-04-03 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