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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장년 골관절염 환자, 미충족 의료 원인은 '접근성'
- 골관절염(Osteoarthritis)은 삶의 질을 위협하는 대표적인 질환이다. 통증과 보행장애, 운동제한 등 증상이 특징이다. 관절의 연골이 손상되거나 퇴행으로 관절을 이루는 뼈와 인대에 염증과 통증이 생기며 노화로 인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2026년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 ‘초고령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되는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실제로 관절염 환자는 빠르게 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지난 2014년 관절염 환자 수는 440만명에서 2018년 486만명으로 5년새 약 10% 가량 증가했다. 하지만 골관절염 환자들은 보행장애 등으로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증상을 악화시켜 사회경제적 손실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골관절염이 미충족 의료에 미치는 영향과 원인을 밝힌 연구가 나왔다. 미충족 의료란 환자가 의료기관을 찾아 진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지만 다양한 이유로 진료를 받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자생한방병원 척추관절연구소(소장 하인혁) 조후인 한의사 연구팀은 골관절염 환자의 경우 미충족 의료를 경험할 확률이 1.65배 높다고 밝혔다. 그 원인으로는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결과를 확인했다. 해당 연구논문은 ‘BMC 공중보건(BMC Public Health, IF=2.567)’ 6월호에 게재됐다. 연구팀은 골관절염이 미충족 의료에 미치는 영향과 매개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질병관리본부의 2010~2013년 국민건강영양조사(KNHANES) 응답자 중 대상자 1만129명을 선정 및 분석했다. 골관절염 여부 확인을 위해 무릎관절과 엉덩관절, 요추관절 등 세 부위에 *KL grade를 활용했으며, KL grade 2단계 이상일 경우와 통증이 3개월 이상 지속됐다고 응답한 이들을 대상자로 선정했다. *KL grade=엑스레이 사진 상 관절 간격의 감소와 관절의 골극형성이나 연골 손실 등의 이상 소견을 나타내는 지표로 1~4단계(KL grade 1~4)로 분류. 4단계로 갈수록 골관절염의 손상 정도가 심한 것을 의미. 이러한 기준에 따라 연구 대상자는 골관절염 환자군(2782명)과 대조군(7347명)으로 구분했다. 두 군에 대한 미충족 의료 경험을 분석한 결과 골관절염이 없는 대조군은 12.1%(891명)만이 미충족 의료를 경험했으나 골관절염 환자군은 전체의 31.6%(878명)이 미충족 의료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오즈비 값으로 확인한 결과 골관절염 환자군이 대조군 보다 미충족 의료를 경험할 확률의 오즈비 값이 1.65배 높았다. *오즈비 값=집단간 비교시 특정 사건의 발생 가능성 차이가 유의미한지 그 정도를 검증하는 데 사용. 뿐만 아니라 연구팀은 미충족 의료의 원인을 가용성과 접근성, 수용성으로 나눠서 분석하기도 했다. 가용성 측면에서는 공공 보건·보건 의료시설과 의료서비스의 충분한 공급, 이용 가능 여부를, 접근성에서는 모든 이가 의료시설·서비스에 접근 가능한지를 살폈다. 그 결과 접근성으로 인한 미충족 의료가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접근성은 의료보장제도와 교통 편의 등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의료보장제도가 확립돼 있지 않으면 경제적 능력에 따라 미충족 의료를 경험하게 된다. 교통 편의성이 떨어질 경우 노인과 장애인 등 이동에 불리함을 가지는 계층에게 문제가 될 수 있다. 미충족 의료의 원인 중 큰 영향을 끼친 접근성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교통수단 부족에 따른 활동제한의 매개효과가 23.9%로 가장 높았다. 이번 연구를 통해 골관절염이 미충족 의료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그 과정에는 활동제한이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연구팀은 밝혔다. 활동제한은 현재 건강상의 문제나 신체 혹은 정신적 장애로 일상생활 및 사회활동에 제한을 받는 상태다. 자생한방병원 조후인 한의사는 “골관절염은 인구 고령화에 따라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질환이며 보행장애등으로 인한 삶의 질을 악화시킨다. 뿐만 아니라 의료기관을 찾는 데도 어려움을 준다”며 “이번 연구 결과는 골관절염 환자의 의료 서비스 접근성을 개선할 수 있는 정책 결정에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2020-08-10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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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휴가철 느긋하게 펼쳐보는 신간!
- # 차의 시간을 걷다 (김세리 외 공저·열린세상) 5000년에 걸친 동아시아 차 문화의 역사를 향긋하고 산뜻하게 풀어낸다. 고전에서 낭만, 실용의 시대까지 차의 시대별 변천사를 다양한 문헌과 회화로 소개한다. # 나이 따위, 잊고 살랍니다 (시모주 아키코 저·이터) 왕년에는 아나운서로, 현재는 일본여행작가협회 회장으로 활동 중인 82세 저자의 유쾌한 에세이. 나이에 얽매이지 말고, 하고픈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아갈 것을 제안한다. # 황야의 이리 (헤르만 헤세 저·을유문화사) 자아를 찾아 끊임없이 방황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 전후 사회에 대한 헤세의 인식이 고스란히 담긴 자전 소설로, 그의 사상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 퀸 메릴 (에린 칼슨 저·현암사) 최고의 배우이자 어머니인 메릴 스트립의 삶을 조명한다. 치열한 할리우드 생존기부터, 인생을 바라보는 가치관까지 '철의 여인'의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 노화의 종말 (데이비드 A. 싱클레어 외 공저·부키) 노화는 정상이 아닌 질병이다? 장수 분야 세계 최고 권위자가 노화의 비밀을 밝힌다. 인간을 늙게 하는 한 가지 원인과 획기적인 장수 비법을 공개한다. # 하루 여행 하루 더 여행 (최갑수 저·보다북스) 여행작가 최갑수가 직접 다녀온 국내 여행지 50곳을 테마별로 소개한다. 모든 코스는 당일치기 또는 1박 일정으로 긴 여행이 어려운 현대인의 맞춤형 여행서다.
- 2020-08-0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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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이야말로 영혼의 움직임이다"
- 재즈를 아는 이가 드문 시절이었으니 당연하게도 물심양면의 외로움이 많았겠다. “아예 무대를 얻지 못해 무교동 주점을 찾아가 무료 연주를 자청하기도 했다. 근데, 그냥 가라 하더라고. 재즈는 필요 없다는 거였다.(웃음) 집에선 와이프의 원성이 자자했지. ‘제발 월급이라는 걸 가져와보라’고 다그쳤다. 결국 TBC(과거 동양방송)의 ‘이봉조 악단’이나 KBS ‘길옥윤 관현악단’에 들어가 일하며 월급을 받았지. 그러나 허구한 날 가수들의 반주나 하자니 자존심이 상해 견디기 힘들더라고.” 결국은 뛰쳐나왔다는?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베이시스트로 꼽히는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는 한동안 활동을 중단하고 우체국 직원으로 살았더군. 그는 예술적 자존심의 손상을 감내하면서까지 클럽의 주정뱅이들을 상대로 연주하긴 싫었던 거다. “재즈 뮤지션들은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다. 그런데 나에겐 삶의 자유보다 더 지배적인 욕망이 있었다. 나만의 연주 스타일을 확보하고 싶다는 거! 그러자면 맹렬한 연습이 필요했다. 방송국 악단을 뛰쳐나온 건 월급봉투보다 연습을 통한 기량 향상이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게 재즈 뮤지션의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기도 했다.” 내심 독을 품은 연습벌레로 살았다는 얘기이겠다. 엉덩이가 물러터지도록 내내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난타하고, 그러다 지겨워 마신 술에 취해서도 두드리고, 재즈 LP를 들으며 채보(採譜)를 하고, 필이 떠오르면 작곡을 하고…. 그는 피아노에 육신을 내던지는 부단한 연습과 학습으로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져나갔다. 그리고 실존적 경제적 기반 확보를 위한 하나의 유력한 조치를 취했다. 서울 홍대 앞에 재즈클럽 ‘문 글로우’(Moon Glow)를 차렸던 것. 이곳은 신관웅이 주도해 만든 빅밴드(열 명 이상의 뮤지션으로 편성한 앙상블 형태의 밴드)의 주둔지였다. 김준(보컬), 김수열(색소폰), 강대관(트럼펫), 류복성(봉고), 이판근(베이스), 조상국(드럼), 홍덕표(트롬본) 등 신관웅과 함께 미8군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1세대 재즈 뮤지션들이 참여했다. 다시 말해, ‘문 글로우’는 한국 재즈의 요람이자 플랫폼이었다. “‘문 글로우’에선 날마다 공연이 펼쳐졌다. 재즈 마니아들이 즐겨 찾아들면서 명소로 부각됐고. 그러나 운영난에 봉착하게 되더군. 임대료조차 감당하기 어려워 폐업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지. 그러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언론들이 보도를 하고, ‘문사모’(문 글로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후원모임이 지원을 해 간신히 지속해나갔다. 하지만 결국은 문을 닫았다. 개업 15년 만에.” 폐업에 이른 동인은 재즈가 대중화하지 못한 탓? “그렇다. 사람들은 재즈를 낯설어한다. 어렵다고들 투덜거린다. 이건 과거나 요즘이나 마찬가지다.” 요즘도? 비주얼과 스펙을 겸비한 젊고 유능한 재즈 연주자들이 속속 등장하는데도? “재즈 연주자는 시중에 넘치지만 감상자들은 밋밋하게 증가했을 뿐이거든. 아이돌 뮤직과 트로트의 돌풍을 보라. 대중을 모조리 쓸어가는 게 아닌가. 재즈는 여전히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어떤 방법으로 활로를 찾을 수 있다고 보나? “재즈의 본질적 성향인 클로스오버로 파고를 넘어서야 한다. 난 이미 오래전부터 재즈와 국악을 접목한 공연을 시도해왔다. K-재즈! 여기에 답이 있다고 보는 거다. 재즈란 원래 흑인들의 한을 정서적 근간으로 한 장르다. 국악 역시 한을 정조로 하기에 양자의 결합은 절묘한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거든. 국악+재즈 빅밴드를 결성하는 게 나의 꿈이다.” 재즈의 모든 기법 구사해 신관웅의 재즈 인생 고백엔 낙심과 낙관이 교차한다. 번번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무대에 섰던 기억은 악몽처럼 쓰라리나 값진 단련의 기회였다고 한다. 검불 몇 조각 펄럭이는 황무지와도 같았던 한국의 척박한 재즈 토양에 씨를 뿌렸다는 자부심은 노년의 그에게 정당성을 제공한다. 하여, 그는 자신에게 여전한 현역의 자격을 부여한다. 그의 재즈 선율에는 이와 같은 긍정과 자신감 또는 가라앉지 않은 갈증의 심상이 아롱질 터다. 서정적인 멜로디, 수려한 레가토주법(둘 이상의 음을 사이가 끊어지지 않도록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하는 주법), 호쾌한 건반 두드림, 그리고 ‘끼’의 분출에 의한 쇼맨십까지, 신관웅의 연주엔 재즈의 모든 기법들이 동원된다. “서정적인 면과 폭발적인 면, 나는 이 둘의 조화로운 표출을 연주 목표로 삼아왔다. 그런데 나이 들면서 좀 변하더라. 과거엔 기법 중심의 화려한 연주였다면 요샌 감성의 흐름을 중시해 다분히 정적이거든.” 심금을 울리는 음악은 영혼을 다한 자만이 가능하다지? “내 안에도 한이라는 게 있다. 한이야말로 영혼의 움직임이지 않을까? 나는 낱낱의 음에 한의 정서를 실어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기를 갈망한다.” 재즈 정신에는 사회모순과 금제에의 도전이라는 측면도 있다. 일단의 재즈 뮤지션들은 자유를 숭상하는 아웃사이더이기도 했다. 당신의 성향은 어떤가? “내가 생각하는 현대 재즈는 하나의 독특한 제도권 문화다. 청중과 교감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하고도 강력한 장르이기도 하다. 더 넓게 보자면 인격 완성의 수단이기도 하지. 알다시피 재즈는 즉흥연주를 기본으로 삼는다. 하지만 밴드 멤버들 각자의 선율이 어울려 고도의 하모니를 이루지 않고선 성립할 수 없는 음악 행위다. 즉, 연주곡 하나하나가 모두 인격체의 산물인 거다. 나의 성향? 둥글둥글하다. 꽤나 온화하거든. 뭐 과음을 즐기는 버릇이 있긴 하지만 취중에도 모난 짓을 하진 않는다.(웃음)”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지? “나를 내려다보시는 신의 눈길을 가끔 느낀다. 한번은 재즈 성가를 녹음했는데, 일을 마치고 보니 녹음의 절반이 날아갔더라. 기술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대번에 영감이 떠오르더군. ‘넌 아직 멀었다! 어디서 감히 성가를?’ 그런 하늘의 음성을 들은 기분이었다.” 어디서 감히! 신의 음성이 아니더라도 가슴을 치는 일갈이다. 나 잘난 ‘자뻑’도, 카랑카랑한 논리도 지나치면 실족한다. 신관웅의 개성이라면 그저 무덤덤한 유연함? 이는 ‘어디서 감히!’의 진실을 알고 사는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절제의 폭을 웅변할지도.
- 2020-08-0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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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의 불청객 '대상포진' 피하려면?
- 여름철이면 해마다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있다. 수두바이러스에 의한 대상포진은 7~8월에 가장 많이 발생하는 대표적인 여름병이다. 올해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스트레스와 악화된 기상이변으로 대상포진 환자가 역대 최고치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년월별 통계에 따르면 대상포진 환자는 해마다 증가해 2019년에는 연간 약 95만 명이 진료를 받았다. 발생 추이로는 매년 8월에 가장 많이 발생했고 2018년 8월 9만 명을 돌파한 이후 지난해 8월에도 9만2000명을 기록하며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50대 이상 여성에게서 급격히 증가해 면역력 관리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방치시 심각한 후유증 발생 우려 대상포진은 몸의 좌우 중 어느 한쪽으로 일정한 부위에 통증이 나타나고, 1~3일 후 붉은 반점이 생기면서 여러 개의 물집들이 무리지어 발생하는데 대상포진(帶狀疱疹)이라는 이름도 이 같은 모양에서 지어진 것이다. 수포들은 노란 농포로 변하다가 딱지가 생기는데 치료에는 대략 2-3주의 기간이 걸린다. 주로 가슴과 등 쪽에 발병이 많으며 얼굴이나 팔, 다리, 두피 등 신체 전반에 걸쳐 발생할 수 있다. 서울척병원 내과 이승훈 과장은 “젊은 사람들의 경우 단순 근육통이나 두통으로 인식하기도 하고 벌레에 물렸거나 가벼운 피부질환으로 생각하며 방치했다가 만성 신경통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다”며 “몸살이나 통증과 함께 특정부위에만 피부증상이 나타나면 빨리 병원을 방문해 정확한 진단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상포진은 발병 후 72시간 내에 치료가 이뤄지는 게 좋다. 치료는 항바이러스제를 복용하거나 주사한다. 치료시기를 놓치면 바이러스가 중추신경까지 침범해 수개월에서 1년 이상 통증이 계속되는 후유증이 발생할 수 있다. ◇재발위험 있으니 예방접종 받아야 대상포진은 예방접종으로 60% 정도 예방이 가능하며 발병하더라도 ‘대상포진 후 신경통’과 같은 합병증의 발생위험을 낮춰 대상포진으로 인한 질병부담을 감소시킬 수 있다. 60세 이상 성인은 예방접종이 권고되고 있으며 만 50세 이상에서도 대상포진이나 포진 후 신경통에 민감할 가능성이 높다면 의사의 판단 아래 접종을 받을 수 있다. 평생 1회 백신을 접종 받는데 이미 걸렸던 사람도 재발위험이 있으므로 예방접종을 받는 것이 좋다. 다만 치료 후 최소 1년이 지나야 하니 전문의와 상의해야 한다. 무엇보다 신체 면역력 관리가 중요한데 평상시 스트레스와 피로를 줄이고 균형 있는 생활을 해야 한다. 특히 여름철 과도한 활동과 흡연 및 음주도 면역력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 2020-08-03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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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후 준비에 대한 인식 확산이 필요한 시대
- 은퇴 후에도 능동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노년층을 의미하는 액티브 시니어가 최근 사회적으로 큰 이슈다. 지난 5월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은 액티브 시니어를 우리말로 바꿔 ‘활동적 장년’으로 선정했다. 런던대학교 경영대학원 MBA 과정 수업 도중 한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했다. “당신이 100년 산다고 가정할 때, 소득의 약 10%를 저금하고, 최종 연봉의 50%를 가지고 은퇴할 수 있는 시점은 언제인가?” 학생들은 곧바로 계산을 했다. 답은 80대였다. 일순간 강의실은 조용해졌다. 80대까지 지금과 같은 업무 강도로 일해야 한다니…. 런던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 린다 그래튼과 앤드루 스콧이 함께 쓴 ‘100세 인생- 저주가 아닌 선물’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장수시대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오고 있다. 교육-일-퇴직으로 이어지던 전통적인 3단계 삶의 모습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앞으로는 은퇴와 정년이라는 개념이 없어지고 70세 혹은 80세까지 일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지금의 나이가 몇 살이든 우리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다. 새로운 시대를 선도적으로 살아가고 제2의 청춘을 즐기는 액티브 시니어처럼 다가오는 노년의 꿈을 계획하고, 노후를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액티브 시니어는 누구인가? 은퇴 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100세 시대, 아무 준비 없이 은퇴하기엔 여생이 너무 길다. 은퇴 후 노후에 대한 청사진이 필요하다면,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액티브 시니어를 롤 모델로 추천한다. 액티브 시니어는 미국 시카고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버니스 뉴가튼이 “오늘의 노인은 어제의 노인과 다르다”고 말하며 만들어낸 신조어다. 뉴가튼 교수는 55세 정년을 기점으로 75세까지를 젊은 노인(young old)으로 구분했다. 액티브 시니어들은 은퇴 후에도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세대로 가족 중심에서 벗어나 자기중심의 삶을 영위하면서 자기개발과 여가활동, 사회적 관계 맺기 등을 적극적으로 한다. 기존의 시니어가 노년을 인생의 황혼기로 인식했다면, 액티브 시니어는 노년기를 새로운 인생의 시작으로 생각한다. 자신이 실제 나이보다 5~10년 젊다고 생각하고, 진취적으로 삶을 사는 세대다. 액티브 시니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액티브 시니어의 공통점은 자신이 무엇을 했을 때 행복한지 알고 노년의 삶을 준비한다. 다시 말해 미래의 삶에 대한 자기 기준이 명확하게 정립돼 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길거리 화가가 된 60세 여성, 의상 공부가 하고 싶어 다시 대학을 간 80세 여성, 40세에 사진을 취미로 배워 10년 후 프랑스에서 전시회를 연 50세 남성, 자식을 다 키우고 60세에 요식업을 시작한 남성 등, 이들은 은퇴를 제2의 인생 시작점으로 설정했다. 은퇴 이후의 삶을 자녀 세대에 의존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과 배움을 통해 스스로 노후를 대비했다. 이들은 못다 이룬 꿈을 성취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꿈이 반드시 거창해야 하는 건 아니다.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면서 만족감과 행복감을 얻는 이들은 항상 활력이 넘친다. 그래서 액티브 시니어라 부른다. 시니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액티브 시니어들처럼 노후를 잘 준비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노후를 아직 준비하지 못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지난 5월 ‘하나금융그룹 100년 행복연구센터’에서 발간한 보고서 ‘대한민국 퇴직자들이 사는 법’에 따르면, 퇴직자의 평균 생활비는 월 252만 원이다. 또 대부분의 퇴직자들이 경제활동을 못하면 1년 내 형편이 어려워질 것을 걱정했다. 이분들께 눈높이를 낮춰서라도 현금 흐름을 유지할 것을 권유한다. 재취업이나 소자본 창업, 주택연금 등을 통해 소득을 유지하는 다양한 방법도 있다. 아직 퇴직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노후 준비를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다. 다가오는 미래는 먹고만 사는 시대가 아니다. 보다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노후를 위해서는 소득, 취미, 일자리, 관계, 건강 등 행복을 주는 요소들이 골고루 갖추어질수록 좋다. 자신만의 삶의 기준들을 정하고 장기적으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행복만큼이나 미래의 행복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노후 준비 Early Design, Self Planning! 고령화가 심각해질수록 사회적으로 노인 문제도 점점 커질 것이다. ‘100세 인생’을 한 편의 드라마로 보면 주인공의 행복과 불행은 결국 작가이자 감독인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시니어 당신에게 무엇을 준비했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제대로 예측하고 준비한다면, 장수는 저주가 아니라 선물이고 축복이다. 주체적으로 제2, 제3의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 주위를 살펴보면 노후 준비를 위한 다양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보건복지부 후원으로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가 주최하고 ㈜드림업컨설팅이 주관하는 ‘2020 해피에이징 교육캠페인’도 그중 하나다. 노후준비문화 확산을 위해 액티브 시니어를 주제로 진행 중인 ‘해피에이징 교육캠페인’은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가 올해로 6년째 진행하는 무상교육 프로그램이다. 사회공헌적 취지에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초고령사회에 대비할 수 있도록 노후 준비의 중요성을 고취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초고령 사회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개인 스스로 노후를 대비해 ‘Early Design, Self Planning’하는 것이다. 노후 준비에 대한 인식의 확산이 필요한 시대다. 지금 당장 준비해야 늦지 않다. 당신도 액티브 시니어가 될 수 있다.
- 2020-07-30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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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 이황과 14대 후손 이육사
- 안동 도산서원을 방문한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안동 시내에서 35번 국도에 올라 도산서원 이정표를 따라 달린다. 도로 오른쪽으로 낙동강 줄기를 이루는 안동호를 끼고 돌다 보면 마치 물 위를 달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 안동호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가르며 마치 신선 물놀이하듯 안개 낀 안동호를 따라 도산서원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갔다. 비가 오는 날은 문화재를 방문하기 좋은 날이다. 평소 왁자지껄한 소음 없이 호젓하게 거닐며 옛 역사를 음미하며 앞으로의 발걸음을 다잡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관광버스 한 대 없다. 오늘의 방문은 무척 만족스러울 듯하다. 입구로 들어가는 길도 오가는 이 없이 고즈넉하게 우리를 맞았다. 지금에야 이렇게 길이 넓었지 퇴계 이황 선생에게 수학하던 서생들은 좁다란 오솔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렇게 학문에 정진했을 모습을 생각하니 참 편한 세상에 산다는 미안함이 든다. 도산서원 입구 오른쪽 강 건너에 작은 정자가 보인다. 안동호로 흐르는 물길 가운데에 있는 작은 정자다. 섬이라 하기에는 작지만 달리 뭐라 부르기도 애매하다. 이 정자가 잘 보이는 곳에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는데 시사단(試士壇)이라 불린다. 1792년 음력 3월에 정조가 도산서원에서 치른 과거시험을 기념해 단을 쌓고 전각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당시 과거에 응시한 이가 너무 많아 장소를 도산서원으로 하지 못하고 그 아래 낙동강 모래강변에서 시험을 치렀다는데 답안지를 제출한 사람만 3632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오늘날 공무원 시험에 너도나도 몰빵하는 모습과 오버랩된다. 시사단으로 가려면 서원 앞 강가로 내려가 나룻배로 건너야 한다. 마을 주민들이 순번을 정해 배를 운행한다는데 비가 내리는 평일이라 그런지 배는 있는데 사공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서원만 보고 가야 할 듯하다. 소수서원이 평지에 세워졌다면 도산서원은 산자락에 위치해 있어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차례로 건물들이 놓여 있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동쪽은 퇴계 이황 선생이 직접 건축해 학생들을 공부시키던 서당이다. 그 옆 싸리문은 아직도 보존돼 있다. 이황 선생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매일 이 싸리문을 밀치고 마루에 올랐을 것이다. 이 문은 유정문으로 불리는데 ‘그윽한 곳에서 수도하는 사람은 바르고 길할 것’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한국의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부쩍 서원을 찾는 관광객이 많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서원의 핵심 공간이라 할 강학당인 전교당이 현재 보수 중이라 진입이 금지돼 있다. 전교당 현판은 선조의 명령으로 한석봉이 직접 썼다는데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도산서원을 느긋하게 살펴보고 나왔지만 사실 오늘 방문의 주요 목적지는 인근에 위치한 이육사 문학관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으로 나오면 퇴계 종택과 이육사 문학관 가는 길 이정표가 나온다. 이육사 본명은 이원록이며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아래는 두산백과가 이육사를 설명해놓은 글이다. “육사(陸史). 본명 원록(源祿).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 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때의 수인번호가 264. 이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썼다. 또한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시 ‘청포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인 1944년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했다. 이육사가 죽은 후, 1년 뒤에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었다. 그 후, 1946년 신석초를 비롯한 문학인들에 의해 유고시집 ‘육사 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고, 1968년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에 육사 시비(陸史詩碑)가 세워졌다.“ 이육사가 이황 선생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학교에서 배웠던가? 선생의 독립운동 여정을 자세하게 배운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오로지 떠오르는 것은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시작되는 ‘청포도’라는 시 구절뿐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빗줄기가 휘몰아쳐 잠시 고민을 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하고는 문학관을 향해 차를 몰았다. 경북 안동에 위치한 이육사 문학관은 산속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2층 건물이다. 잠깐 돌아보고 오자 했던 계획은 어둑해져서야 끝이 났다. 문을 닫을 때까지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며 머물렀다. 우리 일행은, 격렬했지만 여리고 순수했던 이육사의 삶의 흔적을 느끼고 그가 남긴 작품들을 돌아보며 마치 질풍노도의 시대를 보냈던 20대 초반으로 다시 돌아간 듯 흥분하고 목메면서 이육사의 삶을 하나하나 경험했다. 이육사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할머니(80)가 기억하는 아버지 이육사의 모습은 어땠을까? 헤어질 때 3세에 불과했으니 기억이 없는 게 당연할 텐데 어떤 한 순간이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 아버지를 기억한단다. 1943년 아버지가 구속돼 베이징으로 압송되던 날이었다. 포승줄에 두 손이 묶이고 용수(죄수의 얼굴을 볼 수 없게 싸리나무로 만든 둥근 통)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푹 가린 아버지가 건넨 마지막 말, "아버지 다녀오마." 올 초 방영된 MBC 예능 프로그램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에서 안동 이육사 문학관을 찾아 이옥비 할머니를 인터뷰한 영상이 있다. 유튜브에 이 영상이 남아 있어 가끔 들어가서 본다. 문학관에서 선생의 유품들을 돌아보자니 유일한 혈육이었던 딸아이를 용수 속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졌을 아픔이 전해진다. 문학관은 선생의 작품들을 연대기별로 정리하고 전시해놓았지만 작품 활동보다 더 치열했을 독립운동에 대한 기술도 잘돼 있다. 특히 이육사 선생이 당했던 처참했던 고문 현장과 피로 얼룩진 도포, 감옥 수감 도구들도 전시돼 있어 악랄하고 광폭했던 일본 경찰의 만행을 느낄 수 있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던 이육사의 작품들은 시와 평론, 시나리오까지 다채롭게 정리돼 있다. 마지막까지 죽음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지켰던 이육사. 그를 청포도의 시인으로만 기억해왔던 이가 있다면 지금 당장 안동으로 달려가 그의 문학관을 방문해봐야 한다. 연대기로 서술돼 있는 각종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며 가슴이 먹먹하다 못해 목이 메어오는 뜨거운 경험을 하게 될 터이니.
- 2020-07-21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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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의 인연으로 재취업의 터전을 일구다
- 광주 민주화 항쟁 당시 진압군 헬기 사격으로 245개의 탄흔이 발견된 전일빌딩 5층에서 정동한(55세) 씨를 만났다. 2019년 8월부터 AI 콘텐츠 기업지원센터 스타트업팀 수석으로 근무 중인 그는 2030 젊은이들과 함께 당당하게 일하고 있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내내 쑥스러워했다. 정동한 씨의 방황은 45세에 시작됐다. 그리고 고비 때마다 그에게 위안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곳은 노사발전재단 광주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였다. 센터와의 인연이 벌써 10년이 됐고, 이곳에서 그는 자신만의 경쟁력을 찾았다. 일이든 사람이든 인연이 아니면 어찌할 수 없었다. 인연이 되려면 어느새 곁에 와 있었다. 물론 그 인연을 발견하는 안목은 스스로 키워야 했다. 점점 더 어려워진 회사, 퇴직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다니던 회사의 사정이 나빠지기 시작했을 때 당장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 할 정도로 경영 상태가 안 좋았지만 경영정보 총괄 책임자로서 기업전산을 담당했던 그는 쉽게 발을 뺄 수 없었다. 한동안의 방황 끝에 결국 퇴직을 선택했다. “금방이라도 재취업이 될 줄 알았어요. 그때는 제가 아직 젊은 나이(45세)였으니까요. 어딘들 갈 데가 없을까 하는 자신감이 있었죠.”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어느 곳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는 점점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고,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 노사발전재단 광주중장년일자리센터였다. “처음에는 그곳에 가본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냐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하나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조금씩 자신감도 생기고 위안이 되더라고요. 스스로에 대한 신념도 잃지 않았죠. 마음치유가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10년 인연의 시작이었다. 이명숙(현 노사발전재단 광주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소장) 컨설턴트는 심리상담을 통해 그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었고 직업 검사, 교육 안내와 함께 직업 매칭까지 해주며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노사발전재단의 지속적인 관심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졌는데 처음에는 대부분의 면접에서 떨어졌어요. 나이 때문이었죠. 어렵게 잡은 직장에서는 그동안 해오던 업무와는 전혀 다른 일을 해야만 했어요. 힘들어서 그만두었죠. 아마 지금 같았으면 극복하고 그 일을 했을 거예요.”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지난 10년간의 치열했던 시간들이 느껴졌다. 힘든 과정들을 거치며 전직에 대한 의욕이 점점 떨어지자, 그는 차라리 창업을 준비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명숙 컨설턴트는 창업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면서 상황이 어려워도 좀 더 시간을 두고 준비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가장으로서 당장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급함이 밀려왔고 그 절박함이 그의 귀를 막았다. 지금이라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후 창업을 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러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결국 2년 만에 사업을 접어야 했습니다. 교육 콘텐츠 사업과 학원 운영을 동시에 했는데 과도한 투자와 시장조사 없이 시작한 게 원인이 됐습니다. 학생만 관리하면 될 줄 알았는데 학부모 관리가 더 중요한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모든 게 쉽지 않았죠. 게다가 경쟁업체까지 생겨나는 바람에 폐업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방황은 짧았다 폐업 후 한 달 동안은 이런저런 후회와 절망 속에서 지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다잡은 그는 다시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를 찾았다. 회사에서 퇴직하고 방황할 때 따뜻한 손길을 내어주던 곳, 창업하려고 할 때 말렸던 컨설턴트의 말이 생각났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전히 그곳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는 이들을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는 자체만으로 그에게 위안이 됐다. 이번에는 무모함에서 빚어졌던 첫 실패를 경험 삼아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갔다. 힘든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고,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구직 활동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고, 이후 직업 매칭도 이뤄졌다. 그동안의 경력이 쓸모없어졌다고 낙담하던 그에게 관련된 일을 함께 찾아보자며 힘을 불어넣어줬다. 달랑 하나였지만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이 그에겐 있었다. 정보 분야의 업무를 찾았고 다행히 취업이 되었다. 집에서 두 시간 거리의 선거관리위원회가 새로운 일터가 됐다. 출퇴근에 소요되는 시간과 급여 액수에 연연하지 않고 경력을 쌓는다는 생각으로 일에 전념했다. 계약기간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짧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그를 자극했고 게을렀던 지난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첫 직장에서의 정년은 생각도 안 하고 살았습니다. 퇴직은 남의 일처럼 여겼죠. 한창 일할 나이에 직장을 잃는 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인데 말이죠. 그래서 40대부터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합니다.” 4개의 자격증에 도전, 재취업 성공 새 일터에서 그는 4개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빅데이터, 디지털 포렌식, 통계(사회조사분석), 정보보안 관련 자격증들이었다. “시험을 보러 가면 다들 젊은이들이었어요. 나이가 많아봐야 30대? 50대는 저밖에 없더라고요. 합격은 했지만 뒤늦게 공부하면서 정말 힘들었어요.” 하지만 그는 목표를 끝내 이뤘다. 올해부터는 인공지능 분야를 공부하고 싶어 대학원을 다닌다고 했다. 일에 대한 열정과 자기 계발에 쉼이 없었다. 선거관리위원회 업무는 얼마 동안 연장됐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계약 만료 후 실업급여 교육장에서 그는 이명숙 컨설턴트와 다시 만났다. “2019년 8월 정보문화산업진흥원에 입사 지원서를 내고 젊은 사람들과 경쟁해서 당당하게 합격했습니다. 제가 가장 나이 많은 합격자입니다.” 그동안 취득한 자격증과 경력을 쌓기 위한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현재 40개 기업을 관리하며 4차산업 관련 기업 육성, 중장년 1인 창조기업 투자 컨설팅, 일자리 창출 등의 업무를 맡고 있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를 찾았던 그가 10년이 지난 지금에는 중장년의 창업과 일자리를 컨설팅하는 일을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준비되어 있으면 문이 열린다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두드리지도 않는데 문이 저절로 열릴 리가 없잖아요.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를 비롯해 시 또는 나라에서 운영하는 시설을 잘 활용하면 재취업의 길을 찾을 수 있어요. ‘과연 도움이 될까?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나?’ 하면서 자기만의 사고에 갇혀서 참여를 꺼리는 경우가 많은데 잘못된 선입견입니다. 문을 두드려 그 안에 들어가면 많은 정보와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기회를 찾는 노력은 해야죠.”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중장년들에게, 그 길을 걸어온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물었다. 그가 명쾌하게 답했다. “퇴직 후의 사업은 말리고 싶어요. 반드시 해야겠다면 최소한 2년 정도의 준비기간을 갖길 권합니다. 우리나라의 창업 시스템은 잘되어 있는 편이니 적극 활용하면서 절차에 따라 신중하게 창업하면 됩니다. 그동안 일해온 분야와 연결되면 더 좋습니다.” 그는 재취업을 원한다면 자존심을 버리라고 조언했다. 취직이 될 때까지 이력서를 쓰고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을 파악해 거기에 알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보를 많이 찾아보고 노력을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는 문이 열릴 것이라고 힘을 실어 말했다. 창업과 기업지원 등에 관해 의문이나 도움을 구하고 싶으면 광주 1인 창조기업 지원센터/중장년기술창업센터에 문의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자신을 찾아와도 된다고 흔쾌히 말하는 그의 얼굴에서 일에 대한 자신감과 중장년의 고충을 이해하는 선배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 2020-07-21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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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를 숙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 시대를 앞서간 명사들의 삶과 명작 속에는 주저하지 않고 멈추지 않았던 사유와 실천이 있다.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유와 사랑과 우정 이야기가 있다. 그 속에서 인생의 방향을 생각해본다. 이번 호에는 독일 통일을 이끈 빌리 브란트를 소개한다. 역사의 명장면 중 하나를 꼽으라면,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를 떠올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를 맞으며 무릎을 꿇은 채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모습을 전하며 헝가리의 뉴스 캐스터는 “무릎을 꿇은 것은 브란트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민족이다”라고 말했다. 미리 계획된 행위도, 참모들이 급히 짜낸 전략도 아니었다. 왜 무릎을 꿇었느냐는 질문에 브란트는 “헌화를 하는 순간 머리를 숙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고 고백했다. 나치 강제수용소 생존자였던 폴란드 총리는 그날 브란트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성찰과 참회의 힘 아무도 예상 못했던 일이었다. 빌리 브란트의 이른바 ‘무릎 사과’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하지만 그의 나라 서독에서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2년 뒤 치러질 뮌헨 올림픽을 앞두고 유대인들과 동구권 국가들을 의식한 행위라는 비판도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일인들은 하층민 출신인 그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생아’라는 출생 배경은 사람들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렸다. 1913년 독일 북부 뤼벡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Herbert Ernst Karl Frahm). 빌리 브란트라는 이름은 히틀러의 독재에 맞서 투쟁할 때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가명이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미혼모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람’이라는 이름은 그를 비하하고 비방하려는 정적들에게 종종 불려나오곤 했다. 그 때문일까.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한 이후 그는 더 이상 본명을 쓰지 않았다. 정치 망명객으로 지냈던 과거도 그를 꽤나 힘들게 했다. 사회민주당 청년당원으로 활동하다 게슈타포의 표적이 된 그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나치 정권에 대항했다. 1938년에는 국적을 박탈당해 노르웨이 국적을 취득했는데 이때의 이력으로 ‘어려운 시절 조국을 버린 배신자’라는 공격을 받아야 했다. 특히 보수 언론과 그와 경쟁 관계에 있던 정치인들은 노르웨이 군복을 입고 나치 독일에 대항했던 과거를 들먹이며 그를 코너로 몰아붙이곤 했다. 하지만 여러 난관 속에서도 브란트는 정치가로서 성공했다. 1949년부터 1992년 사망할 때까지 의원, 시장, 외무부장관, 총리를 역임했고 정파를 떠나 국민과 국익을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로서 신뢰도 얻었다. 1971년에는 동·서독 화해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도 수상했다. 평화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빌리 브란트가 이처럼 화려한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미·소 냉전시대의 긴장 완화를 위한 ‘동방정책’(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화해 정책)을 펼치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는 ‘갈등과 대립’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정치란 체제와 이데올로기가 아닌 인류와 평화에 기여할 때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대화를 통한 협상은 그가 추진했던 동방정책의 핵심이었다. 그 결과 1969년부터 1974년까지 그가 이끌었던 서독 정부는 소련을 비롯해 동유럽 국가들, 그리고 동독과 화해와 협력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브란트는 권력자가 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보이는 어떤 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문제가 생기면 오래 고민하고 가능한 한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좋아했다. 그래서 종종 동료들로부터 “커브 길만 나타나면 차를 조심스럽게 운전하는 노인”과 같다는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브란트는 자신의 정치 스타일을 고수하며 뚜벅뚜벅 걸어갔다.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며, 더 궁리하고 관찰하면서 합리적인 방법들을 찾아내려 애썼다. 그리고 더 많은 민주주의가 감행되기를 바랐고 더 많은 자유를 제공하고 더 많은 공동 책임을 요구하는 사회를 원했다. 한 인간으로 볼 때 그는 약점투성이의 인물이었다. 쉽게 상처받고, 예민했고, 갈등을 싫어했다. 누구에게 속마음을 잘 보여주지도 않았고, 더러는 사생활 문제로 참모들의 속을 썩이기도 했다. 이러한 약점들이 오히려 위대한 정치가가 되는 데 특별한 거름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정치에서는 언제나 이길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평화정치를 구현하겠다는 의지는 결코 내려놓지 않았다. 그는 한 연설을 통해 말했다. “평화가 전부는 아닙니다. 하지만 평화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던 해, 브란트는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독일 통일이 언제 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을 받고 “내가 살아 있을 때는 보기 힘들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보름 후 장벽은 무너졌다. 우리의 38선은 어떤가. 최근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소식이 들려왔다. 다시 캄캄하다. 그래도 어느 날 벼락같은 큰 소식을 듣고 싶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을 때 “원래 하나였던 것은 함께 자라야 한다”고 분노했던 빌리 브란트는 1989년 장벽이 무너지자 “원래 하나였던 것이 이제 함께 성장하게 됐다”는 말로 자신의 연설문을 완성했다. 동방정책을 선언한 지 20년 만이었다.
- 2020-07-2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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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자 활용한 코로나시대 노년층 운동법
-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집 안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노년층의 건강관리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실내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상대적으로 외부 활동이 줄어들면서 근감소증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상황이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국내 고령자 5명 가운데 1명은 근감소증 수준을 겪고 있다. 또한 경희대학교병원 가정의학과 원장원 교수 연구팀은 한국노인노쇠코호트(KFACS)에 참여한 국내 70~84세 고령자 2123명(남성 1070명·여성 1053명)을 분석해 이 같은 사실을 보고했다. 원장원 교수는 “근육량이 줄면 낙상과 골절 위험은 물론 면역력이 약해지고 신체기능 저하에 따른 사회적 장애, 당뇨병, 실혈관질환 등의 발생 위험도 덩달아 높아질 수 있다”며 “건강한 노년을 맞이하려면 근육량·근력 관리에 신경 써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근육량과 근력을 키우려면 단백질 섭취와 규칙적인 운동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와 함께 어르신들은 실내에서 의자 등을 활용해 다리 근육을 단련하는 운동을 소개했다. 이 운동은 의자 뒤를 잡고 서서 다리를 천천히 옆으로 올리거나 발뒤꿈치를 들고 발끝으로 서서 1초간 유지하는 동작 등을 10~154회 반복하는 식이다.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나는 스쾃을 하거나, 의자에 앉은 채 한쪽 다리를 앞으로 올려 발끝을 천창으로 향하게 하는 동작도 도움이 된다.
- 2020-07-20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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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인 81%, "인생 이모작 준비하고 있다"
- 평균수명이 늘어 인구구조가 고령화되면서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는 직장인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17일 잡코리아가 30~40대 직장인 2070명을 대상으로 ‘인생 이모작’에 대해 조사를 진행한 결과 81.3%가 ‘제2의 인생설계를 준비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성별로는 남성이 85.4%로 여성 78.7%보다 6.7%포인트 높았다. 이들 응답자가 인생 이모작을 위해 준비하는 것은(복수응답) 재테크 등 경제력 향상(37.9%)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이직 및 재취업(32.7%) △취미 및 특기 개발(25.6%) △외국어, 직무능력 향상 등 자기계발(22.8%) △개인사업 및 창업준비(22.2%) 등의 순이었다.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는 데 어려운 점은(복수응답) ‘자금부족’(76.0%)이었다. 다음으로 △시간부족(25.1%) △가족부양(20.2%) △의지부족(16.8%) △거시적 안목부족(12.1%) 등이었다. 제2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자유로워야 한다’(59.7%)였다. 이어 △마음 편히 살아야 한다(15.1%) △일하면서 보람을 찾아야 한다(13.2%) △취미생활 등 즐겁게 살아야 한다(9.6%) △봉사활동 등 사회공헌을 해야 한다(1.7%)는 의견이 있었다. 이번 조사에 참여한 30~40대 직장인들이 제2의 인생에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을 ‘여행’(39.4%)으로 꼽았다. △내 사업(창업 30.6%) △취미활동(13.6%)이 각각 2~3위에 올랐다. 이외에 △귀농(5.5%) △봉사활동(4.4%) △공부(4.3%) 등의 응답도 있었다. 직장인들이 예상하는 자신의 제2의 인생 시작 시기는 ‘50~54세’가 23.6%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45~49세(16.8%) △40~44세(16.0%) △55~59세(15.3%) 순으로 10명 중 7명 이상이 40~50대에는 이미 제2의 인생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했다. △60~64세(13.0%) △39세 이하(9.9%) △65~69세(4.0%) △70세 이상(1.5%) 순이었다.
- 2020-07-17 0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