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소풍을 간다는 연락지를 두 애가 가지고 왔다. 또 다시 보고 또 되풀이해 읽어보면서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보다 잘못하는 걸 꼬집어 내고 싶은데 어째서 한 번도 그런 일이 내 귀에 내 눈에 안 들리고, 안 띄는지 약이 오를 정도였다. 얄밉게 학교에서 보내주는 손바닥만 한 연락지도 혀를 차게 하니... 3학년 애의 연락지에는 간식비가 100엔,
20~30명이 한 반인데 어머니들이 거의 다 참여 한다. 아주 자질구레한 일들이지만 소신을 가지고 정말 학교를 위해서 열정적이다. 벨 마크를 매달 모아서 계산하는 일들 같은 건 한 달 쯤 지나가도 어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일이고, 다음 달에 해도 아무 문제없는 일임에도 절대 그러는 엄마들이 없다. 근면 정신과 책임완수에 내심 놀라웠다. 자기 책임 절대
1983년 작은 아이가 3학년 새 반이 되면서 2학년 때의 그 여자 선생님이 또 담임이 되어 안심이었다. 큰 애는 새신랑 같았던 남자 선생님이 아닌 여자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2년을 연거푸 담임을 하는 제도가 좋은 점은 아이들이나 어머니들이 처음 만나는 어색함을 한 번만 겪으면 2년 동안을 겪으면서 훤히 서로를 알게 되어 거의 가족 같은 분위기로 마음이 편
사진은 대중화하였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시니어도 예외가 아니다. 사진은 예술적 작품보다 영상언어로 활용된다.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사진을 원하는 모습으로 손쉽게 조정, 편집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손가락 하나로 찍은 사진을 다양하게 편집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이 있다. 그 사용방법이 어렵지 않아 쉽게 따라 할 수 있다.
원하는 크기로 자르고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부임지로 떠나는 화려한 사또 행차를 밭 매는 남루한 아낙이 부러운 듯 한마디 합니다. ‘저 사또의 아내는 얼마나 행복할까?’ 사또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가마에서 내려 아낙에게 다가 옵니다. ‘이 여인아 조금만 더 참지!’ 사또가 한숨 쉬며 한 말입니다. 그 아낙은 장원급제하기전의 사또의 본처였는데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개가 한 여인
아이들은 전혀 문제없이 잘 다녀 주었다. 담임선생님의 배려도 아주 각별했다. 초등학교인데도 미술과 공예가 합친 일어로 ‘즈고~’라고 발음하는 과목은 교실을 옮겨서 수업을 받는다는 것이 특별했다. 선생님도 담임이 아니란다. 처음 목공예라는 수업을 교실을 옮겨했다며 신기하고 재미있었다며 큰 애가 신이 나서 설명했다. 그 교실엔 전기로 나무를 잘라서 었다. 전기
파란 하늘빛으로 상큼한 9월이 시작된 첫 주말에 모처럼 아들, 며느리 손녀 손자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샤갈, 달리, 뷔페 전시회에 다녀왔다.
초대권이 있어 나서긴 했지만 어린 손녀, 손자와 그림을 감상한다는 게 좀 무리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기는 했다.
꼭 보고 싶은 그림전시회인데 아기들이 소란을 피우거나 지루해하면 빨리 퇴장해야
올 여름은 내 생애 최고의 살인 더위였다. 실제 데이터는 아닐지 몰라도 기억과 느낌으론 그랬다. 그 온도의 높이 보다 그 지독한 더위가 낮 뿐 아니라 열대야로 보름 이상 이어짐이 몹시 참기 힘들었다. 그런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일 뉴스에서 전기요금 폭탄이 중요 이슈까지 다뤄지니 에어컨도 마음 놓고 켜기가 두려웠다.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으로서는 가히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백로다. 아침·저녁이면 제법 시원한 가을바람에 생기가 돈다. 제일 무더웠던 여름날도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100세 인생’도 번개처럼 지나갈 터이다. 은퇴자가 매순간 아름답게 살아야 하는 이유다.
감별은 ‘병아리의 암수를 가려내거나 골동품, 보석 따위의 가치를 가려내는 것’이다. 아름다운 은퇴자가 많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도
청소년기는 필자의 영혼이 가장 순수하던 시절이었다. 그보다 어린 시절은 철이 없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어서는 힘들게 거센 파도와 싸워야 했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처자식을 위해 밤낮없이 뛰고 또 뛰었다. 이제 흰 머리 희끗희끗한 이순의 나이가 되어 생각해 본다. 그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맑은 영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