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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59년生, 감출 수 없는 부끄러움 - 김애양 은혜산부인과 원장·수필가
- 나는 안경 대신에 콘택트렌즈를 착용하여 눈이 나쁘단 사실을 한동안 숨겨왔다. 우리 시절엔 여자가 안경을 쓰는 걸 터부시했었으니까. 예를 들어 택시기사도 안경 쓴 여자를 첫손님으로 받으면 온종일 재수가 없단 말을 공공연하게 했다면 요즘 젊은이들은 믿기나 할까? 맞선 보는 자리에 안경을 쓴 색싯감은 일순위로 딱지를 맞았다는 일화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근시의 원인은 아직도 잘 모른다는데, 대개 어두운 데서 책을 읽는다든가 눈에다 너무 가깝게 대고 본다든가 텔레비전 앞에 바투 앉아 시청을 한다든가 등등을 원인으로 꼽는다. 하지만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부르며 절대로 사주지 않았던 부모님 덕분에 고등학생이 되기까지 텔레비전은 구경도 못하고 자란 내가 시력이 나빠진 데에는 억울한 사연이 따로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명백히 최루탄 탓이라 믿고 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집은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이었는데 몇 정거장만 올라가면 고려대학교와 맞닿았다. 그 당시 대학교 근처에 산다는 건 곧바로 최루탄 세례를 받는다는 말과 같았다. 4·19와 5·16땐 아직 어려 엄마 품에 있었기에 세상이 아름답게만 느껴졌지 그렇게 매운바람이 불어올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철이 들고 나서부터 봄은 최루탄 가스와 함께 시작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학기가 되면 대학생들은 여지없이 교문 밖으로 뛰어나와 데모를 벌였고 데모를 진압하는 경찰이 최루탄을 투척하면 매캐한 연기가 온 동네를 뒤덮고 말았다. 그 겨자보다도 더 모질게 매운 최루탄 가스 앞에서 우리들은 비극의 주인공처럼 눈물을 질질 흘리며 대학생들을 원망하곤 했다. 특히 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이 혀를 끌끌 차셨다. “학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하다니…” 친구들과 모래성 쌓기 놀이를 하다가 불발탄이 된 최루탄 조각이 땅속에서 불쑥불쑥 솟아나오면 그게 마치 수류탄이기라도 되는 듯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던 날도 많았다. 최루탄 가스가 눈이나 코, 피부로 들어가면 눈물과 콧물이 쏟아지며 심한 통증이 찾아온다. 어떤 땐 구토까지 일으키며, 피부가 온통 뒤집어지기도 했다. 일시적 실명현상까지 일으키는 최루탄 가스 세례를 해마다 받고도 내 시력이 나빠지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할 것이다. 그렇게 매운 환경 속에 성장한 나는 중학생이 되던 해부터 안경잡이로 살아야 하는 운명에 접어들었다. 안경 쓰기의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대학생이 되면 절대 데모 따윈 하지 않으리라는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1978년에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세상은 정권에 대해 반발하는 국민정서가 정점에 올랐던 그 시기였다. 나라가 흔들바위에 올라앉은 것처럼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이듬해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얼마나 흉흉한 시절인지 모른다. 내가 다니던 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에는 붉은 글씨로 ‘독재 정권 물러나라’라는 대자보가 매일 새롭게 붙었다가 뒤돌아보면 어느새 떼어내고 없어지곤 했다. 교정 곳곳엔 날카로운 눈빛의 아저씨가 손에 워키토키 무전기를 들고 우리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나는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런 아저씨와 눈이 마주칠까봐 건물 뒤로 먼 길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학생들 사이에선 늘 무언가 새로운 정보가 수군수군 퍼져나갔고 등사기로 민 조잡한 인쇄물이 나돌아 다녔다. 주로 ‘군사 정권을 타도하자’는 내용이었다. 캠퍼스 한곳에서 간헐적으로 데모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면 여지없이 삽시간에 경찰버스가 밀어닥쳐 마치 닭장을 탈출한 어린 닭을 잡아들이듯 한심하단 표정으로 여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싣고 떠났다. 정말 무서운 광경이었다. 나무 위에 유령처럼 숨어 있었던지 정보부 직원이 어느결에 나타나 군홧발로 잔디밭을 짓밟으며 데모 현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대학이 지성과 아무 관계없는 치열한 전투 현장처럼 여겨졌다. 그러다가 부마(釜馬)사태가 발발한 1979년 가을 무렵이었다. 학생들은 모두 서울역 앞에 집결하기로 결정했다. 과 대표가 결연한 모습으로 더는 침묵할 수 없으므로 한 곳에 모여 구국의 결의를 다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날이 아마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벌인 가장 큰 시위였을 것이다. 진압하는 경찰을 피해 달아나다 붙들려 옷이 찢어지거나 신발을 잃어버린 학생들이 대다수였고, 곤봉으로 얻어맞은 친구들도 많았고, 몇몇 학생은 결국 붙잡혀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에 잠기곤 한다. ‘그때 만일 나도 친구들을 따라 서울역에 갔었더라면….’ 그때 서울역에 가는 대신 나는 도서관으로 향하며 이렇게 자기합리화를 했다. 의과대학에 들어온 이유는 정치에 상관없이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되려는 것인데 일일이 세상 돌아가는 일에 참여하다 보면 언제 공부를 하겠어? 의사란 이념보다는 인간애를 중시하고 또 실천하는 직업이 아닌가? 구태여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대학생들이 세상을 바로잡을 테지…. 하지만 그건 치졸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고 사실 나는 겁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어떤 교육을 받아왔던가? ‘국민교육헌장’을 제대로 못 외우면 손바닥을 대나무 회초리로 맞았고, 국어 시간엔 애국에 대한 표어를 짓고 미술 시간엔 ‘반공 포스터’를 그렸다. 자나 깨나 반공교육을 통해 공산주의를 무슨 괴물이거나 악마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때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단어는 뭐니뭐니 해도 ‘간첩’이었을 것이다. 강원도에 살던 이승복이란 아이가 무장공비를 향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저항하다가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몰살당했다는 뉴스는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하필 이승복은 나와 생년월일이 똑같은 1959년 12월 9일생이라서 결코 그 이름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뿐인가. 서울 한복판에도 무장공비가 출몰한다는 소식은 우리들 머리 위에 구름처럼 공포를 드리워 놓았다. 공포만큼 인간을 다스리기 편한 도구가 또 있을까? 청와대를 폭파하는 목적으로 남하했다는 간첩 김신조가 체포되었다는 속보가 허공을 날아다녔다. 구름에서 비가 떨어지듯 하늘에서 불안감이 뚝뚝 떨어졌다. 대학생들이 데모를 벌이면 어른들은 그게 모두 북한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거라고 말했다. 그럴 땐 북한 공산당이라고 하지 않고 빨갱이라고 부르게 마련이었다. 그건 지금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사실 대학생이 되었다고 하루아침에 세상을 향해 감긴 눈이 떠지는 건 아니다. 일간 신문에 실리는 기사를 액면 그대로 믿었고,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던 평범한 여학생이 정권의 실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다른 친구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서울역을 향해 뛰어가도 그건 지각없는 부화뇌동일 뿐이라 여겼다. 도서실에 두더지처럼 숨어 있던 나는 스스로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는 착한 딸이라고 믿었다. 그땐 그랬다. 덕분에 안기부에 끌려가는 일 없이 무사히 대학을 마치고 의사가 된 걸 안도해야 할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물론 여러 가지로 평가해야겠지만 확실한 건 만일 내가 다시 대학시절로 돌아가 민주화 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서게 된다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면, 그땐 절대로 데모대를 외면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기적인 시선으로 개인의 안정만 도모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남미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권력과 억압에 대한 항거가 비단 우리나라에 국한된 역사가 아니란 걸 새삼 알게 되었다. 칠레에는 피노체트 정권하에서 짓밟힌 수많은 목숨이 스러져갔고 아르헨티나의 ‘추악한 전쟁’ 동안에는 불순분자로 낙인 찍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수만 명의 실종자들이 있었다. 과테말라에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미구엘 앙헬 아스투리아스의 는 어쩌면 그렇게 우리나라의 모습과 닮았던지 소름이 끼쳤다. 대통령의 심복이 겪는 불행이 비정한 군부정치의 생리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또 로베르토 볼라뇨의 에는 멕시코시티의 대학에서 데모대가 진압 당할 때 화장실에 숨어서 13일을 연명한 우루과이 출신의 여대생 이야기가 나온다. 그건 실화를 가지고 만든 소설이어서 더욱 숨죽이며 읽게 되었다. 그녀는 나중에 ‘멕시코 시(詩)의 어머니’로 추앙받는다는 조금 심오한 내용이다. 또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 에는 여죄수에게 가하는 고문의 강도를 연구하며 강간을 저지르는 의사가 등장한다. 그 의사는 성적 고문을 하는 동안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를 들려주는 친절함을 베풀었다는데 이 희곡의 공간적 배경은 ‘칠레일 수도 있지만 오랜 독재 기간이 끝난 직후 민주정부가 들어선 경우라면 어느 나라도 무방하다.’라고 설정되어 있는 것만 봐도 독재란 전염병처럼 세상에 널리 퍼졌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민주화 투쟁을 하던 데모는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반향이었던 것이고 그런 데모에 동참하지 않았던 나는 전 세계적으로 비겁한 인물이 된 셈이다. 그런 중에 칠레 태생의 천재적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가 어느 수상식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걸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양질의 글쓰기란 ‘암흑에 머리를 들이밀 줄 알고, 허공에서 뛰어내릴 줄도 알고, 문학이 기본적으로 위험한 일임을 알고 쓰는 글’이라고. 그게 비단 글쓰기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즉 암흑에 머리를 들이밀 줄 알고, 허공에서 뛰어내릴 줄도 알고, 기본적으로 인생이란 위험한 것이란 걸 알고 사는 삶이 가치가 있다는 뜻이리라. 그러니까 나는 그동안 모르는 게 너무 많은 채 살아왔던가 보다. 나이가 들면 점점 더 안정과 자기 영달을 추구한다지만 내게 남은 세월엔 지난 부끄러움으로 더는 낯을 붉히지 않게 되길 소망한다. △ 김애양(金愛洋) 은혜산부인과 원장·수필가 이화여대 의대 졸. 은혜산부인과(서울 강남구 역삼동) 운영. 1998년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5권 발간. 한국의사수필가협회를 결성해 모임을 주도하고, 해마다 ‘한국 의학도 수필공모전’을 통해 의대 학생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함양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다.
- 2016-05-16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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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기타로 튜닝하는 아름다운 인생 멜로디, 수제 기타 장인이 된 전 현대건설 이사 최동수씨
- “자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1994년 1월, 현대건설 이사였던 최동수(崔東秀·77)씨가 사직서를 내밀자 고(故) 박재면 회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삼성이나 롯데에 가려고 그만두는 거냐?”는 물음에 “기타를 만들겠다”고 대답하자 더욱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현대건설은 국내 건설업계 1위 업체였고, 잘 나가는 건축담당 이사였던 최씨의 갑작스러운 은퇴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최씨의 선택은 하루아침에 결정된 것이 아니다. 기타를 만들고자 한 것은 학창시절부터 고이 간직해온 그의 꿈이었고, 20여 년에 걸친 아내와의 약속이었다. 아내와 애인(?)을 위한 선택 ‘은퇴’ 최동수씨가 아내인 수필가 허숭실(필명)씨와 연애하던 시절의 일이다. 덕수궁 후원을 걷던 최씨는 허씨에게 엉뚱한 고백을 했다. “당신과 데이트하느라 내 애인을 돌보지 않았더니 그녀가 병들었소. 오늘 당신에게 그 애인을 소개해 주리다.” 허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의 애인을 만나러 가자고 했다. 그러자 최씨는 들고 있던 기타를 무릎 위에 척 올려놓고는 “기타가 바로 내 애인”이라고 털어놨다. 그가 말한 애인이 사람이 아닌 기타라는 사실에 그녀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마음이 복잡하기만 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허씨 앞에서 최씨는 “그동안 데이트 자금을 마련하느라 애인을 전당포에 맡겨두었더니 습기가 차 피부가 트고 몸도 틀어져 속상하다”며 기타를 쓰다듬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허씨는 ‘풋내기 예술가’를 발견한 듯 반가움에 가슴이 뛰었고, 그날의 감동이 결국 그녀를 ‘기타 만드는 남자의 아내’로 만들었다. 최씨의 기타 사랑은 고등학생 시절 읽은 한 소설을 통해 시작됐다. 지금은 책 제목도 가물가물한 일본 소설이지만, 당시 전쟁터에서 다리 불구가 된 주인공이 창녀가 된 아내의 집 근처 전봇대 아래에서 기타 연주를 하는 장면만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이후 기타에 매료돼 아버지를 졸라 기타를 하나 샀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결국 직접 취향에 맞는 기타를 손수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다. 마땅한 재료가 없어 집안의 오동나무 장롱 서랍을 뜯어가며 기타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결혼해서 얼마 동안은 틈틈이 기타를 만들었다. 하지만 건축설계 사무소를 운영하면서 밤낮으로 기타 만들기에 몰두하는 그의 모습을 본 아내는 견디다 못해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아이들 교육을 다 마치고 난 뒤에 기타를 만들면 그때는 전폭적으로 지지하겠어요.” 아내의 말에 그는 본업에 충실하기로 마음먹고 1975년 현대건설에 입사한다. 입사 후, 18년을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등 타국에서 지내며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밥벌이에 몰두했다. 그러던 어느 날, 1993년 그가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던 때, 아내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외로움도 암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그는 조기 은퇴를 결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남은 인생은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다 가겠다고 다짐하던 최씨에게 한 가지 꿈이 피어올랐다. “사표를 내기 전 아내에게 ‘나 기타 만들까?’라고 물어봤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계산기를 가져와 탁탁 두드리더니 ‘앞으로 삼시 세끼 먹는 데는 문제없겠네요. 인생 1막은 아이들을 위해 물질에 투자했으니, 2막은 당신의 정신적 자유에 투자하도록 해요’라며 흔쾌히 제 결정을 받아들이더군요. 20년 전, 아이들을 키우고 나면 기타를 만들어도 좋다고 했던 그 약속을 지킨 거죠.” 그렇게 그는 아내와의 여생을 위해, 그리고 애인과의 재회를 위해 은퇴를 결심했다. ‘소리가 나는 작은 집’을 건축하다 기타 제작을 결심한 그는 그동안 지내던 서울의 아파트를 정리하고 경기도 고양시 일산으로 이사했다. 31년간의 건축가 경험을 살려, 마당이 딸린 집을 직접 지었다. 아늑한 그의 집은 ‘행운의 열쇠’ 모양을 따서 설계한 1층을 지나면, 기타 제작 공간인 지하실 ‘목운(木韻: 나무에서 소리가 난다는 뜻) 공방’이 나온다. 최씨의 꿈과 애정이 깃든 이곳에서는 1년에 단 2대의 기타만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 딸을 키운다는 생각으로 기타를 만들고, 시집보내는 마음으로 기타를 파는 그다. 이 때문에 최씨는 기타를 파는 게 아니라 “백마 탄 기사에게 시집보낸다”라고 말한다. 딸을 키우는 심정으로 정성을 다하는 그이지만, 아무래도 기타를 만드는 데는 숙련된 솜씨가 뒷받침돼야 할 터. 기타 제작을 위한 그의 노력도 대단했다. “은퇴한 첫해에는 미국 힐즈버그(Healdsburg)에 있는 아메리칸 기타스쿨에 입학했어요. 이듬해에는 스페인 코르도바(Cordoba)의 기타페스티벌에서 마에스트로 호세 로마니요스(Jose Romanillos)에게 제작 마스터 클래스를 지도받았죠. 두 과정 모두 한국인으로는 처음이라고 해요. 현재는 미국 현악기 제작가 협회(GAL: Guild of American Luthiers)의 유일한 한국인 회원이기도 하고요.” 기타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18년간의 해외생활은 그의 꿈을 실현하는 디딤돌 역할을 했다. 해외 근무라는 이점을 활용해 외국의 공방과 자재상들을 찾아다니며 제작에 필요한 공구를 수집한 것. 그렇게 오랜 시간 기타를 만들기 위해 준비해온 만큼 그는 욕심을 내거나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시계는 꼬박꼬박 기타를 위한 시간으로 쉼 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집 지하실의 기타 공방으로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하고 오후 6시에 퇴근한다. 야근도 마다치 않는다.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드는 기타는 1년에 2대 남짓이다. 기타 제작 과정은 단번에 결과물을 내기보다는 완성까지 꼼꼼한 설계와 인내가 바탕이 돼야 하는 건축일과 닮은 점이 있었다. “기타는 ‘소리가 나는 작은 집’과 같아요. 제 인생 전반전을 장식한 싱가포르 선텍 시티(Suntec City), 카타르 국립대학 건물, 이라크 북부역사 등을 짓는 것처럼 기타를 만드는 일도 미학적 판단과 설계가 필요한 종합 예술이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최동수표 악기’ 오랜 꿈, 아내의 내조를 밑천 삼아 시작한 기타 제작은 꾸준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처음에는 친구나 동료 등 지인에게 주기 위해 만들었는데, 근래에는 서정실, 변보경, 배장흠 등 유명 기타리스트에게 기타를 헌정했다. 대개 유명 기타리스트의 경우 독일이나 프랑스 등 해외 장인이 만든 것을 사용하는데, 그런 이들이 그가 만든 기타를 쓴다는 것은 이미 실력이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섰음을 증명한 것이다. 그의 기타는 보통 1대당 1000만원 가량이다. 예상한 가격보다 비싼 값을 받을 때도 많지만, 그가 공짜로 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기타를 주는 것은 결코 공짜 거래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떻게 돈으로 그 가치를 표현하겠어요? 대부분 손님이 알아서 가격을 정해서 지급하죠. 조금 손해 보는 경우가 있을지 몰라도, 결코 손해가 아니랍니다. 내가 공짜로 기타를 주면 어떤 이는 나에게 훌륭한 그림을 주기도 하고, 좋은 책을 보내기도 하니까요. 악기는 파는 게 아니라 인연을 만드는 과정이라 생각해요. 악기는 내 딸인데, 내 딸을 데려갔으면 그도 사위처럼 내 자식이 되는 거지요.” 그는 팔기 위해 만드는 것은 단순히 ‘기타’라 하겠지만,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위한 단 하나의 ‘악기’를 만들고 있다고 설명한다. 판매나 주문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의 기타를 하나둘씩 실물로 탄생시키는 최씨다. 온도와 습도가 적당한 봄철이면 기타를 만들기 적합하다. 이 시기에 결의 방향과 울림이 좋은 나무를 골라 온도를 맞춘 작업실에 한 달가량 둔다. 그다음 색을 입히는데, 그는 붓 대신 천으로 만든 솜방망이로 문질러 칠하는 방식을 고수한다. 한 번 칠할 때마다 100~150번을 문지르고, 이 과정을 100번 정도 반복해야 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서너 달이 걸리기 때문에, 기타 한 대를 만들고 나면 3~5kg씩 체중이 줄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에도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작업은 튜닝이다. 아무리 독특하고 멋진 기타라도 그 감탄은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기타도 악기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소리다. 나무마다 고유한 진동이 있는데, 이를 조화롭게 맞추기 위해 일일이 손으로 나무 두께를 가늠해 조율한다. 기타의 모양이 나오면 제대로 된 소리를 얻기 위해 대전의 음향 전문가에게 보내 진동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다시 튜닝을 한다. 튜닝은 한 달이 걸리기도 하고 반년이 걸리기도 하는데 하다가 안 되면 다시 뜯어서 처음부터 만들어야 한다. “기타리스트 배장흠씨의 기타도 앞판을 세 번, 뒤판을 두 번 바꿔가며 튜닝을 마친 작품이에요. 그는 기타가 만족스러웠는지 고맙게도 그 이후에 제가 만든 기타를 두 대 더 구입했죠. 2014년 7월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공연 무대에서도 제가 만든 기타로 연주했어요. 딸을 시집보낸 입장에서는 참 뿌듯하고 기분 좋은 일이죠.” 요즘 그는 리라(lyre: 고대에 사용한 발현악기) 모양의 기타 제작에 몰입하고 있다. 원래는 일흔넷까지만 기타를 만들려고 했지만, 여전히 46번째 기타 만들기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는 그동안의 기타와의 인연을 모아 만든 책 (가제)를 준비하고 있다. 기타를 통해 천상의 소리를 선사하고, 책을 통해 기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게 목표다. “어언 나이가 차서 손을 거둘 날이 가까워져 오잖아요. 그전에 꿈속에서 상상만 하던 리라 기타와 같은 작품을 몇 가지 만들어 보고 싶어요. 또, 책이 출간되어 많은 분이 제 이야기를 읽어준다면 기타 제작 생애의 목표의 반은 성취한 셈이죠.”
- 2016-04-25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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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밤의 피아니스트가 된 치과의사 장요한의 이중생활
- 그날따라 신촌 길을 걷고 싶었다. 봄바람이 불던 첫날.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걷던 길 멀리서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다다른 곳은 신촌 홍익문고 앞 피아노. 많은 젊은이가 멈춰 서서 익숙한 선율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피아노 앞에는 갈색 모자에 목도리를 단단히 두른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그렇게 밤길 위의 피아니스트 장요한(張요한·62)씨를 만났다. 차 한잔 함께 하실래요? 그의 연주가 끝나기가 무섭게 다가가 다짜고짜 물었다. 봄이라지만 밤은 겨울이었다. 차라도 한잔 하면서 얘기가 하고 싶었다. 무엇 때문에 젊은이들의 장소에 나와 피아노를 치는지 묻고 싶어졌다. “그저 취미로 피아노를 칩니다. 일과를 마치고 피아노 칠 수 있는 곳을 찾아옵니다. 오늘은 날씨가 좀 풀린 거 같아서 신촌에 나왔는데 사람들이 피아노 연주를 들어주니까 좋았습니다.” 겨울 동안 장요한씨는 신촌이 아닌 여의도 IFC몰 CGV영화관 안에 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는 20분이고 30분이고 피아노를 쳤다. 그가 피아노를 치는 날이면 영화관 측에서 관객(?)들이 앉을 테이블과 의자를 마련해 주었다. “수줍음이 많은데 어렸을 때부터 남들 앞에서 연주를 좀 해서 그런 지 거리에서 피아노를 치는 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신촌에는 오늘 정말 오랜만에 나온 겁니다.” 장요한씨가 최근에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건 작년 3월 인사동에 설치된 ‘달려라 피아노’를 알고부터다. ‘달려라 피아노’는 연주되지 않거나 거실, 공공시설에 방치된 중고 피아노를 기증받아 화가들이 새롭게 디자인한 뒤, 지역 공공장소에 설치하는 프로젝트다. 2008년 영국 버밍엄에서 시작해 한국에는 신촌 홍익문고 앞, 인사동, 선유도 공원, 어린이 대공원, 동대문 DDP 등 서울과 지방 여러 곳에 번지고 있다. 장요한씨는 인사동과 신촌, 여의도를 오가며 매일 연주를 했다. 피아노 칠 때는 모르지만 연주가 끝나고 나면 몸이 아주 힘들었다. “쉬고 운동도 해야 하는데 퇴근만 하면 자꾸 발걸음이 피아노 있는 쪽으로 향하더라고요. 가끔은 왜 내가 아프면서까지 피아노를 치고 고생할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박수가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원동력이자 중독의 요인이라고 말했다. 피아노를 치고 난 뒤 쉬어야 하는데 박수를 받으면 연주를 끊을 수 없다. 몸이 좀 힘들어도 그가 연주하는 이유다. 피아노는 배운 적이 없다? 천재 아니십니까? 그는 단 한 번도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다. 어렸을 때 집에 있는 풍금을 접한 것이 피아노를 치는 계기가 됐다. “1974년 어느 날, 커피숍에서 누군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봤는데 그게 너무 멋있었어요. 원래는 기타를 배우려고 했다가 때려치우고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면 항상 음악과 함께한 세월이다. 중·고등학교 악대부원으로 활동할 때는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악대부 유니폼을 입고 안동 시내 시가행진을 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취미활동도, 특별활동도 늘 음악을 선택했습니다.” 학교 음악선생님이 음대에 가라더군요.” 고등학교 때는 고향인 안동에서 대구로 유학을 가 큰누님 집에서 살았다. 등교하기 전 피아노를 30분정도 치고 갔다. 전공자도 아닌 고등학생이 참으로 대단한 열정이 아니었나 싶다. 작곡가 출신이던 고등학교 음악선생님을 대신해 수업 시간에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는 장요한씨. 그런 그에게 음악선생님은 음대에 갈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장요한씨는 음악은 그냥 취미로 여긴다며 음악선생님의 추천을 거절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음대를 준비했던 것도 아니고……. 그때 당시에 음악선생님이 대구시립 교향악단 지휘자였거든요. 음대에 가라고 했는데 저는 1년 더 공부해서 치과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피아노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피아노를 쳤다. 손님이 없는 레스토랑이나 피아노가 있던 대구교대 안에 들어가 피아노를 쳤다. 피아노를 전공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약간의 후회가 남아 있는 듯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음악에 상당히 소질은 있었어요. 부모님이 제 재능을 알아보고 잘 키워줬으면 어땠을까요? 지방이 아니라 서울에 살면서 음악을 더 접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과거의 이루지 못한 꿈이 미련으로 남아 장요한씨를 길 위의 피아니스트로 만든 게 아닐까. “그래도 대학 다닐 때 학교 그룹사운드에서 키보드를 연주했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조용한 음악이 좋지만 저도 나름 20대 때는 록 음악이 좋았습니다.” 그는 경북대 의대 그룹사운드 ‘메디컬 사운드’ 2기 출신이다. 본과에 올라가기 전까지 활동하다 후배들에게 물려주는데 지금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전통의 그룹사운드다. 낮에는 치과의사 장요한의 삶을 삽니다 장요한씨의 본업은 치과의사다. 경북대학교 치과대학 1기로 졸업한 뒤 35년을 치과의사로 살고 있다. 최근 1년 사이 피아노를 치는 삶에 심취한 듯 보이지만 하얀 가운을 입는 순간 영락없는 의사 선생님으로 돌변한다. “피아노만 치고 치과 진료에 관심 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최대한 정직한 진료로 꼼꼼하게 환자를 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 병원에는 과잉 진료를 피하는 방법도 적어두었습니다. 은퇴하는 날까지 양심적인 치과의사로 일하고 싶습니다.” 장요한씨는 마음을 비우고 일반 환자만 치료하고 있다. 임플란트 시술도 안 한다. 엑스레이 찍기, 스케일링도 장요한씨 스스로 한다. “속은 편합니다. 수익이 별로 없는 게 문제지만, 돈에 대해 신경을 별로 안 써도 됩니다. 내 월급 누가 주는 거도 아니고 진료가 끝나면 저는 피아노 치러 나갑니다.” 치과의사를 하는 35년 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그만큼 치과의사로서 열심히 살았다고 말한다. “제 나이는 이제 은퇴할 나이잖아요. 하루에 받을 만큼만 예약한 환자들을 봐줍니다. 환자를 볼 수 있을 만큼만 봐서 에너지가 축적이 된 건지. 그래서 아마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장요한씨는 피아노라도 안 쳤으면 서울서 살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모든 사람에게 힐링 되는 연주 선물하고파 “저는 레퍼토리가 아주 많습니다. 그냥 놔두면 2~3시간 칠 수도 있어요.” 장요한씨는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비롯해 영화 OST , , , 등 피아노로 치기 편하고 인기 좋은 음악들을 고른다. “힐링이 되는 음악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제가 치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 보면 따뜻한 음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제 연주가 편하고 좋다며 다가와 말해주는 사람도 있었어요.” 장요한 씨는 좋은 연주를 위해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단다. “어떤 팝송이 치고 싶다고 생각하면 원곡을 계속 열심히 듣습니다. 듣다 보면 내가 따라 할 수 있고 딱 듣기 좋은 부분들이 들립니다.” 영어 어휘력을 늘리듯이 그렇게 차근차근 손에 건반의 느낌을 익힌다고 했다. 피아노를 치다 잘 넘어가지 않고 자꾸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잘 풀릴 때까지 연습한다. “반복해서 하나하나 치다 보면 되더라고요.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던 악보도 치다 보니 됐습니다.” 장요한씨는 은퇴 후 의료 시설이 취약한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서울에는 사람들도 많고 또 치료해 줄 의사도 많다고 느낀다. “치아 미백도 하고 다른 여러 가지 하면서 돈을 번다는데 저는 그런 거하고 멀어요. 고향으로 가고 싶은데 가족들이 서울이 더 좋다고 해서 고민입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 속에서 피아노 치는 게 그리울 거 같아 걱정이다. “내일은 뭐 하실 건가?”라는 질문에 “날씨가 추워진다고 하니 여의도에 가서 피아노를 칠 생각입니다”라고 말하는 장요한씨. 1년 넘게 그의 일상으로 자리 잡은 피아노 연주를 위해 그는 친구를 만나는 것도, 술을 마시는 것도 자제한다. 봄이 되면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피아노를 칠 생각이라는 장요한씨. 오늘 혹시 시간이 된다면 여의도 IFC몰로 가보기를 권한다. 산뜻한 표정의 치과의사, 아니 밤의 피아니스트 장요한씨를 만날 수 있다.
- 2016-04-12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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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가는 사람들] Part 2-1 새벽을 밝히는 사람들
- 시내 주요 호텔의 아침을 밝히는 것은 여행에 들뜬 투숙객도, 약속을 위해 찾은 방문객도 아니다. 바로 조찬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들른 경영인들이다. 이른 새벽, 이름난 호텔 정문에 서 가만히 기다려보면 검은색 고급 승용차들의 행렬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누구보다 시간을 쪼개 쓰는 이들이 회사가 아닌 호텔에서 아침을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현재 공식적으로 집계되고 있지 않지만, 국내에서 진행 중인 조찬 모임을 업계 관계자들은 200~300개 가량 될 것이라고 추정한다. 주최나 주제에 따라 그 성격도 다양하다. 일반적인 경영자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 이외에도 특정 직군이나 지역을 위한 모임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한국정보산업협회의 CIO포럼은 업계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고, 또 대전경제포럼과 같이 지역별로 진행되는 행사도 있다. 교육기관이 아닌 은행이나 보험사에서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시중에서 진행되는 포럼의 주요 대상은 경영인이나 임원, 업계 관계자들이 많다. 참가 비용이 적지 않고 연간 회원제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기본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임이 조찬으로 진행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시간’이다. 아무래도 오전 일찍 시작되다 보니 하루를 길게 나눠 쓸 수 있고, 직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는 것. 조찬 현장에서 만난 한 참석자는 부지런히 자신을 몰아붙이는 알람 같은 장점도 있고, 맛있는 아침식사 역시 매력적인 ‘덤’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조찬 모임에 열광하는 경영인들의 모습을 어떻게 평가할까? 강연 참석차 포럼을 찾은 윤석철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경영자들의 이런 적극적인 교육활동은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 학보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미국이나 가까운 일본에도 이런 모임은 거의 없으니까요. 이런 모임을 통해 생각의 방향을 조정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과정은 기업인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분석했다. 이런 평가는 외국인의 눈에도 비슷하다. 중국인인 aSSIST 중국 비즈니스 MBA 과정의 황비 교수는 한국의 조찬모임 참석자들의 열의를 높게 평가했다. 그는 “참석자들의 열망이 매우 높고, 특히 중국 비즈니스에 대한 관심도는 대단합니다”라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는 것처럼, 경영인들에게 조찬 모임은 아침 일찍 마음을 수련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진행하는 단체가 많다 보니, 포럼 간 경쟁도 치열한 편이다. 때문에 담당자들이 가장 신경쓰는 부분은 콘텐츠와 포럼의 중심을 잡는 주요 인사의 확보다. 콘텐츠가 경쟁력이다 보니 연사 섭외 역시 치열하다. 대표적 조찬 모임 중 하나인 aSSIST 포럼 마케팅팀의 김민지씨는 포럼의 운영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포럼의 주제와 연사는 참석자 분들의 추천과 내·외부 강의 평가자료를 바탕으로 내부 강사 선정위원회에서 논의해 정해지는데, 크게 인문학(40%), 경영통찰(40%), 경제전망(20%) 분야로 나뉩니다. 프로그램 구성과정에서 가장 고려하고 있는 부분은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교육의 장을 만드는 데 있습니다. 경영자들이 다양한 주제의 강연을 듣고 이를 통해 각 기업의 창조적 혁신을 이끌어 낼 수 있게 지원하고자 노력 중입니다.” 이들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포럼 참석자의 95% 정도가 기업의 최고경영자나 임원이고, 일반인은 5% 정도다. 연령별 분포를 보면 60대 이상이 40%정도이고, 40~50대는 55%를 차지하고 있다. 30대 이하의 낮은 연령대는 많지 않다. 참석효과에 대해 포럼에서 만난 경영인들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외부에서는 교육효과보다는 인맥 형성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더 클 것이라는 시선도 있지만, 내부의 평가는 다르다. 인문학 조찬모임을 1년 넘게 참석중인 박주초 알터 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인문학을 통해 중국 진출에 도움을 얻었다고 했다. “사업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습니다. 특히 제가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한 철학적 지침을 얻을 수 있어, 시야가 넓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동양 철학이나 고전에 대한 공부는 중국에서 비즈니스를 진행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작년에 진행했던 공연 역시 단편적이거나 표면적인 과거와 달리 담백하지만 깊은 감동을 준다는 평가를 받았구요. 지혜를 얻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참여한다면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인맥 형성을 통한 비즈니스 진행을 원한다면 조찬 모임보다는 소규모 인원으로 진행되는 최고경영자 과정이 더 적합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한 상장사 최고경영자 역시 “우리 정도 나이가 되면 인맥에 대한 갈증은 크게 없습니다. 사람 만나러 간다는 외부에서 보는 시각과는 차이가 있죠”라고 밝히고, “원래 철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 나오게 됐고, 다들 비슷한 이유에서 이 자리에 참석했을 것으로 봅니다”라고 설명했다. 경영학을 통해 병원 운영에 도움을 받았다는 의료인도 있다. 채규창 구로이즈치과의원 원장은 “치대에서 경영에 대한 별도의 교육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 개원하는 치과의사들은 개업 후 당황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라고 말하고, “리더십 강좌, 경영 코칭 강좌 등을 통해 병원 운영에 대한 철학과 원칙을 배운 후에 괴롭혔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고 밝혔다. 조찬 모임의 또 다른 트렌드 중 하나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다. 5년 전까지만 해도 경영전략이나 경제동향에 대한 강의가 주로 이뤄졌지만, 최근에는 역사나 철학 강의에서부터 음악 공연까지 구성이 다양해지고 있다. 한국능률협회의 인문학 조찬 모임 ‘수지향(수요일에 만나는 지혜의 향연)’을 담당하고 있는 김혜인 연구원은 동향을 이렇게 분석한다. “경영의 복잡성이 증대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위기가 빈번히 발생하면서, 인문학에 대한 기업의 관심이 증가하며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이 통계적 분석 기법으로는 예측이 곤란한 위기에 대한 대처 방법으로 인문학적 통찰력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때문에 저희도 소위 문사철이라 불리던 문학과 사학, 철학뿐만 아니라 뇌과학, 사회학, 음악, 여행, 미술 등 다양한 분야의 대가들로부터의 새로운 인문학을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강연을 위해 ‘수지향’을 찾은 유홍준 명지대학교 석좌교수는 “많은 강의 중에 기업인들 앞에서 강의할 때가 가장 편합니다. 강연내용에 의구심을 갖기보다는 얻어가려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죠”라고 설명하고, “인문학에 대한 경영자들의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소비자들의 산업적 요구가 다양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라고 분석했다.
- 2016-03-11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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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부는 주고받음이다 PART8]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라 일본의 기부 문화 현주소
- 우리말 가운데 ‘이웃사촌’은 잘 보존된 전통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 전해줄 살아 있는 미풍양속, 즉 미덕(美德)이어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이상, 사회 속에서 그 가치를 발휘하며, 특히 더불어 살아야 하는데 이는 기쁨과 슬픔도 함께한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이웃을 돕는 행위는 크게 모금과 기부, 그리고 봉사로 나눌 수 있겠는데 최근에는 재능 기부의 형태로 크고 작은봉사 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금전적인 제공의 모금과 다르게 기부의 범위가 단순한 물품의 제공을 넘어서 점차 확산되고 있다. 모금은 재해로 인한 생명과 재산 피해를 입은 지역과 재해민에게 전달되는 의연금과 현지에서 지원 활동을 벌이는 단체들에 제공되는 활동지원금으로 분류되는데, 후자는 대개 ‘기금’이라고도 한다. 2011년, 그해 6월 일본 적십자사는 일본 코카콜라 주식회사와 손을 잡고 모금 기능이 딸린 자동판매기를 실현시켰다. 일본 적십자사는 그동안 자동판매기의 판매액 일부가 적십자사로 기부되는 ‘지원형자동판매기’를 설치하여 운영해 왔는데, 거기에 판매기 본체에 10엔과 100엔 전용의 모금 스위치가 설치되어 ‘이용자가 직접 모금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자동판매기를 추가한 것이다. 이런 시도는 2011년 9월에 활동을 시작한 특정 비영리활동법인 기부형자동판매기보급협회(kjf.or.jp)를 중심으로 현재 일반재단법인 일본 국제기아 대책기구, 특정비영리 활동법인 아시아 식림 우호협회와 국경 없는 의사단, 일본 국제자원봉사센터, 인정 NPO 법인 굿네이버스재팬과 난민지원협회 등 수많은 단체가 이용 중이다. 또한 아이치(愛知) 현 등 일본 전국의 지역자치단체에서 광역별로 지역 공동기금 조성에 기부형 자동판매기를 이용하고 있다. 온라인 기부 사이트 기부 행위에 따르는 번거로움과 기부의 투명성을 해결하기 위한 온라인 기부 사이트 기브원(www.giveone.net)이 운영 중이다. 기부 라이프의 실현을 위해 만들어진 이 사이트는 NPO프로젝트 단위로 기부할 수 있는데, 각 프로젝트의 내용 검색은 물론 각종 리포트를 통한 비교 검토도 가능하다. 사용자는 자신의 관심에 일치하는 기부를 골라 은행이나 우체국에 가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신용카드 기부를 할 수 있는 일본 최초의 온라인 모금 사이트이다. 또한 단체 지정을 하지 않더라도 같은 테마로 활동 중인 여러 단체에 기부를 균등하게 배분하는 테마 기부도 가능하다. 기부를 마친 사용자는 활동 리포트를 통해 자신이 기부한 프로젝트의 ‘자금’을 수시로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현재 환경, 마치즈쿠리(거리 만들기), 긴급재해, 문화 예술 스포츠, 국제협력, 고용 취로 지원, 인권평화, 어린이 청소년, 여성, 장애우 등 10개 분야에 235개 프로젝트가 운영 중이다. 불용품이 소중한 지원품으로 국제사회지원 추진회가 운영하는 월드 기프트(world--gift.com) 사이트를 살펴보면 일본 전국의 사용하지 않는 물품과 기증품을 받아 개발도상국에서 활동 중인 여러 NGO와 기금에 기부하고 모금을 지원하는 활동으로 쓰이고 있다. 지원물자는 헌옷, 인형, 잡화, 식기, 장난감 등 다양하며, 재사용 및 재활용으로 발생하는 이익금도 국경 없는 의사단, 세계자연보호기금, 유엔 식량지원기관인 WFP 등에 기부금의 형식으로 지원하고 있다. 또한 유치원과 보육원에는 문방구 등을 기부하고 있다. 한 이용자는 “인형과 의복, 그리고 문방구를 포장했는데, 모두 오래되고 그중에는 더럽혀진 물건도 있어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괜찮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활동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다시 기회가 있다면 또 이용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철도회사의 자연사랑 실천 일본의 철도회사 오다큐( 小田急) 전철은 올해 5월 후지산이 보이는 도쿄 근교의 온천지역으로 유명한 하코네초( 箱根町) 마을사무소를 찾아 하코네초 자원보전기금 142만3896엔을 기부했다. 이는 오다큐 전철이 하코네초의 천연수를 사용해 2009년 4월 선보인 미네랄워터 ‘하코네의 숲에서’와 2012년 12월부터 발매된 ‘하코네 숲 녹차’가 판매될 때 한 병당 1엔을 기금으로 모은 돈이다. 2009년 4월부터 기부 총액은 1890만 엔에 달한다. 1년에 상반기와 하반기 두 차례 기부가 이뤄진다. 이들 두 음료수는 오다큐 전철이 달리는 노선의 각 역 매점과 자동판매기, 지역 슈퍼마켓과 편의점, 오다큐 그룹의 각 점포와 하코네초 사무소 등 관련 시설과 식당 내 자동판매기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는 지역자치단체와 철도회사의 상호 시너지 효과를 높인 좋은 예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지역의 특산물과 관광명소를 살려 그 혜택과 이익금을 지역에 환원하는 예는 최근 유행하고 있는 지역 홍보 마스코트를 이용한 각종 상품에서도 볼 수 있다. 21세기형 고향 사랑의 실천 일본은 2008년부터 ‘후루사토(고향) 납세’ 제도를 실시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후루사토 납세는 본인이 태어난 고향이 아니더라도 특정 지방자치단체에 개인적으로 내는 기부금을 뜻하는데, 구체적으로는 개인이 2000엔 이상의 기부금을 원하는 지방자치단체에 기부할 경우 본인이 현재 거주하는 지역에서의 세금이 환급 공제된다.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에 인구가 집중된 현재 구조로는 지방자치단체의 세금으로 충당하는 재정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후루사토 납세’는 거주지에 내던 세금의 일부를 본인이 원하는 임의의 지방자치단체로 분산해 대도시 중심의 세금 집중을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효과를 얻고 있다. 뿐만 아니라 후루사토 납세를 통해 기부하는 이용자들에게는 기부하는 지역의 특산품을 제공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다양한 수산물과 농산물, 상품 등의 선물에서 지역온천의 숙박권, 그리고 인기 관광명소와 다양한 시설 이용권을 보내준다. 따라서 자신이 선택한 지방자치단체를 응원하면서 기부금의 사용 용도를 정확히 알고 납부할 수 있는 장점에 선물과 소득세 혹은 주민세의 공제 혜택까지 받을 수 있어 해마다 이용자들이 크게 늘고 있다. 도입 첫해인 2008년 기부자는 총 3만 명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2014년에는 총 15만 명이 참가했다. 사이타마(埼玉) 현에 거주하는 요시다 씨(32세)의 경우 맞벌이 부부로 세살짜리 딸이 있는데, 연간 세대 수입은 650만엔으로 ‘후루사토 납세’ 공제 한도는 약 12만4000엔에 실제로는 군마 현과 나가사키 현의 두 군데에 총 10만 엔을 기부하고 있다. 세금 환급으로 결국 자기부담 2000엔에 불고기와 스키야키 세트 1.1kg×5세트, 고시히카리 쌀 10kg×3세트, 양식 참치 400g×2세트 등을 선물로 받았다. 한편 ‘후루사토 납세’는 장기적으로는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에 태어난 사람을 비롯해 해외 귀국 자녀, 그리고 일본 거주의 외국인들에게도 제2의 고향을 자신이 직접 만들어 간다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또한 지방자치단체로서는 그 지역의 특산물을 일본 전국에 홍보하는 한편 각종 숙박권과 시설권으로 관광객 유치의 효과도 노릴 수 있어 2, 3차적인 경제적 연쇄효과가 기대된다. 일본 전국의 ‘후루사토 납세’ 특산품과 혜택, 그리고 기부금의 사용 용도를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관련 사이트 운영도 점차 늘어나고 있어 새로운 비즈니스의 모델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일본 경시청 보고서는 2011년 당시 1만5878명 사망, 6126명 부상, 2713명 실종을 확인했다. 또한, 25만4204동이 반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건물 12만9225동이 붕괴되었고 69만1766동은 부분적으로 손상을 입었음을 확인하였다. 기부금은 ‘마을자원보전기금’에 적립돼 자연환경 보전활동 등에 쓰인다. 매년 일본 전국의 대표 지역 홍보 마스코트를 대상으로 인기투표가 실시되고 있다. 2015년 그랑프리 투표 사이트 는 다음과 같다. www.yurugp.jp/vote/ 예를 들어 5만 엔까지 공제가 가능한 사람의 경우 ‘후루사토 납세’로 5만 엔을 지방자치단체에 보낼 경우 2000엔을 제외한 4만8000엔의 세금이 되돌아오며, 거기에 1만 엔당 3000~5000엔 상당의 그 지역 선물까지 받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다. 결국 ‘1만 엔을 기부하면 답례로 쌀 10㎏을 받을 수 있다’는 지방자치단체 5군데에 ‘후루사토 납세’를 하면 자기 부담 2000엔에 50㎏(10㎏×5)의 쌀을 손에 넣을 수 있다.
- 2015-12-31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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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홍의 와인여행] 와인을 마시면 건강하게 장수한다?...프렌치 패러독스
- 달팽이 요리를 즐기는 나라, 그러나 시속 300㎞가 넘는 TGV가 달리는 나라, 프랑스. 말을 할 때 여러 가지 내용을 횡설수설하는 것 같아도 귀담아들어보면 앞뒤 논리가 잘 맞는 기막힌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세계의 유행과 패션을 리드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유행이나 패션에 별 관심이 없는 나라. 수많은 명품을 생산하지만, 실제 거리에서는 우리나라의 강남과는 전혀 다르게 명품을 찾아보기가 힘든 나라. 모든 게 느리고 엉성한 것 같지만, 또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이상한 나라. 담배를 많이 피우기로 유명하며 운동은 별로 즐기지 않지만, 세계에서 가장 장수하는 나라, 프랑스. 이쯤 되면 프랑스를 ‘패러독스의 나라’라고 해도 될 성싶다. 오랫동안 프랑스인들의 건강과 장수의 비결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이에 착안해 1991년 11월 미국의 CBS 방송은 이 주제로 를 꾸며보기로 결정하고, 리용(Lyon)에 있는 국립보건의학연구소(INSERM)의 르노(Serges Renaud) 박사의 연구소를 방문한다. 목적은 지방이 많은 음식을 즐겨 섭취하고, 흡연도 많이 하는 반면 운동은 미국인에 비해 적게 하는 프랑스 사람들의 심장병 사망률이 현저하게 낮은 이유와 장수하는 까닭 등 간단하지 않은 주제를 풀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미스터리는 그때까지 과학적으로 전혀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인터뷰 중에 르노 박사는 조심스럽게 하나의 가정을 내세운다. 이 미스터리를 푸는 데 와인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그는 소량의 와인을 규칙적으로 마시는 것이 심장혈관 계통의 질병 예방에 효과가 있으리라 전망했다. 이 방송은 전 미국을 열광케 했다. 1993년부터 1996년 사이 미국인의 와인 소비는 두 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그리고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증폭시키는 효과도 가져왔다. 과연 프렌치 패러독스는 존재하는 것일까? 프랑스 북부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심장병 사망률과 평균 수명은 유럽 여느 나라의 평균과 비교해 볼 때 크게 차이가 없다. 그러니 프렌치 패러독스는 프랑스 하고도 남부 지중해 연안의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남쪽 사람들의 느긋한 생활 태도, 신선한 과일과 야채의 다량 섭취, 온화한 기후 등이 와인과 함께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니 프렌치 패러독스라기보다는 ‘지중해 패러독스’라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와인은 2000년 동안 유일한 항생제 고대 사회 이래로 와인은 인간의 근심을 잠재우고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효력이 있다고 알려져 왔다. 사실 서구 사회에서 와인은 2000년 동안 유일한 항생제이기도 했다. 중세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와인은 치료제로 간주되어 열이 날 때, 통증을 줄이기 위해, 설사를 멈추게 하기 위해, 장티푸스나 빈혈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들이 처방하던 약이었다. 외부에 상처가 났을 때도 바르는,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처럼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다. 루이 14세의 주치의 파공(Fagon)은 절대군주에게 건강을 위해 화이트 와인 대신 부르고뉴 산 레드 와인을 마실 것을 처방했다는 기록도 있다. 영국의 의사인 허버든(Herberden)은 일찍이 1786년에 와인이 협심증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준다고 기록했다. 프랑스의 경우는 1954년까지 모든 병원이 환자들에게 아침을 제외한 매끼 와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와인을 “늙은이의 우유”로 부르기도 하는데, 와인의 강장제적 효능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와인 구성성분이 무려 800여 가지 그렇다면 와인이 정말 건강에 좋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와인의 구성성분을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와인을 구성하고 있는 생물학적, 화학적 성분은 놀랄 만큼 다양하고 복잡하다. 지금까지 밝혀진 성분만도 800여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구성 성분이 다양한 만큼 각각의 함유량도 크게 다르다. 물(80∼90%), 에틸알코올(7∼10%)을 제외한 나머지 성분들은 극소량이 들어 있다. 그러니 와인을 마시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선하고 깨끗한 수분을 섭취하는 행위다. 그 밖에 와인에 함유된 성분 중에는 산(acid), 포타슘, 칼슘, 소듐, 철, 황산염, 인 등이 있다. 와인 속의 산은 인간의 위액과 아주 흡사하여 소화 촉진을 돕는 것으로 알려졌다. 포타슘과 황산염은 이뇨 효과가 있다고 한다. 와인에는 질소 함유물과 20여 종의 아미노산도 들어 있다. 아미노산 중 일부는 인간의 피 속에 들어 있는 것과 비슷한 농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최근 의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와인에는 지용성 비타민만 들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비타민 P는 혈관의 모세관을 강화시켜 주며, 출혈(일혈)과 수종(부종)을 막는 데 효과가 있다고 한다. 와인에 함유된 또 다른 성분으로는 산화제, 환원제와 셀레늄·크롬·아연·동·마그네슘·불소·요오드·비소 등의 금속 촉매, 그리고 효소 촉매들이 있는데, 생명의 근원인 세포번식에 필요한 화학적 작용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요소들이다. 뿐만 아니라 와인에는 지금까지도 상당부분 신비의 베일에 싸여 있는 와인의 향을 구성하는 여러 물질들과 다양한 종류의 페놀(polypenols)이 들어 있다. 특히 페놀은 강력한 산화 방지 효과가 입증되어 중요한 연구의 주제가 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레드 와인에 함유된 타닌도 많은 연구가들의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와인에 포함된 성분 중에는 인체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많기에, 와인이 건강에 좋다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오랜 역사를 통해 보나, 현대의 첨단 연구 결과를 보나, 와인이 분명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주의하라! 아직도 많은 연구가 진행 중이라 섣부른 속단으로 우리의 소중한 건강을 담보하기는 충분하지 않다. 다음으로 와인 속 수많은 성분들이 섭취 후 정확히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마시는 사람의 체질에 따라 흡수력이 다르다는 것도 문제다. 셋째로 각자의 생활 습관이나 식습관 등이 다르기에 와인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만을 따로 증명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이다. 와인은 치료약이 아니다. 일정한 조건에서 마실 경우 일부 성인병 예방에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와인을 마시기만 하면 성인병 예방에 도움이 되는가? 그것은 절대 아니다. 이 점에 한해서만은 모든 연구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와인이 성인병 예방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규칙적으로 소량을 마실 때만 가능하다고 한다. 부연하자면 하루에 2∼3잔을, 그것도 식사 중에 마실 때만 가능하다고 한다. 와인이 무슨 처방약도 아니고, 이렇게 마시다가 오히려 스트레스가 더 심해질 수도 있다. 그러니 알랭 쉬프르(Alain Schifres)의 다음 말을 음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최고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와인이 여러 질병을 예방한다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행운을 가졌다. 나는 심장을 위해 한 잔을 마신다. 두 번째 잔은 암을 막기 위해 마신다. 세 번째 잔은 건강한 내 몸을 위해 마신다. 그리고 그 이상은 기쁨을 위해 마신다.” 와인이 건강에 좋다는 설이 난무하면서 - 건강에 무척 민감한 우리들이기에 - 이에 영향을 받아 와인을 마시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건강을 위해서라면 몸에 이로운 다른 것도 얼마든지 있다. 페니실린을 발명한 플레밍(Alexander Fleming)의 말로 결론을 대신한다. “페니실린은 병을 치유하지만, 진정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와인이다.” 그리고 기분이 좋을 때 엔도르핀이 높아지므로 우리의 면역 체계는 자연적으로 강화된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바란다. ‘적당히 그리고 즐겁게’, 이것이 질병 예방을 위해 가장 바람직하게 와인을 마시는 방법이지 않을까? >> 장 홍 (張洪)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국제관계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프랑스 알자르 소믈리에협회 준회원이며,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살펴본 와인, 인류역사 속 와인의 의미와 파워, 예술 인문학을 통해 본 와인 등에 대해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 2015-12-09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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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홍의 와인여행]와인과 야누스...단순한 알코올인가 문화적 산물인가
-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야누스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신이다. 선한 면과 악한 면, 즉 양면성을 지닌 신이다. 그런 면에서 와인도 어딘가 야누스를 닮았다. 와인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역할에 대해서는 오랜 역사를 통해 다양한 접근과 분석이 진행되었다. 반면에 와인과 건강에 대한 본격적이고 과학적인 논의는 최근의 일이다. 물론 고대 그리스 이후 와인은 소량을 규칙적으로 마시면 건강에 유익하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정설이었다. 이는 의학적인 진실이라기보다는 오랜 세월 생활을 통해 사회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공유된 진실이었다. 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은 이 저서에서 “만약 밀이 우리의 오랜 역사에서 산문이라면, 포도나무, 특히 와인은 시이며 우리 국토의 경치를 밝히고 고귀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와인이 지닌 문화적 상징성을 그야말로 시적으로 잘 정리하고 있다고 보인다. 얼마 전 스페인 의회가 와인을 다른 알코올과 분명한 차별이 있는 ‘문화적 산물’로 제정한 것도 맥을 같이 한다고 보인다. 그러나 의사들의 주장은 경치를 밝히고, 고귀하게 하는 양지쪽보다 햇빛이 들지 않는 음지쪽을 드러내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와인이 문화적 산물이 아니라 단순히 알코올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으며 와인이 알코올 중독과 암의 유발을 높인다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와인에 대한 의학적 관심은 매우 최근에 들어와서야 불기 시작했다. 그 본격적인 시작은 1990년대 초반으로 르노(Renaud) 박사가 ‘프렌치 패러독스(French paradox)’를 주장하면서부터다. 이와 더불어 와인과 건강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여러 나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와인이 심장혈관계통 질병, 알츠하이머 등에 예방효과가 있다는 주장과 더불어 와인은 여느 다른 알코올과는 성격과 특성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는 반면, 와인도 다른 알코올과 다를 바 없이 건강에 해롭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리고 이들의 논쟁은 날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2009년 2월 프랑스 국립 암 연구소(L’Institut national du Cancer: Inca)가 배포한 브로슈어에는 시한폭탄이 하나 장치되어 있다. 내용인즉 한 방울의 알코올(와인 포함)이라도 마시는 순간부터 암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수백 년 이상 하루에 한두 잔의 와인은 건강에 좋다는 믿음과 신화가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었다. 국립 암 연구소의 발표는 곧바로 거센 반발과 논쟁을 촉발했으며, 뜨거운 감자는 지금까지 식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때로 거칠기까지 한 논쟁은 일반 소비자들을 더욱 어리둥절하게 한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소량의 와인도 암을 유발하는가?’라는 가장 단순한 질문에 확실한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니 말이다. 1인당 연 평균 와인 소비량이 54리터나 되고, 450여 AOC를 자랑하며, 6000만 헥토리터(1헥토리터=100리터)를 생산하며, 100억 유로(한화 약 13조원)의 매출(단일 상품으로는 곡물류 다음)을 기록하는 주요한 경제적 산물이다. 게다가 사회문화적으로 와인 소비가 권장되는 분위기이며, 와인 관련 업자들의 막강한 로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 같은 내용은 가히 충격이었고 마른하늘에 천둥 같은 것이었다. 프랑스 국립 암 연구소의 발표는 국내의 일부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자, 이제 거칠고 뜨거운 논쟁에서 조금 비켜나 여러 전문가들의 상반된 주장을 차분히 한번 검토해 보자. 이것만이 와인을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나름대로의 판단 기준을 제공해 줄 수 있는, 현재로서는 유일한 방안이라 믿기 때문이다. 우선, 와인은 화학적으로 보면 다른 여느 알코올과 같다. 모든 알코올음료처럼 와인도 에탄올 몰레큘라(CH3, CH2, OH)를 함유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연구는 에탄올이 인체에 해롭다는 것을 명확히 증명하고 있다. 통계상으로 보면 알코올은 프랑스에서 담배 다음으로 피할 수 있는 사망 원인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직접적인 원인 외에도 알코올로 인한 교통사고, 폭력 등에 의한 사망을 합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공공 건강의 열렬한 수호자인 클로드 고트(Claude Got) 교수는 자신의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리고 있다. “알코올은 두 얼굴을 가진 제품이다. 그것을 마시는 즐거움과 생산하는 자들 혹은 판매하는 자들의 경제적 부라는 측면과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재앙이란 측면이다. 그리고 후자는 중독, 사고, 폭력, 간경화, 정신질환, 암 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한 잔의 와인이라도 건강 걱정 없이 마음 편하게 즐길 수는 없다는 말인가?’라는 절박하면서도 핵심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와인은 알코올음료임에는 분명하지만, 다른 알코올음료와 확연히 구별되는 아주 특별한 알코올음료다. 그 이유는 와인을 구성하는 화학적 생물학적 성분이 다른 알코올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한 잔의 와인 속에는 수백 가지의 몰레큘라가 들어 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포도 껍질과 씨 속에 다량 함유된 강력한 항산화성 물질인 폴리페놀이 주목을 끌고 있다. 폴리페놀의 특성 중 일부는 나쁜 콜레스테롤의 형성을 막아 심장 혈관 계통의 질병 예방에 효력이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체중 감소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졌다. 또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와인은 알츠하이머 등에 예방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이런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와인과 암 유발에 대한 연관성은 확실하지 않은 만큼 복잡하여 뒤에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이제 ‘와인의 효과를 최대한 누리기 위해 적절한 양은 얼마인가?’ 하는 매우 예민하고 까다로운 질문이 남았다. 이 점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의 의견은 상충하고 있다. 소량을 규칙적으로 소비할 때 일부 병에 대한 예방 효과가 있다 해도,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상황적 분위기나 개인적 성향과 알코올 분해 능력, 성별, 유전자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적당한 양만 소비하기가 무척 어려운 사람들, 특히 젊은 층에게는 권유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간에서 알코올 분해 효소를 관장하는 유전자가 다르다. 아시아인의 50%는 알코올 분해 효소가 활동하지 않으므로 구토, 붉은 반점의 출현, 어지럼증 등의 현상이 나타나 알코올화 진행이 중단되는 반면, 유럽인들에게는 이런 예방적 현상이 전혀 없다고 한다. 알코올 중독 예방에 관한 한 동양인은 서양인에 비해 유전적으로 유리한 입장을 타고났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와인의 적절한 소비량에 대한 기준은 존재하는가? 대답은 ‘없다’이다. 프랑스의 건강을 위한 국립 예방 및 교육 연구소(Institut national de prevention et d’education pour la sante)나 세계 암 연구 기금(World Cancer Research Fund : WCRF)이나 프랑스 국립 암 연구소의 결론은 와인 소비의 적절한 양을 결정할 수 없다(no threshold is identified/pas de seuil indentifie 혹은 보다 확실하게 There is no threshold/il n’y a pas de seuil)라는 것이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건강을 생각하며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권장할 수 있는 충고는 규칙적(매일 혹은 거의 매일)으로 소량(2~3잔)을 식사 중에 마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로부터도 공격당하지 않고 확실하고 안전하게 추천할 수 있는 것은 알코올이 함유되지 않았지만 와인 이상으로 폴리페놀을 함유하고 있는 다른 음식이나 음료를 즐기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커피, 녹차, 초콜릿 등에는 와인보다 월등히 많은 폴리페놀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와인이 주는 독특한 즐거움과 분위기는 결코 제공해주지 못할 것이다. 와인은 여전히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와인의 진정한 매력일 것이다. >> 장 홍 (張洪)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국제관계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프랑스 알자르 소믈리에협회 준회원이며,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살펴본 와인, 인류역사 속 와인의 의미와 파워, 예술 인문학을 통해 본 와인 등에 대해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 2015-11-1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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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만사]노환규 전 의협회장의 ‘나의 가족과 삶’
- 지난 몇 해 동안 노환규(盧煥奎·53) 전 의협회장을 만날 땐 의료제도와 관련해 특종이 될 만한 거침없는 발언을 기대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주문을 던졌다. 오해도 많고 굴곡도 많은 그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듣고 싶다고 했다. 할 말은 다 하는 그이지만, 막상 본인의 속내를 꺼내 놓으려니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 사무실 근처에서 가볍게 소주 한잔을 걸치고 가슴에 담아온 이야기를 시작했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중학교 때 만난 첫사랑과 결혼해 말다툼 한 번 없이 약 30년의 세월을 지내왔다는 것이 믿기십니까? 제가 바로 산 증인입니다. 단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어요. 모든 걸 받아줬던 아내 덕분이죠.” 중학교 3학년생 노환규는 과외 그룹에서 한 소녀를 만난다. 원래는 친구가 좋아하던 여학생이어서 그 둘을 이어주려 했는데 결국 친구랑은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어느 순간 마음에 쏙 들게 됐다. 고 1때 결혼을 해야겠다고 작정하고, 장기적인 구애에 들어갔다. 노환규는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고 그 여학생과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한다. 그리곤 1986년 졸업과 동시에 결혼에 골인한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과외를 같이 하던 중학생들이 중년의 나이가 됐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부 금실이 좋은 것은 온전히 아내의 포용력 덕분입니다. 전 젊은 시절에 모든 결정을 순식간에,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끌고 가곤 했어요. 교만했던 시절이었죠. 자기중심적인 인간, 그게 저였다고 생각해요. 제 아내가 아니었다면 부부싸움을 해도 수백 번 했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결혼 전 계획했던 미국 이민을 갑자기 포기했던 일, 2시간 고민하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아주대병원으로 이직을 결정해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사를 가야했던 일, 교수직과 미국유학을 포기하고 비즈니스를 해야 하겠다고 결심했던 일.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상의 없이 결정 후 아내에게 통보하곤 했던 그였다. 그런 그를 묵묵히 응원하며 살아온 그녀의 사랑은 그 무엇보다 넓었다. 사망판정, 그래도 잘 자란 아들 아내의 임신소식에 깨가 쏟아지던 신혼 초기였는데 문제가 생겼다. 임신 5개월째, 아내의 배가 이상하게 오른쪽만 불러 왔다. 초음파 검사 결과, 자궁이 둘로 나뉜 ‘쌍각자궁’으로 판정됐다. 당시 흉부외과 인턴에 불과했던 노환규는 겁이 났다. 쌍각자궁은 아기에게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질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심초사하면서 출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부인과 교수를 찾아갔지만 안정을 취하라는 말만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온 지 10분도 안 됐는데 화장실에서 양수가 터지고 몸 밖에 탯줄이 나와 있었다. 곧바로 응급실에 찾아갔지만, 결국 아이는 사망 판정을 받게 된다.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 말로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인턴 신분이니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죠. 응급수술이 지체돼 태아가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던 교수는 뱃속에서 아이를 꺼내자마자 수술실을 떠났어요. 하지만 간호사가 사망하지 않은 사실을 발견해 신생아 중환자실에 옮겼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 뇌출혈도 판정받게 됐고 담당 교수는 포기를 권했습니다. 그때 인큐베이터의 산소 공급도 중단했습니다. 부모님은 장례까지 준비하고 계셨죠.” 그러나 사망 판정을 받았던 노환규의 아들은 걱정과는 달리 잘 컸다. 단지 걸음마가 다른 아이들보다 느렸을 뿐 건강하게 자랐다. 행운이었다. 아들은 이제 29세, 멋진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청년으로 자라났다. 의사가운 입은 채 의료사고를 말하다 아들이 사망 판정을 받았던 순간은 그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조금만 더 성실한 진료를 해줬으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의료사고에 대한 생각이 다른 의사들과는 달랐다. 같은 의사라고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숨기기만 한다면, 그게 의료의 신뢰 하락으로 이어질 테고 분명히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는 무서움을 몸소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전국의사총연합 대표로 일하던 2011년, 의사 가운을 입고 지방 모 대학병원 앞에서 의료사고 해명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감행한다.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항암제를 바꾸어 주사하는 바람에 사망한 아홉살 백혈병 환아 종현이 사건 때문이었다. 대한의사협회장이었을 때도 이 사건에 대해 당당하게 말했다. “그것은 의료사고입니다”라고. “의료사고는 지금도 그렇지만, 의료계에서 다들 쉬쉬하는 부분이죠. 100% 막을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양심을 저버린 대학병원 교수진의 조직적인 사실 은폐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검찰이 6개 대학병원에 종현이와 관련된 소견서와 의무기록을 달라고 했지만, 모두 거절한 상태였습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나서지 않는다면 당신은 문제의 일부다’라는 말이 머릿속에 계속 남았죠. 제가 나서야만 했습니다. 의사 가운을 입고 말이죠. 그래서 지금도 저를 싫어하는 의사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 방법이 옳다고 믿습니다.” 지난해 말 종현이법으로 불리는 ‘환자안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의사가 의료적 오류를 범했을 때 병원에 마련된 전담인력인 환자안전위원회에 ‘자율’ 보고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다만 의무보고와 이를 어길 경우 제재하는 내용은 빠진 상태다. 의료사고를 숨기기만 했던 분위기는 개선은 됐지만, 앞으로 갈 길은 멀다. 의료계의 ‘돈키호테’ 의료계에서 노환규는 아주 특별한 인물이다. 선배 중심의 의료계에서, 그것도 의사회, 학회의 지지기반이 없는 인물이 2012년 5월 제37대 의사협회장이 된다. 한동안 의료계 메시아라고 칭해지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돈키호테가 됐다. 결국 그는 임시 대의원총회에서 탄핵 당하고 만다. 106년 역사의 의사협회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심경을 듣고 싶었다. “불명예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고 막을 수도 있었던 임시 대의원총회였습니다. 누구에게도 탄핵을 저지하기 위한 전화 한 통 하지 않았어요.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제가 탄핵됨으로 해서 협회의 대의원제도를 개혁하고 싶었습니다. 회원들이 뽑지 않은 250명의 대의원이 힘을 행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전략적으로 잘못된 부분(탄핵 후 소송을 통한 제기)이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저처럼 특이한 케이스가 나타나서 판을 흔들어야 협회가 발전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게 1년 여의 시간이 지났고, 그의 목적이었던 대의원제도가 일부 바뀌었다. 올해 최초로 대의원들이 직선제를 통해서 선출됐기 때문이다. 그가 의협을 떠났어도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다. 할 말을 할 수 있는, 그 뜻 그의 발언은 세다. 쉬쉬하지 말고 아예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자는 방식이 주를 이룬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전문의 평균 연봉은 9200만원인데, 세후로 따지면 600만원이 안 된다. 국민들은 의사 연봉이 3000만원이길 바라지만, 3000만원 받는 의사에게서 심장수술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방식의 차이겠지만, 솔직한 발언을 쏟아내 호불호가 갈리는 그는 그래도 할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가 할 말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이유는 좋은 아내와 든든한 아들이 버팀목이 돼 주고 있고, 부모님도 여전히 건강하신 상태고, 종합적인 행복지수가 높아서일 수도 있어요. 전 웃지 않으면 화났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 굉장히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감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남들이 모른 척할 때, 할 말을 해야 하는 게 제 삶의 임무겠죠.(웃음)” 기자가 알아본 바로는 노환규 전 의협회장은 정치권에서 수차례 러브콜을 받은 바 있다. 그래서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혹시 정치권으로 들어갈 의향이 있는지 넌지시 물어봤다. 답변은 간단했다. “가슴 뛰는 일, 따듯한 일을 하고 싶은데 정치는 그렇지 않잖아요.”
- 2015-08-19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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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이 아침] 두 번째 인생의 길에 가족 그리고 FTA
- 국가 경제의 90% 이상을 무역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최근 몇 년 동안 차례차례 세계 각국과 FTA를 진행하면서 산업 풀을 넓히고 있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갈등과 문제 제기가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과연 FTA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한국FTA산업협회는 그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설립된 국내에서 유일한 FTA 전문 민간 단체다. 이창우(李昌雨·62) 한국FTA산업협회 회장은 삼성종합상사를 거쳐 전자상거래, 전자무역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전자무역협회장 및 서강대학교 국제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한 현장 전문가 출신의 FTA 전도사. 그가 조찬회에 나가 끊임없이 공부하는 이유를 들어본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안타까운 점이 참 많습니다.” 이창우 한국FTA산업협회 회장에게 FTA의 현재 상황에 대하여 물었을 때, 나온 말이었다. 이는 FTA 추진의 난맥상을 그대로 드러낸 목소리였다. 이 회장은 20여 년 전 종합상사맨으로 있었던 시절 미국의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추진에 자극을 받고 전문가가 없는 국내에서 사실상 홀로 FTA에 대해 독학한 실무형 전문가다. 사실 FTA는 국민적 관심사라기에는 너무 전문적인 인상을 주지만, 동시에 의사결정권의 세계에서는 정치 게임으로 다뤄지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 회장 입장에서는 답답할 만도 할 것이다. 국제경쟁력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이 회장은 우리 사회의 국제경쟁력이 어떤지에 대한 평가를 기준으로 FTA에 대한 사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우선 진정성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FTA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잘 모르고, 정치적 수준에서 말을 합니다. FTA를 언급하려면 경쟁 국가들과, 국제적 흐름을 보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국내용으로만 언급하고, 대부분 FTA 정책도 국내용으로 추진됩니다.” 또한 그는 실무 경험자로서 교역 현장의 팩트 반영이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FTA 협정문을 제대로 반영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상황을 보면 한·미 FTA 24개 항목 중 2개만 반영되는 수준이며 한·중 FTA 22개 항목 중 2개 수준만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변호사가 법전을, 스님이 불경을, 목사님과 신부님이 성경을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회장은 양자, 다자, 복합, 복수국가 FTA 등 FTA 자체가 급속도로 진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도 앞으로 미국과는 3개, 싱가포르와는 5개, 베트남과 5개, 중국과 총 6개의 FTA 체결이 예상되는 등 복합 FTA가 급속히 중가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 국가들은 우리나라 말고 다른 나라들과도 계속 FTA를 추진하고 있는데 현재의 FTA 정책, 교육, 컨설팅 등은 미국, 중국이 우리나라하고 딱 하나의 FTA만 체결한다는 가정 하에 정책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입니까?”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는 ‘가족’ FTA의 현실에 대한 이 회장의 단호한 견해는 그가 가진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회장도 자신이 만약 FTA 전문가가 되지 않았다면 교육전문가가 되었으리라고 말한다. “아들들이 저보고 학원 선생님 했으면 명강사로 돈 많이 벌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남들이 안 하는 FTA 전문가가 되어 죽창에 찔릴 뻔하고, 멱살 잡히고, 밀가루를 뒤집어쓰는 등 고생만 하고 돈은 못 버는 가장을 원망하는 소리겠지요.” 일만 하며 살아온 이 회장이 가족에게 느끼는 빚은 컸다. 현재의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가족이 된 이유는 너무나 바빴던 그의 삶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저는 대기업, 종합상사맨으로서 정말 바쁘게 앞만 보고 살았어요. 그 사이에 가족의 희생이 너무 컸습니다. 지금도 가슴 아프게 하는 기억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젊었을 때 제가 하도 가족을 돌보지 못하니까, 어느 날 아내가 작정한 것처럼 아이들 좀 한번 보라고 하더라구요. 그때 아이들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정말 아이들이 얼마나 귀엽고 예쁜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아이들과의 대화는 아이들이 군대를 갔다 와서야 비로소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둘째가 중학교를 다닐 때 아빠하고 대화를 하고 싶었는데 아빠는 신경도 안 썼다고 말하더군요. 밤늦게 들어와서 새벽에 나가고 토요일, 일요일도 없었으니까요.” FTA로 제2, 제3인생을 빚다 가족을 포기한 대신 일에 매달려 살던 이 회장의 삶은 현재의 그에게 FTA 전문가라는 보상을 해주고 있었다. 그에게 인생 후반전, 제2의 인생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물었다. “제가 올해로 6학년 2반인데요. 베이비부머, 실버, 시니어 등의 대표적인 나이지요. 저는 FTA로 제 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분야는 전 세계가 FTA를 둘러싼 극단적인 경쟁을 하고 있어서 고도로 전문성이 필요하지만, 국내에는 상대적으로 FTA 전문가가 거의 없습니다. 전국적으로 원산지·통관 분야만 다루는 관세사 외에 종합적으로 FTA를 다룰 수 있는 전문가는 10명도 채 안 됩니다.” 이 회장은 FTA가 일자리의 보고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 회장은 은퇴한 무역전문가들을 200명 선발하여, 200시간의 FTA 교육을 통해 FTA 전문가로 양성했다. 200명 중 48명이 취업 및 창업을 했고, 100명 이상이 현재 FTA 전문가로 활동 중이며 일부는 해외까지 진출한 상태라고 한다. 또한 전통적으로 FTA에 대한 반감이 가장 높은 농업 분야에서도 40여 명의 FTA 전문가를 양성하여 활용 중에 있다고 한다. “FTA 관련 정보를 다루는 분야는 대표적 블루오션으로서 앞으로 약 10만 명의 FTA 전문가가 필요한데 이들을 양성하는 데 진력하다 보면 저도 70대가 되지 않을까요? 70세가 넘으면 쉴 생각입니다.” 내 삶을 완성하는 데 쉼 없는 배움 지식포럼을 자주 나가는 이유는 지혜를 배우려는 것. 선배들에게서 머릿속에 있는 지식의 암묵지(暗默知)를, 머릿속에 지식을 글이나 그림으로 정리한 형식지를, 몸으로 체득한 지식의 경험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조찬 포럼을 찾아다니는 마음가짐은 무엇일까? “우선 저는 요즘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쉬움도, 원망도, 욕심도, 미움도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어렵지만 그렇게 노력하다보니 마음이 편하고 행복해집니다. 살아 있는 것만도 축복이니까요. 그리고 시대에 적응하려고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아빠 때문에 걱정이라고 종종 말합니다. 그러면서 3가지를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더군요. 젊은 사람들이 아빠 앞에서 담배를 피워도 야단치지 말기, 전철에서 젊은 남녀들이 껴안고 뽀뽀를 해도 나무라지 말기, 길 가다 어린 아이들이 예뻐도 쳐다보거나 머리를 쓰다듬지 말기가 그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기준과는 너무도 먼 화성과 금성 같은 이야기이지만 적응해 보려고 노력중입니다. 이제는 아이들이 나를 걱정하는 시대예요. 그러니 제가 노력해야지요.” 마지막으로 이 회장은 주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자 한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면 저는 주위의 도움과 은혜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위치에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크게는 국가·사회, 작게는 가족·친구·이웃 등 모두 감사하지요. 그리고 나이 든 사람에게는 보물이 4개가 있다고 하는데 이를 소중히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바로 늙은 몸(건강), 조강지처(부인), 오래된 친구(친구), 노후 자금(돈)입니다. 특히 돈 없는 노후는 100세 시대의 재앙이라고 생각합니다.”
- 2015-06-03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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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avo Life]“읽고 쓰고 웃어라”
- 30~40년 전까지만 해도 이상헌의 칼럼이 실리지 않은 여성지가 없었다. 세계일보 칼럼 1000회를 기해 시작한 ‘기쁨세상’은 한 달에 한 번씩 가진 모임이 200회를 훌쩍 넘겼다. 이상헌(李相憲·79) 한국심리교육협회 회장은 이 모임에서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전파한다. 그는 감사와 기쁨, 이른바 ‘감기’가 자신을 살렸다고 말한다. 강연과 집필활동의 메시지도 다르지 않다. vk팔순이 다 된 나이에도 섹시한 뇌를 가진 이상헌 씨의 늙지 않은 삶의 나침반을 찾아봤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아기일 때 양잿물을 실수로 마신 저를 동네 장정들이 거꾸로 들고 병원까지 20리 길을 달려가 경추 연골이 닳아 체머리가 생겼고 이렇게 머리를 흔들어대고 있기 때문에 두뇌가 개발됐고 성장판이 늘어나 키까지 컸어요.(웃음)” 이상헌 회장은 ‘예비된 화였지만 화를 품은 복이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집필한 책만 150여 권, 이 중 등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3년 전에는 국민성공시대 대한민국 CEO독서대상도 수상했다. 평생 동안 어림잡아 한 2만권쯤 읽었다. 읽고 쓰는 일에 대해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연명하느라 절실히 매달렸다”고 표현했다. 어린 시절부터 얼마 못 산다는 선고를 수시로 들었다. 그만큼 몸이 여러 질병에 시달린 터라 몰입만이 고통을 잊을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책을 읽었고 방송을 했고 강연을 하며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했다. 그의 대표작 도 이런 그를 우려하는 어머니의 말에 대한 가르침에서 시작됐다. “제가 ‘아파죽겠다’고 하니까 어머니가 그러더시더라고요. ‘죽겠다고 하면 죽는다. 아프면 견딜 만하다고 해라’라고. 그래서 통증이 죽을 것 같을 때도 ‘견딜 만하다’고 말하니까 또 견딜 만하게 변하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죽지 않을까, 생명을 연장시킬까’하고 살아온 그는 “고난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예방주사와 같다”고 한다. 80년이 가까운 세월을 견디며 살아왔다는 그는 자신의 평생에서 지금이 가장 젊고 근사하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드는 것이야 어쩌겠냐마는 모든 기능상으로 가장 젊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전에는 늘 불안, 초조에 시달려 생전 웃지 않던 그는 70세가 넘으면서 해탈했는지 웃는 표정도 갖게 됐다. 그는 요즘 나이가 들수록 건강이 좋아지고 있다고 한다. 70대가 넘으면서 그를 괴롭히던 병들과 아픔도 하나둘 떠나가고 ‘오늘이 가장 젊을 때이고 지금이 가장 행복한 때’라고 한다. ‘감기’가 그를 살렸다…‘운을 부르는 남자’ 그는 매일 일기를 쓴다. 다만 일기장에 그날의 일 중 고마웠던 것, 좋았던 것, 기뻤던 것만 적는다. 그러다보니 매일 좋은 날이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살다보니 평생 그를 괴롭힌 아픔도 감사할 일이다. 그는 “아픔도 즐기자고 마음먹었어요. 난 아파보니까 안 아픈 게 얼마나 행복한지도 알고, 다른 사람들 만나서 얘기할 수 있다는 것에도 감사하게 됐죠. 남들은 못 아파봐서 모르잖아요.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감사한데 뭐가 문제겠어요”라며 질곡의 삶에서 나온 긍정을 드러냈다. 감사나 감동할 때 엔도르핀의 4000배가 되는 다이도르핀이 생겨 신체의 각 기관을 새롭게 만들어 주는 기적을 경험한 그이기에 가능한 것. 그는 어려서부터 오랜 투병 생활을 해서인지 의사들은 40세를 넘기지 못한다고 했다. 몸에 저체온증, 심근경색, 부정맥 등 25가지 병이 있다는 의사의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듣고 나서 그는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갖고 살아왔다. 그래서 두려움을 잊기 위해 눈만 뜨면 책을 손에 쥐었다. 그는 죽음의 두려움을 잊기 위해 15년 동안 책 1만여 권을 읽었다. 책을 통해서 스스로 희망을 찾고 행복을 배워간 것이다. 책이 그를 변화시키고 희망, 성공과 행복에 대한 베스트셀러 저자로 설 수 있게 했다. 수많은 책을 읽고 강의와 글을 쓴 것도 죽음에 대한 준비였을지도 모른다. 강의를 하다가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가기도 하고 집 앞에서 길을 건너다가 오토바이사고로 의식을 잃기도 했다. 12년 전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을 때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는 허공에 붕 뜨는 느낌이 들면서 기억이 끊겼던 이 사고로 무릎 연골이 상했고 요추 신경을 건드려 걸음이 편치 않아 지금까지도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또한 감사한 일이라고 표현했다. 얘기인즉슨 그 전까지는 매일 바쁘게 강연을 다니고 글을 쓰느라 하루에 2~3시간밖에 자지 못해서 과로가 심했는데, 사고 덕분에 과로사를 피할 수 있었다는 이유다. 또 다리를 다치고 나니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이 눈에 들어오게 됐다고. 다리를 다쳐 거동이 어렵게 되자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와 집필뿐이었다. 그래서일까, 사고로 인해 집필한 책들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전에는 강연과 병행하느라 시간에 치이면서 쓰던 글에 더 집중을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글을 쓸 때는 몰입을 하므로 아픈 게 없다. 방송, 강연도 그렇고 끝나기 시작하면 또 아프다. 고난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예방주사 그는 매일매일 애국가를 부른다. 혹자는 그를 애국자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안 부르면 죽을 것 같아서’ 부른다. 중학교 2학년때 6·25 전쟁을 겪은 그는 피난길 폭격에 형제들을 잃었다. 눈앞에서 둘이 죽고 누이 하나가 중상을 입고 헐떡이는 동안 곧 따라오신다던 부모님이 오실 때까지 공포를 견디기 위해 울면서 애국가를 불렀다. “해는 넘어가고 새소리만 들리고. 아는 노래라고는 애국가뿐이었는데,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니 가사도 얼마나 좋아요. 울다가 노래 부르다가 졸다가 하고 있는데, 새벽 3~4시쯤 저 산 쪽에서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오시더라고요.” 평생 몸과 마음에 고통이 끊이지 않았던 그에게 애국가는 일종의 진통제인 셈이다. 그는 “사람들이 불편한 건 불편한 일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불편한 걸 참다보니 불편한 거예요. 저는 아픔도 즐기거든요. 남들이 못하는 경험을 하는 건데, 돈이 드는 것도 당연하고. 그게 다 제 재산의 일부예요”라며 가급적 긍정적으로 감사한 일을 생각하라고 조언했다. 이 회장은 그를 통해서 사람들이 변화하는 모습에서 기쁨을 찾는다. 완전히 좌절했던 사람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은 그의 전문, 큰 보람 중 하나다. “세상에 나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점만 보니까 나빠 보이는 것이죠. 우리는 항상 자기 입장만 보기 때문에 서로 이해를 못하여 가정도 국가도 힘들어지죠.”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불운의 늪에 빠져 있다면 이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삐걱거리는 한 걸음이라도 움직여야 한다. 한 걸음을 움직이기 위해선 “이렇게 하면 운이 좋아져. 자, 넌 할 수 있어”라고 하는 유쾌한 뻥과 긍정의 마취제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처방이다. ‘내 건강은 내가 지킨다’라는 의욕을 가지고 헤쳐 나갈 때, 뇌는 더욱 더 능력을 발휘한다고 그는 자신한다. “영원히 노화를 막을 수는 없죠. 그러나 죽는 순간까지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살고 싶다는 유쾌한 예방주사 한 방으로 뇌 노화에 정면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살면 재밌잖소.” 그는 개인적으로도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사람들에게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을 쓰면서도 정작 저는 아내(장윤정·70)와 제대로 대화할 시간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에는 아내와 40년 전, 50년 전 추억의 장소를 찾아 함께 식사를 해요. 할 얘기도 많아지고 너무 좋죠.” 매순간 그에게는 삶이 절실했다.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긍정에너지지만, 그의 앞에서 긍정적일 수 없는 일, 감사하지 못할 일이 얼마나 될까. 뇌의 스위치를 온오프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는 그의 노후가 아름다운 이유이다. 이상헌 회장이 제안하다/건강한 뇌, 젊게 사는 법 30가지 01.아침에 깨어나면 맨손체조부터 하라. 에너지가 넘친다. 02. 하루 5분 마음의 양식을 소화하라. 03. 긍정적인 언어만 사용하라. 말대로 이뤄진다. 04. 날마다 30분을 걸어라. 헬스클럽보다 효과가 크다. 05. 친구 3명과 통화하라. 나이 들면 친구가 보물이다. 06. 날마다 친구 1명씩 만나라. 07. 좋았던 기억을 재생하라. 그래야 천국의 문이 열린다. 08. TV시청은 줄여라. 소모적인 프로가 자신을 황폐화시킨다. 09. 미리미리 치아를 손봐라. 호랑이도 이빨 빠지면 맥을 못 춘다. 10. 호기심을 가져라. 그것이 젊음의 비결이다. 11. 하루 100자를 쓰고 1000자 글을 읽어라. 뇌가 젊어진다. 12. 감사와 기쁨을 기록하라. 하루하루 성장한다. 13. 좋은 취미를 살려라. 취미가 없으면 무미건조해진다. 14. 웃음의 시간을 늘려라. 기쁨이 100배로 증폭된다. 15. 피로가 쌓이기 전에 휴식하라. 의사가 필요 없다. 16. 생각의 폭을 넓혀라. 그래야 존경받는다. 17. 노여움, 미움은 뼈를 삭게 만든다. 용서의 달인이 되라. 18. 진실하라. 그래야 자신의 가치가 올라간다. 19. 규칙적인 생활을 하라. 노화가 발붙이지 못한다. 20. 과로는 노화의 주범이다. 알맞게 일하라. 21. 젊은이들과 어울려라. 나도 모르게 젊어진다. 22. 누구에게나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 위험한 말버릇이다. 23. 좋았던 일만 기록하라. 그것이 행복일기다. 24. 통화 대신 편지를 써라. 사고력과 집중력이 향상된다. 25. 손 운동을 하라. 뇌가 활성화된다. 26. 명상을 배워라. 신선 같은 사람이 된다. 27. 남이 잘하는 것을 찾아라. 장점을 보면 행복하다. 28. 불평은 불운을 끌고 다닌다. 좋은 말만 골라서 하라. 29. 누가 뭐라면 맞장구쳐라. 대인관계가 좋아진다. 30. 손주의 그림 하나 정도는 걸어둬라. 감동은 좋은 기운이 난다.
- 2015-06-03 1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