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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순에 첫 시집 낸, 멋쟁이 시니어 정봉애 시인
- 엄마 친구 집 대문을 열다 7월의 뜨거운 열기조차 서늘하게 느껴질 만큼 사무친 그리움을 안고 고향 순창으로 갔다. 얼마 전 뇌졸중이 재발되어 갑자기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나서였다. 한적한 골목길을 거닐다 어느 집 앞에 멈춰 섰다. 엄마의 오랜 친구 정봉애(89) 씨가 사는 집 앞. 한참을 서성이다가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네 엄마가 왼손은 마비됐어도 삶의 의지가 강해 몇 년은 더 살 줄 알았더니, 너무 갑자기 가버렸구나.” 등을 토닥이며 아픈 내 마음을 위로해주셨다. 50년 지기인 두 분은 젊은 시절 학부모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친구가 되어서 보니 어릴 적 가정 환경이 신기하게 비슷했다. 소학교 시절 정봉애 씨는 남원에서, 엄마는 순창에서 우등생이었던 것도 비슷했는데, 같은 상급학교에 지원했다 세월 탓에 좌절한 경험은 아예 똑같았다. 이런 인연으로 두 분은 우정을 돈독히 쌓아왔다. 나이 들어서는 각자 자신이 사는 동네 노인회관 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게이트볼 선수로 여러 대회에 출전도 했다. 또 게이트볼 심판 자격증을 따서 심판을 본 것 등등 두 분은 닮은 점이 정말 많았다. 그런데 이번 만남으로 엄마 친구였던 그녀가 시인으로 등단을 한 사실을 알게 됐다. 엄마가 편찮으신 동안 소식을 잘 듣지 못했는데 이런 축하할 일이 생겼다. 독서를 좋아하던 소녀의 꿈 2014년 월간 ‘문학공간’을 통해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학계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했다. 엄마와 원불교 교당을 같이 다니고, 동갑계모임을 하는 등 그저 평범한 우리네 어머니로만 알았는데 이토록 멋진 시인이 되어 있을 줄이야! 6월에는 첫 시집인 ‘잊지 못하리’가 출간됐다. 더욱이 전북관광문화재단에서 지원금을 받아 시집을 출간했다고. 이 말은 작가로 인정받아 당당하게 낸 소중한 시집이란 뜻이다. 같은 달 말에는 순창문인협회 주최로 시집 출판기념회도 열렸다. 우리 나이로 구순. 100세를 10년 앞둔 정봉애 시인의 새로운 인생에 모두들 박수를 보냈다. 정봉애 씨, 아니 정봉애 시인은 어쩌다 시를 쓰게 됐을까? 문득 시를 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 여쭸다. 1929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정 시인은 비교적 부유한 집 막내딸로 귀하게 자랐고, 아홉 살에 사립 소학교에 들어가 열다섯 살에 졸업했다. 전교 1, 2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했고, 희망하던 공주사범학교 서류전형 합격도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렇게 똑똑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칼바람 불던 세월 탓에 학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한학자였던 부친이 딸의 상급학교 진학을 완강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혹여 딸아이가 위안부로 징집될까 부친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은 간절한 꿈을 접고 정 시인은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전북 순창군 유등면 8남매가 사는 작은 농가의 맏며느리로 들어갔다. 슬하에 7남매를 낳아 기르는 동안에도 틈틈이 책 읽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시동생 친구인 동네 청년들한테 부탁해서 소설, 시, 월간지 가릴 것 없이 책이란 책은 모조리 구해다 읽었지. 시어머니가 호롱불 기름 닳는다고 불 끄고 자라 하면 치마로 문을 가리고 읽었어. 그렇게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지다 보면 시집살이의 고단함도 저만치 날아가곤 했어.(웃음)” 정 시인의 문학적 기질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 시절에도 그렇게 책을 읽었다니 새삼 참 멋져 보인다. “많이 배우지도 못한 사람이 시 쓸 생각이나 했겠나. 2006년에 평생을 같이했던 남편과 사별하고 나서 적적한 마음에 그저 끄적끄적 메모를 해댔지. 그런 습관이 나중에 시를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 맘에 드는 것은 행동에 옮긴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적극적인 성격의 정 시인. 어느 날 순창에서 발행하는 지역신문 ‘열린순창’을 꼼꼼하게 읽다가 무척 마음에 드는 필진을 발견하고 곧바로 신문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 머시냐 저기… 박모 씨 글이 하도 좋아서 그 필진과 인사를 한번 나누고 싶은디. 연락처 좀 알려줄라요?’ 내가 그랬어!” 그 일을 계기로 이 재밌는 할머니(?)의 이모저모를 살피던 신문사 직원이 시 창작 공부를 한번 해보라며, 순창여성회관에서 진행하는 ‘시 창작 교실’을 소개해주었다. 글 읽는 것은 좋아했지만 스스로 써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던 정 시인은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시 창작 교실을 노크했다. “첫 시간에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가니 40, 50대 젊은 친구들이 모여 있더만. 속으로 깜짝 놀랐어. 퇴직하고 나이 지긋한 심심한 양반들이나 있겠거니 생각했거든.” 그래도 기죽지 않았다는 정 시인. 젊은이들 틈에 용감하게 자리 잡고 앉았단다. 자그마한 체구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도전정신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로 공공도서관 등을 찾아다니며 각종 인문학 강좌는 모두 섭렵하다시피 했다고. 특히 일주일에 한 번 가는 ‘시 창작’ 수업을 좋아해 매주 무척 기다렸다고 한다. “시 창작 강의가 너무 재밌어서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어. 선생님이 내준 숙제 꼬박꼬박 하고, 꾸준히 다니다 보니 이런 좋은 결실을 보게 된 것 같아.” 시인 정봉애로 살다 정 시인의 하루는 규칙적이다. 오전 4시에 일어나 요가와 스트레칭을 하고 7시에 아침식사를 마치면 외출 채비를 하고 밖으로 나가 서예, 시창작, 시낭송, 게이트볼 등 그날그날 정해진 일정을 소화한다. 오후 5시 반쯤에는 귀가해서 신문 보고, 시 다듬고, TV 뉴스 잠깐 시청한 뒤, 9시 조금 넘어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든다. 이런 규칙적인 생활 속에서도 정 시인에게는 단 하나 예외적인 것이 있는데, 자다가도 시상이 떠오르면 새벽 1시가 됐든 2시가 됐든 벌떡 일어나 곧바로 메모하는 것이다. 시에 대한 그녀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다. 솟구치는 그녀의 시심은 아주 중요한 순간에 빛을 발하기도 했다. 작년 11월, 순창읍 일품공원에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할 때 정 시인은 순창평화의소녀상건립군민추진위원회로부터 자작시 낭송 요청을 받았다. 당황스러워 “다른 훌륭한 시인도 많은데 왜 나에게 하라는 거냐”며 한사코 거절했다.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과 동시대를 살아온 정 시인이 적임자라며 거듭 요청을 해왔다.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결국 시인이라는 사명감 하나로 밤을 새워 작품을 완성했다. 정 시인은 같은 또래의 위안부 할머니들을 ‘친구’라 부르며 ‘친구여 편히 쉬시라’는 제목의 자작시를 작년 12월 ’평화의 소녀상‘ 건립 행사 때 낭송해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내 사랑, 잊지 못하리 여담으로, 시집 제목을 왜 ‘잊지 못하리’로 했나 여쭸다. “나는 그냥 ‘노인네 넋두리’로 하자 했는데, 내가 쓴 시가 그런 제목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하더만.(웃음)” 할 수 없이 주변에서 권유하는 대로 ‘잊지 못하리’로 제목을 막상 붙여놓고 보니 아주 마음에 든다며 천진스레 웃으신다. 123편의 서정시를 모아 엮은 정 시인의 첫 시집 ‘잊지 못하리’는 정 시인의 요청을 받아 노인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큼지막한 글씨로 인쇄돼 정감을 준다. “내 소소한 일상을 보고 느낀 대로 적어 다듬었을 뿐인데, 노인네 넋두리로 치부하지 않고 주변에서들 공감해주니 어찌 이리 고마울 수 있을까.” 90세 넘은 나이에 시 쓰기를 시작해 일본 열도를 감동시킨 100세 시인 ‘시바타 도요’가 롤 모델이라고 했다. 정 시인은 ‘시바타 도요’처럼 100세가 되기 전에 두 번째 시집을 내보고 싶은 꿈이 생겼다 한다. “시는 이제 영원한 내 친구, 시 쓰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앞으로도 쉬지 않고 끈기 있게 계속 쓸 참이여.” 정 시인의 하루는 요즘 더 바빠졌다. 시집 발간 후 여기저기서, 심지어 멀리 미국에서도 축하인사를 보내와 정신없을 정도라고. “내가 요즘 심심할 겨를도 없이 호강을 많이 한다우. 여기저기 크고 작은 행사에서 모셔가지, 젊은 동호회 회원들이 수시로 전화해 드라이브시켜주고 맛있는 밥 먹으러 다니지, 아주 행복혀.” 90세 인생이 이리도 즐거울 수 있을까. 정 시인은 문자는 물론 컴퓨터와 카카오톡까지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안다. 카톡 프로필 란에 ‘매일매일 싱그럽고 화려하게ㅋㅋ’라는 멘트가 놀랍다. 열정은 사람을 늙지 않게 만드나보다. 이 나이에 뭘 하나, 세상 다 산 듯 정신줄 놓고 있던 게으른 내 영혼에 90세 시니어 시인은 섬광처럼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 잊지 못하리 - 정봉애 이토록 보고픔 어찌하오리까 고요 속에 아른아른 아린 그리움 어찌하오리까 가슴 깊이 젖어드는 끈끈한 정 어찌하오리까 마디마디 묻어나는 님의 향기 어찌하오리까 이왕에 가버린 사랑 어찌하오리까 정봉애 시인은, 어린 나이에 결혼해 60년 넘게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아온 남편이 병환으로 세상을 뜨자 하늘이 무너진 듯 온 세상 슬픔이 다 몰려왔다고. 6·25동란 때 오빠들과 부모님을 모두 잃은 정 시인에게 남편은 오빠 같고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내 나이 78세 때 82세 남편이 가버렸지. 다들 살 만큼 살았다고 말들을 하더라만, 남편만 의지하고 살았던 나는 그 허전한 마음을 어디에도 둘 데가 없더라고.” 저녁이면 남편과 오순도순 술 한 잔씩 반주로 나누며 밥 먹던 소소한 행복. 첫 잔을 꼭 먼저 따라주던 다정했던 그 사람. 이 시 ‘잊지 못하리’는 사별한 남편을 그리워하는 정 시인의 애틋한 심정이 아리게 담겨 있다.
- 2018-09-05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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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수련은 현재진행형"
- 영화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 등에서 브루스 리(Bruse Lee, 이소룡)가 선보인 절권도는 그야말로 획기적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를 제압하는 절권도의 매력에 푹 빠진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김종학(50) 관장이다. 올해로 40여 년째, 인생의 반 이상을 무술과 함께했지만, 그는 아직 배우고 싶은 무술이 너무나도 많단다. 푹푹 찌는 한여름날 김종학 관장을 만나기 위해 양재동에 위치한 이소룡절권도 한국총본관을 찾아 나섰다. 몇 개의 골목길을 지나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래도 ‘도장은 시원하겠지’ 하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너무 큰 기대였을까, 도착한 도장에는 작은 선풍기 한 대만 탈탈거리며 돌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에어컨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도장에선 한 번도 에어컨을 틀어본 적이 없다는 김종학 관장. 전기세가 무서워서도 아니고 더위를 못 느껴서도 아니다. 운동하는 공간에선 마음껏 땀을 흘리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한다.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도 하고 복싱도 할 만큼 운동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때 한창 무술영화가 유행이었는데 우연히 영화 ‘취권’을 보게 됐죠. 공중을 날아다니고 상대를 한 방에 제압하는데… 너무 멋있더라고요. 그렇게 무술에 빠져서 시작한 게 우슈였어요.” 누구나 한 번쯤은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적을 무찌르는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우슈 수련을 이어가던 그는 어느 날 돌연 대만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진 거라곤 비행기 표와 한 장의 명함뿐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무모해 보일 수 있는 선택이었지만 그는 “대만으로 떠난 건 힘든 시절의 나에게는 한 줄기의 빛이자 유일한 돌파구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세상에 대한 환멸을 느꼈어요.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 와중에 힘들어하던 몇몇 친구들이 나쁜 길로 빠지는 걸 보면서 제 정신줄을 잡아줄 무엇인가가 절실히 필요했어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뭘까, 뭘 하면 행복할까?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결론은 운동이더라고요. 때마침 지인이 대만에 있는 분이라며 찾아가 보라고 명함을 한 장 주셨죠. 그길로 바로 대만으로 떠났어요.” 그의 마음을 끈 건 다름 아닌 절권도였다. 브루스 리가 창시한 무술인 절권도는 그가 실제로 배웠던 무술 중에서 실용적이라고 생각한 동작만 따로 모아 발전시킨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절권도는 미완성의 무술로 전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브루스 리가 죽기 전 그가 보여줬던 동작만 절권도라고 말할 수 있다고 정의해요. 근데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하거든요. 그가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는 더 많은 무술을 배워서 절권도의 기술을 확장했을 거예요. 때문에 브루스 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절권도를 한다고 했을 때 ‘그게 절권도가 맞다, 아니다’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거죠.” 김종학 관장은 우슈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의 전통 무예인 실랏(Silat), 필리핀의 전통 무술인 칼리(Kali) 등 다양한 무술을 훈련 중이다. 브루스 리가 배웠던 무술을 할 줄 알아야 그가 절권도를 만들고자 했던 진정한 뜻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무술의 매력을 묻는 말에 그는 무술을 음식에 비유했다. “음식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잖아요. 무술도 마찬가지예요. 태권도, 우슈, 합기도 등 아주 많죠. 우리가 김치찌개를 좋아한다고 김치찌개만 먹고 살 수 없는 것처럼 저에게 한 가지 무술만 하고 살아라? 그렇게는 안 되겠더라고요.(웃음) 음식 맛이 다 다르듯이 무술에도 각기 다른 멋이 있고, 그 나라의 문화가 깃들어 있어요. 이런 걸 이해하면서 배우는 게 큰 재미죠.” 절권도를 향한 열정 “테드 웡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세계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그의 도장으로 찾아왔어요. 저도 그중에 한 명이었는데 전 운 좋은 놈이었죠. 그의 눈에 띄었으니까요.” 대만에서 돌아온 그는 브루스 리의 마지막 제자로 알려진 테드 웡(Ted Wong)을 찾아 홍콩으로 떠났다. 무작정 비행기 표를 사서 떠난 그의 모습에서 일찍 눈치 챘어야 했다. 그는 독한 남자였다. 테드 웡의 수업 첫날, 허리 디스크가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숨긴 채 수업에 임했다. 테드 웡도 그 절실함을 알아봤는지 김 관장을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했다. “사부가 개인적으로 누굴 초대한다는 게 매우 드문 일인데 절 데려오라고 하니 다른 제자가 질투가 났나봐요. 씩씩거리면서 ‘웡 사부가 너 오래’ 이러더니 따라오라고 하더라고요. 엄청난 영광이었죠.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테드 웡에게 말을 걸었어요. 그때 처음 한 질문이 “두유 노우 김치?”였어요.(웃음)” 한국인이 외국인을 만났을 때 피해야 할 세 가지 질문이 ‘두유 노우 김치?, 두유 노우 지성팍?, 두유 노우 강남스타일?’이거늘….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질문은 효과가 있었다. 테드 웡은 김치를 잘 안다고, 이웃이 한국인이라 먹어본 적도 있다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분위기가 좋은 틈을 타 김 관장이 테드 웡을 한국으로 초대하겠다고 말했다. “테드 웡 사부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OK!’ 하더라고요. 덕분에 2008년에 그를 모시고 한국에서 세미나를 개최할 수 있었죠.” 이후에도 김 관장은 테드 웡의 집에서 개인수련을 하는 등 인연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지난 2010년, 테드 웡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불과 며칠 전 김 관장과 통화할 때만 해도 ‘새로운 세미나를 준비 중이라 바쁘다’던 그였기에 그의 사망 소식은 김 관장에게 뜻하지 않은 이별이었다. “수련도 수련이지만 이상하게 그의 오래된 차가 기억에 많이 남아요. 엄청 가파른 언덕이 하나 있었는데 웡 사부는 항상 그 언덕을 올라가기 전에 차에게 ‘준비됐나?’라고 말하곤 했거든요. 마치 나이 든 자기 자신한테 물어보듯이요. 그 질문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지금은 그의 오래된 차도, 웡 사부도 볼 수 없게 되었네요.” 테드 웡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김 관장의 맨땅에 헤딩하기는 계속됐다. 그는 브루스 리가 생전에 절권도를 가르칠 수 있는 사범 자격을 준 3인 중 한 명인 댄 이노산토(Dan Inosanto)를 찾아 LA로 향했다. 댄이 스톡턴으로 가면 스톡턴으로, 댈라스로 가면 댈라스로 그야말로 그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쫓아가서 수업을 들었다. 문득 이렇게까지 하면서 절권도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솔직히 말해서 절권도가 궁금하면 유튜브나 비디오를 통해서도 충분히 배울 수 있어요. 하지만 유튜브가 나의 사부가 될 순 없잖아요. 저에겐 절권도 ‘동작’이 중요한 게 아니라 브루스 리에게 절권도를 배운 사람들의 생각과 철학이 중요했어요. 그래서 전 직접 사람을 만나서 배우는 데에 의미를 둔 거죠.” 내 몸은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 갑자기 김 관장이 모형 칼을 손에 쥐더니 피해보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칼에 맞았다. 실제 상황이라면 죽었거나 응급실에 실려 갔을 것이다. 이번엔 반대로 칼을 쥐어주더니 자신을 찔러보라고 했다. 칼을 휘두르는 동시에 칼을 뺏겼다. “사람들이 스스로 방어할 생각도 안 하면서 약자라고 말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최소한 자기를 보호할 방법은 알았으면 좋겠어요.” 김 관장은 스스로 보호할 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공격을 당했을 때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최근엔 호신술 수업을 무료로 진행하고 있다고. 마지막으로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나는 무술 하는 김종학”이라고 답했다. “마치 등산 같은 거죠. 한 산에 오르면 거기 머무르지 않고 다른 산도 가보는 것처럼, 이 무술, 저 무술 다 해보고 싶어요.”
- 2018-08-0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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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중년 통기타 입문기' 우리에겐 우리만의 문화가 있다
- “엄마, 기타 치는 모습 너무 귀여워.” 휴대폰으로 찾은 동영상을 보면서 기타를 이리도 잡아 보고 저리도 잡아 보는 나를 향해 딸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내가 기타를 잘 치냐 하면 반대로 왕초보다. 이제 막 통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시작은 늦었지만 어려서부터 늘 기타를 배우고 싶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기타를 치는 모습, 가수들이 기타 치며 노래하는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사실 누구라도 따라 하고 싶은 폼나는 모습 아닌가? 악기상점이 모여 있는 종로의 낙원상가는 물론이거니와 지나다 우연히 기타가 세워져있는 상점이라도 발견하면 진열장 앞에서 넋을 놓고 바라보던 기억이 있다. 나뿐만 아니었다. 윤이 반짝반짝 나는 기타가 바로 보이는 진열장 앞에는 늘 나와 같은 아이들이 두 서넛은 기웃거렸다. 왜 하필 기타였을까? 살다 보면 이유 없이 끌림이 가는 것들이 있는데 기타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가질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은 그것을 가지게 되었을 때 더 큰 행복으로 다가온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통기타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가수라면 너 나 할 것 없이 기타를 치던 시대였다. 특히 종로의 ‘쎄시봉’ 하면 떠오르는 가수 김세환이나 팝송을 번안해서 부르던 트윈폴리오의 윤형주와 송창식, 특유의 목소리로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는 양희은 등등의 인기는 지금의 빅뱅이나 방탄소년단 못지않았다. 종일 음악이 흐르는 다방에는 DJ가 있어서 신청곡을 즉석에서 틀어주기도 했고 여름만 되면 기타를 메거나 라디오를 손에 든 청춘들이 삼삼오오 기차를 올라타고 서울을 벗어나던 시대였다. 지금쯤 중년이 되었을 그 시대 청춘들. 첫 수업에서 A 코드와 E 코드를 배우고 동요 ‘비행기’를 쳤다. 단 두 개로 치는 거라 쉬워 보였는데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손가락 세 개가 나란히 있는 코드 A에서 자연스레 코드 E로 넘어가는 것은 나에겐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이었다. 잘도 넘어가는 다른 분들을 보면서 자괴감보다는 ‘아마 예전에 하던 사람일 거야’ 하고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을 발동시켰다. 두 번째 수업에서도 나의 비행기는 바닥을 설설 기어갈 뿐 높이 뜨지 못했다. 함께 시작한 분들의 비행기는 대부분 높이 날아올라 강의실이 좁다고 허공을 뱅뱅 날아다니는데 가여운 나의 비행기는 슬쩍 뜨려다 멈칫멈칫 주저앉았다. 이유는 있다. 연습을 거의 못 했다. 못 뜨는 것이 당연하다. “기타를 가방에 모셔두지 말고 꺼내놓고 자주 만져주세요. 그냥 한 번씩 안아주기만 해도 좋습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기타를 안아주지만 더 시간이 지나면 기타가 여러분들을 위로해주는 날이 옵니다.” 두 번쯤 수업을 들었을 때 강사님이 말했다. 이 얼마나 근사한 말인가? 기타가 나를 위로해 주다니! 더 신기한 건 그 말을 내가 이해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수업까지도 아리송한 상태로 시간이 날 때마다 만져 주리라 하고는 거실에 기타를 꺼내두었다. 주말에 손녀가 오더니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는 장난감이 되었다. 띵 똥 거리며 소리가 나는 물건이 어린 눈에도 신기했나 보다. 기타를 처음 시작할 때 입문용으로 하다가 교체하는 게 좋다는 조언도 있었지만 물려 줄 꼬맹이를 염두에 둔 것도 있다. 비행기를 쳐 주니 전혀 엉뚱한 소음이 들린다. 음이 맞지 않았다. 튜닝기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네 번째 수업이다. 강사님이 세 번째 수업 즈음 7월 말경 ‘김광석 따라 부르기’가 있다면서 “우리도 한 곡 참여하죠?” 하더니 이내 “우리도 한 곡 하기로 했어요”로 바뀌었다. “별로 어렵지 않아요. 코드 두세 개로만 하는 거라 연습하면 가능해요.” ‘물론... 연습만 열심히 하면, 물론 그렇겠죠.’ 모두 입을 쩍 벌리곤 고개를 절레절레(나와 같은)하거나, 깔깔대고 웃거나(틀림없이 예전에 좀 하던 분들이다) 했다. 실력을 떠나서 내가 좋아하는 김광석이라 일단은 좋다. 벌써 일곱 번째 수업이 진행되었다. 연습 부족인지 수업이 진행될수록 다른 분들과 격차가 생기는 느낌이다. 강사님이 말했다. “여러분! 연습 잘되고 있는 거죠? 이제 일주일 남았습니다.” ‘아니요! 아니요! 절대 연습 안 되고 있어요!!’라고 속으로만 외쳤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은 잘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 여러분 아주 잘하는데요! 이대로만 하면 되겠어요!” 합주를 하고 난 후 강사님이 말했다. 나도 잘한 것은 맞다. 오직 G 코드 하나만 누르고 그 순간에만 오른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합주를 하다 보니 나 같은 사람이 더 있는지 그 부분에서 유독 소리가 커졌다가 코드가 바뀌면 소리가 확 줄어드는 느낌이 든다. 합주를 마친 후 강사님은 “어 이상한데?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네요”라고 말했다. 모두 고개까지 젖혀가며 웃느라 정신이 없다. 강사님은 수강생들의 편법 연주를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 김광석의 노래를 기타를 치며 부르고 싶다. 시간이 날 때마다 기타를 집어 든다. 아,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기타를 잘 치기엔 내 손은 너무나 작았다. 물론 다 핑계라고 할 수 있지만 동영상에서 가르쳐 주는 그 손동작이 나는 안 된다. 엄지손가락을 6번 줄 위에 멋지게 걸칠 수가 없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피아노에서만 유리한 줄 알았더니 기타도 마찬가지였다. 감사한 것도 있었다. 내 손가락은 길이만 짧은 것이 아니라 가늘기도 했다. 남들보다 다른 줄을 건드릴 확률이 낮다. 역시 신은 공평하시다. 코드를 잡아 본다. C 코드, D 코드, E 코드. 비행기도 열심히 친다. 코드를 정확히 익히니 연결도 전보다 편하다. ‘하긴, 코드를 잘 모르는데 연결이 부드럽게 되기를 바라는 게 욕심이지’하고 스스로 반성도 한다. 어설프게 알다가 확실히 알게 되는 순간의 기쁨은 배움의 과정에 있어 본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깜박이던 형광등에 반짝하고 불이 켜지면서 환해지는 느낌과 같다. 오늘도 밤늦도록 기타 코드를 잡는다. 비행기가 자연스레 되나 쳐보고 “오! 제대로 들린다!” 혼자 뿌듯해한다. 몸으로 하는 것은 자세를 바로잡으면 반은 성공이라는 생각에 동영상을 검색한다. ‘기타 칠 때 바른 자세’, ‘왕초보 기타 코드 배우기’, ‘자연스럽게 기타 코드 연결하기’ 등등. 신기하게도 인터넷에는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수업시간에 배운 것을 동영상을 보면서 열심히 따라 해본다. 손가락 끝이 얼얼하다. 많이 연습한 증거라 그마저도 싫지 않다.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보다가 비행기를 다시 친다. 귀에 들리는 소리가 전보다 좋다. “이게 비행기로 들리니?” 거실에 나온 딸에게 비행기를 물었더니 “ 그럼, 그럼. 비행기로 들려! 엄마 이제 잘하네!” 하고는 웃는다. 어설프게나마 비행기 코드를 연결하게 된 내가 자랑스럽다. 진도를 높여 본다. 수업 중에 G 코드 하나만으로 껑충 연주를 했던 김광석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의 악보를 펼친다. 처음엔 역시 G 코드다. 거북이처럼 목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이어지는 Em코드를 시도해 본다. 된다. 알고 보니 연결이 쉬운 코드였다. 엄청난 발전이다. 시간은 자정이 훌쩍 넘었다. 이러다 언젠가는 정말 기타에게 위로받는 날이 올 것만 같다. 기타를 배우노라고, 배워서 홍대 버스킹을 하는 게 꿈이라고 했더니 “에이, 버스킹은 힘들 걸요” 하던 젊은 선생님의 얼굴도 떠오른다. 꿈은 이루지 못하면 꿈에 머물지만 이루고 나면 더 이상 꿈이 아니다. 첫 수업에서 난생처음 기타 코드를 잡았지만 이제는 비행기를 공중에 띄웠다. 가능성은 늘 열어두어야 한다. 혹시 아나? 앞으로 5년쯤 지나 혹은 그 이후에 어떤 머리카락 희끗한 할머니가 최고령 홍대 버스킹으로 신문에 날지,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내 손으로 기타를 치며 비행기를 부르게 될지 몰랐으니까. “떠~어~따 떠~어따 비~행~기~날~아~라~날~아~라~높~이 높~이 날~아라 우리 비행기~”
- 2018-07-27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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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더위도 잊게 한 '인생2막 글쓰기'
- 자고 나면 줄줄이 올라오는 다른 동년기자들의 글이 쌓여 가도록 생각의 언저리에서만 서성이고 있었다. 동년기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글쓰기’에 대한 기본기를 다지고 싶었다. 무조건 해보자는 결단으로 글쓰기 강좌를 신청했다. 물론 기사를 쓰는 형식과는 다르겠지만, 기본 글쓰기가 능수능란해지면 기사에서도 ‘요것 봐라?’하는 재치를 가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생2막 글쓰기’라는 강의 부제에 걸맞게 50대부터 80대까지의 학생이 모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총 8주 과정으로, 장르나 주제에 관계없이 글을 메일로 전송하면 선생님의 첨삭 출력물을 수업 전에 받아볼 수 있다. 30여 명 수강생 중에 보통 10명 정도의 작품은 선생님이 직접 읽고 학생들은 경청한다. 그러고 나서 토론을 하는데, 이때 나오는 이야깃거리가 아주 풍성하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자란 유년기를 풀어낸 글, 울음 끝에 웃음을 주는 글, 자신의 일터가 고스란히 담긴 글 등 각양각색이다. 그중에서도 수십 년 전 첫사랑 얘기는 단골 메뉴다. 조각보 같은 학생들의 재주에 감탄이 이어진다. 그 틈에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맛에 다음 시간이 더 궁금해지기도 한다. 하필 폭염기와 수강 기간이 겹쳐 힘들기도 했다. 그런 중에도 대전에서 KTX를 타고 다닌다는 유치원 원장님은 술떡을 한 상자 해 오셨다. 그다음 주는 다른 수강생이 달걀을 삶아 왔고, 누군가는 찰떡을 가져오는 등 수업 내내 간식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 학생들의 인정과 열정 덕에 지치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다. 마지막 수업을 남겨두고는 가는 더위마저 퍽 아쉬웠다. 글쓰기를 배우려면 책으로 독학할 수도 있고, 강연을 찾아갈 수도 있다. 또, 이런 수업을 통해 자신의 글을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고 느낌을 나누며 전문가에게 조언을 얻는 방법도 있다. 내 글의 민낯을 보이는 과정이 어쩌면 부끄러울 수도 있지만 토론과 개별 첨삭은 우등생이 되기 위한 오답노트 같기도 하다. 달고 쓰게 공부한 노트가 켜켜이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글 좀 쓴다는 속 빈 격려라도 받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수업 내내 기록이 꼼꼼해지고 귀가 쫑긋해졌다. 우선 펜을 잡아 보자는 생각으로 나선 글쓰기 수업이었다. 하루 한 시간 무조건 써보는 작은 습관이 중요함을 인정하게 됐다. 처음엔 잡지 기사를 잘 써볼 요량으로 시작했지만, 어쩌면 그 이상의 더 큰 무언가가 뭉게뭉게 피어오를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바라고 원해서 한 일인 만큼, 글쓰기가 나에게 인색함 없는 행복을 한없이 안겨 주리라 생각한다.
- 2018-07-27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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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을 돌고 돌아 소설가 되다, 한보영 MBC 전 복싱 해설위원
- 만나고 보니 꽤나 독특한 삶이다. 마치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듯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완벽하게 전문적이고 색다른 인생담. 전생과 현생을 말하는 듯 세대를 넘나드는 사건 전개. “내가 무슨 인터뷰할 게 있어”로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특별하고 치열한 역사 드라마를 고스란히 감상한 느낌이랄까? ‘선데이서울’ 전 방송사 출입기자이자 MBC 전 복싱 해설위원, 등단 1년 차 신인 소설가 한보영(韓寶榮·82) 작가를 만났다. 대한민국 1960~70년대를 주름잡았던 별들의 야사와 링 위의 전쟁이 정신없이 쏟아져 내렸다. 한보영 작가를 만난 곳은 서울시 중구 서울신문 사옥 내 한 커피숍. 세련된 모습으로 단장한 서울 중심부이지만 옛 시절부터 발을 디뎌온 기자 선배의 눈에만 보이는 아지트가 숨어 있다고 했다. “한국체육언론인회가 이 근방에 있어요. 체육기자 출신 모임은 여기에서 하거든. 전 직장인 서울신문 사우회도 여기에 있고, 자주 가는 기원도 이곳이니까 벗어나지 못해요. 아무래도 내가 가는 단골집도 많고요. 교통편도 좋고 나는 광화문이 편해요.” 한보영 작가는 매일 아침 일찍 배낭 하나 메고 되도록 빨리 집을 나선다. “생활에도 리듬이 있고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밋밋한 건 딱 질색이거든. 그러니 집에만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시간을 벌어 글을 쓰고 오랜 지인들 만나 얘기하고 또 짬을 내서 글을 쓴다. 한보영 작가는 작년 4월 손자와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단편소설 ‘너와 나의 끈’으로 월간 문예지 ‘조선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이후 꾸준하게 단편소설을 문예지에 게재하면서 소설가로서 새로운 삶을 그려가는 중이다. “열심히 쓰고 있어요. 작년에 4편을 발표했습니다. 제가 등단했던 ‘조선문학’ 6월호에 작품 하나가 나왔고. 7월은 한국소설가협회에서 나오는 월간지 ‘한국소설’에 신작이 나옵니다. 올해 말까지 한 5개 정도 쓰고 내년 초에 지금까지 썼던 단편소설을 묶어서 단행본으로 내려고 해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틈틈이 글을 쓰고 있는 신참내기 소설가. 참 안타까운 현실은 이렇게 정성들여 월간 문예지에 게재를 해도 원고료 주는 곳이 많지 않다. 돈을 염두에 두고 이 일을 했다간 한 글자도 못 쓸 것이 빤하니 금전적 보상은 단념하고 작품활동에만 전념한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가지고 호흡을 고르면서 써야 돼, 쉬엄쉬엄. 그 대신 뭐 시간이 꼭 정해진 건 아니지만 조금씩 쓰다가 나중에 싹 지워버리고 다시 쓰고 그럽니다. 예전에 한 번은 컴퓨터 조작을 잘못해서 다 없어지는 바람에 처음부터 새로 썼다고. 얼마 전에 발표를 했는데 디테일한 점은 좀 모자라는 대신 구성은 오히려 마음에 들더라고요.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는 거죠. 글은 쓸 때마다 기분이 제일 중요합니다.” 뭐든 마음에 들면 들이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전주에서 고교 시절을 보낸 한보영 작가는 배구선수로 활약했다. 문제는 한보영 작가가 운동에만 몰두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관심 분야가 생기면 일단 발부터 담가보기를 반복했다. “배구부에 있을 때 트럼펫에 관심이 생겨서 밴드부에 들어갔더니 한 선생님이 ‘운동하는 애가 왜 여기에 있냐’며 저를 쫓아냈습니다. 문예부에도 들어갔었어요. 글재주가 있었으니까요. 교지 만들 때 일조했습니다. 대부분 운동부라고 하면 수업시간에 안 들어가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중학교 3학년 때 교실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어요. 운동만 해서 그런지 어느 순간 배구가 싫었습니다.” 배구도 곧잘 해 서울 소재 대학에서 배구선수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하고 입시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대학교를 안 가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학한 곳이 바로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였다. “글을 제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에 들어갔습니다. 김동리 선생과 서정주 선생이 저희 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어요.” 한보영 작가는 특히 김동리 교수와 가깝게 지냈는데 하루는 자신이 쓴 습작을 봐주십사 부탁했다. ‘선데이서울’ 기자도 MBC 복싱 해설위원도 아닌 어린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할 절호의 기회였을지도 모를 중요한 순간이었다. “한창때 실존주의 이론에 빠져 있었어요. 젊은 패기에 선생님이 해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김동리 선생이 저와 별 상의 없이 습작에 관한 심사평을 ‘현대문학’에 내신 거예요. 문장과 구성은 다 좋은데 주제와 내용이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하셨더라고요. 시골 동네에서 벌어지는 근친상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김동리 선생 취향과 너무나 동떨어졌던 것이죠. 화가 나서 찾아갔더니 본인과 주제가 잘 맞지 않으니 다른 소설가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말에 충격받아서 두 번 다시는 소설 안 쓰겠다고 하고 집어치워버렸습니다. 그때는 어깨에 왜 그렇게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웃음)” 당시에 만약 김동리 선생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더라면 한보영 작가의 삶은 어떻게 전개가 됐을까? 대작을 쓰는 작가로 거듭났을까? 소설에 대한 희망을 접고 선택한 한보영 작가의 첫 번째 직업은 선생님이었다. 경기도 포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1년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눈앞에 펼쳐진 자연이 사무치도록 좋았지만 몇 개월 지나자 공포감이 엄습했다. 눈이 내렸다 하면 허리까지 차올랐다. 월급은 보리와 쌀 반 가마니. 그나마 현찰로 지급되는 돈은 학교운영회에서 거친 회비를 조금 얻어 쓰는 정도였다. 하숙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힘든 시간을 좀 이겨내나 싶었을 때 영국 민요 ‘오 데니 보이’를 여학생들에게 가르치다 교장에게 발각됐다. 노래 속에 사랑 얘기가 들어 있다는 게 화근이었다. 왈가왈부하다 결국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방송사 출입기자로 방송가를 누비다 “나는 잡지 출신이야. 신문사 출신이라는 말 잘 안 해.” ‘선데이서울’이 ‘서울신문’에서 나오는 주간지였고, 복싱 해설위원으로 모습을 바꿀 때도 ‘서울신문’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인물검색을 하면 전 신문인으로 뜬다. 하지만 한보영 작가는 우리나라 초창기 잡지를 꿰고 있는 잡지사 기자 출신이 맞다. 초등학교 교사직을 내려놓고 들어간 곳이 월간 ‘여성계’였다. 피란 시절 대구에서 창간했던 월간 ‘여성계’를 시작으로 ‘교육평론’이라는 잡지사에서도 일했다. 책이 나오는 달만 월급이 나오는 상황인지라 돈도 없고, 잘 챙겨먹지 못해 급기야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김동리 선생이랑 싸우고 소설도 안 써지니까 위장병에 걸렸던 것 같아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밖에서 밥을 사 먹다 보니 나아질 기색이 없었어요. 결국 위장병이 있는 상태로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몸이 좋아지더라고요. 건강을 되찾고 난 다음 군에 있는 동안 프리랜서로 글을 꽤 썼습니다. 다른 월급쟁이들보다 낫다 싶을 정도였죠.” 제대 후에는 당시 인기 잡지였던 ‘아리랑’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방송사 출입 기자로서의 발판을 마련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연예부나 문화부 기자로 방송사에 드나드는 기자를 말한다. 예전에는 방송사마다 탤런트와 개그맨, 성우를 매년 정기적으로 뽑았다. 특히 탤런트의 경우 소속 방송사의 드라마와 프로그램에만 등장할 수 있었다. 방송사 소속 아나운서와 같다고 보면 된다. 심은하, 장동건을 보려면 MBC를 찾아가야 했던 시절이 있다. 방송사 출입기자는 연기자와의 끈끈한 인맥과 유대감은 물론이고 방송사 관계자와의 관계도 신경 써야 하는 힘든 분야 중 하나였다. “‘아리랑’은 글씨를 세로가 아닌 가로로 표기한 최초의 잡지였습니다. 연예인 주변 이야기, 스포츠, 만화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담아낸 세련된 책이었죠. ‘아리랑’에 있을 때 배우 신성일과도 친해졌습니다. 그때는 방송사 소속 탤런트들이 조금 딱했습니다. 기획사를 차리는 게 꿈이었는데 잡지 사업에 발을 들이고 말았습니다. 뜻대로 안됐죠.” ‘아리랑’에 있는 동안 음악 전문지를 만들어볼 생각에 ‘청춘’이라는 소규모 잡지를 인수했다. 젊은 세대를 위한 음악 잡지로 만들려고 했는데 1970년대 초 유신시대가 도래해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두 달여 공을 들였지만 사회 상황과 잡지 성향이 맞지 않아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큰 손해를 봤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남들처럼 술 먹고 울분을 토하고 그런 성격이 또 제가 못됩니다. 극장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그렇게 실업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산업경제신문’에서 연예부 기자로 오란 연락을 받았습니다. 물불 가릴 것이 없었어요.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 퇴직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나왔거든요. 그곳에 있다가 서울시청에 납품하는 ‘주간 시민’으로 옮겼고 그다음이 ‘서울신문’ 대표 매거진인 ‘선데이서울’이었죠.” 한보영 작가가 방송사 출입기자로서 활약하고 성과를 낸 매체는 ‘선데이서울’이다. 본격적인 방송계 출입기자 삶을 산 시간이 이때였다고도 자평했다. “기자는 많은데 방송사를 제대로 찾아다니는 기자가 의외로 적었습니다. ‘선데이서울’에 있을 때는 정말 탤런트, 연예인들 일에 제가 많이 좌지우지했던 것 같습니다.” 이름만 대면 쉽게 알 만한 연예인 사생활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과거 연예사를 들춰내는 종합편성채널 TV 프로그램 출연이 잦았다. 한 여성 탤런트는 한보영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선생님, 그런 방송에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라면서 넌지시 말을 건네기도 했단다. “요새는 방송 출연 제의가 들어오면 저보다 순발력 있는 다른 사람을 구해보라며 거절해요. 누구 부탁 때문이 아니고, 그게 좀 더 방송이 살 것 같아서죠.” 복싱 해설위원으로 다른 삶을 살다 방송국 출입기자로서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을 두루 섭렵하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어쩌다 돌연 스포츠 분야로 눈을 돌려 복싱 해설위원으로도 이름을 알리게 됐을까. “1972년 3월 ‘선데이서울’에 방송사 출입기자로 들어가 오랜 시간 연예계 기사를 썼습니다. ‘서울신문’에서 ‘주간스포츠’를 창간해 왔다 갔다 하면서 복싱 관련 기사를 쓰다가 1980년대 초에 ‘주간스포츠’로 완전히 옮겨가 복싱 담당기자가 됐습니다. 당시 복싱 인기가 정말 대단했어요. 그런데 복싱 담당기자가 자꾸 나가버리니까 하루는 국장이 불러서 복싱을 맡으라니 어쩌겠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배우와 탤런트를 위한 기획사를 차리는 것과 방송 극본을 쓰는 것이 나름의 목표였다. 스포츠 분야로 가라는 말에 회사를 관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국장의 선택에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같은 회사니까 복싱 담당을 하다가 연예부 쪽에서 일하라 하면 그쪽으로 가서 취재했죠. 나중에는 스포츠 쪽에 남기로 했습니다. MBC와 해설위원 이야기도 된 상태였고요.” 한국 복싱 전성기, 최고의 명승부에는 늘 MBC 복싱 해설위원으로 활약하던 한보영 작가의 예리한 분석이 뒤따랐다. 방송사 출입기자에서 복싱 담당기자, 이를 바탕으로 복싱 해설위원으로 살아온 삶. 기간이 좀 길어서 그렇지 듣고 보니 납득이 가는 인과관계가 있다. 새로운 격변이 아닌 삶에 순응하고 적극적으로 따른 결과였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뭐든지 억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조금은 그렇게 순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최전성기 복싱 해설을 했다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남들 은퇴하는 55세에 종이매체와 이별하고 MBC와 해설위원으로 정식 계약을 맺었습니다. 70에는 고희기념 출판기념회를 열었고요.” 복싱의 인기가 사그라지면서 방송 기회도 점점 줄어들었다. 2003년 MBC와계약을 만료하고 MBC스포츠로 옮겨 2007년까지 간간이 복싱 해설을 했다. “그런데 지금도 저는 복싱 해설을 합니다. 어디서 하는 줄 아세요? 유튜브에서요. 오픈게임부터 끝까지 제가 도맡아서 합니다. 훨씬 힘든 대신 신바람은 납니다. 복싱 해설도 내 인생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일부분이고 제가 좋아하는 일이죠. 1년 차 소설가이면서 현역 복싱 해설위원 입니다.” 한참 복싱과 관련한 얘기를 하다가 현실로 돌아오듯 소설 이야기로 돌아온다. 최근 집필한 ‘친부(親父)의 꿈’은 어디엔가 살아 있을 전설의 파이터 김득구 아들을 상상하며 썼다고 했다. “김득구 아들이 지금 살아 있으면 34세쯤 됐을 거예요. 그런데 왜 복싱에 데뷔하느냐면 말이지….” 이야기 보따리가 온몸 구석구석 한아름이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3시간 꼬박 앉아서 참 많은 얘기를 끄집어낸다. 아무리 봐도 적당한 시기에 자기 진로를 잘 선택했다. 지금이 딱 소설 쓰기 좋은 나이라고나 할까? 대학 시절 김동리 선생과의 일화는 새삼 한보영 작가 인생의 중대한 복선이 된 것만 같다. 그 후 방송계와 복싱계를 누비며 쌓아놓은 기억은 소설가 한보영에게 좋은 자양분이 됐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 원래 바라던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상념에 잠겨 있을 한보영 작가에게 한마디 건네고 싶다. 언제나 브라보 유어 라이프.
- 2018-07-02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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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소원이 있습니다
- 반려견, 아니면 더 넓게 반려동물에 대한 사랑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학생은 제대하고 복학한 친구인데, 수업시간에 ‘관계’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다 자기가 키우던 개가 죽은 이야기를 하면서 글자 그대로 엉엉 울었습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고 묻자 다섯 달 전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또 다른 예를 제가 사는 아파트 이웃에서도 들었습니다. 키우던 강아지가 ‘세상을 떠나자’ 슬픔에 빠진 자기 딸이 결국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일, 그것은 아름답고 고귀하고 감동스러운 일입니다. 사람 간에도 그렇고 짐승과도 다르지 않으며 꽃이나 나무와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은 온갖 관계의 가장 드높은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앞에 든 사례를 놓고 부모상을 당해도 흔하지 않을 모습을 보면서 그 슬픔을 견디기 힘들었던 사람들을 언짢게 이야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일에서 마음이 쓰이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 가슴이 저리도록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오래 함께 살다보면 정들고, 그러다 보면 서로 아끼고 살피며 죽자 살자 하나가 되는 건데 그 까닭을 묻다니!” 하시면서 제 생각을 무척 탐탁잖게 여기실 분도 계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살이 또한 그러니까요. 그런데 저는 이런 물음을 묻고 싶은 것입니다. 개가 또는 고양이가 말을 해도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요. 저는 개가 겨우 짓기만 할 뿐이어서 다행이지 말을 한다면 반려견을 키우는 집안이 한시도 조용할 수 없을 거라고 단정합니다. 개가 말을 한다면 얼마나 주인한테 할 말이 많겠습니까? 이견, 주장, 고집, 항변 그런 것들이 서로 뒤엉키면서 사람이나 개나 마음에 상처를 받고, 나아가 미움이 자라고, 마침내 서로 내치는 일이 상상도 할 수 없이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어쩌면 개들은 이런 결과를 미리 알고 말을 하지 않기로 작정했는지도 모릅니다. ‘무릇 침묵이 최선의 평화를 위한 처신이다’라고요. 말은 어마어마한 힘을 가졌다 말을 안 하고 살 수는 없는데 말하기처럼 힘든 일이 없습니다. 말은 어마어마한 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했죠. 말은 사물을 있게 한다고요. 없게 한다는 뜻도 당연히 거기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도 말로 천지를 만들었다 하니 말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저 우리네 말로 한다면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무서운 일’을 아무렇게나 해댑니다. 앞뒤 안 가리고 말을 쏟아냅니다. 좋은 말도 흔하면 별로 좋지 않게 되는데 온갖 고약하고 못된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뱉어냅니다. 아니, 아예 어떤 말이 좋은 말인지 못된 말인지 구분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적재적소에 맞추어 말을 할 까닭이 없습니다. 게다가 꾸미고 감추고 짐짓 아닌 척하는 말도 어지럽게 흩뿌립니다. 더구나 나이를 먹으면 안하무인격이 되어 말하는 데 거의 조심을 하지 않습니다. ‘늙은이 추한 모습’ 중에 으뜸이 바로 말 마구 하는 몰골입니다. 그런데 말을 안 하는 개처럼 자존심을 버리고 살 수는 없고 어차피 말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러니 어떻게 하면 말을 다듬어 잘 덕스럽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늘 숙제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을 잘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저는 제 소원의 한 항목으로 삼고 새해 첫날 다음과 같은 다짐을 해보았습니다. 벌써 한 해가 반이 지났는데 되짚어 그 다짐을 새삼 되뇌어봅니다. 저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 꿈을 실현했으면 좋겠다는 꿈을 꿉니다. “이 나이에 무슨…” 하는 부끄러운 자의식이 없지 않습니다만 “이 나이에 욕을 먹은들…” 하는 생각이 겹치니 여간 다행스럽지 않습니다. 올해 제 소원은 이러합니다. 내 언어가 맑았으면 좋겠습니다. 감추고 가린 것이 없는 언어. 겉에 발언되는 언어와 다른 속내 언어가 없는 언어. 그렇게 투명한 발언을 하는데도 그 언어가 예(禮)에 어긋나지 않는 언어. 다른 사람이 내 발언을 듣고 나서 나를 잘못 알게 되지 않는 언어. 흐린 흐름이 흘러들어도 마냥 맑은 그런 언어를 발언하고 싶습니다. 내 언어가 순했으면 좋겠습니다. 본래 결이 고와 순하든, 아니면 곱게 다듬어져 결이 순하든, 엉겅퀴 같지 않은 언어를 발언했으면 좋겠습니다. 멍들게 하지 않는 언어. 상처 내지 않는 언어.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함께 있어도 누구나 두루 다 알아듣는 감치는 언어. 질기지 않고, 딱딱하지 않은 언어. 그런 언어를 발언하고 싶습니다. 내 언어가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시린 마음이 더 듣고 싶어 하는 언어. 따뜻한 마음이 공명(共鳴)하는 언어. 오래 기억되어 문득문득 되살아나 온기를 전해주는 언어. 그래서 그 언어 속에서 유영(遊泳)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는 언어. 그 언어의 메아리 안에서 손발이 얼었던 시절을 따뜻하게 회상할 수 있는 그런 언어를 발언하고 싶습니다. 내 언어가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듣고 있노라면 소리가 아니라 풍경이 보이는 언어. 갑자기 무지개가 뜨고 별의 운행이 보이는 언어. 높고 낮은 소리나 모질고 둥근 소리들이 함께 어울리는 모습이 보이는 언어. 즐겁고 행복하여 그 발언에 참여하여 함께 춤추고 싶어지는 언어. 이런 언어를 발언하고 싶습니다. “꿈도 야무지지…” 하시는 말씀이 그대로 들립니다. 그렇습니다. 꿈인데, 현실이 아닌데, 그거야말로 한번 야무져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삼가 소원성취하시길 기원합니다.
- 2018-06-26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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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웰다잉 연극단'의 무대 위 웰다잉 수업
- 사회복지법인 각당복지재단의 ‘삶과죽음을생각하는회’의 커뮤니티 ‘웰다잉 연극단’. 단원 모두 웰다잉 강사 자격을 갖춘 이들로 2009년 3월 창단해 올해로 10년째 자원봉사 형태로 활동 중이다. 웰다잉 연극 ‘춤추는 할머니’, ‘행복한 죽음’, ‘소풍가는 날’ 등을 통해 공감대를 일으키며 더욱 쉽게 죽음의 의미와 준비 방법에 대해 전파하고 있다. 최근 공연작인 ‘아름다운 여행’(장두이 작·연출)은 존엄사 유언장과 사전장례의향서, 버킷리스트를 준비하는 노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실제 암 투병 중에도 항암치료를 견디며 무대에 선 최명환 단장은 “100회 공연을 하는 것이 버킷리스트였는데, 이미 초과 달성했다”며 “웰다잉 연극단 10년사를 잘 엮어 책으로 남기는 것이 새로운 버킷리스트다”라고 말했다. 김희숙 부단장은 “단원 모두 유언장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둔 상태”라며 “웰다잉 전문가들이지만, 죽음을 주제로 연극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강의보다는 몸으로 보여주며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내용을 이해시키는 데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웰다잉 연극단 총무를 맡은 홍재응 씨는 “연극을 통해 관객은 자기 마음속 이야기와 마주한다. 특히 언젠가 떠나리라 인정하면서도 멀리만 느꼈던 죽음의 문제와 직면하며 실천을 미루거나 망설였던 일들을 상기하게 된다”고 말하면서 관객의 반응을 통해 연극의 효과를 실감한다고 덧붙였다. ‘아름다운 여행’에서 저승사자 역의 방성희 씨는 “웰빙과 웰다잉은 하나이지, 분리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나의 죽음에 대해 스스로 결정권을 갖고,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 즉,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느냐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라고 조언했다. 연극의 주인공인 노인 역의 유한권 씨는 “죽어가는 인물을 연기하며 간접적으로 죽음을 체득하게 됐다. 그러면서 죽음은 곧 새로운 삶을 위한 과정임을 깨달았다”며 관객뿐 아니라 연극 단원으로서 느낀 소회를 들려줬다. 단원들은 입을 모아 “우리는 웰다잉을 위해 웰빙하는 사람들”이라 말한다. 자신들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웰다잉을 실천하길 바란다는 그들의 웰빙 무대는 앞으로도 계속된다. 웰다잉 연극단은 올해 2월 4일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시행에 맞춰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노인복지관, 평생교육원 등 10곳을 선정하여 무료로 찾아가는 공연을 진행했다.
- 2018-06-22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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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아이는 성장해 엄마의 미싱 소리에 반응했다-연희데코2050
- 도희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미싱을 돌렸다고 말했다. 엄마와 할머니의 심장 소리에 맞춰 미싱은 잘도 돌아갔고, 도희의 심장도 함께 박자를 맞췄을 것이다. 20대 중반이 된 지금 도희는 엄마 옆에 바짝 붙어 앉아 함께 미싱 페달을 밟는다. 할머니 대에서부터 시작한 수예점 가업은 50년이 돼간다. 가업을 잇는 것만으로 계승할 수 있을까?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다. 특별한 계승 유전자를 바탕으로 가업을 이어받았다면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할머니에서 어머니 그리고 딸, 가업을 엮어가다 각자 다른 듯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행복한 가업 승계를 하는 수예 전문업체 연희데코2050(이하 연희데코)의 모녀 대표 고백연(57), 김도희(24) 씨를 만났다. 이들이 함께 운영하는 연희데코의 작업실은 재래시장 현대화 공사가 한창 진행되는 성남중앙시장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연희데코는 원래 재래시장 가업 승계의 바른 사례로 성남중앙시장을 대표하는 업체이기도 하다. 재개발 공사가 완료되는 내년 가을까지 지금의 작업실에서 손님을 맞이한다. 임시 거처라지만 방문객을 고려한 상품 진열은 물론 가업 승계의 향수를 느낄 만한 전시물을 마련해 놨다. 고백연 씨의 어머니가 사용했다던 50년 된 가위와 자, 미싱 그리고 가족의 모습을 그린 캐리커처와 사진들이 작업실 입구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서비스 정신에 창의력을 더한 엄마 고백연 씨 “옛날 재래시장 좌판에다 원단 놓고 이불 팔던 것이 시작이었어요.” 1970년 무렵 초등학교 2, 3학년이던 고백연 씨는 인천에서 성남으로 이사 왔다. 그때부터 어머니 김순남(85) 씨가 성남중앙시장 좌판에서 이불 장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뭐든 꿰매고 기워 쓰던 시절, 이불만 팔아치우면 될 법도 한데 어머니는 좌판 한쪽에 미싱을 들여놓았다. 베개며 이불이며 떨어진 것을 수선해주는 서비스를 손님들에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그 모습을 보던 고백연 씨는 그것뿐만 아니라 누군가 원하는 디자인으로 새롭게 만들어주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첫아이를 임신하고 난 뒤 엄마가 계신 중앙시장으로 들어왔어요. 5평 남짓 가게에 들어와 미싱 앞에 앉았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물론 남들의 시선이 좀 의식됐다. 없는 살림에도 교육열이 높았던 어머니 덕분에 고백연 씨는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서울에서 다녔다. 경희대학교 간호학과를 나와 간호사 생활도 10년 정도 했다. 산부인과 간호사 생활을 하고 나니 힘도 들고 미래가 없어 보였다. 고백연 씨 머리에 첫 번째로 스친 것이 원단 제작이었다. “신생아를 받는 조산원에서 일했어요. 힘들기도 하고 제2직업으로 무엇을 할까 생각했는데 딱 첫 번째로 생각났어요. 저는 그때 10년, 20년이 지나면 직접 만든 제품에 대한 수요가 반드시 생긴다고 생각했어요. 한 분, 한 분 일을 해드리고 나면 손님이 다시 찾아주셨습니다. 나중에는 우리 엄마보다 제 장사가 더 잘됐어요. 원단을 산더미같이 쌓아두고 일할 때도 있었고요. 도희가 저랑 일한 게 7년이라고 하지만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장사한 거예요. 손님들이 이 아이 친구죠. 이렇게 오랜 시간 일했지만 저는 지금도 원단을 보면 설레요. 제품을 보면 죽은 애들 같아요. 창작한다는 거는 뭔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죠.” 가업 승계에 대한 인식이 바뀐 딸 김도희 씨 엄마와 딸 ‘덜그럭’, ‘드르륵’ 하는 미싱 소리의 이끌림으로 성장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애초에 두 사람 다 엄마가 가는 길을 따라갈 거란 생각은 없었다. 고백연 씨는 간호학과에, 딸 김도희 씨는 영문학과에 진학했으니 말이다. 원단 사업은 꿈에도 없었다. “남들 다 똑같이 하는 거처럼 인서울을 목표로 수능점수 맞춰서 대학에 갔는데 학교가 너무 재미가 없었어요. 자퇴는 자신이 없어서 1학년 1학기 때 휴학을 하고 엄마 가게에 매일 나갔어요. 그때 상인회 회장님이 중소기업청에서 전통시장 살리기 프로젝트로 상인들을 교육하는 대학을 만들었는데 엄마 대신 저더러 한번 가보라고 권하셨어요.” 한 달 코스로 진행된 그곳에서 김도희 씨는 생각에도 없었던 일에 눈을 뜨게 됐다. 가업 승계였다. “전통시장의 역사를 이어나가려면 가업 승계를 해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엄마와 함께 일을 할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교육을 통해 인식이 바뀌었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소스들, 어머니와 할머니요. 이건 정말 남들에게는 없는 나만의 차별성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까지 별다른 꿈이 없었는데 내가 하면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교육이 끝나자마자 수예점을 홍보하고 판매까지 연결할 수 있는 인터넷 블로그를 개설했다. 그해 겨울에는 온라인 판매를 위해 독자적으로 사업자 등록증을 내 어엿한 업체 대표가 됐다. 영문학과에서 경영학과로 전과해 사업가로서의 수업도 병행 중이다. 학교에서 배운 이론을 실제 사업에 적용하면서 공부하니 학교 성적도 좋아졌다. 엄마와 딸이 따로 또 같이 성장해가다 “어머니는 같은 공간 안에서 함께 작업을 하면서도 어린 저를 독립적인 주체로 대해주셨어요. 대개는 자식이 부모 밑에 들어가 기술을 배우잖아요. 어머니는 처음부터 제가 버는 것과 당신이 버는 것을 구분하셨어요.” 충분히 펼치고 성취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것만으로도 자식이 성장한다는 것을 고백연 씨는 알고 있었다. 바로 어머니 김순남 씨가 그랬기 때문이다. “제가 먼저 저희 엄마랑 일을 하면서 겪은 경험이 있잖아요. 다른 집들을 봐도 가족이 같이 사업을 해서 좋은 게 있는 반면에 의견 차이도 심해요. 엄마의 기존 틀이 있다면 딸이 생각하는 것도 있잖아요. 우리 엄마 고마운 것이 뭐냐면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셨어요. 잘하든 못하든 간에 하라고 하셨어요.” 할머니로부터 이어지는 모녀의 가업 승계 개념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다. 조상이 물려준다는 의미보다는 하나의 독립체로 성장하다가 어떤 시점에서 엮이듯 오묘하게 닮아간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제 스타일과 딸의 스타일이 서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각자의 개성과 장점이 다르니 서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죠. 그렇게 꾸준히 각자 노력하다 보면 결국에는 조화롭게 멋진 모습으로 어울리게 되는 겁니다. 원색보다는 섞여서 나오는 창조적인 결과물이 중요한 것이죠. 우리 색깔을 지키고 찾아가는 것, 그게 가업 승계라고 봐요.” 지금의 연희데코 작업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백연 씨가 우리 집 셋째 ‘도순’이라고 부르는 연희데코 전시실이 있다. 오래된 3층짜리 단독주택으로 1층은 작업실과 구제 및 원단 전시실, 2층에는 손님맞이 테이블과 전시실이 있다. 아직 완벽하게 준비된 상황이 아니기에 문의를 해오는 고객에게만 개방하고 있다. 이 또한 미래를 내다본 고백연 씨 모녀의 장기 프로젝트 중 하나다. “제 꿈은 도순이 집을 중심으로 연희거리를 만드는 거예요. ‘한국에 성남이라는 곳에 가면 엄마와 딸이 함께하는 거리가 있다’라고요. 외국 사람들도 방문하는 거리를 꿈꿉니다. 이곳이 활성화되면 수선하는 사람, 원단 파는 사람, 커피 파는 사람 등이 모이게 될 거고, 간단하게 음식도 만들어서 팔고요. 여기라고 북촌마을처럼 되지 말라는 법 있어요?”
- 2018-05-1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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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능기부 "지식이 아닌 마음을 나누세요"
-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시니어를 대상으로 진행한 버킷리스트 서베이에서 1위를 차지한 ’재능기부‘. 아직 망설이고 있다면, 사례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실천의 한 걸음을 내디뎌보자. ◇ 가죽공예 재능기부 전도사 윤난희 씨 결혼 후 30대부터 문화센터를 비롯한 다양한 기관에서 가죽공예 강의를 해온 윤난희(63) 씨. 지난해부터 오산시 5070청춘드림팀 재능기부단에 참여하며 나눔의 즐거움에 흠뻑 취해 있다. 이전에는 주로 아이들을 대상으로 가죽공예를 가르쳤는데, 최근에는 어르신들을 위해 재능을 나누는 그녀다. “어르신들께 가죽공예는 생소한 분야잖아요. 젊은이들을 가르칠 때와는 수업 매뉴얼을 바꾸는 데 신경을 많이 썼어요.” 재능기부 대상에 따라 강의 방법을 달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윤 씨. 수강생의 세대나 특징을 고려하지 않고 접근했을 때는 호응을 얻기 어렵다고 조언한다. 이처럼 배려하는 마음이 없는 재능기부는 나눔이 아닌 자기 능력 뽐내기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내가 강사야, 선생이야’ 이런 걸 내세우기보단 최대한 그분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다가가야 해요. 제 경우에는 상담 봉사도 종종 하는데, 아이들에게 가죽공예를 가르치면서 이런저런 질문도 하면서 그 아이의 생각을 끄집어내려고 해요. 내가 가죽 수업 하러 갔다고 그것만 하고 오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다른 재능이 있다면 더 나눠주려 노력하고 있어요.” 윤 씨는 나눔이 주는 즐거움과 행복을 잘 알기에 자신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만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고 싶다 말한다. 그러나 한 가지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 있다. “여러 기관에서 재능기부 요청이 와요. 수업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결국 재료비 때문에 진행을 못 하는 경우가 많죠. 기관마다 예산이 정해져 있는데, 가죽공예가 다른 수업에 비해 저렴한 편은 아니니까요. 기부자도, 기관도, 수강생도 재료비에 부담 없이 가죽을 즐길 방법을 연구하는 중입니다.” 재능기부 실천을 위한 TIP ❶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라 기관이나 재단 등에서 진행하는 수업도 좋지만, 먼저 내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곳을 살펴보세요. 저도 성당에서 먼저 시작했답니다. 동네 어린이집, 방과 후 교실 등 둘러보면 재능을 나눌 곳이 얼마든지 있어요. ❷ 하나의 재능만 나누려 하지 마라 수업의 특정 주제에만 얽매이기보다는 내가 가진 또 다른 능력을 끌어와 접목해보세요. 자칫 따분해질 수 있는 수업에 활력이 생기고 더 많이 나누고 얻을 수 있어 마음이 풍요로워집니다. ❸ 대화를 많이 나눠라 수업에 대한 내용만이 아니라 일상의 이야기나 고민도 함께 이야기해보세요. 친밀도도 올라가고 더 가슴 뜨거운 재능기부가 될 거예요. ◇ 서예 재능기부 17년 차 서병규 씨 오산시에서 재능기부하면 빼놓을 수 없는 나눔 베테랑이 있다. 농촌진흥청 공무원 은퇴 후 17년째 오산시에서 서예 재능기부를 하고 있는 정산(靜山) 서병규 선생이다. 동네를 거닐다 보면 아이, 주부 할 것 없이 ‘선생님’ 하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고.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다양한 세대와 만나고 소통할 수 있어 노후가 즐겁다는 서 씨다. 알고 보니 그는 ‘서예’를 전공하거나,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 선비였던 아버지께 어깨너머로 글 쓰는 법을 익혔고, 그때부터 죽 지필묵을 달고 지냈을 만큼 오랜 취미로 삼았던 것이 서예였다. “서예 재능기부를 하려고 전문 자격증이나 학위를 준비해본 적은 없어요. 스스로 터득한 재능을 나눠주고 있는 셈이죠. 내가 하는 일을 요즘엔 재능기부라 칭하지만, 맨 처음 서예 공부방을 열었을 때는 그런 말도 없었어요. 사실 나는 기부니 봉사니 그런 말이 부끄러워요. 수업을 하다 보면 결코 내 것만 나누는 게 아니거든요. 그 시간을 함께하는 모든 사람이 즐거움을 나누고, 배움을 얻는 거지요.” 서 씨가 처음 재능을 나눈 곳은 아파트 관리사무소. 오산시에 이사 온 기념으로 아파트에 글 한 폭을 써서 기증했는데, 이를 본 주민들이 서예를 가르쳐 달라 요청한 것. 그렇게 30명 남짓으로 시작했는데,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 경로당과 어린이 교실까지 진행하게 됐다. 서예 수업이라 해서 붓만 슥 휘두르고 온다 생각하면 오산. 수강생들이 보고 베껴 쓸 체본을 만드는 데만 시간이 제법 걸린다. 한 장을 써서 종이를 복사하면 간편하겠지만, 하나하나 다른 문장을 직접 화선지에 써서 준비하며 공을 들인다. “수강생들을 위한 배려이지만, 자기 수양까지 겸하는 과정이죠. 나도 완벽하지는 않잖아요. 수업을 하면서 내 글씨도 더 좋아졌고, 공부가 많이 됐어요. 함께 성장하는 거죠.” 재능기부 실천을 위한 TIP ❶ 취미도 나눌 수 있다 재능기부를 하겠다고 갑자기 없던 능력을 키우거나 자격증 따기에 매진하지 마세요. 평범한 재능, 오래된 취미 등도 충분히 나눌 수 있으니까요. 꼭 큰 것만 나눌 수 있는 건 아녜요. 작은 것도 나누면 즐거움이 배가됩니다. ❷ 머리 아닌 마음으로 나눠라 재능기부가 뜻깊은 시간이 되려면 머릿속 지식만 공유하지 말고, 따뜻한 마음도 함께 나누세요. 주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을 거예요. ❸ 나눔 외에 욕심 부리지 마라 재능기부를 통해 돈, 명예, 지위 등을 얻으려는 경우도 적지 않아요. ‘선행은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학문은 공명을 탐하지 않는다’라는 제 좌우명을 나눠봅니다.
- 2018-05-11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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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래기 국밥에 추억이 끓는다
- 계절에 따른 음식은 그 맛이 특별하다. 올겨울처럼 한파가 연이어 오면 뜨끈뜨끈한 음식이 구미를 당기기 마련이다. 그런 음식으로 필자는 시래기 국밥을 즐겨 한다. 오늘도 바깥에서 이른 저녁 식사로 그 국밥을 먹었다. 쌀이나 보리, 먹거리가 적어 배고프던 어린 시절에 식구들이 먹는 밥의 양을 늘릴 수 있는 음식 중의 하나가 시래기 국밥이었다. 겨울이면 으레 그 시래기를 이용하여 만든 국이나 국밥을 자주 먹어 싫어질 만도 하지만, 여전히 좋아한다. 신토불이인가 보다. 필자가 가르치고 있는 서울의 사진반 수강생들의 야외 실습을 창경궁에서 진행했다. 나이가 든 사람들이어서 보통 오후 1시부터 3시간가량 촬영을 지도한다. 오늘은 날씨가 추워 시간을 줄이고 근처의 카페에서 손을 녹이며 수업을 마무리했다. 수강생들과 헤어진 후 이왕 나온 김에 혼자서 대학로 근처를 돌며 사진 소재를 찾으며 시간을 더 보냈다. 해가 기울면서 찬바람은 귓전을 때리고 셔터를 누르는 손끝이 아프다. 저녁을 먹기엔 다소 이른 시간이었으나 야외지도를 하다 보니 배가 고파졌다. 예전에 대학로에서 안사람과 함께 “브라보마이라이프”에서 제공한 연극 티켓으로 안사람과 함께 연극관람을 하고 맛있게 먹었던 시래기 국밥집이 생각났다. 혼자서 바깥 식당에서 식사하기가 망설여졌으나 차가운 날씨가 그 음식점으로 발길을 끌었다. 식단 전체가 시래깃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래기 국밥, 시래기 들깨 국밥, 시래기 굴국밥, 시래기 매생이 굴국밥, 시래기 매생이 떡국 국밥이 그것이다. 아직 저녁 식사 시간이 일러선지 손님이 한두 테이블밖에 없어 멋쩍음이 덜했다. 뚝배기에 담겨 나오는 국밥에 시래기 냄새가 구수하고 고향의 추억이 끓는다. 들어간 시래기도 갈아 넣어서 어린 시절 시골에서 먹던 것에 비교해 부드럽고 밥알도 많다. 질감이 다르지만, 시래기 맛은 비슷해 고향의 추억이 혓바닥에 와 닿는다. 한 그릇을 뚝딱 비우니 얼었던 손과 발이 녹으며 전신이 푸근해진다. 고향의 추억을 한 뚝배기 먹었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는 날씨가 추운 겨울이면 시래기 국밥을 자주 끓였다. 식량이 흔하지 못했던 터라 배 부르게 먹기 위하여 적은 곡식에 시래기를 보태 양을 늘리는 방법이었다. 볏짚으로 엮어 시나브로 볕에 마르게 한 후 처마 밑이나 비를 맞지 않는 곳에 매달아 두고 겨우내 음식 재료로 썼다. 밥에 시래기를 넣어 불리기도 하고 아예 죽을 쑤는 것도 같은 이치였다. 시래기를 잔뜩 넣고 걸쭉하게 끓이면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시래기 스무 동도 못 먹고 황천에 멱 감을 팔자”라는 말도 있다. 가을볕에 말린 무청 시래기는 추운 한겨울을 버텨내는 양식이었다. 우리의 조상은 봄에는 들녘에서 겨울을 뚫고 나오는 쑥을 캐어 기운을 얻었고 얼음이 꽁꽁 얼어 채소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얻을 수 없던 그때에는 말려두었던 시래기로 겨울을 따뜻하게 지냈다. 적은 양의 곡식과 함께 죽이나 국 또는 나물로 이용된 구황식품이었다. 시래기의 구체적 효능을 선조들은 알았을 턱이 없으나 체험으로 느끼고 계속 활용하였지 싶다. 시래기가 가진 영양분은 여러 가지다. 무청에 들어 있는 비타민 A와 C가 항산화 작용을 하여 암이나 노화, 동맥경화를 억제한다. 특히 식이섬유가 풍부하여 장운동을 도와주어 다이어트 식품이다. 풍부한 칼슘은 빈혈을 예방하고 치아를 튼튼하게 하여주니 얼마나 좋은 천연의 식자재인가?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자연식품이다. 시골을 고향으로 둔 남편과 반평생을 산 도시 태생의 안사람도 이제 남편이 즐기는 시래기 같은 시골 음식을 즐긴다. 요즘은 남편보다 더 즐기는 듯하다. 찬바람이 쌩쌩 일고 간 밤이 지난 아침엔 자주 시래기 국밥을 끓인다. 추억이 보글보글 끓는 국밥 뚝배기를 앞에 놓고 눈 덮인 앞산을 창 너머로 보며 안사람과 세상을 이야기하는 여유로움을 즐긴다. 한 숟갈 뜬 시래기 국밥을 후후 불며 추억에 빠져드는 시간은 분명 행복이다.
- 2018-02-18 1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