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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영, 언제나 그 자리에서 긍정과 감사를 말하다
- 매일 오후 12시 20분이 되면 만나게 되는 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대한민국 대표 라디오 프로그램. 바로 ‘싱글벙글쇼’다. 국내 시사 풍자 라디오 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싱글벙글쇼’의 안주인으로서 33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혜영은 공동 진행자인 강석과 함께 오랜 세월 사람들이 듣고 싶은 얘기들을 들려주고 웃음과 위로를 전하며 변치 않는 사랑을 받고 있다. 격동의 시대 한복판을 살아오면서 치른 김혜영의 삶과 깨달음이 위기의 시대인 지금 어떻게 다가올 수 있을지, 그녀와의 반가운 인터뷰를 통해 탐색해봤다. 가히 역병의 시대다. 코로나19로 기존의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세상이다. 일상에서는 언제 침입할지 모를 전염병이 걱정이고 경제 지표를 읽는 사람들은 세계적인 경기 위축 현상이 불러올 혼돈을 걱정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1987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33년 동안 ‘싱글벙글쇼’를 진행하고 있는 김혜영 또한 아랑곳하지 않고 항상 우리 곁에서 힘을 보태주는 그런 이들 중 한 명이다.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사람 처음 인사는 흉흉한 상황인 만큼 코로나19 바이러스로부터의 안부를 먼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은 하고 있는데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죠. 요즘 줌바 댄스에 재미 붙였는데.(웃음) 그래도 자기관리는 계속하고 있어요. 여의도공원과 여의도 아파트 광장을 수시로 걷고 PT도 계속 받아요. 최근에 춤추는 걸 한번 해보자 해서 줌바 댄스를 시작했는데요. 몸이 가벼워지더라고요. 그런데 어쨌든 상황이 이리 돼서….” 비록 안타까움이 묻어났지만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는 그 밝고 반가운 목소리 그대로였다. 김혜영은 무엇보다도 액티브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답게 많은 걸 배웠고 배우는 중이다. “필라테스, 우쿨렐레와 캘리그래피도 배우거든요. 라디오 녹음하는 날에는 스튜디오까지 계단을 걸어 올라가고요. 나이가 들면 허벅지 근육으로 살아야 하니까요. 건강하게 늙고 싶은 마음이에요. 오늘도 중요하지만 다음 일도 대비해야 하는데, 저희 같은 방송인은 몸 자체가 상품이잖아요? 다른 무엇보다 건강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설 수밖에 없죠.” 그녀는 나이 들어 싫은 건 얼굴 주름뿐이고 나쁜 건 없다고 단언했다. 긍정의 에너지가 그녀 주위에 넘실거리고 있는 듯했다. “마음의 여유, 경제적 여유, 아이들이 다 큰 것에 대한 여유가 있죠. 그리고 남편이 내게 시간을 주는 것도 고마워요.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너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그냥 내가 건강하고 즐거우면 된다고 생각해요. 행복하냐고요? 그렇죠.” 남편과의 오래된 약속 그러고 보니 김혜영의 남편 얘기가 궁금했다. 김혜영이 유명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남편은 지금껏 미디어에 노출된 적이 없다. “나로 인해서 TV와 잡지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게 남편이 결혼 전 내걸었던 조건이었어요. 저는 십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실물은 공개 안 해요. 남편은 결혼을 하고 지금까지 마음의 변화가 없는 사람이에요. 변덕을 부리면 제가 부리지, 남편은 한결같아요. 그래서 아가씨들이 저 사는 모습 보면 결혼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아무래도 그녀의 남편은 대쪽 같은 남자인 듯싶다. 그러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방송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쫑파티하고 밥 먹고 들어오는 것을 보곤 ‘너는 연예인이기 전에 가정주부니까 제 시간에 들어와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 번 대판 싸우고 제가 깔끔하게 정리했죠.(웃음) 그다음부터는 그런 거에 대한 얘기가 없어요. 현재까지. 그리고 제가 문제를 일으킬 일을 안 하니까요.” “사람이 너무 좋다” 김혜영은 요즘 동네 사람들과 다양한 취미활동과 함께 어른들을 모시는 사회공헌적 모임도 하고 있다. 1년에 한 번 5월에 소장품을 팔고 공연도 하는 등 행사를 크게 연다. 그녀 또한 나누는 일에 재미를 느끼게 된 걸까? 알고 보니 국제구호 NGO 단체인 월드채널에서 홍보대사로 일하며 10여 년 동안 매년 3000만 원씩 기부하고 있었다. 캄보디아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학교도 지었다니 그녀의 봉사활동 또한 묵직하고 오래된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관계맺기를 힘들어한다. 그런데 그녀는 나이 들어가며 그 관계망이 오히려 더 넓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 비결이 궁금했다. “저는 사람이 너무 좋아요. 그러니 말도 먼저 걸게 되죠. 그리고 방송인이 좋은 점은, 나는 상대를 몰라도 상대는 마음을 열어놓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다가가면 더 많이 마음을 열게 되는 거죠. 저는 사람을 만날 때 쭈뼛거리는 게 없어요. 그냥 편해요. 제가 그렇게 대하니 상대도 편해지는 거고요.” 어머니 덕분에 이룰 수 있었던 많은 것들 김혜영과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그녀가 뼛속 깊이 감사의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는 인상을 받았다. 33년째 진행한 ‘싱글벙글쇼’에 대한 그녀의 생각 또한 그와 같았다. 많은 사람이 싱글벌글쇼를 푸근하게 들어줘서 종종 잊게 되지만, 사실 싱글벙글쇼는 시사 프로그램이다. 웃음을 밑바탕에 깐 시사 전달이 목적이다. 그러나 불편할 수도 있는 내용을 특유의 해학과 함께 시청자들에게 전하는 게 ‘싱글벙글쇼’의 강점이자 김혜영이 해내야 할 미션이기도 하다. 그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맞춰주는 스태프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너무 편하죠. 나이가 들어 고마운 게 그들이 나에게 맞춰주는 거예요. 그래서 조금만 그들을 안아주면 잘 따라오더라고요. 좋은 MC는 먼저 상대를 인정해주고 장점을 부각해주는 능력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김혜영은 싱글벙글쇼에서 다양한 연기를 펼쳐 보인다. 들어보면 자연스럽게 연기자로서의 능력이 높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능력을 ‘어머니 덕분’이라고 돌렸다. “삶이 힘드셨던 분이었어요. 6남매를 키워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어머니가 나로 인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에 ‘어떻게 하면 즐거워하실까’를 연구하곤 했어요. 그게 방송에 도움이 되었죠. 그리고 방송국에서 버는 돈을 어머니께 갖다 주는 게 제 기쁨이었죠.” 33년 동안 감사한 사람들 싱글벙글쇼는 원래는 강석이 하고 있었고 김혜영은 그의 상대역으로서 네 번째로 온 사람이었다. 그녀는 당시 서세원이 진행하던 ‘별이 빛나는 밤에’에 게스트로 출연하던 중이었는데, MBC 라디오국 김건영 부장이 그녀의 가치를 알아봐 ‘싱글벙글쇼’에 들어가게 됐다. 그 후로 33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 있게 될 줄 알았을까? “김 부장님은 정년퇴직하셨죠. 생각해보니 저랑 같이 일한 사람들은 다 정년퇴직했어요. 양희은 언니도 저에게 ‘MBC 라디오국에서 제일 독한 년이 너야. 열두 번도 그만뒀을 텐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그런지 그녀가 이 봄날 저녁식사에 초대하고픈 중요한 사람도 바로 싱글벙글쇼 식구였다. “싱글벙글쇼 대본을 25년간 쓴 작가가 있어요. 박경덕 작가라고, 제가 힘들 때마다 그 품에 안겨서 많이 울었어요. 항상 ‘김 여사 참아, 견뎌내’라고 말해주며 25년 동안 많이 들어주고 토닥여줬죠. 고맙고 아련해요. 그리고 15년 된 김성 작가, 애기작가로는 이자원 씨가 있어요. 내 얘기를 가장 많이 들어준 사람들이에요.” 아직도 소녀처럼 김혜영은 철저한 방송인이다. 결혼식 당일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방송을 진행한 후 결혼식장에 갔을 정도다. 매일 라디오 방송을 하느라 해외여행 한 번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언제든 라디오를 그만두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계획을 짠 적이 있다고 한다. “한 달간은 절에 들어가 있으려고요. 그리고 애틀랜타에 가서 3개월 지낼 거예요. 지인이 있어서 거길 기점으로 여행을 많이 다녀보고 싶어요. 제주에서도 1년 살고 싶어요. 제주도는 너무 매력적이거든요. 그래서 귤 따고 당근 뽑는 알바도 알아봤어요.” 제주도에서 지내게 되면 아르바이트 일당을 받아 샌드위치, 와인, 과일을 사고 아침 일찍 해변에 가서 해 떨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있다 올 거라고 한다. 그렇게 일당 번 걸 다 쓰면 또 일을 할 거라고 한다. 낭만적인 상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참 소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딸이 그러더라고요. 걸어가도 시원찮은데 어떤 사람이 산에서 막 뛰어다니는 걸 보면 엄마 같은 사람 저기 또 있다고 그래요.(웃음)” 그녀는 방송인이 안 되었다면 연기자가 되려고 더욱 노력했을 거라고 말한다. 사실 그녀의 연기 욕심을 증명하듯 그녀는 코미디언이면서도 드라마를 많이 한 편이다. 첫 정극 연기는 국민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펼쳤다. 이후 ‘당신’이라는 드라마에도 출연했고, 신년 특집드라마 ‘우리들의 신부님’에서는 주인공 역을 맡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한지붕 세가족’. 평범한 부부의 아내 역할로 오랫동안 안방을 찾았다. 인생살이는 점수로 매겨지는 게 아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감사의 생활이 내재화된 사람, 그러나 그러한 외향적 성향은 많은 사람과 접촉하는 만큼 상처도 쉽게 받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떻게 자신을 지켜내고, 나이가 들어서도 바뀌지 않는 긍정과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 “다 받아들이고 다 인정해버리면 돼요. ‘누가 너보다 방송을 더 잘하네’ 하면 ‘오, 그래 잘하네’ 하고 인정해요. 그 순간부터 편해져요.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해도 ‘그래, 그럴 수도 있어’ 하죠. 힘든데 그게 돼요. 그래서 엄마가 너무 고맙고 감사해요. 이렇게 긍정적인 성격을 물려주셨으니까요.” 나이가 더 들면 영화에 출연해 재밌는 아줌마 같은 감초 역할을 하고 싶다고 웃으며 말하는 김혜영은 어쩌면 삶에 노련해질 수 없는 사람이기에 그 젊음을 간직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틀렸다. 도리어 그녀는 자신의 강점인 긍정의 힘으로 삶을 수용하고 품에 안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 말에는 오랜 시간 끝에 감사와 긍정을 내재화한 사람이 본 세상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었다. “이기려고 하지 마세요. 상대를 이겨서 내가 더 잘났다고 여기는 건 자기 생각이지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아요. 인생살이는 점수로 매겨지는 게 아니니까요.”
- 2020-03-2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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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액티브 시니어, 스타트 액티비티!
- “얼굴에 행복이 가득하다, 새로운 도전을 즐긴다, 인생은 충분히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자기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한다.” 중장년을 위한 자기계발서 ‘비바 그레이’의 저자 홍동수(64) 씨가 말하는 액티브 시니어의 공통점이다. 패러글라이딩, 암벽등반, 스쿠버다이빙, 승마, 요트 등 거의 모든 레포츠를 섭렵한 그에게 ‘젊음을 느끼는 순간’이 언제인지 물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 “나이를 느껴본 적이 없다. 고로 나는 매 순간이 젊다.” 도움말 홍동수 ‘비바 그레이’ 저자 홍동수 씨와 같은 중장년을 이른바 ‘액티브 시니어’라 부른다. 본래 이 말은 미국 시카고대학교 교수인 버니스 뉴가튼이 처음 사용했다. 베이비붐 세대의 소비패턴이 가족 중심에서 여가, 자기계발 등 자기 중심으로 변화한 것에 착안한 용어다. 한국에서도 여가와 취미, 소비를 즐기며 사회생활에도 적극적인 50~60대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줄곧 쓰인다. 액티브 시니어의 경우 과거 노인층과는 확실히 구분되며, 육체뿐 아니라 경제적, 정신적 측면에서도 혈기왕성한 성향을 띤다. ‘액티브’(활동적인)라는 의미처럼, 이들은 건강한 신체를 바탕으로 청년 시절보다 더 활발한 여가와 취미를 즐기고 있다. 홍동수 씨는 “레포츠 동호회에서도 직장생활로 바쁜 젊은 세대보다 시간 여유가 있는 시니어들이 반 이상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활동이 그들의 삶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은 무엇일까? 첫째, 삶의 행복과 심리적 안정을 준다. 둘째,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해 친밀감과 유대감을 갖고, 이를 기반으로 지역사회에 이바지하며 사회적 혜택을 얻는다. 셋째, 신체적 여가활동을 통해 건강을 유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가 뭐래도 즐거워한다. 액티브 어덜트, 더할 나위 없이 놀자! 국내 최초 설악산 대청봉 패러글라이딩 및 샌드 요트 제작, 에베레스트 원정, 초경량 항공기 면허, 스쿠버다이빙 자격 취득, 그룹사운드 INDKY의 베이시스트 등등. 액티브 시니어 홍동수 씨의 활동 이력이다. 젊은이조차 엄두를 못 내는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그는 “오히려 나이가 들면 더 쉽게 도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앞서 말한 경제적, 시간적 여유 덕분이다. 중요한 것은 나이나 신체가 아닌 마음가짐. 물론 취향의 차이는 있다. 시니어 레포츠 전문가인 그에게 사람들은 ‘어떤 액티비티를 즐겨야 좋을지’ 자주 묻는다. 이에 그는 ‘에니어그램’(Enneagram, 성격유형검사)을 기반으로 추천 종목을 정리해뒀다. 온라인이나 앱을 통해 ‘에니어그램’을 검색하면 손쉽게 자신의 유형을 파악할 수 있다. 다음 궁금증, 바로 ‘비용이 얼마나 드느냐’는 것. 장비의 경우 대부분 대여가 가능하고, 동호회 등을 통해 중고로도 구매할 수 있다. 활동보다는 고가의 장비 수집이 취미인 이들도 있어, 그야말로 자기 나름이다. 홍동수 씨는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마련한 공식(?)을 내놓았다. ‘장비 구입비는 한 달 생활비 정도, 활동비(이용료, 입장료 등 하루 경비)는 하루 생활비 정도’로 계산하라는 것. 그의 경우 장비 구입비는 300만 원 선, 활동비는 하루 10만 원 선으로 보고 있다. 금액 때문에 도전을 망설이지는 않는가? 홍동수 씨는 말한다. “레포츠는 돈보다는 열정과 호기심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최근 코로나19 등의 여파로 각종 레포츠 모임이 주춤한 상태다. 그는 이때를 틈타 준비해둘 것이 있다고 조언한다. “나이를 떠나 레포츠를 즐기려면 어느 정도 근력이 필요합니다. 집에서라도 조금씩 운동하며 기초 체력을 키우길 바랍니다. 건강하고 능력 있는 우리 시니어가 ‘잘 노는 사람’까지 된다면, 드디어 완벽한 인생을 누리는 첫 세대가 아닐까요?” 홍동수 씨가 권하는 상황별 레포츠 ◇ 은퇴 후 부부가 함께하려면 ‘산악자전거’ 산악자전거가 일반 자전거보다 더 위험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의외로 안전하다. 우리나라는 산마다 임도(산간 도로)가 잘 조성돼 있다. 이 길은 등산로와 다르다. 사륜구동차도 다닐 수 있다. 아내도 산악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면서 건강해졌다. 산악자전거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부부가 함께 전국일주도 가능하다. ◇ 럭셔리한 취미생활을 원한다면 ‘승마’ 승마는 귀족 스포츠로 잘 알려져 있지만 말을 구입하지 않으면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지는 않는다. 부유한 이들도 말을 소유한 경우가 극히 드물다. 다양한 승마 체험의 재미가 있는데, 말을 사면 자기 말밖에 탈 수 없고 유지비도 많이 들기 때문이다. 또 정적이고 우아한 활동으로 여기기 쉬운데 의외로 격렬하고 체력소모도 심하니, 이 점 고려하자. ◇ 사색과 성찰의 시간이 필요할 땐 ‘패러글라이딩’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 중에 중장년이 꽤 많다. 하늘에 떠서 고요히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기 좋기 때문이다. 조절하기 나름이지만, 길게는 4~5시간도 공중에 떠 있다. 광활한 풍경을 바라보며 성찰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정적인 레포츠다. 잠깐 교육만 받으면 스스로 바람을 살피면서 안전하게 제어가 가능해 누구든 쉽게 배울 수 있다.
- 2020-03-25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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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우야, 99세까지 88하게 같이 가자
- 테니스 코트 앞에 모인 일흔다섯 살 동갑내기 친구들은 계란과 과일, 빵, 차 등을 챙겨와 서로 나눠 먹으며 한 달 동안 하지 못했던 얘기도 하고 테니스로 우정을 다진다. 2014년 2월에 창단했으니 올해로 딱 6년째. 러브 테니스 클럽 회원들은 한 달에 한 번, 매월 첫째 주 일요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모여서 테니스를 친다. 요즘은 안양 토박이인 김재민 씨가 주선해 안양시청 테니스 코트에서 몸을 푼다. 1946년생 개띠, ROTC 7기. 전우애로 뭉친 러브 테니스 클럽 사람들은 나이도 추위도 잊고 형광색 테니스공을 쫓아 뛰고 또 뛰었다. 이 모임의 머슴(?)이라고 밝힌 총무 김종익 씨. 테니스를 치러 오는 날만큼은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고 했다. “모인 친구들이 살아온 인생은 다 다르지만 여기에서는 그냥 제복 입고 보던 모습 그대로입니다.” ROTC 장교로 퇴역하고 대기업 임직원, 업체 대표, 교사, 교수 등 다양한 모습으로 젊음을 불태우다 현역 은퇴 뒤 더 끈끈한 우정으로 회우했다. “만나서 얘기하다 보니 테니스 치는 친구가 있더라고요. ‘너도 쳐? 나도 쳐!’ 하다가 모임을 만들었어요. 초창기에는 5~6명이었지만 지금은 12명이나 됩니다.” 러브 테니스 클럽은 특히 ROTC 7기들이 만든 모임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어 다른 동기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앞서 말했지만 이들은 장교로 전역한 후에도 대한민국 경제와 교육계를 주름잡으며 화려한 현역 시절을 보냈다. 한진해운 미주 지사장을 지낸 송국주 총회장을 비롯해, 현대중공업과 삼성계열사 요직에 있었던 김성주 러브 테니스 클럽 회장, 한국산업은행 태국지사장이었던 오재영 씨, 국방대학교 교수였던 김수창 씨, 교장 출신인 손기준 전 회장과 김재민 씨. 인천예술총연합회장 김재열 씨 등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테니스가 삶의 활력소가 됐다고 말했다. 김재민 씨는 5년 전 위암 말기로 3개월밖에 못 산다고 했으나 지금은 완치 판정을 받고 테니스에 빠져 산다. 서울대학교 출신 체육 교사였던 노영식 씨도 최근 큰 수술을 받았지만 병상에서 일어나자마자 테니스 코트로 돌아왔다. 지금 이들에게 테니스가 더할 나위 없는 게 돼버렸다는 의미다. 김성주 회장은 “지인들이 자꾸 저 세상으로 떠나서인지 이곳에 올 때마다 친구들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골프 맛 보고 테니스계에 복귀 러브 테니스 클럽 회원들은 테니스는 물론이고 골프를 친 시간도 오래됐다. 지나고 보니 테니스가 참 좋은 운동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고 했다. ROTC 7기 중앙회장인 송국주 씨도 러브 테니스 클럽의 주요 멤버. 골프 마니아였던 그가 테니스 예찬론자로 돌아선 지는 꽤 오래됐다고 했다. “한창 젊을 때는 골프를 쳤어요. 42년 정도 하면서 싱글 핸디캡퍼에도 올랐죠. 그런데 어느 날 문득 테니스가 치고 싶어서 다시 테니스 라켓을 잡았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요즘은 한 달에 한 번 러브 테니스 클럽 가는 날만 기다려요. 진짜 좋은 운동입니다. 여기 모인 친구들은 모두 행운아죠. 건강하지 못하면 테니스를 못 치니까요.” 신두완 씨와 이해영 씨도 30년간 테니스를 쳐왔다며 “사회성과 순발력에 좋은 스포츠이고 평생운동이 바로 테니스”라고 했다. 산업은행 태국지사장을 지낸 오재영 씨는 골프 치기 좋은 태국에서도 한인회를 찾아가 함께 테니스를 칠 친구들을 구하기도 했다며 테니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언제까지 테니스를 칠 수 있을 것 같냐는 질문에 의견이 분분했으나 다들 99세까지는 치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위하여!”를 외치는 그들의 목소리에서 젊은 열정이 느껴졌다. 테니스 라켓 선택 헤드 사이즈, 무게, 밸런스, 스트링 패턴 체크 ----- 헤드 사이즈 93스퀘어인치(sq.in.)부터 113스퀘어인치까지 크기가 다양하다. 헤드 사이즈가 작을수록 공격형, 클수록 수비형 라켓으로 분류된다. 즐기려면 헤드가 큰 것을 고른다. 무게 220~340그램까지 있다. 신체 근력 등을 생각해 선택하면 된다. 여성은 270그램 정도가 좋고 남성은 300그램이 적당하다. 밸런스 무게중심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룬 ‘이븐밸런스’, 무게중심이 뒤쪽에 위치해 컨트롤은 좋으나 무거운 단점이 있는 ‘헤드라이트’, 공을 칠 때 힘은 좋으나 컨트롤이 힘든 ‘헤드헤비’가 있다. 입문자는 이븐밸런스 레벨을 선택하면 된다. 스트링 패턴 라켓의 줄 수가 가로 19줄 세로 16줄로 구성된 것은 오픈패턴(줄 수가 적은 패턴)이라 하며 타구감이 부드러운 게 장점이다. 가로 20줄, 세로 18줄로 촘촘하게 구성된 것은 덴스패턴이라 한다. 가장 대표적인 패턴이다. 강하게 날아오는 공을 치기에 좋고 컨트롤도 쉽다. 타구감이 딱딱해서 호불호가 나뉜다. 테니스화 고르기 테니스 경기 중 가장 많이 다치는 부분이 발목이기 때문에 발목을 잘 잡아주고, 내구성보다는 착용감이 편한 것을 선택한다. 발볼이 넓으면 신발 폭이 넉넉한 것을 고르고, 발가락 앞쪽 부위에 여유 공간이 있는지도 확인한다.
- 2020-03-25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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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연재 변호사, 옳은 것을 알리고 정의롭게 살다
- 인생은 살 만하다. 끝도 보이지 않는 암흑 같은 터널을 지나면 결국 밝은 빛을 만나기도 한다. 때론 눈, 비 내리는 처절한 시련을 겪기도 하고 말이다. 명암의 시대를 지나 다시 한 번 뜻깊은 삶에 도전하는 박연재(朴連在·69) 변호사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999년에 탈옥수 신창원 검거사건을 특종보도한 후 KBS 서울 본사로 가서 홍보실 차장으로 2년간 근무했어요. 그때 일간지와 잡지사 기자도 많이 만났습니다.” 아침 일찍 서울에서 광주까지 온 기자를 반갑게 맞이한 박연재 변호사는 방송사 시절 이야기로 친근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기자 출신인 그는 기자를 상대로 하는 홍보팀뿐만 아니라 KBS 광주방송총국 심의위원으로 정년을 마칠 때까지 방송사에 젊음을 바쳐 일해왔다. 정년과 함께 사법연수생 되다 방송사에서 정년퇴임이 임박했을 무렵, 박 변호사는 법무부로부터 사법시험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2007년 9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과거 국가 권력에 맞서 시위에 나섰다가 억울하게 사법시험 면접에서 탈락한 사람들에게 사업연수원 입소 기회를 부여하라고 정부에 권고했다. 박 변호사도 그중 한 명이었다. 1970년 전남대학교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던 박 변호사는 유신시대, ‘독재타도’를 외치다 무기정학생이 됐다. 그래도 꿈은 법조인이 되는 것이었기에 사법시험을 봤다. 그러나 1981년과 82년 1, 2차까지 합격했지만 최종 면접의 관문은 넘어설 수 없었다. “1981년에 사법시험 면접에서 떨어진 뒤 방송기자 시험을 보고 KBS에 들어갔어요. 미련이 남아서 다시 사법시험을 봤는데 또 붙었어요. 그런데 그때 누가 저에게 포기하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해주더라고요.” 기자로서 종횡무진 일했다. 은퇴 인생을 앞두고 평생 소망이었던 꿈을 육십이 다 되어 이뤄낸 박연재 변호사. 사법시험에 합격한 지 근 30년 만인 2010년, 까마득히 어린 미래 법조인들과 사업연수원에서 함께 생활했다. “내 앞뒤 좌우가 1987년생으로 나랑 26~7년 차이가 났어요. 아들보다 더 어렸어요.(웃음).” 연수원의 어린 동기생을 대하는 것도 어려운데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보니 고등학교 2년 후배인 김이수 전 헌법재판관이 연수원장이었다. 김 연수원장은 박연재 변호사를 ‘선배님’이라고 부르면서 밥을 사기도 했다. 그가 그렇게 사업연수원에 들어간 지는 올해로 10년, 변호사 사무실을 연 지 8년이 됐다. 열혈 변호사 박연재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가족이 있는 서울이 아닌 광주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대학과 방송사 생활까지 그곳에서 했기에 생활 터전이나 다름없었다. 사무실을 열고 2년 정도는 사무장을 고용했는데 점점 기자로서의 버릇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직접 써야 하는 버릇이 남아 있어서 혼자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접 보지 않으면 불안했어요. 어떤 로펌을 보면 변호사가 아니고 사무장이 소장을 쓰던데 나는 그게 참 신기해요.” 변호사를 만나러 왔으면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고 가지 왜 사람들이 사무장과 상담하고 가는지 납득하기 힘들다고 했다. 광주지방법원 앞에 마련된 박연재 변호사의 사무실에는 ‘마을 변호사’라고 쓰인 벽보가 붙어 있다. 마을 변호사로서 어떤 사건을 가지고 법원에 출입하는지 궁금했다. “의뢰인 중에 영수증도 없이 돈 빌려줘 놓고 그거 받아 달라고 하는 분도 있어요. 민사에서 영수증이 없는데 어떻게 돈을 받아줘요. 참 답답하지만 해결하기 어렵죠. 그래도 변호사 초기 국선 변호사로서 음주운전으로 걸렸던 피고인의 음주 측정 수치를 분석해 무죄를 선고받게 한 적도 있습니다.” 황당한 일도 겪었다. 승소하고도 돈을 떼였다는 것. “수임료를 지불하지 않고 변호사협회에다 강요에 의해 계약서를 썼다면서 투서한 사람이 있었어요. ‘설명은 변호사가 한 것 같은데 고지를 안 들었다’, ‘바빠서 도장 찍으라고 해서 찍었다’ 등등 내용도 다양해요. 강제집행하려고 주소지를 쳐봤더니 논두렁인 적도 있고요.” 최근에는 중국 단동 출신 동포가 박 변호사를 찾았다. 그는 1심과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대법원에서 사기죄로 구속됐다. “제가 대법원에 상고이유서를 썼는데 다행히 피고인 측에서 제 상고이유서를 읽고 대단히 감동했다더라고요. 판결이 파기되기는 어려울 수 있겠지만 억울한 부분도 있더라고요.” 다양한 사건을 맡아 변론해왔지만 그가 중점적으로 다뤄온 사건은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사건이다. “6·25전쟁 때 양민학살이 많았어요. 무고한 학살이었다는 것이 국가배상 청구를 통해 입증되고 승소하면 국가가 배상해줬습니다. 2010년까지 한시법으로 끝났습니다. 대상자들 가운데 영암에서 시신을 찾지 못하고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도 진실규명 불능이라고 했는데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아냈습니다. 국가 배상도 중요하지만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먼저이지요.” 지금도 가끔 이와 관련한 문의가 오지만 한시적으로 끝난 일이기에 안타깝기만 하다. 세상 요지경 속을 들여다보다 그는 기자와 변호사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고 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건 비슷하지만 변호사가 더한 세상을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부부나 부자간의 갈등, 재산상속 문제는 가족 간 갈등이 얼마나 심한지를 보여줍니다. 기자로 30년을 살면서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 있더군요.” 법정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사건과 마주하는 순간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사건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않는 의뢰인에게 파고드는 질문을 했다가 싫은 소리도 들었다. “왜 심문하듯 따져 묻느냐는 사람도 있었어요. 불리한 상황도 변호사인 제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숨길 것은 숨기고 유리한 것은 공격하죠.” 소외된 이들을 위한 삶을 살다 시니어가 되어 제2인생으로 맞이한 변호사 생활. 그에게 삶의 활력소는 단연코 ‘일하는 삶’이다. 퇴직 이후에 흐트러지고 불규칙한 생활을 하게 되면 건강도 해치고 삶의 질도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란다. “일이 없으면 생활의 윤기가 떨어지죠. 봉사건 뭐건 사회활동을 해야 해요. 물론 용돈을 벌면 좋겠지만, 수입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그는 휴일에도 사무실에 나와 판례를 보고 소장 등을 챙긴다. “그전에는 골프도 치고 무등산, 월출산도 가고 그랬어요. 방송기자로 지낼 때는 낮술을 좀 했는데 지금은 전혀 안 해요. 외부 활동이 많은 변호사를 이해할 수 없어요. 최선을 다하려면 눈코 뜰 새도 없거든요.” 박 변호사는 이 시대를 사는 시니어로서 독자들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우리 세대가 너무 비판적으로만 현실을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분노할 줄도 알아야 하지만 나이 들어갈수록 감정을 유연하게 표출했으면 합니다.” 이 사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후세에게 개선할 역할도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시니어의 경륜과 진중함을 잘 활용해야 참 시니어 아닐까요? 이건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 2020-03-25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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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웬만해선 남편이 싫어하는 건 안 하는 편입니다”
-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 ‘울산 큰애기’, ‘대머리 총각’ 등의 노래들로 국민가수의 삶을 살았던 김상희. 그녀는 1961년 고려대학교 법학과 학생 신분으로 가수 데뷔를 해 장안의 화제가 됐었다. 여성이 법학과 엘리트라는 점도 특별했지만, 그런 사람이 소위 ‘딴따라’ 가수를 한다는 게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과감한 선택은 성공이라는 보답으로 돌아왔다. 다양한 히트곡을 발표하며 1960~197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로 살았던 그녀에게는 50여 년을 함께한 사랑하는 남편, 그리고 지난 시대의 역사가 있다. 삶의 지혜 가득한 그녀의 얘기를 들어봤다. 김상희와의 인터뷰를 시작했을 때 특유의 보이시한 저음이 매력적으로 들려왔다. 밝고 힘 있는 목소리 톤에서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녀는 1943년생, 올해 행운의 숫자 7을 두 개나 갖는 나이가 됐다.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자마자 그토록 젊음을 유지해주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 우리 남편이죠. 남편은 우리 집 원동력이고 아주 좋은 친구예요.” 김상희의 남편은 유훈근 씨. KBS PD 출신인 그는 1968년 그녀와 결혼해 어언 52년간을 함께해왔다. 이혼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졸혼이 유행처럼 얘기되고 있는 요즘, 이 부부의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단단해 보였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기에 가능했을 터다. 행복의 근원은 남편의 배려심 “대학 4년 동안 그야말로 남자 대학 같은 곳에서 공부했어요. 당시엔 여학생들이 별로 없었거든요. 또 밖에 나와서 만나는 방송계, 언론계 사람들도 다 남자들이었고요. 말하자면 남자들 세계에서 생활한 셈인데, 남편이 혹시 기분이 안 좋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한 번도 그런 내색은 안 하고 편하게 대해줬죠. 친정 부모님은 내가 가수생활 하는 걸 정말로 싫어하셨어요. 시댁에서도 그랬죠. 그러나 양가 어르신들께 용감하게 입장을 말씀드리고 결혼을 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곁을 지켜주고 있는 남편이에요.”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남편은 등대이자 나무 그늘이었다고 표현했다. 전혀 불평도 안 하고 감싸주고 보살펴주니 그녀로선 당연히 남편을 인생의 동반자처럼 항상 이해해주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부부는 서로에게 마음을 다 주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가장 현명한 것 같아요. 특히 상대의 자존심은 꼭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픈 부분은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하고요. 예를 들어 남편은 잔소리, 특히 한 말 또 하는 걸 아주 싫어해요. 부부생활은 철저한 일상인데, 상대의 잘못은 잘 보이고 내 허물은 잘 안 보이기 마련이죠. 그래서 잔소리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를 ‘눈만 보고도 웃을 수 있는 사이’라고 말한다. 밤에 자다가 문득 눈이 떠질 때가 있는데, 그때 옆에 있는 남편을 보면 너무 든든하다는 생각이 든단다. 그저 고맙기만 하다고. “요즘 남편이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옛날에 돈 버는 일을 좀 더 많이 하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할 때가 있어요. 그러면 내가 ‘돈 벌었잖아, 우리 살렸잖아. 그런데 왜 자꾸 그래’ 하고 말해주곤 해요.” 정치와 연을 끊은 사연 남편의 후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부부의 돈독한 관계와 달리, 부부를 둘러싼 외부 환경은 거칠기 그지없었다. “시댁은 정치하는 집안이었어요. 시아버지가 5선 국회의원이고, 시숙부도 4선 국회의원이었죠. 종갓집 맏며느리로 할일도 많았고 마음고생도 엄청 했어요. 주변에는 늘 우리 집안을 사찰하는 사람이 있었고요. 무슨 움직임이 없나 이런 거 말이죠.” 어느 날 PD였던 남편에게 김대중 당시 신민당 총재가 함께 일하자고 찾아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그 요청이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되자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에게도 정치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친정어머니는 결혼을 허락할 때 남편한데 정치를 안 하겠다는 언약을 받았어요. 그래서 남편이 고민할 때 나도 생각이 많았죠. 그러나 ‘나도 친정에서 그렇게 반대하는 결혼을 했는데 저 사람은 오죽할까’ 싶었어요. 그래서 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죠.” 남편은 결국 김대중 당시 신민당 총재 공보비서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무렵은 서슬 퍼런 1980년대 독재정권 시절이었다. 야당 의원 공보비서가 된 남편과 그런 남편을 둔 가수를 정권에서 곱게 볼 리 없었다. 남편은 어쩔 수 없이 해외로 정치적 망명을 떠나야 했고 그 시간 동안 김상희는 방송 출연과 공연 금지를 당해야 했다. 그때 그녀는 시간이 좀 여유가 있어서 햄버거 장사도 해본 적 있다. “그런데 가게를 운영하다 보니 내가 계산을 잘 못하는 데다 원가와 이익 구분도 못 하겠더라고요. 장사를 하면 안 될 사람이었어요. 나중에 귀국한 남편이 그 사실을 알고는 마음 아파했죠. 그렇게 먹고살 게 없었느냐고. 사실 그렇게 부족한 처지는 아니었지만, 나는 시댁에 가서 돈 얘기를 일절 안 했거든요.” 그러나 남편의 정치 도전은 끝이 좋지 못했다. 마침내 사면을 받고 귀국한 그는 전주시 갑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다. 남편에게 전주 갑은 아버지의 지역구였기에 의미가 컸고, 모두들 그가 당연히 국회의원 후보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당에서 공천 명단을 발표했을 때 남편은 떨어지고 변호사 출신 인사가 후보가 됐다. 남편은 분노했다. 그래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그 결과는 낙선이었다. 이 일로 환멸을 느낀 남편은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10월 26일, 뒤통수가 얼얼했던 날 어쩌면 그런 ‘팔자’였을까. 김상희에게도 정치계와 관련된 비화들이 있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10·26 사건과 그녀가 인연이 있다는 건 뜻밖이었다. 그녀는 유신정권 시절, 대통령 앞에서도 당당히 할 말을 했던 에피소드들을 들려줬다. “어느 날 밤 청와대에서 공연을 하라고 부른 적이 있어요. 나이트클럽과 계약이 되어 있었던 터라 못한다고 했죠. 그랬더니 문화공보부 장관이 몇 시 스테이지냐고 묻더라고요. 9시, 11시라고 했더니 그럼 그 전에 보내주면 되지 않느냐고 해서 갔죠. 그런데 노래를 끝내고 나왔을 때 아무도 없는 거예요. 청와대 입구까지 혼자 어떻게 걸어 나와요. 그래서 냅다 소리를 질렀죠. 장관 이름을 부르면서.” 청와대 한복판에서 소리를 지르다니 대단한 ‘깡’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부르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 소리를 듣고 나타난 사람은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녀를 장난삼아 ‘깡패’라고 부르곤 했다는데, 그녀의 대찬 기질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어이, 깡패. 왜 그러는 거야’ 하고 묻더군요. 그래서 ‘공연 때문에 나이트클럽에 가야 하는데 내보내준다고 해놓곤 연락이 없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박 대통령이 비서들에게 ‘여기 봐!’ 하더니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할 거 아냐’ 하고 혼을 내더라고요. 그래서 쏜살같이 공연하러 갈 수 있었죠.”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서로를 편안하게 생각하는 관계였기에 박 대통령의 사망 소식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줬다. “10월 26일 저녁에 청와대 연회 공연이 있었어요. 공연을 끝내고 저는 돌아왔고요. 그런데 그 후 안가에서 사건이 났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머리가 띵하더군요. 바로 전에 만났는데….” 다양한 장르 섭렵한 멀티 플레이어 전직 대통령들과의 에피소드는 그쯤에서 끝이 났고, 이제 그녀의 음악세계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요즘 김상희는 대중가요보다는 클래식이나 품격 있는 공연에 더 어울리는 느낌이다. 양재무 음악감독이 이끄는 남성합창단 이마에스트리와 함께하는 공연도 그렇다. 이마에스트리로선 창단 이후 최초로 대중가요 가수와 협연하는 공연이기도 하다. 그런데 60년 가수생활 동안 그녀는 가요만 부른 게 아니었다. “이탈리아 가곡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해서 부른 게 있고 동요도 불렀어요. 일본에선 재즈 앨범도 만들고 뮤지컬 넘버를 발췌한 앨범도 냈어요. 내가 생각해도 정체성이 뭔지 모르겠어.(웃음) 뮤지컬도 하고 영화도 찍고 할 거 다 했거든요. 이번에는 클래식과 함께하는데 이질감이 없어요.”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즐기는 사람’, 뭐든지 잘 흡수하는 ‘한지 같은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스스로 분석하기에 문제가 좀 있다고 했다. 게으르다는 것이다. “처음엔 잘해요.(웃음) 그런데 내 몫만 하는 타입이죠. 요즘은 젊었을 때보다 노래의 깊이가 달라졌다는 걸 느껴요. 해석하는 방법이 달라졌으니까요.”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강직함 김상희는 지금도 밥공기에 밥풀 한 알 남기는 일 없이 먹는다.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배운 ‘밥상머리 교육’ 때문이다. 사실 그녀의 친정은 상인 집안이었다. “친정아버지가 무역을 했어요. 굉장한 재력가셨죠. 외화도 수입하고 극장도 운영하셨는데, 돈을 흥청망청 쓰는 걸 아주 싫어하셨어요. 어쩌다 떨어진 밥풀을 보면 우리더러 다 먹으라고 할 정도였어요. 아버지 명을 어기기 힘들었죠. 그때부터 남김없이 밥을 끝까지 먹어치우는 버릇이 생겼어요.” 친정어머니도 강직한 사람이었다. 자식들이 실수를 하면 누구 하나의 책임이 아닌 연대 책임을 지도록 가르쳤다. 그래서 나중에는 형제들끼리 실수가 없도록 서로 단속하고 관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김상희에게서 느껴지는 꼿꼿함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도 부모님 속을 썩인 것이란다. 달이 뜨면 어머니에게 미안하다고 말해 김상희의 본명은 최순강이다. 가수가 되기 위해 집안을 속여야 했기에 가명을 썼다. “나는 좋아하는 걸 하게 되면 밀어붙이는 타입이에요. 그런데 엄마에겐 대못을 박았구나, 깨달은 적이 있어요.” 김상희의 둘째 아들도 그녀가 졸업한 고려대학교 법대에 입학했다. 그런 아들을 사랑스러운 자식이자 자랑스러운 후배로 여겼다. 법대에 들어간 만큼 사법고시는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목표였다. 아들은 여유만만하게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시험을 치르고 발표가 났는데 낙방이었다. 얼굴이 새까매진 아들은 “전 고시할 팔자가 아닌 거 같습니다. 오늘 부로 접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 말을 듣고 하늘이 노랬죠. 친정어머니도 내가 가수한다며 법 공부 안 했을 때 남산을 세 번을 돌면서 울었다고 했어요. ‘아, 우리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알게 됐죠. 아들에게는 ‘괜찮아. 네가 좋아하는 거 하면서 행복을 찾아’라고 말하고 돌아서는데 눈물이 핑 돌았어요. 요즘도 둥그렇게 보름달이 뜨면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요.” 나이 들어도 소통이 되면 외롭지 않아 사단법인 한국연예인한마음회 이사장이자 가요계의 원로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그녀에게 사람들과 잘 지내는 비결을 물어봤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소통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누구와도 소통이 되면 외롭지 않아요. 어떻게든 귀를 열어 듣고, 얘기할 때는 나잇값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죠. 사실 나잇값하는 게 제일 힘들어요. 서로가 열린 마음을 가져야 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요즘은 일단 듣고, 의견을 물으면 맨 마지막에 해요. 너무 나서지 않고요. 특히 ‘내 나이가 얼만데’, ‘나 때는 말이야’ 이런 말은 절대 안 하려고 합니다.” 그녀가 살면서 가장 잘한 일로 양가에서 결사반대했는데 결혼한 것을 꼽았다. 그리고 그렇게 결혼했어도 가족이 화목하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녀가 지키는 삶의 법칙은 절대 남에게 험한 얘기를 안 하는 것이란다. 화가 나도, 상대에게 상처 주는 말은 평생 해본 적이 없다. 그렇게 해서 얻은 좋은 기운이 그녀의 삶을 굳게 지켜준 것인지도 모른다. “가수로, 엄마로, 아내로, 나로서 잘 살다 간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내가 죽었을 때 슬퍼할 사람들이 있다면 잘 산 거겠죠? 난 웃으면서 죽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정말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도 하고요.”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쉽게 꺾이지 않는 코스모스 같은 그녀의 노래가 깊은 내면 속으로 울려 퍼졌다.
- 2020-03-20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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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록 소장 "노후의 나력 키워나가길"
- 라틴어로 가면을 뜻하는 페르소나(persona). 사회적 위치나 역할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일생에서, 또 일상에서 여러 페르소나를 갖게 된다. 겨울 옷 하나로 사계절을 보낼 수 없듯, 다양한 가면으로 유연하게 탈바꿈하며 사는 것이 곧 삶에 적응하는 일이다. 김경록(金敬綠·58)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은 특히 퇴직을 앞둔 중장년이 사회적 페르소나를 벗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꽃과 잎을 모두 떨구고 벌거벗은 겨울 나목(裸木)의 단단한 기세처럼, 자신의 민낯을 마주할 용기, 즉 노후의 나력(裸力, 벌거벗을 힘)을 키워나가길 바라는 그다. 경제학자이자 은퇴 연구 전문가로 이름을 알려온 김경록 소장은 최근 중장년을 위한 자기계발서 ‘벌거벗을 용기’를 펴냈다. 재테크나 투자 등 그의 전공 분야와는 다소 거리감이 있어 보이는 제목이다. 내용 역시 ‘성찰, 관계, 자산, 업(일), 건강’ 순으로, 돈 문제에 한한 이야기가 아닌 보다 폭넓은 주제를 아우르고 있다. 김 소장은 스스로 “은퇴에 대한 생각 전부를 담은 책”이라 일컬으며, 은퇴 전후의 중장년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길 바랐다. “생텍쥐페리는 소설 ‘인간의 대지’에서 삶의 의미를 역할과 책임이라 했어요.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사회에서의 역할과 가정에서의 책임이 줄어드니 그러한 삶의 의미도 점점 퇴색되어가죠. 명함, 직위 등 자신이 갖고 있던 비본질적인 것, 즉 사회적 페르소나를 내려놓는 시기가 찾아오는 겁니다. 흔히 은퇴한 사람들에게 ‘물 빼는 데 3년 걸린다’는 말을 해요. 이는 페르소나를 바꾸는 데 3년이 걸린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쉽지 않고요.” 혹자는 여러 가면을 둔 이들을 기회주의자라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 소장은 오히려 하나의 페르소나만 갖는 것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내다봤다. 여러 가면을 잘 바꿔 쓰는 게 정신 건강에도 좋고, 은퇴 후 삶에 적응하기도 수월하다고. “어떤 가면도 영원히 쓸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다른 가면으로 바꿔 쓰거나 가면 없는 자신으로 살아가야 하죠. 사회적 페르소나의 경우, 너무 오래 써왔기에 쉬이 벗지 못합니다. 은퇴 후에도 지인의 회사 고문으로 명함을 만드는 등 과거의 흔적을 부여잡기도 하죠. 애써 페르소나를 벗었더라도 자신의 민낯에 당황하곤 합니다. 나의 본질을 받아들이고 후반생의 의미를 찾으려면 성찰이 중요해요. 때문에 ‘성찰’을 책 서두에서 다뤘죠. 또 젊어서는 부모나 직장의 테두리 안에서 통제가 가능했다면, 이제는 나를 제어할 무언가가 없잖아요.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폭주노인’이 되기 십상입니다. 성찰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죠.” 점의 인생관으로 그려낸 인생 그림 자신의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폭발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이를 이른바 ‘폭주노인’이라 말한다. 이러한 경우 대부분 지난날에 대한 후회에 사로잡혀 있거나, 혹은 반대로 찬란했던 한때에 얽매여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렇게 좋든 나쁘든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지나치게 연결 짓다 보면 결국 노후의 만족감은 떨어지기 마련. 이에 김 소장은 ‘점의 인생관’을 통해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길 조언했다. “나이 듦을 선으로 보는 인생관이 있고, 점의 집합으로 보는 인생관이 있습니다. 가령 연필을 떼지 않고 선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해보죠. 나의 노력과 무관하게 한 번 잘못된 선을 그어버리면 원하는 그림을 얻기 힘들어요. 반면 점을 찍어 그릴 경우, 실수한 점 하나 때문에 그림을 망치지는 않습니다. 찍힌 점들을 어떤 순서로 연결하느냐에 따라 그림이 달라지니까요. 내가 찍은 점들의 집합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 의미를 깨닫거나, 관점에 따라 다른 그림으로 보이기도 하죠. 덕분에 과거보다는 현재에 집중할 수 있고, 어떤 선택에 대한 부담도 덜어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비유한 ‘점’은 인생에 있어 과거의 경험과 사건, 관계, 나의 생각 등을 나타낸다. 우리는 살면서 때때로 잘못된 점을 찍었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점들이 쌓여갈수록 알게 된다. 실수처럼 보였던 점이 때론 새로운 그림을 그리게 해준 터닝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고 ‘오리온자리’, ‘전갈자리’ 등을 찾곤 하죠. 근데 그건 인간이 붙인 이름이지, 각각의 별이 그런 뜻으로 존재했던 건 아니잖아요. 인생에 찍힌 무수한 점들 역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겠죠. 물론 그 점들이 완성하는 최종 그림은 우리가 눈을 감는 그 순간이 돼야 볼 수 있겠지만요. 그러니 과거에 너무 얽매이거나 미래의 일을 두려워 말고, 새로운 제2인생의 점을 과감히 콱콱 찍어나갔으면 해요.” 다시 태어나 진짜 삶을 꽃피우다 물론 과감히 점을 찍어가는 과정에서도 주의할 부분은 있다. 김 소장은 책에서 ‘인생 후반 5대 리스크’로 성인 자녀, 금융 사기, 은퇴 창업, 중대 질병, 황혼 이혼 등을 꼽았다. 그리고 인생을 축구 경기로 묘사하며, 이러한 리스크가 닥치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축구 경기에서 골(goal)이 가장 많이 들어간 시간대는 ‘후반 마지막 15분’이었습니다. 전반에는 열심히 뛰어다니며 부족한 실력도 활동량으로 메울 수 있지만, 후반으로 가면 체력이 바닥나고 진짜 실력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후반전이 끝나갈 때쯤 나오는 골이 무서운 겁니다. 만회가 어렵기 때문이죠. 인생 후반에서도 앞서 말한 5대 리스크로 예상치 않게 골을 먹기도 합니다. 이 경우엔 거의 회복이 어렵다고 봐야 해요. 결국 수비를 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우울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리스크는 현실적으로 경제활동을 재개할 가능성이 적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일 뿐, 절대적인 시간이 적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에 김 소장은 노후 삶의 목표를 ‘prosper’(번성하다)가 아닌 ‘flourish’(만개하다)에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인생 전반에는 대개 ‘prosper’를 목표로 하죠. 돈도 벌고 재산도 늘리며 사회적으로 번성하기 위해 사니까요. 그러나 인생 후반에는 지난날 자신이 뿌려놓은 씨앗을 꽃 피우겠다는 ‘flourish’의 관점을 지니는 것이 좋습니다. 가령 노후에 연극배우를 꿈꾼다면 그건 물질적으로 번성하기 위함이 아닌, 잠재돼 있는 나의 달란트(재능)를 만개시켜보겠다는 다짐인 셈이죠. 종종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을 하고 싶다’고 말씀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수명이 길어진 덕분에 우리는 마치 두 번 사는 것과 같은 인생을 살고 있어요. 공부하고, 직장 다니고, 가족을 위해 살았던 전반생, 그리고 오롯이 나만을 위해 사는 후반생. 어쩌면 이 후반의 삶이 더 길다고 볼 수도 있죠. 그러니 다시 태어난 인생이라 여기시고 무엇에든 도전하시며 만개한 삶을 꿈꾸시길 바랍니다.”
- 2020-03-20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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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몬트 숲 속에서 산 스무 해의 기록”
- 시대를 앞서간 명사들의 삶과 명작 속에는 주저하지 않고 멈추지 않았던 사유와 실천이 있다.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유와 사랑과 우정 이야기가 있다. 그 속에서 인생의 방향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생각해본다. 이번 호에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온몸으로 살았던 헬렌과 스코트 니어링을 소개한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희망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봤을 바이블 같은 책이 있다. 바로 헬렌 니어링(Helen Nearing)과 스코트 니어링(Scott Nearing) 부부가 쓴 ‘조화로운 삶’(Living the Good Life)이다. 1930년대 초 뉴욕을 떠나 시골 버몬트의 한 낡은 농가에서 살았던 20년간의 일상을 기록한 이 책은, 생태적 삶을 실천하며 욕심 없이 사는 모습을 솔직하게 그려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전 세계가 경제공황의 늪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덜 갖고 더 많이 존재하자” 스코트 니어링은 188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동 노동의 착취와 전쟁을 반대하다가 강단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그는 경제학자로서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치며 존경받던 대학 교수였다.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대학 측과 마찰을 빚지 않았더라면 그의 삶은 무난하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실천적 지식인이 되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결국 해임 통보를 받고 다시는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후 주류 사회의 배척이 이어지면서 강연은 물론 언론 매체에 글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 여파로 첫 번째 아내와도 헤어지고 자녀들까지 만날 수 없게 되었다. 헬렌을 만난 건 그 무렵. 스코트의 나이 45세, 그녀의 나이 24세 때였다. 한때 인도 철학자 크리슈나무르티의 연인이기도 했던 헬렌은 1904년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예술과 명상과 우주 질서에 관심이 많고 자유분방했던 그녀는 1928년 스코트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새로운 삶의 길로 들어선 건 스코트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덜 갖고, 더 많이 존재하고자 했다. 그러나 직장도 잃고 생계수단마저 막혀버린 스코트에게는 당장 먹고사는 일이 절박한 문제였다. 미친 듯이 서두르며 속도를 내는 세상에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경제적 독립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답은 자급자족밖에 없었다. 그들은 도시를 떠나기로 했다. 시골 버몬트로 이사한 뒤 거칠고 쓸모없어 보이는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손수 살아갈 집을 지었다. 돈을 벌기 위해 애쓰지 않았으나 그때그때 필요한 현금은 단풍나무 수액을 채취해 시럽과 설탕을 만들어 팔아 마련했다.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양식이 마련되면 일도 하지 않았다. 대신 독서와 명상, 여행 등을 하며 여가시간을 즐겼다. 그러면서도 오늘 할일을 내일로 미루는 게으름은 철저히 경계했다. 두 사람이 쓴 ‘조화로운 삶’에는 당시의 일상들이 다음과 같이 묘사돼 있다. “우리는 할일을 했고, 그 일을 즐겼다. 충분한 자유시간을 가졌으며, 그 시간을 누리고 즐겼다. 먹고살기 위한 노동을 할 때는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다. 그렇지만 결코 죽기 살기로 일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더 많이 일했다고 기뻐하지도 않았다.” 스코트 니어링의 유언 헬렌과 스코트는 버몬트에 개발 붐이 불자 1952년, 몇십 배로 가격이 오른 땅을 대부분 마을에 기부하고 떠났다. 새로운 삶의 터전은 메인이었다. 그곳에서도 그들의 집은 늘 열려 있었다. 문명에서 물러난 삶을 몇십 년째 살고 있는 이 기이한 부부를 보러 오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고 귀농 붐도 일어났다. 야채, 과일, 곡물로 차린 소박한 밥상을 즐긴 두 사람은 잔병치레 없이 오래도록 건강했다. 90대가 되자 스코트의 육체적 기력은 예전 같지 않았지만 98세에도 강연을 할 정도로 정신만큼은 꼿꼿했다. 그러나 곧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왔음을 알았다. 1983년, 100세를 눈앞에 둔 어느 날 그는 지인들과 마주앉은 자리에서 “나는 더 이상 먹지 않으려 합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러고는 음식을 서서히 끊었고 물만 마시다가 7주 후에 세상을 떠났다. 헬렌은 훗날 자서전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통해, “우리는 누워서 병을 앓으며 무력한 삶을 계속 살아갈 필요도 없고, 요양원에서 이루어지는 긴 사멸의 공포를 느낄 필요도 없다”고 강조하면서 “스코트가 단식으로 자기 몸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은 느리고, 품위 있고, 평화롭게 떠나는 방법이자 스스로 원한 것”이라고 말했다. 80세 되던 해 썼다는 스코트의 유언은 오늘날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였던 셈이다. 헬렌 니어링도 삶의 마지막을 그렇게 맞이하고 싶어 했지만 그 바람은 이루지 못했다. 1995년, 그녀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91세의 생을 마쳤다. 스코트가 건강할 때 미리 작성해뒀다는 유언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그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1. 마지막 죽을병이 오면 나는 죽음의 과정이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길 바란다. -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란다. - 나는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한 것처럼 보인다. -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다가왔을 무렵에 지붕이 없는 열린 곳에 있기를 바란다. - 나는 단식을 하다 죽고 싶다. 그러므로 죽음이 다가오면 나는 음식을 끊고, 할 수 있으면 마찬가지로 마시는 것도 끊기를 바란다. 2. 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그러므로 어떤 진정제, 진통제, 마취제도 필요없다. 3. 나는 되도록 빠르고 조용하게 가고 싶다. - 따라서 주사, 심장충격, 강제급식, 산소주입 또는 수혈을 바라지 않는다. -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리를 함께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 위엄, 이해, 기쁨과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나누기 바란다. -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다.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 모든 삶의 다른 국면에서처럼 어느 경우이든 환영해야 한다.
- 2020-03-03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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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독자를 위한 3월의 문화 소식
- ● Exhibition ◇ 레안드로 에를리치:그림자를 드리우고 일정 3월 31일까지 장소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아르헨티나 출신의 세계적인 설치 작가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개인전이다. 에를리치는 주로 거울을 이용한 착시 현상에 착안해 엘리베이터, 계단, 수영장 등 친숙한 공간을 소재로 한 작품활동을 이어왔다. 특히 눈으로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물리적 체험까지 가능한 그의 작품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몸소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총 4개의 전시공간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작가의 작품 이미지를 활용해 제작한 영화 포스터 13점으로 꾸민 ‘커밍 순’으로 시작한다. 이어 ‘탑의 그림자’, ‘자동차 극장’ 등 대형 작품을 비롯해 남·북한 지도를 모티브로 한 ‘구름(남한, 북한)’까지 만날 수 있다. ◇ 뜻밖의 발견, 세렌디피티 일정 4월 25일까지 장소 사비나미술관 ‘예술가에게 창의적 아이디어가 떠오른 순간,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우연한 발견이 예술적 발상과 작품으로 연결되기 위해 필요한 환경적 조건은 무엇인가’ 등의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시도로 기획된 전시다. 창작에 영감을 준 이미지를 발견한 당시의 순간과 그 특별한 발견을 작품으로 옮겨나가는 창의적 행위의 과정에 대해 그린다. 이세현, 손봉채, 베른트 할프헤르 등 세렌디피티(뜻밖의 발견)를 경험한 작가 21명의 예술작품 78점과 더불어 흥미로운 일화와 사례, 작가노트 등을 공개한다. 이를 통해 아름다움의 발견에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일깨운다. ◇ 환상의 에셔展: EXIT-에셔의 방 일정 4월 30일까지 장소 서울웨이브아트센터 20세기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네덜란드 작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특별전이다. 이번 전시는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에셔의 그래픽 디자인, 판화 에디션, 아카이브 영상과 더불어 VR 작품과 특별 제작된 대형 오브제 등으로 다채롭게 꾸며졌다. 미술에 수학과 과학을 접목한 작가 특유의 기하학적 구조가 돋보이는 작품들을 통해 예술가의 이성적인 논리와 날카로운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뫼비우스의 띠’, ‘펜로즈 삼각형’ 등을 직접 체험하며 작품 속 에셔가 표현했던 원리들을 마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듯 감상하도록 구성한 점이 흥미롭다. ◇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 2019 일정 4월 23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은 1967년부터 시작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전시로, 매년 세계 80여 개국에서 3000명이 넘는 아티스트가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2019년 볼로냐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수상자 76명의 작품 300여 점을 선보인다. 영향력 있는 심사위원단을 통해 선정된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작품들을 만날 기회다. 2019년 수상작 전시 외에도 2018년 수상자 벤디 베르니치의 특별전이 함께 열린다. 더불어 어린이 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라가치상’ 수상 도서 16권이 전시되는 등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세계 일러스트 트렌드를 살펴볼 수 있다. ● Movie ◇ 찬실이는 복도 많지 개봉 3월 5일 장르 드라마 감독 김초희 출연 윤여정, 강말금, 김영민, 윤승아 등 ‘우리 순이’, ‘산나물 처녀’ 등으로 주목받은 김초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3관왕,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 수상 등 작품성과 대중성을 인정받으며 화제를 모았다. 평생 일복에 시달리며(?) 살던 주인공 ‘찬실’에게 전에 없던 행운이 굴러들어오며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유머러스하게 펼쳐진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여성 서사의 작품에 따뜻하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더했다. 배우 윤여정은 무심한 듯 보이지만 속정 깊은 주인집 할머니 ‘복실’ 역을 맡아 극에 훈훈한 감동을 불어넣는다. ◇ 다크 워터스 개봉 3월 11일 장르 드라마 감독 토드 헤인즈 출연 마크 러팔로, 앤 해서웨이, 팀 로빈스 등 독성 폐기물 유출로 인류의 99%를 위험에 빠뜨린 미국 최고 화학기업 듀폰. 그들의 만행을 고발하며 전 세계를 뒤흔든 일간지 ‘보스턴글로브’의 심층취재팀 ‘스포트라이트’의 실화를 스크린에 옮겼다. ◇ 리암 갤러거 개봉 3월 12일 장르 다큐멘터리 감독 개빈 피츠 제럴드, 찰리 라이트닝 출연 리암 갤러거 등 세계적인 록밴드 ‘오아시스’의 멤버였던 리암 갤러거의 삶과 음악에 대해 엿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화려한 시절을 지나 험난한 시간을 보낸 그가 자신의 진솔한 심정을 고백하며 관객과의 소통에 나선다. ● Book ◇ 오팔세대 정기룡, 오늘이 더 행복한 이유 (정기룡 저ㆍ나무생각) 경찰서장을 지내다 정년퇴임 후, 온몸으로 부딪히고 깨지면서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한 오팔세대 가장의 파란만장 인생 후반전을 담았다. 진솔하게 풀어낸 저자의 다채로운 에피소드를 통해 공감뿐만 아니라, 용기와 위로의 메시지도 얻는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터득한 은퇴설계 노하우를 아낌없이 공개하며 오늘날 오팔세대의 활기찬 제2인생을 응원한다. ◇품위 있게 나이 드는 법 (버나드 오티스 저ㆍ검둥소) 노년기 마음가짐과 실질적 조언의 비율을 3대 7로 구성해 현명하게 나이 드는 방법을 제시한다. 가입할 보험 조건, 병에 걸렸을 때의 대처, 유언 준비 등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다. ◇ 인간의 모든 죽음 (최현석 저ㆍ서해문집) 현대인의 생활 습관과 죽음의 관계, 죽음의 유형과 특징, 치매·간병·호스피스·사별 등 웰다잉을 위한 실용적 지식을 총망라했다. 죽음에 대한 117개의 키워드를 꼽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 정년 아저씨 개조계획 (가키야 미우 저ㆍ㈜소미미디어) 가부장적인 태도를 지녔던 ‘정년 아저씨’가 손주를 돌보기 시작하며 자신의 편견을 깨 나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 주인공의 인식 전환을 통해 가족과 사회를 위한 긍정적 변화를 촉구한다. ◇ 양준일 MAYBE (양준일 외 공저ㆍ모비딕북스) 최근 JTBC ‘슈가맨’을 통해 19년 만에 돌아온 가수 양준일이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놨다. 좌절과 상처를 극복할 수 있었던 그가 깨달은 삶의 본질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 2020-02-28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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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퍼리치의 정점엔 예술이 있다
- ‘인플루언서’(Influencer)라는 말이 있다. 영어로 ‘영향을 주다’라는 뜻의 ‘인플루언스’ 뒤에 접미사 ‘er’을 붙여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을 칭한다. 연예인, 운동선수 혹은 잘나가는 유튜버 크리에이터일 수도 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인플루언서’로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부자다. 특히 부자들의 삶에서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경매시장에 나온 예술품은 범상치 않은 이의 손과 손을 거치며 본연의 가치를 드러낸다. 그들의 입소문을 타면 예술의 가치가 올라갔고, 문화로 정착했으며, 새로운 예술가가 탄생하기도 했다. ‘부’를 업고 문화를 껴안다 재력을 쌓아올린 부자들은 먹고사는 일에서 해방되자 규칙을 정하고 그들만의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최고급, 최상품, 최고 가치는 부자들의 눈썰미에 최적화되어 분류됐다. 도시가 생겨나고 산업이 발달하던 시기, 예술의 가치를 논할 수 있는 자는 결국 시간과 정서적 여유가 있는 부자들이었다. 먹고사는 데 불편함이 없었던 이들은, 예술세계를 알면 또 다른 차원의 즐거움과 카타르시스가 있음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인플루언서였던 그들은 시대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을 찾아내고 성장시켜왔다. 당장 빵 한 조각이 없어 굶어죽을 수도 있는 사람이 예술을 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예술과 문화에 대한 지원은 결국 부자들이 했다. 그것은 미래 가치에 대한 투자였다. 예술과 학술 활동을 후원하고, 문화 가치의 보존에 힘쓴 역사 속 수많은 부자 중에는 15세기의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섬유 사업으로 가세를 키워 금융업으로 성장해 유럽 최고 부호가 된 가문이다. 막대한 자본을 기반으로 피렌체 정치도 좌지우지했다. 그다음으로 한 것이 바로 예술인 후원. 온갖 고서를 찾는 책 사냥꾼을 고용해 전 세계의 서적을 모았고 문화, 조각, 회화는 물론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등 14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예술 작품을 메디치 가문이 보존했다. 한국판 메디치 가문을 꼽자면, 간송 전형필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넘어가거나 훼손, 말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집하고 보호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간송은 증조 때부터 배우개(현 종로4가) 중심의 상권을 장악해온 대부호 집안의 상속권자였다.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 그는 중국어 역관이자 서화가, 수집가였던 오세창과 함께 민족문화재 수집 보호에 힘을 쏟았다. 대대로 물려받은 막대한 재력과 오세창의 탁월한 눈썰미, 그리고 두 사람의 민족문화운동에 감명을 받은 지식인들의 후원으로 순조롭게 문화재를 회수했다. 추사 김정희와 겸재 정선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연구했다. 심사정, 김홍도, 장승업 등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화적, 서예 작품까지 총망라했다. 고려자기와 조선자기를 비롯해 불상, 불구, 와전 등의 문화재도 수장했다. 우리 미술사 연구를 위해 중국 역대 미술품도 수집했다. 제2의 메디치 가문을 꿈꾸는 ‘메세나’ 지난해 가수 헨리가 10년 동안 써왔다는 바이올린이 자선경매에서 1000만원에 낙찰되는 모습이 MBC의 ‘나 혼자 산다’를 통해 전파됐다. 이 낙찰금은 ‘2017 오사카 국제콩쿠르’ 파이널에 진출하고 ‘2018 티보르바르가 국제콩쿠르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한국예술종합학교 기악과 김주선 양에게 전해졌다. 현재도 다양하고 굵직한 무대에서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는 김주선 양이 세계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대기업의 지원이 있었다. 2013년 LG(회장 구광모)와 함께하는 사랑의 음악학교 장학생, 2014년 현대자동차그룹(회장 정몽구) 아트드림콩쿠르 장학생으로 재정적 지원을 받아 바이올린 연주에 몰두할 수 있었다. ‘메세나’는 기업들이 문화, 예술, 스포츠 분야를 지원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현재 249개 기업이 (사)한국메세나협회에 가입해 문화 지원활동 분야에서 사회 공익 사업을 펼치고 있다. 지원 규모나 스케일도 꽤 크다. CJ문화재단은 음악 장학생을 선발해 청년 음악가를 후원한다. 특히 2014년부터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후원을 시작해 2018년부터는 공동 주관사로 대회 운영을 함께한다. 실력 있는 가수들을 배출한 전통 있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이끌어가는 것 또한 대중예술과 창작자를 돕는 사회 공익 사업 중 하나. 한류 문화의 중심에 있는 기업이다 보니 대중문화 지원 활동이 눈에 띈다. 두산그룹(회장 박정원)은 매년 두산아트센터에서 청소년아트스쿨이라는 워크숍을 열어왔다. 우리나라 최고 연출가와 극작가를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에 무대예술에 관심 있는 청소년에게 뜻깊은 프로그램이다. 연출가 박근형, 김수정 등 한국을 대표하는 연출가들이 참가해 청소년들에게 꿈을 불어넣어줬다. 한화그룹(회장 김승연)의 한화청소년오케스트라도 반향이 크다. 2014년부터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평소 클래식 악기를 접하지 못한 소외계층 청소년에게 연주를 가르치고, 연주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작년에는 천안과 청주 지역 청소년들에게 정통 클래식 악기를 가르쳤으며 연말에는 이틀에 걸쳐 정기 음악회도 열었다. 이러한 각 기업들의 활동은 더 나은 예술 환경을 조성할 뿐만 아니라 미래 인재를 위한 소중한 씨앗 뿌리기가 되고 있다.
- 2020-02-27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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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자들의 일석이조 효과
- 즐기는 취미가 있는가. 부자들의 좀 더 특별해 보이는 그것, 혹은 돈이 없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럭셔리 취미생활을 엿봤다. 브리지 게임에 빠진 슈퍼리치 한국 사람에게 가장 있기 있는 게임이 화투라면 외국에서는 트럼프 카드로 즐기는 브리지 게임(이하 브리지)이 인기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130여 개국 4000만 명이 이 게임에 열광한다.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지적인 두뇌 게임’이라는 찬사가 따라다니는데, 그 명성만큼이나 이 사교 게임을 즐기는 부호와 사회 지도자도 많다. 당장 부자의 대명사로 꼽히는 워런 버핏과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의 이름이 나온다. 두 사람이 함께 브리지를 즐기는 모습이 인터넷 상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들이 이 게임을 소위 광적으로 즐긴다는 소문이 나면서 브리지는 세계 최고 부자의 놀이로 인식됐다. 워런 버핏은 “브리지를 잘하는 사람 3명만 있으면 교도소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빠져 있다. 버핏과 게이츠는 브리지의 장점 등을 알리며 미국의 중·고교 학생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기부를 이어가고 있다. 두뇌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시니어 세대 치매 예방에도 좋은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브리지 하면 인도네시아 최고의 갑부 마이클 밤방 하르토노도 빼놓을 수 없다. 경제전문지 ‘포브스’ 선정 ‘인도네시아 최고 부자 50인’에 11년 동안 1위 자리에 올라 있는 인물. 하르토노는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정식 종목에 브리지를 넣기 위해 많은 힘을 기울였다. 특히 그는 당시 79세의 고령에 선수로 참가해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중국의 덩샤오핑 전 주석은 마오쩌둥 집권 당시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며 금지했던 브리지를 숨어서까지 했을 정도로 즐겼다. 이 열성적인 정치지도자로 인해 아시아권에서 중국이 브리지를 가장 많이 하는 국가가 됐다. 이외에도 미국의 아이젠하워, 케네디 대통령, 영국 윈스턴 처칠 수상 등이 즐겼으며, 조훈현 9단도 브리지 게임의 매력에 푹 빠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주를 품는 슈퍼리치 3인방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 회장은 2000년 항공우주회사 블루오리진(Blue Origin)을 설립했다. 테슬라모터스의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는 2년 후인 2002년 민간 우주개발업체 스페이스X(Space Exploration Technologies Corp.)를 만들었다. ‘괴짜 CEO’로 알려진 버진그룹의 리처드 브랜슨 회장도 2004년 민간 우주탐사기업 버진갤럭틱(Virgin Galactic)을 설립해 우주여행의 꿈에 한 발짝 다가섰다. 그는 10억 달러(약 1조1825억 원) 이상의 개인 자금을 우주 사업에 투자했다. 버진갤럭틱의 경우 지난해 10월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 상장사가 되면서 우주여행 사업이 더 이상 공상과학이 아니고 투자가 가능한 분야임을 입증했다. 2000년대 초반 이들이 민간 우주항공사를 만들 때만 하더라도 ‘저게 과연 가능한 발상인가’ 하며 젊은 부호의 허세로 여겼다. 하지만 장난처럼 보였던 도전은 취미에 머물지 않았고 정부산업의 축으로 보던 우주 분야의 문을 열었다. 이들 중 후발주자인 버진갤러틱은 두 회사를 제치고 2018년 12월 민간기업 최초로 탑승객을 태운 우주선의 대기권 밖 여행을 성공시켰다. 성공이 있기까지 각종 사고와 실패가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우주여행의 꿈에 꾸준히 다가선 결과다. 특히 리처드 브랜슨 회장은 민간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여행한 인류 최초의 여행자로서 원대한 꿈을 이루겠다고 다짐해왔다. 지난 1월 8일에는 비행기 모양의 차세대 유인 우주선 ‘버진 스페이스십 유니티’를 공개하며 차근차근 우주 정복의 시기를 앞당기고 있다. 버진갤럭틱은 1인당 약 2억8000만 원을 내면 우주비행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까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저스틴 팀버레이크, 레이디 가가 등 유명 인물을 포함, 700명이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간 관광객 우주 방문 프로그램인 로켓 시스템 ‘뉴셰퍼드’를 개발해온 블루오리진은 현재까지 11차례의 시험 비행을 마쳤는데, 6명까지 탑승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귀를 자극하고 마음을 열다 남자들이 특히 빠지면 안 된다고 입을 모으는 것 세 가지가 있다. 자동차와 카메라 그리고 오디오다. 이들 세계에 눈을 뜨는 순간 수천만 원을 쏟아 붓는 일이 어렵지 않게 벌어지기도 한다. 오디오필, 오디오파일 혹은 스테레오파일 등 오디오 애호가를 지칭하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전 세계에 하이파이(Hi-Fi), 하이엔드(High-End) 오디오라 부르는 고음질 음향을 추구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꼭 슈퍼리치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오디오 마니아로 소개된 이는 많지만 심취해온 구력(?)으로 봤을 때 공정곤 전 효성물산 부회장 이름이 가장 눈에 띈다. 그는 고가의 오디오 장비로 음악 감상실을 꾸며왔다. 스피커의 경우 1987년 생산된 골드문트사의 아폴로그. 이탈리아 유명 미술가 클라우디오 로타 로리아가 디자인해 세계 최초로 뉴욕 MoMA에 전시됐다. 이 제품의 25주년 특별 한정판 가격은 6억5000만 원이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고교 시절 오디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대학 때부터 빠져 살았다”고 말했다. 레코드판이 많을 때는 1000장이 넘을 정도였다고. 오일머니 축구 구단주, 이것이 돈의 맛 2006년, 군부 쿠데타로 태국 정치권력으로부터 추출됐던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가 2007년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의 맨체스터시티(맨시티)를 인수한 적이 있다. 그 소식이 들리기가 무섭게 다시 주인이 바뀌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아랍에미리트의 왕자인 셰이크 만수르 빈 자예드 알 나얀(이하 만수르)이 3000억 원에 샀다는 것. 당시만 해도 그저 그런 성적을 보이던 맨시티를 사는 데 들어간 비용 자체만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만수르는 “진정한 부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말로 인수에 관한 언급을 대신했다. 사람들은 중동 부자가 인수한 맨시티가 과연 어떤 행보를 보일 것인지 촉각을 세웠다. 그 후 12년 동안 맨시티의 분위기는 바뀌어도 너무 많이 바뀌었다. 2011-2012 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시작으로 거의 매년 우승과 준우승을 오가며 고공행진 중이다. 만수르의 전폭적인 투자와 선수영입과 육성은 우승이 멀게만 느껴졌던 맨시티에게 기회를 제공한 셈. 2018년 언론보도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만수르가 맨시티에 퍼부은 돈만 2조1000억 원이다. 그 뒤 2년의 시간이 더 흘렀으니 그보다 더 많은 돈을 투자했을 것이다. 그는 스타급 선수를 영입하는 것은 물론 소속 선수들에 대한 지원, 차원이 다른 팬 서비스, 유소년 축구클럽 후원에도 아낌없는 지원을 이어갔다. 지난해 국제축구연맹(FIFA) 산하 국제스포츠연구센터(CIES)가 선수들 몸값을 조사했을 때 맨시티가 가장 값비싼 선수들을 보유한 구단으로 나타난 바 있다. 맨시티 선수들 몸값 합산가는 10억1400만 유로(약 1조3350억 원). 특히 몸값으로 10억 유로를 넘긴 구단은 맨시티가 EPL 역사 이래 처음이다. 만수르가 맨시티 하나만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 지난해 말 만수르는 인도의 축구팀 뭄바이시티FC을 인수했다. 만수르가 운영하는 시티풋볼그룹(CFG)은 이 축구팀의 지분 65%를 인수했다. CFG는 맨시티를 비롯해 미국 메이저리그사커(MLS) 뉴욕시티FC, 호주 A리그 멜버른하트FC, 일본 J리그 요코하마 등을 소유하고 있다. 뭄바이시티FC는 만수르의 8번째 축구팀이다. 슈퍼리치의 특징 다섯 가지 미국의 경제전문지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미래 부자의 이웃: 부자가 되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쓴 작가인 사라 스텐리 팔라우의 연구를 통해, 미국의 600여 명 부자들이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5가지 특징을 소개했다. 바로 독서, 운동, SNS 활동, 잠, 일이다. 그러면서 부자들은 이와 관련한 활동을 하루든 한 주든 한 달이든 평균적으로 고르게 시간을 할애한다고 강조했다. 취미도 잠도 운동도 성공에 있어 모두 중요한 요소라는 의미다. 특히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일수록 독서에 할애하는 시간이 많은 점에 주목하면서 워런 버핏의 경우 하루의 80%를 책 읽는 시간으로 쓴다고 언급했다. 마크 저커버그도 책읽기를 강조하며 책을 통해 다른 문화와 역사와 기술, 신념을 쌓아갈 수 있다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말했다. 특히 운동 습관은 일반인들에 비해 철저했다. 일주일에 6시간 가까이 운동을 하는데 애플의 공동 창업자 팀 쿡은 매일 아침 4시 30분에 일어나 피트니스센터로 향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실제 주인공 안나 윈투어 역시 아침 5시 45분에 일어나 테니스로 몸을 푼다고. 버진그룹의 리처드 브랜슨도 아침에 주로 테니스를 치는데 서핑보드, 수영, 자전거 등도 꾸준히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명 슈퍼리치의 취미 •마크 저커버그(페이스북 창업자) 히브리어 책 읽기 •피터 틸(페이팔 창업자) 체스 두기 (국가대표 출신) •래리 앨리슨(오라클 CEO) 요트 타기(그의 팀은 아메리카스컵 대회에서 우승을 거뒀다) •데이비드 록펠러(미국의 전 은행가, 사업가) 딱정벌레 수집(록펠러가 최초로 발견한 딱정벌레에는 그의 이름이 학명으로 붙었다) •구본무(전 LG그룹 회장) 새 관찰(살아생전 집무실에 망원경이 있었고, 조류도감도도 발간하고 새 사랑 사이트도 있었다)
- 2020-02-24 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