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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 뮤지컬 애호가가 아니라도 ‘브로드웨이 42번가‘라는 제목은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한 작품이다.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처음 공연된 후 5,000회 이상의 장기 공연, 토니상 9개 부문 수상 등 흥행성과 작품성을 갖춘 기념비적 뮤지컬로 세계적으로 유명해 졌고 우리나라도 1996년 초연 이래 20여 년 동안 꾸준히 사랑받으며 무대에 올려졌다. 이번에 국내 초연 20주년을 기념하여 예술의 전당에서 다시 공연을 시작했다고 한다. 로열석의 티켓이 생겨서 친구와 보러 가기로 했다. 먼저 브로드웨이 42번가를 생각하면 현란하고 숨 가쁘게 펼쳐지는 탭댄스가 그려진다. 수십 명의 무희들이 일사분란하게 타닥타닥 타다닥하며 굴러대는 발소리는 참으로 유쾌하고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어서 벌써부터 기대감에 부풀어 공연 날을 기다렸다. 무대는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이었는데 가보니 공연장이 필자 맘에 딱 들었다. 항상 공연을 가게 되면 좌석 때문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소극장도 그렇지만 세종문화회관이나 큰 규모의 공연장도 앞자리 사람의 머리에 무대가 가려져 이쪽저쪽 사이로 관람하느라 신경 쓰인 적이 많았는데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은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아도 좌석의 경사가 커서 앞사람에 가려 공연 보는 게 힘들 염려는 전혀 없었다. 모자를 즐겨 쓰는 필자는 연극이나 영화관에 가면 뒷사람에게 영화가 시작되면 모자를 벗을 테니 안심하라고 미리 말해 준다. 앞자리 사람의 머리와 모자 때문에 화면이나 무대가 가려지는 걸 경험했기 때문에 배려를 안 할 수가 없다. 토월극장에서는 필자와 필자친구 모두 모자를 벗지 않고 관람할 수 있어 좋다고 웃었다. 역시 뮤지컬의 시작은 막을 반쯤만 걷고 신나는 음악에 맞추어 수십 명의 다리로만 연기하는 탭댄스였다. 야망과 능력이 출중한 연출자, 이미 한 물 갔는데도 거만한 여주인공, 그 여주인공의 복잡한 남자관계, 청순 발랄한 새내기의 출현, 삼각관계와 오해, 여주인공의 발목 부상으로 공연이 중지될 위기, 이로 인해 예상치 않게 행운을 잡아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는 새내기 등 뻔한 내용이지만 익숙한 음악과 경쾌한 춤이 관객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화려한 의상과 무대, 다이내믹한 탭댄스, 주옥같은 뮤지컬 넘버로 펼쳐지는 브로드웨이42번가에 이번엔 탤런트 송일국 씨와 이종혁씨가 더블 캐스팅 되었다. 여주인공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뮤지컬 배우 김선경 씨와 최정원 씨다. 오늘 무대엔 송일국 씨와 김선경 씨가 열연을 펼쳤다. 송일국 씨도 노래를 두 세곡 했는데 역시 전문 뮤지컬 배우와는 많이 달랐지만 연기를 잘하니 보기에 괜찮았다. 송일국 씨는 ‘줄리안 마쉬‘라는 뮤지컬 연출자로 분했다. 브로드웨이 최고의 연출자 줄리안에게 ‘프리티 레이디’라는 작품은 꼭 성공시켜야 할 중요한 공연이다. 그는 여주인공으로 도로시를 캐스팅하면 10만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장난감회사 사장 에브너의 제안에 이제는 한물간 여배우인 도로시를 주인공으로 정한다. 자신이 투자자를 끌어들였다고 자만한 그녀는 거만하기만 하다. 브로드웨이 댄서가 되려고 시골에서 상경한 페기는 두려움에 주춤거리다 오디션 기회를 놓치지만 그녀의 춤을 본 안무가가 재능을 발견하고 코러스로 채용한다. ‘프리티 레이디’ 연습중 주인공 도로시가 넘어져 부상을 당하고 도로시의 부상이 페기 때문이라고 오해한 줄리안은 그를 해고시킨다. 실망한 페기는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기차역에 가는데 도로시 역할을 대신할 사람은 페기뿐이라는 단원들과 뒤늦게 오해를 푼 줄리안이 설득에 나서 공연은 무대에 올려 질 수 있게 된다는 신데렐라 같은 이야기가 펼쳐졌다. 계속되는 무더위에 지쳤던 몸과 마음이 신나고 즐거운 음악과 춤을 감상하며 다 사라진 듯하다. 어쩌면 주연 조연 모두 탭댄스와 연기를 그리도 잘 하는지 그들의 노력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아직도 수십 명이 똑같이 맞춰 발을 구르던 탭댄스의 타닥타닥 경쾌한 리듬이 귓가에 맴돌고 있다.
- 2016-09-02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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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동경은] 전업주부 곤도 유키코의 화려한 제2 인생
- 영화감독 꿈꾸던 소녀 음악PD가 되다 인터뷰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작은 체구에 단단한 관록을 풍기면서 함박웃음으로 맞이해 준 ㈜콘코르디아(CONCORDIA)의 대표 겸 음악 프로듀서 곤도 유키코(近藤由紀子, 67)는 이시카와현(石川縣) 나나오시(七尾市) 출신. 육군비행학교를 나와 육군항공대 조종사로 태평양 전쟁 때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에서 전투를 치르고, 오키나와에서 특공대로 소집돼 죽음의 출격을 앞둔 상황에서 1945년 8월 15일 패전을 맞이한 부친, 그리고 평범한 주부였던 모친 사이에서 유키코는 1949년 1월에 태어났다. 바로 이른바 일본의 전후 베이비붐 세대를 뜻하는 단카이(團塊) 세대인 셈이다. “철들 무렵 늘 영화관에 있었다. 당시 나나오시에는 오락물 혹은 엔터테인먼트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엄마 세대는 전쟁의 아픈 기억과 상처받은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영화였는데, 엄마를 따라 서양 영화를 비롯해 일본 영화 등 모든 장르의 작품을 봤다. 그러다가 혼자서 ‘할머니를 찾으러 왔다’며 영화관에 들어가 작품에 푹 빠져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울러 영화와 관련된 음악도 열심히 들으면서 막연하게나마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키웠다.” 청운의 뜻을 품고 와세다 대학으로 영화감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더 큰 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고자 유키코는 도쿄(東京)의 와세다(早稻田) 대학 제1 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막 올라온 소녀의 눈에는 모든 게 신기하고 낯설기만 했다. 이웃사촌처럼 터놓고 지냈던 나나오시의 생활과는 완전히 다른 별세계(別世界)에 크고 작은 문화충격도 받았지만 영화 때문에 싹튼 꿈을 위해 뭐든지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했다. “아는 친지도 없고 인맥도 없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로 처음부터 하나씩 쌓아 나가야 했다. 신기하게도 주위 분들이 많이 도와 주셨다. 시골에서 올라온 순진한 소녀가 열심히 뭔가를 잡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예쁘게 봐 준 것 같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TV방송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는데, 학생 신분으로 일본 엔카(演歌)계의 최고봉인 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거물급 여배우 나카무라 타마오(中村玉緖) 등의 도우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직접 옆에서 지켜보면서 영화계에 대한 동경심도 더욱 강해졌지만 한편으로는 남성 중심의 폐쇄적인 영화계 풍토에서는 여성의 입지가 정말 좁다는 현실도 깨닫게 됐다고 한다. 대학 나와 첫 직장은 ‘이와나미 홀’ 유키코는 대학 졸업 후 프랑스에서 영화를 배운 다카노 에츠코(高野悅子, 1929년생. 영화운동가, 영화 프로듀서, 방송작가 및 연출가 등)가 운영하는 ‘이와나미(岩波) 홀’에 입사한다. 당시 이와나미 홀은 232석의 작은 극장이었지만,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을 비롯해 유명 사진가 등 당대를 대표하는 문화 예술인들이 드나드는 사랑방 역할도 했다. “다카노는 ‘마음’과 ‘신념’으로 일했다. 진짜는 언젠가 반드시 세상의 빛을 받으며, 평가받을 것이라는 진지한 자세를 그때 배웠고, 이것이 나의 출발점이 됐다.” 이와나미 홀에서 2년간 근무 후 그녀는 일을 포기한다. 결혼으로 두 아이가 생겼으며, 무엇을 하든 하나에만 집중해 모든 힘을 기울이는 그녀는 망설임 없이 육아를 선택해 엄마의 길을 걷는다. 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두 아이의 엄마로서 아낌없는 사랑으로 육아를 마친 유키코는 49세 때 아티스트 프로듀서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물론 전업주부로서 살림을 꾸리는 틈틈이 시나리오 작가를 공부하고, 드라마 기획서도 쓰는 등 조금씩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녀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가코 다카시(加古隆, 1947년생)가 음악을 담당했던 NHK 특별 다큐멘터리 에 감동하여 2000년 스페셜 콘서트를 기획해 도쿄, 오사카(大阪), 가나자와(金澤), 후쿠시마(福島) 등을 돌며 전석 매진의 흥행을 거두었다. 2003년에는 히비야(日比谷) 공원 야외음악당에서 개최한 에도(江戸) 400주년 기념 오프닝 이벤트 등도 꾸미는 등 늦깎이 프로듀서의 열정과 실력이 조금씩 평가받기 시작했다. “20세기 전쟁 때문에 돌아가신 분들의 레퀴엠으로 콘서트를 열어 21세까지 이어지지 못한 그들의 넋을 제대로 위로하는 진혼곡(鎭魂曲)을 들려주고서 21세기 평화와 생명의 시대로 힘차게 나아가자는 뜻을 담으려고 했다. 기획서를 쓰고 2년 동안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뜻을 함께하는 분들을 모았고 스폰서를 찾으려고 동분서주했다. 그 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눈물과 박수로 다시 한번 음악의 힘을 느꼈으며, 큰 보람과 함께 정말 값진 보물을 얻은 기분이었다.” 한국과 인연도 깊어 2015년 1월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양국의 젊은 성악가 2명이 함께 기념 공연을 펼친 바 있다. ‘한국판 폴 포츠’로 불리는 팝페라 가수 휘진(권휘진)과 일본인 테너 가수 고하시 고헤이(古橋鄕平)가 도쿄 지요다구(千代田区)의 기요이(紀尾井) 홀에서 ‘같이 울리는 순간’이라는 주제로 듀엣으로 화합과 희망의 선율을 선보이는 감동적인 무대를 꾸몄다. 물론 곤도 유키코가 기획한 공연이었다. 그녀는 가수 휘진에 앞서 2004년 9월부터 R&B 남성듀오 ‘소리(SoRi)’, 그리고 2007년 솔로로 전향한 가수 케니(홍기현) 등을 일본에 데뷔시키는 등 꾸준히 실력 있는 한국 아티스트를 찾아내 적극 소개해 왔다. 휘진이 동일본 대지진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음악의 힘으로 미래를 믿는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 피해 지역을 수차례 찾아가 자선 콘서트를 펼쳤듯이 케니도 2007년 9월 미얀마 민주화 시위를 취재하다 총에 맞아 사망한 사진기자 나가이 겐지(長井健司)에게 바치는 곡 ‘눈물-세계 어디선가 이 순간’을 발표해 수익금의 일부를 캄보디아 빈민을 돕고 있는 민간단체 등에 기부했다. 부제 ‘흐르는 눈물을 미래의 아이들 빛으로 바꾸기 위해’가 붙은 이 노래는 곤도 유키코가 직접 노랫말을 썼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요즘 세계의 움직임이 정치적으로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든다. 일본은 수많은 젊은이의 희생 위에 패전을 맞이했고, 그 뒤를 이어 태어난 우리 단카이 세대는 평화 속에 살아올 수 있었던 걸 감사하면서 계속 평화를 지켜가야 하는 사명이 있다.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려 미래로 이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이 바로 내가 할 일이고, 한일관계도 마찬가지로 문화 교류를 통해 서로 뜻을 나누고 마음을 함께하는 자리가 계속 이어져야 한다.” 원점에서 소통을 다시 생각 2003년 54세의 나이로 자신의 뜻을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 음악·예술 기획사 콘코르디아(CONCORDIA)를 설립한 곤도 유키코는 평화와 소통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음악·예술 문화는 평화의 사절이며, 사람들 마음을 비추는 밝은 빛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도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을 응시하면서 마음에 와 닿는 감동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다. 음악과 예술을 통해 국경, 민족, 언어의 벽을 뛰어넘어 상호 소통과 연대감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길 바랄 뿐이다.” 2015년 5월 회사 창업 12주년을 맞이해 프로듀서 이름으로 결혼 전 이름인 후지하시 유키코(藤橋由紀子)를 내걸고 원점에서 다시 활동을 재개할 것을 선언한 그녀는 “신으로부터 목숨을 받아 태어난 이상 죽을 때까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건 인간의 도리이다. 또한 일하면서 만나는 수많은 인연을 통해 교류를 넓혀가면서 그 만남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국경을 넘어 서로 돕고 힘을 합치는 것, 바로 이것이 소통이고 문화의 시작이다”며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다.
- 2016-09-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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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라이프] 라디오 스타, 성우의 어제와 오늘
-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 대중은 이 말을 이 전 대통령의 육성이 아닌 한 성우를 통해 더 많이 들었다. 1964년 방송된 라디오 드라마 · 등에서 이 전 대통령 역을 맡은 성우 구민(92)이다. 아직도 구민하면 이승만 대통령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아저씨, 나 추워요.” 1964년 개봉된 영화 의 여자 주연, 엄앵란의 대사다. 이 대사의 목소리 주인공은 배우 엄앵란이 아니다. 성우 고은정(80)의 목소리다. 1950~1970년대는 화면을 먼저 촬영하고 그 화면에 따라 대사, 음악을 녹음하는 후시녹음 시스템으로 영화를 제작했다. 이때 화면 연기는 배우가, 대사 연기는 성우가 담당했다. 1960년대 최고의 여자 스타, 문희 남정임 엄앵란 김지미의 대사 연기는 모두 고은정이 도맡았다. 무명 신인이던 최진실을 최고의 스타로 만들어준 것은 1989년 삼성전자 CF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고 말하는 최진실에 대중은 환호했다. 그런데 이 광고 목소리 연기를 한 사람은 최진실이 아닌 성우 권희덕이었다. 권희덕(60)은 유지인 임예진 등 1970~1990년대 스타들이 모델로 나선 CF의 목소리 연기를 한 유명 성우다. 라디오 시대이자 후시녹음 영화 시대였던 1950~1970년대 최고의 대중문화 스타는 성우였다. ‘얼굴 없는 배우’라 불리던 성우들은 ‘영화와 방송의 꽃’으로 평가받으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한국 성우의 역사는 라디오의 역사와 궤를 함께한다. 1927년 경성방송국 개국으로 라디오 시대가 열렸다. 일본어로 방송하던 경성방송국에서 1933년부터 한국어 방송을 시작하며 등 라디오 드라마를 본격적으로 제작해 청취자의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 성우의 어머니’로 불리 우는 복혜숙 등 성우들이 라디오 연속극에 출연해 청취자의 사랑을 받았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서울중앙방송국(현 KBS), 1954년 기독교방송, 1959년 문화방송, 1963년 동아방송, 1964년 동양방송이 잇따라 개국하면서 라디오 방송 전성시대를 열었다. 서울중앙방송국이 1953년 성우를 최초로 채용하면서 성우라는 직종이 하나의 전문직으로 자리 잡았다. ‘청실홍실 엮어서 무늬도 곱게 티 없는 마음속에 나만이 아는 수를 놓겠소’로 시작되는 주제가를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1956년 10월~1957년 4월 방송)을 비롯해 등 라디오 드라마들이 쏟아졌다. 1960년대 각 방송사들이 한 해 평균 150여 편의 라디오 드라마를 내보냈을 정도다. 청취자들은 성우들의 목소리 연기로 펼쳐지는 다양한 라디오 연속극에 빠져들었고 성우들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대중 스타로 우뚝 섰다. 1963년 동아방송 공채 1기로 성우가 된 박웅(76)은 “30여 명 뽑는 성우 시험에 3500여 명이 몰렸다. 1960년대 성우의 인기는 엄청났다. 성우의 수입이 탤런트 등 다른 연예인의 수입을 압도했다”고 말했다. 또한, 1950~1970년대 동시녹음이 아닌 후시녹음으로 영화가 제작되던 시기에 성우들의 활약은 영화배우 못지않았다.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을 비롯한 수많은 한국영화가 성우들의 대사 연기로 완성됐다. 의 신성일이 연기한 남자 주인공의 대사 연기는 성우 이창환이 한 것이다. 여자 주연 엄앵란의 대사 연기는 고은정이, 트위스트 김이 연기한 건달 역의 목소리 연기는 오승룡(81)이 각각 했다. 고은정은 “1950~1970년대 한국영화는 동시녹음 기술이 없어 배우들이 연기한 뒤 성우들이 화면을 보고 대사를 녹음하는 후시녹음 시스템이었다. 이 당시 신성일 씨가 연기하는 모든 영화의 배역은 성우 이창환 씨가 맡아 대사 연기를 한 것처럼 특정 배우와 특정 성우 관계가 형성됐다. 나는 문희 엄앵란 김지미 남정임 안인숙 등 여자 주연 목소리 연기를 전담했다”고 말했다. 지금도 가끔 패러디되는 영화 의 안인숙이 맡은 여자 주인공, 경아의 “꼭 안아주세요”라는 대사 연기는 바로 고은정이 한 것이다. 성우들은 라디오 연속극과 영화뿐만 아니라 시사교양 프로그램 진행자로도 맹활약했다. 1962년부터 1972년까지 방송된 MBC 시사고발 라디오 프로그램 은 서민들의 마음을 속 시원하게 풀어줬는데 이 프로그램을 이끈 주역이 성우 오승룡이다. 오승룡은 “은 서민들이 하고 싶은 말을 속 시원하게 대신해 준 프로그램으로 청취자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생방송으로 진행된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아플 수도 없었고 휴가도 갈 수 없었다. 방송사고 없이 오랫동안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청취자의 열띤 반응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1950~1970년대 최고의 수입과 인기를 누리며 성우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성우는 구민 고은정 장민호 신원균 정은숙 김소원 윤미림 이혜경 남성우 심영식 주상현 오승룡 오정한 천선녀 이춘사 김영옥 사미자 김용림 나문희 전원주 등이었다. 청취자들은 실제 모습을 보지 못한 채 목소리만 듣고 성우의 외모와 성격을 상상하는 경향이 많았다. 라디오 연속극에서 주인공을 연기하거나 멋진 혹은 예쁜 목소리를 가진 성우들에게 팬레터가 쏟아졌고 심지어 연인이 돼 달라며 방송사를 찾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사미자는 “청취자들은 목소리만으로 성우의 외모와 성격을 파악했다. 목소리가 예쁘면 외모도 성격도 예쁠 것이라고 단정했다. 목소리와 다른 외모를 가진 일부 성우들을 보고 실망하고 돌아가는 청취자들도 적지 않았다”며 웃었다. 1980년대 들어 TV 수상기 보급이 확대되면서 라디오는 대중의 사랑을 잃기 시작했다. 또한, 한국 영화가 동시녹음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대중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성우들의 인기가 급락하며 존재감도 급감했다. 1980년대 이후 성우들은 명맥을 유지하던 라디오 연속극에 출연하면서 TV에서 방송하는 외국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더빙,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을 병행했다. 이 시기 김기현, 송도순, 박일, 배한성, 양지운 등이 외화 더빙이나 라디오 연속극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인기 성우로 눈길을 끌었다. 배한성은 “라디오 전성시대가 가고 텔레비전 시대가 열리면서 성우의 존재감은 축소됐지만 정확한 발음과 뛰어난 목소리 연기 등으로 외화 더빙과 내레이션 부분에선 성우들의 역할은 커졌다”고 말했다. 또한, 권희덕을 비롯한 일부 성우들은 각종 CF에서 목소리 연기를 펼쳤다. 권희덕은 “목소리 출연 CF는 3000여 편에 달하고 더빙한 외화 작품은 1000여 편에 이른다”고 말했다. 1990년대 이후 의 강희선, 의 이규화와 서혜정, 의 최덕희를 비롯해 김영선, 김승준, 정미숙, 구자형, 김서영 등이 외화와 애니메이션 더빙 등을 통해 인기 성우 명맥을 잇고 있다. 한편 성우로 활동하다 라디오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영화와 텔레비전 연기자로 전업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7월 끝난 tvN 드라마 에 주연으로 나선 것을 비롯해 드라마와 영화, 연극에서 최고의 연기력을 보이며 왕성한 활동을 하는 나문희, 드라마와 영화에서 개성적인 캐릭터를 잘 소화하는 변희봉을 비롯해 정혜선, 김영옥, 남일우, 한인수, 김용림, 사미자, 전원주 등이 성우 출신 연기자들이다. 이들 성우 출신 연기자들은 빼어난 연기력으로 시청자와 관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61년 MBC라디오 공채 1기로 성우 생활을 시작한 나문희는 “성우로 일할 때 외화 더빙을 많이 했는데 이것이 연기자로 전업하면서 큰 도움이 됐어요. 외국 여배우의 캐릭터가 제각각이잖아요. 다양한 캐릭터의 목소리를 연기하며 캐릭터를 분석할 기회를 얻었지요. 이것이 드라마와 영화 연기할 때 큰 힘이 됐지요”라고 말했다.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탄탄한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는 배우 한석규 역시 성우 출신 연기자다. 한석규를 드라마 에 처음 발탁해 연기자로 데뷔시킨 장수봉 전 MBC PD는 “한석규를 비롯한 성우 출신 연기자들은 대사 연기가 뛰어나다. 오랫동안 발성 훈련을 받아 감정의 결을 살리는 대사 연기를 잘한다”고 말했다. 방송사가 성우 공채 제도를 폐지한 2000년대 들어서도 성우들은 게임과 외화, 애니메이션 더빙과 CF, 라디오 연속극의 목소리 연기,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등에서 활약하며 여전히 대중화의 주역으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2016-09-0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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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큰 아이
-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에 비해 눈이 큰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동양계에서는 일본 배우들 중에 눈이 큰 사람이 가끔 있을 정도이다. 서양 배우들은 오드리 헵번부터 앤 해서웨이 등 눈이 큰 여배우가 많아서 눈이 작은 배우를 찾기 힘들 정도이다. 그런데 요즘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눈이 큰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성형 덕분에 눈이 커진 경우도 있겠으나 성형이 아니더라도 어릴 때부터 눈을 크게 뜨다보면 눈이 크게 보이는 것이다. 마치 수리부엉이 눈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과거에는 크게 놀라거나 할 때만 그런 표정이 나왔었다. 삼성동 SM 타운에 갔을 때 ‘소녀시대’ 같은 걸그룹의 사진들을 볼 수 있었다. 관객들을 똑바로 봐야하고 사진에 잘 나오려니 눈을 동그랗게 떠야 사진에 예쁘게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요즘 우리 젊은이들이 어릴 때부터 연예인들을 우상으로 삼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수 있다. 요즘 셀카 등 자신의 모습을 사진 찍을 일이 많으니 사진 찍을 때 보면 일부러 눈을 크게 뜨는 사람이 많다. 사실 우리 어릴 때는 눈을 크게 뜨면 윗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있었다. 다소곳이 약간 아래를 보는 시선이어야 무난했다. 순종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당당해 보인다. 아이 콘택트라고 사람이 눈과 눈이 마주 봤을 때 그 사람의 마음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거나 자신이 없을 때 눈을 똑바로 보는 것을 회피한다. 아직도 눈을 똑바로 마주 보라고 하면 수줍어한다. 라틴댄스를 출 때는 아이 콘택트가 필수이다. 그래야 파트너와의 교감과 파트너의 리드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틴댄스 서수들은 대부분 눈을 똑바로 뜨고 대한다. 우리나라 배우로는 남자로는 조재현, 여자는 한혜진 등이 대표적으로 눈을 크게 뜬 배우들이다. 조재현의 경우는 연기는 잘 하는데 어딘지 부담스럽다. 한혜진의 경우는 여자라서 그런지 얼굴 윤곽이 선명해 보인다.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눈이 마주치면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도 있다. 기분 나쁘게 쳐다봤다는 것이다. 길을 가다가 또는 전철 안에서라도 남들과 시선이 마주치면 얼른 피하는 것이 요령이다. 안 그랬다가는 “왜 쳐다보느냐?”며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시니어들이 한창 젊을 때 유행하던 포크 송으로 ‘눈이 큰 아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내 마음에 슬픔어린 추억 있었지, 청바지를 즐겨 입던 눈이 큰 아이”로 시작되는 가사인데 은은한 슬픔의 추억을 노래한 곡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애창되었던 ‘긴 머리 소녀’와 함께 남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자를 표현해서 더 사랑 받았던 것 같다.
- 2016-08-22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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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레피센트
- 누구나 어린 시절 동화책을 많이 읽고 자란다. 미녀와 야수, 신데렐라, 백설 공주, 인어공주, 잠자는 숲 속의 미녀나 전래동화로는 해님 달님, 콩쥐 팥쥐, 장화홍련전, 흥부 놀부 등이 있다. 재미있는 건 서로 다른 나라임에도 동화의 내용이 비슷한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나쁜 새엄마와 의붓언니에게서 구박받으면서도 씩씩하게 견디어 드디어 왕자님과 결혼까지 하게 되는 신데렐라도 우리나라의 콩쥐 팥쥐와 같은 내용이어서 흥미롭다. 나라가 달라도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의 뜻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월트 디즈니에서 만든 영화 ‘말레피센트’를 보게 되었다. 매우 섹시하고 예쁜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을 맡았다. 월트 디즈니에서 각색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만들어낸 작품으로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이야기가 펼쳐졌다. 필자가 어린 날 읽었던 내용으로는 왕국에 공주가 태어나고 축하받는 자리에 초대받지 못한 나쁜 마녀가 아기 공주에게 16살 되는 날 물레 바늘에 찔려 영원히 잠들고 깨어나지 못한다는 저주를 내리면서 다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키스를 받으면 깨어날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심술 맞은 마녀가 말레피센트였는데 영화는 필자가 알고 있던 내용과 좀 달랐다. 말레피센트는 그렇게 나쁜 마녀가 아니었다. 세상에는 왕국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 요정 나라가 있었다. 요정 나라의 어린 요정 말레피센트는 우아한 날개를 가진 어여쁜 소녀였다. 어느 날 그곳에 인간 세상 사람인 어린 소년 스테판이 찾아온다. 둘은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친해진다. 이들은 점점 멋진 청년과 아름다운 요정으로 자라며 우정을 키웠다. 어느 날 스테판은 말레피센트에게 키스를 하고는 인간 세상으로 돌아갔다. 그 무렵 인간 세상의 왕은 요정 세계를 지배하려고 요정 나라 숲을 침략했다. 그러나 말레피센트의 지휘로 숲 속 요정들이 힘을 합쳐 대항해 왕은 참패를 당한다. 왕은 죽기 전에 요정인 말레피센트의 힘을 없애는 자에게 왕국을 물려주고 공주와의 결혼을 허락한다 했다. 이에 신하였던 스테판은 왕이 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사랑하는 요정 말레피센트의 날개를 자르기로 하고 그녀를 찾아간다. 출세에 눈이 멀어 아름다운 우정과 사랑도 돌아보지 않는 인간의 속성이 안타깝고 슬프다. 오랜만의 만남에 즐거워하는 말레피센트에게 약을 탄 음료를 마시게 한 후 잠든 그녀의 날개를 잘랐으니 추악한 욕망을 가진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에 분통이 터졌다. 잠에서 깨어난 요정은 날개가 없어진 걸 알고 절망을 느낀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스테판이었기에 배신과 절망은 더욱 컸다. 말레피센트의 날개를 가져온 스테판은 왕위를 이어받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며 예쁜 공주 오로라를 낳았다. 오로라의 탄생을 축하하는 파티에 많은 사람이 초대되고 작은 요정 삼총사도 찾아와 행운을 빌어준다. 그때 날개는 없지만 막강한 힘을 가진 숲의 지배자 말레피센트가 나타나 공주에게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16세가 되는 날 물레 바늘에 찔려 영원한 잠에 빠질 거라는 저주를 내린다. 이에 스테판은 공포를 느껴 세 요정에게 16세 되는 다음 날 왕궁으로 데려오라며 공주를 맡아 키워 달라고 부탁하고 깊은 숲 속으로 보낸다. 그리고는 나라에 있는 모든 물레를 창고에 모아 아무도 사용할 수 없게 했다. 아기는 무럭무럭 귀엽고 예쁘게 자라났다. 어느 날 숲으로 놀러 간 오로라는 말레피센트와 만난다. 말레피센트는 미워할 수 없는 아기 공주의 수호천사가 되어 돌보고 위험에서 지켜준다. 오로라를 사랑하게 된 마녀는 그가 곧 16세가 될 시기에 공주의 저주를 풀려고 노력하지만, 영원히 라고 했기 때문에 풀 수가 없었다. 그 무렵 숲에 있던 공주는 길을 지나던 소년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이웃 나라 왕자였다. 그들은 다음에 만날 것을 약속한다. 이 왕자가 후에 잠든 공주를 키스로 깨울 것이라는 암시를 받게 된다. 한편 말레피센트가 자신에게 그런 저주를 내렸다는 걸 알게 된 공주는 16세가 되던 날 왕국으로 간다. 왕은 16세 되는 다음날 데려오려고 했는데 하루 일찍 도착한 오로라를 감금하라 명령하고 공주는 궁을 헤매다 결국 물레 바늘에 찔려 잠이 들고 만다. 숲에서 만났던 왕자가 해법일 줄 알았는데 왕자의 키스에도 일어나지 않던 공주가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며 입맞춤 한 말레피센트의 키스에 눈을 뜬다. 진정으로 공주를 사랑한 건 말레피센트였다. 스테판 왕은 병사를 동원해 말레피센트를 죽이려 하고 말레피센트는 위기에 빠진다. 그때 아버지가 잘라 온 마녀의 날개를 발견한 공주가 벽에서 떼어내자 날개는 주인을 찾아 날아가 말레피센트는 막강한 힘을 되찾게 되고 왕은 성에서 떨어져 죽는다. 이후 인간 세상과 요정 나라가 화합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동화 속 이야기지만 출세에 눈이 멀어 사랑과 우정을 배반한 추악한 인간의 욕망에 화가 났고, 복수심에 불탔지만 어린 공주를 사랑하게 되는 마녀의 애틋한 마음이 훈훈했던 영화이다. 말레피센트를 연기한 안젤리나 졸리의 우아하고 매력적인 모습과 풋풋한 오로라 공주역의 엘르 패닝의 연기가 환상적으로 다가왔다. 멋진 한편의 영화가 어린 날 감동으로 읽었던 동화책처럼 잔잔하게 필자 마음을 적셔주었다. (PS-오로라 공주 어린 시절 역을 맡은 귀여운 아기가 안젤리나 졸리의 친딸이었다는데 캐스팅된 이유가 재미있다. 오디션 보던 모든 아기들이 마녀로 분장한 안젤리나 졸리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는데 친딸인 비비안 졸리 피트만이 엄마를 알아보고 울지 않아서 뽑혔다고 한다.)
- 2016-08-11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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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 리포트①] 늙지 않는 여성들의 습관
-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 몸에게 묻는 것이 건강관리의 기본 마에다 비바리(前田美波里·영화배우, 1948년 가나가와 현 출생) 더위를 모르고 여름을 무척 좋아하는 마에다 비바리는 이전 주목받았던 화장품 광고 이래 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젊고 탄력 있는 몸매와 촉촉한 피부를 유지하고 있다. “언제 어떤 역할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동작도 소화할 수 있도록 늘 몸을 다듬어 놓는데, 피아노의 조율과 마찬가지이다. 여배우로서 건강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여진다는 걸 항상 의식해 몸 만들기에 신경을 써 왔다. 무대에서는 모든 각도에서 사람들이 보기 때문에 어디서 보더라도 좋게끔 해 두고 싶다. 나아가 반듯한 몸에는 제대로 된 정신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몸을 만들고 있는데, 특별한 것은 하고 있지 않다. 해야 할 것만 하고 있을 뿐이다.” 특별한 것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매일 습관처럼 하는 노력은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 이상 정성을 기울인다고 하겠다. “아침에 눈 뜨면 먼저 전신 ‘임파(淋巴) 체조’를 10분, 그 뒤로 온천물을 데워 한 잔 마시는 게 일과이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신문을 읽고, 아침을 먹는다. 주로 채소 샐러드에 빵과 삶은 달걀 한 개. 그리고 머그컵에 커피를 붓고 코코넛 오일을 우유를 넣어 카페오레로 마신다. 달달한 과자를 군것질로 곁들여. 몸을 깨우는 데는 아침 식사가 중요하다.” 비 바리는 작년 가을 비 오는 날 비탈길에서 미끄러져 어깨를 골절했다. 그때 뼈가 붙자마자 재개한 ‘에고스큐(egoscue) 체조’가 빠른 회복에 크게 도움이 됐다. “시작한 지 4년 반쯤 되는데, 아침 식사 후 30~40분 에고스큐 체조를 반드시 한다. 근육을 자극하고 단련해 똑바로 움직이고, 몸의 비틀림을 바로잡는 운동이다. 몇 년 전부터는 되도록 차를 이용하지 않고 걷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1주일에 한 번 수중에어로빅도 하는데 물의 저항이 몸에 좋다. 내부근육도 단련되고, 달랑거리는 팔의 살도 금방 없어지고…” 울퉁불퉁 근육질의 여성스럽지 않은 몸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기계를 이용한 트레이닝은 하지 않는다. 어떤 운동이 몸의 어느 부분에 효과가 있고,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는지 이미 파악하고 있다. “오랫동안 여러 가지 운동을 하면서 연구해 왔는데, 이게 나의 재산이다. 허리가 아프다는 연기자나 스태프가 있으면 내가 가르쳐 주고, 나 자신도 한 달에 한번 에고스큐 선생님과 상의해 새로운 메뉴를 지도 받는다.” 운동 이외에 아름다움과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건강보조 식품과 효소, 온천물 등을 함께 일하는 동료 배우와 친구들이 추천한 게 많은데, 괜찮다고 생각 들면 먹어 보고 자신에게 맞으면 받아들여왔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라는 것은 없다. 수십 년 계속 먹어온 건강보조 식품도 무대 공연으로 피곤할 때는 좀 많이 먹는다든지 그날그날의 몸 상태에 맞게 양을 조절한다. 그렇다고 건강보조 식품에 의지하는 삶은 싫다. 자신의 건강은 자신이 지키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손발이 찬 체질이라 몸이 차가워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는데, 에어컨은 되도록 쓰지 않고 여름에도 샤워만 하는 게 아니라 탕에 들어가 여유 있게 기분전환을 한다.” 욕탕에는 수소 거품이 발생하는 걸 넣어서 수소를 흡입하고, 수소수 물로 머리를 감고, 목욕탕에서 나와서는 바디오일을 바르고 침실은 향수를 뿌리기도 한다. 바닐라, 망고 등을 좋아하는데, 맘이 차분히 가라앉고 잠도 잘 온다. “자기 몸에 물어보고, 좋다고 생각하는 걸 계속 해 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본다.” ◇ 어떤 명의도, 명약도 수면 부족에는 진다 유카와 레이코 (湯川れい子·음악평론가·작사가, 1936년 도쿄 출생) 지난 1월 80번째 생일을 맞이한 유카와 레이코는 지금도 아티스트 취재로 국내외를 돌고 있으며, 집필활동 외에도 합창단의 멤버로서 노래하는 등 “지금이 내 인생 중 가장 바쁠지도 모르겠다”며 팔순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바른 자세와 환한 웃음을 잃지 않는다. 음악가를 양성하는 ‘스쿨 오브 뮤직 전문학교’의 명예 교장이기도 한 그녀는 삿포로, 센다이, 도쿄, 나고야, 오사카, 후쿠오카에 있는 학교를 돌며 졸업식과 입학식에 6번 참석해 인사를 했다. “연설은 내가 1년간 일을 제대로 했는지 안 했는지를 실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살아 있는 음악정보를 말하는 거야말로 젊은 학생들의 마음에 스며들지, 과거의 추억담을 얘기하면 전혀 울림이 없다. 그래서 내년에도 학생들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올 한 해도 더욱 열심히 해야지 하고 생각한다.” 올해 아티스트 취재로 호주와 영국에도 갔다 왔으며, 개인적으로는 한 달에 한 번 4인조 코러스 그룹 ‘스완시스터즈’의 연습에 본인이 단장을 맡고 있는 가스펠 그룹 ‘도쿄여자합창단’의 단원으로서 동일본 대지진 부흥 자선콘서트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음악평론가와 작사가 이외에도 라디오 DJ를 하거나 젊은 사람들을 응원하고 노래하면서 환경과 평화와 관련된 문화활동도 소화하는 등 한마디로 사방팔방 종횡무진 대활약중이다. “샐러드도 상추만으로는 질리고, 여러 가지 채소가 들어 있으면 맛있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면 다채롭고 풍부한 삶이 더 즐겁다고 생각한다. 또 늘 앉아서 하는 일의 피로가 노래함으로써 풀리고 위안을 받는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21살 때 급성복막염 수술을 받을 때 수혈로 인해 C형 간염에 감염. 병명을 알게 된 것은 1989년 53세 때이다. 하지만, 감염이 판명되었지만 치료약이 개발되지 않아서 의사는 C형 감염 환자의 87%가 간경화에서 간암이 된다며 아무도 도와줄 수 없으니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으니 의사는 술 마시지 말고, 과로하지 말고 적당한 운동을 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충분히 잠을 자라며 어떤 명의도 명약도 수면 부족을 이기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수면이 부족하면 면역력도 저항력도 떨어진다. 그 뒤로 하루에 적어도 8시간은 잠을 자도록 하고 있다. 사실 60대 중반에 건강진단을 받고서 췌장암과 간암이 발견됐었다. 의사는 더 크면 위험하니 수술하자고 했지만 안 했다. 불안은 있었지만, 나이 들수록 어딘가 나쁜 곳이 나오게 되는 법인데, 나는 병과 싸우는 게 아니라 면역력을 높여 병과 공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뒤로 더욱 수면과 식사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결국 규칙적이고 바른 생활이 몸을 지켜준다고 믿게 됐다.” 공연 취재와 지방 강연회 등으로 바쁘더라도 전날 1박 하는 식으로 7~8시간의 수면을 확보하고 있다는 유카와는 “잠이 안 오거나 도중에 깰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눈을 감고 어쨌든 자는 상태를 유지한다. 안 자더라도 누운 상태만으로도 수면 중의 3분의 1 정도 체력이 회복이 된다고 하니까. 생각하기 시작하면 뇌가 쉬지 못하니까 잠이 안 올 때는 침대 위에서 호흡법을 한다. 단전 아래 3㎝ 정도 떨어진 곳을 의식해 코로 숨을 쉬고 천천히 길게 입으로 내뱉으면 잡념이 없어지고 뇌가 빈 상태로 되는데 그대로 자연스럽게 잠이 든다”며 “해외로 나갈 때도 마찬가지다” 고 밝혔다. “식사를 하면 위장이 움직이고 몸이 활동 모드에 들어가기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는 거의 안 먹는다. 탑승하기 전에 와인 한 잔 마신 후 호흡법을 하면서 마냥 수면을 취한다. 그러면 긴 장거리 비행에도 피로가 안 쌓이고, 시차도 없다.” 60세쯤부터 부교감 신경을 자극해 면역력을 높이는 호흡법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데, 잠이 오지 않을 때뿐만 아니라 전철 안 혹은 책상 앞, 자기 전에도 꼭 한다. “수면과 호흡법 덕분에 암이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크지 않고 있다. 호흡법은 언제 어디서든지 누구나 할 수 있다. 요즘에는 등골과 관절 등을 움직여 뼈에 적당한 부하를 거는 ‘뼈 호흡 체조’를 한 달에 한 번꼴로 도장에 다니며 지도를 받고 있다. 뼈를 강화해 주고 비틀림을 고쳐주고 대사를 촉진해 준다.” 연예계가 남성 중심의 경쟁 사회라 싫은 일도 많고 낙담하는 경우도 있는데, 고민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오늘 일은 오늘로, 싫은 것들을 내일로 가져가지 않는 게 중요하다. 침대 위에서 호흡에 집중해 푹 자고 나면, 다음 날 기분 좋게 눈 뜨면 그럼 오늘도 파이팅! 하는 힘도 생기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떠오른다. “끙끙거리고 우울할 때는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 낙담하는 감정은 좌뇌로 거기에 음악의 템포를 부여하면 자동적으로 우뇌가 우선이 되면서 좌뇌의 고민을 잊을 수 있다. 걷는 것도 스트레스 해소가 되니까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리듬에 맞춰 걸으면 그 효과는 몇 배 커질 것이다.” 몸과 마음의 젊음은 음식이 정한다 ◇ 우에키 모모코 (植木もも子·관리영양사·국제중국의사·국제중국의약요리관리사, 1953년생) 젊고 똑똑하고 즐겁고 건강하게, 이것이 삶의 주제라고 말하는 우에키 모모코는 서양의 영양학과 동양의 한방학 모두를 섭렵한 전문가로. “늙지 않기 위해서는 식생활을 고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강조한다. 실제로 자신이 스트레스에 약한 체질을 알고 평소의 식사습관을 고치고 건강을 되찾았다고 한다.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체질이 있어서, 생활습관에 개인 차이가 생긴다. 나이 들수록 그 차이는 커지기 때문에 자신의 몸과 마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동양의 한방의학에서는 인간의 몸은 기(氣), 혈(血), 수(水) 세 가지 요소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데, 나이 먹으면 그 균형이 깨지기 쉽고, 몸의 이상이 생기는 원인이 된다. 이 상태로 두면 몸의 노화가 빨라지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이다. 기는 영양과 피, 수분을 몸 구석구석에 옮겨준다. 생명 활동을 행하는 에너지, 기가 부족하면 체력이 떨어져 제대로 보충하는 게 중요하다.” 건강의 근본이 되는 기를 보완하는 식재료는 닭고기, 고등어, 양배추, 산마, 꿀 등. 체력은 물론 기력이 저하됐을 때 추천할 만하다. “적당한 운동도 필요하다. 몸을 움직임으로써 피의 흐름이 좋아지고, 또한 운동으로 땀을 흘리면 체내에 쌓인 여분의 수분과 노폐물이 배출될 수 있다. 덥다고 냉방기를 틀어놓은 실내에서만 지내면 물의 순환이 나빠지며 발이 붓고 관절통 등의 증상도 나타난다. 여름에도 샤워만이 아니라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 적절히 땀을 흘리고, 음료수와 음식도 따뜻한 걸 권하고 싶다. 기, 혈 수가 잘 돌도록 하는 생활을 계속해 나가면 몸도 마음도 활기차고, 더위도 먹지 않는다.”
- 2016-07-29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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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종 드 히미코(La maison de Himiko)-일본 실버타운 이야기
- ‘메종 드 히미코(La maison de Himiko)’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를 만들었던 이누도 잇신 감독과 각본가 와타나베 아야 콤비의 작품이다. 일본의 원빈으로 불리는 하루히코 역의 오다기리 죠와 어딘지 촌스런 분위기의 여배우 시바사키 코우가 사오리 역으로 주연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실버타운의 이름인데 영영사전을 찾아보니 “Originally, La maison de mon rêve was only intended to be distributed among a close circle of friends.”라고 나온다. 폐쇄된 서클의 친구들에게 바친다는 정도로 해석이 된다. 사오리는 아버지 히미코가 자신과 어머니를 버리고 떠나 경제적으로 혼자 어렵게 살아간다. 술집에 바니걸로도 취직을 하려 했으나 용모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퇴짜 맞는다. 여자로서 그리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얘기이다. 어느날 훈남 하루히코가 찾아 온다. 아버지 히미코가 암에 걸려 곧 죽을 거라는 소식을 전해준다. 술집에 나가느니 실버타운에서 청소나 잡일을 하면 유산도 받을 수 있을 거라 해서 마음이 흔들린다. 하루히코에게도 끌리지만, 아버지의 젊은 동성연인이라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게이 아버지를 원망하며 아버지의 존재 자체도 부정했으나 일단 실버타운에 가서 일을 해 본다. 남자들 만의 여러 군상들이 모였는데 모두 게이 동성애자들이다. 사람들에게 눈총 받고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여성스러운 이들은 모두 착한 사람들이다. 조금씩 마주보다 보니 그들도 사람이었다. 하루히코와의 사랑도 싹트지만, 역시 게이인 하루히코는 사오리에게 더 이상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 영화의 콘텐츠로는 동성애자들이 나오고 젊은 남자가 아버지의 애인이라는 등 거북스럽지만, 동성 성애 장면은 한 장면도 안 나온다. 남녀 간의 키스 정도만 나올 뿐이다. 장면 상으로는 외설스러운 부분이 없는 영화이다. 지난 6월 초 서울광장에서 ‘퀴어 축제’라고 동성애자들의 시위가 있었다. 뉴스로는 5만 명가량이 모였다는데 동성애자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동성애지이지만 굳이 시위까지는 안 나온 사람들이 더 많다는 얘기이다. 일본이 우리보다 성이 문란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자유롭다.” 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동성애 부문에서도 우리보다는 개방적인 모양이다. 필자가 남성으로 태어나서 여성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다행이고 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루히코가 사오리와 키스까지는 했으나 그 다음 진도를 못 나가는 것을 보고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로 태어났으나 여자들처럼 옷을 입고 화장을 해야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다면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 되는데 소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 것이다. 다음 세상에는 여자로 태어나겠다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도 보인다. 실버타운 사람들이 단체로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왕년에 은행지점장이었던 사람은 부하직원이었던 사람을 우연히 마주친다. 부하직원이었던 사람은 이 옛 상사가 여성스럽게 옷을 입은 것을 보고 게이라며 마구 놀려대며 비난한다. 다른 직원들에게도 다 알리겠다며 조롱한다. 혼자만 알고 이해해주면 될 일을 이렇게 발설하는 사람도 인성이 덜 된 사람이다. 영화는 그들에게 다가가 보면 그들도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들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화해해 나가라는 교훈을 남긴다.
- 2016-06-2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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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영화] 6월에 다시 만나는 <세 가지 색: 블루>
- 최근 로베르토 베니니(Roberto Benigni)가 연출·주연을 맡은 영화 가 17년 만에 국내 박스오피스에 이름을 올렸다. 재개봉(4월 13일) 9일 만에 5만 관객을 돌파한 데 이어 18일 차에 10만 관객을 모으는 등 기분 좋은 흥행성적을 냈다. 이 외에도 , , 등을 다시 스크린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영화는 상영 기간이 끝나고 나면 과거에는 비디오, 요즘은 DVD나 TV 영화 채널, 인터넷 동영상 다운로드 등을 통해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래도 작은 화면으로 보는 것은 커다란 영화관 스크린으로 웅장한 사운드를 곁들여 보는 것보다 감동이 덜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한 번, 또는 여러 번 봤던 작품이라도 재개봉 소식이 들리면 영화관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1994년 국내 첫 개봉 이후 2009년 재개봉했던 영화 를 2016년 6월 다시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게 됐다. 프랑스혁명 이념을 바탕으로 파란색(자유), 하얀색(평등), 빨간색(박애)을 주제로 만든 세 가지 색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이다(두 번째 , 세 번째 ). 어두운 푸른 빛 물결 배경과 대조되는 흰 피부의 여성이 무표정한 얼굴로 한쪽을 응시하는 모습이 담긴 포스터는 영화를 보지 않은 이들도 한 번쯤은 봤을 정도로 다양한 패러디나 디자인에 활용됐다. 포스터 속 여인인 프랑스 여배우 줄리엣 비노쉬(Juliette Binoche)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남편과 딸을 잃게 되며 절망에 빠지는 주인공 줄리역을 연기했다. , 등에 출연해 이름을 알린 그녀는 같은 해 개봉한 세 가지 색 시리즈 영화에 모두 출연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0세였다. 이제는 50대 중년이 된 줄리엣 비노쉬의 젊은 시절 모습과 순수한 연기를 볼 수 있다는 점도 재개봉 영화만의 매력이다. 영화는 ‘자유’를 주제로 했지만 다소 음울하고 묵직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오히려 그런 점이 작품의 무게감을 더하고, 관객에게 진정한 내면의 자유에 대해 곱씹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외에도 장 자크 아노 감독의 ,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 오우삼 감독의 등도 6월 극장가에서 다시 볼 수 있다. 개봉 1994년 4월 재개봉 2009년 1월, 2016년 6월 장르 드라마 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출연 줄리엣 비노쉬, 베누아 레전트, 플로렌스 퍼넬, 샤롯 베리 등
- 2016-06-0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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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라이프] 동료…재벌…스포츠스타…교포…
- “이제 배우로서의 삶과 더불어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를 만났습니다. 예쁘게 잘 살겠습니다.” 스타 배우 김하늘(38)이 3월 1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한 살 연하의 사업가와 백년가약을 맺으면서 한 말이다. “평생 존중하며 사랑하고 ‘나’를 위한 인생이 아닌 ‘우리’를 위한 인생을 위해 살겠습니다.” 가수 가희(36)도 3월 26일 세 살 연상의 사업가 양준무씨와 미국 하와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처럼 올해 들어 여자 스타들이 속속 결혼하고 있다. 탤런트 김유미(37)는 두 살 연하 배우 정우와 1월 16일 서울의 한 교회에서 결혼했다. 걸그룹 핑클 출신 연기자 이진(36)은 2월 20일 미국 하와이에서 금융업에 종사하는 여섯 살 연상의 미국 교포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탤런트 황정음(31)은 2월 26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세 살 연상 프로골퍼 출신의 사업가 이영돈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또한, 스타 연기자 김정은(40)은 4월 29일 금융업에 종사하는 동갑내기 재미교포와 결혼했다. 걸그룹 쥬얼리 출신 연기자 박정아(35)는 5월 15일 두 살 연하의 프로골퍼 전상우와 부부의 연을 맺을 계획이다.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은 대중의 시선을 모은다. 그중에서도 여자 스타의 웨딩드레스, 결혼사진, 신혼여행지, 결혼식 장소와 형태 등 결혼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높은 관심을 끈다. 오죽했으면 ‘여자 스타 결혼식은 스타 마케팅의 종합전시장’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여자 연예인의 배우자는 대중의 관심을 넘어 사회적인 화제가 된다. 한류가 거세지면서 우리 스타의 결혼은 외국 언론의 주요한 기사 아이템이 됐다. 대중의 관심을 받는 여자 연예인의 결혼식은 일반인의 소비와 라이프 트렌드를 이끌고 배우자관에 큰 영향을 준다. 그렇다면 그동안 여자 스타의 배우자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연예인 역시 일반인처럼 결혼 배우자가 매우 다양하지만,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위상의 변화와 함께 여자 연예인의 결혼 상대자도 크게 달라졌다. 대중문화 초창기였던 1900~1950년대에는 유교적 인식이 엄존해 연예인들의 사회적 위상이 낮았고 연예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많았다. 1900~1950년대 대중문화 초창기에는 여자 연예인과 일반인 결혼이 많았다. 또한, 백설희-황해, 전옥-강홍식, 황금심-고복수 커플처럼 상당히 많은 여자 연예인들이 동료 남자 연예인과 결혼했다.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위상은 높아졌지만, 여전히 부정적 인식이 존재하고 TV 등 매스미디어가 본격 등장한 1960~1970년대에는 여자 스타의 배우자는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스타들의 우상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이 시기에는 여자 연예인의 결혼 상대는 매우 다양해졌다. 특히, 이 시기 눈길을 끈 것은 여자 스타와 재벌 혹은 중견기업 오너와의 결혼이었다. 영화배우 문희는 1971년 당시 한국일보 부사장이었던 故 장강재 한국일보 회장과 결혼했고 영화배우 안인숙은 1975년 미도파백화점 사장이었던 대농그룹 박영일 전 회장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또한, 펄시스터즈의 배인순은 1976년 최원석 동아그룹 전 회장과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중앙산업 조규영 회장과 결혼한 스타 정윤희를 비롯해 황신혜, 고현정, 김희애, 김성령, 이요원, 최정윤, 박주미 등 여자 스타들이 재벌 혹은 중견기업 대표와 결혼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과 결혼했다 이혼한 고현정은 “결혼 당시 많은 사람이 재벌과의 만남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우연히 만나 사귀게 됐고 사랑해 결혼했다. 내가 사랑한 사람이 재벌이었을 뿐이다”고 말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일부 여자 연예인들이 재미교포 등 외국 교포와 결혼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물론 엄앵란-신성일, 윤복희-남진, 김지미-나훈아 커플처럼 동료 연예인끼리의 결혼 역시 성행했다. 대중문화 시장이 급성장하고 대학생이나 대학 졸업자의 연예계 진출이 두드러진 1980년대에는 연예인의 위상이 크게 올라갔다. 이 시기 관심을 끈 여자 연예인의 배우자는 연예인의 특성을 이해하고 결혼 후에도 연예활동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방송사 PD, 영화감독 등 대중문화 분야 종사자였다. 원미경은 1987년 MBC 이창순 PD와, 양미경은 1988년 KBS 허성룡 PD와 결혼했다. 임예진 역시 드라마PD 최창욱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근래 들어서도 박성미-강제규 영화감독, 문소리-장준환 영화감독, 김민-이지호 영화감독처럼 여자 연기자와 영화감독의 결혼이 이어졌다. 원미경은 “결혼 후에도 연기를 계속하고 싶었어요. 연예계가 일반 직장과 성격이 크게 달라 배우자는 연예분야를 알았으면 했어요. (남편이) 드라마 PD라 연애할 때도 결혼 후에도 저를 많이 이해해주고 격려해줘요”라고 말했다. 대중매체가 급증하고 연예산업이 산업적 기틀을 갖추어 스타가 엄청난 이윤을 창출하는 주체로 떠오른 1990년대부터는 연예인을 발굴하고 육성, 관리하는 연예 기획사가 스타 시스템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됐다. 이에 따라 연예 기획사 대표와 연예인의 결혼이 흔치 않은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1998년 가수 양수경과 예당컴퍼니 변두섭 회장과의 결혼을 시작으로 배우 신은경-김정수 커플처럼 1990년대부터는 연예기획사 대표, 연예인 매니저와 결혼하는 여자 연예인들이 많아졌다. 또한, 1980년대 최미나-허정무, 최란-이충희 커플처럼 스포츠 스타와 결혼하는 여자 연예인이 등장하기 시작해 1990년대부터는 스포츠 스타와 결혼하는 여자 연예인이 급증했다. 톱스타 최진실이 프로야구 선수 조성민과 결혼한 것을 비롯해 이혜원-안정환, 김성은-정조국, 슈-임효성, 한혜진-기성용, 유하나-이용규 등이 여자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 커플의 대표적인 사례다. 1990년대에는 여자 스타의 배우자 중 가장 많은 것이 연예인이다. 하희라는 1993년 최수종과 결혼했고, 신애라는 1995년 연기자 차인표를 배우자로 맞았다. 이후 유호정-이재룡, 채시라-김태욱, 고소영-장동건, 유진-기태영, 이효리-이상순, 원빈-이나영 커플처럼 수많은 여자 스타들이 동료 연예인과 결혼했다. 신애라는 “같은 드라마 에 출연하면서 자연스럽게 교제를 시작했다. 대중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고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은 연예계에서는 작품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동료 연예인과 사귀고 결혼한다”고 말했다. 1990년대 시선을 모은 스타 결혼식 중 하나가 최명길의 경우이다. 1995년 정치인 김한길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이후 흔치 않지만, 여자 연예인과 정치인의 결혼이 간간이 이어졌다. 심은하-지상욱, 황혜영-김경록 커플이 여자 연예인과 정치인의 만남으로 관심이 쏠렸다. 연예인이 청소년들의 직업 1순위로 부상하고 대중문화 산업이 만개한 2000년대 들어서는 여자 스타들의 배우자는 전문직 종사자에서부터 사업가, 스포츠 스타, 동료 연예인, 일반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해졌다 염정아-정형외과 의사 허일, 한지혜-서울지검 검사 정혁준, 전도연-사업가 강시규, 이영애-사업가 정호영, 소유진-요식업 사업가 백종원, 차수연-연예기획사 판타지오 대표 나병준, 전지현-금융업 종사자 최준혁, 한혜진-프로축구선수 기성용, 김지우-셰프 레이먼 킴 커플에서 보듯 최근 들어서는 여자 연예인의 결혼 배우자의 스펙트럼은 사업가에서부터 전문직 종사자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어졌다. 2000년대 들어 한류가 거세지면서 외국 스타와 결혼하는 여자 스타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중국에 진출해 등 중국 드라마에 출연한 채림은 2014년 중국 배우 가오쯔치(高梓淇)와 결혼해 눈길을 끌었다. 중국에서 드라마 회당 출연료로 1억원을 받는 스타로 부상한 추자현도 최근 올해 중국 배우 위쇼우광과 결혼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추자현은 예비신랑 위쇼우광(于曉光)에 대해 “힘들고 지칠 때 힘이 되어주고 연기자로서 발전을 도와주는 동료이자 연인이다. 중국인이라는 점이 결혼을 결정할 때 장애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처럼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여자 스타들의 결혼 배우자는 시대 상황과 연예인에 대한 인식과 위상 변화에 따라 달라졌다. 또한, 과거에는 여자 스타들이 결혼과 함께 활동을 중단하거나 인기가 하락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최근 들어서는 대부분의 여자 스타들이 결혼 이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제 결혼은 여배우의 인기의 무덤이 아니라 인기 상승 기폭제 역할까지 하고 있다.
- 2016-05-26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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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도사 되는 법] 여직원이 던진 한 마디
- 2000년대 초반 ‘아름다움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강의를 의뢰받은 적이 있다. 주제를 보고 필자는 대단원에 나이 들어 얼굴에 잔주름 가득한 미국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두건을 한 채 뼈만 앙상한 흑인 어린이를 안고 있는 사진을 넣기로 했다. 이 사진만큼 ‘아름다움의 지속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 필자는 완전 컴맹이었고 강의용 파워포인트 교재는 디자인팀 여직원이 만들어 주곤 했다. 필자는 그날도 평소대로 강의 콘티를 손으로 스케치한 후 디자인팀 여직원에게 파워포인트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뒷부분에는 헵번이 머리에 보자기를 두른 멋진 사진을 넣어서. 필자의 요청은 처절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필자가 “네이버에서 헵번을 치면 그의 사진이 죽 나오는데 몇 번째 페이지를 열고 거기서 머리에 보자기를 둘러쓴 헵번의 사진을 파워포인트에 넣어줘요”라고 여직원에게 설명하자 그 여직원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안티를 던진 것이다. 그가 날린 한마디는 바로 “사진을 캡처해서 저한테 이메일을 보내 주시면 간단하잖아요!” “….” 그의 말 중에 ‘이메일’이라는 단어는 알아듣겠는데 ‘캡처’는 도대체 알아듣지 못할 ‘외계어’였다. 그 여직원이 도도한 자세로 자리로 돌아간 후 필자는 생각에 잠겼다. 필자는 무거운 환등기와 슬라이드 트레이를 양손에 들고 강의 다녔다. 그런데 불과 몇 년 만에 새끼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의 USB라는 신기한 물건만 호주머니에 넣고 가면 되는 세상으로 변했다. 모든 것이 디지털로 천지개벽했는데 필자는 아직도 아날로그 세상에 머물러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젠가 직원의 도움을 받지 못할 상황이 되면 그야말로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바로 ‘기분 잡치지만 컴퓨터 공부 한번 제대로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50세 넘어서 젊은 사람들과 컴퓨터학원에서 같이 공부하는 장면을 떠올리니 이것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필자 아이들이 어릴 때 집으로 모셔서 배우던 컴퓨터 선생님. 그렇게 해서 필자는 퇴근 후 집에서 컴퓨터 개인교습을 받게 됐다. 수개월에 걸쳐 인터넷 검색 방법, 한글 워드 작성법, 이메일 주고받는 법, 엑셀, 파워포인트, 포토샵을 두루 배웠다. 블로그 만드는 법을 배워 블로그도 개설했다. 필요한 사진을 ‘캡처’해서 파워포인트를 만드는 것 역시 공부했다. 아날로그에 익숙한 필자가 컴퓨터를 이해하고 배우는 과정에 좀 어려운 면도 있었으나 반복 연습으로 극복했다. 어느 날 회사 디자인 회의 시간에 필자는 호주머니에서 USB를 턱 하니 꺼내 노트북에 장착하고 슬라이드를 실행했다. 그날 깜짝 강의에 사용된 파워포인트 교안을 필자가 직접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원들은 눈이 동그래져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컴퓨터는 기초적인 것을 배우고 나면 그 외의 다양한 기능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 파워포인트로 몇 년 동안 강의 교안을 만들다 보니 이제 손에 익게 된 것이다. 요즘에는 글씨체와 크기, 사진의 배열, 배경 색상 등 슬라이드 디자인에도 신경 쓰고 있다. 몇 년 전 보자기를 쓴 헵번의 사진을 ‘캡처’해서 이메일로 보내라던 그 여직원의 당돌한 한마디가 발단돼 필자 앞에 찬란한 IT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 2016-05-24 1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