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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트 3국 여행기(1)
- 올해부터 버킷리스트에 올라 있던 여행을 위하여 일찍부터 점찍어 두었던 나라가 발트 3국이었다. 발트 3국은 미지의 세계였다. 서 유럽은 재직 시 독일 주재원을 인연으로 직무 상 여러 번 갔었지만, 나머지 유럽은 직무상 다녀 올 일이 없었다. 발트 3국은 지도를 보니 유럽에서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스칸디나비아가 있는 북유럽도 아니고 동유럽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동북유럽이라 해야 한다. 북쪽에는 핀란드, 스웨덴이 있고, 동쪽에는 러시아가 있고 남쪽으로 폴란드가 둘러싸고 있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면적도 작아서 생소한 나라들이었다. 비슷한 면적 세 나라 합해서 한 반도의 3분의 2 정도이고 인구도 각국이 각각 리투아니아 300만 명, 라트비아 200만 명, 에스토니아 125만 명으로 세 나라 합계가 625만 명 정도이다. 가이드에게 한 첫 질문이 “발트 3국의 특징은 무엇입니까?”였다. 대답은 “별 다른 특징은 없고 다른 유럽 국가들을 다 보고 나서 마지막으로 들르는 나라가 발트 3국입니다”였다. 그만큼 특별히 볼 것도 없고 빼놓자니 아까운 지역이라는 것이었다. “로마를 먼저 보면, 다른 나라는 시시하다”는 말이 있다. 과연 그랬다. 그래도 유럽은 유럽이다. 오랜 역사가 있고 석조문화 덕분에 고성, 대성당 같은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종교의 힘 덕분에 불가사의 같은 대성당 등이 지어졌다. 지정학적으로 강국의 틈새에 있으면 시련을 많이 겪을 수밖에 없다. 잘 알려지지 않았고 소국이라면 우리나라의 운명과 비슷할 거라는 짐작은 했었다. 당연히 이웃나라인 스웨덴, 폴란드, 러시아, 좀 떨어져 있는 독일에게도 침략 당해 속국이 되었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구가 적으면 국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번에 절실히 깨달았다. 1차 대전 후 잠시 독립을 했으나 1939년 2차 대전을 앞두고 독일의 히틀러와 소련의 스탈린이 밀약을 하여 발트 3국을 제멋대로 소련 땅으로 하기로 한 것이다. 히틀러가 서유럽을 침공하기 위해서는 동쪽의 소련이 움직이지 않도록 한 것이다. 발트 3국이 독립을 쟁취한 것은 1991년이므로 이제 겨우 26년의 역사를 가진 셈이다. 독립을 위하여 벌인 인간 띠 행사가 1989년 8월23일 독소조약 50주년에 맞춰 600km, 200만 명이 참가했다. 3국의 수도를 인간 띠로 남북으로 잇는 거대한 행사였다. 인구가 적으니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진 숲과 도로에 사람이 이어서기 위해 인구의 1/3이 나서는 대단한 노력을 한 것이다. 이 행사는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소련 강경파가 제압하려 했으나 역시 같은 방법으로 의회와 방송국들을 시민들이 막아서는 방법으로 자유를 쟁취했다. 소련은 내부적으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외친 고르바초프를 연금 시킨 3일천하 쿠데타가 있었고 이후 소련 연방 공화국들은 속속 독립을 선언했다. 발트 3국은 각각 각국의 특징이 있다. 우리가 우리를 식민지화 했던 일본을 미워하듯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했으니 소련에게 적대감이 남아 있다. 그러나 아직 소련의 유물과 잔재가 존재한다. 에스토니아는 국민의 20%가 러시아계이며 러시아 접경에 몰려 살고 있다. 소련으로부터 독립은 했으나 경제적으로는 자립해야 하니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렇다 할 제조업은 없고 50%가 서비스업, 20%가 농업인데 농업조차 기후와 토양이 맞지 않는다. 그나마 일인당 국민소득은 1만5천불 정도 되니 어느 정도 살만한 나라들이다. 기후는 서울보다 약간 서늘하다. 6월인데도 아침 온도는 10도 이하이고 낮 기온도 22도 정도였다. 서울 날씨와 여러 번 유럽에 기본 경험만 믿고 반팔만 갖고 가기 쉬운데 필히 긴팔 옷을 준비해야 한다. 음식은 서유럽과 비슷하다. 입맛에도 잘 맞는 편이지만, 매일 하루 세 끼를 그렇게 먹다 보니 맵고 짠 한식이 생각난다.
- 2017-06-21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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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이 빚은 조각품, 舊石器人 형상
- 자연의 조화는 언제 보아도 신비스럽다. 사람의 힘과 손놀림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조각이나 그림을 만들어낸다. 그러한 모습을 발견한 순간은 늘 기쁨이고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샘솟는다. 때로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절감한다. 충청북도 단양지역의 천동동굴(충청북도 기념물 제19호) 관람 여행에서 최초로 발견한 구석기인(舊石器人)을 닮은 형상(사진) 또한 그렇다. 이 형상은 동굴 관리기관에서 이미 발견해 놓았거나 다른 사람이 이미 찾은 형상이 아닌 처음 발견이다. 동굴 현장이나 안내 유인물에도 그런 내용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단양지역은 선사 문화의 발상지로서 여러 동굴과 유물들을 만나 볼 수 있는 곳이다. 중기 구석기 시대부터 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유물들이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남한강 일원에서 발견되고 있고 그 유물들을 “수양개 선사유물 전시관”에서 관람할 수 있다. 석회암이 발달하여 만들어진 동굴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거주 공간이었다고 한다. 동굴 속에서 돌로 ‘주먹 도끼’나 ‘주먹 찌르개’를 만들고 있는 모습의 구석기인을 빼닮은 이 형상은 선사 문화와 연결하여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료임엔 틀림이 없기에 제보하여 활용하도록 할 계획이다. 이 형상은 일반인의 평범한 시각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 즉 앵글을 달리하여 보면 찾을 수 있다. 필자는 사진작가로서 자연이 빚은 형상을 찾아 촬영하기를 좋아하고 실제로 많은 종류의 형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중 일부는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필자는 하나의 피사체를 촬영할 때도 여러 각도와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기를 즐겨 한다. 구석기인의 형상 역시 그런 행동의 결과에서 얻은 사진이다. 카메라로 또 하나의 이야기를 썼다. “세상사는 생각하기 나름이고 보기 나름이다.”라는 말이 사진에서도 적용된다. 다시 보아도 여지없는 구석기인 형상으로 자연이 빚은 조각품이다.
- 2017-06-12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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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 않던 것이 보여, 백제여행
- “거기, 아무 것도 없어” 공주와 부여, 익산 일원의 백제역사유적지구 팸투어를 간다는 말에 지인이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가방을 메고 출발하는데 김빠지는 소리였다. 그러나 공주 공산성에서 시작해 공주와 부여 일원을 둘러보자, 지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이 됐다. 기원 전 18년, 고구려에서 쫓겨난 비류와 온조가 한강유역 위례성에 세운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로 한성을 내주고 웅진(공주)으로 쫓겨 내려갔다가 사비(부여)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지만, 결국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멸망하고 만다. 패배의 역사로 얼룩진 백제역사유적지구엔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아무 것도 없는 벌판에서 상상력을 발휘하며 1500년 전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내야 했다. 백제인들의 삶은 고단했으리라. 삼국은 늘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고, 한성에서 공주, 사비로 수도를 옮길 때마다 새로운 성을 쌓느라 백성들은 과도한 노동에 시달렸을 것이다. 성 안에 있던 커다란 사찰에도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서리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인들이 남긴 유물이나 유적들을 들여다 보면 온화하고 부드럽다. 모든 왕릉이 도굴 당했지만 고맙게도 무령왕릉 하나가 온전히 남아있어 백제인들의 세련되고 앞선 문화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유네스코는 백제역사유적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며 국제성과 개방성을 갖춘 보편적 가치를 인정했다.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고분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에 포함돼 있기도 하다. 공주 공산성에서 시작해 1박 2일 백제역사유적지구를 둘러보았다. 백마강이 내려다 보이는 공산성이나 소나무가 울창한 부소산성을 걷고, 유람선을 타고 아찔하게 깍아내린 낙화암을 보았다. 또한 정림사지에선 정림사 5층 석탑을 보며 돌을 쪼던 백제인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인 곳은 무왕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던 익산이었다. 어린 아이들에게 서동요를 부르게 해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결혼한 무왕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사실 무왕은 호방하고 걸출한 기상을 지닌 왕이었다고 한다. 익산에서 백제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던 무왕은 엄청난 크기의 왕궁과 사찰을 지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인 미륵사지는 건물은 다 사라지고 터만 남았다. 그리고 지금 그곳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의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절 터엔 복원을 위해 번호를 매겨 놓은 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백제역사유적지구 투어는 과거의 흔적들을 더듬으며 퍼즐조각을 맞추는 게임 같았다. 대부분의 유적들은 사라지고 덩그러니 터만 남아있는 그 곳에서 옛사람들의 숨결을 듣고 목소리를 되살리고 기상을 느껴보려 애썼다. 그러자 보이지 않던 것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동아시아 교류의 중심에 있던 무령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무령왕의 어진 위로 새로 선출된 대통령 얼굴이 떠오르며 우리나라도 하루 빨리 동아시아에서 제 위치를 찾을 수 있길 빌어보았다.
- 2017-05-30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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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녀와 유채꽃
- 유채꽃은 제주도에서만 유명한 줄 알았더니 부안의 유채꽃밭도 아주 볼 만했다. 샛노란 유채꽃이 끝없이 펼쳐져 눈부신 풍경을 이루었다. 몇 년 전 제주도 유채꽃밭에서 사진을 찍으려 했더니 돈을 내야 한다는 팻말이 있어 기분이 안 좋았는데 이곳 부안 유채꽃밭은 포근하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 속에서 필자도 꽃이 된 양 마음껏 셔터를 눌러 멋진 유채꽃밭 사진을 얻었다. 유채꽃 만발한 부안 마실길인 수성당은 재미있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수성당은 딸 여덟 명을 낳아 일곱 명 딸을 팔도에 한 명씩 나누어주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바다를 다스렸다는 개양 할머니의 전설이 있어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흘에 제사를 올리고 풍어와 무사고를 빌었다고 한다. 또 수성당 주변에서 선사시대 이래 바다에 제사를 지낸 유물이 발견돼 죽막동 제사 유적지임이 확인된 곳이라 한다. 유채꽃밭 속에서 손자, 손녀와 그네도 타고 사진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행 첫날을 보내고 다음 날은 부안에서 유명한 누에박물관에 가보기로 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소라며 고른 방문지다. 온종일 피곤했을 텐데 아이들은 잠을 안 자고 뛰어다닌다. 억지로 끌어안고 누웠더니 필자가 먼저 꿈나라로 갔던 모양이다. 아침에 손녀가 가만히 귀에 대고 “할머니~” 하고 불러 잠이 깼다. 콘도였으면 아침 정도는 간단히 해먹었겠는데 호텔이라 아래층 식당으로 갔다. 넓고 깨끗한 한식 식당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누에 박물관으로 출발했다. 누에 형상을 한 귀여운 캐릭터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해서 손자 손녀는 신이 났다. 누에로 비단 실을 만들므로 실크로드와 부안의 선잠 농가에 관한 설명이 있었는데 실크로드(비단길) 라는 이름의 어원은 1877년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 호팬’이 중국에서 중앙아시아, 인도로 이어지는 교역로에서 주요 교역품이 비단인 것에 착안 그의 저서 ‘차이나’에 ‘자이덴 슈트라쎄’ 라고 명명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연구가 계속되면서 1910년 독일의 동양학자 ‘알버트 헤르만’이 교역로가 중국에서 시리아까지 간다고 주장했으며 오늘날에는 동서의 교역로를 비단길과 초원길, 바닷길, 3가지로 나눈다고 한다. 부안은 참뽕 프로젝트로 세계제일의 누에 메카를 꿈꾸며 입는 실크에서 먹는 기능성 실크로 녹색성장의 힘찬 도약을 하고 있다. 부안 참뽕 오디를 이용하여 뽕 아이스크림, 뽕 오디 과자, 오디 케이크, 뽕 술, 뽕 바지락죽 등 많은 음식을 만들고 있다. ‘잠령제’ 라는 행사도 있는데 해마다 봄누에 치기를 앞두고 순조로운 누에치기를 빌며 인간이 기능성 식품생산을 위해 큰누에를 급랭 건조하는 죄를 천지신명께 고하고 잠령들의 안녕과 양잠 농가의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의식이라 한다. 누에에 속죄하는 사람의 마음이 선하게 느껴졌다. 체험관에서는 실제 누에를 만져 볼 수 있었다. 하얗고 보드라운 누에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니 캐릭터처럼 귀여운 모습이다. 5살 손녀는 징그럽다고 싫다지만 두 살짜리 손자는 단풍잎 같은 손으로 누에를 살짝 만져보며 관심을 보였다. 이런 작은 누에에서 멋진 비단 실이 나온다는 게 정말 신비스럽다. 농약을 하지 않고 키운다는 참뽕나무 터널도 지나보고 참뽕 잎도 하나 따서 입에 넣어 보았다. 부안의 참뽕 프로젝트가 큰 성공을 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해 보았다.
- 2017-05-11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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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꽃 명소가 된 선진리 왜성
-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선진리(船津里) 왜성을 다시 찾은 것은 꼭 13년 만이었다. 남해안 꽃마중 길에 벚꽃 명소라는 소문에 이끌려 찾아간 것이 2004년 4월이었다. 경남 사천군 용현면 선진리. 사천만 바다가 내륙으로 깊숙이 파고든 한적한 어촌 마을 야산을 뒤덮은 벚꽃이 제철이었다. 그곳이 정유재란 때 일본 무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자의 거점이었다는 사실에 잠시 관심을 가졌었다. 그는 지금의 가고시마(鹿兒島) 땅인 사쓰마(薩摩) 영주였다. 그 벚나무들이 일제의 유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잠시 세월의 나이테를 헤아려보았다. 성의 주인이었던 시마즈 후손들 입김으로 조선총독부는 그곳에 공원을 꾸미고 벚나무를 심었다 한다. 더러는 그때 심은 것으로 보이는 고목도 있었다. 벚나무들은 봄마다 무심한 꽃잎을 쏟아낸다. 올 4월에도 벚꽃 축제가 또 사람들을 유혹할 것이다. 첫 방문 이후 13년 동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2005년부터 시작된 성터 발굴사업에서 의미 있는 출토품이 나왔다는 사실은 몰랐다. 고려시대의 자기류 같은 출토품은 왜성이 생기기 이전부터 왜구의 분탕질에 대비해 고려수군영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옛 모습의 편린을 짐작케 하는 성터가 복원된 사실도 알 턱이 없었다. 첫 버스로 진주에 도착해 삼천포 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선진리 정류장에서 내려 3km를 걸어서 갔다. 1598년 가을 사천벌을 붉은 피로 물들인 치욕적인 패전의 흔적은 남았을 리 없겠지만 분위기만은 느껴보고 싶었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들판 여기저기서 봄 기지개가 한창이었다. 농수로마다 물이 흘러넘치고, 농사 준비에 바쁜 농부들 모습이 정겨웠다. 논두렁, 밭두렁 너머 울타리마다 피어나는 매화도 반가웠다. 420년 전 초토에도 봄은 왔다. 싸움에 패해 달아나다가 왜군의 소총에 맞아 죽고, 칼과 창에 찔려 죽은 수많은 조·명 연합군 병사들의 비참한 최후는 이제 까마득한 옛일일 뿐이다. 지금 그 땅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 턱이 없는 시대다. 정유재란 최대의 치욕 선진리 왜성도 순천과 울산처럼 바다와 뭍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순천과 울산 육전(陸戰)에서는 명군이 적장의 뇌물을 받거나 몸을 사려 비겁하게 물러난 데 비해, 선진리 전투는 어이없는 패전이었다는 사실이다. 병력 면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았던 조·명 연합군의 선진리 패퇴는 정유재란 최대의 치욕으로 기록됐다. 오죽하면 일본이 전과를 크게 부풀려 3대첩의 하나로 자랑했으랴! 서전은 연합군의 승승장구였다. 중로(中路)군 장수였던 명군 제독 동일원(董一元)이 이끄는 명군 3만7000명과 정기룡(鄭起龍) 장군 휘하의 조선군 3000명은 1598년 9월 20일 진주성을 차지했던 왜군을 쉽게 물리쳤다. 이어 남강 변 망진산 왜성까지 함락시켜 왜군을 바닷가로 내몰았다. 진주성과 망진산을 거점으로 연합군에 저항하던 왜군은 압도적인 병력에 위축되어 사천 읍성과 선진리 성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사천읍도 쉽게 탈환됐다. 정기룡이 읍성을 포위하고 야간 기습공격을 가해 가볍게 수복한 것이다. 시마즈군은 7km 서남쪽 선진리 성으로 철수하면서, 수백 명의 병력을 남겨 수성하도록 했다. 그 병력으로 4만 대병을 막으라는 것은 연합군 남진의 속도를 늦춰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보자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선진리 전투는 10월 1일이었다. 양력으로는 10월 30일이었으니 4만 연합군과 1만 안팎의 시마즈군이 가을 들판에서 벌인 창과 방패의 대결이었다. 누가 봐도 싸움이 되지 않을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역사적인 치욕을 당했다. 사천만 바닷가 고지대에 견고한 성을 쌓고 농성하던 시마즈군은 독 안에 든 쥐 형국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은 그 쥐에게 급소를 물린 꼴이 됐다. 성내를 향해 포화를 집중하고 성문을 부수기 위해 돌격대를 투입했다. 성문만 열리면 전투는 끝이었다. 왜군은 유리한 지형을 등에 지고 결사항전으로 나왔다. 주변에 미리 지뢰를 매설하고 조총을 총동원해 연합군의 행동반경을 묶었다. 전투 중 세토구치 시게하루(瀬戸口重治)가 연합군 식량 창고를 불화살로 공격해 군량미가 소실됐다. 군량이 사라진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연합군의 공세는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게다가 뜻하지 않은 사고까지 일어났다. 사고였는지 적의 공격에 당한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명군 화약고가 폭발해 큰 혼란이 일어났다. 어떤 기록에는 왜군의 불화살로 일어난 일이라 하고, 어떤 기록에는 명군의 실수로 돼 있다. 아비규환의 사천벌 연합군 진영이 우왕좌왕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왜군은 일제공격으로 돌변했다. 불끄기에 동원된 병사들이 미처 무기를 챙겨 들 사이도 없이 밀려든 왜적의 공격에 연합군 전선은 허무하게 와해됐다. 진중은 너나없이 도망치는 병사들로 어지러웠다. 도리 없이 동일원은 남은 군사를 진주성으로 철수시켰다. 왜군은 달아나는 병사들을 추격하면서 총을 쏘고 칼과 창을 휘둘렀다. 사천벌은 순식간에 단말마 비명으로 아비규환이 됐다. 논두렁과 밭두렁은 피로 물들었다. 연합군이 철수해 달아난 진주까지 핏자국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았을 정도다. 이렇게 죽은 연합군 전사자 숫자는 제각각이다. 뜻하지 않은 전과를 크게 자랑하고 싶었던 일본 측 기록에는 2만~3만으로 나오는 데 비해, 에는 7000~8000명에 달한다고 기록돼 있다. 일본이 크게 늘리고 조선이 크게 줄였다고 가정한다면, 1만 안팎으로 보는 의견이 타당해 보인다. 더 비극적인 사건은 그 후의 일이다. 시마즈는 자신의 전공을 자랑하기 위해 전사자 시체에서 코와 귀를 잘라 소금에 절여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보냈다. 전공을 증명할 수급 대신 잘라 보낸 코와 귀는 지금 교토의 유명한 사적지 미미즈카(耳塚, 귀무덤)에 묻혀 있다. 그곳에 묻힌 원혼은 이 전투의 희생자뿐만이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 코도 베어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모두 12만 명이 넘었다. 그 한을 풀기 위해 1992년 박삼중 스님(부산 자비사 주지)이 원혼이 깃든 교토 이총의 흙을 떠다가 선진리 조명군총(朝明軍塚) 옆에 안장하고 비석을 세웠다. 선진리 전투 패전 보고를 받은 명나라 만력 황제는 크게 노하면서 즉시 진군해 성을 빼앗고 왜장을 징치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겁에 질린 동일원이 남은 병력을 추슬러 11월 17일 다시 왜성 공격에 나섰으나, 시마즈는 이미 성을 버리고 귀국한 뒤였다. 그 치욕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바로 왜군이 만행을 저지르고 쫓겨 간 뒤 현지 백성들이 시신을 수습해 묻은 조명군총이다. 여기저기서 썩어가는 악취를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코와 귀가 잘린 수급을 모아 성 옆에 묻었다. 명군 수가 훨씬 많아 ‘당병무덤’ 또는 ‘뎅강무데기’라 불렸다. 뎅강무데기란 말이 섬뜩했다.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었던 무덤은 원형대로 보전되다가 1983년 사천문화원과 민간이 협력해 비석을 세우고 매년 10월 30일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은 원혼들에게 한 가닥 위안이라도 하려는 건지 왕릉 규모 못지않은 거대한 무덤 주위에 올해도 매화와 동백이 피었다. 선진리 왜성은 처음 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말쑥하게 새 단장을 하고 있었다. 2005년 발굴사업에 이어 복원 공사와 공원화 공사가 끝난 탓이다. 동쪽에 있던 성문 터에는 육중한 문루도 복원됐다. 전형적인 일본 성으로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천수대 자리에 우뚝 선 6·25 전몰 공군 장병 위령탑은 엉뚱해보였지만, 허물어졌던 성곽이 복원되어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해줬다. 성 마루에서 바라본 사천만 바다는 드넓은 호수 같았다. 잔물결 하나 없는 잔잔한 바다가 옛날 그 자리에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임진년 해전에 처음 출전한 거북선 용머리가 포효하며 왜선들을 수장시켰던 성난 바다의 모습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치욕적인 육전과는 반대로 7년 전의 임진년 해전은 통쾌한 승첩이었다. 세계 해전 역사에 그 명성을 떨친 이순신 함대의 거북선이 처음으로 위력을 과시한 전투였다는 점에서도 사천만 해전은 유명하다. 사천해전은 1592년 5월 하순에 일어났던 전투다. 첫 승첩인 옥포해전(1592년 5월 7일) 직후 전라좌수영(여수)으로 돌아간 이순신이 전열을 가다듬을 새도 없었던 5월 27일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에게서 다급한 지원 요청이 왔다. “왜군 전선 10여 척이 사천 곤양 바다를 침범해 노량에 대피했으니 빨리 와서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일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이순신은 곧 휘하 장수들을 거느리고 경상도 바다로 달려갔다. 거북선의 첫 승리 삼천포 해안에서 멀리 내륙으로 파고 들어간 사천 바다로 가니 선진포구에 왜선들이 오색 깃발을 날리며 정박해 있는 것이 보였다. 이순신은 처음 거느리고 온 거북선 성능을 실험해볼 겸 적선을 너른 바다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다. 적은 그 계책에 넘어가 따라나섰다. 두려운 척 물러가던 이순신 함대는 수심이 깊은 바다에 이르러, 돌연 뱃머리를 돌려 거북선을 앞세우고 적진으로 돌진했다. 거북선 용구(龍口)에서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 화포들이 불을 뿜고, 여러 판옥선들이 일제히 불화살과 총통공격을 퍼붓자 적선들은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여 엎어지고 깨지고 가라앉았다. 불이 난 선상의 왜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에 뛰어들고, 천신만고 끝에 뭍에 오른 병사들은 산으로 도망치며 통곡을 쏟아냈다. 삽시간에 왜선 10여 척을 분멸시키고 당파한 쾌거였다. 이 해전의 의미는 단연코 거북선의 성능에 귀일한다. 무시무시한 용머리를 앞에 달고 무서울 것 없다는 듯 달려드는 괴물 같은 전함에 왜적은 크게 당황했다. 선재도 두꺼운 적송으로 돼 있어 가볍고 날렵하기만 한 왜선들은 부딪히는 대로 깨졌다. 이순신은 뒤이은 당포해전이 끝난 뒤 임금에게 전투보고서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을 올렸는데 전투 상황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산 위와 배를 지키는 곳에서 왜적들이 빗발치듯 철환을 쏘았는데, 그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도 섞여 있어 분하여 배를 급히 저어 앞으로 나아가 배를 두들겼습니다. 여러 장수들이 한 번에 구름처럼 모여들어 천자, 지자 대포들과 장편전, 화전 등을 쏘아 천지를 뒤흔들었고, 고막이 상해서 엎어지는 자, 부축해서 끌고 달아나는 자가 얼마인지 모르겠으며, 언덕으로 물러가서 감히 앞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선들은 처음에는 거북선의 무서운 외양에 겁을 먹었으나 판옥선보다 크지 않은 몸집에 자신감을 가졌던 모양이다. 일단의 왜병들은 2층 층루에서 사다리를 걸고 거북선 위로 뛰어내렸다. 육박전에 도가 튼 그들은 단병전에 승부를 걸 요량이었겠지만, 뛰어내린 적병마다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거북선 등을 덮은 가마니 거적 속에 촘촘히 박힌 철추에 팔다리와 배가 찔린 것이다. 사천해전 승전의 중요한 의미 첫 해전이 끝난 뒤 이순신은 신병기 거북선 보안을 위해 삼천포 대방진 굴항에 깊숙이 정박시켰다. 이순신 선단은 현장에서 멀지 않은 모자랑포에서 밤을 보내면서도 거북선만은 안전하게 멀리 숨겨둔 것이다. 이 굴항(窟港)은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다. 고려시대 때부터 왜구 침입에 대비해 군선을 안전하게 정박시키려고 만든 시설이 요긴하게 쓰인 것이다. 그 뒤로도 이 굴항은 조선수군의 주요 시설로 보전돼왔다. 사천해전에서 이순신은 큰 전상을 입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부하 장수의 상처를 돌봐주는 대인의 풍모를 보여줬다. 에 따르면, 이순신은 신변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줄곧 대장선 꼭대기에 선 채 전투를 지휘하다가 어깨에 적탄을 맞았다. 피가 발등까지 흘러내렸는데도 활을 놓지 않고 지휘를 마쳤다. 전투가 끝난 뒤에야 상처를 내보인 그는 생살을 두 치(6cm)나 째고 철환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태연하게 웃으며 부하들과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 상처는 1년이 넘도록 낫지 않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다음해 유성룡에게 보낸 편지에서 “죽음에 이를 만큼 다치지는 않았지만 연일 갑옷을 입고 있는 데다 상처에서 진물이 줄줄 흘러 아직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뽕나무 잿물로도 바닷물로도 씻어보지만 차도가 없어 민망할 따름”이라며 고통을 실토했다. 이 전투에 이기지 못했다면 왜군의 호남 진출 거점인 선진리를 잃어 임진왜란 초기 전쟁의 양상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사천해전 직후 당포해전에서도 승리한 이순신의 장계에는 “사천선창에서 바라보니 험준한 산 위에 400여 명의 왜적들이 긴 뱀이 똬리를 튼 듯한 모양의 진[長蛇結陣]을 치고 붉고 흰 깃발을 난잡하게 꽂아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왜성을 쌓는 모습이 그렇게 묘사된 것으로 해석된다. 사천해전에 패했다면 그 축성 공사는 바로 완공됐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순신의 본거지인 전라좌수영과 뒷날 한산도 통제영까지 감제하는 요지가 그들에게 제공됐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사천해전 승첩은 전쟁 초기 제해권 향방을 가른 중요한 전기였다. 선진리 성은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10월 왜군 장수 모리 요시시로(毛利吉城)에 의해 축성됐다. 공사가 불과 2개월밖에 안 걸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곡창 호남을 도모하려는 작전 계획이 얼마나 시급했는지 그 사정을 알 수 있다. 그런 곳에 갇혔던 왜장을 징치하지 못한 선진리 전투 현장을 답사하면서, 나의 전쟁과 남의 전쟁, 나의 염원과 남의 인식 간의 상관관계를 골똘히 천착하게 됐다. 문창재(文昌宰) 언론인 1946년 강원 정선 출생. 서울 양정고, 고려대 국문과, 한양대 대학원 졸. 한국일보 도쿄특파원, 사회부장, 논설실장 역임. 저서로 , , , 등이 있다.
- 2017-03-3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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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인은 나의 은인’이라는 말씀을 새겨본다
- 어느 해 여름 아내와 나는 여름휴가를 맞아 차를 타고 무작정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냥 그렇게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철 스님의 생가도 둘러보았다. 꾸밈이 없는 고택에는 스님께서 생전에 남긴 글 등 중생들에게 귀감이 되는 유물들이 전시돼 있었다. 스치듯 보고 지나치는데 유독 한 문장이 필자의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못된 짓을 한 악인은 나의 은인이다.” 말도 안 되는 내용처럼 느껴졌다. 잘못 봤나 싶어 가던 발길을 돌려 다시 읽었다. 당시 필자는 직장 동료인 친구의 배신에 마음이 편치 않은 상황이었다. 친구와 필자는 경력사원으로 입사한 동기였고 아주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가정 사정으로 동기들보다 5~6년 늦게 직장생활을 시작한 필자보다 나이는 두 살 아래였지만 직위로는 한 직급 위였다. 필자와 달리 온화한 성격의 그 친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깔끔하게 얻어내고 해결하는 처세술이 있었다. 필자는 그런 재능을 가진 친구가 참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두 사람만의 은어를 만들어 큰 소리로 허심탄회하게 상사와 동료들 욕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 정도로 허물없이 지냈다. 그런데 그와 사이가 벌어지게 된 결정적인 일이 있었다. 당시 필자의 총괄 중역이었던 전무님이 부서장을 맡고 있던 필자에게 그 친구가 자리가 없어 진급이 어려운데 필자가 있는 부서 담당 중역으로 오게 하면 진급이 가능하다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원하지 않는다면 승인하지 않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그러나 필자는 친구가 잘되면 서로 윈윈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동의를 했고 그는 곧 진급을 해서 우리 부서 담당 중역으로 오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부서 상사로 오는 순간부터 그의 말과 행동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치 필자의 업적과 실적을 비방해야 자신의 위치가 확고해지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참고 지낼 수 있었다. 필자를 정말 힘들게 한 것은 필자의 총괄 중역이었던 분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본부장과 서로 입을 맞추고 20년간 한 우물을 파온, 어쩌면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보유한 필자를 부서장직에서 해임한 일이었다. 필자를 해임하고 해당 업무를 전혀 모르는, 본부장의 지인을 데려다가 부서장 자리에 보임한 사건이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더니 빈말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아내와 무작정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난 것이었다. 성철 스님이 남긴 말처럼 필자는 그 친구로 인해 세상살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한 수 배우게 된 것이니 그가 바로 나의 은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입장에서 헤아려봤다. 그에게는 본부장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될 불가피한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고 나니 그가 세상일을 깨우치게 해준 은인이었다. 그 후 그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은인으로 대해주니 그도 말없이 많을 것을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요즘은 가끔씩 통화도 한다. 물론 예전 같은 친밀함은 없지만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게 해준 은인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를 문경지우로 함께할 수 없는 것은 필자의 한계일까?
- 2017-03-31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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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반해버린 바람의 섬, 미코노스
- ‘에게 해의 진주’와 ‘바람의 섬’이라는 별명을 지닌 미코노스는 유럽인들이 즐겨 찾는 휴양지로 손꼽힌다. 영화 등 촬영지로도 인기를 누리는 섬. 특히 동양인에게 많이 알려진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이 섬에 머물며 소설 를 쓰기 시작했고 에세이 에는 이곳의 ‘한 달 반’ 생활이 낱낱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 섬은 예술가나 특정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호화로운 곳은 절대 아니다. 이신화 여행작가 ('On the Camino' 저자, www.sinhwada.com) 아폴론의 손자 미콘스의 이름을 딴 섬 그리스는 섬들의 나라다. 6000개가 넘는 섬 중에서 유인도는 227개. 에게 해의 섬들 중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 미코노스다. 미코노스 선착장에서 ‘워터 택시’를 타면 코라(구항구)에 금세 다다른다. 이 섬의 첫 느낌은 ‘눈부신 흰색’이다. 그리스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미코노스는 그리스령 키클라데스 제도 가운데 하나다. 북서쪽에 티노스 섬, 남쪽에 낙소스 섬과 파로스 섬이 있고, 델로스 섬과는 2㎞ 떨어져 있다. 면적은 86㎢로 작으며 최대 고도는 364m로 산토리니 섬의 깎아지른 듯한 벼랑과는 달리 평지다. 지질은 주로 울퉁불퉁한 화강암이고 신선한 자연수가 적어 염분을 제거한 해수도 이용한다. 미코노스에 사람이 정착한 것은 BC 11세기경으로 이오니아인들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프텔리아 해변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의 카레스(Kares)족의 유물은 BC 3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코노스 섬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됐다. 제우스를 우두머리로 하는 올림포스 신들과 거인족 기간테스가 신들의 지배자 자리를 놓고 10년간이나 필사적인 전투를 벌였다. 제우스를 도운 헤라클레스가 거인족을 섬멸하기 위해 던진 바위 조각이 바로 이 섬이라고 전해진다. 이후 태양신 아폴론의 손자인 미콘스(Mykons)의 이름을 딴 섬이 됐다고 한다. 만토 광장, 좁은 골목길 걷다 만난 보니스 풍차 바닷가 옆, 마토이아니 거리에서 만토 광장으로 들어서면 만토 마브로게누스(1796~1848)의 동상이 있다. 그녀는 그리스 독립운동(1821~1832)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다. 그리스 동전(1988~2001)에도 얼굴이 새겨져 있는 그녀의 삶은 영화로도 제작됐다. 만토 광장을 비켜나면 아기자기한 부티크숍, 레스토랑, 호텔, 작은 박물관 등이 있는 좁은 골목이 나온다. 여름철, 화사한 부겐빌레아꽃이 피어나면 ‘흰 빛’의 가옥들은 차라리 눈이 부시다. 화분으로 치장한 발코니가 있는 앙증맞은 집들을 지나 언덕 위로 올라가면 보니스(Boni´s) 풍차가 보인다. 더 이상 돌지 않은 풍차이지만 미코노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좋은 자리다. 구항구에 떠 있는 큰 배와 부산하게 움직이는 작은 배들, 그리고 교회, 하얀 집들이 어우러진 섬의 모습은 너무 아름답다. 미코노스가 산토리니와 다른 점은 건물 색이다. 획일화를 싫어하는 그리스인들의 성격을 보여주듯 흰색에 밤색, 청색을 덧칠했다. 보니스 풍차를 기점으로 서쪽으로는 선사유적지가 있고 동쪽 끝으로는 다섯 개의 풍차(Kato Milli, Lena´s House)가 있다. 원래 16대였던 풍차는 이제 5대만 남아 미코노스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이 풍차들은 육지에서 가져오는 곡식을 빻는 방앗간 역할을 했다. 현재는 바람을 거절하는, 돌지 않은 풍차이지만 농업박물관으로 개조되어 관광객에게 무료 공개되고 있다. 풍차를 등지면 에게 해가 에둘러 섬을 감싸 안고 알록달록한 ‘리틀 베니스’ 건물들이 휘어진 해안선을 만난다. 그리스 정교회가 400개를 웃도는 섬 미코노스에는 그리스 정교회의 작은 교회가 유난히 많다. 무려 400여 개나 있어 미코노스 작은 시가지에서는 엄청난 교회와 맞닥뜨린다. 가장 유명한 곳이 파라포르티아니(Paraportiani) 교회다. ‘중세 성채의 뒷문’이 있던 곳이어서 뒷문을 뜻하는 ‘파라포르티’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지인들은 ‘성모 마리아 파라포르티아니’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이 교회는 독특하게도 5개의 예배당이 하나로 합쳐져 있다. 지상에서 보면 한 개의 건축물(1425년)이지만 지하에 4개의 예배당이 더 있다. 지상 건물이 가장 오래됐고 지하는 16~17세기에 걸쳐 만들어졌다. 비잔틴 스타일에 미코노스 섬과 서구 교회 양식이 조합돼 오묘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키클라데스 군도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건축 양식이다. 교회 앞쪽으로는 ‘리틀 베니스’로 불리는 골목이 이어진다. 때때로 펠리컨이 친구가 되기도 한다. 특히 이 섬은 낮보다는 밤 문화가 발달된 도시로 고요함보다는 생동감이 넘친다. 활동적인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섬이다. ◇ Travel Data 항공편 한국에서 그리스까지 가는 직항 노선은 없다. 프랑크푸르트, 파리, 로마, 이스탄불, 두바이 등을 경유해 아테네로 들어가야 한다. 많은 이들이 터키 여행과 함께 그리스를 선택한다. 한국에서 터키 이스탄불까지는 직항 노선이 있다. 터키 항공사를 이용하면 가격이 저렴하다. 11시간 40~50분 소요. 현지 교통 아테네 피레우스 항구에서 페리나 그리스 국내 항공을 이용하면 된다. 항공편으로는 약 35분 정도 소요. 초고속 페리는 3시간, 완행은 6시간 정도 소요된다. 파로스, 산토리니, 크레타, 테살로니키 등에서도 페리가 연결된다(배편 인터넷 예약 사이트는 hellenicseaways.gr). 주말, 연휴 때는 가격이 두 배로 오른다. 표를 직접 구하기 어려울 때 항구 주변의 여행사를 통하면 알아서 척척 저렴한 가격의 표를 만들어준다. 현지 정보 올드 타운은 걸어 다니고, 그 외 델로스 섬은 투어 상품을 이용하면 된다. 파라다이스 해변 등은 올드 타운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 피크 시즌에는 숙박 가격이 매우 비싸다. 시즌을 피해서 가는 것이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호텔보다는 가정집을 빌려주는 아파트를 이용하면 저렴하다. 그리스의 일반 식당으로 알려진 타베르나(taverna)가 많고 문어, 새우 등 해산물 요리를 즐길 수 있다. 화덕에 굽는 숨은 빵집(Gioras Wood Medieval Mykonian Bakery)이나 피아노 바인 몽파르나스도 기억해두자. 기타 정보 그리스 경기가 불안하다고 대대적인 보도가 나왔지만 실제로 여행을 할 때는 체감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매우 밝고 친절하다. 통화는 ‘유로’이고 물가는 싼 편이다. 시니어 여행 포인트 미코노스를 기점으로 델로스, 시로스, 파로스, 낙소스, 산토리니 등 주변 섬 여행을 해봄직하다. 섬 여행이 지루하다면 아테네로 나와 그리스 내륙 여행을 즐기면 된다. 메테오라, 테살로니키, 델피, 칼라마타 등 그리스는 한 달 이상 머물러도 충분히 즐길 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다.
- 2017-02-28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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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대폰 없는 세상’에서 살아본 하루
- 스마트폰 알람소리를 듣고도 이불속에서 꼼지락 거리며 늑장을 부리고 있다. 깊은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다가 새벽잠이 들 때면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방바닥에 접착제라도 발라놓은 것처럼 깊은 잠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니 알람소리가 달가울 리가 없다. 그러나 통근버스를 놓치는 날이면 생으로 고생할 것을 생각하면 무턱대고 늑장을 부릴 수도 없으니 주섬주섬 이불을 정리하고 거실로 나온다. 지금부터가 출근전쟁이다. 작년 9월부터 집에서 좀 떨어진 고향에 취직이 돼 은퇴 후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처음에는 임시로 친구네 집에 방 한 칸을 빌려 출, 퇴근하기 시작하다가 눈치도 보이고 여의치 않아 조금 떨어진 곳에 원룸을 얻어 따로 나왔다. 물론 서울집에는 주말에 올라가니 늘그막에 팔자에도 없는 주말부부가 됐다. 거실로 나와 일단 TV를 켜고 아침뉴스를 보면서 몸은 이미 샤워실로 향하고 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어제 먹던 찌개를 덥히고 프라이팬에 계란을 깨 올려놓은 다음, 냉장고에서 몇 가지 되지도 않는 밑반찬으로 상을 차리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머리를 말리고 속옷을 갈아입으면서 출근복장으로 변신하기 시작한다. 어쨌거나 밥 한 숟가락을 먹고는 지난주에 아내가 챙겨준 녹용보약까지 살짝 데워 쭉 들이킨다. 이 시간만큼은 참으로 바쁘게 설쳐댄다. 그렇지 않으면 통근버스를 놓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스마트폰 배터리를 바꾸어 끼우고 설거지를 시작한다. 설거지가 끝나면 문을 대충 열어놓고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한다. 나이 탓인지 아니면 계절 탓인지 요즘 들어 부쩍 머리카락이 빠져 바닥에 나뒹구는데, 그냥 출근하기가 내키지 않아 아침마다 청소기를 돌리곤 한다. 청소가 끝나고 시간을 보니 통근버스 탑승 5분전이다. 허둥대는 마음으로 보일러와 렌지를 확인점검하고 전등을 모두 끈 다음 문단속까지 하고 황급히 점퍼를 걸치고 뛰어나왔다. 아! 5분, 최소한 10분전까지는 집에서 출발해야 여유 있게 정류장까지 갈 수 있는데, 5분이라?…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고 드디어 정류장까지 숨이 턱에 차도록 뛰기 시작했다. 달리는 중에 휴대폰을 깜박 집에 두고 나온 것을 알았지만 되돌아가기에는 이미 시간이 부족했다. “에라, 오늘 휴대폰 없는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자” 스스로 위안을 하면서 통근버스에 올라탔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하루 종일 휴대폰 없이 산다고 생각하니 심심하고 답답해서 어쩔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한편으로는 “언제부터 휴대폰에 의지했다더냐. 예전에는 흎대폰 없이도 잘살았는데 뭐! 참고 견디어 봐야지” 사실 요즘 사람들은 너무나도 휴대폰에 빠져 살고 있으니 어찌 보면 중독 수준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요즘처럼 바쁘게 돌아가는 정보화 시대에 정보와 지식의 산실인 휴대폰은 현대인의 필수품일 수밖에 없다. 그 어떤 궁금증도 똑똑한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대부분 해소 할 수 있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서로 통할 수 있으니 좋다. SNS의 발달로 인해 언제든지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으며 이제는 외국에 나가 있는 자녀들과도 바로 이웃한 것처럼 대화를 할 수 있으니 예전의 손 편지나 쪽지편지는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요즘의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시니어들까지도 눈을 뜨고 있는 이상 휴대폰을 습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세상이 되었으니 어찌 보면 상대방에 대한 무관심을 부채질하여 삭막하기 그지없는 세상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문명의 이기는 어디까지가 그 한계일까? 어쨌거나 휴대폰 없는 하루를 살겠노라고 단단히 벼르고 별렀건만 회사의 업무 중에도 여전히 머릿속은 궁금증으로 가득 찼다. 혹시 급한 전화는 오지 않았을까? 미국에 있는 아이들에게서 카카오톡이 오지는 않았는지? 회사의 누군가 커피 같이 마시자고 연락은 오지 않았는지? 생각할수록 휴대폰 없는 세상은 답답한 것은 물론이고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오전을 잘 넘기고 점심식사가 끝난 후, 잠시 휴식시간에도 허전하고 재미없기는 마찬가지이니 이 나이에 휴대폰에 중독이라도 됐단 말인가? 그래도 노력하니 참을 만 해졌다. 습관은 어느새 중독으로 진화해 가는 요즘 세태에 휴대폰 없이 하루를 견디어냈다. 이제 가끔은 휴대폰 없는 하루를 만들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해 보지만 퇴근시간이 가까워오자 어느새 마음은 휴대폰을 놓고 나온 집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 2017-02-22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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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관 답사기] 김수영 문학관
- 도시 숲을 헤치고 빠른 속도로 버스가 달린다. 희미하게 햇살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짙은 갈색 나무 끝이 파란 하늘 배경으로 흔들흔들, 구름의 속도로 움직인다. 작은 버스정류장에 내려 차갑고 신선한 공기와 마주하며 이정표를 따라 걷는다. 곧 다다른 곳은 김수영 문학관. 문체의 자유를 넘어 진정한 자유세계를 위해 끊임없이 저항하고 아파했던 순수시인 김수영의 세계가 구름이 가는 속도만큼 잔잔히 흐른다. 북한산 신선한 공기가 김수영과 어우러지다 중·고등학교 시절 김수영에 대해 그저 ‘한국문학의 대표적 자유시인’ 정도로만 밑줄을 치고 그대로 외운 기억이 있다. 시간이 흘러 다시금 김수영의 글을 읽어보니 자유라는 표현에 한계가 있음을 새삼 느낀다. 세련된 문장도 문장이지만 소재의 다양성과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우울한 시대를 희망차게 살아보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고나 할까? ‘진보’라는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갔을까 하는 궁금증마저 든다. 그런 김수영을 기리는 문학관이 북한산 둘레길이 이어지는 도봉구 한적한 길가에 자리하고 있다. 시를 쓰며 살았던 그의 본가와 묘, 시비 등이 있는 도봉구에 2013년 11월 김수영 문학관이 문을 연 것이다. 도봉구에서 운영하는 김수영 문학관은 개관 이후 한 달에 1500명, 연간 1만8000명이 다녀갈 정도로 도봉구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문화시설이 없던 동네에 사람들이 찾아들고 활력이 넘치는 곳을 만든 이가 시인 김수영이다. 김수영 문학관은 5층 건물에 1층과 2층이 전시관으로 꾸며졌다. 제1전시실(1층)은 김수영 연보를 시작으로 한국전쟁, 4·19혁명, 5·16 군사정변 등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경험하며 써낸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김수영의 삶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상영물을 관람할 수 있다. 또한 시를 낭독하고 녹음할 수 있는 작은 공간도 있다. 이외에 관람객이 참여해 만드는 시작 코너와 김수영에게 편지를 쓰는 공간으로 전시실을 알차게 구성했다. 무엇보다 김수영의 시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꾸며놓은 것이 이곳의 매력이다. 원문 전시와 함께 활자화시킨 시를 서랍장 형식으로 만들어놓았다. 원문을 본 뒤 서랍을 열면 희미하게 보이던 원문의 모든 글귀를 쉽게 읽을 수 있다. 제2전시실은 김수영의 산문과 번역서, 일상 유물 등이 전시돼 있다. 어느 한 집안의 벽면처럼 김수영의 어릴 적 모습에서부터 가족들과 찍은 사진 등 소소한 기록들이 펼쳐져 있다. 김수영의 서재도 이곳에 옮겨놓았다. 전시장에 소개된 글은 김수영이 서재에서 어떤 모습으로 생활했을지를 짐작하게 한다. ‘한 편의 시나 산문이 완성되면 김수영 시인은 항상 아내 김현경을 찾았다. 그러면 집안 살림을 하든 다른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하던 일손을 멈추고 달려가야만 했다고 한다. 서재에 들어서면 김수영 시인은 빽빽하게 쓴 시의 초고를 건넸고, 그 시를 정리해서 원고지에 깨끗하게 정서하는 것이 김현경의 못이었다고 한다. 김수영 시인은 시를 쓰는 작업을 마치면 ‘산고(産苦)’를 겪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서재 오른쪽으로는 김수영이 살아생전 남긴 번역서 등을 전시해놓았다. 왼쪽으로는 시인의 서적을 열람할 수 있는 공간으로 아늑함을 더했다. 이외에도 3층은 구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작은 도서관과 아동열람실, 4층에 대강당, 5층은 휴게 공간이다. 김수영 유족이 함께하는 ‘김수영 문학관’ 김수영 문학관은 도봉구에서 직접 관리를 하지만 유족들의 보살핌과 사랑으로 운영되고 있다. 문학관에서 일하는 김은씨는 김수영 시인의 조카다. 수학선생으로 교편을 잡고 있다가 문학관의 명예관장이자 고모인 김수명(83)씨의 부름을 받고 문학관에 들어왔다. 김수명 명예관장은 김수영의 다섯째 동생이다. 문학관에 전시된 전시물 대부분을 기증했다. 40년 동안 두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도 김수영의 모든 육필원고 등을 싸들고 다닐 정도로 오빠와 작품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 마침 취재를 갔던 날 김수명 명예관장을 만날 수 있었다. 여든셋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찬 목소리에 에너지가 넘쳤다. 그녀는 “김수영을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면서 특히 “아이들에게 자극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한 김수영 시인의 시 세계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날씨가 풀려가고 봄의 기운이 느껴지는 어느 날 문득 김수영 문학관을 찾아가보자. 자유 그 이상의 세상을 꿈꾸던 천상의 자유시인 김수영이 문학관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관람 정보 휴관 매주 월요일, 설날 및 추석 당일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5시 40분 관람료 무료 주소 서울특별시 도봉구 해등로 32길 80 TEL 02-2091-5673
- 2017-02-08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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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아이다>
- 매서운 한파가 며칠 지속되고 있다. 이렇게 차가운 날에 뜨거운 사랑 이야기 뮤지컬 한 편을 관람했다. 제목 ‘아이다‘는 이집트의 이웃 나라인 누비아 왕국의 공주 이름이다. ‘아이다’를 알긴 했지만, 그놈의 사랑이 뭐라고 가슴 아프게 이렇게 목숨까지 거는 사랑 이야기인 줄은 몰랐다. ‘아이다’는 우리나라에서 2005년에 초연되었고 2012년까지 총 574회의 공연을 한 대표적 뮤지컬 작품으로 4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려졌다. 팝의 거장 앨튼 존과 음악의 전설 팀 라이스가 함께 완벽한 음악을 만들었고 고대 이집트가 무대이므로 의상이나 장신구가 매우 화려해서 듣고 보는 즐거움이 컸다. 이번 공연의 무대는 샤롯데 씨어터로 지난해 보았던 여러 대작 무대보다는 좀 작은 규모여서 뮤지컬이 어떻게 표현될지 관심이 갔는데 900개의 고정 조명과 90대가 넘는 무빙라이트가 섬세하고 아름다운 빛을 나타내었고 무대와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800여 벌의 의상과 머리 장식 등이 어우러져 매우 환상적인 무대를 보여주었다. 벽화에서나 봄 직한 고대 이집트를 표현한 안무도 강인함과 섹시함, 처절함과 비장함을 역동적으로 표현해 춤의 마력에 빠져들게 했고 웅장한 음악은 가슴 속에 한동안 남았다. 이 작품은 무대, 의상, 조명, 안무 등 모든 면에서 현대적이면서도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던 해 최고의 뮤지컬에 주어진다는 토니상 음악상과 그래미상 베스트 뮤지컬 앨범상 수상의 영예를 안아서 작품의 훌륭함이 증명되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운명 같은 애절한 사랑 때문에 울고 웃는다. 뮤지컬 ‘아이다’는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었던 나일 강 변에서 시작된 전쟁 속에서 피어난 사랑 이야기다. 이집트의 장군 ‘라다메스’는 승전보를 울리며 귀국 항해하던 중 부하들이 잡아 온 누비아 포로들 가운데 끊임없이 반항하는 여인 ‘아이다’에게 관심을 두게 된다. 노예가 될 운명의 포로 사이에서 고귀하고 용감한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라다메스’는 이집트에 돌아와 누비아 사람인 부하 ‘메렙’에게 ‘아이다’를 자신의 약혼녀인 이집트 공주 ‘암네리스’의 하녀로 보낼 것을 명령한다. ‘메렙’은 ‘아이다’가 누비아의 공주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지만, ‘아이다’는 자신의 신분을 감춰 달라고 부탁한다. ‘라다메스’ 장군은 9년째 약혼상태인 이집트 공주 ‘암네리스’가 있음에도 자꾸만 노예 ‘아이다’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이다’ 또한 끌려온 백성을 구해야 하는 신분임에도 포로가 되어 적국의 장군을 사랑하게 된 자신의 처지가 한없이 괴롭기만 하다. 한편 상큼 발랄한 이집트 공주 ‘엠네리스’는 ‘라다메스’의 사랑을 갈구하며 ‘아이다’에게 속을 털어놓는 사이가 된다. 어느 날 누비아의 왕이 잡혀 왔다. 감옥에서 만난 아버지와 ‘아이다’는 누비아 백성을 이끌고 탈출해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하는데 누비아 왕과 누비아 포로들이 배를 타고 출발하려는 때 ‘아이다’는 ‘라다메스’를 보기 위해 동행하지 못하게 된다. 배만 타면 고향으로 갈 수 있는데 그놈의 사랑이 뭐길래 ‘아이다’는 이집트에 남아 ‘라다메스’와 만난다. ‘라다메스’를 사랑한 ‘엠네리스’는 배신감에 치를 떨고 그들을 잡아들인다. 병중인 이집트 왕 파라오는 그 둘을 죽이라고 하지만 ‘엠네리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신이 여왕이 될 것을 선포하고 ‘라다메스’와 ‘아이다’를 한 공간에 넣어 매장하는 벌을 내린다. 큰 죄를 지었으니 살아날 길이 없는 그들에게 함께 죽을 수 있는 은혜를 베푼 것이다. 그 후 ‘엠네리스’는 전쟁을 멈추고 평화롭게 나라를 잘 이끄는 현명한 여왕이 되었다고 한다. 뮤지컬의 처음과 끝나는 부분에서 현대의 이집트 박물관이 나온다. 고대의 이집트 문화와 유물이 전시되는데 한 전시물 앞에서 만난 두 사람이 환생한 ‘아이다’와 ‘라다메스’라는 설정이 가슴 찡하고 전생에서의 인연을 잊어 서로 알아보지 못하니 애틋하기만 하다.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이 뮤지컬은 ‘아이다’ 보다는 ‘엠네리스’가 더 큰 비중을 가진 것 같다. 그만큼 사랑스러운 공주의 역할을 잘해 낸 가수 아이비에게 환호를 보낸다. ‘엠네리스’는 ‘라다메스’와 결혼해 그를 이집트 왕으로 만들려 했다. 사랑에 배신당했지만, 그 둘을 같이 죽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장면에서 한 왕국을 이끌 수 있는 여왕으로 큰 그릇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사랑 때문에 목숨까지 건 한 남자와 적국의 남자를 사랑한 죄를 진 공주와의 애절한 이야기 ‘아이다’가 가슴에 다가왔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렇게 추운 겨울날 가슴 저미는 사랑에 애틋함을 느낄 수 있는 시니어가 되어보면 어떨까? 한 번 권하고 싶다.
- 2017-02-03 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