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이지만 거두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권대욱(65) 아코르 앰배서더 호텔 매니지먼트 사장의 말이다. 31년을 최고경영자로 살아온 인물의 첫 멘트로는 의외다. 선입관 없이 듣는다면 달관한 성직자 내지 철학자의 말 같다. 인터뷰 장소인 도심 복판의 강남 특급호텔이 갑자기 호젓한 사찰로 변해 수도승과 선문답을 나누는 느낌이다. 탈속 버전(?)에 맞춰 묘비명 질문으로 그와의 인터뷰를 진행해봤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태어나자 마자 1년 만에 아버지를 여읨 △삯바느질하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외아들로 어렵게 유·청소년기 보냄 △지망 중학교 입시 실패 △IMF 때 47세의 나이로 해직 △창업에 도전했다가 실패, 이후 산막에 칩거해 세상과 격리생활 2년.
반면에 다음의 이력을 보라.
△35세에 한보건설 사장이 된 후 3개 건설사 사장 역임 △현직 특급호텔 사장 △교수 △합창단 단장 △쓰기, 말하기, 노래하기 등이 프로 수준 △주말마다 별장에서 전원생활 향유.
두 삶의 이력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위의 삶에서 짙은 불운의 그늘이 느껴진다면 아래의 삶에선 행운, 그것도 보통이란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억세게 좋은 트리플 운이 느껴지지 않는가. 단순히 성공도, 행복만도 아닌 균형적 삶으로 말이다.
알고 보면 동일 인물이다. 바로 권대욱(65) 아코르 앰배서더 호텔 매니지먼트 사장의 이야기다. 아코르 앰배서더 호텔 메니지먼트(주)는 국내의 정상급 호텔인 앰배서더와 세계적인 호텔체인 아코르가 공동 출자한 호텔 운영 전문 기업이다. 권 사장은 인생의 성공과 실패, 행과 불행을 카르마로 풀어 이야기했다.
카르마란 중생이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을 말하며 혹은 전생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받는 응보(應報)를 가리킨다. 그는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이지만 거두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며 “운이나 불운이나 결국은 업보이기 때문에 늘 현재의 행실을 갈고닦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묘비명에 꼭 한 줄 적히길 바라는 문장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한 단어로 이야기하면 명예입니다. 돈, 명성보다 중요한 것이 명예라고 생각합니다. 명예를 소중히 여긴 사람으로 기록되고 싶습니다. 언제든,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당당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당당하게 살고 싶어도 세상이 그냥 두지 않는 경우는 없었습니까?
“물론 나도 (유혹에) 흔들립니다. 인생의 매순간은 유혹이니까요. 누구나 흔들리지만 깨어 있고자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공자는 ‘일흔이 되고서야 비로소 내 마음대로 해도 세상의 규율에 얽매임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공자도 이럴진대 보통사람이 어떻겠습니까. 흔들릴 때마다 내게 스스로 묻는 세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선의를 갖고 있는가. 둘째, 의로움과 정직함이 살아 있는가. 셋째, 내 자식이나 후배에게 떳떳한 역사를 쓰고 있는가입니다. ‘호호·당당·담담(웃음 넘치고 당당한 삶을 살아야만 담담해질 수 있다)을 살펴보는 세 가지 자성 질문이 나를 잡아주는 마음의 기둥입니다.”
중간에 부침이 있었지만 31년째 CEO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또 65세인 지금까지도 현역이십니다.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인생 선배로서 청춘들에게 전하는 조직생활 성공 메시지를 담은 책 를 최근 출간했다.)
“예전에 이런 질문을 받으면 버벅거렸습니다.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직장에 존경심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상사에 아부를 떨고 눈치 9단이 되어 설설 기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회사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 일과 동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일의 주인이 될 수 있고 당당해집니다. 사람으로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유 아닙니까. 회사를 사랑하고 일을 사랑해야 내가 삶의 주인이 되고 당당해져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당당해야 자존이 살고, 자존이 살아야 자유가 삽니다.”
주인의식을 갖고 당당하게 살고 싶은데, 조직이나 상사가 ‘주인을 의식하게’ 해 고민하는 젊은이가 많습니다. 멘토로서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신지요.
“정 힘들면 최면을 걸어서라도 내 일을 사랑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하하). 조직에서 80%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데 조직생활이 불행하면 인생이 불행해집니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상사가 있다면 ‘내가 왜 너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가’라는 피해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먼저 노력하라고 말합니다. 지금의 고통은 후일의 영광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신념과 내공이 쌓이고 진정한 자존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권 사장은 지금도 새벽에 출근할 때 회사에 경례를 하곤 한다. 사람, 상사에 대한 경례가 아니라. 회사의 가치와 비전 그리고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새벽바람 맞으며 달려오는 동료들의 열정과 마음을 향해 경의를 표하는 경례다.
그의 말을 들으며 얼마 전 들었던 ‘너가 회사다’란 말이 생각났다. 상사, 동료, 직원, 조직문화를 탓하지만 우리 모두가 누군가에겐 회사가 아니겠는가.
승승가도를 달리다 법정관리에 들어가 47세에 극동건설 사장을 그만두셨습니다. 그리고 창업을 하셨다가 바로 실패하셨는데요.
“세상에서 사람들로부터 잊혀진다는 것은 생각 이상의 큰 두려움입니다. 오죽하면 공자도 ‘자기를 몰라줘도 화를 내지 않으면 군자’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세상으로부터의 외면, 망각 그런 게 두려워 창업을 서둘렀지요. ‘건설의 포털, 민간건설사업의 조달청 역할을 하는 아이템이었는데요. 전화 몇 통 걸어 이틀 만에 12억원을 모았다고 기뻐한 것도 잠시였지요.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사업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부족했고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문 경영인과 창업은 완전 다른 차원이더군요. 내 돈도 아니고 지인들의 피 같은 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하루하루 보는 게 피가 마르는 고문이었습니다.”
그 후 산막에 들어가 2년간 은거생활을 하셨더군요.
“중년 백수, 내 인생에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지요. 처절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산막에 기거하는 생활, 힘들었지만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새로운 것들, 깨닫지 못한 삶의 중요한 요소를 생각할 숙성의 시간이 됐다고나 할까요. 돌이켜보니 더 올라갔다고 더 소신이 있고, 더 많이 가졌다고 더 여유로워진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손에 쥔 것을 잃을까봐, 자리를 뺏길까봐 더 소신이 없어지고 눈치를 더 많이 보게 됩니다. 막상 산에서 살아보니 사람이 하루 동안 먹는 게 별 거 없고 돈도 그리 많이 필요 없더군요. 과일 몇 알 가지고도 버틸 수 있고요. 가진 것을 놓지 않기 위해, 비굴하지 말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지면’ 사라지겠구나, 살아지지 말고, 주도적으로 살아야겠다, 소명의식을 갖고 내 삶을 살아야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은 기간이었습니다.”
지금도 주말엔 산막에 가서 생활하신다고요. 중년의 많은 사람이 ‘산막의 전원생활’을 동경합니다.
“(웃으며)겉만 봐선 안 됩니다. 사람들은 산막의 여유로움이라는 좋은 면만 바라봅니다. 그 뒤의 땀과 수고를 봐야 진정으로 진정한 전원생활을 즐길 수 있습니다. 가령 원두막에서 한가로운 독서를 하기 위해선 그 뒤에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누가 흙 범벅의 손 되어 씨 뿌리고 잡초 뽑고 거름 줄 것인가. 개 먹이는 누가 주고 진드기 잡고, 청소하고, 닭똥 냄새 맡으며 누가 거름 만들 것인가. 낭만으로만 생각할 거면 차라리 콘도나 펜션으로 놀러가라는 말을 해주곤 합니다. 인생도 그렇지만 산막, 전원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 총량의 법칙이 작용합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습니다. 행해야 복이 옵니다. 행하지 않고 낙(즐거움)은 없습니다.”
권 사장은 “산막은 야인 시절, 권토중래의 재기 의지를 다짐하는 보금자리였지만 지금은 새로운 힘과 아이디어 충전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며 “세상이 나를 속이고 버릴지라도 언제든 돌아갈 보루가 있다는 점에서 든든한 안식처가 되고 마음의 힘이 된다”고 말했다. “산막을 지은 게 내 인생 최고로 잘한 일로 꼽는다”는 말에 자부심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권 사장님 하면 청춘합창단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시 오디션 장면, 저도 TV로 봤는데요.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온 삶이 아니었다”라는 말에 공감한 분이 많았습니다. 청춘합창단 이후 삶이 어떻게 달라지셨습니까?
“하하, 바람 빠진 풍선에 공기가 빵빵하게 들어갔다고나 할까요. 처음 공개오디션 과정에 응한 것 자체가 큰 도전이고 용기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참 잘한 결정이었습니다. 더 부지런해지고 더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생활, 흐릿한 미래에 활력이 더해지고 꿈이 보다 더 또렷해졌습니다. 유엔 무대에 서겠다는 ‘가당찮은’ 꿈이 실제로 이뤄졌고 올해는 오스트리아 그리츠 음악제에 초대받아 해외 무대에도 진출합니다. 평균 연령 64세의 ‘청춘 또래들의 합창’을 통해 소통과 화합을 이루고 세계 무대에 전파하겠다는 꿈을 이루고 싶습니다. 언제까지 어디에서 어떻게 이룰 것인지는 다음 문제입니다. 꿈이 있는 한 외롭지 않고, 과정이 아름다우면 인생도 아름다운 것 아니겠습니까.”
SNS 활동도 활발하신데요. 곡우라 칭하시는 사모님과 부부지간 금슬이 알콩달콩 보기가 좋습니다.
“사실은 제가 철든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오십 넘어 집사람의 고마움을 알았어요. 알고 보면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라 이심이체예요. 당연히 나와 같으리라고 짐작해 내 고집을 피우고 우기지 말고, 나랑 다르다는 것을 알고 물어보고 배려해야 합니다. ‘따로 또 같이’라고나 할까요. 함께할 수 있는 일, 각자 할 일을 구분해 함께 혹은 각자 하고 즐기는 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입니다.”
쓰(쓰기)-말(말하기)-노(노래하기)에 능하십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특별한 재능이 없는 평범한 중년, 노년들이 삶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만큼 작은 것에서도 행복을 느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다섯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첫째, 죽을 때까지 명함을 파야 한다. 둘째, 최소한의 경제 독립. 이미 갖고 있다면 죽을 때까지 놓지 말아야 한다. 셋째, 지속적으로 공부해야 한다. 넷째, 독립심을 가져야 한다. 단적으로 반찬 만들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기본적인 일에서부터 은행일, 세금 신고하고 납부하는 일 등 일상과 관련한일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혼자 놀기뿐 아니라 혼자 먹기에도 익숙해져야 합니다. 다섯째, 확실한 취미를 가져야 한다. 하다못해 숨쉬기 운동이라도 취미로 가져야 무료하지 않습니다. 시간 알차게 보내기, 몰입할 수 있는 취미를 가지는 것이 요체라고 봅니다. 앞으로 이삼십 년을 무료하게 살지 않으려면 취미든, 공부든, 일이든 새로 시작하려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꿈은 아름답지만 정작 그것을 이루어가는 길은 늘 험하고도 멀다. 하지만 도전해볼 만한 일이다.” ‘꿈꾸는 청년’ 권대욱 사장의 마지막 멘트였다.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한 편의 인생론, 행복론 장편 강의를 들은 것처럼 충만한 기분이 들었다. 인생의 진정한 달관은 포기가 아니라 진격의 용기가 아닐까. 밖으로 나오니 꽃샘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그 바람을 헤치고 봄꽃들이 얼굴을 군데군데 내밀고 있었다. 문득 영국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율리시즈’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여행을 그만두고 쉴 수가 없다. / 나는 내 삶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들어 마시겠다. 나는 언제나 / 기쁨도 고통도 최대한 누리고 겪었다. (중략) 한결같이 변함없는 영웅적 기개 / 세월과 운명 때문에 약해졌지만, / 분투하고, 추구하고, 발견하고, 굴복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강하도다.”
인생의 행복은 남보다 높이,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 있지 않다. 분투하고, 추구하고, 발견하고 굴복하지 않는 의지로 지치지 않고 도전하는 데 있다. 당신은 인생을 진격시키는 힘을 어디서 어떻게 구할 것인가.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어느 날 우연히 우리 아파트 북 카페에서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한눈에 크게 공감하는 이유는 내 손으로 직접 집을 짓는 일이었다. 에서 비록 일주일이라는 단어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조용한 시골에서 흙집을 짓고 노년을 맞이하고 싶은 것은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기 때문이었다.
필자도 지난 시절, 시계만 들여다보며 정신없이 살아왔다. 앞만 보며 쉴 새 없이 달려왔기에 이제쯤은 쉬엄쉬엄 자연 속에서 호흡하며 살아가고 싶었다. 그야말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 번뇌로 가득하고, 고고한 척하며 창백한 지식인만으로 살아가는 것은 풍요 속 빈곤 생활이었다.
저자는 오스트리아에서 어렵사리 철학박사 학위를 따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안정되게 살아가던 중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자기모순, 자기 분열이라는 삶의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고도 한다. 결국 자신에 대한 박사학위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자신의 호칭을 바꾸며 홀로 다시 서기에 도전을 한다.
종이 한 장만으로 입증하는 박사 타이틀은 진정한 의미의 박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저자는 교수라는 직분으로 사는 내내, 이론과 실천, 이상과 현실이 분리되는 허탈한 삶만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행복을 꿈꾸며 사는 진정한 의미의 살아있는 행복한 삶은 시골로 내려가 자아를 실현하며 이론을 실천에 옮기는 길이었다.
그는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행복한 삶이란? 삶의 세 가지 영역,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영혼이 기뻐하는 평화로운 상태를 말한다.’ 진실로 기쁨이 넘치는 삶이란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로 사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몸이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이고, 영혼이 그에 따라 조화롭게 움직이는 것이다. 행복을 꿈꾸는 지은이의 내면 소리가 필자에게도 감동으로 다가왔다.
사람은 살다 보면 자기 분열의 고통으로 괴로울 때가 많이 찾아온다. 정신이 꿈틀대며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흙집을 지을 때면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단호하고 자신 있게 강조한다.
오로지 흙집을 지을 때만이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영혼이 기뻐하며 춤을 춘다고 흥미롭게 서술해간다. 더구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조적 성취감으로, 손수 집을 짓고 나면 그 대견스러움으로 자신에 대한 신뢰감도 용솟음을 친다고 했다.
또한, 흙집을 한 채 짓는 것은 자연의 훌륭한 의사를 주치의로 모시는 것과 같으니, 그 집에 사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 몸에 병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어찌 신비로운 일이 아닐까 싶다. 마침내 그는 흙집을 짓는 것이 마치 머리와 손발이 따로 노는 먹물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방주와도 같다고 대단한 극찬을 했다.
결국 ‘흙집 짓기는 일종의 자기 수행의 도량’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명언들이다.
저자는 육체노동을 거의 하지 않았고 영혼이 작동하지 않았던 지난날을 과감하게 접었다. 머리로만 살아왔던 기형적인 삶에서 기초를 튼튼히 다시 세우고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살아온 길을 정리하고 하루아침에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요동치는 갈등이 사라지고 평화가 깃들 수만 있다면 그리 못할 것도 없다. 진정한 행복을 꿈꾸며 그 관점에 따른 행동이라는 실천이 있을 때, 드디어 영혼이 함께하는 충만한 기쁨을 맛볼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은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대단한 용기와 집념이 참으로 부럽기도 했다.
이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꿈을 꾸며 살아간다. 사람에 따라 꿈도 달라지겠지만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하나 되어 조화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철학적 사고를 넘어 꼭 실천에 옮겨야만 하는 필수과목 행동학 같다는 묘한 생각도 들었다. 저자의 명쾌한 삶에 깊은 공감을 하며, 그것은 필자의 내면에서도 꿈틀대고 있는 분명 살아있는 삶이었다.
언젠가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꿈꾸며 두꺼운 책 한 권을 단숨에 읽어 내렸다. 어느 흙집 짓는 철학자 교수가 쏟아내는 명언들은 오랫동안 진한 여운을 남겨왔다. 그것들은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필자의 일상적 생활 속에 깊이 새겨져와, 바쁜 삶 속에 잊고 살았던 꿈들을 모락모락 피어나게 만들었다.
남편과 함께 또닥또닥 흙벽을 발라대고, 훨훨 타오르는 장작불을 지필 수 있는 벽난로를 떠올리며 그날이 오기를 꿈꾸어 본다.
우리는 덕, 인격, 도덕 등과 같은 익숙한 단어의 의미를 얼마나 알고 이해하고 있을까? 가끔 우리는 음덕, 공덕, 후덕과 같은 단어도 잘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 뜻은 무엇일까? 필자가 학문에 뜻을 두면서부터 터득한 한 가지 진리는 ‘어떤 학문을 하더라도 그 정의를 확실하게 알고 이해하지 못하면 처음부터 바른길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덕의 사전적 정의는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이다. 또는 도덕적, 윤리적 이상을 실현해나가는 인격적 능력이라는 좀 난해한 철학적 뜻으로도 풀이된다.
사실 필자 자신부터 평소 덕이 부족한 것 같아 덕이 무엇인지 궁금했고 좀 더 공부를 하고 싶었다.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는 어쩌면 소크라테스를 닮은 것도 같다. 그도 잘 알면 덕을 실행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덕에 대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덕이란 아레테(arete), 즉 우수하고 훌륭한 상태라고 정의하였다. 바람직한 삶이 잘 사는 것이요, 잘 산다는 것은 선한 것이라 이야기했던 그는 덕을 쌓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잘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덕에 대한 여러 가지 정의 중,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인 장자가 내린 정의가 재미있고 쉽게 설명되어 있어 덕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재주는 빨랫줄에 걸린 속옷과 같고
덕은 장롱 속에 넣어둔 속옷과 같다.
재주란 높은 산들바람만 스쳐도
대낮 하늘 밑에서 창피한 줄을 모르고
오가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한껏 나풀거린다.
그러나 장롱 속의 덕이란
남의 시선을 피하여 그것을 입는 사람에게
추위를 면하게 해주려고
항상 기다리고만 있을 뿐이다.
좋은 일을 했다 하여 생색을 내는 것은
무슨 꿍꿍이속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뭇사람들의 고마운 마음을 얻지 못한다.
덕이란 무엇인가?
고마운 마음을 얻게 하는 것이다.
덕은 마음을 가볍게 하고 입을 무겁게 하며
귀를 두텁게 하고 눈을 밝게 한다.
그리하여 뭇사람들로부터
참 고마운 마음을 얻게 한다.
그러나 덕이 마음속에서 나와 입을 통해 바람을 탈 때는
반나절 양지쪽 햇볕에 불과할 뿐이다.
살면서 가끔 우리는 현대식 영문으로 이해하면 더 쉽게 느껴질 때도 있는 것 같아 위 장자의 말씀 일부를 직접 영어로 번역해보았다.
One like underwear with laundry line is not virtue.
Virtue is placed in the wardrobe like underwear which
will be good for warming the body.
What is Virtue?
Virtue is the light shown in the deep mind without a saying.
Deepen the ear and brighten the eye.
Therefore, it gets a real gratitude from the people.
사실 필자는 조상의 음덕에 대하여 가끔 생각을 한다. 오늘날 우리 가정이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큰 문제없이 이렇게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다 ‘조상님의 음덕’ 때문이라는 생각이 가끔 들곤 한다. 즉 그분들이 생전에 사람들에게 많은 덕을 베풀면서 살았기에 그 공덕을 지금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고려의 대장군이셨던 ‘집자 평자’ 7대 조부는 몽고군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국가를 위해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셨으니 그 덕이야 말로 결코 작은 공덕이 아닐 것이다. 참 이상하다. 왜 그런 생각이 들까? 아마도 사람의 기는 4대까지 함께 느껴진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
자고로 대장부는 후덕(厚德)으로 처신하여 천박하지 않으며 내실(內實)을 높이 사서 부화에 미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덕이 있는 사람은 작위(作爲)를 버리고 무위(無爲)를 취한다. 과거 세종대왕은 통치자의 덕을 이렇게 말했다.
“임금이 덕이 없고 정치를 잘못하면 하늘이 재앙을 보내 경계시킨다고 하는데, 지금 가뭄이 극심하다. 대소 신료들은 제각기 위로 나의 잘못과 정령의 그릇된 것과 아래로 백성들의 좋고 나쁨을 거리낌 없이 직언하여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나의 생각에 부응되게 하라.”
그래서 세종대왕은 항상 덕정을 베풀어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그분의 이런 후덕한 정치는 이인 편의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라는 말을 생각나게 한다. 소크라테스도 덕과 지가 겸비한 사람이 지도자(철인)가 되어야 한다는 철인 정치를 주장했던 것과 서로 상통하는 것 같다.
반대로 덕이 부족하면 만사에 원망이 발생하게 된다. 그렇다면 덕이란 사람이 행동할 때 올바른 마음을 가져야 하고 바른 마음을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삶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이 되는 자연과 사회의 근본 질서를 도라 하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을 덕이라고 할 수 있다”는 어느 스님의 말이 기억난다. 도덕의 의미는 그런 뜻에서 우리 모두가 생각하고 실천하면서 살아야 하는 덕목인 것 같다.
필자도 이제 덕에 대하여 조금 이해를 하였으니 덕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덕을 실천하게 되어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더 많은 덕을 실천할 수 있을 것 같다. 덕 중에서 여자에 대한 지를 더하여 후덕한 남편이 되고 공덕을 쌓아 이웃의 삶에 빛을 주는 삶을 살 수 있다면 필자의 여생은 아주 더 행복해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생각하기에 따라 외도란 정도의 차원을 높여주는 디딤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인간은 정도를 걷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외도를 통해 확실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탄성을 넘어서는 외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르지 않은 길을 가다 보면 어느 순간 잘못된 길임을 깨닫게 되고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충동적으로 평소 해보지 않던 일을 해봄으로써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일들이 얼마나 내가 잘할 수 있고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인간이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 중 하나가 ‘외도’ 아닐까? 그것은 마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제목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처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 동경 같은 것이 항상 마음속에 내재돼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탄의 유혹에 빠진 이브와 아담처럼 삶의 곳곳에서 인간은 그런 유혹을 받으면서 사는 존재인 것 같다.
필자에게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있다. 인생관, 직업관 그리고 결혼관이다. 필자에게는 필자만의 그릿(Grit)이 있다. 그중에서 결혼관을 소개하면, 선택을 할 때 최대한 신중을 기하되 한 번 결혼하면 그 결혼에 대해 책임을 지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배우자에게 부족한 면이 있다면 좋게 만들어줘야 한다. 이러한 삶은 결코 쉽지 않지만 결혼할 때 대부분의 부부는 그렇게 사랑하고 노력하며 살 것을 약속한다. 이러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면 실존주의 철학자로 잘 알려진 사르트르처럼 계약결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결혼할 때 약속한 것들을 서로 이행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졸혼이나 이혼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이는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사랑과 용서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인간은 실수를 행하기 마련이고 신은 이를 용서한다”는 말이 있다. 한정된 지능을 지닌 인간이 무한한 변수가 작용하는 이 세상을 사는 과정에서 한 번쯤 실수나 외도는 있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존재하는 말이 아닐까? 그래서 성당에서는 고백성사를 통해 신부님이 신자들의 실수나 지은 죄까지도 용서를 해주는 것 같다. 물론 보속이라는 속죄의 과정이 필수적으로 따르기는 하지만. 따라서 배우자가 외도나 실수를 했을 때도 한 번쯤은 용서해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실수는 한 번으로 끝나야지 두 번 다시 반복돼서는 안 된다.
나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혼한 사람에 대해서는 좋지 않게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그만한 사정이 있어 어찌할 수 없이 선택한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대동소이한 삶을 살고 있기에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노력하면 문제는 극복이 된다고 본다.
우리는 정도와 원리원칙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외도를 했을 때도 한 번쯤은 정도를 걷기 위한 디딤돌로 이해하고 용서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필자의 아내는 필자가 너그러운 사람인 줄 아직 모르는 것 같다. 마치 단 한 번의 실수나 외도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볼 게 분명하다. 이제 필자의 아내가 이 글을 읽는다면 다소 그런 편견이 바뀔 수도 있을 것 같다. 여기서 한 번쯤의 외도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외도가 아닌 일상에서의 탈출, 보다 확실한 정도를 걷기 위한 한 번쯤의 일탈이라고 해두면 어떨까?
유명인들의 작은 생활습관이 그 사람의 업적보다 더 잘 알려지기도 한다. 철학자 칸트의 산책 습관도 그렇다. 칸트의 산책 시간으로 주변 사람들이 시간을 맞췄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칸트의 철학 이론이 거론되는 곳에서는 늘 함께 입에 올리는 이야기다.
필자가 앞뒤 가리지 않고 일만 했었던 시절이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피로해져야 강제적인 휴식을 하곤 했는데 그 휴식시간이 거의 정확했다. 일탈이라도 없으면 모든 정서가 석고화되겠다 싶어 어느 날 바람 따라 나들이를 한 곳이 맨해튼이다. 맨해튼 기차의 종착역인 펜실베이니아 역에서 내렸다. 기차역에서부터 무리를 지은 사람들을 보며 숨이 막혔다. 사람과 차들이 하도 많아 정물로 서 있는 높은 빌딩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순히 쉬고 싶어 한국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은 정장 차림의 한국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시끌벅적한 것도 서울 도심의 직장인들이 가득한 식당 풍경 그대로였다. 사람들이 바글대고 시끄러운데 피로감은 싹 가시고 편안함이 느껴졌다.
그랬지 한국에서도 이런 풍경 속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떠들곤 했지. 바로 그때 필자처럼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초로의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합석은 우리들의 의사가 아니고 주인의 부탁에서 이루어졌다. 6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인의 의미는 시간과 세속이 풍화시킨 성숙으로 다가왔다. 교육도 없이 수련이나 수양도 없이 지친 삶과 야박한 인심이 만들어낸 풍류객이었다.
“나는 1년에 한 번 이상 맨해튼에 온답니다. 여기 오면 꼭 이 식당에서 밥을 먹지요 칼국수와 김치를 먹고 싶어서가 아녜요. 사람들을 보고 싶어서예요. 한국 음식은 집에서 여기보다 더 훌륭하게 만들 수 있거든요.”
1950년대 후반, 미군과 결혼해서 루이지애나로 왔다는 그녀는 시골이라 사람이 적고 거리도 깔끔하고 움직임이 느린 공간에서 살아왔단다. 변함없이, 수십 년간 보아온 자연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이제는 지루하단다. 어느 날은 평화로움마저 슬프고 안정적인 날들도 시큰둥하고 특별한 문제가 없는 빤한 하루하루가 숨 막혀 맨해튼에 온단다. 맨해튼은 서울 같아서 가슴이 활짝 열려진단다. 지저분하고 홈리스가 있는 거리는 육이오사변 직후의 서울을 언 듯 생각나게 하고, 복작거림과 사람들의 지친 모습도 정감이 가고 메뚜기 뛰듯하는 경쟁은 동대문시장을 닮은 듯해 마치 고향에 온 기분이란다. 이제는 부모도 다 떠나버린 서울, 동생들이 어쩌다 미국에 오면 선물로 가져갈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단다.
“그렇게 발전해버린 그 땅이 내 고향이겠어요?”
자신의 희생으로 교육도 받았겠다, 부까지 이룬 동생들이 자신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도 않는 눈치란다. 맨해튼이 자본주의의 꽃이라지만 그녀에게는 살려고 바둥거리는 가난한 사람들만 보인단다. 좀 더 나은 삶을 살아보겠다고 불나방처럼 모여든 사람들, 이루었다 싶으면 또다시 물거품이 될 그들의 꿈이 보인단다.
그녀가 고향을 찾듯 맨해튼을 찾아오는 마음은 아마도 치유되지 않은 한 때문이리라.
내가 처음 미국을 방문한 것은 1961년이었다. 그 당시 미국의 교수들을 비롯한 지성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말 중의 하나는 ‘인생은 60부터’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나이가 되면 인생은 끝나는 때라고 흔히 말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지금은 인생의 전성기가 60부터라는 관념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즐기기 위해 산다는 목표를 세운다면, 인생은 40부터라는 생각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값있고 보람 있게 살기 원한다면 60부터라는 판단이 적절할 것 같다. 그리고 즐기기 위해 사는 사람보다는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사회적 의미도 창출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60은 100세 시대를 바라볼 때 늦은 나이가 아니라고 여겨진다.
60이 되면 인간적 성장과 성숙의 완숙기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믿을 수 있고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자신을 갖추는 연령이라고 생각한다. 공자의 자기평가와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리고 60부터 75세쯤까지는 노력만 한다면 누구나 정신 및 인간적으로 성장이 가능하다. 지식과 사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성 전반에 걸친 생산적이며 창의적인 노력과 사회 기여가 가능하다고 본다. 가능한 것만이 아니다. 100세 시대 인간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한다.
내가 76세 때의 일이다. 한 후배 교수가 회갑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내 친구가 “그 친구 철도 안 들었는데 회갑부터 된다”라며 웃었다. 자기도 그랬었다는 뜻이다. 비슷한 때였다. 내 나이를 물은 90대 초반의 선배 교수가 “좋은 나이로구먼…” 하며 부러워하던 얘기를 지금도 기억에 떠올리곤 한다. 60에서 75세쯤까지가 인생의 황금기였다는 사고는 누구나 잠재적으로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75세쯤까지 성장할 수 있다면 그 성장의 위상을 언제까지 연장할 수 있는가이다. 노력하는 사람은 85 내지 87세까지는 연장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의 성장을 포기하는 편이다. 40대라고 해도 공부와 일을 포기한 사람은 녹슨 기계와 같아서 사회적 기여를 못한다. 그러나 70대가 되어서도 사회적 관심을 갖고 노력하는 사람은 젊고 활기찬 생애를 이어갈 수 있다.
언제까지 연장될 수 있는가. 내 주변 친구들은 85세까지는 사회가 요청할 수 있을 정도로 봉사하며 도움을 주고 있었다. 가깝고 존경스러운 친구들 중 김수환 추기경, 김태길 교수, 안병욱 선생 모두가 그랬다. 90 가까이까지 일하기도 했다.
그런 점들을 감안해본다면 100세 시대의 후반기는 50대부터 시작하게 되고 50대가 되면 내가 80대가 되었을 때는 어떤 인생을 살게 되며 동료들과 사회는 나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를 스스로 묻고 대답을 얻어가는 삶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확실해야 한다. 나 자신이 교육계에 몸담고 있을 때를 회고하면서 스스로 후회스러운 반성을 해보는 때가 있다.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20대 젊은이들에게, ‘내가 50쯤 되었을 때는 어떤 모습으로 인생을 살고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을 반드시 찾아 지녀야 한다고 권고하지 못한 잘못이다.
20대에 문제의식을 갖고 50세를 맞이하는 사람은 대부분 보람과 성공의 기반을 갖출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 젊은이들은 인생의 낭비가 너무 심하다. 인생의 전반기를 굳건히 다지지 못한 사람은 후반기에 가서도 그 빈자리를 메우기 힘들어지는 법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50대에는 80대 후반기까지의 장래를 계획하고 바르게 정진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갖고 살아야 한다. 인생관의 가장 큰 과제는 삶의 목적을 설정하는 일이다. 가치관의 핵심이 되는 것은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해답을 지니고 사는 것이다.
그런 생각들을 정리하게 되면 80대가 채워질 때까지는 마음 놓고 자신 있게 인생의 마라톤에 뛰어들어도 좋다는 결론이 된다. 나는 80대가 되면서 이제는 쉬고 싶고 쉬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져보았다. 그 휴식의 1년은 일하고 공부하는 1년보다도 더 지치고 무의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시작해서 지금까지 17, 18년 동안 공부하고 일하는 것을 계속해보고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거나 객관적 평가를 원해서가 아니다. 나 자신의 삶의 의미와 풍요로움을 상실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런데 누군가가 90 고개를 넘긴 후에는 어떠했느냐고 물으면 객관적인 권고를 할 자신이 없다. 할 수 있는 대답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는 개인적 소감을 피력할 수 있으면 다행일 것 같다. 내 주변의 90대 사람들을 많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90대가 되면 자신의 신체적 건강을 뜻하는 대로 지탱할 수가 없다. 자연히 누군가에게 의존하게 된다. 부부 중의 한쪽은 떠나간다. 자녀들에게 의탁하는 것도 옛날과는 다르다. 여성들은 90대가 되어도 모성애의 대가라고 할까, 갈 곳이 있으나 남성들은 홀로 남는 것이 보통이다. 그 나이가 되면 친구들도 떠나간다. 그때 찾아드는 남성적 고독과 인간적 외로움을 극복하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지금 나에게 하는 가장 적절한 문안인사가 있다면 “사시는 것이 많이 힘드시지요?”라는 말이다. 90대 후반은 더욱 그렇다. 그러한 부담을 극복할 수 있어야 90대에도 보람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지금 누군가가 나에게 “그래도 아직 행복하세요?”라고 물으면 나는 숨기지 않고 “행복합니다”라고 대답하곤 한다. 내가 지니고 있는 짐은 무겁지만, 그래도 일할 수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나누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버거운 짐이지만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고생이라면 그 이상의 행복은 없겠기 때문이다.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임을 깨닫는 사람이 최선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교수
1920년생. 안병욱 교수(숭실대), 김태길 교수(서울대)와 함께 한국의 1세대 철학자로,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영원한 현역’이다. 현재도 활발한 저술 및 강연을 통해 우리 사회에 큰 울림과 귀감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 석학이다. 특히 100세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서 사랑과 행복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바탕으로 동시대인들에게 깊은 성찰과 깨달음,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전시(exhibition)
1) 프랑스 국립 오르세미술관 이삭줍기 전: 밀레의 꿈, 고흐의 열정
일정 3월 5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9세기 서양미술사를 빛낸 거장들의 명작 130여 점을 만날 기회다. 작품 보존을 위해 엄격하게 관리하는 고흐의 ‘정오의 휴식’은 오르세미술관 개관 이래 수십 년 동안 유럽 이외 지역으로 반출된 적이 없으나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대여를 허가했다. 낭만주의와 고전주의, 아카데미즘과 사실주의, 인상주의와 자연주의, 상징주의와 절충주의, 20세기 예술의 다양한 원천 등 5개의 테마로 나누어 각 주제를 중심으로 작품 간의 대비와 유기성, 예술사의 흐름까지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2) 닉 나이트 사진전: 거침없이, 아름답게
일정 3월 26일까지 장소 대림미술관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진작가로 손꼽히는 닉 나이트(Nick Knight)의 국내 첫 사진전이다. 사진과 디지털 그래픽 기술의 결합이 돋보이는 닉 나이트 특유의 작품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상 실험을 접목한 패션필름까지 폭넓게 마련돼 있다. 초상사진, 디자이너 모노그래프, 페인팅·폴리틱스, 정물화·케이트 등을 주제로 한 110여 점의 각양각색 작품을 한 공간에서 감상할 수 있다. 매주 일요일에 열리는 ‘선데이 라이브 앤 클래스(SUNDAY LIVE & CLASS)’ 등 유익한 전시 연계 교육 프로그램들도 살펴볼 만하다.
◇도서(book)
1) 인생의 발견(시어도어 젤딘 저·어크로스)
21세기의 예언자라 불리는 영국의 철학자 시어도어 젤딘이 유명 인물들의 전기와 철학적 탐색을 통해 발견한 28가지 질문을 담았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인간과 삶에 관해 끊임없이 성찰해온 저자의 성숙한 지혜와 혜안을 엿볼 수 있다.
2) 브릿마리 여기 있다(프레드릭 배크만 저·다산책방)
로 잘 알려진 베스트셀러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 소설이다. 59세 중년 남성 오베와 얼핏 비슷하면서도 다른 성향을 지닌 63세 중년 여성 브릿마리. 누군가의 그늘에서만 살아온 그녀가 삶의 위기를 통해 온전한 자신을 찾아나가는 여정을 그렸다.
◇영화(movie)
1) 뚜르: 내 생애 최고의 49일
희귀암에 걸린 26세 청년이 한국인 최초로 49일 만에 뚜르 드 프랑스 풀코스를 완주한 실화를 영화화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체육교사를 꿈꾸었을 정도로 건강했으나 어느 날 갑자기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절망스러운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 않던 그는 뚜르 드 프랑스 완주라는 꿈을 키운다. 3500km 레이스의 마지막 지점인 파리 개선문을 통과하며 꿈을 이룬 순간의 가슴 벅찬 감동이 영화의 포스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개봉 1월 12일 장르 다큐멘터리 감독 이윤혁 출연 임정하, 전일우, 박형준 등
2) 내 어깨 위 고양이, 밥
떠돌이 음악가와 고양이 한 마리가 우연히 만나면서 인생의 희망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제목처럼 주인공 제임스는 어깨에 고양이 밥을 올리고 거리 이곳저곳에서 기타를 치고 사람들과 정을 나누며 따뜻한 세상과 마주하게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두 주인공은 2007년에 만나 현재까지 뜨거운 우정을 나누고 있다. 데이비드 허슈펠더 음악 감독과 싱어송라이터 찰리 펑크 등 실력파 제작진이 대거 참여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개봉 1월 4일 장르 드라마 감독 로저 스포티스우드 출연 루크 트레더웨이, 루타 게드민타스 등
◇공연(stage)
1) 인간
프랑스의 천재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유일한 희곡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인류 마지막 생존자인 화장품 연구원 라울과 호랑이 조련사 사만타가 ‘인류는 이 우주에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재판을 벌이는 2인극이다.
일정 3월 5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연출 문삼화 출연 고명환, 오용, 박광현 등
2) 꽃의 비밀
네 명의 아줌마가 보험금을 타기 위해 각자의 남편으로 변장해 벌이는 사건들을 유쾌하게 그렸다. 장진 감독이 직접 쓰고 연출을 맡은 작품으로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코미디 장르의 연극이라는 점이 돋보인다.
일정 2월 5일까지 장소 대명문화공장 연출 장진 출연 배종옥, 소유진, 이청아 등
3)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중국 고전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를 각색한 작품이다. 원작의 비극성에 희극적 요소를 곁들여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2015년 이 작품의 무대에서 유명을 달리한 배우 고 임홍식의 공손저구 역은 중견 배우 정진각이 이어받았다.
일정 1월 18일~2월 12일 장소 명동예술극장 연출 고선웅 출연 장두이, 하성광, 정진각 등
4) 아이다(AIDA)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던 해 토니 상과 그래미상 등을 휩쓸었던 명작으로 한국에서는 2012년 이후 5년 만에 막이 오른다. 누비아의 공주 아이다와 이집트 파라오의 딸인 암네리스, 두 여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라다메스 장군의 사랑을 노래한다.
일정 3월 11일까지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키스 배튼, 박칼린 출연 윤공주, 아이비 등
오늘 전철을 타고 가면서 바로 옆의 승객이 책을 읽는 것을 보게 되었다. 제목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평소 행복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은지라 슬쩍 어깨 너머로 보았다. 그런데 그 분이 한 페이지를 30분 이상 정독을 하고 있어 나도 함께 읽을 수 있었다.
요약하면 이런 이야기였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찾기 위해 시골길을 걷다가 행복에 겨워 노래를 부르는 농부를 발견하여 물어보았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하고 묻자 농부는 “저는 항상 행복합니다.” 라고 대답을 하여 얼마나 행복한지 계속 묻게 되었는데 그 답변을 듣고 나서 그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결론을 지었다는 내용이었다.
농부는 한 때 가난하여 신발이 없어 불행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발이 없는 사람을 만나게 된 순간 자신은 아주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이웃에서 직장생활 하시는 분이 정리해고를 당해 실직하여 불행하게 지내는데 자신은 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덧 붙여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하여 누리고 있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늘 불행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로 스토리가 되어있었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이 생각났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목적을 가졌는데,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덕을 쌓아야 하는데 이성에 알맞은 덕스러운 활동을 통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덕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습관을 통해 몸에 배이도록 해야 한다. 또,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中庸)의 생활 자세를 강조하였다.
공자도 중용을 아는 자는 많아도 실천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위 이야기에 나오는 시골 농부는 이미 생활 속에서 중용의 의미를 터득했기에 항상 늘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필자도 아침에 일어나면 늘 행복함을 느끼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시골 농부처럼 필자도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대체적으로 만족하는 편이다. 왼쪽 다리로 걸을 때 골수염을 앓은 후 다 낳았으나 후유증으로 걸음걸이가 불편하지만 그래도 행복함을 느낀다. 아마 어쩌면 필자가 아프지 않고 정상적이었다면 더 행복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필자는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기에 행복을 느낄 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대학시절 윤리학 교수의 ‘취약점 보완의 원리’가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준 것 같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취약점이 있다. 그러나 그 취약점을 보완하는 방법을 찾는 다면 그 취약점이 장점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비록 걸음 거리가 좀 불편하지만 필자는 운전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면서 가끔 불편함을 더 편함으로 전환시키는 삶을 살고 있다. 만일 필자가 비행기를 운전한다면 이 지구상에 누구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 3대 행복론으로 유명한 러셀이나, 칼 힐티 그리고 알랭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필자는 삶속에서 나름대로 행복의 비결을 찾아가고 있다.
행복이란 부에서 찾을 수만도 없고 도덕적으로 선한 생활을 하고 건강하게 열심히 일하고 배우면서 그리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경제적으로 크게 부족함이 없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사는 습관을 기른다면 매일 같이 자신에게 찾아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이를 기억하기 쉽게 WHERES( Work, Health, Economy, Relation & Study)의 삶이라 정의해 본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바로 이를 실천하고 느끼면서 사는 그 농부와 같은 사람이리라.
“치과의사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세요?” 조윤선 문화체육부장관이 그를 보고 던진 첫 질문이었다. 장영준(張永俊·58) 회장은 대한바이애슬론연맹을 대표해 나간 자리에서 받은 그 질문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 조 장관이 아니라 누구라도 비슷한 질문을 했을 것이다. 바이애슬론이라는 비인기 동계스포츠를 대표하는 자리에 치과의사라니. 더군다나 지금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둔 중요한 시기. 그는 어떻게 동계스포츠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일까.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장영준 회장은 사실 치과의사들 사이에서는 아주 잘 알려진 인물이다. 올해 1월까지만 해도 그는 선거에서 당선된 대한치과의사협회의 부회장이었고, 그 전부터 협회 기획이사와 홍보이사 등을 경험한 회무에 밝은 사람으로 평가받아왔다. 때문에 치과계 돌아가는 사정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장영준이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를 리 없다. 그를 치과계에서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의 직함이 있다. 바로 연세대학교 치과대학동문회장이라는 자리. 현재 국내에는 의대보다 훨씬 숫자가 적은 11개의 치과대학이 있고, 그만큼 의과대학에 비해 결속력이 강하다. 한때는 어떤 대학 동문회가 어느 후보를 지지하는지에 따라 협회 회장이 바뀐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이렇게 그는 뼛속까지 치과의사 그 자체다.
벽안의 한국인 서안나와의 인연
다시 그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조윤선 장관의 질문에 장영준 회장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물론 스포츠도 하나의 전문적인 분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격이 필요한 분야는 아니잖아요. 단체를 운영한다는 것은 운동과는 별개의 이야기니까요. 치과의사들의 다양한 사회 참여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합니다. 치과의사들에 대한 인식이나 위상이 긍정적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에서의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영준 회장의 바이애슬론과의 인연은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올해 4월이 그 시작이었다. 바이애슬론 연맹은 곧 있을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성적 향상을 통해 외국인 선수의 귀화를 야심차게 추진했는데, 그중 한 선수인 러시아 출신의 프롤리나 안나(한국이름 서안나·32)의 후원 요청을 받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바이애슬론의 주 무대가 유럽인 만큼, 활발한 활동을 위해서는 스폰서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바이애슬론은 제게 낯선 스포츠였죠. 그러나 제가 운영하는 의료법인 메디피움 이름으로 후원을 해달라는 선수 에이전시 측의 요청이 있었어요.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또 태극 마크를 달고 뛸 선수를 돕는 일이라 기분 좋게 동의를 했죠.”
후원이 결정된 프롤리나 안나는 2009년 평창 세계선수권대회 스프린트 4위, 계주경기 1위를 차지하고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는 여자 스프린트 7.5km 경기에서 4위를 기록한 세계 정상급 선수다.
이런 그의 응원이 힘이 됐는지, 안나는 한국 바이애슬론 역사상 첫 세계선수권 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지난 8월 27일 에스토니아 오테페에서 열린 2016 바이애슬론 하계세계선수권대회 여자 스프린트 종목에서 22분 29초 01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다음 날 열린 여자 추발 종목에선 3위로 결승선을 통과해 동메달을 하나 더 따냈다. 평창에서의 금메달을 바라는 이들의 기대에 부응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린 셈이다.
“안나는 결혼과 함께 잠시 은퇴했던 선수였어요. 그러다 2년 만에 복귀했는데 지난여름의 성과로 주변의 우려를 한 번에 불식시켰어요. 여성 운동선수들은 나이가 들면 남성호르몬 분비가 늘면서 오히려 성적이 더 좋아지는 경우가 있어요. 아마 안나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후원자에서 진두지휘하는 수장으로
일각에서는 마치 용병을 사 모으듯 외국인 선수를 귀화까지 시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합당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대표를 출전시켜야 하는 바이애슬론연맹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
바이애슬론의 올림픽 출전권은 국가 순위가 기준이 되는데, 이 순위는 9번의 월드컵과 1번의 세계선수권대회를 통해 결정된다. 그런데 한국의 2015~2016 국가 순위는 25위로 22위까지만 주어지는 자동출전권을 얻기는 어려운 상황. 게다가 남자 대표의 경우 성적이 나빠 세계선수권 출전권조차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결국 2016~2017 시즌에서 출전권을 확보하려면 성적을 낼 선수가 필요했다.
장 회장은 “귀화 선수를 더 확보하려고 추진하고 있는데 쉽진 않다고 들었어요. 여자 선수는 선수층이 얇아 보강이 필요하다고 하고. 이런 좋은 기량을 가진 선수들은 단기적인 성과만 내주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어린 선수들이 기량을 갖추는 데 마중물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안현수 선수가 쇼트트랙 종목의 수준이 낮은 러시아에 가서 금메달도 따고, 러시아 선수들의 기량 향상에 기여한 것처럼, 안나도 바이애슬론 수준이 낮은 한국에서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죠”라고 말했다.
장 회장은 안나의 후원식이 열리던 날 안나의 성적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후원이 결정되고 얼마 되지 않아 바이애슬론연맹 회장직에 도전하게 됐고 지난 7월 29일 열린 투표에서 제5대 대한바이애슬론연맹 회장에 당선됐다.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된 셈이다. 그 과정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해 3월에 국민체육진흥법이 바뀌고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가 통합되면서 새누리당 염동렬 의원이 맡고 있었던 전임 회장자리가 자동으로 공석이 됐어요. 국회의원의 체육단체장 겸직 불가 의견도 있어 새 회장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들었는데 문득 욕심이 나더라고요. 아마 안나를 후원하면서 바이애슬론 매력에 빠진 모양이에요(웃음).”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이렇게 평창올림픽을 위해 애쓰고 있는 입장에서 일련의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올림픽이 마치 범죄의 온상이라도 된 듯한 지금의 상황에 대한 그의 생각이 말이다. 장 회장은 당연히 성공적 개최가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연맹과 조직위원회가 맡은 역할이 달라 세세하게 알긴 어렵습니다만, 지금의 상황이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평창올림픽은 국가적인 사업이라는 점이에요. 실제로 이번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많은 사람이 애쓰고 있고요. 이미 IOC에서도 실사를 다녀갔고, 경기 준비 진행에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받았어요. 한 차례 세계대회를 치러본 경험도 있고, 경기장도 12월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제 국민들이 관심을 가져주시는 일만 남았어요. 연맹 예산이 적어 홍보활동에 많은 한계가 있지만 좋은 성적을 내고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응원도 열심히 해주시고, 많이 보러 와주시면 좋겠어요.”
이종결합으로 대중화 앞당길 것
바이애슬론은 국내에선 어쩔 수 없는 비인기 스포츠이지만 유럽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국내의 프로야구나 프로농구에 비견될 만큼의 인기 스포츠 중 하나. 유럽 일부 국가에선 하루 24시간 바이애슬론 경기만 방영하는 방송국이 운영되고 있을 정도. 역대 올림픽 성적을 보면 독일이 가장 강국이고, 그 뒤를 노르웨이와 러시아가 뒤쫓고 있다.
장 회장은 “바이애슬론은 크로스컨트리 스키와 사격이 결합된 경기예요. 선수들은 총을 등에 맨 채로 스키를 타고 일정 거리를 달리다가, 사격장에선 사격을 겨뤄요. 바이애슬론이 인기가 있는 이유로는 두 가지 경기, 그러니까 스키와 사격을 함께 볼 수 있다는 점과 과녁을 맞히지 못하면 페널티가 주어지는 역동성이 꼽히죠. 이 밖에도 꽤 흥미로운 요소가 많아요. 한 가지 경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계주도 있고, 앞 주자를 앞질러야 하는 추적 경기도 있어요. 올림픽에서는 11개의 메달이 걸려 있는 종목이니까 비중도 꽤 높다고 봐야 합니다. 남자 5개, 여자 5개, 혼성 1개의 경기가 진행돼요”라고 설명한다.
장 회장이 바이애슬론연맹을 맡으면서 관심 갖는 것 중 하나는 바이애슬론의 대중화다. 결국 국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되지 않고서는 인지도와 성적 모두 다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바이애슬론은 생각보다 즐길 수 있는 여지가 많아요. 꼭 스키가 아니더라도 자전거와 같은 다른 종목과 결합할 수도 있고, 사격 역시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많죠. 요즘엔 레이저를 이용한 장비들도 있어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얼마 전에 대중화를 위한 연맹 차원의 행사가 있었는데, 어린아이들의 반응이 대단했어요.”
치과의사들의 다양한 목소리 듣고 싶어
그가 속한 의료법인 메디피아는 치과뿐만 아니라 의료검진센터 등 다양한 과목이 결합된 의료법인이다.
“메디피아를 시작한 시기는 1990년이었어요. 다른 과목 의사들과 의기투합해서 만들었는데, 어려움이 생겨 경매에 넘어가게 된 상황까지 처해 할 수 없이 모든 지분을 제가 인수하게 됐죠. 2000년 1월 1일에 이사장이 됐어요. 경영 정상화가 되면서 2013년에는 판교에 분점도 냈죠. 치과의사가 다른 메디컬 분야의 경영에까지 참여한다는 것이 한계도 있고 공부도 필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직의 힘과 팀워크 그리고 소통의 중요성을 알게 됐어요.”
그가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 중 하나는 바로 치과의사를 위한 일종의 사회운동, ‘행복한치과만들기 준비위원회’다. 그는 이 위원회를 통해 철학자 강신주를 초청, 대담을 진행한 적도 있고, 청년이나 여성 치과의사들과의 모임도 진행했다.
“치과의사들에게 ‘우리는 행복한가’라는 화두를 던져보고 싶었죠. 치과의사들이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다양한 계층의 치과의사들과 터놓고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젊은 치과의사들이나 여성 치과의사들의 생각은 어떤지, 동료로서 선배로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다양한 시도들을 했습니다.”
이런 모임에서 여러 직함을 갖고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그가 놓지 않는 것은 치과의사라는 스스로의 정체성이다. 이제는 직원이 300명인 의료법인의 대표라면 진료를 쉴 법도 한데, 아직도 매주 환자를 대면하고 직접 진료하는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이유에 대해 묻자 간단하게 대답한다.
“배운 것이 이것이고, 치과의사니까요.”
어느 대학교의 철학교수가 수업 첫시간에 학생들에게 아는 철학자의 이름을 말해보라고 하면 대부분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외국의 철학자를 들먹이고 아주 드물게 퇴계 이황선생을 말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위대한 선조보다 외국의 누구를 알아야 지식인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 합니다.
퇴계는 조선시대 성라학의 대가입니다. 그의 학문적인 업적은 너무 깊고 높아 배우려고 하다가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학문보다도 그의 인간미에 반하여 그를 존경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퇴계의 손자며느리가 아이를 낳았는데 년년 생이라 젖이 잘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침 고향집 하녀 학덕이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손자며느리가 듣고는 유모로 보내달라고 퇴계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퇴계는 이 편지를 받고 엄하게 나무랍니다.
“남의 자식을 죽이면서 제 자식을 살리는 것은 사람으로서 차마 못할 짓이다.” 그리고는 증손자를 위해 약을 지어 보내고 또 증손자가 병이 있음을 듣고 괴로운 심정을 편지로 써서 손자에게 보냈습니다. 왕자도 유모의 젖을 먹고 양반이 유모를 들이는 것이 보편화된 시대에 젖이 부족하여 죽어가는 증손자의 죽음을 앞에 두고 그가 취한 행동은 위대합니다. 결국 이 아기는 증조부인 퇴계를 보지 못하고 요절하였다고 합니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재직할 때 둘째아들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습니다. 아들의 죽음도 슬픈 일이지만 자식도 없이 한평생 과부로 살아야할 며느리가 큰 걱정입니다. 여필종부, 부창부수, 삼종지도 의 봉건적인 조선시대에 여인의 재혼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입니다. 이렇게 재혼금지라는 제도가 강하게 된 이유가 과부가 재혼하면서 배속에든 아이가 전 남편의 자식인지 지금 남편의 자식인지가 아리송한 일이 생기자 1477년에 ‘과부제가급지법’(1896년 감오경장 때 폐지) 이 만들어졌습니다. 비록 사대부 출신이라 해도 과부로서 재가하여 낳은 아들이라면 관직이 철저히 봉쇄되었습니다.
반면 과부로서 평생 수절하고 정절을 지키면 국가유공자에게 포상하듯 기념비를 하사하고 수절한 과부의 희생을 그 가문과 후손에게 혜택으로 보상하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퇴계는 며느리의 인간다운 삶을 고려하여 사돈을 불러서 둘째며느리를 데려가도록 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통념을 깬 것입니다. 며느리의 재가는 가문의 큰 수치이지만 퇴계는 가문보다는 며느리의 삶을 걱정하고 결행 했습니다. 사돈도 퇴계의 뜻을 이해하고 은밀하게 그녀를 재혼시켰다고 합니다.
퇴계가 조정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던 중 어느 기와집에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퇴계는 주인집에서 차려준 밥상이 고기보다 채식을 좋아하는 자신의 식성에 맞게 차려진 밥상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아침 식사 후 주인이 예법대로 버선을 선물하였는데 버선의 크기가 자신의 발 치수에 정확함을 알고 이 집의 안주인이 자신의 며느리였었음을 눈치를 챘지만 서로의 체면을 생각하여 모른척했다고 합니다. 주인집을 멀리 떠나와 퇴계가 뒤돌아보니 자신의 둘째며느리가 담 모퉁이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배웅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며느리의 재가 사실이 알려지면 퇴계 선생과 그 가문이 받아야 할 치욕은 이만저만 한 게 아닙니다. 지금 까지도 퇴계 후손들은 며느리의 재가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는 목숨도 버리지 않는 유교문화의 조선사회에서 그가 어렵게 택한 결행은 인간 사랑이고 가족사랑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닮고 싶은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너무 신과 같아서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능력의 소유자를 가까이 닮기에는 너무 벅찹니다. 내가 한발만 더 내 디디면 손에 잡힐 듯한 우리의 영웅이 필요합니다. 너무도 인간적인 퇴계의 삶에서 나는 따뜻한 사람의 정을 느끼고 그를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