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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걷기, 본원적 행동과 숭고한 철학의 결합이다-강동경희대학교병원 한방신경정신과 김종우 교수
- 애초부터 걷기와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고비’라는 말과 맞닿아 있던 삶. 다양한 운동 방법이 세상에 넘쳐나지만 걷는 게 그에게는 최적, 최상, 최고의 선택이었을 게다. 극복을 위한 아주 원초적 접근 방법.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뎌 무조건 길을 나선다. 걷는다. 여행한다. 궁극의 선택 안에서 자유를 찾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내가 목소리만 좋았으면 배우가 됐을 거예요!(웃음)” 사진을 찍는 동안 오십 넘은 중년의 얼굴이 어린 소년처럼 한껏 생기가 넘친다. 모델로서 이런 포토제닉 또한 오랜만이다. 기본적으로 재밌고 대화하는 상대를 편하게 해준다. 자신에 대한 사랑까지 충만하다.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걷기에 여행 이야기가 더해지니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다. 최근 ‘마흔 넘어 걷기 여행’이라는 책을 낸 걷기 여행 전문가(?)이자 강동경희대학교병원 한방신경정신과 김종우(金鍾佑·53) 교수를 만났다.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세계의 걷기 성지까지 두루두루 섭렵했다. “제 나름대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걷기 여행에 관한 책을 쓰게 됐습니다. 제 삶의 철학 중 하나죠. 여행을 가더라도 좀 걷자! 대학생인 딸도 그렇고 저보다 어린 직장인, 병원 내 레지던트들이 들려주는 여행 이야기도 그렇고. 좀처럼 재미가 없어요. 안타까워요. 어디를 가도 장소를 점처럼 찍어서 가요. 마치 사진작가처럼, 먹는 것을 찾아 떠난 셰프처럼 그렇게요.” 선을 연결해 영토를 확장하듯 면을 만들고 입체적인 그림을 그려가는 게 걷기 여행이다. 돈도 적게 들고 좋은 것도 많이 볼 수 있다. 여행자 자신의 관심사를 명확히 알게 해주기 때문에 걷기 여행이 매력적이라고.. “걷기는 인간의 본능적 행동이자 의도하는 바를 이루게 하는 행위이죠. 여행은 반복된 일상에서 벗어나서 진짜 나를 찾아가는 작업이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걷기와 여행이 결합하면 떠나는 순간부터 마칠 때까지 여정 속에 푹 빠져서 자기 자신을 찾고 새로운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걷기에 의사의 해석이 더해지다 걷기 여행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걷기가 뭔지 들어보기로 했다. 걷기에는 운동이라는 요소와 철학이라는 요소가 맞물려 있다고 김종우 교수는 말한다. 걷기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육체적인 성취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걸으면서 여행하고, 세상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문화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있는 단순하지만 놀라운 행위가 걷기다. “한 일간지에서 걷기 두 시간 해봤자 운동 효과 제로라는 제목의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요즘 쓰고 있는 문화일보 고정 칼럼에 ‘걷기는 굉장히 중요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숭고한 철학이 담긴 활동’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걷기를 그냥 운동이라고만 생각하면 그건 걷기가 아니죠.” 스트레스와 화병 전문가인 김종우 교수는 오랜 기간 한 월간지에서 주최하는 건강캠프 등에서 상담과 주치의를 맡아왔다. 한의학을 하다 보니 스트레스 치료의 가장 좋은 조건이 자연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사람들 대부분 활동량이 많이 떨어집니다. 가장 큰 해결책이 어떻게 하면 활동량을 늘리느냐 하는 점이죠.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자연만 한 좋은 환경은 없죠. 물론 자연에서 어떤 방법을 쓸 것인가도 중요하겠지만 조용히 걷고 사색하는 것만으로도 심적 치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 걷기 여행이 주는 매력을 말하다 치유 프로그램이나 트레킹 스태프로 참여할 때마다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 참여자들과 토론을 하고 강의도 한다. 선정된 주제에 관련한 책들을 먼저 많이 읽어두고 그 느낌을 걸으면서 계속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스태프로 참여할 때는 걷기와 관련해 훨씬 더 많은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걷기 여행의 콘셉트을 제대로 가지고 가고 싶어서요.” 문득 걷기 여행을 예찬하는 김종우 교수가 이렇게 스스로 준비해 참가자들과 철학적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부담 되지 않는지 물었다. 예전부터 자신도 비슷한 방식으로 여행을 해왔기 때문에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나이 오십이 넘으면 내가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얻은 것을 전해야죠. 선생의 즐거움은 가르침을 주는 것이잖아요. 가르침의 즐거움이 없으면 선생을 할 필요가 없죠.(웃음)” 김종우 교수는 일반인과 함께 참여하는 걷기 프로그램을 즐긴다.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걷고 명상하는 일을 반복하지만 행복한 시간이라고 했다. “저는 정말 굉장한 스태프예요.(웃음) 아침 6시부터 명상이나 새벽 산책을 해요. 이때는 주로 육칠십대 분들이 참여합니다. 그리고 두 시간 걷죠. 아침식사를 하고 한나절을 걷고 점심을 먹고 또 걸어요. 저녁식사 후에는 허리나 무릎에 침을 놔줘요. 물집도 다 따주고요. 그러고 나서 오후 8시, 9시쯤 되면 밤 산책을 나가요. 그때는 사오십대가 많이 가세요. 대신 이 사람들은 다음 날 새벽에 절대 안 나와요. 저는 다시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걷죠. 풀타임으로요.(웃음)” 그렇다면 하루 중 가장 걷기 좋은 시간은 언제일까? 김종우 교수는 이른 아침 통이 트기 시작할 때를 꼽았다. 도시건 자연이건 가장 근본적인 원초적 에너지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새벽이라는 것이다. “가장 큰 접점은 해 뜰 때거든요. 여명이 딱 깃들 때 도시와 자연은 정말 달라요. 자연은 특히 이탈리아의 돌로미티 같은 곳에 가면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요. 새벽에는 그 도시의 풋풋함이 느껴집니다. 자연의 기운을 그대로 내 몸에 받아들이는 것이 명상인데 새벽에는 장애 요소들이 없잖아요. 새벽 산책은 도시건 자연이건 각성, 깨달음을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에요. 만약 도시여행이라면 해가 뜨고 나서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카페에 들러 에스프레소와 크루아상 하나 딱 먹으면 최고죠. 그리고 새벽에 걸으면 두 배는 더 여행할 수 있고요.” 모두가 말린 히말라야에 오르다 걷기 프로그램 주치의로 활동하다 급기야 히말라야 트레킹에까지 참여하게 됐다. 히말라야는 김종우 교수가 가서는 안 될 장소였다. “저는 세 살, 일곱 살 때 심장병으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중·고등학교 때는 뛰지를 못하니까 체육시간에 맨날 낙오됐어요. 30대 중반에 부정맥 증상이 나타나서 반복적으로 응급실에 갔었고 중환자실에도 들어갔다 왔고요. 그런 저에게 히말라야가 다가왔습니다. 무조건 간 거죠.” 이런 제안이 없으면 언제 또 히말라야에 가보나 생각했다. 심장병 주치의가 말렸지만, 비아그라를 처방받아 네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말이다. “도보 코스도 굉장히 좋았고 마지막에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모든 것이 너무 좋았어요. 1000m에서 2000m, 3000m 갈 때 힘들어지는데 산은 올라갈수록 에너지가 생겨요. 반복적인 리듬으로 계속 가다 보면 걷는 게 쉬워지거든요. 트레킹을 아주 재밌고 멋지게 다녀왔죠.” 웃으면서 얘기했지만 사지 보행을 하면서 힘들게 올라갔다는 고백(?)을 받아냈다. 그 후로 스페인 순례자의 길인 산티아고를 비롯해 이탈리아 아말피 해안도로와 터키의 리키안 웨이 등 세계 유수의 트레킹 코스를 다녀왔다. 그렇게 걸어 다니면서 꼭 지키는 법칙이 있는데 밤 12시에는 반드시 잔다는 것. “일과를 마치고 나면 마을 사람들이 다니는 선술집에 가요. 맥주 한 병 혹은 와인 두 잔이 딱 적당하죠. 그리고 함께 걸었던 사람들과 여행 이야기를 해요. 사람들이 똑같은 길을 온종일 걸었다고 칩시다. 그럼 다 똑같은 거만 볼까요? 얘기를 하다 보면 훨씬 더 다양한 느낌이 와요. 그러고는 밤 12시에 취침에 들어가는 거죠.” 가족과 함께 나서는 길 꼭 프로그램을 통해 걷기 여행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걷기 여행 조기교육을 받은 대학생인 아이들과 아내가 함께 할 때도 있다. 작년에는 호주의 그레이트 오션 워크를, 올해는 일본 순례자의 길인 오헨로에 다녀왔다. “그레이트 오션 워크는 100km인데 3일 동안 60km를 걸었습니다. 어렸을 때도 아이들이 배낭 메고 10km, 20km 걸었거든요. 일본 시코쿠에 1400km의 오헨로 길이 있어요. 88개의 절을 지나는 순례길이죠. 한 번 갔을 때 다 걸으려면 45일은 걸립니다. 저는 직업도 있고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딱 10년 계획을 세웠어요. 1년에 일주일 정도 120km만 걷자. 아내하고 아이들 다 데리고 갔어요. 그런데 기특하게도 우리 애들은 걷자고 하면 걸어요.” 물론 가족들과 가면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계속 걷기보다는 도시 여행도 한다. 오헨로 길 여행 때는 이틀은 걷고 이틀 노는 방식으로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다음 달에도 오헨로 길을 가는데 아내와 6일 내내 걷기로 했다. “아내가 날 좋아하니까요.(웃음) 나 혼자 즐기는 게 억울해서 가는 거겠죠. 그런데 아내가 대단한 것이 10년 동안 그 길을 걸을 계획이라니까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떠날 때마다 제안하겠지만 아마도 아내랑 함께 걷게 될 거 같아요.” 생사를 넘나드는 삶 속에서 얻은 깨달음 “언제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네 번의 전신마취를 했다. 그때 깨달았다. 수술대에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굴곡진 길 또한 쉼 없이 걸었다. 명상하고 마음을 다잡고 하는 건 벌써 오래전에 끝냈다는 김종우 교수. “삶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봤자 달라지지 않아요. 문득 떠오르는 생각 속에서 ‘내가 이렇게 살아왔구나!’ 하고 한두 번 씩 깨달으면 됩니다. 내면의 뭘 찾겠다고 해봤자 다 내 삶이거든요.(웃음)” 올 초에도 몇 번이나 힘든 일들을 겪었다. 1월에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번졌다. 수술 도중에 담석이 발견됐지만 곧바로 제거하지 못하고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심장이 약해 전신마취가 쉽지 않았던 것. 결국 일본 오헨로 길 여행을 다녀온 후에 담석 제거를 했다. “간단한 수술이기는 한데 일본 트레킹 가서 아이들한테 그랬어요. 아빠는 언제 갈지 모른다고요. 너희들 대학교까지 보내고 잘 키워놨으니까 언제든 혼자 살 수 있겠다고 말했죠. 물론 술 먹으면서 잘 풀어서 대화했습니다. 우리가 걷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자연과 교감을 하는 것이죠. 건강한 삶을 추구하지만, 또 언제든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니까요. 자연의 이치 같은.” 가보고 싶은 길이 있냐고 물었다. 어디를 가도 좋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학회 때문에 미국 미니애폴리스에 갔을 때도 3시간씩 걸었어요. 어디가 중요한 것이 아니죠. 걸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습니다. 적당한 장소에 에스프레소와 크루와상이 있으면 정말 끝내주겠죠.”
- 2018-04-12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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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월
- 4월을 맞으며 파블로프의 반응처럼 맴도는 한 문장이 있습니다. 저뿐이 아닐 것입니다. “사월은 잔인한 달!” 이 단순한 문구로 T.S. 엘리엇의 ‘황무지(The Waste Land)’는 시작됩니다. 그러나 엘리엇은 지혜롭게도 이 문장을 시작하기 전에 슬쩍 전체를 이끌어갈 두 구절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깔아놓습니다. 그의 의도대로 그 장치는 보이지 않게 잘 작동합니다. 하나는 수백 년을 살고 있는 무녀의 독백이고, 다른 하나는 에즈라 파운드입니다. 한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지요.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하고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지요. “죽고 싶어.” 그리고 그는 곧이어 본격적으로 시가 시작되기 바로 전에, 그의 선생님 뒤에 숨습니다. “나의 존경하는 선생님 에즈라 파운드에게 이 시를 바칩니다!” 얼마나 영리한지요? 아니면 바로 그 선생님이 기진한 제자를 또 다른 시로 감싸주었는지? 저는 독자이니 아무래도 좋습니다. 총 5장으로 나뉘어 구성된 이 장편서사시의 제1장은 ‘죽은 자의 매장(The Burial of the Dead)’으로 시작됩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한창 멋 부릴 나이에 이 시를 만난 저는 첫 문장부터 긴장하며 오랫동안 난해한 문장들과 씨름을 했던 기억이 떠올라 혼자 웃음이 나옵니다. 우선 너무 생소한 고유명사 밑에 깔린 고전, 그리고 숨겨진 신화를 찾아보느라 표를 만들었습니다. 본문보다 훨씬 더 긴 표에 또 꼬리를 이리저리 달아야 했습니다. 당시는 전자정보는 말할 것도 없고, 복사기도 없던 때라 도서관에서 일일이 사전으로 시작해 연결된 내용을 인덱스카드에 한 자 한 자 적어, 이리저리 붙이고 떼면서 생각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지난 3월호 칼럼과 이번 4월호는 이어집니다. 거기선 몽골 평원에서 인문이란 아름다운 무늬가 푸른 하늘로 경쾌하게 피어오르는 생명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우리 인간끼리의 사랑을 넘어 가축을 아끼는 몽골 유목민의 평범함이 제게는 큰 울림이었습니다. 그 후에 이어지는 본격적인 이야기로 이어가고 싶지만 다음으로 미루고 이번 4월호에는 세상을 흔들어놓은 서양 시인의 봄비로 시작되는 4월의 황무지 이야기입니다. 물론 몽골이란 특별한 지역에서 생각하는 4월은 좀 다를 것입니다. 여기 몽골에선 정말 다른 나라에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4월이면 아직 오지 않은 봄을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 시인은 겨울나라 사람들이 그토록 앙망하는 봄의 햇살도, 꽁꽁 언 대지를 녹이고 깨우는 봄비도 잔인하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봄과 겨울을 잉태한 시간과 공간 그 자체마저 하나하나 드러내 기대할 것이 없다고 조목조목 발가벗겨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 시를 읽다 보면 숨을 쉴 때마다 시인의 표현대로 가는 재가 끝없이 허파로 들어오는 공포를 체험하게 됩니다. 더구나 그 재는 내 몸을 두꺼비 집처럼 뒤덮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그림자도 시간이란 절망의 무섭고 처량한 모양으로 길게 바뀌어 우리들을 제압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도 메아리 없는 독백으로 바뀌고, 별들의 질서도 어느새 혼돈일 뿐입니다. 또 그가 인용한 다른 서양 시인의 지옥보다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단계인 연옥과 천국을 볼 수 있다는 간접적 희망도 무참히 포기시켜버리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많은 황·무·지를 보게 하지만 남자도 여자도 다 겪은 눈먼 노인 테이레시아스의 영안(靈眼) 앞에서 전 아예 길을 잃었습니다. 꼭 붙잡고 있던 마지막 도피처인 상상(想像)도 무너트립니다. 비를 거느린 천둥의 말과 큰 희망인 또 한 사람의 빛마저! 주라! 해도 숫자를 헤아리고 있는 나. 공감하라! 해도 경계를 지우고 있는 나. 자제하라! 해도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나. 그래도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해변 기슭에 앉아 시인은 낚시질을 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립니다. “내가 앉아 있는 주변 땅이라도 깨끗이 해야 하지 않을까?” 거미줄에 맺힌 아침이슬처럼 그의 독백은 위태롭지만 영롱합니다. 그 시인이 땅에 묻힌 지 반세기, 시를 발표한 지 한 세기가 다 되었습니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어 있던 땅과 나무들을 녹이는 햇살과 봄비를 잔인하다고 선언한 이후 세상은 그 시인의 바람과는 달리 정말 황무지가 되는가! 했습니다. 그래도 봄이면 여전히 햇살과 봄비는 세상을 감싸 안고, 그가 잠든 땅을 녹이고, 잠든 나무를 깨웁니다. 그리고 단단한 가지를 뚫고 목련은 피었습니다. 또 그토록 그 시인이 듣고 싶어 했던 물소리는 아직 그 혼탁함과는 상관없이, 어디서나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른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함철훈(咸喆勳) >>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Gems of Central Asia’,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Quando il Vento incontra l’Acqua’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대상 수상. 저서로 ‘보이지 않는 손’, ‘사진으로 만나는 인문학’ 등이 있다.
- 2018-04-04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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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말의 힘! ‘다키스트 아워’
- 우리는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을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으로 기억한다. 그의 이전 경력이 주로 군 관련 경력에 치우쳐 있어 그를 무장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그는 아마추어 수준을 뛰어넘는 화가였으며 소설, 신문 칼럼, 에세이 등 글을 잘 쓰는 문필가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전쟁이 끝난 후 집필한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 ‘다키스트 아워’는 영국 해군장관 출신의 정치인 윈스턴 처칠이 전시내각의 총리로 임명되는 1940년 5월 10일부터 덩케르크 작전(다이나모 작전)으로 불리는 대규모 철수작전이 끝나는 5월 28일까지 19일간의 행적을 추적한다. 최악의 상황에서 내각을 이어받은 처칠이 반대 세력으로부터 받는 갖은 압력 속에서 현실과 신념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모습이 이 영화의 전부를 이룬다. 사실 이 영화를 보게 된 동기는 작년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를 감명 깊게 보았던 영향이 크다. 당시 놀란 감독이 표현해낸 기적 같은 철수 장면이 떠오르면서 당시 영국 내의 상황이 궁금해진 것이다. 그러니까 두 편은 서로 이어진 작품으로 순서만 바꿔 보는 셈이다. 두 편 모두 같은 사건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지만, 도달하는 지점은 같다는 게 흥미롭다. ‘덩케르크’는 등장인물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이름 없는 국민들의 눈물겨운 헌신이 돋보인다. 반면에 ‘다키스트 아워’는 이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진흙탕 싸움이 전개된다. 사실 이 시점에서 무엇이 옳은지 불분명하다. 현저한 전력의 열세 속에서 히틀러에게 항복하고 희생을 줄이는 것도 나름 정당성이 있다. 그러나 처칠은 항복은 곧 노예의 삶을 의미한다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진다. 무수한 정치적인 공세 속에서 처칠의 흔들리는 신념을 잡아주는 존재는 다름 아닌 이름 없는 지하철의 시민들이었다. 물론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역사적 사실이 아닌 픽션임이 분명한 이 장면이야말로 감독의 의중을 여실히 반영하는 지점일 것이다. 전쟁이라는 막중한 상황에서 어려움을 견디며 전쟁을 수행하는 주체는 결국 이름 없는 일반 국민들인 것이다. 처칠은 그들을 대변하며 용기를 얻는다. 처칠의 무기는 또 하나 있다. 그것은 그의 탁월한 언변이다.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처칠의 말과 관련한 일화는 무수히 많다. 정적을 제압하는 여유 있는 유머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어디선가 접했을 법한 익숙한 그의 명연설이 감독 조 라이트의 뛰어난 연출을 통해 화면에 전개된다. 역광을 활용한 어두운 분위기의 의사당에서 행하는 마지막 연설은 이 영화의 백미다. 그렇다. 결국은 말의 힘이다. 처칠은 사실 과거 군사적 판단착오로 여러 전쟁에서 실패한 무장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말의 힘으로 일어섰다. 올바른 판단을 하였으면서 말로 표현하는데 서툴러 무대에서 사라진 정치가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의 현실과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언제쯤 자극적인 막말이 아닌 우아한 언어로 상대를 제압하고 국민을 설득하는 이런 정치가를 만날 수 있을까! 수많은 명언 중 “싸우다 패한 나라는 다시 일어설 수 있어도, 무릎 꿇고 굴복한 나라는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말이 오늘의 우리 상황과 중첩되어 기억에 남는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처칠 역의 게리 올드만에 크게 빚지고 있다. 그가 옛날 의 그 미치광이 형사였다니.
- 2018-03-13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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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학교 농대 교양학과 교수님들
- 초등학교 친구인 옥자가 자신이 근무하던 서울대학교 농대 교양학과 사무실의 사환자리를 필자에게 물려주었다. 기회를 준 옥자가 참으로 고마웠다. 필자가 근무하던 자동차 노조 사무실은 한 달 봉급이 5000원이었지만 농대는 절반밖에 안 되었다. 그래도 그곳에 더 있다가는 숨통이 막혀버릴 것 같았기에 과감하게 사표를 냈다. '인생은 선택이다.' 단 하루를 살아도 맑은 공기를 나눠 마실 수 있는 사람들하고 같이하고 싶었던 것이다. 필자는 진흙탕에서도 살 수 있는 미꾸라지가 결코 아니었다. 물이 탁해지면 금방 숨이 끊어져버리고 마는 은어였다. 농대는 야학 시절 음악회나 연극이 있을 때 수시로 드나들던 곳이다. 농대 캠퍼스를 유난히 좋아했는데 그곳에 근무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뛸 듯이 기뻤다. 마음속에 ‘농대 교수님들은 필자가 그리도 좋아하는 서둔 야학 선생님들의 선생님들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무조건 교수님들을 좋아하고 존경했다. 교양학과 교수님들은 한 분 한 분이 참으로 학구적이고 매너가 부드러운 신사들이었다. 필자에게도 늘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교양학과 과장님은 영어를 담당하신 조성지 교수님이었다. 키가 크고 체구가 당당하시며 혈색이 좋으신 조 선생님은 필자가 붙여드린 ‘영국 신사’라는 별명이 너무 잘 어울리는 분이었다. 인간성까지 좋으신 조 선생님은 흐트러진 구석을 절대로 보이지 않았다. 학자로서 교재연구를 착실히 하면서도 글쓰기를 즐겨 생활수필을 써서 신동아 등의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원래 열렬한 기독교인이었으나 나중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신 조 선생님은 ‘가톨릭이야말로 진짜 종교다’라고 역설하시곤 했다. 고향이 이북인 조 선생님은 근검절약의 표본이시기도 했다. 구두 뒤축이 다 닳으면 왼쪽과 오른쪽 구두의 굽을 바꿔 달아서 신으시는 등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절대로 지출을 하지 않았다. 필자에게 심부름을 보낼 때는 1원짜리로 세어서 왕복 14원을 주실 때도 있었는데 처음에는 ‘체구 큰 남자 어른이 잘아도 너무 잘다’라는 생각도 했지만 근검절약하시는 모습을 늘 보면서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절약하고 사셔서 그런지 자제분들을 꽤 많이 두었음에도 모두 대학교를 보냈다. 점심에는 주로 라면을 드셨다. 필자는 라면을 끓여드리곤 했다. 뚱뚱하신 체구에 땀을 뻘뻘 흘리며 라면을 드시는 모습을 뵙기가 안타까워 옆에서 부채질을 해드리기도 했다. 선생님은 처음에는 사양하시다가도 필자가 고집을 부리면서 부채질을 해드리면 어린애같이 좋아하셨다. "내가 애란이 덕분에 너무 호강한다." 고교 시절, 필자는 적어도 세계문학전집만큼은 다 읽어야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농대 도서관과 학교에서 책을 빌려다 놓고 틈만 나면 책 속에 빠져 있곤 했다. 그때 조 선생님이 넌지시 지적해주셨다. "애란아, 책은 그만 보고 공부에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니?" 그날 밖에서 다른 선생님들과 점심식사를 하신 조 선생님이 싱글벙글 웃으시며 들어오더니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며 말씀하셨다. “이거 우리 약혼 시계야.“ 껄껄 웃으시며 시티즌 손목시계를 필자 손목에 맞게 조절해서 채워주셨다. 60대 노교수님 얼굴에 어린애같은 순진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난생 처음 차보는 손목시계의 차가운 감촉이 퍽 신선한 느낌으로 와 닿았다. 시계는 얼마 안 가 고장이 났지만 조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만은 기억 속에 그대로 살아남아 있다. “꼭 베일을 쓴 신부 같네.” 필자가 근무하는 곳을 아름답게 꾸미고 싶었다. 사무실 탁자에 언제나 꽃을 꽂아 놓고 싶었으나 너무 가난했기에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화원에서 흰 국화와 아스파라가스를 싸게 구입할 수 있었다. 커피 병에다 정성껏 꽂아놓았더니 교수님들이 즐거워하시며 하신 말씀이다. 교양학과 교수님들은 대개 인품이 훌륭하셨다. 그중에서도 선하신 데다 겸양의 미덕까지 갖춘 이상철 철학 교수님은 철저한 학자이셨다. 이 교수님은 앉으나 서나 책만 봤다. 책을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눈을 혹사시켰기에 그즈음 의사가 처방을 내리기를 “책을 그만 봐야 한다. 안 그러면 시력을 아주 잃어버릴 수 있다”라고 했다. 교수님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분은 책을 안 읽고 살 수 없는 분이셨다. 차라리 밥을 먹지 않는 게 그보다 덜 고통스러웠을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은 좋은 눈을 갖고도 책 한 권 읽지 않고 방탕하게 세월을 보내는데, 열심히 연구하시는 분의 눈은 왜 나쁜 것일까. 안타까웠다. 이 교수님은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모르고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하는 백면서생인 데다가 세속적인 영달도 바라지 않는 듯했다. 필자가 좋아하는 전형적인 학자 타입의 남자였다. 독신주의자이셨던 교수님을 보면서 막연하게 이런 분 뒷바라지를 하며 생을 보내는 것도 행복하고도 보람 있는 삶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독어 교수님은 릴케의 시 ‘가을날의 기도’를 번역하신 송영택 시인이었다. 배가 튀어나온 송 선생님은 흘러내리는 허리띠를 연신 치켜 올리는 습관이 있었다. 날렵한 몸매에 순수한 눈빛을 가진 윤동주 시인을 기억하고 있던 필자에게 배 나온 시인은 아무래도 이상해 보였다. 가장 젊은 국어과 홍윤표 교수님은 정의감과 의협심이 투철하신 분이었다. 순수와 열정을 갖춘, 날카로운 지성과 달콤한 감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교수님은 필자만 보면 “이빨 두 개 내놔라, 이빨 두 개 내놔” 하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필자 이름이 ‘배비장전’에 나오는 기생 애랑과 이름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교수님의 악의 없는 농담에 한바탕 웃곤 했다. 교수님의 아버님은 평소에 “사람을 믿어라, 사람은 근본적으로 착하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당시 돈으로 어마어마한 3000만 원(?)인가를 사기당한 후부터는 “사람을 믿지 말아라” 하셨다고 한다. 그래도 교수님은 사람을 믿고 싶고, 믿을 것이라고 하셨다. 천사가 따로 없었다. 필자 눈에 비친 교수님은 천사 같은 분이었다. 안경 쓴 남자 천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교양학과 사무실이 있던 농대 신관은 가운데가 사각 공간으로 설계되어 있었는데 그곳에 잔디가 파랗게 심어져 있었다. 늦은 봄이면 초록색 잔디 위에 노란 민들레가 여기저기 소담스럽게 환히 피어 있어서 너무도 아름다웠다. 창문을 열고 내다보면 아침마다 방긋 웃던 샛노란 민들레의 미소가 필자에게 행복감을 듬뿍 안겨주곤 했다. 그런데 5월 어느 날 아침,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본 필자는 참담해졌다. 어제까지 피어 있었던 민들레들이 모두 날카로운 낫에 베어져서 한쪽에 모아져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베어져버린 민들레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기 좀 보세요. 베어진 민들레들이 마치 여인네의 퇴색한 옷자락 같아요.” 다른 교수님들도 있었지만 특별히 홍 교수님께 인정을 받고 싶었다. 필자의 계산이 들어맞은 것인지 교수님께서 감탄했다. “야! 박 양 표현력이 대단하구만” 따가운 햇볕에 지친 나무들이 ‘자울자울’ 졸고 있는 듯한 어느 날 오후였다. 모처럼 시간을 내어 홍 교수님과 같이 서호 둑을 거닐었다. 햇살이 온 천지에 내려앉아 눈이 부셨고 호수의 잔물결은 가장자리에 박혀 있는 돌들을 가볍게 쓰다듬고 있었다. "지방에 산재해 있는 비어 중에 배를 가리키는 비어로 ’배때기‘, ’배때지‘ 등이 있다니까 여대생들이 어찌나 배를 잡고 웃던지 강의를 계속할 수가 없었어요." 교수님은 강의 중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말씀해주셨다. 그때 재미있게 들으며 웃던 필자의 눈에 호수 둑 밑에 피어 있는 자그마한 노란 꽃이 들어왔다. "어머, 저 꽃 참 예쁘다." 무심결에 감탄했더니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박 양, 내가 저 꽃을 따다 줄까요?" 가지고 있던, 책이 들어 있는 자그마한 손가방을 필자에게 맡기시고는 조심조심 내려가 그 꽃을 따다 주셨다. 그 장면은 필자로 하여금 물망초의 전설을 연상시켰다. 나를 잊지 말라 했다는 슬프디슬픈 전설이. 교수님은 따다 주신 꽃을 소중하게 받아 들고 필자는 기쁨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생각하는 것은 자유라 했다. 그날 홍 교수님은 너무나도 멋진 기사님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값진 것은 역시 사람의 인품이다. 교양학과 교수님들은 필자가 근무하는 3년 동안 늘 화목한 모습을 보여주셨고 갈등을 겨자씨만큼도 보여주신 적이 없다. 주간으로 나오던 대학신문 또한 필자에게 좋은 선생님이 돼주었는데 훌륭한 소설평이나 칼럼 등은 반드시 그날 일기에 적어두고 몇 번씩 반복해서 읽었다. 참으로 훌륭한 집단에서 보낸 세월이었다. 그래서 취업을 앞둔 제자들에게 필자는 늘 이렇게 강조한다. “돈 몇 푼 더 받는 곳보다 분위기 좋은 직장을 골라서 가라. 그래야 배울 것이 많고 좋은 배우자를 만날 확률도 높다.”
- 2018-03-05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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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뛰는 사람 위에 노는 사람, 노는 사람 당해낼 사람은 없지요”
- 삶에서 행복을 충전하는 최고의 방법은? 좋은 사람들과 여행을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라 한다. 그것을 다하며 사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중견 여행사 ‘베스트래블’을 경영하는 음식·여행 칼럼니스트 주영욱 대표(57)가 그이다. 이외에도 사진가, 팟캐스트 DJ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노는 게 일이다. 그의 별명은 문화 유목민, 호모 루덴스(유희하는 인간)다. 한마디로 노는 사람이다. 마케팅 리서치 분야에서 25년을 일해온 그는 2013년 52세의 나이에 여행사를 창업, 인생 2막을 ‘문화유목민’으로 살고 있다. 뛰는 사람에서 ‘튀는 사람, 노는 사람’으로 변하게 된 그의 인생 2막 이야기를 들어보자. 주영욱 대표는 여행, 음식은 물론이고 미술, 음악, 사진 모두 전문가 수준의 취미를 갖고 있다. 57세, 보통 사람은 이제 버킷리스트를 쓰기 시작할 때다. 그는 하나씩 실행해나가며 지워나가느라 오히려 홀쭉하다. 고교 시절부터 꿈꿨던 DJ의 꿈은 팟캐스트 활동으로, 음식 칼럼을 쓰고 싶다는 꿈은 중앙일간지 연재를 통해 실현했다. 이외에도 가상역사소설, 공상과학소설로 저술을 준비하는 등, 그의 꿈은 산지사방 전 분야에 걸쳐 뻗쳐 있고 진행 중이다. 얼마 전 그는 왼쪽 팔목에 ‘매버릭’(Maverick, 개성이 강한 사람)이란 문신을 새겼다.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나이에 20대 젊은이들처럼 멋부리기 유행을 타서도, 폭력배처럼 위협을 주기 위해서도 아니다. 매버릭, 말 그대로 개성이 강한 사람으로 편견과 습관에 갇혀 살지 않겠다는 자기다짐이고 자유선언이다. 그는 “세상의 터부 내지 스스로의 금기를 깬 느낌 때문인지 시원했다”며 “세상에 길들여져 탈색되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겠다는 의미에서 했다”고 말했다. 그가 정기적으로 단식과 명상을 하며 몸과 마음을 함께 비우는 것도 본질과 개성을 찾기 위한 일환이다. 그는 비우고 내려놓고 편견의 곁가지를 쳐내야 핵심에 집중해 생생해진다고 말한다. 삶이나 몸이나 생각이나, 심지어 음식의 맛도…. 마케팅 리서치 분야에서 25년간 일하며 미국, 일본, 프랑스 글로벌리서치 사의 한국법인 CEO를 두루 역임하셨습니다. 52세의 나이에 이종 분야 창업을 하신 게 특이합니다. “경영상 이견으로 외국 회사 한국법인 CEO를 그만두고 됐어요. 20대 때부터 몸담아온 마케팅 리서치 일을 다시 할까도 생각했어요. 마케팅 리서치는 최적의 대안을 찾아내 본질에 집중하는 일이거든요. 제 성격의 완벽주의랑 맞아 신나게 일했어요. 25년 가까이 해오다 보니 스스로 타성이 느껴지더군요. 현재의 삶에 그럭저럭 안주하는 내 모습이 싫어졌습니다. 아직 젊은데 작은 성공에 취해서 한 달에 보름씩 골프를 쳐가며, 이렇게 살아도 되나 불안하기도 했고요. 재미가 제 삶의 중요 요소예요. 좋게 말하면 글로벌 마인드, 나쁘게 말하면 역마살이라고나 할까요. 익숙한 길보다 가지 않은 길, 새롭게 흥분할 수 있는 것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나를 던지고 싶었어요.” 주 대표께서 생각하는 여행의 재미와 의미는 무엇인가요. “여행의 가장 큰 의미는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사고를 유연하게 해줘요. 이분법적 사고에서 절로 벗어나게 한다고나 할까. 여행 가면 늘 낯선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룰을 따르고 새롭게 생각해야 하잖아요. 그런 게 제 성격에 맞아요. 철이 안 들어서 그런가봐요. 추하다vs아름답다, 옳다vs그르다의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게 해줘요. 편견을 깨야 한다는 걸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지요.” 그는 인도 여행을 갔을 때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초라한 행색의 인도인이 자기 배를 타달라고 호객 행위를 심하게 하더란 것. 다음 날 아침 숙소 앞에서 넘어져 잠깐 쉬고 있을 때였다. 그가 다가오기에 또 호객 행위를 하러 온다고 생각해 자신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고. 알고 보니 약을 주려고 온 것이었다. 그는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여행지에서 매번 시시각각 깨닫는다고 털어놓았다. 여행을 좋아하는 것과 여행 사업을 하는 것은 별개인데요. 창업을 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첫 번째는 고품격 여행 상품을 개발하고 싶었어요.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 하잖아요. 저는 그게 여행 자체가 아니라 프로그램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400회 이상 해외 여행한 경험이 있으니 그런 기획을 잘할 거라고 생각했지요. 여행 계획을 짜면 모두들 즐거워하며 ‘이런 프로그램은 여행사도 못 짠다. 너, 나중에 여행사 차려라’ 하고 농담할 정도였거든요. 두 번째는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여행업은 미래 산업으로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나름 판단했지요. 세 번째는 인맥에 대한 자신감이었지요. 제가 온갖 모임의 총무, 회장을 맡아 마당발이었거든요. 아는 VIP들만 모객해도 걱정 없겠다 생각했지요. 금방 착각임을 깨달았습니다만….” 즐기던 여행을 막상 사업으로 해보니 어떻던가요. “일과 취미는 전혀 달라요. 지금까지 여행사를 하며 실제 고객은 모르는 분들을 개척한 거예요. 아는 사람과 도와주는 사람은 전혀 별개예요. 처음엔 섭섭하기도 했는데요. 그게 인지상정이에요. 나도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친분보다 전문성을 갖고 냉정하게 판단하거든요. 인생 2막, 새로 도전하면서 과거 인맥을 바탕으로 뭘 해보겠다는 사람을 보면 적극 말려요. 사업은 아는 사람 믿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준비와 자금력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기본인데도 잊기 쉬워요.” 그는 “내가 여행상품 기획은 잘하니 호텔, 항공료 절감 등 원가 관련 문제 같은 부족한 실무 요소는 남을 통해 보완하면 되겠지 하고 안이하게 생각한 것도 실수였다”며 “사장이 큰 그림 보며 해야 할 일을 직원이 대신 해줄 수는 없더라”고 말했다. 만일 창업 초기로 돌아간다면 여행 가이드를 하든, 자격증을 따든, 직원을 하든 현장에서 밑바닥 경험을 1~2년 반드시 해보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나마 자신은 충분한 투자금을 확보해놓고 시작해서 버틸 수 있어 다행이었다는 고백이었다. 그가 히트를 친 것은 고품격 테마여행 중국 장강삼협 크루즈 관광상품 출시다. 동종 상품의 3~4배 가격으로 고품격의 명품패키지를 기획한 게 먹힌 것이다. 2016년 그는 여행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해외여행자와 서비스 제공자(여행사/랜드사/가이드/해외교민/유학생 등)를 직접 연결시키는 맞춤형 여행 도움 플랫폼 ‘티비스켓’을 창업해 사업 영역을 넓혔다. 주 대표는 “얼핏 마케팅 리서치 경력이 여행업과 상관없어 보이지만 결국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마케팅 리서치의 본질은 옥석을 가려 최고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며 “이는 여행업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설명했다. 직관적으로 ‘좋다, 나쁘다’로 끌리기보다 호기심의 본질과 원인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주 대표와 대화를 하며 특이한 모습을 발견했다. 인생의 우선순위로 재미를 이야기하고, 본인도 재미있게 살지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거나 유머가 넘치는 편은 아니었다. 첫째, 둘째, 셋째 하는 식으로 정리를 해서 설명하고 단어의 정의를 내린 후 논리를 전개해나가는 방법으로 대화를 했다. 알고 보니 그는 우리나라 상위 2%의 지능지수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멘사 회장을 지냈다. 음식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시지요. 일간지에 연재도 하셨고 ‘이야기가 있는 맛집’이라는 책까지 내셨습니다. 일반 음식 칼럼과는 달리 식당 셰프, 사장의 인생 사연을 곁들이는 게 특색이더군요. 잘되는 식당의 비결은 무엇이던가요. 간단히 말하면 기본에 충실한 식당입니다. 말은 쉬운데 오래 유지하긴 어려워요. 이런저런 핑곗거리와 유혹 때문에 넘어가기 쉽거든요. 유명한 집과 맛 좋은 집은 달라요. 진정한 맛집의 음식에선 주인의 정성과 열정이 느껴져요. 손님을 지갑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 자체에 자부심을 가진… 결국 음식은 재료맛, 손맛, 칼맛의 조합이거든요. 주인의 정성이 깃든 음식은 첫맛, 중간맛, 끝맛이 일관되게 같아요. 단맛이나 자극적 조미료로 맛을 낸 음식은 첫입엔 당기지만 끝맛이 좋지 않아요.” 주 대표는 ‘맛집을 고르는 비결’로 2가지를 귀띔해줬다. 사장이 직접 요리하는 곳, 오랜 전통을 가진 곳, 이 두 기준으로 고르면 틀림없다는 것. 요즘 상(上)남자는 상(床)남자, 상 차리는 남자란 농담도 있더군요. 집에서 요리를 잘 하십니까. “한동안 열심히 배웠지요. 내 손으로 메뉴에 따라 음식을 만드는 게 신기하더라고요. 의욕이 넘쳐 비싼 칼이랑 파스타 냄비만 잔뜩 사놓고선 그만뒀어요. 손이 입을 못 따라가 중년 남자의 작심삼일 셰프놀이에 그쳤지요.(웃음) 애들이 먹지 않으니 요리할 마음이 없어지더군요. 그냥저냥 요리는 재미있는데 뒷정리 설거지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아내의 고마움을 뒤늦게 깨달았답니다. 요리를 배우겠다는 동년 친구들에게 충고해주는 게 있습니다. 음식 맛은 고가의 장비랑 상관없으니 비싼 그릇과 도구는 사지 말라고요. 고급 골프채를 새로 샀다고 골프 스코어가 바뀌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해주지요.” 음식 칼럼니스트가 꼽는 최고의 음식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하는 음식은 아내가 해준 김치찌개입니다. 힘들고 지쳤다가도 돼지고기 넉넉하게 넣고 끓인 김치찌개만 먹으면 마음이 순식간에 풀려요. 나의 소울 푸드라고나 할까요. 밖에서 일하느라 바쁘고 지친 와중에서 집밥 해주는 정성을 알기에 일절 불평 없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반찬투정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답니다. 음식은 입보다 마음으로 먹는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해주셨던 소박한 집밥 한 끼가 어느 산해진미보다 더 맛있게 기억되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최근 아프리카 여행 때는 가수 휘성 씨 뮤직비디오 촬영도 하셨다면서요. 산악자전거 타기, 사진가, 종횡무진 다양한 활동을 하시는데요.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요. “여행 관련 콘텐츠를 만들어 여행 전문 케이블 TV를 만들고 싶어요. 경영자로서 저는 수치에 그렇게 밝은 편이 아닙니다. 선한 영향,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사업이 자리가 잡히면 직원들을 소사장으로 만들어 파트너 관계로 경영하고 싶어요. 좋은 음식이 그렇듯 뒷맛이 좋고 오래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김치찌개같이 질리지 않고 따뜻한 사람으로요.”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그가 핸드폰을 꺼내 자신이 DJ로 활동하는 맛집탐방 팟캐스트를 들려주었다. 촉촉한 7080의 감성 어린 목소리로 사연을 곁들여 맛집을 소개하고 있었다. ‘꿈이 있는 자는 늙지 않는다’고 했던가. 다음에 만날 때 그가 얼마나 더 ‘홀쭉해진’ 버킷리스트를 갖고 나타날지 궁금해졌다. 그때 같이 먹을 추천 식당도….
- 2018-02-28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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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 전문가 홍익희 교수의 고백, 인생 2막의 반전과 역전 그리고 결전
- 국내 최고의 유대인 전문가인 홍익희 세종대학교 대우교수(65). 그와의 3시간여 ‘인생 2막’ 인터뷰는 한마디로 선입관의 전복이었다. 수치에 밝은 냉철한 전문가일 것 같았지만 인간미 넘치는 인문학자에 가까웠다. 직선의 경력을 쾌속으로 걸어왔을 것 같지만 굽이굽이 곡선의 지각인생, 갈지(之) 자 이력이었다. 경력과 브랜드를 보고서 지레 짐작한 선입관은 무너졌다. 홍익희 교수의 인생은 반전과 역전 그리고 결전의 파노라마였다. 첫째 반전, 홍익희 세종대 대우교수는 32년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생활을 한 뼛속까지 코트라(KOTRA)맨이다. 중남미, 뉴욕, 유럽 각지에서 해외근무를 했지만 정작 중동 근무를 한 적은 없다. 둘째 역전, 베스트셀러 작가이지만 정작 글쓰기와 관련한 일을 본격적으로 해본 적이 없다. 정년퇴직 후 58세에 본격 글쓰기를 시작한 게 전부다. 셋째 결전, 코트라 무역관장을 거쳐 대학교수로 연착륙한 그의 인생은 겉으로 보기엔 꽃길이다. 정작 본인은 “내 인생의 8할은 열등감과 실패로 가시밭길이었다”고 술회하는 것 아닌가. 노력, 노오력을 넘은 사력으로 역경을 경력으로 전복시켜왔다는 고백이다. 자, 그의 인생 2막의 반전, 역전, 결전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자. 국내 최고의 유대인 전문가로 꼽히시는데요. 코트라 재직 중 정작 중동 지역이나 관련 문화권에서 근무한 적은 없으십니다. 인생 2막에서 유대인이란 주제를 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32년간의 코트라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금융산업을 포함한 서비스산업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내가 서비스산업이 중요하다고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을 것 같지 않더군요. 그래서 고대로부터 서비스산업을 창안하고 주도했던 유대인 이야기에 당의정을 입히면 공감대를 넓히는 데 효과적이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32년간 수출전선에서 근무지가 늘어날수록 유대인의 힘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전 세계에서 금융업뿐 아니라 서비스산업을 창안하고 주도하고 있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게 배경이 되었지요.” 그가 맨 처음 유대인들의 힘을 느낀 것은 1983년에 파견된 콜롬비아의 보고타 무역관에서다. 유대인 대형 바이어들과 거래하고, 유대인 군수품 에이전트와 같이 입찰에 응찰하는 것을 비롯, 금융도시 뉴욕에서 근무하면서 유대인의 실체에 대해 보다 깊이 알게 됐다. 세계 각국에 투자된 외국인 자본의 3분의 2는 미국 자본이고 그 태반이 유대계 자본이더란 것. 한 줌밖에 안 되는 유대인들이 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것을 지켜보며 유대인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근무지 곳곳에서 경험한 유대인의 힘의 근원을 천착, ‘유대인 이야기’를 출간했다. 그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유대인 전문가란 브랜드를 구축, 작가-교수로서 인생 2막을 성공적으로 시작한다. 책이 작가로서 인생 2막의 터닝포인트가 되었군요. 뼛속까지 무역맨인 분이 전문작가로 전업하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퇴직 후 투자에 크게 실패했어요. 경제적 손실이 컸지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 후 모 중견기업의 경영자로 가기로 돼 있었는데 틀어졌어요. 알고 보니 의례적 인사말을 착각, 김칫국을 마신 것이었어요. 정말 깜깜절벽에 출구가 보이지 않더군요. 경제적 손실만이 아니고 미래의 대책마저 보이지 않으니 살아 있지만 산 것 같지 않은 우울증이 찾아왔어요. 나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되더군요. 현실을 잊기 위해선 무언가에 몰입해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글쓰기는 도피처였다고나 할까요. 온종일 글쓰기에 매달렸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습니다. 자는 시간 외에는 글만 치열하게 썼습니다. 이때 탄생한 게 50여 권의 전자책들입니다.” 비록 100여 페이지에 불과한 전자책이지만 거의 이틀에 책 한 권 분량을 쓴 꼴이었다. 퇴직 후 출판사에 원고를 가져갔더니 자그마치 10권 분량이었다. 이때 쓴 ‘유대인 경제사’ 10권을 한 권으로 축약해서 출판한 게 2013년 초에 발간된 ‘유대인 이야기’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썼던 전자책 원고들이 지금은 아이디어의 보물창고가 되고 있다. 글로벌 경제 전문가도 투자에 실패하는군요. 퇴직 후 투자 실패였으면 더 타격이 크셨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하느님의 계획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인생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되었더라면 강의와 저술을 하는 오늘날의 내가 되지 못했겠지요.(웃음) 외형적 성공은 몰라도 지금처럼 행복하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글쓰기는 배부르고 등 따시면 하기 힘들거든요. 절박하고 절실해야 글이 써져요. 돌아보면 내 인생의 8할은 실패와 열등감이에요.” 홍 교수님의 이력에서 인생의 8할이 실패와 열등감이란 이야기는 의외입니다. “열등감이 과도한 인정욕구로 이어지면서 자충수를 둔 경우가 많았어요. 지그재그 인생을 돌아가게 만들고요. 지각인생이고 뒤처진 삶이었어요. 대학 시절, 3학년 1학기까지 다닌 건축공학을 접고 대학과 전공을 바꿔 재입학한 것도 그렇지요. 외무고시 공부 죽어라 매달려 거의 붙었나 했더니 시위 경력으로 막판에 징집당해 군대를 갔다 오느라 동기들보다 사회 진출이 늦었지요. 코트라 다니면서도 또 사업 한답시고, 가구사업 벌였다가 부도났어요. 당시 채무자에게 전화로 재촉받은 트라우마가 아직까지 남아 있어서 전화를 늘 진동으로 해놓는답니다. 그런데 퇴직 무렵에 또 투자를 해서 재산을 날렸으니….” 그는 하느님의 계획이란 말을 자주 했다. 돌아보면 당시엔 역경이고 힘들었던 일들이 나중엔 경력이고, 혜택으로 작용하는 일이 많더란 것이다. 상사의 신문칼럼 대필을 하느라 애면글면하는 게 부당하게 느껴졌지만, 그것이 글쓰기의 힘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해외의 경제상황 보고서 격무로 연일 야근을 하면서 몸무게가 10kg 이상 줄 정도였지만, 그것이 오늘날 경제사 집필의 원천 자료가 되고, 사업 실패가 경영자들에 대한 이해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으니 말이다. 가깝게는 책 출판이 예정 시기보다 지체된 것도 불만이었다. 하지만 대기(待機)하는 동안 자료를 보충하며 ‘대기(大器)’로 숙성시킬 수 있었다. 홍 교수가 되새기는 말이 ‘현재에 충실해라’다. “과거의 불완전성, 미래의 불확실성에 불평하고 고민하느니 현재에 몰입한다.” 그가 인생 수업료를 비싸게 치르고 얻은 교훈이다. 말씀 들으니 참 곡절도 많으셨는데 잘 넘기셨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3초도 안 돼 그는 즉답했다). 제가 청소년기에 비뚤어지지 않은 것은 어머니의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어머니를 너무너무 사랑했거든요. 아르바이트를 해서 그 돈을 어머니께 갖다 드릴 때 웃는 얼굴을 보는 게 참 좋았어요. 만인의 사랑보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사랑이에요. 저는 그 점에서 운이 좋지요. 늘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니까요. 집사람도 내가 사업 부도내고 힘들었을 때 만났어요. ‘학벌도, 얼굴도, 돈도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을 나 아니면 누가 구제해줄까’ 하는 모성본능을 발동시켰다고 말하더라고요.(웃음) 많은 사람이 경제적인 문제로 괴로워합니다. 돌아보면 돈으로 인한 고난이 제일 약하더군요. 생활수준을 낮추거나 참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건강, 사랑을 잃으면 회복 불능입니다.” 그는 인생엔 ‘동심 총량의 법칙’이 있는 것 같다고 고백한다. 어려서 애늙은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애어른’으로 중심을 잡다 보니 지금 오히려 ‘철부지 어른애’로 허당기를 발동한다는 것. 남보다 훨씬 세게 좌충우돌하셨군요. 그러면서도 늘 티핑포인트와 터닝포인트를 마련해 헤어나오셨습니다. “내가 뭐든 한 번 빠지면 깊이 빠져 잘 헤어나오질 못해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 역시 장점이 약점이고, 약점이 장점입니다. 무언가에 필이 꽂히면 무섭게 빠지는 것, 좋게 말하면 몰입이고 나쁘게 말하면 중독인데요. 식음을 전폐하고 2박 3일 바둑을 둔 적도 있습니다. 인생 반전은 결국 결단력입니다. 뒤늦게나마 정신 차리고 결심을 무섭게 하고 바람직한 것에 몰입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요.” 그는 ‘인생의 3대 결단’으로 “첫째는 어려운 가정형편인데도 3년 반이나 다닌 대학을 그만두고 재입학 결정을 내린 것, 둘째는 중년기에 바둑을 끊고 그 시간을 독서 등 건설적으로 사용한 것, 셋째는 정년퇴직 후 투자 실패로 힘들었던 시기에 글쓰기에 올인했던 것”을 꼽았다. 아드님만 셋이시지요. SNS를 보면 아드님이 아버지와 이야기도 나누고 가족을 위해 양갈비 요리도 하는 등 살갑더군요. “(얼굴이 환해지며)요즘 세대는 우리와 근본부터 달라요. 나는 전쟁 치르듯 치열하게 살았지만, 얘네는 즐겁게 누리고자 하니까요. 공학을 전공했는데 모 방송 주최 랩 오디션에 나가 본선에 진출하기도 하고…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요. 내가 애들에게 오히려 배웁니다.” 그는 아들 이야기를 꺼내자 영락없는 아들 바보가 됐다. 아들과 와인 관련 공동칼럼을 쓴 적이 있었단다. 소비자가 앱을 통해 와인 품질을 즉각 분석, 판단할 수 있게 한 와인평가 앱이 출현, 전문가 위주의 와인평가 2.0시대에서 소비자 중심의 와인평가 3.0시대로 넘어간다는 트렌드 기사였다. 기성세대인 홍 교수는 이 기사를 쓰는 데 그쳤지만 신세대 아들은 와인 검색 비비노 앱 창업자인 하이니 자카리아슨(Heine Zachariassen)에게 기사를 번역, 복사해 이메일로 보내 교신까지 하더란다. 그는 현재 아들과 ‘실리콘밸리 이야기’와 ‘유대 금융자본과 비트코인 세력 간의 세계대전’ 두 권을 공동집필하고 있다. 유대인 하면 교육열이 떠오릅니다. 자제분들께 적용한 유대인 교육이 있으십니까. “웬걸요. 애들 어릴 때 저는 유대인에 대한 관심이 없었지요. 손주들한테는 유아 때부터 적용해보고 싶어요. 특히 베갯머리 교육과 밥상머리 교육은 꼭 해보고 싶어요. 잠자기 전 동화를 읽어주고, 밥상에서 인생의 산 교훈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하는 것이죠. 유대인이나 한국인이나 교육열이 높지만 큰 차이가 있어요. 우리는 혼자 잘나길 원하지만, 이들은 철저히 협업을 강조합니다.” 그는 유대인과 한국인 교육의 가장 큰 차이를 두 가지로 요약했다. 달란트 vs 베스트, 학업 vs 인성이 그것이다. 우리는 공부의 목적을 역량강화, 즉 성공력에 둔다. 반면에 유대인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재능개발에 둔다. 또 우리는 경쟁에서 승리, 최고가 될 것을 주문하지만 유대인은 단결력에 둔다. 어려서부터 합숙교육을 통해 협동력을 체화해 유대인끼리 서로 형제처럼 돕는다. 상대의 단점을 보며 시기, 경쟁하기보다는 강점을 보며 협력한다. 이들에게 협상능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협동능력이다. ‘남을 비난하는 자’뿐 아니라 그것을 말리지 않고 들은 사람까지 ‘공공의 적’으로 금기시한다. 또 실력보다 매력, 즉 인성과 협동심을 우선시한다. 인생 2막을 앞둔 분들께 조언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하늘은 일단 들이대는 사람을 좋아한다”입니다. 당장의 일자리를 찾기보다 오랫동안 할 일거리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들이대고 저지르고, 그다음엔 밀어붙여라. ‘하늘은 열정에 반해 마법을 일으키게 한다.’ 힘들 때 내가 스스로에게 한 주문이기도 합니다.” 인터뷰 후, 홍 교수가 자작시를 문자로 보내왔다. 이 시를 읽으며 ‘절대 절대 절대’란 말에 목울대가 울컥해졌다. 지금 2막의 새 신발끈을 묶고 있을 당신, 거센 풍랑에 맞부딪히더라도 절대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라. 제목은 ‘거센 풍랑을 만나거든’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하고 박차고 일어나 맞서라. 일생에 한 번은 독해져라. 처절하리만큼 치열하게 맞붙어라. 길고 긴 힘들고 지루한 싸움이 될 것이다. 출구 없는 절망 속에 갇혀 허우적거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마라. 절대 포기하지 마라. 절대. 절대. 절대. 그 거대한 고난을 이겨내면 은혜는 슬며시 다가온다. 고난에 좌절하면 은혜 역시 고개 돌린다. 은혜는 항상 고난을 앞세우고 다가온다. 거저 오는 법이 없다. 얄미운 은혜다.
- 2018-01-29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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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무리의 상징, ‘귀뚜라미[蟋蟀]’
- 2017년은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아울러 2015년부터 3년간 써온 필자의 한문 산책 역시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그동안 필자의 칼럼을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지면을 빌려 감사를 드리며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시제를 골라봤다.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시로서 가장 오래된 작품은 무엇일까?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가(詩歌) 문학을 대표하는 ‘시경(詩經)’에서 세모의 시는 바로 당풍(唐風)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실솔3장(蟋蟀三章)’이다. ‘실솔(蟋蟀)’이란 귀뚜라미를 의미하는데, 3장으로 이루어진 이 시의 제1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蟋蟀在堂(실솔재당) 귀뚜라미가 마루에 있으니 歲聿其莫(세율기모) 해가 드디어 저물었도다. 今我不樂(금아불락) 이제 우리가 즐거워하지 아니하면 日月其除(일월기제) 해와 달이 (우리를 버리고) 가리라. 無已大康(무이태강) 너무 편안하지 아니한가. 職思其居(직사기거) 자신의 직책을 생각하여 好樂無荒(호락무황) 좋아하고 즐거워함을 지나치지 않음이 良士瞿瞿(양사구구) 어진 선비의 두려워하고 조심함이니라. 귀뚜라미가 마루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당시 주나라 빈(豳) 지방의 노래였던 ‘빈풍(豳風) 칠월(七月)’을 보면, “七月在野(칠월재야:칠월이 되면 귀뚜라미가 들에 있고), 八月在宇(팔월재우: 팔월이 되면 집 안에 들어오고), 九月在戶(구월재호: 구월이 되면 문 안으로 들어오고), 十月蟋蟀(시월실솔: 시월이 되면 귀뚜라미가), 入我牀下(입아상하: 내 침상 아래로 들어오느니라)”란 표현이 있다. 귀뚜라미가 날이 추워지자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인 집으로 찾아 들어오는 모습으로 한 해가 지나감을 표현한 것인데, 빈풍의 노래들은 하나라의 월력인 하력(夏曆)을 사용한 관계로, 한 해의 마지막 달이 12월이 아닌 10월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귀뚜라미가 마루에 있다’는 표현은 하력으로 따지면 9월에서 10월 초, 그리고 주나라 이후 사용된 주력(周曆)에 의하면, 11월에서 12월 초 정도의 시점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는 한 해의 노고를 돌아보며 즐기되 지나치지 않음을 강조한 시다. 이후 많은 곳에서 인용되었는데, 주로 한 해의 마지막을 나타내는 세모 또는 선비가 스스로를 다지는 마음가짐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예컨대, ‘고시19수(古詩十九首)’ 중 ‘동성고차장(東城高且長)’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四時更變化(사시경변화) 사계절은 변화하기 마련이라지만, 歲暮一何速(세모일하속) 연말이 돌아옴은 어찌 그리 빠른 것인가? 晨風懷苦心(신풍회고심) ‘시경’ 신풍편(晨風篇)에는 버림받은 신하의 괴로움을 나타내고 있고(벼슬 못하는 괴로움), 蟋蟀傷局促(실솔상국촉) ‘시경’ 실솔편(蟋蟀篇)에는 구속되어 살아감[局促]을 상심하는 뜻을 나타내고 있네(벼슬살이하는 괴로움). 한편 조선시대 기대승(奇大升)의 ‘고봉집(高峰集)’ 천상추기근(天上秋期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亹亹送流年(미미송류년) 세월이 갈수록 자꾸 흐르는 해를 전송하게 되는구나. 奔走紅塵裡(분주홍진리) 세상 풍진 속에 혼자 분주하니, 空吟蟋蟀篇(공음실솔편) 부질없이 실솔편만 읊조리누나. 3년간 써온 한문 산책을 마감하니 위의 ‘空吟蟋蟀篇’이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는다.
- 2018-01-06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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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세대 재미교포 여성운동가, 그레이스 김의 망부가(忘夫歌)
- 미주 한인 사회에서 지식인의 멘토로 불렸던 노부부가 있었다. 정신과 전문의로 UC데이비스 의과대학에서 35년간 교수로 근무했던 故 김익창 박사와, 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 25년간 교사로 일했던 그레이스 김(한국명 전경자·86)씨다. 부부는 평생 소외받는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힘썼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싸웠다. 53년을 함께하는 동안 그들은 최고의 동지이자 친구였으며 연인이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아내는 여전히 열심히, 행복하게 살고 있다. “You should keep going.” 당신은 계속 그렇게 살아 달라는 것이 남편의 바람이었다. 사랑스러운 사회운동가 “동호회에서 주최하는 클래식 음악회 준비로 정신이 없어요. 오후에는 신문사에 음악회 기사를 전달하러 가야 해요. 오늘도 너무 바쁘네요!” 그녀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친다. 3년 전, 애너하임의 한 노인병원에서 김익창 박사와 그레이스 김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김익창 박사는 파킨슨병으로 상당히 힘들어하면서도 아내와의 인터뷰를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당시 인터뷰 주제는 ‘부부’였는데 김 박사는 “부부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젓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남편은 나를 커뮤니티 액티비스트(사회운동가)라고 별명처럼 불렀어요. 조용하고 신중했던 그와 달리 나는 말도 많았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곤 했는데 남편은 그런 내 모습을 사랑해줬지요. 우리는 6·25전쟁을 눈앞에서 겪은 세대입니다. 모두가 못 배우고 가난한 시절에 그래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우리는 그것을 갚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소외받는 곳,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늘 관심을 두게 되었어요.” 1931년 중국 상해에서 나고 자란 김씨는 해방이 되던 해 부친의 고향이었던 평안북도로 돌아왔고, 남북으로 갈리게 되자 다시 38선을 넘어 왔다. 이 과정에서 막내 동생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때 거침없이 행동하는 것은 그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상해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은 임시정부에 돈을 보내며 독립운동을 도왔고, 주위에 고학을 하는 한국 유학생이 있으면 장학금을 내놓기도 했다. 어머니 역시 그 시대에 평양신학교를 나온 신여성으로서 이웃과 나누는 것을 평생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고. “여고 시절 내 꿈은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가서 슈바이처 박사와 함께 일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화여대 의대로 진학했지요. 그런데 입학한 그해 6·25전쟁이 터졌어요. 산속으로 피난을 갔다가 와 보니 집이며 모든 것이 폭격으로 사라져버렸더라고요. 너무 화가 나서 당장 군에 입대해 총 들고 싸우겠다고 고집을 부렸죠. 어린 아가씨가 얼마나 맹랑했겠어요. 그때 영락교회를 다녔는데 목사님이 하루는 보여줄 곳이 있다면서 저를 데리고 가신 곳이 있어요. 바로 고아원이었죠.” 폭격을 맞고 부서진 학교 건물에 임시로 마련된 고아원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밤낮으로 울부짖었고 아프고 굶주린 아이들을 돌봐줄 손길은 없었다. 그렇게 김씨는 여군 대신 고아원 선생님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김씨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재입학한다. “등록금을 댈 형편이 아니었어요. 서울대 사범대가 등록금도 싸기도 하고 모자라는 교사를 길러내기 위해 장학금도 많이 준다고 하니 좋았지요. 또 고아원 선생을 하면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도 알게 되었고요. 무엇보다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으니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요?” 서울대학교 캠퍼스에서 그녀는 남학생들이 데이트 신청이 쇄도할 만큼 인기가 있었지만 모두 퇴짜를 놓아 별명이 ‘NO’였을 정도로 콧대가 높았다고 한다. 그중 유일하게 ‘YES’를 한 것이 남편 김익창 박사의 오페라 데이트 신청이었다고. 생전 김익창 박사는 인터뷰 때마다 첫눈에 반할 정도로 ‘탁월한 미모의 소유자’였다고 아내를 향한 무한 애정을 드러내곤 했다. 1956년, 김익창 박사가 미국 유학을 떠난 이후 6년 동안, 두 사람은 장거리 연애를 시작한다. 그 사이 김씨는 숭의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후 거리를 배회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용산직업학교를 세워 불우한 형편의 아이들을 지도했다. “6년 동안 우리는 떨어져 있으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어요. 그때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편지로 주고받았는지 몰라요. 삶에 대한 가치관, 철학, 문학, 음악, 예술, 종교에 대한 생각을 나누면서 우리가 서로 얼마나 닮아 있는지 알게 되었죠. 그 시간 동안 다져진 신뢰는 남녀의 사랑 그 이상이었어요.” ‘Dear, Grace’ 1962년, 마침내 두 사람은 미국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김익창 박사가 샌프란시스코 마운트 자이언(Mt. Zion) 병원에서 인턴십을 하는 동안 두 아들 데이비드와 다니엘이 태어났고, 남편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병원 응급실에서 일해야 했다. 잠을 잊고 살아야 했던 고된 시절이었다. “대단한 정신력이 아니면 견딜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렇게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3년 만에 박사과정을 끝내더라고요. 레지던트를 마칠 무렵 남편이 내게 공부를 해보라고 제안했어요. 너무 기뻤죠. 내가 너무나 원하던 거였으니까요.” 김씨는 그 길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원에 진학, 1969년 상담학과 아동발달학으로 교육 석사학위를 받는다. 캘리포니아의 진취적인 교육 도시 데이비스에 정착하면서 부부는 본격적으로 소수민족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게 된다. 김익창 박사는 임상정신과 의사로서 평생 소수민족의 정신의학에 관심을 두었다. UC데이비스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문화가 다른 환자들에 대한 의료진들의 이해’를 강조하며 대학에 강좌를 만들고 끊임없이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다문화 정신의학 분야의 권위자로 자리 잡았고 그의 노력으로 현재 미국 정신의학협회에는 ‘화병’이 정식 병명으로 등록되어 있다. 김씨는 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언어와 문화 차이로 어려움을 겪는 소수인종 학부모들과 학교를 잇는 가교 역할을 자청했다. 특히 인종차별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어떤 차별도 받지 않도록 앞장섰다. 특히 1980년부터 시작했던 미주 한국일보의 질문과 응답 형식의 칼럼 ‘Dear, Grace (그레이스에게)’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어느 날 신문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부모들이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려움이 많다고요. 흔쾌히 하겠다고 했죠. 궁금한 것을 편지로 보내면 답을 주겠다고 했는데… 세상에, 편지가 어마어마하게 와서 너무 놀랐어요. 궁금한 것은 많은데 어디에 물을 곳이 없었던 거예요. 한국말을 하는 선생님이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부모와 자녀 간의 갈등, 학교와의 마찰, 인종문제를 비롯해 마약, 섹스, 가출 문제까지. 그레이스 김은 한인 학부모와 청소년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고 칼럼은 1990년까지 계속됐다. 나눔, 그 위대한 유산 이들 부부에 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부’에 대한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입양아 단체, 아시안 청소년 장학재단 등에 적지 않은 기부를 하고, 무료 진료와 상담 등의 봉사활동을 해왔던 부부가 은퇴하면서 제대로 일을 치른 것이다. 2006년 김익창 박사가 35년간 몸담았던 UC데이비스 대학에서 나왔을 때, 이들은 캘리포니아 실비치의 한 은퇴촌에 작은 집을 마련한 뒤 나머지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 20여 개 단체에 전달한 기부금은 적게는 5만 달러, 많게는 25만 달러에 이르렀다. 모두 익명으로 한 기부였다. 이 놀라운 기부는 당시 UC데이비스대학에서 이들이 내놓은 기부금 25만 달러로 ‘다문화정신의학센터’를 만들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사실 그만한 목돈이 생긴 데는 숨은 사연이 있어요(웃음). 젊은 시절 내가 하도 많이 기부를 하고 다니니까 남편이 매달 월급의 반만 받고 나머지는 은퇴연금으로 저축을 하자고 한 거예요. 은퇴할 때 그렇게 돈이 쌓인 줄 몰랐어요. 평소 돕고 싶었던 단체 리스트를 적어 내려가는데 얼마나 신이 나던지. 남편과 아주 펑펑 잘 썼어요!” 고마운 것은 부모의 결정을 기쁘게 받아들여준 두 아들이었다. “그때 아이들이 한 말이 잊히지 않아요. 돈이 필요하면 지금 이야기하라고 했죠. 두 아이 모두 자신들을 키워준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다며 원하는 곳에 다 쓰라고 하더라고요. 아, 우리가 아이들을 잘 키웠구나. 갑절로 행복해지더라고요. 두 아들 내외 역시 어려운 곳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기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아요.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2009년 데이비드 김씨가 지난 오바마 정부의 교통부 차관보에 임명됐을 때, 그가 남긴 말이 있다. 부모님은 늘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마음만 있다면 언제나 남을 도울 힘이 있다고요.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또 다른 방식으로 도울 수 있다는 거죠. 바로 그 나눔의 정신이 우리 가족을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고개 들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아시아인은 돈을 많이 벌어도 미국 주류 사회에 들어가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님의 삶은 제 미래를 위한 최고의 투자였습니다. 부모님의 기부가 저를 성공적으로 키운 셈입니다. 상해에서 독립운동가와 유학생을 돕던 부모에게서 김씨에게로, 이것이 다시 김씨의 아들들에게로 이어진, 참으로 위대한 유산이다. To my forever love… ‘김 여사의 해피 에너지’는 은퇴촌에서도 빛을 발했다. 김씨는 입주한 은퇴촌 실비치 레저월드의 한인회 회장이 되어 커뮤니티 간 화합에 앞장섰다. 한인 노인들을 위해 각종 세미나와 교양 프로그램을 속속 만들어내는가 하면 지역구 선거에 한인 후보자가 나오면 발벗고 나서서 선거운동을 도왔다. 물론 그 뒤에서 묵묵히 김씨를 돕는 사람은 남편 김익창 박사였다. 이 무렵 김익창 박사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면서 부부에게는 예상치 못한 슬픔이 찾아왔지만 이 또한 차분히 받아들였다. “한동안 멍했지요. 왜 이런 병에 걸리게 됐을까. 젊었을 때 잠을 너무 못 자고 힘들어서였을까…. 하지만 남편은 곧 받아들이고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어요. 파킨슨병은 관리만 잘하면 당장 어떻게 되는 병이 아니라면서요. 그렇게 8년을 투병했지요. 그 사이 자신의 인생을 덤덤히 돌아보며 두 권의 자서전도 집필했고요.” 병세가 악화되어 노인병원에 입원하고 2년 동안, 부부는 다시 연애를 시작하는 기분이었다고. 아내는 매일 아침 예쁘게 화장을 하고 직접 구운 쿠키를 만들어 남편을 만나러 갔고, 남편도 눈을 뜨면 아내를 기다렸다. 전립선암이 발병했을 때는 상당히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김 박사는 항상 웃는 얼굴로 아내를 맞아주었다. 병원 스태프에게 ‘She is my forever love’라고 소개해 사람들을 웃게 만들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편지 한 장을 건네더라고요. ‘결혼해줘서 고맙고 행복했다. 아파서 미안했고 먼저 가서 또 미안하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까지처럼 계속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슬픈 삶을 살까봐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어요. 끝에는 늘 하던 말, ‘my forever love’라고 적어놓았더군요. 마지막 러브레터였어요(웃음).” 김익창 박사가 떠난 후, 그녀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며칠을 먹지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문득 자신이 이렇게 될까봐 걱정하며 병실에서 간신히 손을 움직여 편지를 썼을 남편이 떠올랐다. “아니다. 남편이 가장 좋아했던 내 모습으로 끝까지 열심히, 즐겁게 살자. 그렇게 결심했어요. 나는 지금 아주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은퇴촌에서 음악회도 열고 노래도 부르고 세미나도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어요. 그러다 남편이 너무 그리울 때는 조용히 말합니다. ‘하나님 나는 준비되었으니 이제 데려가셔도 됩니다. 루크를 만나게 해주세요…’ 라고요(웃음).” 오랜 대화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열심히 포즈를 취해주는 그녀의 미소가 캘리포니아 햇살만큼이나 화사하다. 누구에게나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하는 이런 모습을 남편은 사랑했으리라. “Good to see you!” 쿨하게 인사를 남기며 보무당당히 사라지는 ‘유쾌한 그레이스씨’. 그녀와의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
- 2017-11-13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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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의 추천 전시, 도서, 영화, 공연
- ◇exhibition 王이 사랑한 보물: 독일 드레스덴박물관연합 명품전 일정 11월 26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독일 드레스덴을 18세기 유럽 바로크 예술의 중심지로 이끌었던 폴란드의 ‘강건왕’ 아우구스투스. 그가 수집한 예술품 중 130점을 총 3부로 구성해 전시한다. 제1부에선 아우구스투스의 군복과 태양 가면, 사냥 도구 등 그의 권력을 상징하는 유물들이 소개된다. 아우구스투스가 수집한 예술품을 공개하기 위해 만든 보물의 방 ‘그린볼트’를 소개하는 제2부에선 당대 최고의 장인을 동원해 제작한 공예품을 선보인다. 각종 보물이 사용된 작품을 통해 화려한 바로크 예술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 제3부에선 18세기 중국과 일본의 수출 도자기와 초기 마이센 자기를 한눈에 비교해볼 수 있다. 전시장 내부를 확대사진 기술을 사용해 드레스덴 궁전 내부와 비슷하게 연출한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도그 in 강남 일정 11월 19일까지 장소 강남미술관 반려동물 인구 1000만 시대를 맞이해 동양화작가 곽수연, 사진작가 김현욱, 입체작가 빅터조, 업사이클링작가 엄아롱, 일러스트레이터 이연경, 도예작가 틸다 등 다양한 분야의 작가가 모였다. 반려동물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는 회화, 설치, 사진, 조형 등으로 표현된 총 5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강남미술관이 무료로 제공하는 애견기저귀를 착용할 경우 반려동물도 입장이 가능하다. 반려동물이 있다면 함께 관람해도 좋다. 다양한 작품 외에도 유기견을 입양한 견주들이 보내준 사연을 읽어볼 수 있다. 또 반려동물 관련 서적을 비치하는 등 반려동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전시장 건물 옥상에는 반려동물과 함께 쉴 수 있는 ‘반려동물 놀이터’가 마련되어 있다. ◇book 걸어도 걸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저·민음사) 15년 전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다 세상을 떠난 장남 준페이. 작품 속의 ‘오늘’인 그의 기일을 맞아 온 가족이 모인 하루를 담아낸 이야기다. 가족 간의 쉽지 않은 소통과 그럼에도 연결하고자 하는 욕구를 ‘걸어도 걸어도’ 끝나지 않는 여정으로 그려내며 아스라한 동경과 영원한 그리움의 상대는 가족임을 들려준다. 향기 탐색 (셀리아 리틀런 저·뮤진트리) 고고학자인 어머니를 따라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성장한 저자 셀리아 리틀턴의 향기 탐색서다. 냄새로 기억되는 곳들을 추억하며 향의 발자취를 답사하고 회고한다. 각 나라 특유의 향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향의 기초적인 원료와 재배법, 향수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살펴볼 수 있다. ◇movie 유리정원 칸,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신수원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국내에선 보기 드문 소재와 독창적인 스토리로 다시 한 번 주목을 끌었다. 은 베스트셀러 소설에 얽힌 미스터리한 사건을 중심으로 그 속에 감춰진 슬픈 비밀을 그린 작품이다. 10월 22일에 열린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몽환적이면서도 독특하다”, “신수원 감독의 남다른 상상력을 실감하게 만든다”는 호평을 받았다. 또 숲속의 유리정원에서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혈액을 연구하며 초록 피가 흐르는 ‘재연’ 역을 맡은 문근영이 2년 만에 스크린으로 복귀한 작품으로 기대를 모았다. 개봉 10월 25일 장르 미스터리, 드라마 감독 신수원 출연 문근영, 김태훈, 서태화, 임정운 등 리빙보이 인 뉴욕 이후 , 시리즈를 연출한 마크 웹 감독이 다시 한 번 로맨스 영화로 돌아왔다. 은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젊은 남녀 간의 로맨스를 통해 도시 뉴욕의 풍경을 스크린에 담았다. 마크 웹 감독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도시인 뉴욕의 가장 현실적인 모습을 담아내고 싶었다”며 뉴욕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을 드러냈다. 맨해튼의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 가을을 배경으로 촬영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국내에선 로 얼굴을 알린 칼럼 터너가 남자 주인공 ‘토마스 웹’ 역을 맡았다. 개봉 11월 9일 장르 드라마, 로맨스 감독 마크 웹 출연 칼럼 터너, 케이트 베킨세일 등 ◇stage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드라마와 영화로도 제작된 이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항상 사랑받기를 꿈꾸며 살았던 여인 마츠코의 기구한 삶을 감성적인 연출과 음악으로 그려내며 진정 그녀의 인생이 혐오스러운 삶이었는지 되묻는다. 장소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일정 10월 27일~2018년 1월 7일 연출 김민정 출연 박혜나, 아이비, 강정우 등 도둑맞은 책 인간의 행동은 의지인가 욕망인가. 영화대상 시상식 날 납치된 시나리오 작가 서동윤, 그리고 그를 납치한 보조작가 조영락. 두 사람을 통해 연극 은 인간이 극한 상황에 몰려 사람다움을 포기할 때 얼마만큼 추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장소 충무아트센터 소극장 블루 일정 10월 13일~12월 3일 연출 변정주 출연 이현철, 이갑선 등 에어포트 베이비 미국으로 입양된 조쉬가 친부모를 찾아 한국을 방문하면서 겪는 이야기다. ‘입양’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담백하고 재치 있는 대사로 풀어내면서 감동을 선사한다. 8년 동안 수정과 보완작업을 거친 작품으로 현실적 소재를 잘 소화했다는 평을 받았다. 장소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1관 일정 10월 17일~12월 31일 연출 박칼린 출연 최재림, 유제윤, 강윤석 등 오펀스 새로운 시도와 도전으로 공연계의 독보적인 연출가로 불리는 김태형이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가정과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고아 형제 트릿과 필립, 그리고 중년의 부유한 갱스터 해롤드. 아픔과 상처를 지닌 세 인물을 통해 따뜻한 격려와 위로를 전한다. 장소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일정 9월 19일~11월 26일 연출 김태형 출연 박지일, 손병호, 장우진 등
- 2017-11-06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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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감 찾기
- 블로거들의 최대 고민은 글감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쓰고 나면 쓸 거리가 없다고 토로한다. 필자는 30년간 봉제 계통의 월간 전문지에 필자 이름으로 된 칼럼을 쓴다. 매월 A4 2장 반 정도의 글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봉제 업종에 종사하고 있을 때는 그런대로 글감을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해외 전시회에 다녀오면 전시회 관련 글을 쓰면 되었고, 회사 내에서 일어난 일들도 기밀사항이 아니면 쓸 수 있었다. 같은 업종과의 교류도 많았다. 그러나 봉제계를 떠난 지 이미 20년이 다 되어간다. 그러니 봉제 관련 글을 그만 한 분량으로 매달 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만 쓰려고 몇 번이나 마음먹었으나 아직도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필자의 봉제 칼럼이 나름대로 인기가 있어 단행본으로 만들어줄 계획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업계의 한 경영자는 필자가 쓴 글을 보고 필자를 따로 만나 취업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었다. 매월 마감일이 15일 정도인데 필자는 새 달 첫날 원고를 보내준다. 잡지사 측에서 가장 고마워하는 일이다. 그 비결은 미리 원고를 써두는 것이다. 글감은 삼라만상에서 찾을 수 있다. 필자만의 시각으로 낯설게 보는 것이 요령이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좀 특이하다 싶으면 글감으로 찍어둔다. 개인의 신변잡기도 글감이다. 직접 경험한 일이므로 어렵지 않게 쓸 수 있다. 지인들과 술을 마시며 나눈 얘기에서도 글감이 나온다. 그래서 글감이 되겠다 싶으면 즉시 메모를 해둔다. 필자는 스마트폰 메모장을 이용한다. ‘충격 받기’라 하여 자다가도 충격적으로 글감이 떠오르면 즉시 메모해둔다. 술자리에서 나온 얘기들은 술이 깨고 나면 메모가 너무 간단해 생각이 안 날 때가 있어 비교적 자세히 뼈대까지 병기해둔다. 그런데 해외여행을 며칠 다녀와 여행기를 쓰고 나면 글감이 두절되는 현상이 온다. 해외여행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기 때문에 다른 것에는 신경을 못 썼기 때문이다. 머리도 멍하고 굳어지는 느낌이다. 게다가 그런 현상이 오래간다. 그래서 여행 전에 여행기 외에 여행 갔다 온 후 쓸 글감을 미리 저장해둔다. 비교적 쉬운 글감은 영화, 공연, 행사, 여행 등에서 직접 경험한 일들이다. 영화는 인터넷에 보면 시놉시스가 있고, 행사와 공연은 안내서나 브로슈어가 있다. 거기 쓰려는 글 분량의 절반 이상의 자료가 들어 있다. 여행은 직접 경험한 것이므로 가장 자신 있게 쓸 수 있다. 책도 한 권 다 읽고 나면 반드시 글로 남기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 책을 덮고 나면 기억이 안 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독후감에 참고할 내용이 있는 페이지를 표시해둔다. 신문은 글감의 보고다. 글 잘 쓴 사람들의 글을 보며 익힐 수도 있고 같은 제목이지만, 다른 시각에서 본 필자의 시각도 글감이 된다. 글감은 스스로 찾으려 하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고 떠오르지도 않는다. 먼저 습관으로 만들어 두는 것이 좋다. ‘매일 한 편씩 글을 쓰겠다’는 과제를 자신에게 줘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며칠이 후딱 지나간다.
- 2017-09-11 1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