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은 서울에서 두 시간 남짓한 거리다. 바다가 있고 나지막한 산이 있고 역사의 숨결이 머문다. 서해 바다로 떨어지는 낙조는 흐릿할 때도 있고 더할 수 없이 화려해지기도 한다. 서산에서 어떤 해넘이를 만날 수 있을까?
아침에 눈을 떴는데 불현듯 가을의 개심사가 궁금하다. 세상사 번잡함을 내려놓고 느리게 걷기 좋은 곳, 서산에 간다.
개인 취향으로 서산 제1경은 개심사다. 왕벚나무 꽃이 피는 봄철에는 상춘객으로 들썩이는데 가을은 어떤 색일까? 여전히 소담스럽다. 단풍이 은은하게 든 나무에 둘러싸인 개심사는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개심사 입구임을 알리는 표지판에서 시작되는 돌계단이 실개천을 지나고 나서는 급격히 휘어진다. 직선이 아닌 곡선의 길을 걸을 때면 휘어진 길 끝에서 만나게 될 풍경에 대한 기대가 크다.
돌계단이 끝나자 개심사가 나타난다. 봄의 분주함과는 확연히 다른 가을의 고요함이 흐른다. ‘마음을 여는 절’, 개심사의 가을은 번잡하지 않아서 좋다. 마음을 열기 좋은 계절은 가을이다.
연못가에 서 있는 우람한 둥치의 서어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었고 주렴처럼 열매를 늘어뜨리고 있다. 경내 계단을 올라 만난 건물의 기둥이 독특하다. 나무를 그대로 사용한 도랑주의 자연스러운 곡선미 위에 부화한지 얼마 되지 않은 유리산누에나방이 날개를 펴고 쉬고 있다. 명부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을 오르며 가을햇살이 내리쬐는 숲으로 들어간다. 가을날 거닐기 좋은 절, 개심사는 시간이 느려지는 여행지다.
해미읍성 또한 산책하기 좋은 서산 여행지다. 읍성 안의 너른 잔디밭은 시민들의 휴식처다. 초가를 새로 얹는 분주한 손길이 겨울 채비에 한창이다. 1,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가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아름드리 회화나무는 그때의 시간을 기억하는 듯 상처 입은 채 서 있다. 읍성 성곽을 따라 걸으며 바람을 느낀다.
서산은 바다가 지척이어서 가볼 만 한 곳이 많다. 간월암, 삼길포항에서 서해 바다로 떨어지는 낙조를 만날 수 있다. 간월암(看月庵)은 만조에는 섬이 되었다가 간조가 되면 육지와 연결되는 길이 나타나는 신비의 섬, 간월도에 있는 암자다.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일몰 시간까지 기다려 간월암 앞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 붉게 변하는 하늘을 바라본다. 우측으로는 빨간 등대가 보이고 갈매기들이 하늘로 날아든다. 서산은 느려도 좋다고 말하는 여행지다. 개심사의 단풍과 해미읍성의 바람, 간월암의 낙조까지 천천히 쉬며 놀며 서산을 만나보자.
6월은 여행하기에 어렵다. 화사한 봄꽃을 볼 수 있는 계절도 지나고, 시원한 바다에 풍덩 뛰어들고 싶은 절정의 여름도 아니니 말이다. 이런 계절에는 축제나 체험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오히려 반갑다.
서해안의 절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팔봉산 기슭에서 해마다 6월이 되면 감자 축제가 열린다. ‘감자 축제가 뭐야?’ 할 사람도 있겠지만, 팔봉산 감자는 황토와 자갈이 섞인 흙에서 해풍을 맞으며 자라니 맛이 뛰어나다. 쪄놓으면 포실포실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6월이라곤 하지만 한낮 기온이 30℃에 육박하는 날씨에 감자밭에 쪼그리고 앉았다. 목장갑을 끼고 어느 고랑이 실한 감자를 품고 있을까 어림짐작하여 자리를 잡았다. 흙을 파기 위해 호미질을 하니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난생처음 해보는 호미질이 걱정이었지만 땅에 호미를 대자 주먹만 한 감자가 줄줄이 따라 나왔다. 웃음도 저절로 따라왔다.
따가운 햇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감자를 깼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호미를 들고 감자를 캐는 등의 수확 기쁨을 느껴 본 적이 없다. 약간의 체험비를 내면 수확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체험 여행의 묘미 같다. 5kg을 담을 수 있는 노란 봉지 가득 감자를 담고 허리를 펴자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즐겁고 재미있지만, 한편으론 이 감자를 수확하기까지 수고하고 애쓴 분들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쿠 밥솥에 물 반 컵을 넣고 취사를 누르면 포실포실 맛있는 감자를 맛볼 수 있는 팔봉산 감자 축제에서는 5kg 8,000원, 10kg 15,000원 체험비를 내면 해풍이 길러낸 감자를 직접 수확할 수 있다.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서해안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가까이에 서산의 9경 중 하나인 간월암이 있으니 즐거운 수확을 마친 후에 함께 둘러보면 좋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첫 번째 임금이 되기까지 많은 도움을 준 무학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썰물 때면 육지와 연결돼 걸어 들어갈 수 있고 밀물 때가 되면 섬처럼 보이는 신비한 암자다.
섬이라곤 하지만 아주 자그마한 암자 하나뿐이다. 육지에서 섬까지 100m도 채 안 되는 길을 걸어 들어가면, 깊은 산 속이 아닌 바다 위에 세워진 작은 암자를 만날 수 있다. 절집은 공사 중이었지만 넓디넓은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간월도는 굴이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주변이 온통 굴밥 집이다. 맛이 뛰어난 굴이 듬뿍 들어간 영양 돌 밥을 먹고, 무학대사가 이성계에 진상했다던 이곳 특산품 서산 어리굴젓까지 사고 나면 완벽한 하루 여행이다. 서울에서 2~3시간이면 닿을 수 있으니 당일 여행으로도 좋은 코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