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가을밤에는 전국 문화재 야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지역별 문화재 야행을 알아보고 문화 체험도 소개한다.
경복궁 별빛야행
10월 8일까지 | 경복궁
외소주방에서 궁중음식체험과 전통 공연을 관람하고, 전문 해설사와 함께 별빛 산책도 할 수 있다.
예산 문화재 야행
9월15~16일 | 예산군청 일원
예산 성당, 예산호서은행본점 등을 방문하며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한 야간 문화 향유 콘텐츠를 체험하자.
보은 회인 문화재 야행
9월15~17일 | 회인 인산객사, 회인로 일원
도깨비 마을로 변한 보은 회인에는 천연염색체험, 무형문화재 줄타기 등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다양하다.
부여 문화재 야행
9월 15~17일 | 부여 정림사지
백제의 문화유산 정림사지를 중심으로 다양한 야간 역사문화체험을 하면서 사비백제의 밤을 누비자.
충주 문화재 야행
9월 22~23일 | 충주 중앙탑 사적공원 일원
가족, 연인, 반려견과 함께하는 문화재 야행. 문화재 스탬프 랠리와 공연 등을 즐기며 역사를 배울 수 있다.
왕궁리 유적지로 들어가면서 ‘여유롭다’란 말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유적지든 공원이든 시설물로 가득가득 채워지고 볼거리가 많음을 보여주려는 듯한 복잡한 풍경이 늘 아쉬웠던 터다. 널찍한 익산의 왕궁리 옛터엔 휑한 여백의 미가 팍팍, 신선한 바람 맞으며 헐렁한 여유감으로 벅차기까지 하다. 물씬한 황량함이 어쩐지 더욱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그 넓은 터에 혼자 온 듯한 여행자 두 사람만이 각자 이쪽저쪽에서 뚝 떨어져 호젓하게 둘러보고 있었다. 유난스러운 유적지의 시스템이 있을 법한데 여긴 그렇지도 않다. 딱히 꾸며진 모습 없이 자연스럽다. 이렇게 널널한 풍경이 된 역사 속을 걷는다. 관람 동선 안내문이 있지만 이 넓은 공간을 그냥 발걸음 닿는 대로 자유롭게 오가면 된다. 입구에서 호위하듯 고목이 숲을 이룬 길을 산책하듯 홀린 듯 걸으며 유적지를 돌아보는 맛,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멀리서도 홀로 오롯한 왕궁리 오층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포토존 프레임 안으로 바라보는 석탑 또한 기품 있다. 오랜 세월 너른 터에 우뚝 서서 품격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왕궁터를 돌아보건대 세련되고 웅장했을 백제 옛터다. 끊임없는 보존 노력으로 이제는 풍경이 된 역사 속에 서본다.
주변으로 몇 개의 건물터, 금당터가 자리를 지키고, 왕궁 둘레를 감아 도는 길에 단을 높인 대형 배수로의 흔적도 보인다. 왕이 휴식하던 후원과 공방, 화장실까지 옛사람들이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도록 조성했다는 설명서를 읽으니 그 시절 장인들의 디테일한 기술이 놀랍다. 이런 길을 따라 궁궐과 정원의 멋을 누렸을 백제 시대의 영화를 마음의 눈으로 그려보고 상상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공주, 부여와 함께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지구로 당당히 자리 잡은 후에도 여전히 발굴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천년 넘는 역사 속의 백제 문화유산은 무궁무진할 터.
왕궁리 유적 옛터에 내리는 노을을 보러 저녁 시간에 다시 와볼 생각이었는데 딴전 피우다 결국 그러지 못했다. 일몰이든 일출이든 천년이 훨씬 넘는 왕궁터가 배경이 되어준다면 그 풍경은 더 말할 게 없을 듯하다. 푸른 하늘과 늦가을 왕궁리의 조화가 이렇게나 멋진데, 날씨 따라 변화하는 백제 옛터 왕궁리의 사계는 또 어떨까.
미륵사지 석탑이 품은 이야기
왕궁리 유적지에서 미륵사지 석탑까지는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다. 정문에 들기 전에 ‘미륵사지 미디어아트 쇼’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게 뭐지’ 하면서 보고 있는데 이 지역 주민인 듯한 분이 지나다가 얼마 전에 진행된 행사라면서 참 볼 만한 쇼였다고 말해준다. 미륵사지 석탑 동·서쪽에 프로젝션 매핑 및 드론을 이용해서 다양한 빛과 형상을 표현하고 음악을 활용한 종합 미디어 쇼로 구현된 행사였다는 말이었다. 이렇게 익산 지역의 문화유산일 뿐 아니라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인 미륵사지 석탑의 가치 확산과 관광 활성화를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입구에 들면서부터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이렇게 너른 대지에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모습이 있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보았던 미륵사지 석탑, 백제 시대 최대 사찰이던 미륵사지는 국보 제11호다. 원래는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절반 이상이 붕괴된 모습이다. 그동안 꾸준히 보강하고 섬세한 복원 작업을 해온 결과, 지금은 미완의 6층 석탑으로 우뚝 서 있다. 복원 작업 중 해체 수리하면서 내부에서 사리장엄구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현재 내부는 입장할 수 없다.
우리의 기술로 거의 완벽하게 복원된 미륵사지 동탑. 옛 석탑을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개방해 들어가 보았더니 시원하다. 그 서늘함이 그 옛날의 기운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길 양옆의 연못이 차분하다. 연못 속으로 비치는 석탑의 반영이 오랜 세월 속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거길 지나 미륵사지 앞마당에는 동·서 방향으로 당간지주 두 기가 서 있다. 다가가 보니 생각보다 매우 크다. 보물 제236호로 지정되었다. 당간은 절에서 행사가 있을 때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놓는 돌기둥이다.
미륵사지 주변으로는 큼직한 돌이나 파편들이 몇 군데 자리 잡고 있는데 석탑의 노반 덮기 돌이라고 한다. 동원 금당터가 있고 몇 군데 터마다 목탑이나 석탑이 있었지만 화재로 사라지기도 하고 지금은 이렇게 기단만 남아 있는 상태다.
집에 와서 사진을 정리하다 유적지를 돌아보는 젊은 커플이 내 사진 속에 몇 번씩 담긴 걸 보았다. 널찍널찍한 터에 스며 있는 역사적 사실을 꼼꼼히 살피며 다니는 모습을 보며 참 예쁘구나 했다. 한적한 미륵사지 터를 돌며 데이트하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그저 그림이다. 백제 유적지의 풍경 속에서 그들만의 하루는 참 멋진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그뿐일까.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지나가는 가족의 모습 또한 아름답다. 이렇게 가족과 나들이하며 우리의 문화유산을 접해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즐거움일 것이다. 특히 백제 무왕의 흔적이 가득한 익산의 모습을 보려면 이곳 미륵사지를 빠뜨릴 수 없다.
한옥마을에서 호젓하게 하루
익산으로 떠나면서 그곳의 숙소를 검색했지만 마땅한 게 없었다. 어찌된 게 이 시기에 빈방이 없다고 나오는 곳도 제법 있다. 시내를 벗어난 곳의 숙소를 클릭해보았더니 한옥 숙소가 있다. 이름도 낯선 ‘함라’라는 곳에 위치했다. 일단 통화를 해보았다.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예약을 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익산시에서 20~30분 정도 달려 해질 무렵에 도착한 ‘함라마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통 보이지 않는다. 한적하고 조용하다. 체크인하고 밖으로 나와해 저무는마을 골목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농촌 지형을 그대로 살린 울퉁불퉁 돌담길의 자연스러움, 토담에 매달린 주먹만 한 호박과 노란 호박꽃, 가을을 알리는 담쟁이들의 뒤엉킴…. 알고 보니 토석담이 주를 이루는 함라마을의 이런 토담, 돌담, 화초담 등의 전통 담장이 등록문화재 제263호라고 한다.
그리고 시·도문화재로 지정된 함라 삼부자집의 조해영 고가, 김안규 가옥, 이배원 가옥 사랑채는 오래된 전통 가옥으로, 토석 담장과 한옥 기와지붕이 어우러진 전통적 경관이 볼 만한 곳이다.
함라 삼부자가 베푼 인심은 호남을 대표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숟가락 하나만 있으면 배고픔을 면할 수 있고 노잣돈까지 얻어 갔다는데, 당시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들이었다고 전한다.
이른 아침에 눈을 떠 아무도 없는 마당에 서니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정원의 꽃들이 선명하다. 풀잎에 아침 이슬이 송송송… 잔디 마당을 걸으니 운동화가 촉촉해진다. 관리동 어르신이 지나가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시며 이 먼 데까지 뭐하러왔냐신다.이렇게 조용한 거 처음이라니까, “조용하기로야 예가 절간이지 뭐” 하신다. 더러 시끄러울 수도 있을 테지만 하루 있는 동안 정말이지 한 점 소음이 없었다.
마을 바로 위쪽으로 함라향교가 마을을 품듯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조선 세종 19년에 세워진 함라향교는 겉으로 보기에도 아주 오래된 느낌이다.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쌓였지만 여전히 실용적인 향교로 건재한 채 지금껏 이어져오는 듯했다. 어르신도 말하신다. “이게 우리 아버지 때도 있었던 향교지요. 그때도 지내던 제를 지금까지 빠짐없이 이렇게 지냅니다.” 점잖고 선한 인상으로 꼭 존대어를 하신다.
한옥 숙소엔 도문대작이라는 식당이 있다. 허균(許筠)이 함열 유배 시절인 광해군 3년, 전국 팔도의 식품과 명산지에 관해 정리한 ‘도문대작’(屠門大嚼)을 저술했다고 한다. 함열관아 객사터 가까운 곳이 허균 선생의 유배 생활공간이었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바탕으로 이곳 함라 숙소의 식당 이름이 ‘도문대작’이다. 정이 넘치는 마을분들이 차려주신 수수한 한 상으로 흐믓했던 아침 시간이다.
그냥 시내의 흔한 숙소에서 묵었다면, 따끈한 온돌의 맛도 모르고 덜컹거리는이중 창호문여닫이도 못 해봤을 것이다. 아침 이슬 촉촉한 담장이 이어진 멋진 아침 산책도, 새벽 정원의 이슬도, 정다운 아침밥상도, 점잖으신 향교 어르신도 못 뵈었을 텐데. 교외로 조금 더 달려가서 묵은 조용한 한옥마을의 하루가 기억 속에 이렇게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 호젓해보기의 진수, 익산 여행은 확실한 힐링이었다.
바람이 서늘해지자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건 인지상정인가보다. 지인들과 서울 곰탕 맛집 정보를 공유하다 멀리 나주곰탕 이야기로 흘렀다. 꿀꺽 군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주곰탕, 돼지국밥처럼 향토색 강한 음식은 타지역에서 먹으면 왠지 그 맛이 안 난다. 곰탕 먹으러 나주에 갈 거라는 내 말에 지인들이 숟가락을 얹었다. “나주곰탕 포장 부탁해.” 말은 이래도 그들도 안다. 나주곰탕은 나주에서 먹어야 제맛인 것을.
3味로는 부족한 맛의 고장
나주가 호남 물류 중심지였던 호시절이 있다. 영산강 유역의 비옥한 나주평야와 뱃길 교통이 편리한 영산강을 품은 지리적 여건 덕이었다. 100여 년 전 영산강 나루터에는 특산물과 산해진미가 넘쳐났다. 사람이 몰려드는 만큼 음식문화가 발달했다. 그 문화가 ‘나주 3味’라 불리는 ‘나주곰탕’, ‘영산포 홍어’, ‘구진포 장어’로 이어졌다.
나주곰탕은 우시장에서 나오는 머리 고기와 뼈, 내장 등을 푹 고아낸 장터국밥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예부터 조선시대 관아인 금성관 앞에 큰 장이 섰다는데,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상인과 구경꾼들이 밥에 고깃국을 말아 후루룩 먹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군납용 소고기 통조림 공장에서 나온 소 부산물로 국을 끓인 것이 나주곰탕의 시초라는 설도 있다. 시초가 무엇이든 맛있는 곰탕을 지금 시대에도 맛볼 수 있으니, 식탐 많은 나 같은 여행자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나주 사는 지인이 “나주에 오면 곰탕보다 홍어를 먹어야죠” 하며 홍어 자부심을 드러냈다. 물론이다. 나주 3味에 연탄돼지불고기까지 야무지게 맛볼 생각이었다.
나주 여행의 시작은 곰탕으로
서울에서 아침 일찍 나주행 KTX를 타면 아침 식사로 곰탕을 먹을 수 있다. 나주역에서 구도심의 나주곰탕거리까지는 차로 약 5분 거리다. 많은 곰탕집 중에서 주로 가는 곳이 하얀집, 노안집, 남평할매집이다. 하얀집은 개업한 지 110년이나 되었고, 노안집과 남평할매집은 60년 정도 되었다. 동네 주민에게 최고 맛집을 물어도 똑 부러진 대답을 듣기 어렵다. “어느 집에서 먹어도 맛있어요. 다만, 식당마다 맛이 조금씩 달라요. 서울 사람이 좋아하는 식당이 있고, 나주 사람이 좋아하는 식당이 있어요” 한다. 결국 직접 맛을 보고 비교할 수밖에 없다.
나주곰탕은 설렁탕과 달리 국물 색이 맑다. 나주곰탕과 설렁탕 모두 소뼈와 고기를 푹 고아내는 방식은 같지만, 나주곰탕은 소뼈를 적게 넣고 양지나 사태로 육수를 내기 때문이다. 밥은 말아져 나온다. 밥이 담긴 뚝배기에 가마솥에서 펄펄 끓은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몇 차례 토렴한다. 밥알에 짭조름한 간이 배고, 뚝배기가 뜨끈해지면 살코기, 달걀지단, 대파를 올려 손님상에 낸다.
곰탕 맛은 국물 빛깔처럼 맑고 개운하다. 다진 양념을 풀면 칼칼해진다. 숭덩숭덩 썰어 넣은 고기는 새콤달콤한 초고추장 양념장에 찍어 먹으면 더 맛있다. 곰탕 맛을 북돋는 김치도 중요하다. 숟가락 위에 밥, 고기, 잘 익은 배추김치 또는 깍두기를 올려 먹어야 제대로 먹은 것 같다. 노안집의 배추김치는 감칠맛과 시원한 뒷맛이 일품이다. 사장에게 비결을 물었다. “김치 담글 때 여러 가지를 섞은 잡젓을 넣어요. 봄배추를 싹둑싹둑 썰어서 잘 익힌 김치가 최고 맛있지요. 봄에 또 오세요.”
곰탕 먹고 나주읍성 산책
곰탕거리 일대에는 고려시대 초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호남의 중심지였던 ‘나주목’의 사적지들이 모여 있다. 조선시대 객사이자 나주목의 중심 관청이었던 금성관, 나주 관아의 정문 정수루, 나주목을 다스렸던 목사들의 살림집 목사내아, 고려시대 때 세운 나주향교 등을 걸어서 둘러볼 수 있다. 왜구 방어를 위해 축조한 고려시대 읍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성문과 성곽이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1993년부터 나주읍성 사대문 복원 사업을 추진, 2018년 완공해 나주읍성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최근 나주향교 옆에 ‘39-17마중’이 들어서 구도심에 활기를 더한다. 39-17마중은 카페&와인바, 게스트하우스, 공연장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다. 이곳은 원래 나주 의병장 난파 정석진의 손자 정덕중이 1939년에 어머니를 위해 지은 난파 고택이었다.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이 집을 한 젊은 부부가 매입해 ‘1939년의 근대문화를 2017년에 마중하다’라는 뜻을 지닌 39-17마중을 조성한 것이다. 부부의 눈에는 한·일·양의 건축 양식이 결합한 근대 건축물과 마당의 아름드리 금목서가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고 한다. 영화 세트장 같은 난파 고택은 게스트하우스로, 마당의 큰 창고는 벽면을 통유리로 마감한 카페로 탈바꿈해 손님을 맞는다. 향교 담장이 카페 창가에 앉아 나주산 농산물로 만든 음료를 마시노라면 진짜 나주 여행하는 것 같다.
홍어 튀김 먹을 줄 알아야 홍어 고수
“홍어앳국 드셨나봐요.” 택시기사가 딱 알아본다. 홍어앳국 첫 경험을 이야기하자 “제대로 만든 홍어앳국을 드셨네요. 홍어 숙성도에 따라 등급이 나뉘는데 손님이 드신 앳국이 가장 많이 삭힌 등급 같아요. 나주 사람들은 그 정도 삭힌 걸 좋아해요. 앳국에는 4~5월에 나는 여린 보리 순을 넣어야 제맛이 나죠”라며 거든다.
홍어앳국은 홍어 뼈 육수에 된장을 풀고, 삭힌 홍어 내장과 보리 순을 넣어 얼큰하게 끓인다. 홍어 애는 홍어 간이다. 생 홍어 애는 연두부처럼 부드럽고 고소해 기름장에 찍어 먹는다. 삭힌 홍어 애를 넣은 홍어앳국은 암모니아 향이 매우 강하다. 알싸한 냄새에 막혔던 코가 뻥 뚫린다. 처음에는 냄새 때문에 먹기 힘들지만 후각이 조금 마비되면 얼큰하고 구수한 맛이 느껴진다.
삭힌 홍어가 나주의 별미가 된 사연은 이러하다. 고려시대 말 공민왕 때 왜구 침략을 피하고자 흑산도 사람들을 나주 영산포로 이주시킨 적이 있다. 흑산도 사람들이 생선을 잡아 배에 싣고 며칠 동안 나주로 건너오는 사이 생선들이 상하고 말았다. 그런데 상한 생선을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고 맛있는 생선은 홍어뿐이었다고 한다. 그 뒤로 영산포에 정착한 사람들이 홍어를 삭혀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영산포는 곰탕거리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영산포 선창가에 40여 개의 홍어 식당과 홍어 판매장이 자리해 있다. 거리에서부터 홍어 삭히는 냄새가 풍긴다. 홍어요리 전문점에서 홍어정식을 주문하면 홍어삼합, 홍어튀김, 홍어무침, 홍어찜, 홍어전 등이 한 상 차려진다. 삭힌 홍어는 열을 가할수록 향이 강해지므로 차가운 음식부터 나온다. 홍어무침, 홍어삼합, 홍어전, 홍어찜, 홍어앳국, 홍어튀김 순으로 먹어야 삭힌 홍어 맛에 차차 적응할 수 있다. 마지막에 등장한 홍어튀김은 홍어 고수라고 자부했던 내게 굴욕감을 안겼다. 한입 먹었을 뿐인데 입천장이 까져 젓가락을 내려놓아야 했다.
사심 가득한 나주 4味 연탄돼지불고기
영산포 선창가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구진포 장어거리가 있다. 1981년 영산강 하굿둑이 생기기 전에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던 곳이라 민물장어가 흔했다. 당시에는 장어 식당 열댓 채가 성업했다. 지금은 다섯 채 정도만 남아 장어거리의 명맥을 유지한다. 구진포 장어 원조집으로 알려진 신흥장어도 이제는 타지역 장어를 사용하지만, 오랜 내력의 깊은 손맛은 여전해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나주 3味에 별미 하나를 추가한다면 송현불고기집의 연탄돼지불고기를 손꼽는다. 외지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오래된 맛집이다. 8년 전 송현불고기집에 처음 갔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길가 허름한 식당 안에 손님이 많아 놀랐고, 주인이 연탄불 앞에 앉아 석쇠 위 삼겹살을 쉴 새 없이 굽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번듯한 건물을 지어 이전했다. 고기 맛이 바뀌었을까봐 걱정했는데, 고기 표면에 기름이 번드르르하고, 달고 짭조름한 맛은 그대로다. 가위로 고기를 직접 잘라 먹어야 하는 번거로움은 맛으로 상쇄하고도 남는다. 싼값에 배불리 한 끼 먹었으니 가성비와 가심비를 다 잡았다.
◇ 이색 명소 & 맛집 ◇
나주목사내아(금학헌) 목사내아는 조선시대 나주목 최고 수장인 목사의 살림집이다. 건물 이름이 금학헌이다. 1825년에 건립된 ‘ㄷ’자형 전통한옥으로서 내아 1동과 행랑채 1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사 의복 무료체험과 한옥 숙박체험을 할 수 있다. 성정을 베푼 목사들의 이름을 딴 온돌방에는 옛집에 걸맞은 전통가구와 침구가 갖춰져 있다. 나주시에서 운영해 숙박료가 저렴한 편이다. 나주시 금성관길 13-8, 09:00~18:00 관람료 무료, 061-332-6565
영산강 황포돛배와 영산포등대 영산강 하굿둑이 생기면서 농수산물을 실어 나르던 황포돛배가 사라졌다가 30여 년 만에 관광용으로 부활했다. 영산포 선착장을 출발해 다시면 회진리 천연염색문화관 앞 풍호나루터까지 약 5km 구간을 왕복 운항한다. 영산포등대는 내륙 하천에 남아 있는 유일한 등대다. 지금은 등대 기능을 상실했지만, 밤마다 불을 밝혀 옛 추억을 되살려준다. 나주시 등대길 80, 10:00~17:00 월요일 휴무, 영산포 선착장 매표소 061-332-1755
전라남도 산림자원연구소와 도래한옥마을 산포수목원으로 더 잘 알려진 이곳에는 명품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이 있다. 수목원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풍산 홍 씨 집성촌인 도래한옥마을도 둘러볼 만하다.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홍기응 가옥과 홍기헌 가옥, 한국 내셔널트러스트의 시민유산 제4호로 선정된 도래마을옛집 등 조선시대 양반집이 많다. 나주시 산포면 산제리 산23-7, 09:00~17:00 입장료 무료, 061-336-6300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갓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짓는 것은 부모의 큰 즐거움이며 보람이다. 지금은 많이 자유로워졌지만, 예전엔 부모들이 집안의 법도와 항렬을 지키면서 좋은 이름을 짓느라 정성을 들이며 많은 고심을 했다. 의미가 아무리 좋아도 발음이 우스우면 놀림감이 된다. 받침을 뻴 경우 이상해지는 이름도 되도록 삼가야 한다. 지난주 ‘바서오 선생님은 어디에’라는 글을 썼더니 그걸 읽은 송장진, 정봉직, 임연봉 이런 사람들이 어려서 받침을 빼고 부르는 아이들에게 시달렸다고 자수해왔다.
알고 보면 사연이 재미있는 이름이 많다. 하도 빚쟁이에 시달려 “200만 원만 있으면 좋겠다”고 한탄을 했는데(1950년대 후반의 일이다), 마침 아기가 태어나 이백만이라고 이름 지은 경우가 있다. 일제 때 길에서 300원을 주운 사람은 세 아들의 이름을 이진삼, 이진백, 이진원 이렇게 삼, 백, 원으로 지었다(미확인 보도임). 아들을 더 낳았으면 어쩔 뻔했나.
이름에 숫자를 넣는 경우는 많다. 일본인들은 이치로(一郞), 지로(次郞), 사부로(三郎) 식으로 우리보다 더 노골적인 것 같다. 중국인들도 숫자를 잘 넣어 이름을 보면 장남인지 몇째인지 금세 알 수 있다. 백 천 만 억, 이런 큰 숫자를 넣은 이름도 많다.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은 전남 해남 출신으로 본관은 선산(善山),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해 명종 연간에 동부승지(同副承旨), 병조참지(兵曹參知), 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분이다. 절조 있고 청렴결백하며 시와 초서에 능했다.
그런데 석천의 5형제 이름이 천으로 시작돼 아래로 갈수록 점점 더 커진다. 임천령, 임만령, 임억령 이렇게. 억 다음엔 당연히 조, 경이 나와야 할 텐데 석천의 아버지(또는 할아버지)는 마음이 약해졌는지 넷째와 다섯째의 이름을 백령, 구(九)령으로 지었다. 따지고 보면 9도 구만리장천까지 뻗치는 무척 큰 글자이지만, 어쨌든 막내 이름의 숫자가 가장 작다.
석천의 두 형은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생이라는 이유로 기묘사화(1519년) 당시 함경도 단천에 유배돼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두 살 아래 동생 임백령(1498~1546)은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 일파에 붙어 대윤(大尹) 윤임(尹任) 등을 제거한 을사사화(1545년)를 일으켰다. 석천은 동생이 그 공으로 위사공신 1등에 숭선부원군으로 책봉되자 벼슬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면서 “잘 있거라 한강수야/고이 흘러 물결 일으키지 마라”[好在漢江水 安流不起波]고 시로 타일렀다. 그 뒤 백령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錄券)을 보내오자 분격하여 불태우고 의절한 채 해남에 은거하다 동생이 죽은 뒤에야 서울에 출입했다. 막내 구령도 백령을 따라 시류에 편승해 출세의 길을 걸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에게 시를 가르치기도 했던 석천은 강원도 관찰사일 때 관동팔경을 시로 읊은 일도 있고, 김성원(金成遠), 고경명(高敬命), 정철과 함께 ‘식영정 사선(四仙)’이라고 불렸던 인물이다. 담양의 식영정은 사위이자 제자인 김성원이 장인을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석천이 시속을 따라 행동하지 않고 이백을 배우려 노력했다며 자기 문집에 이런 시를 소개했다. “어떤 사람 물가에 기대어 서 있는데/ 해오라기도 여울가에 멈춰 섰네/ 머리가 흰 건 비슷하다만/ 나는 한가한데 해오라긴 여유가 없구나”[人方憑水檻 鷺亦立沙灘 白髮雖相似 吾閒鷺未閒].
허균(許筠)도 그를 찬탄하며 “마음은 흐르는 물과 함께 세상으로 나오고/ 꿈에는 백구 되어 강 위를 나네”[心同流水世間出 夢作白鷗江上飛]라는 시를 호평했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는 “긴 바람은 만리에 불고/ 조각달은 고금을 비추네”[長風一萬里 片月古今秋]라는 시구를 이백에 비기며 감탄하는 글을 남겼다.
석천의 시 중에서 널리 사랑을 받는 것은 ‘시자방’(示子芳), 친구 자방에게 보인 세 수 중 세 번째 시다. “옛 절 문 앞에서 또 봄을 전송하노라니/ 지는 꽃잎 비를 따라 옷에 붙는데/ 돌아와도 소매 가득 향기가 맑아/ 수많은 산벌들이 날 쫓아오네”[古寺門前又送春 殘花隨雨點衣頻 歸來滿袖淸香在 無數山蜂遠趁人].
형제의 스승이었던 청백리 박상(朴祥)은 형 억령에게 ‘장자’를 가르치며 “너는 반드시 문장가가 되리라”고 했고, 동생 백령에게 ‘논어’를 가르치며 “너는 정승이 되리라”고 했다 한다. 과연 그의 말대로 백령은 출세를 하긴 했지만 더러운 이름을 얻은 채 명나라에 다녀오다 객사했고, 형은 동생보다 22년을 더 살면서 맑은 이름을 후세에 드리웠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는 마흔 살이나 많은 임억령을 존경해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 평생에 이 무릎 꿇지 않았다가/ 오늘날 공 앞에서 꿇는다오”[何幸同時出 生平不屈膝 今日爲公屈]라는 시를 썼다. 백령에 대해서는 선조에게 지어 올린 ‘동호문답’(東湖問答)에 “윤원형, 임백령 등 다섯 간흉은 그 죄가 하늘에 이르니 반드시 죽이고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될 자들”이라고 극언했다.
임억령 5형제의 이름엔 모두 장수의 기원이 담겨 있다. 그중에서 단연 우뚝한 인물은 임억령이다. 이름 그대로 억 살을 살 것 같다. 그리 될 인물인 줄 알고 아버지가 가장 큰 숫자를 준 걸까, 아니면 가장 큰 숫자를 받아서 그에 걸맞게 자신을 수렴해가며 스스로 큰 인물이 된 걸까. 자꾸만 내 이름과 남들의 이름을 돌아보게 된다.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고 정(正)이 사(邪)에 쫓겨나는 세상이어서 맑은 인격이 더 그리워진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아이들은 호모 루덴스(유희하는 인간)다. 아이들은 여러 가지로 논다. 요즘 아이들은 게임하고 카톡을 하면서 주로 비대면으로 혼자 논다. 하지만 1960년대의 아이들은 또래들과 만나서 놀고, 동물들과 놀고, 말장난 수수께끼에 노래 가사를 바꿔 부르며 놀았다. 장난감이 없던 시대의 아이들에게는 말이 장난감이었다.
그런데 숫자를 차례로 나열하는 말장난이나 끝말을 이어가면서 약간의 멜로디와 리듬을 붙여 소리치고 다니는 유희, 이런 걸 뭐라고 하지? 예를 들면 “애들 모여라, 애들 모여라. 여어자는 필요 없고 남자 모여라.” 또는 어려서 아이들이 날 놀려 먹던 노래(?) “순이 순이 철순이, 장가 장가들었다, 누라 누라 마누라, 개다 개다 두 개다.” 이런 거. 나는 요언(謠言)이라고 쓰려 했는데, 찾아보니 사전엔 뜬소문이라는 풀이밖에 없더라. 그게 맞는 말이기도 하겠다. 나는 마누라가 두 개가 아니니까.
(여기서 잠깐~! 이쁘고 요리 잘하고 착한 마누라를 얻으려면? 답은 마누라를 셋 얻는 것이다. 마누라가 하나면 한심한 남자, 둘이면 양심적인 남자, 셋이면 세심한 남자라고 하지 않던가? 이렇게 신소리 헛소리를 하면서 작전타임을 써 봐도 딱 맞는 말을 찾아내지 못하겠다. 그런데 이런 게 바로 자생적이고 자발적인 동요가 아닐까.)
나는 어려서 못된 말장난을 많이 하고 다녔다(물론 어른들이 못 듣는 데서). “일, 일본 년이 이,……, 삼, 삼밭으로 들어가 사. 사방을 둘러보니 오, 오는 사람이 없어 육, 육시랄 년이 칠,…… 팔, 팔뚝만한 XX로 구, …… 십,…을 하더라.” 이 칠 구의 말줄임표는 생각나지 않는다는 표시다. 함께 자란 고종사촌형에게 물어봤지만 “난 너무 고상한 사람이라 그런 거 생각 안 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형과 나는 무슨 행진곡인가에 가사를 붙여 “아이고 오줌 마려, 아이고 오줌 마려. 아이고 오줌 마려 마려 아이고 오줌 마려.” 이렇게 발맞추어 노래 부르곤 했다. 그러면 안방에 있던 할머니가 “아, 얼렁 뒷간에 가. 오줌 참으면 병나”라고 소리쳤다(사실은 병이 된다는 말인데, 충청도 말 도+ㅑ가 표기되지 않는 게 유감이다).
그 형과 내가 공통적으로 완전하게 기억하는 건 이거다. “야 야 야마싯대가 담뱃대, 대 대 대꼬바리(담배통)가 홀애비짱, 장 장 장돌뱅이가 시리방구, 구 구 구두 신었다구 재지 마, 마 마 마루 밑에 달기똥(닭똥), 똥 똥 똥 싸놓고 도망갔다네, 내 내 냇가에서 놀다가, 가 가 가아련다 떠나려언다….” 무슨 뜻인지 지금도 모르는 말이 몇 개 있다. 네가 내로 바뀌는 대목이 어색하지만, 이 말장난의 끝은 유행가 ‘유정천리’로 이어진다.
1959년 박재홍이 불러 대히트를 한 그 노래의 1절은 이렇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에/못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눈물 어린 보따리에 황혼 빛이 젖어드네.”
그런데, 우리 공주 시골동네 청년들은 다르게 불렀다. 가사를 바꾼 노래의 1절과 2절은 다음과 같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 뒤를 따라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는 떠나간다
천리만리 타국 땅에 객사죽음 웬 말이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오네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
춘삼월 십오일에 조기 선거 웬 말이냐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당선 길은 몇 굽이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눈이 오네
노래가 발표된 1959년은 4·19 한 해 전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독재가 막판으로 치달을 때였다. 1956년 5월 15일의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열흘 앞두고 민주당의 해공 신익희(1894~1956) 후보가 호남선 열차에서 급서했다. 이어 4년 후인 1960년 3·15 대선 때는 민주당 조병옥(1894~1960) 후보가 미국으로 신병 치료하러 갔다가 선거 한 달 전인 2월 15일에 타계했다. 그 상황에서 대중의 절망과 민주화 열망을 담은 노래가 “가련다 떠나련다”의 개사곡이다. 1960년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다. 마을 청년들은 작대기로 지게목발을 두드리며 이 노래를 참 많이도 불렀다.
또 하나 ‘비 내리는 호남선’이라는 노래. 해공 급서 이후 민주당의 당가처럼 불린 가요가 있다. 작사자 손로원, 작곡자 박춘석은 정치와는 무관한 사람들이었고, 해공이 타계하기 석 달 전에 나온 노래였는데도 해공을 애도하기 위해 만든 거라는 오해를 받아 경찰에 소환당하며 시달렸다. 5월 5일 어제가 해공의 64주년 기일이었다.
사람은 가고 노래는 남았다. 그러나 가사를 바꾸거나 곡조도 없는 노래로 만든 말장난 동요는 불러본 사람들만의 것이어서 전승되지 않는다. 동시대의 사람들이라도 잘 알지 못한다. 악보상의 노래와 달리 기억 속의 동요는 사람과 함께 사라진다. 스스로 만들어 노래유희를 하는 아이들도 이제는 보기 어렵다.
그는 망가진 몸을 고치기 위해 귀농했다. 죽을 길에서 벗어나 살길을 찾기 위해 산골에 들어왔다. 그 외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봤다. 결과는?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서리 맞은 호박잎처럼 시들어가던 그의 구슬픈 신체가 완연히 회생했으니. 산골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 아름답고 기묘한 지구별과 이미 작별했을 거란다. 현명한 귀농이었다는 거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정도사’라 부른다. 이 사람, 정경교(62) 씨의 삶에는 색다른 게 있다. 누가 뭐래도 제멋대로 산다.
경교 씨는 오랫동안 대양을 누볐다. 바다에서 무슨 신기한 일이 일어나나 골똘히 연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외항선 항해사. 이게 그의 직업이었다. 인생이 무엇이냐고 그에게 묻는다면 마냥 돌고 도는 일이라는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 배를 타고 지구를 36바퀴쯤 돌았다는 게 아닌가. 오만가지 경험을 했을 거다. 생사를 넘나들기를 밥 먹듯이 거듭했단다. 긴 항해 뒤 잠시 정박한 낯선 항구의 주점에서 이마에 총을 들이대는 건달들을 깡으로 해치우기도 했다. 그는 무술에 능란하다. 그러나 몸에 찾아온 병증은 무술로 때려눕힐 수 없다. 정 씨는 자신의 몸이 내지르는 화급한 비명을 듣고 배에서 내렸다.
“어느 날, 술 마시다 혼절했어요. 이러다가 바다 위에서 객사하겠구나, 두려운 생각이 엄습하더라고요. 온몸의 에너지가 모조리 고갈된 상태였던 겁니다. 한마디로 엉망진창이 됐다는 거. 외항선원 생활이라는 게 원래 건강을 망치기 쉽습니다. 밤낮이 따로 없는 고된 업무, 늘 부족한 잠, 무절제한 음주, 극도의 스트레스 등등이 겹치다 보면 한계 상황에 이르게 마련이거든요.”
“시골에서 살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어디서 온 거죠?”
“귀농을 해서 오가피 농사를 짓자! 그런 결심을 했어요. 여기엔 이유가 있어요. 제가 배를 타면서도 건강 복구를 위해 이 약 저 약, 몸에 좋다는 걸 다양하게 먹었는데요, 오가피 효력이 가장 좋았어요. 공기 좋고 물 좋고, 자연환경 살아 있고, 그런 깨끗한 산촌에서 스트레스 받지 않고 손수 오가피 농사를 지어 장복한다면 건강해지겠거니, 건강한 심신으로 나의 영원한 관심사이자 길동무인 무예 수련에 전념한다면 인생 자체가 달라지겠거니, 그런 확신과 구상이 있었던 겁니다.”
“계획대로 잘 흘러갔어요? 시련을 피할 수 없는 게 귀농인데. 심지어 고행길인데.”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뭘 하든 미쳐야 도달할 수 있다는 거! 제겐 스스로 선택한 일엔 완전히 미치는 버릇이 있어요. 귀농하자마자 모아뒀던 자금으로 집을 짓고 밭 200평을 사 오미자 농사를 시작했어요. 새벽마다 반드시 두어 시간 무술 수련을 했고요. 처자를 건사하기 위해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어요.”
외항선 항해사가 배에서 내린 까닭
정 씨가 사는 마을은 진안군 덕태산 백운계곡 아래에 있다. 사시사철 등산객이 바글거리는 길목이다. 해서, 식당은 용케도 성황이었다지. 그러나 접었다. 돈벌이는 될망정 식당일에 발목 잡히기 싫어서였다. 때마침 이웃 마을에 빈집 매물이 나와 그걸 사들였다. 집이라 할 것도 없는 폐가였다. 풀덤불에 묻혀 쓰러져가는 방앗간이었으니까.
“건강이 빠른 속도로 좋아지자 본격적으로 무예 공부를 하고 싶더라고요. 그러기엔 방앗간 자리가 적격이라 본 겁니다. 골격만 남기고 거의 다 털어낸 뒤 다락방이 있는 2층집으로 싹 개축을 했어요. 폐자재나 피죽을 구해 직접 지었어요. 엉성한 집이지만 무려 3년간 혼자 뚝딱거려 완성했지요.”
“어디서든 다시 보기 어려울 재미있는 집이에요. ‘영웅문’이라 쓴 간판도 걸어두셨네?”
“소림사의 무예 영웅들을 기리며 지은 당호입니다. 하하핫! 이전에 살았던 식당집도 홍콩 영화 ‘동방불패’에 나오는 무사의 집을 본떠 지었어요. 무림 고수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동경. 어려서부터 제겐 그런 게 있었어요. 학창 시절부터 태권도, 합기도, 검도 등 다양한 무예를 섭렵했죠. 선원생활을 할 때도 틈틈이 중국의 전통무예를 부지런히 배우고 익혔습니다. 귀농 이후에는 드디어 본격 수련에 접어들었고요.”
“무술과 함께하는 삶의 꿈을 귀농으로 비로소 이룬 사람. 그게 정 선생이라는?”
“그렇죠. 비록 아직은 부족하지만 점점 심화되는 무술 수련을 통해 진정한 만족을 느낍니다. 어릴 적부터 제가 무협지를 끼고 살았어요. 흰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는 도인을 꿈꾸었어요. 동심으로 자라난 몽상이었지만 무예와 함께하는 지금의 생활은 제게 너무도 이상적입니다. 인생을 제법 깊게 바라보는 안목과 에너지도 생겼어요. 삶에는 우리가 경험하거나 상상한 것보다 더 아름답고 더 신비하고 더 고귀한 경지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나 할까. 결국 무술 공부가 제게 신세계를 열어준 셈이죠.”
무술과 함께하는 귀농인의 삶
정 씨의 산방 ‘영웅문’은 무협영화 세트장을 닮았다. 오잉! 대번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풍경이다. 집 안팎에 온갖 무술 도구와 특이한 장식물과 총천연색 휘장들이 어지러이 혼재해 있어서다. 내 취향대로 이왕이면 재미있게, 이왕이면 익살스럽게 살겠다는 의지가 읽히는 집이다. 인생이 어차피 쇼라면, 비극보다는 희극 쪽으로 생활을 몰아가겠다는 지향이 엿보인다.
이 집이 완성된 건 2008년. 이후 10여 년간 그는 농사와 무술 수련, 오직 이 둘을 전공 삼아 정진했다. 몰입하면 성취하는 법. 무술의 진도가 질주처럼 빨라지고, 부실했던 몸은 근육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 옹골찬 몸으로 날고 솟으며 고도의 무술 품새를 수련해왔다. 시들어가던 건강을 복구하고, 단련된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만드는 일이 쉬울 리 있겠는가. 그는 어쩌면 독종이다. 들입다 공부만 파는 ‘범생이’를 닮았다. 또 어쩌면 수행자다. 그가 무술을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건 정신의 산정(山頂)인 것 같다. 이미 ‘신세계’라 일컬을 만한 한 경지를 슬쩍 봤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제가 한때 크리스천이었습니다만 영성이랄까, 영혼의 비밀이랄까, 그런 본질적인 차원을 실감으로 경험한 일이 좀 있었어요. 삶으로만 완료되지 않는 또 다른 세계, 그런 게 있다고 믿게 된 거죠. 그렇기에 더 충실하게 살아야겠다는 각성을 하게 됐고요. 무술 수련은 결국 도(道)를 찾는 공부이자 활인(活人)의 길입니다. 나 하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욕심에서 벗어나, 남들에게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공부이기도 하고요.”
정 씨에겐 따르는 제자들이 있다. ‘영웅문’ 마당에서 자주 함께 수련을 한다. 지역 문화행사에 초대받아 무술 시연도 한다. 방송 출연도 잦았단다. 때로는 ‘오가피 명인’으로, 때로는 ‘산골에 사는 괴짜 도사’ 명색으로. 한 TV 방송에서는 괴력을 과시했다. 한겨울 계곡 암벽에 꽝꽝하게 뒤엉긴 얼음장을 이야압! 하는 외마디 기합 하나로 산산이 부서뜨린 것. 생생한 현장 영상이라 무슨 속임수를 썼을 여지는 없어 보인다. 범상치 않은 내공, 정 씨는 그 이색적인 기운이 자신의 내부에 축적되고 있다는 데에 스스로 놀란다. “어라, 이게 뭐지? 나 왜 이러지?” 그렇게 말이다. 아울러, 좋은 에너지를 얻었으니 좋은 쪽으로 승화시키자는 결론에 닿았다고 한다. 희한한 재주로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도사가 횡행하는 세상임을 잘 알기 때문이겠지.
‘태평농법’이 가능한 오가피 농사
무술이 정 씨의 정신적 동행이라면 오가피 농사는 단 하나뿐인 생계 수단이다. 유행가만 유행을 타지 않는다. 농작물도 유행을 탄다. 흥행에 롱런하는 작물은 없다. 오가피도 그중 하나. 이미 오래전부터 과잉 생산돼 흔히들 파내고 다른 작물로 전환했다. 실정이 그렇건만, 그는 그걸 왜 신주단지 모시듯 붙잡고 살지?
“일찍이 외항선을 탈 때부터 ‘필’이 꽂혀 귀농의 한 계기가 된 게 오가피입니다. 실제 농사를 지어 장복을 하면서부터는 더 신통방통했어요. 제 체질에 잘 맞는 탓일까, 건강에 이보다 더 좋은 약초는 없다고 부르짖고 싶은 심정이에요. ‘본초강목’엔 오가피가 금은보화보다 낫다고 기록됐더라고요.”
“제아무리 유망한 약초라 해도 농부가 생산을 해서 소득을 올리기까진 힘든 과정의 연속이지 않겠어요? 농사 초보자에겐 더욱 가시밭길이었을 테고.”
“영농 교육도 받았어요. 이웃 농부들에게도 배웠고요. 근데 오가피 농사가 원래 타 작물에 비해 수월합니다. 병충해에 워낙 강해 농약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이른바 ‘태평농법’이 가능한 작물이라는 거. 풀만 어느 정도 잡아주면 알아서 잘 성장합니다.”
“재배 규모는? 수익성은?”
“현재 2만 평 정도로 규모가 늘었어요. 산지를 사 농장으로 개간하길 거듭했어요. 다른 약초들도 재배하지만 주된 작물은 단연 오가피예요. 오가피 열매를 수확해 진액을 만들어 판매하는데 가공공장도 운영하고 있어요. 소득은 미흡한 수준입니다. 하지만 앞날의 전망은 긍정적이라는 거. 단기간에 떼돈을 벌어 생기는 폐단을 고려한다면, 한동안 좀 궁한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보고요.”
상처도 삶의 또 다른 이름
2만 평짜리 약초농장. 200평으로 시작한 농사가 크게 불었구나. 관에서 주관하는 영농지원사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장기 저리 영농 자금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면 도시에서보다 빨리 일어설 수도 있다는 게 정 씨의 판단이다. 그렇더라도 어차피 빚. 뭔가에 적당히 쫓기는 게 없는 인생엔 스릴과 탄력이 없다. 그러나 굶주린 멧돼지처럼 꽁무니를 사납게 들이받는 부채에 허구한 날을 허덕일 경우엔 얘기가 달라진다. 마침내 벌렁 나자빠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자빠지자고 참여한 게 인생은 아니겠고 말이다.
“모든 재능을 쏟아 농사를 지어야죠. 당장의 수익구조가 열악하더라도 집요한 공을 들여 미래의 희망이 보인다면 절반은 이미 성공한 거 아니겠어요? 그러자면 나만의 독창적인 농산물 생산에 심혈을 기울여야 해요. 저는 내심 최고의 오가피 생산 농민이라 자부합니다. 가령, 진액을 만들더라도 보통은 대여섯 시간을 달이지만 저는 이틀을 달여 진정한 농축액을 만들어요. 약효가 극대화되는 고품질 가공품을 생산하는 거죠. 이렇게 하면 가격이 좀 비싸더라도 단골이 붙게 마련이에요.”
“도시에서 유능하게 잘 살았다는 사람이 귀농을 해 오히려 뒤죽박죽이 되는 사례가 드물지 않더군요. 주변 귀농 농가들의 형편은 어때요?”
“농사란 몸을 최대치로 쓰는 직업이에요. 쉽지 않다는 거. 열심히 일했으나 건강부터 무너지는 경우가 있어요. 가장 불행한 케이스죠. 반면, 농사를 통해 심신이 함께 건강해지는 사람들도 있어요. 과욕을 버리고, 농사일도 일종의 정신수련이라 여기는 게 상책이라 봅니다.”
“정신수련은 고상한 가치를 지니지만 정작 실천을 결여한 채 거룩한 폼만 잡다 끝나기 십상이죠. 어차피 담금질의 연속인 인생 자체가 이미 두말할 것 없는 수련일 테고요. 새삼 정신수련이 왜 필요하죠?”
“제가 생각하는 좋은 인생은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그래서 무예에 정진해요. 농사일에도 전념하지만 무예 다음이에요. 무예야말로 진정한 수련이라 믿으니까. 생활에 수련이라는 정신활동이 가세할 경우엔 삶의 질이 달라져요. ‘빛의 세계’라 할 만한 영성까지 갈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게 사는 게 내면에 얼룩진 상처를 줄이는 최상의 처방이겠죠.”
상처. 애초에 삶을 가진 모든 존재들은 상처를 피할 길이 없다. 상처란 삶의 다른 이름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 무기징역처럼 지겨운 상처를 정 씨는 무술 수련으로 쓱싹 해치우는 것 같다. 그러고서도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단다. 아내와의 이혼에서 얻은 번뇌가 그것.
“여자들에게 귀농생활은 너무도 힘들 수 있어요. 한평생 동고동락하자 했으나 견디질 못하더라고요. 아내가 떠난 뒤 제가 방황을 했다면 상처가 더 커졌겠죠. 그러나 보란 듯이 지금 잘 살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부끄러울 게 없는 겁니다. 하지만, 그놈의 상처라는 건 영 사라지질 않아요. 끙.”
이혼도 참신한 해방일 수 있는 걸 왜 그러시나? 난 그리 생각하지만, 그는 먹먹한 표정으로 포옥 한숨을 몰아쉰다.
◇ 정경교 씨가 주는 귀농 Tip ◇
•초기의 과도한 투자는 금물이다. 5년쯤 농사 경험을 쌓아 안목이 트일 때 본격 투자를 해도 늦지 않다.
•집부터 먼저 잘 지으려 노력하지 마라. 처음엔 세를 얻어 살거나 극히 간소한 건축을 하자. 그렇게 살다 보면 자신의 취향과 마을 실정에 어울리는 집이 어떤 형태일까를 저절로 깨닫게 되니까.
•독립적인 사생활이 보장되는 도시의 아파트 생활과 농촌 공동체의 관습은 완전히 다르다는 걸 투철히 인식하자. 잘난 척하거나 매사 앞에 나서다가는 소외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이대로 일만 하다 죽을 순 없다고 기를 쓰고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이 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해서 놀러다니는 거야 탓할 일이 아니지만 아직은 일을 해야 할 형편인데도 내가 번 돈 다 쓰고 죽겠다고 한다. 아무도 알 수 없는 게 죽는 날이다. 언제 죽을지 예상하고 돈을 펑펑 쓰다가 막상 오래 살게 되면 어쩔 것인가. 생각지도 않은 암 같은 큰 병에 걸려 병원비에 발을 동동 구를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돈 때문에 말년에 고생하는 사람도 많이 본다.
이미 종영된 방송이지만 ‘그 여자 그 남자'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부부간의 불화를 본인들이 해결 못해 방송사에 의뢰하면 전문가들이 개입해 원인을 찾고 함께 해결을 모색해나가는 줄거리다. 불화의 여러 원인 중 돈 문제가 적지 않다. 아니 돈을 벌어오지 못해 파생되는 문제가 많다. 자식 우윳값을 친정 부모에게 빌리러 가는 아내의 처절한 심정을 이해한다면서도 남편은 담배를 사서 피운다. 막노동은 몸이 약해서 못하겠단다. 이 일은 이래서 어렵고 저 일은 저래서 못한다는 핑계를 댈 궁리만 한다. 화목한 가정의 중심에는 돈 벌어오는 사내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남한산성’과 ‘칼의 노래’를 쓴 김훈이 있다. 이분이 자기 아들에게 쓴 편지글을 읽고 깜짝 놀랐다.
“아들아, 사내의 삶은 쉽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마라. 사내의 삶이란 어처구니없게도 간단한 것이다. 어려운 말 하지 않겠다. 쉬운 말을 어렵게 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중략) 사내의 한 생애가 뭣인고 하니, 일언이폐지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 알겠느냐? 이 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김훈은 돈과 밥은 같은 것이라 했다. 돈이 있어야 밥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의 위력을 제대로 못 느끼는 남자를 볼 때마다 참으로 안타깝다. 인생관이 어떻고 우리 가문이 어떻고 하기 전에 남자는 나가서 돈을 벌어와야 한다. 죽는 날까지 벌어와야 한다. 직접 근로소득을 하지 못하면 벌어놓은 예금에서 이자가 나오게 하든 건물에서 월세가 나오게 하든 여하튼 돈이 있어야 한다. 해외여행하다 낮선 곳에서 객사하지 말고 돈 벌다 가족 품에서 죽어야 한다.
전 국민이 일하지 않고 노숙이나 하고 얻어먹으려고만 한다면 나라가 유지되겠는가? 국가는 무소유주의자가 지켜내는 것이 아니고 돈 버는 사람의 세금으로 유지된다. 돈 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부른다. 부자는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보다 할 수 있는 게 많다. 먹고 싶은 것 먹고, 입고 싶은 것 입고,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일해서 돈을 버는 사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내가 번 돈이라고 나를 위해서만 쓰지 말자. 장학금도 내놓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기부도 하며 살자. 방문 꽁꽁 닫아걸고 혼자 소고기 구워 먹는 삶은 별로 행복할 것 같지 않다.
나이 들다 보니 죽는 것에 관심이 많아진다. 이미 주변에서 또래 사람들이 죽는 것을 많이 보았다. 젊었을 때는 교통사고 같은 사고사가 많았지만, 이제는 질병으로 죽는 사람이 많다. 부모님들도 연로하셔서 작고하시는 분이 많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그래서 이 나이쯤 되면 죽음에 대비하게 된다. 죽어서 매장을 원하는 사람도 많지만, 요즘은 화장이 대세라고 한다. 그다음은 묻힐 장소로 선산, 공원묘지, 납골당, 삼림욕장 등이 거론된다.
어디서 죽느냐도 중요하다. 그전에는 집에서 임종해야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집이 아닌 곳에서 죽으면 객사라고 하여 불쌍하게 봤다. 그러나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최근에는 병원에서 죽는 경우가 무려 73%라고 한다. 병원도 집이 아니므로 객사에 속한다. 그러나 이 비율은 점점 높아질 수밖에 없다. 고령이 되면 병원에 자주 가야 하고 그다음에는 아예 병원 신세를 지다가 죽는 것이다. 집에는 오지도 못하고 바로 병원 장례식장에서 장지로 향한다.
어떻게 죽느냐도 중요하다. 암 같은 질병이 생겨 고통을 받다가 죽는 경우가 가장 불행해 보인다. 돈은 돈대로 까먹고 그 힘들다는 항암치료와 통증,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뜨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졸지에 객사하는 경우가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져 죽으면 고통은 순간적이다. 고혈압, 고지혈증을 ‘소리 없는 살인자’라 표현하며 무서워하지만, 죽음의 방법에서는 반드시 회피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고통만큼은 순간적이다. 고혈압이나 고지혈증을 앓고 있으면 기름진 음식, 술 등을 못 먹게 한다.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다가 죽는 사람에 비하면 불행이다. 차라리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다가 심근경색이나 뇌경색으로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지 않고 후유증이 남아 고생하다가 죽을까봐 관리를 하는 것이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또는 졸지에 죽음을 맞이했을 때 팬티가 깨끗한지 걱정이 된다는 사람도 있다. 죽으면서도 남들 눈을 의식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죽고 나면 그만이다. 본인을 중심으로 보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죽을 때도 남을 의식하는 병폐다.
요즘 나는 여행을 자주 다닌다. 고산병 위험을 무릅쓰고 히말라야에도 가고 각종 전염병이 있다는 아프리카에도 갈 예정이다. 교통수단도 위험하고 여행지에서도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위험하다며 말리는 지인이 많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 하다가 죽는 것도 행복이라고 본다. 위험하다고 집에서만 있다가 죽을 수는 없다. 사고로 죽을 수는 있지만, 확률적으로 사고 없이 잘 다녀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히말라야 고봉을 등정하다가 사고로 죽은 등산가도 많다. 그 사람들은 객사를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슬람교에서 해마다 성지순례를 하다가 죽는 사람도 많다.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냐고 물으니 성지순례 하다가 죽으면 천당에 간다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객사(客死)이자 내가 만들어낸 말이지만, 도사(道死))인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긴 역사가 고이 간직된, 천년고도 에든버러. 대영제국이 된 지 300년이 흘렀어도 근원은 스코틀랜드일 뿐이다. 남자들은 킬트 줄무늬 치마를 입고 길거리에서는 백파이프 연주가 흐른다. 스코틀랜드의 민족성과 풍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외에도 스튜어트 왕가와 귀족들, 월터 스콧,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흄, 로버트 번스 등 세기의 작가들 흔적이 남아 있다. 회색빛의 고풍스러운 건축물에 서리서리 스며 있는 역사의 이야기는 긴 겨울밤을 하얗게 지새우게 한다.
스코틀랜드의 대문호 월터 스콧 기념탑
에든버러 공항에서 버스를 타면 시내 중심까지 한 시간이 채 안 걸린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탓일까? 아니면 약간 구릉진 언덕 위에 자리를 잡은 고색창연한 건축물들 때문일까? 에든버러 겨울의 첫 느낌은 ‘회색빛’이다. 어쩌면 버스정류장 앞쪽에 우뚝 서 있는 스코틀랜드 대문호인 월터 스콧(1771~1832)의 기념탑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해달라는 스콧의 유언에 따라 시커먼 사암석으로 만든 뾰족한 탑. 61m 높이의 기념탑은 왠지 기괴하고 음산하다. 이 탑을 만들 때, 잉글랜드에 대한 경쟁심으로 영국에서 제일 높은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기념탑보다 5m 더 높이 올렸다는 후일담이 있다. 287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에든버러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지만 포기하고 스콧 기념탑 아래 프린세스 정원의 국립 갤러리, 로열아카데미를 찾는다. 모두 무료 입장이다. 관광객으로서는 매우 반가운 일. 미술관에 걸린 수준 높은 명화를 마음껏 감상하면서 미소 짓는다.
에든버러의 국교는 장로교
에든버러는 남북을 가로지르는 프린스 스트리트를 경계로 북쪽의 올드 타운과 남쪽의 뉴타운으로 구분된다. 구시가지는 15세기부터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도로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다. 신시가지는 18세기 이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조성된 주택, 상업지구. 1985년, 유네스코는 신·구시가를 묶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시선도, 마음도 구시가지에 다 빼앗긴다. 무조건 ‘고성(古城)’을 기점으로 걷는다. 고성까지 걸어가는 길목에서 화폐 박물관, 뉴대학을 만난다. 대학 건물은 해묵은 향기를 뿜어낸다. 토마스 찰머스(1780~1847) 목사의 동상이 있는 이 대학은 스코틀랜드 장로교 교구가 있던 곳. 16세기경, 이곳은 매우 중요했다. 1560년, 스코틀랜드가 국교로 지정한 장로교를 잉글랜드와 미국으로 전파하는 중심지였다.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격전지, 에든버러 성
에든버러 성은 오래전 활동을 중단한 화산 꼭대기(133m)에 있다. 성 뒤쪽은 거대한 바위산이 버티고 있는데 3면이 깎아지를 듯한 절벽을 이루고 있다. 딱 봐도 요새로 최적이다.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동쪽이 출입구. 이 성은 현재 영국군 사령부 역할을 하고 있는데 전통 복장을 한 두 명의 근위병이 성을 지키고 있다. 한겨울에도 킬트를 입은 채 맨살을 보여주는 근위병은 여행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지만 정작 그들은 관광객들의 시선에 무심하다. 에든버러 성은 6세기에 지어졌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다. 1018년부터 조금씩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현재의 건물들은 16~18세기 혹은 그 이후에 지어졌다. 이 성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격렬한 투쟁사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수 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성주가 바뀌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동안 이 성은 이긴 자의 차지였다.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를 끝으로 결국 잉글랜드 차지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성내에는 가장 오래된 12세기 초기의 건축물인 세인트 마가렛 예배당이 있는데 대부분 군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타탄 무늬 제품의 천국 도시
에든버러의 백미는 구시가지 거리 로열마일이다. 에든버러 성과 홀리루드 하우스 궁전을 연결하는 1.6km 남짓의 도로. 과거 왕가에서 쓰던 전용 도로로서 길이가
1마일이나 되어 ‘로열마일’로 불린다. 왕족들만 다닐 수 있는 로열마일 때문에 서민들은 좁은 클로즈 골목을 이용해야 했다. 대로 옆으로 무수한 클로즈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클로즈는 한국의 피맛골 거리와 엇비슷하다. 로열마일 양쪽으로는 역사를 간직한 옛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기념품 숍, 식당, 호텔 등도 무수히 이어진다. 로열마일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은 브로디스(Brodie’s) 클로즈다. 18세기, 낮에는 저명한 인사로 지내고 밤에는 도둑으로 살았던 윌리엄 브로디(1741~1788)의 이름을 따서 붙인 골목이다. 론마켓에서 캐비닛을 만드는 장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낮에는 경건하고, 부유하고, 훌륭한 시민이었다. 1781년에는 시의 조합장(deacon)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밤에는 강도짓과 도둑질을 했고 도박꾼으로 방탕하게 살았다. 그는 두 번째 부인과 살면서 돈을 많이 써댔다. 1786년에는 시립은행의 열쇠를 복사해 800파운드를 훔쳤다. 또 부유한 집안에 일하러 다니면서 열쇠를 따로 복제했다. 주변 상인들도 도둑질에 끌어들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교활함과 뻔뻔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결국 성 자일스 교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브로디의 이중적인 캐릭터에 영국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1894)이 영감을 얻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라는 작품이 탄생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나 그 진위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그의 집은 카페로 이용되고 있다.
애덤 스미스 동상과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로열마일의 가장 번화한 광장에 과거 스코틀랜드 국회의사당, 청동 말과 동상으로 만들어진 버클루 공작의 기념비, 애덤 스미스의 동상과 성 자일스 성당 등이 몰려 있다. ‘국부론’으로 잘 알려진 애덤 스미스(1723~1790) 동상은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애덤 스미스 동상 앞에 있는 성 자일스 성당(1495년 건립)의 노르만 양식의 탑이 인상적이다. 이 교회는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곳. 종교개혁가 존 녹스는 프로테스탄트 동지를 규합했다. 성당 앞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18세기 시청사가 있다. 시청사 옆 리얼 마리 킹 클로즈는 ‘귀신 나오는 골목’으로 관광 트렌드가 되었다. 이 광장에서 조금 밑으로 내려가면 콕번 스트리트를 앞두고 데이비드 흄(1711~1776)의 흉상이 있다. 흄은 에든버러 근교인 나인웰스에서 태어났지만 에든버러에서 대학을 다니는 등 인연이 깊다. 우여곡절이 많은 그의 인생 이야기가 참 재미있다. 흄은 “철학자가 되어라. 그러나 철학 가운데서도 여전히 인간이어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메리 여왕이 살던 홀리루드 하우스
흄 흉상을 지나면서 길은 한가해진다. 길 끝에 홀리루드 하우스 궁전이 있다. 홀리루드 하우스는 1128년 데이비드 1세가 지은,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성당이었다. 1498년, 제임스 4세의 명에 따라 궁전으로 다시 지었고 1530년대에는 제임스 5세가 자신과 왕비인 기즈의 메리를 위해 탑을 덧붙였다. 1560년대에는 이들의 딸인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가 살았다. 메리는 1565년, 이 수도원에서 사촌 단리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하지만 단리가 살해되자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살해 용의자 보스웰 백작의 아이를 임신한 채 이 궁전에서 결혼했다. 메리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메리와 단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제임스 6세는 에든버러에 머물 때는 홀리루드 하우스를 이용했으나 1603년, 그가 영국으로 떠난 뒤로 이 궁전은 왕가의 방문이 있을 때만 사용되었다. 2002년에는 왕실이 소장한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퀸스 갤러리’가 만들어졌다.
주인의 무덤 지킨 충견, 보비
에든버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보비의 동상이다. 존 그레이의 양치기 개 보비. 존은 보비와 여행을 하던 중 병으로 객사했다. 존의 시신은 보비가 지켜보는 가운데 에든버러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묘지에 묻혔다. 당시 두 살이었던 보비는 죽을 때까지 무려 14년간 매일 밤 존의 무덤을 지켰다. 보비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스코틀랜드 전역은 물론 해외까지 퍼졌고, 에든버러의 아이들은 용돈을 모아 보비에게 목걸이를 선물했다. 보비가 집 없는 개로 오인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잡혀가거나 사살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보비는 개로서는 유일하게 에든버러 시 명예시민권을 부여받았고, 죽은 뒤에는 특별허가를 받아 존 옆에 묻혔다. 보비의 동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해리포터’의 작가인 조앤 롤링(1965~)이 즐겨 찾았다는 카페가 있다. 이혼 후 에든버러에 정착한 그녀는 아이 분유 값을 벌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화를 쓰기로 결정한 그녀는 집 근처 카페에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완성했다.
Travel Data
항공편 스코틀랜드까지 가는 직항편이 없다. 인천→영국 런던행 직항편을 이용해 히드로공항까지 약 11~12시간 소요.
교통 런던 빅토리아 코치 역에서 에든버러까지 내셔널익스프레스 버스가 운행된다.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서는 매일 20여 회 기차가 운행된다.
시차우리나라보다 9시간 늦다.
음식 ‘하기스(Haggis)’가 유명하다. 양의 내장을 잘게 다져 곡물과 섞은 것을 양의 위장에 채워 삶은 음식. 스코틀랜드의 전통 요리로서 매시포테이토와 순무를 곁들여 먹는다.
주류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스카치위스키다. 몰트위스키와 그레인위스키를 섞어 만드는 블렌디드 위스키가 가장 일반적이고, 한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종류다.
숙박 게스트하우스, 호스텔 등을 이용하면 된다. 고급 호텔은 25만 원 이상의 비용이 들지만 평균 8만~10만 원대에서 이용 가능하다.
화폐 파운드
여행 포인트 시간 여유를 갖고 북부 고지대에 있는 ‘하일랜드(Highland)’ 지역을 연계하면 좋다. 에든버러 시내 여행사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풍패지향(豊沛之鄕) '전주'
전주(全州)는 조선 왕실 가문의 관향(貫鄕)으로 전주 이씨의 시조(始祖)와 조상들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즉, 조선 왕실의 뿌리가 그곳인데 전라도의 수부(首府) 전주(全州)로 부르기보다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고 부르는 것을 더 높이 섬기고 받든다.
이는 천하를 최초로 통일한 중국의 진(秦) 나라가 3대를 넘기지 못하고 멸망한 후 다시 재통일한 한나라 유방(劉邦)이 강소성의 작은 시골 풍패(豊沛) 출신임을 빗대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관향을 일컫는 말이니 전주를 풍패향(豊沛鄕)이라거나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그래서 지금 전주성은 다 없어지고 남쪽 성문만 남았는데 그 이름이 풍남문(豊南門, 풍패지향 전주의 남문)이며, 전국의 객사(客舍) 중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된 전주 객사의 주관(主館)에 걸린 편액에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고 씌어 있으니 이러한 내력을 모르면 왜 전주를 풍패향(豊沛鄕)이라고 부르는지 또한 풍패지관(豊沛之館)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시조묘역(始祖墓域) 조경단(肇慶壇)
전주 이씨의 시조는 신라의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에게 21대 조가 되는데 전주에서 태어나 살았다고 하나 자세한 기록이나 자취는 없으며 ‘건지산에 묘소가 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태조 이성계는 건국 후 이곳을 묘역으로 정하여 지키도록 하였으며 영·정조 때에 이르러 실태조사를 하였으나 묘소의 실체는 찾지 못하였으며 1899년(광무 3) 고종황제가 단을 쌓고 비석을 세워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이라 명명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조경묘(肇慶廟)와 경기전(慶基殿)
조경단이 시조묘역이라면 조경묘는 시조를 모신 사당이다. 전주가 전주 이씨의 발상지라 하여 전국 유생의 상소에 의하여 1771년(영조 47)에 창건되었는데, 위패 ‘시조고신라사공신위(始祖古新羅司空神位)’와 ‘시조비경주김씨신위(始祖妣慶州金氏神位)’는 영조의 친필이다.
동학혁명 때는 경기전의 태조 영정과 함께 시조와 시조비 위패를 위봉산성(威鳳山城)으로 이안하여 보존하였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 즉 어진(御眞)을 모신 경기전 뒤쪽에 홍살문을 세운 조경묘는 늘 잠겨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전주가 조선왕실의 뿌리라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시조의 위패를 모신 조경묘는 경기전 안에 있지만 별개의 영역으로 관리되며, 영조가 자신의 서자 콤플렉스를 의식하여 조상을 잘 모시는 위선(爲善) 대책으로 추진하였다는 시각도 있다. 반면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모신 경기전은 조경묘보다 훨씬 앞선 태종 10년(1410)에 세워졌는데 당시 명칭은 어용전(御容殿)이었다가 진전(眞殿)으로, 다시 경기전으로 바뀌었다.
태조의 어진은 애초 26폭이 전해져 나라 곳곳에 진전(眞殿)이 있었으니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이라 이름 지었으며 현재의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고쳐지었으며 사적 제339호이다. 경기전의 태조 어진(御眞)은 고종 9년(1872) 당시 어진이 낡고 해져 새로 제작한 것으로 원본을 옮겨 그린 모사본(模寫本)이자 유일하게 남아있는 태조 어진이며 국보 제317호이다.
참고로 태조에서 철종까지 25대 임금중 현존하는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뿐이다. 이는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소실되었기 때문이며 특히 6.25 전쟁 때 부산으로 이안 했다가 1954년 창고에 불이나 대부분 타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곤룡포(袞龍袍)라고 하면 붉은색 홍포(紅袍)를 떠올리는데 이성계는 청색 곤룡포를 입었다. 이에 대하여 개국 초기에 나라를 열었기에 청색이라거나 중국에서 아직 정식 인준을 받지 못하여 그렇다는 주장 등이 있는데 명확하지는 않다. 세종 때에 이르러 명나라에서 곤룡포를 보내왔다고 하니 그 이전에는 전 왕조인 고려의 습속을 이어받아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조선왕실의 뿌리라고 부르는 전주에는 전주 이씨의 시조묘인 조경단과 사당 조경묘, 그리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이 있어 조선왕조를 연구하고 답사하자면 꼭 들려보기를 권하는 곳이다.
게다가 경기전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전주사고(全州史庫)가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 옛 사고터가 남아 있으며, 7대 임금 예종(睿宗)의 태실과 태실비가 있는데 이는 원래 완주의 태봉산에 있던 것으로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6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