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도전 – 일본
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어느 날, 캠퍼스 게시판에서 우연히 한 대자보를 발견했다.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일본 문부성(현 문부과학성) 장학생으로 선발됐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이름을 보는 순간, 마치 내가 합격한 듯 가슴이 터질 듯 뛰었다. 가까운 사람의 성공은 언제나 가장 강렬한 자극이 된다.
그날 이후 나는 일본어에 몰입했다. 식사 시간조차 아껴가며 독학에 전념했고, 그렇게 꿈을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침내 나는 일본 유학이라는 인생의 새로운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한국을 떠나 처음 맞이한 해외 생활은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시간이었다. 낯선 언어, 문화적 이질감, 외로움 속에서 나는 스스로를 단련했다. 도서관의 불이 꺼질 때까지 책상에 앉아 있는 날들이 이어졌고, 그 과정은 학문적 성취를 넘어 나 자신을 마주하는 여정이었다. 때로는 벅찼지만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장학생으로서의 자부심은 나를 한층 성숙하게 만들었다.
석사과정을 마친 뒤 컨설팅 회사에 취업했다. 그러던 중 한국인 유학생과 결혼해 두 아이를 낳았고, 그때부터 내 삶에는 또 다른 변화의 물결이 밀려왔다. 1990년대 초반의 일본 사회는 여성의 커리어와 육아를 병행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나는 늘 시간과의 전쟁 속에 살아야 했다.
그런데 그때 아주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다.
저녁 5시 퇴근 직전, 고객과의 약속대로 서류 20장을 팩스로 전송한 후 급히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6시까지 도착하지 않으면 아이를 맡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저녁, 고객사로부터 항의 전화가 걸려왔다. 서류 한 장이 빠졌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이메일이 없어서 팩스가 유일한 수단이었고, 두 장이 겹쳐 전송된 것이 원인이었다. 고객사는 상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직원이 5시에 퇴근하는 회사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 말은 일과 삶의 균형이란 개념조차 사치로 여겨졌던 시대의 상징처럼 들렸다. 당시 일본 사회는 ‘24시간 싸울 수 있습니까?’라는 유명 영양음료 광고처럼, 쉼 없는 노동을 미덕으로 여겼다. 나는 그날 커리어와 가정이 충돌하는 현실을 온몸으로 느꼈다.
두 번째 도전 – 뉴욕
그런 일이 반복되자,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삶은 점점 더 버겁게 느껴졌다. 오랜 고민 끝에 회사를 그만두고, 가장 성 평등한 도시 뉴욕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당시 아이는 생후 9개월, 2년 6개월이었다. 남편은 내 결정을 단번에 지지해주었다.
“당신이 성장하면 나도 함께 성장하는 거요. 힘들겠지만 해봐요. 석 달에 한 번씩 가서 도와줄게요.”
그는 일본에 남아 절약하며 생활비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두 아이를 품에 안고, 낯선 땅을 향해 결연히 날아올랐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너무 큰 위험을 감수하는 것 같다고 우려했지만, 나는 내 길을 가야 한다는 믿음과 열정을 잃지 않았다. “모험하지 않는 자는 얻는 것도 없다”는 스페인 격언처럼, 나는 새로운 세상에 나를 던졌다.
그 넓은 미국에서 뉴욕을 선택한 이유는 당당하고 자립적인 여성들이 많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눈보라 치던 겨울날, 사건이 일어났다.
폭설이 내리던 새벽, 20년 된 중고차가 갑자기 멈췄다. 비싼 값에 사온 차량은 이탈리아 출신의 능변 중고차 판매원에게 속아 샀던 차였다. 주변엔 전화도, 편의점도, 주택도 없었다. 나는 딸을 품에 안고, 아들의 손을 잡은 채 지나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지만, 어느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눈보라 속 러시아워. 손발의 감각이 사라지고 아이들의 얼굴이 창백해질 무렵, 한 대의 차가 멈춰 섰다. 운전자는 갈색 눈을 지닌 동양인이었다. 그는 우리를 경찰서까지 데려다주었다.
지각한 채 학교에 도착하자, 나는 울먹이며 외쳤다. “지각한 건 미국식 개인주의 때문이에요!”
그러나 곧 깨달았다. 이 냉정한 사회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며 버티는 일은 이상보다 훨씬 가혹한 현실임을 절감했다. 그렇게 두 번째 도전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자유롭고 도전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고, 실패는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세 번째 도전 – 다시 일본
뉴욕에서 돌아온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분명했다. 나는 여전히 일하고 싶었고, 비즈니스 세계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수십 개 회사에 이력서를 냈지만, 아이가 둘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내 꿈은 여전히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지만, 두 아이를 키우며 일을 찾는 현실은 너무나 벅찼고, 몇 번의 실패 끝에 나 자신에게 무엇이 가능한지조차 의문이 들었다.
‘일이 어렵다면 공부는 가능하지 않을까?’
방향을 전환한 나는 다시 한번 모든 열정을 공부에 쏟았다. 마침내 K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 합격했고,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새로운 꿈을 품었다. 박사과정에서의 길고도 험한 여정은 나에게 단순한 연구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 둘을 키우며 논문을 완성해가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지도교수님이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나는 큰 상실감을 느꼈고, 내 연구도 끝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새로 부임한 교수는 내 연구와 전공이 맞지 않았고, 바쁘다는 이유로 내 논문을 검토조차 하지 않았다. 성격도 맞지 않아 관계는 점점 멀어졌고, 연구실 발걸음도 뜸해졌다. 완성된 논문은 서랍 속에서 먼지만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지도교수가 내민 한 편의 논문.
한국의 저명한 정치인의 아들이 쓴 박사학위 신청 논문이었다. 그는 유력 인사의 자제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심사위원 중 한 명이 그 집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교수의 태도는 단호했다.
“논문은 공정해야 합니다. 누구든 실력으로 평가받아야 합니다.”
결국 그 정치인의 아들은 학위를 받지 못했다.
그날 꺼져가던 열정에 다시 조용한 불씨가 살아났다.
당시 한국 사회는 권력과 지위가 실력보다 앞서던 시대였다. 그러나 일본 학문의 세계는 달랐다. 공정하게, 오직 실력으로 평가받는 사회.
‘정말 공정한 사회라면 나에게도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나는 지도교수가 관심 가질 만한 주제를 찾아 논문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학위를 받기까지 무려 10년이 걸렸다.
그 후 3년 동안 수많은 공개 채용에 도전한 끝에, 50세에 일본의 한 대학에 부교수로 임용되었다.
그 순간 나는 인생에서 가장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며 보내는 날들은 평온하고 충만했다. 미래가 밝은 대학생들과 함께한 시간은 나를 젊게 만들었고,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했다. 경영학을 연구하며 좋은 상품과 서비스를 통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을 고민해왔다.
하지만 점차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쓰는 논문과 책이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될까?’
도서관에 꽂힌 전공 서적들은 먼지만 쌓여갔다. 아무도 읽지 않고, 복사조차 되지 않는 논문들. 의무감에 쫓겨 억지로 이어가는 연구에는 영혼을 담을 수 없었다. 나는 단순히 학문적 성취를 넘어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이미 시니어가 되어 있었다.
남들보다 늦게 교수직에 올랐기에 재직 기간은 짧았다. 강의와 연구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지만, 현실은 조용히 퇴장을 준비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제야 돌아보았다. 일본에서 살아온 세월이 한국에서 보낸 시간보다 길어졌다는 사실을.
‘나는 조국을 떠나 무엇을 얻었는가?’, 그리고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은 내 시선을 전공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분야로 향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도전 – 한국
우리보다 앞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 그들의 경험 속에는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또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우리나라 시니어들의 행복지수를 높일 방법은 없을까?’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마지막 도전은 일본에서 시니어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깊이 연구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시니어들의 삶의 질을 향상할 해법을 찾는 것이었다.
나는 현장으로 향했다. 시니어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듣고, 그들의 삶에 직접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제, 그 이야기들을 한국 사회에 전하고자 한다.
그것이 내가 선택한 마지막이자 가장 뜨거운 도전이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 되면 캐리어를 끌고 일본 전역을 누볐다.
섭씨 38℃의 무더위 속에서는 쇠퇴한 고향을 되살리기 위한 시니어들의 지방 프로젝트 현장을, 싸라기눈이 뺨을 때리는 겨울에는 정년을 폐지하고 80~90대 시니어들을 고용해 성공한 기업들을 찾아다녔다.
정년 후 박사과정에 도전 중인 K씨(86세), SNS를 통해 전 세계 젊은이들을 사로잡은 산골 할머니 O씨(88세), 정년퇴직 후 다양한 일을 병행하며 행복을 찾은 ‘N잡러’ I씨(80세)도 있다. 70대에 와상 환자로 누워 있다가 82세에 천으로 핸드백을 만들기 시작한 M씨(88세)는 한 달에 100개씩 판매하며, 젊은 여성 고객에게 받은 감사 편지를 ‘러브레터’라 부른다.
세계 최고령 앱 개발자 Y씨(89세)는 59세에 처음 컴퓨터를 접하고 80세에 프로그래밍을 시작했다. 81세에 고령자도 즐길 수 있는 스마트폰 게임 앱을 개발했고, 지금까지 9권의 책을 펴냈다. 애플 CEO 의 초청을 받아 면담했고, 전국을 누비며 강연하고 있다.
그들의 삶은 단순한 통계나 보고서로는 결코 담을 수 없는 뜨거움과 생생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과 마주할 때마다 나는 놀라운 에너지를 느꼈다. 그들의 눈빛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나이가 들수록 더 뜨겁게 삶을 개척하려는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예전에는 수익성과 효율성을 중심으로 기업을 분석했다면, 이제는 ‘행복’이라는 본질적 가치를 중심에 두고 시니어들의 삶을 바라보게 되었다.
행복은 전염된다고 했던가.
취재를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이야기들을 꼭 한국어로 써야 해.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더 많은 시니어들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지금 나는 비로소 내 영혼을 온전히 쏟아 넣을 수 있는 연구를 하고 있다. 시니어들의 삶을 통해 나 자신의 삶도 더욱 깊고 풍요로워지고 있다.
하지만 이번 도전은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단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쌓아온 경험을 사회에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그래서 나는 일본을 넘어 한국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배운 노하우를 기반으로,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한국 시니어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다.
매달 한국 시니어 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시니어 학습 공간에서 강연도 진행하고 있다. 그들과 소통하며 함께 웃고, 공감하며, 그들의 현실을 더 깊이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의 꿈
여성의 자립을 꿈꾸며 떠났던 젊은 날의 나는, 이제 시니어가 되어 조국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참살이’ 인생을 향해 다시 한 걸음을 내디디려 한다.
앞으로는 우리나라 시니어들을 직접 만나러 갈 계획이다. 기업들은 시니어 인재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을까? 노인 주거 복지시설은 일본과 어떻게 다를까? 지방 소멸을 막기 위한 프로젝트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나는 이 모든 현장을 직접 보고, 듣고, 기록할 것이다.
무엇보다 시니어들의 생생한 삶을 가까이에서 취재하며, 그들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모색해 글로 남길 것이다.
전국을 누비며 다양한 시니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 그것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까?
백세시대를 살아가는 선배 시니어들을 만날 때마다 깨닫는다. 은퇴 후에도 배울 수 있고, 일할 수 있으며, 도전할 수 있고,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의 이야기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은퇴는 종착역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의 출발역이다.”
그 메시지는 희망이 되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앞으로도 나는 두려움 대신 호기심을, 안정 대신 가능성을 선택하며 나아갈 것이다.
나의 ‘브라보’ 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도, 나는 여전히 도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