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궁중문화축전’이 오는 4월 26일 경복궁 경회루에서 펼쳐지는 개막제를 시작으로 9일간의 축제의 막을 연다. 이번 궁중문화축전은 문화재청이(청장 정재숙) 주최하고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진옥섭), (사)대한황실문화원(이사장 이원)이 주관한다. 5대 궁과 종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문화유산 축제로 각 궁과 종묘의 이야기를 담아 4월 27일부터 5월 5일까지 9일간 다채로운 공연, 전시, 체험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26일 오후 7시 30분부터 개최되는 개막제 ‘2019 오늘, 궁을 만나다’에선 축전에서 펼쳐질 다양한 프로그램을 옴니버스식으로 선보인다. 궁중 문화를 바탕으로 미디어 퍼포먼스도 감상할 수 있다. 개막제는 경복궁 야간개장 입장권을 따로 구매하지 않아도 인원 제한 없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개막제가 열린 다음 날 4월 27일부터는 경복궁을 포함한 5대 궁에서 본격적으로 축전이 열린다. 특히 28일에는 궁중문화축전의 백미로 꼽히는 ‘광화문 新산대놀이’와 ‘경회루 판타지-화룡지몽’을 만나볼 수 있다. ‘광화문 新산대놀이’는 28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광화문 광장과 세종대로에서 시민이 함께 즐기는 놀이판이다. 산대놀이, 나례의식, 다양한 전통 연희를 재해석한 흥겨운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경회루 판타지-화룡지몽’은 개막제에서도 미리 엿볼 수 있지만, 28일 오후 8시에 공식적으로 막을 올린다. 이 공연은 노비 출신 ‘박자청’이 경복궁의 꽃이라 불리는 경회루의 건설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어둠이 내려앉은 경회루를 배경으로 3D 맵핑, 조명 연출 그리고 화려한 춤과 연기가 더해진 미디어 퍼포먼스를 펼칠 예정이다. 또한 경회루 연못에 350석의 수상객석이 배치되어 무대를 더 가까이 감상할 수 있다. ‘경회루 판타지–화룡지몽’은 5월 4일까지 공연된다.
이 외에도 우리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이번 주말에는 따뜻한 날씨를 즐기며 가까운 궁으로 도심 나들이를 떠나보자.
개막제 ‘2019 오늘, 궁을 만나다’
장소 경복궁 경회루
일시 4월 26일 19:30
‘경회루 판타지-화룡지몽’
장소 경복궁 경회루
일시 4월 28일~5월 4일 20:00, 21:00
광화문 新산대놀이
장소 광화문광장
일시 4월 28일 15:00, 17:00
고궁사진전 ‘꽃피는 궁궐의 추억’
장소 경복궁 흥례문 광장
일시 4월 30일~5월 5일 11:00, 15:00
조선왕조 500년의 ‘예악(禮樂)’
장소 창덕궁 인정전
일시 5월 2~4일 15:00~16:00
달빛기행 in 축전
장소 창덕궁 일대
일시 5월 2~4일 19:00~21:00, 20:00~22:00
AR 체험 ‘창덕궁의 보물’
장소 창덕궁 일대
일시 4월 27일~5월 5일 9:00~18:00
웃는 봄날의 연희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
장소 덕수궁 석조전 뒤 협률사
일시 4월 27일~5월 5일 13:00~14:00, 19:00~20:00
시간여행 그날 ‘영조, 백성을 만나다’
장소 창경궁 일대
일시 5월 3~5일 15:00~16:00
창경궁 양로연 ‘가무별감’
장소 창경궁 문정전
일시 4월 29일~5월 1일 13:00~15:00
대한제국 외국공사 접견례
장소 덕수궁 정관헌
일시 4월 27일~5월 5일 14:30~16:30
조선 마술사 마술 공연
장소 경희궁 숭정문 앞 특설무대
일시 5월 4~5일 13:30~14:00
종묘제례악 야간공연
장소 종묘 정전
일시 4월 30일~5월 3일 20:00~21:00
종묘대제
장소 종묘 영녕전, 정전
일시 5월 5일 10:00~16:00
작년 7월 손웅익 동년기자와 함께 동행 취재를 했다. 공장지대에서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한 성수동 거리를 걸어 다니며 공간을 소개하는 지면이었다. 그날은 손웅익 동년기자가 서울오션아쿠아리움 부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지 딱 일주일 되는 날이기도 했다. 마침표를 찍지 않았더라면 회사에 앉아 있어야 할 시간. 갓 내린 커피를 마시며 지금까지 살아온 얘기와 살아갈 얘기를 나눴다. 40년 건축 전문가로, 전문 경영인으로 살다 은퇴한 지 1년째.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해 또다시 데이트 신청을 했다.
“경희궁이요?”
손웅익 동년기자는 그곳을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만들어준 공간이라고 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경성중·고등학교였으며, 해방 후 1980년까지 서울고등학교의 옛 교정이 있던 자리다. 무시험고교입학제, 소위 ‘뺑뺑이 세대’로 불리며 명문 서울고에 입학한 58년 개띠 손웅익 동년기자가 고교 시절을 보낸 장소. 본래 모습을 되찾아가면서 교정은 사라졌지만,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광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의 서울역사박물관 자리가 대운동장이 있던 곳입니다. 경희궁 뒤에도 작은 운동장이 더 있었어요. 나무들도 그때 그대로입니다.”
인생 방향을 설정해준 운명의 장소로 꼽은 옛 서울고등학교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속상한 일도 많았다. 입학시험 관문 없이 명문고 대열에 무임승차한 자격미달 74년 고교 입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시험 쳐서 들어왔는데 저희는 아니잖아요. 선배들과 선생님들의 벽이 너무 높았어요.”
총동창회에 안 나오겠다는 졸업생도 많았다. 선배들 사이에서는 아예 74년 입학생을 후배로 인정하지 말자는 소리도 흘러나왔다.
“큰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제가 졸업하고 한 10년 정도 됐을 때 총동문회에서 마이크를 잡을 기회가 있었어요. ”
동문들 앞에 선 손웅익 동년기자는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데도 58년 개띠생을 후배 취급할 생각이 아니라면 다른 이름을 만들어 1회 졸업생으로 나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곳에 계신 선배님들 자식 중에 뺑뺑이로 서울고등학교에 들어오면 우리한테 대하듯 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장내가 잠잠해지더라고요.”
손웅익 동년기자는 이날 동문들 앞에서 했던 이야기를 정리해 동문회지에 글로 실었다. 이를 계기로 선후배 간 관계가 재정립됐고 지금의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게 됐다.
“이 자리에서 제가 공부했을 때가 제 인생 줄기의 큰 시작점인 것 같아서 이곳에서 뵙자고 했습니다.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제 경우는 많은 걸 깨달았어요. 학교 다닐 때 어린 마음에 반발심도 있었어요. 감성도 풍부할 때라 고목 주위에서 그림도 많이 그렸고요. 나중에 보니까 학교의 전통이나 정신이 알게 모르게 배어 있었습니다. 이곳의 추억이 벌써 40년 전인데 지금까지 맥락을 꿰뚫고 있더라고요.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때 그 자리로 오고 싶었습니다.”
마침 대학 졸업 후 첫 직장도 옛 서울고가 내려다보이는 피어선 빌딩에 있었다. 은퇴하고 나서도 학교 주위는 친숙하기에 자주 찾는다. 시청역에서 덕수궁을 지나 정동길을 걸어 커피 한 잔, 차 한 잔 하며 여유를 즐긴다. 경희궁 한 바퀴 돌고. 서울역사박물관도 구경하고 말이다.
척박한 서울살이를 이기다
경주에서 태어난 손웅익 동년기자는 부모님을 따라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서울로 올라왔다. 성수동 카페거리 동행 취재 때 중랑천변 판자촌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비가 오면 집이 떠내려가기 일쑤였고, 전기가 없던 시절이라 횃불 들고 밤새 집을 지어야 했다. 그런 생활이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1 때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 통장을 의무적으로 만들어서 적금을 붓도록 했어요. 그런데 돈이 없어서 못 냈다가 교우들 앞에서 선생님한테 맞은 적도 있어요. 그렇게 힘들었는데 나는 지금도 부모님이 내 대학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해주셨는지 잘 모르겠어요. 친구들한테 자주 민폐를 끼치면서 살았어요. 그야말로 빈대생활이었죠.(웃음)”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손웅익 동년기자는 미술대학 대신 한양대학교 건축과를 택했다.
“미술 대신 선택한 건축이 저랑 잘 맞았어요. 건축은 조형물이고 예술품이지요. 미술을 선택하지 못했던 한을 건축에서 충분히 풀 수 있었으니까 제가 40년 가까이 건축을 했겠죠.”
건축과 졸업 후 돈을 잘 벌 수 있는 건설회사 대신 건축설계 사무실에 들어갔다. 건설회사의 3분의 1 수준인 월급을 받고 설계 사무실에 앉아 도면을 그렸다. 현장에서 공사하는 것보다 도면 그리는 것이 적성에 맞아서였다.
“그때 건설회사로 간 친구들이 월급을 삼십만 원쯤 받을 때였어요. 설계 사무실은 십만 원이었고요. 그래도 나는 어쨌든 간에 도면이 좋았어요.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요. 나중에 건축사가 돼 설계 사무실을 차려 돈을 벌면 된다는 생각이었거든요.”
건축사 자격증을 따고 설계 사무실을 연 이후 일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건설 열기 덕분에 설계사 또한 바빠졌다.
“결혼하고 1년 뒤에 건축사 자격증을 따고 서른한 살에 설계 사무실을 차렸어요. 정말 그때는 일도 많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죠. 미국에도 가고 이탈리아, 스위스 종주여행도 하고요. 당시 유럽 왕복 티켓 가격이 비쌌거든요. 1990년대 초반에는 분당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건설 열기가 또 어마어마했습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많았어요. 사무실 규모도 커지고 집도 사고 정말 내 세상이었어요. 말도 못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는데 30대 초반에 경제적으로 인생 역전했던 거죠.”
신나게 이야기가 흐를 때쯤 속도가 딱 끊기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이 시대를 살아온 이들의 말문이 막히는 순간, IMF 금융위기 얘기가 이어진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직원들을 내보내지 않았어요. 내보내봐야 직원들이 갈 데도 없잖아요. 집 담보 잡히고 그냥 모든 걸 다 쏟아 붓고요. 이곳저곳에서 돈 빌려서 회사 사무실에 다 쓸어 넣었어요. 그 빚 갚는 데만 10년 걸렸어요. 경제적으로 제로인 상태에서 퇴직을 했습니다.”
10년을 준비한 은퇴, 퇴직 1년 차
작년 5월, 서울오션아쿠아리움 부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손웅익 동년기자. 부사장이라기에 넉넉해서 그만두는구나 생각했는데 이전 상황에 대해 듣고 나니 왜 그만뒀는지가 궁금했다. 회사에서 제안도 있었고 좀 더 은퇴를 늦출 수도 있었지만 흔들림 없이 계획대로 은퇴 날짜를 잡았다.
“제가 은퇴 준비만 10년 했습니다. 자격증도 따고, 책도 내고, ‘이 정도면 부딪칠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강의하고 글 쓰고, 건축 일을 평생 했으니까 또 건축과 관련해서 자문도 몇 개월 했고요.”
은퇴를 위해 미술심리상담사, 노인심리상담사, 자살예방지도사 등 자격증도 땄다. 중앙일보에 건축과 관련한 글을 1년 여 게재했고, 동년기자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최근 우송정보대학교 리모델링 건축과 겸임교수로 임용돼 강의도 하고 있다.
“강의하는 게 재미있습니다. 반응도 좋고요. 참 체질적으로 나랑 잘 어울리는구나 생각합니다.(웃음) 작년 5월에 수필작가로 등단했어요. 이외에는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그림. 정말 그림을 다시 한 번 하고 싶어서 삽화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림 그리고 사진도 찍고 그게 글하고 또 연결되잖아요.”
은퇴하고 무엇보다 좋은 것은 시간의 속박에서 해방된 것이라고 했다. 은퇴하는 순간까지 출근시간은 늘 아침 7시에 맞춰져 있었다. 고교 시절에도, 설계 사무실을 운영할 때도, 큰 조직에서 중역을 맡아 일할 때도 시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찍 출근해서 데이터 정리하고 글도 쓰고 사진도 정리하고요. 퇴근도 항상 늦었어요. 문제는 내가 정말 쉬고 싶어도 강제로 출근해야 되잖아.”
건축설계 사무실을 운영하는 후배가 자리를 내주어 출퇴근할 장소가 있기는 하지만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출근하다가 멈춰 설 수도 있고 어디론가 다른 길로 빠져서 내빼도 괜찮다. 사진 찍고, 산책하고, 집 근처 영화관에서 영화도 많이 본다고 했다.
“좋잖아요. 생각도 하고. 하여튼 뭐 여러 가지로. 과거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현재를 봐요. 글이나 그림 소재도 생각하고요. 그리고 길가다 사진도 찍어야죠. 바삐 가야 하는 사람들과 걸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니 혼자 걷습니다.”
베이비부머가 주거문화를 바꿔야 한다
그렇다고 손웅익 동년기자가 1년 동안 유유자적 한가롭게만 지낸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업과 시니어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의견을 나누고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 중이다. 문 닫은 식당과 빈 공간들이 눈에 많이 띄어서 걱정이라고도 했다.
“베이비부머는 위로는 늙은 부모가 살아 계시고 아래로는 부양해야 할 자식들이 있습니다. 정말 조금이라도 자식들에게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국민연금에 기대기도 어렵고 퇴직연금을 들어놓은 사람도 흔치 않고요. 재산을 분배하네 마네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생각도 줄이고 씀씀이도 줄여야 하고 실제로 우리가 사는 공간, 그러니까 집의 크기를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 주거 공간의 평수를 줄이고 입주자가 함께 쓰는 공간을 늘려 조금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주거로 전환하자는 운동을 현재 손웅익 동년기자가 펴나가고 있다. 자식들 출가시키고 나면 덩그러니 부부만 남아 있으니 적당한 규모의 집에서 살고 남는 돈은 현금화해서 노후자금으로 돌리자는 의미다.
“내 공간은 최소화하고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구역을 만들어 여러 가지 활동도 하고 수익사업으로도 이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이죠. 시니어 카페라든지,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요리를 하고. 이런 공동 주택이 마을화가 되면 다른 지역 사람들이 와인을 마시러 혹은 빵을 맛보기 위해 방문할 수 있는 곳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또한 10년 넘게 연구했습니다.”
최근 정부의 잇따른 부동산 정책 실패로 혼란과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생각을 골똘히 해보면 나쁘지 않은 구조이기도 하다. 투자와 돈을 만드는 도구로 변질된 집의 개념을 본래의 기능으로 되돌릴 수 있는 혁신 운동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액티브한 시너지를 기대한다
회사에 있으면서 해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갈증이 심한지 그가 매진하는 일들이 많기도 하다. 삽화뿐만 아니라 캘리그라피에도 관심이 많아 시간이 나면 꼼꼼하게 글씨를 쓰기도 한다.
“그림을 하다 보니까. 어떤 곳에서 책을 내는데 삽화를 그려 달라는 제의도 있었어요. 내가 그린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면 SNS 활동도 열심히 해야겠구나 생각합니다.”
끝에 뭐가 있는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이 시간을 마음껏 누려보겠다는 마음밖에 없다.
“아무 준비도 없이 불확실한 미래를 그냥 기대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이가 없다잖아요. 맞는 얘기죠. 그런데 제가 오랫동안 건축설계 사무실을 운영하고 크고 작은 기업에서 일도 해보고 했는데 그때마다 제것도 아니고요. 그냥 열심히 살다 보니까 여기에 제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핵심은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관계요.”
시니어 세대로 접어들면서 좋은 점은 관계 정리에 의연해졌다는 것이다. 정리도 할 수 있고 새로운 관계도 만들 수 있다. 오랜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모이니 친해지기도 쉽고 다양한 경험들이 서로를 자극하고 발전시킨다는 생각도 든다.
“굉장히 희망적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어요. 동년기자단도 멋진 시니어가 모인 모임이잖아요. 앞으로 동년기자 활동도 잘해야 할 텐데요.(웃음)”
경희궁 처마 아래서 손을 내밀어 비와 마주하던 손웅익 동년기자 모습이 기억난다. 혼란스러웠던 시절. 힘들었던 세상과 맞서던 추억 속 고교생 시절 자신과 만나 듯 손 위로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가문 땅을 적시는 단비가 내린 다음날 아침, 서울시가 주최하고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가 주관하는 서울 詩 기행을 나섰다. 미세먼지도 말끔히 걷히고 길가의 초여름 나무들은 상큼하고 싱그러워 내 삼십대를 떠올리면서 정동골로 향했다.
정동은 근대사가 곳곳에 살아 쉼 쉬는 곳이요 덕수궁 돌담길은 내 데이트 코스이기도 했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덕수궁의 동문인 대한 문을 들어서자 비운의 역사가 되살아나는 듯 마음이 침울했다. 고종이 야심차게 자주적으로 선포한 이란 국호와 란 년호의 맥이 끊긴 곳이기도 하다.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 했던 곳도 다시 돌아온 곳도 이 곳 경희궁(덕수궁)이었다. 1918년 경술국치로 완전히 국권을 일제에 빼앗겼으며물론 외교권도 빼앗겼다 얼마 후 이곳에서 강제 퇴임 당하는 치욕의 장소이기도 했다. 비운의 왕 고종의 승하는 3.1운동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주인 잃은 석조전은 유일한 서양식 건축물인데 고종이 귀빈을 만나거나 외국 손님을 만날 때의 장소였다. 지금 봐도 품위 있고 멋이 있었다. 그 앞 느티나무 한 그루가 옛 주인을 생각한 듯 푸른 잎을 떨어뜨려 날리고 있었다.
배재학당 박물관에 가니 보수중이어서 들어가지 못했으나 부활절 아펜젤라의 기도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조선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고 자유와 빛을 주옵소서”라는 간절함을 담은, 그는 한양 정동에 한옥을 구입하여 4명의 학생으로 교육을 시작하고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란 학교명을 부여 받고 배재학당을 세웠다고 한다. 이곳에서 서재필과 이승만이 나왔고 시인 김소월이 나왔다. 그리고 후에 카프문학의 발상지가 되기도 했다. 카프문학의 주 멤버인 박세영 박팔양 나도향 이런 시인들이 배재학당 출신들이다. 박세영의 그 유명한 시 는 노래로도 불려져 북한에서는 성악가 조청미가 불렀다 한다.
1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흘러 내리고
뭇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냐
2,3 단원 중략
남극에서 왔나
북극에서 왔나
산상에도 상상봉
더 오를 수 없는 곳에 깃들인 제비.
너희야말로 자유의 화신 같구나,
너희 몸을 붙들자 누구냐
너희야말로 하늘이 네 것이요 대지가 네 것 같구나
녹두만한 눈알로 천하를 내려다보고,
주먹만한 네 몸으로 화살 같이 하늘을 꿰어
마술사의 째찍 같이 가로 세로 휘도는 산꼭대기 제비야
중략
나는 차라리 너희들 같이 나래라도 펴 보고 싶구나
생략
나더러 진달래꽃을 노래하라 하십니까
이 가난한 시인더러 그 적막하고도
가냘픈 꽃을
이른 봄 산골짜기에 소문도 없이 피었다가
하루 아침 비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꽃을
무슨 말로 노래하라 하십니까?
노래하기에는 너무도 슬픈 사실이외다
백일홍처럼 붉게붉게 피지도 못하는 꽃을
노래하느니 차라리 붙들고 울 것이외다
친구께서도 이미 그 꽃을 보셨으리라
이분들의 시를 읖조리다보니 역사의 숨결이 아프게 다가오는듯 하다.
시인 송시월은
전남 고흥 출생, 1997년 월간 으로 등단, 계간 책임 편집.
저서로는 시집 시문학사 이 있다.
“아마 남대문 방화도 문화해설 체험을 통해 문화재의 소중함을 알았다면 없었을 일일지도 모르죠.”
우리문화숨결 궁궐길라잡이 오정택(吳政澤·52) 대표의 말이다. 그냥 넓은 공터가 있는 옛날 건물이 아니라, 누가 살았고 어떤 역사가 있었고, 왜 우리가 아껴야 하는지 들어볼 기회가 있었다면 방화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
궁궐길라잡이들은 그런 면에서 중요한 사람들이다.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와 소중함을 알리고 보존활동에도 참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은 2002년에 덕수궁터 미대사관 아파트 건축 반대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궁궐길라잡이가 설립된 것은 1999년. 당시 청년단체였던 ‘서울KYC’가 중심이 돼 출범했다. 오정택 대표는 초창기부터 참여하다 대표를 맡은 지는 10년이 넘었다.
궁궐길라잡이는 오랜 역사 속에서 변화도 많았다. 초창기에는 경복궁과 창경궁, 덕수궁만 해설하다가 이후 창덕궁과 경희궁, 종묘까지 해설을 맡았다.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대통령상 등 수상 내역도 화려하다. 그만큼 정부로부터 수고를 인정받은 것이다. 현재는 서울시에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되어 있다.
이들의 각 궁궐에서 하는 해설은 모두 무료로 진행된다. 문화재청에서 단체 운영에 필요한 일부 예산을 후원받을 뿐 대부분의 활동은 회원들의 재능기부로 이뤄진다.
“비영리단체이고 해설에 대한 비용도 없어 운영이 쉽지 않긴 하죠. 하지만 그만큼 이해관계나 갈등의 요소가 적어 원활한 모임 운영의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해요. 혹시 궁궐길라잡이분들을 보시면 자부심과 보람만으로 하시는 일이니 꼭 응원해주셨으면 해요.”
매주 일요일 각 궁궐에서 해설을 하고 있는 궁궐길라잡이는 대략 400여 명. 해설이 가장 많은 경복궁의 경우는 하루 10회 이상 해설이 이뤄지기 때문에 문화해설사도 그만큼 필요하다. 오 대표는 그중 상당수는 시니어라고 말한다. 현역 최고령 회원은 1943년생이다.
“약 20% 정도는 은퇴하신 분들이죠. 자긍심과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일이다 보니 나이가 많으신 분들에게 적합한 것 같아요. 일요일 궁궐 해설뿐만 아니라 청소년 대상 사업이나 심화강좌 등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어서 시니어가 참여할 수 있는 일거리가 적지 않습니다.”
교육을 통한 길라잡이 배출도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9개월 교육기간에 비용은 20만원에 불과한데 강사진 중 상당수는 대학 강단에서 활동을 할 정도로 수준이 높다. 올해는 45명이 교육을 받고 있다.
오 대표는 경희궁 해설 활동을 최초로 시작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경희궁은 입장료조차 받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현장 중 한 곳입니다. 저희의 해설 활동 시작이 경희궁의 가치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리적 복원이 어려울 때 해설로 그 가치를 복원하는 셈이죠. 또 달라진 관람문화도 저희가 기여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둘러보고 쉬다 가는 관람문화가 지금은 체험하고 이해하는 문화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 해설사들의 노력이 있습니다.”
최근 고궁과 같은 사적을 방문하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역사적 배경을 곁들여 문화재를 설명하는 문화해설사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전하는 ‘이야기꾼’에서 역사적 사건과 그 배경을 설명하는 ‘역사 선생님’으로서, 때론 유적을 안내하는 ‘안내자’로서의 열정을 보여주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화해설사에 대한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그 매력에 빠지는 것만큼 문화해설사가 될 수 있는 방법도 쉬울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문화해설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이 직업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직종인지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문화해설사란 전문성을 갖고 사적이나 특정 지역의 역사와 가치, 문화를 알리고 방문객의 이해를 돕는 사람을 지칭한다. 문화해설사제도가 처음 도입될 때만 하더라도 특정 문화재를 대상으로 고정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에는 문화재가 아닌 여러 지역이나 코스를 대상으로 해설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문화해설사라는 명칭 역시 대상이나 주관 기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문화재청의 경우 제도 시행 초창기에는 문화해설사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현재는 문화재안내해설사라고 구분해 부르고 있다. 광역자치단체에서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문화해설사들은 ‘문화관광해설사’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문화관광해설사제도는 관광진흥법으로 정해져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 그리고 각 지자체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밖에 구 단위 소규모 지자체나 민간단체에서 활동하는 인원은 문화해설사, 역사문화해설사, 문화교류해설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처럼 명칭이 해설 대상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그 취지와 역할은 대동소이하다.
정부 문화관광해설사 취득은 ‘바늘구멍’
문화해설사 중 가장 대표적인 문화관광해설사제도는 어떻게 운영될까? 안을 들여다보면 다소 복잡하다. 문화관광해설사제도의 설립은 2011년 관광진흥법 개정으로 시작됐다. 2001년 ‘한국 방문의 해’를 맞아 당시 문화관광부가 문화유산해설사를 배출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문화관광해설사는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다른 제도와 달리 관광진흥법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가 인증한 위탁 교육기관을 수료한 사람만이 지원 가능하다. 위탁 교육기관에서 100시간 교육을 통해 배출된 예비 문화관광해설사는 지자체의 평가와 3개월 이상 실무수습을 마친 후에 문화관광해설사 자격을 얻게 된다.
이들 교육기관은 문화체육관광부가 한국관광공사에게 선발을 위탁하는데, 한국관광공사는 3년에 한 번씩 교육기관의 인증을 갱신한다. 현재 인증된 교육기관은 총 25개소로, 교육 시설을 갖춘 대학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이들 25개 인증 교육기관으로 찾아가면 문화관광해설사가 될 수 있을까? 아니다. 이들 교육기관은 상시적으로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자체에서 문화관광해설사의 수요가 있을 때마다 교육을 의뢰받아 시행한다. 다시 말하면 서울시와 같은 광역자치단체에서 문화관광해설사에 수요가 있을 때 문화체육관광부와 협의해 선발 계획을 세우면, 공고를 통해 지원자를 선발하고 이들의 교육을 한국관광공사에서 인증한 위탁 교육기관에 의뢰하는 식이다.
의뢰가 있을 때마다 선발된 인원에 대해서만 교육을 진행하기 때문에 교육기관을 찾아간다고 문화관광해설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각 지자체에서 선발 공고를 내면 그 시기에 맞춰 신청해야 자격 취득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문제는 문화관광해설사의 수요가 광역자치단체마다 사정이 다르다는 것. 강릉시와 공주시, 경상남도의 경우 올 초 문화관광해설사를 선발해 본격적인 교육에 들어갔다. 이에 반해 국내 최대 규모인 214명의 문화관광해설사를 관리하고 있는 서울시의 경우 올해 추가 인원을 뽑지 않기로 했다. 서울시 서울관광마케팅관광사업팀 관계자는 “모집 여부는 지난해 실적을 고려해 판단하는데, 지금 인원으로 충분하다고 판단돼 올해 추가 모집은 없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사드 문제로 인한 중국 관광객의 급감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관광해설사 자격을 얻으면 운영기관 배치에 따라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게 된다. 서울시의 경우 문화관광해설사들이 활동 가능한 시간과 지역을 설정해놓으면 서울도보관광(korean.visitseoul.net)에서 신청자들의 예약을 받아 자동으로 연결하는 형태로 운영 중이다.
해설사 운영 지자체도 많아
소규모 지자체에서 모든 과정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문화해설사 과정도 노려볼 만하다. 서울의 경우 중구와 종로구, 영등포구 등이 각 지역의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활동할 문화해설사를 선발해 운영 중이다. 선발이나 운영 방식은 각 구별의 특성을 반영해 차이가 있다.
서대문구의 경우 지난 3월 처음으로 해설사 8명을 선발했다. 총 36명의 지원자 중 8명을 뽑았다. 이들은 40시간의 이론·현장 교육을 받은 뒤 5월 하반기부터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해설을 하게 된다. 서대문구 지역활성화과 박홍표 과장은 “서대문구의 역사문화 자원을 발굴하고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하며 “스토리텔링 개발을 통해 문화재 중심에서 지역을 알리는 골목 해설로의 확대도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문화해설사제도가 지자체의 전유물은 아니다. 서울시 도심권50플러스센터는 지난해 6월 민간단체 한양길라잡이와 함께 세종마을(서촌)해설사 양성 과정을 진행했다. 이들은 7월 23일부터 10월 16일까지 온라인으로 해설 신청을 받아 1개 도보여행 코스를 운영했다. 올해 역시 도심권50플러스센터를 통해 두 번째 세종마을해설사 총 18명을 선발해 지난 3월 수료식을 진행했다.
한양길라잡이 이상욱 대표는 “올해는 해설사 선발에 경력사항을 중점적으로 고려했고, 실제로 반응도 좋다. 지난해보다 단체 신청이 많은 상태”라며, “내년에는 한옥마을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갑신정변과 3·1운동의 중심인 북촌과 관련한 프로그램을 운영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민간단체를 통한 경력 확보의 길
현장의 문화해설사들은 문화해설사라는 직업을 쉽게 접하고, 관련 경력을 쌓을 수 있는 방법으로 민간 문화해설 관련 단체를 추천한다. 민간 주도의 ‘재능기부’이기 때문에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워 가입이 쉽고, 교육 내용도 관 주도의 교육보다 실질적이고 체계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현재 민간 문화해설사 양성기관 중 대표적인 곳으로는 비영리 민간단체 우리문화숨결이 운영하는 ‘궁궐길라잡이’와 사단법인 한국의재발견이 운영하는 ‘우리궁궐지킴이’가 있다. 두 기관의 뿌리는 서로 다르지만 1999년 공식적인 문화해설 활동을 협력해 시작한 사이로 국내 문화해설 사업을 이야기할 때 두 단체를 빼놓을 수 없다. 실제로 국내 문화해설사 교육 과정에 참여하는 인력 중 상당수는 이들 단체 출신이고, 두 단체 출신은 선발 과정에서 프리미엄이 붙는다는 이야기까지 나돌 정도다.
두 단체는 1년에 한 번 교육생을 모집하고, 총 9개월간의 이론과 실습 교육 과정을 거쳐 문화해설사를 배출한다. 배출된 인원은 문화재청과의 협의를 통해 주요 궁궐을 중심으로 한 사적에 배치돼 방문객을 대상으로 해설 활동을 한다. 서울의 5대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과 종묘에서 궁궐지킴이는 금요일과 토요일, 궁궐길라잡이는 일요일에 해설을 맡는다. 문화재청 소속으로 활동하는 문화재안내해설사들은 평일에 주로 외국인을 상대로 안내 역할을 한다.
큰 수입 기대하면 낭패
직업으로서 문화해설사는 어떨까. 현실적으로 생활에 보탬이 될 만한 수익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문화재청 소속의 문화재안내해설사들이 급여가 보장되어 있어 그나마 사정이 가장 낫기는 하지만 기간제근로자(계약직)라서 업무성과 평가 후 1년 단위로 계약이 갱신된다. 모집인원도 문화재마다 1~2명씩 선발하는 것이 고작이어서 도전하기가 쉽지 않다.
광역자치단체의 문화관광해설사를 포함해 소규모 지자체의 문화해설사 역시 대부분 급여의 개념이 아니라 교통비와 활동비 정도만 지원해준다. 1회당 지원금은 2만5000원에서 3만5000원 수준이다. 이마저도 해설을 매일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수입은 ‘월 소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민망한 액수다. 그래서 자긍심과 보람, 열정이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이다.
중국어 전문 서울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 중인 김선희씨는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자랑스러 문화유산을 알릴 수 있는 것이 이 직업의 매력”이라며, “해설을 들은 외국인들이 여행 후에 다시 연락해 감사인사를 전할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굽이굽이 꺾인 골목길을 따라 무너져 내린 성곽 끝자락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일행의 시선을 붙든 건 음습한 기운 속에서 마지막 숨을 토해내는 작고 허름한 벽돌집. 그렇게 한 세기 이상을 숨죽여 지내온 과거의 시간은 세월의 모진 풍파를 피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그 흔적이나마 보전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잊혀진 역사를 더듬어 떠나는 여정, 촌철살인의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가 동반자로 나섰다. 글 임도현 프리랜서 여행 기자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흔히 서울 앞에 ‘역사도시’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말로는 동의하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에선 납득이 가지 않는데요. 여러분은 수긍하십니까?”
전우용 교수가 던진 화두에 강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아리송해지기 시작한다. 조선 600년 역사와 더불어 고려, 삼국도 모자라 상고시대를 거슬러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의 후예들에게 서울이 역사도시로서의 면모가 부족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도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희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정동 경향신문사 사옥에서 말이다.
“옆 동네 사람들이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문화재를 파괴한다면 여러분은 분명 그들을 비난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 유적이 발견되고 그것으로 인해 개발이 지연되어 집값이 떨어진다면 여러분들 역시 문화재 파괴범이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서울을 허물기에만 바빴습니다.”
서촌 성벽 귀퉁이에서 만난 백범
서대문에서 서소문 사이 도성을 기대고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마을의 이름은 서촌(西村). 현재 옥인동 일대를 일컬어 서촌이라 부르지만 전우용 교수는 “엄밀히 말해 그곳은 하급관리들이 모여 살았던 향촌(鄕村)”이었다고 정정한다. 역사를 조목조목 꿰뚫고 있는 전우용 교수로부터 그동안 몰랐던 이야기를 듣기 위해 20여 명의 본지 독자들이 모였다. 브라보마이라이프가 매월 진행하는 ‘BRAVO TOUR’여행 그 첫 번째로 서울 역사기행을 택했고 2016년을 이틀 앞둔 지난해 12월 30일, 그와 함께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서울의 성곽 주변 서북촌 일대엔 문화재가 많아 전쟁 당시 폭격을 피할 수 있었고 청와대가 들어선 뒤에는 엄격한 개발제한을 받아야 했습니다. 덕분에 대부분의 한옥이 파괴된 와중에도 이곳만큼은 일제시대 당시 지은 근대 한옥을 비롯해 옛 건물을 보존할 수 있었죠.”
물론 거주민들의 상실감은 무척 컸을 것이다. 고층빌딩이 올라가고 아파트 투기가 서울 온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시대에 서촌 일대는 개발에서 제외된 열외자들이 촘촘하게 은거하는 도심 속 버려진 유물로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일행의 발길이 처음 닿은 경교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경교장(京橋莊)의 원래 이름은 일본식 한자인 죽첨장(竹添莊)입니다. 일제시대에 금광으로 부호가 된 최창학이 일본이 패망한 뒤 친일 행적을 만회해보겠다며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당시 초현대식 저택인 이 집을 헌납했어요. 김구 선생은 바로 아래 흐르는 만초천에 놓인 다리인 경교를 따 이 집의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그 후 경교장은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고 몇 해 전에서야 당시 이곳에 출입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려 복원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경교장에는 안두희의 흉탄에 저격당했던 순간 백범 선생이 입었던 선혈 낭자한 옷가지가 벽에 걸려 있다. 일제 패망과 함께 보란 듯이 환향하여 민족반역자들을 단죄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반으로 추대 받았어야 마땅한 그를 서촌의 그늘진 성벽 귀퉁이에서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일행은 안타까운 탄식만을 남겨둔 채 다시금 길을 나선다.
악덕 장사꾼 쁘레샹 집터에선 씁쓸함이
경교장을 시작으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길, 학자의 입에선 숱한 역사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반쯤 폐허의 모습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간신히 철거를 모면한 유한양행 터를 지나 기초가 통째로 뽑혀진 채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프랑스 영사 안토니 쁘레샹(Paul A. Plaisan)의 집터 앞에서 일행은 100년 전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1901년 조선에 온 쁘레샹은 서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이 땔감이란 것을 알아차리곤 사업에 뛰어듭니다. 땔감을 잔뜩 지고 무악재를 넘어오는 나무꾼들에게 쁘레샹은 커피를 한 잔씩 대접하는 로비를 펼치는데요. 달콤한 커피 맛에 단단히 중독된 나무꾼들이 하나둘씩 쁘레샹과 거래를 트면서 쁘레샹은 장안의 유통채널을 모조리 접수하게 되죠. 조선 최초의 땔감 브로커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쁘레샹의 영악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내친김에 이름을 ‘부가 들어오는 상서로움’ 이라는 뜻의 부래상(富來祥)으로 개명한 후 본격적인 재산 불리기에 나섰다.
“쁘레샹은 이후 부래상 상회를 열어 화란국 명예영사라는 번쩍번쩍한 금박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시작합니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모든 물품이 수입 금지된 틈을 타 값싼 국산 화장품을 대량으로 구입해 포장지를 뜯고 프랑스 라벨을 붙여 귀부인들을 상대로 폭리를 취하게 되죠. 하지만 곧 철창신세를 지고 맙니다.”
훗날 쁘레샹은 땔감 브로커와 짝퉁 사건을 계기로 역사가들로부터 두 번이나 ‘조선 최초’라는 수식어를 부여받는 영광(?)을 누린다. 그런 쁘레샹의 흔적도 이제는 뿌리가 뽑혀나간 부래상 상회와 함께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으니 조만간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서촌 전체가 돈의문 뉴타운 개발로 언제 갈아엎어질지 모를 일이다.
성벽아래 곳곳엔 외국인들 양옥 흔적
“재미있는 것은 성곽주변에 유독 외국인들이 집을 많이 짓고 살았다는 점이에요. 죽은 사람이 산다는 이유로 사찰 외에 산에다 집을 짓지 않았던 풍습과 더불어 왕궁보다 높은 곳에 건물을 지을 수 없다는 세속적인 제약에 따라 우리 조상들은 절대로 높은 곳에 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석조건축 위주인 서양에선 높은 언덕이나 성곽에 기대어 집 짓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지금도 성곽 곳곳에 외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조선 최초의 교회인 정동교회는 성벽에 기대어 첨탑을 세웠고, 정동교회를 지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아예 성벽을 자기 집 울타리로 이용하는 배짱을 보였다.
도성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이유로 나무로 만든 사대부집 한옥들이 예외 없이 소실된 반면, 도성을 끼고 벽돌로 쌓은 외인들의 집은 오늘날에도 건재하다. 홍난파 가옥 역시 그러한 운을 타고났다.
“이 집은 독일 영사관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홍난파 선생이 돌아가시기 직전 5년 동안 기거하신 곳입니다. 만약 이곳이 강남이나 광화문에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을 거예요. 성벽 밑 후미진 곳에 있어서 그나마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죠.”
홍난파 가옥을 지키는 안내자의 설명에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홍난파 선생이 사용했던 침대에선 창밖으로 인왕산이 훤히 보인다고 하니, 선생께선 아마도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잠을 깨어 악상을 떠올리며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서촌의 좁은 골목길을 수백 번도 넘게 올랐을 전우용 교수가 걸음을 재촉하더니 붉은색 벽돌로 지은 2층 양옥집 앞에서 멈추었다. 3·1운동을 외국에 타전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있는 UPI 특파원인 앨버트 타일러가 기거했던 딜쿠샤다.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벌이면서 앨버트 테일러는 미국의 스파이로 몰려 강제로 추방됩니다. 일본인 손으로 넘어간 딜쿠샤는 해방과 함께 적산가옥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싸움에 휘말려 불법으로 점거당한 채 지금도 17세대가 거주하는 무허가 주택 신세로 전락해있습니다.”
내력을 알 길이 없어 한 세기 동안이나 방치됐던 딜쿠샤는 2006년 앨버트의 아들인 브루스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숨겨진 이야기들이 낱낱이 밝혀지게 된다.
지난해 늦게나마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기획재정부 소유로 법적 절차를 온전히 마쳤음에도 딜쿠샤는 여전히 버려진 유물 그 이상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처지다. 파워블로거 김민영씨도 안타까워하기는 마찬가지다.
“불법으로 점거된 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우리가 많이 안다고는 하지만 실상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아요. 당장 돌아가서 딜쿠샤에 대해 더욱 공부해야겠어요.”
누군가에 의해 자물쇠로 겹겹이 둘러쳐진 딜쿠샤를 뒤로 하고 일행은 종착지인 경희궁을 향해 무겁게 발길을 돌린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의식해 복원을 마친 경희궁 근처의 성벽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하다. 육중한 중장비를 동원해 네모반듯하게 쌓아 올린 성벽이 전우용 교수의 눈에도 탐탁지 않아 보인다.
문화재, 방치와 보존 사이에서 길을 잃어
“18킬로미터에 이르는 한양 도성길을 모두 중장비로 신속하게 복원했습니다. 문화재라 함은 사람 손을 통해 창조되어야 마땅할 텐데 이런 식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한들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요. 과거 서울올림픽을 개최했을 때 개최 조건이 서울시가 운영하는 미술관을 보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경희궁 앞에 부랴부랴 시립미술관을 짓고 역사박물관을 세운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죠.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2016년에도 건승하길 빌겠습니다.”
결론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무엇이든 허물기 바빴던 과거, 그리고 허문 것을 재빨리 일으켜 세우려는 현재의 어리석음이 반복되면서 서울은 종잡을 수 없는 의문의 도시가 되고 말았다. ‘버려짐’과 ‘방치’가 곧 ‘보존’이요 ‘문화재’라는 아이러니한 등식 앞에 역사도시의 면모가 견고한 시멘트바닥에 눌려 신음하고 있다. 늦었지만 해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본디 역사란 시작하고 흘러야 하는 법, 더 이상 허물지 않고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 역사도시를 감상하는 현명한 방법이 아니던가.
굽이굽이 꺾인 골목길을 따라 무너져 내린 성곽 끝자락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일행의 시선을 붙든 건 음습한 기운 속에서 마지막 숨을 토해내는 작고 허름한 벽돌집. 그렇게 한 세기 이상을 숨죽여 지내온 과거의 시간은 세월의 모진 풍파를 피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그 흔적이나마 보전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잊혀진 역사를 더듬어 떠나는 여정, 촌철살인의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가 동반자로 나섰다.
“흔히 서울 앞에 ‘역사도시’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말로는 동의하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에선 납득이 가지 않는데요. 여러분은 수긍하십니까?”
전우용 교수가 던진 화두에 강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아리송해지기 시작한다. 조선 600년 역사와 더불어 고려, 삼국도 모자라 상고시대를 거슬러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의 후예들에게 서울이 역사도시로서의 면모가 부족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도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희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정동 경향신문사 사옥에서 말이다.
“옆 동네 사람들이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문화재를 파괴한다면 여러분은 분명 그들을 비난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 유적이 발견되고 그것으로 인해 개발이 지연되어 집값이 떨어진다면 여러분들 역시 문화재 파괴범이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서울을 허물기에만 바빴습니다.”
서촌 성벽 귀퉁이에서 만난 백범
서대문에서 서소문 사이 도성을 기대고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마을의 이름은 서촌(西村). 현재 옥인동 일대를 일컬어 서촌이라 부르지만 전우용 교수는 “엄밀히 말해 그곳은 하급관리들이 모여 살았던 향촌(鄕村)”이었다고 정정한다. 역사를 조목조목 꿰뚫고 있는 전우용 교수로부터 그동안 몰랐던 이야기를 듣기 위해 20여 명의 본지 독자들이 모였다. 브라보마이라이프가 매월 진행하는 ‘BRAVO TOUR’여행 그 첫 번째로 서울 역사기행을 택했고 2016년을 이틀 앞둔 지난해 12월 30일, 그와 함께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서울의 성곽 주변 서북촌 일대엔 문화재가 많아 전쟁 당시 폭격을 피할 수 있었고 청와대가 들어선 뒤에는 엄격한 개발제한을 받아야 했습니다. 덕분에 대부분의 한옥이 파괴된 와중에도 이곳만큼은 일제시대 당시 지은 근대 한옥을 비롯해 옛 건물을 보존할 수 있었죠.”
물론 거주민들의 상실감은 무척 컸을 것이다. 고층빌딩이 올라가고 아파트 투기가 서울 온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시대에 서촌 일대는 개발에서 제외된 열외자들이 촘촘하게 은거하는 도심 속 버려진 유물로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일행의 발길이 처음 닿은 경교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경교장(京橋莊)의 원래 이름은 일본식 한자인 죽첨장(竹添莊)입니다. 일제시대에 금광으로 부호가 된 최창학이 일본이 패망한 뒤 친일 행적을 만회해보겠다며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당시 초현대식 저택인 이 집을 헌납했어요. 김구 선생은 바로 아래 흐르는 만초천에 놓인 다리인 경교를 따 이 집의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그 후 경교장은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고 몇 해 전에서야 당시 이곳에 출입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려 복원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경교장에는 안두희의 흉탄에 저격당했던 순간 백범 선생이 입었던 선혈 낭자한 옷가지가 벽에 걸려 있다. 일제 패망과 함께 보란 듯이 환향하여 민족반역자들을 단죄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반으로 추대 받았어야 마땅한 그를 서촌의 그늘진 성벽 귀퉁이에서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일행은 안타까운 탄식만을 남겨둔 채 다시금 길을 나선다.
악덕 장사꾼 쁘레샹 집터에선 씁쓸함이
경교장을 시작으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길, 학자의 입에선 숱한 역사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반쯤 폐허의 모습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간신히 철거를 모면한 유한양행 터를 지나 기초가 통째로 뽑혀진 채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프랑스 영사 안토니 쁘레샹(Paul A. Plaisan)의 집터 앞에서 일행은 100년 전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1901년 조선에 온 쁘레샹은 서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이 땔감이란 것을 알아차리곤 사업에 뛰어듭니다. 땔감을 잔뜩 지고 무악재를 넘어오는 나무꾼들에게 쁘레샹은 커피를 한 잔씩 대접하는 로비를 펼치는데요. 달콤한 커피 맛에 단단히 중독된 나무꾼들이 하나둘씩 쁘레샹과 거래를 트면서 쁘레샹은 장안의 유통채널을 모조리 접수하게 되죠. 조선 최초의 땔감 브로커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쁘레샹의 영악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내친김에 이름을 ‘부가 들어오는 상서로움’ 이라는 뜻의 부래상(富來祥)으로 개명한 후 본격적인 재산 불리기에 나섰다.
“쁘레샹은 이후 부래상 상회를 열어 화란국 명예영사라는 번쩍번쩍한 금박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시작합니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모든 물품이 수입 금지된 틈을 타 값싼 국산 화장품을 대량으로 구입해 포장지를 뜯고 프랑스 라벨을 붙여 귀부인들을 상대로 폭리를 취하게 되죠. 하지만 곧 철창신세를 지고 맙니다.”
훗날 쁘레샹은 땔감 브로커와 짝퉁 사건을 계기로 역사가들로부터 두 번이나 ‘조선 최초’라는 수식어를 부여받는 영광(?)을 누린다. 그런 쁘레샹의 흔적도 이제는 뿌리가 뽑혀나간 부래상 상회와 함께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으니 조만간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서촌 전체가 돈의문 뉴타운 개발로 언제 갈아엎어질지 모를 일이다.
성벽아래 곳곳엔 외국인들 양옥 흔적
“재미있는 것은 성곽주변에 유독 외국인들이 집을 많이 짓고 살았다는 점이에요. 죽은 사람이 산다는 이유로 사찰 외에 산에다 집을 짓지 않았던 풍습과 더불어 왕궁보다 높은 곳에 건물을 지을 수 없다는 세속적인 제약에 따라 우리 조상들은 절대로 높은 곳에 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석조건축 위주인 서양에선 높은 언덕이나 성곽에 기대어 집 짓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지금도 성곽 곳곳에 외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조선 최초의 교회인 정동교회는 성벽에 기대어 첨탑을 세웠고, 정동교회를 지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아예 성벽을 자기 집 울타리로 이용하는 배짱을 보였다.
도성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이유로 나무로 만든 사대부집 한옥들이 예외 없이 소실된 반면, 도성을 끼고 벽돌로 쌓은 외인들의 집은 오늘날에도 건재하다. 홍난파 가옥 역시 그러한 운을 타고났다.
“이 집은 독일 영사관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홍난파 선생이 돌아가시기 직전 5년 동안 기거하신 곳입니다. 만약 이곳이 강남이나 광화문에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을 거예요. 성벽 밑 후미진 곳에 있어서 그나마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죠.”
홍난파 가옥을 지키는 안내자의 설명에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홍난파 선생이 사용했던 침대에선 창밖으로 인왕산이 훤히 보인다고 하니, 선생께선 아마도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잠을 깨어 악상을 떠올리며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서촌의 좁은 골목길을 수백 번도 넘게 올랐을 전우용 교수가 걸음을 재촉하더니 붉은색 벽돌로 지은 2층 양옥집 앞에서 멈추었다. 3·1운동을 외국에 타전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있는 UPI 특파원인 앨버트 타일러가 기거했던 딜쿠샤다.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벌이면서 앨버트 테일러는 미국의 스파이로 몰려 강제로 추방됩니다. 일본인 손으로 넘어간 딜쿠샤는 해방과 함께 적산가옥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싸움에 휘말려 불법으로 점거당한 채 지금도 17세대가 거주하는 무허가 주택 신세로 전락해있습니다.”
내력을 알 길이 없어 한 세기 동안이나 방치됐던 딜쿠샤는 2006년 앨버트의 아들인 브루스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숨겨진 이야기들이 낱낱이 밝혀지게 된다.
지난해 늦게나마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기획재정부 소유로 법적 절차를 온전히 마쳤음에도 딜쿠샤는 여전히 버려진 유물 그 이상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처지다. 파워블로거 김민영씨도 안타까워하기는 마찬가지다.
“불법으로 점거된 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우리가 많이 안다고는 하지만 실상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아요. 당장 돌아가서 딜쿠샤에 대해 더욱 공부해야겠어요.”
누군가에 의해 자물쇠로 겹겹이 둘러쳐진 딜쿠샤를 뒤로 하고 일행은 종착지인 경희궁을 향해 무겁게 발길을 돌린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의식해 복원을 마친 경희궁 근처의 성벽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하다. 육중한 중장비를 동원해 네모반듯하게 쌓아 올린 성벽이 전우용 교수의 눈에도 탐탁지 않아 보인다.
문화재, 방치와 보존 사이에서 길을 잃어
“18킬로미터에 이르는 한양 도성길을 모두 중장비로 신속하게 복원했습니다. 문화재라 함은 사람 손을 통해 창조되어야 마땅할 텐데 이런 식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한들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요. 과거 서울올림픽을 개최했을 때 개최 조건이 서울시가 운영하는 미술관을 보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경희궁 앞에 부랴부랴 시립미술관을 짓고 역사박물관을 세운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죠.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2016년에도 건승하길 빌겠습니다.”
결론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무엇이든 허물기 바빴던 과거, 그리고 허문 것을 재빨리 일으켜 세우려는 현재의 어리석음이 반복되면서 서울은 종잡을 수 없는 의문의 도시가 되고 말았다. ‘버려짐’과 ‘방치’가 곧 ‘보존’이요 ‘문화재’라는 아이러니한 등식 앞에 역사도시의 면모가 견고한 시멘트바닥에 눌려 신음하고 있다. 늦었지만 해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본디 역사란 시작하고 흘러야 하는 법, 더 이상 허물지 않고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 역사도시를 감상하는 현명한 방법이 아니던가.
글 임도현 프리랜서 여행 기자
“중심부(도심)에는 물(부동산 투자 수익)이 마르지 않는다.”
돈도 정보도 감(感)도 빛의 속도만큼 빠르다는 대한민국 0.1% 슈퍼리치.
그들은 부동산 침체기를 오히려 즐긴다. 그들은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고급주택 등 고가의 부동산을 싸게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활용한다. 역시 프로들이다.
VVIP마케팅 전문가들 말을 보면 슈퍼리치들에게는 그들만의 룰이 있다. 이른바 ‘도심 투자 불패의 법칙’이다. 제 아무리 부동산 암흑기에도 명동 등 도심 한복판 땅값은 떨어지지 않듯이 도심 한복판에 들어선 고급주택 등 부동산 가격도 시황에 따라 잠시 꺾였다가도 반드시 다시 오른다고 확신한다.
국내 대기업 CEO(최고경영인)를 사위로 둔 장경자(83·가명)씨. 그녀는 펜트하우스가 40억원을 호가하는 서울 중구 A고급아파트 한 채를 지난해 연말 사들였다. 지난 2009년 이후 부동산 경기가 악화된 이후 고급주택 가격이 내릴 만큼 내렸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특히 이 로케이션(입지)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한 가운데라는 점이 장씨의 마음에 쏙 들었다. 집값이 바닥을 친 상황에서 앞으로 시간이 갈수록 부동산 가치가 쑥쑥 오를 수밖에 없다고 장씨는 직감했던 것이다. 주변 여건도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조건이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살던 곳은 성북동. 하지만 그 지역보다 더 도심에 가까우면서도 주변에 대사관 등 공관이 많아 녹지도 많았던 것. 더욱이 덕수궁, 경희궁, 남산, 북한산 등 서울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조망권은 일품이었다. 장씨는 “집에 앉아만 있어도 사위가 일하는 회사를 볼 수 있다. 요샌 고급주택도 도심에 가까울수록 인기가 좋다”라고 흐뭇해 했다.
이런 분위기가 반영되어서 일까. 한 채당 가격이 수십억원에 이르는 이 고급주택은 지난해 초부터 미분양 물량이 나가기 시작해 연초에 남은 물량이 모두 소진됐다.
300억원 땅부자 박갑수(60·가명)씨도 요즘에는 고급주택만 눈에 들어온다. 수도권에서 투자한 땅값이 크게 올라 슈퍼리치 클럽에 가입했지만 사는 집은 아직 부천이다. 특히 아직 한번도 이사간적이 없어 누가 봐도 일반 서민과 다를 바 없다. 그런 그가 최근 선택한 주택이 바로 성동구 B고급아파트다. 이 아파트는 50억원을 호가한다.
그가 이 아파트를 선뜻 선택한 이유가 뭘까. 그는 20세 시절 1000만원을 주고 부천과 시흥사이에 땅을 샀다. 40년이 지난 지금 그 땅의 공시지가는 100억원을 넘는다. 시가로 300억원을 호가한다.
그는 다시 시간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그는 서울 도심 한복판의 주택은 반드시 다시 돈을 크게 불려 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는 “난 부천에 땅이 있으니, 노후 걱정은 내려 놨다. 다만 내가 다시 투자한다면 가치가 오를 곳에 투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방 슈퍼리치들도 서울 도심에 눈독을 들인다. 예전엔 강남 재건축 아파트나 신도시 아파트를 선호했지만 최근엔 고액자산가를 중심으로 이태원을 비롯해 용산, 한남동, 장충동 등 서울 도심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이른바 도심 투자 불패의 법칙이 지방 슈퍼리치들에게도 적용되고 있다.
한 VVIP마케팅 전문가는 “용산 부동산 값이 많이 내렸다고 생각한다. 지금 그 지역 부동산을 사기도 하고 저가 매물을 원하는 슈퍼리치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슈퍼리치 마케터들에 따르면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주식 투자를 활용한다. 주식으로 돈을 벌고 나면 처음 구매하는 것이 바로 외제차다. 일단 자동차는 사람들에 눈에 바로 띄기 때문에 차를 사고 싶은 욕구가 가장 앞선다는 것. 그 돈으로 계속 사업을 하다가 100억원 이상 큰 돈을 벌게 되면 고급주택에 대한 욕심을 낸다고 한다. 예컨대 100억원 클럽에 가입한 뒤 그들과 같이 어울리려면 어느 정도 급에 주택을 소유해야한다는 보이지 않는 룰이 있다는 얘기다. 왕따를 당하지 않으려면 강남이나 용산 등 특정 지역에 20억원 이상의 고급주택이 필수 옵션이된다는 뜻이다.
슈퍼리치들이 주목하는 상품은 또 있다. 바로 서울 도심지에 들어선 빌딩들이다. 현지 고급 부동산 마케터들에 따르면 젊은 슈퍼리치들은 자신들의 사업을 지속하기 위해 사옥을 구입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게 돈(수익)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다. 법인세를 아끼기 위해서다. 예컨대 100억원을 현금으로 가지고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한 세금을 내야하지만 사옥을 사게 되면 그만큼 비용으로 처리돼 세금을 아낄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 익명을 요구한 한 VVIP마케팅 담당자는 “사업을 하다보면 부동산을 단순히 투자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절세를 감안한 투자를 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