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신문사 골프 전문기자는 같은 학과 선배다. 둘이 함께 기자 시험 준비를 해서 며칠 차이를 두고 둘 다 기자가 됐다. 그러곤 시간이 한참 흘러 나는 기자를 그만두고 우여곡절 끝에 프로 골퍼가 됐다. 그 선배는 한 우물을 파서 골프 전문기자가 됐고. 내가 프로 골퍼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이다. 나는 선배에게 이렇게 물었다. “멋있는 골퍼란 어떤 골퍼인가요?” 숱한 골퍼와 라운드를 해봤을 그 선배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다시 만나고 싶은 골퍼가 멋있는 골퍼라고 생각한다”고. 나는 “그렇군요”라며 고개는 끄덕였지만 그 말이 깊이 와 닿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만나고 싶은 골퍼는 어떤 골퍼일까요?” 그는 이번에는 잠깐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답했다. “골프를 잘 치는 사람도 멋있지만 아무래도 골프 규칙을 잘 지키는 골퍼와 다시 라운드하고 싶지.” 그러고는 “다른 플레이어에게는 관대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엄격한 골퍼와는 꼭 다시 만나고 싶더라”라고 말을 더했다. 그때만 해도 엘리트 코스를 거치지 않고도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 선발전을 통과한 사실에 우쭐하던 나는 가슴이 ‘턱’ 하고 막혔다. 시원한 샷을 날리고 좋은 점수를 내는 것을 골프에서 가장 큰 덕목으로 꼽던 나에게 그의 답은 의외였기 때문이다. 그가 오랫동안 골프 전문기자로 취재를 하면서 나보다 실력이 출중한 골퍼를 한두 명 만났겠는가? 그런 그는 ‘누구는 파워가 압도적이어서 멋있다’라는 말 따위는 꺼내지도 않았다. 또 ‘누구는 쇼트 게임을 귀신같이 잘해서 다시 쳐보고 싶더라’라는 말도 입에 담지 않았고. 그 대신 원칙과 배려 같은 덕목을 최고로 꼽은 것이다. 그랬으니 골프는 스코어라고만 생각했던 내가 먹은 것이 체하지 않았겠는가?
그의 말을 가슴에 담은 뒤 내 골프는 조금 바뀌었다. 스코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냐고? 천만에, 그건 아니다. 점수와 상관없이 내게는 규칙을 좀 더 엄격하게 적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친선 라운드를 할 때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골프장이 정한 로컬 룰 대신 일반 규칙(영국왕립골프협회가 정한 공식 규칙)을 기준으로 삼았다. 함께하는 골퍼들에게는 최대한 관대하게 규칙을 적용한 것은 물론이고. 심심풀이로 내기를 할 때라도 승부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다고 이기든 지든 대충 친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늘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내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이런 부분만 지킨다고 다가 아니었을까? 지난해 과 동기들과 라운드한 뒤 저녁식사 자리에서 동기로부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얘기를 들었다. 쉽게 말하면 “너 그런 식으로 골프 치지 마라”는 말이었다. ‘내가 동기들과 골프 칠 때도 내기를 해서 주머니를 턴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엥?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그 자리에선 술 취한 친구가 한 주정이라고 넘어갔다. 그런데 자리에 누워 잠이 오지 않았다. 선배 말에 감화를 받고 ‘다시 만나고 싶은 골퍼가 되기로’ 마음먹은 지 한참 뒤에 들은 얘기라서 더 그랬다. 그래서 이튿날 그동안 한 번이라도 나와 라운드한 같은 과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법 여럿이었다. 혹시 라운드하면서 불쾌한 일이 있었다면 사과한다고. 또 혹시 나와 골프 쳐서 기분 상한 동기가 있느냐고도 물었다. 그런 적도 없고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다는 답을 들었다. 그래도 꺼림칙했다. 혹시 나는 기억 못 하지만 당한(?) 친구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러다 짚이는 친구가 한 명 떠올랐다. 자기 고객과 동반 라운드를 할 때 나를 초대한 친구였다. 초대를 받고 나는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명색이 프로 골퍼인데 네 회사 접대 골프에 부르는 거니 출장비는 주는 거냐?”고. 친구는 “친구 사이에 무슨 출장비냐?”며 “내기라도 할 테니 능력껏 가져가라”고 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나는 프로가 치는 블랙 티에서 치고 다른 이들은 화이트 티에서 플레이했다. 핸디(속어로 핸디캡 차이를 줄인 말, 실력 차이를 감안해서 오가는 덤)도 넉넉하게 주고. 그런데 그날따라 샷이 너무 잘 됐다. 까다로운 코스였는데 치는 족족 가서 붙더니 버디를 대여섯 개나 잡아낸 것이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고전하더니 모두 핸디캡보다 훨씬 높은 점수를 기록했고. 그렇게 소소한 수고비(?)를 챙기고 헤어졌다.
나로선 그날 함께한 사람들에게 승부가 주는 짜릿함을 느껴보라고 최선을 다한 것이었는데. 그 일이 떠오르자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곤 안부와 함께 예전 일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했다. ‘혹시 그날 일로 마음이 상했다면 미안하다’고. 그 친구는 “무슨 소리냐?”며 “아무렇지 않다”고 답했다. 그래도 나는 친구와 통화를 마치고 나서 내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과연 다시 만나고 싶은 골퍼일까?”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다시 물어도 마찬가지다. 다시 만나고 싶은 골퍼가 되는 것은 정말 어렵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일까? 그동안 뱁새 김용준 프로 칼럼을 사랑해준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에게 감사드린다. 골프에 관해서 뭐든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필자에게 메일을 보내기 바란다.
독자는 어떤 그립을 잡고 있는가? 위크 그립? 뉴추럴 그립? 스트롱 그립? 나는 위크 그립을 잡는 플레이어를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백이면 백 뉴추럴 그립 아니면 스트롱 그립이다. 뉴추럴 그립을 잡는 플레이어에게 ‘왜 뉴추럴 그립을 택했냐’고 물으면 대부분 이렇게 답한다. 골프를 시작할 때 그립에는 세 종류가 있다(위크, 뉴추럴, 스트롱)고 듣고 깊게 따져보지 않은 채 뉴추럴 그립을 선택했다고. 이들에게 ‘왜 스트롱 그립을 잡지 않느냐’고 물으면 의외의 답을 듣는다. 바로 ‘스트롱’이라는 이름 탓에 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약하다는 뜻의 ‘위크’와 중립이란 뜻의 ‘뉴추럴’, 그리고 강하다는 뜻의 ‘스트롱’이 있다면 어떤 것을 고르겠는가?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많은 사람은 가운데 것을 고른다. 같은 종류 물건인데 값이 싼 것과 비싼 것, 그리고 중간인 것이 있다면 십중팔구 중간 것을 고른다. 이 성향은 문화적 배경까지 더해져서 더 강해진다. 바로 중용(中庸) 때문이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 할 때 그 중용 말이다.
무슨 소리냐고? 어느 한 편으로 기울지 않는다는 중용을 큰 미덕으로 삼았던 탓에, 뭔가를 선택할 때 적당한 것을 고르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스트롱 그립을 쓰는 플레이어가 적은 것은 그 이름뿐 아니라 별명 탓도 있다. 스트롱 그립은 일명 ‘훅 그립’이라고도 부른다. 훅은 왼쪽으로(오른손잡이 골퍼인 경우) 감기는 것을 말한다. 처음 들을 때 볼이 왼쪽으로 감긴다면 선뜻 그 그립을 선택할 사람이 있겠는가? 나도 그랬다. 독학으로 골프를 시작하면서 별 생각 없이 뉴추럴 그립을 택했다. 어깨너머로 보며 익힐 때도 오랫동안 다른 그립으로 바꿔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숱한 시간을 슬라이스로 고생했다. 필드에서 제법 좋은 점수를 낼 수 있게 된 뒤에도 내 샷은 항상 슬라이스였다. 드라이버 샷은 비행접시처럼 휘었다. 흔히 슬라이스로 고생하는 골퍼에게 11시 방향을 보고 치라고 조언한다. 그런데 내 경우엔 11시 방향으로 쳐도 오른쪽으로 가끔 아웃 오브 바운드(OB)가 날 정도로 오른쪽으로 많이 휘었다. 그래서 나는 10시 방향을 보고 드라이버 샷을 치곤 했다. 아이언 샷도 마찬가지였다. 치기만 하면 오른쪽으로 밀렸다. 그런데 어떻게 점수를 내고 급기야 프로 골퍼까지 됐냐고? 바로 일관성 덕분이다. 내 샷은 아주 일관되게 오른쪽으로만 휘었다. 열심히 휘둘러댄 덕에 힘이 붙어서 거리가 제법 났다. 그러니 늘 목표보다 한참 왼쪽을 겨누고 치면 원하는 곳에 볼을 갖다놓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선 내 샷은 페이드(살짝 오른쪽으로 휘는 샷)라고 자위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지독한 슬라이스로 고전했다. 말이 좋아서 일관성이지, 오른쪽으로 크게 휘는 샷으로 좁은 홀에 서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내가 스트롱 그립 맛을 본 것은 프로 선발전을 통과하기 불과 얼마 전이었다. 하루는 당시 자주 겨루던 박창교(2014년 아난티클럽 챔피언) 선배에게 완패했다. 그날따라 박 챔프는 드라이버 샷을 반듯하게 날리면서 거리도 부쩍 멀리 보냈다. 당시 나보다 쇼트 게임이나 퍼팅 실력이 뛰어난 그였다. 그날은 비거리까지 나를 바싹 따라붙으니 당할 재간이 없었다. 라운드가 끝나고 식사를 하면서 박 챔프는 그립을 바꿔봤더니 효과가 너무 좋다고 비결을 털어놨다. 바로 스트롱 그립으로 바꿔 잡아봤다는 얘기였다. 그랬더니 슬라이스를 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더라는 것 아닌가? 그 뒤 나도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스트롱 그립을 잡아봤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드라이버 샷 슬라이스가 크게 줄었다. 그만큼 비거리도 늘었고. 아는 만큼 본다고 하던가? 그 뒤로 TV 골프 중계를 보면 선수들 그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럴 수가! 스트롱 그립을 잡은 선수가 훨씬 많지 않은가? 왜 이걸 몰랐을까? 수년간 슬라이스로 말 못 할 고생을 한 것이 너무 억울했다. 그 뒤로 조금씩 스트롱 그립으로 고쳐가면서 적응했다. 그리고 지금은 스트롱 그립을 잡으라고 가르친다.
스트롱 그립을 어떻게 잡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대부분 알 것이다. 셋업을 하고 위에서 내려다볼 때 왼손 손마디가 두 개나 두 개 반 정도 보이면 적당하다. 세 개까지 보이면 너무 과한 것이다.
칼럼 제목은 ‘클로즈드 그립을 잡아라’인데 클로즈드 그립이 뭔지 얘기를 안 하고 끝낼 뻔했다. 클로즈드 그립은 내가 지은 이름이다. 나는 스트롱 그립 대신 클로즈드 그립이라고 부른다. 클로즈드는 스트롱이라는 말이 주는 편견을 털어낸다. ‘클로즈드’(Closed)는 ‘닫았다’는 뜻이다. ‘열었다’는 뜻인 ‘오픈’(Opened)의 반대말이다. 나는 위크 그립은 오픈드 그립이라고 이름 지었다. 뉴추럴 그립은 그대로 뉴추럴이라고 부른다. 슬라이스로 애를 먹는다면 클로즈드 그립을 잡기를 권한다. 훅으로 고전하고 있다면 오픈드 그립을 잡으면 좋다. 클로즈드 그립이니 오픈드 그립이니 하는 것은 세계 최초로 뱁새 김용준 프로가 이름 붙인 것이라는 점도 널리 알려주기 바란다. 많은 경우에 이름이 실질을 지배한다. 골프에서 그립 이름도 그렇다.
여태 안 쓰던 레슨을 쓰기로 한 걸 보니 칼럼 소재가 떨어진 것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통한 일이 벌어지는 골프 세상에 얘깃거리가 쉬이 바닥나겠는가? 오로지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가 한 타라도 줄이는 데 보탬이 되기로 마음 먹고 방향을 튼 것이다. 물론 편집자와 숙의 끝에 정했다.
그래도 레슨을 칼럼에 담기로 하면서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사회관계망(SNS)에 레슨 콘텐츠가 넘친다는 사실 때문이다. 또 칼럼이라서 글로만 뜻을 전달해야 하는 한계도 있다. 그래도 늦깎이인 내가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을 독자와 함께 나눈다면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용기를 낸다.
자, 뱁새 김용준 프로의 골프 레슨 제1회를 시작한다. 독자는 ‘이완’(relaxation)과 ‘수축’(contraction)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물론 골프 스윙에서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안다고? 이미 상급자 반열에 오른 골퍼임에 틀림없다. 모른다고? 나도 불과 얼마 전까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걸. 지금도 아쉽다. 이완과 수축이 뭐냐고? 뜸들이지 말고 얘기하라고?
‘이완과 수축을 잘해야 좋은 스윙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이런 것이다. 힘을 쓰기 전까지는 근육의 긴장을 최대한 풀고 있다가 힘을 쓸 때 긴장을 해야 힘을 제대로 쓸 수 있다는 말이다. 백스윙 때는 이완하고 다운스윙 때는 수축을 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고. 더 정확하게는 백스윙 때와 다운스윙 초기에는 이완을 하고 다운스윙 중간부터 수축을 하는 것이 맞다. 다운스윙 초기에도 이완을 해야 한다는 말을 꼭 기억하기 바란다. 다운스윙을 시작하자마자 수축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운스윙을 시작하고 조금 지나고 나서 수축을 해야 한다. 다운스윙을 시작하고 얼마나 지나서 수축을 해야 하냐고? 두 손이 백스윙 톱에서 50~60대 정도 내려올 때까지는 여전히 이완을 했다가 그 다음부터 수축을 한다고 생각하면 좋다.
이완과 수축이란 표현을 쓰지 않았어도 같은 내용을 가르치는 골프 조언은 흔하다. 그립을 부드럽게 잡으라는 조언이 대표적이다. 그립을 꽉 잡으면 근육은 자연스럽게 수축한다. 백스윙을 천천히 하라는 조언도 마찬가지다. 백스윙을 빨리 하려다 보면 아무래도 그립을 꽉 잡게 된다. 어깨에도 힘이 들어가기 마련이고. 백스윙 톱에서 잠깐 멈췄다가 다운스윙하라는 조언도 이완과 수축을 적절하게 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톱에서 잠깐이라도 멈추는 일은 급한 백스윙으론 어림 없다. 혹시 백스윙 때 살짝 수축(긴장)을 했어도 톱에서 멈추는 동안 다시 이완 되기도 하고. 여유 있는 템포로 스윙하라는 충고도 같은 뜻을 담고 있다. 스윙 템포는 백스윙에서 다운스윙으로 전환하는 시간이 얼마냐로 정해진다(이 말은 조금 어려우니 나중에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다). 여유 있는 템포는 다운스윙으로 전환하는 데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레 백스윙 때뿐 아니라 다운스윙 초기에도 이완을 하게 된다. 들어본 지 오래지만 노래 구절 ‘에~델 바이스’를 떠올리며 스윙하라고 가르치던 옛 방식도 같은 의미다. ‘에~델’ 할 동안 백스윙을 하면서 긴장하지 않고 있다가 ‘바이스’ 하는 대목에서 힘을 주라는 것이다.
혹시 독자는 스윙을 할 때 확 잡아 빼서 후려치는 스윙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도 프로 골퍼가 되기 전에는 그랬다. 실은 프로 골퍼가 되고 나서도 그 버릇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정말 많이 고쳤다. 돌이켜보면 내 백스윙이 얼마나 빨랐는지 말도 못 할 정도였다. 그때는 오로지 공을 때릴 생각밖에 없었다. 백스윙을 하고 있는데 이미 마음은 다운스윙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 어디 이완이 됐겠는가? 그립에는 잔뜩 힘이 들어갔을 테고. 볼을 뒤로(목표 반대 방향으로) 치느냐는 핀잔을 들은 적도 있다.
물론 백스윙을 순식간에 하면서도 기가 막히게 치는 골퍼도 있다. 나와는 달리 그립을 부드럽게 쥐고 어깨도 긴장하지 않으면서 그런 스윙을 해내는 것일 테니 놀랍다. 대개 전문 교습가로부터 도움을 받아 엄청나게 훈련한 엘리트 골퍼나 가능한 일이다. 나로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손으로 꼽는 장타자 중에 이렇게 치는(순식간에 백스윙하는) 선수가 많다 보니 나도 모르게 따라 하게 된다. TV 중계를 통해 독자 눈에도 익으니 겉으론 비슷한 동작인 줄 착각하게 된다. 그 스윙은 큰 차이가 있으니 감안해야 한다.
이완과 수축이라는 말을 나는 김민조 골프 트레이너가 연 세미나에서 처음 배웠다. 그는 힘을 쓰기 전까지 한없이 근육을 이완시켰다가 단숨에 수축해야 ‘폭발적’으로 힘을 쓸 수 있다고 알려줬다. 몸을 쓰는 원리에 대해서는 백지에 가까웠던 나는 그 세미나를 듣고 깨달은 것이 많았다. 그 뒤로는 연습을 하면서 늘 ‘이완’, ‘수축’을 뇌까리며 스윙을 한다. 실전에서도 스윙이 급해졌다고 느낄 때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이완’과 ‘수축’이다.
독자도 나를 따라 해보기를 권한다. 백스윙을 시작해서 다운스윙 초기까지 ‘이~완’이라고 속으로 말하는 것 말이다. 다운스윙 때는 ‘수축’이라고 안 하냐고? 머릿속으로만 한다. 직접 해보기 바란다. 힘을 쓸 때는 이를 악물기 때문에 입은 저절로 다물게 된다. 이렇게 하면 실력이 느냐고? 효과는 내가 장담한다.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 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
내가 40대 중반에 프로 골퍼가 된 것은 애독자라면 다 아는 얘기다. 처음 듣는다고? 그렇다면 아직 애독자가 되기엔 멀었다. 지난 칼럼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30대 후반에 골프를 시작한 나는 2015년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 선발전에 합격했다. 당당히 수석으로 합격했다고 자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턱걸이로 붙었다. 내가 속한 조에서 45명을 뽑는데 37등이었다. 그 정도면 준수한 것 아니냐고? 나는 공동 37위였다. 무려 여덟 명이나 나와 같은 점수를 기록했다. 37등부터 여덟 명을 손가락으로 꼽아보라. 44등까지 공동 순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두 명이 더 우리와 같은 타수를 기록했다면? 10명 중 한 명만 떨어지는 잔인한 연장 승부를 할 뻔했다. 춥고 강풍까지 겹친 늦가을 날씨에 이미 탈진한 나는 연장전 승부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상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나는 프로 골퍼가 되고 난 다음 해 3부 투어에 도전했다. 내친걸음이었다. 지금은 3부 투어를 2부 투어에 통합했지만 그때는 3부 투어가 따로 있었다. 그때 속 모르는 이들은 나를 보고 “아직도 현역으로 뛰니 대단하다”고 말하곤 했다. 그럴 때면 “아직도 현역이 아니라 이제야 현역”이라고 쑥스럽게 답했다.
그런 내 늦깎이 현역 생활은 딱 2년밖에 가지 못했다. 왜냐고? 갑자기 골프가 싫어졌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지금도 골프 얘기가 들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겉으로 밝히는 이유는 내가 경기위원이 된 탓이다. KPGA 규정상 경기위원은 대회에 나갈 수 없다. 심판이 시합에 나가면 공정하지 못하다는 판단에서 만든 규정이다.
그런데 속사정은 다르다. 현역으로 뛴 그 두 해 동안 나는 쉽지 않은 기록을 세웠다. 뭐냐고? 바로 ‘상금 0원’이라는 기록이다. 그랬다. 나는 2년간 스무 번 남짓 시합에 나가고도 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갑자기 서러움이 복받친다.
그렇게 골프를 못 치는데 어떻게 프로 골퍼가 됐냐고? 그러게 말이다. 바로 그 얘기를 하려고 한다. 독자는 내가 얼마나 유명한 골프 지도자에게 골프를 배웠는지 아는가? 내 사부는 그동안 수많은 골퍼를 길러냈다. 그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독학 선생’이다. 맞다. 나는 순수 독학 골퍼다.
레크리에이션 골퍼인 선배 손에 끌려 클럽을 처음 잡았다. 그러곤 프로 골퍼가 될 때까지 누군가에게 골프를 제대로 배운 적이 한 번도 없다. 오로지 어깨너머로 보거나 주워들은 것만으로 골프를 연마했다. 독학으로 프로 골퍼가 됐으니 대단한 것 아니냐고? 전혀 그렇지 않다.
TV로 중계하는 1부 투어가 아닌 2부나 3부 투어도 치열하기는 마찬가지다. 현재 2부 투어 지역 예선은 경쟁률이 9대1쯤 된다. 카트 두 대에 선수들이 타고 나가면 그중 한 명만 본선에 올라가는 셈이다. 어렵사리 본선에 가도 첫날 60등 안에 들어야만 상금을 받는다.
빈손으로 필드를 떠나는 선수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내가 경기위원이 되고 나니 가족들이 반가워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다. 대회에 나갈 때마다(물론 경기위원으로 근무하러) 돈을 벌어오니 말이다. 맨날 비용만 들이고 상금은 한 푼도 벌어오지 못하다가.
2부 투어 지역 예선을 통과하려면 언더파를 쳐야 하는데 보통 언더파론 안 된다. 비바람이 부는 날이나 2~3언더파가 커트라인이다. 그림 같은 날씨면 4언더파를 치고도 탈락하는 선수가 나온다. 진짜다. 그 정도 못 치냐고? 바로 그게 문제였다. 잘 친 샷만 꼽으면 나도 정상급 선수 못지않다.
그런데 대회 때는 딱 한 번 쳐서 승부를 가리는 게 아니지 않은가? 잘나가다가 나쁜 버릇이 나오는 게 내 한계였다. 언더파를 쳐도 떨어지는 판에 확 깎여서 아웃오브바운드(OB)가 나거나 뒤땅이라도 나면 어찌되겠는가? 예선 통과는 물 건너간다.
샷을 다듬는다고 다듬었는데도 가끔 그런 실수를 한다. 그러니 재미로 나가는 것이 아니고서야 대회 참가를 주저할 수밖에. 그 나쁜 버릇은 바로 ‘독학 선생’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프로 선발전을 준비하면서 나는 골프가 많이 늘었다. 프로 골퍼가 되고 나서도 조금 더 늘었고. 그런데도 잔뜩 긴장하면 옛날 버릇이 나온다. 중년이 되고 나서도 힘들거나 급하면 ‘어머니’가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골프를 시작한다면 절대 ‘독학 선생’에게 골프를 배우지 않을 것이다. 골프를 처음 시작한 2006년에 나는 왜 ‘독학 선생’을 택했을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니 내가 오만한 탓이다. 다른 일도 잘해 왔으니 골프도 얼마든지 혼자서 잘할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주변 사람들이 내게 한 충고도 한 몫 보탰다. 바로 ‘독학으로도 잘 칠 수 있다’거나 ‘프로가 돈 벌려고 거짓으로 가르친다’는 조언 말이다. 그 충고를 한 사람들은 고수였냐고? 아니다. 처음 시작한 나보다 조금 나았을 뿐.
지금까지 샷을 연마하느라고 혼자 애쓴 시간을 생각하면 너무 아깝다. 제대로 배우면서 그 긴 시간을 보냈더라면 어땠을까? 혹시 늦깎이가 놀랄 만한 성적을 냈다는 신화를 만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
골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독자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미 잔뼈가 굵은 골퍼라도 마찬가지다. 당장 독학 선생을 과감하게 내치고 골프 지도자를 찾기 바란다. 내 꼴 나지 말고. 가슴이 저린다.
2020년 골프 월드는 뒤죽박죽이었다. 매년 4월에 열던 ‘마스터스’를 84년 만에 처음으로 11월에 연 것이 대표적이다. 그 바람에 덕을 본 선수가 두 명 나왔다. 한 명은 최저 타수 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더스틴 존슨이다. 더스틴 존슨은 늦가을에 촉촉하게 젖은 오거스타 내셔널(마스터스를 매년 여는 골프장) 그린을 장타와 날카로운 아이언 샷으로 공략해 나흘 합계 20언더파를 기록했다. 종전 최저타 기록은 타이거 우즈와 조던 스피스가 갖고 있던 18언더파다. 더스틴 존슨의 기록은 늦가을에 비가 흠뻑 내려 그 악명 높은 오거스타 그린이 딱딱함을 잃은 덕분임이 분명했다.
참, 내 정신 좀 보라. 제목은 최고령 기록 어쩌고 해놓고 엉뚱한 길로 새서 한참 가고 있다. 새해 첫 글의 주제는 독자도 보다시피 ‘최고령 기록과 에이지 슈팅’이다. 더스틴 존슨이 대회 중계 화면을 독차지하다시피 한 그 대회에서 내가 눈여겨본 선수는 따로 있다. 언뜻언뜻 비칠 때마다 진심으로 응원했다. 그는 바로 베른하르트 랑거다. 나는 2019년 마스터스에서 만 62세로 컷 통과를 한 그가 2020년에도 선전하기를 바란 것이다. 결과는 어땠냐고? 그는 내 바람을 훌쩍 뛰어넘어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바로 마스터스 역사상 최고령 컷 통과 기록을 세운 것이다. 만 63세로. 랑거는 1957년생이다. 나흘간 합산한 최종 성적도 빼어났다. 공동 29위. 2019년에는 컷 통과 후 맥이 풀렸는지 컷 통과자 중 최하위를 기록했는데 말이다. 랑거 또한 더스틴 존슨과 마찬가지로 ‘11월에 열린 마스터스’의 수혜자다. 왜냐고? 마스터스를 예정대로 4월에 열었다면 랑거가 컷 통과를 해도 최고령 기록을 달성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랑거의 최고령 마스터스 컷 통과 기록에 내가 환호한 이유는 또 있다. 랑거는 2019년 주로 활동하는 미국 PGA 투어 챔피언스(시니어 투어)에서 시즌 중반 갑자기 부진에 빠졌다. 그는 그해 마스터스 컷 통과를 한 직후 대회부터 몇 개 대회에서 죽을 쒔다. 마스터스에 진을 뺀 후유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때 ‘시니어 투어를 지배하던 랑거의 시대가 끝났다’는 내용의 칼럼을 여러 골프 칼럼니스트가 썼다. 그때 내 생각은 어떠했는지는 애독자라면 잘 알 것이다. 모른다고? 흑. 애독자가 아니거나 내가 아직도 철저하게 무명이라는 얘기다. 나는 ‘랑거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큰소리를 친 칼럼을 바로 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썼다. 못 믿겠다면 2020년 3월호 베른하르트 랑거 편을 찾아보기 바란다.
2020년에는 마스터스가 열리기 직전 다른 미국 프로골프(PGA) 투어 대회에서도 멋진 기록이 나왔다. 1956년생 프레드 펑크가 버뮤다 챔피언십에서 컷 통과를 한 것이다. 세상에 만 64세에 말이다. 64세 이상일 때 PGA 투어 대회에서 컷 통과를 한 선수는 프레드 펑크를 빼면 딱 세 명뿐이다. 누구누구냐고? 모두 다 내가 이 칼럼에 소개한 이들이다. 바로 잭 니클라우스와 샘 스니드, 그리고 톰 왓슨이다.
놀라운 선전을 거둔 베른하르트 랑거와 프레드 펑크가 밝힌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독자도 이미 알 것이다. 바로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꿈을 꾼 것이다. 꾸준한 운동이 비결 아니냐고? 맞다. 그런데 꿈을 꾸면 훨씬 더 꾸준하게 운동하게 된다. 만 60세로 한국과 일본 시니어 투어 무대에서 뛰는 김종덕 프로는 40세 때 체력 관리의 중요성을 깨달은 뒤 20년째 근력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한 적 있다. 집에서 TV를 보더라도 아령을 든다고 말이다.
그래 김용준 프로 당신 얘기가 다 맞다고 치자. 그렇다면 “시니어 골퍼인 우리는 무슨 꿈을 꾸면 좋을까?” 하고 묻는 독자가 분명 있을 것이다. 순전히 참고하라고 내 목표를 살짝 밝힌다. 골프에서 내 목표는 에이지 슈터(age shooter, 나이보다 더 적은 타수를 기록한 골퍼)가 되는 것이다. 명색이 프로 골퍼라면서 목표가 우승이 아니고 에이지 슈팅(age shooting, 나이보다 더 적은 타수를 기록하는 것)이냐고? 흑! 맞다. 나이보다 더 적은 타수로 한 라운드를 마치는 그 에이지 슈팅 말이다. 에이, 김 프로 당신이야 프로 골퍼니까 에이지 슈팅이 가능할지 몰라도 어디 우리 같은 레크리에이션 골퍼가 가능하겠냐고? 일단 에이지 슈팅은 나도 장담 못한다. 그리고 독자에게는 ‘변형 에이지 슈팅 기준’을 소개한다. 변형 에이지 슈팅 기준이라고? 첨 들어본다고? 당연하다. 내가 세계 최초로 내놓는 것이니까. 변형 에이지 슈팅이란 바로 ‘전성기 핸디캡을 현재 나이에 더하고 그 점수보다 더 낮게 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창때 핸디캡이 ‘12’이고 지금 나이가 칠십이라면 ‘82’를 에이지 슈팅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어떤가? 세계 최초로 제안하는 ‘변형 에이지 슈팅’이라는 콘셉트가. 혹시 변형 에이지 슈팅을 하고 나서 옆 사람이 그런 게 어디 있냐고 깎아내리기라도 하면 꼭 김용준 프로가 만든 개념이라고 당당하게 말해주기 바란다. 변형 에이지 슈팅. 영어로는 ‘모디파이드 에이지 슈팅’(modified age-shooting)쯤 되려나? 그 기록을 달성하면 ‘변형 에이지 슈터’이고.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
독자는 몇 살에 골프를 시작했는가?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하다가 뜻대로 안 돼서 지금은 손을 놓았다고? 그렇다면 지금부터 들려주는 얘기를 듣고 꼭 용기를 내면 좋겠다.
내 아버지 김정홍 옹은 2014년 늦가을에 처음 골프채를 잡았다. 진짜로 평생 처음. 그는 1940년생이다. 메이저 대회 세계 최다승 기록을 갖고 있는 잭 니클라우스(Jack Nicklaus)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런 그가 골프를 시작한 것은 만 74세 때. 갑자기 골프를 치기로 작정한 이유는 나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동년배 중에 골프를 치는 이가 몇 있어서 어울리기 위해서라고 짐작만 했을 뿐. 아버지는 이듬해 봄에 친구들과 필드에 나가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당시에 아마추어치곤 기량이 상당했던(실은 기량이 상당하다고 착각했던) 나는 아버지에게 그립부터 가르쳤다. 그리고 클럽 페이스가 상당히 많이 닫힌 드라이버를 구해서 선물했다. 초보 골퍼가 고통받기 마련인 슬라이스로부터 조금이라도 빨리 구해내기 위해서였다. 아버지가 스윙을 제대로 익히는 것만으로 슬라이스를 완전히 극복하기에는 몇 달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버지는 골프에 빠져들었고 입문 후 6개월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습했다. 진짜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한 시간 가까이 말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한꺼번에 너무 오래 연습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허리를 이따금 삐는 그가 무리할까봐 걱정이 됐던 것이다. 그는 틈이 나면 내게 샷을 배우고 또 혼자서 그것을 익혔다. 진짜 연습다운 연습을 한 것이다. 연습은 한자로 익힐 ‘연’, 배울 ‘습’ 아닌가?
그렇게 6개월이 지났다. 드디어 아버지가 친구들과 필드에 나가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 이삼 일 전 나는 시뮬레이션 골프 연습장(흔히 말하는 스크린 골프)에 그와 함께 갔다. 실전을 대비해서. 그리고 거기서 부자간 라운드를 했다. 결과는? 그는 109타를 쳤다. 정말이다. 파3인 13번 홀에서는 파도 하나 잡았고. 나는 몇 타나 쳤냐고? 버디 6개 보기 2개로 68타를 쳤다. 그것도 챔피언티에서 대회 모드로 놓고.
아차, 얘기가 딴 길로 샜다. 다시 내 아버지 얘기로 돌아가자. 며칠 뒤 그는 아침 느지막이 데리러 온 친구들과 경기도 용인에 있는 모 골프장으로 첫 필드 라운드에 나섰다. 나는 그날 오후 내내 결과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라운드가 끝났을 무렵부터 전화를 할까 말까 몇 번이나 망설였다. 그러다가 밤에 집에서 만났을 때야(그렇다 나는 아버지와 한집에 산다) 그에게 물었다. “오늘 재미있게 치셨어요?”라고. 혹시 속이 상했을지도 몰라 ‘몇 타나 쳤냐?’라는 질문은 꾹 참았다. 그런데 곧이어 나온 대답에 나는 눈이 커졌다. 아버지는 “친구들이 연습장 등록해야겠다고 하면서 가더라”고 말했다. 그날 아버지는 레드티에서 98타를 쳤다고 했다. 흔히 숙녀들이 주로 쓴다고 해서 레이디티라고 한다. 그러나 주니어도 쓰고 노신사도 쓰기도 하니 레드티가 더 멋진 표현이다.
98타! 나는 믿어지지 않았다. 독자는 처음 필드에 나간 날 몇 타를 쳤는가? 나는? 셀 수 없이 많이 쳤다. 볼도 무수히 잃어버렸고. 그런데 칠순이 넘은 아버지가 생애 첫 라운드에서 ‘파백’을 하다니. ‘파백’은 100타를 처음 깨는 것을 말한다. 게다가 친구들이 연습장에 등록하겠다며 간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그가 ‘내뿜은’ 장타가 부러워서였다고. 그제야 돌이켜보니 그랬다. 시뮬레이션 골프 연습장에서 아버지의 드라이버 티샷은 160m 가까이 나갔다. 그보다 100m 이상 더 멀리 보내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아버지의 친구들이 볼 때는 입이 떡 벌어지는 거리였던 것이다.
아들에게 골프를 배웠다고 하니 친구들이 더 부러워했다고 한다. 당시 싱글 핸디캡퍼(평균 핸디캡이 한 자릿수인)인 아들이 그해 10월에는 급기야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 선발전을 통과해 프로 골퍼가 된 것은 애독자라면 다 아는 얘기다. 첨 듣는다고? 그렇다면 아직 애독자 인증을 하기엔 멀었다. 이미 10회 남짓 나간 이 칼럼을 첫 회부터 찾아서 읽어보기 바란다.
내 아버지가 늦깎이로 화려하게 골프 월드에 입문한 것은 순전히 행운 덕분만은 아니다. 그는 첫 라운드를 준비하는 6개월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골프를 수련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이지만 마음을 열고 상수(上手)로부터 조언을 듣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어디 자식에게 조곤조곤 물어보기가 쉬운가?
내 아버지와 동갑인 잭 니클라우스는 지난 9월에 미국 미주리주에서 열린 페이슨밸리컵 때 이벤트 행사에 출전해 건재함을 과시했다. 아일랜드 홀인 파3에서 타이거 우즈 등과 니어리스트(티샷으로 볼을 홀에 가장 가까이 붙인 선수가 이기는 것)를 겨뤘다. 등이 약간 굽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니클라우스는 거뜬하게 볼을 그린에 올렸다. 그를 보며 6년 전 내 아버지가 골프채를 처음 잡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골프에 나이는 없다. 몇 살에 시작하든 의지만 있다면 실력이 향상된다.”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벤 호건(Ben Hogan)이 한 말이다.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
독자는 악동을 좋아하는가? 나는 어떠냐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 좋아하지 않을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니 그 예측 불가함이 불편해서다. 나와 달리 악동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서 열렬한 팬이 되는 이도 있고. 이런 이는 악동이 보여주는 ‘파격’을 높게 치는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골프 세상에도 악동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 선수 얘기를 하려고 한다.
몇 년 전 일이다. “혹시 잔 데일리라는 선수를 아시나요?” 그 무렵 나를 후원하던 골프용품 업체 대표가 전화를 걸어 대뜸 물었다. “잔 데일리요?” 나는 ‘잔 데일리’가 누군지 선뜻 떠오르지 않아 되물었다. “네, 미국 에이전트가 잔 데일리 선수를 후원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서요.” 그가 내게 물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제야 나는 그가 말하는 선수가 ‘존 댈리’임을 알 수 있었다. “혹시 존 댈리를 말씀하시나요?” 내가 물었다. “그런 것 같은데요.” 골프용품 사업에 뛰어든 지 얼마 안 돼 해외 선수들까지 꿰고 있지 못한 그가 답했다. 한국계 미국인인 현지 에이전트가 존 댈리(John Daly)를 그렇게 발음한 것이 틀림없었다.
“존 댈리는 유명한 선수입니다. 지금은 PGA 시니어 투어인 챔피언스 투어에서 뛰고 있습니다. 최근에 챔피언스 투어에서 1승을 거뒀구요. 젊어서도 장타자로 유명했는데 지금도 챔피언스 투어에서 최장타자입니다.”
나는 아는 대로 존 댈리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존 댈리’ 하면 떠오르는 많은 얘기는 꿀꺽 삼킨 채 말이다.
“존 댈리에게 연간 30만 달러 정도 후원하고 우리 용품을 쓰게 하면 어떨까요? 물론 경기에 나갈 때는 우리 로고를 달고요.”
그는 에이전트가 제안한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말했다. 나는 얼핏 생각하기에 일리 있다고 느꼈다. 존 댈리를 후원하는 것 말이다. 그 골프용품 업체는 그 해 미국 시장에 막 진출한 참이었다. 그러니 브랜드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을 거다. 물론 상업적으로만 따졌을 때 말이다. 그런데 내게 존 댈리에 대해 물은 대표는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함께 일하면서 충실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존 댈리라는 사내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줄 수밖에 없었다. 꿀꺽 삼켰던 것을 되새김질해서 말이다.
나는 존 댈리가 천재적 골퍼인 것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1966년생인 그는 대학을 마치고 스물한 살에 프로로 전향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은 1991년에 메이저 대회인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그것도 출전이 확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차를
8시간이나 몰아 대회장 근처에서 기다리다 얻은 출전 기회를 살려서 말이다. 이어 1995년에는 ‘디 오픈 챔피언십’도 거머쥐면서 PGA 챔피언십 우승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그런 존 댈리이지만 스윙만 볼 때는 도무지 메이저 대회를 두 번이나 우승한 선수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내 기준으로 볼 때 그렇다. 그는 클럽 헤드가 머리 뒤를 넘어 땅에 닿을 것 같은 오버 스윙을 한다. 이런 스윙으로 PGA에 장타 시대를 열었다는 사실은 더 믿을 수 없다. 존 댈리는 1997년 PGA 투어 최초로 시즌 평균 드라이버 거리 300야드를 넘겼다. 이어 1999년부터 2008년까지 다시 10년 연속 시즌 평균 드라이버 거리 300야드 이상을 기록했다. 2003년까지 시즌 평균 드라이버 거리 300야드를 넘긴 선수는 존 댈리가 유일했다. 작은 키 탓에 ‘땅콩’이라고 불리는 LPGA 선수 김미현은 거리를 늘리기 위해 존 댈리 스윙을 모방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존 댈리는 골프 팬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PGA 투어에서는 단 5승뿐이다. 5승이 대단하지 않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그의 재능이나 인지도로 따지면 훨씬 더 많이 우승했을 것 같은데 아니라는 말이다. 같은 시대 선수들보다 어마어마하게 멀리 치던 그의 파워로만 따져도 그보다 우승 기록이 많았어야 마땅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그렇지 못했을까? 아마 골프 자체에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알코올에 심각하게 의존했다. 대회 때도 종이 봉지에 술을 담아가지고 다니며 몰래 홀짝거리거나 혹은 대놓고 마시며 경기를 치른 경우가 숱했다. 그를 무명에서 영웅으로 만들어준 1991년 PGA 챔피언십 때도 나흘 내내 술을 마시며 경기했다. 도박 중독도 심각했다. 대회장 근처에 카지노가 있으면 어김없이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경기를 했다. 잠이 부족하면 어떻던가? 내 경우엔 숏 게임과 퍼팅이 안 된다. 술과 도박에 빠져 있었으니 성적이 들쑥날쑥한 건 당연했다. 성격이라도 좋았으면 조금 나았을지 모른다. 그는 갤러리하고도 이따금 다퉜다. 경기가 뜻대로 안 풀리면 라운드 중에 클럽을 내던지는 일도 잦았다. 갑자기 기권하고 백을 싸서 떠나는 일도 흔했고.
가슴이 너무 뜨거웠던 탓일까? 그는 개인사도 순탄치 않았다. 네 번이나 결혼했고 네 번 다 헤어졌다. 그 때문인지 2004년 뷰익 인비테이셔널에서 통산 다섯 번째 우승한 뒤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래서 2007년부터 PGA 시드권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그인데도 골프 팬은 그를 경기장에서 이따금 볼 수 있다. 초청 선수로 가끔 불러주기 때문이다. 누가 그를 부르냐고? 당연히 대회 스폰서다. 그와 같은 악동도 골프 월드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는 시대가 한국 골프에도 올까? 쉽지 않아 보인다. 결국 골프용품 업체는 존 댈리를 후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으로, 골프채널코리아에서 골프 중계 해설을 맡고 있다.
2008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연장전 첫 홀. 두 선수가 파3인 17번 홀에 들어섰다. ‘제5의 메이저’로 불리는 이 대회 우승컵을 놓고 벌이는 연장전이었다. 두 선수 중 한 명은 가르시아였다. 그렇다. 홀에 침을 뱉기도 하고 퍼팅 그린을 퍼터로 찍기도 한 ‘버르장머리 없는’ 세르지오 가르시아 말이다. 다른 한 선수는? 이름 없는 선수다. 누군지 몰라도 그가 가르시아 콧대를 꺾어놓으면 좋겠다. 그가 먼저 티샷을 한다. 그가 친 볼이 멋지게 날아서 홀 바로 옆에 꽂히면 얼마나 좋을까? 언감생심. 그의 볼은 패널티 구역(당시로는 해저드)에 빠지고 만다. 그렇게 2008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우승컵은 악당 가르시아 손에 들어갔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못 외우면 맞던 시절에 외운 시라 그런지 지금도 생각이 난다. 원숙한 아름다움을 국화꽃에 비유했다는 설명을 듣고 그때는 고개만 끄덕였다. 가슴으로는 그 뜻을 몰랐다. 그런데 30년도 더 지나 다시 떠올리는 것은 이 구절에 걸맞은 사람을 봤기 때문이다. 바로 PGA 투어 챔피언스에서 뛰고 있는 폴 고이도스(Paul Goydos)다. 2008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연장전에서 가르시아에게 아쉽게 패한 사람이 바로 그다.
내가 골프채널에서 미국 PGA 투어 챔피언스 경기를 해설할 때다. 유난히 묵묵히 플레이를 하는 선수가 눈에 들어왔다. 기가 막힌 아이언샷으로 볼을 핀에 바싹 붙여도 기쁜 내색을 별로 안 한다. 반대로 대여섯 발짝짜리 퍼팅을 몇 번이나 놓쳐도 마찬가지다. 탄식하는 법이 없다. 그런데 리더 보드 상단에는 매번 이름이 올라온다. 저 선수가 도대체 누군지 궁금해졌다. 그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다가 나는 눈이 커졌다. 2015년 투어 챔피언스에 들어온 뒤 꾸준히 우승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 정도면 젊은 시절 PGA 투어에서도 한가락 했을 법해서 찾아봤다. 그런데 웬걸? 단 2승뿐이다. 스물아홉 살에 PGA 투어 시드를 처음 받은 뒤 무려 21년간이나 뛰었는데도 말이다. 물론 2승도 쉽지 않다. 스타플레이어와 비교하면 덜 화려하다는 얘기다. ‘이거 싱거운걸’ 하고 마음을 닫으려다가 깜짝 놀랐다. 그가 한 라운드에 59타를 기록한 몇 안 되는 선수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PGA 투어에서 59타를 기록한 선수는 지금까지 단 아홉 명뿐이다. 말이 쉬워서 59타이지 68타가 최고기록인 내게는 꿈같은 숫자다. ‘뱁새 김용준 프로, 골프 좀 치는 줄 알았더니 겨우 68타가 최고기록이냐’고 비웃지 말기 바란다. 어디까지나 풀백티에서 대회 규칙에 따라 친 점수다. 그래도 59타 발끝에도 못 미친다.
아차! 얘기가 딴 길로 샜다. 폴 고이도스로 돌아가자. 폴 고이도스는 2010년 존 디어 클래식 1라운드에서 59타를 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59타를 기록한 선수는 단 네 명뿐이었다. 그를 포함해서. 그 뒤로 다섯 명이 더 늘었다. 총 아홉 명 중에 대기록을 수립할 당시 나이가 가장 많은 선수가 바로 폴 고이도스다. 그는 마흔여섯 살 때 59타를 쳤다. 믿어지는가? 마흔여섯 살에 잭 티클라우스가 마스터즈를 우승했을 때 골프 세상은 얼마나 놀랐는지. 노장의 승리라고 말이다. 폴 고이도스도 노장으로 불리는 나이에 59타 대기록을 작성한 것이다. 그가 꽃길만 걸었다면 나도 ‘국화꽃’을 들먹이지 않았을 거다.
그는 골프를 일찍 배우기는 했다. 어려서 입문해 고교 시절 지역 대회에서 우승도 한 모양이다. 제법 잘 친 덕에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도 진학했다. 그런데 곧바로 프로로 전향하지 못했다. 내 짐작엔 조금 부족한 기량과 가정 형편 탓이었을 것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 기간제 교사로 몇 년간 일했다.
끓는 피를 참을 수 없었던 걸까? ‘끓는 피’라니? 아까는 그의 경기 스타일이 차분하다고 칭찬하더니. 하여간 뱁새 칼럼은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많다.
하여간 그는 스물일곱 살에 다시 골프채를 잡았다. 1991년과 1992년 벤 호건 투어를 뛴 것이다. 지금은 콘 페리 투어로 부르는 미국 PGA 2부 투어 말이다. 그러다 이듬해 PGA 큐스쿨(PGA 투어 참가 자격을 얻기 위해 치르는 시험으로 흔히 지옥 같은 대회라고 한다)을 가까스로 통과했다. 그리고 그의 스타일대로 묵묵히 3년을 도전한 끝에 1996년 마침내 첫 우승을 거뒀다. ‘베이힐 인비테이셔널’에서였다.
그런데 다음 우승은 무려 11년을 기다려야 했다. 2007년 소니 오픈까지. 이 무렵 그의 샷 감이 절정이었나보다. 글을 시작할 때 얘기한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연장전에 나간 것이 바로 그다음 해였으니까.
너무나 아쉬운 연장전 패배 뒤에 폴 고이도스가 권토중래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악재가 겹쳤다. 팔목 수술을 하고 부비강 수술도 하고. 그런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골프채를 잡았다. 그렇게 도전한 끝에 만들어 낸 대기록이 바로 2010년에 친 59타다. 파71 코스에서 버디 12개에 파6개. 버디 12개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폴 고이도스는 키가 175cm로 그리 큰 축에 들지도 않다. 드라이버 비거리도 260야드로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거포들 틈에서 묵묵히 자기 경기를 하고 있다. 가을에 피는 국화처럼 기품 있게 말이다. 내 골프도, 그리고 내 삶도 그처럼 원숙함을 갖게 될 날이 오기를.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으로, 골프채널코리아에서 골프 중계 해설을 맡고 있다.
부모 혹은 조부모 그림자는 평생 우리를 따라다닌다. 서양처럼 ‘누구누구 2세’ 혹은 ‘아무개 3세’ 하는 식으로 이름을 짓지 않아도 말이다. 특히 부모나 조부모가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라면? 그 그림자는 훨씬 크고 무겁다. 부모나 조부모가 잘했으니 자식이나 손주도 당연히 잘할 것이라고 세상이 기대하기 때문이다. 자식이나 손주가 상당히 잘해도 때론 세상 사람들이 깎아내리기도 한다. 조상 덕을 본 것일 뿐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렇게 평가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질투하는 것이다. 조상이 주는, 아니 정확히는 세상이 주는 부담이나 시샘을 이겨내고 큰 꿈을 이루기는 쉽지 않다. 큰 나무 밑에서는 다른 나무가 자라지 못한다는 속담은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일까?
무슨 말을 하려고 서론이 이렇게 기냐고? 토미 아머(Tommy Armour) 3세 얘기를 하려다 보니 그렇게 됐다. 토미 아머 3세는 전설의 골퍼 토미 아머(별명 실버 스콧)의 손자다. 토미 아머가 누구냐고? 앗! 이 질문은 예상 못했다. 그의 이름을 딴 골프 용품이 있을 정도이니 골프를 모르는 독자들도 위상만큼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용품업체는 뱁새 김용준 프로와는 아직까지 인연이 전혀 없음을 밝힌다. 아직까지는.
할아버지 토미 아머는 PGA 투어에서 25승을 거뒀다. 마스터즈를 제외한 3대 메이저 대회를 모두 석권한 골퍼로도 유명하다. 마스터즈까지 우승했다면 그랜드 슬램 반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토미 아머는 바비 존스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다. 그의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이 갈 것이다.
손자 토미 아머 3세는 PGA 투어 챔피언스(시니어 투어)를 벌써 10년 넘게 뛰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했다. 젊은 시절 PGA 투어에서는 2승을 거뒀다. 아니, 너무 싱거운 얘기 아냐? 하고 실망하기엔 이르다. 나도 기록을 찾아보고 나서야 알았다. 그가 엄청난 기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불과 얼마 전까지 ‘PGA 투어 72홀 최저타 기록’을 토미 아머 3세가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72홀에 254타(26언더파). 이 기록은 그가 2003년에 PGA 발레로 텍사스 오픈 때 세운 것이다. 발레로 텍사스 오픈? 오랜 골프 팬이라면 들어봤을 것이다. 최경주 선수가 2라운드 때 선두 턱밑까지 치고 올라갔다가 공동 7위를 기록한 대회다.
토미 아머 3세는 이 대회 때 첫날 ‘64타’, 이튿날 ‘62타’ 그리고 사흗날 ‘63타’를 기록했다. 마지막 날엔 ‘65타’를 쳤는데 이날은 보기가 두 개나 나왔다. 사흗날까지는 보기 없이 플레이를 하던 그였다. 역사에 남을 기록에 대한 부담이 보기로 이어졌을까? 할아버지 토미 아머가 세운 대기록과 나란히 할 만한 업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까?
토미 아머 3세는 ‘티에이쓰리’(T.A.3)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할아버지 토미 아머의 별명에 3이라는 숫자를 더한 것이다. 할아버지의 후광이 너무 강했다. 큰 부상으로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하고 당시로서는 가장 비싼 레슨비를 받는 교습가로 변신한 할아버지 토미 아머. 그 거장이 손자에게 골프를 기초부터 탄탄하게 가르쳤을 것이라 지레짐작하기 쉽다. 나도 넘겨짚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토미 아머 3세는 1960년생이다. 할아버지인 토미 아머는 1968년에 세상을 떠났다. 여덟 살에 할아버지를 잃은 것이다. 그랬으니 시간당 50달러나 했다는 토미 아머의 레슨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 겨우 시간당 50달러라고 얕보지 말기를. 1950년대 레슨비다. 지금으로 치면? 뱁새 김 프로 한 달 레슨비보다 더 많을 것 같다.
토미 아머 3세가 할아버지에게 골프를 배우지 못했을 거라고 짐작되는 부분이 또 있다. 둘의 스윙이 전혀 다른 점이다. 남아 있는 영상을 보면 토미 아머는 클래식컬한 스윙을 했다. 당연한 일이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자라고 그곳에서 골프의 거장이 된 토미 아머 아닌가? 그에 비해 손자 토미 아머 3세는 원 플레인 스윙을 한다. 둘은 그립을 잡는 방법부터 다르다. 토미 아머는 핑거 그립을 잡았다. 손가락으로 잡는 그립 말이다. 토미 아머 3세는 팜 그립을 잡는다. 손바닥으로 잡는 그립이다. 이 스윙으로 토미 아머 3세는 PGA에서 2승을 거뒀다. 그중 하나가 바로 대기록을 세운 발레로 텍사스 오픈이다.
그는 이 기록으로도 만족하지 못한 것 같다. 할아버지의 명성에 필적할 만한 업적을 남기고 싶었던 걸까? 토미 아머 3세는 PGA 투어에 끝까지 도전했다. 성적을 내지 못해 투어에서 밀려 내려온 뒤에도 큐스쿨(투어에서 뛸 선수를 정하는 테스트)에 나갔다. 그가 마지막으로 PGA 큐스쿨에 나간 건 2012년. 그의 나이 만 52세 때였다. 당시 참가자 중 나이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마흔네 살에 프로 선발전에 합격해 프로 동기 90명 중 나이가 가장 많았던 내 모습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졌다.
190cm에 육박하는 큰 키에 짧은 백스윙과 내던지는 듯한 팔로 스로우를 가진 토미 아머 3세. 그가 세운 72홀 역대 최저타 기록. 전설이 된 할아버지의 명성에 결코 부끄럽지 않은 대기록이다. 이 기록은 2017년 조던 스피스가 253타를 기록하면서 14년 만에 깨졌다. 나는 토미 아머 3세가 은퇴하기 전 챔피언스 투어에서 꼭 1승을 거두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부모나 조부모 명성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누군가의 도전도 응원하고 싶다.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으로, 골프채널코리아에서 골프 중계 해설을 맡고 있다.
카톡은 국민의 생필품적 통신수단이 된 지 오래입니다. 얼마 전까지도 연말연시엔 수첩과 명함을 정리하곤 했는데, 지금은 카톡을 정리하는 게 큰일입니다. 불필요한 동영상이나 사진, 의미가 없어진 사람의 이름을 삭제하고 중요한 걸 따로 갈무리하다 보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런 작업을 하는 동안, 모든 사람이 느꼈을 법한 불편과 불쾌함을 덜기 위해 일정한 지침이 필요하다 싶어 카톡 10계명을 만들어보았습니다. 주로 단톡(단체카톡)방에 관한 것들입니다.
1. 시도 때도 없는 “카톡!”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카톡을 보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카톡, 카톡!” 소리가 싫어 묵음으로 해놓거나 아예 문자메시지만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 때나 카톡을 보내는 건 실례입니다. 특히 시차가 있는 외국에서 제 흥에 겨워 시도 때도 없이 카톡을 보내면 역효과만 나게 됩니다. 낮에는 전혀 카톡을 읽거나 답하지 않다가 남들 자는 밤 12시, 1시 넘어 답장을 보내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2. 정치·종교 이야기 금지
얼마전 모 사회단체의 단톡방에, 어떤 사람이 인민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민주당 헌법 개정 초안이 나왔다는 글을 띄웠다가 뭇매를 맞았습니다. “정치 이야기하는 곳 아니다, 거짓 뉴스 띄우지 마라, 대체 누구냐, 나가라”는 비난이 쏟아졌는데, 그 사람은 나가지는 않은 채 숨만 쉬고 있습니다. 친목과 사교, 공지사항 전달이 주목적인 단톡방에서 정치나 종교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 서로 불편해지고 편이 갈려 싸움이 납니다.
3. 삼가야 할 중복·반복
용량이 큰 동영상 또는 사진을 다량 전송하거나 동일 내용을 반복 홍보하는 일도 삼가야 합니다. 등산을 하는 사람들이 계속 실황 중계를 하는 경우를 더러 보았는데, 대부분 그 사진이 그 사진이어서 받자마자 삭제하기 바쁩니다. 잘 선별해 의미 있는 것만 최소한으로 보내든지 ‘사진 묶어 보내기’ 기능을 이용하면 남들이 편해집니다.
4. 기성품 안부·격려 지양
월초나 주초, 또는 명절이나 연말연시가 되면 “힘내세요”, “웃고 사세요”, “오늘도 으라차차!” 따위의 응원 인사가 폭주합니다. 내용이 빤한데 본인이 쓰거나 만든 것도 아닙니다. 같은 걸 하루에 다섯 번 받은 날도 있습니다. 이런 거 어떻게 만드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배우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고 “어디 가져오는 데가 있어” 하면서 알려주지 않고 뻐기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5. 좋은 글·미담 공해
1960년대에 코미디언 살살이 서영춘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 이런 말을 유행시킨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좋은 글과 사진을 마구마구 보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이도 자기보다 한참 적은 사람이 인생철학을 거론하며 착하게, 바르게 살라는 글을 보내오면 누가 좋아할까요? 이런 글 중 감동적인 미담에는 출처와 근거가 없는 가짜나 사실이 잘못 알려진 게 부지기수입니다.
6. 억지 초대 자제
서로 생면부지인 사람들을 모아 단톡방을 개설하는 것도 꼭 필요하지 않으면 삼가야 합니다. 초대된 사람들은 서로 모르는 이야기만 하거나 자칫 말이 엉켜 불쾌해지게 됩니다. 100명 넘는 사람을 초대해 운영하다가 “잠시 잠적한다”며 없어지더니 몇 달 후 다시 나타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이게 뭐야, 장난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7. OB 내지 않기
골프에서는 공이 규정된 지역 외로 나가면 OB(Out of Bounds)라고 합니다. 단톡방에도 OB꾼들이 많습니다. 아내에게 보내는 카톡을 엉뚱한 모임에 날리거나 임대료 빨리 보내라는 카톡을 대학 동창 단톡방에 올려 웃음거리가 되곤 합니다. 정신 차리세요. 간판도 못 다는 사람이 많지만 단톡방 간판을 잘 보세요. 뒤늦게 삭제해도 ‘때는 늦으리’입니다.
8. 댓글 달기 신중하게
수신자가 지켜야 할 것도 많습니다. 행사나 모임에 초대하는 카톡에 눈치 없이 제일 먼저 못 간다고 댓글을 다는 건 한마디로 흥행을 방해해 김이 새게 만드는 짓입니다. 카톡을 빨리 읽는 건 좋지만 불참 통보는 최대한 늦춰야 합니다. 또 어떤 일에 대해 회원들의 반응이나 논의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다른 걸 올리는 건 실례입니다. 이런 중간 낙서는 먼저 글 올린 사람을 불쾌하게 할 뿐 아니라 호응도 얻지 못합니다. 하루 정도 지나 그 일이 정리된 뒤 새 글을 올리는 게 바람직합니다.
9. 딴전·딴청 부리지 말기
여럿이 의견을 주고받는 단톡방에서 그 주제 내의 특정 사항에 대해 둘이서 설왕설래, 지지고 볶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관심이 없거나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떠들다 보면 본인들은 신날지 몰라도 꼴불견이 되기 십상입니다. 개인 카톡으로 1대 1 대화를 하는 게 좋습니다.
10. 반응·답장 잘 하기
카톡을 받으면 반응을 보이고 답을 하는 게 소통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묵묵부답인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내용이 지겨워 오는 족족 카톡을 지우고 일절 답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자 보낸 사람이 삐쳐서 전화도 안 받더랍니다. 겨우겨우 기분을 풀어주었는데, 영영 안 볼 사람이 아니면 적절히 알은척을 해주십시오. 데이터가 꽉 찬 경우 카톡방에서 나가버려 기분 상하게 하지 말고, 휴대폰 우측 상단의 석 삼자를 누르고 그 아래 기능 버튼에서 ‘대화 내용 모두 삭제’를 눌러 몸을 가볍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