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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지 수집 노인 돕는 스타트업들, “노동 가치가 핵심”
- 우리나라 폐지 수집 노인은 약 1만 5000명. 하루 11시간 일하고 1만 원을 번다. 폐지를 잔뜩 쌓아둔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있는 노인을 담은 사진 한 장은 ‘노인 빈곤’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이런 인식을 바꾸고 싶은 기업들이 있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은 올해 ‘폐지 수집 노인 현황과 실태’ 보고서를 통해 처음으로 폐지 수집 노인에 관한 데이터를 제시했다. 주목할 부분은 ‘폐지 수집 활동의 사회적 가치’를 추산했다는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폐지 수집 노인이 주로 활동하는 곳은 도시의 단독·연립·다세대주택이 밀집한 곳이다. 이 지역에서 이들이 수집하는 폐지는 전체의 28.4%, 재활용의 60.3%를 담당한다. 폐지 수집 기여도가 높음을 알 수 있다. 보고서는 “폐지 수집 노인을 지원하는 다양한 방법 중 어떤 방식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면서도 사회적기업들과 연계해 “단계적으로 다른 활동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연계하고 알리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노동 가치 말하는 세 가지 시선 폐지 수집 노인들이 안전하게 일하고 사회와 교류할 수 있도록 돕는 회사가 있다. 사회적기업인 러블리페이퍼, 끌림, 아립앤위립이다. 기우진 러블리페이퍼 대표, 신유진 끌림 대표, 심현보 아립앤위립 대표는 “폐지 수집 노인을 빈곤하다는 관점으로만 보지 않고 노동 가치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신유진 대표는 수입보다도 사회와 소통할 수 있다는 만족감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불쌍하다는 시선 때문에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이 빈곤보다 더 큰 문제”라면서 “끌림 리어카를 끌면 광고를 보고 ‘이게 무엇이냐’ 말을 거는 시민이 많다. 어떤 ‘끌리머’는 스스로 광고에 대해 설명하면서 자부심을 갖게 되어 ‘이제 허리 펴고 일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드리는 수익에서 1만 원을 정기적으로 기부하시는 분도 있었다”고 말했다. 사회와 소통하고 인정받는 것에서 오는 삶의 만족도가 더 크다는 의미다. 심현보 대표는 “본질적인 변화를 원했다. 우리는 이분들과 얼마나 오래 연을 이어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정규직으로 함께하게 된 옥자 님의 경우 키보드 사용 방법을 알려드리는 데 6개월이 걸렸다. 이제는 ‘신이어뉴스’ 발행인이 되어 직접 글을 쓰고 댓글도 단다. 옥자 님을 좋아하는 팬도 생겼다. 우리와 함께 일하면 정부에서 나오는 수급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임에도 일하는 것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구성원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심 대표는 본질을 해결하려면 ‘노인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립앤위립은 앞으로 ‘노인 일자리’로 영역을 넓힐 계획이다. 기 대표 역시 새로운 비영리 스타트업을 통해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개선하고 사회 인식을 바꾸려 한다. 기우진 대표는 “우리는 폐지 수집 노인을 ‘자원재생 활동가’라고 부른다. 사회적·경제적·환경적 가치가 재평가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분들을 지원해야 하는 이유는 빈곤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노동이 가치 있기 때문이다. 폐지 줍는 이유를 ‘빈곤’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배제’당하고 있는 현상을 봐야 한다. 사회적·경제적 배제는 ‘노인’이 되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라고 강조했다. 러블리페이퍼에 고용된 세 명의 어르신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보다 “눈 뜨면 갈 곳이 있고, 함께 일하는 친구가 있어 회사 가는 게 설렌다”고 말한다. ‘자원순환법 개정안’과 같은 법과 제도 마련을 통해 사회 안에서 이들의 역할을 명명해주는 게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결국 폐지 수집 노인들에게 필요한 건 사회 안에서 그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인정과 소통인 셈이다. 이와 관련해 기우진 대표와 이야기를 더 나누어봤다. 러블리페이퍼 기우진 대표 인터뷰 Q 폐지를 줍는 것에 대한 인식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계신데요. 빈곤이라는 것 외의 관점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인구 통계학적으로 노인이 많아지면서 빈곤한 노인도 늘어난 것인데, 우리 사회는 이를 대비할 시기를 놓쳤어요. 노인 빈곤의 과도기를 거치고 있다고 할까요? 그렇다보니 전기 노인과 후기 노인을 나누는 기준인 75세를 넘은 노인들이 생계를 위해 소득을 창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데요. 빈곤하다고 해서 모두가 폐지를 줍는 것은 아니에요.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 것은 사회 구조 때문이지만, 폐지를 줍는 것은 선택의 문제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Q ‘폐지 줍는 노인’이 아니라 ‘자원재생활동가’라고 명명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는데요. 사회에서 이들이 하는 일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요. 폐지를 줍는 행위를 ‘빈곤하기 때문이다’라고만 설명할 수 없어요. 저는 ‘배제’라는 단어를 씁니다. 빈곤이라는 관점으로만 접근하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또한 단조로워집니다. 생필품이나 금전 지원의 형태에 그치고 말아요. 그런데 사회 구성원으로서 사회적, 경제적, 정서적으로 배제되었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이거든요. 그렇다면 이 부분을 회복해줄 수 있는 문제 정의가 필요합니다. 이들의 일을 인정해줌으로서 소속감, 자존감,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는 것이죠. 우리 사회는 법과 제도로 이뤄져있습니다. 그래서 ‘자원순환법 개정안’이라는 법으로 이 분들을 ‘자원재생활동가’라고 정의하고 바르게 불러줌으로써 이 분들의 가치를 재평가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Q 빈곤의 관점으로 본다면 복지와 연결이 되는데, 사회적 배제의 관점으로 본다면 일자리 창출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중요한 점은 재사회화입니다. 직장을 다니던 사람이 은퇴만 하더라도 내가 해왔던 것들이 쓸모없어진다는 박탈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폐지를 주우면서 우리 동네가 깨끗해지고 환경이 보호된다는 말을 하시거든요. 하지만 이를 인정해주는 사람은 없는 거죠. 그러니 우리가 이 분들을 지원해야 하는 당위성은 ‘빈곤’해서가 아니라 ‘가치 있는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복지의 개념은 상당히 포괄적입니다.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 활동이 가능한 분위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혜적 지원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Q 궁극적으로 시혜적 지원 외에 어떤 점을 보충해야 할까요? 이 분들의 활동을 경제적 가치로 산정하고 사회·환경적 가치로 활용한다면, 상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을 거고, 복지라는 테두리 안에서 다루어지게 되겠지만, 재원이 충당되고, 사람이 필요하고, 인프라가 형성되어야 하는 어떤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제까지 해왔던 시혜적 복지와는 다른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죠. 중장년이 부동산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요. 그럼에도 폐지를 줍는 이유는 가처분 소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이 분들이 가지고 있는 주택이 서울에서 흔히 말하는 10억, 20억이 넘는 고가의 아파트가 아니라 1~2억 내외의 다세대 주택인 경우가 많습니다. 부동산에 관한 부분도 다시 들여다봐야 할 이유가 있는 거죠. Q 결국 노인에 대한 인식도 변화할 필요가 있겠군요. 요즘 액티브시니어라고도 하는데, 이 분들이 65세가 넘었을 때에 이 분들에게는 어떤 복지가 적합할까요? 시니어가 시대에 따라 변하듯, 조금 더 세련된 복지 시스템이 마련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노인 일자리에 대한 관점도 함께 바뀌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Q 앞으로 러블리페이퍼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A 저희가 매번 ‘멋있게 망하는 게 목표입니다’라고 하는데요.(웃음) 명확하게는, 어르신들에 대한 법과 제도가 완비되어 행정적으로 어르신들이 지원 받는 센터 같은 곳이 생기고, 그 지원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시스템이 만들어진다면, 저희는 문을 닫고 싶습니다. 저희는 열악한 노동 환경 개선, 사회 인식 개선이라는 두 가지 소셜 미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러블리페이퍼를 통해 고용과 노인 일자리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스피커 역할을 해왔는데요. 사회적 기업으로서 한계를 조금 느끼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비영리 스타트업을 준비하고 있어요. 비영리스타트업을 통해 어르신들의 네트워킹을 만들고 목소리를 내어 법과 제도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그 외에 자원순환을 활용한 기부도 해보려고 합니다.
- 2022-12-2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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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겐 너무 과분한 돌싱남 서서히 드러난 그의 본색
-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드디어 내가 이혼을 했어. 우리 이제 함께 살 수 있게 된 거야.” “그래요? 잘됐네요….” “당신, 기쁘지 않아? 반응이 왜 그래? 왜 시큰둥한 거지? 너무 오래 기다려서 실감이 나지 않는 건가?” “그런가 보죠. 어쨌든 당신이 원하던 거니까 잘된 일이네요.” “나만 원하던 일인가? 그럼 당신은 안 원했단 말이야? 오늘따라 왜 이렇게 까칠하게 구는 거야? 도대체 뭐가 또 문제냐고?” 뭐가 또 문제냐고? 그 말에 성질이 발끈 돋았다. 그래, 지금까지 당한 것도 모자라 지금 와서 감정을 쏟고 화를 내는 건 정말이지 바보짓이지. 저 인간이 내게 뭘 해줄 수 있다고. 그렇게 당하고도 모른다면 나는 정말 하나님도 구제 불능인 인간인 거지. 이혼을 했다니 그 마누라는 드디어 해방인가? 그럼 이제 내가 저 인간을 차버려야 할 순서란 말이지? 남편 사별 후 운명처럼 나타난 남자 나와 그는 7년 전에 만났다. 그를 만나기 6개월 전 남편을 하루아침에 잃고 나도 따라 죽고만 싶은 시간을 보낼 때,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온몸으로 느끼던 나날 중에 교회에서 그를 알게 되었다. 남편은 교회를 안 다녔고, 나도 큰 열정 없이 꾸린 가게가 한가해진 틈을 봐가며 이따금 출석하곤 했다. 그도 나처럼 아내 없이 혼자 교회를 다니던 터라 두 사람 다 미적지근한 교인으로서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치 짐승의 후각처럼 그가 싱글인 것을, 아니 명확히는 돌싱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혼자가 된 나는 예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처지를 눈치채게 되었고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끌림의 법칙이 있는 걸까. 멀쩡한 유부녀였을 때는 내 삶 반경 내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그 남자. 그러나 혼자가 되고 나니 그 남자가 갑자기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아내와의 관계가 10년 넘게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흔히 말하는 무늬만 부부로 지내며, 나를 만났을 때는 이미 함께 살지도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이 함께 카페를 꾸리고 있었기에 각자의 거처에서 아침에 따로 출근해 밤에 퇴근할 때까지 함께 일만 할 뿐이었다. 이혼을 전제로 한 별거였지만, 치열한 일터에서 부대끼다 보니 바쁘고 지쳐 헤어질 법적 절차를 미루고 있었다고 할지. 나도 카페를 운영하기 때문에 그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영업이란 게, 특히 카페란 게 식당보다는 여유가 있지만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일인지 해본 사람은 안다. 그런 그에게 이혼 성사는 그 자체로 축하할 일인 건 맞다. 그 바쁜 와중에 아르바이트도 거의 두지 않고 생업을 꾸리면서 차일피일 미루던 일을 강행하여 결론을 냈으니.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랴. 두 시간 만에 주검으로 돌아온 남편 “이선희 씨가 본인인가요?” “네, 그런데요. 무슨 일이죠?” 경찰 둘이 가게로 들어서며 누가 먼저 말을 꺼낼지 머뭇대는 순간 직감이 들었다. ‘남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구나’ 하는. “남편 되시는 분 성함이 최성호 씨 맞나요?” “네, 맞습니다만, 무슨 일로…?” “잠깐 서로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확인해주실 일이 있어서요.” 마음은 이미 최악의 상황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두려움에 주춤대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제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가서 확인부터 하셔야 하는데… 남편께서 오늘 오후 4시경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카페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러 나간 지 2시간 만에 남편은 주검이 되어 내게 돌아왔다. 바쁜 점심 시간을 막 치른 후 몇 가지 떨어진 품목을 구입하려고 잠깐 재료상에 갔던 길이었다. 주차하기 편하다며 짧은 거리는 주로 오토바이를 이용했는데, 도로를 가로지르다 마주 오던 차에 정면으로 부딪혀 즉사했다고 한다.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도, 하늘이 무너지던 마음도 반추하고 싶지 않다. 또다시 가슴이 헤집어진다면 나도 남편도 두 번 죽는 꼴이기에. 한 달 가까이 가게 문을 닫고 두문불출 칩거하다시피 지냈다. 대학과 직장에 다니며 각자 사는 딸과 아들의 위로도 귀찮기만 해서 같이 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편하게 여겨질 정도로 그렇게 나는 혼자 그 시간을 버텨냈다. 그와의 동거가 시작되었으나 이러다 영 사람 구실 못 하겠다 싶어 허깨비 같은 몰골로 교회에 나갔고, 그렇게 반년이 지났을 즈음 그와 가까워진 것이다. 그는 동종 업계 종사자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운영하는 카페를 들락거리며 내 주변을 자연스럽게 맴돌았다. 자기 가게는 뒷전인 것 같았지만 내 알 바 아니었다. 남편이 떠난 후의 빈자리에 절대적으로 일손이 필요한 데다 원래부터 나는 일이 서툴렀기 때문에 그가 와서 도와주는 것이 고맙고 반갑기만 했다. 그가 아니었으면 혼자 운영하기 벅차 일찌감치 카페를 접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우리는 정이 들었고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그의 카페는 규모도 크고 매상도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그로서는 가뜩이나 사이 좋지 않은 아내와 붙어 있는 것보다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웠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기 가게는 아내에게 전적으로 맡겨버리고 우리 가게로 출근했다. 나는 고마움을 핑계 삼아 퇴근 후 그에게 늦은 저녁밥을 지어준다며 집에까지 그를 끌어들였다. 그렇게 우리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의 아내가 나를 찾아와 머리끄덩이를 잡는다거나 하는 통속극은 없었다. 나를 만나기 전부터 별거를 하던 부부이니, 그가 어디서 누구와 살든 그의 아내가 상관할 바가 아닌 데다 내 탓 또한 아니었다. 우리 사이는 평온했고 나는 그가 좋았다. 남편의 빈자리를 메우고 외로운 마음만 달랠 수 있어도 더없이 고마울 상황에 가게 일까지 도움을 받으니 나로서는 더 바랄 게 없었다. 게다가 그는 키도 훤칠하고 인물도 좋고, 나와 나이 차이도 두 살밖에 안 났다. 50대 초반인 우리는 얼마든지 새 출발해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드디어 이혼을 했다고 하는데 왜 반가워하지 않는지 의아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가 기혼 상태일 때 그의 이혼을 간절히 바랐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다 내 곁을 훌쩍 떠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탓에 그 사람 앞에서 늘 저자세였던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 자녀도 없다. 이혼 후 재산의 절반이 오롯이 그의 것이 되니 재혼하면 내게 유리한 점이 없지는 않았다. 물론 그가 자기 재산을 내게 나눠주겠다고 한 적은 없지만, 딸린 자식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홀가분하지 않은가. 가스라이팅으로 피폐해져 “당신, 어쩌면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어? 도대체 몇 번을 가르쳐줘야 알아듣겠어? 도대체 내가 없었다면 어떻게 카페를 꾸릴 생각이었어? 너처럼 덜떨어진 여자랑 함께 살았던 죽은 네 남편이 불쌍하다.” 사귄 지 반년이 지났을 무렵 그가 폭언을 퍼부었다. 손님이 많은 시간에 내가 계산 실수를 하자 카운터 앞에서 대뜸 성질을 부린 것이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다 나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거니 내가 참아야지. 앞으론 잘하자’ 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당한 창피함을 애써 잊으며 혼자 삭이곤 했다. 그 후로도 몇 번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고, 그럴수록 나는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곰곰이 이성적으로 따져볼 생각은 점점 더 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시비를 걸면서 나를 바보 취급하며 몰아붙였고, 아내와 다투기라도 한 날은 그 화풀이까지 해댔다. 나중에는 반찬 투정에 음식 타박까지 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며, 자기가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겠냐며, 공연히 자기 감정에 겨워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나의 주눅 듦과 정신적 혼란은 더욱 심해졌으니, 이른바 나는 그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두렵기도 했고 서러웠다. 남편이 죽지 않았다면 이런 수모를 겪을 일도 없었을 거라는 원망 아닌 원망도 올라왔다. 남편을 떠올리니 나도 더는 참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용기가 솟았다. 하루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렇게까지 힘들면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 가게는 나 혼자 알아서 꾸릴 테니 일과를 마친 후 밤에 만나자”고 단호히 말했다. 느닷없이 허를 찔린 듯 갑자기 겁먹은 표정으로 그가 내 눈을 외면했다. 그렇게 일단락되는가 했지만 그는 꾸역꾸역 나와서 예의 고약을 떨었다. 그랬다. 그는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기생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였던 것이다. 사실 그는 아내에게 쫓겨났고,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자 나의 약점을 이용해 기생충처럼 파고들면서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 그의 나약하고 비겁한 성질이 폭로될수록 그의 이혼이 달갑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이제야말로 나도 그를 쫓아내야겠다는 복수심마저 들었다. 그가 왜 이혼 위기에까지 몰렸으며, 딴 여자를 만나고 있음에도 그의 아내가 전혀 반응하지 않았는지 이제는 이해가 된다. 그의 아내가 떼낸 혹이 내게 붙어버렸으니 이 골칫덩어리를 어떻게 처치할까.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2022-09-21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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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지 수거 노인 돕자", 팔 걷은 스타트업들
- 폐지 수거 노인들은 오늘도 거리에서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박스를 모으고 있지만, 낮은 수익성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폐지 줍는 65세 이상 성인은 100명당 1명꼴(2017년 기준 약 6만 6000명)이다. 몸을 움직일 수 있으나 노동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어려운 노인들이 일상 유지를 위한 수입을 위해 돈벌이에 나서는 것이다. 국민연금공단의 자료를 살펴보면 65세 이상 독거노인이 한 달에 필요한 생활비는 129만 3000원이다. 그러나 이들이 하루 평균 8시간 이상 폐지를 주워 만지는 돈은 2~3만 원으로 2021년 최저임금 기준 시급(8시간 기준 69760원)보다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고된 노동에 비해 적절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노인들을 위해 폐지 수거를 돕거나 대체할 수 있는 일거리를 제공하는 기업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끌림은 가볍고 안전한 리어카를 직접 개발하고, 그 위에 광고를 부착하여 발생하는 광고 수익을 폐지 수거 노인에게 전달하는 소셜 벤처다. 현재 서울 17개 구, 부산 6개 구, 인천 3개 구, 광주, 제천에서 리어카 광고를 진행 중이다. 끌림은 “지난 4년 동안 전국 27개 지역구, 401명의 어르신께 336개의 끌림 안전 경량 리어카를 무상 임대해드렸다”며 “더불어 끌리머 어르신들께 2억 2천만 원의 임금을 지급해드렸고 이를 폐지 무게로 환산하면 10,200톤”이라고 설명했다. 아립앤위립은 폐지 수거 노인을 대상으로 일거리 창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노인들에 ‘미술 작업’을 맡기고 이를 제품화해 판매한다. 노인들이 그림을 그리면 일종의 저작권료를 지불한 뒤 엽서, 마스킹테이프, 수제 노트 등 굿즈로 재탄생시키고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수익을 내는 식이다. 또 판매 제품의 포장 작업을 어르신들에게 맡겨 두 번의 일거리를 창출하게 된다. 러블리페이퍼는 친고령, 친환경 기업을 표방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페지 수거 노인들이 자원 재생활동가로 자부심을 느끼며 폐자원을 수집, 운반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kg당 50원 정도에 그치는 폐지를 300원에 매입해 예술작품(페이퍼 캔버스 아트) 및 교구를 제작하여 판매하고 이때 발생한 수익으로 다시 폐지 수거 노인들의 생계 안전, 여가를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캔버스는 △시세의 6배가 넘는 가격으로 박스 구매 △박스, 캔버스 천 재단 △풀칠, 사포질 등을 통해 완성된다. 러블리페이퍼는 2019년 7월부터 폐지 수거 노인을 직접 고용해 폐박스 캔버스 제작을 함께한다. 러블리페이퍼는 “어르신들이 손도 빠르고 이해력이 좋아 준비한 물량을 금새 마무리하신다”며 “우리의 목표는 폐지 수거 어르신들 삶의 변화를 위한 인식 개선이다. 어르신들이 계속 일을 하실 수 있도록 명화 작품에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 2021-12-27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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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르몬으로 사랑 읽기
- 우리는 왜 낯선 타인을 보며 첫눈에 반하고, 불같이 사랑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이 식어버릴까?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빠지고, 상대를 욕망하고, 감정에 지배당하는 이유를 호르몬의 관점으로 흥미롭게 살펴봤다. 도움말 性전문가 박혜성 해성산부인과 원장 “그대를 처음 본 그 순간 난 움직일 수가 없었지. 그대 그 아름다운 모습 난 넋을 잃고야 말았지.” 읽는 순간 자동으로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 가수 박진영이 부른 ‘허니’의 가사다. 노래 속의 화자는 첫눈에 반한 상대에게 온갖 달콤한 말로 유혹하며 3분 30초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열렬한 구애를 펼친다. 대중가요부터 드라마, 영화 등 누군가에게 반해 사랑을 시작하는 전개는 시대를 막론하고 로맨스 장르에서 빠질 수 없는 단골 소재다.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6세기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도 있다. 염세적인 이들은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이 살면서 비슷한 경험을 한다.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2019년 미혼 남녀 총 48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중 48%가 ‘첫눈에 반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해피엔딩’은 아니다. 운명 같은 상대와의 열애도 더 이상 운명처럼 여겨지지 않을 때가 온다. 그 무렵 상대와의 설레었던 순간을 다시 떠올려보면 자신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치 무언가에 홀렸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느껴지고, 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까지 든다. 하지만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화학적으로 접근해보면 인간의 마음이 왜 이토록 갈대 같은지 명료해진다. 사랑은 일종의 호르몬 작용이다. 낯선 이도 가깝게 만드는 ‘사랑 호르몬’ 피부와 체중, 모발 등 신체적인 변화를 좌우하는 호르몬은 인간의 정서적인 면에도 다양한 영향을 미친다. 그중 이끌림, 호감, 애착, 설렘, 쾌감 등 사랑할 때 느끼는 감정에 관여하는 호르몬을 ‘사랑 호르몬’이라고 부른다. 2005년에 개봉한 영화 ‘클로저’ 주인공들의 얽히고설킨 사랑 이야기를 보면 이 호르몬의 짓궂은 장난이 보다 쉽게 이해가 된다. ‘클로저’는 낯선 사람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고, 시간이 흘러 서로가 가까운 존재가 되었을 때 또 다른 낯선 사람에게 끌리며 벌어지는 네 남녀의 적나라한 욕망을 그린다. 내용은 이렇다. 소설가를 꿈꾸는 ‘댄’(주드 로)은 우연히 마주친 스트립 댄서 ‘앨리스’(나탈리 포트만)에게 첫눈에 반한다. 앨리스와 사랑을 나누며 그녀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낸 그는 책 표지 사진을 찍기 위해 만난 사진작가 ‘안나’(줄리아 로버츠)에게 또 다른 강렬한 감정을 느낀다. ‘안나’는 댄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만, 다가오는 그를 밀어내지 못한다. 내용만 보면 다소 ‘막장’ 드라마 같지만, 호르몬의 지배를 받는다면 현실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7초의 마법 ‘도파민’ “Hello, Stranger(안녕, 낯선 사람).” 영화 클로저의 첫 대사다. 런던의 도심 한복판,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댄과 눈이 마주친 앨리스가 건넨 말이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이들은 그렇게 사랑에 빠진다. 이 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은 도파민으로 가득 차 있다.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할 때 우리 몸속에서는 도파민이 짧게 분비된다. 도파민은 뇌의 보상 센터에서 작동하는 신경전달물질로 기쁨이나 행복, 성취감 등이 밀려올 때 분비량이 늘어난다. 도파민이 분비되면 상대방에게 성적인 끌림을 느끼게 되고, 이 감정이 발전하면 사랑으로 이어진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데 7초면 충분하다”는 이야기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도파민은 집중력, 의욕, 에너지 등을 관장하기 때문에 적절하게 분비될 경우 몸에 활력이 생긴다. 그러나 그 양이 지나치게 많을 때는 무언가에 미친 듯이 몰두하고 빠져드는 상태가 되어 마약이나 도박을 즐기는 사람처럼 중독 증세를 보인다. 이런 이유로 도파민은 ‘중독 호르몬’이라고도 불린다. 행복과 깊은 연관이 있는 호르몬인 만큼 사랑에 빠진 이들은 도파민 분비가 활발하다. 헬렌 피셔 미국 럿거스 뉴저지 주립대학 인류학과 교수가 수십 쌍의 연인에게 상대방의 사진을 보여주며 뇌의 반응을 관찰한 결과 도파민 분비가 활성화되는 것을 발견했다. 사랑을 갓 시작한 사람들이 언제나 들떠 있고, 활기로 가득 차는 것은 바로 이 도파민 때문이다. 짧고 강렬한 ‘페닐에틸아민’ 운명 같은 첫 만남과 아슬아슬한 ‘썸’을 거쳐 사랑을 시작한 연인은 서로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진다.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지 않고, 보고 있어도 그립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처럼 상대방에게 콩깍지가 쓰이고 무조건적으로 헌신하는 연애 초기단계에는 ‘사랑 분자’로 알려진 페닐에틸아민이 몸속에서 마구 분출한다. 페닐에틸아민은 아드레날린 같은 화학물질로, 이성을 마비시키고 열정을 샘솟게 한다. 쾌락중추뿐 아니라 인지능력에도 영향을 미쳐 커피를 여러 잔 마신 것과 같은 천연 각성 효과를 낸다. 댄과 앨리스가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고 관계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도파민과 페닐에틸아민의 역할이 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댄은 앨리스와 교제하는 도중 사진관에 들렀다가 낯선 여자 안나의 매력적인 모습에 반하고, 충동적인 입맞춤을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앨리스는 그에게 이별을 고한다. “보여줘, 사랑. 그게 어디 있는데?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어. 몇 마디 말은 들리지만 그렇게 쉬운 말은 공허할 뿐이야. 뭐라고 말하든 이젠 늦었어.” 앨리스의 이야기를 책으로 쓸 정도로 불 같은 사랑을 했던 댄의 마음이 어째서 이렇게도 빠르게 식어버린 걸까. 미국 코넬대학교 인간행동연구소 신디아 하잔 교수팀이 남녀 5000여 명에게 ‘애정의 지속도’를 조사한 결과 가슴이 뛰거나 스릴 넘치는 사랑은 18~30개월이 지나면 사라지는데, 특히 남자의 속도가 여자보다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연인 간 교제기간이 2년 정도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사랑 호르몬이 더 이상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래 만난 연인이나 수십 년간 함께 지낸 부부 사이에 권태기가 발생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오래 사랑하고 싶다면 ‘옥시토신’ 식어가는 사랑의 유효기간을 늘릴 방법은 없는 것일까. 힘겨운 권태기를 겪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옥시토신에 주목해야 한다. 옥시토신은 누군가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고 느낄 때, 안정적인 기분이 들 때 분비된다. 옥시토신이 분비되면 친밀감, 유대감, 우정 등 긍정적인 감정은 극대화되고, 부정적인 기억은 일시적으로 사라져 상대방에게 애정이 깃든 행동을 하게 된다. 즉, 사랑에 빠진 기분이 든다. 옥시토신은 피부 자극에 매우 민감해 손잡기, 포옹 등 애정이 깃든 스킨십을 통해 주로 분비된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 잠자리를 가질 때 매우 활발하게 분비되고, 관계 중 절정에 이를 때 최고조에 달한다. 또 관계 중에는 옥시토신뿐 아니라 기분을 좋게 만드는 엔도르핀과 성장 호르몬도 함께 분비되어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 관계가 끝난 직후 남성이 여성에게 더 깊은 애정을 느끼는 것도 같은 이유다. 체내에서 활성화된 옥시토신은 다시금 상대방을 갈망하게 만들고, 성욕을 극대화한다. 하지만 옥시토신이 일차원적인 자극을 주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아니다. 신뢰감에도 깊게 관여한다. 예컨대 아이를 낳을 때도 자궁이 수축하면서 옥시토신이 분비되는데, 이 순간 산모는 출산의 진통을 잠시나마 망각한다. 이후에도 유대감, 애정 등의 감정을 통해 아이와 산모가 애착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해주고, 호감과 설렘을 넘어 한 차원 더 숭고하고 깊은 사랑을 키워낸다. 옥시토신은 안락한 감정과 연관이 있는 호르몬이다. 세월의 흐름과 관계없이 깊은 사랑을 나누고 서로를 보듬어줄 때 옥시토신도 증가한다. 오래 행복한 부부생활을 하고 싶다면 미운 구석이 있더라도 감싸주고, 안아주는 연습이 필요하다. ‘클로저’의 댄도 공허한 애정 표현 대신 진심 어린 행동을 보여줬더라면 앨리스가 마음을 의심하는 일이 없었을지 모른다. 즉 호르몬의 장난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진심이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아껴주는 순간, 사랑은 다시 시작될 수밖에 없다.
- 2021-02-15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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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리랑카가 나의 모든 걸 흔들어놓았다
-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을 떠도는 여행만큼 즐거운 게 다시 있을까. 생활의 굴레에서 해방된 자유로움. 모처럼 내숭이 없는 마음으로 풍경과 풍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의 관대함. 도취할 수밖에 없는 우연한 이벤트들과의 만남. 다채로운 비일상적 낭만의 향유와 감성 충전이 가능한 게 여행이다. 그러기에 흔히들 지친 ‘나’를 위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여행을 즐긴다. ‘스리랑카주의자’ 고선정(48)은 좀 다르다. 그는 여행으로 삶을 통째 뒤집었다. 종전의 관습을 획기적으로 바꾸었으니 반전이자 반역(?)이다. 신간들을 살펴보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다 특이한 제목을 단 여행서 하나를 발견했다. “나는 스리랑카주의자입니다”라는 책. 스리랑카라는 나라를 좋아하기를 참을 수 없는 사람이 쓴 책임을 암시하는 제목이다. 스리랑카에 관한 한 고수임을 알리고, 풀만 먹기로 작정한 채식주의자처럼 스리랑카를 메뉴로 섭취해 삶과 정신을 살찌우겠다는 의도를 덩달아 밝힌 셈이다. 평소 제목에서 갖는 호감만으로 책을 충동 구매하는 버릇을 가진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이 점에서도 이 책의 네이밍은 꽤 근사하다. 부실한 내용을 담은 채 오직 호객을 위한 기술적 작명에 그쳤을 경우엔 노련한 독자들의 한숨을 자아내겠지만 ‘조금 특별한 여행기’임을 자처하는 이 책의 내용은 비교적 충실하다. 저자 고선정은 3년여 간 스리랑카를 집중적으로 드나들며 체험한 명소와 유적, 그리고 사람들에 관한 추억을 기반으로 책을 써나갔다. 자료와 정보의 수집에도 공을 들인 기색이 완연하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책엔 스리랑카의 역사와 종교, 문화와 환경 등등에 관한 인문적 정보들이 빼곡하다. 재미있는 건 여행 중에 만난 스리랑카 사람들이 보여준 정겹고 미더운 모습을 담은 에피소드들. 이는 건조한 문체와 평면적 묘사로 일관해 다소 밋밋한 맛을 풍기는 이 책에 고소하게 뿌려진 양념에 속한다. 스리랑카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에겐 요긴한 가이드북이 될 테다. 매체의 서평 담당자들이 딱히 이 책을 지목했다는 흔적은 별로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건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저자의 인생이 확 변했기 때문이다. “책을 내고서 드디어 인생의 바닥을 쳤다고 생각했다. 대학 졸업 뒤 나는 25년간 수능학원 강사로 살아왔다. 수험생과 마찬가지로 휴일이나 명절에도 쉬지 못한 채 정말 바쁘게 살았다. 벗어나야지, 달아나야지 하면서도 얽매인 세월이었다. 항상 경제적인 측면을 중시하며 기관차처럼 달려온 날들이었거든. 책 출간을 계기로 이 지루한 단순반복에서 탈출, 인생 2막을 새로 시작하게 됐다.” 학원 강사에서 여행 작가로 변신한 셈이구나. “요즘 두 번째 책을 준비하고 있다. 국문학을 전공한 나에게 글쓰기는 오랜 꿈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 꾸깃꾸깃해진 꿈이었다. 그 낡아가는 꿈을 스리랑카 여행을 계기로 복원할 수 있었지. 이제부터라도 좋은 글, 좋은 책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커지고 있다. 돈이 안 되는 일일지라도 열정을 불태워보겠다는 생각이다.” 심각한 글쓰기는 방울방울 피를 뿜는 고행에 가깝다. 학원 강사보다 지겨울 수 있는 게 문학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실로 힘든 일이라는 걸 왜 모르겠나? 스리랑카 이야기를 쓰며 많이 울었다. 어떻게 글을 끌어내야 할지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를 몰라 그지없이 막막하더군. 그러나 도전하고 싶었다. 내가 원래 좀 강한 캐릭터다. 몹시 힘든 상황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근성은 좀 있거든. ‘뭐 해보는 거지, 뭐든 하다하다 안 되더라도 죽기보다 더 하겠어?’ 이게 나의 방식이다. 어려운 일에 질겁하기보다 일단 세차게 부닥치고 보는 성향이라는 거.(웃음)” 시련을 기어이 이겨내는 타입? 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났기에? 당신은 25년간 강사 생활을 계속했다. 안심으로 안주한 날들이지 않았을까? “사실 유난히 힘든 일을 겪지는 않았다. 게다가 완벽주의자라서 매사 엄청 노력했으며 덕분에 잘나가는 강사로 살았다. 경제적 기반도 다졌다. 그런데 중년에 접어들며 나를 돌아보자 허탈하더군. 긴긴 세월, 집과 학원만을 오가며 나를 너무도 조이고 누르며 살았다는 걸 깨닫고서였다.” 세상에 유쾌하기만 한 직업이 있겠나? 애환이 없는 인생이 가능하겠느냐는 얘기다. “나는 일종의 패배감마저 느껴야 했다. 단조로운 생활을 계속한 결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숙한 인간, 미성숙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는 자괴감이 심했다. 한마디로 지나치게 경직된 삶이었지. 인간관계도 좁았고, 친구를 만나더라도 대화조차 풀려나가질 않더라고. 유치한 인생이었다.” 결국 빡빡하게 조여둔 나사를 여행으로 풀었나? “마흔이 다 돼 처음 나선 해외여행으로 해방감이라는 걸 맛봤다. 여행이 나를 풀어놓을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라는 걸 알았다. 이후 남미나 유럽 등 20여 개 국가를 여행했고, 이 와중에서 강사 생활을 청산했다.” 이상과 본성을 되찾게 해준 나라 첫 번째 해외 여행길에서 고선정은 ‘눈물을 콸콸 흘렸다’고 한다. 낯선 거리를 아무런 목적 없이 쏘다니며 즐거워하는 자신의 모습에 북받쳐서. 그가 감옥과도 같은 직장생활을 하거나 얼토당토 없는 쇼를 하며 살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지나온 날들이 족쇄에 갇힌 허울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는 회의감에 당황하고, 아울러 여행의 기쁨에 전율했던 모양이다. 진정으로 잘 산다는 게 어떤 것인가를 자문하며 여행이라는 신세계에다 자신을 방목하기로 결정했던 것 같다. 설명하기 어려운 추상화와도 같은 삶과 시간에 마침내 구체적 맥락이 잡혀나가는 계기였을지도. 이후 그는 자유로운 인간 유형의 한 가지 존재 방식인 여행자의 자격을 자신에게 부여하고 세상의 많은 곳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만난 게 스리랑카였다. “여행길의 비행기에서 우연히 본 잡지 속 스리랑카 풍경 사진 한 장. 그게 나를 스리랑카로 달려가게 했다. 다분히 충동적인 끌림이었지만 치명적인 매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충격이 느껴질 정도였다.” 스리랑카의 그 어떤 매력에? “첫 여행에서 여덟 개 도시를 돌아다녔는데 묘하게도 도시마다 색깔이 다르더라. 바다 경관도 실로 절경이었다. 10회 이상의 여행으로 아예 살다시피 하며 체험한 스리랑카는 ‘아름다운 물의 나라’였다. 이마저 불충분한 설명에 불과하다. 뭐라 딱 집어 예찬하기 어려울 지경으로 모든 게 좋았다.” 풍경은 물론 분위기까지 당신의 성향과 잘 맞았다? “그렇다. 내면으로 스리랑카가 흘러들어 나의 모든 것을 흔들어놓았다. 여행을 통해 물처럼 흐르고 싶다는 것, 공기처럼 가볍게 떠돌고 싶다는 것, 이게 내가 원하는 목적이었는데 스리랑카는 적격이었다. 나의 이상과 본성을 되찾게 하는 여행지였으니까.” 스리랑카는 인도 남동부에 있는 작은 섬나라. 개발도상국이지만 사망률과 문맹률은 낮으며 명차 실론티의 산지이기도. 자연 풍광이 빼어나 ‘인도양의 진주’라 부른다. 세계적인 여행안내서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은 ‘2019년 세계 최고의 여행지’로 스리랑카를 선정, 논란을 야기했다. ‘론리 플래닉’은 고대로부터 상속된 불교와 힌두교 유적들, 훼손되지 않은 자연환경 등을 근거로 스리랑카 여행을 권장했지만 종교분쟁이 지속되고 있어서였다. 2019년 4월엔 수도 콜롬보에서 테러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위험 상황에 아랑곳없이 고선정은 스리랑카를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막상 가보면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위험지구는 영리하게 미리 피해야 하고 말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신중한 인간이다. 어릴 적 별명이 ‘애늙은이’였다.(웃음)” ‘론리 플래닛’의 스리랑카 예찬에 영국 외무부는 우려를 표했더군. 관광지에서 성희롱이 난무하는 나라라며. “나도 툭툭(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스리랑카식 택시) 기사에게 불편한 농담을 들은 적이 있다. 달리는 툭툭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그러나 극히 부분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불편한 상황을 용납하거나 당할 나도 아니다.” 인간의 바람기와 장난기는 모든 곳에 공기처럼 감돌지도. 이게 여행자의 피로감을 가중하기도 한다. “여행이 오직 즐거울 수만은 없다. 단독 여행자에게 외롭고 두려운 상황은 언제 어디서든 불시에 찾아들지 않던가. 안전을 최우선으로 현명하게 움직여야 하겠지. ‘여행하다 비명횡사는 하지 말자!’ 이건 나의 수칙이다. 항상 서툰 방심이나 일탈을 극구 삼가며 여정을 추진했다.” 약간의 일탈과 모험은 여행의 풍미를 돋우지 않나? 서머싯 몸은 ‘경찰이 보지 않을 때 슬쩍 딴짓을 하는 데에 인생의 재미가 있다’고 했다. 규율에 속박돼 살지 말자는 얘기였다. “성격상 일탈은 나와 멀다. 나를 속박한 건 나 자신이었던 것 같다. 나를 자유롭게 풀어놓기가 너무도 힘들었거든. 그러나 스리랑카에서 달라졌다. 비로소 꽤나 자유로워진 나를 발견했던 거다. 그러니 스리랑카를 좋아할 수밖에.” 어떤 에너지를 받았기에? “선량한 사람들, 가난하지만 밝고 따뜻한 사람들! 내가 만난 스리랑카인들이 그렇게 대부분 순박하고 친절했다. 그런 그들의 선의가 나를 풀어놓게 한 에너지로 작용했던 것 같다.”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라지? “돈을 중심에 두고 아웅다웅하는 자본주의에 덜 물든 덕분인 것 같다. 모두가 골고루 가난해 상대적 불행감이나 박탈감을 갖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나라다. 그들은 여행자를 가족처럼 진심으로 대했다. 가령, 하루 여정을 마치고 숙소로 귀환하는 저녁이면 미리 집 앞까지 나와 기다려주는 주인집 식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들 그런 식이었다. 내가 스리랑카에 심취한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리랑카로 이주해 살기로 했다 스리랑카 여행 중에 사람들은 고선정에게 곧잘 묻곤 했단다. “아니, 당신은 왜 항상 웃는가?”라고. 고선정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늘 웃는 인간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무심하고 차가운 세상의 이면을 스리랑카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학원 강사로 열심히 뛰었던 한국에선 맛보지 못한 깊은 만족감을 이국에서 비로소 만끽했다는 게 아닌가. 그러자 쪼그라들었던 자아가 돌연한 탄력을 받아 확장되었나? 그는 자신과의 불화 구조를 깨고 정체성을 찾았고 열린 감관으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 것 같다. 여기까지는 어쩌면 평범한 여행 서사에 불과할 수 있겠다. 그런데 고선정의 행보는 한층 역동적이다. 한 권의 여행기로 스리랑카에 꽃을 바친 그는 자신을 위해서도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아예 스리랑카로 이주해 살기로 결심했다는 게 아닌가. 이미 스리랑카에 터를 사들여 살아갈 집을 짓기 시작했다. “눈뜬 아침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스리랑카다. 나를 꿈꾸게 하고, 열정을 심어준 나라. 거기에서 군더더기는 다 내려놓고 즐겁게 살고 싶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건축 일정에 차질이 생겼지만 올 연말엔 스리랑카로 날아가 공사를 진척시킬 참이다.” 지구 저편으로 이주. 이는 그가 요번 생에 행한 가장 참신한 결단에 속하려나. 한 번뿐인 아까운 생을 나 살고 싶은 곳에서 살겠다는 의도에 무슨 결함이 있으랴. 그런데 스리랑카에서 산다 한들 삶의 고역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행복으로 도배할 수 있는 삶이 가능할까. 어디서건 인간은 외로운 존재라 하지 않던가. 여기에 대한 고선정의 생각은 이렇다. “밝고 투명하게! 내가 살고 싶은 방향이 그렇다. 물론 스리랑카에 산다고 1급수처럼 해맑게 살 순 없겠지. 그저 2급수 정도만 돼도 좋겠다. 이마저 열정이 아니고선 얻기 어려운 차원일 거 같다. 하지만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으로 도전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인터뷰 중에 고선정이 자주 동원한 단어가 ‘꿈’, ‘열정’, 그리고 ‘도전’이었다. 실천을 결여하면 허영에 불과할 단어들이다. 그러나 그에겐 필생의 지표일지도.
- 2020-10-05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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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파시니어클럽 술술맵시단’ 전통매듭, 젊은 감성으로 배워 담다
- 조용했던 뜨개질 방이 술렁거렸다. 이제부터 다른 것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안 하던 것을 하다니. 잠시나마 당황했다. 손녀뻘로 보이는 어린 선생님이 알록달록 형형색색 끈을 펼쳐보였다. 막상 눈앞에 놓아둔 것을 보니 새록새록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엄마랑 할머니랑 도란도란 앉아서 우리네 옛 매듭을 엮어 만들던 모습이 기억 저편에서 샘솟았다. 전통매듭과 함께 소녀시대로 돌아간 송파시니어클럽의 술술맵시단을 찾아갔다. 전통매듭이 뭐길래? “작은 선생님, 이리 좀 오셔봐요. 나 길을 잃어버렸어. 요놈 가져다가 넘기지? 하나는 잘 넘어왔는데 하나가 영 안 되네.” 어딘가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책상에 바짝 앉아 ‘오벌가락지매듭’을 만들고 있던 한미자 씨였다. 매듭이 제 길을 찾아 잘 가나 싶었는데 결국 헤매고 말았다며 최현숙 선생을 불러 세운다. 바늘을 사용하지 않고 손을 이용해 끈과 끈이 오가다 보면 소박한 아름다움이 우러나는 전통매듭이 된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송파시니어클럽에는 60대 후반부터 80대까지 8명의 여성 시니어가 모여 매듭을 배우느라 열기가 가득하다. 작년 8월부터 시작했으니 1월이면 전통매듭을 만난 지도 5개월째다. 기초 매듭에서부터 섬세한 작업을 해나가는 시니어의 모습이 꽤나 진지하다. 젊은이들처럼 손이 빠른 것은 아니지만 세월의 노련함이 묻어난다. 나아가 예술성과 함께 상품 가치가 있는 작품을 만들어 시니어 취미를 넘은 수익활동 영역으로까지 가능성을 넓히는 중이다. 전통매듭을 시니어와 함께 해보겠다며 송파시니어클럽에 노크를 한 이들은 30대가 주축인 문화예술사업단 술술공작소다. 술술공작소 강순주 대표는 ‘과연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배우고자 하는 시니어의 자세가 남달라 새삼 놀랐다. “기초적인 매듭부터 하나하나 지어나가면서 완벽하게 상품으로 만드는 과정까지가 수업입니다. 저희가 매번 와서 가르쳐드릴 수는 없어 하루는 교육하고 그다음 시간은 숙제로 내드린 것을 해오게 합니다.” 매듭을 배우기 위해 시니어 학생들이 교실 안 책상 앞에 자연스럽게 둘러앉은 것처럼 보이지만 좌석 배치에는 나름의 공식이 있다. 기본매듭을 배우는 단계와 만들어진 매듭을 적당한 색상으로 배합하는 단계, 마지막으로 끈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단계로 나눠서 일사분란하게 구성원들끼리 호흡을 맞춘다. 술술맵시단, 젊은이와 전통을 공감하다 전통매듭이라는 분야를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나누고 보급할까 고민했다고 강순주 대표는 말했다. “다른 지역의 시니어 관련 기관에도 가봤습니다. 마침 송파시니어클럽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해주셨어요. 이곳에서 뜨개질하는 시니어분들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전통매듭을 하는 시니어는 송파시니어클럽의 사업단 중 하나인 한코한코손뜨개사업단 소속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주방용 아크릴 수세미 상품을 만들어 수익사업을 해왔다. “뜨개질도 하는데 전통매듭을 만들어보시라고 제안을 드린 것이죠. 아무래도 손뜨개를 하는 분들이니까 잘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흥미로운 점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웠다거나, 집에서 만드는 것을 봤던 경험이 있다고 말하는 80대 시니어가 적지 않았다고. 30대 젊은 강사가 전통매듭을 가르치기 위해 왔다가 시니어에게 옛 추억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오히려 더 많은 감동을 받는 시간이라고 한다. “지금 만들고 계신 것이 연봉매듭이에요. 왕의 곤룡포를 비롯해서 한복이 쓰이는 단추매듭이죠. 한 어르신이 옛날에는 시집가기 전에 옷감 자투리를 말아서 단추를 해가지고 가는 것이 혼수품이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자주 만들어 쓰던 매듭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매듭이 생각 안 나면 어른들이 그러셨대요. 내가 이제 갈 때가 됐구나.(웃음)” 세대 간 소통 부재의 세상에서 이렇게 어우러지기도 쉽지 않을 텐데 서로 상부상조하는 세대 공감 프로젝트로 보였다. 5개월쯤 함께 활동한 후 이들을 대표하는 이름도 신중한 고민을 거쳐 내놓았다. 바로 술술맵시단. ‘매듭을 만드는 시니어 모임’이라는 뜻이다. “아직은 시작 단계잖아요. 설명해드려도 모르는 게 있다 하시면 옆에서 말씀드리고 또 말씀드립니다. 지금은 선생님이 없을 때도 작업을 꽤 잘하십니다. 앞으로의 바람이라면 이분들이 정식으로 자격증을 따고 더 나아가 또래 시니어는 물론 다양한 분들을 대상으로 우리의 전통매듭을 가르쳤으면 하는 겁니다.” 새로운 것 가르쳐줘서 고마워요 작고 아담한 작업물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요한 시간이 흐른다. 그러나 눈과 손은 예리하게 반응하며 정성을 기울인다. 뜨개질을 오래도록 해왔던 이희자 씨는 “전통매듭이 생소한 분야라 두려움도 있었지만 만들면서 가치 있는 것을 누군가에게 팔 수 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고 했다. 수업 초반 ‘오벌가락지매듭’으로 고생하던 한미자 씨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어머니가 만들던 모습만 봤는데 젊은 선생님에게 배우게 됐다”며 좋아했다. 술술맵시단 고령자 중 한 명인 김정애 씨는 “손을 많이 쓰는 게 치매 예방에 좋다고 들었다”면서 “특히 지역 행사 때 어린아이들한테 매듭 만드는 법을 가르쳐줬는데 보람 있었다”고 만족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80대인 김을용 씨는 “너무 못 따라가고 민폐일까봐 고민을 했는데 여기 모인 분들과 선생님이 친절하게 가르쳐주시고 말동무도 해주셔서 만나는 시간이 늘 기다려진다”고 했다. “나이 든 사람에게 누가 이렇게 다가와 새로운 걸 가르쳐줍니까.” 술술맵시단 시니어가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느리고 서툴지만 섬세함과 정교함을 높여가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진지하게 매듭을 알아가는 중이다. 오늘도 내일도 하루하루 성장해가는 술술맵시단의 멋진 미래를 기대한다. mini interview 술술공작소 강순주 대표 클래식 소녀 국악을 만나 전통예술을 깨치다 “추계예대에서 클래식 작곡을 전공했습니다.” 전통매듭을 가르친다는 말에 나이 지긋한 사람을 상상했는데 만나고 보니 35세의 클래식 전공자였다.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총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여러 교수들과도 격 없이 지냈다는 강순주 대표에게 국악과 교수들은 “클래식 작곡 전공자가 국악을 하면 더 가치 있지 않겠냐”며 조언했다. 그때의 강한 끌림으로 졸업과 함께 락음국악단(예술나눔청년사업단)에 들어가 3년 여 활동했다. 뜻 맞는 음악 친구들과는 전통예술단 ‘호연(浩演)’을 만들어 11년째 활동 중이다. “예술 분야는 사회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요. 지원금이 없으면 예술 단체는 힘들거든요.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큰 일들이 많았잖아요. 지원도 걱정이 되고 자립 방법을 찾아보자 했는데 국악기에 달린 매듭술이 눈에 들어왔어요.” 악기는 애지중지 닦고 조율하면서 매듭술은 악기 처음 샀을 때 있던 것을 그대로 달고 있어 꼬질꼬질해졌다. ‘매듭술 만드는 곳 어디 없나?’ 하다가 공방을 찾아갔다. “공방 선생님한테 제 전공부터 시작해서 왜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말씀드렸어요. 상황을 들으시고는 제대로 배워보라고 하셨어요. 사범증을 따고 나니 뭔가 더 해보고 싶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술술공작소다. 작년 3월에는 서울대학교 스타트업센터 예술 분야 업체로 선정돼 입주했다. 다양한 축제에 전통매듭으로 참여하다 보니 협업이 가능한 동반 집단이 있으면 좋을 듯싶어 다양한 계층을 만났다. “다문화가정 여성들도 가르쳐보고 보호관찰소 여학생들도 만나봤어요. 꼼꼼하고 실력은 좋은데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시니어에게는 다가가기가 조심스러웠어요.” 전통이나 매듭을 생각하면 시니어를 떠올리게 되니 진부하게 보이면 어쩌나 걱정됐단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궁합이 꽤 괜찮았다. 그 시대를 살지 않으면 모를 얘기, 특히 매듭과 관련한 추억을 들려주시는 시니어 덕이 컸다. 최근엔 조금씩 수익도 내고 있다. 작년 11월에는 송파시니어클럽 술술맵시단과 작업했던 작품이 면세점에서 판매됐다. 올해는 좀 더 열심히 뛰어서 우리 전통을 시니어와 함께 알릴 계획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통 스토리를 담은 음악극도 훗날 제작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면서 음악가로서 포부도 밝혔다. “우리 것을 만들자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전통매듭이 자리를 잡고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로 원활하게 돌아가면 음악과도 어우러질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오겠죠?”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2019-01-07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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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중년 통기타 입문기' 우리에겐 우리만의 문화가 있다
- “엄마, 기타 치는 모습 너무 귀여워.” 휴대폰으로 찾은 동영상을 보면서 기타를 이리도 잡아 보고 저리도 잡아 보는 나를 향해 딸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내가 기타를 잘 치냐 하면 반대로 왕초보다. 이제 막 통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시작은 늦었지만 어려서부터 늘 기타를 배우고 싶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기타를 치는 모습, 가수들이 기타 치며 노래하는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사실 누구라도 따라 하고 싶은 폼나는 모습 아닌가? 악기상점이 모여 있는 종로의 낙원상가는 물론이거니와 지나다 우연히 기타가 세워져있는 상점이라도 발견하면 진열장 앞에서 넋을 놓고 바라보던 기억이 있다. 나뿐만 아니었다. 윤이 반짝반짝 나는 기타가 바로 보이는 진열장 앞에는 늘 나와 같은 아이들이 두 서넛은 기웃거렸다. 왜 하필 기타였을까? 살다 보면 이유 없이 끌림이 가는 것들이 있는데 기타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가질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은 그것을 가지게 되었을 때 더 큰 행복으로 다가온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통기타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가수라면 너 나 할 것 없이 기타를 치던 시대였다. 특히 종로의 ‘쎄시봉’ 하면 떠오르는 가수 김세환이나 팝송을 번안해서 부르던 트윈폴리오의 윤형주와 송창식, 특유의 목소리로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는 양희은 등등의 인기는 지금의 빅뱅이나 방탄소년단 못지않았다. 종일 음악이 흐르는 다방에는 DJ가 있어서 신청곡을 즉석에서 틀어주기도 했고 여름만 되면 기타를 메거나 라디오를 손에 든 청춘들이 삼삼오오 기차를 올라타고 서울을 벗어나던 시대였다. 지금쯤 중년이 되었을 그 시대 청춘들. 첫 수업에서 A 코드와 E 코드를 배우고 동요 ‘비행기’를 쳤다. 단 두 개로 치는 거라 쉬워 보였는데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손가락 세 개가 나란히 있는 코드 A에서 자연스레 코드 E로 넘어가는 것은 나에겐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이었다. 잘도 넘어가는 다른 분들을 보면서 자괴감보다는 ‘아마 예전에 하던 사람일 거야’ 하고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을 발동시켰다. 두 번째 수업에서도 나의 비행기는 바닥을 설설 기어갈 뿐 높이 뜨지 못했다. 함께 시작한 분들의 비행기는 대부분 높이 날아올라 강의실이 좁다고 허공을 뱅뱅 날아다니는데 가여운 나의 비행기는 슬쩍 뜨려다 멈칫멈칫 주저앉았다. 이유는 있다. 연습을 거의 못 했다. 못 뜨는 것이 당연하다. “기타를 가방에 모셔두지 말고 꺼내놓고 자주 만져주세요. 그냥 한 번씩 안아주기만 해도 좋습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기타를 안아주지만 더 시간이 지나면 기타가 여러분들을 위로해주는 날이 옵니다.” 두 번쯤 수업을 들었을 때 강사님이 말했다. 이 얼마나 근사한 말인가? 기타가 나를 위로해 주다니! 더 신기한 건 그 말을 내가 이해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수업까지도 아리송한 상태로 시간이 날 때마다 만져 주리라 하고는 거실에 기타를 꺼내두었다. 주말에 손녀가 오더니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는 장난감이 되었다. 띵 똥 거리며 소리가 나는 물건이 어린 눈에도 신기했나 보다. 기타를 처음 시작할 때 입문용으로 하다가 교체하는 게 좋다는 조언도 있었지만 물려 줄 꼬맹이를 염두에 둔 것도 있다. 비행기를 쳐 주니 전혀 엉뚱한 소음이 들린다. 음이 맞지 않았다. 튜닝기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네 번째 수업이다. 강사님이 세 번째 수업 즈음 7월 말경 ‘김광석 따라 부르기’가 있다면서 “우리도 한 곡 참여하죠?” 하더니 이내 “우리도 한 곡 하기로 했어요”로 바뀌었다. “별로 어렵지 않아요. 코드 두세 개로만 하는 거라 연습하면 가능해요.” ‘물론... 연습만 열심히 하면, 물론 그렇겠죠.’ 모두 입을 쩍 벌리곤 고개를 절레절레(나와 같은)하거나, 깔깔대고 웃거나(틀림없이 예전에 좀 하던 분들이다) 했다. 실력을 떠나서 내가 좋아하는 김광석이라 일단은 좋다. 벌써 일곱 번째 수업이 진행되었다. 연습 부족인지 수업이 진행될수록 다른 분들과 격차가 생기는 느낌이다. 강사님이 말했다. “여러분! 연습 잘되고 있는 거죠? 이제 일주일 남았습니다.” ‘아니요! 아니요! 절대 연습 안 되고 있어요!!’라고 속으로만 외쳤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은 잘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 여러분 아주 잘하는데요! 이대로만 하면 되겠어요!” 합주를 하고 난 후 강사님이 말했다. 나도 잘한 것은 맞다. 오직 G 코드 하나만 누르고 그 순간에만 오른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합주를 하다 보니 나 같은 사람이 더 있는지 그 부분에서 유독 소리가 커졌다가 코드가 바뀌면 소리가 확 줄어드는 느낌이 든다. 합주를 마친 후 강사님은 “어 이상한데?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네요”라고 말했다. 모두 고개까지 젖혀가며 웃느라 정신이 없다. 강사님은 수강생들의 편법 연주를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 김광석의 노래를 기타를 치며 부르고 싶다. 시간이 날 때마다 기타를 집어 든다. 아,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기타를 잘 치기엔 내 손은 너무나 작았다. 물론 다 핑계라고 할 수 있지만 동영상에서 가르쳐 주는 그 손동작이 나는 안 된다. 엄지손가락을 6번 줄 위에 멋지게 걸칠 수가 없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피아노에서만 유리한 줄 알았더니 기타도 마찬가지였다. 감사한 것도 있었다. 내 손가락은 길이만 짧은 것이 아니라 가늘기도 했다. 남들보다 다른 줄을 건드릴 확률이 낮다. 역시 신은 공평하시다. 코드를 잡아 본다. C 코드, D 코드, E 코드. 비행기도 열심히 친다. 코드를 정확히 익히니 연결도 전보다 편하다. ‘하긴, 코드를 잘 모르는데 연결이 부드럽게 되기를 바라는 게 욕심이지’하고 스스로 반성도 한다. 어설프게 알다가 확실히 알게 되는 순간의 기쁨은 배움의 과정에 있어 본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깜박이던 형광등에 반짝하고 불이 켜지면서 환해지는 느낌과 같다. 오늘도 밤늦도록 기타 코드를 잡는다. 비행기가 자연스레 되나 쳐보고 “오! 제대로 들린다!” 혼자 뿌듯해한다. 몸으로 하는 것은 자세를 바로잡으면 반은 성공이라는 생각에 동영상을 검색한다. ‘기타 칠 때 바른 자세’, ‘왕초보 기타 코드 배우기’, ‘자연스럽게 기타 코드 연결하기’ 등등. 신기하게도 인터넷에는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수업시간에 배운 것을 동영상을 보면서 열심히 따라 해본다. 손가락 끝이 얼얼하다. 많이 연습한 증거라 그마저도 싫지 않다.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보다가 비행기를 다시 친다. 귀에 들리는 소리가 전보다 좋다. “이게 비행기로 들리니?” 거실에 나온 딸에게 비행기를 물었더니 “ 그럼, 그럼. 비행기로 들려! 엄마 이제 잘하네!” 하고는 웃는다. 어설프게나마 비행기 코드를 연결하게 된 내가 자랑스럽다. 진도를 높여 본다. 수업 중에 G 코드 하나만으로 껑충 연주를 했던 김광석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의 악보를 펼친다. 처음엔 역시 G 코드다. 거북이처럼 목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이어지는 Em코드를 시도해 본다. 된다. 알고 보니 연결이 쉬운 코드였다. 엄청난 발전이다. 시간은 자정이 훌쩍 넘었다. 이러다 언젠가는 정말 기타에게 위로받는 날이 올 것만 같다. 기타를 배우노라고, 배워서 홍대 버스킹을 하는 게 꿈이라고 했더니 “에이, 버스킹은 힘들 걸요” 하던 젊은 선생님의 얼굴도 떠오른다. 꿈은 이루지 못하면 꿈에 머물지만 이루고 나면 더 이상 꿈이 아니다. 첫 수업에서 난생처음 기타 코드를 잡았지만 이제는 비행기를 공중에 띄웠다. 가능성은 늘 열어두어야 한다. 혹시 아나? 앞으로 5년쯤 지나 혹은 그 이후에 어떤 머리카락 희끗한 할머니가 최고령 홍대 버스킹으로 신문에 날지,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내 손으로 기타를 치며 비행기를 부르게 될지 몰랐으니까. “떠~어~따 떠~어따 비~행~기~날~아~라~날~아~라~높~이 높~이 날~아라 우리 비행기~”
- 2018-07-27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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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문경시 이화령 산골에 사는 하득용·안미정 부부
- 백년 안짝에 이 세상을 지나가는 덧없는 나그네. 그게 인생길. 이제 남은 생을 들판에서 일하며 만족을 구가하리라, 하득용(52) 씨는 그런 생각으로 산골에 입문했다. 산촌 노장들이 보기엔 짠했던 모양이다. “멀쩡하게 서울에서 그냥 살지 어쩌자고 내려와 생고생이오?” 오나가나 듣는 소리가 늘 그 소리였단다. 그러나 하 씨의 귀엔 맺히는 게 없는 관전평에 불과했다. 귀농에 아무런 회의가 없기에. 자연스러운 귀결이기에. 어릴 적부터 하득용 씨에겐 우렁찬 꿈 하나가 있었다. 바로 농사였다. 농대에 진학한 것도 농사 실력을 쌓기 위해서였다. 쉰 줄에 접어든 그는 현재 오미자 농원의 쥔장. 말하자면 드디어 꿈을 이루었다. 그는 번쩍거리는 서울의 요지 강남에 살며 근사한 직장을 다녔었다. 그랬던 그의 귀농 뉴스를 접한 초등학교 동창들은 이구동성으로 합창했다지. “야야, 놀랍지 않다. 너는 일찍부터 늘 시골에 살겠다 하지 않았냐.” 그의 오래 숙성된 꿈을 훼방할 의사가 전혀 없었던 아내 역시 순순히 부응했다. 뱀이 바람처럼 스며들어 소파 위에서 똬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는 식의 불상사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기꺼이 동행하겠다고 장단을 맞췄다. 그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귀농을 실행했다. 농경은 인류를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준 혁명적 사건이었다. 대략 1만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장수 산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이 나라에서 농업이란 가장 못 믿을 직업으로 밀려나 있다. 무엇보다 허리 휠 신역이 자심한 반면 타산을 맞추기가 영 힘들다. 사정이 이러했지만 하 씨는 밀어붙였다. 자신의 삶의 방향에 관한 확신과 긍지에 찬 귀농임을 이미 알 만하지만, 나는 바보처럼 물었다. 농사의 그 무엇에 매력을 느꼈는가? “제가 시골 태생입니다. 어린 눈에도 농사란 힘겨운 일로 보였어요. 그러나 꽃과 나무들 속에서 산다는 게 참 좋았어요. 시골의 목가적인 정경이랄까, 그런 게 천성에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어렴풋하게나마 농부의 꿈이 발아했던 거죠. 중학생 때 치른 적성검사에선 농학 적성 비율이 98%로 나왔어요. 아, 농부가 나의 길이구나, 일찌감치 확신을 품기 시작했죠. 시골의 자연 풍경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농업이 내겐 가장 잘 어울린다는, 가장 좋은 삶일 거라는 끌림이 있었던 겁니다.” “농부의 꿈을 품고 살았지만 정작 사회생활은 서울에서 했어요.” “고등학교 졸업 뒤 의심의 여지없이 농대를 선택했고 일본 유학까지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꿈을 접고 서울의 화학 회사에 취직하는 걸로 사회생활에 뛰어들었어요. 처자를 건사하고, 기반을 다져야 했으니까. 10년만 직장생활을 하고 시골로 내려갈 작정이었지만, 20년이 지나고서야 사직을 하고 귀농할 수 있었어요. 여건이 비로소 무르익었다는 판단으로.” “처음엔 혼자 산골로 들어갔죠? 선발대로 뛰어들어 일단 물정을 익힌 거예요?” “귀농교육도 받았고, 귀농박람회도 찾아다녔고, 사전에 서울에서 충분히 준비를 해뒀죠. 휴가를 얻어 전국을 돌며 마땅한 귀농지를 물색하기도 했어요. 지리산 자락 하동군 악양이 맘에 들었으나 땅값이 너무 비싸더라고요. ‘귀농의 압구정동’이라 하더군요. 포기했죠. 이후 문경 산북면의 시골 농토와 빈집을 임대해 농사를 짓는 걸로 귀농생활에 돌입했어요. 식구들은 서울에 두고 혼자서 말이죠.” “차근차근 신중한 수련 과정을 밟으셨구나.” “단신으로, 초심자로 농사를 한다는 게 예상보다 버거웠어요. 정말 고생했죠. 1식 1찬으로 끼니를 채우며 부지런히 배웠습니다. 살이 쭉쭉 빠지더라고요.(웃음) 그러나 꽤나 시골 물정을 터득할 수 있었죠. 1년쯤의 견습기를 지날 즈음, 마침 이화령 산중에 괜찮은 부지가 나와 매입을 하고 이주, 본격적인 귀농생활로 접어들었어요. 서울의 아파트를 팔고, 식구를 불러들이고, 집을 짓고, 묵정밭을 갈아 농장을 만들고, 그렇게 나름의 공을 들여 꾸려온 게 현재의 모습입니다.” 그의 ‘오래된 미래’는 시골 하 씨 부부가 이화령 기슭에 자리 잡은 건 2013년의 일. 터는 널따랗다. 5000평의 부지를 사들여 3000평을 오미자 농장으로 개발했다.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는 첨단 단열공법으로 지은 북유럽식 2층 페시브하우스도 큼직하고 준수하다. 자금력이 수반되지 않고선 엄두를 낼 수 없는 행보렷다. 늘그막까지 우리를 일쑤 끙끙거리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는 돈 문제다. 헐거운 소유로 오히려 진정한 만족을 누리는 도류(道流)도 없지 않지만, 일테면 시골살이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난적이 물적 토대의 여하라는 문제이기 십상이다. 하 씨는 이 난적의 농간을 면제받은 것으로 보인다. 숙원의 해결 또는 삶의 질적 지향이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그의 머리는 민첩하게 움직였으며, 준비는 충실했고, 실천은 적시에 행했다. 광란처럼 기똥차게 치솟은 강남의 아파트를 미련 없이 처분, 그의 ‘오래된 미래’인 시골에 무난한 터전을 장만한 행장은 슬기의 소산일지도. 이제 농사 얘기를 들어볼까. 오미자를 주 작목으로 선택한 이유는 뭘까? “‘해당 지역의 특산물을 재배하라!’ 귀농교육을 받을 때 자주 들었던 얘기였어요. 합리적인 권장이죠. 이곳 문경의 특산물은 사과와 오미자입니다. 기술 숙달이 필요한 사과 재배는 초보 농부에겐 너무 힘들다 판단해 오미자를 택했어요.” “약재를 전문으로 하는 어떤 노인께서 제게 권합디다. 구기자와 오미자를 장복하시오! 그 둘의 약성이 탁월하다는 얘기였죠.” “이왕 농사를 할 바엔 가족들의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작물을 하자, 그렇다면 오미자가 적격이다, 그런 판단도 했습니다. 저나 아내나 서울에선 천식과 알레르기에 시달렸는데 그게 싹 사라졌어요. 맑은 공기, 깨끗한 지하수, 그리고 오미자 덕분이라 봅니다.” “문경은 오미자 주산지로 널리 알려졌어요. 농가들의 경쟁이 치열하겠죠? 하 선생의 생산물은 어떤 특장이 있죠?” “무농약 고품질 오미자를 생산하기 위해 나름 노력했습니다. 제대로 된 청정 농산물을 생산하는 게 농사꾼이 할 일이라는 생각을 고수해왔어요. 무엇보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덜 쓰는 게 요체라 봤고요. 과거의 농사엔 화학비료라는 게 쓰이질 않았어요. 자연과 절기에 순응하는 지혜를 필요로 했을 뿐이죠. 어떤 학자는, 철없는 사람들이 철없는 농산물을 먹어 오히려 심신의 건강을 해친다는 투의 말을 했는데, 경청할 만한 얘기이지 않겠어요?” “요즘의 농작물은 파종 단계에서부터 농약을 투여하죠. 농약이 아니고서는 생육 자체가 어렵도록 농약 의존도가 심화됐어요. 무농약 농사를 실행할 경우엔 생산량도 매우 낮다죠? 결국은 채산성 악화로 이어지고 말이죠.” “제가 오미자 농원 3000평을 운영하며 목표치로 잡은 게 연매출 5000만 원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턱없이 미달이에요. 농업 소득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면 생계조차 위태로웠겠죠. 다행히 모아둔 게 좀 있어서 헤쳐 나가고 있어요. 향후 4년쯤 지나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봅니다만, 무농약 농사란 어떻게 보자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에요. 생산량은 관행농에 비해 3분의 1에 불과하지만 가격은 20% 정도를 더 받을 수 있을 뿐이니 사실상 암담한 상황이라는 거.(웃음)” 적막도 즐길 만한 대상 세상에 유쾌하기만 한 직업은 없다. 설사 안정적인 소득이 보장돼도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직업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나를 쏟아 부을 경우엔 문제가 달라진다. 꿈이 실린 직업은 고독한 인생을 보완해준다. 이상으로 삼은 일에의 몰두가 깊을수록 만족감이 커진다. 하 씨의 경우는? 그는 양양하다. 속사정까지야 깊숙이 들여다볼 길이 없지만 그늘이 없다. 말쑥한 언사로 귀농의 만족감을 표한다. 비록 아직은 형편이 열악하지만 성취감을 느낀다는 게 아닌가. “아내와 함께 농장의 풀을 손수 뽑아야 하는 일부터 농사의 전 과정은 고됩니다. 일머리가 서툴러 고생도 많았고, 극심한 가뭄으로 한 해 농사에 완전히 실패하기도 했고, 애환이 많은 게 농사예요. 하지만 매번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농사더라고요. 풀을 뽑고 난 뒤 깨끗해진 농장을 바라볼 때, 하루하루가 다르게 잘 자라 오르는 오미자 덩굴을 바라볼 때, 붉게 물들어가는 열매를 바라볼 때, 그럴 때마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성취감을 톡톡히 맛봐요.” “예전엔 느끼지 못했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는 주로 머리를 썼어요. 귀농 이후엔 달라졌어요. 몸을 덩달아 최대치로 쓰고 있어요. 그러자 머릿속에 가득했던 욕망이나 욕심이 줄어드는 반면, 몸으로 오감으로 느껴지는 성취감이 자주 찾아오더라고요. 좋다, 참 좋다! 속으로 그렇게 탄성을 내지르는 순간들이 많습니다. 다채로운 자연의 변화와 생동감이 주는 즐거움과 활력은 도시에서는 누릴 수 없는 최상의 가치예요.” “이곳의 산세는 통쾌하고 수려해요. 하지만 적막강산이에요. 아무리 일에 바쁘다지만, 때로 권태롭진 않을까?” “삶이란 즐기라고 부여된 것. 일의 노예로 산다면 인생이 지루하겠죠. 낮에는 일하고 해 저무는 하오엔 읍에 나가 테니스를 즐깁니다. 한국화도 배우고, 난타와 색소폰도 교습받아요. 적막? 그 역시 즐길 만한 대상이죠. 언젠가 아내와 둘이 ‘위대한 침묵’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참 좋았어요. 고요한 산중 생활에 깃드는 내적인 평화, 이 역시 귀농을 통해 받은 큰 선물이구나, 아내와 둘이 그런 얘길 나눈 적이 있습니다.” 하 씨의 농사 실적은 아직 시원치 않다. 애당초 귀농 목적을 돈벌이에 두지도 않았다. 가급적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개인적인 용무를 보고 싶었을 뿐이며, 용무란 농사 그 자체였으며, 마침내 농부로 변신, 결국은 해묵은 꿈을 이룬 셈이다. 그러자 또 하나의 세계가 조용하게 열렸다. 자연과 동행하는 삶의 길이 가지런히 펼쳐지고 있는 것. 이미 유년기에 시골에서 싹 텄을 자연에 관한 감수성이 귀농으로 되살아나 생태계를 존중하고 교감하는 버릇이 몸에 배기 시작한 것. 상쾌한 예화 하나를 볼까? 하 씨 부부는 어느 날 숲에서 꿩 둥지를 발견했다. 둥지 안에는 조르르 알들이 놓여 있었다. 알들의 일부는 깨져 있었다지. 뭔가가 둥지를 건드렸다는 증거였다. 일단 둥지가 노출되면 어미 새는 알들을 더 이상 돌보질 않는다. 그걸 알았던 부부는 읍내로 달려가 사온 부화기에 알들을 고이 길러 날려 보냈다. “어느 날은 새 한 마리가 유리창에 부딪쳐 나동그라졌어요. 죽었는지 기절했는지 숨을 쉬지 않더라고요. 우리는 서둘러 인공호흡에 나섰어요. 저는 놈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줬고, 아내는 부리를 벌려 빨대를 꽂아 숨을 불어넣었어요. 앗, 그러자 살아나 후루룩 날아가는 게 아니겠어요?” 소소하면서도 짜릿한 감흥을 주는, 동화를 닮은 일화다. 보는 눈이 없더라도 그물에 걸린 어린 고기나 금지 어종을 풀어주는 어부라면, 그는 이미 자유로운 영혼이다. 새 한 마리의 목숨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희귀하게도 잘 사는 사람이다. 나이 들어서도 우리의 이기심이 종종 놓치는 건 공생의 가치이지 않던가.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 2018-03-15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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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맛있는 인생(Second Half)’
- 이런 영화가 있는 줄 몰랐다. 그리 대단한 흥행을 한 것도 아니고 마케팅도 열심히 한 것 같지 않다. 저예산 영화라서 그랬을지 모른다. 그런데 묘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의 자연스런 연기와 함께 마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영화다. 조성규 감독 작품이다. 주인공인 영화제작자 조 대표 역으로 류승우, 젊은 여대생 민아 역으로 신인 배우 이솜이 나온다. 한때는 잘나가던 40대 영화제작자 조 대표는 최근 만드는 영화마다 망한다. 거래처 전화에 시달리다가 훌쩍 바다가 보고 싶어 차를 몰고 강릉으로 혼자 향한다. 무작정 떠난 것이다. 호텔을 정하고 레스토랑에서 차 한잔 하려는데 서빙하는 한 아르바이트 여대생에게 전류가 흐르듯 시선이 꽂힌다. 긴 생머리에 청순한 얼굴, 날씬한 몸매의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다. 그런데 여대생이 조 대표가 유명한 영화제작자라는 것을 먼저 알아본다. 더구나 팬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쉬는 날이라며 강릉 가이드를 자청한다. 돌이켜보니 20년 전 친구들과 강릉에 왔을 때 묵었던 민박집에 또래의 딸이 있었다. 당시 친구들과 누가 그녀와 잘 수 있는지 내기를 했고, 조 대표가 그녀를 유혹해 하룻밤 정사를 나누곤 다음 날 새벽 서울로 도망쳤던 기억이 있다. 둘은 강릉 일대를 다니며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아름다운 여대생과 중년 남자의 꿈같은 여행이었다. 유명한 명소와 맛집, 커피숍 등을 다니며 둘은 많은 대화를 나눈다. 조 대표는 민아에게 묘한 떨림과 끌림을 느낀다. 20년 전 하룻밤을 나눈 그녀의 딸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조 대표는 민아가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점점 민아가 자기 딸이라는 심증을 굳힌다. 그리고 자책감에 시달린다. 드디어 여행 마지막 날, 둘은 어두운 바닷가에 앉아 서로 고백할 일이 있다고 말한다. 조 대표는 20년 전 일을 고백하려고 했지만 민아가 먼저 고백하겠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가 바로 조 대표라고 말한다. 충격적인 그녀의 고백에 잠시 당황하던 조 대표는 돌아서서 그 길로 차를 몰고 서울로 돌아온다. 남자들에게는 조 대표와 비슷한 죄책감이 있다. 젊은 시절은 이성보다는 본능이 더 강할 때다. 여자들은 혹시 이 남자는 뭔가 다를까 하고 받아들이지만 결국에는 남자들은 다 똑같다는 말을 한다. 민아도 얼마 전까지 사귀던 또래 남자가 있었지만 헤어지고 보니 역시 똑같더라는 말을 한다. 영화 제목을 왜 ‘맛있는 인생’으로 지었을까 의아했다. 영어로 번역한 ‘Second Half'는 ’후반전‘이란 의미다. 40대에 인생 후반전을 이야기하기에는 이르다. 그러나 인생 후반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곰곰 생각해볼 나이다.
- 2018-01-08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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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혼의 사랑
- 황혼에 사랑이 찾아온다면 좋은 일이다. 가슴이 떨리고 세상이 갑자기 생동감 넘치는 느낌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 아니다. 원래부터 화성과 금성에서 각각 살다 와서 DNA가 다르지만, 지구라는 별에 와서도 합해서 100년이 넘게 다른 세계를 살아 온 사람들이 맞춰 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너무 다른 것에 이해가 어렵다. 청소년기처럼 이성적인 끌림이 우선 발동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나이쯤 되면 서로 이성이나 세태에 대해 아는 지식이 너무 많다. 순수한 감정으로 생긴 사랑보다 이해타산이 따르고 상대방을 의심한다. 여자들은 사랑을 상당히 비중 있게 보지만, 남자들은 생태적으로 그렇지 않다. 그동안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밖에서 일하는데 온 정열을 쏟으며 살았다. 관심은 늘 밖에 있는 것이다. 늘 같이 있을 것 같고 온통 자기만 생각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사랑은 물론 중요하지만, 여자들처럼 그렇게 큰 비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여자들은 자기 남자가 바람이라도 피우지 않을까 매우 걱정한다. 어딜 가나 여자들이 많고 요즘 여자들은 매우 적극적이라 무섭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남녀 모두 그동안 살아 온 경험 속에 적절히 제어 장치가 있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매력도 잃어 청소년기처럼 이성만 보면 무조건적으로 끌리지도 않는다. 남자들은 여자에게 푹 빠졌다가 이별 통보라도 받으면 큰 충격을 받으며 가슴이 무너진다. 괘씸해하기도 한다. 대부분 그래 왔기 때문에 다가오는 여자를 무섭게 생각한다. 여자들은 늘 머릿속에 사랑과 이별을 염두에 뒀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대비가 되어 있다. 반면에 남자들은 그런 생각 없이 사랑에 빠져 들었다가 갑자기 이별 통보를 받게 되면 충격이 큰 것이다. 남자들은 원래 그만큼 단순하다. 남자들은 “예스”, “노”가 분명한 편이다.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 “노‘라고 하지만, 노가 아닌 경우도 많다. ”헤어지자’고 말하지만, 진심이 아닌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남자들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남자 앞에서는 농담도 가려서 해야 하는 것이다. 혼자 오래 산 사람들은 혼자가 얼마나 좋은지 안다. 익숙하기도 하다. 별 문제도 없었다. 같이 살려면 여러 가지 고민해야할 부분이 많다. 포기해야 할 것도 많고 새로 실천해야 할 것도 많아진다. 사랑이 그 모든 것을 다 커버하고도 남는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그런 불편을 감수할 결심을 하기 쉽지 않다. 혹시 늙어서 병들었을 때 누군가 수발을 해줘야 하니 반려자의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미래의 일은 미래에 닥쳐봐야 알 일이다. 옆에 보호자가 있다 하더라도 냉대하거나 하면 없느니 못할 수 도 있다. 병들어 추한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반대로 상대편이 병들어 병수발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상당한 부담이 된다.
- 2016-07-19 1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