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주(58)는 자타 공인 한국을 대표하는 뮤지컬 배우다. 그가 뮤지컬 배우로서 무대에 오른 지도 벌써 약 40년. 강산이 네 번 바뀐 시간에도 무대 위의 남경주는 나이 들지 않았다. 한결같은 에너지를 자랑한다. 비결을 묻자 그는 “그냥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웃으며 답했다. 화려한 무대를 벗어나 마주한 진짜 남경주는 소탈하고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었다. 특히 가족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사랑꾼임을 알게 됐다.
“제가 오랫동안 뮤지컬 배우를 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해요. 좋아하는 일을 만났기 때문이죠. 그래서 질린 적도 없고 즐기면서 일할 수 있었던 거예요. 하나 더 말해보자면 창조적인 습관을 잘 길러놓았고, 늘 호기심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결혼한 후부터 제 삶의 원동력인 가족도 한몫 하고요.”
남경주는 서울예술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후 1982년 연극 ‘보이체크’로 공연계에 입문했다. 뮤지컬 데뷔는 서울시립가무단 시절인 1984년 출연한 뮤지컬 ‘포기와 베스’다. 이어 그는 데뷔 초 뮤지컬 ‘가스펠’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1990년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을 통해 이름을 널리 알렸다.
1990년대 당시 남경주의 인기는 여느 아이돌 부럽지 않았다. 꽃미남 외모에 연기력까지 겸비한 그를 보고자 공연장에 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팬클럽까지 생겼다. 뮤지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였다는 평을 받은 남경주는 최정원과 함께 ‘뮤지컬 1세대 배우’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저는 1세대가 아니라 1.5세대”라고 생각을 밝혔다.
“항상 저는 1세대가 아니라고 해요. 우리 형님(남경읍)도 계시고, 형님 위에 선배님들도 계시죠. 우리나라에서 뮤지컬을 최초로 했던 그분들이 1세대인 거죠. 뮤지컬 대중화 1세대라고 할 수는 있겠네요. 그런데 저는 우리 후배들이 2세대고, 저는 1.5세대라고 생각해요. 비유를 해보자면 저는 밭을 일궜고, 후배들이 비옥해진 토양에서 열매를 거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선배로서 느끼는 책임감은 매우 크죠.”
벌써 네 번째, ‘넥스트 투 노멀’
대배우인 남경주에게도 코로나19의 충격은 컸다. 처음 겪어보는 일의 연속이었다. 예정된 공연이 갑자기 취소되고, 1년 넘게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직업을 잃은 것 같은 상실감은 이루 말하지 못할 정도였다.
“코로나19로 배우들은 자의식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오랜만에 무대에 올랐는데 풍경이 생소했어요. 관객들이 띄어 앉고,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까 반응이 잘 느껴지지 않는 거죠. 그러다 보니 연기에 몰입되지 않고 어렵더라고요. 우리가 뭔가 잘못하는 것인가 생각하게 되고요.”
남경주는 코로나19 이후 더욱 무대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다. 그는 이번 달까지 서울 광림아트센터에서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로 관객과 만난다. ‘넥스트 투 노멀’은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한 가정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이다.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국내에서는 이번이 네 번째 시즌으로 7년 만의 귀환이다. 초연부터 ‘넥스트 투 노멀’에 출연하고 있는 남경주는 “보통 뮤지컬과 달리 이 작품은 평범한 가정의 이야기”라면서 “우울한 이야기를 다양한 장르의 음악으로 표현한, 음악의 힘을 보여주는 뮤지컬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차별점을 짚었다.
남경주는 극 중 아빠 댄 역할을 맡았다. 그의 아내 다이애나는 과거의 상처로 신경정신 질환을 앓고 있고, 딸 나탈리는 아픈 엄마로 인해 가족에게 소외감을 느낀다. 댄은 아내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병원에 데리고 다니며 헌신하는데, 정작 자신의 상처를 보지 못한다. 가장의 무게가 느껴지는 외로운 캐릭터다.
“저도 꽤 가정적인 편이에요. 그래서 제 자신에게서 댄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어요. 내가 병이 있는 아내와 같이 산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을 많이 했죠. 댄이 한시도 아내한테서 눈을 떼지 않고 관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 부분에 중점을 두고 연기했어요.”
극 중 댄의 아내인 다이애나 역은 배우 박칼린과 최정원이 연기한다. 남경주는 박칼린과 초연 때부터 부부 호흡을 맞추고 있다. 남경주와 최정원은 두말하면 입 아픈 뮤지컬계 콤비다. 남경주가 느낀 박칼린과 최정원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칼린 씨는 처음부터 같이했으니까 서로 교감, 호흡이 잘 맞죠. 그리고 저는 칼린 씨가 다이애나 역할의 연기 장인이라고 생각해요. 연기하면서 저도 도움을 많이 받죠. 정원 씨는 이 작품이 처음이어서 아직은 힘들어해요. 그래서 저를 많이 믿고 있고, 저도 편안하게 해주려고 노력하죠.”
가족은 나의 힘
남경주는 ‘넥스트 투 노멀’이 ‘가족 힐링 뮤지컬’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 역시 연기하면서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저는 가족의 행동 하나하나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고 진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가정 안의 문제가 뭔지, 가족한테 가장 필요한 것이 뭔지 알게 되죠. 공연을 보면서 공감도 하고 펑펑 울면서 힐링도 하셨으면 좋겠어요.”
남경주는 이번 시즌에 특히 감정이입을 하면서 연기를 펼치고 있다. 그 이유는 남경주의 딸과 극 중 딸 나탈리의 나이가 비슷하기 때문. 남경주는 2005년 팬으로 만난 연인과 결혼했고, 2008년 딸을 품에 안았다. 남경주는 아빠로서 자신에 대해 “한없이 다정한 딸바보”라고 자평했다.
“우리 딸내미는 제가 조금만 엄하게 얘기해도 아주 싫어해요. 그래서 엄한 얘기는 엄마가 담당하고, 저는 늘 응원해주려고 해요. 딸이 부탁하는 것은 웬만하면 다 들어주고요. 딸은 발레 전공으로 예술중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새벽에 집에서 일찍 나가고 방과 후에는 또 학원에 가서 개인 레슨을 받아야 하죠. 안쓰러울 때가 많아요.”
알고 보니 남경주도 초등학생 시절 체조를 했다고. 그는 중학생 때 키가 부쩍 크는 바람에 체조를 그만두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다고 밝혔다. 몸을 움직이는 것도, 음악도 좋아했던 터라 밴드부 활동을 하고, 고고장에도 자주 놀러 다녔다고 한다.
이후 고등학생이 된 남경주는 마음을 다잡고, 미대 진학을 목표로 미술 공부를 했다. 그러나 결국 고등학교 3학년 때 연기로 전공을 바꿨다. 배우로서 넘치는 끼를 막을 수 없었다. 형인 배우 남경읍의 영향도 컸다. 당시 대학생인 남경읍이 연기하는 모습에 매료된 그는 형을 따라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것. 남경주에게 남경읍은 어떤 존재일까.
“어릴 때는 형님이 아버지 역할을 해주셨어요. 많이 삐뚤어질 뻔한 절 잡아주신 덕분에 지금까지 제가 배우 생활을 하는 것 같아요. 형님은 미숙한 제가 연기할 수 있게 영감을 준 존재이고, 늘 제 삶의 구심점이 되어준 분이에요. 요즘은 형과 친구처럼 지내요. 자주 만나서 공연 얘기도 하고 일상 얘기도 하죠.”
5남매 중 남경읍은 첫째, 남경주는 셋째다. 남경주는 “둘째 형은 목공 일을 했고, 남동생은 미대를 졸업했다. 막내 여동생은 승무원이다”라고 설명했다. 예술가의 피가 흐르는 집안이다. 그러면서 남경주는 “어머니가 고생하며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우셨다”고 말했다. 약사였던 아버지의 사업이 망한 후, 어머니가 생선 장사를 하면서 자식들 뒷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2017년 당시에 어머니께서 요양병원에 계셨어요. 어머니께서 위독하다는 연락이 와서 공연을 마치고 병원에 갔는데 이미 눈을 감으신 후였죠. 임종을 지키지 못한 거예요. 그때 정말 목 놓아 울었어요. 어머니께서 고생하셨던 게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더라고요. 그래도 생전에 어머니께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안겨드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형이 문화예술계에서 자리 잡은 공로로 상을 받으신 거니까 어머니가 뿌듯해하셨죠.”
슬럼프 극복 후 롱런하기까지
앞서 말한 대로 데뷔와 동시에 주목받은 남경주의 젊은 날은 화려했다. 인기가 많다 보니 여러 방송과 공연에서 남경주를 찾았고, 그의 피로는 쌓여갔다. 이에 남경주는 1997년 돌연 ‘굿바이 남경주’ 콘서트를 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제 몸은 하나인데 부르는 곳이 너무 많았어요. 쇼 프로그램 MC, 라디오 DJ 등 방송 활동도 많이 했죠. 그러다 보니까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년 조금 넘게 공백기를 갖고 미국에서 공연도 많이 보고 잘 쉬고 돌아왔죠. 무대가 그립기도 했어요.”
결과적으로 미국 유학은 재충전의 시간이 됐다. 남경주의 진짜 슬럼프는 40대 진입을 앞두고 찾아왔다. “이제 더 이상 젊은 주인공 역을 하기 쉽지 않은 나이가 된 거죠.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것이 느껴졌어요. 주인공만 하던 사람에게 아빠 역할, 조연 역할 제의가 들어오니까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더라고요. 힘이 많이 빠졌어요.”
그때 남경주에게 찾아온 작품이 바로 원조 로맨틱 뮤지컬 ‘아이 러브 유’다. 2004년 초연한 ‘아이 러브 유’는 중형 뮤지컬로서는 이례적으로 1200회 공연을 돌파하며 50만 명의 관객을 끌어모은 작품이다.
남경주는 첫 시즌 594회를 포함해 2009년 앙코르까지, 총 830회 무대에 올랐다. 남경주라는 존재감이 재확인된 작품이다. 그 스스로도 ‘아이 러브 유’를 인생작으로 꼽았다. 더욱이 남경주는 이 시기에 공연 중 프러포즈를 했고, 결혼에도 골인했다. 개인적으로도 의미 있는 작품이다.
“‘아이 러브 유’는 에피소드 20개를 묶은 옴니버스 형식의 뮤지컬이에요. 배우 4명이 60명이 넘는 인물을 연기하죠. 새로운 형식의 공연을 하면서 연기 변신을 했고, 자존감도 되찾았어요. 결혼이라는 좋은 일도 치렀고요. 당시 슬럼프를 잘 극복한 덕분에 지금까지 버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 러브 유’ 최장 공연 외에도 남경주가 남긴 기록은 많다. 그는 1995년 백상예술대상에서 뮤지컬 ‘그리스 록큰롤’로 인기상을 받았다. 남경주는 “뮤지컬 배우가 인기상을 받은 것은 최초였다. 그 이후에도 연극 쪽은 수상자가 있었지만 뮤지컬 배우가 수상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더불어 그는 1997년 한국뮤지컬대상 남우주연상, 2005년 한국뮤지컬대상 인기스타상, 2019년 제13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남우주연상 등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브로드웨이 42번가’, ‘노트르담 드 파리’, ‘위키드’, ‘시카고’, ‘빅피쉬’ 등이 꼽힌다.
수많은 뮤지컬 배우들이 롤모델로 꼽는 남경주. 그는 교수로서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2014년부터 교단에 선 그는 현재 홍익대학교 공연예술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남경주는 “뮤지컬 배우는 노래, 연기, 춤 3박자를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 더해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저는 학생들에게 배우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고 얘기해요. 자연스러운 연기가 가장 좋은 연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노래를 아름답게 잘하는 것보다 감정적으로 솔직하고 풍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공인으로서 책임, 의무감을 갖고 후배한테 좋은 본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광대’ 남경주의 롱런에는 이유가 있었다. 관객의 고마움을 아는, 성실한 배우라는 사실이 그의 특별함이었다. 남경주는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 “가정과 내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죽을 때까지 무대에 서고 싶다. 배우는 정년이 없기 때문에 체력이 허락하는 날까지 무대에 서고 싶다”고 덧붙였다.
“나이가 들수록 책임감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아요. 어떻게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살까,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삶일까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독자분들도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함께 고민해보셨으면 좋겠어요. 행복은 내가 많이 갖는 게 아니라 남들을 웃게 만들고 나눌 때 더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1976년 연극 ‘하멸태자’로 데뷔 후 46년째 연기의 길을 걷고 있는 배우 남경읍. 그는 배우이기도 하지만 조승우, 황정민, 소유진, 오나라 등 4000여 명의 제자를 양성한 뮤지컬계 대스승이다. 그런 그가 공교롭게도 뮤지컬 ‘올드 위키드 송’에서 슬럼프에 빠진 천재 피아니스트를 가르치는 ‘요제프 마쉬칸’ 교수 역을 맡았다. 후배들이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빛을 함께 찾아주며 멘토가 되어주었던 그에게 이번 작품은 어떻게 다가올까. 또 이 자리에 서기까지의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했을까. 인생을 하나의 ‘슬럼프’라고 비유한 배우 남경읍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요제프 마쉬칸’은 어떤 인물인가?
마쉬칸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겪었던 홀로코스트의 트라우마를 감추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특유의 유쾌함과 웃음으로 그 아픔을 가리며 살아가는 인물이에요. 그래서 더욱 괴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죠. 하지만 ‘스티븐 호프만’을 만나고 사제 간 음악으로 하나가 되면서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기 시작합니다.
Q. 스승으로서 작품이 주는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제자들을 가르치다 보면 다양한 학생을 만나게 되는데요. 보이는 것이 전부인 학생이 있고, 지금은 재능이 보이지 않지만 숨겨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학생도 있어요. 좋은 선생은 그런 재능을 가진 학생을 찾아내고, 키워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또 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중요하죠. 많은 제자의 재능을 끌어내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경험이 도움되었습니다.
Q. 사제 간 교감을 극대화하는 넘버가 있다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슈만의 ‘시인의 사랑’은 숨은 열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메시지가 강한 곡이에요. 그중 마음이 가는 노래는 제1곡 ‘이 아름다운 5월에’입니다. 마쉬칸이 이 곡을 가르치면서 스티븐의 열정을 끌어내기 위해 하는 말이 있어요. “인생이란 건 언제나 그렇게 명확할 수만은 없는 거야. 이 안에 마음이라는 게 있어. 그걸 움직이라고!”
Q. 연기하며 와 닿았던 대사는?
마쉬칸의 대사 중 이런 말이 있어요. “비탄 속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비탄을 모르니 커다란 기쁨에 대해서 이해하지도 못하는 거야.” 그의 말처럼 항상 행복한 사람도, 슬럼프를 겪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아요. 누구에게든 슬럼프가 오지만, 그것을 극복할 때 행복하고 기쁘죠. 좋고 나쁜 일을 번갈아 겪다 보면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슬럼프이며 터널이지 않을까요?
Q. 슬럼프를 극복한 일화가 있다면?
힘든 시기에 겨울 산을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찬바람과 싸우는 나목의 황량한 모습이 그 당시 저와 참 비슷하다고 느꼈죠. 한참을 바라보다 문득 ’아! 다른 계절에는 나뭇잎 때문에 햇빛이 땅까지 비추지 못하지만, 잎이 다 떨어진 겨울 산은 햇빛이 오롯이 땅을 비추고, 그 덕에 땅속에서 수많은 광합성이 일어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제 현실이 겨울이라도 춥지만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죠.
Q. 관객에게 전하는 위로의 한 말씀
코로나19 또한 인생의 우여곡절, 리듬이라고 생각해요. 영원한 어둠은 없습니다. “기쁨과 슬픔의 결합. 이게 바로 핵심이야!“라는 마쉬칸의 대사처럼 지금은 큰 비탄을 겪고 있지만, 두 주인공처럼 커다란 기쁨을 이해할 날이 곧 오겠지요. 그 시간을 견디는 가운데 이 작품이 희망의 메시지가 되어주리라 생각해요.
뮤지컬 '올드 위키드 송'
일정 3월 1일까지
장소 예스24스테이지 3관 연출 우진하
출연 남경읍, 남명렬, 이재균, 정휘, 최우혁 등
배우 남경읍(59)의 경력을 보니 그가 처음 뮤지컬을 한 것은 이라는 작품으로,
어언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야말로 한국 뮤지컬 1세대라고 불리는 게 당연할 수밖에 없다. 그 후로도 그는 꾸준히 뮤지컬 활동을 하며 척박했던 뮤지컬 장르를 지금의 보편적 문화계로 올려놓는 데 기여했다. 또한 수많은 연극과 영화, 드라마에서의 활약으로 정통 연기자로서의 자신을 각인시킨 그는 얼마 전까지 연기를 가르치는 교육자로서의 삶도 살았다. 여러 사이클을 거쳐 앞으로의 10년을 위한 연기자로서 다시 현장에 선 그에게 삶과 사람에 대해 물어봤다.
기자가 배우 남경읍을 다시 만나게 된 건 6년 만이었다. 최고의 전성기는 딱히 없지만 늘 힘이 나는 그래서 변함없이 차분하고 믿음을 주는 인상을 가진 그는 깊은 가을과 어울리는 남자였다. 드라마와 영화 뮤지컬을 동시에 종횡무진 활동 중인 그는 활발한 외부 활동과는 별개로 얼마 전 큰 아픔이 있었다. 한 달여 전, 어머니를 하늘로 떠나보낸 것이다.
인생을 바꿔준 어머니의 말씀
“원래 제가 재수할 때 연극영화과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음대를 가려고 했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연기를 할 테면 해보라고 말씀하셨죠. 회상해보니 초등학교, 중학교 때 연극을 했었거든요. 중학교 때는 대본이란 말도 몰랐는데 강감찬, 을지문덕, 이순신 등 위인들을 소재로 막 대본을 썼어요. 그걸로 집에 세트를 만들어서 동네 아이들과 연습도 했고. 그때 문경읍에는 녹음기가 없어서 점촌까지 나가서 녹음기를 사서 녹음해서 연습했어요.”
그는 어머니가 ‘남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라고, 돈 벌려고 아등바등하는 건 남자답지 않다는 거였죠.”
1970년대의 보수적이고 고루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던 여자. 어머니의 그런 태도는 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항상 어머니께 감사해요. 그런데 동생인 남경주가 연기를 한다니까 어머니가 한 집안에 광대가 둘이나 있어도 되겠냐며 반대하시더라고요. 그때는 제가 설득했죠(웃음). 아들 둘을 배우로 만든 어머니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받기도 했어요.”
“남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많은 아쉬움이 있을 듯했다. 그래서 어머니 얘기를 해도 될까 걱정했다.
“어머니가 생선장사를 하시며 혼자 4남 1녀, 5남매를 키우셨어요. 약사이셨던 아버지께서 고등학교 2학년 때 부도를 맞아 집에 못 들어오시고 밖에서 사셨기 때문이었어요. 전국을 유랑하며 글을 쓰면서 사셨던 한량이었어요. 집에는 1년에 한두 번 오셨고, 겨우 하룻밤 주무시고 떠나셨죠. 그래서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어요.”
어찌 보면 어머니가 그에게 한 “남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는 말은 아버지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10여 년 전에 승천했다.
“아버지가 오시면 동생들이 아버지가 안 오셨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였어요. 우리를 잘 모르면서 간섭하는 아버지가 그저 불편하고 어색했으니까요.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제가 혼절할 정도로 난리를 쳤죠. 그런데 희한하게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이 안 났어요. 정말 신기했어요.”
어쩌면 그것은 어머니의 삶이 서러움과는 거리가 먼, 후회 없는 삶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형제 우애가 돈독해지는 것 같아요. 어머니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 아닐까 싶어요. 어머니는 아버지 고향인 경북 봉화에 묻혔어요. 아버지는 그동안 벽제에 있는 서울시립승화원에 계셨는데, 이번에 어머니와 합장했죠.”
소통하는 후배들과의 즐거운 만남
요즘 남경읍은 뮤지컬 에 열중하는 중이다. 루 월리스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오랜만의 뮤지컬 복귀작이기도 하다.
“뮤지컬은 8년 만에 하는 거예요. 매우 아끼는 후배 연출자가 출연을 요청해서 대본도 안 보고 하겠다고 했죠. 작은 역이라고 했는데, 진짜 작은 역이긴 하더라고(웃음).”
그러고 보니 그는 널리 알려진 이미지와는 달리 생각보다 작품이 적다. 작품을 신중하게 고르는 성향 때문이다.
“1년에 한 개나 두 개 정도 해요. 이번 는 워낙 탄탄한 원작에 음악과 연출이 너무 좋아요. 관객 반응도 상당히 좋아서 설 연휴 기간의 공연은 매진이었고. 배우들도 고무돼서 즐겁게 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는 에 함께 출연하는 후배 칭찬을 이어나갔다.
“카이가 아주 인간성이 좋고 정말 열정적이더군요. 깜짝 놀랐어요. 민우혁도 참 멋있는 후배고요. 박민성은 노래를 얼마나 잘하는지, 무대 뒤에서 아이비하고 저하고 입 벌리고 보게 돼요. 무서운 후배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무서운 후배들을 이길 생각 말고 뒤처지진 말자고 생각하죠(웃음).”
신이 내린 계시, “까불지 마라”
지금은 탄탄한 중견 배우로서 입지를 굳혔지만, 여전히 힘든 순간은 있다.
“공연할 때 내가 생각한 대로 표현 안 될 때가 너무 힘들어요. 나는 배우로서 자질이 없다고 자책하고 면박하기도 하고. 내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 날이 있었는데 그날 정말 많이 울었어요. 그런데 그걸 극복하기 위해 결국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받아들이려면 무한 반복하는 수밖에 없어요. 무식한 방법일 수는 있어도 내가 한 만큼 나오니까.”
그는 발레리나 강수진씨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의 예술세계는 끝이라고 말한 걸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위대한 것을 이룬 사람, 정말 대단한 예술가는 죽기 직전까지 반복해서 연습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가 신문을 며칠 치 모아서 서너 시간을 투자해 한 번에 읽는 편이거든요. 2000년 즈음에, 그렇게 신문을 읽다가 눈에 들어온 제목이 하나 있었어요. 80세 할아버지 피아니스트. 그분이 호로비츠였던가? 외국의 한 기자가 그가 연주를 쉬는 시간에 인터뷰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80세 피아니스트가 휴게실에서도 계속 연습을 하는 걸 보고 물어봐요. ‘그렇게 평생 피아노를 치셨는데 휴게실에서도 또 치십니까?’ 그러자 피아니스트가 말해요. ‘왜? 난 요즘도 조금씩 느는 것 같아.’ 그때 제가 한창 교만했던 때였어요. 그런데 그 글이 마치 신이 내린 계시 같았죠. 까불지 말라고.”
이미 날짜가 지난 신문들에서 하필 그 제목만 눈에 들어와서 그에게 큰 감명을 줬다는 것은 어찌 보면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그 순간 앞으로 평생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게 됐다.
“제자들에게도 말해요. ‘까불지 말라’고. 이 말이 저에겐 평생 갈 수 있는 심지가 된 셈이죠.”
같은 연기자로서 이해하는 딸
남경읍의 자녀는 외동딸 남유라 한 명이다. 그녀는 아버지와 같은 연기자의 길을 걷는 중이다.
“아직 메이저에서 활동하는 것은 아니에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더니 그렇게 됐죠. 아내는 무용인이라 이쪽 길이 힘든 걸 알아서 딸이 연기하는 걸 반대했는데, 난 힘들어도 얻는 게 있다고 생각해서 찬성했어요.”
아버지와 딸 사이는 돈독하다. 조언과 대화도 많이 하고, 자신이 연기한 걸 보라고 보여주기도 하며 이쪽 계통 얘기들과 인생에 관한 얘기 등등을 지겨울 정도로 한다고 한다. 어쩌면 부녀 사이를 넘어서 같은 연기자로서의 끈이 서로를 잘 통하게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싶다.
“동생(남경주)은 작품을 같이 할 때는 대들기도 해요(웃음). 그런데 뭐, 끝나면 다시 잘 어울리고. 술 한잔하자고 만나자 하면 만나서 한잔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보는 것 같네요.”
연출? 정치? 단칼에 거절한다
탄탄한 중견 배우인 그는 여러 연기 영역을 두루 거쳤다. 그에게 연출할 생각은 없는지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그는 바로 손사래를 치며 거부했다.
“내가 전문가가 아니에요. 우리는 감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니까. 저는 제 재능을 알기에 오로지 배우예요.”
그는 신뢰감을 주는 외모 덕분인지 유난히 정치하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항상 ‘노’다.
“단칼에 거절해요. 저는 장관도 국회의원도 못해요. 내가 나를 알기 때문에. 저는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이 일을 하면 즐거울 건가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돈은 아니에요. 그래서 돈을 못 모았지만(웃음). 하고 싶은 걸 하라는 어머니 말씀이 저에게 계속 남아 있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돈에 대한 생각은 안 해봤어요. 내가 하고 싶은 걸 정말 최선을 다해 하다 보면 그만한 대가가 오겠지 하는 생각이었죠.”
물론 돈에 대해선 내려놨다는 그 말을 지키면서 만들어진 현실적인 고통들도 있었다.
“쌀이 없어서 라면을 먹은 적은 이루 말할 수도 없고 어머님 생신날에 차비가 없어서 못 간 적도 있고…. 그런데 그것 또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배우는 경험이 많을수록 배역을 잘 소화하게 되니까요. 슬프고 괴로운 경험이라 할지라도 도움이 될 것이고, 마음 한쪽에는 지나간다고 생각하죠.”
명불허전 진짜배기
남경읍은 올해로 59세다. 그도 작품을 하면서 자신이 나이 들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힘이나 호흡 면에서 특히 그렇죠. 후배들과는 30년 차이가 나니까요. 비교하면 안 되지만 하게 되죠. 나도 한때는 체력 좋았지만 이제 환갑이라(웃음). 그런데 이순재, 신구 선생님은 80대이지만 활동하고 계시죠. 나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분들은 하늘이 내린 배우라고 봐요. 그래도 70대까지는 활동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에게 사람을 알아보는 덕목에 대해 묻자 ‘처음과 끝이 같으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앞서 말한 죽을 때까지 연습하는 예술가와 같은 관점에서의 말이었다.
“사람이 위치에 따라 달라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초심을 쉽게 잃죠.”
그렇다면 그는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 걸까 궁금해졌다. 이미 베테랑 배우에게 묻기에는 어색할 수도 있는 궁금증이었지만, 그만큼 그에게서 나오는 기운이 젊고 열정적이기 때문이었다.
“좋은 배우로 남고 싶죠. 그럼 좋은 배우가 뭐냐. 대본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캐릭터 역을 최대한 치밀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배우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디테일하고 완벽한 준비가 필요해요. 전쟁에서 쓸 총알을 만드는 일과 같죠. 그러다 보니 너무 바빠요. 그런데 그게 나의 취미이고 생활이자 특기, 원동력인 것 같아요.”
‘58년 개띠’란 말은 아주 오래전부터 유행처럼 쓰였던 말이다. 같은 개띠인 1982년생은 ‘82년생’이라고 할 뿐 ‘개띠’를 강조한 적은 없다. 그러나 1958년생은 다르다. 늘 개띠가 따라붙는다. 왜 유독 58년생의 띠만 유별나게 불렀을까. 1958년생은 어디서나 튄다. 숫자가 많고 삶의 스펙트럼도 워낙 넓다 보니, 어디에 가든 한두 명씩 만나게 되는 게 바로 58년 개띠다. 그래서 우연히 만나서 나이를 물어보면 ‘저도 58년 개띠예요’라고 할 만큼 흔하게 볼 수 있는 세대들끼리의 진한 소속감을 느꼈기 때문 아닐까.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지분을 가진 세대들로서, 세상을 향해 짖는 그들이 가진 감성의 이유를 들여다본다.
어떻게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중간’이 되었는가
“어디를 가나 사람에 치이는 일은 우리들이 태어날 때부터의 숙명이었다”
1958년 생 동갑내기 4인의 삶의 질곡을 그린 은희경의 장편소설 127페이지에 등장하는 이 대사는 58년 개띠가 겪어야 할 이야기들을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다. 사람에 치여 살아야 하는 삶, 그것은 그들이 대학교에 입학했던 1977년도 대입 시험이 인구학자들의 예견대로 광복 이후 최다 학생들이 응시해 역대 최고의 경쟁률을 나타냈던 지표로도 증명된다.
모든 제도의 테스트는 58년 개띠부터였다는 말이 있다. 하라면 해야 했다. 콩나물 교실, 본고사가 면제된 첫 ‘뺑뺑이’ 세대, 고교평준화제도, 경쟁자로 가득했던 77학번, 국민교육헌장, 10월 유신, 긴급조치, 교련실기대회, 올드팝, 이소룡, 임예진 등이 58년 개띠들이 겪은 시대를 읽는 문화 코드다.
학교도 회사도 최고 경쟁률
58년들은 본성이 모험보다는 부지런히 일해서 먹고 사는 기질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근면성과 과정을 중요시하므로 원칙주의자라는 소리는 듣지만, 주변의 신뢰도가 높아 두둑한 성과를 이루게 됐다.
혹자들은 58년을 너무 앞서가지도 보수적이지도 않은 세대라고 했다.
사이먼앤가펑클, 양희은, 김민기의 노래를 듣고 공부하며 10대 시절을 보낸 이들은 자연스럽게 과거 세대의 문화를 유지하는 한편, 과거에 대한 반항으로서 정착된 포크와 블루스 문화를 습득할 수 있었다. 가장 감수성이 강했을 때에 이미 양편의 문화를 접하며 이중적 경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20대로 들어서면서 더욱 격렬해진 민주화의 열풍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취임을 통해 극단적인 양편의 교차를 보여주게 된다. 잠시동안 있었던 민주화에 대한 희망은 금세 꺾이고 20대를 맞이한 58년 개띠들을 벼락처럼 내리친 건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이었다. 그 와중에 어떤 이들은 민주화 투사를 선택하여 화염병을 던지고 어떤 이들은 진압군이 되어 거리에서 친구의 머리에 곤봉을 내리쳐야 했다. 58년 개띠의 정치적 허무감, 혹은 조심스러운 중도로서의 포지션은 이때 결정적으로 마련되지 않았을까.
제2의 인생을 마주하게 된 가장 커다란 세력
민주화로 인한 경제 호황이 시작된 90년대는 이들이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수도권 개발, 신도시들이 마련되기 시작했고, 58년 개띠들은 40대로 들어가면서 완연히 사회의 중심이 됐다. 그러나 그들이 중역으로 점프하는 시점에 IMF체제가 닥쳐왔다. 그들의 코앞에 놓여 있던 평생직장의 꿈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중산층의 중심이 됐어야 할 58년 개띠들은 중산층의 씨를 말리는 가혹한 구조조정 속에서 가족과 함께 죽음과 파멸에몰리거나 가족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남아야 했다.
전병헌, 추미애, 정병국, 전하진, 김부겸, 심재철, 이정현, 한선교 등 국회의원들이 있고 주병진, 임백천, 신문선 등 방송인과 홍서범, 남경읍, 장미희, 이동준, 강남길 등 연예인이 있다. 미래에셋 그룹 박현주 회장, 표현명 KT렌탈 사장, 정미홍 J&A 대표이사, 강대석 신한금융투자 사장, 신제윤 금융위원회 위원장, 김주원 한국투자금융지주 사장, 김석중 현대인베스트먼트자산운용 사장, 하태형 현대경제연구원 원장, 김기남 삼성전자 DS부문 반도체총괄 사장 등 기업인이 많은 편이다.
지독한 혼돈의 시대를 거쳐 2015년, 어느덧 58년 개띠들은 사회적 은퇴, 그리고 제2의 인생을 바라볼 시점이 됐다. 살아오는 동안 겪어야 했던 온갖 변화는 그들에게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체화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인구수는 그들에게 우리나라에서 흔치않은 ‘중도세력’으로서의 분명한 성격을 부여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제2의 인생 앞에 선 이들이 펼쳐 보일 행복한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