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걸음은 거침없었다. 원숙미 넘치는 이들의 워킹은 패션 신진들이 세상에 내놓은 참신한 의상들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지난 17일 크래프트72에서 열린 동덕여자대학교 패션디자인학과 2022년 졸업패션쇼에선 행사 도중 조금 색다른 모델들이 눈에 띄었다. 바로 박지영, 진태리, 김보민, 신비, 권수희, 박영애, 이에스더, 김도진 등 8명의 시니어 모델들이다.
동덕여대 패션쇼는 4년제 대학 중 국내 최대 규모의 졸업 패션쇼로 유명하다. 과거 제이에스티나나 메트로시티와 같은 유명 브랜드와 콜라보를 했을 정도로 대중적인 인지도도 갖췄다. 이 행사에 시니어 모델이 참여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학교 측은 “베이비붐 세대들이 패션업계의 소비자로 떠오르면서, 이들을 고려한 의상 디자인을 교육 과정에 반영 중”이라고 말하고, “중장년 체형을 고려한 시니어 모델의 기용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설명했다.
이번 쇼를 위해 학교 측은 지난 3월 시니어 모델 선발을 위한 오디션을 진행했다. 이 경쟁에 참여한 지원자는 300여 명에 달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런웨이에 선 시니어 모델들은 약 40여 명의 전문 모델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현장에서 이들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프로에 버금가는 몸 관리와 태도, 연기 등은 관객들로부터 찬사를 끌어냈다.
이번 행사가 더욱 특별했던 것은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처음 진행된 오프라인 패션쇼라는 점. 실제로 이날 행사에는 약 2000여 명의 관람 인파가 몰려, 행사의 주목도를 실감케 했다.
행사를 기획‧연출한 아시아시니어모델협회 주윤 회장은 “코로나19 대유행 이후에 오랜만에 현장이 줄 수 있는 패션쇼의 감동을 전할 수 있어 감사했다”며 “시니어모델들이 프로와의 실력차를 줄이기 위해 워킹의 보폭이나 속도 등 많은 부분에서 맹연습을 한 것이 결실을 맺은 것 같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는 또 “해외 브랜드들도 컬렉션에서 시니어 모델을 꼭 참가 시킬만큼 패션 업계에서 시니어 파워는 성장하고 있고, 패션이라는 하나의 언어로 세대의 장벽을 허물어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동덕여대 패션디자인과 졸업작품전을 위한 시니어 모델 공개오디션이 23일 동덕여자대학교 디자인연구센터에서 진행됐다.
이번 공개오디션은 5월 17일 크레스트72에서 개최되는 동덕여대 패션디자인과 졸업작품전을 위한 것이다. 동덕여대 패션디자인학과는 패션 업계에서 많은 인재 배출로 주목받는 교육기관 중 하나로, 이들의 졸업패션쇼에는 프로 모델이나 연예인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정도로 전통과 권위를 자랑한다. 지난해에는 국내 대학 최초로 유튜브 채널을 통한 온라인 쇼로 진행되기도 했고, 김명애 총장이 직접 모델로 나서 화제가 됐었다.
이 대학에서 시니어 모델을 졸업작품 패션쇼에 기용하는 것은 올해로 3번째다. 시니어 모델을 학생들의 졸업패션쇼에 기용하는 것은 대학 측의 중‧장년 의상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학과 관계자는 “중‧장년을 위한 의상은 소비자의 체형 등을 고려해 시니어 모델을 기용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베이비부머들이 패션업계의 주요 소비자로 주목받으면서, 이들의 수요를 만족시킬만한 의상 디자인을 공급하기 위해 교육 과정에도 반영 중”이라고 말했다.
이번 오디션에는 약 300여 명의 시니어 모델이 몰려 높은 경쟁을 보였다. 이 중 약 50여 명의 예선 통과자가 이날 오디션에 참가했다. 동덕여대 측은 8명의 시니어 모델을 선발해 약 40여 명의 다른 프로 모델과 함께 오는 5월에 개최되는 졸업패션쇼의 런웨이에 세운다는 계획이다.
행사를 기획‧연출한 아시아시니어모델협회 주윤 회장은 “최신 많은 시니어 모델이 배출되는 것에 반해 설 무대가 없어, 시니어 모델 선발대회에서 참가비를 요구하거나, 의상 구매를 강요하는 등 부작용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번 오디션과 같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진행되는 다양한 행사를 준비해, 많은 시니어 모델이 설 수 있는 여러 무대를 마련하고 싶다”고 밝혔다.
2030세대는 모든 게 빠르다. 자고 일어나면 유행이 바뀌어 있고, 며칠 전 신나게 쓰던 신조어는 한물간 취급을 한다. 좁히려 해도 좁혀지지 않는 세대 차이,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20대 자녀, 혹은 회사의 막내 직원과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시니어를 위해 알다가도 모를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최신 문화를 파헤치고,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소개한다.
“이 특별 구성, 오늘만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구매를 서두르세요!” TV 홈쇼핑에서 한 번쯤 들어본 듯한 익숙한 멘트다. 하지만 TV가 아니다. 웬걸,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다.
지금은 ‘라방’ 전성시대
최근 라이브 커머스 열풍이 거세다. 라이브 커머스는 인터넷이나 모바일 플랫폼을 통해 실시간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스트리밍 방송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를 덮치기 전까지만 해도 라이브 커머스 경쟁은 지금처럼 치열하지 않았다. 그러나 갑자기 불어닥친 비대면 트렌드는 오프라인 소비를 위축시켰고, 유통업계는 너나 할 것 없이 ‘라방’(라이브 방송)에 뛰어들었다. 현재 티몬·쿠팡·11번가 등 이커머스 업계 대부분이 자체 라이브 채널을 운영 중이며, 롯데·CJ·현대·신세계 등 전통 유통 강자들도 관련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3조 원가량으로 추정되던 라이브 커머스 시장이 2023년 8조 원 규모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퍼스널 쇼퍼처럼 친근하게
기사를 위해 며칠간 인기 라이브 커머스 플랫폼을 들락거리며 아이쇼핑을 즐겼다. 네이버쇼핑라이브를 접속하자 동시 시청자 수가 1000여 명부터 많게는 20만 명에 달하는 채널이 즐비했다. 다양한 채널 중 관심 있는 의류 방송을 누르자 모바일에 최적화된 세로 화면이 나타나며 진행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궁금한 점 댓글로 마구 남겨주세요!”
라이브 커머스의 두드러진 특징은 쌍방향 소통이다. 홈쇼핑을 보다 보면 상품이 마음에 들어도 몇 가지 의문점 때문에 구매가 망설여지는 경우가 있다. 반면 라이브 커머스는 화면 하단에 위치한 채팅창으로 궁금한 점을 즉시 해소할 수 있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요청 사항도 들어준다. 실제로 의류 방송을 시청하는 도중 판매하는 블라우스가 청바지와 어울릴까 싶어 댓글을 남겼더니 불과 몇 초 안에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청바지와 매치한 모습이 궁금하시다고요? 제가 한번 입고 와보겠습니다.”
이처럼 라이브 방송은 대부분 자연스럽고 격 없는 분위기로 흘러간다. 그러나 친근함과는 별개로 상품을 구석구석 뜯어보고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허술하지 않다. 또 채팅창 아래 제품의 구매 링크가 띄워져 있어 방송을 시청하며 결제까지 가능하다. 진행자가 이 모든 과정을 안내해주니 마치 퍼스널 쇼퍼와 원격으로 쇼핑하는 듯한 기분도 든다.
쌍방향 소통의 특성상 각종 ‘애드리브’가 난무할 때도 있지만, MZ세대는 이 또한 유쾌한 콘텐츠로 여긴다. 이에 단순 정보성을 넘어 예능 포맷을 접목한 오락형 방송도 늘어나는 추세다.
시니어 ‘큰손’ 가능성 ↑
라이브 커머스가 젊은 세대의 이색 놀이 문화로 부상하면서 대부분의 플랫폼이 MZ세대를 겨냥하고 있지만,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시니어가 라이브 커머스 시장의 큰손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롯데홈쇼핑이 지난해 라이브 방송 시청자의 연령대를 분석한 결과 40~60대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며, 주로 대형 가전이나 명품 의류 등 비교적 고가의 상품을 구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롯데홈쇼핑 관계자는 “안정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SNS를 활발히 이용하는 중장년층이 늘어남에 따라 이들을 위한 상품과 콘텐츠를 선보여 고객층을 확대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시니어 전용 라이브 채널이 형성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김익성 한국유통학회 명예회장 겸 동덕여대 교수는 “모바일에 대한 거부감이 적고 판매자와 직접 소통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시니어에게 라이브 커머스는 효과적인 플랫폼이 될 수 있다”며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가 제품을 홍보하는 등 시니어의 니즈에 맞는 콘텐츠가 제작된다면 새로운 소비 시장이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라이브 커머스의 세계로 빠져볼까?
네이버쇼핑라이브 검색이라는 막강한 플랫폼을 기반으로 시장의 선두주자를 달리고 있다. 네이버 스마트스토어에 입점된 업체라면 누구나 방송을 할 수 있어 품목이 다양하고 빈도가 잦다. 접속 방법 네이버 모바일 앱 →‘네이버쇼핑’ 탭 →‘쇼핑LIVE’ 탭
카카오쇼핑라이브 네이버가 골라 먹는 뷔페라면 카카오는 코스 요리 같다. 하루 1~2회 정해진 시간에만 방송하지만, 명품 또는 유명 브랜드와의 협업으로 시청자를 효과적으로 끌어모은다. 접속 방법 카카오톡 앱 → ‘쇼핑하기’ 탭 →‘라이브’ 탭
라이브11 11번가는 쇼핑과 예능을 결합한 콘텐츠로 승부수를 던졌다. 오프라인 매장 습격 방송 ‘털업’, 신상 리뷰 방송 ‘찐텐 리뷰’, 제철 특산물 먹방 ‘생쑈’ 등 재미를 더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다. 접속 방법 11번가 앱 → ‘라이브방송’ 탭
배민쇼핑라이브 국내 1위 배달 앱 배달의민족도 최근 라방에 뛰어들었다. 각 지역 배달 맛집 소개, 레시피 전수, 먹방 등 다양한 푸드 콘텐츠로 이용자와의 접점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접속 방법 배달의민족 앱 → ‘생생하게 맛있는 쇼핑라이브’ 탭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첫 구절만 들어도 바로 떠오르는 ‘나성에 가면’이라는 노래를 부른 세샘트리오. 그 세샘트리오의 보컬이었던 권성희(66) 씨는 누구나 기억하는 노래의 주인공인데도 그 삶에 대해선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외부에 자신을 드러내는 걸 꺼리는 성격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에 자주 보이지 않아도 그녀는 가수로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연예인 자원봉사단체인 한마음회 회장, 건강보험공단 홍보대사, CEO클럽 회장까지 맡으며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활발한 사회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올해로 데뷔 45년을 맞이한 그녀의 남다른 소회를 들어봤다.
“권성희라는 사람은 멋있는 가수였다고 기억되고 싶어요. 그래서인지 가정사를 많이 오픈하지 않고 살았죠. 예능에 나와달라는 연락은 많이 받았는데, 남편도 오픈하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방송에 나와도 재미없을 거라고 해요.(웃음)”
권성희 씨의 남편은 배우 박병훈 씨. MBC 공채 탤런트 8기 출신으로 ‘제5공화국’, ‘연개소문’ 등의 드라마에 출연한 중견 배우다. 두 사람은 1985년에 결혼했다. 아내가 서른두 살, 한 살 연하였던 남편은 서른한 살이었다.
“남편과는 친구 소개로 만나 연애를 해서 결혼했어요. 착하고 성실해 보여서. 그리고 당시에는 제 나이 서른이 넘으니까 주변에 총각이 없더라고요.(웃음)”
결혼하기 전까지는 연하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결혼을 한 후에야 남편 주민등록증을 보고 나이를 알았다고 하니, 남편이 연하인지도 모른 채 결혼한 셈이다.
“요즘처럼 SNS도 없었고, 방송하고 연습하고 야간 무대 하고 집에 오는 바쁜 생활이었으니 제가 인기 있는 줄도 몰랐어요. 나중에 솔로로 나오고 팬들도 만나니 그때 체감되더군요. 그래서 쉬고 싶다는 생각에 결혼한 것도 있었죠.”
성악가를 꿈꾸던 소녀, 대중 가수가 되다
소녀 권성희는 마리아 칼라스 같은 프리마돈나가 되겠다고 다짐한 성악 꿈나무였다. 하지만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일까. 합격하리라 자신했던 연세대 입시에서 낙방했다. 친구들과 부모님 볼 낯이 없어서 그대로 잠수를 탔다. 그러다 생각을 고쳐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후기 동덕여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낙방의 아픔이 흉터처럼 남은 탓인지, 막상 대학 생활을 해도 학업에 열중하기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 방송국의 아는 분들에게서 프로그램에 나와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죠. 그래서 방송을 ‘살랑살랑’ 했어요. 그런데 방송을 알게 되니 재밌더라고요. 성악을 했지만 현미 씨나 패티김 씨 노래를 즐겨 부르기도 했고요. 저쪽으로 가볼까 하는 마음이 생겼죠.”
대학교 2학년 때부터는 야간 무대에 서게 됐다. 당시 가수들의 야간 무대는 지금과 달리 자연스러운 무대 활동이었다. 성악을 기본으로 한 탄탄한 가창력으로 주로 스탠더드 팝과 패티김 노래를 부르는 그녀를 찾는 무대가 점점 늘어났다.
“수입이 좋았죠. 월급쟁이가 3만~4만 원 받던 시절에 하루 4만~5만 원을 벌었으니까요. 어느 무대에서는 10만 원, 15만 원을 받기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한 달에 몇 백만 원씩 벌었죠. 아직 무명이었는데도요. 그때 연예계가 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라틴 대중가요, 세샘트리오 결성
야간 무대에서 활동하던 그녀는 경희대 성악과 출신의 전항 씨를 알게 된다.
“‘너나 나나 클래식을 했던 사람인데 뭔가 팝이면서도 고급스러운 음악을 불러보자’면서 라틴 음악을 제안하셨죠. 들어보니 멋지더라고요. 그리고 그분이 기타를 잘 치던 홍신복 씨를 섭외했어요. 그렇게 셋이 같이 로스 판초스 같은 혼성 트리오를 결성하기로 해서 만들어진 게 세샘트리오였어요.”
그러나 라틴 음악은 세샘트리오 자신들에게도 새로운 음악이었다. 3개월 동안 매일 아침 만나서 연습을 해야 했다. 저녁이 되면 야간 무대에 섰다. 그러면서 레퍼토리를 늘리고 계속 공부했다.
“카바사, 마라카스, 탬버린 등 라틴 악기들도 다루기 시작했죠. 노래 연습보다 그게 더 힘들었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익숙해지니 그게 없으면 노래가 안 되더라고요.(웃음)”
결성 1년 만에 길옥윤 씨가 작곡한 ‘나성에 가면’이 나왔다. 보사노바 장르로 당시 대중가요에선 없던 노래였다. 그러나 엄혹한 시대를 밝히는 밝은 분위기의 노래였던 덕분일까, 홍보를 거의 안 했는데도 대박을 쳤다.
“바쁘니까 제가 스타인 줄도 몰랐는데 어느 날엔가 되어 있더라고요. 1978년부터 1983년까지 세샘트리오의 전성기였죠. 일도 많이 하고 미국 공연도 하고. 그렇게 잘나가다가 남자 멤버들이 외국으로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해체되었어요.”
사회는 모두가 어우러져 살아야
세샘트리오 이후 솔로 활동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권성희의 삶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한국연예인협회 한마음회에서의 일도 그것이다. 한마음회는 연예인 자원봉사단체로 1981년에 설립되어 2000년에 사단법인이 되었고, 벌써 40여 년이나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오랜 역사를 지닌 단체다. 권성희 씨는 2009년부터 회장직을 맡아 다양한 봉사활동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작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비대면으로 활동했죠. 장충체육관에서 4000~5000명씩 모셔서 하는 행사는 어려우니 올해는 찾아가는 봉사를 계획하고 있어요. 4월부터 각 구청의 노인복지과와 연계해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녀는 시간적·재정적 여유가 있으면 봉사는 누구나 해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다.
“사회란 모두가 어우러져야지 누구는 너무 잘 살고 누구는 너무 못 살면 안 되잖아요. 우리가 받은 것을 조금이나마 되돌려준다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어요. 그분들 덕에 우리 일도 유지되는 거니까요. 한마음회 사람들이라면 모두 그런 생각으로 일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통합되어 있기에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있었겠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
여전히 이어지는 코로나19 상황은 조금 나아지나 싶다가도 집단감염이 거듭 발생함에 따라 위기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권성희 씨는 이런 어두운 시절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회의적으로 생각할 때도 있었죠. 바쁘게 살 때는 행복이 뭔지 모른 채 살았고, 지금은 나른함과 좌절감이 함께 오는 시기죠. 그러나 그런 중에도 행복은 있다고 봐요. 작은 데서 행복을 찾게 되고요.”
그녀는 요즘 시간 여유가 있으니 강아지를 데리고 집 앞을 산책한다. 강아지에게 정이 들어보기만 해도 힐링이 된다고. 처음에는 지금의 언택트 상황이 힘들었지만, 이제는 힘든 와중에도 자신이 행복을 느끼는 포인트를 찾아야 한다는 게 그녀의 말이다.
“사실 외로움은 못 느끼고 살죠. 가정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별로 없으니까요. 그런데다 저는 주부면서 사회생활도 하기 때문에…. 여자는 자신을 갖춰야 할 필요가 있어서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그런데 남자들은 그게 안 되나 봐요. 코로나19 이전에는 외부 활동을 많이 해서 그런 걸 못 느꼈는데, 집 안에서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니 완전히 ‘삼식이’들이 됐어요. 그리고 저는 집에 오면 도우미 아줌마가 되죠.(웃음)”
봉사를 넘어 진짜 나눔 펼쳐
뭐든지 열심히 하는 모범생 스타일이라서 그런지 그녀는 올해 9년째 국민건강보험공단 홍보대사를 맡고 있기도 하다.
“홍보대사를 맡으며 각 지역 지사의 행사에 참여하는데 굉장히 보람 있어요. 전국을 다녀보면 재밌게 사는 어르신들이 많아요, 그리고 서울보다 서울 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되레 건강하고 음악을 즐기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걸 보면서 백 원을 가져서 행복한 사람이 있고 백 원을 가져서 불행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가 떠오르더군요. 욕심 없이 살면 오래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지 않을까…. 코로나19도 그렇죠. 마이너스만 된 게 아니라 인생을 성찰하는 시간을 준 거라고 생각해요. 내려놓는 시간으로 말이죠.”
한마음회 회장, 국민건강보험공단 홍보대사와 함께 그녀는 MBC리더스포럼의 CEO클럽에서 회장직도 맡고 있다.
“사람들이 뭘 계속 시켜요.(웃음) 사람 한명 한명이 참 좋아서 애착이 많고, 배울 점도 많은 모임이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은 중요해요. 그래서 사람은 가정에만 있어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톱스타였던 연예인이 막상 일을 그만두거나 인기가 떨어지면 외로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동안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막상 뭘 하려고 하면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렇게 안 되려면 끊임없이 사람 관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해요.”
그녀는 돈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건강하고 행복하게 더불어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과 만나서 무슨 이득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사람 관계를 이어가기 어렵죠.”
중년 부부의 솔직한 관계
그녀는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아이를 가졌을 때, 그리고 잠정 은퇴를 했을 때라고 말한다.
“우리 때는 야간 무대 도는 게 당연했어요. 그래서 하긴 하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이제는 야간 무대에서 노래하기 싫으니 쉬어야겠다, 50 먹으면 안 하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래서 쉰 살이 되었을 때 3년 정도 쉬었죠. 정말 행복했어요. 그런데 3년 정도 지나니 지루해지더라고요. 어느 순간 ‘내가 뭐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속에선 항상 연예계가 그리웠던 거죠. 그래서 앨범을 내고 다시 가수 활동을 시작했어요. 그걸 보면 가정이 있기 때문에 항상 안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혼자였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기도 해요.”
그녀에게 부부란 확고한 동반자다. 서로 아플 때 챙겨줄 수 있는 존재다.
“나이 들면 기저질환이 생기잖아요. 부부라면 그런 걸 서로 챙겨줘야 하죠. 혼자 사는 사람이 가장 서러울 때가 아플 때라고 하잖아요. 부부는 옆에 동반자가 있으니까 그보다 낫죠.”
그래서 그녀는 요즘 유행하는 졸혼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건 이혼이나 마찬가진데, 누가 아이디어를 냈는지 모르겠지만 이상한 관계예요. 불합리해 보이고 나중에는 사라질 거 같네요.”
물론 부부 생활에서 갈등이 없는 부부란 있을 수 없다. 그녀 또한 안 좋았던 시기도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걸 잘 넘어간 이유는 제 덕분인 거 같아요. 그런 상황이 되면 지고 들어갔거든요. 뭐 내가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 거 같은데.(웃음) 그리고 평소에 성질을 안 부리던 사람이 성질을 벌컥 내면 싸우지 않는 게 맞잖아요. 물론 정말로 싫었다면 헤어졌겠죠. 하지만 그보다 좋은 부분이 많기 때문에 상쇄가 됐어요.”
서로 기 싸움하지 말고 내려놔야 한다. 그녀가 말하는 부부 관계의 해법이다.
“남편의 교통사고도 있었고, 모은 돈을 날리기도 했고, 아이 입시 문제도 그렇고.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데 그때는 잠 못 자고 엎치락뒤치락했죠. 이제는 뭐든 잘되겠지 하는 마인드로 살아가요.”
그녀는 요즘 재즈를 배우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생활에 치여 못 했던 도전이지만 예순이 넘어 드디어 하게 되면서 자신이 가수로서 나태하게 산 게 아닌가 반성했다고도 한다. 그 말을 들으니 주부로서의 권성희, 사회인으로서의 권성희도 소중하지만, 그녀가 가장 자신 있고 가장 영향을 받는 영역은 역시 가수로서가 아닐까 싶다. 그녀의 방식대로 온전하게 자신에게 집중하며 새로운 즐거움을 실행하는 시간, 그 모든 과정이 인생의 축복이고 봄 햇살처럼 찬란하다.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현재와 호흡하는 그녀의 열정과 삶이 담긴 재즈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본다.
한국 포크 블루스의 살아 있는 전설, 이정선의 음악 인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에게 오랜 활동의 원동력을 물으니 “다른 걸 할 줄 모르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렇게 그는 거의 모든 질문에 무심하고도 간단하게 답한다. 자신의 음악적 삶에 대해서조차도 “그냥 오래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1974년에 데뷔한 이후 그가 대중음악사에서 이룬 것들은 그저 오래해서 쌓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의 간결한 소리가 만드는 묵직한 삶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억지로 갖다 붙이지 마요. 살면서 여러 길로 가다가 중간중간 우연히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는 거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겠다 해서 그렇게 사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이정선은 꾸며서 말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 모습은 마치 그의 노래 가사와도 같다. 그의 노래 가사들은 짤막한 단어들로 감성을 톡톡 건드려준다.
흘러가는 대로 구르는 대로
부딪히는 대로 밀리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구르는 대로
부딪히는 대로 밀리는 대로
우리네 인생살이 그렇게 가는 게지
그러다가 가끔 욕심이 나면
하고 싶은 일도 너무 많지만
그러다가 가끔 욕심이 나면
하고 싶은 일도 너무 많지만
산마루 구름처럼 쉬면서 가는 게지
그가 김현식에게 준 노래 ‘우리네 인생’의 가사다. 이 노래는 ‘인생은 그저 흘러가는 것’임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그 마음과 기타만 있으면 그 외에는 필요 없다는 듯이.
블루스 거장의 도피(?) 시절
“원래 꿈은 많았죠. 노래를 해야지 했던 건 한 1972년쯤에 생각했나. 제대 후에 돈을 잠깐 벌어야겠다 싶었죠. 왜냐하면 기타는 그 전부터 치고 있었으니까. 그때 막 기타 붐이 일었을 때였거든. 학비 정도는 벌지 않을까 했어요.”
이정선답다고나 할까, 찬란하고 눈부신 시작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산 기타로 기타를 접한 그에게 음악인으로서의 삶은 그저 생활의 연장으로서 부여됐을 뿐이다. 그 후 12장의 솔로 앨범과 신촌블루스 1, 2집, 해바라기 3집 등 가요사에 남는 명반들을 만들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포크 블루스의 거장으로 불리게 됐다.
“예전에는 곡을 만들고 여러 사람 주면, 그중에 그들이 안 부르는 노래가 생기잖아요. 그걸 제가 불렀어요. 그러다 보니 안 팔리는 노래만 불렀죠. 그런데 그 자체를 제가 즐기고 있는지도 몰라요. 저는 운이 좋게도 군대 제대 후 세상을 볼 수 있는 나이에 음악을 시작했어요. 친구가 음악을 하면서 스타가 되자 변질되거나 달라지는 것도 봤고…. 그런 여러 가지 과정들을 보며 저렇게는 안 사는 게 내 성격에 맞겠다 해서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도 있었죠.”
음악을 하다 보면 알려져야 하는 순간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정선은 “알려지기 싫어서” 그걸 피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도망갔다.
소극장 공연의 내밀한 즐거움
“위로 올라가기가 너무 싫었어요. 내가 가진 것 이상으로 평가받는 게 싫었던 거죠. 요즘은 그게 더 심해지는 게, 그것이 원하지 않더라도 사람의 이미지가 자꾸 확대가 되잖아요.”
스마트폰으로 모두가 미디어를 갖게 된 시대, 별것도 아닌 일이 인터넷을 수천 수만 번 떠돌면서 비대해지는 광경을 우리는 자주 접하고 있다. 되려 그렇게 되고 싶어서 부추기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이정선은 체질적으로 그런 것들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이다. 큰 공연은 안 하면서 소극장 공연만 3년째 꾸준히 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밴드가 7명인데, 처음 시작할 때 관객은 10명이었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관객 40~50명, 많아야 100명을 넘지 않는 공연을 계속하고 있다.
“큰 공연장을 가면 저도 과장을 해요. 오버하는 거죠. 필요 이상으로 잘하려 하고. 그런데 작은 데에선 관객과 얘기하듯 공연을 하죠. 음정이 틀려도 되고. 그대로 보여줄 수 있어서 편안합니다.”
소극장 공연의 즐거움은 아는 사람만 안다. 다분히 인간적인 감성으로 노래하는 가수와 공유하는, 그 작은 세계가 만들어지는 분위기는 다른 사람이 알 수 없기에 더 소중하다. 그가 고수하는 내밀한 세계는 확실히 대형 공연장의 요란함보다는 소극장에 더 어울릴 수밖에 없다. 쉽고 간결한 연주와 가사를 통해 삶의 냄새가 폴폴 느껴지는 편안한 소리가 이정선 노래다.
“밴드 멤버들에게 미안하죠. 제일 오래한 친구가 20년 됐고, 그 외에 지금 있는 친구들은 수입이 별로 없어도 음악이 좋아서 활동하는 친구들이에요. 멤버들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못 치는 음악은 기타를 안 잡는다
장인 같은 음악인 이정선. 그의 다른 모습으로는 교육인 이정선이 있다. 많은 사람이 그가 만든 기타 바이블 ‘이정선 기타교실’을 기억할 것이다. 처음 기타를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거쳐 가는, 말 그대로 교본이었던 책이다. 그는 1989년부터 대학 강의를 시작해 동덕여대에서 실용음악과 교수로 16년 재직하고 2016년 정년퇴임했다. 과묵하다 못해 하도 리액션이 없어 방송 PD들에게 기피 대상이었다던 그는 학교에 가서 자신이 좀 변했다고 했다.
“말이 많아졌죠. 짜식들이 말을 못 알아들어서.(웃음)”
그렇게 입게 된 옷이 꽤 맞았는지, 공연예술대학 학장까지 지냈다.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며 살았어요. 책 쓰고 가르치면서 음악을 했죠. 순간순간 해야 할 일은 그 자리에서 했죠. 그리고 이 일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전혀 다른 일에서 푸는 법을 알게 됐죠. 덕분에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서도 참 편하게 지냈어요.”
그러고 보면 그에게 있어 음악은 생활의 연장으로서 자연스럽게 이어져 온 것 같다. 덤덤하고 까다로워 보이지만 삶과 생활에 자연스러운 흐름이 생기면 그것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또한 이정선다운 것 아닐까.
“창작하는 사람들은 가슴속에 샘이 있는 거예요. 물방울이 하나씩 모이다가 넘치면 작품이 돼. 한결같이 물방울이 모이진 않으니까요. 하룻밤에 모일 때도 있고 몇 년 걸릴 때도 있고. 샘이 고갈되다가도 하룻밤에 넘쳐서 1시간 만에 뚝딱 하고 작품이 터질 때가 있지.”
음악에는 큰 힘이 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이정선은 치열한 경쟁이나 승부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엊그제 공연을 갔는데, ‘아이고, 외계인들 아냐?’ 싶더라고요. 너무 잘하니까. 옛날 같으면 다른 사람이 그렇게 잘하는 걸 보면 밤새 기타를 치기도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잘하는 놈은 잘하는 거고, 나는 내 음악 하면 되는 거다 합니다. 사실 젊었을 때도 좀 따로 놀았어요. 잘들 한다 그러면서.(웃음)”
요즘은 전 세계가 케이팝 열풍이라고 한다. 아무리 노래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9시 뉴스를 틀면 방탄소년단 소식을 듣게 된다. 한국 가요가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는 장면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래서인지 가요계에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가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수많은 가수, 특히 아이돌은 치열한 경쟁과 자본의 논리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처지들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궁금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밖에는 설명이 안 돼요. 음악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관이 달라진 거죠. 요즘 아이들이 음악을 하는 건 돈이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더 크게 지르고 더 크게 벌고. 예전에는 안 그랬던 사람이 더 많았죠. 노래를 좋아하다 보니 어느 날 먹고살게 되더라, 그런 분위기였어요. 지금은 노래를 돈 버는 수단으로만 생각하니…. 처음에는 안타깝다가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으니 어쩔 수 없다, 기준이 달라졌다고 봐요. 그래서 아이돌 그룹을 보고 있으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죠. 그 친구들이 10년 후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노파심이죠.(웃음)”
그는 음악에는 돈벌이 수단보다 더 큰 힘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지금 나오는 가수들이 그걸 좀 느끼고 알면 음악에 대한 자세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은 게 그의 희망이다.
“아직 모르는 거예요. 인간다움이 있어야 하는데… 아유, 이러면 말이 너무 많아져.(웃음)”
존중과 인내로 만들어가는 부부관계
인터뷰 중 이정선이 유독 말이 많아지는 순간이 두 번 있었다. 하나는 음악에 대한 얘기, 다른 하나는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였다. 인터뷰 전 그가 ‘사랑꾼’으로 불릴 정도로 아내에 대한 애정이 깊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이해가 갔다.
“제가 머슴이죠.(웃음) 아이는 없어요. 우리 때는 애 안 낳는 게 애국하는 일이라고 해서. 덕분에 아이에게 들어갈 돈과 시간으로 두 사람이 하는 일이 많죠.”
두 사람은 여행을 참 많이 다녔다 한다. 그리고 취미생활은 서로에게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도 그 일이 정 싫으면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준다. 부부관계가 오래, 다정하게 유지되려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존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나이 들어서도 아내와 잘 지내는 방법이요? 하고 싶은 걸 참으면 돼요. 강요하지 말고 참아야죠.”
그도 어느새 내년이면 칠순이 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고 싶은 게 많다고 한다.
“뭘 하려고 하면 이게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 생각하게 되죠. 가능하지 않은 일은 가능하지 않아서 욕심도 나는데… 아, 돈이 없어서 안 돼.(웃음)”
그는 여전히 기타리스트이며, 그 무엇보다 기타에 대한 애정이 충만하다. 집에 이미 50개쯤 있다고 한다. 아마도 세상을 관조하며 사는 그가 가장 욕심을 내는 몇 가지가 있다면 그건 바로 기타와 소리에 대한 애정일 것이다.
“악기들은 계속 개량되고 있으니까요. 내가 구체적으로 찾고 있는 소리가 있다기보다는, 내가 내는 소리에 노래를 맞추죠. 옛날에는 기타도 직접 만들고 싶었는데 거기에 빠지면 다른 걸 못하니….”
나이 들면서 더 간결해졌다
“나이 들면서 달라지는 점이라면, 심플해지는 거죠. 감정도 단순해지고. 요즘은 가사를 쓰는데 자꾸 짧아져요.(웃음) ‘배고프다’ 하면 그걸로 얘기가 다 되는데, 왜 배고픈지에 대해 구구절절 말할 필요 없죠. 그러다 보니 가사도 짧아지고 곡도 줄어지고.”
군더더기 없는 간결함을 더 추구하며 미니멀리즘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이정선은 인생에 대해서도 ‘말 그대로 인생인데’라고 말한다. 인생 앞에 ‘인생’이라는 두 글자 외의 무엇을 더 붙일 필요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인생 전반을 차지하는 노래에 대한 생각도 단순했다.
“가끔 그런 질문을 받는데, 어떻게 대답하면 멋있을까 고민해봤어요. 그런데 노래는 그냥 제가 살아가는 만큼을 보여주는 정직한 사이즈예요. 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대로의 크기 말이죠.”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좋아하는 것. 그에게 노래는 그런 것이었다. ‘대가’에게 ‘대가’라는 말 외의 수식어가 필요 없는 것처럼.
살아 온 날 중에 댄스스포츠 경기대회에 출전한 일들은 하나하나 귀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수백만 명의 댄스 스포츠 동호인 중에 정식 댄스 스포츠 대회에 선수로 참가해 본 사람은 극소수이다. 그러므로 그런 면에서는 행운아인 셈이다.
처음 댄스 대회에 출전한 것은 댄스에 입문한지 10년이 지난 2000년대 초 쯤으로 기억된다. 당시 동덕여대 총장 배 대회에 라틴 포메이션으로 출전했다. 필자 외에 여러 커플이 한 팀으로 출전했다. 주차장에서 연습을 하는데 필자의 옷소매 단추가 파트너의 가발에 걸려 낭패를 본 적이 있다. 필자가 팔이 짧아 소매 단추가 걸린 것이니 팔을 크고 높게 돌리라는 주의를 받았다. 막상 본 대회에서는 우리 팀 중 가장 키가 큰 커플이 같은 사고를 냈다. 소매 단추가 와이프의 가발에 걸리자 가발을 뽑아 내동이친 사람 때문에 꼴찌를 했다. 퇴근 후 모여 밤늦게 까지 연습을 했는데 그런 결과가 나오니 맥이 풀렸다.
올림픽공원에서 500여명이 모여 하루 종일 벌어진 자이브 페스티벌에서는 뜻밖에도 필자가 초대 챔피언이 되었다. 유력한 우승 후보가 결승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필자가 어부지리로 덕을 봤다. 그날 모인 여러 사람들 중에 단 한 커플 챔피언을 가리는 경쟁이어서 기분이 날아갈 듯 했다. 다음 해에도 이어서 계속 챔피언 자리에 오르자 축하 보다는 질시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로부터 다시 10년 후 모던댄스로 전향했다. 시각장애인을 가르쳐 왈츠 단 종목으로 같이 출전했는데 첫 대회는 동상에 그쳤다. 그러나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후 종목을 늘려 모던 5종목까지 할 수 있게 되고 성적도 좋았다. 그러나 파트너가 고령으로 은퇴하는 바람에 다시 다른 파트너와 시작해야 했다.
2015년은 필자 댄스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해였다. 새로 젊은 장애인 파트너를 만나 가르쳤는데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협회에서도 장애인 대회만 뛰기에는 아까우니 일반인 대회까지 해보라고 했다. 청주대회는 새벽 4시에 만나 하루 종일 대회에 출전하고 서울에 와서 허기를 달래니 다음 날 새벽 4시였다. 여수 대회에서는 오전 장애인 대회에 이어 오후 일반인 대회 장년부, 일반부, 아마추어까지 출전했는데 3부문 모두 결승에 올라 우승, 우승, 준우승의 쾌거를 이뤘다. 모던 5종목으로 출전했으니 대단한 체력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파트너가 밤에 일을 해야 한다고 해서 멋진 시상식에 참여하지 못하고 부랴부랴 KTX를 타고 상경한 것이 아쉽긴 했다. 그 파트너 덕분에 국립극장 무대에도 서 봤으나 그게 끝이었다. 코앞의 전국체전에서는 다시 새 파트너와 나갔으나 무관으로 돌아 와야 했다. 그러나 얼마 후 남한산성 배 대회 등에 출전하여 트로피를 들었다.
장애인들을 인솔하고 참가한 대구 대회에서는 대회가 끝나고 산중의 정화여상에서 부랴부랴 짐을 꾸려 터미널로 가야하는데 택시는 안 잡히고 시간이 촉박했다. 지나가던 봉고 차를 세워 모두 태우고 가까스로 버스 시간에 맞췄던 일이 잊을 수 없는 무용담이다.
전국의 여러 도시를 돌며 젊은 선수들과 같이 움직이는 일도 즐거운 일이었다. 시간이 나서 같이 바닷가를 거닐던 추억, 저녁에 같이 어울리던 추억, 같은 방을 쓴 룸메이트들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제주대회 때는 당일 경기도 댄스파티 날짜와 겹쳐 댄스파티 참가는 포기했었다. 그러나 주최 측의 강력한 요청으로 부랴부랴 혼자 비행기를 타고 와서 다시 택시를 타고 파티에 정시에 참석한 일화도 흐뭇한 추억이다.
댄스 대회 시작은 장애인과 같이 했으나 그 덕분에 일반인 파트너와도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 울산 대회에 KTX를 타고 당일 아침에 갔을 때는 모던 5종목 타임 테이블이 오전으로 변경되어 출전도 못하고 나머지 종목으로 출전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용인대회에서는 오전 예선에 착오로 출전하지도 못했으나, 주최 측의 배려로 결승에 추가로 참가하여 트로피를 건졌다. 대회마다 음악을 트는 순서가 달라 엉뚱한 위치에 서 있다가 당황한 적도 있다.
전국체전에 4번이나 나가 3번 메달을 딴 것도 귀중한 추억이다. 평창 올림픽 폐회식을 보며 대구에서 벌어진 당시 전국 체전 입장식이 떠올랐다. 젊은 선수들과 어울려 스타디움의 수많은 관중들에게 손을 흔드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지금도 댄스 대회장에 가서 쿵쾅거리는 음악을 들으면 몸이 들썩인다. 플로어를 지날 때면 연미복을 입고 경기를 뛰던 생각이 나서 흥분하게 만든다. 아직 선수 은퇴선언을 한 것은 아니지만, 선수로 플로어를 누빌 기회가 다시 올 것 같지는 않다. 집에 있는 몇 개의 찬란한 트로피와 메달이 그나마 위안을 준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 하는 사람이 과거를 그리워하는 거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꼭 그래서 그런 건 아니지만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리움이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어렸을 때의 일을 글로 한번 꼭 표현해 보고 싶다는 열망이 항상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만큼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돌아가 볼 수 없는 정말 그리운 그 시절의 추억을 끄집어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정말 기쁜 마음이다.
유년시절
필자는 살아오면서 자신을 서울 토박이라고 생각해 왔다. 60년 인생에서 50년이 넘는 시간을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당연히 서울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는데 실은 고향은 대전이다.
필자 머리가 특별히 좋은 건 아니지만 유년 시절의 많은 일을 기억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마 서너 살 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아버지, 어머니와 유성온천 만년장호텔의 개울 위 다리에서 벚나무에 기대어 사진을 찍었던 일도 기억나고, 만년장 객실의 커다란 전면 유리창 밖으로 봄날의 벚꽃이 하나 가득 흩날려 쏟아지던 것도 생생하다.
필자는 1952년 아름다운 계절 6월의 첫날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전 근교에서 큰 포도밭을 하시는 할아버지의 장남으로 많은 동생을 보살펴야 했으므로 피아노를 좋아하셨지만 예술가의 길로 가지 못하고 초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셨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평양이 고향인 이북 사람이셨다. 할아버지는 경성제대를 졸업하시고 충남대학교에서 사학과 교수로 평생 후학을 길러내셨으며 명망이 두텁고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아주 인자하고 훌륭한 분이였다.
아버지는 대전 사람이지만 어머니는 서울 옥인동이 고향이고 진명여고를 다니다 대전으로 피난 가서 대전여고를 졸업했다 어머니도 역시 피아노를 전공해서 초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었는데 거기서 두 사람이 만났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집엔 피아노가 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는 건 참 즐거운 일이었다. 전쟁도 있었고 다들 어려운 형편이었을 텐데 두 시림은 어떻게 피아노를 그렇게 잘 쳤는지 존경스럽다.
필자가 태어난 동네는 대전역 건너편 골목의 정동이라는 동네였다. 아주 어릴 때의 일인데도 그때 있었던 일들이 기억이 나니 필자 머리가 보통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한다. (크면서 공부는 잘 못 했지만….
부모는 딸 셋을 낳고 더는 아이를 갖지 않으셔서 필자 집은 세 자매가 되었다.
필자 집은 대전역 건너편의 중심가에 있었고 친가는 조금 떨어진 가양동, 외가는 10km쯤 떨어진 문창동에 있었는데 아주 어릴 때부터 외가를 좋아해서 거기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어린 마음에도 그곳이 그렇게 좋았던 이유는 바로 꿈과도 같은 집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제 나라로 돌아간 일본 사람의 적산가옥이라 불리던 집을 외할아버지가 장만하셨는데 그 집은 정말 꿈의 동산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집 건물이 있고 왼쪽으로는 커다란 팽나무에 할아버지께서 필자를 위해 매어주신 기다란 그네가 보였다. 필자는 언젠가는 꼭 이 집에 대해서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필력이 모자라 표현을 어찌해야 할지 항상 머릿속에 담아 두고만 있었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는 마음만 갖고 있었다.
마당에는 일본 사람 특유의 정원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수 있을 정도의 동산과 돌다리가 걸쳐진 연못이 있었다. 연못 속에 돌로 만든 거북도 멋있었고 연못 속에서 피어난 늘씬하게 쭉쭉 뻗은 수선화의 초록 이파리와 꽃도 아름다웠다.
대문에서부터 집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까지 놓인 발 디딤돌 외의 공간에는 빼곡히 알록달록 키 작은 채송화가 융단처럼 깔렸기도 했는데 외할머니께서 가꾸신 것이다. 오른쪽으로 가장 끝에 부엌이 있고 그 옆에 칸 칸으로 나누어진 커다란 미닫이 유리창이 안방 문이었다.
부엌 앞에는 아래위로 손잡이를 움직이면 언제나 콸콸 시원한 물이 쏟아지는 펌프가 있었고 안방을 지나 돌출된 현관을 가진 작은방 옆에는 석류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새빨간 석류가 딱 벌어져서 그 안에 보석 같은 알맹이가 가득 들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이 외가에 들어와 본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필자는 덕분에 동네의 헤로인이 될 수 있었다. 놀이할 때에도 필자는 우선권을 가질 수 있었으며 동네의 또래 아이들은 모두 필자를 떠받쳐주었기 때문에 그곳이 그렇게 좋았을 수도 있겠다.
필자는 항상 집이 부자인 줄 알고 살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당시 처절하게 돈을 모으셨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부족함 없이 딸 셋에게 풍족하게 해 주려고 부모가 많이 노력하셨다는 걸 알았다.
필자는 어릴 땐 숫기 충만하고 남 앞에 서는 걸 좋아했었던 것 같다. 대흥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책 읽기를 잘해서 4학년 때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교장 훈화하는 단상에 올라 동화구연을 하기도 했다. 욕심 많은 어부의 아내 이야기로 어부가 잡아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부리다 망한다는 교훈적 이야기였던 것도 생각난다.
동화구연이 끝나고 과자를 사 먹으려고 교문 밖 문방구에 갔더니 주인아줌마가 “너 참 잘하더라” 라고 말씀을 해서 군것질을 못 사고 공연히 연필 한 자루만 사 들고 오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공인이 되면 그렇게 체면치레도 해야 하는가 보다.
필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유행가도 잘 불렀다. 또 어머니와 영화를 보고 온 날은 아이들 앞에서 어찌나 실감 나게 연기를 해 보였던지 극장에 갔다 온 것보다 더 재미있다는 말을 들었다. 필자는 어릴 때 그런 재주가 있었다.
이렇게 신나게 살던 필자 맘에 꼭 드는 도시인 대전을 떠날 일이 생겼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서울로 이사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전이 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필자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필자는 식구들이 필자만 외가에 두고 떠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지만 며칠 후 초등학교 6학년이 시작되던 해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의 첫 집은 아현동에 있었고 아현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아현동 집은 대문 앞에 대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어서 대추나무 집이라고 불렸으며 아주 예쁘고 깔끔한 한옥이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처음 다녔던 아현초등학교를 한 학기만 마치고 전학을 간 곳은 돈암초등학교였다. 집이 돈암동으로 이사했기 때문이었다. 돈암동 집 역시 한옥이었다. 그때로써는 더 좋은 동네로 옮긴 거지만 요즘으로 따져보면 아현동은 지금 너무나 발전한 고층빌딩 숲으로 시내 중심가가 되었으니 이사하지 않고 그냥 그 대추나무집에 살았다면 어머니, 아버지는 재테크를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후 돈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필자는 동대문 밖 창신동에 있는 동덕여중에 들어갔다. 동덕여중은 일제 강점기에 여성교육에 큰 뜻을 품으신 조동식 박사가 설립한 민족 학교라 할 수 있는데 교정이 아름답고 건물이 너무나 멋졌다. 본관 건물의 빨간 벽돌담을 초록 담쟁이가 가득 뒤덮어 고풍스러운 모습은 그림 동화책을 보는 듯 마음을 설레게 했다.
등교하던 모습도 생생하다. 허리를 졸라매는 하얀 블라우스와 군청색 스커트의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타고 등교했다. 등굣길의 버스 안이 얼마나 만원이었는지 그때 학교에 다녔던 학생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터질 듯한 버스 속으로 안내양이 등으로 밀며 필자를 구겨 넣었다. 그러면 운전기사 아저씨는 일부러 차체를 흔들어 뭉쳐 있는 사람들을 고루 뒤섞어 놓았다. 버스에서 내리면 반듯하게 다림질하고 주름 잡아 허리를 매어 입은 교복이 구겨지고 삐뚤어져서 한동안은 동소문동 집에서부터 보문동, 신설동을 돌아 창신동 학교까지 걸어 다니기도 했다.
혜경, 대학생이 되다
그리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고3 때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꼭 가고 싶었던 이화여대는 아니어도 청파동 언덕의 아름다운 숙명여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과도 영문과나 불문과 아니면 국문과가 좋았지만 예비고사 성적에 맞추어 무난하게 경제학과를 지망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최고의 학과이지만 그 당시 필자가 경제학과 학생이 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뭐 어쨌든 이렇게 청춘 시대가 활짝 열렸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공부보다는 노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은 듯하다. 수많은 미팅도 있었고 친구들과 명동이나 종로 등 좋아하는 거리를 섭렵하며 다녔다. 이렇게 미팅 전성시대를 누렸지만 정작 결혼은 매우 철저한 중매로 했으니 아이러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었으나 그런 추억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 아닐까?
필자는 학교 다니는 동안 교직과목을 듣고 교생실습을 거쳐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땄다. 친구들은 취직한다고 동분서주했지만 필자는 그때도 놀기만 했다. 교사자격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근무지였다. 서울에서는 임용고시가 너무나 어려워 통과하기 어렵다고들 했다. 그래서 많은 친구가 경기나 지방으로 교사가 되어 떠났다. 지방은 서울보다는 선생님 되기가 쉬웠다고 한다. 그러나 딸만 셋인 아버지는 필자를 지방에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결국 필자는 본의 아니게 빈둥빈둥 노는 신세가 되었다. 끔찍하게 딸들을 사랑한 아버지 덕분에….
20대 후반이 됐는데도 시집을 못 가
나이가 27세가 되자 어머니는 매일 한숨을 내 쉬며 걱정했다. 대학 시절 그렇게 연애를 많이 했는데 정작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시집을 못 간 것이다.
그래서 선을 보기 시작했다. 무척 많이 보았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필자가 자타공인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수많은 선을 보았는데 어느 날 부모님이 강력히 추천하는 사람을 만났다. 약대를 나왔고 시아버지는 변호사라고 했다. 어머니는 첫딸이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야 동생들도 그렇게 될 거라며 이 사람을 만나보라고 했다. 선을 봤는데 남자가 너무 못 생겨 보였다. 못 생겨서 싫다고 했더니 제 복을 제가 찬다면서 야단치셨다. 그런데 이야기해 보니 마음이 참 착해 보였다. 그래서 이 사람으로 결정해 버리고 말았다.
부잣집 맏며느리?
이 남자를 만나보니 인물보다는 마음이 참 착해 보였다. 더구나 어느 날 자기 집 얘기를 하는데 집에 수영장이 있다는 게 아닌가. 필자는 거짓말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 외국 영화에서 본 것처럼 넓고 푸른 잔디밭에 파란 물이 출렁이는 예쁜 풀장을 생각한 것이다.
실제 가서 보니 뭐, 거짓말은 아니고 정말 집안에 수영장이 있긴 했다. 집은 장충동 고급 주택가인데 어머니가 손수 지휘하셔서 아주 공들여 지은 집이었다. 필자가 상상한 그런 수영장이 있는 집은 아니었지만 멋지고 좋은 집이었다.
전면으로 볼 때 3층이었고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오른쪽으로는 분수가 나오는 정원이 있고 왼쪽으로 반지하인 1층이 있는데 그 층에 운전기사 방과 제사나 명절 때만 사용한다는 넓은 부엌이 있고 그 구석에 어린 시동생과 시누이를 위해 네모난 풀장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 수영장을 보고 필자가 엉뚱하게 상상했던 게 생각나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결국 결혼했다. 처음엔 결혼하고 바로 분가하기로 했었는데 사정이 있었다. 시아버지가 첩이 있어 따로 살고 있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집이 너무 큰 데 식구가 없으니 몇 년 만 같이 살자고 제의했다.
이혼의 위기에서
그런데 그렇게 시댁은 빌딩도 여러 채 갖고 있고 분당이 개발되기 전에 서현동이라는 곳에 정원이 아름다운 크고 근사한 별장도 있었으며 시아버지가 아직 현역 변호사로 활동하는 등 굉장한 부자이긴 했지만 첩과 나가 계셨기 때문에 좀 복잡했다.
그렇게 멋진 집에서 5년을 살고 분가했다. 분가는 친정 옆 동네로 했다. 시댁의 가정사가 복잡한 것과 대조해서 친정은 너무나 인자하신 아버지가 있어 언제나 평화로웠다. 특히 아버지는 손자를 목숨처럼 사랑했다.
이혼의 위기
부잣집 맏며느리라고 부러움을 받고 살던 필자에게 큰일이 일어났다. 상속받은 소공동 프라자호텔 뒤편 북창동에 있던 5층 건물이 넘어가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 건물은 시아버지가 죽기 직전까지 변호사 사무실로 쓰고 있었던 알토란같은 건물이었다. 위치가 좋아 건물세도 잘 나오고 필자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다고 표현하며 좋아했었는데 마음만 착한 남편이 사기에 걸려 보증을 서는 바람에 날려 버렸다.
그런 상황에 놓이자 이혼도 고려하게 되고 심각해졌는데 필자는 이혼하지 않았다. 아들을 생각해서 온전한 가정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주변에선 필자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가끔 남편을 구박하기도 하고 화풀이도 하지만 이혼 안 한 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큰 재산을 잃었지만 든든한 시댁과 친정아버지 덕분에 그리 힘들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다. 아들이 잘 자라주었고 키우는 동안 너무나도 기쁘거나 즐거운 일이 많았기 때문에 없어진 큰 재산이 아깝긴 해도 무난하게 살아왔다.
이제 다섯 살이 된 아주 예쁜 손녀와 돌 지난 손자, 아들, 며느리를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어 행복한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큰 불행이 닥쳤다. 남편이 큰 병에 걸렸다. 정말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이다. 투병 중인 남편을 보며 한때 재산을 없앴다고 못되게 굴었던 일도 후회돼 마음이 아팠다. 이런 상황이 되어 보니 유행가 가사가 다 진리로 다가온다. 있을 때 잘하라는 유치한 말이 정말 가슴에 와 닿고 누구에게나 해 주고 싶은 말이다.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소풍 나온 이 한 세상 잘 살았으며 이별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을 갖자고 다짐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제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을 학생들에게 전해주는 일이 정말 보람 있어요. 강의하면서 젊은이들의 열정과 신세대의 문화코드를 배우기도 하지요.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학생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해 강단에 서는 것이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입니다.” 드라마, 영화, 연극무대를 오가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중견 연기자 이순재의 또 다른 직업은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다.
대학가는 3월 입학식과 함께 활기찬 새 학기가 시작된다. 최근 들어 대학 캠퍼스에 교수나 강사로 나선 연예인들의 모습이 크게 늘었다. 방송, 연예, 연극, 영화, 음악 등 연예인 지망생이 급증하면서 대학교들이 경쟁적으로 관련 학과를 신설하거나 학생 수를 늘려 대학 강단에 서는 연예인들도 많아졌다. 무엇보다 방송, 연예, 연극, 영화 관련 학과에선 풍부한 현장 경험과 실무가 중요하므로 학생들이 연예인 교수를 선호한다. 또한, 연예인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전문성, 대중적 인지도가 대학교 홍보나 학생 모집에 큰 도움이 돼 유명 연예인을 교수로 임용하는 대학이 증가하고 있다.
모델 활동을 하면서 대학 강의를 병행하다 전업 교수로 돌아선 김동수 동덕여대 모델학과 교수 같은 경우도 있지만 강단에 서는 연예인 대부분은 연예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대학 강의를 하는 연기자, 가수, 개그맨, 방송인, 모델 등은 석좌교수, 정교수에서부터 초빙교수, 객원교수, 특임교수, 강사 등 다양한 형태로 강의하고 있다. 출강하는 곳도 4년제 대학에서부터 전문대학, 특수 직업학교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다.
생생한 현장이야기 학생들 좋아해
이순재는 세종대 석좌교수를 거쳐 현재 가천대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20년 넘게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에게 연기론을 강의하고 있다. 명지전문대 연극영상학과 정교수로 있는 중견 연기자 장미희도 지난 1998년부터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이순재나 장미희처럼 대학 강단에 서는 연기자들이 적지 않다. 중견 배우 최란은 한서대 교수를 거쳐 2015년 2학기부터 서강대 영상대학원에서 초빙교수 자격으로 ‘연기 세미나’ 과목을 강의한다. 드라마와 연극무대에서 정교한 연기력을 보이며 왕성한 활동을 하는 정보석은 수원여대 연극영상과 부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스타 연기자 고현정은 2014년부터 동국대학교 연극학부 겸임교수로 위촉돼 매체 연기 과목을 강의하고,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탤런트 배종옥은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부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이 밖에 최불암 유인촌 유동근 서인석 노주현 정동환 이인혜 명세빈 이영하 류승룡 이범수 김성령 남성진 등 많은 연기자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현재는 강의하고 있지 않지만, 한때 김희애처럼 교수로 재직하며 대학 강단과 인연을 맺었던 연기자들도 적지 않다.
정보석은 “연기자 교수들은 연기 활동을 병행하고 있으므로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실기 강의를 하는 데 유리하다. 연예계에 진출하려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전달하고 조언도 해줘 학생들이 좋아한다”고 말했다. 또한, 최란은 “미디어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시대적 흐름에 맞춰 학생들에게 현장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산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강의를 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 가수와 뮤지컬 배우 지망생이 급증하면서 각종 대학의 실용음악과와 뮤지컬학과에서 강의를 하는 가수와 뮤지컬 배우들도 크게 늘었다.
가수 장혜진은 지난 2009년 한양여자대학교 실용음악과 전임교수로 임용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장혜진은 “전임교수로 실용음악과 보컬 전공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가수로 활동하고 있기에 가수 지망생인 학생들의 강의 참석률이 매우 높다. 실기뿐만 아니라 이론도 철저히 지도한다”고 강조했다.
가수 옥주현은 겸임교수 자격으로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실용음악과에서 강의한 바 있으며 현재 동서울대학 공연예술학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뮤지컬을 지도하고 있다. 가수 김연우는 서울종합예술학교 실용음악예술학부 전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인순이는 한국방송예술진흥원 실용음악학부에서 강의하고, 바비킴은 서울예술전문학교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뮤지컬 배우 겸 감독인 박칼린은 호원대학교 방송연예학부의 뮤지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 밖에 대학 강단에 서는 가수로는 송대관 김경호 알리 등이 있다.
개그맨들의 대학 강단 진출 바람도 거세다. 개그맨 이윤석은 서울예술전문학교 방송연예학부 학과장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이봉원, 김한석은 한국방송예술진흥원에서 개그맨 지망생들을 대상으로 희극 연기론을 강의하고 있다. 슬랩스틱 코미디와 다큐 예능의 1인자 김병만은 백제예술대학 방송연예과 겸임교수로, 개그맨 박준형은 경인여자대학 방송연예과에서 강사로 학생들과 만나고 있다. 남희석 이영자 김미연 김수용 등도 대학 강단에 서는 개그맨으로 유명하다.
방송인, 모델, 쇼호스트 역시 속속 대학 강단에 서고 있다. 아나운서로 활동한 뒤 성신여대에서 후학들을 지도했던 손석희 JTBC 사장처럼 아나운서 중에는 대학 강의를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KBS 등에서 명진행자로 활동하는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 이금희는 모교인 숙명여대에서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으며 MBC 아나운서 출신인 김경화는 연세대 생활환경대학원 겸임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임성민 문지애 박혜진 서현진 김병찬 김성경 등이 아나운서 출신으로 대학 강의를 하는 방송인이다.
일부 연예인 교수들 부실강의로 문제
김동수 동덕여대 모델학과 교수처럼 모델 출신 대학 강사, 교수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모델 박둘선은 한국예술원 모델과 전임교수로 활동하고, 한국모델협회 교육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향기는 대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유난희를 비롯한 쇼호스트들 역시 대학의 방송학과나 쇼호스트학과에 출강하고 있다.
이처럼 연예인들이 대학 강단에 서는 이유는 자신이 현장에서 쌓은 경험과 노하우 등을 후학들에게 전수하는 것에 큰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연예인들이 대학 강의를 하면서 공부와 연구를 통해 새로운 정보와 지식, 이론을 습득해 연기나 무대에 적용해 더 발전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도 대학 강단에 서는 이유다. 이 밖에 대학 강의가 연예인의 이미지 제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점도 대학에 진출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서인석은 “열정이 넘치는 학생들을 보면서 연기자로서 초심을 잃지 않게 된다. 연기와 대학 강의를 병행하는 것은 힘들지만, 대학 강의를 하면서 새로운 이론을 공부하고 현장에 적용할 수 있어 시너지 효과가 크다”고 설명했다.
상당수 연예인 교수들이 탄탄한 실기 실력과 풍부한 현장 경험으로 학생들에게 유익한 강의를 해 학생들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하지만 일부 연예인 교수들은 부실한 강의 등 문제점도 드러내고 있다. 시간강사, 겸임교수, 초빙교수, 전임교수, 정교수 등 각종 형태로 대학 강단에 서고 있는 연예인 중 일부가 방송연예 활동과 강의를 병행하는 관계로 잦은 수업 결강, 부실한 수업 내용, 신변잡기로 일관하는 강의 등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유명한 연예인 교수 수업을 신청했다가 강의 내용이 부실해 실망을 표하기도 한다. 새 학기에 강단에 서는 연예인 교수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해 내실 있는 강의로 학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를 원하고 있다. 경북 경산의 대경대학 방송학과 학과장으로 방송 MC 진행 실기, TV 예능 화법, 코멘트론, 아이디어 개발론 등을 강의한 바 있고 요즘에는 특강 형태로 대학생들을 만나고 있는 개그맨 남희석은 “대학 강단에 설 때 학생들이 정말 수강을 잘했다는 말이 나오도록 강의에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나 한 사람이 잘못하면 연예인 전체에 누를 끼치게 된다. 연예인들은 대학 강단에 서는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