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머 리무버(Boomer Remover). 베이비붐 세대를 없애겠다는 조롱과 혐오가 담긴 표현으로, 최근 미국 젊은이 사이에 유행어로 번지고 있다. 노년층 부양에 대한 부담과 정치 성향에 대한 반감 등이 표출된 단어다. 우리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틀딱, 연금충, 앵그리실버 등 노인을 향한 혐오 표현은 날로 생겨난다. 혐오 어린 말과 눈초리를 피해 노인들은 저마다의 퇴적 공간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 곁에서 노인은 사라졌고, 혐오만이 남았다.
“노인을 떠올렸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편견과 선입견은?” 나문희 주연의 영화 ‘수상한 그녀’의 도입부, 노인복지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묻는다. 주름, 검버섯, 쾨쾨한 냄새, 두꺼운 얼굴…. 다소 부정적인 단어가 쏟아지던 중 한 학생은 “탑골공원”이라 답한다. 그곳에 가면 노인이 많다는 게 이유다. ‘퇴적 공간’의 저자 故 오근재 전 홍익대 교수는 ‘탑골공원’을 일컬어 “사회에서 쓸모를 인정받지 못해 잉여적 존재가 되어가는 인간군이 하구의 삼각주처럼 퇴적된 공간”이라 했다. 언제부턴가 노인을 상징하는 마중물이 돼버린 그곳, 탑골공원을 찾았다.
파라다이스 or 디스토피아 ‘탑골공원’
비가 내린 탓인지 탑골공원 안팎은 조용했다. 평소라면 벤치에 누워 오수를 즐기거나 담벼락 주위에 모여 장기를 뒀을 테다. 몇몇 노인만이 팔각정에 앉아 시름을 달래고 있었다. 파고다공원 시절 노인들은 이곳에 모여 술을 마시며 시국 토론을 하고 만담을 펼쳤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쌓이며 그들의 행위는 규제 대상이 됐고, 그렇게 노인들은 표정을 잃어갔다.
공원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코로나19 영향도 있고, 이젠 노인끼리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근재 교수는 “얼핏 탑골공원은 노인들의 파라다이스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곳이 현실의 냉혹함에 밀려 퇴적된 노인들의 공간이라면 디스토피아일 것”이라 말한 바 있다. 공원을 찾은 한 70대 노인은 토로한다. “누가 우릴 환영하나. 깨끗이 입어도 냄새난다고 싫어하지. 여기도 재미없다. 말은 안 섞지만, 그냥 저 노인네도 그래서 왔겠구나, 동병상련을 느끼는 거다.”
세대 간 혐오의 순간
“여긴 키오스크가 없네? 할아버지들이 많아서인가?”, “비 때문인지, 저분들(노인) 때문인지 꿉꿉한 냄새나.”, “주문도 안 하고 자리만 죽치네.” 탑골공원 근처의 한 패스트푸드점. 점심시간이라 인근 학원 학생들이 주문을 위해 줄을 서 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소나기 탓에 유독 노인들이 많았던 터다. 몇몇 학생은 노인들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을 내비쳤다. 매장 직원은 “비 오는 날 그나마 여기 안 오시면 또 어디를 가실까. 한편으론 다행스럽다. 딱히 그분들이 해를 끼치는 건 아닌데, 젊은 사람들은 피하고 불편해한다. 이해는 간다”라면서도 그 이유를 묻자 말을 아꼈다.
혐오의 은신처
지하철 종로3가역 1번 출구. 탑골공원으로 향하는 길, 건너편 출구 계단에 노인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짝! 짝!” 수신호처럼 이따금 박수도 친다. 기이한 풍경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물었다. “다들 뭘 기다리시나요?” 노인 왈. “그냥 노는 거야! 소꿉장난.(웃음)” IMF 당시 실직 후 줄곧 이곳을 찾았다는 그는 비가 오거나 너무 덥거나 추우면 이렇게 지하철역에 앉아 논다고 했다. 기왕 놀 거면 마주 보고 모여 앉지 그러느냐 물으니, 서로 알지도 못하고 그냥 그것이 편하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 “다들 (노인) 싫어하잖아. 생쥐처럼 알아서들 숨은 거야.”
60대 이상 고령자에게 혐오 표현을 들은 후 반응을 물은 조사에서 ‘사람이나 장소를 피한다’라고 응답한 이는 80.7%로 나타났다. 혐오의 시선과 마주하지 않기 위해 노인들은 사람을 피하고, 자신들만의 공간을 찾아 나선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언제나 그렇듯 추모공원 입구에 차를 세웠다. 1년마다 어김없이 해온 일이다. 특별히 나들이 철도 아니고 성묘객이 몰리는 명절도 아닌데 길이 막히는 것이 짜증스러웠지만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 내색조차 못 했다. 평소에는 앞차가 시야를 가리고 브레이크를 자주 밟게 되면 구시렁거리며 불평을 내뱉곤 하지만 아내의 성묫길에는 교통체증에도 입을 꾹 다문다. 옹졸한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다. 하지만 늘 통 큰 남편인 척하는 것도 솔직히 지겹다. 아내는 내가 통 큰 척하고 있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내가 통이 크든 작든 아내에게는 아무 상관도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이다. 도대체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내가 왜 이래야 하나. 벌써 20년째다. 이제는 그만둬도 되지 않나. 그런데 왜 나는 아내에게 이제 그만둘 수 없냐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걸까.
“조심해서 다녀와. 같이 갈까?”
“아니에요. 혼자 갈게요. 운전해줘서 고마워요. 쉬고 계세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무거울 텐데… 제수(祭需)만 들어다주고 난 내려올게.”
“그러실 필요 없어요. 늘 하던 일인데요, 뭐.”
그래, 늘 하던 일이지. 20년을 한결같이. 추모공원 앞에서 나누는 우리의 대화도 늘 똑같고. 그런데 왜 오늘따라 짜증 나고 답답하고 억울한가 말이다. 아니 억울할 것까진 없지만.
전남편 제사 지내는 아내
아내와 나는 20년 전에 재혼했다. 아내와 나 둘 다 30대 중반에 배우자와 사별했다. 혼자 지낸 지 3년쯤 지나 지인의 소개로 만났을 때 동병상련이 서로의 마음을 움직였다. 당시만 해도 이혼보다 사별이 재혼에는 유리하게 작용했다. 사별은 불가항력이니까. 그러나 이혼은 선택이니 사정이야 어쨌든 자기주장이 강하고 드센 사람이란 인상을 준다. 특히 여자에게는. 이렇게 생각하는 나를 보수적이라고 비난해도 하는 수 없다. 어쨌든 나는 그랬다.
혹자는 이혼은 자기 의지로 관계를 끊었기 때문에 전 배우자에 대한 미련이 더 이상 없지만, 사별은 생전에 사이가 나빴던 부부조차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이유로 애틋한 환상에 빠져 없던 사랑도 만들어내서 내내 잊지 못한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아내의 경우가 그랬던 것이다.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매해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으니. 그럼 나는?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같은 때 죽은 아내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그리고 이따금 꿈에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냥 그뿐이었다. 아이들 엄마로서 아이들을 볼 때 떠오를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 내 삶에서는 이미 떠나간 사람이었다.
아무튼 재혼 상대로 나온 여자가 전남편과 사별했다는 것이 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결혼 전 아내가 들고 나온 약간 이상한 조건도 상대에 대한 나의 호감을 더했으면 더했지 감하지는 않았다. 그 조건이란 재혼을 하더라도 전남편의 기일을 지키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집에서 제사를 지내겠다는 건 아니고 성묘를 가고 싶다고 했다.
죽은 사람 못 이기는 산 사람
아내가 좋았기 때문에 무슨 부탁을 해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제안을 할 줄이야! 그토록 지고지순한 사람일 줄이야! 세상 떠난 남편에게 그 정도의 순정이라면 살아 있는 내게는 얼마나 정성스러우랴. 죽은 남편을 못 잊어 하는 것은 남이 들어도 그 자체로 칭찬받을 갸륵한 마음씨 아닌가. 그런 여자를 흔쾌히 받아들인 나는 더 넓은 마음씨의 소유자고. 이 모든 것이 나의 상상 속 이야기이자 착각이었다 해도 나는 통 큰 남자가 되기로 하고 그렇게 해온 지 20년째다. 그랬던 내가 뒤늦은 심술이 동한 것일까. 설마 죽은 사람에게 질투를 느끼는 것일까. 왜 내 심사가 이리 꼬이냔 말이다. ‘죽은 남편을 죽도록 사랑했나 보지. 그렇다 해도 세월 앞에 장사 있나. 몇 년 그러다 말겠지.’ 처음부터 이런 마음을 먹었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랬다면야 예상이 빗나간 게 약올라서 심통을 부릴 수도 있겠지만.
아내는 왜 전남편을 잊지 못하는 것일까. 전남편과 산 기간보다 나와 함께 산 기간이 두 배나 긴데도. 세월조차 지우지 못하는 둘의 추억은 무엇일까. 물론 나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런 걸 물어볼 정도로 얼간이는 아니다. 자존심이 있지. 그렇다고 아내와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다. 우리 둘은 잘 지낸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지만 재혼할 때 각자 데리고 온 남매들끼리도 무난하게 잘 지낸다. 이젠 모두 성인이 되어 자주 만날 일이 없지만 나도 아내도 내 자식, 네 자식 나눠서 서운한 마음이나 갈등을 겪은 일이 없다. 오히려 상대의 자녀들을 서로 잘 챙긴다.
우리는 건강한 편이며 돈도 아주 없지 않고 주변의 관계도 원만하다. 이만하면 노후를 대비해 부족함 없는 복 받은 중년 부부다.
문제는 아내의 전남편이다. 전남편이 우리 사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아니, 나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허,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나. 죽은 사람이 산 사람 일에 끼어든다고? 하긴 산 사람은 결코 죽은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지. 아내는 죽기 전까진 ‘저 짓’을 그만둘 의향이 없는 듯하다. 저러다 내가 먼저 죽으면 아내는 내 제사는 안 지내고 저 인간만 챙기는 거 아냐?
아내가 전남편을 못 잊는 이유
아내의 전남편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늦은 밤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너다 차에 치었다고 했다. 빨간색 보행자 신호등에서 건너간 남편 쪽 과실이었다고. 딴생각을 하다가 순간적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아니면 자투리 초록 신호등에서 무리하게 뛰어 건너다 변을 당한 것일지도. 남편은 즉사했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재혼 후 5년쯤 되었을 때 아내의 친구에게서 사고 당일 밤 부부가 크게 다투었다고 들었다. 화가 난 남편은 술이라도 마실 생각으로 집을 뛰쳐나간 것 같은데 진정되지 않은 마음에 보행자 신호등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 같다고.
그러면서 아내의 친구는 그 순간은 일부러라도 차에 뛰어들어 죽고 싶지 않았겠냐는 야릇한 여운을 남겼다. 아내의 전남편이 죽고 싶을 정도로 격렬했던 싸움의 원인은 뭐였을까. 내 얼굴에 어쩔 수 없는 궁금증이 피어오르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의 친구는 당시 아내가 잠깐 한눈을 판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아내의 외도 사실이 남편 귀에 들어가 부부가 대판 싸움을 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구태여 내게 말하는 이유를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만두고 말았다. 그 사실 자체로 불쾌했고, 무슨 속내인지는 몰라도 친구의 치부를 폭로하는 그 여자에게도 불쾌했다. 안달이 난 쪽은 아내의 친구, 그 여자였다. 하지만 나는 그 입을 더 이상 열게 하지 않았다. 불쾌를 넘어 불안했다. 아내에 대해 내가 모르는 무슨 말이 더 나올까 싶어서.
그냥 아내에 대한 시기 질투로 이해하기로 하고 마음을 정리했다. 그 친구는 아내가 사별한 비슷한 시기에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안정된 재혼 생활을 하는 아내가 부러울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더구나 캐묻고 싶지 않았다. 물론 아내는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모른다. 자존심을 지켜주고 오히려 아내를 이해하는 쪽으로 작용한 나머지 전남편의 기일 성묘를 이제 그만둘 수 없냐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영혼은 누구에게?
그랬다. 지난번 결혼에서 아내는 남편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죄의식으로 20년간 남편의 기일을 챙기고 있는 것이다.
나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일에, 그것도 아름답지 않은 일에, 따라서 보람도 없는 일에 나까지 발을 담그고 있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남들이 이 일을 알면 나를 바보라고 할 테지. 무엇보다 저 여자는 너무 뻔뻔하지 않나. 아무리 내가 허락했고 약속했다고 해도 20년을 한결같이 그의 기일을 챙기고 있으니. 나를 무시하고 깔보는 마음이 없고서야 미안해서라도 스스로 알아서 그만뒀어야 하지 않나.
더구나 아내는 한 번도 나를 성묘에 참여시키지 않고 있다. 나를 위한 배려라고 하지만 현 남편인 나를 전남편에게 한 번쯤 인사를 시켜줄 법도 하건만. 이쯤 되면 전남편과 오붓한 시간을 갖겠다는 심사가 아니고 뭔가. 아내는 죽은 남편의 묘 앞에서 매해 무슨 말을 할까.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또 사과하며 용서를 비는 걸까. 만약 그날 그 사고가 없었다면 저 사람이 아닌 당신과 해로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눈물을 찍어내는 걸까. 그나저나 조신한 아내가 어쩌다 그런 실수를 저질렀을까.
자동차 사이드미러 저 멀리서 성묘를 마치고 내려오는 아내가 보인다. 가까워올수록 평온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이 드러난다. 아까 올라갈 때의 스산한 표정이 아니다. 상념에서 깨어나, 시동을 걸어놓고 아내의 손에 들린 제사 음식 보따리를 받아들기 위해 차에서 내린다. 이제 아내는 다시 내게로 돌아오고 있다. 하지만 내가 차지하고 산 건 아내의 몸뚱이뿐이고 아내의 영혼은 늘 저곳, 저 남자에게 있었던 게 아닐까. 아니 몸조차 거기에 있고 지금 내게 오고 있는 여자는 아내의 모습을 한 허깨비가 아닐까. 내 아내는 여전히 묘 앞에서 전남편과 도란도란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건 아닐까.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퇴근해 돌아와 보니 아내가 짐을 싸서 집을 나갔다. 장식장과 콘솔 등 소품 자리가 빈 휑뎅그렁한 거실 한가운데에 찌무룩이 섰다가 주방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들이켰다. 찬 기운이 정수리를 타고 올라가는가 싶더니 가슴께로 싸하게 번졌다.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뱉었다가 크게 들이마셨다.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하긴 출근길에 아내의 딸이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것을 보았으니 오늘 짐을 빼겠구나 짐작은 했다. 그리 놀랄 일이나 새삼스러운 충격은 아니란 뜻이다.
이렇게 해서 다시 혼자가 되었다. 재혼한 지 1년 반 만에. 말이 1년 반이지 한 공간에서 지낸 것은 6개월도 채 되지 않는다. 다툴 때마다 아내는 버릇처럼 집을 나갔으니까. 친정도 없는 사람이 변변히 갈 데가 있을 리 없건만 마치 가출 자체로 위로를 삼는 것처럼 수틀리면 훌쩍 집을 나갔고, 그렇게 한번 나갔다 하면 몇 달씩 들어오질 않았다. 그럴 때마다 거의 내 쪽에서 화해를 청했고, 아내가 마음을 풀고 돌아오면 이번에는 내가 불안해졌다. 다시 나가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이제 다시 돌아올 일은 없으리라. 불안할 일도 없으리라. 서로가 재혼이라 혼수를 따로 장만한 것도 없고 아내가 아끼던 자잘한 것들만 가지고 내 아파트에서 합쳤던 터라, 이번 가출은 전과 달리 물건을 모두 실어서 나간 걸 보면 이로써 우리의 인연도 끝난 것일 터. 그렇게 자꾸 나갈 거면 아주 나가버리라고 했던 건 나니까.
다시 혼자가 되어
이렇게 둘이서 서둘러 결정할 게 아니라 그 흔한 부부 상담이라도 받아봤어야 했던 거 아닐까. 갈등의 뿌리는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서로 자존심만 세우다 아내도 나도 얼결에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건 아닐까. 나는 아내를 사랑했을까. 아내는 나를 사랑했을까. 함께 연주를 하기도 전에 조율 중인 악기를 내팽개쳐버린 것처럼 이런저런 생각이 마구 뒤엉키며 혼란스레 오갔다.
아내와 나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법적으로는 부부가 아니다. 그저 잠깐 동거한 관계일 뿐. 그렇게 생각하면 홀가분하다가도 성대히 치른 결혼식이 마음에 걸린다. 그랬다. 우리는 결혼식을 꽤나 성대히 치렀다. 남들 눈에 그럴 듯해 보이고 싶었던 허영심, 과시욕에서만큼은 아내와 내가 의기투합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니 허탈감과 자괴감이 든다. 재혼의 형식만 그럴 듯했지 부부의 내실은 너무나 허약했고, 그나마 이제는 관계를 쌓아갈 토대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내가 재산을 지키자고 아내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아내도 그건 인정할 것이다. 내 재산 못지않게 아내도 자기 몫이 알찬 사람이니까. 그러니 혼인신고를 미룬 이유는 서로 속 깊이 사랑하지 않아서라 할밖에. 말이 부부지 결속의 끈은 느슨했던 것이다.
동병상련의 사랑
나는 20년 전에 상처(喪妻)를 했다. 대학 선배의 소개로 만난 두 살 아래 전처와의 10년 결혼 생활은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서른 살에 결혼하여 이듬해와 또 그 이듬해에 연년생 남매를 낳았다. 아이들은 건강하고 영리했다. 안정된 나의 직장과 가정을 소중히 보살피는 아내, 무엇을 더 바란다면 죄를 짓는 느낌이 들 만큼 평범하지만 안온한 생활이었다. 아내가 간암 판정을 받을 때까지는. 그랬던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는 죄라도 지었던 것일까. 서른여덟 살 젊디젊은 아내는 그렇게 우리 세 식구를 남겨두고 1년 투병 끝에 훌쩍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던 아이들을 남겨두고. 아홉 살, 여덟 살 남매는 엄마를 잃었고 나는 나이 마흔에 아내를 잃고 홀아비가 되었다. 이후 직장과 가정을 병행하여 돌봐야 했던 지난 20년, 고달프고 서글프고 버거워 견딜 수 없을 때면 아내의 묘를 찾아가 “나는 이렇게 힘든데 당신은 어쩌면 이렇게 태연히 누워 있을 수 있냐”고 원망과 푸념을 쏟아내곤 했다.
아내가 떠난 후 남은 우리 세 식구는 함께 외식을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내가 없는, 엄마의 자리가 빈 가족 외식은 그 존재의 부재를 더욱 각인시키며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니건만 식당에 앉아 있는 내내 위축감을 느끼게 했다. 부부와 자녀들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볼 때는 더욱 그랬다. 저 평범한 일상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주어질 수 없다는 쓰라림과 함께.
아내를 따라 나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내 책임을 다한 후 이담에 저세상에서 아내를 만나 단단히 생색을 내자며 오기 아닌 오기로 버텨온 것이 어느덧 20년. 30세가 가까운 남매는 아직 미혼이긴 해도 둘 다 직장이 있으니 내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할 즈음, 지금 막 헤어진 두 번째 아내를 만났다. 그간 주변에서 재혼 권유나 소개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해서 마다해왔던 것을 이제는 마음을 좀 열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때였다.
막 헤어진 지금의 아내도 나와 비슷한 시기인 38세 때, 세 살 많은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딸 하나를 데리고 혼자 살아왔다. 설 명절을 지방 시댁에서 보내고 귀경하던 눈길 고속도로에서 타고 오던 차가 미끄러지면서 중앙 분리대를 박으며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였다. 피로를 덜고자 부부가 교대 운전을 하고 있었고, 사고 당시 운전대는 아내가 잡고 있었다. 옆자리의 남편은 중상을 입은 후 병원에서 사망했고, 뒷자리에 앉아 있던 다섯 살 딸과 자신은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
허울뿐인 결혼
딸을 키우며 20년 가까이 혼자 살아온 아내. 야무지게 자신을 지키며 강한 생활력과 다져진 실력, 철저한 자기 관리로 직장의 잔뼈가 제법 굵어져 나를 만날 무렵에는 꽤 높은 위치에 올라 있었다. 나는 지금 대표 자리에 있는 회사에서 당시는 중역이었기에, 어느 경제인 조찬 모임에서 회사를 대표하여 참석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열 개 남짓 마련된 원탁 가운데 마침 한 테이블에 앉게 되어 서로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눈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사별의 아픔을 겪은 공통점으로 인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같은 모임에서 다시 한번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자 우연을 인연으로, 인연을 필연으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갈망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음을 열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봤다고 할까. 느낌이란 게 있다고 할까. 우리는 연민과 연정으로 그렇게 한 마음, 한 몸이 되었다.
우리의 성대한 결혼식은 조찬 모임 참석자들을 의식한 점도 작용했다. 경제인 단체 회원 중에 커플이 탄생한 것도 이례적이거니와 그들의 사회적 신분을 고려할 때 아예 가족끼리 조촐히 치르면 모를까, 식을 올린다면 하객들의 신분에 걸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은 모두 부질없는 짓일 뿐 아니라 크게 벌인 만큼 창피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실상 말이 가족끼리지 그녀에게는 부모님도, 가까운 친척도 안 계셨고, 나도 다른 형제 없이 홀로 자라 연로하신 어머니 한 분뿐이니 조촐하다 못해 초라한 모양새가 될 게 뻔했다. 결국 사회에서 연결된 지인들을 모시다 보니 나와 그녀의 직장 관계자까지 초대하여 그만 식이 커져버린 것이다.
기가 막히게도 아내는 대학 3학년 때 양친을 한날한시에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때도 어느 해 설에 부모님과 함께 지방의 조부모님을 뵙고 올라오던 때였다고 한다. 뒷좌석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졸고 있었던 그녀는 사고 후 혼자 살아남았다. 운명이란 게 있다면 그녀에게는 같은 운명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학생 때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결혼 후에는 역시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었으니. 또한 부모를 잃은 자신의 운명을 딸에게 그대로 넘겨줬다.
굶주린 애정
아내와 그녀의 딸은 처음에는 나와 한집에 살았다. 아내를 위한 나의 배려였다. 또한 두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나의 두 아이는 따로 거처를 마련해서 내보냈다. 한평생 의지하고 살아온 아내와 아직 미혼인 아내의 딸을 떼어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을까. 모녀는 한 몸처럼 결합되어 도무지 내가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았다. 다툼의 원인이 아내의 딸 때문일 때도 종종 있었다. 가령 무질서한 생활 습관이나 늦은 귀가 시간에 대해 몇 번 주의를 줬더니 그게 서운했던지 내게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제 엄마랑만 속닥거린 후 독립을 해버렸다. 그때 나는 내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고, 제 발로 나가준 것이 고맙기도 했다. 내 아이들을 생각할 때 공평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아내와 나 본격적인 둘만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집을 나가는 아내의 버릇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딸의 아지트가 있었으니까. 채 정이 들지 않은 나와 사는 것보다 딸과 지내는 것이 더 익숙하고 편했던 거겠지. 관계가 본격적으로 엇나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부부로 정이 들기도 전에 균열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러고는 오늘의 결별을 맞은 것이다.
나도 아내도 첫 결혼에서 배우자를 일찍 여의고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다. 외롭고 팍팍한 길을 걸으며 사랑에 굶주려 있었다. 상대의 빈 가슴을 채워주기보다 나의 허기가 먼저였다. 그만큼 새로 만난 사람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이다. 남자로서 내가 좀 더 아량이 넓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그 또한 생각일 뿐, 그게 말처럼 쉽다면 지금의 이 상황을 마주하지는 않았을 터. 누구를 탓하랴. 탓할 것은 내 팔자요, 그녀의 팔자일 뿐. 여하튼 지금은 쉬고 싶을 뿐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미국 메이저 방송사에서 우리나라 프로야구 경기를 중계하는 시대가 됐다. 코로나19가 변화시킨 세계의 모습이다. 1982년 해태 타이거즈의 창단 멤버로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레전드이자 선수에서 감독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인 김성한(62) 선수를 만난 것은 지금 한국 프로야구의 시대에 다시 발견되어야 할 가치를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2014년 한화 이글스 1군 수석코치직을 마지막으로 프로야구계를 떠난 그는 여전히 피 끓는 선수로서의 열정을 지닌 채 나주에서 새로운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어언 40여 년이 되어가는 프로야구의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자신의 역할을 모색 중인 그를 만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야구에 대한 미련이 아직 있죠. 여전히 야구 해설을 하면 엔도르핀이 돌고 삶의 활력을 느낍니다. 언제든지 현장에 가고 싶은 마음이죠. 그러나 현실이 되지 않기 때문에…. 현장을 떠난다는 게 처음엔 적응이 안 돼서 엄청 힘들었어요. 야구만 하다 보니 세상 사는 법을 몰랐죠. 지금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데 다른 세상을 사는 기분이에요.”
나주에서 만난 영원한 타이거즈이자 프로야구 레전드 김성한은 마치 선수 때처럼 에너지가 넘쳤다. 그는 현재 나주 혁신도시의 명물 맛집으로 소문난 중식당 ‘The하이난’의 오너이자 CMB광주방송 프로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전남 선거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인연으로 얼마 전 총선에서는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였던 정태호 의원의 유세를 돕기도 했다. 이런 그의 제2인생을 돌아보기 위해선, 삶의 결정적 순간이었던 기아 타이거즈의 감독직에서 물러났을 때로 돌아가는 게 맞을 것이다.
“감독직에서 물러난 뒤 주로 산을 다녔어요. 제가 중간에 잘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감독까지는 탄탄대로로 가다가 기아로 바뀌고 나서 경질되었죠. 해태 타이거즈의 문화와 기아의 문화는 달랐어요. 거기에 잘 안 맞은 거예요.”
김성한은 오로지 야구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삶의 전부였고, 노력한 만큼 엄청난 성과도 거뒀다. 그렇기에 야구를 시작한 후 처음 맛본 엄청난 좌절에 너무 공허해서 사람들 만나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겁나고 무서웠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안 보이는 산으로 갔어요. 가서 생각 많이 했죠. 그리고 동병상련하듯 좌절 앞에 선 사람들과 만나서 얘기를 하다 보니까 내 일은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이런 정도 일에 공허함을 느껴야 하나 싶었어요. 그때 깨달은 게 좀 있었죠. ‘높은 자리에서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지내느라 나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제2인생 나주에서 열다
김성한은 과거부터 ‘우리 같은 사람들은 팬들의 응원을 받으며 살았으니 그걸 갚을 수 있는 사회공헌활동을 꼭 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그가 기아 타이거즈 감독을 끝낸 후 군산상업고등학교 감독을 맡은 건 그런 봉사를 행하고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단 먹고사는 일부터 해결해야 했기에 광주에 식당을 차렸다. 그렇게 5년을 운영하다가 한화 이글스로 간 김응용 감독의 부름을 받고 그곳에서 수석코치로 1년여 동안 활동했다. 그리고 코치를 끝내고 나와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 나주에 야구팀이 있는 학교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다들 야구 열정은 넘치는데 해소할 방법은 없고, 야구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아이들도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지자체를 찾아갔죠. 야구팀과 야구장을 만드는 조건으로 KBO의 전국 유소년 야구대회 유치를 제안했고 나주시가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이 과정에서 그는 나주 혁신도시의 존재도 알게 됐다. 야구팀이 만들어지면 노후에 여생은 편안하게 보낼 수 있겠다고 판단한 그는 건물을 분양받아서 중식당 ‘The하이난’을 차리게 됐다. 요식업은 절대 호락호락한 분야가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The하이난이 체인점인 줄 알 정도로 성공한 상태. 그러나 김성한은 체인점을 만들 생각이 절대 없다고 한다.
“물론 제안은 있었는데 제 철학이 ‘절대 동업은 해선 안 된다’예요. 망해도 혼자 망해야지.”
문재인 대통령과의 첫 인연
김성한은 사업을 하면서 인연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사람은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가 갖게 된 중요한 인연 중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과의 인연이다. 그 일은 그가 우연히 나주 지역 주민자치위원장이 되면서 맺어진 만남으로 비롯됐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주민자치위원장을 해보시라, 동네를 위해 유명하신 분이 일 좀 하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안 한다고 했더니 억지로 주민자치위원에 넣었어요.”
그 후 과정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어쩌다 위원장 선거 자리에 나갔더니 김성한을 알아본 사람들이 ‘위원장을 하려면 저 정도의 네임 밸류는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그 자리에서 박수를 치면서 그에게 위원장직을 맡겨버렸다.
“주어진 일인 만큼 적극적으로 활동했죠. 저는 정치에 관심이 정말 없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문재인 당시 대통령 후보가 나주에 온다는 거야. 간담회가 열렸는데, 저는 식당 일이 바빠서 못 간다고 했어요. 난리가 났죠. 부위원장이 혁신도시에 건의할 게 있으니 빨리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건의는 부위원장이 하쇼. 모두 다 아는 내용일 테니까’라고 말했죠.”
그러나 하도 뭐라고 해서 결국 가긴 갔다. 일하다 말고 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대충 빨간 점퍼를 걸치고 갔는데, 막상 도착하니 다른 사람들은 다들 정장을 입어 혼자만 후줄근해 보였다. 그래도 조용히 들어가서 앉아 있었다.
“간담회가 끝나고 문재인 후보가 와서 악수를 하는데 저를 알아보곤 깜짝 놀라면서 ‘아니, 여기 사시냐? 주민자치위원장이시냐?’라고 묻더군요. ‘그렇게 됐습니다’ 하고 대답하니 ‘어쨌든 많이 좀 도와주십쇼’ 하더군요. 그때 그분을 처음 봤는데, 며칠 지나 전화가 왔어요. 도와주셨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참 그걸 어떻게 냉정하게 못 도와준다고 그러겠어요. ‘잘 알겠습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했죠.”
광주 금남로에서 홈런을 치다
그러나 그때는 문재인 후보에 대한 호남 민심이 안 좋을 때였다.
“김정숙 여사가 먼저 와서 터를 닦기로 했어요. 그리고 내게 ‘여사님을 모시고 다니는 일을 좀 해 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당시 김정숙 여사가 호남 구석구석 안 다닌 데가 없어요. 그렇게 인연이 됐죠.”
그가 호남 민심을 잡은 결정적 순간도 있었다.
“호남 민심을 얻을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제가 옛날에 입었던 유니폼이 생각났어요. 빨간색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 그래서 문재인 후보가 광주 유세를 첫 번째로 오게 됐을 때, 일단 김응용 감독님께 SOS를 쳐서 자리에 함께 모셨고, 문재인 후보에게 제 빨간색 유니폼을 입히고 모자도 쓰게 하고 방망이까지 쥐어줬죠. 금남로에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모였는데, 그 모습을 보더니 난리가 났어요.(웃음)”
문재인 후보의 연설이 끝난 뒤 마이크가 그에게 넘겨졌다. 그런데 당시 김성한은 정치 연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그만큼 부담감이 밀려왔다.
“정치 연설을 들어보면 정치적인 시그니처 단어가 있어요. 저는 그런 말에 익숙하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누구를 비방하거나 타 후보 얘기는 안 하고, 문재인 후보가 너무 순수하고 사람이 좋더라, 이 정도면 대통령 자질이 충분하다, 그래서 좋아서 지지한다는 식으로 대본 없이 제 소신껏 말했어요. 그 후 기왕이면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열심히 하게 됐고 유세차에서 지원 유세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어? 말하는 게 괜찮거든? 그래서 막바지 선거방송에도 출연해 22분간 혼자서 찬조연설을 하기도 했죠.”
NG 없이 한 번에 끝낸 TV 찬조연설은 문재인 후보도 보고 극찬할 정도로 공감이 가는 연설이었다고 했다. 말하자면 대통령 선거 돕다가 자신도 몰랐던 달변가 기질을 발견하게 됐다. 덕분에 감칠맛 나는, 그리고 사이다처럼 톡 쏘는 스피치 재능을 살려 한동안 강연 활동도 했다. 이후에는 CMB광주방송 해설위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국 야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고민 중
정치 얘기를 잠깐 했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김성한은 철저한 야구인이다. 그가 요즘 생각하는 것도 우리나라 야구의 미래에 대한 일이다.
“이승엽, 양준혁, 이순철, 이만수 같은 멤버들이 뭔가 상징적인 일을 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운동하는 사람들 보면 먹고사는 문제에 민감한데, 그것도 중요하지만 부담 없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시급해요.”
그는 선동열 같은 대스타가 국정감사에 나가 수모를 당한 장면을 떠올리며 잠시 분노를 토로하기도 했다.
“(그런 일은) 총재가 안고 가야지. 총재가 ‘현장에 있는 대표팀 감독이 무슨 죄가 있소’ 했어야지. 사실 리더십이 그런 곳에서 필요하잖아요. 그때 현장 감독한테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에 너무나 실망했어요.”
사실 우리나라는 정치권과의 교류가 없으면 제도권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혹시 그에게도 공천에 대한 유혹이 있는지 물어봤다.
“그건 절대 싫어요.(웃음) 제안을 받긴 했는데, 잘못하면 내 인생이 파괴될 수 있으니까.”
그는 정치인은 사양이지만 야구와 관련된 일이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얼마 전 프로야구 초창기 멤버 몇몇과 만나 야구와 관련된 생각들을 나누기도 했다.
“좋은 의견을 많이 들었어요. 팀과 고향을 떠나서 야구 얘기를 하면 다들 공감하니까요. 대한민국 야구 역사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는 거니까요. 지금까지는 다들 개개인의 삶이 바빴지만 이제 시작할 때가 된 거죠.”
너무 많은 사랑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김성한이 은퇴 후 학교에 야구팀을 만든 것도 야구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와 얘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이해가 됐다. 그렇게 학교에 야구팀을 만들어주고 대회도 유치해줬지만 그는 바로 빠져나왔다. 자신이 운영하면 오해가 생긴다는 이유였다. 사람들이 으레 색안경을 끼고 보기에 그는 아예 발을 안 들였다고 했다. 그의 말에는 야구인으로서 순수함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그건 그가 여전히 뜨거운 야구인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야구할 때가 유독 암울한 시대였잖아요? 야구장의 응원 소리도 즐겁다기보다는 좀 우울했죠. 사회와 정치가 그랬으니까…. 응원이 아니라 울분을 토하는 것처럼 들렸다고 해야 하나? 그때는 이기고도 ‘목포의 눈물’을 불렀어요. 가사를 보면 엄청 슬픈 노랜데 그게 응원가였어요. 이겨도 져도 오로지 ‘목포의 눈물’만 불러댔죠.”
요즘은 ‘목포의 눈물’을 안 부른다고 한다.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들의 마음도 달라졌다는 의미다. 그러나 많은 것이 변했지만 야구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랑받는 스포츠다. 그래서 그는 후배들에게 ‘지금 저 환호하는 사람들을 고맙게 생각하고 팬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항상 말한다.
“지금 그 많은 팬들의 마음을 진심으로 느끼지 못하는 선수들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알게 될 날이 올 겁니다. 저는 은퇴하고 많이 느꼈어요. 막상 유니폼을 벗고 나니 그제야 못 봤던 것도 보이고 사람들이 엄청 많이 응원을 해줬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제가 정말 사랑받으며 야구를 했구나 싶었죠. 그래서 요즘 사람들과의 만남이 즐거워요.”
인연의 소중함을 믿는 영원한 타이거즈맨, 김성한은 요즘의 삶이 행복하다고 인터뷰 내내 말했다. 그가 심은 인연들이 이어져서 머무르는 모습이 그에게만은 닿을 테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김성한이라는 레전드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일 것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대홍수가 끝난 후 ‘노아의 방주’가 멈춘 곳은 해발 5000여m 높이의 아라라트 산이다. 노아는 비둘기를 이용해 세상으로 나올 때를 확인한 뒤 제단을 쌓고 첫 포도원을 가꾸는 등 새로운 삶을 이곳에서 시작했다. ‘아라라트’라는 명칭은 ‘우라르투’(Urartu)의 히브리식 이름이다. 우라르투 왕국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 국가 아시리아와 대적하기도 했으나 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에게 멸망당했다. 그 후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총독을 파견해 이 지역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우라르투는 ‘아르메니아’(Armenia)로 불렸다. 이렇게 노아의 후손들이 지켜온 땅 아르메니아는 오랜 시간을 버텨오며 생긴 슬픔의 생채기를 처연한 바람의 아름다운 숨결로 들려주는 곳이다.
가장 오래된 도시 예레반의 품격
아르메니아는 한글보다 1000년 이상 앞서 만든 그들만의 고유문자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3분의 1 정도 되는 2만9000㎢ 면적에 해발 1000m가 넘는 산악지대가 전체의 90%를 차지한다. 총인구는 300만 명.
이 중 35%인 106만 명이 수도 ‘예레반’(Yerevan)에서 살고 있다. 이곳에서는 어디서든 아라라트 산이 보인다.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이 산은 삶의 시작이자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될 아름다운 보금자리다. 그리고 영혼을 치유해주는 곳이다. 치유는 밝은 곳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빛과 어둠이 서로 만나는 곳에서 시작되며 그런 곳에서 기적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수천 년의 슬픔을 덮어온, 자신들의 시작이자 끝인 아라라트 산을 언제나 보고 싶어 한다. ‘베르니사시 시장’ 한복판, 화가의 거리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그림은 아라라트 산과 노아의 방주를 그렸다. 아르메니아에 입국할 때 출입국 심사대에서 여권에 찍어준 스탬프에도 아라라트 산을 의미하는 산 모양이 선명하다.
인간이 살아온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한 곳인 예레반은, 구 소련의 건축가 ‘알렉산더 타마니안’(Alexander Tamanyan)이 아르메니아가 소비에트 지배하에 있을 때 설계한 계획도시다. ‘공화국 광장’에서 ‘자유 광장’을 거쳐 ‘캐스케이드’에 이르는 시내 거리는 신고전주의풍 건물들로 장식해 마치 파리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여행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예레반은 잃어버린 낭만을 되찾아줄 것만 같은 분홍색 빛을 띤 도시다.
해외 유명 브랜드숍과 유럽풍 분위기의 레스토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길은 광장과 광장을 연결해준다. 노천카페에는 까맣고 짙은 눈썹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누군가를 하루 종일 그리워하는 것 같은 눈길로 지나가는 여행자를 바라본다. 원형 형태의 오페라 극장에서 흘러나오는, 체리빛 노을 색을 띤 바이올린의 흐느낌은 이방인의 발걸음을 잡는다. 수업시간을 기다리던 발레 아카데미의 청소년들은 수줍어하면서도 주차 요금기를 사용할 줄 모르는 외부인을 위해 기꺼이 무언의 손길을 내민다. 국민소득이 낮은 국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문화적 품격이 돋보인다. 무엇을 흉내 낸 가벼움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아온 그들만의 자연스러움과 자존감이 스며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르메니아에 다시 가고 싶어 하고, 예레반을 오래 머물고 싶은 도시로 꼽는다.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아르메니아 국화는 ‘물망초’다. 6000년의 역사를 가진 그들에게는 20세기에도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 제국에 의해 행해진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이다. 오스만 제국에서 살고 있던 250만여 명의 아르메니아인들 중 150만여 명이 살해당했다. 이 참화는 1973년 유엔에 의해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규정됐다. 이어서 많은 나라가 공식적으로 제노사이드(genocide, 국민·인종·민족·종교의 차이 등으로 집단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행위)로 인정했다. 이 역사를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건 야만과 폭력으로부터 우리와 후손들의 삶의 가치를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레반의 서쪽 언덕에는 ‘제노사이드 추모 공원’이 있다. 아르메니아를 방문하는 다른 나라 정상들도 이 공원에 꼭 들러 기념식수를 한다. 추모탑 밑에는 절대로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365일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다. 상처를 극복하는 길이 무조건적인 망각은 아니기에 물망초를 국화로 선택한 아르메니아의 아픔에 공감이 된다.
제노사이드 때 학살을 피한 난민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교포)를 형성했다. 현재 해외에 사는 아르메니아인은 800만 명으로 아르메니아 인구보다 많다. 해외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 상당수는 성공한 기업가들이다. 이들은 아르메니아에 도움을 주기도 하는데 그 힘이 막강하다. 미국에서도 유대인만큼은 아니지만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가 정치, 경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동병상련일까. 미국 L.A. 글렌데일의 위안부 소녀상 건립 당시 미국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계 디아스포라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한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줬다.
세계 최초 기독교 공인 국가
아르메니아인들이 특별하게 생각하는 아라라트 산. 그러나 현재 아르메니아인들은 갈 수 없다. 과거 스탈린이 아르메니아 민족주의를 억압하고 무력화하기 위해 이 산을 터키에 분할했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아라라트 산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은 산자락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코르 비랍’(Khor Virap)’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에는 지하 20m 깊이의 동굴이 있다. 아르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그레고리’(St. Gregory)가 왕의 명을 거역해 13년 동안 갇혀 있던 곳이다. 그가 기적적으로 살아나 왕의 병을 고치자 왕은 크게 감동해 기독교로 개종했다.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다. 이때가 301년. 로마보다 91년이나 빨랐다. 코르 비랍 수도원은 7세기 때 동굴 위에 세웠다.
아르메니아는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독교를 지켜왔다. 심지어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도 아르메니아의 정체성을 지켜주고 통일을 시킨 힘은 신앙이었다. 동방정교회, 서방 가톨릭, 개신교가 아닌 ‘아르메니아 사도회’라는 그들만의 독특한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들의 엄숙한 신앙에는 초기 기독교의 순수함과 절제, 소박함이 많이 남아 있다. 아르메니아에서 기독교의 비중이 커진 주요 원인은 그들만의 고유문자로 성경을 번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원은 중요한 예술, 문학, 교육센터이자 ‘카트치카’(khatchkars, 십자가 문양을 판 돌비석)의 완성처가 됐다.
아르메니아에서 가볼 만한 여행지
에치미아진 (Echmiadzin)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중심지로 300년경에 세워진 아르메니아 최초의 교회다.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다고 추정되는 창이 보관돼 있다.
가르니(Garni) 신전, 아자트(Azat) 계곡 헬레니즘시대에서 로마시대에 걸쳐 태양신 미트라를 숭배하기 위해 이오니아 양식으로 세운 신전. 신전 밑 아자트 계곡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주상절리가 있다.
게하르트 수도원 (Geghard Monastery) 고대 아르메니아의 동굴 수도원으로 예수님을 찌른 창이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계곡의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
타테브 수도원(Tatev Monastery) 해발 2000m 높이에 위치한 수도원. 외부에서 침입을 하면 말발굽 소리에 기둥이 흔들렸다고 한다. 고즈넉한 풍광과 코카서스 최고의 경치를 자랑한다.
세반 호수(Sevan Lake) 바다가 없는 아르메니아에서 유명한 호수. 해발 1900m에 위치한 이 호수는 물이 맑고 깨끗해 가재도 잡힐 정도라고. 세반 호수의 송어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흰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정장, 선글라스로 반쯤 가린 무표정한 얼굴, 근육질의 몸. 경호원 하면 떠오르는 클리셰다. 게다가 이 세계는 한동안 ‘금녀(禁女)의 영역’이었다. 꽤나 케케묵은 이 통념을 깨트린 이가 있다. 2002년 국내 보안 업체에 ‘첫’ 여성 경호원으로 입사해 톰 크루즈, 빌 게이츠, 히딩크, 고르바초프, 박세리 등 국내외 유명 인사들의 경호 업무를 수행해온 이용주(李庸朱·39) ADT캡스 경호팀장. 화려한 경력에 놀라고 단아한 외모에 또 한 번 놀라면서 28세의 나이에 팀 수장이 되어 맹활약해온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녀에게는 ‘첫’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따라 붙는다. 경호학과를 졸업한 1호 여성 경호원으로도 주목받았지만 국내 여성으로서 경호학 석·박사 학위도 최초로 취득했다. 입사 5년 만에 경호팀장 자리에 오른 사실도 입지전적인 이력이다. 남자도 쉽지 않은 분야에서 도전을 거듭하고 있는 그녀에게서 근성과 유연성을 자랑하는 파이터가 연상됐다.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환경에서 홀로 견뎌왔을 고독한 시간들도 느껴졌다.
“입사했을 때 여자 경호원이 저밖에 없었어요. 남자 경호원들은 달가워하지 않았죠. 현장에 나가면 하루 종일 같이 있어야 하니 얼마나 불편했겠어요. 그 심정이 이해는 됐지만 제 입장에서는 그런 눈치까지 봐야 했으니 더 힘들었죠. 멘토도 없어서 많이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더 채찍질했는지도 몰라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뭘까 매일 고민했죠.”
여성 경호원 생명은 짧다는 얘기도 자주 들려왔지만 귀담아 듣지 않았다. 선택한 길의 결말도 함부로 상상하지 않았다. 당장 극복해야 할 문제들에 집중하며 몸과 마음의 탄력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후배들에게는 등대 같은 존재였기에, 선도자로서의 역할도 중요했다.
“결혼과 출산은 경력 단절로 이어져 여자들에게 큰 부담이었어요. 저도 지인들에게 ‘결혼하면 보직 변경을 해야 할 텐데 어느 부서를 선택할 거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경호 업무를 더 이상 못 하게 되는 건가 고민이 됐죠. 부서 내에서는 상의할 사람이 없어 인사팀에 상담을 요청했더니 왜 그런 고민을 하냐고 하더군요.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했죠. 그런데 아이를 낳았을 때 또 자격지심이 밀려오더라고요. 출산 과정의 공백기를 과연 이해해줄까 염려스러웠어요. 선례가 없어 속앓이를 했던 것 같아요. 경호학과 나온 여성들이 경찰공무원 시험을 보거나 법원 경비대 등 안정적인 곳에서 일자리를 찾는 건 그 때문이에요. 저는 운이 좋았어요. 회사의 배려를 많이 받았거든요. 후배들은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토대 위에서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됐죠.”
서비스 마인드 없으면 고독한 직업
그녀는 일의 핵심을 재빨리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었다. 남성 중심의 체력과 무술 실력이 주로 요구되어왔던 경호 업무야말로 시대에 맞게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고, 여성의 강점인 부드러움과 섬세함으로 차별화를 꾀해 신뢰를 얻었다. 이를테면 의뢰인이 일정을 마치고 차량에 오르면 편히 쉴 수 있도록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고 최적의 컨디션을 위한 각종 음료도 구비해놓는다거나 식사가 늦어지면 시장기를 달래줄 간단한 간식거리를 준비하는 식이다. 그녀가 경호를 ‘토털 서비스’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경호원이 되고 싶어 하는 학생들에게 조언할 때 서비스 마인드를 강조해요. 의뢰인 입장을 한 번 더 생각하는 경호를 하라는 거죠. 음료수 하나를 살 때도 고민을 해야 합니다. 의뢰인에게 어떤 음료가 더 필요할지 헤아려보는 마음, 그것이 바로 서비스 마인드입니다. 체력 좋고, 오랫동안 잘 서 있는 것이 경호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필 편지를 손에 쥐어준 고르바초프
태권도 4단, 유도 3단, 합기도 2단의 무술 실력을 갖춘 그녀는 슬럼프에 빠지기 전까지는 음대를 지망하며 플루트를 배우던 학생이었다. 플루티스트의 꿈을 접은 건 고등학교 3학년 때. TV에서 우연히 경호원을 꿈꾸는 학생 인터뷰를 보게 되면서부터였다. 평소 운동에도 소질을 보였던 그녀는 어머니의 권유로 용인대학교 경호학과로 진로를 바꾼다. 망설임은 없었다. 악기 연주에 투자한 시간이 아쉽기는 했지만 새로운 선택에 적응하는 데 부지런했다. 당시 TV에 나왔던 학생은 같은 학교 선배로 만나 결혼까지 했다.
“남편은 경호원 꿈을 접었지만 제 얘기를 많이 들어주고 조언도 해줍니다. 9년 연애하고 결혼했으니까 어느새 제 인생 절반을 함께했네요. 둘째 낳았을 때 육아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을 했는데 그때 남편이 ‘네 일을 더 열심히 하면 좋겠다, 대신 내가 부모 역할 더 많이 하겠다’라고 말했어요. 남편 응원이 큰 힘이 됐습니다.”
국내외 명사들의 수행 경호를 도맡아 해온 그녀는 2008년도에 방한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일주일을 꼬박 함께 다녔다. 당시 팔십에 가까운 고령이어서 지병 유무, 복용약 등을 체크하고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면 바로 갈 수 있도록 이동 경로에 따른 병원들도 미리 알아봤다.
“돌발 상황도 있었죠.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사진을 찍으려고 달려드는 사람이 많았어요. 제가 여자라 약해 보였는지 팔을 꺾으며 밀어붙이는 통에 진땀을 흘렸습니다. 하루는 계단에서 넘어지실 뻔해서 신속하게 부축을 했는데 남자 손길이 아니어서 불편하셨나봐요. 괜찮다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러나 차차 제 마음을 알아주셨어요. 마지막 날 호텔에서 나오면서 ‘한국에서 좋은 친구를 알게 돼서 너무 고맙고 좋다’는 내용의 자필 편지를 손에 쥐어주셔서 감동했습니다. 헤어질 때는 할아버지처럼 저를 꼭 안아주셨지요.”
외빈 경호를 하게 되면 팀을 구성해 예행연습을 한다. 묵게 될 호텔에 가서 도면을 받아 내부 구조를 살피고 지방으로 이동할 때는 식당 등의 비상구까지 꼼꼼하게 체크한다. 2011년 필리핀 장관들이 우리나라의 환승문화를 도입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는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체험을 해야 했기에 바짝 긴장했다. 각 노선표는 물론 지하철 어느 칸을 타야 바로 계단을 이용하고 에스컬레이터를 탈 수 있는지 하나하나 확인했다.
“현장에 들어갈 때는 위험 상황에 대비해 시·분·초 단위로 사전 점검을 해요.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해도 갑자기 일정이 바뀌어 당황스러운 경우도 있죠. 대부분 개인적인 업무를 보거나 자녀들하고 올 때는 아이들 관련 일을 보기도 합니다. 그럴 때가 제일 난감하지만 의뢰인들과의 감정 갈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최고가 되고 싶다
그녀는 사회가 흉흉할수록 경호 문의가 많다고 했다. 특히 학교 폭력, 데이트 폭력 때문에 경호를 의뢰하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아이 경호는 학교와 학부모 동의를 받아야 할 수 있습니다. 문의가 오면 저도 아이 키우는 입장에서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상담을 해드립니다. 금전적인 부담 때문에 경호를 맡기지 못하는 분에게는 자존심을 지켜드리려고 하지요. 아이를 경호하면 당장의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친구들과의 관계, 아이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인식에 문제가 생겨 최선의 방법은 아닐 수 있다고 말씀드려요. 요즘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데이트 폭력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해요. 협박 전화 때문에 친구들도 다 떠나고 부모도 힘들어 전화선을 뽑고 사는 의뢰인이 있었는데 상대를 멀리서 봐도 몸을 벌벌 떨 정도로 정신적 충격이 심했습니다. 신변 보호가 우선이지만 이럴 때는 의뢰인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카운슬러 역할도 합니다.”
현재 여성 경호원 비율은 10% 정도에 머물고 있지만 여성의 부드러운 이미지를 선호하는 의뢰인이 많아져 더 큰 활약이 기대되고 있다. 그녀 나이 올해 마흔. 경호원은 나이 제한이 없는지 궁금했다.
“그런 건 없어요. 경력이 쌓일수록 경호는 몸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실감해요. 몸과 마음, 두뇌가 동시에 가동돼야 하지요. 물론 현장에서 일할 때는 무전기와 3㎏에 달하는 삼단봉, 가스총, 전기충격기 등 기본 무기를 지녀야 합니다. 체력관리는 필수입니다. 저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출근하기 전까지 운동도 하고 독서도 합니다.”
2011년도부터 시작한 호신술 재능기부에 이어 최근에는 심폐소생술 강의까지 하고 다니느라 더 바빠진 그녀는 사회에 보탬이 되는 봉사활동을 통해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또 자신에게 따라다니는 최초라는 타이틀도 의미 있고 감사하지만 앞으로는 ‘최선을 다하는 최고’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독려하겠다고 했다.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 무엇을 더 얹게 될지 아직은 모르지만 삶의 매순간이 도전과 열정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음은 분명히 알 것 같다.
사노라면 가끔은 숨을 공간이 필요하다. 젊은 날이었다. 과음을 하고 동료들 몰래 건물 뒤로 돌아가서 시원하게 토악질을 해댔다. 보고도 못 본 척해주면 좋으련만 꼭 뒤따라와서 등을 두드려 주는 선배가 있었다. 썩 고맙지는 않았다. 손등에 흉터를 가리려는데 까뒤집어 들어내게 하며 “야! 우리 톡 까놓고 지내자” 하고는 정작 자신은 드러내지 않는 유형이다.
취업포털 사이트 커리어가 직장인 391명을 대상으로 ‘직장에서 가장 바라는 공간’을 물었다. 응답자의 49.6%가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수면공간을 원했다. 이어 산책 공간 (17.4%), 당구 탁구 등 레저가 가능한 공간(10.2%),자유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카페 또는 매점(8.2%), 따로 건물 밖이나 옥상에 가지 않아도 흡연할 수 있는 흡연 공간(6.7%) 순이었다. 목적은 달라도 남들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공간을 누구나 원한다. 회사 사장님이 들으면 펄쩍 뛸지 모르지만 정말 직원을 위한다면, 나아가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라도 직원 수면공간을 만들어 주는 건 긍정적으로 검토해볼 만하다.
통계자료를 더 살펴보면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않은 미혼의 20~30대는 나만의 공간으로 ‘내방’이 있다. 부모들이 자신의 방을 희생해서라도 자식의 방은 만들어줬다. 결혼 후에는 내방이 있어도 나만의 공간으로 인식하지 않거나 못한다. 심지어 40~50대는 나만의 공간이 자동차 안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은 퇴근 후 집이 아닌 혼자만의 공간인 오피스텔로 간다. 혼자 조용히 샤워를 하고 맥주를 마시며 스포츠방송을 보며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다시, 들어왔을 때의 차림으로 갈아입고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간다.
나이 들면 나만의 공간이 점점 더 없어진다. 커피숍에 가도 온통 젊은이들 천지다. 그들은 나이 먹은 나를 의식하지 않는데 나는 그들이 불편해할까 봐 조바심 나서 오래 있지 못한다. 자식들이 결혼해 집을 나가면서 내 방이 생겼다. 오랜 습관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방이라는 인식이 덜하다. 비상금은 회사에 있는 내 책상 서랍에 두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한국블로거협회’에서는 매주 월요일 회원들끼리 지역별로 모여서 ‘월요브런치클럽’이라는 오프라인 행사를 한다. 퇴직하고 특별히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는 도시의 은퇴자들을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으로 집 밖으로 끌어내는 수단이다. 서로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도 하고 밥도 한 끼 먹는다. 문제는 만나서 수다를 떨 공간이 절대적으로 없다는 것이다. 1만 원의 범위내에서 이루어지는 ‘만 원의 행복’을 하려다 보니 카페에서는 커피 값이 부담되고 오래 앉아있으면 눈총이 느껴진다.
짐승들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숨을 곳을 찾아야 살아남는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자신의 몸을 주위의 나뭇잎 색깔과 같게 보호색으로 변화 시켜 위장술로 숨는다. 사람도 혼자 있는 공간이 있어야 사색도 하고 꿈도 꾼다. 정부나 지자체에서도 은퇴자들에게 이런저런 교육만 시키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갈 곳 없는 도시의 은퇴자들이 혼자서 또는 삼삼오오 몰려와서 떠들고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 ‘우리의 아지트’를 만들어 주는 것도 고려해봄 직하다.
아들이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며느리가 급성 맹장염이어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아이 셋을 당장 맡길 곳이 없다는 것이다. 고양시 일산에 살고 있는 아들네는 요즘 보기 드물게 아이가 셋이다. 맨 위의 손녀가 7세이고 그 밑에 4세 손자와 2세 손녀가 있다. 하나같이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이다.
급한 김에 수원에 살고 있는 딸한테 전화를 했다. 딸은 전업주부이기는 하지만 돌이 갓 지난 아들이 하나 있다. 움직이려니 기저귀, 우유병 등 짐이 한 짐이고 밖에는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려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하소연만 하고 있다.
아이들의 할머니인 필자의 아내는 몇 달 전 새로 얻은 직장에 나가고 있는데 몇 사람이 서로 팀을 짜서 일을 하기 때문에 빠질 수가 없는 상황이다. 결국 불똥은 필자에게로 튀었다. 하지만 필자도 직장에 나가야 해서 손주들을 돌보려면 휴가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런데 아들은 필자가 아이들을 제대로 돌볼지 믿지 못하는 눈치다.
결국 아내가 회사 눈총을 받아가며 아이들을 돌보기로 결정했다.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전철로 이동을 하는데 아들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파트에서 같은 교회를 다니는 이웃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돌봐주기로 했으니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일단은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고 그분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 집도 또래의 아이 셋을 둔 가정이란다, 동병상련이라고 사로의 사정을 잘 이해하기 때문에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선 것 같다. 며칠 뒤 그 집 아이 셋과 우리 손주 셋이 함께 생활하는 사진을 보내왔다. 꼭 어린이집 같은 분위기라서 안도감과 함께 웃음이 나왔다. 물론 아들이 휴가를 내고 아내 간호도 하고 틈틈이 집에 와서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찾아오는 일을 해야 한다. 아들이 집을 비우고 병원에 가는 시간에는 이웃집 아주머니가 틈새관리를 해줄 것이다. 맹장염 수술법이 발전해 예전처럼 오래 병원에 입원해 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도 3일은 걸릴 텐데 흔쾌히 도움을 주겠다고 승낙해주신 분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 그지없다.
도시의 현대인들은 거미줄처럼 꽉 짜인 스케줄대로 너 나 할 것 없이 바쁘다. 갑자기 계획에도 없는 일이 생기면 당황하고 우왕좌왕하게 된다. 도와줄 일가친척이 멀리 떨어져 살면 도움을 주기도 어렵다. 이런 시대를 반영하듯 예전에 없던 산후조리원이 생겨나고 간병인, 요양보호사라는 직업도 생겨났다. 그전에는 이런 일들을 모두 가족들이 해줬다.
도시인들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 이번 일을 겪다 보니 친한 이웃이 멀리 있는 형제들보다 백번 낫다는 생각이다. 살다 보면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던 일들이 닥치기도 한다. 가까운 이웃을 가까이 알아두는 것은 마치 보험에 가입하는 것처럼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글 손성동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 ssdks@naver.com
어느 택시기사에게서 엿본 50대의 자화상
온 나라가 최순실 게이트로 들끓던 어느 날 택시를 탔다. 갑자기 불편해진 다리와 피곤한 몸에 잠깐이나마 휴식을 주기 위해서였다. 푹신한 의자에 등과 목을 기대고 편히 쉬고 있는데 기사분이 말을 걸어왔다. 눈을 감고 건성으로 대답해도 눈치 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걸어왔다. 피곤한데다 슬슬 짜증지수가 올라왔지만 어느 순간 호기심이 발동했다. 사연은 이렇다.
“제가 퇴직을 하고 마땅히 할 일이 없어 택시를 몰고 있는데, 하루 12시간 일해도 한 달에 100만원 벌기가 어려워요.”
“그래요?”
“3년 무사고면 개인택시를 신청할 수 있는데, 그걸 기다리며 참고 있습니다. 근데 그게 만만찮아요.”
동병상련인가. 기사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초보 택시기사라 해도 하루 12시간 일하고 한 달에 100만원 벌기가 힘들다니…. 일주일에 12시간 강의하고 한 달에 200만원 정도 버는 나는 그에 비하면 호사스런 퇴직자가 아닌가! 이번에는 내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하루에 몇 킬로미터 운전하세요?”
“대략 230킬로미터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교통지옥 같은 서울 시내에서 하루 230킬로미터씩 운전하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정말 힘든 노동이다. 3년 무사고가 만만찮다는 것을 처음엔 수긍하지 못했지만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 달에 100만원 벌기도 힘든데 누구는 한 방에 10억, 20억, 100억을 해먹었다니 박탈감이 너무 커요.”
최순실 일당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마음의 상처가 큰 것 같았다. 3년 뒤 개인택시 신청할 날을 기다리며 힘든 나날을 참고 견뎌나가는 초보 택시기사에게 최순실 일당은 정말 못할 짓을 했구나. 저 마음의 상처는 누가 보듬어줘야 하나.
택시에서 내려 걷는 동안에도 초보 택시기사가 한 말이 내내 귓가를 맴돌았다. 무거운 발걸음 위로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고군분투하는 50대들의 자화상이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지금 50대는 지독한 몸살을 앓고 있다. 한창 공부할 자녀도 있는데, 구조조정의 칼바람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자신들의 노후 준비도 불확실하고, 고령의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급한 마음에 자영업에 뛰어들어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은 경우가 허다하다. 100세 시대에 50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연령대다. 50대 10년을 잘 견뎌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노후는 크게 달라진다. 50대 10년을 잘 견뎌낸 사람은 국민연금을 기본으로 하고 부족분을 사적연금이나 다른 자산으로 보완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동안 쌓아온 노후 자산에 손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진퇴양난의 길에 내몰린 50대!
연금해지의 경제학
요즘 연금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순실 일당에겐 연금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겠지만, 일반 서민들에게 연금은 금과옥조 그 자체다. 기나긴 노후를 안정적으로 보내느냐, 불안에 떨며 보내느냐는 연금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과옥조 같은 연금을 깨트려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린 50대들이 많다. 필자의 이야기부터 해본다.
어느덧 1년 전의 이야기다. 갑작스레 닥친 퇴직은 나름 평온했던 필자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렸다. 엄청난 대지진이었다. 이로 인해 지상의 평화로운 날들은 순식간에 극도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고 필자의 일상도 완전히 망가져버리고 말았다. 정신은 혼미해졌고, 가슴은 불구덩이로 활활 타올랐고, 두 발은 갈 길을 잃고 방황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줄기 빛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연금이었다. 연금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계속 유지해야 하나, 해지해야 하나. 한 달 보름 정도의 고민 끝에 아내를 대동하고 해지의 길에 올랐다.
해지의 길에서 자괴감이 몰려왔다. “당신은 연금 전문가라면서 이렇게 해지를 해도 돼요?” 아내의 말에 뜨끔했다. “나만 믿어.” 그 당시 뭘 믿고 아내에게 그렇게 큰소리를 쳤을까? 당시 내게 남은 유일한 길은 ‘배수의 진’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으므로,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우선 몸을 가볍게 만드는 게 중요했다. ‘배수의 진’을 친 장수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거운 갑옷으로 몸을 감싼다면 행동이 굼떠 적의 포로가 되거나 몇 발짝 나가지 못하고 지쳐 쓰러지고 말 것이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입은 갑옷 때문에 오히려 위험에 빠지는 역설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내 형편은 엄청난 무게의 갑옷을 입은 것처럼 무거웠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안게 된 수억의 빚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빚을 안고서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내 몸을 꽉 쪼이며 발걸음을 무겁게 만드는 이 족쇄를 떼어내지 못하면 사즉생(死則生)의 ‘배수의 진’도 별무소용일 터! 그래서 선택한 길이 ‘연금을 죽임으로써 연금을 얻는 방법’이었다. 연금을 해지해 우선 몸을 가볍게 만든 후 난관을 돌파하고, 그 과정에서 획득한 수확물로 즉시연금을 구입한 셈이다. 나는 해지가 불가능한 국민연금을 제외한 모든 연금을 해지해버렸다.
그런데 필자와 같은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 문제다. 올 상반기에만 보험 해약 환급금이 사상 최대인 14.7조원을 넘어섰고, 작년 한 해의 연금저축 해지 금액은 2.5조원에 달한다. 대부분 손해를 감수하며 해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해지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필자처럼 어쩔 수 없이 모든 사적연금을 해지해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부만 해지하면 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흔히 개인연금과 퇴직연금을 합쳐 사적연금이라고 부른다. 개인연금에는 연말정산 때 세액공제 혜택을 받는 연금저축이 있고, 이런 혜택은 없지만 10년 이상 유지할 경우 발생한 이자소득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연금보험이 있다. 연금저축의 경우 5년 이상 유지하고 만 55세 이후에 연금으로 수령하면 3.3~5.5%의 연금소득세만 부담하면 되지만, 중도에 해지하면 16.5%의 기타소득세를 납부해야 한다. 따라서 연금저축을 중도에 해지하면 납입 원금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연금보험은 다소 복잡하다. 연금보험을 중도에 해지하면 세제상 불이익을 보는 일은 거의 없지만 해지 환급금이 납입 원금보다 적을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납입 원금 대비 해지 환급금의 비율을 의미하는 해지 환급률은 어느 보험사 상품이냐, 적용 이율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다. 공시이율형 연금보험의 해지 환급률이 납입 원금의 100%가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공시이율형 연금보험이 대략 7년, 최저이율보증형 연금보험이 10년 정도다.
퇴직연금은 근무기간과 최종 3개월간의 평균 임금에 의해 급여가 결정되는 확정급여형, 적립금의 운용 수익률에 따라 급여가 결정되는 확정기여형, 이직할 때 적립금을 계속 쌓아가는 계정인 개인형 퇴직연금(IRP)으로 나뉜다. 퇴직연금 적립금을 연금으로 인출할 경우에는 나이에 따라 3~5%의 연금소득세를 적용받지만, 일시금으로 인출할 경우에는 퇴직금에 해당하는 금액은 퇴직소득세를, 근로자 자신의 불입금이나 운용 수익에 해당하는 금액은 기타소득세(16.5%)를 적용받는다. 연분연승법이 적용되는 퇴직소득세는 계산이 복잡하지만 가입해 있는 퇴직연금사업자에게 문의하면 알 수 있다.
이처럼 각각의 연금은 세제가 다르고 세부 내용으로 들어가면 더욱 다르다. 따라서 개인 사정으로 연금 해지를 고려할 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
첫째, 충분한 시간을 두고 고민하자. 일분일초가 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해지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 연금은 한 번 해지하면 해지 이전의 상태로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둘째, 해지가 아닌 다른 방법은 없는지 살펴보자. 납입액이 부담스러워 해지를 결심한 경우라면 해지보다는 납입 중단을, 자금이 필요해 해지를 결심한 경우라면 중도인출 후 추가납입이나 담보대출 등의 방법을 먼저 생각해보자. 중도인출 후 추가납입은 연금보험 가입자가 자금 필요시 해약 환급금 범위 내에서 중도인출하고 나중에 추가납입으로 인출액을 보충할 수 있는 제도를, 담보대출은 퇴직연금 적립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제도를 말한다.
셋째, 해지를 해야 할 경우에는 손해율을 따져보고 손해율이 적은 것부터 해지하자. 개인이 손해율을 계산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각자 가입해 있는 금융회사에 문의하면 된다.
가교연금 만들기
지금까지 빚 때문에 고민이 많은 50대의 연금술에 대해 살펴봤다. 이른바 연금해지의 경제학이다. 인생 100세 시대의 50대는 매우 중요한 시기다. ‘50대 10년의 강’을 무사히 잘 건너는 사람은 안정적인 노후를 보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50대에 연금을 무턱대고 해지해버리면 노후에 가택연금당하기 십상이다. 50대 연금술의 핵심은 죽을 때까지 연금에서 소득이 창출되도록 만드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될까?
빚 규모가 미미하거나 없는 50대 중에 퇴직으로 인해 생활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그동안 적지 않은 돈을 벌었지만 자녀교육과 내 집 마련, 부모님 봉양 등으로 수중에 남은 돈이 별로 없는 50대들이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이 나올 때까지 생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일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소득이 적더라도 제2의 일자리를 찾고 가교연금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는 가교연금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
먼저 국민연금을 수령할 수 있는 나이를 확인하고, 지금부터 그 나이까지 안정적인 소득 흐름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가입해 있는 개인연금이 있다면 수령 방법으로 수급기간이 정해져 있는 확정연금형을 선택하면 된다. 이 방법으로도 생활비를 마련하기 힘들다면 퇴직할 때 받은 퇴직 급여를 활용해 부족한 생활비를 보충할 수 있도록 확정연금형 즉시연금이나 인출형 예금상품, 월지급식 펀드 등에 가입한다. 고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즉시연금과 인출형 예금상품과 달리 월지급식 펀드는 수입이 일정하지 못하거나 예상보다 일찍 수입이 중단되는 일이 생길수도 있지만 적극적인 운용을 통해 높은 수익을 추구할 수 있으므로 각자의 위험 성향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 적합한 상품을 선택하면 된다.
가교연금을 구축하고도 남은 퇴직 급여가 있다면 국민연금 수급 연령에 도달했을 때 종신지급형 즉시연금에 가입해 부족한 국민연금 급여 수준을 보완하도록 해야 한다. 그동안에는 개인형 퇴직연금에 넣어두고 계속 운용할 필요가 있다. 이때는 안정적이라는 이유로 낮은 수준의 이율에 만족하지 말고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적극적인 운용을 통해 수익률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퇴직 급여를 가교연금 만들기에 다 써버린 50대라고 불안에 떨 필요는 없다. 집이 있다면 60세 이후에 주택연금을 신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신연금 만들기
50대 중에는 생활비가 전혀 문제가 안 되는 사람들도 있다. 50대 후반의 A씨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임원까지 지내다 지금은 가교직업(bridge job) 형태로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A씨의 고민은 자녀의 결혼이다. 최근 직장에 다니는 아들이 A씨의 재산 상태에 관심을 가지며 눈치를 살피기에, 결국 A씨는 두 자녀에게 결혼자금으로 거액을 떼어주기로 결심했다. 그러고 나니 A씨 부부의 노후생활 자금이 빠듯해질 것 같더란다. 더 이상의 재산을 자식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고 결심한 A씨는 비상자금을 제외한 금융자산은 모두 즉시연금으로, 집은 주택연금으로 활용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 손성동(孫盛東)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
삼성금융연구소 수석연구원,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금연구실장 역임. 현재는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로 있으면서 1인기업가를 꿈꾸고 있다. 공식블로그 ‘꿈꾸는 은퇴와 연금’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부산 동아대와 동서대에 출강하고 있다.
친구는 기쁨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상처를 잔뜩 안기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때론 배에 칼을 푹 박을 수도 있는 게 친구입니다.
곽경택 감독의 영화 를 보면 준석(유오성)과 동수(장동건)는 어린 시절 죽고 못 사는 친구 사이입니다. “친구 아이가”라는 대사가 모든 걸 웅변해줍니다.
하지만 둘이 다른 폭력 조직에 몸담고, 양쪽 조직이 대립하면서 둘은 죽고 못 사는 사이에서 죽이지 못해 안달인 사이가 됐습니다. 그리고 준석이 동수에게 마지막으로 화해를 제안하지만 거절하자 준석 쪽 조직원은 동수를 칼로 찔러 죽입니다. 동수는 죽으면서 “고마해라, (칼) 마이 묵었다 아이가”라는 애틋한 명대사를 남깁니다. “친구 아이가”와 “(칼) 마이 묵었다 아이가”라는 두 대사는 친구들의 엇갈린 운명을 상징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 수십 번은 봤는데 그때마다 항상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진정한 친구였는데 서로 죽일 처지가 됐다면 그 전에 누구 한 사람이라도 “우리 조직 생활 접자. 이러다 서로 칼 박겠다. 이 생활 청산하고 막노동이라도 하면서 모두 행복하게 살자. 서로 하트(♥) 뽕뽕 쏘면서”라고 할 수 없었을까요. 친구란 ‘배려’의 동의어이기 때문입니다.
8월호엔 ‘친구, 이럴 때 의 상한다’는 주제로 동년기자들의 글 네 편이 실렸습니다. 이 가운데 두 편은 친구 사이에서 배려가 얼마나 소중한 덕목인지 알려준 글이어서 마음 절절했습니다.
우선 ‘나 보험 안 든다 한마디가 남긴 것은’(소현영 동년기자)이란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운명의 기복은 친구의 신뢰를 시험한다고 로마 정치인 마르쿠스 키케로가 말했는데 필자는 바로 그 시험에 걸려 넘어졌다. (중략) 1980년 필자는 직장을 나가면서 대학을 다녔다. 그 친구도 같은 대학에 다니면서 가난을 벗 삼아 공부하는 동병상련을 앓고 있어 서로 의지하며 아주 친했다. (중략) 그러던 중 그 친구가 1990년대 후반 회사를 그만두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보험설계사를 한다는 아픈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에 필자는 다시 연락할 수밖에 없었고, 갖은 설득 끝에 그 친구가 필자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리고 오기로 한 날 전화가 걸려와 반갑게 인사가 끝나고 약도를 알려주고 나서 필자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말이 ‘근데 숙아, 난 보험은 안 들을 거다’였다. (중략) 보험을 들라고 찾아오는 것도 아닌데, 친구이기에 당연히 만나러 오는 것인데…. (중략) 당연히 그 친구는 집에 오지도, 연락도 없었다. 그러고는 영영 소식이 끊겼다.”
소 동년기자는 ‘배려의 부재’로 친구를 잃었습니다. 친구에게 “얼마나 힘드니. 용기 잃지 말라”는 말 한마디만 던졌어도 그 친구는 아직 곁에 있을 겁니다.
반면 ‘수다쟁이는 못 참아’(백외섭 동년기자)는 산악 모임에서 말로 회원들을 고문했던 친구를 배려로 끌어안은 내용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부디 친구에게 항상 풍성한 배려를 보내길 기대합니다. 저도 그렇게 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