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소리 찰랑이는 개울 건너에 채미정(採薇亭)이 있다. 차량과 사람들로 북적이는 금오산 관광단지 인근에 있지만 침범 못 할 고요가 고인 숲속의 정자다. 자리 한번 잘 잡았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의해 고려가 망하자 금오산 기슭에 은거한 야은 길재(吉再, 1353~1419)를 기리는 공간이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정자다. 그러니 애초 허투루 자리 잡았으랴. 풍치를 고려하고, 세상의 먼지와 풍문이 틈입할 수 없는 곳을 고르고 골라 터를 정했을 테다. 길재가 떠난 지 350년 후인 조선 영조 44년(1708)에 지었다.
정자 이름 ‘채미’는 ‘고사리를 캐다’라는 뜻이다. 길재의 은둔을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다 굶어 죽은 백이숙제의 초절정 절개에 빗대는 의미로 채미정이라 했다. 경내로 들어서자 채미정 현판을 단 오른편의 정자부터 눈에 쏙 들어온다. 단아한 품격으로 빼어난 건물이다. 16개의 기둥과 우물마루를 두른 정중앙부의 작은 온돌방 하나로 이루어진 정사각형 정자다. 왼편엔 길재의 후학들이 강학했다는 구인재가 있다. 이 역시 수려한 자태로 조선 한옥의 건축적 수준을 웅변한다. 경역 뒤편엔 길재 유허비와 추모 공간인 경모각이 있다.
길재는 어려서부터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8세 때 쓴 시 석별가(石鱉歌)를 보자. ‘자라야 자라야/ 너도 엄마를 잃었느냐/ 나도 엄마를 잃었단다/ 나도 너를 삶아 먹을 줄 알지만/ 엄마 잃은 처지가 나와 같으니/ 내가 너를 놓아준다.’ 총기와 재기와 위트가 비치는 동시다. 남다른 재목다운 싹눈이 파랗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작품이란다. 이 시를 쓸 무렵 길재의 아버지 길원진은 아내와 함께 전남 보성에 살며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다. 어린 아들은 처가에 맡겨둔 채로. 쥐꼬리만 한 박봉으로 세 식구가 입에 풀칠하기는 곤란하다는 판단에 따른 임시방편이었다고 한다.
이런 사정으로 느닷없이 외톨이가 된 아이는 엄마를 그리며 자주 훌쩍였을 수밖에. 그러던 어느 날 냇가에서 자라 모양으로 생긴 돌을 보고 문득 읊조린 게 이 시였다. 사람이 사무치게 고독하면 일쑤 시에 가까운 넋두리가 흘러나오는 법이다. 그런데 아이가 읊은 그것은 재능의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과연 꼬맹이 길재의 재주가 어른 뺨 친다. 자세히 뜯어볼 것도 없이 쉽고 천진한 동시지만, 거기에 역지사지와 동병상련의 정서가 아른거려 은근히 졸깃한 게 아닌가.
이렇게 신통한 자질을 지닌 길재는 ‘논어’와 ‘맹자’를 읽으며 성리학에 눈을 떴다. 아버지의 근무지인 개경에 올라가서는 내로라하는 거물급 문신들과 교분을 텄다. 이색, 정몽주, 권근 등의 문하에 속하면서 본격적으로 학문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성계의 둘째 아들 이방원(훗날의 태종)과 한동네에 살며 친하게 지내기도 했다. 길재는 늦은 나이인 35세 때 성균학정을 맡으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지만 이듬해에 성균박사로 승진하는 등 지체가 없었다. 학문에도 이력과 탄력이 붙어 알아주는 눈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가르침을 청해오는 학생들도 숱했다. 길재에게 호시절이 도래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게 벼슬살이의 끝이었다. 그즈음 고려를 벼랑 끝으로 밀어붙이는 군사 쿠데타가 발발했기 때문이다. 1388년 명나라 요동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해 우왕을 폐위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 발생한 것. 이를 지켜본 길재는 고려의 국운이 다한 걸, 왕조가 바뀔 걸 직감하고 벼슬을 버렸다. 명분도 윤리도 저버린 변괴가 벌어졌다고 판단한 길재가 택한 건 낙향이었다.
왕실이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낙향한 길재는 주로 금오산 기슭에 은거했다. 그러나 혁명을 통해 조선을 건국한 새 왕실은 길재에게 러브콜을 거듭 보냈다. 비록 조선에 안티를 건 인물이지만 지조와 인품은 나무랄 게 없다는 데에서 길재의 쓸모를 찾았던 것이다. 하지만 길재는 거절했다. 1400년엔 이방원이 나서서 태상박사직을 주고자 했으나 임금(정종)에게 상소문을 올리며 고사했다. ‘여자에겐 두 지아비가 없고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없으니, 고향에서 지조를 지키며 노모를 봉양하게 해주소서’라는 요지의 상소였다. 이에 정종이 공감하며 길재의 은거를 수긍했다. 길재가 충절의 아이콘으로 여겨진 건 이때의 일을 계기로 해서였다.
길재는 산문 ‘후산가서’(後山家序)를 통해 산림처사로 은둔한 감회를 피력한 바 있다. ‘학문을 닦으며 어버이를 봉양하고, 임금을 섬겨 요순 세상을 만드는 데 뜻을 두었지만, 하늘이 무너지듯 고려가 붕괴돼 슬프다. 그러나 세상 밖을 방랑하며 몸과 마음을 보전하고 있으니 부귀인들 부러우랴’라는 요지의 글을 썼다. 난세의 강을 건너는 기술엔 여러 가지가 있다. 강자의 편에 서거나, 한판 맞붙거나, 이도 저도 아닌 채 양다리를 걸치거나. 길재의 길은 다른 데에 있었다. 현실 정치판에서 완전하게 물러나 ‘우주’라는 스케일까지 생각하며 안분지족을 도모한 게 아닌가. 그래 몸을 지키고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동시대를 살았던 정몽주, 정도전, 이색, 이숭인 등 수많은 사대부가 살해되는 등 참혹한 말로를 맞이한 사실과 대비된다.
변변치 않은 가문 출신인 데다 벼슬도 부족해 길재의 경제는 오나가나 곤궁했다. 그러나 구차한 처신을 하지 않았다. 가령 붕우(朋友)에 가까웠던 이방원이 식량을 보내주자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없다’며 돌려보낼 정도였다. 학문에 조예를 가지고 후학 양성에도 공을 들였다. 특히 김숙자를 제자로 길러 성과를 거두었다. 김숙자는 훈구파와 각을 세우며 조선 학맥을 양분한 사림파의 영수 김종직의 아버지다. 즉 길재의 학문이 김종직에게로 이어졌다. 길재를 조선 사림파의 조상 중 하나로 간주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채미정에 가을바람 불어 소슬하다. 벌써 저문 낙엽이 바람에 날린다. 하늘은 쾌청해 환한 햇살이 쏟아진다. 그 빛의 대열은 금오산의 암팡진 정상부에 나그네처럼 내려앉아 쉬어간다. 저 산기슭 어딘가에 길재의 초막이 있었다. 거기에서 노모를 봉양하고 공부했다. 고립감을 피할 수 없는 게 은거다. 길재의 고독을 녹여준 게 학문만이 아니었다. 풍류 역시 세월의 강을 건너게 한 나룻배였다. 길재가 20대 때 쓴 글을 통해 그가 일찍부터 풍류에 일가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대목을 보라. ‘산중에서 혼자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춘다. 천지간에 홀로 즐거우니 이게 은자의 낙이 아니겠는가?’ 그는 산야의 기질을 타고난 게 아니었을까. 불사이군의 기개를 산에서 얻었을 것 같다.
라태훈 구미문화원 원장“국제 문화 교류 활발해”
구미시의 문화는 세 개의 축으로 이루어졌다. 유교문화, 불교문화, 산업문화가 바로 그렇다. 특히 유교문화의 발흥이 완연한 고장이다. 일찍이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구미)에 있다’고 했다. 라태훈 구미문화원장은 이처럼 풍부한 문화자원을 문화원 사업의 근간으로 삼아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했다.
(주민욱 프리랜서)
구미시 대표 역사 문화유산을 꼽는다면?
“첫째는 금오서원이다. 야은 길재와 점필재 김종직 등 다섯 선현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구미의 절의 정신과 학맥의 위용이 집약된 곳으로서 가치가 크다. 둘째는 천년고찰 도리사다. 구미는 아도화상에 의해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곳이며, 도리사가 바로 최초로 열린 사찰이다. 불교의 성지라 할 수 있다.”
가치에 비해 아직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문화유산엔 어떤 게 있을까?
“경북 무형문화재인 ‘발갱이들소리’를 꼽고 싶다. 이건 전통 농요다. 구미 사람들의 애환과 정서가 담긴 문화유산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현대의 산업화를 거치면서 거의 잊히다시피 했다. 구미문화원으로선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서 1991년에 발굴해 되살렸다. 구미 사람들이 좀 더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
현재의 문화 공간 중 가장 특별한 곳을 소개해달라.
“구한말 항일의병장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처형된 왕산 허위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구미문화원은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이 기념관 건립의 밑불을 놓은 바 있다. 최근 금오산 채미정 인근에 조성된 ‘구미성리학역사관’도 자랑스럽다.”
라 원장이 생각하는 문화원 활동의 지향점은?
“구미는 인재의 보고로 한국사에 큰 기여를 한 고장이다. 따라서 인물들의 위상 제고를 위한 연구는 물론, 묻힌 인물들에 관한 발굴 사업을 지향하고 있다. 문제는 예산 부족에 있다. 그렇다고 문화사업 확대를 늦추거나 포기할 순 없다.”
그간 펼친 문화원 사업 중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프로그램이 궁금하다.
“아동과 청소년 대상의 ‘만화로 보는 구미 역사인물 시리즈’를 간행해 화제를 모았다. 전국적으로도 사례가 드문 모범사업이라는 평을 받았으니까. 이젠 롤모델이 됐다. 우리는 국제 문화 교류에도 앞장서고 있다. 중국, 일본, 베트남 등의 도시들과 자매결연을 맺어 공연 활동 등 문화 교류를 펼쳤다. 구미의 풍물 육성사업과 지역축제 개발 부문에서도 성과를 거두어 지역문화 창달에 공헌했다.”
현재 지역사회에 부각된 문화 이슈나 숙원사업이 있다면?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으로 사라진 선사도호부 관아 복원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현재 구미시는 천생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면서 그 안에 인동부 관아를 재현할 계획인데, 선사도호부 복원도 추진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라 원장은 시 외곽에 있어 주민 접근성이 떨어지는 문화원을 중심부로 이전하는 문제 역시 화급한 사안으로 본다. 효율적인 프로그램 개발로 한발 앞서가는 구미문화원의 행보는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