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만에 최고로 길었던 추석 연휴가 지났다. 긴 연휴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수많은 며느리들에게 육체적인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늘어난 휴일만큼 더 많은 가사에 시달리면서 허리와 손목, 어깨 등에 통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실제로 정형외과는 명절 연휴 직후가 성수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연세에이스정형외과에서 만난 이순옥(李純玉·64)씨도 명절이 고달픈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보통의 며느리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녀가 겪은 질환은 파스 몇 장으로 끝낼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처음엔 뒤늦게 시작한 취미가 문제라고 생각했죠.”
이순옥씨는 남편을 통해 알게 된 노래 모임을 통해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6년 전 일이다. 처음 배우는 악기라 당연히 쉽지 않았고, 코드를 잡는 손부터 허리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래도 기타를 다루는 것이 익숙해지면서 통증은 점점 사라져갔다. 연주로 인한 즐거움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유독 왼쪽 어깨에 남아 있는 통증은 그대로였다. 이러다 말겠지 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명절이 지나면 통증은 더 심해졌다. 그러다 남편의 무릎 치료를 위해 들른 병원이 믿을 만해서 자신의 어깨도 검사해봤다. 진단 결과 석회성건염이었다.
원인 모를 석회화가 통증 불러와
석회성건염은 어깨에 돌덩이 같은 것이 생기는 병이다. 관절에 석회 물질이 저절로 발생한다는 것이 쉽게 상상이 되질 않는다. 치료를 담당한 정형외과 전문의 윤홍기(尹洪基·46) 원장은 석회성건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석회성건염은 말 그대로 어깨 힘줄 부위에 석회 침착물이 생기면서 염증을 일으키는 병이에요. 이 염증이 통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죠. 사실 이 병의 정확한 원인은 밝혀진 바가 없어요. 힘줄의 노화 과정에서 석회화가 일어난다는 가설과 힘줄 세포의 변성으로 석회가 생긴다는 이론이 지지를 받고 있지만 확인되진 않았어요.”
우리가 흔히 오십견으로 알고 있는 유착성관절낭염과는 완전히 다른 병이다. 어깨에 통증이 발생하는 병이기 때문에 비슷하다 여길 수 있지만, 오십견은 어깨 관절의 운동 범위가 직접적으로 감소되는 점이 가장 다른 부분이다. 석회성건염도 어깨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증상의 정도에 따라 다르다. 주의해야 할 점은 치료를 받지 않아도 나을 수 있다는 오십견에 대한 속설이다. 어깨통증을 모두 오십견이라도 단정 짓고 병을 키울 경우 응급실 신세를 질 수도 있다.
“아팠을 텐데 지금까지 어떻게 참으셨어요?” 윤 원장이 이씨를 만나자마자 건넨 말이다. 윤 원장은 일반 환자보다 커다란 석회덩어리를 보고 걱정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다행히 덩어리 크기에 비해 환자가 느끼는 통증은 비교적 적었다. 석회성건염은 생성기, 휴지기, 흡수기의 3단계를 거치는데, 흡수기에 접어들었을 때는 극심한 통증이 나타난다. 만약 어깨가 너무 아파 응급실을 찾을 정도라면 대부분 석회성건염일 가능성이 많다.
윤 원장은 환자의 통증이 심하지 않아 일단 보전적 치료를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함부로 어깨에 칼을 대기보다는 수술을 하지 않고 치료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심한 통증이 없다면 비수술적 치료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에요. 석회를 없애기 위해 보통 두 가지 방법이 쓰입니다. 석회물이 부드러운 상태라면 주사기로 빨아들여 크기를 줄이고, 딱딱하면 체외충격파 치료로 부순 다음 분산시켜요. 이순옥씨의 경우 체외충격파를 몇 차례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어 결국 수술을 결정하게 됐죠.”
제사를 모셔야 하는 며느리의 숙명
올해로 결혼생활 28년째. 집안에선 둘째 며느리이지만 내 손으로 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성격 탓에 시어머니로부터 모든 제사를 물려받았다. 제사만 1년에 4차례. 설과 추석의 차례상 준비도 그녀 몫이다. 단 한 번도 빼먹은 적도, 소홀히 넘긴 적도 없다.
이순옥씨가 처음 병원을 찾은 것은 설 명절 직후인 지난 2월이다. 집안의 연이은 행사 때문에 어깨 질환이 생긴 거라고 지목하지 않았어도, 대소사를 챙겨야 하는 중압감은 그때마다 어깨 위로 쌓이지 않았을까?
“워낙에 내 일로 남 일로 바빠요. 가만히 있질 못하는 성향이니까. 한때는 백화점에서 일도 했고, 부대찌개 식당도 했어요. 그래도 다행인 건 올해부터는 제사를 한 번에 지내기로 했어요. 부담이 좀 줄어들었죠.”
그녀의 활달한 성격은 여가생활에서도 나타난다. 남편을 통해 알게 된 노래 모임 ‘관악산 통사모(통기타 사랑 모임)’는 활동한 지 10년째다. 이제는 보컬을 담당하는 남편보다 그녀가 ‘핵심 멤버’로 꼽힐 정도다. 이 노래 모임은 ‘관악산 통사모 7080 음악회’라는 제목으로 매달 2, 4번째 일요일에 관악산 제2광장에서 정기공연을 갖는다.
관악산 통사모를 통해 알게 된 티뷰크사회복지재단을 통해 봉사활동도 해왔다. 민원으로 인해 중단될 때까지 신대방동 인근에서 저소득층 노인들에게 간식을 나눠주는 ‘빵 봉사’를 6년이나 했다. 많을 때는 1000명 이상의 사람이 몰렸다. 말 그대로 쉴 틈이 없는 나날들이었다.
어깨를 많이 쓰는 야구선수 사이에서는 “어깨는 쓸수록 강해진다”는 속설이 떠돈다. 그러나 이씨에게도 적용되는 말일까? 윤 원장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강조한다.
“모든 관절은 과부하가 걸리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에요. 많이 쓸수록 좋아지고 건강해진다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나이 들면 어깨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배드민턴이나 탁구 같은 운동 역시 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어요. 전기나 배관과 같은 팔을 올리고 작업하는 직업군 역시 어깨 질환이 자주 발생합니다.”
석회성건염의 불편한 특징 중 하나는 여성들의 발병이 남자에 비해 두 배가량 높다는 것. 연령을 기준으로 하면 30대에서 50대에 가장 많이 발생한다. 발병 원인이 아직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에 왜 여성이 더 많이 걸리는지, 나이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통증보다 더 무서웠던 것
지난 7월 결국 이씨는 수술대에 올랐다. 사실 수술은 그녀에게 그렇게 두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대장암 수술을 통해 투병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어깨 수술은 겁나지 않았다. 대장암은 이미 제거되었고 완치 직전에 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 있었다.
“제가 폐쇄공포증이 좀 있어요. 아주 심한 편은 아니지만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있을 때가 있어요. TV 장식장 안처럼 좁은 공간은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요. 그래서 찜질방도 못 가요. 수술 전 MRI 촬영을 위해 관처럼 좁은 공간에서 30분 정도 움직이지 않고 있어야 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다 때려치우고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죠. 눈 질끈 감고 노래를 부르면서 버텼어요. 그때 아는 노래 모두 불러버린 것 같아요(웃음).”
수술 과정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얇은 튜브 모양의 관절경이 들어갈 수 있도록 어깨의 앞, 뒤, 옆에 작은 구멍을 내 수술을 하는 방식이다. 관절경에 달린 카메라를 통해 석회물이 생성된 부위를 직접 들여다보면서 힘줄이 다치지 않도록 제거해낸다.
윤 원장은 “간혹 수술을 해도 석회물이 남는 경우가 있어요. 이순옥씨의 석회화 부위는 넓은 편이었지만 다행히 모두 제거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수술 후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10일 입원 지시를 받았지만, 몸이 들썩거려 6일 만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퇴원했다. 어깨는 그래도 괜찮을 정도로 빠르게 좋아졌다.
“수술 후 첫날부터 어깨가 잘 움직여 물리치료사가 깜짝 놀랄 정도였으니까요. 운동 치료도 잘되고 몸 상태도 빨리 좋아지자 병원에 계속 누워 있기가 싫더라고요. 일반 사람들보다 회복이 빨랐던 이유는 아마 요가 때문인 것 같아요. 10년 정도 요가를 꾸준히 해왔거든요.”
그녀는 자신의 부지런한 성격과 평소에 해왔던 운동이 몸이 회복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그리고 병원에서 가장 말을 잘 듣는 환자는 자신일 거라며 웃었다. 병원 방문날짜를 어긴 적도 없고, 운동도 빼먹지 않고 했다. 시키는 동작은 통증이 느껴져도 모두 다 해냈다.
이씨는 부지런한 성격이지만, 석회성건염 환자들 대부분은 게으르다. 윤 원장은 석회성건염 환자들은 합병증도 조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일부 환자들은 병세가 호전되지 않는다고 치료를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있어요. 치료가 지겹기 때문일 거예요. 운이 좋으면 석회물이 자연 흡수되는 경우도 있어 통증이 사라지고 힘줄이 회복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운이 나쁘면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들어 일상생활이 더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환자들에게 당장 좋아지지 않아도 성실하게 치료를 받으시라고 권합니다. 아무리 느려도 그것이 가장 빨리 낫게 하는 방법입니다.”
2개월 만에 거의 회복된 몸
수술 후 변화를 묻는 질문에 그녀는 재미있는 답변을 했다.
“이제 차 앞자리에서 뒷자리 물건을 집을 수 있어요. 수술 전에는 뒷자리에 있는 물건을 전혀 집을 수 없었거든요. 기타 연주를 마음놓고 할 만큼 회복되진 않았어요. 통기타는 쇠줄을 잡아야 해서 힘이 필요한데, 아직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요가도 비슷해요. 그러나 정상일 때에 비하면 90% 정도는 회복됐다고 봐요. 더 건강해지기를 기대하지만, 수술 후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자상한 남편은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 그녀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수술이 끝나고 남편 얼굴만 보였다며 당시를 기억했다. 치료 후 어깨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최근 걷기에 집중하고 있다고 이씨는 말했다. 많이 걸으면 두 시간도 너끈히 걷는다고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걸으려고 노력해요. 주위를 둘러보며 걷는 걸 좋아해요. 지하철 계단도 열심히 걷고. 걷는 속도도 꽤 빨라서 젊은 사람들과 함께 걸어도 앞장서서 가요.”
수술 후 하고 싶은 것이 있을까. 그녀에게 묻자 또 의외의 답을 내놓는다.
“요즘 유행하는 플라잉 요가를 해보고 싶어요. 물론 어깨가 완전히 나은 후에 해야겠죠. TV에서 연예인들이 하는 것을 봤는데 멋져 보이더라고요. 남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제게는 일종의 도전 같은 것이에요. 나를 위한 도전을 계속 하고 싶어요. 플라잉 요가를 위해서라도 빨리 완치되고 싶어요.”
귓가의 사이렌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했다. 함께 탄 구급대원은 쉴 새 없이 무언가 물었지만 너무나 혼란스러워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시끄러운 구급차의 신호음을 비집고 들리는 언니의 다급한 목소리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짐작케 했다. 그저 가족이 함께 타고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될 뿐이었다.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에서 만난 김해임(金海任·57)씨는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불과 몇 달 전인 6월 6일의 일이다.
해임씨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우려가 앞섰던 것은 당연한 걱정이었다. 뇌출혈로 응급실에 실려온 환자는 대부분 후유증이 남기 마련이라는 것은 상식에 가까운 일이다. 당연히 뇌와 관련한 장애가 생겼다면 인터뷰 진행이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어느 정도 각오를 했다.
하지만 병원에서 만난 김해임씨의 모습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뇌출혈로 쓰러졌던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건강해 보였다. 의외였다. 그의 이런 건강한 모습 뒤에는 마치 드라마 속 우연처럼 기적을 만들어낸 몇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수영에 한창 재미 붙였는데…”
김해임씨가 수영을 시작한 것은 사건이 벌어지기 6일 전의 일이었다. 지난해에는 남편과 친오빠를 두 달 간격으로 하늘로 보내야 했다. 힘든 날들의 연속이었다. 올봄에는 운영하던 가게를 정리하는 일로 진절머리를 앓기도 했다. 즐거운 일은 조금도 찾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럴 때 친언니가 권한 것이 수영이었다.
“수영에 푹 빠져 있었던 언니가 권하더라고요. 나이 먹을수록 체력이 떨어진다는 느낌도 들고, 운동을 좀 해야겠다 생각했는데 수영이 딱 맞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가까운 동네 문화체육센터에 등록하고 다니기 시작했죠. 올해 6월 1일부터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더라고요.”
그러다 사달이 난 것은 며칠 후인 현충일이었다. 그 전날까지 전조증상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다음 날 수영 수업이 기대될 뿐이었다. 수영패드를 쥐기는 했지만 물에 떠 앞으로 나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대견하기만 했다.
“콧속에 물이 들어가면 좀 찡하잖아요. 그날은 그렇게 찡한 기분이 수영 시작하자마자 들더라고요. 물을 들이마시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그냥 이상하다 싶었는데, 갑자기 머리가 너무 아팠어요. 수영장 안전요원에게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했더니 심각성을 느꼈는지 바로 119에 신고하겠다고 했어요. 이 정도 일로 구급차를 불러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얼마 안 가 뒷목이 너무 아팠어요. 그 이후로는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죠.”
보기 드물게 운 좋은 환자
김씨를 치료한 인천성모병원 신경외과의 장동규(張東奎·44) 교수는 “정말 운 좋은 환자”라고 말했다.
“이렇게 치료 결과가 좋고 후유증이 없는 뇌출혈 환자는 보기 드물어요. 빠른 대처가 환자를 살린 셈이에요. 119에 신고가 접수된 것이 오후 3시쯤이고, 병원에 도착한 것이 3시 30분이었어요. 증상이 나타난 지 30분 만에 의료진이 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으니 초기 대응이 신속했던 거죠. 또 하나 운이 좋았던 부분은 환자의 출혈량이에요. 뇌출혈의 위험도를 결정하는 기준 중 하나가 출혈량인데 환자의 출혈량은 매우 적었어요. 여러모로 행운이었습니다. 처치가 늦었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죠.”
장 교수가 설명하는 김씨의 정확한 병명은 내경동맥박리로 인한 뇌지주막하출혈. 쉽게 설명하면 뇌의 우측 내경동맥 일부분이 찢겨 피가 혈관 밖으로 새어나간 것이다. 자발성 뇌출혈은 주로 고혈압에 의해 자발적으로 터지는 자발성 뇌내출혈과 뇌지주막하출혈 등으로 나뉘며, 뇌지주막하 출혈은 뇌동맥류의 파열에 의한 경우와 혈관이 찢어지는 뇌동맥박리에 의한 경우로 나뉜다. 물론 모두 다 심각한 상황이지만, 그 중에서도 뇌동맥박리로 인한 출혈의 경우 출혈량이 많으면 예후가 매우 좋지 않다. 뇌지주막하출혈 환자 중 내경동맥박리에 의한 뇌출혈 환자는 0.3% 미만일 정도로 흔치 않다.
“환자가 처음 병원에 왔을 때는 약간의 출혈이 있었지만 더 이상은 없었어요. 뇌혈관조영술을 통해 찢어진 부위가 의심되는 부위가 있었지만 뚜렷하지 않아, 일단 환자의 혈압을 안정시키고 나서 이틀 후인 6월 8일에 뇌혈관조영술을 다시 시도했어요. 혈관 모양이 변화된 것이 확인돼 뇌동맥박리에 의한 뇌지주막하출혈이라고 확진하고 스텐트 삽입술을 진행했습니다. 더 이상 출혈이 생겨서는 안 되니까요.”
혈관용 스텐트는 금속으로 된 원통형의 그물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스텐트는 제대로 자리를 잡았지만 며칠 후 확인해본 결과 혈관의 모습이 기대와는 달랐다. 가성동맥류라고 부르는, 피로 찬 주머니가 혈관 밖으로 부풀어 오른 것이다. 그대로 놔두면 재출혈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조치가 필요했다.
1m 퍼팅, 하지만 홀컵이 3mm라면
장 교수는 코일색전술이라는 치료법을 선택했다. 피가 고이지 않도록 주머니에 백금으로 만들어진 아주 얇은 실을 타래처럼 꼬일 때까지 삽입하는 방법이다. 백금사가 자리를 잡으면 피가 응고돼 더 이상 터질 염려가 없는 작은 혹으로 남게 된다.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시술 방법이 매우 까다롭다. 허벅지에 있는 대퇴동맥을 통해 카테터를 삽입했다가 피가 고여 있는 부위까지 미세 카테터를 병변부위까지 삽입하고, 백금사를 넣는 방법이다. 스텐트 삽입술과 비슷하지만 난이도가 훨씬 높다.
허벅지에서 뇌동맥까지 거리는 약 1m 남짓. 일반적인 골프의 퍼팅이라면 초심자도 도전해볼 만한 거리이지만, 이 수술의 목적지는 108mm 홀컵과는 완전히 달랐다. 혈관에 튀어나온 부위는 높이가 1.45mm, 너비가 2.9mm로 여드름 크기에 불과했다. 1m 밖에서 얇은 실을 여드름 안에 넣어야 했다. 게다가 터지면 환자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시술은 6월 22일에 이뤄졌다.
“아무래도 긴장이 많이 됐죠. 코일색전술은 3mm 이상의 환부에 시술하는 것이 보통이니까요. 카테터가 들어가다 출혈이 생길 수도 있고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놔둘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의 사랑이 생명 살려
다시 김씨가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로 돌아가보자. 김씨가 완벽에 가깝게 생명을 살리고 몸을 회복할 수 있었던 그날, 또 하나의 비밀이 있었다. 김씨가 응급실에 도착하고 나서 의료진이 치료를 시작했을 때, 그들에게 악다구니에 가깝게 절규하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김씨의 언니 김해자(金海子)씨였다.
그도 그럴 것이 김씨 자매를 공포로 몰았던 것의 바탕에는 집안의 가족력이 있었다. 자매의 어머니와 큰언니도 뇌혈관이 막히는 병인 뇌경색을 앓았다. 지난해 친오빠도 뇌졸중으로 응급실에 실려가, 입원한 지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자매는 당시 병원에서 좀 더 서둘러줬다면 오빠가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생 해임씨마저 눈앞에서 쓰러지는 것을 지켜본 해자씨는 극도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료진이 서두르고 있었는데도 해자씨는 다급하게 외쳐댔다. 1분 1초가 억겁 같았다. 해임씨는 응급실에 실려와 정신이 없는 와중이었는데도 언니의 그 모습을 또렷이 봤다고 했다.
“저도 머리가 아파오자 돌아가신 오빠 생각이 났는데, 언니도 마찬가지였겠죠.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고 해요. 저도 두려웠고요.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병원으로 가려는 구급차를 규모가 큰 이곳으로 돌린 것도 언니였어요.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큰 병원이 낫다고 판단한 것 같아요.”
골든타임 맹신하면 안 돼
그렇다면 뇌출혈은 왜 발생하는 걸까. 장 교수는 그 원인을 기본적인 데서 찾았다.
“혈관성 질환의 가장 대표적인 원인은 고혈압이에요. 혈압이 높으면 혈관에 문제가 생기기 쉽죠. 특히 나이가 들면 특별한 질환이 없어도 혈압이 오를 수 있어요. 많은 사람이 한두 해 전의 검사결과로 안심하고 자신의 건강을 맹신하곤 하는데, 혈압이 오르는 이유는 다양해요. 그러므로 자주, 정기적으로 혈압을 체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나트륨을 많이 섭취하거나, 흡연 및 기름진 식습관으로 인한 고지혈증도 고혈압의 원인이 됩니다. 신장과 같은 장기의 이상으로도 혈압이 오를 수도 있고, 운동 부족도 마찬가지이고요.”
이밖에 장 교수가 지목한 원인은 바로 가족력이다. 김씨의 경우처럼 가족력이 있다면 본인의 상태도 반드시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 환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또 한 가지는 빠른 대처라고 했다.
“흔히 골든타임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 시간 전까지 오면 언제든 괜찮다는 뜻은 아니에요. 한시라도 빨리 와서 의료진의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해요. 빠른 시간에 적절한 처치가 이뤄지지 않으면 대부분 후유증이 남게 돼요. 너무 늦거나 상황이 심각하면 환자를 살릴 수 없는 경우도 있어요. 매초마다 뇌세포는 죽어가고 있다고 여겨야 해요.”
장 교수가 말하는 후유증이란 우리가 흔히 중풍(뇌졸중)의 후유증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다. 뇌졸중은 뇌출혈과 뇌경색을 아울러 표현하는 말이다. 후유증에는 전신의 한쪽만 마비되는 편마비나 언어장애, 삼키는 데 문제가 생기는 연하장애, 혈관성 치매 등이 있고, 심하면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다. 보행장애가 오면 이동에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주님이 내게 기회주신 것
김씨가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을 때 크게 걱정한 사람들 중에는 그의 학생들도 있다. 매주 하루씩 부광노인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있는데, 그의 소식이 알려지자 일부 학생들이 병실로 달려와 안부를 물었다. SNS 메신저에는 쾌유를 비는 기원들로 가득했다. 또 그가 다니는 교회 교인들로 병실이 가득 차기도 했다고.
병실에 방문했던 지인들이 멀쩡히 대화하고 행동하는 그를 보고 놀라는 모습이 재미있었던 것도 병원에서의 좋은 기억 때문이라고 김씨는 말한다.
“교회 지인분들은 저 때문에 두 번이나 놀랐다고 해요. 처음엔 제가 쓰러졌다는 소식에 놀랐고, 또 한 번은 퇴원해서 교회를 나갔을 때 너무나 멀쩡한 제 모습에 또 놀라신 거죠. 제가 이렇게 건강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앞으로는 더 열심히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최선을 다할 거예요. 노인대학 강의도 적극적으로 할 생각이고요. 또 다른 삶을 살게 된 것과 마찬가지니까 한 사람의 몫을 더 하며 살아야겠죠.”
다른 큰 사고들과 마찬가지로 발단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은행 전산실에서 근무하는 이경호(李京浩·48)씨는 산전수전 다 겪은 프로그래머다. 업무에서는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고도의 보안을 요구하는 업무의 특성상 여러 대의 컴퓨터를 다뤄야 하는 그의 주변은 당연히 복잡한 케이블이 얽혀 있었다. 임시로 가설해놓은 전선이 문제였다. 바퀴가 달린 의자로 몸을 모두 움직여 좌우의 다른 컴퓨터를 조작해야 했지만 케이블이 걸리적거리면서 손과 목만 움직여 다루는 습관이 생겼다. 말 그대로 사소한 것이었다. 별것 아니라 여겼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몸에 피로를 쌓았고,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가 어느 순간 활을 밀어내듯 통증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어느 날 자리에 앉아 스트레칭을 하는데 갑작스럽게 목이 아프더라고요. 마치 담 걸린 것처럼. 별것 아니라 생각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낫지 않았어요. 나중엔 두통까지 와서 도저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되더라고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지키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됐어요.”
이씨의 근무환경은 영화 속 펀드매니저를 상상하면 된다. 4대의 모니터가 눈앞에 펼쳐져 있고, 각각의 모니터는 별개의 컴퓨터에 연결되어 있는 상태. 이메일 등 일반 용도의 컴퓨터와 프로그램 개발용, 서버관리용 컴퓨터 등은 철저히 분리되어 관리된다. 수많은 고객의 예금이 관리되는 만큼 사소한 보안의 허점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목과 상체만 돌려 이런저런 업무를 오래 보면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탈이 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고요. 하지만 허리 때문에 이미 고생해본 적이 있어, 운동을 꾸준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일 있겠나 싶었죠. 그게 오만이었나봐요.”
파스 몇 장으로 낫지 않는 병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도 이씨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 병을 해결해 줄 사람을 마음속으로 결정해놓은 상태였다.
오랜 시간 그들을 이어준 라뽀
세연통증클리닉의 최봉춘(崔鳳春·58) 원장과 이경호씨의 인연은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려 20년의 시간이다. 1997년 이씨는 허리가 아파 이 병원 저 병원을 옮겨 다니다 최봉춘 원장 덕분에 겨우 정상생활을 할 수 있었고, 관리를 위해 계속 인연을 유지했다. 최 원장은 이씨와는 이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약속을 잡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의사와 환자 사이로 만난 시간이 워낙 오래되었으니까요. 지금 자리가 아닌 초창기 개원 시절부터 환자로 저를 찾아주었어요. 누구보다도 몸 상태를 잘 알고, 함께 늙어가는 과정을 오롯이 지켜보고 있습니다(웃음).”
그런데 통증클리닉이라는 병원명이 좀 생소해 보이기도 한다. 통증클리닉은 어떤 곳일까. 최 원장은 “말 그대로 통증의 원인을 찾아 환자를 안 아프게 해주는 것이 목적인 곳”이라고 설명한다.
“통증의 원인은 다양해요. 근골격계 통증일 수도 있고, 신경 통증일 수도 있어요. 환자의 환부를 진찰해 통증의 원인과 치료 방법을 찾습니다. 정형외과와 다른 부분은 외과적 치료에만 국한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씨의 증상은 전형적인 목디스크로 치료가 그리 어려운 경우는 아니라고 했다. 목디스크는 왜 생기는 것일까.
“척추의 뼈와 뼈 사이에는 추간판, 그러니까 흔히 디스크라고 부르는 것이 쿠션 역할을 해줘요. 목뼈에 걸리는 무게를 분산시켜주는 거죠. 그런데 간혹 이 디스크가 삐져나와 목의 신경을 누를 때가 있어요. 디스크가 삐져나오는 경우는 매우 흔한데, 그중 일부가 통증을 유발합니다. 디스크가 삐져나와 있다고 해서 무조건 통증이 있지는 않아요. 대부분의 디스크 질환은 퇴행성입니다. 허리디스크도 마찬가지고요. 노화 과정에서 디스크에 변형이 오는 거죠.”
최 원장은 최근 목디스크 환자의 증가를 의료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달라진 생활환경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과거엔 책과 서류 볼 때를 제외하면 앞을 보면서 생활했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주위를 보세요. 앉아 있어도 서 있어도 전화기만 들여다보고 있어요. 심지어 걸을 때도 말이죠. 이러다 보니 당연히 목에 무리가 올 수밖에 없죠. 또 잘못된 자세도 큰 원인 중 하나예요. 평소에 바른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디스크 수술, 이럴 때만 해야 한다
이쯤 되면 누구나 궁금해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디스크, 수술 해야 하나? “대부분 수술이 필요 없습니다.” 최 원장은 잘라 말한다.
“허리디스크나 목디스크 환자 중에서 수술이 필요한 경우는 정해져 있습니다. 다리에 힘이 빠져 거동이 어려울 정도로 마비 증세가 왔을 때, 대변이나 소변을 보는 데 문제가 생기는 배뇨장애가 왔을 때, 6개월 이상 치료를 했는데도 통증이 지속될 때입니다. 그 외에는 수술이 아닌 치료 방법으로 충분히 증상을 호전시킬 수 있어요.”
최 원장이 또 하나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운동이다. 척추 주변의 근육을 강화시키는 운동을 꾸준히 하면 디스크로 인한 증상을 호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가끔 디스크 질환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만 듣고, 아픈 허리를 운동으로 혹사시키는 분들이 있어요. 이러시면 절대 안 됩니다. 척추 주위 근육을 강화시키기 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어요. 바로 치료입니다. 정상적으로 치료를 받아 디스크 증세를 어느 정도 안정시켜놓고 의사가 안내하는 운동법에 따르는 것이 중요해요. 무턱대고 운동을 무리하게 하다간 오히려 더 악화되기 십상입니다.”
치료 미루다 삶의 질 떨어져
최 원장은 목디스크로 다시 찾아온 이씨에게 목신경성형술을 실시했다. 최 원장의 표현을 빌리면 “대단한 수술이 아닌” 시술이다. 척추뼈 사이의 구멍을 통해 척추 경막외강에 1mm 두께 바늘 모양의 카테터를 삽입해 통증이 발생하는 부위에 약물을 주입한다. 이를 통해 신경 주위의 염증과 유착을 사라지게 만든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고 회복도 빠르다. 시술 후 곧바로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최 원장은 목이나 허리디스크 치료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치료 시기라고 조언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정상생활로의 복귀시간도 단축된다는 이야기다.
“통증이 느껴지는데도 마비 증세가 올 때까지 참고 버티는 것이 최악이에요. 통증이 지속되어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불면이 계속되면 피곤함은 물론 우울증까지 올 수 있어요. 결국 삶의 질이 급격하게 떨어지겠죠. 작은 통증이라도 멈추지 않으면 빨리 병원을 찾아야 합니다.”
디스크 환자들이 쉽게 하는 실수 중 하나는 통증의 위치로 잘못된 진단을 스스로 하는 것. 허리디스크의 대표적 증상은 다리저림인데 다리가 아프다 보니 척추의 문제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최 원장은 “다리가 저리면 허리디스크일 수도 있고, 협착증일 수도 있고, 고관절의 문제일 수도 있고, 엉덩이 주변 신경의 문제일 수도 있어요.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받으려면 병원부터 가야 합니다. 스스로 잘못된 진단을 내리고 방치하면 병만 키우게 됩니다.”
부주의가 큰 병 불러와
이씨가 처음 최 원장을 찾은 것은 허리 때문이었다. 그때도 부주의가 문제였다고 이씨는 말한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예요. 당시 테니스에 푹 빠져 지냈는데, 집에 있어도 코트 생각만 났죠. 1997년 겨울이었어요. 빨리 손맛을 보고 싶은 생각에 몸을 제대로 풀지 않고 덤볐다가 사달이 났죠. 추운 날씨에는 충분히 준비운동을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허리를 삐끗한 뒤 용하다는 한의원과 정형외과 등을 전전했지만 낫질 않아 고생하다 스포츠신문 기사를 보고 최 원장님을 찾게 됐어요. 병원에 와 보니 프로농구 용병 선수 몇 명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여기서는 허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씨는 허리 치료 후 최 원장 추천으로 수영을 시작했다. 허리 근육을 강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고, 덤으로 모든 영법도 마스터했다. 이후 웨이트 트레이닝도 시작했다. 이제는 테니스 라켓을 다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정상이 됐다.
“허리가 아팠을 때는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아침에 지하철로 출근하는데 20m도 걷질 못하겠더라고요. 그렇게 고생을 하고 나니 몸을 제대로 관리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좋아하는 테니스도 한동안 쉬고 몸을 위한 운동에만 집중했죠. 효과가 있었는지 이후에는 최 원장님을 가끔씩만 봬도 될 만큼 호전됐어요.”
몇 년 동안의 투병 때문인지 이씨는 자신이 허리 박사가 다 됐다고 말한다.
“한 가지 질환 때문에 20년 고생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박사 수준이 돼요. 허리에 좋은 바른 자세나 운동 방법 등은 훤히 꿰고 있어요. 아무래도 앉아서 하는 일이다 보니 간혹 통증을 호소하는 동료가 있어요. 그럴 때 이런저런 조언을 해줍니다.”
이씨는 디스크로 인한 ‘두 번째 고생’을 마치고 나서 다시 한 번 ‘바른생활’을 하기로 다짐했다고 한다.
“한동안 운동도 열심히 하고 관리도 잘해왔는데 방심했다가 또 이런 일이 벌어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얼마 전에는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책상을 샀어요. 계속 앉아서 일하는 게 몸에 좋지 않은 것 같아서 틈틈이 서서도 일하려고요. 물론 걸리적거렸던 케이블도 진작에 치웠습니다(웃음). 아파보지 않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짐작조차 못할 거예요. 겪어보니 몸은 방심을 참아주지 않는 것 같아요. 다른 분들도 평소에 제대로 관리하셔서 건강하게 지내시면 좋겠어요.”
“조직검사 보냈어요.”
처음에는 검진을 받아보라는 후배의 권유를 그냥 무시할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건강검진센터에서 의사로 일하는 후배의 제안이 고마워 그럴 수 없었다. 약간의 치질이 있는 상황도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대장내시경을 받고 난 후 후배가 의외의 말을 전했다. 조직검사라니!
그리고 며칠 후 김재규(金在圭·66)씨는 더 놀랄 소식을 듣는다.
조직검사 결과 직장암이었다.
“그때는 깜짝 놀랐죠, 암이라고 하니까. 수술을 해야 하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다들 알 만한 병원으로 향했죠. 문제는 수술시기였어요. 가장 먼저 찾은 종합병원은 4개월은 기다려야 수술을 받을 수 있다 하고, 다른 대학병원에선 3개월 후에 수술하자고 하더라고요. 그 사실을 알고 친구들이 더 난리였어요. 어떻게 암을 안고 몇 달을 사냐고. 그래도 지금 돌이켜보면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우연한 기회에 암을 초기에 발견했으니까요.”
30년 지기 고향 친구들이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그와 인연이 닿은 의사는 한솔병원의 정춘식(鄭春植·51) 진료원장이었다. 등 떠밀리듯 찾은 한솔병원에서 김재규씨는 한숨 돌렸다. “당장 내일이라도 수술할 수 있다”는 의사의 답변 때문이었다. 그렇게 잡힌 수술 날짜는 2007년 7월 11일. 정확히 10년 전이다.
가족에게 숨긴 채 수술실로 들어가다
“사실 수술날짜가 잡혔는데, 아내에게는 말도 못했어요. 딸에게도 마찬가지고요. 괜한 걱정을 할까봐요. 사업한답시고 밤마다 술에 절어 살았으니, 병 얻은 것이 내 탓인 것 같기도 했죠. 그래서 그냥 정밀 건강검진을 위해 일주일 정도 입원한다고만 말했어요. 아내는 의심했지만 적당히 둘러대고 병원으로 향했어요.”
수술하는 날까지 입원실을 찾아 수선을 떨던 고향 친구들과는 달리 정작 김씨는 두렵진 않았다고 했다. 처음 선고를 받았을 땐 멍해지고 겁이 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낯선 이름의 병, 직장암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중년의 경상도 사나이는 링거 스탠드를 한 손에 잡은 채 뚜벅뚜벅 수술실로 걸어 들어갔다. 누워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김씨의 거짓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수술이 무사히 끝나고 입원해 있을 때 친구 중 한 명이 아내에게 전화로 사실을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급히 병원으로 달려온 아내에게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다.
김재규씨는 자신의 병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예전에 운영하던 회사가 디스플레이 관련 원천기술을 갖고 있었는데, 기술을 가져다가 제품을 생산하는 대기업과 거래하는 과정에서 속상한 일들이 많았어요. 소위 ‘갑질’을 많이 당했죠. 그래서 화풀이하듯 술도 엄청 마셨고, 영업을 위해서 참석하는 술자리도 잦았어요. 말 그대로 몸을 혹사시킨 것이 병을 만든 것 같아요. 한번은 오징어 젓갈을 잘못 먹고 비브리오패혈증에 걸린 적이 있어요. 그때 치료해준 의사가 장 속에 여드름 같은 것이 생길 수도 있으니, 정기적으로 대장내시경을 하라고 했는데 지키질 않았죠. 그것도 8년이나 말입니다.”
김씨가 한솔병원을 선택했던 이유는 수술이 당장 가능하다는 것 말고 또 한 가지가 있었다. 지금은 보편화된 수술법이 되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대중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복강경수술을 선도하던 병원 중 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보수적인 외과의사들은 직접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개복수술을 고집하던 시절이었다. 현재도 대장항문전문을 표방하는 병원은 전국에 한 손으로 꼽을 정도로 드물고, 아직도 개복수술 비중이 높은 병원들도 있다.
김씨는 복강경수술만으로도 치료가 가능했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의 혜택을 볼 수 있었다. 복강경수술은 내시경을 닮은 장비를 몸속에 넣어 수술하는 방식으로, 절개 부위가 작고 장운동도 빨라 식사 시기를 앞당길 수 있어 회복속도가 빠르다. 김재규씨가 수술 일주일 만에 퇴원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직장암은 예방과 치료가 쉬운 암
“종양 사이즈는 좀 큰 편이었지만 아직 주변으로는 전이가 안 된 2기 직장암이었습니다.” 정춘식 진료원장은 당시 김씨의 상태를 이렇게 설명했다.
“직장암은 수술 과정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대장암하고 비슷한 성향을 띠는데, 대장은 주변 장기와 붙어 있지 않은 반면에, 직장은 주변에 신경이 복잡하게 자리 잡고 있고 배뇨기능이나 성기능에 영향을 줄 수 있어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아요. 김재규씨의 경우에는 다행히 종양 위치가 항문과 4cm 이상 떨어져 있어서 항문을 유지할 수 있었죠.”
직장암 환자들이 가장 걱정하는 부분은 바로 항문이다. 직장암은 다른 암들에 비해 비교적 쉽게 발견이 되고 성장속도도 더디기 때문에 대부분 치료가 가능하다. 여러 암 중에서 완치율이 높은 편에 속한다. 그러나 문제는 암 위치에 있다. 항문과 가까운 곳에 위치할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항문을 제거하고, 인공항문인 영구장루에 의지해야 한다. 영구장루는 일종의 주머니인데 옆구리로 배설물이 배출될 수 있도록 입구를 만들어 이곳을 통해 나오는 배설물을 받아내는 역할을 한다. 당연히 환자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이유가 되지만 암 재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방법이다. 아직까지는 영구장루를 대체할 만한 획기적인 기술은 없다.
1, 2기의 직장암은 수술만으로 대부분 치료가 끝난다. 전이가 염려되거나 재발이 걱정되는 경우에는 방사선 치료도 하지만 드물다. 과거 2기 환자는 경구항암제를 복용하며 재발을 막기도 했다. 김씨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최근에는 직장암과 대장암 치료를 위한 표적치료제 개발도 이뤄졌지만, 전이가 된 4기 환자에게만 쓰인다.
정춘식 진료원장은 직장암과 관련해 섣부른 자가진단은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괜한 걱정만 늘어난다는 것이 이유다.
“직장암의 초기 증상은 몇 가지가 있긴 해요. 변이 가늘어진다든가, 혈변을 본다든가 하는 것들이죠. 그런데 이러한 증상이 대부분 치질 증상과 겹쳐요. 증상을 자각한다고 해도 정확한 병명을 알아내기가 그만큼 어려워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딱 하나, 대장내시경이에요. 의사가 직접 몸속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죠. 이 방법만큼 정확한 것은 없어요.”
정 원장은 직장암과 대장암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는 암이라고 말한다. 예방이 가능하기 때문이란다.
“대장암과 직장암 모두 예방법이 있어요. 정기적으로 대장내시경을 해서, 발견되는 작은 용종을 제거하는 거예요. 다행히 이런 용종이 모두 암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고, 용종이 암으로 발전하는 데도 약 10년 내외의 시간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40세 이후에는 5년에 한 번 정도 대장내시경을 통해 별다른 변화가 없는지 확인만 하면 되는 겁니다. 만약 용종이 발견된 적이 있다면 위험군이므로 3년에 한 번 정도로 검사 간격을 앞당기면 그만이고요. 또 가족력이 있다면 30세 이후부터 정기검진을 받는 것이 좋아요.”
암이 생겨도 이렇게 조기에 발견할 수 있다면 수술을 통해 완치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수술이 잘못돼 합병증이 생기거나, 간혹 대장내시경 검사 과정에서 검진이 제대로 안 되는 ‘블라인드 포인트’의 종양을 놓치는 경우가 있지만 거의 발생하지 않는 일이다.
정 원장은 “식생활도 마찬가지예요. 특별히 신경 쓰거나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그냥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고, 함께 생활하기를 권해요. 채식만 고집할 필요도 없고 골고루 많이 드셔서 면역력만 잘 유지하면 됩니다”라고 조언한다.
수술 후 달라진 삶
물론 수술 후 정상생활로 돌아오는 데는 2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수술 직후에는 화장실을 하루에도 10번 가까이 가는 생활이 반복됐고, 변의가 오는 상황을 제어하기도 쉽지 않았다.
“배에서 신호가 오면 무조건 화장실로 가야 했으니까요. 시간이 지난 후에는 지사제를 먹고 화장실 가는 횟수도 줄이고 제어할 수 있는 상태가 됐지만, 그래도 평소 같지는 않았어요. 화장실이 없는 버스를 타고 장거리를 가는 것은 꿈도 못 꿨죠. 그래서 웬만한 곳은 차를 끌고 다녔어요. 6개월 정도는 경구항암제를 복용했는데, 이 역시 몸을 무겁게 하더라고요.”
수술 후 김재규씨가 겪은 변화 중 하나는 가족과 주위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어릴 때는 허가받은 장소를 찾아 사냥을 즐기고 낚시도 자주 했지만, 지금은 ‘살생’이라는 생각이 들어 일절 끊었단다. 대신 아내와 보내는 시간을 늘렸다. 다양한 분야의 사업체를 이끌어온 그는 건강을 위해 일도 줄이고 보안 관련 IT 기업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이제 알게 됐다고 말한다.
“그때는 그저 먹을 것으로만 보였던 것들이 이제는 생명으로 보여요(웃음). 수술 후에는 아내와 등산을 많이 다녔어요. 북한산이나 관악산 등 주변에 있는 산이란 산은 모두 다녔어요. 지금은 아내가 더 등산을 좋아할 정도예요. 요즘엔 관절이 좋지 않아 자주 다니지 못하지만, 그래도 아내와의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일부에서는 현대 의학이 신의 영역까지 넘보고 있다고 평가하지만, 아직도 몇몇 질환은 경험 많은 의료진도 쉽게 발견해내기 어렵다. 명의를 찾아 의료 쇼핑을 하는 환자가 적지 않은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병원에 가면 병을 속 시원히 밝혀내고 치료해주길 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더조은병원에서 만난 심재숙(沈載淑·73)씨도 그랬다.
심재숙씨는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꽃중년이었다. 출가한 자녀가 가끔 걸어오는 전화를 기다리고, 남편과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즐기는, 은퇴한 부부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가끔 저리곤 하는 다리가 신경 쓰였지만, 아직은 장보는 일도, 산책을 다녀오는 일도, 집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도 큰 문제 없었다. 집 앞 도봉산 등산은 엄두를 내기 어려웠지만, 주변의 둘레길 정도는 쉽게 다닐 수 있었다.
무릎이나 다리가 문제인 줄 알았는데…
그러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작년 초쯤이다. 다리가 저리는 날이 점점 더 많아졌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극심한 통증이었다. 심재숙씨는 그 당시 자신을 괴롭혔던 통증을 출산의 고통에 비유했다.
“엄청났죠.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처음엔 조금 먼 데를 다니는 것이 힘들었는데, 나중에는 집에 가만히 있어도 욱신거렸어요. 너무 아파 눈물이 날 정도였죠. 마치 다리 속을 헤집고 누가 힘줄을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찾은 곳이 더조은병원. TV를 시청하다 알게 된 병원이었다. 그때만 해도 TV에 출연했던 그 의사를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저 몸 아픈 것이 더 심해지면 저길 가봐야겠다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통증은 더 심각해졌고, 지난해 2월 더조은병원 도은식(都恩植·59) 병원장을 만나러 갔다. 심씨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무릎이나 다리가 문제인 줄 알았는데 허리가 문제라고 하더라고요. 난생 처음 들어본 병명이었어요. 옆구리 디스크라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덜컥 겁이 나서 일단은 통증을 완화시킬 수 있는 시술을 먼저 해달라고 했어요. 병원에선 임시방편이고 또 아파올 것이라고 했지만, 당장 수술을 결정하기엔 두려웠거든요. 그래서 신경성형술 시술만 받고 퇴원했어요.”
병원에서 맞은 크리스마스와 새해
도 원장은 심씨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환자 중 한 명으로 기억했다.
“MRI를 찍어보니 극외측 디스크였어요. 환자들이 병명을 어려워해 옆구리 디스크라고 설명해줘요. 이 질환은 보통의 디스크와 마찬가지로 허리가 노화되는 과정에서 디스크가 밀려나와 생기는 병인데, 뒤쪽이 아닌 옆으로 밀려나오면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골치 아픈 것은 밀려나오는 부위에 신경절이 있는데, 디스크가 이곳을 건드리면 아주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요. 신경들이 몰려 있거든요. 평범한 디스크하고는 비교가 안 되죠.”
병원에서 심씨에게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반년은 평범한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문제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허리가 다시 아파왔다.
“그래도 수술을 피해보려고 다른 병원에 갔어요. 수술 없이도 허리를 잘 고치는 병원으로 유명하다고 해서 찾아가봤는데 허사였어요. 계속 주사만 놔주는데 효과가 하나도 없었죠.”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 동안 통증은 더 심해졌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생각나는 사람은 도 원장뿐이었다. 바로 병원을 찾아 12월 27일로 수술 날짜를 잡았다. 다들 크리스마스며 들뜬 연말 분위기를 즐길 때였지만 그런 것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심씨의 허리는 그마저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수술 날짜까지 기다릴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병원 침대에 누워야 했다.
“수술을 사흘 앞두고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어요. 얌전히 누워 있어도 통증은 멈추지 않았죠. 수술 날짜까지 기다릴 수 없었어요. 그래서 무작정 병원을 찾았어요. 일단 입원부터 해서 무슨 수를 써서든 통증부터 가라앉혀야 살겠다 싶었죠. 지금 생각하면 병원에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결국 새해를 병원에서 맞이했어요.”
디스크 환자 중 극외측 디스크는 약 15%
결국 심씨는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12월 23일 병원에 입원했다. 입원과 함께 통증을 줄이는 처치도 진행됐다. 도 원장은 심씨의 당시 반응이 충분히 이해된다고 말했다. 극외측 디스크 환자들이 대부분 겪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극외측 디스크 환자의 공통점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다는 거예요.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통증과는 차원이 달라요. 그리고 중년 이후의 고령 환자들에게 많아요. 노화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니까요. 다리에 힘이 풀리는 증상도 흔해 다른 병원을 거쳐 오시는 분이 많아요. 안타깝게도 극외측 디스크는 진단 과정에서 발견 안 되는 경우들이 있거든요.”
병원에서 허리 진단을 위해 MRI 촬영을 할 때는 대부분 시상촬영이라는 방식을 사용한다. 허리를 환자 옆에서 본 모습으로 촬영하는 것인데, 일반 디스크 환자를 진단할 때는 이러한 촬영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 시상촬영만으로는 극외측 디스크를 진단하기 어렵다는 것. 척추를 위에서 본 모습으로 단면을 촬영하는 관상촬영을 해야 극외측 디스크를 잡아낼 수 있다.
디스크 환자 중 극외측 디스크 환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 더조은병원에서 2014년 12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1년간 내원한 환자 138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극외측 디스크 환자는 약 15% 정도였다. 적지 않은 숫자다. 디스크 환자 중 15% 정도는 자칫 제대로 된 진단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도 원장은 극외측 디스크는 수술도 쉽지 않다고 설명한다. 디스크나 튀어나온 부분이 손이 쉽게 닿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평범한 디스크는 등 쪽으로 튀어나오니까 절개 부위가 크지 않아도 수술이 가능해요. 수술시간도 짧고 회복도 빠르죠. 그러나 극외측 디스크는 수술이 꽤 까다롭습니다. 만 명이 넘는 환자를 수술한 저도 두세 시간이 훌쩍 걸리니까요. 또 자칫 수술이 제대로 안 되면 다리저림과 같은 후유증을 앓을 수도 있어요. 의사 입장에선 신중을 기해야 하는 수술입니다.”
요즘 척추수술을 하는 신경외과 전문의들에게는 한 가지 딜레마가 있다. 병원들이 무리하게 척추수술을 한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사회에 확산되면서, 수술을 꺼리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것. 도 원장은 제대로 된 진단을 통해 정확한 치료가 이뤄지면 문제가 없는데, 나쁜 선입견 때문에 되레 수술을 받아야 할 환자가 수술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실제로 최근 신경외과나 정형외과 병원에선 전체 치료 중 수술이 차지하는 비율이 몇 % 이하라며 광고할 정도다.
“일종의 교통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증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환자에게 맞는 치료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해요. 허리 수술이 필요 없다면, 왜 1년에 12만 건 이상의 수술이 전국에서 이뤄지겠어요. 분명 허리 상태에 따라서는 수술만이 해결책인 경우가 있어요. 환자에게 한 가지 치료법을 고집하고 강요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다행히 수술이 필요 없다면 보존적 치료를 하고, 어쩔 수 없다면 수술 치료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의 사랑 큰 힘 돼
심씨의 수술은 모두의 바람처럼 무사히 끝났다. 미국에 있다 놀라 귀국한 막내딸과 남편이 병원을 지켰다.
“수술이 생각보다 무섭지는 않았어요. 허리에 칼을 댄다고 해서 처음엔 겁이 났지만, 워낙 통증이 심해서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마음이 컸죠. 그리고 옆에서 늘 지켜주는 남편이 있어서 두렵진 않았어요. 제 수술 때문에 남편이 고생 많았죠.”
사실 심씨의 큰 수술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3년 건강검진에서 대장암 판정을 받고 암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때도 힘이 되어준 사람은 남편이었다.
인생을 살면서 찾아온 몇 차례의 고비는 부부의 사랑을 더욱 견고하게 해줬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아침과 저녁 한두 시간의 짧지 않은 산책을 거르는 법이 없다고 심씨는 말한다.
“남편에겐 늘 감사한 마음이에요. 수술 후 집안일도 많이 도와줘서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이젠 주변에서 허리 치료에 대해 물으면 수술도 아프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여유를 찾았어요. 빨리 수술할 걸 괜히 겁냈다 싶기도 해요. 앞으로 허리 때문에 더 이상 고생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스트레칭을 열심히 하고 있어요. 몸이 좀 더 나으면 다른 운동도 해볼 생각이에요.”
극외측 디스크는 보통의 디스크와 마찬가지로 허리가 노화되는 과정에서 디스크가 밀려나와 생기는 병인데, 뒤쪽이 아닌 옆으로 밀려나오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골치 아픈 것은 밀려나오는 부위에 신경절이 있는데, 디스크가 이곳을 건드리면 아주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요.
인간의 삶에는 어쩔 수 없이 지나야 하는 많은 관문들이 존재한다. 학교생활이나 입시, 첫사랑 등 사회적, 감정적 과정들을 거친다. 사람의 몸도 비슷하다. 성장에 따른 성장통도 있고, 연령별로 예방을 필요로 하는 질병도 있다. 사춘기도 마찬가지. 갱년기는 그중 가장 대표적인 관문이다. 노화를 비켜갈 수 없는 누구나 이 갱년기를 경험한다. 강동경희대학교한방병원에서 만난 김진분(金珍粉·56)씨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이 과정을 맞닥뜨린다. 그리고 이어 찾아온 당황스러움은 평범한 중년 여성들과 다르지 않았다.
건강한 남편과 별 탈 없이 잘 자라준 아들 녀석, 곧 취업을 앞둔 딸아이. 김진분씨의 가정은 전형적인 화목한 가정이었다. 마치 행복을 대표하는 광고 속 모델의 미소와 같은 그런 흠잡을 것 없는 나날들이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아차 싶었다. 이미 어둡고 긴 그림자가 그에게 드리워져 있었다. 갱년기였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병, 갱년기증후군
김씨는 처음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이야기한다.
“언젠가부터 목과 어깨가 뭉쳐 아프기 시작했어요. 그저 피로가 좀 덜 풀렸거나 무리한 부분이 있어 그런가 싶었죠. 이러다 말겠지 했는데 도통 사라지질 않았어요. 몸이 불편하니 잠도 잘 안 오고, 잠을 제대로 못 자니 피로는 점점 더 쌓여가고, 악순환이었죠.”
안 되겠다는 생각에 동네에서 마사지도 받아보고, 혹시나 해서 정형외과도 가봤다. 당연히 별 문제 없다는 소리만 들었다. 용하다는 한의원도 가봤는데 역시 허탕이었다. 하지만 증상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냥 찌뿌둥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운동량을 늘려보면 어떨까 생각했죠. 그래서 많이 걷고 할 만한 운동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어느 날부터 발바닥이 찌릿찌릿해지면서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졌어요. 몸이 무거워서 좀 움직여보고 싶은데 발이 받쳐주질 않으니 여러모로 곤란했죠.”
그러고 나서 그녀는 갱년기 증상을 겪는 중년 여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증상과 마주친다. 바로 울화였다. 누군가에게 화를 잘 내지 못하는 김씨의 성격이 더해져 중년의 홍역은 그대로 독이 됐다. 가족이나 누군가에게 윽박지를 법도 한데 모두 다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품은 화는 다시 열이 됐다.
“밤에 잠을 못 자겠더라고요. 몸이 덥고 뜨거우니 겨우 잠이 들어도 얼마 안 돼 깨버리는 과정이 반복됐죠. 이런 좋지 않은 과정이 반복되니까 혹시 큰 병은 아닐까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병원을 찾기로 마음먹었어요.”
다행히 다시 물색한 병원은 효과가 있었다. 비슷한 증상들로 고생한 지인의 추천 덕분이었다. 그렇게 지난 4월 경희대학교한방병원 한방여성건강클리닉 이창훈(李昌勳·53) 교수를 만났다.
이창훈 교수는 김씨를 갱년기증후군 증상을 겪는 중년 여성의 전형이라고 정의했다. 그중에서도 비교적 초기에 속한다고 설명했다.
“나이를 먹는 과정에서 4명 중 1명은 이런 증상을 겪기 마련이에요. 특히 여성의 경우 폐경을 겪으면서 신체의 급격한 변화를 겪는데요, 사람에 따라 적응을 하기도 하고, 못하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지요. 가장 대표적인 증상인 열이나 안면홍조 등도 이 때문이에요. 나이가 많아지면서 마르는 것 역시 열 때문입니다.”
남성보다 여성의 증상이 더 다양
이 교수는 누구나 갱년기를 통해 신체적, 정신적 변화를 겪는데 김씨처럼 신체적 질환으로 나타나는 경우를 갱년기 장애라고 설명했다.
“갱년기는 대개 40대 중반에서 50대 중반 사이를 말하는데 여자가 남자보다 10여 년 정도 일찍 맞는 경향이 있어요. 남자도 갱년기 증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자는 남자보다 생리적인 면에서 변화가 많고, 정서적인 면에서도 민감한 편이어서 심신에 다양한 증상이 나타납니다.”
최근의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경향과 달리 갱년기는 심하면 30대 초반에도 증상이 나타나는 조기화를 보이고 있다고 이 교수는 덧붙였다. 잘못된 식습관이나 운동 부족, 스트레스, 환경적 요인 등이 여성호르몬의 감퇴를 촉진한다는 것. 또한 난소낭종 등으로 난소를 일찍 절제했거나, 자궁근종 등으로 자궁을 적출한 경우에도 수년 내 갱년기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단다.
그렇다면 갱년기 증상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 교수가 설명하는 갱년기 증상은 흔히 알려진 것 이상으로 다양했다.
“갱년기 과정에서 겪는 증상들은 셀 수 없이 많아요. 안면홍조에서부터 식은땀, 불안, 가슴 두근거림, 불면증, 잦은 소변, 요실금 등이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갱년기 증상입니다. 하지만 이외에도 두통, 목의 통증, 어깨 결림, 손발 저림, 냉증, 요통, 발 통증, 질 건조로 인한 질염 등이 나타나기도 하고, 빈혈이나 갑상선 이상, 우울증, 유방암, 관상동맥질환, 소화기질환, 담석증, 담낭염, 방광염증, 자궁암, 골다공증, 각종 관절염과 관절 부상 등도 갱년기증후군과 무관하지 않아요.”
또 폐경 후 시간이 지나면서 골다공증이 급속도로 진행되기도 하고, 고지혈증이 증가하면서 고혈압, 심장병, 중풍과 같은 심혈관 질환이 발생한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김씨는 첫날 이 교수를 만나 치료했던 날을 기억했다.
“교수님을 처음 찾은 날 굉장히 힘들었어요. 병명도 모르겠고 게다가 큰 병일지도 모른다는 걱정까지 있었으니까. 처음엔 몰랐었는데, 온갖 걱정을 하고 있었나봐요. 교수님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제 이야기는 하소연으로 바뀌어 있더군요. 교수님께서 너무 공감을 잘 해주신 덕분인 것 같아요. 마지막에는 부끄럽게 눈물까지 들켰으니까요(웃음).”
김씨는 이 교수가 증상에 대해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을 해준 덕분에 온갖 걱정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녀는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했단다. 특히 “병은 마음에 담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병원에 두고 다니는 것”이라는 이 교수의 조언이 가장 와 닿았다고 말했다.
‘몸의 적응’에 초점 맞추는 한의학
이 교수가 선택한 치료는 초기에 선택하는 치료법 중 하나인 수기치료. 병원에 따라 추나요법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치료법은 굳어져 있는 근육을 풀어 긴장도를 완화하고 몸의 순환을 도와준다.
“양의학이 갱년기로 인한 호르몬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데 집중한다면, 한의학의 관점은 다소 다릅니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몸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을 씁니다. 노화로 인해 부족함이 계속되더라도 불편함이 생기지 않게 만드는 것이 치료의 지향점입니다.”
좀 더 자세히 풀이하면, 갱년기증후군의 한방치료는 크게 노화로 인한 생식력·생명력 저하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을 개선하는 방법과, 스트레스 등 정서적인 변화로 나타나는 현상을 개선하는 방법으로 구분한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한약치료는 초기 또는 갑자기 나타나는 증상과 만성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을 구분해서 처방하는데 가미소요산, 시호가용골모려탕, 육미지황탕, 사육탕, 귀비탕 등의 한약이 쓰인다. 이외에 침이나 뜸치료, 수기치료 등 환자에 따라 다양한 치료 방법이 있고, 환자에게 맞는 운동법을 추천해 집에서 하도록 만드는 자율훈련법도 스트레스 완화에 효과가 좋아 자주 쓰인다.
주치의처럼 새로운 동반자로
김씨는 모든 증상이 완치됐지만 계속 병원에 다닐 것이라고 선언했다. 의외였다.
“이번 경험은 제게 건강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됐어요. 그래도 병이 더 심해지기 전에 맘 맞는 의사를 만나 치료할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교수님 조언대로 식생활에도 변화를 주고, 운동도 시작했어요. 아쿠아로빅 수업도 시작했고, 수업이 없는 날을 대비해 헬스클럽도 끊어놨어요. 또 아파트 주변 산책로가 잘되어 있어서 걷기운동도 꾸준히 하려고 해요. 하지만 무엇보다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겠다고 다짐한 것이 가장 큰 변화인 것 같아요. 새롭게 주치의가 생겼다 생각하고 교수님도 뵙고 가족의 건강도 부탁드릴 계획이에요.”
이창훈 교수도 갱년기 증상이 나타나면 무조건 참지 말고 병원을 찾아 도움을 받을 것을 권했다.
“자신의 갱년기 증상이 어떤지는 갱년기지수(Kupperman’s index) 설문지를 통해 어느 정도 체크해볼 수 있어요. 만약 심상치 않다 싶으면 바로 병원을 찾아 조기치료하시길 바랍니다. 요즘 한방병원에서는 적외선 체열촬영법을 통해 상열감은 물론 전신에 나타날 수 있는 통증, 수족냉증, 손발 저림 등을 시각적으로 판단하기도 하고, 수양명경경락기능검사로 스트레스 상태나 민감도, 자율신경 균형 상태 등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참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시는 경우가 많은데 무모한 일이에요. 간단한 치료만으로도 나을 수 있으니 꼭 조기에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사고는 예기치 않게 다가온다. 평소에 충분히 잔병치레를 했다고 봐주는 일은 없다. 부양하는 가족이 있어도 피해가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 것은 온전히 당사자의 몫이다. 강서 나누리병원에서 만난 이미정(李美正·54)씨도 그랬다. 연이어 시험에 들듯 시련이 다가왔지만, 그저 묵묵히 이겨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배정식(裵政植·41) 병원장을 만난 것은 자신과 주변 것들에 대해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았던 그녀의 삶에 준 선물 같은 보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은 그저 즐거운 일뿐이었다. 악몽 같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전조는 없었다. 조금 전까지 머물렀던 사우나의 열기가 아직 몸에 미열처럼 남아 있었지만, 바람을 시원하게 느끼게 해주는 기분 좋은 것이었다. 옆자리 동네 언니와의 대화 주제는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었지만 언제나처럼 즐거웠다. 늘 다니던 길 위에서 달리는 차들이 주는 공포도 없었다.
그때였다. 승용차 한 대가 벼락같이 나타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차는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속도를 줄일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 속도는 왜 줄이지 않는 건지, 저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는 건지, 찰나에 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그 의문들이 머리를 떠나기도 전에 섬광이 번쩍였다. 그리고 엄청난 충격이 그녀를 덮쳤다. 사이렌 소리에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구급차 안이었다.
음주 차량이 빼앗아가 버린 삶
이미정씨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유난히 미간을 찌푸렸다.
“2010년 사고가 났어요. 나중에 들었는데, 가해 차량 운전자가 음주운전을 했다더라고요. 제대로 감속할 생각도 못하고 냅다 들이받았나 봐요. 119 구조대원들이 저를 차에서 꺼내기 위해서 절단 장비까지 써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결국 그날의 사고는 이미정씨의 몸에 생채기를 냈다. 치아가 4개나 부러졌고, 늑골도 부러져 꽤 오랫동안 고생해야 했다. 하지만 정말 치명적인 상처는 다른 곳에 났다. 바로 허리였다.
“허리 디스크 파열이었어요. 디스크 수핵이 터져 수술을 받아야 했어요. 대학병원에서 수술 후 퇴원하기까지 3주나 걸렸어요.”
사고 후 몇 년이 지나면서 허리는 조금씩 나아지는 듯싶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거동은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상황이 됐지만, 성급한 그녀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반찬장사를 하면서 보낸 십수 년의 세월은 그녀를 뭐든 자신의 손으로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변한 성격이 이번에는 화를 불렀다.
“건강에 좋다고 등산을 다녔어요. 허리 아픈 사람한테는 쥐약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죠. 허리가 아파오길래 더 열심히 운동하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반대였어요.”
상태는 수술 직후보다 더 좋지 않았다. 집에서 20분 거리인 시장까지 한 번에 걸어갈 수가 없었다. 10분만 걸으면 온몸의 맥이 풀리면서 주저앉았다. 밤이 되면 다리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저려왔다. 그 고통의 날들 속에서 배정식 병원장을 만났다.
‘척추수술 후 통증 증후군’으로 다시 병원에
배정식 병원장은 이미정씨를 쉽지 않은 환자로 기억했다.
“임상적으로 아주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전후 사정이 좀 복잡했어요. 일단 다른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오신 상태였고, 또 그 수술이 잘못된 수술은 아니었으니까요. 이미정씨의 경우는 두 가지 증상이 겹친 상태였어요. 척추에 신경이 지나가는 통로인 척추관이 좁아져서 생기는 척추관협착증 증세도 있었고, 척추수술을 한 환자에게서 간혹 나타나는 척추수술 후 통증 증후군 증상도 있었죠.”
증후군은 치료 과정에서 섬세한 주의가 필요하다. 트라우마라는 심리적 불안이 병의 치료 과정에서 많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특히 만성통증 환자는 우울증을 동반하기도 해서 배 원장은 신체적인 치료도 중요하지만 환자가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환자가 어떤 마음가짐을 갖는가가 치료에 많은 영향을 끼쳐요. 환자의 표정을 보면 치료가 어떻게 진행될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데요, 경험상 환자가 시술에 대한 믿음이 높으면 수술이나 예후가 좋은 경우가 많아요. 의심하거나 불안해하면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고요.”
척추관협착증은 시니어들이 노화 과정에서 자주 겪는 병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어 척추가 노화되면서 척추 뼈마디가 굵어지고 뼈와 뼈 사이에 있는 인대가 두꺼워지는데 이 과정에서 신경이 압박당하기 때문이다.
허리 디스크와 구분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은 허리를 굽혀보는 것이다. 허리를 굽히거나 쪼그려 앉았을 때 통증이 사라지면 척추관협착증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허리보다 허벅지나 엉치 같은 부위에 더 큰 통증이 있다.
“허리를 많이 쓰는 직업을 가진 분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어요. 농부나 주부에게서도 이런 증상이 나타나곤 하죠. 보통은 약물을 이용한 주사 요법으로 3개월 정도 치료해보고 수술 여부를 결정하게 됩니다. 심한 경우 대소변 기능 장애가 오기도 해요. 하지만 실제로 수술을 하는 경우는 10%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허리 질환 예방은 근육 강화가 최고
그렇다면 건강한 허리를 유지하는 방법은 없을까? 배 원장은 허리 근력을 강화할 수 있는 운동을 하라고 권고한다.
“척추 근육이 단단해지면 뼈와 신경, 인대에 주어지는 스트레스가 분산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어요. 허리 디스크에 무리를 주지 않는 운동을 통해 근육을 강화하면 허리 질환을 상당 부분 예방할 수 있습니다.”
배 원장이 추천한 운동은 30분 정도 속보로 걷는 것이다. 시간을 30분 정도로 제한한 것은 너무 많이 걷게 되면 오히려 척추관협착증을 악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매일 차량으로 이동하는 일상이라면 두 정거장 정도 미리 내려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운동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배 원장의 설명이다.
또 다른 추천 운동은 수영이나 아쿠아로빅 같은 수중 운동. 물속에서 운동을 하면 척추나 무릎 관절에 중력으로 인한 부하가 적게 걸리기 때문에 몸에 무리를 주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바닥 생활은 허리에 안 좋다. 바닥에 앉았다 일어나는 동작의 반복이나 바닥에 허리를 굽히고 앉는 자세, 무거운 물건을 드는 자세는 허리건강에 치명적일 수 있다고 배 원장은 설명한다.
“무거운 물건을 들 때는 가급적 물건과 몸을 밀착시켜 들고, 정면을 바라보면서 들어야 허리 부상을 예방할 수 있어요. 쉴 때는 가급적 등받이 있는 의자를 이용하시고요. 재채기할 때도 복압으로 인해 디스크 파열이 올 수 있으니 체중 분산 등 주의가 필요해요.”
허리수술 하지 말아야 한다?
이미정씨도 약물 요법으로 치료를 시작했지만, 예후가 그리 좋지 않았다. 결국 배 원장은 수술을 결정했고, 이씨는 수술 결정에 동의하는 데 큰 걱정은 없었다고 한다.
“사고를 당하고 처음 수술대에 누웠을 때가 무척 겁이 났죠. 허리수술은 위험하다는데 큰 사고로 수술까지 하게 됐으니까요. 하지만 두 번째 수술은 담담하더라고요. 수술을 결정하는 것도, 수술대에 누워서도 마음이 편안했어요. 원장님을 믿고 모든 걸 맡기자고 생각했어요.”
외과의사 입장에선 의사를 믿고 몸을 맡겨주는 환자가 고맙다. 허리수술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와 소문들이 쌓이면서,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색안경 끼고 바라보는 환자들이 적지 않은 탓이다. 배 원장도 그런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다.
“실제로 무조건 수술을 거절하는 환자도 있어요. 하반신에 마비가 올 정도로 상황이 심각한데 말이죠. 치료는 모든 방법을 다 고려해야 해요. 약물이나 비수술적 처치도 당연히 고려해야 하고, 만약 수술이 필요하다면 해야 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치료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검토하고, 환자 상태에 맞는 치료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치료법만 고집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미정씨가 병을 의연하게 이겨낼 수 있었던 데는 딸의 존재가 컸다. 사실 이씨가 큰 병을 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녀의 표현대로 “웬만한 병원은 다 가봤다”고 할 정도로 이런저런 질환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2007년에는 갑상선암 수술을 했고, 그다음 해에는 난소에 문제가 생겨 절제를 해야 했어요. C형 간염 합병증으로 간 수치가 위험할 정도로 올라간 적도 있고요. 그때마다 딸아이가 제 간병인 역할을 했는데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했어요. 당연히 허리 때문에 입원했을 때도 큰 도움을 받았죠. 그런 경험 때문인지 지금은 사회복지 쪽으로 진로도 변경했어요. 간병이요? 전문 간병인보다 나아요(웃음).”
그녀를 다시 일어서게 해준 신앙의 힘
이어지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 그를 구원한 존재는 또 있다. 바로 신앙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씨는 최근 총회신학대학원 과정을 수강 중에 있다.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는 것이 꿈이다. 그녀는 힘들 때마다 예수님의 고통과 희생을 생각했다. 그러면 자신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어릴 때 그분에게 서운한 것이 있어 잠시 교회를 멀리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종이 되어 봉사하며 살고 싶어요. 여러 가지 병이 겹치면서 우울증으로 힘들었던 시기도 있었는데,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죠. 어릴 때 제 꿈 중 하나는 힘든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 같은 시설을 운영하는 것이었는데 지금도 그 꿈은 유효해요. 건강을 되찾으면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는,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수술 후 재활을 통해 다시 정상적인 삶을 되찾아가고 있지만 쉽지는 않다. 몸을 써야 하는 직업인데다, 급한 성격이 허리에 가끔씩 무리를 주는 탓이다.
“조심해야 하는 건 아는데 괜찮다 싶어 최근 몸을 좀 움직였더니 다시 상태가 나빠지려고 해요. 이전보다 몸이 많이 둔해진 걸 알면서도 자꾸 마음이 앞서나 봐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일에도 이젠 익숙해져야겠어요. 요즘엔 다시 조심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스트레칭도 자주 하고, 걷는 운동도 열심히 하면서 허리를 관리하고 있어요. 또 병원 신세 져서 딸아이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요(웃음).”
올 것이 왔다 싶었다. 화장실에서 평소와 다른 시커먼 그것을 보았을 때 말이다. 심상치 않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인과응보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가 떠올린 것은 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생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의사는 그의 병이 위암이라고 했다. 고려대학교 구로병원에서 만난 오성표(吳聖杓·68)씨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는 상부위장관외과 장유진(長有鎭·40) 교수를 만나 두 번째 삶을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암 환자가 자신의 병을 인정하기까지는 여러 가지 과정을 거친다. 자신의 병을 부정하며 진단을 탓한다. 그렇게 여러 병원을 전전하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분노하면서 다양한 감정의 기복을 반복한다. 그러나 오성표씨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암인지 알기 2년 전쯤에 집안에 힘든 일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2011년쯤이었습니다. 그때 실의에 빠져 매일 술로 살았거든요. 잠이 오질 않으니 자기 전 소주를 들이켰고, 새벽에 잠에서 깨 맨정신이 되면 또 괴로운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침 5시부터 안주도 없이 강소주를 마시기 시작했죠. 그런 생활을 2년 가까이 했으니 몸이 온전할 것이라는 기대는 별로 없었어요.”
게다가 흡연도 문제였다. 아내와 자녀의 잔소리는 수십 년째 이어졌지만 끊기가 힘들었다. 오랜 삶을 살아오면서 몇 번의 위기가 있었고, 그 어려움 속에서 그에게 힘이 되어준 것은 담배밖에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씨가 놀라지 않았던 데에는 주변 지인들을 통해 위암을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이유도 있었다. 먼저 병을 경험한 선배(?)들은 위암은 이제 치료가 가능해진 병이라고 했다.
몸이 보낸 구원의 신호
그렇게 지내다 혈변을 몇 차례 확인하곤 동네 병원에서 위암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암의 진행이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두 곳의 종양 중 하나는 초기 상태였고, 다른 하나는 1기에서 2기로 막 넘어가려는 상태였다. 의학적으로는 어렵지 않은 상대였다.
어떻게 보면 그의 몸이 ‘혈변’이란 신호를 보내준 것은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위암은 대부분의 경우 초기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고 조용히 성장하기 때문이다. 위암 초기에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은 소화불량이나 복부의 불편감 정도라서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 쉽다. 결국 정기적인 검진 정도가 일찍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인데, 오씨는 검진을 적극적으로 챙기기 어려운 자영업자라서 이 점에서도 불리했다.
그렇게 불행 중 다행으로 암의 존재를 알게 된 오씨는 지인 소개로 고려대학교 구로병원을 찾는다. 수술 날짜를 결정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씨의 운명을 좌우할 수술 집도의 장유진 교수를 만난다.
장유진 교수는 서울삼성병원 안지영 교수, 보라매병원 안혜성 교수와 함께 우리나라 위암 분야 여성 외과의사 1세대로 꼽힌다. 그전까지는 남성 의사의 전유물이었던 셈이다. 흔치 않은 여성 외과의사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 어렵진 않았을까 괜한 염려를 하자, 대수롭지 않다는 오씨의 대답이 돌아온다.
“큰 걱정은 하지 않았어요. 여자 의사도 이런 수술을 하는구나 했죠. 얼마나 잘하시길래 여자 의사가 이런 수술을 하실까 하며 별 걱정 안 했어요.”
장유진 교수도 같은 대답을 한다.
“처음 부임할 때 병원 내부에서도 비슷한 걱정을 했죠. 혹시 환자들이 거부감을 보이면 어떻게 하나 하고 말이죠. 하지만 괜한 기우였어요. 환자분들은 선입견에서 훨씬 자유로워요. 어차피 이름을 보고 미리 성별을 짐작하고 오시기 때문에 처음 대할 때 어색함은 없었죠. 오히려 여자 의사라서 꼼꼼하게 더 잘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큰 것 같아요.”
수술 난이도 높인 심방세동
하지만 순조로울 것만 같았던 수술에 문제가 생겼다. 외과의들이 꺼려하는 상황 중 하나였다고 장 교수는 설명했다.
“위의 상태는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어요. 위의 벽은 모두 5개 층으로 이뤄졌는데, 그중 큰 것이 안쪽에서 3개 층까지 자리를 잡고 있는 상태였죠. 암이 발생한 위치도 모두 아래쪽이어서 위 전체를 잘라낼 필요 없이 3분의 2 정도만 절제하면 됐어요. 그런데 문제는 부정맥으로 인한 심방세동이었죠. 심장이 떨면서 피떡이 만들어질 수 있어 피가 굳지 않도록 항응고제를 드셔야 하는데, 수술 부위가 아무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 출혈이 계속되면 상황이 좋지 않으니 주의해야 했어요.”
그리고 2013년 9월 9일 그는 수술대에 올랐다. 오씨는 그날을 자세히 기억했다. 워낙 겁이 없고 담담했던 그도 그날만큼은 겁이 덜컥 났단다.
“수술실 바닥은 모양에 신경 쓰기보다 청소하기 쉽도록 되어 있잖아요. 수술 도구들도 많고요. 그것을 보니 예전에 갔었던 소 도축장이 생각나더라고요. 묘한 기분이 들면서 진짜로 내가 수술을 한다는 실감이 났죠. 그리고 마취에 잠들었다가 깨어나 보니 수술 후더라고요.”
수술은 복강경 수술로 진행됐다. 복강경 수술은 끝에 수술 도구가 달린 기다란 막대만을 몸속에 넣어 집도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개복 없이 4cm 이하의 크기로만 절개하면 충분하다. 절개 부위가 적어 환자의 회복은 빠르지만, 아무래도 평범한 개복 수술에 비해 까다롭기 때문에 외과의사의 섬세함이 필요한 수술 방법이다.
장 교수는 수술 과정에서 정확한 범위의 림프절을 절제하고 출혈부위를 최소화 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고 말했다. 수술은 기대했던 대로 성공적이었다. 걱정했던 출혈도 없었고 회복도 빠르게 이뤄졌다. 항응고제도 다음 날부터 정상적으로 투약할 수 있었다.
위암 수술의 성패는 조기발견
대체 위암은 왜 생기는 것일까? 위암은 한국인에게 가장 흔한 암종 중 하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국민관심질병 조기위암 통계자료를 보면 위암 환자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2011년 5만1584명에서 2015년 7만1564명으로 5년 새 약 39%가 증가했다. 또 2015년 기준, 60대가 31%(2만2245명)로 가장 많았고 70대와 50대가 그 뒤를 이었다.
위암의 원인으로는 몇 가지가 지목되고 있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이 소금이다. 실제로 서구식 식생활을 하는 나라에 비해 한국과 일본의 위암 환자 비중은 높은 편이다. 찌개, 김치 같은 고염식이나 젓갈 등의 염장 음식을 즐기는 식습관 때문이다. 직화나 훈제 같은 조리법도 위암 발생 가능성을 높인다는 발표가 있다.
위암 발병은 여성에 비해 남성이 두 배 정도 많은데, 상대적으로 음주 과정에서 짜고 자극적인 음식 섭취가 많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장유진 교수는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젊은 여성은 비슷한 연령의 남성이나 갱년기가 지난 여성보다 위암 발병률이 낮은 대신, 암이 발생하면 치료가 어려운 ‘반지고리형 암’인 경우가 많다. 의학계에선 이 원인을 여성호르몬으로 지목하고 있다.
장 교수는 위암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정기적인 검진을 통해 조기발견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위암은 초기에 발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해요. 1기 정도에만 발견되면 우리가 완치라고 부르는 5년 생존율이 97%까지 올라가요. 국가에서도 국가암조기검진사업을 펼치고 있으니까요. 적어도 2년에 한 번은 위내시경으로 위 상태를 확인해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위암은 거의 대부분 수술로 치료한다. 위의 일부를 잘라내는 경우도 있고 위의 위치가 상부에 있거나 암의 진행 상태가 심각한 경우에는 완전히 잘라내기도 한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항암 치료제나 표적 치료제가 활용되기도 하지만 위암의 특성상 수술이 가장 확실한 치료법으로 평가되고 있다. 소위 ‘약빨’이 잘 듣지 않는 것이 그 이유다.
위암은 많이 발생하는 만큼 치료 수준도 높다. 환자가 많다 보니 의료 현장의 전문의들 경험이 많아 국내 의사들의 위암 수술과 치료 실력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힌다. 그래서 장 교수는 위암 판정을 받으면 반드시 수술 전문가, 특히 소화기외과의와 상의할 것을 권한다. 치료 과정이 수술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만큼 외과가 차지하는 비중이 85%나 되기 때문이다. 이 밖에 소화기내과와 종양내과 전문의들도 치료에 참여한다. 장교수는 수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수술을 차일피일 미루면 병만 키울 뿐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활동적 생활로 긍정적 마음 갖게 돼
흔히 위의 일부나 전체를 잘라내면 잘 먹지 못한다는 편견이 있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다. 오씨의 경우처럼 3분의 2 정도 잘라낸 사람도 일반인과 비슷한 식사량을 보인다. 오씨 역시 그랬다.
“수술을 하고 나서 처음 한 달 정도는 죽 같은 것만 먹었죠. 하지만 이후부터는 예전처럼 식사를 했어요. 지금까지 평소와 다름없이 살고 있어요. 사실 어려운 수술도 했고, 위의 절반 이상을 잘라냈는데 그 전과 달라진 것을 잘 모르겠어요.”
병원에서도 위암 수술을 하고 난 뒤 환자들에게 잘 먹을 것을 권한다. 영양분 흡수가 원활하지 않을 수 있어 철분 결핍성 빈혈이나 비타민D 부족으로 인한 골다공증도 걱정해야 한다. 장 교수는 “수술 후 석 달 동안은 영양실조가 일어나지 않도록 관리를 잘해야 해요. 그래서 무리한 저염식, 특히 소금을 아예 안 쓰는 금염식은 말리죠. 일단 잘 먹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수술한 환자는 가만히 있어도 살이 빠지는데 입맛까지 잃으면 문제가 많아집니다. 그렇게 3개월 정도 안정이 되면 금염이 아닌 저염식 식사를 권하죠”라고 말했다.
물론 오성표씨의 삶에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술을 줄였다. 그렇게 즐기던 술은 이제 아주 특별한 날에만 한두 잔 마신다. 그리고 새벽에 운동도 시작했다. 특히 다시 시작한 일은 그가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데 도움이 됐다. 그가 지금 하는 일은 차에 이런저런 생활용품을 싣고 경로당이나 마을회관 등을 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것. 옛날로 치면 보부상 같은 일이다. 워낙 활동적인 일이다 보니 건강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특히 여러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일이 가장 즐겁다고 했다. 요즘은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게 있다. 교수님은 술은 위암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고 했지만 술에 의지했던 그 시절이 자꾸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특히 친구들을 만나면 늘 말해요. 아무리 속상해도 빈속에 강술은 먹지 말라고요. 안주 ‘좋은 놈’으로다가, 밥하고 같이 먹으라고요.”
시력이 점점 나빠지는 상상을 한번 해보자. 자고 일어나면 내가 바라보고 있는 세상의 풍경들이 조금씩 사라진다. 마치 무엇이 가로막고 있듯.
고개를 돌려 피해보려고 해도 여전하다. 보이지 않는 부분은 점점 커지고, 주위를 볼 수 있는 시야가 좁아져 급기야는 작은 창만 해진다. 환자를 더 옥죄는 것은 당장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 그 작은 창마저 닫히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다. 황반변성과 근무력증, 안검하수까지 겹친 김성겸(金成兼·69)씨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그는 씩씩했다. 그의 옆에 성공적인 투병을 도운 동반자 건국대병원 안과 신현진(申賢眞·38) 교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랏?!”
10여 년 전 어느 날 김성겸씨는 운전 중 느닷없이 작은 비명을 질렀다. 이상한 일이었다. 차는 똑바로 가고 있었고 길도 평범한 직선도로였는데, 갑자기 길이 두 개로 보였다. 처음에는 차선이 늘어난 줄 알았다. 깜짝 놀라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앞을 쳐다봤다. 길은 그대로였다. 별일이 다 있다 싶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자신의 건강에 관대한 다른 중년 남성들처럼. 하지만 그날의 사건은 앞으로 벌어질 일의 전조였다.
움직여지지 않던 왼쪽 눈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주 그런 일이 일어났다. 사물이 두 개로 보이는 현상은 ‘어쩌다 한 번’에서 ‘꽤 자주’ 발생했다. 그리고 곧 주변 사람들도 눈치 챌 정도가 됐다.
“야! 너 눈 돌아갔다!”
김씨의 친구는 소주잔에 술을 따르다가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그때는 이미 자신에게 일어나는 증상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닥치라는 농을 던지며 넘어갔다. 하지만 왜 나아지지 않는지 의아했다. 눈을 몇 번 껌뻑거리면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눈이 ‘돌아가는’ 증상은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결국 용기를 내어 동네 안과를 찾아갔는데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서울에서도 손꼽힌다는 병원을 찾아 검진을 받았다. 그때가 2010년이었다. 병원에서는 낯선 병명을 그에게 전했다. 근무력증이었다.
심하면 사망에 이르는 병
근무력증(筋無力症)은 신경과 근육을 연결하는 신경근육접합부라는 부위에 이상이 생기면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쉽게 설명하면 뇌에서 “이렇게 움직이자”라는 명령이 신경을 통해 전달되어도, 근육에 제대로 미치지 못해 그 신체 부위가 움직이지 않는 증상이다.
김씨의 경우는 근무력증이 왼쪽 안구를 움직이는 눈근육에 발병했다. 마치 사지가 축 늘어져버리는 것처럼 한쪽 눈이 사시처럼 아래로 처져버리는 것. 오른쪽 눈은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데 왼쪽 눈은 그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하니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장 큰 불편은 복시, 즉 사물이 겹쳐 보이는 현상이었다.
“온 세상이 다 두 개로 보여 어떤 물체가 진짜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특히 계단에서는 너무 위험했어요. 계단이 두 개로 겹쳐 보이는 데 어떤 계단이 진짜인지 알 수 없어 발을 자주 헛딛었어요. 그러다 넘어지기 일쑤였고. 그래서 아예 한쪽 눈을 가리고 다닌 적도 많아요.”
이렇게 불편한데 신경과에서는 계속 약만 먹으라고 했다. 주변의 시선도 문제였다.
“차라리 모르는 척해주면 좋은데, 눈이 이 모양이니까 사람들이 빤히 쳐다봐요. 신기한 동물 보듯이 말이에요. 당연히 기분이 안 좋죠. 이렇게 된 지 몇 년 안 되어 익숙하지도 않고. 그래서 그때부터 이 안경을 썼어요.”
그가 내민 안경은 흔히 ‘라이방’이라 부르는 익숙한 모양의 선글라스였다. 그렇게 3년을 병원에 다녔는데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안되겠다 싶어 병원을 바꿨다. 바로 건국대학교병원이었다.
쌍꺼풀 수술로 오해받는 안검하수 수술
신현진 교수는 신경과 교수와의 논의를 통해 수술을 하는 것이 낫겠다고 결정했다. 신 교수가 김씨를 처음 만났을 때인 2015년에는 건국대학교병원 신경과에서 치료를 진행해 눈움직임근육이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여서, 수술을 통해 눈 위치로 인한 복시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 교수는 “운동을 안 하면 알통이 줄어드는 것처럼 위축이 일어나고 눈 근육 역시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상태가 점점 더 악화돼요. 늘어진 근육을 잡아당겨 안구가 반대쪽 눈과 비슷한 위치에 오도록 조정하는 수술을 했어요. 발병 전 상태로 돌아갈 순 없지만 그래도 복시가 나타나지 않고, 남들이 봤을 때도 어색하지 않은 눈 상태가 되셨죠”라고 설명한다.
사시 수술 얼마 후에 진행한 또 하나의 수술은 안검하수 수술이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쌍꺼풀 수술’ 논란으로 세상에 알려진 이 수술은 정확히 말하면 쌍꺼풀 수술과는 다른 수술이다. 노화와 질병으로 인해 처지는 눈꺼풀을 제 위치로 돌려놓기 위해 눈꺼풀 속 검판이라는 부위를 눈꺼풀올림근과 연결하는 수술이다. 신 교수는 안검하수 수술에 대해 일반인들의 오해가 많다고 말한다.
“흔히 쌍꺼풀 수술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임상적으로는 쌍꺼풀 수술과 안검하수 수술은 완전히 다른 수술이에요. 사람들이 쌍꺼풀이 보이는 눈을 예쁘다고 생각하니까 수술 과정에서 쌍꺼풀을 만드는 것뿐이지, 원치 않는다면 쌍꺼풀이 안 생기게 안검하수 수술을 하기도 해요.”
수술은 복잡하지 않아 하루면 끝난다. 전신마취 같은 것도 필요 없고, 입원도 불필요한 간단한 수술이라고 설명한다.
맹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시달려
하지만 김성겸씨가 세상을 보는 방법에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이번엔 황반변성이었다. 황반변성(黃斑變性)은 망막 가운데가출혈 등의 이유로 인해 물이 차고 붓는 질환이다. 사무실이나 카페에서 쓰는 빔 프로젝터의 스크린을 상상하면 이해가 쉽다. 평평해야 할 스크린을 뒤에서 누군가가 손으로 누른다고 생각해보라. 스크린의 굴곡이 영상에 반영되면서, 화상이 왜곡돼 보이게 된다.
황반변성도 마찬가지. 상이 맺히는 망막에 혹이 생기면서 사물이 찌그러져 보인다. 가장 손쉽게 진단할 수 있는 방법은 욕실의 타일이나 모눈종이 등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만약 직선들이 똑바로 보이지 않거나 중심이 가려보이면 황반변성의 초기 증상이니 바로 안과를 찾아야 한다. 신 교수는 황반변성의 위험을 이렇게 설명한다.
“황반변성은 안과에서 백내장, 녹내장과 함께 3대 질환으로 꼽히는 흔한 병이에요. 문제는 정확한 원인도 잘 모르는 데다, 한 번 발병하면 완치는 어렵다고 봐야 해요. 발병하면 더 나빠지지 않도록 현 상태를 유지하거나 악화를 늦추는 것에 만족하는 정도죠. 게다가 한 번 발생하면 다른 쪽 눈에도 같은 증상이 나타날 수 있어요. 치료를 위해 안구에 직접 약물을 주사하는데, 1개월에서 3개월 주기로 계속 주사를 맞아야 하고, 주사를 맞으면 감염 방지를 위해 2~3일 정도는 세수도 못하니 환자 입장에선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닙니다.”
또 환자를 옥죄는 것은 정신적 트라우마다. 왜곡돼 보이던 시야의 중앙은 병이 심해지면서 아예 보이지 않게 된다. 검은 반점이 되는 것. 그리고 병이 심해질수록 이 현상도 심해진다. 자고 일어나면 보이지 않는 부위가 점점 더 넓어져 언젠가는 맹인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가 환자를 힘들게 한다. 실제로 65세 이상 인구에서 법적인 실명의 빈도가 가장 높은 질환이 황반변성이다.
신 교수는 노화와 함께 반드시 주의해야 할 질환으로 황반변성을 꼽았다.
“노령인구가 증가하면서 황반변성 환자도 늘어나고 있어요. 하지만 수명이 증가하면서 눈이 필요한 기간은 더 길어지고 있잖아요. 그러므로 질환이 생기기 전에 주의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당뇨, 혈압과 같은 만성질환을 관리하고, 야외에서는 자외선을 막는 선글라스를 챙기세요. 고기 위주의 서구화된 식생활을 피하고, 담배는 반드시 끊으셔야 합니다.”
여전히 희망을 말해야 하는 이유
남들처럼 스트레스와 트라우마에 시달릴 법도 한데 김성겸씨는 씩씩하게 이겨내고 있다. 첫 사회생활을 공무원으로 시작해 그 후 제조업과 유통업, 식당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많은 경험을 한 탓인지 병마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남달랐다.
“그때마다 스트레스받으면 어떻게 살겠어요. 그런가보다 하는 거지. 신경 쓰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생활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요. 신 교수님께서 사시 수술을 예쁘게 잘해주셔서 남들 시선도 덜 의식하게 됐고, 복시도 사라져서 일상생활의 불편함은 없어요. 앞이 뿌옇게 보이니까 사람을 만났을 때 제대로 못 알아보는 것이 약간 불편할 뿐이죠. 또 술 따를 때 자주 넘치도록 따르는 것도 불편하다고 해야 할까(웃음).”
아직도 끊지 못한 소주 얘기를 털어놓으며, 옆에서 듣고 있는 신 교수에게 미안한지 인상 좋은 너털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는 아직까지 직장을 다니고 있다.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일을 놓을 생각은 없다. 건물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는 김씨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매일 지하철을 타고 출근한다.
하지만 상대가 강한 상대이다 보니 황반변성은 조금 나아진 정도.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은 상태다. 그래도 김씨는 여전히 희망을 말했다.
“눈이 좋아지면 차로 아내와 여기저기 다니면서 여행을 하고 싶어요. 젊었을 때 자동차 시트커버도 팔아보고, 엔진오일 도매도 했었는데, 정작 자동차로 여행을 다녀본 기억은 없어요. 여행도 다녀본 사람이 다닌다던데 눈이 좋아지면 주변 조언을 얻어서라도 경치 좋은 곳들을 두루두루 다녀보고 싶어요.”
“샤오메이즈(小美子, 이쁜아) 넌 죽지 않아. 꼭 살아날 거야. 걱정하지 마.” 오빠는 막내의 손을 꼭 잡으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서해를 넘어 한국까지 날아온 오빠가 동생은 너무나 고맙고 미안했다. 그렇게 오빠의 조혈모세포는 동생 몸으로 흘러들어 생명을 살렸다. 바로 중국 출신의 귀화인 등희하(滕希霞·38)씨의 이야기다. 이 감동적인 만남에는 든든한 후원자 가천대 길병원 혈액종양내과의 박진희(朴眞嬉·51) 교수가 있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등희하씨는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해외생활을 동경하던 평범한 소녀였다. 1997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소녀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외국을 향한다. 한국이었다. 물론 타향살이는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적응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고향에 남은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역시 참기 힘들었다. 그러나 중국어 강사로 어느 정도 기반을 잡게 됐고, 2007년 귀화를 통해 한국인이 되었다.
“한국에서 사는 게 좋았어요. 그래서 귀화도 신청했죠. 서울생활에 익숙할 때쯤 같은 학원 강사를 통해 남자를 소개받았고, 2009년에 결혼했어요. 얼마 뒤 아들도 얻었고요. 남편과 함께 작은 중국 음식점을 열어 장사도 열심히 했죠.”
갑작스런 하혈에 놀라다
모든 것이 평탄하게 잘 흘러갔고 행복했다. 장사도 그럭저럭 잘되었고, 둘째 임신 소식에 새로운 복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기쁨은 여기까지였다.
“어느 날부터 하혈이 계속 됐어요. 2011년 6월쯤이었어요. 동네 병원에 가니까 난소암이 의심된다고 하더라고요. 좀 더 큰 병원으로 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병원을 두 번 더 옮겼어요. 그렇게 길병원까지 오게 됐죠.”
결국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한 아이는 유산됐고, 그 후에도 출혈은 계속됐다. 피 검사결과 백혈구 수치가 문제였다. 급성골수성백혈병이었다.
“처음에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는 믿을 수 없었어요. 우리 집안에는 이 병에 걸린 사람이 없었거든요. 보통은 드라마 속 여주인공들이 걸리잖아요. 또 그 주인공들은 금방 죽어버리고. 저도 그렇게 될까봐 너무 겁이 났어요. 길병원을 믿을 수 있나 의심할 정도였으니까요.”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이식수술
“똘똘한 친구예요.” 박진희 교수는 등희하씨를 이렇게 기억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나요. 제가 최대한 환자와 대화를 많이 나누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그녀와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병에 관한 이야기는 물론이고 남편과 하는 가게 이야기에서부터 시댁이야기, 한국생활에 대한 이야기까지요.”
등희하씨의 치료를 진행하는 데는 여러 가지 걸림돌들이 많았다. 먼저 경제적인 어려움이었다. 등희하씨 없이 한국어가 서툰 남편 혼자서 음식점을 운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그녀의 투병으로 가게는 포기해야 했다. 수익원이 없어지니 치료비가 문제였다.
박 교수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백혈병은 전체 암종 중에서 치료비가 가장 많이 드는 암으로 꼽혀요. 다행히 보험제도가 잘되어 있지만 그래도 저소득층에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죠. 그래서 사회사업실을 통해 한국혈액암협회 지원을 받거나 기초생활수급자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어요.”
등씨 입장에선 박 교수가 의사이기 이전에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준 후원자였던 셈이다. 박 교수와 길병원의 지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의 치료를 위해서는 조혈모세포의 이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기증자를 기다리려면 너무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평범한 한국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가족을 병원으로 불러 가능성을 타진했겠지만, 그녀의 가족은 모두 중국에 있어 이식은커녕 검사조차 쉽지 않았다.
박 교수와 병원 관계자들은 중국 병원과 직접 연락을 해야 했다. 그녀의 가족들 중 누가 이식에 적합한지 검사를 부탁했고, 검사결과에 대한 의견교환이 이뤄졌다. 다행히 두 오빠가 적합했고, 그중 회사원인 큰오빠 대신 사업을 하는 작은 오빠가 기증자로 결정됐다.
하지만 넘어야 될 또 하나의 산이 있었다. 이식을 위해 장기체류를 하기 위해서는 비자가 있어야 했는데 거절된 것이다. 또다시 박 교수와 길병원이 나서야 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난 2012년 3월에야 겨우 이식이 이뤄졌다.
등씨는 “교수님과 병원에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살려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우리 집안 식구들이 모두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있어요. 남편은 물론이고 작은 오빠도 한국에 왔을 때 인사를 드렸고, 어머니도 한국에 오셨을 때 병원을 찾아 교수님을 뵈었어요. 덕분에 딸이 살 수 있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가족 사랑이 가장 큰 힘
큰 힘이 되어준 것은 역시 가족이다. 이식이 필요하다고 형제들에게 전했을 때 주저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가족을 살리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다면 당연히 도와야 한다고 했다. 기증자로 결정되자 작은오빠는 한 달 전부터 좋아하는 술도 끊고 운동을 시작했다. 건강한 조혈모세포를 동생에게 주고 싶어서였다. 몸에 좋다는 것 다 찾아먹다 간수치가 오를 정도로 몸 관리에 신경을 썼다.
물론 남편도 힘이 됐지만, 가장 의지가 된 것은 올해 8세가 된 아들 리우한이다.
“제가 아이를 너무 좋아하거든요. 어떻게 이렇게 이쁜 아이를 제가 낳았나 싶을 정도예요. 백혈병 치료를 받기 시작했을 때는 아들이 세 살이었는데, 항암치료를 위해서 무균실에 들어갔을 때 아이를 볼 수 없는 것이 가장 괴로웠어요. 남편은 유리창 너머로 통화라도 할 수 있었지만, 아이는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아이의 노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보면서 버텼어요. 아이를 위해서라도 꼭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죠.”
감기와 비슷한 백혈병 초기 증세
백혈병 또는 혈액암으로도 불리는 이 병은 어떤 병일까. 우리의 혈액은 백혈구와 적혈구, 혈소판으로 구성되는데, 혈액세포들의 생산은 조혈세포가 맡는다. 백혈병은 조혈세포가 암세포로 인해 비정상이 되면서 혈액세포 생성에 문제가 생기는 병.
박 교수는 “어느 날부터 감기가 낫질 않는다든가 멍이 쉽게 들고, 빈혈 증상이 나타난다면 의심해볼 필요가 있어요. 대부분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증상들이니까, 정기적인 건강검진이 중요해요. 하지만 혈액암은 제대로만 치료하면 대부분 완치하는 병이에요. 경제적 부담이 문제인데, 소아혈액암의 경우 후원단체나 기관이 많아 그래도 큰 걱정은 덜은 상태죠”라고 설명했다.
일부 혈액암의 경우 치료를 위해 고가의 표적치료제를 사용한다. 가장 대표적인 표적치료제인 글리백은 미국에서 보험이 없으면 환자가 월 6000달러(한화 약 700만원)를 부담해야 하지만, 국내에서는 건강보험제도를 통해 복제약값 월 200만원 중에서 5%인 10만원 정도만 부담하면 된다. 영양제 가격 수준이다. 그렇다고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시니어, 즉 고령혈액암 환자들이 문제라고 박 교수는 지적한다.
“의학계에서도 과거엔 적극적 치료의 필요성에 대한 논란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어요. 연령과 관계없이 신체나이(상태)만 충분하다면 완쾌시킬 수 있다는 것이죠. 문제는 비용을 후원하는 기관들이 고령혈액암 환자에게는 큰 관심이 없다는 거예요. 사회적 후원이 필요해요.”
베르니케 증후군으로 고생하다
등희하씨의 치료도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치료비 걱정은 해결됐지만, 영양상태가 좋지 않았던 등씨가 힘든 항암치료를 견뎌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겨우 먹은 것도 다 토해내는 통에 너무 힘이 들었어요. 몸속의 백혈구를 모두 죽이고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몸의 면역기능이 약해지니까 식도에 곰팡이가 생겼어요. 가뜩이나 잘 먹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목에 문제까지 생기니 더 힘들었죠.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 몸무게가 6kg이나 빠졌어요.”
조혈모세포 이식은 환자 입장에선 간단한 과정이다. 수혈받는 것처럼 누워서 받기만 하면 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마치 수술처럼 표현되는 것은 극적 연출이지 실제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 박 교수의 설명이다.
등씨는 치료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든 치료를 하고 나서도 두 달 동안 꼼짝 못했다. 사랑하는 아들도 제대로 안아주지 못하고 집에서 누워만 있었다. 박 교수는 그녀가 겪은 증상이 베르니케 증후군의 일종이라고 설명한다. 비타민 등의 영양결핍이 겹친 탓이다. 계속 어지럽고 눈앞의 물체가 흔들려 보이는 증상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웠다.
긍정적인 생각이 날 살려냈다
힘든 과정을 이겨낸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녀의 백혈병은 ‘완쾌’ 단계에 있다. 이제 재발 가능성은 거의 없는 상태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란다. 혹시 다른 암이 발병될 수 있으니 정기적인 검진만 하면 된다.
등씨는 요즘 새로운 직업에 재미를 붙였다. 한국화장품 회사 소속으로 중국의 SNS를 통해 현지 젊은 여성들에게 화장품을 알리고 구매를 돕는 일을 한다.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 아닌데다 흥미로운 분야라 즐겁게 일한다.
등씨는 늘 긍정적인 자신의 태도가 삶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힘들었던 투병생활을 이겨낸 것도, 새로운 삶에 잘 적응해나가는 것도 긍정적 마음가짐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와 비슷한 병을 앓는 분들이 이 기사를 보신다면 꼭 긍정적인 생각을 하시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때는 정말 하루하루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기분이었거든요. 하지만 병을 이겨내겠다, 지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하루를 살더라도 행복하게 살자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