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 공포, 애니메이션 등 몇 장르 영화는 극도의 피로감으로 보는 게 두려울 지경이다. 반면에 시대극, 서부극, 뮤지컬, 전기 영화는 시사회 초대를 마다하지 않는다. 최근 관심 갖고 본 다큐멘터리 알렉산드라 딘의 ‘밤쉘(Bombshell: The Hedy Lamarr Story, 2017)’과 스티븐 노무라 쉬블의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RYUICHI SAKAMOTO: CODA, 2017)’는 추억을 떠올리며 공부하는 자세로 보았다.
국내 영화 팬들이 류이치 사카모토를 알게 된 작품은 ‘마지막 황제’(1987)일 것이다. 편협한 일본 장교로 출연해 무척 의아하게 여겼는데 이름난 작곡가, 영화음악가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콧수염마저 얄밉게 보였던 그는 “왜 일본이 그토록 삭막한 만주 땅을 얻으려 했는지 모르겠다”라며 소신 인터뷰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1983)에서도 장도를 휘두르는 일본 장교로 출연한 바 있는데, 군더더기 없는 몸매에 강파른 얼굴 덕분이 아닌가 싶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와 오시마 나기사가 영화 음악 작곡과 연기를 다 요구했다니, 영화적 얼굴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류이치 사카모토의 영화 음악 덕분에 심취했던 작품을 열거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영화 팬이라면 기본적으로 본 영화들일 테니. 그중에서도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영화음악 작곡가로서의 사카모토를 잘 정리해주고 있다. 특히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에서 주인공이 광막한 설원 저 너머로부터 한 발 한 발 힘겹게 걸어와 관객 앞에 설 때까지 흐르던 음악은 압권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다.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에서 사막 아지랑이 속에 한 점이 나타나고 점점 커진 그 점이 알리 족장임을 알게 되는, 너무도 유명한 롱 테이크 장면에의 헌정이다. 이는 ‘평원의 무법자’(1973)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등장하는 장면만큼이나 근사하고 감동적이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에서 류이치 사카모토는 당시 암으로 투병 중이었지만, 너무도 좋아하고 존경하는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츠 이냐리투의 제안이라서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작곡을 마다할 수 없었다고 밝힌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2012년, 인후암 판정을 받고 모든 활동을 중단했던 류이치 사카모토가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음악 작업으로 활동을 재개한 전후 5년여를 기록한다. 후쿠시마 지진과 쓰나미에 살아남은 망가진 피아노를 연주하고, 핵발전소 재가동 반대 시위에 참석해 발언하고, 암 판정 당시 심경을 고백하고, 숲과 남극 등을 다니며 소리를 채집하여 젊은 시절부터 함께 했던 컴퓨터와 피아노로 작곡하는 모습이 젊은 시절 활동 영상과 영화 출연 장면 등을 곁들여 소개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영화에 나오는 음악과 바흐의 코랄전주곡 같은 느낌의 음악, 약해지지 않고 울림이 오래가는 음을 찾고 있다는 등, 그가 현재 추구하는 음악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전한다.
9·11 테러 당시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그가 찍은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의 사진을 보면 사진작가로서의 재능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검버섯 가득한 얼굴과 백발에 표범 가죽 문양 안경을 쓴 그가 곱게 깎은 연필을 들고 오선지에 음표를 그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또 오로지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지구 이 끝에서 저 끝을 방문하는 집념을 보노라면, 세상에서 가장 고매한 직업은 예술 창작뿐이구나, 눈물이 날 지경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물 다큐멘터리도 그 인물에 얼마나 매료되었는가, 존경하는가에 따라 감상 진폭이 달라진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감독 후샤오시엔, 오시마 나기사, 알프리드 히치콕, 데이비드 린치 등의 다큐멘터리와 더불어 영화 세상에 사는 행복을 만끽하게 해준다.
액션, 공포, 애니메이션 등 몇 장르 영화는 극도의 피로감으로 보는 게 두려울 지경이다. 반면에 시대극, 서부극, 뮤지컬, 전기 영화는 시사회 초대를 마다하지 않는다. 최근 관심 갖고 본 다큐멘터리 알렉산드라 딘의 ‘밤쉘(Bombshell: The Hedy Lamarr Story, 2017)’과 스티븐 노무라 쉬블의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RYUICHI SAKAMOTO: CODA, 2017)’는 추억을 떠올리며 공부하는 자세로 보았다.
‘밤쉘’은 ‘영화 속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던 오스트리아 출신 할리우드 여배우 헤디 라머(1914~2000)를 추모한다. 대표작 ‘삼손과 데릴라’(1949) 국내 개봉 시엔 헤디 라마르로 소개되었다. 연말연시 TV 재방송 단골 영화였던 ‘삼손과 데릴라’를 되풀이해 보며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데릴라라면 삼손이 넘어가는 것도 당연하지!”라고 감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국내에서 헤디 라머의 사망 뉴스는 결혼을 여러 번 한 섹시한 여배우 정도로 간략했는데, ‘밤쉘’은 이런 평가가 얼마나 지엽적이며 왜곡된 것인지를 일깨워준다. 무엇보다 이 아름다운 여배우가 젊은 시절 ‘주파수 도약’을 발명하여 와이파이, 블루투스 원리를 제공했단다. 구글이 2015년 헤디 라머 탄생 101주년을 맞아 발표한 헌정 영상 ‘NO HEDY LAMARR, NO GOOGLE!’이 얼마나 늦은 인정인가 싶다. “어떤 젊은 여성도 매혹적으로 보일 수 있다. 가만히 서서 바보처럼 보이기만 하면 된다”는 헤디 라머의 명언은 지나치게 아름다운 외모에 가려 지성을 무시당한 그녀의 심정을 읽기에 충분하다.
헤디 라머의 전성기를 접해보지 못한 젊은 기자들이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지? 요즘엔 왜 저런 여배우가 없을까? 정말 대단한 여성이었네!”라고 감탄하는 걸 들었다. 그렇다. 60년대까지만 해도 후광에 눈이 부신 선남선녀 배우가 수두룩했다. 이웃집 아줌마 아저씨 용모로도 주연 배우가 되는 요즘 영화밖에 모르는 젊은 영화 팬이 불쌍할 지경이다. 그 점에서 현재의 시니어 세대는 추억마저 격이 있는 세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밤쉘’을 보고 해디 라머의 사진을 검색해보지 않는다면, 당신은 영화를 사랑하는 이라 자신할 수 없다.
‘밤쉘’을 평가해야 할 또 한 가지 이유로 수잔 서랜든 제작을 꼽아야 할 것이다. 정치 사회 발언에 앞장서느라 자신의 이력을 침해당할 정도인 똑똑한 여배우의 행보가 아닐 수 없다. 거트루드 벨, 베르트 모리조, 카미유 클로델 등이 영화로 조명되면서, 우리는 재능과 용기가 남달랐던 선대 여성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앞으로 더 많은 여성이 발굴되어, 영화로나마 그들의 영혼과 행적을 위로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