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전통복식 분야 1호 유희경 박사의 집에 신사임당 초상을 그리기로 한 이종상 화백과 한국조폐공사 관계자, 석주선 단국대 기념박물관장 등이 모였다. 5만 원 지폐에 넣을 신사임당을 그리기 위해서다. 이날 신사임당의 초상 모델이 바로 임수빈 한국방송고전머리전문가협회장이다. 어딘지 모르게 닮은 선한 눈매와 은은한 미소를 가진 그를 만나 고전머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세상에, 정말 이런 머리를 하고 살았을까?’
고전머리 미용대회를 준비하던 30대 늦깎이 학생은 머리를 올리다 말고 생각에 잠겼다. 대회에 출품된 화려하고 다양한 고전머리 스타일이 신비로워 보였다. 고전머리의 매력에 빠지게 된 계기다. 1999년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미용실을 운영하던 임수빈 협회장은 미용을 더 알고 싶었다. 파마약을 바르면 왜 머리가 구불구불한 채로 모양이 잡히는지, 머리카락 속 단백질과 미용 약품 사이에 어떤 화학작용이 발생하는 건지 원리를 알고 싶었다. 2005년 국제대학교 피부미용학과에서 공부를 시작해 서경대 미용예술학과에서 불화에 표현된 고전머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궁금한 것들을 하나하나 풀어가다 보니 세월 흘러가는 줄 모르고 젖어들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다시 하래도 못 할 것 같아요.(웃음) 과거에도 지금도 고전머리를 하나의 학문으로 가르치는 곳은 없어요. 한복만큼 전통 가치가 지켜지고 있지 않아 아쉽습니다.”
K-헤어의 뿌리를 찾아서
어디에서도 고전머리를 배울 수가 없어 임 회장은 역사책을 뒤져가며 스스로 공부했다. 그는 고전머리야말로 현대 미용의 뿌리라고 했다. 고전머리는 청동기, 상고시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도자기 항아리나 벽화 등에 그려진 여성을 통해 머리 모양을 추론할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서민들은 쪽머리, 댕기머리, 둘레머리, 얹은머리 형태를 고수했다. 왕족이나 귀족은 시대에 따라 복식과 머리가 바뀌었다. 조선시대에는 소 한 마리 값에 맞먹어 부의 상징이 되어버린 가체를 하지 못하도록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개화기에 우리 전통 고전머리가 사라졌어요. 역사적으로 쪽머리는 기생이 할 수 없는 머리예요. 용, 봉, 개구리 등으로 품계를 나타냈던 첩지머리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개화기에 나라도 잃고 신분을 나누던 품계도 사라지면서 무거운 머리를 풀어헤치고 기생들이 쪽머리와 첩지머리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신여성이 등장했고, 서양에서 들어온 머리 스타일이 유행하면서 고전머리는 유야무야 사라지다시피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용실은 1933년 화신백화점 미용부에서 시작됐다. 최초의 조선인 미용사 오엽주가 시초다. 이 최초의 미용실이 우리나라 미용 역사의 시작처럼 되어버렸다. 하지만 임수빈 회장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져오다 개화기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우리 머리부터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5천 년이라는 우리 고유의 머리 역사와 뿌리가 있는데도, 오엽주 미용사의 신여성 머리 스타일만 남은 거예요. 그런데 미용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이 뿌리부터 배우는 게 정석 아닐까요?”
고전머리에는 우리의 역사가 그대로 녹아 있다. 한복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 것처럼 머리 스타일도, 장신구도 역사에 따라 달라졌다. 한복에 관해서는 연구가 활발하고 이를 전통으로 지키려는 노력도 하지만, 고전머리에는 그 관심이 이어지지 않아 못내 아쉬웠다.
미용은 ‘학문’이 될 수 없을까?
임수빈 회장은 미용을 ‘과학’이라고 말했다. 미용을 전공하는 많은 학생들이 이르면 중학생 때부터 미용을 배운다.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그는 기술을 넘어 미용의 원리와 뿌리를 알고 싶었다. 석사와 박사 과정을 밟으면 더 깊이 있는 배움이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기술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기술도 물론 중요하지만 머리의 역사에 대한 연구, 미용의 과학적 부분에 대한 연구, 조금 더 학문적인 연구를 통해서 미용의 질을 높이고 싶었어요.”
각종 불화와 문헌을 뒤져 고전머리를 연구하던 임수빈 회장은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정리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5천 년 역사 속 장황하게 흩어져 있던 고전머리 자료를 모으고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해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귀족·사대부·천민들이 쓰는 장신구, 비녀, 꽂이, 장신구별 의미, 상징 등을 하나하나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문헌 속 고전머리를 전통 방식에 맞게 재현하고 트렌드에 맞춘 퓨전머리도 디자인했다. 이 내용을 학생들이 더 이해하기 쉽게 ‘고전머리교실 : 이론과 실습’으로 펴냈다.
머리 스타일에 빠질 수 없는 게 장신구다. 또 복장과 머리 스타일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인터뷰를 하면서 머리 장식에 대해 묻자 협회 곳곳에서 최소 100년 넘은 온갖 장신구들이 나왔다. 임 회장의 할머니가 사용했다는 청색 족두리와 담비털 모자는 시사교양 프로그램 ‘TV쇼 진품명품’에도 등장했다. 거실 액자 속에 늘 걸려 있었다는 담비털 모자는 구한말 할머님이 사용하시던 것이라고. 임수빈 회장이 고전머리에 매력을 느꼈던 건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트레머리가 없어지고 쪽머리가 정착되면서 비녀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어요. 서민들이 쓰던 비녀도 새겨진 무늬가 다 달라요. 천연 옥비녀에는 특유의 고운 빛깔과 흉내 내기 어려운 정교한 조각이 새겨져 있죠. 천연 옥의 종류도 이렇게나 다양해요. 여름에는 옥 소재 비녀를 많이 쓰고 겨울에는 따뜻한 소재를 썼죠. 뒤꽂이 종류도 무척 많아요. 주로 매미, 벌, 꽃, 나비 등이 소재로 쓰였죠. 조선시대에는 생콩을 빻아서 조롱박에 담아 세면대에 두었다가 세안할 때 비누 대신 콩을 비벼 사용했어요. 그러면 콩 비린내가 남거든요. 그래서 향주머니를 차고 다닌 거죠. 이 매미 모양의 향주머니는 매우 드문 거예요.”
고전머리는 머리 장식, 의복, 의복에 쓰이던 장신구까지 모두 이어져 있고, 각 시대상을 반영한다. 이렇게 역사 이야기와 임 회장이 그동안 수집한 온갖 장신구를 직접 눈앞에 펼쳐두고 강의를 하니 학생들은 그의 수업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머리에 몰입한 20년이라는 시간
고전머리를 더 많이 알리기 위해 그는 2012년 한국방송고전머리전문가협회를 세웠다. 10여 년 동안 임 회장은협회비를 받지 않고 개인 활동으로 벌어들인 수입으로 협회를 운영했다. 더 많은 이들이 고전머리 관련 활동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더 많은 미용사가 고전머리의 매력을 알고 자신의 가치를 높였으면 하는 마음으로 고전가체 예능사 1~3급 자격제도를 만들었다. “고전머리도 머리를 만지는 일이기 때문에 미용 자격증이 반드시 있어야 해요. 미용 관련 국가자격증이 여러 가지인데 고전머리 자격증은 없거든요. 수익사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필요한 곳에 쓰일 수 있도록 하고 싶어 만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오색단장, 수빈헤어&메이크업, 한국방송협회 일을 현업에서 계속하다 보니 자격제도를 만들어놓고도 제대로 활성화시키지 못했어요. 그러다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멈추면서 저를 재정비하게 됐죠. 미용하는 분들이 고전머리를 통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더 넓어지면 좋겠어요. 미용인의 가치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혼자 개척해나가면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고전머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제대로 고증되지 않은 고전머리 정보를 퍼트릴 때면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고민하기도 했다. 게다가 아무리 궁금한 게 많아 공부가 즐거웠다 해도, 매일 역사서를 들여다보며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몸은 서울에 있지만 마치 과거에 사는 느낌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기왕 여기까지 온 것, 조금만 더 해서 학생들에게 무언가 해줄 수 있는 하나는 만들어두고 그만두자’고 마음을 달랬다.
미용을 시작한 후 20년을 온전히 고전머리에 몰입해 살았다. 처음 수빈헤어&메이크업을 열었을 때는 손님 한 명 보기가 어려웠지만, 이제는 주말이면 고전머리를 하려는 손님들이 줄을 선다. 임 회장이 반한 고전머리의 매력을 알아본 사람들에게 입소문이 난 것. 이제는 ‘고전머리’ 하면 많은 이들이 임수빈 회장을 떠올린다. 그럴 때 그는 ‘포기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보람을 느낀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임수빈 회장은 우리나라 가체장 1호 명장이 됐으며, 2019년에는 ‘한국을 빛낸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 문화예술부문 한국전통문화최우수공로대상’을 수상했다. 또한 2021년에는 한국예술문화명인 인증을 받았다.
고전머리가 K-헤어 트렌드
임수빈 회장은 복장과 헤어의 어울림을 강조한다. 전통 한복이라면 전통 고전머리를, 퓨전 한복이라면 퓨전 고전머리로 꾸며야 한다는 것. 전통 고전머리를 응용하면 한국식 현대 스타일을 무궁무진하게 창작할 수 있다. 고전머리야말로 현대 미용의 뿌리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요즘 흔하게 하는 ‘당고머리’는 ‘쪽머리’가 원조다. 쪽머리는 비녀가 없던 시절부터 해오던 머리 스타일이다. 항공사 승무원들의 머리 스타일은 ‘벼머리’에서 시작됐다. ‘포니테일’이라고 불리는 묶음머리는 ‘후두부로 흩어진 머리’라는 고전머리에서 출발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머리는 5:5 가르마예요. 우리나라의 기본 스타일이죠. 과거 여인들도 모두 반머리를 했어요. 우리가 반묶음을 하는 것처럼요. 다만 그것을 장식하는 장신구가 바뀌었을 뿐이에요. 현대의 의복에 맞춰 고전머리 스타일이 현대에 맞게 바뀐 거죠.”
임 회장은 고전머리를 기반으로 한 한국 스타일의 퓨전 헤어가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고전머리를 가르쳐주는 곳이 없으니 미용사들도 배워본 적이 없어 응용을 하고 싶어도 몰라서 못 하는 실정을 무척 아쉬워했다. 더 많은 미용사가 고전머리를 배워 자신만의 한국 스타일로 응용하면 그것이야말로 K-헤어가 되는 것 아닐까?
“고전머리가 국가무형문화재가 되는 게 마지막 꿈이에요. 고전머리를 만지는 기술도 서울무형문화재로 함께 인정받으면 금상첨화겠죠. 한복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받은 것처럼 고전머리도 우리의 것으로 역사성을 인정받고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합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외출을 삼가던 61세 A 씨는 여름을 맞아 갑자기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막상 휴가를 가자니 걱정부터 앞선다. 텅 빈 집에 혼자 있을 반려견 감자가 마음에 걸려서다.
반려견의 안전을 위해서는 창문까지 꼼꼼하게 다 닫고 떠나고 싶지만 계속되는 불볕 더위에 그랬다가는 큰 일이 생길 것만 같다. 실제로 더위로 실내 온도가 올라가면 반려견 감자가 탈진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창문을 열어두면 안전을 보장하기 힘들어진다.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부탁해봤더니 “손주가 털 알레르기가 있다”거나 “그날 급한 일정이 있다”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이처럼 펫팸족(Pet+ Family,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여기는 사람) 시니어들은 반려동물이 신경 쓰여 휴가를 마음 놓고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인 찬스’를 쓸 수 있는 환경이면 다행이지만 돌봐 줄 지인이 나타나지 않을 때는 곤란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휴가나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강아지를 부탁해! 펫시터
장기간 외출 시 가족 같은 반려동물이 안전하고 편안한 시간을 보낼 방법이 있다. 바로 ‘펫시터(pet+sitter·애완동물을 돌보는 사람)’ 고용이다.
펫시터를 구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반려동물 커뮤니티 게시판을 이용할 수 있다. 중고거래 애플리케이션(앱) 당근마켓에서도 펫시터를 구하는 글을 종종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직접 펫시터 알바를 하겠다고 자청하는 사람들의 글도 다수 올라온다.
최근에는 펫시터와 반려동물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앱도 나왔다. 산책 시 반려동물의 목에 무리를 주지 않는 이중 산책 줄을 착용한다거나 기상악화로 산책이 어려울 때는 정해진 프로그램에 맞춰 실내놀이를 진행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다만 주의사항이 있다. 펫시터가 반려동물 훈련사 자격증, 미용사 자격증 등 관련 자격증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돌봄 서비스를 받을 반려견, 반려묘만의 건강 상태와 습관, 개성 등을 잘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다.
애견 동반 호텔도 속속 등장
반려동물을 직접 휴양지에 데려가는 방법도 있다. 위탁 시설에 맡길 수도 있지만 반려동물이 반려인 없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들어하거나 혹시 모를 사고가 걱정된다면 애견 동반 호텔을 추천한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반려 인구'가 급증하면서 호텔업계도 관련 상품을 다양하게 출시하고 있다. 강원 켄싱턴리조트 설악밸리가 내놓은 펫 전용 상품은 9월 30일까지 주말 예약이 모두 끝났다. 패키지에는 펫 유모차, 펫 보양 간식, 펫케어 룸, 펫 웰컴키트 같은 다양한 서비스가 포함돼 있다.
그랜드 조선 부산이 선보인 반려동물 동반 패키지는 6월 예약 건수가 올해 1월보다 6배가량 증가했다. 콘래드 서울과 조선호텔앤리조트 같은 서울 특급호텔들도 다양한 '펫캉스'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반려동물용 고급 유모차, 드라이 룸 등을 이용하면서 멀리 떠나지 않고도 개인적인 휴식을 취하고자 하는 반려인을 타깃으로 했다.
반려동물을 홀로 집에 둔다면 이렇게
부득이하게 반려동물을 홀로 집에 두고 가야 하는 시니어들도 있다. 이럴 때는 강아지가 혼자 있는 시간이 1박 2일을 넘기지 않도록 하는 게 좋다. 반면 고양이는 하루나 이틀이면 환경을 바꾸는 것보다 자신의 공간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 낫다.
끼니를 잘 챙겨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고양이들은 집사가 집을 비우면 몇 날 며칠을 식음을 전폐하는 사례도 있어 떠나기 전에 캔 같은 걸로 미리 영양을 보충해 주는 것도 방법이다. 화장실 모래도 넉넉히 쌓아두고, 물그릇과 사료는 여분을 준비해 집안 곳곳에 놓아두면 좋다.
강아지는 사료를 한꺼번에 먹어버릴 염려가 있으니 타이머가 달린 자동 배식기 사용을 추천한다. 급식기는 바닥이 뜨거우면 좋지 않으므로 바닥에 카펫 등을 깔아 일정 온도를 유지해 준다.
반려동물을 배려해 외출 시 텔레비전이나 실내등을 켜두기도 하는데, 이럴 때는 화장실 조명처럼 간접 조명을 이용하는 편이 좋다. 모든 준비를 철저하게 마쳤다고 해도 유비무환의 자세로 주변 지인에게 일정 기간마다 한 번씩 살펴보도록 부탁을 하면 더 좋다.
자격증에 관심을 두는 중장년이 늘어났다. 젊은이들이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의 도구로 자격증을 취득하듯, 시니어 역시 재취업을 위한 발판으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노소를 떠나 무분별한 자격증 취득은 시간, 돈 낭비에 그치기도 한다. 2019년 등록된 자격증 수는 3만2000여 개. 관심 있는 자격증 정보를 선별하기도 쉽지 않다. 이에 고민인 중장년을 위해 자격증을 분야별로 나눠 총 9회에 걸쳐 알아봤다. 이번 호에는 연재 마지막 순서로 그동안 다루지 않았던 인기·유망 분야에 대해 소개한다.
자료 제공 및 도움말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 한국산업인력공단, 한국직업능력개발원
2019년 6월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발간한 국가기술자격 통계 연보에 따르면, 국가기술자격의 응시자와 취득자는 매년 늘고 있다. 중장년층 역시 제2직업을 위한 스펙 마련을 위해 다양한 자격증에 도전하는 추세다. 2018년 기준 50대 자격증 취득자 수는 전년 대비 7% 증가했고, 60세 이상의 경우 무려 30%가 증가하며 전 연령대에서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취업 지원 누리집 워크넷 기준 자격증과 관련된 구인 건수는 28만1675건(23.8%)으로 4건 중 1건가량은 채용 시 자격증을 요구하거나 우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불어 구인 건수가 많은 자격이 대체로 취득자도 많은 상황이다. 이를 토대로 고용노동부는 취업이 잘되는 자격 10선(구인 공고가 많은 자격 기준)을 [표1]과 같이 발표했다.
구인 공고와 별개로 2018년 기준 자격 취득 현황을 보면 30대 이상 모든 연령층에서 지게차운전기능사 취득이 가장 많았다. 연령대별로 살펴보더라도 50세 이상의 취득 종목 1위는 지게차운전기능사였다. 한식조리기능사, 굴삭기운전기능사 등은 그 뒤를 이었다.
PART1. 국가공인자격
상위를 차지한 자격에 해당하는 업종들의 경우 관련 법률에 따라 자격증 취득자를 고용해야 하기 때문에 그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앞서 소개한 목록에는 없지만 근래 들어 주목받는 국가공인자격 중에는 ‘드론(초경량비행장치) 조종자’(교통안전공단)가 있다. 올해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미래가 온다 새로운 직업이 뜬다’와 ‘4차 산업혁명 시대 내 직업 찾기’ 등에서도 드론전문가는 유망 직업으로 손꼽혔다. 단순히 촬영 도구의 일부가 아닌 재난 현장에서 사람을 수색하거나, 먼 섬에 택배를 보내고, 논밭에 비료를 뿌리는 등 다양한 업무에 접목이 가능하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드론 자격 취득자, 드론 장치신고 건수, 사용자 업체 수 등이 빠르게 증가하는 등 그 활용 범위가 점차 늘어날 전망이다.
[자격증 돋보기] 드론전문가가 하는 일은?
크게 드론조종사와 드론개발자로 구분한다. 드론조종사는 드론에 부착된 촬영 장비를 조작해 항공 촬영 및 측량, 농약 살포, 택배, 군사용 무인기 조종 등의 업무를 맡는다. 드론체험교실 등 관련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드론개발자는 새로운 드론을 개발하거나 성능 향상을 위한 연구에 힘쓴다. 군사, 촬영, 스포츠, 관측, 정보통신, 배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응용 장치를 개발한다.
2018년 각종 자격증 취득 현황에서 1순위를 기록한 지게차운전기능사의 경우 전체 취득자 3만6441명 중 남성이 3만5819명으로 98%를 차지했다. 그에 반해 여성의 경우 상위 5개 종목 중 1위 한식조리기능사를 제외한 4개 종목이 모두 미용사 자격이었다(미용사 일반, 네일, 피부, 메이크업 순). 물론 두 자격증 모두 젊은 층이 주를 이루지만, 제2직업이나 창업을 위해 관심을 두는 중장년도 적지 않다. 다만, 합격률이 높지 않은 편이고, 실기가 중요한 분야인 만큼 기술을 익히고 실전에서 발휘하기까지는 시간 투자를 해야 한다.
3D 프린터 관련 자격에 주목하라
지게차운전기능사나 미용사의 경우 오랜 세월 익히 알려진 자격이라면, 드론처럼 새롭게 뜨는 자격이 있다. 바로 3D프린터운용기능사다. 3D 프린팅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제조, 건설, 의료, 로봇, 자동차 등 다양한 산업에서 모형 제작이나, 부품과 제품을 만들기 위해 3D 프린터를 사용하며 응용 분야가 확대됐다. 이에 관련 제조업체나 콘텐츠 사업도 많아졌고, 3D 프린터 산업 시장의 매출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세계 각국은 물론 우리나라도 3D 프린터 산업 육성과 전문 인력 양성에 박차를 가하며, 2018년부터 3D 프린터 관련 자격증을 시행하게 된 것이다. 지난해 1회 시험 결과만 놓고 보면 아직 중장년에겐 자격증 취득이 쉽지 않아 보이지만, 전도유망한 분야인 만큼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볼 만하다.
PART2. 민간자격
과거에 비해 기술이 발달하면서 매해 새로운 직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과거 유망했던 직업들은 하나둘 퇴보하거나 사라지고, 관련 분야에 종사했던 중장년들은 더 이상 경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이에 자신의 커리어에 접목해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자 다양한 민간자격을 준비하는 이가 늘고 있다. 한국고용정보원에서 발간한 ‘미래가 온다 새로운 직업이 뜬다’를 살펴보면 신체 건강을 넘어서 정신과 마음 건강까지 살피는 직업들이 눈에 띈다. 웰빙, 힐링,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등을 중시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반영된 결과다. 모바일건강관리코치, 음악치료사, 식생활지도사, 라이프코치, 수면컨설턴트, 자살예방상담가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특히 중장년의 경우 직업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취미 또는 자신의 심신 건강을 위해 이러한 자격증에 도전하는 이가 많다. 그 밖에도 애견산책도우미, 김치소믈리에, 유품정리사, 조부모-손자녀 유대관계 전문가, 층간소음관리자, 디지털장의사 등이 새로운 직업으로 소개됐다. 이들 직업에 도전하려면 관련 민간자격을 찾아보게 되는데, 한국직업능력개발원 홈페이지 민간자격 검색 서비스를 이용하면 된다. 검색창에 키워드를 치면 수많은 기관에서 시행하는 자격들이 나온다. 이 중 취득을 목적으로 한 자격을 고를 때 다음 사항을 확인해보면 좋다.
민간자격 취득 시 꼭 확인할 사항
첫째, 민간자격의 등록 여부와 공인 여부, 광고에 나온 문의처가 해당 자격을 등록한 업체와 동일한지 확인하기.
둘째, 검정료 외 교재비나 수강료가 있는지, 취득 이후 별도의 등록비나 회비 등을 요구하지 않는지, 변심 또는 불만 등의 이유로도 환불이 가능한지 확인하기.
셋째, 광고 내용과 같이 실제 자격이 활용되고 있는지 본인이 취업하려는 곳에 직접 문의해 확인하기.
엄청난 반전 혹은 거대한 진실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수도 없이 오가던 길목이었지만 분명 미용실은 없었다. 옷가게, 카페, 떡볶이집, 구둣가게가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곳. 스마트폰이 가리키는 장소에 당도했지만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은 외국 나가서도 하지 않는 일을 끝내 하고 말았다. “혹시 장성미용실이…?” 길을 물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외국인 관광객 물결 속에서도 45년 한자리를 고목처럼 지키고 앉아 옛 손님을 기다리는 신삼순(64) 미용사를 만났다.
북적대는 핫 플레이스 옆 작은 미용실
사람 눈길 단번에 끄는 화려한 가게 숲 사이에 그 흔한 간판 하나 없는 미용실. 문을 열면 손님을 반기듯 석상과 화분이 놓인 좁은 복도가 펼쳐진다. 엘리스의 토끼 굴을 지나듯 그 길을 걸어 들어가면 과거로 이동한 듯 기분 묘한 미용실 안으로 인도된다.
“저는 벌교 출신이에요. 간판만 없지 이름은 장성미용실입니다. 1960년대에 여기서 미용실 했던 분이 장성 분이셨어요. 제가 뭘 그렇게 쉽게 바꾸는 성격이 아니라 그 이름 그대로 썼습니다. 지금은 오실 분만 미용실에 오세요. 그러니 간판은 사실 필요가 없어요.(웃음)”
손님은 하루 한 명, 두 명 정도가 딱 적당하다고 했다.
“지금도 멀리서도 손님들이 오시는데 친구들이랑 같이 오시는 분이 더러 있어요. 근데 여기가 자리도 좁고. 딱 한 사람만 하고 가면 그거로 끝이에요. 그래서 한번은 ‘댁만 오세요. 뭐 친구까지 모시고 오고 그래요’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
머리카락 자르고, 파마 말고, 중화제 발라서, 파마 풀고 머리카락 감기는 전 과정을 혼자 하니 힘도 제법 든다. 파마, 커트, 고데 세 가지만 고집하는 이유다. 파마도 구불구불, 바글바글 말아주면 제대로 고객이 만족하는 파마가 된단다. 단골들만 알아서 미용실을 찾아오니 손님 맞춤 머리 스타일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가격도 꽤 저렴하다. 파마 3만 원, 고데 2만 원. 서울 중심지 파마 가격이 싸도 너무 싸다.
“따님들이 다른 미용실 가자고 해서 따라가 보면 가격만 비싸다고 하세요. 나이 잡수신 분들 그냥 빠글빠글 해드리면 되거든요.(웃음) 요즘 미용사들은 그걸 잘 못하잖아요. 또 파마가 오래가는 것도 싫어하고요. 다른 미용실 다녀온 손님들은 파마한 것 같지 않다고들 말씀하세요.”
가끔은 젊은 손님이 파마를 해달라고 전화를 걸어오기도 한다. 그런데 젊은 사람은 정중히 거절한다. 머리숱도 많고 키도 크고 게다가 뭘 해달라는 요구사항이 많기도 많다.
벌교 처녀 서울 입성과 고마운 인연
어린 시절 신삼순 씨가 미용 기능사 자격증을 따게 된 데는 양복기술자였던 아버지의영향이 컸다. 앞으로는 기술 있는 사람이 대우받는 세상이라며 기술을 강조하신 덕분에 지금까지도 미용사 고수 소리 들으며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자격증은 고향에서 땄어요. 초창기 몇 달은 벌교에서 일하다가 1974년도 열아홉 됐을 때 서울로 올라왔어요. 당시 중앙동에서 먼 친척 언니가 미용실을 하고 있었어요. 거기서 한 3개월 있다가 여기 왔어요.”
직업 소개를 미용 재료상이 하던 때였다. 마침 친척 언니 미용실을 오가던 상인이 지금의 장성미용실을 소개해줬고 길고 긴 인연으로 이어졌다.
“여기 와서 굉장히 좋은 분을 만난 거죠. 그때도 종업원들이 적당히 일하면 나가게 하고 그랬는데 여기 사장님은 우리들을 끝까지 책임지던 그런 분이셨습니다. 제가 언니라고 부를 정도로 막역했고요. 저희 부모님과는 19년 살았지만 그분과는 26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쉰아홉 한창 나이에 돌아가셨어요. 저에게 이 미용실을 거의 주다시피 했습니다. 굉장히 귀중한 인연이에요. 저는 늘 언니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언니가 1996년도에 돌아가시면서도 저더러 일 많이 하지 말라고, 몸 챙기며 살라고 유언하시고 떠났어요. 언니가 나를 너무 반듯하게 잘 키워줬어요. 이곳에서 줄곧 일할 수 있는 힘을 주셨고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한 분, 한 분, 손님 친구 모십니다
긴 세월 같은 자리에서 스타일과 기분 한껏 살리는 머리 만지는 작업에 매진하다 보니 어느덧 60대 중반이 됐다. 손님들 또한 긴 세월 함께 길을 걸어준 고마운 동반자다. 취재 갔던 날에는 30년 단골이라는 이준자 씨가 와서 파마를 하고 있었다. 머리 모양이 마음에 쏙 들어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맡기는 일 없이 장성미용실을 찾는다. 짧은 머리카락이라 한 달에 한 번은 찾는다는 이준자 씨는 함께 밥도 먹고 절에도 같이 가는 친구 사이다.
“제일 나이 어린 손님이 50대, 주로 70대, 80대, 나이 많은 분은 내일모레 90. 우리 집에서 97세, 98세 어르신도 파마를 하셨죠. 두 분 다 작년, 재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새로운 손님을 만나기보다는 지금까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손님들 머리를 마지막까지 만져드릴 수만 있으면 하는 마음이다.
“여기 오시는 분들이 돈이 없어서 이곳에 오는 거 아닙니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 가는 미용실에 가면 불편하잖아요.”
신삼순 씨는 파마를 할 때 맨손으로 머리카락을 로드에 마는 일이 많다. 그만큼 순하고 좋은 파마 약을 쓴다고. 매무새도 흐트러짐 없다. 단정하게 빗은 올림머리에 봉선화 꽃으로 물들인 손톱. 미장원 대표의 포스를 한껏 자랑한다. 이 모든 것이 오랫동안 손님을 맞이하는 자세이자 배려다.
“하루에 한 분이 오시더라도 손님을 맞이할 때 긴장감이 있습니다. 아무리 오래된 손님이라도 말입니다. 파마를 해드릴 때는 정성이 들어가야죠. 오며 가며, 내가 여기 있으니까 지나다가 마음 편하게 들르십니다. 여기 이곳에서만 45년 세월인걸요.”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편안함을 유지하다니. 고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일 듯싶다.
우정으로 쌓여간 파마 시간
원래는 지금보다 꽤 공간이 넓은 미용실이었다. 10여 년 전 50세가 넘더니 몸에 이곳저곳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미용실을 접을 생각으로 매장을 세 줘버렸다. 일종의 정년퇴직이었다.
“환갑 지나면 손을 놓아야지 했어요. 형제들도 못하게 했고요. 뭣 하러 그렇게 이 좁은 데서 일하느냐 해서 안 하려고 했더니 손님들이 자꾸 오고 또 지금 이 공간이 놀고 있으니까 주변에서 미용실을 다시 열라고 했어요. 그렇게 10년을 또 했네요.”
돈을 많이 벌 생각은 전혀 없다. 몇 안 되는 단골손님 머리를 책임지는 것이 1순위다. 겨울에는 가스비, 여름에는 에어컨 사용료만 좀 벌면 그걸로 끝이란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해야 돼. 왜냐하면 앞이 창창하니까. 50대까지는, 55세까지는 나도 열심히 했으니까.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는 열심히 살아야죠. 60대쯤 되면 욕심은 좀 내려놓고 그저 남한테 돈 안 빌리고 밥만 잘 먹고 살면 되잖아요.”
이 골동품상회 같은 미용실에는 지금도 여전히 잘 사용하고 있는 오래된 물건들이 많다. 구식 고데기에 파마 잘 나오게 도와주는 열 기계 장치, 파마 로드 등은 다른 미용실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옛것이다. 40여 년 전 물건 그대로이지만 여전히 잘 사용하고 있다.
“저거 고장 나면 나도 끝이여.(웃음)”
기계가 망가지면 그 무거운 것을 들고 전파상 즐비한 세운상가에 가서 고쳐오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오래된 기계를 수리해주던 기술자를 찾는 게 예전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웃으면서도 애잔함이 전해진다. “칠십이 될 때까지도 파마를 계속 말고 있을 거 같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때까지 이걸 붙들고 있겄어?(웃음) 아직 4년 남았네요. 손님도 많지 않고 그때 가봐서 생각해야지 않을까요?”
그때도 고운 모습 그대로 웃음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미용 고수 신삼순 씨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녀는 뽀얗고 하아얀 뭉게구름 같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색다르고 기발한 발상이 피어오른다. 집중해서 듣자니 성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이상희 헤어팝’의 이상희(李相熙·56) 원장. 직업은 미용사인데 그녀 인생에서 봉사를 뺀다면 삶이 심심할 것만 같다. 손에 익은 기술을 바탕으로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니 말이다. ‘누군가를 돕는다’란 말에 백만 개의 하트풍선이 ‘뿅뿅’ 터지는 그녀의 환한 얼굴과 마주했다.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루하루가 감사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하루하루가 감사해요. 저는 되게 감사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감사’라는 단어를 꺼낸다. 열 손가락이 성한 가운데 기술을 배운 것도, 그 기술을 가지고 다른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있어서 감사하단다.
“미용기술을 배울 때 돈만 벌기 위해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한 달에 네 번 봉사를 간다면 나머지 시간은 봉사를 가기 위해 미용실에서 일하는 시간이라 생각하거든요. 제 이름이 서로 ‘상’에 빛날 ‘희’거든요. 말 그대로 상희답게 사는 거죠.”
어려운 이들을 만나면 뭔가 해줄 수 있어 좋고 자신이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후배들이 잘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이상희 원장을 만난 것은 5월 말. 본인 스스로가 정한 인생의 안식년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미용실을 계속하면 쉴 수 없겠더라고요. 원래 하던 넓은 미용실을 4월 30일까지만 하고 5월 1일 철거했어요. 저와 오래 일했던 디자이너들이 일할 곳을 마련해 지금의 아파트 상가로 옮겼어요. 이성적으로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철거하던 날 잠이 안 오더라고요. 안식년이라 해도 두 손 다 노는 게 아니라 그런지 다음 날부터는 잠이 너무 잘 왔어요.”
그런데 그 안식년이란 것 말이다. 대부분 휴식을 염두에 두고 설계를 한다. 이상희 원장은 그 하고 싶다던 일(?)에 더 빠져보려 미용실 운영 대부분을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맡겼다. 벌여놓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 당장 앞두고 있었던 새터민 결혼식에 피부 관련 사업, 매달 있는 봉사, 새로운 봉사, 미용인의 처우 개선 등 쌓이고 쌓인 일을 보니 이게 안식년인가 싶다.
봉사와 업(業)이 하나인 인생을 구상하다
전라북도 정읍 출신인 이상희 원장은 성공하려고 미용계에 입문했다. 미용실에 갔더니 기술을 배우면 서울도 갈 수 있고 해외도 갈 수 있다고 말해줬다. 솔깃한 말에 응시한 미용자격증 필기시험에 떡하니 붙었고 곧바로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학원 안 다니고 미용실에서 연습했어요. 고등학교 친구들 데리고 가서 머리 잘라주면서 두세 달 정도 훈련했고 합격 1년 정도 후에 상경했죠.”
서울에 오자마자 당시 유명했던 미용실에 취업한 이상희 원장은 일주일을 못 다니고 그만뒀다. 줄지어 서 있는 거울에 헤어디자이너의 이름이 아닌 번호가 붙어 있었다.
“큰 미용실 가야 성공한다기에 들어갔는데 거기선 사람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요. 적응하기 힘들더라고요. 제가 시골 애였지만 자존감은 있었거든요.”
서울살이 초반 20대의 이상희는 걷기도 많이 걸었다. 집이 있던 상도동을 지나고 한강다리 건너, 숙대, 남대문시장.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했다.
“신호등 앞에 있는데 파마가 막 말아지는 거예요. 다시 미용을 해? 돈 많은 남자 만나서 미용실을 열어? 가난해서 걷고 고민하면서도 걷고. 그렇게 내린 결론이 나를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을 키워 성공하겠다는 거였어요.”
머리 자르는 미용기술 외에도 머리를 올리는 ‘업스타일’에 ‘메이크업’ 기술도 할 수 있어야 했다. 다니던 미용실 원장과 선배, 동료에게 양해를 구해 시간을 마련했고, 잘살던 친구에게 학원비를 부탁해 메이크업 학원에 등록했다. 선후배 관계가 수직적이고 딱딱하던 시대였지만 업무시간을 배려받고 학비문제를 해결해나가면서 더욱 완벽한 미용사로서 비상을 꿈꿨다.
“후배들에게 돈과 시간이 없어서란 변명을 하지 말기를 당부해요. 꼭 해야 할 일이고 열정이 있으면 누구든 도울 테니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해요.”
20대는 미용사 이상희로서 삶을 채우는 시간이었다면 30대는 그것을 바탕으로 존중하고 돕고 깨치며 살아갔다.
‘높임말’과 ‘봉사’는 철칙
서른 살의 나이, 자신의 이름을 단 미용실을 열었다. 개업과 함께 이상희 원장이 철칙으로 삼았던 두 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가 직원들 사이에 높임말 사용이었다. 당시는 손님이고 미용사들이고 서로에게 함부로 하던 시절이었다.
“저희 때는 디자이너와 스태프가 같이 앉아 밥도 안 먹었어요. 솔직히 미용기술에는 차이가 있지만 사람 차이는 없잖아요. 그래서 오픈할 때부터 높임말을 사용했어요. 혹여 함부로 하는 손님이 있으면 더 예의를 갖춰 말했어요. 구두며 유니폼도 갖춰 입었습니다. 그렇게 분위기를 바꿨어요.”
두 번째는 바로 봉사다. 한 달에 한 번은 전 직원이 봉사하기로 했다.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좋은 일에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교, 지역 그 어떤 것도 따지지 않고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 어려운 이웃과 얼굴을 마주했다.
“처음 찾아서 봉사했던 곳이 가난한 마음의 집이라는 곳이었어요. 1990년대에는 메이크업이 아주 강할 때였어요. 장애우들이 저희를 보고 놀라서 숨는 거예요(웃음). 그래도 몇 번 가니까 친해졌어요. 봉사하다 보니 새터민과도 연결이 됐어요.”
어렵던 시절 동료들과 친구의 도움으로 메이크업을 배운 것이 두고두고 고맙다는 이상희 원장. 좋은 마음이 모여 얻은 기술이기에 봉사를 할 때 더없이 기분이 좋다.
“미용실 열고 1년쯤 돼서 어떤 손님이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러시아 여자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온 탈북민이 결혼식을 하는데 메이크업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요. 제가 메이크업을 한다는 걸 몰랐던 손님인데 말입니다. 당연히 좋다고 했죠.”
봉사한다는 게 알려지면서 놀이처럼 재미있고 기획력 있는 봉사가 이어졌다. 정부 지원이 어려운 틈새 청소년들을 위해 일일찻집을 열고, 산골 아이들을 위해 자전거도 사주고 고아원에 세탁기도 기증했다.
“손님들에게 이건 꼭 약속했어요. 우리 미용실에 와서 머리를 하면 그 일부는 다른 사람들 위해 쓰인다고요. 제가 그렇게 좋은 일을 하면 이곳에 오시는 분들이 복을 받는 거잖아요.”
‘K뷰티’와 ‘뷰티엔젤’ 봉사의 중심에 서다
2000년대 중반에는 한·일 미용인 간의 세미나가 자주 있어서 일본에 갈 기회가 많았다. 그때 일본의 성년의 날과 우리나라의 성년의 날에 대한 의문과 고민이 일었다.
“일본에 갔는데 일본 젊은이들이 기모노를 많이 입더라고요. 예쁘기도 하지만 그 나라 문화잖아요. 그런데 일본의 ‘성인식’은 공휴일인데다가 자치단체에서 큰 잔치를 열어요. 기모노 입고 화장과 머리를 하고. 이 모든 게 다 미용실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함께 일본에 방문하고 온 미용실 원장들에게 우리 청년들을 위한 성년의 날을 특별한 날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메이크업과 머리손질은 미용실에서 도움을 주고, 한복은 당시 이상희 원장이 다니던 우석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미르’에서 만난 지인이 공급해주기로 했다.
“연세대학교 다니는 손님한테 학교 대동제 때 성년식을 열어주겠다고 제안했어요. 단, 스마트폰으로 한복 입은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학생들에게만 기회를 주기로 했어요. 2011년 5월에 이틀 동안 저희가 준비한 성년식에 300여 명이 참여했어요.”
이 행사를 계기로 K뷰티디자인협회의 시초가 된 한국업스타일협회를 창설했다.
“일본에 같이 다녔던 미용인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서 좋은 일도 하고 미용실 손님도 우리 손으로 오게 하자고 말씀드렸어요. 한국업스타일협회는 이후 좀 더 의미를 넓혀 지금의 K(Korea)뷰티디자인협회가 됐습니다.”
이상희 원장의 또 다른 활동 영역은 뷰티엔젤이다. 미용실 개업 초기 직원들과 다니던 봉사가 주위 미용인들과 함께하는 한국미용봉사회로 이어지다가 누구든 함께 참여하는 연합봉사 형태의 ‘뷰티엔젤’로 탄생했다. 한국 봉사는 물론 캄보디아 미용기술 지원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미르’의 박문희 원장님이 의료진하고 캄보디아 봉사를 간다고 머리를 하러 오셨어요. 제가 ‘의사들은 너무 좋겠다, 다른 나라 가서 봉사도 하고’ 그랬더니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봉사를 하게 된다면 저는 미용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게 진행이 됐어요. 그쪽 아이들 미용기술 가르칠 생각을 시작하니까 잠이 안 왔어요.”
캄보디아 봉사는 이상희 원장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20년 넘게 많은 사람을 도우며 살아왔지만 처음의 그 에너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캄보디아 봉사를 앞두고 느꼈어요. 왜 잊고 있었지? 친구 한 명의 도움으로 내가 20대를 살았는데 지금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난해도 여자가 기술을 배우면 자식교육 시킬 수 있고 생활고에서 나아지니까 공부는 늦게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두 번의 캄보디아 미용기술학습프로그램을 통해 20명을 지원했다. 학비뿐만 아니라 숙식과 생활보조금까지 지원하는 사업이라 매년 할 수 없다고 한다.
“캄보디아 아이들과도 약속한 것이 있어요. ‘너희가 성공을 하면 한 사람을 가르쳐라.’ 그게 약속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캄보디아에 미용실 오픈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곳 아이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거죠.”
‘미용복지사’라는 직업 멋지지 않나요?
안식년이라는 본인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매달 13일 레드엔젤(청년응원단체)과 함께 K-컬처 콘서트를 개최한다. 2~3개월에 한 번씩은 다른 봉사단체와 연합활동도 한다. 캄보디아는 물론 올가을 새터민 합동결혼식도 계획 중이다. 미용인으로서의 고민도 남다르다.
“미용은 보건의 개념도 있지만 지금 사회에서는 복지의 개념입니다. 형편은 되는데 거동이 힘들어서 미용실에 못 오시는 경우가 있잖아요. 현재 미용은 이동 미용이 안 됩니다. 환자 외에는요. 미용복지사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미용사의 새로운 직업에 대한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고령화 사회 시니어들의 복지에 대한 깊은 배려가 담겨 있다. 이외에도 한류로 인해 유입되는 외국 여행객에게 보다 친근하게 한국 문화를 알릴 수 있는 ‘뷰티존’을 만들어 세계에 한국 문화와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단다. 미용실을 작은 평수로 옮기면서 ‘손아당(蓀雅堂)’이라는 공간도 만들었다. 뜻 맞는 사람들이 모여 봉사에 관한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허브 역할을 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근데 저는 생각하는 게 예쁜 거 같아요. 끊임없이 꿈을 꾸는 거 같아요. 내가 만일 미용 일에서 손을 뗀다면 내 직함을 뭘로 하지?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 이상희로 불리면 어떨까 하는데 되겠죠?”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를 꿈꾸는 그녀의 입에서는 이쁘다(예쁘다)라는 말이 참으로 많이 흘러나온다. 자주 쓰는 단어에는 그 사람의 평소 모습이 담겨 있다. 그녀의 이쁜 마음이 영원하길 지지하고 응원한다.
주상숙(66) 씨는 자체 개발한 스마트봉운동으로 예순이 넘은 나이에 새롭게 인생 후반전을 시작했다. 더 캐고 들어가면 그의 이력은 좀 별난 구석이 있다. 듣도 보도 못한 스마트봉운동을 개발한 데 이어 피부미용사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어서다.
남자 피부미용사라고? 보통 ‘피부미용사’ 하면 금남의 영역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가. 게다가 전직은 전혀 이쪽 분야와는 상관없을 것 같은 공무원이라니… 흥미진진할 것 같은 이 남자의 인생 스토리에 어찌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금남의 영역’이던 피부관리사에 도전
“퇴직할 무렵 몸이 안 좋았어요. 고혈압, 목 디스크, 퇴행성관절염에 소화불량, 이명, 비만도 있었고요. 그래서 은퇴 후 건강관리를 위해 헬스클럽을 다니면서 발 관리, 경락 마사지, 스포츠 마사지, 쑥뜸, 척추 교정, 다이어트 식이요법 등 여러 분야를 공부했습니다. 그러다가 피부미용사 국가 공인 자격증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됐어요. ‘아! 이거구나’ 싶었죠.”
주 씨의 전직은 경북도청 공무원. 7급 주사보로 시작해 꼬박 30년을 채우고 6년 전, 정년퇴직을 했다. 나이 육십에 아무 준비 없이 나오고 보니 막막할 뿐이었는데 우연히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이전까지 자유업에 속하던 피부 관리 분야가 2008년 국가 자격증이 신설되면서 전문직종이 된 거예요. 새로운 일을 하고 싶던 참에 바로 도전에 나섰죠. 그 길로 문제집을 사서 피부학, 화장품학, 피부관리기기학, 공중보건학 등을 독학으로 공부하고 필기시험을 쳤습니다.”
생소한 과목이긴 했으나 워낙 암기에 자신 있던 그는 한 번에 통과했다. 문제는 실기시험이었다. 혼자 공부하기엔 한계가 있어 피부미용학원에 등록했지만 젊은 여성 교육생들이 남자, 그것도 나이 많은 사람과 같이 실습하려 하지 않았다. 여성 마사지 모델을 구하기가 꽤 힘들었단다. “2시간에 2만원, 돈을 주면서까지 아르바이트 모델을 썼어요. 모델이 없을 때는 시중에서 구한 마네킹을 가지고 연습했습니다.”
기술을 익히는 것 외에도 어려운 점은 또 있었다. “얼굴뿐 아니라 목, 팔, 다리 마사지도 해야 하거든요. 거의 반라의 여성 모델을 처음엔 눈이 부셔 쳐다보지를 못하겠더라고요. 눈을 어디다 둘지 난감했죠, 솔직히….”
20대 젊은 여성 지원자들 사이에서 주 씨는 실기시험에 당당히 한 번에 합격했고 2009년 5월 피부미용사 면허증을 취득했다. 그동안 이 모든 일은 아내 모르게 저질렀다. 자격증을 내보이며 피부관리숍을 차리겠다고 하자, 아내가 펄쩍 뛰었단다. 남자로서 할 일이 못 된다는 거였다. 그는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해 7월,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20만원을 투자해 20평짜리 피부관리숍을 창업했다.
◆‘100세 건강 스마트봉운동’ 직접 개발
그의 가게는 꽤 성업했다. “고객의 90%가 여성이라서 숍 운영이 쉽진 않죠. 창업 초창기엔 파리만 날렸어요. 주 고객층이 여성인데 나이 많은 남자 피부관리사에게 얼굴과 몸의 마사지를 맡긴다는 게 어째 선뜻 내키진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섬세하면서도 힘 있는 마사지가 고객들에게 시원함을 선사하며 호응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피부 관리뿐 아니라 경락마사지, 자세 교정, 식이요법 등에 대한 서비스를 제공, 해박한 지식으로 고객의 건강 문제를 해결해 줬더니 1년쯤 지나자 입소문을 탄 가게에 단골손님이 끊이지 않았다고. 주 씨의 인생 이모작은 피부미용에서 끝나지 않는다.
“피부관리숍을 운영하며 건강 관련 공부를 계속하다 보니 나름대로 건강 이치를 터득하게 됐어요. 나이가 들면 몸이 굳어지고 골격과 자세가 틀어져 몸이 아프며 여러 가지 질병이 온다는 것을 깨달았죠. 내 스스로 뭉친 근육을 풀고 골격을 바로잡는 운동 방법은 없을까 연구하게 됐습니다.”
그가 개발한 일명 ‘100세 건강 스마트봉운동’. 도구와 자기 체중을 이용해 주로 누워서 하는운동이다. PVC 파이프에 보온재를 덧대고 인조가죽을 감싸 만든 지름 9cm·길이 50cm의 작은 스마트봉에 그의 원대한 꿈이 걸려 있다.
“스마트봉 운동을 통해 굳은 근육은 풀리고 틀어진 목, 어깨, 등, 허리 골반 등의 골격이 바로 잡히는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운동법으로 저부터 효과를 톡톡히 봤거든요. 우선 고혈압 약을 끊었고요. 고관절을 바로잡고 목 디스크도 해결했어요.”
가족, 친구들, 피부관리숍 고객에게도 권유해 봤더니 스마트봉운동 효과가 입증됐더란다. 자신감이 붙은 그는 특허 출원과 상표등록 출원을 신청했다. 또 운동법을 알리기 위해 문화센터 50곳에 강좌 개설을 제안했다. 그러나 처음 들어보는 이 운동법에 관심을 가지고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그러던 중 운 좋게 한 문화센터에 요가선생 ‘대타’ 자리가 났고 회를 거듭할수록 운동 효과를 본 사람들의 입소문이 전해지면서 그의 강좌 수강생은 점점 더 늘어났다. 이를 계기로 주 씨에게 여러 문화센터에서 스마트봉운동 강좌 요청이 들어오고 있다.
주 씨의 향후 목표는 ‘강사 양성’이다. 스마트봉운동 강사를 배출해 더 많은 사람이 이 운동을 할 수 있도록 보급하고 대중화를 이루겠다는 심산이다. 최종 목표는 동네 주민들과 함께 인근 농촌에 ‘자연건강마을’을 조성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