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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지 않고 일하는’ 최순호, 그가 현역일 수 있는 이유
- 선수 은퇴 후 31년. 냉혹한 스포츠 세계에서 여전히 최순호(61)는 매력적인 선택지로 건재하다. ‘레전드 대우’가 아니다. 수원FC 단장 공개 모집에서 8대1 경쟁률을 뚫었다. 신입 단장은 자신만의 오랜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쉬지 않고 일하는 최순호식 노하우를 캐왔다.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한 카페의 널찍한 통창 너머로 최순호 수원FC 단장이 보였다. 185cm의 큰 키, 꼿꼿한 자세. 아이폰을 능숙하게 다루는 그는 통화로 업무를 처리하느라 분주했다. 끊자마자 다시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만 61세, 현역. 최 단장의 어느 대체 휴무일 풍경이다. 선수 생활을 마감한 지 30여 년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지도자로 또 행정가로 축구 현장에서 숨 쉬는 중이다. “나처럼 일하는 사람도 드물 거예요. 사회적으로는 은퇴할 때라고들 하니까요. 축구계는 그런 개념이 덜하긴 한데, 그래도 후배들이 한마디씩 하죠. ‘어떻게 형은 쉬질 않네?’” 너털웃음을 지어 보인 최 단장은 금세 확신에 찬 눈을 밝히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어떻게’를 들려줄 채비가 끝난 듯 보였다. 축구 천재와 키다리 아저씨 최순호 단장은 축구계에서 불세출의 재능으로 꼽힌다. 국가대표 통산 96경기, 30골.(참고로 손흥민은 2023년 7월 기준 111경기 37골을 기록 중이다.) 재능에 관한 한 겸손은 없다. “타고났다고 봐야지. 그게 한 3년 동안 쓴 기록이에요. 골 넣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그는 당대 보기 드문 장신에 유연성을 겸비했다. 발이 빠르면 으레 지구력이 부족하기 마련인데, 청년 최순호는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쉬는 시간에 공 차다가 축구부에 뽑혔어요. 워낙 빨랐으니까 눈에 띄었겠죠. 축구를 하면서도 육상부로 청주시 대회에 나가 수상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운동은 타고나는 거예요.” 최 단장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미 포항제철실업축구단(포항스틸러스의 전신) 입단이 확정됐다. 팀 체질 개선을 위해 어린 선수들을 주목했던 ‘실업 최강’ 포항제철은 일찌감치 최 단장을 점찍었다. 1980년대를 풍미한 ‘아시아의 호랑이’는 그렇게 탄생했다. “개인적으로는 20대 초반 4~5년을 전성기라고 생각해요. 타깃형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며 많은 득점을 올렸습니다. 시기로 따지면 1979년에서 1984년까지죠. 정말 재미있게 축구했어요.” 때로 대중과 개인의 평가는 차이를 보이기 마련이다. 최 단장도 그렇다.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대한민국 월드컵 통산 최다 공격포인트 기록(1골 3도움. 3골 1도움을 기록 중인 손흥민과 동률이다)을 안겨준 1986년 멕시코월드컵과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당시 그는 축구에 대한 흥미를 잃은 상태였다. “어느 순간 딱 막히는 느낌이 왔어요. 더 이상 축구가 재밌지 않았죠. 월드컵이 동기부여는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만큼 재밌거나 의욕이 넘치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분이 기억하는 멕시코월드컵 이듬해인 1987년에는 오히려 가장 좋지 않았죠. 아예 선수 생활을 접으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부침을 겪을 때마다 최 단장 곁엔 ‘키다리 아저씨’가 있었다. 포항제철실업축구단 창립자인 박태준 고 포스코 명예회장이다. 그는 최 단장을 각별히 아꼈다. “왜 유독 예뻐했는지 곰곰이 생각한 적도 있을 정도입니다. 당시 ‘볼 좀 찬다’는 선수들은 다 포항제철에 모였지요. 그 팀에 고등학생이 입단한 겁니다. 어떻게 보면 병아리죠. 그 병아리가 애정을 주고 돌보니 장닭으로 성장한 겁니다. 그래서 더 예뻐 보였겠죠. 내 유추는 그렇습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최 단장이 고교 3학년 때인 1979년부터 박 회장이 작고한 2011년까지 33년 동안 이어졌다. 최 단장은 오랜 시간에 걸쳐 큰 어른의 지혜와 선견지명을 배웠다. 그는 “지금까지 일하는 기틀이 잡힌 건 그때”라고 말한다. “사람 인연이 참 중요합니다. 그분을 못 만났더라면 지금까지 일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분이 강조한 건 결국 하나였습니다. 시스템이지요. 한번은 ‘애국이 뭐라고 생각해?’라고 물었는데, 멀거니 있으니 말씀하시더군요. ‘너는 축구인이지? 그럼 축구를 열심히 하는 게 애국이야. 축구를 더 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진짜 애국이야.’ 그렇게 환경, 즉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쉬지 않고 일하는 법 1992년 은퇴 후 최 단장은 포항스틸러스, 현대미포조선, 강원FC 감독을 역임했다. 포항 감독 시절인 2003년에는 K리그 최초로 클럽 유스 시스템을 도입해 한국형 유소년 선수 육성 시스템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 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과 FC서울 미래기획단 단장,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포항 유스 총괄이사 등을 두루 거쳤다. “30~40년 전부터 구상한 것을 그동안 꾸준히 해왔습니다. 예전엔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최 단장이 벙긋 웃었다. 그를 오래 봐온 이라면 웃음의 의미를 유추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축구계 이상주의자라고 불릴 만큼 늘 현실 그 이상을 바라봤다. 눈앞의 결과가 중요한 스포츠판에서 때로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너무 커 뜬구름 잡는다는 말까지 들었지만 기준을 낮추지 않았다. 선진 축구 시스템에 대한 타협 없는 열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만의 무기가 됐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옛날에 축구 좀 한 것 가지고 지금까지 일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요즘 말로 하면 ‘축구 금수저’ 아니냐는 거죠.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최 단장은 쉬지 않고 일하는 그만의 방법을 열거할 수 있다. 가장 핵심이 되는 두 가지는 기획, 그리고 전문성이다. “저는 행정적으로 일합니다. 항상 기획하죠. 어떻게 해나갈 건지 멀리 보고 플래닝하는 겁니다. 그리고 유소년이라는 전문 분야가 있습니다. 유소년은 사회는 물론 축구에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유소년팀에서 성장한 선수가 승급해 프로 무대를 누비는 게 시스템의 선순환이니까요. 실은 지도자 할 때도 유소년부터 맡고 싶었습니다. 여건이 되지 않아 그렇게 할 수는 없었지만, 프로팀 감독을 할 때도 산하 유소년에 관심을 기울였고 지도자들도 꾸준히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늘 유소년 육성 지원 체계에 관심 있는 사람이다’라는 이미지가 생긴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깊이 있게 하니까 다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기획과 전문성을 두 가지 태도가 뒷받침한다. 깊은 사고와 원칙주의다. “늘 기도하고 계획 세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기도를 하면 생각이 깊어지기 마련입니다. 구체적인 비전을 그려야 기도도 가능하니까요. 또 한 가지는 원칙주의입니다. ‘최순호는 대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인식이 축구계에 있는 줄 압니다. 원칙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원칙대로 일하면 누구든 쉽게 보지 않습니다. 대개 이야기가 길어지는 경우는 원칙대로 안 했을 때입니다.” 30여 년에 걸친 노하우를 쏟아낸 최 단장은 정말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다며 빠르게 목을 축였다. “일하기 위해서 일을 쉬었습니다. 그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진지했던 표정은 어느덧 환한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일하는 도중 한 번씩 쉬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안식년 개념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의도적으로 1년 정도 쉰 게 두 번입니다. 단연 2005년이 기억에 남아요. 미국에서 6개월여를 보냈는데,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예배를 마친 뒤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했습니다. 미국 오렌지카운티 한인 타운에는 이민자들을 위한 영어 아카데미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오전 내내 공부하고 오후에는 골프나 등산을 하며 보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태국 파타야에 약 100일간 머물면서 중고등학생들에게 축구를 가르쳤습니다. 목이 타서 새카맣게 변할 때까지요. 재밌는 건 그렇게 1년을 쉬었는데도 사람들은 나더러 안 쉬고 일만 한다고 하는 겁니다.(웃음)” 이상주의자의 현재진행형 꿈 이따금 남몰래 숨을 골라온 최 단장은 현재 일하는 즐거움에 빠져 있다. 지도자 때보다 일하는 강도는 훨씬 강하지만 그만큼 즐겁다고 했다. “단장을 맡기 전까지는 사실 일정이 타이트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선수와 지도자는 정신적으로 고되고, 단장은 육체적으로 고되달까요? 사람들을 많이 만나잖아요. 무언가 부탁하고, 답변하고, 협의하고요. 말하는 게 엄청 피곤한 일입니다.(웃음) 챙겨야 할 팀도 남자 성인, 여자 성인, 초중고 유소년까지 여럿입니다. 체력이 예전 같지는 않아요. 예순 조금 넘어서부터 실감하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새에 하품이 자꾸 나오니까요.” 이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밝다. “그런데 재밌긴 엄청 재밌어요.” 인생 스승에게 얻은 교훈을 오랜 시간 숙성시켜 체화한 그가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밑바탕에는 일상 속 단단히 내린 루틴, 그리고 자기관리가 있다. 새벽 4시 반에서 5시 반 사이에 기상하는 건 오랜 습관. 7시 반이면 사무국에 출근해 늦어도 오전 10시까지 주요 일과를 처리한다. 일주일, 한 달 계획까지 살핀 뒤 직원들이 출근하면 함께 해야 하는 일을 본다. 오후에는 외부 일정을 소화한다. 마케팅 차원으로, 또 관중 유치 차원으로 각종 행사에 참석하기도 한다. 저녁은 집에서 최대한 일찍 먹고 보통 9시에서 9시 반 사이 잠자리에 든다. 짬이 나면 틈틈이 근력 운동 위주로 몸을 단련한다. 가끔 즐기던 와인은 입에 대지 않은 지 꽤 됐다. 담배는 일절 피우지 않는다. “이런 습관을 들인 지는 상당히 오래됐습니다. 운동법만 조금 바꿨지요. 나이가 들면 유산소 운동보다 근력 운동을 하는 게 좋거든요. 신체 건강은 그렇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정신 건강도 있을 텐데, 그런 부분은 어쩐지 ‘일한다’고 하면 다 잊어버립니다.(웃음) 오랜 시간 생각한 꿈과 목표가 있으니까요.” 최 단장의 꿈은 ‘글로벌 스탠더드’ 만들기다. 시스템을 보다 구체적으로 명명해 글로벌 스탠더드라 부르고 있다. “표본이 될 만한 팀이 내 기준에는 아직 K리그에 없습니다. 바르셀로나나 레알마드리드, 파리생제르맹 같은 규모가 큰 구단을 만들겠다는 게 아닙니다. 작지만 구조나 내용은 세계적인 수준을 갖춘 팀을 만들고자 합니다. 소프트웨어부터 하드웨어까지 손볼 곳이 많습니다. 홈구장을 개선해야 하고 숙소, 미팅룸, 훈련장, 피트니스센터 등을 갖춘 클럽하우스도 필요합니다. 팀이 더 단단해지려면 유소년팀도 강해야 합니다. 체계를 잡고 내용을 잘 집어넣어서 유소년 선수들이 프로팀으로 올라올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글로벌 스탠더드입니다.” 이제 오랫동안 그려온 스케치에 채색하는 일만 남았다. 그는 일을 멈출 생각이 없다. “수원FC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문제겠지요. 시간만 넉넉히 주어지면 다 할 수 있어요!”
- 2023-08-08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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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돌봄, 지역사회가 열쇠다⑤] 스페인, 경험 앞세워 노인을 사회 주체로
- 경제협력기구(OECD)는 스페인은 일본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노인이 많은 국가에 등극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지난 2017년에 발표한 ‘불평등 노령화 예방 보고서’(Preventing Ageing Unequally)에서 스페인의 65세 인구 비율이 2050년에 40%에 도달할 것이라는 예측에 근거한 주장이다. 이에 스페인 정부는 초고령화시대를 문제없이 헤쳐 나가기 위해 고령층 건강 대책을 시행하고, 취약 계층을 위한 복지 법안 등을 발의한 바 있다. 또한 노인복지청(IMSERSO)을 정부 부처 내 독립 부서로 두고 국민들의 노후를 지원하고 있다. 노인복지청의 사업으로는 1985년부터 이어진 ‘고령자 여행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65세 이상 연금 수급자와 배우자를 대상으로 하며, 업체들과 제휴를 맺고 스페인 관광지의 교통, 숙박 시설 등을 할인된 가격으로 제공한다. 지난 2일 스페인 일간지 ‘엘파이스’(El País)의 보도에 따르면 여행 상품과 여행지를 다양화해 스페인 내 52개 지방을 방문할 수 있게 됐다. 프로그램은 문화나 자연 경관을 선호하는 노인의 요구에 근거해 개선이 이뤄지고 있다. 또한 사회인권부에 따르면 이로 인해 이용 요금 인상이 이뤄질 수 있지만, 지난해 연금 인상률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스페인 대학들은 55세 이상 시민들을 대상으로 ‘경험자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문화를 경험과 지식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쉽게 접근하고 향유하는 기회를 제공하며 △대학 내에서 사회적 상호 관계를 형성하고 이어나가게 하고 △노인이 아닌 다른 집단에게도 도움을 줌으로써 사회적으로 연대하는 태도를 취하도록 하는 데에 목표를 둔다. 인문학, 과학, 사학, 예술 분야 등의 강의를 제공하는 이곳의 이름은 노인을 단지 나이든 존재로 보지 않고 그들의 경험을 존중한다는 의미가 담겼다. 이 외에도 지자체를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고령자 친화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수도인 마드리드와 주 도시 바르셀로나의 사례를 살펴보자. 마드리드, ‘영원한 현역’으로 사회 발전에 기여 스페인에는 기업의 전 임원을 지내고 은퇴한 중년들이 경험과 노하우를 제공하는 비영리법인 ‘세콧’(SECOT)이 운영되고 있다. 1989년 마드리드에서 처음 설립돼 현재는 스페인 내 도시 외에도 유럽 연합(EU) 22개국의 조직이 모여 30세 미만의 실업자 혹은 실직자나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45세 이상 중년의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목표를 두고 있다. 세콧 회원은 창업, 마케팅, 기업 경영에 필요한 지식이나 재무 관리 방식 등에 대한 강의를 무급 자원봉사로 제공한다.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인터뷰를 진행하며, 전 직장과 업무를 고려해 업무를 배당한다. 또한 실전 강의를 나가기 전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세 번의 모의 강의에서 통과해야 기업에서 강의할 수 있다. 마드리드 내 자치지역인 트레스 칸토스(Tres Cantos)에서는 지난해 고령친화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인도와 공원 내 벤치, 횡단보도 등을 점검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해당 사례를 소개하며 60세 이상 지역 주민 50명이 직접 18개 구와 2개 공원의 GPS 사진을 수집해 정비가 필요한 부분을 확인했으며, 휠체어를 이용하는 이웃에게 이동 편의나 접근성에 대해 직접 확인하는 등 사업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고 전했다. 온‧오프라인서 1인 고령가구 챙기는 바르셀로나 스페인 바르셀로나시는 2017년 말 기준, 총인구 160만 명 중 65세 이상 30만 명이며 이중 4분의 1은 홀로 거주한다. 시 정부는 홀로 거주하는 노인을 위해 ‘빈끌레스바르셀로나’(VincleBCN)와 ‘내 나이가 어때서?’(Soc gran, i que?) 프로그램을 도시 전역으로 확대 시행하고 있다. 빈끌레스바르셀로나는 노인의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관계를 형성, 강화하고 노인 복지를 개선하기 위해 시행됐다. 행정상 바르셀로나에 주민으로 등록된 65세 이상 주민이 이용할 수 있다. 프로그램은 사는 곳이나 관심사가 일치하는 노인들을 하나의 커뮤니티로 묶어 서로 일상을 공유하고,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돕는다. 참여자는 프로그램과 이름이 같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을 활용해 가족과 친구,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커뮤니티 구성원과 일상을 공유한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 등 스마트 기기가 없지만 참여를 희망하는 경우 시에서 기기를 대여해주고 있다. 앱은 노인의 사용 편의를 위해 메시지를 텍스트 외에 음성으로도 입력할 수 있고, 커뮤니티 구성원과의 일정을 기록해 알림을 받을 수 있는 등의 기능이 탑재돼있다. 2021년 10월부터는 청력이 좋지 않은 이들도 이용할 수 있도록 이메일이나 모바일 메신저 서비스 ‘왓츠앱’(WhatsApp) 연동 기능을 추가했으며, 수화가 가능한 직원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게 됐다. 디지털 세대 격차를 없애기 위한 프로그램도 시행된 바 있다. 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나는 블로거다’(soy blogger). 바르셀로나 시의회의 아동‧청소년‧노인 서비스국의 노인 홍보부서에서 추진하는 시민 저널리즘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바르셀로나 노인들은 소셜 네트워크와 시니어 시민을 위한 시 웹사이트 블로그에 기고하는 자원봉사 기자 및 사진작가로 활동한다. 이들은 활동 전 디지털 및 저널리즘 교육을 사전에 이수한다. 프로그램의 목표는 오늘날 자주 쓰이는 SNS 중 하나인 페이스북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교육하는 것이나, 최종적으로는 이들이 직접 도시에 얽힌 콘텐츠를 취재해 제작하고, ‘시니어 웹’(Web de la Gent Gran) 블로그와 바르셀로나 시립 SNS 계정에 올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페이스북과 유튜브 계정이 운영 중이다.
- 2023-03-03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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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간암, 의사들이 조기 검진을 외치는 이유
- 연말이 되면 자연스레 우리의 관심사는 '간 걱정'이다. 잦은 술자리로 인해 늘어나는 음주량을 몸으로 느끼며, 간에 탈이 나지는 않나 걱정하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괴로워하는 간은 우리에게 어떤 신호도 보내주지 않고, 홀로 앓는다. 간이 걱정되는 시기, 남순우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소화기내과 교수의 칼럼으로 우리의 건강을 지켜 내보자. 우리 몸은 여러 중요한 장기들의 상호작용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이를 토대로 생명 활동을 이어간다. 그중에서도 간은 신체의 ‘에너지관리센터’로 불리는 매우 중요한 장기다. 간은 우리 몸의 기본 기능을 유지하고 외부의 해로운 물질로부터 생명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장에서 흡수된 음식물을 적절히 변형해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비타민 등 영양소로 만들어 보관하는가 하면, 포도당이나 아미노산, 글리세린, 유산 등을 글리코겐이라는 다당류로 저장했다가 몸이 필요로 하는 물질로 가공해 온몸의 세포로 운반하는 공장 역할도 맡는다. 더불어 우리 몸에 필요한 많은 양의 단백질, 효소, 비타민이 장에서 합성될 수 있도록 담즙산을 만들고, 몸의 부종을 막아주는 알부민이나 혈액 응고에 관여하는 프로트롬빈과 여러 응고인자를 생성해 몸을 해독한다. 항체인 감마 글로불린을 만들어 혈액의 살균 작용을 통해 우리 몸의 면역 기능이 원활해지도록 돕는 것도 간의 몫이다. 그러나 간은 ‘침묵의 장기’다. 지속적으로 바이러스, 술, 지방, 약물 등의 공격을 받아 전체의 약 70~80%가 파괴돼도 위험 신호가 애매한 경우가 많다. 간 자체에 신경세포가 매우 적어 염증이나 간암이 발생해도 통증을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암이 커지면서 간을 둘러싼 피막을 침범한 후에야 불편함을 느낀다. 간암 3명 중 2명 5년 내 사망… 국내 암 사망률 2위 간에 생기는 악성종양은 간세포암, 담관암, 전이성 간암, 혈관육종 등이 있다. 보통 간암이라고 하면 간세포암을 지칭한다. 간암은 전세계적으로는 6번째, 국내에서는 7번째로 많이 발생하는 암이다. 지난해 말 발표된 국가암등록통계에 따르면 2019년 국내 간암 신규 환자는 1만5605명으로 갑상선암, 폐암, 위암, 대장암, 유방암, 전립선암 다음으로 많았다. 인구 10만 명 당 발생 비율을 나타내는 조발생률은 30.4명, 전체 암 발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1%다. 성별로는 2.9:1로 남성에서 더 많다. 사망률은 더 심각하다. 간암의 최근 5년간(2015~2019) 상대 생존율은 37.7%로 전체 암 생존율 70.7%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간암 환자 3명 중 2명은 5년 안에 사망한다는 얘기다. 주요 다빈도 암 중 폐암(34.7%)에 이어 두 번째로 낮다. 주목할 점은 간암이 한참 경제활동을 하는 40~50대 암 사망률 1위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흔히 간암의 원인으로 음주를 떠올리지만, 그보다는 B형이나 C형 바이러스성 간염 등에 의한 만성간염과 그 합병증인 간경변증이 더 영향을 미친다. 2022년 간세포암종 진료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간암의 원인은 B형간염이 1위, C형간염 2위, 알코올이 세 번째 원인이다. 이외에 지방간이나 자가면역성 간염 등도 원인이 될 수 있다. 특히 간경변증은 간암 발생에 큰 영향을 준다. 간암 환자의 80%에서 간경변증이 선행하고 간경변증을 앓는 경우 간암 발생률이 현저히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간이 바이러스나 음주 혹은 독성물질 등 다양한 원인에 의해 손상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간세포의 종양억제유전자는 힘을 잃는 반면, 종양유발유전자는 다양한 경로로 활성화되면서 간암으로 진행하게 된다. ‘침묵의 장기’ 조기 발견 어려워… 위험요소 있다면 정기검사 필수 간암은 초기에 발견이 어려운 암이다. 윗배에 통증이 있거나 덩어리가 만져질 때, 황달이나 심한 피로감 혹은 배에 복수가 차는 증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때는 이미 상당히 진행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간암은 초기에 발견하지 못하면 예후가 좋지 않다. 때문에 정기적인 검사가 필수다. 일반적으로 만성간염이나 간경변증이 없는 상태에서 간암이 발생하는 경우는 드물다. 위험요소가 있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선별검사를 정기적으로 받아야 한다. 간암은 간수치 혈액검사와 간암종양지표(AFP), 초음파 혹은 CT(컴퓨터단층촬영) 등으로 진단한다. 만성간염이나 간경변증을 가진 환자는 주기적으로 간 전문의에게 진료를 받아야 한다. 간염이나 간경변증이 있는 위험군 환자는 6개월 간격으로 간암종양지표와 초음파 검사를 시행해 간암을 조기에 발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초음파로 간 실질 내에 새로운 병변이 생겼는지 확인하고 종양지표 검사가 정상으로 유지되는지 주기적으로 살펴야 안심할 수 있다. 초기 간암, 간이식 가장 효과적… 중기 이후엔 간동맥화학색전술 대한간학회에서 사용하는 간암의 기수는 종양의 크기, 종양의 림프절 혹은 혈관 침범 여부, 다른 장기로 전이 여부에 따라 4단계로 나눈다. 환자의 간 기능 상태와 운동 가능 상태 등을 고려해 5단계 병기로 구분하는 바르셀로나 병기법도 널리 쓰이고 있다. 종양의 크기가 작고 혈관 침범 등이 없는 초기 단계(간암이 한 개이고 직경 3㎝ 이하)에는 간을 절제하는 수술이 원칙이다. 물론 조금 크더라도 간 상태가 나쁘지 않고 수술이 가능하면 수술로 간을 절제해 주는 것이 좋다. 직경 1~2㎝ 미만의 작은 간암의 경우 고주파 열치료를 통해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초기 간암 치료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간이식이다. 다만 간암은 아주 초기에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고 대부분 초기 상태를 벗어난 이후에 발견되기 때문에 현재는 간동맥화학색전술(TACE, Transcatheter arterial chemoembolization)을 가장 많이 시행한다. 넙다리동맥(대퇴동맥) 혈관을 통해 간 동맥으로 카테터를 넣어 항암제와 색전물질을 직접 주입하는 시술이다. 만약 종양의 크기가 크고 암이 혈관을 침범했거나 다른 장기로 전이된 진행성 간암에는 경구 항암제(넥사바, 스티바가, 렌비마 등)나 주사 항암제(옵디보, 테센트릭+아바스틴 등)를 사용해 질병의 진행을 늦추는 방법을 시행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수술적 절제술이나 간동맥화학색전술에 비해 효과가 상대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수술이 불가능한 진행된 간암에서는 주로 항암제를 사용한다. 방사선 치료도 고려해 볼 수 있는데 전체 간에 시술하는 것보다는 작은 부위, 이를테면 혈관이 막힌 부위 등에 방사선을 조사해 간동맥혈전 등을 제거하는 시도를 해 볼 수 있다. 최근에는 맞춤형 면역치료 요법 등이 개발 중으로 미래에는 면역치료가 치료법의 하나로 등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간경변증 원인 B형·C형간염 예방하고 과도한 음주 피해야 간암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간경변증의 원인이 되는 B형간염이나 C형간염의 예방이 중요하다. B형간염은 백신 접종을 통해 예방한다. C형간염은 아직 백신이 개발되지 못했기 때문에 혈액이나 분비물을 통한 감염에 주의한다. 주사침 1회 사용, 부적절한 성접촉 피하기, 문신이나 피어싱하지 않기 등이 중요하다. 여럿이 쓰는 손톱깎이나 면도기를 사용하는 것도 절대 피한다. 알코올성 간경변증 예방을 위해서는 과도한 음주를 자제하고, 알코올성 간질환이 발생할 경우 절대 금주해야 한다. 최근 과체중과 운동 부족으로 인한 비알코올성 지방간염으로 인한 간 손상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적절한 신체활동과 식단조절 등으로 대사성 증후군을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간암은 재발률이 높은 편이다. 수술을 해도 2년 재발률이 40% 이상이다. 재발할 경우 수술이 가능하면 절제술을 재시행할 수 있지만 만약 어렵다면 단계를 하나씩 높여 간동맥화학색전술을 반복하거나 경구/주사 항암제를 사용하는 방법으로 접근해 치료한다. 재발을 일찍 발견하기 위해 간암 치료 후에도 정기적인 CT나 MRI(자기공명영상) 검사가 필수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간암은 일찍 발견해 치료 옵션을 더 많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 2022-12-07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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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한컷] 요즘 애들은 모르는 88 서울올림픽 이야기
- 23년 전 오늘인 1988년 9월 17일. 제24회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이날은 임시공휴일이었다. 오전 10시 30분에 시작하는 개막식을 보기 위해 온 가족이 둘러앉아 들뜬 마음으로 TV를 시청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올림픽 개회식이 보통 오후 3시경에 시작되던 것에 비하면 이례적이었다. 당시 개회식 시간을 조정한 이유로 국가 이미지인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맞춰 아침에 개막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이후 미국 내 올림픽 방영권을 독점하고 있는 NBC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해서라는 가설도 힘을 얻었다. 이처럼 서울올림픽에는 여러 가지 일화가 있다. 사실 올림픽 서울 유치는 기적에 가까웠다.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이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올림픽을 치르려면 경비가 약 8000억 원 정도는 있어야 했다. 하지만 한국은 이를 감당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이 기적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집요하게 집행한 주역은 바로 현대그룹 총수였던 정주영 회장이다. 한국과 일본이 막판까지 신경전을 벌일 때, 정주영은 한국 IOC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대그룹의 해외 파견 직원 부인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꽃바구니를 하나씩 각국 IOC위원 방에 넣어 줬다. 이에 대한 반응은 의외로 대단했다. 다음날 각국 IOC위원들은 꽃을 보내준 데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러나 최고급 일본 손목시계를 선물했던 일본에는 감사 인사가 없었다. 결국 비싼 선물보다 ‘정성’을 택한 한국의 정주영은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개막식 성화 점화 때는 ‘비둘기 화형식 사건’이 있었다. 당시 성화가 점화되면서 평화의 상징으로 풀어놓은 비둘기들이 불길에 휩싸이는 것처럼 보였다. 크고 넓적한 원 모양의 성화대는 새들이 앉기에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성화 점화 순서가 됐는데도 비둘기들이 날아가지 않았다. 결국 올림픽 운영진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성화대에 불을 붙였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2012 런던올림픽 특집판에서 바로 이 비둘기들의 ‘화형식’을 거론하며 서울올림픽 개막식을 역대 최악의 개막 행사로 꼽았다. 당시 서울올림픽 조직위는 “실제로 불에 탄 비둘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날아갔다”고 공식 해명했다. 지난 2019년 유튜브 채널 ‘사소한 리뷰’에서 성화봉송식을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서울올림픽 다큐멘터리 ‘손에 손잡고’ 영상이 소개됐다. 영상에서 유튜버는 “우선 세계적으로 논란이 됐던 카메라 각도에서는 비둘기가 타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성화대에는 불이 닿지 않는 난간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수십 마리의 비둘기가 처참하게 화형당한 참사로 회자되지만 사실 희생 당한 비둘기는 거의 없었던 셈이다. 다만 불구멍 가까이에 있던 비둘기 한 마리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것으로 드러났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때를 교훈 삼아 1992 바르셀로나올림픽 이후 비둘기를 폐회식 때 풀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주로 밤에 개회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애틀랜타올림픽 조직위원회는 개막식 때 비둘기를 날리는 행사를 없애기로 하면서, IOC는 앞으로 모든 올림픽에서 비둘기를 행사에 활용하는 관행을 없애기로 했다.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 관련 이야기도 있다. 2008년 미국의 MSNBC는 베이징올림픽 특집 방송에서는 ‘역대 올림픽 최고의 마스코트’를 선정했는데, 여기서 호돌이가 3위를 차지했다. 이 방송은 정치성을 배제하고 외관으로만 평가했으며, 호돌이는 호랑이가 웃고 있는 모습이 친근감을 준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호돌이에 대해 “머리에 왜 화장실 청소 도구(뚫어뻥)를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농담을 덧붙였다. 국민체육진흥공단도 ‘몇몇 외국인들은 호돌이가 왜 뚫어뻥을 머리에 쓰고 있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고 관련 일화를 소개해 놓았다. 참고로 MSNBC가 뽑은 최고의 마스코트 1위는 미샤(1980 모스크바올림픽), 2위는 코비(1992 바르셀로나올림픽)였다. 또 1988년 오전 11시 30분경 조정 경기에서 1등을 기록하고 올림픽 2연패에 달성한 이탈리아 조정팀의 다비드 티자노 선수는 금메달의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물 속으로 뛰어드는 우승 세리머니를 펼쳤다. 그런데 타자노 선수는 헤엄치던 도중 금메달을 그만 한강에 빠뜨리고 말았다. 한강 바닥으로 가라앉은 티자노 선수의 금메달을 찾기 위해 미사리 경기장에 4명의 잠수 대원이 투입돼 수색을 펼쳤다. 하지만 물이 탁하고 수심이 3.4m나 되는 강 속에서 금메달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수색은 다음 날까지 이어졌고, 결국 수색을 펼친 잠수 대원이 메달을 분실한 위치인 선착장 부근에서 갯벌 바닥에 묻혀있던 금메달을 찾을 수 있었다. 한편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던 1988년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 최초이자 아시아대륙에서 개최된 2번째 하계올림픽이다. 이 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종합 4위를 차지했다. 서울올림픽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코리아’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던 세계 각국에 우리 문화를 실시간으로 알린 최초의 국제 행사였다. 이는 올림픽에 참가한 세계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화려한 서울올림픽을 위한 숨은 희생도 많았다. 명과 암이 공존했지만 서울올림픽이 대한민국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것만은 분명하다.
- 2021-09-17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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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귀로 떠나는 집콕 여행, 어디까지 해봤나요?
- 외출이나 퇴근하고 집으로 가야 하는 순간,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고픈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제약이 발목을 잡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떠나기엔 체력과 힘에 부쳐서, 가족이나 반려동물이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등등. 그러나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외출이나 퇴근 후 지친 시니어의 몸과 마음을 달래줄, 집에서도 여행온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매일 보는 창밖 풍경 지겹다면, 윈도우 스왑(window swap) ‘윈도우 스왑’(window swap)은 지구촌 곳곳에 사는 누군가의 창문 밖 풍경을 약 5~10분간 영상으로 구경할 수 있는 사이트다. 지난해 여름 개설된 이 사이트는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한 부부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는 지인이 매일 보는 창밖 풍경이 지겹다고 하소연하는 것을 듣고 고안해냈다. 해당 사이트에 접속해 메인 페이지 내 ‘세계 어딘가에서 새 창 열기’ 버튼을 누르면 랜덤으로 세계 곳곳의 창문 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창을 새로고침하거나 버튼을 누르면 다른 나라, 새로운 지역의 창밖을 감상할 수 있다. 컴퓨터나 모바일 둘 다 접속할 수 있으며, 큰 화면에 띄워놓고 소리까지 켠다면 더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다. 세계 각지의 창문 밖 풍경은 사이트 전용 이메일로 보내진 영상들로 채워진다. 영상 좌측 상단에 보낸 이의 이름이 나와 있고, 우측 상단에는 나라와 영상 위치가 소개된다. 미국과 이탈리아, 인도네시아, 멕시코 등 세계 각지에서 보낸 해질녘 노을이 비치는 바닷가, 불 켜진 도심의 야경, 정원에서 낮잠을 자는 반려동물, 골목길을 지나가는 사람들 등 다양한 영상이 코로나19로 잊고 지냈던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게 해줄 것이다. 시원한 계곡과 기차 소리 그립다면…한국관광공사 힐링사운드 여행 ASMR 화면 보는 것조차 지친다면 눈을 감고 귀를 활짝 열어보는 것은 어떨까. 한국관광공사에서 운영하는 ‘대한민국 구석구석’ 홈페이지에서는 힐링 귀캉스를 위한 여행 ASMR(뇌를 자극해 심리적인 안정을 유도하는 영상)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콘텐츠는 흠뻑 노는 물놀이 여행, 맑고 푸른 산 여행, 체험이 있는 로컬 여행 등 세 종류 12가지의 소리로 구성돼 있다. 거제 학동흑진주몽돌해변의 파도 소리, 평창 월정사의 은은한 풍경 소리, 삼척 하이원추추파크의 폐역을 달리는 증기기관차 소리, 남해 상상양떼목장의 양떼 우는 소리 등 클릭 한 번으로 산과 바다, 초원과 계곡을 오갈 수 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다양한 여행지의 생생한 소리를 들으며 집에서 편하게 힐링하고픈 시니어에게 안성맞춤이다. 여름의 막바지인 지금 이 순간 겨울의 정취가 그리울 시니어를 위한 맞춤형 ASMR 콘텐츠도 있다. ‘겨울을 느껴봐! 힐링사운드 여행’에서는 철원 한탄강에 부는 매서운 강바람 소리, 충주 목계솔밭에서 모닥불 타는 소리, 포천 산정호수에서 꽁꽁 언 호수 위에서 얼음 스케이트 타는 소리 등 시니어의 향수를 자극할 다양한 소리가 준비돼 있다. 컴퓨터와 모바일 둘 다 접속할 수 있다. 편하게 누워 그리운 곳의 소리를 ASMR로 즐겨보자. 대세는 우주여행? 방구석에서 떠나는 우주여행 ‘Space Videos’ 색다른 힐링여행을 원한다면 아예 지구 밖으로 떠나보자. 직접 떠나는 우주여행은 아직 요원하지만 유튜브 채널 ‘우주영상(Space Videos)’과 함께라면 우주여행을 떠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1200여 개의 우주 동영상을 보유한 이 채널에서는 우주정거장에서 실시간으로 촬영한 지구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미항공우주국(NASA)이 송출하는 실시간 영상을 24시간 내내 끊김 없이 제공한다. 이 외에도 알프스 산맥, 안데스 산지 등 세계 각지의 고원지대를 우주에서 바라본 모습, 초고화질로 즐기는 극지방의 오로라, 날짜별로 달라지는 달의 모습을 담은 영상 등 다양한 영상이 업로드 돼 있다. 평소 우주에 관심이 많았던 시니어라면 현재 우주정거장이 지구의 어느 곳을 지나고 있는지, 검은 우주에서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감상하는 재미에 빠질 수 있다. 어두운 방안에서 영상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실제로 우주를 유영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 2021-08-30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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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보다 젊다”…올림픽을 빛낸 노장들
- 세계 최고의 기량을 뽐내는 선수들의 땀과 열정으로 가득한 도쿄올림픽. 생기 넘치는 10~30대 젊은 선수들 사이에서 더 돋보이는 이들이 있다. 바로 40~60대 시니어 선수들이다. 체력으로는 뒤처질지 몰라도 노장 선수들의 스포츠 정신과 열정, 기술, 헌신은 젊은 선수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쌓은 연륜과 노련함으로 오히려 더 빛을 낸다. 포기를 모르고 최선을 다하는 백전노장 선수들의 투혼은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전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하며, 도쿄올림픽을 빛내고 있는 노장 선수들을 소개한다. 66세 최고령 선수, 메리 해나(66) 이번 올림픽 최고령 선수는 여자 승마의 마장마술에 출전한 호주의 메리 해나(66)다. 이번이 여섯 번째로 올림픽에 출전한 해나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제외하고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부터 2016년 리우올림픽까지 출전했다. 하지만 아직 메달 기록은 없다. 메달을 받지 못해도 꾸준하게 대회에 출전하며 나이와 상관없이 기량을 과시하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도전 중이다. 그녀에게 나이는 도전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해나는 “메달을 목표로 삼기엔 조금 늦은 것 같긴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70대로 들어서는 2024년 파리올림픽에도 출전하려고 욕심을 내고 있다. 62세 최고령 메달리스트, 앤드류 호이(62) ‘호주의 승마 영웅’으로 불리는 앤드류 호이는 60대 나이로 이번 도쿄올림픽에서 하루에 메달을 두 개나 목에 걸었다. 지난 2일 종합마술 개인전에서 동메달을, 종합마술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호이는 이번 대회 최고령 메달리스트로 기록됐다. 호이는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아직 건강하다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밝혔다. 그는 1984년 LA올림픽부터 두 차례를 제외하고 모든 올림픽에 출전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와 1996년 애틀랜타에 이어 2000년 시드니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호주 역사상 한 종목에서 3연패를 달성한 최초의 남자선수가 됐다. 일곱 번째 금메달 수상, 이자벨 베르트(52) 이자벨 베르트는 52세 나이로 역대 올림픽 승마 종목 최초로 7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지난 7월 27일 열린 도쿄올림픽 승마 마장마술 단체전에서 자신의 7번째 금메달을 획득하며 저력을 과시했다. 베르트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나서 마장마술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을 획득한 선수다. 이후 1996년 애틀랜타, 2000년 시드니, 2008년 베이징,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단체전 정상에 오르며 꾸준하게 메달을 쌓아왔다. 그는 자신의 6번째 올림픽인 도쿄 대회에서 변함없는 기량을 발휘하며, 지금까지 올림픽에서 11개의 메달(금 7·은 4)을 손에 넣었다. 국제승마협회에 따르면 베르트는 마장마술 세계 랭킹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41세 어린 신유빈과 막상막하, 니샤롄(58) 지난 7월 25일 탁구 여자 단식 64강전에서 자신보다 41세 어린 신유빈(17)과의 탁구 대결로 국내 팬들에게도 이름을 알린 니샤렌은 중국 국가대표 출신의 룩셈부르크인이다. 니샤롄은 역대 올림픽 여자 탁구 선수 중 가장 나이가 많다. 그럼에도 그는 신유빈과의 경기에서 41세의 나이 차이에도 막상막하의 경기를 보이며, 역전패했다. 풍부한 경험을 앞세워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니샤롄의 플레이에 신유빈만 바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연출됐다. 이런 모습에 국내 팬들은 얄밉다는 평부터 탁구에 통달했다는 평까지 하며, 그의 활약을 높게 평가했다. 9번 연속 올림픽 출전한 최초 여성, 니노 살루크바제(52)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9번 연속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최초의 여자 선수라는 대기록을 세운 주인공이다. 니노 살루크바제는 1988년 서울올림픽 사격 공기권총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땄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동메달을 추가했다.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는 아들 초트네 마차바리아니와 함께 출전해 올림픽 첫 모자 출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10m 공기권총에서 예선 31위를 기록한 뒤 시력이 떨어져 더는 힘들겠다며 은퇴를 선언했다. 통산 금·은·동메달을 한 개씩 남기고 물러나는 그에게 세계 스포츠계의 격려가 쏟아졌다. 40대 체조 여왕, 옥사나 추소비티나(46) 우즈베키스탄의 체조 여왕으로 불리는 옥사나 추소비티나. 그는 20대 중반만 돼도 환갑이라는 여자 체조계에서 40대까지 8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하며 ‘살아있는 전설’로 새 역사를 썼다. 그는 지난 7월 25일 여자 체조 도마 예선 경기에서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동료 선수와 코치, 운영진 모두에게 기립박수를 받으며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결선 진출에 실패한 뒤 추소비티나는 “나는 마흔여섯 살이다. 이건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나는 살아있고 행복하다. 아무런 부상 없이 여기 있고, 내 두 다리로 혼자 서있다”며 감격해했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보다 젊다. 오늘 도전하고 즐겨야 한다.” 니샤롄은 자신보다 41세 어린 선수와 경기를 끝낸 직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이를 잊은 노장 선수들의 투혼은 나이를 탓하며 도전을 포기하고 즐기지 못하는 수많은 우리들에게 의미있는 메시지를 선사하고 있다.
- 2021-08-06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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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가 올림픽 축구를 예전보다 재미없게 보는 이유
- 대한민국 올림픽 축구 대표팀이 지난 22일 뉴질랜드와 조별예선 1차전에서 0:1로 패했다. 전문가들은 선수단이 전체적으로 호흡이 맞지 않았고, 와일드카드로 데려온 대표팀 간판 공격수 황의조에게 패스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라도 패인을 찾았다. 경기가 끝난 뒤 작은 논란도 있었다. 미드필더 이동경이 상대팀 선수 크리스 우드의 악수를 거부하면서 경기에서도 지고 미성숙한 매너를 보여줬다고 비판받았다. 승자에 대한 존중을 표하지 않는 것은 올림픽 정신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시니어들은 최근 올림픽 축구 경기에서 과거 올림픽과 같은 재미를 느끼기 어렵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열린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억하는 시니어들일수록 더 이런 지적을 많이 한다. 왜 이렇게 느끼는 걸까. 이번 올림픽 참가 선수들이 앳돼 보인다. 대회 첫 경기에서 긴장하고 있는 모습은 물론이고, 상대팀의 거친 몸싸움에 경기가 끝나고도 분을 못 이기는 모습도 보였다. 실제로 지금 올림픽 축구에 출전하고 있는 선수들은 서울 올림픽 출전 당시 선수들보다 나이가 어리다. 1988년 당시에는 30세 골키퍼 조병득이 있었고, 최강희와 최윤겸 등 20대 중후반 선수들이 많았다. 국내 선수뿐 아니다. 브라질의 베베투, 서독의 위르겐 클린스만 같은 20대 중반의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현재 올림픽 축구 대표팀은 23세 이하 선수들로만 선수단을 구성할 수 있다. 예외적으로 ‘와일드카드’ 제도라고 해서 24세 이상 선수 3명을 쓸 수 있다. 한국 대표팀은 와일드카드로 부른 황의조, 권창훈, 박지수를 제외하면 모두 만 23세 이하 선수들로 구성돼 있다. 다른 종목에는 없는 나이 제한이 왜 유독 축구에만 있을까. 올림픽 남자 축구 종목에 나이 제한이 처음 생긴 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다. 여자 축구는 23세 이상이어도 참가할 수 있다. 축구전문 미디어 풋볼리스트의 류청 취재팀장은 이에 대해 “국제축구연맹(FIFA)과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오랜 다툼 때문”이라고 말한다. IOC는 206개 나라 올림픽위원회가 소속된 세계적인 기구다. 스포츠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FIFA의 위상은 IOC를 뛰어넘는다. FIFA 회원국은 211개로 IOC보다 많다. FIFA가 4년마다 개최하는 월드컵은 단일 스포츠 대회로는 가장 규모가 크고 인기가 많다. 농구, 럭비, 아이스하키 등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 ‘월드컵’이라는 명칭으로 대회를 열지만 흔히 월드컵이라고 하면 축구를 떠올린다. 그만큼 FIFA가 개최하는 월드컵의 위상이 더 높다. 그런데 올림픽 축구에서 연령 제한 없이 모든 프로선수들이 참가하게 되면 FIFA 월드컵과 별 차이 없는 또 다른 대회가 만들어진다. 월드컵으로 막대한 수익을 내는 FIFA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FIFA는 나이 제한 카드를 빼들었다. IOC로서는 불쾌한 일이었지만 FIFA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다. 실제로 FIFA는 지속적으로 올림픽을 견제해왔다. FIFA는 프로 선수들도 본격적으로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었던 1984년 LA 올림픽, 1988년 서울 올림픽에도 월드컵 경험이 없는 선수만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그래도 면면은 화려했다. 하지만 23세 이하 선수들로만 올림픽에 나갈 수 있게 되자, 올림픽은 설익은 유망주들의 대회가 됐다. 스타플레이어가 없어 대회 수준은 낮아졌고 흥행도 부진했다. 그러자 IOC는 전체 참가 선수 중 3명은 나이와 상관 없이 포함할 수 있도록 하자고 FIFA에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타협안이 바로 와일드카드 제도다. 와일드카드라는 용어는 한국에서만 쓰고 해외에서는 ‘오버에이지(Overage)’라고 부른다. 결국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부터 24세 이상 선수 3명이 함께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다. 의무적으로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올림픽 메달을 따면 군 면제 혜택이 있어 황선홍과 하석주, 유상철 등 와일드카드로 성인 대표팀 주축 선수들을 투입했다. 가장 최근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는 손흥민과 장현수, 석현준이 와일드카드로 대회에 참여했다. 비록 불의의 1패를 떠안았지만 한국 올림픽 축구 대표팀은 메달을 노리고 올림픽에 참가했다. 한국 대표팀은 25일 루마니아전, 28일 온두라스전을 치른다.
- 2021-07-23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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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다
- 코로나19가 발생한 지 약 1년이 지났다. 하늘길이 닫혔고, 각자 꿈꾼 여행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길어지는 ‘집콕’ 생활은 새로운 여행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사람들은 방구석에서 세계 여행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고, 매일 지나는 동네에서 숨겨진 명소를 찾는 재미를 발견했다. ‘이런 것도 여행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싶은 것들이 관광이 되고, 산업으로 성장했다. 여행이 달라졌다. 글로벌 온라인 여행정보 기업 부킹홀딩스가 최근 전 세계 28개국 2만여 명의 여행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2021년부터는 총 9가지의 여행 방식이 대중화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온라인 여행 ▲기술을 접목한 여행 ▲근거리 여행 ▲안전한 여행 등이 이에 해당한다. 국경을 넘나들며 세계 각국의 랜드마크에 발 도장을 찍는 대신 익숙한 장소에서 편하고 안전하게 여행을 즐기는 시대가 왔다는 이야기다. ‘현실감 최강’ 대세는 몰입형 콘텐츠 코로나19 이후 주목받고 있는 여행 방식은 ‘랜선 여행’이다.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 IT 기기를 통해 즐기는 여행으로,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로 여행 자체가 불가능해지면서 새롭게 떠오른 문화다. 대표적인 것이 유튜브의 ASMR(자율감각쾌락반응) 콘텐츠다. 크리에이터가 특정 주제를 설정하고 이에 맞게 실제 상황인 것처럼 연기하는 롤플레잉 ASMR 영상은 유튜브에서 꾸준히 관심을 끄는 콘텐츠 중 하나다. 이어폰을 착용한 뒤 눈을 감는 순간, 원하는 곳 어디로든 ‘상상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중 ‘공항 ASMR’, ‘비행기 ASMR’은 공항에 도착해 입국수속을 밟고 실제 비행기를 타는 것 같은 생생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승무원의 말소리부터 탑승 안내 방송, 공항 특유의 시끌벅적한 느낌까지 완벽하게 재현한다. 오랜 ‘집콕’으로 유튜브가 식상하게 느껴진다면, 혹은 진짜 여행지를 구경하고 싶다면 각국 관광청 홈페이지도 눈여겨볼 만하다. 오스트리아 관광청, 두바이 관광청 등 여러 나라에서는 자국의 관광지를 360도 영상이나 고화질 사진으로 홍보하는 몰입형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압권인 것은 호주 관광청의 ‘8D로 체험하는 호주’ 영상이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에스페란스 해변에서 돌고래가 뛰노는 소리, 세계에서 가장 작은 페어리펭귄이 이동하는 소리, 킴벌리의 호라이존탈 폭포 소리 등 현장에서나 들을 법한 생동감 넘치고 입체적인 소리가 오감을 자극한다. 세계의 문화 예술을 실감나게 접하는 방법도 있다. ‘구글 아트 앤 컬처’는 구글과 제휴한 주요 박물관 2000여 곳의 콘텐츠를 다양한 방식으로 제공한다. 가상현실(VR)과 거리 뷰 기능을 통해 런던 대영박물관, 파리 오르세미술관 등 세계적인 박물관과 도서관을 360도로 산책하듯이 둘러보고, ‘아트 카메라’ 시스템으로 작품의 미세한 부분까지 관찰할 수 있다. 앱을 다운받으면 더욱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증강현실(AR) 기술을 이용한 ‘아트 프로젝터’ 기능을 누르면 카메라 화면 속에 3차원 예술 작품이 나타나 서 있는 곳을 박물관으로 만든다. 랜선 여행의 진화는 어디까지? 실시간 현지 투어 인터넷 서핑을 통해 여행 분위기를 내는 것을 넘어 이제는 집 안에서 ‘진짜 여행’을 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코로나19로 위기를 맞은 여행사와 숙박업소 등 관련 산업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비대면·비접촉 여행 관련 각종 상품을 내놓고 있기 때문. 비용을 기꺼이 지불할 의향이 있다면, 집에서도 패키지 관광이 부럽지 않은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여행상품 중개 플랫폼을 운영하는 마이리얼트립은 최근 해외에 거주 중인 여행 가이드들이 실시간으로 관광지를 찾아다니며 소개하는 ‘랜선 투어’ 상품을 출시했다. 실제 여행사 프로그램처럼 이용자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생동감 넘치는 가이드를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스페인 소도시 세고비아의 골목을 둘러보는 여행부터 홍콩 야경 투어, 로마 시내 워킹 투어 등 콘셉트도 다양하다. 그중 가장 인기가 많은 투어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여행. 투어에 참가한 이용자들은 “실제로 가이드와 함께 걷는 기분이다”, “집에서 ‘치맥’하며 바르셀로나를 둘러보는 특별한 체험이었다” 등 만족스러운 후기를 남겼다. 에어비앤비는 호스트와 게스트를 연결하는 플랫폼의 특성을 살려 ‘온라인 체험’을 선보였다. 각국의 호스트들이 원격 화상회의 시스템으로 이용자들에게 각국의 문화·예술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일본 승려와 함께하는 명상, 현직 멕시코 셰프의 타코 수업, 고고학자와 이탈리아 와인 역사 배우기 등 원하는 체험을 선택하면 현지인과 생생하게 교류할 수 있다. 가격은 프로그램마다 다르지만, 대개 2~4만 원대다. 한편 일본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일본항공(JAL)은 최근 대면 형태로 실시하던 비행기 공장 견학 프로그램을 원격으로 전환하고, 인쇄업체 톳판인쇄사는 가상현실 기술을 활용해 일본 유명 문화재를 온라인으로 견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일본의 최대 여행사 JTB도 하와이 킬라우에아 화산과 마우나케아 산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온라인 투어 서비스를 도입했다. 나만 아는 여행지, 숨은 명소를 찾아서! 콧바람을 쐬어야 비로소 여행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방구석 여행에 흥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인파가 바글바글한 ‘핫플레이스’를 갈 수도 없는 노릇. 이 때문에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숨은 여행지를 찾아 떠나는 트렌드가 생겨났다. 실제로 한국관광공사가 지난해 6월 발표한 국내여행 의향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기존 유명 관광지보다 숨겨진 여행지나 사람이 많이 몰리지 않는 곳으로 여행할 것’이라는 응답이 1순위로 높았다. 한국관광공사는 이런 트렌드를 반영해 지난해 ‘언택트 관광지 100선’을 내놓았다. ▲기존에 잘 알려지지 않은 관광지 ▲개별 여행 및 가족 단위 테마 관광지 ▲야외 관광지 ▲자체 입장객수를 제한하는 관광지 등 거리두기 기준을 충족하는 여행지를 모아놓은 목록이다. 여행지는 ‘대한민국 구석구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100곳의 여행지를 천천히 살펴보면, 생소한 관광 명소가 눈에 띄면서 우리나라가 새삼 낯설게 느껴진다. ‘차박’도 새롭게 부상한 언택트 여행 문화다. 차에서 관광과 숙박을 모두 해결하는 차박은 거리두기에 최적화된 여행이다. 차로만 방문이 가능한 이색 명소를 들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인터넷 카페 ‘차박캠핑클럽’ 운영자 ‘둥이아빠’의 추천에 따르면, 차박의 대표 명소는 충북 충주 목계솔밭이다. 광활한 대지에 화장실과 개수대 등 편의시설을 모두 갖춰 그야말로 차박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충주 수주팔봉 캠핑장과 삼탄유원지, 양평 광탄유원지, 여주 신륵사 등이 차박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 숨은 여행지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을 수도 있다. 뉴노멀 시대의 또 다른 트렌드는 동네 걷기 여행. 동네 걷기 여행의 매력을 잘 보여주는 콘텐츠는 카카오TV의 웹 예능 ‘밤을 걷는 밤’이다. 밤을 걷는 밤은 가수 유희열이 서울의 밤거리를 거니는 모습을 담아낸 프로그램으로, 익숙한 거리에서도 색다른 매력을 찾아내 보는 묘미가 있다. 때로는 정해진 방향 없이 발길 닿는 곳으로 향하기도 하고, 우연히 멋진 풍경을 만나면 멈춰서 감상도 한다. 부담 없이 동네 한 바퀴를 산책하는 듯한 편안한 콘셉트 때문인지 2020년 12월 기준 누적 조회수가 560만 회를 돌파하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언제쯤 자유롭게 떠날 수 있을까. 아직은 미지수다. 이렇게 애쓰며(?) 노는 게 마스크 없이 세계를 자유롭게 누비는 여행만큼 만족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배낭을 챙기게 될 날을 기다리면서 코로나 시대에 걸맞은 여행을 즐겨보는 것도 색다른 추억이 될 수 있다.
- 2021-02-01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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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알코올성 지방간염, 치료제 개발 실마리 찾았다
- 최근 비만인구의 가파른 증가로 비알코올성 지방간염 환자가 덩달아 급증하면서 치료제 개발이 절실해진 가운데, 국내 연구진이 비알코올성 지방간염의 진행 기전을 처음으로 규명해 치료제 개발의 가능성을 열었다. 비알코올성 지방간염은 알코올 섭취와 관계없이 고지방 위주의 식사와 운동부족 등 잘못된 생활습관으로 간에 지방이 쌓이고 염증이 발생하는 질환이다. 환자 5명 중 1명은 간이 딱딱해지는 간경화(섬유화)나 간암을 앓게 되는데 B형과 C형 간염과 달리 마땅한 치료제가 없어 간이식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서울아산병원 내분비내과 고은희·이기업 교수팀은 비알코올성 지방간염이 있는 쥐의 간세포에서 ‘스핑고미엘린 합성효소(SMS1·sphingomyelin synthase 1)’의 발현이 증가했으며, 이로 인해 간 조직에 염증과 섬유화가 나타난 사실을 확인했다고 최근 밝혔다. 고 교수팀이 동물실험을 통해 밝힌 스핑고미엘린 합성효소의 역할은 사람 대상의 임상시험에서도 재확인됐다. 공동연구팀인 스페인 바르셀로나 국립연구소가 비알코올성 지방간염에서 간암으로 발전해 간이식을 받은 환자를 대상으로 간 조직을 분석한 결과 모든 환자에게서 스핑고미엘린 합성효소 발현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스핑고미엘린 합성효소의 발현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는 것이 비알코올성 지방간염의 진행을 막을 단서임을 시사한 이번 연구는 영국 위장병학회가 발간하는 소화기분야 최고 권위지인 ‘거트(Gut, 피인용지수 19.819)’ 온라인판에 최근 게재됐다. 스핑고미엘린 합성효소는 생체막을 구성하며 필수 지방산을 공급하는 지질이다. 고 교수팀은 스핑고미엘린 합성효소에 의해 만들어진 디아실글리세롤이 세포 죽음을 촉진하는 피케이시델타(PKC-δ) 물질과 염증조절에 관여하는 NLRC4 인플라마좀 유전자를 순차적으로 활성화한다는 사실을 쥐 실험을 통해 확인했다. 이에 따라 간세포에서 강한 염증성 반응에 의한 세포사멸(피이롭토시스)이 증가하고, 간세포 밖으로 유출된 위험신호에 의해 염증 및 섬유화 반응을 유도하는 NLRP3 인플라마좀 유전자가 활성화되는 사실도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비알코올성 지방간염은 비만인구가 많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에서 간경화와 간암의 주요 원인질환으로 보고되고 있다. 환자의 약 20%가 간경화를 앓고 간부전과 간암에 의해 사망한다. 단순 지방간에 비해 간질환으로 사망할 위험이 5.7배 높고, 간경화를 동반하면 사망 위험이 10배 높다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다. B형과 C형 간염에 의한 간경화증의 경우 항바이러스제가 존재해 효과적인 치료가 가능하다. 특히 C형 간염의 경우 이를 처음 발견해 치료제 개발을 이끈 의학자들에게 노벨생리의학상이 수여될 만큼 의학계를 비롯해 사회적인 관심이 높다. 반면 비알코올성 지방간염의 경우 간 조직 내 지방 축적을 감소시키거나 염증반응을 억제시키는 약물만 일부 나와 있으며, 간경화로 악화됐을 때는 간이식 외에 뚜렷한 치료법이 없다. 환자의 생존율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비알코올성 지방간염의 진행을 막을 치료제 개발이 절실한 상황이다. 고은희 서울아산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비알코올성 지방간염 환자의 장기 예후를 결정하는 요인은 섬유화 진행이다. 이번 연구에서 비알코올성 지방간염의 진행 기전이 밝혀짐에 따라, 앞으로 간경화로의 이행을 효과적으로 억제할 치료제 개발이 활발히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 2021-01-1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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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시킨이 사랑한 도시 ‘트빌리시’
- 바쿠의 구도시를 걷다 보면 누군가 옆으로 다가와 근교 일일투어를 권한다. 사실 택시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자유여행으로 바쿠의 근교 투어를 하는 건 시간 면에서 비효율적이다. 가격을 좀 깎아달라고 하니 여행사 사무실을 안내해줘 그곳으로 갔다. 결국 1인당 20AZN(한화 약 1만4000원)을 할인받아, 다음 날 4만9000원짜리 일일 투어를 했다. 아침 9시, 구시가지 성문 앞에서 가이드와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 6명을 만나 일일투어를 시작했다. 준비된 미니버스를 타고 아름다운 카스피해를 바라보며 남쪽으로 한 시간 정도 달려갔다. 고부스탄(Gobustan)에 도착한 뒤에는 대기해 있던 여러 대의 낡은 승용차로 갈아탔다. 왜 차를 바꿔 타야 하는지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곳에서 목적지인 머드 볼케이노(진흙 화산)까지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을 10여 km 더 가야 했기 때문이다. 운전기사는 그 길을 ‘사파리 투어’라 표현했다. 그러나 마케팅 목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 동물 구경은 할 수 없었다. 억지스러웠지만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 차창 밖 풍경은 영화에서 봤던 모습과 비슷했다. 미국의 텍사스나 어느 사막 지역처럼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땅이었다. 전 세계 700여 개의 진흙 화산 대부분이 아제르바이잔에 있다고 한다. 그중 일부가 이곳에 있었다. 용암 대신 진흙이 흘러내리는 화산 가까이 다가갔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화산 분화구에서 진흙이 끊임없이 부글거리며 기포가 부풀어 올랐다가 터졌다. 피부에 좋은 효과가 있는지 남자 몇 명이 머드팩을 즐기고 있었다. 진흙 화산에 오기 전 미니버스에서 내렸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선사시대로 여행을 갈 수 있는 관광지가 있다.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부스탄 암각화 문화경관구역’이다. 공원 입구에는 박물관이 있었고, 암각화 구역은 입구에서 1km를 더 가야 했다. 탐방로를 따라 걸으면 넓은 사암지대에 흩어져 있는, 약 5000년에서 2만 년 전에 원시인들이 돌에 그린 그림을 불 수 있다. 지나온 시간의 무게가 주는 중량감 때문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 모습, 사냥하는 모습, 바다에서 고기 잡는 모습, 춤추는 모습 등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풀, 돌, 바위만으로 구성된 암각화 공원을 본격적으로 탐방하기 전 앞서 가던 가이드가 넓고 평평한 바위를 만나자 갑자기 타악기처럼 두드리기 시작했다. 돌에서 맑은 소리가 났다. 이 지역의 타악기 ‘가발 대시’(Gaval Dash)를 만들 때 사용하는 석재라고 했다. 조로아스터교 사원의 꺼지지 않는 불 불을 접하기 쉬워서 그랬는지 바쿠의 동쪽 외곽에 조로아스터교 성지인 ‘아테시카 사원’(Ateshgah Temple)이 남아 있다. 사원 안에는 470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꺼지지 않고 타고 있는 불이 있다. 불을 숭배해서 배화교로 알려진 고대 페르시아 종교 조로아스터교. 현재는 신도 통계가 없을 정도로 사라져가는 종교다. 하지만 최근 이슬람 극단주의에 환멸을 느낀 쿠르드족들이 개종하면서 그쪽 지역에서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한다. 또 얼마 전 한국에서 신드롬을 일으켰던 록 밴드그룹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조로아스터교의 후손인 파르시(Parsi) 출신이기도 하다. 수도원이었던 사원 내부는 박물관으로 개조됐다. 방마다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설명과 모형,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다. 교세는 미약하지만 조로아스터교를 경험할 수 있는 건 바쿠가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이었다. 이외에도 바쿠 외곽에는 불과 관련한 ‘야나르 다그’(Yanar Dag)라는 이름의 불타는 언덕도 있다. 지하에 어마어마한 양의 천연가스가 매장돼 있어 가스가 나오는 분출구에서는 계속 불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자원 개발로 지하 압력이 내려가 과거에 비해 불꽃이 많이 약해졌다고 한다. 아제르바이잔 여행을 해야 하는 이유 현재와 과거의 절묘한 조화, 손님과 이방인에게 친절한 문화, 동서양의 경계선 위에서 유럽을 향해 있는 도시, 맛있는 음식과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사람들. 바쿠 여행을 하면서 받았던 인상이다. 아직 구 소련 치하의 흔적도 남아 있고,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등 여행 인프라가 부족한 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 관광청이 글로벌 캠페인으로 선정한 ‘기대, 그 이상의 아제르바이잔’(Take Another Look)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그들 사회에 내재돼 있는 역동성과 경계를 넘나드는 수용의 문화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트빌리시행 야간 특급열차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이 주황빛으로 바뀌면서 나란히 뻗어 있는 녹슨 철길 위로 떨어졌다. 검은색 섞인 파란 하늘이 배경이 될 무렵 그림자도 사라져가는 플랫폼 앞으로 둥근 쇳덩이가 슬며시 발을 들이밀었다. 흰 수증기를 내뿜으며 거친 숨을 내쉴 것만 같은 짙은 암녹색 기차였다.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브론스키’와 ‘안나 카레니나’를 운명처럼 만나게 했던 그 기차다. 조지아의 고리 시(市)에 전시돼 있는 스탈린 전용 열차도 같은 색이다. 소설 내용처럼―창 너머로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전송하고 있는 사람들이 마치 뒤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 규칙적으로 덜커덕덜커덕 흔들리면서 플랫폼을 지나고 (…) 열차는 점점 신나고 매끄럽게 경쾌한 소리를 내며 레일 위를 미끄러져 갔다―그렇게 바쿠와 이별했다. 오래된 열차이지만 2인 1칸인 1등석은 불편한 점이 전혀 없었다. 새것으로 바꾼 하얀 침대 시트가 마음에 들었다. 바쿠를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전 시추공에서 나오는 가스 때문에 큰 불꽃이 타오르는 공장들이 창밖으로 스쳐지나갔다. 때맞춰 창틀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모음곡 2번 ‘왈츠 Ⅱ’가 흘러나왔다. 출발 전 역에서 산 와인으로 영혼을 적셨다. 그렇게 떠나는 아쉬움과 새로운 풍경을 만나러 가는 길의 떨림을 가라앉히며 수없이 꿈꿔왔던 침대열차에서의 밤을 보냈다. 기차는 쉬지 않고 트빌리시를 향해 달려갔다. 저녁 9시에 출발한 기차는 꼬박 12시간을 달려 다음 날 아침 9시경 트빌리시에 도착했다. 도착하기 전 새벽 5시쯤 조지아 입국 절차가 한 차례 있었다. 카메라가 연결된 노트북을 들고 조지아 군인들이 열차로 올라왔다. 입국신고서 작성, 여권 제출, 사진촬영, 그리고 이어진 간단한 가방 검사로 국경 통과 절차가 끝났다. 조지아는 한국 여권 소지자의 경우 무비자로 360일 체류할 수 있는 나라다. 미국 조지아가 아니고 ‘조지아’ “조지아? 미국 조지아?” 이번 여행 목적지는 ‘조지아’라고 하니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한결같았다. 몇몇 사람은 구 소련이 지배하던 시절의 ‘그루지야’는 알고 있었다. 1991년에 독립하면서 국명을 ‘조지아’로 바꿨다고 설명하면 미국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이름이 그러냐는 반응들을 보였다. 정말 그랬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는 ‘농부’를 뜻하는 그리스어 ‘게오르기오스’에서 빌려왔다는 설과 트빌리시의 핫플레이스 ‘자유광장’에 황금동상으로 우뚝 서 있는 조지아 수호성인 ‘성 조지’에서 따왔다는 이야기가 가장 많다. 조지아에는 스위스처럼 아름다운 자연이 있고, 프랑스처럼 풍요로운 와인, 이탈리아처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스페인처럼 정열적인 춤과 음악이 있다. 트빌리시는 재즈다 종착역이 가까워지면서 기차 속도가 느려졌다. 트빌리시는 BC 4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해 AD 5세기 말에 조지아의 수도가 된 오래된 도시다. 창문 밖으로 트빌리시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폐쇄된 기지창에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는 녹슨 객차와 화차들, 네모반듯한 현대식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신도시, 트빌리시의 랜드마크인 나리칼라 요새와 ‘조지아 어머니 상’이 있는 구도시가 줄지어 얼굴을 드러냈다. 마치 한 곡의 재즈를 듣는 것 같았다. 이곳 사람들은 ‘재즈적’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연결될 때 주로 사용한다. 그만큼 조지아 사람들은 뭐든 잘 받아들인다. 혼합에 익숙하다. 트빌리시라는 도시도 그랬다. 색소폰의 끈적한 느낌과 와인의 나른한 분위기가 뒤섞여 있는 듯 보였지만 퇴폐적 숨결이 느껴지지는 않는 골목의 모습이 그랬고, 클래식함과 모던함이 서로 뒤엉켜 하나가 된 도시의 풍경이 그랬다. 올드 트빌리시가 보여주는 것들 트빌리시는 도시를 관통하는 ‘므츠바리’(Mtkvari) 강(쿠라 강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을 중심으로 남쪽의 ‘올드 트빌리시’(구도심)와 북쪽으로 나누어진다. 잘 알려진 관광지 대부분이 구도심에 몰려 있어 걸어 다닐 만하다. ‘아블라바리’(Avlabari) 전철역에서 내려 강 언덕에 있는 ‘메테키 교회’(Metekhi Church)로 먼저 갔다. 13세기에 세워진 이 교회는 서른일곱 번이나 다시 지어진 사연으로 수많은 전쟁에 시달렸던 조지아의 얼굴이 됐다. 구 소련 시절에는 감옥과 극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최근에서야 교회 역할을 하고 있다. 교회 옆에는 수도를 트빌리시로 옮긴 ‘바흐탕 고르가살리’(Vakhtang Gorgasali) 왕의 기마상이 도시를 바라보고 있다. 기마상이 있는 곳에서 북쪽을 보면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강 오른쪽으로 ‘리케 공원’(Rike Park)이 있다. 시민과 여행자들에게 은은한 꽃향기로 피로를 풀어주는 곳이다. 강변에는 1200개의 LED 전구가 빛을 내는 ‘평화의 다리’가 있어 므츠바리 강의 밤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2GEL(한화 약 810원)을 내면 ‘메테키 다리’를 건너 므타츠민다 산 정상에 있는 나리칼라 요새까지 케이블카로 올라갈 수 있다. 도시 전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 요새는 4세기에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요새 바로 옆 능선에는 왼손엔 와인 잔, 오른손엔 칼을 들고 있는 ‘조지아 어머니 상’이 있다. ‘친구에게는 와인 잔을 건네지만 적에게는 칼을 든다’는 의미로 건국 1500년을 기념해 만든, 높이 20m의 대형 석상이다. 트빌리시를 사랑한 작가들 러시아의 문호들은 조지아를 사랑했다. 막심 고리키는 이곳에서 일하며 처녀작 ‘마카르 추드라’를 썼다. 이때 사용한 필명이 ‘고리키’다. 그는 “코카서스 산맥의 장엄함과 낭만적 기질을 지닌 이곳 사람들 덕분에 방황에서 벗어나 작가가 됐다”고 회고했다. 톨스토이도 이곳에서 주둔군으로 4년을 복무한 후 조지아를 배경으로 몇 편의 소설을 썼다. 푸시킨의 시 제목을 그대로 가져다 쓴 ‘코카서스의 죄수’가 대표적이다. 누구보다도 조지아의 와인과 음식을 사랑한 푸시킨은 대표적인 친조지아 인사였다. 그래서인지 구도심 자유광장 옆에는 ‘푸시킨 공원’이 있다. 구도심 중앙에 위치한 ‘자유광장’은 주변의 아름다운 건축물과 교통의 요충지로 트빌리시의 시작이자 끝이 되는 장소다. 마치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광장 같은 곳이다. 레닌 동상이 있던 광장 중앙에는 조지아 수호성인 ‘성 조지’의 황금동상이 있다. ‘자유광장’에서부터 ‘루스타벨리 메트로 역’까지 이어지는 거리를 걸었다. 러시아 간섭에 저항하는 조지아인들의 데모가 토요일마다 열리는 국회 앞 광장, 조지아 국립박물관, 루스타벨리 극장, 트빌리시 오페라·발레 극장, 트빌리시 현대미술관들이 이 거리에 있다. 중간중간 보이는 작은 카페와 거리의 화가들 작품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트빌리시의 숨결을 애써 들으려 하지 않아도 트빌리시의 과거와 현재의 눈부신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행복했다. 아무리 걸어도 질리지 않는 하염없이 걷고 싶은 길이다 므츠바리 강을 건너는 ‘사브뤼켄’(Saarbruecken) 다리 옆 ‘데대나’(Dedaena) 공원에서는 트빌리시 최대 규모의 벼룩시장이 열린다. 구 소련의 군용 제품에서부터 은식기, 오래된 카세트테이프 등 온갖 물건들이 거래된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랜 세월이 빚어낸 추억의 물건들이 과거를 되돌아보게 한다. 지치지 않고 무언가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조지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찰나에 그들의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희망과 그리움, 설렘도 봤다.
- 2020-02-10 0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