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젖줄인 제민천을 따라 걸으면서 도심을 여행했다. 골목골목 걷는 내내 나태주 시인의 ‘풀꽃’ 시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문장이 공주를 표현한 듯 느껴졌다. 공주는 풀꽃처럼 소박하고 소탈한 도시였다. 풍경도, 사람도, 음식마저도. 그래서 자세히 보고, 오래 봐야 진가를 알 수 있었다.
걷기 코스
공주시외버스 산성정류소(구터미널)▶ 공산성▶ 산성시장▶ 공주역사영상관(구읍사무소)▶ 풀꽃문학관▶ 충청감영 터(현 공주사 대부고)▶ 카페 ‘반죽동247’과 이미정갤러리▶ 하숙마을▶ 반죽동 당간지주(대통사 터)▶ 공주제일교회 (기독교박물관)▶ 루치아의뜰▶ 산성정류소 또는 공주역
금강 변 공산성과 산성 아래 산성시장
공주 산성정류소에 하차하면 공주의 자랑인 공산성이 코 닿을 거리에 있다. 터미널에서 5분 정도 걸으니 공산성 매표소에 닿는다. 공산성은 공주가 백제의 수도였을 때 금강 변 야산에 지은 산성이다. 산 능선에 조성한 성곽이 물결처럼 울렁울렁 춤춘다. 성곽의 등을 타고 공산성을 한 바퀴 돌 수 있으며, 90분 남짓 걸린다. 성곽길이 이끄는 대로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공산성의 서문인 금서루를 통과해 성곽에 오르자마자 시원한 강바람이 반긴다. 바람을 얼싸안고, 발아래로 흘러내리는 성곽과 반짝이는 금강, 나지막한 공주 시가지를 여유롭게 굽어본다. 오랜만에 탁 트인 풍광을 마주하니 여행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공산성을 일주한 뒤, 다시 터미널 앞을 지나 산성시장으로 향한다. 공산성 아래에 있어 산성시장이라 불리는 이곳은 82년 역사를 지닌 공주 대표 시장이다. 그만큼 규모가 크다. 5개 구획마다 갖가지 생필품과 식자재, 식당들이 즐비하다. 특히 요기할 만한 먹을거리가 풍성하다. 맛 좋기로 전국에 소문난 ‘부자떡집’의 쫄깃한 떡, 줄 서서 먹는 ‘대박난찹쌀호떡’의 달달한 호떡, 가끔 생각나는 ‘단골닭강정’의 매콤달콤한 닭강정, ‘청양분식’의 잔치국수, ‘간식집’의 잡채만두 등이 있다. 대부분 소박한 음식이다. 맛도 그렇다. 공주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좋아할까 궁금하다면 하나씩 맛보는 것도 좋겠다.
풀꽃 시인 나태주와 풀꽃문학관
시장통을 벗어나면 이내 공주역사영상관(등록문화재 제443호)에 닿는다. 1923년에 지어진 충남금융조합연합회관 건물로 붉은 벽돌과 화강암을 섞어 쌓아 올린 근대건축물이다. 백제시대부터 현재까지의 공주 역사를 담은 디지털 영상기록물을 전시해두었다. 공주역사영상관에서 5분 정도 걸으면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이국적인 목조 건물 한 채가 보인다. 1930년대에 지은 적산가옥을 개조해 나태주 시인의 ‘풀꽃문학관’으로 조성한 곳이다. 야생화가 오종종히 피어 있는 뜰과 오래된 목조 건물의 조화가 멋스럽다.
나태주 시인은 금요일에만 문학관을 방문한다. 문학관 앞에 자신이 타고 다니는 자전거를 세워놓아 문학관에 있음을 알린다. 문학관 내부는 다실과 강연 공간으로 구성돼 있으며, 모두 다다미방 형태다. 벽면 곳곳에 나태주 시인이 쓰고 그린 시화가 걸려 있다. 마침 나태주 시인이 다실에서 방문객들이 가져온 시집과 엽서에 정성껏 시를 써주고, 덕담을 건네는 중이다. 다실에서 웃음소리가 끓이지 않는다.
풀꽃문학관을 내려와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고등학교 정문이자 옛 충청감영의 정문이었던 포정사 문루 앞을 지난다. 으리으리한 문루를 통과해 등교하는 학생들의 기분은 어떨지 궁금하다. 제민천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지인이 추천한 카페 ‘반죽동247’에 들른다. 평일인데도 손님이 꽤 많다. 소문대로 커피 맛이 좋다. 시원한 카페라테 한 잔을 홀짝 비우고, 카페 2층에 있는 이미정갤러리 구경에 나선다. 공주 출신 서양화가 이미정 대표가 지역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종종 기획전을 여는 공간이다. 방문할 때마다 수준 높은 작품들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유학생들의 제2의 고향, 제민천 변 하숙마을
제민천 대통교 앞에 이르자 ‘하숙마을’이 보인다. ‘하숙마을’은 옛 약국과 옆 건물 4채를 개조해 한옥 숙박시설 및 마을 안내센터 역할을 하는 곳이다. 공주와 하숙마을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공주는 예로부터 교육의 도시로 명성을 떨쳤다. 명문으로 알려진 공주대학교 사범대학과 공주사대 부속 고등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0~80년대에는 전국에서 학생들이 공주로 유학을 왔다고 한다. 자연스레 학교 주변에 하숙집이 많이 생겨났다. 명문대 진학률이 높은 하숙집 주인은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선배가 후배에게 하숙집을 물려주거나 같은 하숙집에 산 인연으로 부부가 되어 부부 교사가 늘어나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단발머리 여고생과 까까머리 남고생들이 수없이 거쳐갔을 비좁은 하숙집 골목길을 거닐며 당시 풍경을 상상해본다.
하숙마을 옆, 사대부고 학생들이 참새방앗간처럼 들르는 중앙분식을 지나 반죽동 당간지주를 만나러 간다. 동네 한복판 작은 쉼터에 527년(백제 성왕 5년) 백제 최초로 지어진 대통사의 당간지주(보물 제150호)가 홀로 서 있다. 당간지주 옆에는 1903년에 설립된 공주제일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충청도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었으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곳으로 유명하다. 유관순 열사와 조병욱 박사가 이 교회에 다녔다. 지금은 기독교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후미진 뒷골목을 밝히는 등불들
다시 제민천으로 돌아와 대통교를 건넌다. ‘백성을 구제하다’라는 뜻을 지닌 제민천은 공주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고 유유히 흐른다. 주민들이 대통교 그늘에 앉아 다리를 담그고 더위를 식힐 만큼 수질이 좋다. 제민천 변 건물 담벼락에는 옛 하숙마을 풍경 사진과 나태주 시인의 시, 하숙집 학생들의 모습을 담은 벽화가 전시돼 있다. 담벼락을 구경하며 한옥 찻집 ‘루치아의뜰’로 향한다. ‘맛깔’식당과 ‘이안게스트하우스’ 사이의 터널 같은 골목 안으로 쑥 들어가야 발견할 수 있다. 파란 대문 너머로 야생화가 만발한 뜰과 한옥 한 채가 반긴다. ‘루치아의뜰’은 차 문화 전문 사범인 아내 루치아와 쇼콜라티에인 남편 요한이 운영하는 찻집이다. 보이차, 홍차, 커피, 디저트를 판다. 폐허나 다름없던 집과 골목을 부부가 살뜰히 가꾼 덕에 공주 명소로 거듭났다. 도시 재생 성공 사례로도 손꼽힌다. 공간 못지않게 루치아가 차려내는 찻상 또한 작품처럼 아름답다. 찻상을 바라보고, 차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공주에서 루치아와 요한 부부처럼 이 도시를 사랑하는 이를 많이 만났다. 공주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인 김조연 씨도 그중 한 명이다. 서울에 사는 그는 공주 사랑이 대단하다. “공주는 관광객들을 끌거나 관광 트렌드에 발맞추기 위해 치장하지 않아서 좋아요. 다소 투박하고 촌스럽지만, 옛날 시골 동네 모습이 곳곳에 남아 있어 맘이 편안해져요. 이게 공주 원도심의 매력이죠.”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래 보고, 자세히 보면 그처럼 공주와 사랑에 빠지고 말 것 같다.
주변 명소 & 맛집
단골들이 추천하는 ‘중앙분식’
제민천 대통교 앞에 있는 중앙분식은 즉석떡볶이, 쫄면, 비빔만두 등을 판다. 떡볶이 1인분을 주문해도 커다란 냄비에 2인분은 됨직한 양을 내놓는다. 쌀떡, 쫄면과 당면사리, 양배추, 어묵을 듬뿍 넣어준다. 국물이 자작자작해질 때까지 졸여 먹어야 제맛이 난다. 맛의 비결은 안주인장이 만든 특제 소스에 있다고. 학생 때부터 즐겨 찾던 단골, 소문 듣고 찾아온 관광객들로 늘 붐빈다. 올 8월 중순 공주우체국 옆으로 이전한다.
공주시 제민천1길 67, 041-856-1497, 10:30~19:00, 월요일 휴무
전국에서 소문난 ‘부자떡집’
1982년 산성시장 안에 창업한 떡집이다.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당일 생산·당일 판매를 원칙으로 삼는다. 작업장이 공개돼 있어 제작 공정에 대한 신뢰감을 준다. 영양떡인 부자떡이 대표 메뉴이며, 헤이즐넛 호두설기는 이곳에서만 파는 제품이다. 공주의 특산품인 밤을 넣어 만든 알밤찹쌀떡 세트가 선물용으로 인기가 많다. 쫀득한 찹쌀떡 안에 밤이 통째로 들어 있다. 부자떡집의 떡은 달지 않아 부담 없다.
공주시 용당길 11, 041-854-5454, 08:00~19:00, 연중무휴
추억을 부르는 잡채만두집 ‘간식집’
산성시장 내 분식집이다. 잡채만두, 김밥, 떡볶이를 판다. 대표 메뉴는 잡채만두. 통통한 만두 안에 당면이 가득 들어 있다. 대구 납작만두의 통통만두 버전 같다. 만두피와 당면만으로 이루어진 만두가 특별히 맛있는 줄은 모르겠으나, 공주 사람들이 한 봉지씩 사간다. 간장 대신 초장을 찍어 먹는 것이 독특하다. 만두 맛보다 만두를 구울 때 나는 자글자글 소리가 정겹다.
공주시 산성시장1길 46, 041-852-4812, 화요일 휴무(1, 6일 장날 제외)
담백한 육수가 일품 ‘고가네칼국수’
공주는 예로부터 면 요리가 발달해 칼국수집이 많다. 고가네칼국수는 칼국수를 상에서 끓여 먹는 방식이다. 한우 사골, 양파, 무, 파, 닭발 등을 넣어 담백하게 끓인 육수에 각종 채소와 우리 밀 면을 넣어 익힌다. 직원이 우리 밀 면은 더디 익는다고 알려준다. 고가네칼국수는 저염식 식단을 추구해 칼국수 맛이 심심한 편이다. 배추겉절이와 섞박지로 간을 맞춰 먹는다. 1인분도 주문할 수 있다.
공주시 제민천3길 56, 041-856-6476, 10:00~21:30, 일요일 휴무
걷기 Tip
❶ 4월 5일부터 11월 30일까지 매주 금·토요일에 산성시장에서 공주 밤마실 야시장이 열린다. 오후 6시부터 밤 10시까지 운영한다.
❷ 5월부터 10월까지 매주 주말에 공산성에서 수문장 교대식을 진행한다.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까까머리를 강요당하는 시대를 살아왔다. 이른바 ‘탈개인화 시대’였다. 성장이 필요했던 시절 국부 통치 하를 살던 사람들은 가시적 통제를 받아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탈개인화 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군중 혹은 집단 속에서 때때로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지 못하는데 이 현상이 탈개인화다.
멋 부릴 수 없던 앞머리 1cm 수렁
고등학교 때는 ‘스포츠머리’라고 하여 앞머리 1cm가량 기르는 것이 허용됐다. 교문에 들어설 때마다 규율부가 하는 일이 머리 단속. 고학년이 되면 규율부와 친해져서 허용치를 약간 웃돌기도 했으나 그래 봤자 까까머리였다. 교련 선생이 불시 단속이라도 나서면 규정 위반한 학생의 머리 한가운데에 시원하게 바리캉(헤어클리퍼)으로 만든 고속도로(?)가 나는 참사가 빚어지곤 했다. 그 한풀이었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니 장발이 유행했다. 하지만 군사독재 정권은 미니스커트와 함께 장발도 경범죄로 단속했다.
고등학교 시절 사대부고 여학생과 잠시 만난 적이 있다. 사대부고 학생은 긴 머리에 멋진 베레모까지 써서 세련의 극치를 달렸다. 짧은 머리 때문인지 나는 도무지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교복을 벗어 던지고 사복을 입어도 짧은 머리 때문인지 ‘미성년자’라고 이마에 쓰여 있는 것만 같았다. 짧아도 너무 짧은 머리카락 때문에 기운 빠졌다.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는 물론 그 당시에는 학생들이 못 가는 곳이 많았다.
장발 단속, 또 까까머리, 그리고 유니폼 시절
성년이 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군대에 입대하고 나니 또다시 까까머리가 됐다. 군복까지 입으니 힘을 못 썼다. 민간인과 군인이 같이 걸어가면 ‘사람 한 명과 군인 한 명이 간다’고 했다. 군인은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한 것이다. 가슴 뛰는 외출 때면 군복을 다려 입고 구두도 광을 있는 대로 내서 멋을 내고 나갔지만, 군인은 군인일 뿐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군인에게는 머물지 않았다. 군대야말로 탈개인화 현상을 강요해야 하는 집단이었다. ‘조국 수호’라는 대 명제 아래 명령에 복종한다. 적과 대치했을 때 탈개인화가 안 되어 있으면 목숨 걸고 적과 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건설회사에 다닐 때는 늘 청색 점퍼를 입었다. 회사에서 무상 지급해주는 유니폼이었지만 편했다. 건설 현장이 어디나 그렇듯이 해 뜨면 일하고 해가 져도 불 켜놓고 일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오직 일에만 몰두하라는 분위기였다. 예비군복을 입었을 때가 가장 편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비군복을 입으면 정체감은 잠시 잊게 되고 만취에 무단 방뇨 정도의 웬만한 일탈은 사회적으로도 인정해주던 시절이었다. 머리를 자르고 유니폼을 입는 것은 탈개인화 현상의 대표적인 통제 수단이었다.
탈개인화와 멀어진 현재의 삶
이제는 누군가 나에게 유니폼으로 탈개인화를 강요할 일은 없을 것이다. 정체성을 유지하고,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된다. 부모님이 하지 말라던 것, 학교에서 하지 말라던 것 다 무시하고 대중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일이라면 거리낄 것이 없다. 모두 그런 사람들만 모이다 보니 개성이 너무 강해 의견 통합이 어렵다는 문제점에 봉착할 때가 있다. 모임 후 음식점 하나를 골라도 서로 입맛과 취향이 달라 음식점 하나 결정도 어려울 때가 많다. 특히 탈개인화 현상을 겪어 보지 않은 또래 여성은 의견 일치가 더 어렵다. 최근 서울시교육청이 중·고교 학생의 교복과 두발 자유화를 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시대의 요구사항이기도 하지만, 이를 통솔하는 교사들은 골머리 꽤 아플 것이다. 지나고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고 보니 통솔하는 입장에서 탈개인화가 일정 부분 좋은 부분이 있었구나 싶다.
나이가 들면서 친구 사이도 연인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 속에서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한다. 학창 시절부터 만난 오래된 친구부터 사회에서 만났어도 그 누구 못지않게 마음 잘 통하는 친구도 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좋은 내 친구, 어쩌다 만났는데 단짝이 된 친구 이야기를 들어봤다.
글·사진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365일, 일만 생각하며 앞만 보고 살았던 금융맨이 퇴직 후 친구들의 여행을 돕는 여행 전문가가 됐다. 일명 ‘동창생 여행 전문가’가 된 정강현(丁康鉉 ·69) 회장. 퇴직 후 서울사대부고 동문 카페에 18회 졸업생들의 여행 모임 ‘여유회’를 만들어 친구들과 여행을 다닌 지도 10여 년이 훌쩍 넘었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어디든지 간다는 정 회장. 그가 추진하는 여행에는 항상 20명 이상은 참석한다. 이 놀라운 출석률은 정 회장의 탄탄한 여행 준비 덕분이다. 1만원 정도의 적은 회비로 친구들에게 이야기가 있고 맛있는 여행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고. 답사는 기본이고 역사가 있는 여행지를 선정하면 꼼꼼하게 공부하고 챙겨서 여행 해설가로도 변신한다. 지난 7월 7일에는 작년 메르스 때문에 일정을 잡았다 가지 못했던 양수리 세미원과 두물머리를 다녀왔다. 이날 비소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9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내 친구 정강현은 어떤 사람인지 동창생들의 목소리를 들어볼까.
내 친구 정강현은 어떤 친구입니까?
성기정
강현씨는 두말할 것도 없이 멋쟁이예요. 봉사에 앞장서는 사람, 가장 멋진 일을 친구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요. 강현씨 덕에 우리는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되니까 멋있을 수밖에 없어요. 이번에 온 세미원도 예전에 와봤지만 새롭게 단장한 이후 오늘이 처음입니다. 서오능 이런 곳에 갈 때는 역사 공부를 해 와서 친구들한테 설명해 주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친구들하고 다니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송남영
동창들이 만나는 것도 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30~40대에는 못 만났어요. 각자 바쁘다보니 그랬습니다. 50대에 접어들면서 동문회가 활성화되고. 향수를 찾아간다고나 할까요? 동창회에 간다고 하면 그때 친구들이 좋아요. 강현이가 여유회를 시작하면서 안 가본 데가 없어요. 서울성곽 길, 전주한옥마을 등 뭐 말할 것도 없죠. 그리고 같이 있으면 재미있어요. 정말 늙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다들 너무 애들 같아요. 귀엽다니까요. 50년 전으로 가버리니까 그때 같이 있던 사람들이라 마음이 소년, 소녀가 되는 거죠. 목소리도 깔지 않고 서로 앞에서 폼 잡을 일 없고 너무 편합니다.
유경옥
생긴 건 기본이고 멋지고 근사하고 박학다식하고 멋있는 친구예요. 같은 학교를 졸업해서 동창으로 있는 것이 정말 행운이죠. 진짜 전문성도 갖추고 정서적인 거, 마음을 건드리는 감성 그리고 따뜻함을 갖췄어요. 헌신적으로 모임을 위해서 리드를 잘 하세요. 계획적으로 그야말로 여유 있고 즐겁게요. 오늘 보신 것처럼 우리 상태를 보아 가면서 여행 계획을 짜는데 정말 존경스러워요.
김혜자
정강현은 리더십 강하고, 봉사도 잘하고, 정말 사실이 그래요. 이 나이에 저렇게 땀을 뻘뻘 흘리고 좋지도 않은 길을 가면서 설명도 해주고 말입니다. 보통 노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니까 하는 거죠. 강현이는 여행을 할 때 꼭 그곳에 관한 공부를 많이 해오는데 대충 알아서 말하는 게 아니라 충분히 자기 말로 표현하고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줍니다. 여행 가이드 이상으로 저희에게 알려주죠. 한번은 부부동반으로 몽골의 갈매기섬이라는 곳에 갔었어요. 여기는 사람이 혼자 가면 갈매기들이 공격해요. 그런 곳을 혼자 뚫고 갔다 돌아 나올 때 배가 고장이 났는데 기지국이 많이 없어 연락이 안 되는 일도 있었어요. 그렇게 위험한 상황을 겪고도 다음에 또 보면 그런 오지 같은 데를 데리고 가더라고요. 이 친구 아니면 저희가 또 어떻게 그런 곳에 가보겠어요. 그러니까 친구들이 감격해서 잘 따라 다니는 거예요.
서울사대부고 동창 대표 잉꼬 부부 장재숙·하지환 부부
저 친구 정말 좋은 친구입니다. 이 나이에 앞장서서 희생하는 것이 쉽지 않잖아요. 이렇게 여러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얼마나 좋아요. 강현이도 나름대로 바쁜 사람이거든요.
희생정신이 있는 겁니다. 이 많은 친구들을 위해 사전 답사하고, 열차 시간까지 챙기는 거 보면 너무 감사하지요. 서울사대부고 동문 중에서도 우리 18회 동창들이 제일 행복하지 않을까요?
나이를 먹는다는 건 달리보면, 자신의 부모님과 한없이 가까워지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젊었을 때는 알 수 없었던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헌신과 노력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시간을 통해 성숙하게 익어가는 인생에 대한 하나의 증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특히나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은 그 얼마나 많은 희생과 배려로 위대하게 완성되어 있는가.
부르면 부를수록 사무치는 그 이름, 어머니~~
어머니라는 그 이름을 기억하며 위안과 용기를 얻는 삶 속에서 소중한 존재를 다시 기억하자는 뜻으로 본지에서 만드는 「어머니」 코너는 그러한 위대한 어머니들의 삶과 의미를 돌아봄으로써 삶의 의미를 다시 묻고자 한다. 그 첫 시작은 권오준 포스코 차기 회장의 어머니 정수생 씨(1994년 별세)다.
◆어머니의 깊은 혜안과 맑은 지혜로움으로 꽃핀 5남매
긴 진통을 앓던 포스코의 차기 회장에 권오준 기술부문장이 내정되었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권 차기 회장은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나와 미국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포스코에 입사해 연구개발 분야에서 정진했다. 또 포스코가 세계최초로 개발한 최첨단 파이낵스 신공법과 고부가가치 자동차 강판 등의 개발 주역을 맡았다. 한마디로 포스코에 뼈를 묻은 묵직한 기술전문가로서 위기에 처한 포스코를 구해내야 하는 막대한 임무를 수행할 수장으로 발탁된 것이다.
당신들은 헐벗어도 자식만큼은 반듯하게 키우려는 우리나라 부모들의 희생적인 자녀사랑과 교육열이야말로 디지털 강국 코리아를 이룬 저력이 아니었을까.
이처럼 권 내정자가 국민에게 존경받는 포스코를 만들고 글로벌 초일류 철강회사로 발돋움시킬 최고의 리더자로 성공하기까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너희들은 굉장한 사람이 된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될거야’가 아닌 ‘된다’라는 확신으로 마음속에 단단한 심지를 심어 주셨다.
재경 영주 향우회 관계자는 경북여고를 나온 어머니는 자녀의 기를 살려주고 재능을 키워주실 줄 아는 교육적 혜안을 가지신 분이셨다고 기억했다. 자식들의 타고 난 재능을 키울려고 했던 맹모의 가르침을 실행에 옮기셨던 것.
“유학 간 아들이나 서울에서 공부하는 자식들을 위해 바리바리 싸서 보내는 것 좋아하셨습니다. 양계장 하실 때도 계란을 반듯한 걸로 골라 광주리에 담아 서울로 들고 가셨지요. 당신은 안먹고 안 입고 아껴서 쥐포, 오징어, 무말랭이, 백김치, 고추찜 등을 보내는, 말로 다 하지 못하는 아릿하고 따뜻한 넘치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어머니를 잘 알던 고향의 한 어르신은 이렇게 회고했다.
끝없는 자식 사랑과 세상사는 법을 가르쳐주려는 어머님는 위대한 유산을 남기셨고,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는 5남매의 안타까운 효심에 고향 어르신들도 눈시울을 적셨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을 몰랐던 이유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육개장, 콩가루 칼국수(안동국시),뼈다귀 곰국을 기억하는 권 내정자를 비롯 5남매들은 정작 어머니 정 씨가 좋아했던 음식이 뭐였는지 잘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어머니에 관한 회고에서 5남매만을 위해서만 맛있는 것을 해줬기 때문에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선 알려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정 씨는 그러면서도 아이들 공부에까지 신경 썼다. 매번 자식들 숙제를 점검하던 정 씨는 자식들이 숙제에 대해 잘 몰라 하면 자식들보다도 자신이 더 분해했다. 모르는 자식에게 집을 나가라고 하고 책을 집어 던지기도 했고 아궁이로 가져가 책을 태우려고도 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되자 자식들은 울면서 어머니에게 매달렸고 한 번 울고 난 다음에는 묘할 정도로 공부가 잘 되곤 했다. 자식들의 학습열과 집중력을 위해 정 씨가 선택해야 했던 일종의 ‘쇼크 요법’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우리 5남매에게 보내주신 가장 큰 선물은 기도였다. 매일 밤 주무시기 전에 엄마는 꼭 정화수를 그릇에 가득 떠 놓고 두 손 모아 기도를 올렸다. 엄마에게 뭘 기도하셨냐고 물었더니 웃으셨다. 너들 잘 되는 거 말고 뭐가 있냐는 표정이었다, 기도가 희망이었던 분이었고 그 기도는 어머니가 준 가장 큰 축복이었다.”
어머니는 많은 일을 했지만 서울에 가 있는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기엔 돈은 항상 모자랐다. 등록금을 낼 때면 어김없이 부부싸움이 벌어졌다. 정 씨는 때가 되면 남편을 닦달하여 어떻게든 등록금을 마련하곤 했다. 그렇게 해놓지 않으면 남편은 자식들이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학교를 다니는 줄 알 거라는 게 정 씨의 우려였다. 그리고 5남매들은 자신들의 학교 생활이 부모님의 노력과 헌신으로 지탱되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었다.
◆자식들에게 보내주신 큰 선물 '기도'…경북 영주 출신 모두 서울사대부고 나와
권 차기 회장이 대두되면서 자연스럽게 권 차기 회장의 가족이 화제가 됐다. 큰 누나 권원주 씨는 이화여대 약대를 나와 약국을 경영중이며, 큰형 권오성 씨는 외대 출신으로 무역업을 하고 있다. 권 차기 회장의 첫째 동생 권오진 씨는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후 병원을 운영중이며, 둘째 동생 권오용 씨는 고려대 정외과를 나와 전경련 홍보실장, 금호아시아나그룹 홍보전무, KTB 경영기획실 상무, SK그룹 홍보담당 사장 등을 역임한 후 현재 효성그룹에서 상임고문으로 재직중이다. 권 차기 회장의 남매들은 모두 서울사대부고 16회, 18회, 20회, 24회, 26회 동문으로 서울대 연대 고대를 잇는 스카이대와 이대 외대 등의 명문대학을 나와 각계 분야에서 전문가로 활동중이다.
2008년 부친상을 당했을 때 포스코 기술연구소장 전무를 맡고 있던 권 차기 회장은 부고란에 자신의 신분을 ‘회사원’으로 적도록 했다. 포스코 전무의 부친상 부고가 나갔을 경우, 협력사 등에서 조문을 와야 하는 부담을 느낀다는 점을 고려해 배려한 것이다.
이처럼 권 차기 회장은 남들에게 나서는 것을 꺼려한다. 동생 권오용 고문은 “형님은 꼼꼼한 성격에 기술인이기 때문에 기술로만 보여주면 될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강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위대한 어머니 정수생 씨의 헌신
성공한 자식들의 뒤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있기 마련이다. 권 차기 회장 5남매(4남 1녀)의 어머니 정수생 씨 또한 그런 위대한 어머니의 그림을 그리기에 충분한 삶을 살았던 어머니였다.
선친 권영건 씨는 본래 양반가문으로 70년대 초반까지 고향인 영주에서 대규모 제재소를 경영해 상당한 재력을 쌓았지만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자금난에 몰려 사업이 기울었다. 그러나 가세가 어려워졌어도 자식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고 5남매 모두를 상경시키는 교육열을 보였다. 정 씨는 그러한 남편의 의지와 자식들의 미래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남다른 고생을 해야 했다.
5남매에게는 전형적인 엄친자모(嚴親慈母)형의 부모님이었다. ‘健全/道義/勤儉’이라는 가훈을 직접 지어주신 아버지는 무섭기는 해도 풍류를 아는 여유가 있었다. 어머니 역시 자애롭기는 하셔도 결코 원칙에 벗어나는 적은 없었다. 비록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부모는 당시 큰 도시에서 아이들을 교육시켜야겠다는 믿음이 강하신 분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돈이 문제였다. 자식들 유학 비용을 위해 정 씨는 서울에서 스테인리스 식기를 구매하여 영주에 가서 팔았다. 집 마당 한 켠에는 300마리 정도 되는 닭을 키웠다. 그 옆에는 돼지도 길렀다. 밤에도 불을 켜고 사료를 줘야 했다. 돼지야 먹던 걸 그냥 갔다 던지면 그만이었지만 닭은 사료를 사와 으깨서 나눠줘야 했다. 또 다른 벌이였던 하숙과 전세 관리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채를 하숙과 전세를 위해 내주고 정 씨를 비롯한 5남매 가족들은 사랑방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랑방에서는 꽃장사를 했다. 하굣길에 여학생들은 사랑방 창문을 통해 꽃을 사가곤 했다. 그 모든 것이 어머니 정 씨의 몫이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이제야 알게 되서…”
어머니!
나에게 티끌 하나 주지 않은 걸인들이
내게 손을 내밀 때면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전부를 준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제야 알게 돼서 죄송합니다.
아직도 너무도 많은 것을 알지 못해 죄송합니다.
-서울여자대학교 사랑의 엽서 공모전 대상작 중에서
권 고문이 평소에 좋아하는 시인 에서는 어머니에 대한 그의 그리움과 후회가 넘쳐난다. 이 절절한 그리움에 대한 동감은 당연한 것이었다. 고생 끝에 하나씩 이뤄지던 자식들의 성공을 지켜 본 정 씨는 1994년에 71세의 나이로 운명하셨다.
5남매의 어머니 정 씨의 삶의 가치와 자식들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 이 땅의 어머니들의 삶의 가치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자식을 위해 자신을 바쳤고 그렇게 성공한 자식에게서 얻는 기쁨으로 모든 것을 감내했다. 거기에는 이유가 없다. 그저 무제한적인 사랑만이 존재할 뿐이다.
어머니는 5남매를 존중했다. 어머니 스스로의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는 것을 5남매는 뒤늦게 안다.
오는 3월 18일이면 어머니 기일이라 다 같이 모여 형제간의 깊은 우애를 다지는 시간을 함께 하기에 벌써부터 권오준 차기회장 내정자의 취임식에 하늘에 계신 어머니의 축복 담긴 기도가 기다려진다. 권 차기회장 내정자는 3월 14일 정기주총 통과 뒤 이사회 승인을 거쳐 최종 선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