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럽시대 김정섭 · 한울아카데미
셀러브리티와 명성 연구의 이정표가 될 방대한 종합 학술서다.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동서양 명사들의 명성과 관련한 자기 성찰과 발언을 풍부하게 수록했다.
돈 버는 로컬 야나기하라 히데야 · 더가능연구소
지역 컨설턴트인 저자의 참여로 인구 4000명의 작은 마을이 ‘잘 버는 마을’로 성장했다. 저자는 지역관광 마케팅은 성과가 아닌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경성백화점 상품 박물지 최지혜 · 혜화1117
미술사학자인 저자는 1920~30년대 경성의 백화점을 조선 근대화의 상업적 최전선으로 해석했다. 각 층에서 판매하는 상품에 초점을 맞춰 그 시절 경성을 돌아본다.
어쩌다 보니 지구 반대편 오기범 · 포스트락
인기 블로거 ‘오끼’의 10만 원으로 시작한 31개국 366일간의 세계일주 여행기다. 중동, 유럽, 아프리카를 거쳐 북미에 이르기까지 여행 에피소드가 유쾌하다.
올해 국내 합계출산율이 지난해 0.84명보다도 더 하락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올 만큼 대한민국 출산율이 사회적 이슈가 된 가운데, 50세 여성이 얼리지 않은 본인 난자로 임신과 출산에 성공한 사례가 나왔다.
강남차병원 여성의학연구소는 A(50)씨가 얼리지 않은 자기 난자로 시험관 시술을 받고 지난달 말 2.7kg 건강한 남아를 출산했다고 22일 밝혔다. 관계자들은 “젊은 나이에 냉동보관해놨던 난자를 사용하거나, 난자를 기증받지 않고 임신에 성공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고령 산모가 늘고 있지만 50대 산모는 드물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출생아 30만2676명 중 50세 이상 산모가 낳은 아기는 18명이다. 국내 최고령 산모는 2012년 출산한 57세로 기록돼 있다. 다만 해당 산모는 폐경 이전 냉동해둔 난자로 시험관아기 시술로 임신했다.
지난 2018년 6월 강남차병원 난임센터인 여성의학연구소를 찾은 A씨는 2019년 9월 시험관아기 시술을 시도했다. 노화 때문에 난소기능 저하된 터라 총 5번의 과배란과 저자극 배란을 거쳐 수정란 2개를 확보했고 2020년 9월 배아를 이식한 뒤 임신에 성공했다.
A씨는 고위험 산모로 분류되는 위기도 겪었다. 임신 기간에도 임신성 당뇨 진단을 받아서다. 이에 A씨는 강남차여성병원 산부인과와 내과 간 협진을 바탕으로 식단과 생활습관 등을 개선한 끝에 지난달 말 제왕절개로 건강한 아기를 출산했다.
난임센터 주치의 이우식 여성의학연구소장은 “40대 후반~50대 초반 여성이 얼리지 않은 자기 난자로 임신과 출산에 성공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며 “난소기능 저하 등으로 난임 시술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부부의 의지와 경험 많은 의료진이 한 팀이 돼 새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예비 창업자를 위한 길라잡이 도서 ‘창업 지름신’(이준우 외 공저·이앤송)이 출간됐다.
흔히 창업하면 프랜차이즈 카페, 치킨집, 대기업 계열 빵집 등을 떠올린다. ‘창업 지름신’에는 직장인 간식 배달, 취업준비생 면접용 옷 임대, 굼벵이 갈아 만든 애견 사료 등 생소하면서도 다양한 창업 아이템의 성공기가 담겨 있다.
비범한 사람이 특별한 기술과 자본으로 성공했다는 빤한 스토리는 이질감이 들게 마련이다. 이 책은 평범한 직장인, 주부, 청년백수, 실업자 등 우리 주변 이웃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사소해 보였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문제점을 뒤집으며 ‘성공의 기회’로 낚아챈 이들의 인생 역전극을 생생한 인터뷰로 들려준다.
아울러 40개의 창업 스토리를 웰빙, 워라밸, IT, 헬스, 에코 등 5개의 분야로 나눠 관심사별로 접근이 용이하도록 정리했다. 각 인터뷰 끝에는 창업자가 창업을 결심한, 또는 아이디어를 얻은 결정적 순간(이른바 ‘창업 지름신’이 들이닥친)을 소개하는 ‘창업 INSIGHT’ 코너를 따로 마련했다. 스토리 중심으로 읽혀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전반적인 로드맵을 그리게끔 한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저자는 소박한 아이디어로 대박을 일궈낸 창업자들의 성공 요인을 ‘남다른 눈과 끼’라 일컫는다. ‘눈’은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과 새로운 시장의 수요를 파악하는 눈썰미이며, ‘끼’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과감하게 실행한 추진력이다. 책 뒷면에는 이러한 창업 부자들의 성공 비밀을 10가지를 ‘눈7끼3’으로 요약해 보여준다.
무엇보다 창업은 한 번의 행운으로 단박에 이뤄지지 것이 아닌, 눈과 끼로 끊임없는 고민 속에서 발전 시켜나가는 장기전임을 일깨운다. 책을 읽다 보면 “행운처럼 찾아온 창업 지름신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당부와 더불어 “보통 사람인 나도 창업으로 성공할 수 있다”라는 용기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뭐든지 척척, 생각하고 말하는 대로 잘되는 사람을 보면 ‘도대체 어떻게 살았기에 뭘 해도 저렇게 운이 잘 따르나’ 싶다. 부럽다가도 얄밉고, 성공 비법이 뭘까 궁금할 때도 있다. 막걸리 전문 주점 ‘가제트 술집’은 8년 전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변두리 골목에 7평 남짓한 좁디좁은 공간에 문을 열었다. 개업 첫날부터 문전성시를 이루더니 맛집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매스컴도 꽤 탔다. 현재까지 전국 12개 ‘가제트 술집’이 매일 밤 손님맞이를 위해 불을 밝힌다. 스스로도 ‘운이 좋았다’고 평가하는 ‘가제트 술집’의 ‘가제트 오빠(?)’ 김경범(45) 대표. 그의 인생역전 운빨 성공기를 좀 들춰보자.
6년 전 괜찮은 술집이 있다는 지인을 따라 나섰다가 ‘가제트 술집’을 알게 됐다. 그런데 막걸리 집이라니. 홍대 옆 합정동이 지금처럼 번화하지 않을 때였다. 막걸리도 지금처럼 즐겨 찾는 이가 흔치 않았다. 그런데 웬걸? 술집 안은 빈틈없이 손님으로 가득 찼다. 술집이다! 회전율이 빠른 국수집, 밥집도 아닌 술집 대기 줄이 길기도 길었다.
“그때는 그랬어요. 요새는 경기가 안 좋은 것도 있고 본점과 2호점이 인근에 있어서 기다리지는 않아요.”
안경 쓴 얼굴, 수줍게 웃으며 이야기를 꺼내는 이 사람이 바로 가제트 술집 김경범 대표다. 왜 굳이 술집 이름이 ‘가제트 술집’이냐고 묻는다면? 사진을 보면 대충 감이 잡히지 않을까? 그런데 그의 얼굴이 애니메이션 주인공 가제트만큼 낯이 익다. 소소하게나마 TV 드라마와 영화에 얼굴을 비추는 현역 배우이기 때문이다. 최근 MBC 예능 프로그램 ‘2016 무한상사’에도 얼굴을 내비쳤고, SBS 드라마
과 영화 등에도 출연한 바 있다. 막걸리집 사장님이라는 직함은 배우의 삶이 이끌어준 또 다른 삶 중의 하나인 셈이다.
배우 인생에 막걸리 들어오다
인기 배우가 아닌 이상 배우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언제 들어올지 모를 캐스팅 기회 때문에 일정한 일을 갖는 것이 부담스럽다. 배우인 김경범 대표도 술집을 열기 전 여러 직업을 섭렵했다. 연기 선생은 기본이고 오징어 장사, 목수 등 분야도 다양하다. 카타르 현장 취업을 며칠 앞두고 양국 간 마찰로 해외 일자리를 포기했고, 중국 내 유통 사업도 생각했지만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단념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것이 막걸리 아이템이었다.
“2009년 9월이었는데 막걸리 박람회를 한다는 소식을 신문으로 접하고 기록해놓았어요. 그런데 마침 박람회 날이 이사하던 날이더라고요. 박람회가 열리는 곳으로 이삿짐 차를 몰고 갔어요. 막걸리 붐이 일어나기 전이었죠. 그런데 막걸리 맛이 정말 다 다른 거예요. 이거다 싶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막걸리 파는 술집을 열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겁 없는 결정이었다.
올(all) 빚, 올(all) 도움으로 가제트 술집 문 열다
“그때 어떻게 시작했나 몰라.”
잠시 회상에 젖은 김경범 대표. 이 사업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난한 배우에게는 대출도 허락되지 않았다.
“대출이 되겠어요? 고맙게도 후배 중 주차 요원이었던 놈 하나가 전세자금담보대출로 1000만원을 꿔줬어요. 그리고 지인한테도 1000만원을 꿨고요.”
오로지 주위 사람의 도움으로 기반을 마련했다. 그저 운이 좋았다고 했다. 전부 다 빚이었고 도움이었다고 했다.
“당시 홍대 근처 상권이 점점 넓어지고 있어서 권리금이 어마어마했어요. 물어보는 곳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갈 수 없었어요. 포기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허름하고 작은 부동산 하나가 보였습니다. 제가 교회를 다니는데 부동산 이름이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더라고요. 그곳에서 지금의 가제트 술집 본점 자리를 안내해줬습니다.”
체계적인 상권 조사도 없었다. 가끔 가는 근처 닭집이 월 800만원 수익을 벌어들인다는 게 정보의 전부였다. 그리고 인테리어가 관건이었다. 당시 빈티지 인테리어로 꽤 유명했던 시나브로 자매가 가제트 술집의 대표 분위기를 연출했다.
“메일을 보냈어요. 구구절절했죠. 시골에서 상경해 연극을 하다 보니 먹고는 살아야겠고, 절박한 심정으로 부탁드립니다, 아니 감히 여쭤보겠다면서 인테리어를 부탁했어요. 솔직히 한 명은 반대, 한 명은 찬성했다더라고요. 결국 저랑 만나고 난 다음에 해주기로 하셨어요. 솔직히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으로 해주셨어요. 빈티지 핸드메이드라는 것이 작품과 상업의 중간인데 미안하고 또 너무 고마웠습니다.”
한 달에 80만원만 벌면 좋겠다
2009년 11월, 가제트 술집이 드디어 오픈했다. 열자마자 사람들이 계속 들어왔다. 사람들이 줄을 서는지도 처음에는 몰랐다.
“지금도 전화가 와요. 웨이팅(대기) 시간 얼마나 걸리느냐고요. 신기해요, 옛날 생각하면. 그런데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잘된 거 같아요.”
한 달에 딱 80만원 벌 생각으로 가게를 열었다. 돈 욕심이 없었다. 80만원 벌려고 한 사람이 150만원 버니까 너무 좋았다.
“손님이 앉아서 죽치는 거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즐겁게 하니까 잘된 거예요.”
김경범 대표는 1년 반 만에 지인에게 빌렸던 돈을 다 갚았다. 그런데 지금 누가 자기처럼 창업한다고 하면 뜯어 말린다. 본인은 운이 좋았던 것이지 빚은 원래 못 갚는 것이 빚이기 때문이다. 배우의 길을 잠시 접어두고 김경범 대표가 얻은 것은 너무 많다. 부인이 생겼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가정을 이뤘다. 창업을 열망하는 후배, 현역 은퇴자의 조언자로 나서 창업을 도왔다. 그래서 10개의 가맹점과 2개의 직영점을 가진 이른바 프랜차이즈 가제트 술집으로 거듭났다.
평균대 위를 오르다, 배우와 가제트 사이
반면, 김경범 대표는 무대와 촬영 현장을 그리워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배우로서의 삶이 까마득히 멀어져 간 것 같아 부쩍 아쉽다. 그래서 요즘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인터뷰가 잡혀 있던 날도 중국어 수업을 마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중국어는 솔직히 반반이에요. 배우적인 측면과 비즈니스적 측면이 있어요. 솔직히 내 생활에서 배우 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오디션보다는 감독, 작가, 스태프를 자주 만나야 해요. 지금 사드문제 때문에 한류가 단절됐다지만 언젠가 다시 좋아질 거잖아요. 그때 김경범이라는 배우가 중국어를 할 줄 안다고 하면 캐스팅에서 유리하지 않을까요(웃음)? 그리고 사업적인 면에서는 먹고살아야 하잖아요. 내가 전문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제트가 계속 승승장구할 거란 보장도 없고 말이죠. 블루오션인 중국에 치킨도 삼겹살도 아닌 막걸리 전문점은 어떨까. 강남이 아닌 합정동 뒷골목에 막걸리라는 아이디어를 들고 들어왔던 것처럼요.”
물론 사업을 하면서 배우로서의 센스가 다양하게 발휘됐다. 가게를 운영하는 것도 하나의 기획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김경범 대표가 맛으로 손님을 대하는 자세가 꼭 무대 위 배우의 모습과 닮아 있다.
“대다수 음식점 주인이 자기 음식은 다 맛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에요. 관객이 재미없으면 재미없는 건데 우기면 무슨 소용이에요. 관객에게 연기로서 만족감을 주듯, 납득할 만한 맛으로 손님에게 다가가야죠. 계속 손님의 입맛을 맞춰간 것이 주요했던 거 같아요. 최고의 맛이 아니라 만족감으로 사람 마음을 움직이잖아요. 공연할 때 배우와 관객과의 관계처럼 손님이 과연 맛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지속적으로 고민해요.”
그렇다면 김경범 대표의 앞으로의 계획은? 커가는 아이와 화가인 부인을 위해 사는 것은 기본이다. 그리고 이제 슬슬 자신의 꿈을 위해 다시 한 발짝 다가서고 싶다고 한다. 1인 미디어에 대한 관심도 오래전부터 있었다. 굳이 배우를 하지 않더라도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다가갈 계획이라고.
“지금도 차 안에 유튜브에 관한 책이 있어요. 예전에는 돈을 좀 무시했는데 이제는 더 열심히 벌어보려고요. 배우가 꼭 아니어도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밑바닥 배우 인생에서 우리 동네 뒷골목 세련된 막걸리 집으로 손님 취향 제대로 저격한 김경범 대표. 이제 다시금 꿈의 무대로 향할 채비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운빨을 모으고 모아 또 한 번 날려보겠다는 홈런 한방! 그럼 두 손 모아 기다려볼까?
줄담배를 피웠던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금연을 시작하였다. 금단현상이 너무 심하여 수많은 중단위기를 맞았으나, 17년 동안 한 개비도 피우지 않았다. 이제는 담배를 피우고 싶은 유혹을 다 뿌리치고 금연에 성공하였다.
한여름 더위에 가벼운 차림으로 산에 올랐다. 중간에서 친구와 간식을 들면서 쉬고 있었다. “산에서 담배를 피우면 되는 거예요?” 누구인가 소리쳤다. 주위를 살폈더니 또래 등산객이 조금쯤 흥분한 상태였다.
“담배를 피우다니요?” 반문했더니, “담배냄새가 엄청 나는데요.” 또 들이밀었다. 담배냄새가 났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금연 중 ‘담배냄새’ 금단현상에 매우 시달렸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담배골초였으나 휴일 하루만은 피우지 않았다. 1999년 2월 첫 휴일, 산에서 만난 등산객과 담배 한 대를 맛있게 피웠다. 월요일 출근하였더니, 큰 사무실에서 생담배 타는 냄새 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악취가 내 코에서 진동하였다. 머리가 아프고 헛구역질이 났다.
금연경험자로부터 ‘금단현상’의 한 형태라는 말을 들었다. 손 떨림, 체중증가, 우울 등은 종종 들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고통스러운 금단현상이 악취, 기억력감퇴, 꿈 3가지 형태로 찾아왔다.
악취가 몇 개월간 너무나 심하여 금연중단의 유혹을 수 없이 느꼈다. “금단현상의 강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낮아지지만, 담배를 한 대만 피워도 다시 처음처럼 강해진다.”고 하였다. 수시로 코를 헹구면서 지독한 악취를 이겨냈다.
제일 큰 문제가 기억력 일시 감퇴현상이었다. 폐인이 될 것 같은 두려운 생각도 들었다. 생각 끝에 기억력 이상 유무를 테스트하려고 2개의 국가자격시험에 도전하였다. 읽고, 쓰고, 외우면서 기억력 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다행히 합격의 영광을 안고 금연을 계속하는데 자신감을 가졌다.
꿈에서 담배를 피우는 현상이 제일 오래 갔다. 아주 맛있게 담배를 피우다가 벌떡 잠에서 깨어나 가슴을 쓸어내리곤 하였다. “내 의지력이 이것뿐인가?” 담배가 완전히 꿈에서 사라진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17년 금연 작전은 막을 내렸다. 신진대사가 잘되고 건강해져서 좋다. 깨끗한 시니어가 되어서 좋다. 무엇보다 손주들과 뒹굴고 놀아도 냄새나지 않아서 좋다. 우연히 찾아 온 금연기회를 끝까지 지켜낸 금연성공이 소중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