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스 드라마에 투영된 중장년 세대의 불안

입력 2025-12-01 06:00

[영상 속 세상] 김 부장이 우스워지는 현실에 눈물 찔끔

최근 방영한 드라마 ‘태풍상사’와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는 현재를 살아가는 중장년 세대에게 각별하게 다가온다. IMF 시대와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현재의 중장년 세대가 느끼는 성공 가치관의 차이를 극명하게 담고 있어서다.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SLL·드라마하우스· 바로엔터테인먼트 제공.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SLL·드라마하우스· 바로엔터테인먼트 제공.


중장년 가장의 불안이 쏟아진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25년간 일했던 제지 회사의 경영권이 외국계 회사의 투자로 바뀌면서 돌연 해고를 통보받는 중년 가장의 이야기다. 교외의 아름다운 전원주택에서 아내와 두 아이 그리고 반려견과 함께 바비큐 파티를 하며 “다 이루었다”고 만족해하던 이 가장은, 공장 자동화로 쓸모없어져 해고된 후 말 그대로 피 튀기는 재취업 전쟁에 뛰어든다. 블랙코미디 작품이지만 중장년 가장들의 불안과 위기의식이 투영된 웃픈(그래서 우습지만 한편으로는 슬픈)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방영한 KBS 주말드라마 ‘화려한 날들’에는 중견 원단 회사에서 33년을 근속하고 정년퇴직 후 재취업 전선에 나서야 하는 피곤한 가장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가장에게 남은 건 편안한 노후가 아니라, 여전히 생업을 위해 뛰어야 하는 냉혹한 현실이다. 이런 중장년 세대를 일컬어 이른바 ‘마처 세대’라 부르는데,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면서 자녀에게 부양받지 못하는 ‘처’음 세대라는 뜻이다.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SLL·드라마하우스· 바로엔터테인먼트 제공.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SLL·드라마하우스· 바로엔터테인먼트 제공.


JTBC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이하 ‘김 부장 이야기’)’는 그 긴 제목에 지금의 중장년 가장을 대변하는 김낙수 부장(류승룡)이 가진 것들을 나열해 넣었다. 그는 서울에 자가 아파트가 있고 대기업 부장이다. 이제 곧 상무 승진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는 이 인물은 나름 자신이 성공했다고 여긴다. 실제로 서울 자가, 대기업 부장 같은 타이틀은 과거 중장년 세대가 꿈꾸던 성공 기준이었다. 이 드라마는 냉정하게 그것이 모두 과거의 기준일 뿐,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김 부장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인물을 통해 그린다.

부장이라는 위치는 이제 승진하지 못하면 쫓겨나야 할 처지를 말해주는 것이고, 대기업은 과거처럼 직원들을 평생 책임지는 곳이 아니다. 서울 자가 아파트도 그 한 채로는 자산화되지 않아 노년에는 만만찮은 주거비 부담만 요구하는 곳일 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인물은 자신이 성공했다고 여기고, 아들 역시 자신과 같은 길을 가기를 바란다.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취직해 살아가기를 기대하지만, 그건 현세대가 원하는 삶이 아니고 또 성공 기준이 되지도 못한다.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진 대기업이 개인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일은 사라진 지 오래고, 노동에 의한 소득만으로는 풍족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회사 다니며 열심히 벌고 저축하면 잘살던 시대에서, 지금은 자산을 적극적으로 불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갖고 있는 자산도 깎여나가는 시대가 됐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김 부장이 보여주는 씁쓸한 현실은 현 중장년 세대가 갖게 된 위기의식과 불안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SLL·드라마하우스· 바로엔터테인먼트 제공.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SLL·드라마하우스· 바로엔터테인먼트 제공.


차라리 IMF 때가 낫다? ‘태풍상사’의 역설

tvN 드라마 ‘태풍상사’는 IMF 외환위기 시절 상사맨들의 성공기를 낭만적으로 그려낸 복고 드라마다. 갑자기 벌어진 국가적 경제 재난 사태로 인해 강태풍(이준호)의 집안은 풍비박산 난다. 아버지는 충격에 쓰러져 사망하고, 아버지가 평생 일궈온 태풍상사마저 IMF의 풍랑 앞에 좌초될 위기에 놓인다. 강태풍과 그의 어머니는 빚쟁이들에게 몰려 으리으리했던 강남의 아파트에서 쫓겨나, 태풍상사 경리 오미선(김민하)이 사는 달동네 문간방에서 살게 된다. 절망적인 현실이지만, 드라마는 이 절망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다시금 태풍상사를 일으키는 강태풍과 오미선이라는 청춘의 성공기를 그린다. 현실이 아닌 낭만적인 판타지가 IMF라는 살풍경까지 향수를 자극하는 1990년대 복고의 추억으로 포장한다. 그 시대를 직접 경험했던 중장년 세대에게는 이러한 낭만과 복고가 아련한 추억처럼 감성을 자극한다. ‘지나간 일은 다 아름답다’고 하지 않던가. 당시에는 절망적이었을 테지만, 그 파고를 뚫고 나온 중장년 세대에게 이 드라마 속 상사맨들의 도전과 패기의 성장담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복고의 정서는 현재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즉 현재에 없는, 과거 어느 시점의 것들을 떠올리며 ‘그때가 좋았어’라는 복고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태풍상사’가 가져온 현재의 결핍은 뭘까. 개인적인 노력과 도전이 성장과 성취로 돌아오지 않는 현실이다. 또 회사가 직원들을 끝까지 책임져주지 않는 현실이다. 그 결핍을 파고들며 이 드라마는 이렇게 속삭인다. ‘저 때는 그래도 노력하면 성공하고 성취할 기회들이 있었어.’, ‘저 때는 직원들을 끝까지 챙기는 회사가 있었어.’

하지만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진 시대에 회사에 꿈과 인생을 거는 개인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니 회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 회사 구성원들이 힘을 합쳐 그 위기를 극복하는 이야기는 현시대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낭만적’인 일이 됐다. 이러한 변화의 분기점이 사실상 IMF 외환위기였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 드라마의 낭만적 역설이 얼마나 씁쓸한지 새삼 느껴진다.


▲tvN 드라마 ‘태풍상사’, 스튜디오 드래곤 제공.
▲tvN 드라마 ‘태풍상사’, 스튜디오 드래곤 제공.


IMF 시대와는 다른 김 부장들의 위기

1990년대 IMF 외환위기를 배경으로 하는 ‘태풍상사’와 현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김 부장 이야기’를 나란히 놓고 보면, 과거와 현재의 위기가 어떻게 다른 양상을 띠는지 비교해볼 수 있다. 즉 IMF 시대의 위기는 외부로부터 갑작스럽게 온 ‘전염병’과 같아, 공동체적 노력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현시대의 위기는 효율화를 최우선으로 삼는 달라진 기업 시스템에 의한 구조적이고 내재적인 위기로, 개인의 노력과 충성심만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태풍상사’가 그려내는 조직문화는 여전히 남아 있던 공동체적 신뢰를 낭만적으로 포장해 보여준다. 강태풍의 위기 극복과 목표 성취는 주변의 신뢰와 정직함을 거름 삼아 위기를 기회로 바꾸며 ‘사람을 향한 믿음’을 통해 이뤄진다. 예를 들어 자신이 투자했던 안전화 회사가 사채에 몰려 도산 위기에 처했을 때 강태풍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그 신발의 개발자를 먼저 구해내고, 이렇게 쌓인 신뢰는 위기를 극복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이것은 ‘사람을 얻으면 다 얻을 수 있다’는 당대의 공동체적 가치를 담은 이야기다.


▲‘태풍상사’ 포스터.
▲‘태풍상사’ 포스터.


하지만 ‘김 부장 이야기’에서 이러한 인간적 신뢰와 믿음은 찾아보기 어렵다. 김낙수 부장과 입사 동기지만 진급에서 누락돼 만년 과장으로 지내던 허태환(이서환)이라는 인물을 회사는 냉혹하게 쫓아낸다. 단순히 지방으로 좌천되는 줄 알았지만, 매일 맨홀 깊숙이 들어가는 일을 시키는 회사의 숨은 뜻은 나가라고 등 떠미는 것과 다름없다. 이런 사정은 김낙수라고 예외는 아니다. 오래도록 함께 영업맨으로 뛰며 가깝게 지낸 백정태(유승목) 상무는 그를 밀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위기에 처하자 모든 책임을 그에게 떠넘기려고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눈에 띄는 실적이나 남다른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야 한다. 회사는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 부딪치며 누군가 살아남으면 다른 누군가는 죽는 개인들의 생존지가 됐다.


▲tvN 드라마 ‘태풍상사’, 스튜디오 드래곤 제공.
▲tvN 드라마 ‘태풍상사’, 스튜디오 드래곤 제공.


위기의 중장년, 내적 회복과 삶의 유연성

우리 시대 김 부장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회사에서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취직해 열심히 살며 서울 자가에 아들은 좋은 대학까지 보냈음에도, 김낙수가 성공했다고 여기는 것들을 그보다 훨씬 어린 도진우(이신기) 부장과 비교하면 너무나 초라해 보인다. 전문대 출신인 도진우는 거래가 68억에 달하는 반포 아파트 자가 소유자다. 회사에서 일 처리도 스마트하고 부동산이나 증권, 코인 같은 재테크에도 남다른 일가견이 있어 보인다. 이것은 직업 소득만을 믿으며 살아온 김낙수 같은 중장년 가장들이 겪는 상대적 박탈감이다. 직업 소득이 재테크 같은 자산 증식 수단에 비해 가치가 하락한 시대가 아닌가.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취직해 한평생 근속하며 임원 승진을 목표로 하는 전통적인 성공 방정식은 무너진 지 오래다. IMF를 기점으로 구조조정과 명예퇴직은 일상이 됐다. ‘노력하면 인정받는다’는 신뢰가 사라진 시대에 중장년 직장인들의 줄퇴사는 자칫 사회문제로 부각될 조짐마저 보인다. 이들은 경제적 불안정 외에도 심각한 심리적 위기 상태에 놓여 있다. 과연 이들을 위한 해법은 없을까.

이러한 위기의식은 이른바 ‘신중년’이라 불리는 새로운 중장년 세대를 등장시켰다. 이들은 전통적인 성공 기준이던 직함이나 급여 같은 외적인 기준보다 능력 인정과 자아실현이라는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기준을 가치로 세운다. 조직이든 개인적 삶이든 그렇다.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회사에서 쫓겨날 위기에 어떻게든 버텨내려 안간힘을 썼던 중년 박동훈(이선균)이 결국 퇴사 후 자신의 회사를 차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모습은 달라진 현시대 중년들의 가치관을 잘 대변해준 사례다.

이제 회사가 삶의 전부인 양 아등바등 버텨내려 안간힘을 쓰기보다는, 자신을 중심으로 회사 생활과 개인적 삶의 가치들을 재점검해야 한다. 이를 통해 지친 내면을 회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찾고, 변화하는 세상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것이 알 수 없는 불안과 위기감을 느끼는 중장년 세대가 더 행복한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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