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파리 FIFA 총회’를 기점으로 월드컵 창설 100주년인 올해를 기념해 스포츠 평론가이자 해설가인 기영노 평론가가 신간 ‘월드컵 축구 100년 - 100번의 영광과 좌절의 순간들’을 출간했다. 이 책은 월드컵이 지닌 100년의 역사와 그 안에 담긴 빛나는 순간들, 전설적인 선수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오는 2026년 북중미 월드컵에 대한 예측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은 1930년 우루과이에서 시작된 제1회 월드컵부터, 2024년 현재까지 월드컵이 지나온 길을 조명한다. 월드컵 역사 속 빛난 선수들, 하늘의 별이 된 전설들부터 현재까지 활약하는 스타 플레이어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프란츠 베켄바워, 에우제비오, 요한 크루이프부터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킬리안 음바페, 손흥민에 이르기까지, 축구 팬이라면 누구나 가슴 뛰며 읽을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지구촌을 하나로 만드는 월드컵의 힘과 매력을 집대성한 저서다. 지난 100년간 월드컵이 어떻게 전 세계의 관심을 모으고, 수많은 사람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는지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기영노 평론가는 ‘베이스볼 매거진’, ‘일요신문’, ‘민주일보’ 기자 출신으로, 1982년부터 스포츠 평론가로 활동해왔다.
시간의 흐름은 막을 수도, 거스를 수도 없다. 노화도 그럴까. 때마침 ‘당신의 노화시계가 천천히 가면 좋겠습니다’를 집필한 서울아산병원 의료진에게 물었다. 결과는 놀랍다. 그들은 10년 이상, 심지어는 20년 넘는 시간 동안 노화시계를 늦출 수 있다고 했다. 노화의 개인차가 점차 커져갈 현대사회, 전문가들이 전하는 감속 노화 방법을 알고 나면 당신도 느리게 나이 들 수 있다.
노화는 갑자기 찾아와 놀라게 하는 불청객처럼 여겨지곤 했다. 예전 같지 않은 체력, 뒤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기억력, 어느새 생긴 주름만큼 잃어버린 탄력… 모든 것을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누구나 나이에 따라 신체 능력이 점진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노화 연구 전문가들은 물리적인 시간 외 다른 영향이 더 크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아산병원 의료진도 ‘슬로 에이징’이 가능하다고 외친다. 설문에 응한 의료진 모두 느리게 나이 들 수 있다고 답했다. 그중 40%는 현대 의학을 통해 노화를 거스르는 ‘리버스 에이징’까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노화시계를 10년 이상 늦출 수 있다는 답변은 80%에 달했다. 20년 이상 지연시킬 수 있다는 의견은 그 가운데 절반을 차지했다. 우리 몸이 어떻게 늙어가는지 내다보고 대비하면 노화를 늦출 수 있다는 의견이 가히 압도적이었다.
STEP 1 노화 이해하기
노화란 나이가 들어가면서 신체 구조와 기능이 점진적으로 퇴화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발생하는 ‘정상적인’ 변화다. 전문가들은 이 과정을 인지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당신의 노화시계가 천천히 가면 좋겠습니다’에서 박성욱 아산의료원 의료원장은 “늙어가는 것에 대해 너무 부정적인 시각을 갖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김원경 서울아산병원 치과임상과장·임플란트센터장 역시 “노화에 따른 증상을 이해하고 수긍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주요 진료과를 통해 노화 증상을 들었다. 이는 자연스러운 노화 과정이다.
▶ 호흡기내과 나이 들며 세포가 노화되면 회복 능력이 떨어진다. 현대인, 특히 도시 거주자는 미세먼지와 각종 오염물질로 인해 폐 손상이 되고, 반복적으로 섬유화 및 염증이 진행된다. 이로 인해 호흡곤란이 생긴다. 폐암이나 간질성 폐 질환 등으로 진행될 수 있다.
▶ 소화기내과 음식물이 식도에 걸려 더디게 내려가거나 내려가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연하곤란이라고 한다. 고령에서 잘 나타나며, 이때 쓰라리거나 뻐근한 증상이 동반될 수 있다. 나이 들수록 역류성 식도염도 잘 발생한다.
▶ 이비인후과 고음역의 청력이 서서히 저하되는 노화성 난청이 생긴다. 먼 곳에 앉아 있는 사람 말을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없게 된다. 또한 근골격계 약화와 더불어 양쪽 귀의 전정기관이 담당하는 균형감각이 점차 떨어지기 때문에 스포츠를 즐기기 힘들어진다.
▶ 안과 노안 증상은 대개 40대 중반부터 발생한다. 이때 흔히 느끼는 증상은 책이나 신문을 볼 때 글씨가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다. 책을 보더라도 눈과 책의 거리가 점차 멀어진다. 또한 근거리 작업 때 눈이 쉽게 피곤해지며, 심지어 두통을 호소하기도 한다.
▶ 치과 치아 뿌리 주변 충치 발생 등 구강 건조로 인한 합병증이 생길 수 있다. 연하장애(삼킴장애)로 사레에 잘 걸리기도 한다. 음식물을 씹을 때 뺨이나 입술을 자주 깨물게 되며, 상처가 잘 생긴다. 칫솔질할 때 잇몸이 아플 수 있다. 치아 사이에 음식물이 잘 끼기도 한다.
▶ 산부인과 폐경 초기 증상은 홍조, 열감, 땀이다. 많게는 폐경 여성의 약 80%가 경험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중기 증상으로 질 건조와 잦은 질염이 있다. 만성이 되면 골다공증이나 심혈관질환이 발생할 수 있다.
STEP 2 가속 노화 피하기
현대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기대수명은 크게 늘어났다. 설문에 응한 의료진 다섯 명 중 네 명이 ‘100세 이상’에 표를 던졌다. 단, 늙어가는 속도는 개인차가 크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신기술이나 특효약이 아니다. 최창민 서울아산병원 호흡기내과·종양내과 교수는 “노화를 예방하는 마법 탄환 같은 약물은 없다”고 단언한다.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수준의 건강관리를 하고, 질병을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가속 노화의 주범으로는 과식, 흡연, 나쁜 생활 습관이 주로 꼽힌다. 강신숙 서울아산병원 영양팀 임상영양사는 “신체 활동량 감소와 그에 따른 체중 증가”를 가속 노화 요인으로 들며 “신체 활동 감소는 근육량을 감소시키고 체지방을 축적해 고혈당과 만성 염증을 유발한다”고 꼬집었다. 흡연 역시 여러 진료과에서 지적했다. 호흡기내과, 소화기내과뿐만 아니다. 김원경 서울아산병원 치과임상과장·임플란트센터장까지 비위생적인 구강 관리와 더불어 흡연을 가속 노화 원인으로 꼽았다.
STEP 3 감속 노화 가까이하기
천천히 나이 드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매일 먹는 밥, 즐기는 기호식품, 듣는 음악의 볼륨 등 생활 습관을 교정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당장 보이지 않지만 그 차이가 훗날 분명 나타난다고 말한다. ‘당신의 노화시계가 천천히 가면 좋겠습니다’의 대표 저자인 안중호 서울아산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는 “적절한 운동과 건강한 식습관, 그리고 주기적인 몸 상태 체크로 노화를 미리 예방하고 치료한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과 처음에는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나이 들수록 점점 격차가 벌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요 진료과를 통해 일상에서 손쉽게 할 수 있는 감속 노화 방법을 들었다.
▶ 호흡기내과 대기오염이 심한 날을 피해 빨리 걷기나 등산 등 땀이 날 정도의 유산소 운동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능하면 걸어 다니는 것이 좋다.
▶ 소화기내과 소식하면 좋다. 소식이 노화 진행을 더디게 할 수 있다는 보고가 최근 미국 연구에서 나왔다. 식사 시 칼로리를 제한하면 다양한 대사·면역반응을 일으켜 수명을 늘린다. 본인에게 적절한 식사량을 찾고, 먹으면 불편한 음식을 조절해 먹는 것이 좋다.
▶ 이비인후과 불필요한 큰 소음에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불필요한 큰 소음이란 헤어드라이어 정도 되는 소리를 매일 3~4시간 이상 듣는 경우를 의미한다. 소음 크기가 이보다 커지면 난청에 걸리는 시간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어지럼증 없는 삶을 위해서는 하체 근력, 특히 뼈 건강이 중요하다.
▶ 안과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 사용 시간이 늘면 노안 증상을 더 어린 나이에 심하게 겪는다. 노안이 오면 당황하지 말고 안과 전문의에게 눈 상태를 정확하게 검사받은 뒤 비수술적 또는 수술적 치료법 중 선택해서 치료받아야 한다.
▶ 치과 올바른 구강 위생 관리와 칫솔질을 해야 한다. 치실, 치간칫솔도 사용하는 것이 좋다. 정기적인 치과 검진과 스케일링도 필요하다. 초기 치과 치료도 중요하다. 아플 때 치과에 가면 병이 많이 진행된 상태라서 치료 예후가 좋지 않다.
▶ 산부인과 나쁜 생활 습관 교정, 운동, 스트레스 줄이기는 모두에게 적용된다. 여성의 경우 갱년기 증상이 있을 때 적극적인 의사 상담과 호르몬 치료를 추천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 노화가 딱 그렇다. 최창민 교수의 당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노화나 질병의 선을 넘어버려 돌이킬 수 없게 되지 않도록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설문에 참여해주신 분들(가나다 순) 강신숙 서울아산병원 영양팀 임상영양사, 김원경 서울아산병원 치과임상과장·임플란트센터장, 안중호 서울아산병원 이비인후과 교수, 채희동 서울아산병원 산부인과 교수, 최창민 서울아산병원 호흡기내과·종양내과 교수
취재협조 서울아산병원
참고도서 ‘당신의 노화시계가 천천히 가면 좋겠습니다’(안중호 외 16인·클라우드나인)
1950년 10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그 시절 사회는 남편 내조 잘하고 아이 잘 키우는 현모양처가 되라고 했다. 꿈은 아득히 먼 단어였다. 안온한 가정 속, 소소한 재미를 ‘마인드 스포츠’ 브리지에서 찾았다. 매일 52장의 카드를 들여다보며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것 같다는 은근한 죄의식에 시달렸다. 그렇게 4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임현(73) 씨에게 깜짝 선물이 도착했다.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다.
“선생님, 예쁘게 하고 오셔야 해요. 아셨죠?”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결단식을 앞두고 임현 씨는 대내외적인 주목을 받았다. 브리지라는 이색 종목에 출전하는 최고령 선수여서다. 최연소로 승선한 김사랑(11) 양과는 62세 차. 일생일대의 선물은 꽤나 요란했다. 종목별 경기단체 임원, 지도자, 선수단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결단식에서 고령의 도전자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하도 예쁘게 하고 오라고 하기에 의식을 하긴 했는데 그렇게까지 주목받을 줄은 몰랐어요.(웃음) 가장 어린 선수와 둘이 카메라 인터뷰를 하기도 했어요. 국제 대회가 처음은 아니었는데, 확실히 아시안게임이 다르긴 다르더라고요.”
폐막 후 2개월여. 임현 씨가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대회 내내 최연장자로 화제였지만 인터뷰를 고사해왔다. 그러다 긴 휴가를 앞두고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만났다. “사실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쓸 만한 게 있을지 모르겠어요. 다만 브리지가 더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하니까… 내 이야기 한번 들어주겠어요?”
공부하는 엄마, 노는 엄마
한국에서 브리지는 생소하게 여겨지지만, 해외에서는 다르다. 지적 카드 게임인 브리지는 130여 개 국가에서 4000만 명 정도가 즐기고 있다. 중국 정치 지도자 덩샤오핑, 영국 작가 서머싯 몸 등이 대표적인 애호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주와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 파트너를 이뤄 2007 북미 브리지 챔피언십에 출전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임현 씨도 해외 적응을 위해 브리지에 입문한 케이스다. “남편이 외국을 많이 다니는 직업이었어요. 브리지를 알고 있으면 해외 나가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길래 국제부인회에서 배웠어요. 그게 1982년이에요.”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 속 정확한 연도나 기록은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생생한 기억이 있다. 엄마의 취미를 편견 없이 바라봐 준 두 딸의 응원이다. “미국에 1984년 건너갔어요. 거기서 맞는 첫 생일에 브리지 매거진 1년 구독권을 선물로 받았어요. 딸들이 중학생 정도 됐을 거예요. 둘이 자꾸 속닥거리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내 생일에 맞춰서 첫 번째 매거진이 도착하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했다고 해요.(웃음) 그때부터 브리지 관련 책을 접하게 됐어요.”
임현 씨는 가벼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순전히 재미였다. ‘선수’가 된 계기는 영국 대사 부인이 건넨 한마디였다. “브리지는 두 사람이 짝(페어)을 맞춰 다른 두 사람과 겨루는 게임이에요. 그렇게 잘하지 않았을 때인데 영국 대사 부인이 파트너를 제안하더라고요. 그렇게 나선 경기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신문에 우승 소식도 실렸어요.”
누구보다 좋아한 건 아이들이었다. 그 후로 브리지를 하고 온 날이면 “몇 등 했어요?”, “잘했어요?” 하며 종알댔다. 임현 씨는 그 관심이 즐거워 더 브리지를 파고들었다. 브리지 매거진과 관련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고 틈만 나면 브리지를 생각했다. 그럴수록 마음 한편에선 집안일을 더 살뜰히 돌볼 수 있는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아 불편했고, 그 모습을 두 딸이 공부하는 것으로 여겨 어쩐지 죄스러웠다. 복잡한 마음과 함께 임현 씨의 브리지 사랑은 깊어갔다.
“요즘엔 이런 말을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시절엔 대학 졸업장이 거의 결혼 자격증 같았어요. ‘내가 뭐가 되겠다’는 생각을 못 했어요. 사회 분위기가 그랬어요. 결혼하고서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충실하는 것이 내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러니 브리지 책 보는 것도 마음에 걸릴 수밖에요. 브리지 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곤 했어요. ‘이렇게 시간을 많이 쓰는 게 맞나?’ 하고요. 그렇게 해왔어요.”
내조의 여왕에서 브리지 국가대표로
두 딸의 결혼 그리고 남편의 은퇴. ‘제 할 일’ 다한 임현 씨는 브리지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2008 제1회 월드 마인드 스포츠 게임, 2014 제14회 레드불 월드 브리지 시리즈 등 굵직한 국제 대회 경험도 쌓았다. 40페어 넘게 출전한 레드불 월드 브리지 시리즈에서는 전체 2위라는 성적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도 항저우 아시안게임 출전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동안 줄곧 시니어 카테고리에 출전했는데, 아시안게임은 남성부, 여성부, 혼합부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큰 기대 없이 참여한 경선에서 임현 씨는 이변을 썼다. 경선이 당초 예상보다 일찍 종료될 정도로 그 기세는 대단했다. “아시안게임 출전이 확정되고서 축제 분위기였어요. 어휴, 내가 선발될 줄 몰랐지요. ‘연령에 따른 기타 카테고리가 없으니 여성부로 한번 해보자’ 한 것뿐이에요. 경선은 2주 정도 치렀어요. 많이 해서 승률 높은 팀을 선발하자는 거였죠. 굉장히 피곤했어요. 대회보다 경선이 더 힘들었는지도 몰라요.(웃음) 성적은 아주 좋았어요. 마지막에는 ‘더 이상 할 필요 없겠다’ 할 정도로요. 남은 경기를 다 지더라도 우리 점수가 더 나은 상황을 만들었거든요.”
임현 씨는 태극기가 수놓이고 TEAM KOREA (팀 코리아)가 적힌 선수단 물품을 꺼내 보이며 잠시 추억에 잠겼다. 최고령 국가대표에게선 한동안 소녀 같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무릎을 삐끗해 의료진을 찾았다가 선수들만 오는 곳이라고 제지받은 ‘웃픈’ 사연부터 교통경찰이 콜택시를 불러주고 요금도 슬쩍 내준 깜짝 에피소드까지, 임현 씨는 이야기보따리를 풀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웃게 한 건 젊은 국가대표 선수들의 꿈과 열정을 가까이서 목격했다는 사실이다. “아시안게임은 상상 이상이었어요. 막연히 ‘조금 큰 국제 대회겠거니’ 생각했는데 대회 치르는 동안 정말 감격한 게 많아요. 처음엔 브리지 선수단끼리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였는데, 나중엔 아주 전우가 됐어요. 시간이 더 지나니까 선수촌 안에서 만나는 한국 선수들 다 그렇게 보이더라고요. 어찌나 반갑던지요. 내가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 선수들 다 대견하고 예뻐 보여요. 그 생동감! 한 장소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젊어지는 것 같았어요. 대회도 대회지만 그 경험은 말로 표현 못 해요. 정말 좋았어요.”
두뇌 게임 하기 딱 좋은 나이
현실로 돌아온 임현 씨는 대한브리지협회에서 오프라인으로 주 1회가량 브리지를 즐기고 있다. 온라인으로는 전 세계 브리지 애호가를 더 자주 만난다. 여전히 저녁거리보다 브리지 관련 생각에 시간을 들이고 있다. 고령에도 두뇌 게임을 하고 여전히 선수로 경쟁력을 보이고 있다는 건 그 스스로도 오랜 세월 천착해온 주제. 임현 씨는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브리지를 즐겨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다른 두뇌 게임도 여럿 해봤는데 브리지를 단연 추천해요. 브리지는 암기력, 순발력, 사고력, 판단력, 집중력, 문제해결 능력, 유추 능력 등 요구되는 능력이 정말 다양하거든요. 물론 개인차는 있겠지만, 나이 들어서도 브리지를 잘할 수 있는 이유인 것 같아요. 암기력과 순발력이 노화에 따라 떨어진다 해도 경험과 연륜이 쌓이면서 올라가는 능력이 있어요. 평균 점수로 보면 뒤처지지 않는 거죠. 나이 든 사람에게 정말 좋은 스포츠예요. 어린 학생들에게도 추천해요. 브리지를 통해 소통하고 배려하는 법을 배울 수 있어요. 도전 정신도요. 브리지에는 130억 개의 경우의 수가 있어요. 룰이 있지만 언제나 룰이 정답은 아니에요. 승부를 걸어야 할 때도 있죠.”
오랜 시간 브리지와 한시도 떨어진 적 없다는 임현 씨는 당분간 휴식을 취할 예정이다. 미국에 건너가 든든한 지원군인 딸과 함께 ‘방학’을 즐기려 한다. 브리지 금단현상이 걱정되지만 잠시 머리 비우는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방학 뒤엔 다시 브리지와 함께할 생각이다. 언젠가는 최고령 선수가 아닌 성적 우수 선수로 다시 대중 앞에 서고 싶다는 꿈도 가지고 있다. 맞은편 파트너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라면 더할 나위 없다. “시간이 지나니 보이는 것 같아요. 엄마에게 열중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 아이들에게도 좋았다는 것을요. 언젠가 아이들 짐을 정리하는데 신문 스크립트부터 상장까지 다 모아뒀더라고요. 자랑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을 그때 느꼈어요. 이제 브리지를 더 즐기고 싶어요. 지금도 브리지 매거진을 보고 있는데요. 얼마 전 104세 할아버지가 나오더라고요. 그분처럼 팔팔하게 브리지를 하고 싶어요. 손자가 열아홉 살인데, 함께 페어도 하고 싶어요. 농담 아니에요. 진짜로요!”
오늘날 범위와 쓰임새가 확산되고 있는 존재, ‘셀러브리티’는 과연 누구인가? 그들은 어떻게 해서 태어나고 그 위치에 오를 수 있었는가? 위상을 계속 유지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러한 고민에 응답하는 책이 나왔다. 김정섭 성신여자대학교 문화산업예술대학원 문화산업예술학과 교수의 신간 ‘셀럽시대’이다.
‘셀럽시대’는 문화예술과 스포츠 영역뿐만 아니라 경제와 사회, 심지어 정치 영역에까지 ‘셀럽’의 존재감과 중요성이 나날이 커지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셀러브리티와 명성 연구의 이정표가 될 방대한 종합 학술서이다.
바야흐로 누구나 ‘명사’가 될 수 있는 시대다. 유튜브, 페이스북, 트위터, 마이스페이스, 인스타그램, 틱톡, 릴스와 같은 개인화된 소셜미디어를 통해 기성 언론, 홍보 대행사, 홍보 담당자를 거치지 않고도 직접 자신을 소구하거나 홍보해 유명해질 수 있는 편리한 시대가 도래했다.
이런 변화로 인해 명사와 명성에 관한 연구는 사회, 심리, 문화, 정치, 경제를 아우르는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구축될 필요가 있다. ‘셀럽시대’는 이러한 필요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며, 미디어와 SNS의 범람 속에서 길을 찾고자 하는 현대인을 위한 ‘명사학’ 및 ‘명성학’을 집대성하고 있다.
김정섭 교수는 책의 집필을 위해 3년간에 걸쳐 명성론과 명사론의 학습과 관리 전략 마련에 필수적인 다양한 이론과 연구 결과물을 분석했다. 특히 이 책은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동서양 명사들의 명성 관련 자기 성찰과 발언들을 풍부하게 수록하고 있으며, 다양한 셀럽과 전문가들을 심층 조사·분석하고, 필요한 경우 그들 중 가치와 위상 면에서 두각을 나타낸 일부를 직접 인터뷰하여 생생한 목소리를 전달하려 했다.
심층 분석(‘인터뷰’와 ‘포커스’ 코너)의 ‘포커스’ 대상에는 방탄소년단, 이성민 배우, 김연아 전 선수, 인터뷰 대상에는 정세균 전 국회의장,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박지원 전 국정원장, 김세연 전 의원, 철학자 강신주, 시인 나태주, 차석용 LG생활건강 전 부회장, 배우 양미경, 가수 고(故) 구하라, 최나연 프로 등 각 분야의 명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명사들의 언명(言明)에는 각자 인생의 금자탑을 쌓는 과정에서 겪은 인생의 영욕과 부침, 그리고 숨겨진 달콤쌉쌀한 사연과 깨달음이 오롯이 배어 있다.
또한 책에는 국내에서 엔터테인먼트가 학문의 영역에서 미처 논의되지 못하던 시절 케이컬처와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학문화에 시동을 걸어 선구적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하는 김정섭 교수의 평소 고민이 집약되어 있다. 김 교수가 오랜 세월 엔터테인먼트 영역의 하위 범주로 집중적으로 연구해 온 스타 연구의 확장판이자 종착지라는 의미를 갖는 이 책은 셀럽을 비롯한 다양한 위치에 있는 독자들이 더 깊고 더 실천적인 성찰과 수양을 하기 위해 매일 들여다볼 만한 ‘거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제1부 이론과 데이터 통찰’과 ‘제2부 수양과 실천 컨설팅’으로 구성돼 있다. 먼저 제1부는 학술적 통찰에 초점을 두고 명사와 명성에 대한 동서양 학자들의 다양한 이론과 데이터, 각종 연구 결과물의 세계를 깊이 분석하고 탐구해 제시했다. 제2부에서는 명사라면 어떻게 전략을 수립해 수양하고 실천할 것인지 그 기법과 전략적 지혜를 제공하는 데 초점을 뒀다.
김정섭 교수는 K-컬처, 아티스트, 스타 연구에 집중해 왔다. 아울러 ‘경향신문’ 기자, 성신여자대학교 방송영상저널리즘스쿨 원장, 문화부·인사혁신처·환경부·고용노동부 정책 자문·평가위원, 대통령 연설 자문위원, 한국거래소 상장심사위원, ‘2022 한국케이블TV방송대상’ 심사위원장, KTV 방송자문위원, 한국엔터테인먼트산업학회 이사 등을 지냈다.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 윤영미(60). 그녀의 제주도 집 이름은 ‘무모한 집’이다. 직접 작명했다는 윤영미는 “제 인생을 돌이켜보니 저는 굉장히 무모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무모하다’는 꼭 부정적인 말은 아니다. 누군가의 무모한 도전과 열정이 그를 성공으로 이끌기도 한다.
윤영미 역시 무모한 성격 덕에 아나운서가 됐고, 더 나아가 ‘여성 최초’라는 이름 아래 여러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윤영미의 무모하지만 아름다운 도전은 60대에 접어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윤영미에게 아나운서는 오랜 꿈이었다. 초등학생 때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우연히 방송반 아나운서를 맡은 그녀는 진행의 매력에 푹 빠졌고, 아나운서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예 아나운서 명찰을 달고 다니던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윤영미 아나운서’라고 불렀다.
윤영미는 반드시 아나운서가 되어야만 했다. 목표를 정한 그녀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었다. 방법이 없다면 찾아서 만들면 되는 것이다. 윤영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청량리역 역장을 찾아가 “왜 여자는 방송을 안 하냐”고 물으며 방송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에 한 달여 동안 안내 방송을 한 그녀는 ‘최초의 지하철 방송 여자 아나운서’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윤영미는 대학 졸업 후 춘천MBC 사장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당시 춘천MBC에는 공채 제도가 없었는데, 아나운서 시험을 볼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이런 패기 덕에 윤영미는 1985년 춘천MBC 아나운서가 되면서 꿈을 이뤘다. 이어 그녀는 1991년 SBS 개국 당시 경력직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SBS 입사 후에도 ‘최초의 여성 프로야구 캐스터’, ‘최초의 아나테이너’(아나운서+엔터테이너)라는 수식어를 갖게 됐다.
“제가 워낙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는데 방법을 알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요. 저는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 걸 직접 해보고, 뭐라도 시도해보려는 편이에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이기도 했고요. 저희 어머니도 늘 ‘안 되면 끝까지 해봐라. 분명히 길이 보인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들어라’는 얘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그런 말들이 많은 힘이 된 것 같아요.”
이런 아나운서 처음이라고?
춘천을 벗어나 SBS라는 큰물로 옮겨가니 고충이 따랐다. 윤영미는 “SBS에 들어가서 한 3년 동안은 TV 방송을 못 했다. 제 자리가 없었던 거다”라면서 “당시 아나운서 중에 순위를 매기자면 저는 거의 꼴찌였다”라고 말했다. 쟁쟁한 아나운서들 사이에서 위기의식을 크게 느낀 윤영미. 그녀의 성격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윤영미가 찾은 돌파구는 ‘야구’였다. 당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여자 캐스터가 없던 시절이었다. 윤영미는 자신이 길을 개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야구를 좋아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야구의 ‘야’자도 몰랐기에 그녀는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당시에는 야구에 미쳐 살았던 것 같아요. 매일 근무 끝나면 야구장에 가서 야구를 봤어요. 당시에는 신문밖에 없으니까 스포츠신문을 탐독하고, 야구 중계를 켜놓고 따라 하면서 중계 연습을 했죠. 1년 동안 고시 공부하듯 공부했더니 야구가 조금씩 보이더라고요.”
당시 아나운서 국장이었던 이계진은 윤영미의 노력을 가상하게 여겨 캐스터 오디션 기회를 줬다. 윤영미는 당당히 합격하며 마침내 ‘여성 최초 야구 캐스터’가 됐다. 그렇게 그녀는 1994년부터 2000년까지 야구 캐스터로 활약하며 이름도 널리 알렸다. 지금도 그녀는 1994년 4월 7일 광주 첫 중계부터 한국시리즈 중계 등 영광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이후 2000년대 윤영미는 또 한 번 주목받았다. 추석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녀는 신신애의 ‘세상은 요지경’ 무대를 선보였다. 아나운서라는 고정관념을 깬 혼신의 무대는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이후 윤영미는 예능 프로그램의 단골손님이 됐다. 신신애와 이박사 성대모사는 물론 시원한 입담으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최초의 아나테이너 탄생이었다.
“당시 ‘엽기 아나운서’라고 주목받았는데, 요즘 같았으면 짤이 엄청 돌아다녔을 거예요.(웃음) 그런데 사실 아나운서실에서는 품위가 떨어진다면서 별로 안 좋아했어요. 저는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도, 인지도가 높은 아나운서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미지 실추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고, 이왕 할 거면 어설프게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즐겼을 뿐이에요. 시청자분들도 처음에는 제 모습을 낯설게 느끼다가 아나운서도 저렇게 할 수 있구나라고 받아들이신 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때 아나테이너라는 말이 처음 나온 거죠.”
윤영미는 50대 진입을 앞두고 또 한 번의 도전을 했다. 2010년 12월 SBS를 퇴사하고 프리랜서를 선언한 것. 그 이유에 대해 그녀는 “방송국에서는 50세가 되면 방송 진행보다 교육 등 다른 것을 하기를 원한다. 활동에 제약이 생긴다는 것이다. 저는 필드에 계속 있기를 원했다”고 설명했다. 여전히 아나운서로 빛나는 윤영미. 그녀가 생각하는 아나운서로서 자신의 강점은 무엇일까.
“저는 특별히 비주얼적으로 뛰어난 것도, 대단한 특기를 가진 것도 아니에요. 제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건 성실성밖에 없는 것 같아요. 누구나 다 성실하겠지만 저는 굉장히 프로의식이 강해서 평생 지각, 결석을 해본 적이 없어요. 천재지변이 있을 때는 아침 방송에 늦을까봐 전날 출근해 책상에서 잔 적도 있고요. 항상 미리 가서 준비하니까 같이 일하는 사람들한테 믿음을 준 것 같아요.”
제주도, 그리고 가족
윤영미는 프리랜서가 된 후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종편 채널은 물론 홈쇼핑 채널에도 출연하고, 강연도 하고, 책도 쓴다. 연기에 대한 열정은 늘 가슴에 품고 있다. 현재 그녀는 제주도를 오가면서 살고 있다. 책을 쓰기 위해 제주도를 찾았다가 제주도의 매력에 이끌려 정착하게 됐다.
제주도 살이를 한 지 벌써 3년째. 윤영미는 올해 종달리로 이사했다. 그 집이 바로 ‘무모한 집’이다. 그녀는 유튜브 채널 ‘윤영미의 무모한 집’도 운영한다. 이사를 하고 수리·인테리어 과정을 거쳐 집이 재탄생하는 전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제주도의 전통 양식을 살리면서 모던함을 가미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이다. 돌 부엌과 돌 인덕션, 찻장 등 윤영미의 감각이 녹아들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저는 방송이 있기 때문에 서울을 왔다 갔다 해요. 그래도 한 달에 반은 제주도에서 사는 것 같아요. 남편은 제주도에 계속 있고요. 제주도 집에 있다 보면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많이 행복해요. 평생 생각만 하고 못 해봤던 일을 짧게나마 실현한 것 같아서 또 다른 꿈을 이룬 듯한 느낌이 들고 뿌듯해요.”
그런데 무모한 집은 정확히 말하면 윤영미가 산 집이 아니다. 6년 반 동안 장기 렌털한 집이다. 그러다 보니 자기 집도 아닌데 대대적인 수리를 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윤영미 역시 생각보다 많은 돈을 썼지만 후회는 없다. 그녀는 “저는 남들과 다르다. 내가 행복한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에 살던 제주도 집은 ‘체리집’이었어요. 벚꽃(체리 블러섬)이 굉장히 아름다운 집이었거든요. 이번 집은 감나무가 있어 ‘감나무집’이라고 하려 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왜 남의 집에 그렇게 억대의 돈을 투자하느냐, 무모한 짓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저도 돈이 그렇게 많이 들 줄 몰랐는데, 무모한 짓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제 인생 자체를 돌이켜보니 저는 굉장히 무모한 사람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무모한 집’이라고 이름 지었죠.”
윤영미는 자신의 무모한 삶에 관해 얘기하면서 ‘결혼’을 언급했다. 결혼 또한 무모했다는 생각이다. 그녀는 서른다섯 살에 출판사 직원이었던 황능준 씨와 결혼했다. 화려한 아나운서였던 윤영미의 선택은 다소 의외였다. 결혼 전 소개팅, 선을 많이 봤는데, 황능준 씨만큼 자신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 없었단다.
즉 사랑 하나만 보고 결혼한 것인데, 결혼 생활은 예상보다 힘들었다. 윤영미는 가장의 무게까지 짊어져야 했다. 황능준 씨가 결혼 후 3년 만에 목회자의 길을 걸으며 전업주부가 됐기 때문. 졸지에 가장이 된 그녀는 악착같이 일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윤영미는 지난해 한 방송을 통해 그동안 쌓였던 가장의 스트레스를 털어놓았다. 늘 밝고 당당한 그녀의 고백은 충격적이었다. 더욱이 윤영미는 남편과 ‘졸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냐고 묻자 그녀는 “지금 남편과 거의 떨어져서 살고 있기 때문에 졸혼이나 마찬가지다. 30년 정도 같이 살았으면 많이 산 거다”라고 말했다.
“남편의 장점은 밝고 긍정적이고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점이에요. 결혼할 당시 ‘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사람만 좋으면 됐지’라고 생각했는데, 살아보니 그건 아니더라고요. 내가 너무 순진했던 것 같아요. 가장으로서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보면 결혼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윤영미가 오랜 시간을 버티면서 산 이유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들 때문이었다. 현재 20대인 두 아들은 미국에서 유학 중이다. 특히 첫째 아들은 미국 아이비리그에 편입한 바 있다.
“첫째는 경영을 전공해서 월스트리트 쪽으로 진출하고 싶어 하고, 둘째는 건축가가 되고 싶어 해요. 나중에 정말 우리 집을 지어줄지도 모르죠.(웃음) 저는 아이들이 무엇이 됐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애들을 속박하며 공부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엄마가 그렇게 하니까 오히려 애들이 알아서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아요.”
윤영미는 어느덧 60대 시니어가 됐다. 동안 소리도, 젊게 산다는 말도 많이 들었지만 정작 자신은 잘 모르겠단다. 그냥 자신의 방식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을 뿐이라고. 윤영미는 나이를 먹을수록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해야겠다고 느낀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방송과 여행을 죽을 때까지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 과정에서 무모한 도전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뛰어들 그녀다.
“앞으로 2년 동안은 우리 애들 학비를 대는 것이 목표예요. 그리고 제주도 집을 6년 반 계약했으니 잘 살아야죠. 또 욕심이 있다면 강원도나 전라남도에 새집을 얻어 제주도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살고 싶어요. 인생의 목표는 오늘을 재밌게 살고, 하고 싶은 대로 살자예요. 독자 여러분도 마음에 어떤 갈망이 있다면 앞뒤 보지 말고 무조건 행하면서 즐기며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86세대는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교를 다니며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세력을 말한다. 86세대인 그들이 학생운동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유별난 학생들이었기 때문일까. 그리고 그들은 어떤 세상을 꿈꿨을까. 198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경험을 녹여 그래픽 노블(만화책) ‘비밀 독서 동아리’를 펴낸 김현숙(58)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김현숙 작가는 1964년생이고, 1983년에 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어머니는 대학교를 굳이 가야 하냐는 입장이었고, 김 작가는 집에서 가까운 창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로 진학했다. 입학 첫날부터 김현숙 작가는 군사독재에 저항하며 학생운동이 펼쳐지는 충격적인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김 작가는 겁 많고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우연히 비밀 독서 동아리에 가입하게 되면서 민주화운동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더불어 당시 중앙정보부의 감시와 진압, 고문 등의 고초를 겪은 친구들의 모습을 옆에서 생생하게 봤다. 이 모든 이야기를 책 ‘비밀 독서 동아리’에 담았다.
김현숙 작가는 스스로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편은 아니라고 평했다. 김 작가는 그때 학생들의 외침이 현재 대한민국 민주주의로 이어졌다고 생각하며,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더 적극적으로, 더 당당하게 학생운동에 참여할 것 같다”고 말했다.
금서 읽는 비밀 독서 동아리
‘비밀 독서 동아리’의 주인공 이름도 현숙이다. 김 작가는 현숙의 캐릭터와 이야기는 실제 자신과 거의 흡사하다고 밝혔다. 책에서는 창원대학교가 ‘안전대학교’로 나온다. 당시 안전하지 않은 시대를 반영해 반어적인 의미로 ‘안전대학교’라고 했다.
1980년대의 대학교는 화약 냄새가 진동하고, “전두환은 물러나라”고 민주화운동을 벌이는 학생들과 경찰의 대치로 혼잡스러웠다. 그 속에서 현숙은 “나는 공부하러 대학교에 왔다”며 시위 동참을 원치 않았다. 김현숙 작가는 “당시 학교에서 ‘데모하면 안 되고 공부만 해라’라고 일종의 세뇌를 했다. 앞장서서 학생운동을 하면 빨갱이로 낙인찍힌다고 했다”고 회상했다.
괜히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끌려가는 것이 무서웠던 현숙은 ‘학생운동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탈춤 동아리에 가입했다. 그러나 탈춤 동아리마저 과거 양반을 풍자하던 탈춤을 추며 현 정권을 꼬집었다. 현숙은 실체를 알고 도망가려고 하지만, 독서 동아리 가입을 제안받는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현숙은 이를 수락했다.
그런데 그 동아리는 ‘금서(禁書) 동아리’였다. 금서란 국가나 종교상의 최고 권력자에 의해 출판 또는 판매가 금지된 책을 말한다. 만화 속 캐릭터들은 ‘임꺽정’, ‘전환시대의 논리’, ‘공산당 선언’, ‘영혼의 죽음’ 등의 책을 읽는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경찰에 잡혀갈 수 있었던 시대, 현숙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진실을 알고 마음이 바뀌었다. 현숙은 동아리 친구들을 통해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이 발생한 이유와 진실을 감추기 위해 언론 탄압이 자행된 사실을 알게 된다. 친구들이 왜 목숨 걸고 싸우는지도 깨달았다. 이에 각성한 현숙은 보다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여하며 친구들과 뜻을 함께했다.
“전두환 정권의 우민화 정책이라고 하죠.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려고 3S(스크린, 스포츠, 섹스) 정책을 펼쳤죠. 책을 보면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해서 깨우치고 자기한테 저항을 할 수 있잖아요. 그런 것이 싫어서 책 자체를 못 읽게 한 거죠.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북 클럽을 통해서 조금씩 눈을 떴어요. 나중에는 직접 책을 찾아서 보고, 더 나아가서 학생회 참여도 하고. 광주, 서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직접 가보고 공부도 했죠.”
‘비밀 독서 동아리’에는 중앙정보부의 눈총 아래에서도 새로운 세상을 향한 외침을 포기하지 않는 학생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나온다. 김현숙 작가는 검열을 해야만 하는 대학 신문(학보), 이유도 없이 끌려가 고문당한 학우들, 장학금 때문에 밀고자가 된 학생의 모습 모두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김현숙 작가 역시 정보부의 시선을 피하기 어려웠다. 책에 나온 대로 정보부는 김 작가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스테이크 가게로 전화를 했다. 김 작가는 실제로도 정보부의 전화를 친구의 전화인 척 받고 근처 카페에서 그를 만나는 기지를 발휘했다.
“현숙이는 화려한 말솜씨로 정보부 옥 형사를 당황케 하죠. 실제로는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어요.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정보부를 만나기 전에 고압적이고 강압적으로 나를 몰아세울 것 같아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사복을 입고 와서 그런지 의외로 평범해 보였고 질문도 조곤조곤 하시더라고요. 정보를 하나라도 더 캐보려는 느낌은 받았죠. 그런데 그분도 어쨌거나 그게 직업이고 사랑하는 가족들도 있을 텐데, 한편으로는 애처로운 생각도 들더라고요. 양면성이 있는 거죠.”
촛불집회, 미국인 남편의 출판 제의
‘비밀 독서 동아리’는 학생운동을 함께한 친구들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 촛불집회(2016년 9월~2017년 5월)에서 다시 모여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이는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니라고.
김 작가는 “촛불집회 동창회 신을 넣은 이유는 한국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려는 의도가 컸다. 1980년대에는 학생, 지식인 위주로 운동을 했지만, 그때는 모든 시민이 참여했으니까. 그 변화를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동창회는 허구지만 촛불집회는 ‘비밀 독서 동아리’와 연관성이 깊다. 촛불집회는 책이 세상 밖에 나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김현숙 작가는 부산 서면에서 촛불집회에 참여했고, 미국인 남편 라이언 씨는 한국의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에 큰 감동을 받았다. 당시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돼 ‘멘붕’에 빠져 있던 상황이었다.
“남편은 트럼프, 저는 박근혜. 그때 미국과 한국의 상황에 대해 서로 얘기를 많이 했어요. 남편이 촛불집회를 보면서 굉장히 좋은 인상을 받았어요. 국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대통령이 지도자로 아니다 싶으니까 국민의 힘으로 끌어내리는 촛불집회를 펼친 것이 놀랍고 대단하대요. 폭력적이지도 않고, 남녀노소 모두 목소리를 냈으니까요. 미국은 불평 불만은 많지만 정작 그렇게 못 해서 더 대단하게 보였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김현숙 작가는 대학생 때 학생운동을 한 이야기도 남편에게 하게 됐다. 라이언 씨는 아내의 과거를 매우 흥미 있게 들었다. 그리고 한국의 역사 자료를 찾아본 그는 자신의 아내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썼다는 사실에 존경심을 느낀 것 같다. 라이언 씨는 ‘대한민국 대단하다,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트위터에 아내의 이야기를 썼다. 이를 본 미국 출판사 아이언 서커스 코믹스에서 정식 출판 제의를 해왔다.
김현숙 작가는 학생운동은 이미 많이 나와 있는 얘기이고, 자신은 작가도 아니었기 때문에 고민이 깊었다.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그녀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영어 번역 일을 하며 평범하게 살아왔다. 그러자 남편이 “같이 써보자”면서 힘을 줬다. 자신이 느낀 것처럼 미국 사람들에게 필요한 책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나 보다.
이에 본격적인 책 작업이 진행됐다. 김현숙 작가는 오랜만에 동아리 친구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대부분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정치인이 된 이도 있다. 책에 ‘유니’로 등장하는 김경영 경남도의원이 그 주인공이다. 김 작가는 “졸업하고 공장에 위장 취업해서 노조 활동을 오래 했고, 여성운동도 하다가 현재는 의회에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는 여러 캐릭터로 파생돼 녹아 있다. 동창들은 자신이 모델이 된 것에 대해 뿌듯해했다고.
책의 스토리는 아내가 해준 이야기를 토대로 라이언 씨가 썼다. 김현숙 작가는 자문과 검토를 맡고 이야기를 보충했다. 그림은 라이언 씨가 직접 그릴 수 있었지만 한국적 색채를 살리기 위해 고형주 만화가가 맡았다. 이색적인 것은 영어 책이 먼저 쓰였고, 그 다음에 한국판이 나왔다. 한국판이 번역본이 된 셈이다.
책은 2020년 5월 18일 세상 밖에 나왔다.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 출판됐다. 미국에서는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아마존 청소년 부문 베스트셀러(Bestseller on Amazon - YA History Comics)를 차지했고, 청소년도서관협회 올해의 최우수 그래픽 노블(YALSA Great Graphic Novels 2021)로 뽑혔다. 이밖에 미국 학교 도서관 저널, 스미스소니언, 북리스트, 미국 잡지 Publishers Weekly 등에서 최우수 리뷰를 받았다.
“트럼프가 인종차별 발언으로 대통령이 됐잖아요. 미국은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국민들은 후퇴해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미국에서는 아직도 책을 검수하고, 성 평등, 인종차별 문제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저희 책이 호응을 얻은 것은 영감을 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특히 청소년 권장도서로 많이 읽힌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저항을 하고, 어떤 세상을 만들어나가는지 보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가만히 있으면 변화되는 것은 없잖아요.”
김현숙 작가와 라이언 씨는 다음 책으로 ‘노 룰스 투나잇’(No Rules Tonight)을 준비하고 있다. 1980년대 통금 제도를 다룰 예정이다. 책의 ‘투나잇’은 크리스마스로, 커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비밀 독서 동아리’의 캐릭터들과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유명 출판사 펭귄북스에서 출판되며, 2024년 크리스마스 이전에 나올 예정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중심
1980년대에는 학생운동을, 2010년대에는 촛불집회를. 86세대는 분명 민주주의의 중심에 있다. 그들은 왜 이전 세대와 구별되는 것일까. 김현숙 작가는 “이전 세대인 베이비부머(1955 ~ 1963년)는 전쟁도 겪었고 많이 힘들었다. 경제적으로 터전을 잡고 발전해야 하니 독재가 용인됐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김 작가는 자신과 같은 86세대는 민주주의를 이룬 세대라는 자부심이 있다고 짚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권위주의적인 사람, 꼰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줬다.
“같은 소용돌이에서 자랐기 때문에 저는 86세대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들이 자유를 외치고 권위주의 독재에 맞서 투쟁을 한 거잖아요. 그런데 저도 물론이겠지만 그들에게는 권위주의적인 성향이 있더라고요. 술도 마시라면 마셨고, 군사 문화에서 자랐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게 체화된 게 있는 거예요. 그런데 어린 사람들이 보기엔 ‘학생운동 했으면 다야?’, ‘리더면 다야?’ 그런 생각을 하게 되죠. 너무 자부심이 크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권력자가 될 수 있다는 거죠. 고칠 점은 고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198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변화는 젊은 세대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김현숙 작가는 “젊은 세대에게 마음을 열고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우리도 투쟁을 할 때 윗세대가 목소리를 잘 들어주기를 바랐다. 젊은 세대의 마음을 듣고 힘을 모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국내에 프로스포츠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여러 가지 전설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런 영웅담 중에서도 최고의 전설을 꼽자면 아마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두껍게 날리는 흙먼지 사이로 흑색과 적색의 유니폼을 입은 그들이 나타나면 상대 팀 선수들은 기가 죽고, 상대 팀 팬들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상대의 전의마저 상실케 했던 해태 타이거즈 군단의 맨 앞에는 1번 타자 이순철(60)이 있었다.
“당시엔 사실 잘 몰랐어요. 해태 타이거즈에게 상대 팀들이 그렇게 기가 죽었는지를요. 그 공포의 유니폼은 우리에게는 그냥 촌스럽고 덥기만 한 존재였는데.(웃음) 현역 때는 모르다가 나중에 알게 됐죠. 술자리 같은 사석에서 다른 팀 출신 동료들이 이야기하더라고요. 그 유니폼이 그렇게 무서웠다고 말이죠.”
사실 해태 타이거즈의 우승 공식은 아주 단순했다. 타자들이 상대 팀보다 앞서 점수를 내면, 투수들이 막아 승리를 지킨다. 1번 타자 이순철이 시작하면 마무리투수 선동열이 지키는 공식이다.
홈런이 귀했던 시대에 1번 타자가 10개 이상 홈런을 치고 50개 이상 도루를 밥 먹듯 하니, 상대 팀 입장에선 맞설 수도, 내보낼 수도 없는 골치 아픈 타자, 그가 이순철이었다.
“상대는 경기를 시작하면 무조건 선취점을 내려고 했죠. 선동열이 못 나오도록 해야 하니까. 그렇게 무리하다 보면 게임은 꼬이게 되죠.”
함께 흘렸던 목포의 눈물
1980년대 호남 사람들에게 해태 타이거즈는 억눌린 울분을 다소나마 해소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광주 민주화 항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이들이 겪었던 상처는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이 승수를 쌓아갈 때마다 조금씩 아물어갔다. 그래서 팬들은 관중석에 앉아 ‘목포의 눈물’을 목이 터져라 불렀다. 그런 감정은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이순철 위원은 이야기한다.
“지금과 달리 당시엔 선수들도 대부분 호남 출신이었죠. 팀 내에서 민주화 운동에 대한 말은 아끼는 편이었지만, 그 응어리나 한이 없을 수 없죠.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경기 일정부터 달랐어요. 해태 타이거즈는 한동안 5월 18일이 다가오면 전후 일주일 정도는 원정경기만 잡혔어요. 기념일에 광주 구장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요. 하지만 원정을 가도 전라도 분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계속 뜨거운 응원을 보내주셨죠.”
1980년대에만 해태 타이거즈는 5번의 시리즈 우승을 이뤘다. 전체 우승컵의 절반을 가져온 셈이다. 대체 어떤 부분이 해태 타이거즈를 그렇게 강하게 만든 것일까? 이순철 위원은 그 비결로 3가지를 꼽았다. 강한 위계질서와 헝그리 정신 그리고 선수 개개인의 능력이다.
“워낙 좋은 선수들이 많았고, 이 선수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위계질서가 있었죠. 선배들이 짓누르니까 후배들은 압박도 많이 받았지만, 지금은 추억담처럼 이야기할 수 있어요. 아마 프로야구 구단 중에서 OB(구단 출신 은퇴선수) 모임이 가장 활성화된 곳이 해태 타이거즈일 거예요. 그만큼 서로 사이가 좋아요. 또 구단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아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노릴 수밖에 없었어요. 보너스로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려면 말이죠.(웃음)”
사실 강한 위계질서는 후에 그가 해태 타이거즈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타이거즈의 상징과도 같았던 김응용 감독에 대한 항명 사건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이후 비슷한 사건을 겪는다. 43세 젊은 감독으로 LG 트윈스에 부임하자마자 팀의 고참 선수였던 이상훈과 갈등을 빚었고, 에이스인 그를 당시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를 보내게 된 사건이다. 한 번은 선수 입장에서, 한 번은 감독 입장에서 항명 사건과 맞닥뜨린 셈이다. 이 위원은 “철이 없었다”고 정리했다.
“철없던 짓이죠. 김응용 감독과의 갈등은 제가 철이 없었어요. 또 이상훈 선수와의 갈등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선배로서 더 아우를 수 있었는데 그러질 못했죠. 이상훈 선수하고는 나중에 한잔하면서 갈등을 풀었어요. 직접 소통했어야 하는데, 가운데 누군가를 거쳐 말이 전해지다 보니 생긴 오해였더라고요. 김 감독님하고도 마찬가지예요. 얼마 전 감독님 팔순 잔치도 제가 주도해서 준비했을 만큼 지금은 모두와 잘 지내고 있어요.”
숙명의 라이벌과 한 팀으로
사실 이순철 위원이 처음 시작한 운동은 야구가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 축구부에 들어가 선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축구부가 해체되면서 다른 인생이 펼쳐졌다.
“축구부 다음으로 육상부에 들어갔죠. 그러다 핸드볼을 잠깐 하고 나서 야구로 전향하게 됐어요. 그 과정에서 부모님의 응원은 받지 못했어요. 당시만 해도 운동선수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은 시절은 아니었으니까요. 공부하기를 원하셨지만, 먹고살기 바쁘니까 적극적으로 막진 않으셨죠. 저도 공부보다는 운동이 좋았으니까 계속 열심히 했고요. 운동부에서도 쉽진 않았어요. 당시 운동부는 지금 기준으론 범죄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체벌이 심했으니까요. 운동을 말리는 부모님에게 체벌 흔적을 들키지 않으려고 감추기도 하고, 상처 때문에 엎드려 자야 하는 날도 많았어요. 자식이 학교에서 맞고 다닌다면 누가 운동을 시키려 하겠어요.”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진가는 빛났다. 광주상고의 에이스로 발전해 광주일고 선동열과 맞서는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관계는 대학 때까지 이어져 연세대학교 81학번으로 같은 학번의 고려대학교 선동열과 계속 맞서야 했다.
대학 졸업 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을 때 세간의 관심은 1985년 신인왕을 어느 팀이 배출하느냐가 아니었다. 해태 타이거즈의 누가 가져가느냐였다. 결국 신인왕은 0.304의 타율과 12홈런, 31도루를 기록한 이순철의 것이었다. 이 기록은 지난 시즌 기아 타이거즈에 입단한 이의리 선수가 신인상을 받을 때까지 36년간 이어졌다.
10시간의 비행이 만든 프러포즈
1989년 어느 날, 이미 팀의 주전으로 자리 잡은 이순철은 스위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12시간이 넘는 비행이었지만 생경했던 기내식도 먹는 둥 마는 둥이었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허락할까?’
야구와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스위스로 향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연인 이미경 씨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위원은 부인 이미경 씨를 연세대학교 학창 시절 처음 만났다. 그가 대학 시절 이미경 씨를 보고 첫눈에 반해 결혼까지 골인한 것은 야구계에서 유명한 이야기다.
“아내 키가 170cm가 넘어요. 제가 좀 작은 편이라 키 큰 여자를 동경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미인인 아내를 보는 순간 한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만나서 계속 구애를 했죠. 그리고 연애를 10년이나 했어요. 아내가 승마 선수로 스위스에 유학을 가 있을 때 프러포즈를 했어요. 그전까지는 전화카드를 잔뜩 쌓아놓고 공중전화로 장거리 연애를 했죠. 그러다 저도 혼기가 돼서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겠더라고요. 스위스행 비행기에 올라서 어떤 말을 할지, 과연 승낙을 해줄지 이런저런 생각에 긴장이 돼서 기내식도 제대로 소화가 안 될 정도였어요. 걱정과 달리 순순히 허락을 해줘서 기뻤죠. 그리고 다음 해 바로 결혼했어요. 저 때문에 승마를 그만두게 되었다고 아직도 가끔 불평을 해요.”
‘모두까기’의 야구 사랑
야구 골수팬들에게 이순철이란 이름 석 자는 다양한 모습으로 기억된다. 엄청난 기록의 선수였지만 말년의 기복 있던 모습이나 감독으로서는 좋지 않았던 성적, 방송이라도 입바른 소리는 뱉고 말아야 하는 성격 탓에 ‘모두까기’란 별명까지 얻은 해설위원으로서의 모습. 그러나 불만을 가진 팬들도 인정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야구에 대한 그의 사랑이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나서, 그는 단 1년도 야구계를 떠나본 적이 없다. 프로팀 코치나 감독 혹은 대표팀의 코치를 맡기도 했고, 해설위원으로도 활동한다. 이런 모습을 팬들이 인정해주는 것이다.
“제 인생에는 야구밖에 없어요. 인생의 다른 기술이 없어요. 다른 것을 할 용기도 없고,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니까 야구에 몰두하는 것뿐이죠. 어릴 때부터 야구에 매달려 살았고, 야구를 하는 것이 가장 즐거워요. 편하고요. 그래서 인생의 과정이 자연스럽게 야구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요.”
실제로 그는 인터뷰를 위해 사진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어색해하다가 소품으로 준비한 배트를 손에 쥐자 표정이 달라졌다. 타격 자세를 취하고는 “이제야 좀 편해진다”며 웃었다.
이제 그에게는 선수 혹은 감독이라는 호칭보다 해설위원이라는 직함이 더 편안하게 들릴 정도가 됐다. 2007년 MBC를 시작으로 활동을 해오다 지금은 SBS 스포츠에서 해설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사실 선수 출신 해설위원은 대표적인 ‘파리목숨’으로 불리는 자리다. 방송사에서는 매년 스타 출신의 선수가 은퇴하면 세간의 화제를 모으기 위해 해설위원으로 스카우트하지만, 시청자들 반응이 좋지 않거나 약간의 구설이 발생하면 바로 계약을 해지한다. 실제로 우리가 알 만한 레전드들이 2~3년을 채우지 못하고 방송을 떠난 사례가 부지기수다. 그 가운데 방송국을 옮겨가며 장수하고 있는 이순철 해설위원은 이제 모두가 인정하는 ‘스타 해설가’인 셈이다.
“어릴 때부터 종이신문을 읽는 습관을 들였어요. 특히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신문 사설을 많이 읽었죠. 당시 신문들마다 한자 사용이 많았던 탓에 웬만한 한자는 읽을 수 있게 되었을 정도니까요. 프로선수가 되고 나서도 이 습관은 바꾸지 않았어요. 팀 매니저들에게 중앙 일간지는 꼭 로커 룸에 넣어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니까요. 덕분에 해설위원이 되고 나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지식도 많이 쌓고요.”
그가 해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MBC의 제안이 있기 훨씬 전부터였다고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야구 해설의 전설 하일성 선배에게 사석에서 해설에 대한 이야기를 묻기도 했다고. 그래서 첫 제안을 받았을 때 고민 없이 “하겠다”고 답할 수 있었다. 물론 해설은 평생 운동만 한 선수 출신에게는 쉬운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이 위원에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많은 공부가 필요하죠. 제가 처음 해설을 시작할 때는 일본 용어가 많이 사용됐어요. 시합, 계투, 데드볼 같은 용어들이요. 일본도 미국에서 야구를 받아들이면서 본인들 쓰기 편하게 바꾼 것이 많아요. 야구는 미국에서 시작된 스포츠니까 외래어를 쓰려면 미국식 용어를 쓰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고, 관련 자료들을 보면서 하나씩 고쳐나갔죠. 많이 변화시킨 것에 대한 자부심도 있어요.”
이 위원의 중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단짝 정우영 캐스터를 빼놓을 수 없다. MBC 스포츠플러스에서 함께 중계하다 SBS 스포츠에서 재회한 특별한 케이스. 이 위원은 “정우영이라는 좋은 캐스터 덕분에 해설위원이 빛나는 것 같다”며, “까칠한 성격도 이해하며 잘 받아주고, 야구에 대해서도 해박해 좋은 방송을 만드는 데 많은 도움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순철의 것이 아닌 이성곤의 야구
그가 야구에 대한 사랑을 쉽게 놓을 수 없게 하는 또 하나의 존재가 있다. 바로 아들 이성곤 선수다. 이제는 프로 9년 차의 베테랑 선수가 된 이성곤은 지난해 삼성 라이온즈에서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됐고, 현재는 주전 자리를 꿰차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 위원과 이성곤 선수는 야구계에서 많은 에피소드를 낳았다. 이성곤이 1군 첫 홈런을 기록했을 때는 ‘비번’의 여유를 즐기다 방송국으로 호출당해 하이라이트 프로그램 생방송에 출연해야 했다. 당시 선수 이성곤에게 늘 엄격한 해설을 날리던 이 위원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 야구팬들 사이에서 오래 회자됐다.
그는 아들 이성곤 선수가 “야구 실력에 비해 방송 출연이 잦다”며 투덜거리지만 동반 출연도 꽤 즐기는 모습이다. 최근에는 이순철 해설위원의 개인 유튜브 채널 ‘순Fe’(순페이)에 이성곤이 깜짝 출연하기도 했다.
“우리는 야구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는 부자 사이는 아니에요. 본인이 물어보면 그때 대답해주는 정도죠.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가 야구에 관해 깊숙하게 관여했으면 그것은 이순철의 야구지 나의 야구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그만큼 야구를 사랑하고 진지하게 대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바라보다 정 답답할 때만 문자 정도 주고받아요. 아직 대전에 마련한 집도 못 가봤는데, 올 시즌 대전에 내려가게 되면 어떻게 사는지 들러보려고요.(웃음)”
왕년 전성기에 누렸던 최고의 영웅담이나 에피소드. 류춘수 건축가의 과거 그때의 시간을 되돌려본 그 시절, 우리 때는 이것까지도 해봤어. 그랬어, 그랬지!! 공감을 불러일으킬 추억 속 이야기를 꺼내보는 마당입니다.
세상에는 ‘운이 좋았다’고 할 만한 일과 ‘운명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다.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 류춘수의 일생은 후자에 속한다. 언뜻 보면 그는 기가 막히게 운이 좋은 사람 같지만 그의 인생과 건축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적 문고리가 설계되어 있다.
2002년 서울월드컵경기장과 88서울올림픽 체조경기장을 비롯해 리츠칼튼호텔, 한계령휴게소, 박경리문학관과 사저, 동숭동 샘터사 등 그가 설계한 건축물은 국가의 위상과 국민의 일상에 맞닿아 있다. 한양대 건축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을 졸업한 국내파 건축가로서 일본, 중국, 말레이시아, 이란 등지에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세우고, 영국, 미국, 중국, 싱가포르 등에서 강연한 그는 젊은 건축인이 뽑은 대한민국의 가장 바람직한 건축가에 두 차례나 선정되는 등 정상을 지키고 있다.
건축가의 꿈과 불교의 운명적 만남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던 그는 1962년 대구고등학교 2학년 때 경북학생사생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안동에서 막 전학 온 ‘촌놈’이 대구, 경북의 미대 지망생들을 휘저은 ‘사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남고등학교 출신 이두호가 2등을 했으니. 이두호가 누군가? ‘임꺽정’을 비롯해 김주영의 장편소설 ‘객주’ 전권을 만화화하고, 머털도사를 탄생시킨 한국 만화계의 국보급 작가가 아닌가. 더 재밌는 것은 당시 그가 하숙하던 주인집 아주머니의 친정에서 어린이 잡지를 발간하고 있었는데 그때 고교 2학년생 이두호가 거기서 그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대상을 받았다고 하니까 ‘이두호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리는 학생이 있었다니, 그것도 우리 집 하숙생 중에!’ 하면서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셨죠. 하하.”
그림을 잘 그릴 뿐 아니라 기하, 수학 등에도 소질이 있었던 그는 진로 적성검사를 할 때마다 뚜렷하게 건축과로 나왔다. 그의 꿈은 확고했지만 봉화 면서기였던 선친은 1남 2녀의 외동아들이 건축가가 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셨다. 건축가에 대한 변변한 인식조차 없던 시절, 상대 나와 은행원이 되는 것을 최고로 여기던 때였으니. 아버지를 설득해 정작 허락은 받았지만 대학 입시에서 연거푸 두 차례나 낙방하고 만다.
“초라한 삼수생의 몰골로 고향 봉화 문수산 첩첩산중의 작은 암자인 축서사로 들어갔지요. 마음 다잡고 공부하겠다고 2년간 절에 있었던 게 건축가로서 의미 있는 첫 단추를 꿰는 인연이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예민한 성정의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옮겨가는 변곡점에서 불교는 제 인생과 제 건축 밑그림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졸업 작품부터 동기들과는 차별적이었다. 한국 불교의 중흥과 중생제도의 구심점을 세운다는 포부 아래, ‘대한불교조계종 대본산 계획안’을 설계했던 것이다. 불교와의 첫 인연의 고리를 꿴 순간이었다. 하지만 졸업 후 생활은 막막했다. “제 월급이 1만 원이었어요. 은행원은 3만 원을 받던 시절이었죠. 쪼들리며 살던 때 대한불교조계종에서 불교 미술 공모전을 하길래 졸업 작품을 응모해 1등을 했습니다. 상금이 5만 원이었으니 무려 제 한 달 급여의 다섯 배였죠. 덕수궁에서 전시도 했고요. 그런데 며칠 후 조계종 총무부장이 연락을 해왔어요. 부산 대각사의 10층짜리 불교회관 설계를 맡아달라고. ‘스님 돌았소?’란 말이 툭 튀어나올 뻔했죠. 그때까지 집 한 채도 설계해본 적 없는 초짜한테 할 제안인가요, 어디? 근데 스님 말씀이, 무조건 불자가 설계를 맡아줘야 한다는 거예요. 불교와의 인연이 또 들먹여진 거죠. 더 놀란 건 그때 부산까지 동행해준 스님이 축서사에서 동고동락했던 분이었어요. 스님도 ‘절에 있었던 그 춘수 학생이 설계를 맞게 된 거냐?’며 깜짝 놀라셨죠. 그때가 경부고속도로 개통 일주일째 된 때였어요. 멋들어진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 30만 원을 선금으로 받고 총비용 60만 원에 달하는 설계를 계약서도 없이 구두로 맡게 되었습니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일이었지요. 부처님의 가피라고 여겨집니다.”
당시 그가 살던 서울 휘경동 집값이 90만 원이었다. 그때 받은 60만 원으로 부친 생전에 진 본인의 학자금 빚을 갚고, 동생 대학 등록금까지 댔으니, 홀어머니를 모신 장남으로서 가장 노릇을 톡톡히 할 수 있었다. 그는 대학 1학년 때부터 투시도를 그리는 아르바이트생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화여대 조감도를 그리는 데 합류하여 직장 월급의 절반에 해당하는 월 5000원을 받는 ‘꿀 알바생’이었던 것. 졸업 후 3년 만에 집을 샀을 정도로 일이 넘치게 들어온 그때가 일생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벌었던 때였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동료들은 설계 사무실보다 봉급이 서너 배 많은 현대건설, 주택공사 등으로 이직을 했죠. 제게도 스카우트 제안이 쇄도했지만 배를 곯아도 건축 설계를 한다는 결심이 흔들린 적이 없었어요. 만약 그 결심을 지키지 못했다면 지금의 류춘수는 없었겠죠.”
김수근의 ‘공간’에서 류춘수의 ‘이공’(異空)으로
20세기 한국 대표 건축가이자 건축계의 우상인 김수근의 ‘공간’에 새 둥지를 튼 것은 그에게 또 다른 변곡점이 되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설계를 하는 공간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한국에서 건축을 한다고 할 수 있겠냐’는 자문이 강하게 일었다. 무작정 공간을 찾아가 함께 일하고 싶다고 하자 김 대표 왈, “자네가 지금 일하는 곳은 내 친구 회산데 의리상 그럴 수는 없지.” 그 길로 다니던 회사에 무작정 사표를 내고 다시 찾아갔다. 이제 입사 자격이 갖춰졌다고 하자, ‘그럼 내일부터 출근해’ 이러시는 거예요. 제가 또 이랬죠. ‘사표를 냈으니 좀 쉬었다가 일주일 후부터 나오겠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야, 이놈 봐라’였지요. 하하.”
1974년 9월에 입사, 김 건축가가 55세에 간암으로 타계한 1986년까지 만 12년을 함께 일하며 88서울올림픽공원과 체조경기장 등을 맡아 설계했다. 류 건축가는 돌아가신 스승을 대신해 잠시 공간의 대표직에 있다가 ‘이공’(異空)으로 독립한다. ‘이공’은 단순히 ‘다르다’(different)는 의미가 아니라 ‘다름 그 너머의 보다 나은’이라는 의미인 ‘비욘드’(beyond) 스페이스를 뜻한다. 의미심장한 이름의 ‘이공’은 그의 나이 41세였던 1986년에 탄생해 75세인 지금까지 35년째 대한민국 대표 종합건축사 사무소로 건재하고 있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저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임에 틀림없습니다. 서울시로부터 VIP석에 제 이름을 새긴 ‘건축가의 의자’를 지정받기도 했으니까요. 전례가 없는 파격 대우지요.” 서울월드컵경기장은 ‘거인 골리앗을 이긴 소년 다윗’의 상징으로 회자되는 건축업계의 전설이다. 골리앗은 현대건설을, 다윗은 류춘수를 뜻한다.
1998년 IMF 경제위기 여파로 월드컵경기장은 애초 건설 계획이 없었다. 잠실 올림픽경기장을 고쳐서 사용하기로 하고 개조 작품 공모전을 실시했는데 류 건축가가 당선된다. 잠실 올림픽경기장은 김수근의 작품이니 제자인 그가 월드컵경기장으로 변모시키는 것은 의미 있는 일. 그런데 새로 짓기를 원한 정몽준 당시 축구협회 회장이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를 설득, 정부 3분의 1, 서울시 3분의 1, 축구협회 3분의 1 각출로 2000억 원 예산의 공사가 결정됐다. 시공은 당연히 현대건설 측이 맡는 조건이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더니 내가 꼭 그 꼴이 됐지요. 개조안이 무산되었으니. 게다가 시공회사가 설계회사를 지정하는 턴키 방식으로 공사가 확정됐지요. ‘턴키’란 설계와 시공을 패키지로 하여, 완공 후 발주자는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면 된다’(Turn Key)는 의미의 건축업계 용어죠. 당시 현대건설은 건축계의 왕이었어요. 지금보다 100배는 센 기업이었던 무소불위의 현대건설은 ‘공간’을 설계 파트너로 지명했어요. 공간에 있을 때부터 원주체육관, 부산야구장 등 한국의 스포츠 건축물은 99% 제가 설계했어요. 말레이시아체육관 등 해외 스포츠 시설 설계 경험도 있었고요. 그럼에도 제 존재는 깡그리 무시됐죠.”
턴키 방식은 설계 실력으로 하는 게 아니라 로비 실력으로 하는 거라는 말이 건축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던 때였다. 현대, 대우, 삼성, 엘지, 대림, 포스코 등 한국 6대 기업이 컨소시엄을 짰지만 현대의 들러리에 불과한 요식적 몸짓일 뿐이었다.
“삼성엔지니어링에서 저를 찾아왔어요. 자기들과 함께 응모해보자고. 삼성 계열사라 하지만 공장이나 지어봤지 일반 건축은 해본 경험이 없는 곳이었죠. 맏형인 삼성이 이미 현대와 조인트를 한 상황인데 조무래기가 어디 감히 설치냐며 같잖다는 반응이 들렸어요. 같잖기는 저도 마찬가지였죠. ‘일반 건설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번 기회에 공부 좀 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류 건축사님 설계를 부탁합니다’ 이러는 거예요. 전 이미 다 포기하고 머리 식히러 미국에 나가려던 차였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되더라고요. 1만분의 1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해보고 싶었어요. IMF 사태로 제가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렸던 이유도 한몫했지요.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돌팔매를 하기 위해 주머니 속 돌을 만지작거리는 순간이었죠.”
요식적이나마 실시한 현상공모 기간은 세 달, 그로서는 목숨을 건 3개월이었지만 같은 기간 현대건설은 대학의 건축과 교수 등 심사위원 내정자들을 해외 유람까지 시키며 로비를 펼쳤다. 이런 상황에서 그도 단 한 명의 심사위원이라도 안면을 터야 했지만 기회는 어이없이 빗나갔다. 하필 박세직 월드컵조직위원장과 신라호텔에서 조찬 모임이 잡힌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이미 수유리 아카데미 합숙에 들어가버렸으니 배는 이미 떠났다. 다 내려놓는 마음으로 박 위원장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설계자가 자기 도면을 설명할 기회를 달라고. 국제적 관례가 그렇다는 근거를 내세워. 실낱같은 희망으로 그 말을 하고는 한강을 건너는데 서울시에서 전화가 왔다. 수유리에서 설명회가 ‘혹시’ 있을 수도 있으니 준비하라는 전화였다. 그 ‘혹시’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역시’로 드러났다.
“제 순서가 먼저였어요. 발표 30분, 질의응답 30분, 한 시간이 주어졌죠. 어차피 두 팀밖에 없었으니 넉넉한 시간이었어요. 100% 현대건설 측으로 낙착된 일이니 들러리들은 이미 다 떨어져 나갔고 저하고 현대만 남았던 거죠. 그때 ‘류춘수가 저리도 해박하게 강의를 잘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는 수군거림이 들리더군요. 반면 현대 측 설계사는 엉망이었어요. 발표 준비를 했을 리가 없잖아요. 어차피 떼어놓은 당상이었으니까요. 설계자 둘 간의 실력 차가 너무 나니 안 뽑아줄 수가 없었던 거죠. 27명 심사위원 중 심사위원장, 부위원장을 제외한 25명이 저를 지지했습니다. 만장일치였다고 해야겠죠.”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았던 것이니, 신문 등 매체는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고 대서특필했다. 소감을 묻자 “골리앗, 그들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라는 말로 류 건축가는 마지막 한 방을 제대로 먹였다. 피 말리는 운명의 3개월, 그의 꿈은 월드컵경기장으로 실현되었고 현대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현대건설 측에서는 지금도 ‘류춘수’라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라고. 턴키 방식에 의해 시공은 삼성물산에게 돌아갔다.
서울월드컵경기장 설계의 인연으로 영국의 필립 에든버러 공이 2020년 5월 그를 버킹엄 궁에 초청한 일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방문 날짜를 세 개 주면서 그 가운데 가능한 날을 고르라고 했던 것. “정말 감동했어요. 박원순 시장과 비교되었기 때문이지요. 박 전 시장이 70여 명의 건축가를 초청한 일이 있는데 일방적으로 날을 잡더라고요. 그러더니 하루 전날 취소 통보가 옵디다. 일주일 후로 연기하겠다고. 그러다가 그마저도 시간이 안 된다며 무기 연기를 하더라고요. 필립 공의 겸손하고 진정 어린 마음과는 대조적인 처사여서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물론 서울월드컵경기장에 내 자리를 만들어준 것은 박 전 시장의 고마운 배려지요.”
박경리문학관, 한계령휴게소, 리츠칼튼호텔, 봉화 우리 집
“원주의 박경리문학관과 사저도 제가 설계해드렸는데, 작가님께 어떻게 짓길 원하시냐고 묻자, ‘지가 뭘 알아야지요. 선생님이 알아서 해주세요’ 이러시는 거예요. 모든 건축주는 자기가 더 잘 아는 줄 알지요. 그런데 천하의 박경리 선생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비범함이 느껴졌습니다. 문학을 안 했으면 건축을 했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림도 잘 그리셨지요.”
한편 1979년, 33세에 설계한 한계령휴게소는 40년이 지난 최근에 프랑스 파리에 도면이 전시되어 극찬을 받았다. 한계령휴게소는 가파른 산비탈에 터를 잡아 철골과 목구조를 절묘하게 배치해 뼈대와 인테리어에 구분을 두지 않은 점이 독특하다는 평을 받는다. 또한 그가 설계한 호텔 중에 가장 큰 리츠칼튼호텔에도 범상치 않은 운명적 요소가 작용했다. 대형 설계회사의 도면으로 지하 7층까지 땅을 파고 공사가 시작된 지 2년이 지난 후 그에게 설계 의뢰가 다시 들어온 것이다. 그때도 역시 산비탈을 살리는 오르막 콘셉트였는데 유니크한 그의 설계가 뒤늦게 인정받은 것이다. 공모전 낙선작이 2년 후 당선작으로 뒤바뀌며, 진행되던 공사를 중간에 갈아엎고 류춘수 버전으로 지금의 리츠칼튼호텔을 세운 것이다.
운명의 무늬를 그려온 드라마틱한 건축 행로에서 류 건축가 스스로가 꼽는 가장 애착 가는 건축물은 무엇일까. ‘봉화 우리 집’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그를 통해 자연과 어우러진 그의 건축 정서를 또 한 번 느꼈다. 건축, 그 설계는 타인의 기쁨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직업적 노력이라고 정의하는 그는 요즘, 유튜브 ‘류춘수 space TV’를 통해 대한민국 건축 역사와 오버랩되는 류춘수의 건축사를 편안하고 진솔하게 풀어내며 참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다.
왕년 전성기에 누렸던 최고의 영웅담이나 에피소드. 이상우 한국추리작가협회 이사장의 과거 그때의 시간을 되돌려본 그 시절, 우리 때는 이것까지도 해봤어. 나도 그랬어, 그랬지!! 공감을 불러일으킬 추억 속 이야기를 꺼내보는 마당입니다.
“태어나 하고 싶은 건 다 해봤다. 여한이 없다.” 80 평생을 산 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상우(84)가 그중 한 사람이다. 한국추리작가협회 이사장, 한국증권신문 회장인 그는 우리나라 스포츠신문의 산 역사로 창간하는 것마다 족족 대박을 터뜨려 ‘스포츠신문 업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불린다. 또한 50년간 역사 및 추리소설을 무려 400권이나 내고, 지금도 일주일에 7개 매체에 기고하는 왕성한 필력의 작가다. 에두를 것 없이 범상치 않은 그의 인생 속으로 직진해보자.
신문사 사장 된 신문팔이 소년 가장
“저와 신문의 인연은 대학 2학년 때인 1958년, 영남일보 견습기자에서 시작됩니다. 1964년 대구일보 최연소 편집부장에 이어 2년 후 한국일보사로 옮겨 또다시 최연소 편집국장(31세)이 되면서 한국일보사가 발행하던 ‘일간스포츠’를 만나게 됩니다.”
이상우는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경향신문 등을 섭렵하며 사장, 회장, 창업자 등 국내 최장수 언론인으로 자리매김했다. 패션 전문 프랑스 잡지 ‘엘르’의 한국 지사 대표로,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추계예술대학의 교수로, ‘세종대왕 이도’를 비롯, 추리소설 ‘악녀 두 번 살다’로만 50만 부가 팔린 잘나가는 소설가로 승승장구했다. 한글 가로쓰기체 신문(스포츠서울이 효시), 활판을 없앤 전산화 신문(소년한국일보가 최초) 시대도 그에 의해 열렸다.
1938년 경남 산청 출신으로 6남매 중 다섯째인 그의 10대는 전쟁 후의 피폐로 얼룩졌다. 6.25전쟁 때 전사한 형에 이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단칸방에는 자리보전한 할머니와 6명의 가족들. 며칠을 꼬박 굶고 어머니와 밥을 구걸하러 다녔지만 몇 숟가락 얻지도 못하던 때였다. 부친이 살아 계실 때도 구두닦이와 신문팔이로 가족의 생계를 도와야 했다.
이 무렵의 ‘웃픈’ 에피소드가 있다. 단칸방 주인집 남자가 영남일보 윤전기 기사였는데 퇴근할 때 신문을 10부 정도 몰래 빼와서는 돈을 나눠 갖자며 그더러 팔아오라고 했다. 다 못 팔 때도 있고, 비가 와서 신문이 젖을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신문 값을 그에게 물어내게 했다. 갑질 아닌 갑질로 횡포를 부리던 그 남자를 영남일보 기자가 되고 나서 윤전실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뒤가 켕겼는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긴 후였다.
“양공주 구두를 닦을 때가 제일 좋았죠. 뾰족구두인데다 면적이 적어서 구두약도 덜 들고 팁도 후했으니까요. 신문은 제가 잘 못 팔았어요. 배급소 앞에서 제 또래 소년들이 줄을 서 있다가 신문이 나오기 무섭게 받아가지고는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야 했지요. 번화가에 먼저 도착해야 한 장이라도 더 파니까요. 근데 저는 신문 연재소설을 읽고 나서야 팔았으니 늘 꼴찌였죠. 김대중 대통령도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그가 영어 학원을 다녔는데, 당시 자칭 국보 양주동 선생이 가르쳤다. 학원비가 있을 턱이 있나. 등록증을 재주껏 위조했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인식처럼 배움 도둑질도 같은 맥락으로 넘어가던 시절이었다. 양주동 선생은 훗날 한국일보 초청 좌담회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구두통에 교복을 쑤셔 넣고 다녔다. “아버지가 학교를 못 다니게 해서 중학생이 된 걸 숨겨야 했지요. 임종 머리맡에서 처음 말씀드리자 ‘하는 수 없는 일이지’ 하며 체념하셨어요. 그때부터 떳떳이 교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지식인으로 좌우익의 사상을 넘나들다 결국 목숨을 잃게 된 그의 형으로 인해 ‘머리에 먹물이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선친의 한 맺힌 신조였다. 실의에 빠져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더 이상 그의 앞길에 장애가 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가난이 발목을 잡았다.
“고등학교 원서 접수 마감일이었어요. 진학을 포기한 제게 교장 선생님이 무조건 원서를 넣으라고 채근하셨지요. 마감 1시간을 남겨놓고 어디 갈 데가 있어야죠. 길 건너에 대구상고가 있어서 거기다 넣었죠. 뜬금없는 상업고등학교 이력이 그래서 생긴 겁니다. 대학은 영남대 전신인 청구대를 나왔고, 전공은 국문학입니다. 당시 대학신문사 기자를 하면서 생계와 학비를 동시에 해결했지요.”
필화 사건 옥살이, 추리작가 변신 기회로
소설가 이상우는 1961년 대구일보에 ‘신 임꺽정 전’ 연재를 시작으로 지속적인 문단 활동을 이어오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0매를 쓴 적도 있을 만큼 다작하는 작가다. 서울신문 편집부장으로 24시간이 부족하던 때에도 7개 신문사에 소설을 썼다. 연재가 여러 개다 보니 엇갈려 보내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하필 추리작가가 된 계기는 뭘까.
“대구일보 시절 제가 단 기사 제목이 5.16 쿠데타 세력의 보안법에 걸렸어요. 그때 화폐개혁이 있었는데 바뀐 화폐정책이 지방 말단까지 원활히 유통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방지대’라는 제목을 붙였더니 그게 꼬투리가 잡힌 거죠. ‘이방지대라니, 대한민국에 이방이 있다니, 김일성 나라가 있다는 뜻이냐?’며 억지를 부리면서 사형 구형까지 들먹였어요.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40일 동안 살인, 강도 등 잡범들과 한 방에 구금되어 있었지요. 3평 방에 21명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때는 7월 말, 얼마나 더웠던지 내 땀, 네 땀이 뒤섞일 지경이었죠. 제가 신문기자라는 걸 알고는 사형수였던 감방 두목이 재미난 이야기를 하라는 거예요. 2인자 지위를 보장해주겠다면서. 신참인 제가 서열 2위가 되면서 변기통 옆에서 안 자기, 동료 수감자의 부채질 받기, 담배 먼저 빨기 등의 특혜가 주어졌지요. 주로 흉악범들이다 보니 탐정, 범죄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예요. 날이면 날마다 머리를 쥐어짜다 보니 출감 후엔 어느덧 추리소설 작가가 되어 있더라고요. 그때 100개 스토리를 창작했으니 작가의 토양이 수감 중에 빚어진 거죠.”
데카메론과 천일야화가 따로 없었다. 서울신문 시절, 바이엘약품사의 광고 모델이 되어 매스컴을 주름잡기도 했는데, 그 또한 추리소설 작가였기에 발탁될 수 있었다. 작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골을 싸매다 바이엘사의 진통제를 먹고는 머릿속이 맑아져 글이 술술 풀린다는 콘셉트였으니. 당시 바이엘사는 각 나라마다 추리소설 작가를 광고 모델로 기용했는데 한국에서는 김성종을 제치고 이상우가 뽑힌 것이다.
스포츠신문 미다스의 손, 대박의 비결은?
“일간스포츠는 고우영의 만화삼국지, 김성종의 추리소설 연재 등으로 판매 부수를 올렸지요. 스포츠서울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한글 가로쓰기가 판매에 주효했어요. 한겨레신문이 최초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그 공로로 2019년 한글날에 대통령 포상을 받았으니 제가 시작한 게 맞는 거죠. 가로쓰기 한글 신문이 나오자 젊은 세대가 열광했지요. 창간 첫날 90만 부가 팔리는 쾌거를 이뤘어요.”
그는 이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1985년, 스포츠서울을 만들 때 말이다. “전두환 때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다른 신문과 달리 그 소식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스포츠 특성상 순간 포착을 위해 기존 1, 2명에 불과하던 사진기자를 15명까지 투입하여 읽는 신문에서 ‘보는 신문’으로 탈바꿈시켰죠. 컬러 지면으로 혁신을 이룬 것도 짜릿했습니다.”
컬러화 작업은 스포츠신문의 효시인 일본에서 배워갔을 정도였다. 1999년 국민일보로 영입된 후 만든 ‘스포츠투데이’는 창간 6개월 만에 고지를 탈환했다. 스포츠신문 5개 중에서 4개를 창간하거나 운영하면서 족족 대박을 터트렸다.
“IMF 직후라 실업자가 쏟아져 나올 때였죠. 스포츠투데이에 구직 정보를 총망라해 실었습니다. 좁고 긴 판형으로 바꾸고 제본을 시도한 것도 매출과 직결되었지요. 창간 기념으로 현대자동차 100대가 걸린 퀴즈를 100일간 냈습니다. 매일 자동차 한 대가 경품으로 나가니 신문이 팔릴 수밖에요.”
이어 2000년 ‘파이낸셜뉴스’를 창간한 후 다음 행보는 2001년 경향신문. 이번에는 사주가 되기로 하고 140억 원의 자본금과 250명의 임직원과 함께 경향미디어그룹을 꾸리고 회장직에 앉았다. 그의 나이 60세 때였다. 스포츠 기사를 포함한 종합일간지 ‘굿데이신문’이 탄생했다. 창간 기념으로 비행기를 경품으로 걸고 ‘대물’, ’쩐의 전쟁‘ 등 연재만화의 인기로 예의 순탄한 경영이 이어졌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고르바초프가 찾아와 모스크바에도 스포츠신문을 만들어달라고 제안했을 정도니. 그러나 악재의 그림자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스며들었다.
“2004년 무렵 무가지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신문이 안 팔리는 거예요. 우리도 무가지로 돌리고 광고비로 운영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가판 보증금 50억 원을 돌려줄 방법이 없었던 거죠. 제가 만드는 신문은 무조건 팔린다는 인식 덕에 전국의 신문 가판대와 계약이 되어 있었는데 무가지 때문에 신문이 안 팔리니, 그 돈을 물어주고 나서야 무가지로 변신을 해도 할 거 아닙니까. 그때부터 광고도 안 들어오고 자금난에 봉착했던 거지요. 얼마 안 가 무가지는 인터넷 신문에 밀려 역시 쓴맛을 보게 되었지요.”
자본금 문제로 4년간 재판을 끌면서 법정 구속될 위기까지 간 후 무죄로 풀려났지만 300억 원에 달하는 전 재산을 잃었다. 70이 가까운 나이였다.
스물한 살 연하 아내 아침상 차리며 화가를 꿈꾸는 홈즈 아빠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서울신문이 철퇴를 맞자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설암을 앓던 아내의 간호를 위해 안방을 중환자실로 꾸몄다. 대형 병원 설비와 환자 침상을 집 안에 들이고 10년간 아내를 간병했다.
“먹지도 못하고 말도 할 수 없어서 필담을 주고받았는데 잠깐 외출할 때면 두려움에 젖은 애절한 눈빛으로 내 허리춤을 붙들곤 했지요. 그 사람 보내고 63세이던 2002년에 재혼했는데 제가 차린 신문사가 1년 만에 망했으니 저는 지금 아내 덕에 먹고삽니다.”
평생 4시간 수면을 고수해온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아내의 아침상을 차리고 애완견과 산책한 후 글을 쓴다. 스물한 살 연하인 그의 아내 권경희는 심리상담가이자 추리소설 작가다. 서로는 추리소설 응모전 심사위원과 당선자로 만났다. 애완견의 이름은 홈즈. 추리소설 작가 부부답게 ‘셜록 홈스’에서 따왔다. 하고 싶은 거 다 했다면서도 한 가지를 더 이루고 싶단다. 어릴 때 꿈인 화가가 되는 것이라고. 신문 발행인으로, 소설가로, 대학교수로, 화가로, 그는 일생이 참 좋은 시절이다.
청운의 꿈을 품은 채 서울로 상경해 20여 년 동안 공직에서 일하고, 공직을 나와서는 한국신용평가 CEO로 활동했다. 은퇴 후 인생 2막으로 택한 것이 바로 ‘시조’였다. 2017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송태준(75) 시조 시인은 성실한 공무원처럼 시조도 성실하게 쓰는 노력파였다. 그를 만나 그간의 여정과 더불어 시조의 가치와 매력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201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수원화성을 배경으로 한 노인의 삶을 그린 시조 ‘다산(茶山), 마임 무대에 선’이 당선되면서 시조 시인으로 등단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1세. 늦은 나이로 등단한 후, 4년 만에 첫 시조집 ‘바람의 노래’를 출간했다.
“등단 직후엔 때가 아니라고 봤어요. 책을 신중하게 내고 싶었어요. 성격상 대충 하는 건 못 견뎌요. 일종의 결벽이라고 할까요? 종잇값이 아깝지 않은 시조집을 내고 싶었어요. 공을 들여서 책을 만들자고 생각했는데 4년이란 세월이 훌쩍 가더군요. 습작한 지 10년 만에 나온 첫 책이라 원래는 작년 말쯤 출간하고 독자분들과 얘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올해 4월에 드디어 출간하게 됐죠.”
늦깎이 시인이 10년의 세월을 압축해 만든 시조집 제목은 ‘바람의 노래’. 그는 어떤 바람을 담았던 걸까?
“중의적인 의미예요. 하나는 자연현상으로서 바람(wind)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적인 바람(want)이에요. 인공지능의 시대라고 하지만, 자연현상만큼 보편적 공감과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또 있을까요? 자연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이며, 그중에서 바람을 무척이나 좋아해요. 바람은 기척도 없이 왔다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사라지는 것. 인간의 삶도 바람과 매우 닮았죠. 바람과 닮은 삶의 유한함과 공허, 그런 것을 시조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더 나아가 좋은 시조를 쓰고 싶은 결연한 의지와 소망이 담긴 책이에요.”'
시조와 첫사랑
70년은 반세기를 넘어 한 세기에 가까운 나이다. 그가 처음 시조에 눈을 뜨게 된 시기는 언제였을지 궁금했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중학교 시절 문학에 막연한 관심이 있어서 특별활동으로 문예반을 골랐어요. 알고 보니 문예반 지도 선생님이 그해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자였죠. 문예반 활동 자체에 대한 기대도 컸는데, 신춘문예 당선자인 선생님으로부터 지도를 받게 돼 더 즐거웠어요. 선생님이 직접 쓴 시부터 시작해 다양한 시조를 배웠죠. 시조 시인으로서의 기초체력을 다진 시기라고 할까요?”
시조의 포문은 문예반 선생님과 함께 열었지만, 시심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첫사랑’ 덕분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자유로운 연애를 하던 시절이 아니었는데,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윗동네 여학생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어요. 얼마나 좋아했는지 잠도 못 자고, 온종일 그녀 생각밖에 안 했어요. 그렇게 밤마다 그녀를 생각하면서 시조를 매일 한 편씩 적어나갔는데, 1년 6개월 정도 지나니 대학노트 3권 정도 분량이 나오더군요.(웃음) 이대론 안 될 것 같아 고민 끝에 그 동네에 사는 동급생을 통해 편지와 함께 가장 잘 쓴 시조 한 편을 그녀에게 보냈어요. 바로 답이 없어서 차였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뒤 긍정의 답장이 오더군요. 시조는 첫사랑과의 연을 이어준 큐피드 화살이었죠.”
사귄 지 얼마 안 돼 그녀는 떠나갔고, 시조도 그와 멀어져갔다.
“첫사랑과 헤어진 후론 시조를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대신 문학적 재능을 수필이나 소설로 옮기려고 부단히 노력했죠. 고등학교 때는 신춘문예에 2번이나 지원했는데 매번 떨어지더군요. 더불어 문학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고, 문학적 재능이 없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어요. 한편으론 글쟁이의 삶이 너무 고단해 보였어요. 가난한 예술가보다는 성실한 생활인으로 살고 싶었어요. 시골 출신이라 그런지 출세와 사회적인 성공에 대한 열망이 컸어요. 대학도 서울로 오기 위해 죽어라 공부했죠.”
공직은 실패작
순수한 시골 청년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당당하게 서울대학교에 합격했고, 남들처럼 평범한 대학 생활을 보냈다. 대학 졸업반 시절부터 행정고시를 준비해 2번 만에 합격했다. 그는 “당시 공직에 진출해서 이 사회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싶었다”라고 말하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공직에 나가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공직은 제 인생의 실패작이에요. 국무총리실로 첫 발령을 받고 사무관에서 서기관으로 승진할 때는 몰랐어요. 동기 중에서 진급이 빠른 편이라서, ‘이대로만 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죠. 이후 대대적인 부서 통폐합으로 인해 새로운 부서로 발령을 받았어요. 근데 다른 부서에서 와서 그런지 알게 모르게 텃세가 심했어요. 그래도 견뎌냈는데, 상사와의 갈등이 심했어요. 원리 원칙대로 일을 진행하고 보고드렸는데, 그 상사분이 일을 이따위로 하냐며 면전에 서류를 집어던졌어요.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이외에도 이유 없이 불합리한 대우를 많이 받았어요. 승진에서도 밀려났는데, 나중엔 그 상사가 저를 좌천시키려고 하더군요.”
이런 갖은 수모를 견뎌냈지만, 그는 끝내 22년 만에 공직 생활을 접고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다만 이 선택도 그에게 불가피한 일이었다.
“상사와의 갈등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시련도 있었어요. 빚보증을 서달라는 친한 친구의 부탁을 받았어요. 정말로 친한 친구라 거절하기 힘들었죠. 보증인 중에 공무원이 꼭 필요하다고 신신당부를 하길래 무심코 해줬는데, 이로 인해 끝내 친구 하나를 잃게 됐어요. 그 친구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빚을 못 갚게 된 거죠. 공무원 월급의 반을 압류당해 경제적으로 힘들었어요. 그때 마침 좋은 제의가 와서 한국신용평가 CEO로 활동했는데, 그 월급마저도 빚 갚느라 전부 썼어요. 제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어요.”
마음의 숨구멍
22년의 공직 생활. 한국신용평가, 한국농어촌공사 등에서 대표와 비상임이사로 활동. 숨 가쁘게 달려오다 10년 전에 은퇴했다. 그간의 경력으로 볼 때 다른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터. 어쩌다 시조 시인의 길로 가게 된 것일까?
“뜻밖의 우연이 겹쳤어요. 은퇴 이후 시간이 많이 생겨 취미를 찾다가 우연히 도보동호회를 알게 됐죠. 전국에 도보동호회가 참 많더군요. 한번 몰입하기 시작하면 뒤도 보지 않고 달리는 성격인데, 걷는 재미에 빠져서 동호회에 가입하게 됐어요. 전국 각지의 도보 대회를 다녔는데 우연히 강원도 고성에 갔다가 축제에서 하는 백일장을 발견했어요. 이런 백일장은 보통 하루 만에 끝나는 것이 다반사죠. 그런데 이 대회는 보름 정도 제출기한이 있더군요. 학창 시절에 썼던 시조 생각이 나서 응모했는데 덜컥 대상을 받았어요. 예전의 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자신감이 생겨서 그때부터 습작을 시작했죠.”
아무리 좋은 연장이라도 오랫동안 쓰지 않으면 녹이 슬기 마련이다. 그도 창작의 고통을 수없이 맛봐야 했다.
“은퇴 후 남는 게 시간인데, 삶이 무료하더라고요. 이왕 하는 거 신춘문예 당선을 목표로 삼아 시조 시인으로서의 가치를 증명해보고 싶었어요. 육십 넘어 시작한 일인데, 몇 년 더 한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어요. 다만 시조 부문이 있는 신문사도 적고, 인원도 한 명밖에 안 뽑아서 고시보다 더 치열했어요. 앉으나 서나 시조 생각만 했죠. 길 가다가도 메모를 하고, 한밤중에 시상이 떠오르면 불을 켜고 시조를 쓰기도 했고요. 들인 노력에 비해 매번 떨어지다 보니 이 무모한 객기를 그만하고 싶더군요. 그래서 2017년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덜컥 신춘문예에 당선됐어요. 운이 정말 좋았어요.”
삶을 이기는 글은 없다고 하는데, 그간의 경험이 시조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공직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순탄치 못했죠. 억울한 일이 많다 보니 반항심이 커졌어요. 상사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대드는 경우도 왕왕 있었고요. 젊은 날의 치기 어린 객기였죠. 다만 실패가 자꾸 쌓이면 성찰이 발달하는 것 같아요. 항상 마음을 돌아보고, 삶의 상태를 점검하는 게 습관이 된 탓에 글을 안 쓸 수가 없더군요. 창작의 고통은 괴로운데, 어느샌가 본능처럼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종종 있어요. 제게 시조는 마음의 숨구멍과도 같아요. 제 안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편히 눕힐 수 있는 쉼터예요.”
롤모델은 두보
사실 시조는 자유시와 비교해 인기 있는 분야는 아닌데, 그가 생각하는 시조의 매력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시조는 간결한 언어의 리듬이에요. 글자 수의 제약 안에서 절제된 언어, 규칙적인 반복과 특유의 배열을 통해 리듬을 만들어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르죠. 몇 자 되지 않는 단어의 배열로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굉장히 어렵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죠. 규칙이 없는 스포츠는 의미가 없죠. 규칙이란 제약 안에서 최고의 경기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선수의 덕목이 아닐까요? 시조도 마찬가지예요. 자수의 제한 안에서 함축된 언어를 통해 독자의 마음에 잊을 수 없는 문장을 남기는 일. 그게 시조의 미학이죠.”
시조 시인으로서의 지향점과 시조를 쓰는 자신만의 철학에 관해 물었다.
“타성을 경계하고 새로운 눈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해요. 타성을 거꾸로 되짚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에요. 시조를 쓸 때는 관념적인 언어가 아닌 감각적인 언어를 쓰려고 노력해요. ‘꽃이 아름답다’라고 하는 것보다 ‘꽃은 너의 입술이다’처럼 감각적으로 명확한 이미지를 만들려고 하죠. 그 이미지가 오랫동안 맴도는 것. 그게 정말 좋은 시조예요. 이태백처럼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퇴고의 달인 두보처럼 한 편 쓸 때마다 수백 번을 고쳐요. 두보처럼 사회적 문제를 시조에 녹이려고 하고요. 일종의 롤모델이죠.”
끝으로 시조 시인을 꿈꾸는 이들에게 전하는 조언과 더불어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시조 시인을 꿈꾸고 있다면 일기 쓰듯 가볍게 써보는 게 좋아요. 스타일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학도 흐름이 있어서 시대성을 잃어버리면 안 되죠. 이론서부터 시작해 다양한 시조를 읽어보는 게 좋고, 일본의 하이쿠도 좋아요. 시조는 민족 문화의 자산이라고 할 정도로 역사가 깊고,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장르예요. 시조의 매력과 가치를 알리는 데 시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현재는 단시조집 출간을 위해 매일 시조를 쓰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단 한 편이라도 좋으니 독자에게 여운을 깊게 남기는 시조를 쓰고 싶어요.”
그는 자신의 삶을 “무모한 객기가 부른 재앙”이라고 표현했다. 그 말처럼 객기가 객기로만 남았다면 그의 삶은 정말로 재앙이었을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잠시나마 엿본 그는 대단히 성실한 사람이었다. 은퇴 후 그가 시조 시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꾸준한 성실함 덕분이었고, 성실함의 바탕은 성찰에 있었다. 시련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나가기 위해 부단히 반성하고 노력했다. 그의 객기는 용기였고, 시조는 시련 속에서 피워낸 하나의 꽃이었다. 활짝 만개한 꽃처럼 아름다운 시조로 다시 만나기를 기대하며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