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탄 듯, 추억 속 음악은 아련했던 그 시절로 우리를 주유하게 한다. 지난날 삶의 변곡점을 만든 노래가 있는가 하면, 중년에 접어들어 새롭게 전환점이 된 노래도 있다. 오선지에 찍힌 음표처럼, 희로애락의 하모니를 이루며 우리네 인생 변주곡을 채운 그때 그 노래들을 다시 소환해본다.
도움말 김동률 서강대학교 교수 참고 도서 ‘인생, 한 곡’
70년대의 좌절 속 청춘의 마음을 불태웠던 노래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by ‘고래사냥’(송창식)
퇴폐와 자학이 넘치던 1970년대. ‘고래사냥’은 대학가의 절망과 희망을 도도하게 포착하며 청년 지식인들을 끊임없이 선동했다. 계엄령, 긴급조치에 억눌린 젊음에게 서둘러 고래사냥을 떠나라는 절규 아닌 절규였던 셈이다. 안개 같던 시절을 지나 어느덧 인생의 가을.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고,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지만 떠나야 한다. 동해 바다로 완행열차를 타고 떠나야 할 때다. 그렇게 ‘고래사냥’은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를 잡으러 떠나라고 우리를 충동한다.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by ‘돌아와요 부산항에’(조용필)
“빠빠빠빰 빠빠빰 빠빠빰 빠 빠빠빰” 중장년이라면 누구나 귀에 익숙할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전주다. 반주나 마이크가 없어도 어묵 국물에 숟가락 서너 개 걸쳐놓고 목 터지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닐까 싶다. 지금이야 자타 공인 최고의 가수이지만 오랜 무명 시절을 보낸 그에게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가왕 조용필의 이름을 전적으로 드높여준 노래다. 1970년대 말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각종 단합대회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단골곡이 됐다. 대학 엠티에서도 직장 회식에서도 흥이 최고조에 달할 때쯤이면 함께 열창하던 노래였다.
중년 이후 다시 들으면 가슴 먹먹해지는 노래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by ‘서른 즈음에’(김광석)
서른을 많이 넘기지 않은 사람은 노랫말이 주는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다. 그리고 서른을 훌쩍 넘긴 사람은 노래가 주는 슬프고도 시린 마음에 잠을 뒤척인다. 치기 어린 사랑 투정이라 짐작했을 그 가사가 얼마나 가슴을 치는지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서른 즈음에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떠났고 살아남은 우리는 그의 노래처럼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by ‘낭만에 대하여’(최백호)
‘낭만에 대하여’의 모티브가 된 통학길 완행열차에서 최백호는 첫사랑 그 소녀를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박경희, 최백호는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이름을 밝혀도 좋으리라 말한다. 더구나 그녀는 자신이 최백호의 첫사랑인지조차 모를 테니까. 그렇게 낭만은 아득하고 추억마저 긴긴 세월 속에 야위어갔다. 젊은 시절에는 곡의 깊고 유창한 슬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열병처럼 지나온 젊은 날 추억의 장소로 회귀하는 노래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by ‘광화문 연가’(이문세)
‘광화문 연가’를 들으면 종로서적이 떠오르고 무교동의 음악감상실 르네상스가 펼쳐진다. 당시 광화문은 청춘들이 몰려다니던 거리였다. 경기고를 비롯해 서울고, 창덕여고, 진명여고, 숙명여고, 이화여고, 배제고, 경기여고 등 명문고교가 즐비했다. 입시학원, 고고장, 나이트클럽, 음악감상실, 분식집, 빵집이 넘쳤고 거리는 데이트를 즐기는 청춘들로 가득했다. 특히 양식집 ‘이딸리아노’는 연예인이나 당대 명망가들이 드나드는 장안의 명소였다. 서울고와 이화여고 중간에 자리했는데, 이곳에서 고등학생 때 언약하고 결혼까지 한 사람도 꽤 있단다. 어느덧 세월 따라 그 시절 청춘들은 떠났고 노랫말처럼 언덕 밑 정동길엔 감리교회만이 버티고 있다.
“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by ‘골목길’(김현식)
그렇게 시작되는 ‘골목길’은 묘한 상상과 함께 사내들의 술자리에서, 대학생 동아리 모임에서, 회식 후 늦은 밤 귀갓길에서 가만히 터져 나왔다. 노랫말처럼 그 시절 신촌의 골목길에 접어들 때면 가슴이 뛰곤 했다. 곳곳에는 숨겨진 술집과 만화방, 장미여관, 은하수여관이 있었다. 곡에 등장하는 신촌 골목길들은 이른바 1980년대 낭만 히피들의 ‘나와바리’였다. ‘골목길’의 탄생에는 신촌블루스가 있다. 1986년 신촌의 카페 ‘레드 제플린’에서 엄인호, 이정선, 김현식, 한영애가 결성한 록 밴드다. 그 시절 ‘레드 제플린’은 ‘러시’와 함께 낭만 히피들의 아지트였다. 엄동설한 골목길 곳곳 카페에 몰려든 젊음들은 벽난로 가득 활활 타는 통나무 장작을 바라보며 떠나가는 청춘을 노래했다.
서울로 상경한 공순이 공돌이들의 삶을 위무했던 노래
"돌담길 돌아가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고” by ‘물레방아 도는데’(나훈아)
‘물레방아 도는데’의 노랫말에는 고향을 떠나온 이의 애끓는 마음이 담겨 있다. 가난해서 떠나왔지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낙엽이 쌓이고 흰 눈이 내려도 미싱을 잡아야 했던, 이른바 수많은 공순이의 정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산업의 시대정신이 담겨 있는 이 노래는 국민가요라 불릴 만큼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물레방아 도는데’는 공순이, 공돌이란 이름으로 사라져간 이 땅의 노동자들을 위한 헌정곡과 다름없다.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도록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by ‘사계’(노래를 찾는 사람들)
‘사계’는 여성 보컬과 건반의 경쾌한 연주와는 대조적으로 여공들의 쳇바퀴 도는 듯한 단조롭고 신산한 삶을 노래한다. 그 발랄함 속에 숨은 페이소스에, 경쾌한 리듬의 노래를 들으면서도 깊고 무거운 슬픔에 잠기게 된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는 이른바 혁명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수시로 아픈 일이 많았다. 노동현장에서 젊은 학출(學出)들은 노동자들과 연대했지만, 때론 일류 대학생과 공돌이, 공순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적잖은 상처를 주고받았다.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가족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이 땅의 누나, 여동생들이 흘린 회한과 고독이 ‘사계’에 녹아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대한민국 블루스계의 전설 같은 남자.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이런 표현을 싫어할 아티스트. 바로 신촌블루스의 엄인호가 그 주인공이다. 김현식, 한영애, 이광조, 이정선 등 대가의 경지에 도달한 뮤지션들과 함께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를 휘어잡았던 신촌블루스의 영원한 리더인 그는 여전한 블루스 기타리스트로서, 어느새 40년에 도달한 음악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드러나는 걸 싫어하는 천성 때문일까. 여전히 은자(隱者)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그를 찾아 공연 전 술자리에서 막걸리 한 잔과 함께 만났다.
한국 가요사를 말할 때 절대로 지나칠 수 없는 밴드가 있다. 바로 신촌블루스. 이름 그대로 신촌 지역에 거점을 잡고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를 휘어잡았던 신촌블루스는 가요와 블루스의 결합이라는 실험을 통해 다수의 명반을 만들었다. 김현식, 이정선, 한영애, 이광조, 강허달림, 이은미 등 한국 가요사에 묵직하게 새겨진 이름들이 한 번씩 거친 밴드이기도 하다. 신촌블루스에는 ‘아쉬움’, ‘골목길’, ‘그대 없는 거리’, ‘이별의 종착역’ 등 들으면 잊히지 않는 노래를 부른 네임드 멤버들이 있다. 엄인호는 바로 그 핵심 인물이다.
그러나 신촌블루스가 갖는 음악적 무게감과 밴드를 거쳐간 솔로 아티스트들의 화려한 면면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중심을 지킨 엄인호는 대중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데뷔한 지 올해로 40년이지만 아직도 숨겨진 인물이며 야인으로서 존재한다. 자칭 타칭 히피로서의 삶과 언더그라운드라는 포지션, 그리고 쇼비즈니스에 대한 거부감이 많은 그의 천성 때문일 것이다.
언더그라운드의 전설, 그리고 40년
엄인호를 만난 것은 지난 10월 3일. 서울 청파동 코리아블루스씨어터 공연을 앞둔 시간이었다. 술과 담배를 좋아하는 그가 씩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따랐다. 공연 전에는 물과 술 외에는 아무것도 안 먹는다는 그는 술을 마셔서 그런가…. 눈이 유난히 초롱초롱했다.
“얼마 전에 백내장 수술을 해서 시력이 좋아졌는데, 안경을 벗으면 내 이미지가 아니라 안경을 쓰는 거지. 수술 덕에 멀리 있는 건 잘 보이는데 노안이라 가까이 있는 건 잘 안 보여요.”
그에게서 백내장 수술 얘기가 나오다니 세월이 참 많이 흐르긴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한 청춘처럼 보였던 그도 나이를 먹긴 먹었다. 물론 동료들도 함께.
“(신촌블루스) 멤버들과 시간 맞추기가 힘들어요. 각자 세컨드 일을 하고 있으니까. 한 친구는 지방에서, 한 친구는 서울에서 가게를 합니다. 기타리스트 노병기는 자기 블루스 밴드가 있는데 이번 라이브 녹음을 위해 세션으로 초대했죠.”
‘장발 전과 27범’이 만든 새로운 음악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김도향 등이 포진해 있던 명동의 쎄시봉이 포크로 1970년대 가요계를 휘어잡는 동안 신촌은 변방이었다. 그리고 변방인 만큼 마이너리티들이 모이는 지역이 됐다. 그들은 OX, 츄바스코, 하렘 등 몇몇 음악감상실에 모여 술과 음악에 빠져 살았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양친을 잃고 독학으로 기타를 배운 엄인호 또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KBS 합창단에서도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기도 하고 ‘누가누가 잘하나’라는 프로그램에서 매우 높은 점수를 받았던 추억도 있었다. 사춘기에 염세주의에 빠진 적도 있었던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신중현 노래를 듣고 음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1974년에는 부산에 내려가 DJ 생활을 하다 그 후 전국을 유랑하며 한국형 히피로 살았다. 장발단속령이 떨어졌던 그 시절, 히피족 같았던 장발은 그를 ‘장발 전과 27범’으로 만들었다. 그 당시는 “거의 유치장에서 살았다”며 웃으며 추억한다. 지금도 여전히 그때와 같은 장발이다.
문화의 새로운 시대는 주류가 아닌 비주류가 개척해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1979년, 엄인호는 신촌에서 만난 이광조, 이정선과 함께 ‘풍선’이라는 이름으로 데뷔 앨범을 발매했다. 하지만 활동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이어서 박동률, 라원주, 양영수 등 신촌 멤버들과 함께 ‘장끼들’이라는 밴드를 만들었지만 큰 반응을 얻지 못했고 3년여의 활동 후에 해체됐다. 그리고 1986년, 신촌블루스가 탄생한다. 이정선, 이광조, 한영애와 함께 신촌의 레드 제플린이라는 카페에서 활동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기라성 같은 아티스트들 집결하다
“(레드 제플린은) 원래 선배가 운영하던 카페였는데 장사에 신경 안 썼지. 그래서 망해가던 곳이었는데 나한테 운영을 해달라고 했어요. 그때 나는 돈이 없어서 운영권 대신 출연해서 가게를 유지해가면 되겠다 싶어 오케이했죠. 그래서 다 살려놨는데 손님이 많아지니 가게를 다른 주인한테 넘겨버리더라고요. 섭섭했지. 그래도 그렇게 인기가 있어서 관객이 점점 많아졌고 ‘공연을 뭐 이 따위로 하냐 극장이라도 빌려서 해라’는 주위 지인들의 권유로 동숭동 파랑새 소극장을 빌렸어요. 당시 사람이 너무 많이 와서 계단에 앉아서 보기도 하고 그럴 정도였죠. ‘역시 인호 형이 끼니까 뭔가 다르네’ 하는 말도 듣고요. 거기서 시작된 거예요 신촌블루스는.”
그렇게 언더그라운드의 전설이 시작됐다. 1집을 성공시킨 뒤 2집은 개그맨 전유성의 소개로 알고 지냈던 김현식이 참여해 또 명반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러한 음악적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신촌블루스는 엄격하게 조직된 밴드가 아니어서 다소 느슨한 공동체처럼 운영됐다. 그래서 멤버들이 수시로 바뀌었고 보컬과 여러 명의 객원 보컬들도 동원됐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이질적인 성향의 기라성 같은 아티스트들이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가장 단적인 예로 신촌블루스에서 가장 무게감 있는 멤버인 엄인호와 이정선만 비교해도 그렇다. 일렉트릭 기타 블루스와 포크의 조화,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오랜 시간 이별과 만남을 거듭하며 음악적 자장을 넓혔다.
“신촌블루스 멤버 중 저를 성장하게 한 사람은 이정선 씨죠. 악보에서부터 여러 가지를 배웠으니까요. 원래 악보 보는 법을 몰랐거든. 그런데 작곡하는 사람이 악보도 못 그린다는 게 웃기잖아요. 그래서 이정선 씨에게 악보 보는 법을 배웠고 덕분에 쓰는 법도 알게 됐죠. 여러모로 내게는 참 고마운 사람이에요.”
“이거 나 죽으라는 노래냐?”
“전에 발표했던 ‘이별의 종착역’을 블루스로 꼭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신촌블루스 3집에 싣기 위해 김현식에게 죽기 얼마 전에 불러 달라고 부탁하니까 현식이가 ‘이거 나 죽으라는 노래네?’ 하더라고.(웃음) 그런데 흔쾌히 허락했어요. 단칼에. 가사 기억이 잘 안 나니까 가사만 알려 달라고 하고 스튜디오에 아들과 함께 와서 한 번에 불렀죠. 김현식에겐 그런 매력이 있었어.”
엄인호는 아련한 듯 김현식을 추억했다. 생각해보면 그를 거쳐간 가수가 참 많았다.
“현식이, 한영애, 정경화, 이은미 등등 정말 준비된 가수들이었죠. 오랫동안 그 고집으로 쭉 버텨왔고. 나는 오버하는 가수는 싫어해요. 너무 멋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멋 부리지 않고 자기 색깔대로 부르는 가수가 멋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계산된 창법은 안 좋아해요. 연주도 그렇죠.”
자연스럽고 절제된 스타일을 좋아한다는 그의 신조는 그의 음악적 애티튜드였다. 없는 듯 있으면서, 시간과 사연의 흐름을 타고 살아온 그의 인생을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올해로 40년째 음악인으로서 살아왔다. 10년 전 그는 거의 은퇴 직전까지 갔었다고 한다.
“갑자기 다 싫은 거야. 내가 쉴 때가 됐나보다 하고는 미국에 가서 거의 일 년을 놀다 왔지. 한편으로는 그대로 거기서 눌러살까 생각도 했고. 그런데 그러려면 미국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잖아? 과연 내가 정착할 수 있을까 싶었지. 그러다가 아들이 결혼한다고 해서 한국에 다시 들어왔다가 안 나가고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할 것도 많았고.”
뮤지션에 대한 관객들의 예의
그의 아들 엄승현 씨도 현재 세션 기타리스트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아들의 실력을 인정했다.
“그런데 나하곤 일을 안 하려고 해. 야단맞으니까.(웃음) 참견하고 싶지 않아요. 가끔 조언을 해주고 싶은데 거절하더라고.(웃음) 뭐 음악이라는 건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는 자신처럼 라이브 공연으로 살아가는 후배들을 보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일본이나 해외 어디든 가서 공연하면 관객이 너무 부러워요. 뮤지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거든. 특히 예의를 지킬 줄 알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관객들은 뮤지션에 대한 존경심이 없고 소모품으로 여기는 경향이 더러 있어요. ‘너 어디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바라보니까요. 관객이 밴드를 최대한 응원하고 자극하면 더 즐거운 공연이 될 수 있는데, 그걸 몰라요.”
얼마 전 클럽에서 연주를 하는데, 관객 중 한 명이 갑자기 무대로 올라왔다고 한다. “‘골목길’은 내가 더 잘 불러” 하면서. 또 무대 바로 앞자리에 앉아서 공연에 방해가 될 정도로 떠드는 관객도 있단다. 우리나라 공연 문화가 아직 낮은 수준임을 알게 해주는 상황들이라고 그는 안타까워한다.
“결국 뮤지션들은 그런 무대를 기피하게 돼요…. 이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어휴, 입에서 욕이 나오려고 해.”
신촌블루스 원년 멤버 공연
그렇다면 그는 요즘 가요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소위 아이돌 위주로 재편되는 가요계 현실에 대해 그는 덤덤해했지만, 한 가지 주문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어차피 대중음악은 유행 따라 흘러가는 것이기에 큰 불만은 없어요. 단지 우리가 예전에 갖고 있던 감성이 없다 보니까, 마치 아이들 일기에 쓸 법한 가사들만 나오니까… 물론 작사가들이 제대로 쓴 건 다르겠죠. 그런데 요즘 작사하는 친구들 보면 포커스를 모두 중학교 아이들에게 맞추는 거 같아요. 아무리 작곡을 잘해도 가사가 너무 자극적이거나 유치하면 불만스러워요. 안타까운 거라면 그거예요.”
현역으로서, 그는 데뷔 40주년을 맞이해 오는 11월 23일에 그의 음악적 고향 신촌에서 한발 떨어진 홍대 하나투어 브이홀에서 신촌블루스 공연을 하기로 했다. 이번 무대가 특별한 이유는 원년 멤버인 이정선과 한영애가 함께 자리하기 때문이다. 과거 신촌블루스의 면모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기대가 된다.
“11월에 제 생일이 있기도 하고…. 김현식이 떠난 달이기도 한데, 그때가 되면 기분이 가라앉고 방황하게 되니까, 올해가 마침 데뷔 40주년이니 공연이나 해야겠다 싶었어요. 김현식과 함께 불렀던 노래 ‘바람인가 빗속에서’, ‘이별의 종착역’을 불러볼까 해요. 한영애, 이정선 씨도 함께하기로 했는데, 사실 귀찮아요. 그 친구들 나오면 연습도 따로 해야 해서요.(웃음) 그래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까 현식이를 추모하며 그간 서운한 감정 있으면 다 없애고 가끔 이렇게 뭉치자고 하고 싶어요.”
자연스럽게 살다 가고 싶다
덤덤하게 사는 그는 딱 하나, 꼭 해보고 싶은 게 있다고 말했다.
“여태까지 다 해봤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못해본 게 있는 거 같아요. 또 음악이지. 히트곡? 그런 건 아니고. 뭔가 엄인호다운 것.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그런 스타일이 있거든요. 음악적으로 세련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런데 그게 내 생각대로 쉽게 되는 건 아니거든.”
그에게 남아 있는 단 하나의 꿈이란 것도 결국 음악이었다. 모호하고 바로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욱 좇고자 하는 음악의 경지였다. 그렇듯 엄인호라는 사람은 끝까지 음악이 아니면 설명될 수 없는 아티스트다.
엄인호는 신촌블루스 안에서 더욱 빛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주도한 그는 우리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어떻게 기억되고 싶을까.
“누구에게 날 기억해 달라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자연스럽게 살다 가자. 그거면 돼요.”
가슴에서 훅 뜨거움이 쳐 올라와 냉큼 막걸리 잔을 비웠다. 공연이 끝난 후 우리의 술잔은 다시 못다 한 이야기와 함께 넘쳐흘렀다.
한국 포크 블루스의 살아 있는 전설, 이정선의 음악 인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에게 오랜 활동의 원동력을 물으니 “다른 걸 할 줄 모르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렇게 그는 거의 모든 질문에 무심하고도 간단하게 답한다. 자신의 음악적 삶에 대해서조차도 “그냥 오래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1974년에 데뷔한 이후 그가 대중음악사에서 이룬 것들은 그저 오래해서 쌓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의 간결한 소리가 만드는 묵직한 삶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억지로 갖다 붙이지 마요. 살면서 여러 길로 가다가 중간중간 우연히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는 거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겠다 해서 그렇게 사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이정선은 꾸며서 말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 모습은 마치 그의 노래 가사와도 같다. 그의 노래 가사들은 짤막한 단어들로 감성을 톡톡 건드려준다.
흘러가는 대로 구르는 대로
부딪히는 대로 밀리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구르는 대로
부딪히는 대로 밀리는 대로
우리네 인생살이 그렇게 가는 게지
그러다가 가끔 욕심이 나면
하고 싶은 일도 너무 많지만
그러다가 가끔 욕심이 나면
하고 싶은 일도 너무 많지만
산마루 구름처럼 쉬면서 가는 게지
그가 김현식에게 준 노래 ‘우리네 인생’의 가사다. 이 노래는 ‘인생은 그저 흘러가는 것’임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그 마음과 기타만 있으면 그 외에는 필요 없다는 듯이.
블루스 거장의 도피(?) 시절
“원래 꿈은 많았죠. 노래를 해야지 했던 건 한 1972년쯤에 생각했나. 제대 후에 돈을 잠깐 벌어야겠다 싶었죠. 왜냐하면 기타는 그 전부터 치고 있었으니까. 그때 막 기타 붐이 일었을 때였거든. 학비 정도는 벌지 않을까 했어요.”
이정선답다고나 할까, 찬란하고 눈부신 시작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산 기타로 기타를 접한 그에게 음악인으로서의 삶은 그저 생활의 연장으로서 부여됐을 뿐이다. 그 후 12장의 솔로 앨범과 신촌블루스 1, 2집, 해바라기 3집 등 가요사에 남는 명반들을 만들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포크 블루스의 거장으로 불리게 됐다.
“예전에는 곡을 만들고 여러 사람 주면, 그중에 그들이 안 부르는 노래가 생기잖아요. 그걸 제가 불렀어요. 그러다 보니 안 팔리는 노래만 불렀죠. 그런데 그 자체를 제가 즐기고 있는지도 몰라요. 저는 운이 좋게도 군대 제대 후 세상을 볼 수 있는 나이에 음악을 시작했어요. 친구가 음악을 하면서 스타가 되자 변질되거나 달라지는 것도 봤고…. 그런 여러 가지 과정들을 보며 저렇게는 안 사는 게 내 성격에 맞겠다 해서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도 있었죠.”
음악을 하다 보면 알려져야 하는 순간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정선은 “알려지기 싫어서” 그걸 피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도망갔다.
소극장 공연의 내밀한 즐거움
“위로 올라가기가 너무 싫었어요. 내가 가진 것 이상으로 평가받는 게 싫었던 거죠. 요즘은 그게 더 심해지는 게, 그것이 원하지 않더라도 사람의 이미지가 자꾸 확대가 되잖아요.”
스마트폰으로 모두가 미디어를 갖게 된 시대, 별것도 아닌 일이 인터넷을 수천 수만 번 떠돌면서 비대해지는 광경을 우리는 자주 접하고 있다. 되려 그렇게 되고 싶어서 부추기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이정선은 체질적으로 그런 것들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이다. 큰 공연은 안 하면서 소극장 공연만 3년째 꾸준히 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밴드가 7명인데, 처음 시작할 때 관객은 10명이었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관객 40~50명, 많아야 100명을 넘지 않는 공연을 계속하고 있다.
“큰 공연장을 가면 저도 과장을 해요. 오버하는 거죠. 필요 이상으로 잘하려 하고. 그런데 작은 데에선 관객과 얘기하듯 공연을 하죠. 음정이 틀려도 되고. 그대로 보여줄 수 있어서 편안합니다.”
소극장 공연의 즐거움은 아는 사람만 안다. 다분히 인간적인 감성으로 노래하는 가수와 공유하는, 그 작은 세계가 만들어지는 분위기는 다른 사람이 알 수 없기에 더 소중하다. 그가 고수하는 내밀한 세계는 확실히 대형 공연장의 요란함보다는 소극장에 더 어울릴 수밖에 없다. 쉽고 간결한 연주와 가사를 통해 삶의 냄새가 폴폴 느껴지는 편안한 소리가 이정선 노래다.
“밴드 멤버들에게 미안하죠. 제일 오래한 친구가 20년 됐고, 그 외에 지금 있는 친구들은 수입이 별로 없어도 음악이 좋아서 활동하는 친구들이에요. 멤버들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못 치는 음악은 기타를 안 잡는다
장인 같은 음악인 이정선. 그의 다른 모습으로는 교육인 이정선이 있다. 많은 사람이 그가 만든 기타 바이블 ‘이정선 기타교실’을 기억할 것이다. 처음 기타를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거쳐 가는, 말 그대로 교본이었던 책이다. 그는 1989년부터 대학 강의를 시작해 동덕여대에서 실용음악과 교수로 16년 재직하고 2016년 정년퇴임했다. 과묵하다 못해 하도 리액션이 없어 방송 PD들에게 기피 대상이었다던 그는 학교에 가서 자신이 좀 변했다고 했다.
“말이 많아졌죠. 짜식들이 말을 못 알아들어서.(웃음)”
그렇게 입게 된 옷이 꽤 맞았는지, 공연예술대학 학장까지 지냈다.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며 살았어요. 책 쓰고 가르치면서 음악을 했죠. 순간순간 해야 할 일은 그 자리에서 했죠. 그리고 이 일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전혀 다른 일에서 푸는 법을 알게 됐죠. 덕분에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서도 참 편하게 지냈어요.”
그러고 보면 그에게 있어 음악은 생활의 연장으로서 자연스럽게 이어져 온 것 같다. 덤덤하고 까다로워 보이지만 삶과 생활에 자연스러운 흐름이 생기면 그것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또한 이정선다운 것 아닐까.
“창작하는 사람들은 가슴속에 샘이 있는 거예요. 물방울이 하나씩 모이다가 넘치면 작품이 돼. 한결같이 물방울이 모이진 않으니까요. 하룻밤에 모일 때도 있고 몇 년 걸릴 때도 있고. 샘이 고갈되다가도 하룻밤에 넘쳐서 1시간 만에 뚝딱 하고 작품이 터질 때가 있지.”
음악에는 큰 힘이 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이정선은 치열한 경쟁이나 승부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엊그제 공연을 갔는데, ‘아이고, 외계인들 아냐?’ 싶더라고요. 너무 잘하니까. 옛날 같으면 다른 사람이 그렇게 잘하는 걸 보면 밤새 기타를 치기도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잘하는 놈은 잘하는 거고, 나는 내 음악 하면 되는 거다 합니다. 사실 젊었을 때도 좀 따로 놀았어요. 잘들 한다 그러면서.(웃음)”
요즘은 전 세계가 케이팝 열풍이라고 한다. 아무리 노래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9시 뉴스를 틀면 방탄소년단 소식을 듣게 된다. 한국 가요가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는 장면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래서인지 가요계에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가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수많은 가수, 특히 아이돌은 치열한 경쟁과 자본의 논리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처지들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궁금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밖에는 설명이 안 돼요. 음악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관이 달라진 거죠. 요즘 아이들이 음악을 하는 건 돈이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더 크게 지르고 더 크게 벌고. 예전에는 안 그랬던 사람이 더 많았죠. 노래를 좋아하다 보니 어느 날 먹고살게 되더라, 그런 분위기였어요. 지금은 노래를 돈 버는 수단으로만 생각하니…. 처음에는 안타깝다가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으니 어쩔 수 없다, 기준이 달라졌다고 봐요. 그래서 아이돌 그룹을 보고 있으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죠. 그 친구들이 10년 후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노파심이죠.(웃음)”
그는 음악에는 돈벌이 수단보다 더 큰 힘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지금 나오는 가수들이 그걸 좀 느끼고 알면 음악에 대한 자세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은 게 그의 희망이다.
“아직 모르는 거예요. 인간다움이 있어야 하는데… 아유, 이러면 말이 너무 많아져.(웃음)”
존중과 인내로 만들어가는 부부관계
인터뷰 중 이정선이 유독 말이 많아지는 순간이 두 번 있었다. 하나는 음악에 대한 얘기, 다른 하나는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였다. 인터뷰 전 그가 ‘사랑꾼’으로 불릴 정도로 아내에 대한 애정이 깊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이해가 갔다.
“제가 머슴이죠.(웃음) 아이는 없어요. 우리 때는 애 안 낳는 게 애국하는 일이라고 해서. 덕분에 아이에게 들어갈 돈과 시간으로 두 사람이 하는 일이 많죠.”
두 사람은 여행을 참 많이 다녔다 한다. 그리고 취미생활은 서로에게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도 그 일이 정 싫으면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준다. 부부관계가 오래, 다정하게 유지되려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존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나이 들어서도 아내와 잘 지내는 방법이요? 하고 싶은 걸 참으면 돼요. 강요하지 말고 참아야죠.”
그도 어느새 내년이면 칠순이 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고 싶은 게 많다고 한다.
“뭘 하려고 하면 이게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 생각하게 되죠. 가능하지 않은 일은 가능하지 않아서 욕심도 나는데… 아, 돈이 없어서 안 돼.(웃음)”
그는 여전히 기타리스트이며, 그 무엇보다 기타에 대한 애정이 충만하다. 집에 이미 50개쯤 있다고 한다. 아마도 세상을 관조하며 사는 그가 가장 욕심을 내는 몇 가지가 있다면 그건 바로 기타와 소리에 대한 애정일 것이다.
“악기들은 계속 개량되고 있으니까요. 내가 구체적으로 찾고 있는 소리가 있다기보다는, 내가 내는 소리에 노래를 맞추죠. 옛날에는 기타도 직접 만들고 싶었는데 거기에 빠지면 다른 걸 못하니….”
나이 들면서 더 간결해졌다
“나이 들면서 달라지는 점이라면, 심플해지는 거죠. 감정도 단순해지고. 요즘은 가사를 쓰는데 자꾸 짧아져요.(웃음) ‘배고프다’ 하면 그걸로 얘기가 다 되는데, 왜 배고픈지에 대해 구구절절 말할 필요 없죠. 그러다 보니 가사도 짧아지고 곡도 줄어지고.”
군더더기 없는 간결함을 더 추구하며 미니멀리즘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이정선은 인생에 대해서도 ‘말 그대로 인생인데’라고 말한다. 인생 앞에 ‘인생’이라는 두 글자 외의 무엇을 더 붙일 필요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인생 전반을 차지하는 노래에 대한 생각도 단순했다.
“가끔 그런 질문을 받는데, 어떻게 대답하면 멋있을까 고민해봤어요. 그런데 노래는 그냥 제가 살아가는 만큼을 보여주는 정직한 사이즈예요. 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대로의 크기 말이죠.”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좋아하는 것. 그에게 노래는 그런 것이었다. ‘대가’에게 ‘대가’라는 말 외의 수식어가 필요 없는 것처럼.
광복 70년의 역사에서 대중음악은 어떤 분야보다도 일반 대중의 정서와 우리 사회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포착하고 반영하면서 문화의 선두에 서왔다. 한국 사회의 발전상을 축약하면서 우리의 여러 세대와 계층이 알고 기억하는 가장 많은 스타들을 내놓은 곳이 대중가요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글 임진모 음악평론가
광복과 함께 대중음악은 산업적 덩치를 키운 것은 물론 서구의 문화를 창조적으로 수용한 갖가지 스타일을 만들어내면서 예술적 성장과 성숙을 거듭했다. 대중음악은 광복 이후 70년의 역사 속에서 찬란히 꽃을 피운 것이다.
광복 이전에도 대중이 사랑한 음악은 있었다. 이난영, 남인수, 현인, 고복수 등 일제 강점기에 활약한 가수들은 애초 세련된 음악이었으나 갈수록 서민대중의 호흡과 동행한 음악으로 남은 것은 이후 성인가요로 불린 트로트였다.
조금은 저학력과 가난 혹은 단순한 재미로 연결되는 음악이지만 트로트는 꾸준하게 서민대중의 희로애락을 반영하면서 지금도 명맥을 잇고 있다.
광복 이후에 트로트는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가 출현하면서 다시금 힘찬 날갯짓을 했다. 1964년 발표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역사상 최초로 100만장에 준하는 가공할 판매고를 수립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미자는 특히 1960-70년대 경제성장의 뒤안길에서 한과 설움을 삼킨 여인들을 대변한 비가(悲歌)를 많이 부르면서 한국 최고의 여가수, 세기의 가수라는 명예를 지키고 있다.
이미자와 남진 나훈아 라이벌전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반 우리 대중문화 사상 가장 치열한 라이벌전을 전개한 남진과 나훈아는 이미자를 잇는 트로트의 별이었다. 전국을 삼킨 두 가수의 인기대결은 국민 전체가 둘로 나뉘어 설전을 벌일 만큼 살벌했다. ‘님과 함께’를 비롯한 조금은 밝은 톤의 노래를 한 남진이 경제성장 시기의 빛이었다면 ‘물레방아 도는데’와 같은 구슬픈 노래로 이농(離農)의 고통을 표현한 나훈아는 경제성장 시기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단은 그러나 남진과 나훈아가 겨뤘던 때를 트로트의 마지막 전성기로 규정한다. 그때까지 어떤 장르들보다도 드높은 위용을 자랑했으나 이후에는 시장의 헤게모니를 다른 스타일에 넘겨주게 됐다는 것이다. 1970년대의 하춘화, 1980년대 주현미와 현철, 1990년대 태진아와 송대관, 그리고 2000년대 ‘어머나’의 장윤정으로 트로트계보는 쉼 없이 이어졌지만 위력은 갈수록 떨어졌다.
1960년대 중반까지 독점적 위력을 행사한 트로트는 광복 후 전국에 미군이 주둔하고 미국을 위시한 서구의 문화가 물밀듯 유입되면서 불가피하게 외국의 영향을 받은 음악들과 경쟁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용산 동두천 부평 대구 등 이른바 미8군 지역의 영내와 영외에는 우리 음악가들의 미군을 위한 공연활동이 러시를 이뤘고 이후 그들은 국내 무대에 진출해 한국 대중음악의 판도를 송두리째 바꿨다.
트로트 일색이었던 음악계에 그들이 들여놓은 음악은 미국의 재즈와 팝에 기초한 소위 ‘스탠더드 팝’이란 것이었다. 아직도 용어가 불분명한 이 스타일의 음악은 1961년 5·16 군사정변이 터진 해에 히트한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시작으로 현미, 김상국, 최희준, 위키리, 패티김, 정훈희 등의 스타를 배출했다. 발라드를 잘 소화한 스탠더드 팝가수들은 미8군 출신답게 팝송도 자주 불렀으며 노래에 영어를 자주 썼다. 이 가운데 ‘하숙생’의 최희준과 ‘서울의 찬가’의 패티김이 특급스타였다.
서구음악인 스탠더드 팝은 기조와 성격에 있어서 트로트와 대치되는 음악이었지만 국내 방송의 ‘10대 가수가요제’와 같은 프로그램에 의해 트로트와 병치되면서 같은 ‘어덜트(adult) 음악’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베이비붐 세대 이전의 전쟁세대라고 할 1930-40년대 생 인구의 음악에 머무르고 말았다고 할까.
‘록’ 신중현과 ‘포크’ 김민기
미8군을 통해 국내 소개된 음악 중 1950년대 생 이후의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는 청춘의 뜨거운 피를 담은 로큰롤, 즉 록으로(그때 말로는 ‘그룹사운드’) 궁합을 맞췄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에는 청춘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키보이스’를 위시한 그룹사운드가 판을 쳤다. 하지만 역사는 국내 최초의 록밴드 ‘애드포’를 결성한 신중현을 ‘한국 록의 대부’로, ‘한국 대중음악의 총설계자’로 상찬하며 고평을 집중한다. 블루스와 싸이키델릭 등 서구의 음악문법을 창조적으로 가공해 우리식 록의 프레임을 주조해냈다는 역사적 평가는 지금도 유효하다.
스스로 ‘아름다운 강산’, ‘미인’과 같은 명곡을 부른 가수인 한편 펄시스터즈, 김추자, 장현, 박인수, 김정미 등에게 ‘커피 한 잔’, ‘임은 먼 곳에’, ‘미련’, ‘봄비’, ‘봄’ 등 요즘 기준에서도 빼어난 수준의 음악을 잇달아 써준 프로듀서이기도 했다. 그의 도움을 받은 스타가수들을 언론은 ‘신중현사단’으로 일컬었다. 하지만 1975년 유신시대의 대마초와 금지곡 파동에 활동이 급정지된 그와 함께 한국의 록은 침체기로 접어든다.
록만이 아니라 베이비붐 세대의 또 다른 사운드트랙인 포크도 독재통치의 철퇴를 맞는다. ‘청통맥’ 즉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로 표현된 베이비붐 세대들의 꿈과 도약, 아픔과 좌절을 창의적으로 그려낸 많은 포크송 가수들이 활동금지를 당하거나 은둔의 처지에 몰렸다. 김민기, 한대수, 송창식, 윤형주, 양희은, 서유석, 이장희, 김정호 등이 한국 포크의 기수들이었다. 이들 음악은 전쟁세대보다 상대적으로 학력이 높은 베이비붐 세대의 대학생들에게 어필했다.
포크 가수들은 대부분 자기들이 곡을 만들어 통기타와 하모니카로 연주하고 노래하며 이전의 악단과 전문 작곡가가 지배한 풍토에서 탈피, 소위 싱어송라이터(Singer-songwriter) 시대를 개척했다. 대부분 자기가 쓴 곡을 담은 LP를 최초로 출반한 김민기에 자극받아 동시대의 많은 가수들이 자작곡을 내놓은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김민기는 록의 신중현과 같은 인물이다.
‘아침이슬’ ‘백구’ 등 그가 작곡해준 곡을 불러 유명해진 양희은은 김민기의 페르소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음악의 자가발전을 이뤘다는 점에서 포크를 ‘한국 음악민주주의의 시작’으로 정의하는 관계자들이 많다. 하지만 포크는 베이비붐 세대의 정서라 할 청춘스피릿이 당시 군사정부와 충돌하면서 대마초 파동이라는 암흑기를 초래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네 범주 가운데 어덜트 음악인 트로트와 스탠더드 팝이 1980년대에 들어 정체상태를 맞은 반면 시련을 맞은 영(Young) 음악인 록은 1977년 대학가요제와 밴드 ‘산울림’의 등장으로 힘차게 재도약한다. 참신하고 재기에 넘치는 가사와 실험적인 곡 전개를 특징으로 한 산울림은 흑인음악인 펑크(funk)를 실험한 ‘사랑과 평화’와 함께 록의 기운을 되살렸다. 포크는 1970년대 중·후반 이정선, 조동진, 정태춘을 거친 뒤 시대를 고발하는 민중가요를 낳았고, 1990년대에는 김광석이 활약했지만 장르의 파괴력은 2000년대 들어서 현저히 후퇴했다.
‘가왕’ 조용필, ‘10대 대통령’ 서태지
1980년대의 특급 스타들인 조용필, 윤수일, 김수철, 구창모 등은 대부분 록의 세례를 받은 가수들이었고 실제로 상당수가 밴드를 거느리며 대중적 록의 위용을 뽐냈다. 밴드 송골매와 벗님들은 TV에서도 맹활약했다. 하지만 1980년대는 훗날 ‘가왕’으로 통한 조용필의 것이었다. 그는 ‘단발머리’, ‘못 찾겠다 꾀꼬리’ 등 발랄한 록으로 10대 오빠부대를 이끄는 동시에 ‘허공’ 등 트로트 성향의 노래도 불러 다세대를 망라한 국민가수의 면모를 과시했다. 또한 앨범마다 혁신을 불어넣어 단일 곡이 아닌 앨범 전체의 미학과 음악적 완성도가 중요해진 흐름을 견인했다.
아마도 베이비붐 세대와 1960년대 중반 생 이후의 포스트 베이비붐을 함께 묶는 유일한 가수가 조용필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활약하던 1980년대는 가요계의 규모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던 때라서 이전 음악계에는 없던 갖가지 장르의 음악이 용암이 분출하듯 솟아올랐다. 김현식, 한영애, 들국화와 같은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젊은이들이 찾았고 ‘봄여름가을겨울’과 김현철은 재즈를 실험했으며 ‘신촌블루스’처럼 블루스를 시도한 음악가도 나왔다.
이문세에 곡을 준 이영훈과 비운의 천재 유재하는 뽕짝 즉 트로트 느낌을 완전 배제한 팝 발라드의 꽃을 피웠다. 이 음악과 함께 고학력 여성들도 시장의 소비자로 참여하게 됐지만 음악의 주도권은 하이틴으로 넘어가 나미, 김완선, 소방차 등 10대가 좋아하는 댄스음악이 각광을 받았다. 중심이 ‘10대’와 ‘댄스음악’이라는 트렌드를 정확히 간파해 시대를 가른 인물은 1992년 광풍을 야기한 ‘난 알아요’의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글로벌 시장에서 점프한 케이팝
새로운 음악인 랩을 가요에 접목한 서태지는 신세대인 X세대의 공격성을 노골화한 음악을 구사해 10대대통령 또는 문화대통령으로 불렸다. 그가 랩을 끌어들이고 잠시 후 김건모가 ‘레게’를 유행시키고 듀엣 ‘듀스’가 ‘힙합’을 퍼뜨리면서 1990년대 국내음악 판은 과거에는 홀대된 흑인음악으로 쏠려갔다. 한 사회학자는 “요즘 젊은이들이 흑인음악에 열광하는 것은 백인음악에 압도적으로 경도된 기성세대에 대한 은근한 반란”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서태지가 은퇴를 선언한 1996년부터 음악계는 댄스와 비주얼을 내건 대형기획사의 아이돌 가수들이 판세를 장악했다. 동아시아에 한류 붐을 터뜨린 ‘에쵸티’(H.O.T.)를 시작으로 2세대라고 할 ‘동방신기’, ‘빅뱅’,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투애니원’ 등 아이돌 댄스음악은 20년 가까이 된 지금도 대세를 몰이하며 장수하고 있다. ‘애들 음악은 5년을 못 간다!’는 속설을 깼을 뿐 아니라 ‘텔 미’의 걸 그룹 원더걸스가 등장한 2007년부터는 케이팝(K-Pop)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간 우리의 아이돌음악은 세계에 ‘다이내믹 코리아’의 문화이미지를 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상업적인 아이돌 댄스의 주류음악에 반발해 독립을 외친 인디음악이 소생하기도 했다. 크라잉 넛의 ‘말달리자’는 IMF 시절 넥타이부대의 찬가로 등장, 인디의 가능성을 알렸다.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요원했던 빌보드 차트에서 5주간 2위를 차지, 케이팝의 지평을 크게 올려놓았다. “케이팝 때문에 한국을 알았다”는 세계인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각 세대와 계층의 정서를 담아내면서 대중의식을 이끌어온 대중음악이 광복 70년 역사의 내공을 발휘하며 이제 내수시장이 아닌 지구촌 곳곳에서 찬란한 성공스토리를 써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케이팝이란 깃발 아래 우리 역사의 사운드트랙은 시제를 미래로 맞추고 있다.
△ 임진모 음악 평론가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후 경향신문과 내외경제신문기자를 거쳐 1991년부터 음악평론.
라디오 출연 등 전파. 인쇄매체에서 폭넓게 활동중이다.